부산에는 여러 가지 볼거리와 놀거리가 많다고 합니다. 높다란 아파트가 바닷가에 서기도 하고, 바다를 가로지르는 긴 다리가 있기도 합니다. 부산 야구장에는 사람들이 꽉 차고, 술집과 찻집과 고기집과 옷집 있는 거리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립니다. 부산 이름을 앞세운 국제영화잔치가 벌어지며, 영화잔치 곁에는 자갈치시장 있어, 바닷내음 물씬 풍깁니다. 한편, 부산에는 산복도로가 있고, 달동네가 있습니다. 멧꼭대기까지 자그마한 집이 알뜰살뜰 어깨를 맞대어 조그마한 골목으로 이어집니다. 집안 아닌 집밖에 뒷간이 있는 보수아파트가 있고, 이 둘레에 보수동 헌책방골목이 있습니다. 헌책방골목에는 크고작은 헌책방이 서로 어깨를 나란히 합니다. 한국전쟁 무렵부터 자리를 잡은 헌책방이라는데, 예순 해를 지나고 일흔 해가 되도록 책 하나에 깃든 사랑으로 새 이야기가 피어납니다. 책은 묵되 이야기는 새롭습니다. 보수동 헌책방골목에서 부산근현대사박물관 곁을 지나고 용두산공원 옆을 스쳐 걸어가면 책쉼터(북카페) ‘백년어서원’이 있습니다. 책이 있고, 차 한 잔이 있으며, 책걸상이 있습니다. 여러 인문학 모임이 이어지고, 시를 나누는 조촐한 자리가 생깁니다. 책쉼터 앞은 찻길이기에 자동차물결 소리로 귀가 아프지만, ‘백년어서원’을 일군 분이 시와 사진으로 아름다운 꿈 한 자락 길어올리는 삶을 걸어왔기 때문인지, 계단 한 칸 두 칸 밟고 책쉼터로 들어서면 어느새 자동차물결은 내 머릿속에서 잊히면서, 책내음과 이야깃소리가 가슴속으로 스며듭니다. 부산사람은 야구 보는 재미로 살아간다고도 하는데, 삶을 밝히는 책빛으로 헌책방골목이 고운 등불 구실을 하고, 삶을 빛내는 책쉼터가 따사로운 횃불 구실을 하는구나 싶습니다.

 


 숲사람 이야기 5 - 이야기 꽃피우는 작은 터
 ― 도서관은 하루아침에 서지 않는다

 


  도서관과 책


  도서관에는 책이 있습니다. 도서관에서는 주머니에 돈 한 푼 없어도 책을 빌려 읽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허름한 옷차림이라 하더라도, 또 고무신이나 짚신차림이더라도, 아니 맨발이라 하더라도, 도서관에서 책 한 권 빌려 읽을 수 있습니다.


  기초수급생활자이건 차상위계층이건, 또는 장애인이건 어린이이건 할아버지이건, 도서관은 아무도 물리치지 않습니다. 손을 뻗어 책을 쥘 수 있으면, 손에 쥔 책을 가만히 쓰다듬으며 이야기를 읽을 수 있으면, 누구라도 도서관을 드나들 수 있습니다. 다만, 주말 아닌 여느 날에 도서관 나들이를 할 수 있을 만한 사람은 좀 적다 할는지 모릅니다. 여느 날 여느 때에는 일터에 매여 옴쭉달싹 못할 테니까요.


  도서관 건물이 아무리 으리으리한들, 꾀죄죄한 옷차림으로도 씩씩하게 드나듭니다. 도서관 건물이 높고 크다 하니까, 까만 자가용을 타고 찾아가야 하지 않습니다. 책은 알맹이를 읽어 책이지, 겉껍데기를 번드레레하게 꾸민대서 책이 아닙니다. 책읽기란 책에 서린 삶을 읽는 즐거움이지, 책읽기를 해서 지식자랑이나 정보뽐내기를 할 까닭이 없습니다.


  생각해 보면, 아직 이 나라 도서관은 건물만 너무 큽니다. 도서관은 책을 알뜰히 건사하고 다루면서 사람들이 책하고 살가이 사귀도록 돕는 쉼터 구실을 해야 할 텐데, 아직 이 나라 도서관은 입시공부나 시험공부 하는 ‘칸막이 공부방’ 구실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도서관이 ‘공짜 책 실컷 보는 데’는 아닙니다. 도서관이 갖추는 책은 모두 내가 낸 돈(세금)으로 장만합니다. 곧, 내 돈으로 장만하는 책이니, 더더욱 아끼고 보살필 책이요, 나뿐 아니라 내 뒷사람도 즐겁게 만나 기쁘게 읽을 만한 책을 갖추도록 이끌어야 아름답습니다.


  도서관은 책을 읽는 곳이면서 책을 지키는 곳입니다. 도서관은 책을 읽을 수 있는 밝고 푸르며 싱그러운 햇살과 바람을 누릴 만한 데에 지어야 합니다. 아마, 오늘날 도시에서 이런 자리는 도시 변두리쯤 될 텐데, 도서관은 변두리 아닌 한복판에 지어야 하고, 도시 한복판에는 먼저 숲(공원)이 있어야 해요. 숲 곁에 도서관이 있어야 올발라요. 그러니까, 도시 한복판이란 숲과 도서관이어야 올바르다는 소리입니다. 다음으로, 도서관이 책을 지키자면 건물만 커서는 안 돼요. 바람과 볕이 알맞게 드나들도록 짜고, 책꽂이를 좋은 나무로 엮으며, 책손 누구나 책을 고운 손길로 찬찬히 만져야 합니다. ‘대출실적 0’이라 해서 함부로 버려서는 안 됩니다. 아직 사람들이 안 빌리는 책이 있다면, 도서관지기가 이런 책들을 잘 살피고 값을 헤아려 사람들한테 알려주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즐거이 읽으며 마음을 빛낼 책인데 못 알아보니까, 이런 책을 알리라는 뜻에서 도서관지기(사서)를 두지요.


  그렇지만, 우리 모습을 돌아보면, 도서관은 책을 지키는 데라기보다 책을 버리는 데입니다. 도서관에서 버린 책은 종이쓰레기 모이는 데로 가고, 헌책방 일꾼이 이곳에서 ‘버려진 책’을 캐내어 찬찬히 손질합니다. 비록 도서관에서는 책손을 만나지 못했지만, 이 ‘버려진 책’을 찾아 애타는 눈길로 아름다운 넋을 일구고 싶은 사람들이 있거든요.

 

 

 


  숲과 나무와 종이


  숲이 있어 나무를 얻습니다. 나무를 얻어 집을 짓습니다. 사람들은 나무로 집을 지은 다음, 나무로 연장을 만듭니다. 나무를 깎아 연필을 만들고, 나무를 잘라 종이를 빚습니다. 나무한테서 얻은 종이를 묶으면 책이 됩니다. 하나하나 따지면, 글을 쓰는 사람은 연필과 종이와 책 모두 나무한테서 얻은 숨결로 글쓰기를 하는 셈입니다. 글을 쓰는 사람은 숲에서 푸른 숨결 얻어 글쓰기를 하는 삶입니다.


  시를 쓰든 철학을 파헤치든 소설을 쓰든 문화인류학을 살피든, 글을 쓰고 책을 읽는 이들은 ‘나무를 만지면서 읽는’ 셈입니다. 글쓰기란 삶을 쓰기에 삶쓰기라 할 수 있는데, 어느 모로 보면 나무쓰기가 됩니다. 책읽기 또는 글읽기란 책이나 글을 쓴 사람 삶을 읽는 일이기에 삶읽기라 할 수 있는데, 어느 모로 보면 나무읽기가 되곤 합니다.


  어떤 이야기를 다룬 글이든 숲에서 비롯합니다. 어떤 이야기를 실은 책이든 숲에서 태어납니다. 대입시험을 다루는 문제집이나 참고서도 숲에서 비롯합니다. 토익이나 토플을 치르려고 들여다보는 영어교재도 숲에서 태어납니다. 우리들은 숲에서 집을 얻고 밥을 얻으며 옷을 입습니다. 여기에, 종이와 책과 연필을 숲에서 얻습니다. 온통 숲내음이고 숲바람이며 숲햇살입니다. 숲삶입니다.


  숲을 생각하지 못하면, 이야기가 슬기롭게 나오지 않습니다. 숲을 사랑하지 않으면, 글 한 줄에 아무 이야기가 안 담깁니다. 숲을 생각하기에, 이야기가 술술 흘러나와 아이들한테 찬찬히 물려줍니다. 숲을 사랑하기에, 글꽃이 피어나고 말꽃이 자라나며 온누리에 사랑씨앗이 퍼집니다.


  지식을 쌓도록 돕는 책이 아닙니다. 책을 읽으면 머리가 좋아지지 않습니다. 내 이웃과 동무 삶을 마주하면서 아름다운 꿈을 키우는 길잡이 구실을 하는 책입니다. 내 하루를 기쁘게 맞이하는 어여쁜 웃음꽃 피어나도록 이끄는 책입니다.


  먼먼 옛날 사람들한테는 종이책이 따로 없었습니다. 임금님이나 권력자나 지식인 사이에는 종이책이 얼마쯤 있었지만, 흙을 일구며 숲에 깃들어 살던 사람들한테는 종이책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글 또한 따로 없었습니다. 그러나, 흙을 일구며 숲에 깃들어 살던 사람들은 종이책 없이도 하늘을 읽고 날씨를 읽으며 구름을 읽고 바다를 읽어요. 글 한 줄 모르지만, 물길과 바닷길을 알고, 풀과 새와 벌레를 알아요. 흙을 일구는 흙사람은 흙에 얽힌 모든 이름을 짓습니다. 숲에 깃들어 사는 숲사람은 숲에서 비롯하는 모든 이름을 짓습니다. 땅이름과 마을이름뿐 아니라, 풀이름과 꽃이름과 벌레이름과 나무이름 모두 흙사람과 숲사람이 지었어요. 바람과 비와 눈을 나타내는 이름도 흙사람과 숲사람이 지었어요. 사람 몸 곳곳 가리키는 이름이나 사람 마음과 생각이 어떠한가를 나타내는 낱말도 흙사람과 숲사람이 지었어요. 흙사람과 숲사람은 나무를 잘라 연필이나 종이나 책을 만들지 않았지만, 나무를 잘라 집을 짓고 삶을 지으면서 ‘삶책’이라고 하는 ‘닳지 않고 낡지 않으며 바래지 않는 가장 아름다운 책’을 아이들한테 물려주었어요.

 

 


  책으로 쉬는 터


  부산 보수동 헌책방골목 일꾼들은 작은 손길 그러모아 책잔치를 일굽니다. 2013년에는 어느덧 열 번째 책잔치를 합니다. 보수동 헌책방골목 한 자리를 지키는 〈우리글방〉은 ‘책방’으로만 책지기 구실을 하다가, 시나브로 마음을 기울이면서 ‘책쉼터’, 곧 ‘북카페’를 책방 한쪽에 마련합니다.


  헌책방 책살림을 꾸리면서 책쉼터를 마련하는 일이란 만만하지 않습니다. 흔히들, 책 한 권이라도 더 꽂아 책 한 권이라도 더 팔아야 한다고 여기지만, 〈우리글방 북카페〉는 조금 다른 생각을 책손한테 들려줍니다. 사람들이 책을 한 권이라도 더 읽기를 바라는 마음이 아예 없지는 않으나, 이보다는 사람들이 책을 한 권이라도 더 아름답게 읽으면서 스스로 삶을 곱게 빛낼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책을 한 해에 백 권 읽거나 이백 권 읽기에 더 훌륭하지 않습니다. 책을 한 해에 열 권 읽거나 스무 권 읽기에 덜 훌륭하지 않습니다. 책을 한 해에 한 권조차 못 읽는대서 못나거나 바보스럽지 않습니다. 먼먼 옛날 흙사람과 숲사람처럼 ‘삶책’을 읽을 줄 알면 됩니다. 삶책을 읽는 사람은 날마다 새롭게 사랑을 길어올립니다. 삶책을 읽는 사람은 언제나 싱그러운 꿈을 나눕니다.


  보수동에 있는 〈우리글방 북카페〉는 사람들이 책과 어깨동무하도록 이끄는 헌책방골목을 조그맣게 밝히는 등불이라 할 만합니다. 이를테면 ‘꼭 이런 베스트셀러 저런 스테디셀러를 찾아서 읽으려고 하지 마셔요’ 하고 속삭이는 등불입니다. ‘내 마음에 와닿아 내 생각을 따사롭게 보듬는 책을 읽어요’ 하고 속삭이는 등불입니다.


  부산 동광동에 자리한 인문학 책쉼터 〈백년어서원〉은 산복도로나 달동네 언저리에서 작은 사람들 작은 집으로 이루어지는 이야기를 알뜰히 사랑하는 넋을 살포시 들려주는 만남터입니다. 책으로 쉬고, 이야기로 사귀며, 배움과 만남이 어우러지는 이음고리입니다.


  둘레를 살피면, 도시에는 찻집과 밥집과 술집이 많습니다. 시골에는 면소재지쯤 되더라도 찻집이 거의 없습니다. 시골에서는 찻집이 따로 없어도 논둑과 밭둑이 이야기마당입니다. 시골에서는 밥집이 따로 없어도 여느 살림집에서 밥을 지어다가 들밥을 먹습니다. 시골에서는 막걸리 한 사발 떠서 나누면 들판이나 숲 어디에서나 술잔치가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차나 밥이나 술을 즐기는 곳은 어떤 이야기가 오가는 자리가 되나요. 도시에서는 어디에서 다리쉼을 하거나 동무를 만나 마음을 느긋하게 열어 이야기꽃 피울 만한가요.


  도시에서는 돈이 있어야 다리쉼을 할 수 있는 얼거리입니다. 도시에서는 돈이 있어야 물을 마시고 밥을 먹을 수 있는 얼거리입니다. 도시에서는 풀 뜯어먹을 빈땅 찾기 어렵습니다. 문명과 물질은 있어도 사랑과 꿈은 뿌리내리기 힘듭니다.

 

 

 


  이야기 꽃피우는 마음


  인문학 책쉼터 〈백년어서원〉에서 차를 한 잔 마시면서 아이들과 다리를 쉬다 보면, 마음도 함께 쉬는구나 싶습니다. 어째서 이곳에서는 몸과 마음을 느긋하게 쉴 수 있을까요. 〈백년어서원〉에서 2012년 12월에 내놓은 《百年魚》 13호 맺음말을 읽습니다. “백년어는 다시 처음을 향하여 흘러갑니다. 물고기가 사는 곳에 사람이 삽니다. 진정한 생명이 무엇인지 다시 공부할 참입니다.”


  물고기가 사는 곳에 사람이 산다면, 풀이 사는 곳에 사람이 살겠지요. 나무가 사는 곳에 사람이 살고, 구름과 무지개가 사는 곳에 사람이 산다 할 테고요. 달과 별이 사는 곳에 사람이 삽니다. 해와 바람이 사는 곳에 사람이 살아요. 그러나, 오늘날 부산이나 서울이나 크고작은 도시는 물고기나 풀이나 나무나 구름이나 무지개가 살기 어렵습니다. 달과 별과 해와 바람이 살 만한 도시는 없습니다. 조그마한 도시뿐 아니라 시골조차 공장과 골프장을 끌어들이려 합니다. 핵발전소나 화력발전소를 받아들여 보상금 몇 천억 원 받는 꿈을 꾸는 지자체가 많습니다.


  이야기 스스로 자라날 만한 도시가 없습니다. 이야기 푸르게 숨쉴 만한 도시가 없습니다. 문화예술재단이 있되, 전시와 성과에 얽매이지, 작은 사람들 작은 삶을 작게 사랑할 만한 이야기를 보살피는 길하고는 아직 멉니다.


  도서관은 하루아침에 지을 수 없습니다. 도서관에 건사할 책은 수십 수백 해에 걸쳐 나오는 책입니다. 커다란 새책방에 있는 책을 하루아침에 한꺼번에 주문해서 갖춘들 도서관이라 할 수 없어요. 차근차근 책을 갖추어 서른 해나 쉰 해나 백 해쯤 흘러야 비로소 도서관 꼴을 갖추어요.


  보수동 헌책방골목 〈우리글방 북카페〉는 기나긴 나날 책을 만지고 살리던 사랑으로 ‘책쉼터’를 일굽니다. 동광동 인문책 쉼터 〈백년어서원〉은 시인 김수우 님이 기나긴 나날 책을 읽고 보듬던 꿈으로 ‘책나눔터’를 이룹니다. 책으로 길어올리는 이야기꽃은 오래도록 한결같이 흐르는 사랑이 감돌아 피어납니다. 책으로 주고받는 이야기꾸러미는 두고두고 천천히 속삭이는 꿈이 깃들며 무르익습니다.


  산복도로나 달동네를 처음부터 애틋하게 눈여겨보던 사람이 있었을까 궁금합니다. 아마, 얼른 재개발을 해야 할 곳으로 바라보기만 했겠지요. 그런데, 산복도로나 달동네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스스로 이야기를 일구었어요. 시가 태어나고 소설이 태어나며 영화가 태어납니다. 이와 달리, 해운대 높다란 아파트에서 시나 소설이나 영화가 태어나는 일은 아예 없거나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어쩌다 해운대 높다란 아파트에서 시나 소설이나 영화가 태어나도 그닥 재미없습니다. 삶도 사랑도 웃음도 눈물도 좀처럼 서리지 못하거든요.


  까르르 웃고 떠드는 아이들이 산복도로와 달동네에서 이야기꽃으로 피어납니다. 구슬치기 고무줄놀이 숨바꼭질 술래잡기 즐기는 아이들이 산복도로와 달동네에서 이야기씨앗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이야기를 먹고 자란 아이들이 어른이 되면, 책을 사랑하면서 책쉼터를 빚습니다. 이야기를 나누고 자란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 책을 아끼면서 책나눔터를 짓습니다. 주머니에 있는 돈이 얼마가 되든, 꾸준하게 어루만지며 가꾼 꿈을 책사랑으로 빛냅니다. 빙그레 웃음지으며 읽은 책을 마음밭에 아로새겨 책집으로 선보입니다. 보수동 헌책방골목은 왁자지껄 재미난 ‘도서관 한마당’입니다. 동광동 인문책 쉼터는 고즈넉하니 어여쁜 ‘도서관 다락방’입니다. 4346.1.28.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시민사회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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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꽃 2013-06-12 15:31   좋아요 0 | URL
그런데요~ 부산 보수동 헌책방골목이 없어진다는 말이 있대요??

숲노래 2013-11-01 07:52   좋아요 0 | URL
아, 없어지지 않습니다~~ ^^;;
댓글을 이제서야 보았네요~~
 

  2002년 여름부터 푸른책(청소년책)을 꾸준하게 펴내면서 한국땅 푸름이와 교사와 어버이한테 ‘삶을 읽는 길동무가 되는 책’을 나누는 ‘양철북’ 출판사가 있다. 아주 작은 일터로 처음 문을 연 뒤, 어느덧 열두 일꾼이 책짓기를 하는 책터가 되었는데, 출판사 대표 조재은 님(47)은 어릴 적 시골에서 감자묻이·밀사리를 하고 땔나무를 하며 고구마 빼때기를 하던 일을 즐겁게 되새긴다. “대밭골에 가서 대를 자르고 사카린 네 동가리 나눠서 타고, 막대기 꽂고 뒤안에 갖다 놓으면 시골이 참말 춥거든요. 대나무가 꽝꽝 얼어서 갈라지는데, 하루 자고 이듬날 소죽 쑬 때 갖다 넣으면 바깥만 떨어지고 안만 남아서 쏙 나오는데, 그게 아이스크림이에요. 얼마나 추운지 볼과 손이 빨간 거야. 그리고 소죽에 손을 담그면 때가 불어서 둥둥 뜨는데 소는 그걸 맛있다고 잘 먹어요.” 하는 이야기를 구수하게 들려주는데, 이 같은 이야기를 그림책이나 청소년소설로 빚으면 퍽 아름다우리라 느낀다. 2006년부터 인문책을 차근차근 펴내고 푸른책을 나란히 펴내면서 한국땅 사람들한테 ‘삶을 사랑하는 길벗이 되는 책’을 나누는 ‘철수와영희’출판사가 있다. 처음부터 작은 일터로 열었고, 오늘도 작은 일터로 살림을 꾸리는데, 출판사 대표 박정훈 님(44)은 ‘일하는 사람들이 슬기롭게 사랑을 나누면서 생각을 꽃피울 수 있는 책’을 꿈꾼다. 뚜벅뚜벅 걷는 한 걸음이 모여 천 리 길이 되고, 천 리 길이 만 리 길로 이어지면서 이 나라 골골샅샅 아리따운 이야기 살포시 감돌 수 있으리라. 삶은 사랑으로 누리고, 책은 사랑으로 빚는다.

 


  숲사람 이야기 4 - 사랑으로 빚는 책
  즐겁게 책을 빚는 사람들

 


  책 한 권 읽기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책을 읽는 사람’ 모습은 차츰 사라지지 않느냐 싶다. 신문에서도 방송에서도 정부에서도 스마트폰이라 하는 손전화 기계를 널리 알리거나 파는 데에 생각을 기울일 뿐이고, 삶을 다루는 책은 좀처럼 이야기하지 않는다. 초·중·고등학교 교과목은 잔뜩 늘어났고, 대학교 학과는 수없이 생겼다. 그런데, 초·중·고등학교에서나 대학교에서나 교과서와 교재로 지식과 정보를 가르치려 할 뿐, 교과서를 넘는 책이나 교재를 아우르는 책을 밝히지는 않는다.


  교과서와 교재는 ‘온누리를 밝히는 책’ 가운데 알맹이를 간추렸을까. 아이들은 학교를 다니며 교과서와 교재만 달달 외우면 슬기로운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교과서로 시험공부를 하고 ‘논술에 도움 될 몇 가지 문학책과 인문책’을 읽고 나서 ‘독후감’을 쓰는 굴레로 열두 해를 보낸 다음, 더 커다란 회사나 공공기관에서 연봉을 더 많이 받을 만한 자리를 살피도록 등을 떠미는 대학교 네 해를 보내는 아이들은 마음에 어떤 이야기를 담을까. 오늘날 아이들은 교과서를 읽으며 무엇을 배울까. 오늘날 아이들은 교과서를 살짝 내려놓고 읽는 문학책과 인문책으로 무엇을 느낄까.


  글 한 줄에 서린 넋을 읽으라는 말을 흔히들 읊지만, 정작 제도권 기본교육 열두 해를 거치는 동안, 아이들 스스로 ‘책 한 권 글 한 줄’ 느긋하게 읽으면서 마음 깊이 아로새기도록 풀어놓지 않는다. 글 한 줄을 읽으면서 삶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책 한 권을 읽고 나서 사랑을 깨우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1년 평균 독서량’은 대수롭지 않다. 노래꾼 ‘싸이’가 한 해에 한 권조차 안 읽는다고 하더라도 대수롭지 않다. 그렇다면, 한 해에 책을 100권이나 1000권쯤 읽는 이들은 얼마나 훌륭하게 삶을 갈고닦는가. 한 달에 책을 10권이나 30권쯤 읽는 이들은 얼마나 아름답게 사랑을 꽃피우는가. 한국에서 똑똑하다는 이들은 얼마나 착하고 참답게 이웃사랑을 하는가. 한국에서 가방끈 길다 하는 이들은 얼마나 어여쁘고 슬기롭게 이웃과 어깨동무를 하는가.

 

  책이란 무엇인가


  한 사람은 하루에 책을 몇 권쯤 읽을 수 있을까. 하루에 책 한 권씩 읽을 수 있을까. 여느 책이라 하면 한 권 읽는 데에 너덧 시간이나 대여섯 시간 걸린다고들 말하지만, 책에 따라 다 다르기에, 어느 책은 5분만에 읽을 수 있고, 어느 책은 다섯 해에 걸쳐 읽을 수 있다. 아이들과 그림책을 읽는 어버이라면, 날마다 그림책 스무 권이나 서른 권씩 읽기도 한다. 같은 그림책 한 권을 하루에도 열 차례나 스무 차례 읽어 주기도 한다.


  아마, 통계에는 ‘어린이책 아이한테 읽히는 어버이’가 날마다 하는 ‘책읽기 부피’까지 담기지 않으리라 본다. 통계에는 안 잡힌다 하지만, 이 나라 숱한 어머니들은 집에서 아이들과 부대끼며 그림책이나 동화책을 참 많이 오래도록 읽는다. 다만, 어머니 스스로 ‘책을 읽는다’고 못 느낄 뿐이다.


  그림책이나 동화책은 ‘아이들이 읽는 책’으로 잘못 알거나 말하는 사람이 너무 많은데, 그림책을 쓰거나 동화책을 내는 이는 모두 어른이다. 어른이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려 어린이책을 빚는다. 이 어린이책은 어른들이 책방에서 장만하거나 도서관에서 빌린다. 그리고, 이 어린이책은 바로 어른들이 ‘먼저 읽’으며 아이한테 읽힐 만한가 살핀다. 어른들은 먼저 한두 번 읽은 뒤, 아이들한테 책을 읽어 준다. 곧, 어느 어린이책이라 하더라도 어른들은 ‘책 한 권을 백 차례쯤은 되읽는다’고 여길 만하다.


  그나저나 어린이책은 어린이부터 모든 어른이 읽는 책이다. 어린이책은 어린이만 읽는 책이 아니다. 어린이책은 어린이부터 모든 어른이 느끼고 깨달으며 생각밭을 북돋우도록 이끄는 책이다. 할머니 할아버지도 그림책을 들고 아이한테 읽히면서 당신 스스로 ‘책을 읽는’다. 할머니 할아버지도 그림책을 읽히면서 ‘당신 스스로 미처 못 느끼거나 모르던 새로운 누리’를 깨닫는다.


  여느 어버이라면, 아버지는 회사에서 돈 벌고 어머니는 집에서 아이를 돌보는 얼거리인데, 여느 아버지들은 회사에서 너무 오래 머무느라 막상 아이들과 ‘아름다운 어린이책을 함께 누리지’ 못하면서 책읽기하고 자꾸 동떨어진다고 느낀다. 나아가, 여느 아버지들은 집에서 아이들과 복닥이면서 ‘아이 삶 읽기’, 곧 ‘아이읽기’와 ‘삶읽기’ 또한 제대로 못 한다고 느낀다.


  책이란 무엇인가. 숲에서 나무를 베어 만든 종이에 잉크를 찍어서 실로 묶거나 본드로 붙여야 비로소 ‘책’일까. 누군가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사진을 찍어서 담아야 비로소 ‘책’일까. 따로 글을 안 쓰고 그림을 안 그리더라도 말로 조곤조곤 들려줄 때에도 ‘책’이지 않을까. 이른바 ‘입말, 이야기말(구비문학)’ 모두 책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종이책은 안 읽는다지만, 집에서 아이들을 돌보고 이웃들과 어깨동무하며 풀과 나무를 보살피는 이라면 ‘책을 읽는’ 셈이리라.

 

 

  책에서 읽는 삶


  삶을 읽으며 책을 읽는다. 책을 읽으며 삶을 읽는다. 아이들 눈빛을 바라보며 아이한테 서린 ‘하느님 넋’을 읽는다. 숲에서 나무를 쓰다듬거나 숲바람을 쐬면서 숲속에 고이 흐르는 ‘빛과 그림자’를 읽는다.


  시골에서 흙을 일구는 이들은 이제 할머니와 할아버지이다. 어린이와 푸름이와 젊은이는 일찌감치 시골을 떠나 도시에서 회사원이나 공무원이나 공장 일꾼이 되었다. 시골에서 나고 자라며 시골을 지키는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당신 흙일을 당신 어버이한테서 몸으로 보고 듣고 배우고 익혔다. 어느 시골 할머니 할아버지도 ‘농사짓는 길잡이책’을 읽지 않았다. 예나 이제나 시골 할머니 할아버지는 ‘책으로 흙일을 배우거나 살피’지 않는다. 언제나 몸으로 흙을 부대끼고 만지고 밟고 쓰다듬으면서 흙일을 배우거나 살핀다.


  ‘모내기 하는 법’을 책으로 읽어야 책읽기일까. 모내기 하는 법을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맨발로 무논에 들어가 배울 때에 책읽기일까. 김매기와 피사리는 ‘책으로 읽어’야 알아채거나 깨달을까. 낫질과 호미질과 쟁기질과 삽질은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사진을 찍어 책으로 엮어’야 비로소 이야기가 될까. 몸으로 보여주고 입으로 말할 때에, 그러니까 낫질을 몸으로 보여줄 때에는 어떤 이야기가 될까. 호미질로 풀을 캐는 삶을 굳이 글로 쓰거나 책으로 빚어야 할까.


  시골에서 할머니 할아버지를 바라볼 때면, 이분들 누구나 날마다 ‘책을 수십 권’ 읽는구나 하고 느낀다. 할머니들은 풀책을 읽는다. 할아버지들은 나무책을 읽는다. 할머니들은 해책과 달책을 읽는다. 할아버지들은 새책과 벌레책을 읽는다. 할머니들은 물책을 읽고, 할아버지들은 불책을 읽는다. 가을에 나락을 거두며 ‘나락책’을 읽는다. 수수를 털고 서숙을 까부르며 ‘수수책’과 ‘서숙책’을 읽는다. 서숙 한살이를 따로 책으로 써야 제대로 알거나 살필 수 있지 않다. 흙을 만지며 시골에서 한 해를 살면 몸과 마음으로 깊디깊이 서숙을 알거나 살핀다.


  봄에 찾아오는 제비는 ‘제비 그림책’이나 ‘제비 사진책’을 만들어야 제비 한살이를 깨닫도록 돕지 않는다. 제비가 둥지를 틀 만한 물 맑고 바람 좋으며 햇살 따스한 시골마을에서 흙집을 짓고 예쁘게 살아가면, 날마다 제비를 바라보고 인사하고 노래하고 마주하면서 ‘제비읽기’를 한다. ‘제비책’을 읽는 셈이다.


  요즈음 아이들은 손전화 기계에 푹 빠져 종이책은 잘 안 읽는다고들 한다. 그렇다. 종이책은 잘 안 읽겠지. 그러나, 손전화 기계를 징검다리 삼아 동무들끼리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이 이야기는 덧없는 쪽글질이나 개구진 말놀이가 아니다. 요즈음 아이들 나름대로 ‘마음껏 뛰놀 흙땅’과 ‘걱정없이 뒹굴 빈터’와 ‘사이좋게 얼크러질 놀이터’가 없는 마당에, 손전화 기계라도 붙잡으면서 마음을 열거나 가꿀밖에 없다. 아이들은 놀이터에서 놀이책 읽고, 흙땅에서 흙책 읽으며, 동무들과 사이좋게 뛰놀면서 동무책을 읽어야 아름답게 자랄 수 있다.

 

  책은 어디에 있는가


  책은 사람들 가슴속에 있다. 책은 교보문고나 영풍문고 책시렁에 있지 않다. 책은 사람들 가슴속에 있다. 교보문고나 영풍문고 책시렁에는 ‘종이꾸러미’가 있을 뿐이다. 사람들은 새책방이나 헌책방으로 마실을 다니면서 종이꾸러미를 돈 주고 장만한다. 저마다 장만한 종이꾸러미를 펼치면서 ‘삶을 읽으려’ 마음을 기울일 때에 책읽기가 된다. 스스로 장만한 종이꾸러미를 손수 넘겨 삶을 읽으려 할 때에 시나브로 ‘글마다 감도는 뜻과 꿈’을 살핀다.


  그런데, 글마다 감도는 뜻과 꿈을 살피자면, 종이꾸러미를 장만한 사람 스스로 가슴속에 뜻과 꿈이 있어야 한다. 내 가슴속에 사랑이 없다면 연애소설을 읽는다 하더라도 사랑이든 연애이든 알아채지 못한다. 내 가슴속에 꿈이 없으면 어떤 수필책이나 자기계발책을 읽는다 하더라도 앞으로 이루고픈 꿈이 무엇인가를 헤아리지 못한다. 박경리 님이 쓴 《토지》이든 펄벅 님이 쓴 《대지》이든 톨스토이 님이 쓴 《죄와 벌》이든, 아무나 이 작품을 ‘읽지’ 못한다. 종이꾸러미를 장만해서 줄거리를 살피거나 꿰뚫을 수는 있다. 그러나 아무나 책을 ‘읽어내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책읽기란 ‘줄거리읽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책읽기란, 책을 쓴 사람들이 살아온 나날마다 스스로 빚은 꿈과 사랑을 읽는 즐거움이다. 《토지》에 담긴 꿈은 못 읽고 줄거리만 욀 수 있대서 ‘《토지》를 읽었다’고 말할 수 없다. 《대지》에 서린 사랑은 못 읽고 줄거리와 등장인물을 꿰찰 수 있대서 ‘《대지》를 읽었다’고 말할 수 없다. 우리가 《죄와 벌》이라는 작품을 읽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주 쉽다. 우리 스스로 ‘《죄와 벌》을 읽을 만한 눈높이와 눈썰미와 눈길과 눈빛과 눈결을 갈고닦으면서 알차게 기르면’ 된다. 삶을 즐겨야지.


  성경책은 아무나 읽어내지 못한다. 불경책은 아무나 곰삭히지 못한다. 종이꾸러미에 찍힌 글자를 소리내어 말하는 일이야 누구나 하리라. ‘글자읽기’는 일곱 살 어린이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일곱 살 어린이가 글자를 또박또박 읽는대서 ‘너 참 책을 잘 읽는구나’ 하고 말하지 않는다. 그저 ‘글자를 잘 읽을’ 뿐이다.


  우리 사회를 돌아보면, 오늘날 사람들이 흔히 한다는 ‘책읽기’는 책읽기라고 말하기 어렵다. 아직 너무 많은 사람들은 ‘글자읽기’에 머문다. ‘줄거리읽기’에서 맴돈다. 책을 읽으면서 삶을 읽어야 즐겁고, 책을 읽으면서 사랑을 읽어야 즐거우며, 책을 읽으면서 꿈을 읽어야 즐겁다. 다른 사람이 쓴 책을 하나 읽으며 내가 가꾸고픈 삶을 읽을 때에 즐겁다. 여러 사람이 온삶을 들여 쓴 책을 하나 읽으며 내가 아끼고픈 사랑을 읽을 때에 즐겁다. 숱한 사람이 기나긴 해를 바쳐 쓴 책을 하나 읽으며 내가 이루고픈 꿈을 읽을 때에 즐겁다.

 

 

  책을 짓는 삶


  양철북 출판사에서 펴낸 책을 하나씩 헤아려 본다. 2002년 7월부터 2012년 10월까지 《나는 선생님이 좋아요》(하이타니 겐지로), 《아이들》(야누스 코르착), 《로빙화》(중자오정), 《부모와 아이 사이》(하임 기너트), 《권력과 테러》(노암 촘스키), 《자라지 않는 아이》(펄벅), 《소녀의 마음》(하이타니 겐지로), 《꼬마 모모》(마쓰타니 미요코), 《사랑의 매는 없다》(앨리스 밀러), 《두 친구 이야기》(안케 드브리스), 《나무소녀》(벤 마이켈슨), 《산다는 것의 의미》(고사명), 《분홍바늘꽃》(질 페이턴 월시), 《아이는 기다려 주지 않는다》(요한 크리스토프 아놀드), 《눈물나무》(카롤린 필립스), 《별을 헤아리며》(로이스 로리), 《지로 이야기》(시모무라 고진), 《안 뜨려는 배》(팔리 모왓), 《시타델의 소년》(제임스 램지 울만), 《반칙 선생님》(우다가와 유코), 《여우와 토종 씨의 행방불명》(박경화), 《어른이 되고 싶습니다》(최종규), 《사랑으로 매긴 성적표》(이상석), 《청소년 인권 수첩》(크리스티네 슐츠 라이스), 《인간의 벽》(이시카와 다쓰조),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요시노 겐자부로), 《잃어버린 육아의 원형을 찾아서》(진 리들로프), 《크리스티나에게 보내는 편지》(파울루 프레이리), 《덴코짱》(노다 미치코), 《원예반 소년들》(우오즈미 나오코), 《태평육아의 탄생》(김연희), 《첫사랑》(구드룬 파우제방), 《가르친다는 것》(윌리엄 에어스) 같은 책을 내놓았는데, 어느덧 150가지 남짓 된다. 이 가운데에는 무척 널리 사랑받는 책이 있고, 좀처럼 사랑받지 못하는 책이 있다. 사람들이 조금 더 눈여겨보는 책과 제대로 눈여겨보지 못하는 책이 있달 수 있는데, 어느 책이든 ‘한 사람으로서 사랑을 꽃피우는 삶에서 스스로 찾는 아름다운 길’을 들려준다고 느낀다.


  철수와영희 출판사에서 펴낸 책을 곰곰이 되짚어 본다. 2006년 8월부터 2012년 10월까지 《우리는 말썽꾼이야》(양승완), 《철들지 않는다는 것》(하종강), 《대한민국에 교육은 없다》(이득재), 《총을 들지 않는 사람들》(박노자·전쟁없는세상·한홍구),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서경식), 《내 날개 옷은 어디 갔지》(안미선), 《길은 복잡하지 않다》(이갑용), 《10대와 통하는 불교》(강호진), 《정당한 위반》(박용현) 《동네 숲은 깊다》(강우근), 《일하는 우리 엄마 아빠 이야기》(백남호), 《덤벼라 인생》(고성국·남경태), 《진보와 저항의 세계사》(김삼웅), 《그대 무엇을 위해 억척같이 살고 있는가》(손석춘), 《우리 학교 텃밭》(노정임·안경자), 《사자성어 한국말로 번역하기》(최종규), 《적을 삐라로 묻어라》(이임하) 같은 책을 내놓았는데, 이제 40가지 남짓 된다. 이 가운데에는 사람들이 여러모로 아끼는 책이 있고, 아직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는 책이 있달 수 있는데, 어느 책이든 ‘한 사람으로서 사랑을 이야기하고 삶을 누리며 꿈을 즐기는 예쁜 길’을 들려주는구나 싶다.


  책을 짓는 삶이란 무엇인가? 한 권이라도 더 많이 펴내는 삶인가, 한 권이라도 제대로 읽히는 삶인가. 책을 즐기는 삶이란 무엇인가? 한 권이라도 더 읽으려는 삶인가, 한 권이라도 제대로 읽으려는 삶인가. 책을 사랑하는 삶이란 무엇인가? 책을 많이 읽거나 건사하는 삶인가, 책을 읽으며 삶을 톺아보고 사랑을 나누는 삶인가.

 

 

  책으로 여는 꿈


  책에는 길이 있다고 말할 수 있으나, 책에서 길을 찾을 수 없다고도 말할 수 있다. 스스로 삶을 짓는 사람은 책을 읽으면서 길을 찾는다. 스스로 삶을 짓지 않거나 못하는 사람은 책을 수없이 읽어도 ‘줄거리 지식’과 ‘등장인물 정보’만 머리에 담을 뿐, 삶을 짓는 길을 느끼지 못한다.


  길을 찾고 싶으면 길을 찾으면서 책을 읽으면 된다. 스스로 가장 사랑하고 좋아할 만한 삶을 생각하면서 천천히 길을 걷다가 책 하나 길동무로 삼으면 된다.


  책으로 꿈길을 열 수 있다. 내 하루를 가장 아름다운 무늬와 빛깔과 결로 보듬으면서 곱게 꿈을 꾸면 된다. 하루아침에 이루는 꿈이 아니다. 한결같이 누리면서 이루는 꿈이다. 오늘 하루 이루면 끝나는 꿈이 아니다. 어제도 오늘도 모레도 꾸준하게 누리면서 이루는 꿈이다. 이를테면, 밥을 한 끼니만 잘 먹으면 되지 않는다. 밥은 날마다 잘 먹어야 한다. 끼니마다 잘 먹을 밥이요, 끼니마다 스스로 가장 맛나게 차리면서 한솥밥을 나눌 때에 즐거운 삶이다.


  삶은 하루만 잘 누리면 되지 않는다. 날마다 잘 누릴 삶이다. 어린이와 푸름이하고 즐거이 나눌 책을 짓는 책마을 일꾼은 ‘책 하나만 잘 지으’면 되지 않는다. 새롭게 내놓는 책마다 잘 지어서 내놓을 책삶이요, 차근차근 한 권씩 책살림 늘리면서 이 땅 어린이와 푸름이한테 언제나 살가우며 반가운 마음밥이 될 책밥을 지을 노릇이다.


  책으로 꿈길을 연다면 바로 이 대목에 있지 않을까. 한 번 읽고 나서 책꽂이에 얌전하게 꽂고는 오래도록 가슴이 촉촉히 젖도록 이끄는 책이 있으리라. 여러 차례 되풀이 읽느라 책상맡에 늘 두면서 두고두고 가슴이 해맑게 부풀도록 이끄는 책이 있으리라. 올해에 읽고 다섯 해 뒤에 읽으며 열 해 뒤에 읽고, 또 열다섯 해나 스무 해 뒤에 새삼스레 읽으면서, 내 발자국을 튼튼하게 어루만지는 길동무처럼 곁에 있는 책이 있으리라.


  책 한 권 웃으면서 빚는다. 어제도 오늘도 활짝 웃으면서 삶을 사랑으로 누린다. 오늘도 모레도 환하게 웃으면서 책을 사랑으로 빚는다. 웃음 가득한 사랑이 피어나는 이야기를 담은 책을 읽는 사람은 웃음 어린 꿈을 마음밭에 심을 수 있겠지. (4345.10.25.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2 - 시민사회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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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명교사예찬비’가 있습니다. 1985년 2월 24일에, 전라남도 고흥군 도화면 신호리에 있던 흥양초등학교(1963년 열고, 1998년 닫음) 교사 김정숙(1960∼1984) 님을 기리며 세운 빗돌입니다. 시골학교 교사 김정숙 님은 시골마을에서 태어나 시골마을에서 살며 시골학교 교사가 되어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는데, 시골학교 교사로 일하며, 마을 가난한 아이들을 알뜰히 보살피며 뒷배했다고 해요. 안타까이 스러진 넋을 기려 동료 교사와 후배가 빗돌을 세웠고, 이녁 아버지 김영식 님은 딸아이가 흙으로 돌아간 뒤 딸아이 넋을 이어 시골학교 아이들한테 장학금으로 도와주는 일을 농사를 지으며 꾸준하게 잇습니다. 무명교사예찬비가 있는 전남 고흥인데, 이곳에는 서울에서 나고 자란 뒤 시골로 삶자리 옮기며 농사꾼이 되었다가 서른네 살부터 고등학교 교사로 일하는 조경선(42) 님이 있습니다. 조경선 님은 《서울 여자, 시골 선생님 되다》(살림터,2012)라는 교육일기를 내놓았습니다. 내남없이 도시로, 서울로, 온통 시골을 떠나는 흐름하고는 다르게, 도시에서, 또 서울에서 시골로 찾아든 조경선 님은 시골학교에서 문학으로 삶을 가르치는 일을 맡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서울사람으로서 서울을 떠나 강원도 양양에 있는 산촌유학센터에서 아이들을 돌보는 송민혜(38) 님이 있습니다. 송민혜 님은 충청북도 충주 무너미마을에 있는 이오덕학교에서 교사로 지낸 뒤 강원도 양양으로 옮겼습니다. 한 번은 숲속, 한 번은 바닷가, 이렇게 깊은 시골에서 아이들과 살아가며 서로를 아끼며 빛낼 사랑이란 무엇인가를 헤아립니다.

 

 

 

 

 

 

 


  숲사람 이야기 3 - 학교는 삶을 나누는 곳
  시골교사가 품은 꿈

 


  학교가 맡은 몫


  아이들이 학교에 갑니다. 도시에서든 시골에서든 아이들이 학교에 갑니다. 시골에서는 노란버스가 마을 곳곳을 돌며 아이들을 태우곤 합니다. 두 시간에 한 번 지나가는 버스를 타려고 아침 일찍 부산하게 길을 나서는 시골마을 아이들이 있습니다. 시골마을 시골버스에는 사람이 퍽 적습니다. 한갓진 버스에는 으레 할머니 할아버지 손님만 있으나, 학교옷 입은 푸름이가 드문드문 보이곤 합니다. 시골버스는 숲이나 바다나 논밭을 가로지르며 달립니다. 시골버스 타고 학교를 오가는 아이들은 시골마을 삶자락을 가만히 살펴보면서 마음으로 곱게 담을 수 있을까요.


  도시 아이들은 이른아침이나 새벽부터 꽉꽉 들어차는 버스나 전철을 타고 학교를 다닙니다. 저녁이나 밤에도 이와 같습니다. 창밖을 바라볼 겨를이 없고, 창밖을 바라본들 시골처럼 푸른 숲이나 파란 하늘이란 없습니다. 오직 잿빛 건물과 까만 아스팔트뿐입니다. 사람만큼은 오지게 많아, 여기에서도 저기에서도 사람에 치입니다. 도시에서 수많은 사람들한테 둘러싸인 아이들은 저마다 아름다운 목숨 건사하는 사람이요, 나와 너 모두 고운 넋인 줄 즐겁게 느낄 수 있을까요.


  학교를 오가는 길은 사뭇 다르지만, 시골이나 도시나 학교에서 가르치는 이야기는 똑같습니다. 모두 똑같은 교과서를 쓰고, 모두 똑같은 시험문제를 풀며, 모두 똑같은 대학교를 바라봅니다. 그저 한 가지만 다릅니다. 도시 아이들은 도시 초·중·고등학교를 나와 도시에서 살아가고, 시골 아이들은 시골 초·중·고등학교를 나와 도시에서 살아갑니다. 도시 아이들은 더 커다란 도시로 나아가곤 하는데, 시골 아이들은 ‘아무튼 도시로 나가’고 보며, 한 번 도시로 나갔으면 더 큰 도시로 새로 나아가서 살아가든 처음 나아간 도시에서 뿌리를 박든. 도시내기가 돼요.


  곰곰이 살피면, 오늘날 학교가 맡은 몫이라면, 도시 아이는 언제까지나 도시내기가 되도록 하고, 시골 아이는 차츰 도시내기가 되도록 하는구나 싶어요. 도시에서 회사원이나 공무원이 되도록 이끌어요. 또는 공장 일꾼이 되도록 등을 밉니다.

 

  시골학교 장학금


  요즈음은 어느 시골에서나, 그러니까 ‘군 단위’ 어느 곳에서나 ‘지역발전 장학금 모으기 사업’을 합니다. 고흥군에서도 해남군에서도 봉화군에서도 양양군에서도 음성군에서도 한결같이 ‘지역발전 장학금 모으기 사업’에 소매를 걷어붙이고 나섭니다. 고흥군에서는 2012년에 벌써 100억 원에 이르는 장학기금을 모았다며, 앞으로는 200억 원에 이르는 장학기금을 모으겠다고 밝힙니다.


  장학금이란 더 힘내어 배우라는 뜻으로 주는 돈입니다. 시골에서나 도시에서나 가난한 집안 아이들이 있으니, 장학금 받으며 학교를 다니면 여러모로 보탬이 되리라 느껴요. 그런데, 시골학교에서 아이들한테 장학금을 왜 주고, 장학기금을 어디에 쓰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왜냐하면, 장학금은 으레 ‘학력’ 장학금이지 ‘복지’ 장학금이 아니기 때문이에요. 더욱이, ‘지역발전’과 ‘나라발전’을 이루라며 장학금을 줄 뿐, 시골 군 단위에서 시골에 튼튼히 뿌리내리는 아름다운 농사꾼이 되라며 장학금을 주는 일은 없어요. 모든 장학금은 시골 아이들이 시골을 떠나 도시로 가도록 부추깁니다.


  시골마을에서 태어나 시골마을 작은 초등학교에서 교사가 된 김정숙 님은 이녁이 다니던 초등학교에서 교사가 된 뒤, 이 학교 후배이자 제자를 따사로이 품었습니다. 이녁이 흙으로 돌아가고 나서 무명교사예찬비가 섰는데, 이 빗돌 이름대로 ‘이름없는’ 교사한테서 배운 ‘이름없는’ 아이들은 ‘이름없는’ 작은 마을에서 저마다 씩씩하고 꿋꿋하게 살아갈 사랑을 물려받았으리라 느낍니다. 비록 지역발전이나 나라발전 같은 거룩한 뜻을 펴지 못한달지라도, 흙을 사랑하고 숲을 아끼며 바다를 돌보는 착한 어른으로 자랐으리라 느껴요.


  도시에서 시골로 삶자리 옮긴 고등학교 교사 조경선 님은 시골마을 아이들이 비록 도시만 바라보고 도시로 갈 생각만 키운다 하더라도, 이 아이들 가슴에 문학을 바탕으로 이웃과 동무를 사랑하는 넋을 북돋우며, 어디에서 어떤 일을 하는 어른으로 살아가든, 아이들이 선 땅과 아이들이 바라볼 하늘을 떠올리도록 이야기꽃 피우리라 느껴요.


  도시에 있는 어버이 품을 떠나 산촌유학센터에서 살아가며 시골학교를 다니는, 이른바 산촌유학을 하는 도시 아이들하고 살아가는 도시내기 교사 송민혜 님은, 그곳 아이들하고 똑같은 살림이라 할 수 있을 테지요. 그러나, 아이들이 산촌유학을 끝내고 일자리며 삶자리를 도시에서만 찾고 ‘시골에서 지낸 어릴 적 경험’만 쌓기보다는 ‘시골에서 살며 느낀 즐겁거나 좋은 꿈’을 품을 수 있으면 참 좋겠다고 생각하는구나 싶어요. 시골살이란 자연체험이 아니니까요.

 

 

 

 

 

  일반학교·대안학교


  아이 둘과 살아가며 늘 헤아립니다. 이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야 할까 차근차근 헤아립니다. 다섯 살 된 큰아이는 보육원이나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을 안 다닙니다. 두 살 작은아이도 아무 시설에 넣지 않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네 식구 함께 부대낍니다. 손수 밥을 차려 먹이고, 손수 빨래해서 입히며, 손수 집살림 건사하며 지냅니다.


  새근새근 자는 아이들 이마를 쓸어넘깁니다. 이불을 걷어차면 여밉니다. 밤에 쉬가 마려우면 쉬를 누입니다. 기저귀에 쉬를 눈 작은아이 옷가지는 날마다 빨래해서 말린 다음 예쁘게 갭니다. 아이들과 마을을 천천히 한 바퀴 돌곤 하며, 자전거수레에 이 아이들 태우고 면소재지나 바닷가나 이웃마을을 찬찬히 다니곤 합니다. 숲을 거닐거나 들을 걷습니다. 나무하고 얘기하고 풀벌레 노랫소리 듣습니다. 해와 구름과 달과 별을 올려다봅니다.


  아이들은 무엇을 배울 때에 즐거울까 생각합니다. 어버이인 내가 이 아이들 나이였을 적, 나부터 무엇을 배우며 하루를 누릴 때에 즐거웠던가 생각합니다. 나부터 무엇을 어떻게 배워야 내 삶을 내 손으로 당차게 일굴 만한가 생각합니다. 물려줄 돈이나 지식이나 집이나 땅이 아닌, 함께 살아가며 함께 누리고 함께 빚을 삶을 생각합니다.


  여느 제도권학교에서는 제도권 틀에 맞추어 열두 해 교육과정이 있습니다. 열두 해 교육과정은 오직 대학교 잘 들어가는 길을 보여줍니다. 보충수업과 자율학습이라는 이름을 붙여 그저 대입시험 문제를 잘 풀도록 길들입니다. 시골학교에는 기숙사가 많은데, 기숙사에 들어가는 아이들은 밤늦도록 수험공부를 합니다. 봄이 되어 들마다 봄일에 바쁘건, 여름이 되어 들마다 여름일에 바쁘건, 또 가을이 되어 들마다 가을일에 바쁘건, 이제 시골학교조차 ‘들일 방학’이 없어요. 예전에는 시골학교에서는 봄철과 가을철 열흘 즈음 말미를 마련해, 집식구 들일을 거들도록 했다 하지만, 요즈음에는 학원에 보내든 과외를 시키든 ‘대학교에 붙도록 돕는 시험공부’를 한 시간이라도 더 시키려고 시골이나 도시나 똑같이 구슬땀을 흘립니다.


  대안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은 대학교에 들어가 새로운 길을 찾고 싶다 하면서 일반학교 아이들하고 똑같이 시험공부를 붙잡습니다. 나라에서 인가를 받으며 지원을 받는 대안학교는 비록 학교가 숲속에 있다 하더라도 숲배움을 하지 못하고, 일반학교처럼 교과서를 쓰며 시험공부를 하도록 틀이 짜입니다.


  여러모로 살펴보면, 한국에서는 일반학교이든 대안학교이든 똑같아요. 학교가 깃든 터는 다르나, 가르치는 이야기는 같아요. 가르치는 이야기가 사뭇 달라도, 일반학교를 마치건 대안학교를 마치건 시골사람 되도록 이끌지 않아요. 숲속에 깃든 대안학교이든 시골에 자리한 일반학교이든, 숲이나 메나 바다나 냇물과 얼크러지면서 흙·풀·하늘·바람·해·냇물 기운을 맞아들이도록 이끌지 않습니다.


  그러면,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열두 해, 여기에 대학교 네 해, 이른바 열여섯 해를 학교에서 보내는 아이들은 무엇을 느끼거나 겪거나 배우면서 어른이 될까요. 이 아이들은 스무 살이 되고 스물다섯 살이 될 적에, 이녁 삶을 얼마나 스스로 일구면서 홀로서기를 할 만할까요.

 

 

 

 

 

  시골 읍·면 고등학교


  시골 읍내 고등학교나 면내 중학교를 다니는 아이들 가운데에는 이녁 어버이 일을 거들며 바다를 누비거나 흙을 만지는 아이가 더러 있습니다. 그러나 거의 모든 아이들은 학교에서 아주 오랫동안 머물며 수험공부에만 마음을 쏟습니다. 또는 학교 기숙사에서 먹고자며 수험공부로 하루를 보냅니다. 막상 시골에서 학교를 다녔어도 들풀 이름이나 나무 이름 하나 모르곤 합니다. 들풀을 따서 나물로 무치거나 나무를 보살피는 손길을 익히지 않곤 합니다.


  도시에서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한테는 숲이 없고 바다가 없으며 들이 없습니다. 도시 아이들한테는 놀이시설이나 문화시설이 가까이 있습니다. 버스가 많고, 전철이 있기도 합니다. 시내에는 옷가게·밥집·찻집도 많아요. 다만, 도시에 많은 온갖 놀이·문화시설은 모두 돈을 들여야 즐길 수 있습니다. 도시에서도 돈이 없다면 공공도서관 빼고는 딱히 즐길 만한 시설이 없어요. 더욱이, 돈이 있거나 없거나 마음을 놓고 드러누워 쉴 풀숲이 없어요. 시원하며 조용한 나무그늘이 없어요. 해바라기를 하거나 별바라기를 할 호젓한 들판이 없어요. 책을 읽으며 별자리를 익히고 구름 모양을 외울 수 있을 테지만, 도감이나 자연그림책을 읽으며 풀이름이나 꽃이름을 욀 수 있을 터이나, 나물 뜯기나 밭 일구기는 겪어 보기 어려워요.


  나는 시골에서 아이들과 살아가며 언제라도 바다로 마실을 가거나 숲이나 들로 나들이를 갑니다. 군내버스를 타고 이웃마을을 찾아갑니다. 자전거를 달려 옆마을을 돌아봅니다. 이동안 둘레를 살펴보면, 다른 시골 아이들은 스스로 이녁 마을 곳곳을 누비지 않습니다. 아이들끼리 동아리를 꾸려 멧길을 오르거나 바닷가를 노닐지 않습니다. 여행이나 관광이 아닌 삶으로 누리는 숲을 느끼지 못해요. 시골에서도 도시에서도, 아이들은 가게에서 음료수와 과자를 사서 먹습니다. 시골에서도 도시에서도, 아이들은 가게에서 무언가 사다 먹은 다음 빈 봉지를 아무 곳에나 버립니다. 따로 청소부가 쓰레기를 치워야 합니다. 청소부란 다른 사람이 아닌 내 어버이일 수 있고, 푸름이들이 어른이 되어 스스로 얻을 일자리일 수 있지만, 시골에서나 도시에서나 푸름이들은 스스로 어디에 어떻게 서며 살아가는가를 못 깨달아요.


  도시에서는 유비쿼터스 고등학교가 생깁니다. 시골에서는 전자고등학교나 종합고등학교가 생깁니다. 공업고등학교와 상업고등학교와 농업고등학교는 하나둘 자취를 감춥니다. 이름이 바뀌고 허울이 달라지는데, 어느 고등학교이든 아이들은 ‘도시에서 돈을 버는 일자리’ 솜씨를 익히는 길을 걷습니다. 대학교에 나아가는 길도 ‘도시에서 돈을 버는 일자리’ 솜씨를 익히는 길이 될 뿐입니다.


  돌이켜보면, 밭일이나 들일이나 멧일이나 바닷일은 초·중·고등학교뿐 아니라 대학교에서조차 가르칠 수 없다 할 만해요. 고기잡이배를 몰거나 그물을 던지거나 거두는 솜씨를 어느 대학교수가 가르칠까요. 호미질을 하거나 낫질을 하는 솜씨를 어느 과목교사가 가르치나요. 구름과 별을 바라보며 날씨를 읽는 눈썰미를 가르치는 대학교수는 없어요. 들풀과 멧나물을 꺾거나 따거나 캐서 밥거리를 얻는 길을 가르치는 과목교사는 없어요.

 

 

 

 

 

  교과서·책


  두 살 작은아이가 바지에 응가를 눕니다. 으레 아침과 낮과 저녁, 이렇게 세 차례는 똥바지를 치웁니다. 작은아이는 응가를 누고는 속이 아주 시원한지 해맑게 웃습니다. 해맑게 웃는 아이를 안고 밑을 씻기면서 몸도 씻깁니다. 똥에 흠뻑 젖은 바지를 복복 비벼서 빨래합니다.


  아이들 옷가지를 빨래하는 솜씨는 스스로 익혔습니다. 아니, 내 어린 날 내 어머니가 나와 형 옷가지를 빨래하던 손길을 어깨너머로 바라보며 익혔다고 해야 옳아요. 어제, 나는 내 어머니 손길이 듬뿍 담긴 옷을 입으며 사랑을 배웠습니다. 오늘, 나는 내 손길이 담뿍 배인 옷을 입히며 사랑을 가르칩니다. 그나저나, 빨래하는 솜씨를 다루는 교과서나 책은 없습니다. 학교에서는 손빨래이든 기계빨래이든 가르치지 않습니다. 더 헤아리면, 학교에서는 밥하기나 국 끓이기나 반찬 만들기를 가르치지 않아요. 더더 헤아리면, 학교에서는 사내와 가시내가 서로 사랑하며 아기를 빚는 길을 가르치지 않아요. 더더더 헤아리면, 사랑으로 빚은 아기를 사랑으로 낳아 사랑으로 돌보는 길을 가르치지 않아요. 더더더더 헤아리면, 사랑으로 낳아 돌보는 아기가 사랑스럽게 자라서 아이 스스로 사랑스럽게 홀로서기하도록 이끄는 삶을 하나도 가르치지 않아요. 오직 하나, 학교에 보내라고만 가르치는 학교예요.


  마을 할머니가 쑥을 뜯고 미나리를 뜯으며 시금치를 뜯습니다. 손수 씨를 뿌리는 푸성귀도 뜯고, 굳이 씨를 안 뿌려도 절로 잘 자라는 풀을 뜯습니다. 할머니들은 누구한테서 ‘풀뜯기’를 배웠을까요. 누가 할머니한테 풀뜯기를 가르쳤을까요.


  마을 할아버지가 낫으로 풀을 벱니다. 마을 할아버지가 감나무 뽕나무 석류나무 매화나무 능금나무 유자나무 탱자나무 동백나무 백일홍 비자나무 들을 돌봅니다. 할아버지는 누구한테서 나무 돌보는 손길을 배웠을까요. 누가 할머니와 할아버지한테 흙일을 가르쳤을까요.


  마을 할머니랑 할아버지한테 흙일을 가르친 분은 무엇을 바탕으로 흙일을 가르쳤을까요. 흙일을 가르치는 교과서나 책이 있었을까요. 당신들이 아이를 낳아 돌볼 적에, 아이를 낳아 돌보는 손길을 가르치던 교사나 가정부나 교수님이 있었을까요.


  먼먼 옛날 옛적부터 사람들이 살아오던 발걸음을 곰곰이 톺아봅니다. 먼먼 옛날부터 사람들은 스스로 책이 되었습니다. 종이가 없고 붓이 없었어도, 사람들은 스스로 책을 썼습니다. 사람들 누구나 온몸으로 책을 쓰고 온마음으로 책을 읽었어요. 손과 발에 아로새긴 책을 맑은 눈빛으로 빙그레 웃으며 아이들한테 물려줍니다. 눈과 귀와 코와 입으로 몸책을 읽고 마음책을 읽으며 삶책을 읽습니다. 아이들은 놀이를 하며 놀이책을 읽습니다. 아이들은 물질을 하며 물책을 읽습니다. 아이들은 숲을 누비며 숲책을 읽습니다. 아이들은 들에서 풀뜯기를 거들며 풀책을 읽고, 풀피리를 부르며 노래책을 읽습니다. 소를 몰고 새를 만나며 개구리랑 노닥거리는 동안 짐승책과 목숨책을 읽습니다. 언제나 하늘책, 구름책, 해책, 달책, 무지개책, 미리내책처럼, 싱그러이 빛나는 빛책을 읽습니다. 고려나 조선 같은 지난 어느 날, 어느 지식인과 학자는 한문으로 책을 썼다고 합니다. 예전 지식인과 학자가 한문으로 쓴 책을 오늘날 사람들이 한국말로 옮기고 한글로 새로 적바림해서 다시 읽곤 합니다. 옛것을 읽히며 새것을 한결 넓게 아로새긴다고도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한문책을 한글책으로 고쳐서 읽기는 하지만, 먼먼 옛날부터 수수하고 꾸밈없는 여느 내 어버이 몸과 마음에 아로새겨지던 삶책과 사랑책과 꿈책만큼은 제대로 읽지 못해요. 살아서 펄떡거리는 이야기책을 깨닫지 못해요.

 

  시골교사가 품는 꿈


  두 아이와 살아가는 나와 옆지기는 우리 집 아이들을 아직 학교에 넣을 생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직 이 나라 학교에서는 아이들을 사랑스레 품으며 사랑을 가르쳐 사랑을 빛내는 푸름이로 살아가도록 가르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없는 학교에 우리 아이들을 넣어 사랑을 모르거나 사랑을 등지는 삶을 꾸리는 일은 달갑지 않습니다.


  나는 대학교를 그만두어 고졸이고, 옆지기는 고등학교를 그만두어 중졸입니다. 아버지요 어머니인 우리 두 사람한테는 요즈음 흔히 일컫는 가방끈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아이들은 나와 옆지기한테서 사랑을 얼마든지 받아먹거나 물려받을 수 있어요. 우리 두 사람이 사랑으로 살아가면 아이들은 시나브로 사랑을 깨닫고 느끼며 배워요. 어버이 두 사람이 꿈을 생각하고 꿈을 이루려 활짝 웃으면, 아이들은 차근차근 꿈을 키우고 꿈날개를 펄럭일 수 있어요.


  얼추 서른 해쯤 앞서 흙사람이 된 ‘무명교사’를 마음으로 만납니다. 시골 읍내 고등학교 ‘문학교사’를 몸으로 만납니다. 또 다른 시골 산촌유학센터 ‘삶교사’를 이야기로 만납니다. 세 분 시골교사는 이녁이 맡은 아이들이 똑똑해지거나 돈을 잘 벌거나 이름을 드날리기를 바라지 않으리라 느낍니다. 세 분 시골교사는 이녁이 사랑하며 아끼는 아이들한테 꿈과 슬기와 빛과 삶을 몸소 보여주고 함께 어깨동무하면서 하루하루 곱게 일구려 한다고 느낍니다. 푸른 숲을 함께 좋아하기를 바라고, 파란 하늘을 함께 맛보기를 바라며, 너른 들과 맑은 물로 다 같이 너른 가슴과 맑은 눈빛이 되기를 바라리라 생각합니다. (4345.9.22.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2 - 시민사회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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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2-10-05 17:58   좋아요 0 | URL
예쁘게 아이들을 키우시니까,
당연히 두아이 모두 너른 가슴과 맑은 눈빛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가끔은, 아이들이 된장님과 다른 선택을 하더라도 이해해주실까,
아이들의 선택을 존중해주실까 하는 걱정이 듭니다. 또는 이렇게 맑은 아이들을
제도권이 아닌 다른 선택을 세상에서 줄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합니다.

그냥.... 된장님이 하두 맑게 사시니, 걱정이 되는 걸겁니다.
아마도 그것까지 헤아리셔서 잘 하시리라 믿으면서도 말이지요. ^^

숲노래 2012-10-05 18:10   좋아요 0 | URL
사람들이 으레 궁금하게 여기는데,
아이들을 굳이 '제도권'이라는 데로 보내야 할 까닭이 없어요.

제도권 아닌 삶을 누리는 하루와
제도권 톱니바퀴가 되는 하루는
'다른 길'이 아니라 '삶인 길'과 '삶이 아닌 길'이에요.

곧, 아이들은 '삶인 길'에서 스스로 좋아할 길을 찾아가기 마련이에요.
그러니까, 아이들 스스로 저마다 좋아할 '삶인 길'을 잘 찾도록
어버이부터 '삶인 길'에 즐겁게 서서 씩씩하게 걸어가면
모든 일이 사랑스레 이루어지리라 느껴요.

^^
 


  헌책방은 헌책이 있는 곳입니다. 국어사전 말풀이를 살피면 “헌책을 팔고 사는 가게”가 ‘헌책방’이라 합니다. ‘헌책’은 “이미 사용한 책”을 가리키는 낱말이라고 해요. 그런데, 헌책방이나 헌책을, 또 책을, 이런 말풀이로 나타내거나 바라보아도 좋을까 아리송합니다. 그저 ‘누군가 한 번 쓴(읽은) 책’을 ‘헌책’이라고 하기에는 무언가 허전합니다. 그예 ‘헌책을 팔거나 사는 곳’을 ‘헌책방’이라고 하기에는 어딘가 모자랍니다. 마음을 담는 책이요, 마음을 담기에 기나긴 나날이 흘러도 얼마든지 되읽으면서 꿈을 빛내도록 도우니까, 사람들이 헌책방으로 마실을 다니며 손에 책먼지를 묻히리라 느껴요. 그리 크지 않든 제법 크든, 마음을 밝히는 책 하나를 만나면서 기쁘게 웃을 만한 책쉼터인 헌책방이라고 느껴요. 헌책방은 서울에도 있고 부산에도 있습니다. 강릉에도 있고 춘천에도 있습니다. 작은 시골마을을 둘러싼 작은 도시에도 헌책방이 있습니다. 시골 들판과 숲하고 가까운 데에 있으며, 바다하고도 가까운 데에 있는 헌책방 여러 곳 이야기를 가만히 헤아립니다. 순천 〈형설서점〉 일꾼은 “도움되고 사랑받는 책도 있지만, 도움 안 되고 어느 한 사람만을 위해 만든 책도 있단 말이야. 그러나 그 책도 나올 가치가 있어 나왔으니까, 나는 그 책도 한 권이라도 사서 갖추는 거야.” 하고 말합니다. 베스트셀러나 스테디셀러만 책이 아닙니다. 삶을 담고 삶을 말하며 삶을 사랑하는 길을 밝힐 때에 비로소 책입니다.

 


  숲사람 이야기 2 - 엑스포 구경 아닌 헌책방 마실
  책으로 빚은 숲

 


  엑스포·나들이


  전라남도 여수에서 ‘엑스포’가 여러 달 열렸습니다. 적잖은 사람들이 여수로 엑스포 구경을 한다며 찾아갔습니다. 기차를 타고, 버스를 타며, 자가용을 몰아, 여수로 나들이를 다녔겠지요. 서울부터 여수까지 고속철도가 다니기에, 서울사람은 여수까지 손쉽게 오갈 수 있습니다.


  엑스포 막바지에, 우리 네 식구 살아가는 전남 고흥 시골마을에 ‘마을 이장님 새벽 알림방송’으로 엑스포에 구경하러 가라는 이야기가 흐르곤 했습니다. ‘마을로 공짜표 나왔으니 가실 분은 이장한테 와서 받아’서 구경하러 가라 했습니다.


  우리 식구는 이장님한테서 공짜표를 얻지 않습니다. 따로 엑스포를 구경하러 갈 마음이 없고, 이웃한 도시 여수로 나들이를 간다면 엑스포 아닌 다른 곳을 찾아가고 싶습니다. 여수에는 바다와 가까운 곳에 예쁜 헌책방이 있어요. 여수에도 예전에는 헌책방이 곳곳에 많았을 테지만, 이제는 고소동 641번지에 1·2층으로 이루어진 〈형설서점〉 한 곳이 있어요. 책을 좋아하는 분이라면, 여수 나들이를 하면서 고소동 헌책방에 들러 마음밭에 책씨를 솔솔 뿌린 다음, 천천히 걸어 진남관을 거치고 이순신광장을 들러 돌산다리 바라볼 수 있는 바닷가에 앉아 책 한 권 펼치며 너른 바다 숨결을 맞아들일 수 있습니다. 헌책방으로 걸어서 오갈 만한 데에 있는 여관에서 며칠 머물면서 틈틈이 헌책방으로 책마실을 다닐 수 있습니다. 여수에서 살아가는 분이라면 자전거를 타고 슬슬 헌책방마실을 누릴 수 있어요.


  여수 엑스포는 끝났으나, 엑스포가 없더라도 헌책방은 튼튼히 있었습니다. 엑스포가 끝난 뒤에도 헌책방은 씩씩하게 제자리를 지키며 예쁘게 있으리라 생각해요. 책은 조그마한 씨앗입니다. 헌책방은 조그마한 씨앗을 건사하는 자그마한 씨앗주머니입니다.

 

 

 

 

 

  바다·멧자락


  전남 고흥에는 헌책방이 없습니다. 예전에도 없었는지 이제는 없는지 잘 모릅니다. 아마 예전에는 고흥에도 헌책방이 있었으리라 생각해요. 고흥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고흥에서 학교를 다니고 고흥에서 뿌리를 내리며 예쁘게 살아가던 지난날에는 헌책방뿐 아니라 새책방 또한 작은 면소재지에까지 있었겠지요. 나날이 초등학교가 문을 닫고 중학교와 고등학교마저 문을 닫아요. 전남 고흥에서 문을 닫은 학교는 쉰 군데가 넘어요. 예순 군데가 넘을는지 모르고, 머잖아 백 군데 넘는 학교가 문을 닫겠지요. 왜냐하면 시골사람이 자꾸자꾸 도시로 가거든요. 시골 초등학교를 다니다가도 이웃한 도시에 있는 커다란 초등학교로 옮겨요. 중학교까지 다니다가 고등학교부터는 순천이나 광주로 나가곤 해요. 고등학교까지 고흥에서 다니더라도 대학교를 간다며 훨씬 커다란 도시로 나가요. 그리고, 이렇게 한 번 시골마을 고흥을 떠난 아이들은 거의 도시에서 뿌리를 내려요. 다시 시골마을로 돌아와 시골사람으로 살아가는 길을 찾지 않아요. 이러니 시골마을 헌책방은 문을 닫고 사라져요. 시골마을 작은학교가 문을 닫고 사라지듯, 시골마을에 깃들던 작은 헌책방과 새책방은 소리도 소문도 자취도 소식도 남기지 못한 채 아스라이 사라져요.


  순천 〈형설서점〉에서 장만한 《三山二水》(정한조 엮음,1965)라는 묵은 책 하나를 살펴봅니다. 순천시와 승주군 역사를 다루었다는 묵은 책인데, 102∼103쪽에 순천시와 승주군 ‘국민학교 현황’이 표로 실립니다. 1964년 5월을 잣대로, 승주군에 있는 ‘분교’ 다섯 군데(평중·월가·이곡·도월·대룡) 가운데 넷은 학급수가 둘이요, 학생 숫자는 94∼130이며, 한 곳은 학급수 넷에 학생 숫자 166입니다. 이즈음에는 분교조차 학급이 둘이어도 학생은 100을 넘곤 했으나, 요즈막 고흥 면내 초등학교는 학생이 10 안팎인 곳이 퍽 많아요.


  네 식구는 군내버스를 타고 읍내로 갑니다. 읍내에서 시외버스로 갈아타고 두 시간 남짓 달려 여수에 닿습니다. 고흥에서 순천으로 나가는 길은 온통 숲길입니다. 왼쪽도 오른쪽도 숲이고 들입니다. 벌교를 거쳐 순천으로 가는 길은 온통 아파트와 가게입니다. 왼쪽도 오른쪽도 아파트요 가게들뿐, 숲도 들도 보이지 않습니다. 순천에는 순천만이 있다지만, 시외버스를 타고 달릴 때에는 바다를 볼 수 없습니다. 이러다가 순천을 벗어나 여수로 접어드는 길은 다시 숲길이 됩니다. 왼쪽도 오른쪽도 너른 숲이요 들입니다.


  숲바람을 쐽니다. 들바람을 맞습니다. 숲과 들을 거쳐 바다로 둘러싸인 도시 여수에 닿습니다. 여수는 제법 큰 도시라 할 텐데, 도시이면서도 숲이 있는 멧자락 사이에 이루어진 도시입니다. 너른 바다를 둘레에 예쁘게 안은 도시입니다. 똑같은 도시라 하더라도 이렇게 바다와 숲을 함께 얼싸안는 곳이라 하면 예쁜 넋을 푸른 숨결로 가꿀 만하리라 느껴요.

 

 

 

 

  여수 헌책방·순천 헌책방·진주 헌책방


  여수에 헌책방 한 곳 있고, 순천에 헌책방 한 곳 있습니다. 여수에는 고소동 여수경찰서 옆에 〈형설서점〉(061-664-8949)이 있고, 순천에는 시외버스역 둘레 저전동 230-2번지에 〈형설서점〉(061-741-0228)이 있습니다. 같은 이름을 쓰는 두 책방으로, 순천은 동생 헌책방이요, 여수는 형 헌책방입니다. 맨 처음에는 1981∼82년 무렵 형이 어머니와 함께 광주에서 헌책방 일을 했고, 동생은 1987년에 안동에서 헌책방을 열었습니다. 동생은 안동에서 세 해 헌책방 일을 잇다가 광주에서 헌책방을 하던 어머니하고 함께 책살림을 꾸리고, 동생이 남원에서 새롭게 제금나서 헌책방을 차릴 즈음 형은 회사를 그만둡니다. 그러고는 동생이 꾸민 남원 가게를 받아 책살림을 꾸리다가 여수로 옮깁니다. 이러면서 동생은 어머니하고 순천으로 옮겨 헌책방을 열었고, 세 차례 터를 옮긴 끝에 순천 저전동에 자리를 잡아요. 2012년 9월 1일에는 경남 진주 평안동에 있던 헌책방 〈즐겨찾기〉(055-748-4785)가 같은 진주에서 봉곡동 14-2번지로 옮기며 책방 이름을 〈형설서점〉으로 새로 붙입니다. 순천과 진주 헌책방 사장님은 서로 동무 사이라는데, 처음부터 같은 책방 이름을 쓸까 하다가 다른 이름이 되었고, 이제 같은 이름이 되면서, 여수와 순천과 진주 세 곳에 이름이 같으며 다른 헌책방이 책손을 기다리는 모습이 됩니다.


  시골집에서 순천으로 나들이를 다니면서, 때때로 여수까지 조금 먼 마실을 다니면서, 또 가끔 진주로 더욱 먼 다리품을 팔면서, 나라안 골골샅샅 고운 빛살 나누어 주는 헌책방을 만납니다. 찻집에서 차를 마시거나 밥집에서 밥을 먹을 수 있겠지요. 책이 있는 집에서는 책을 읽을 수 있습니다.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간 즈음 서서 읽거나 골마루를 거닐며 읽거나 걸상에 앉아 읽습니다.


  시인 김지하 님이 1984년에 내놓은 《밥》(분도출판사)이라는 이야기책을 가만히 들춥니다. 1991년 뒤로 헌책방에 많이 쏟아지고 만 《밥》인데, 2012년에 새삼스레 이 책을 끄집어서 들춥니다. “예수 안에는 말도 소도 풀도 흙도 새도 바람도 다 삽니다. 예수가 민중이라는 것은 예수가 중생이라는 뜻입니다(81쪽).” 같은 대목을 곰곰이 아로새깁니다. 예수 마음속뿐 아니라 내 마음속에도 말이랑 소랑 풀이랑 흙이랑 새랑 바람이랑, 또 햇살이랑 나무랑 꽃이랑, 또 냇물이랑 바다랑 하늘이랑, 모두 얼크러져 살아가요. 예수도 부처도 나도, 또 내 옆지기와 아이들도, 또 내 이웃과 동무도 모두 마음속에 하느님이 있어요. 흙을 만지는 이웃집 할매 굵직한 손가락도 마음속에 깃든 하느님에 따라 움직여요. 배를 타고 그물을 건지는 이웃마을 할배 굵직한 손마디도 마음속에 서린 하느님에 따라 움직여요.


  여수 〈형설서점〉에서 마련한 《가정주부》(한국여성개발원,1987)라는 책은 미국사람 ‘레이 안드레’ 님이 썼는데, 첫머리에 “사람들은 그들의 공로가 값으로 계산할 수 없을 만큼 귀중하다고 하지만, 대부분의 가정주부들은 자신의 일에 대한 급여도, 어떤 보장도 받지 못한다(15쪽).” 하고 밝혀요. “사람들은 주부들이 귀중한 사회 성원이라 말하지만, 실제로는 이 사회에서 가장 낮은 임금을 받는 집단이 누리는 혜택조차도 받지 못하고 있다.” 하고 덧붙여요.


  이제 어느 새책방에서도 구경할 수 없는 《가정주부》라는 책을 찬찬히 읽으며 생각합니다. 국립중앙도서관에서는 디지털열람을 할 수 있다는 《가정주부》라는데, 헌책방 한 곳에서 아주 고맙게 만났습니다. 나는 이 책을 도서관 아닌 헌책방에서 만나는데, 《三山二水》 같은 책도 도서관 아닌 헌책방에서 만났어요. 올봄, 순천 〈형설서점〉으로 나들이를 하다가 《우리 고장 고흥》(고흥문화원,1983)이라는 작은 책을 만나기도 했어요. 이 책 또한 도서관에는 없어요. 국립중앙도서관뿐 아니라 고흥군립도서관에도 이 책은 없어요. 그러나 이런 책도 저런 책도 헌책방에서 새삼스레 만나요.

 

 

 

  헌책방에서 만나는 책


  인터넷이 발돋움한 오늘날 참 많은 일이 집이나 회사에서 이루어집니다. 컴퓨터를 켜서 인터넷을 열면, 몇 번 또각거린 다음 온갖 물건을 집이나 회사에서 손쉽게 받을 수 있어요. 다만, 나와 가게는 인터넷으로 만나지만, 이 사이에는 짐을 실어 나르는 택배 일꾼이 있어요. 우리들은 택배삯 얼마를 치르고 책이든 냉장고이든 가게를 안 찾아가고도 장만하거나 구경할 수 있어요.


  그런데, 온갖 책을 인터넷을 열어 구경하다가 살 수 있다지만, 인터넷으로는 만나지 못하거나 살피지 못하는 책이 많아요. 도서관에 가거나 새책방에 가더라도 만날 수 없는 책이 많아요. 《우리 고장 고흥》을 펼칩니다. 9쪽에 ‘우리 고장의 발전 연표’가 실립니다. 1980년대를 잣대로 예순 해 앞서라는 1910∼1919년에 처음으로 국민학교가 섰다고 합니다. 1920∼1929년에 한길이 처음 나고 자동차가 다녔다고 하며, 국민학교가 아홉 곳이 되었답니다. 1930년대에 국민학교가 열 곳이 되고 어업조합이랑 수리조합이랑 소방서랑 등기소가 생겼대요. 1940년대에 비로소 중학교가 생기고 1950년대에 농업고등학교가 생겼다는군요. 1960년대에는 보건소와 농협이 생기고 ‘시외버스 정류소’가 생겼다고 합니다. 1970년대에는 초·중·고등학교가 아흔아홉 곳이 되고, 1980년대에는 백열여섯 곳이 되었다고 해요.


  순천 성남국민학교 37회 졸업사진책(1986)도 헌책방에서 구경합니다. 모두 일곱 학급인 작은 학교로구나 싶은데, 한 학급 아이들을 조금 큰 사진 하나로 한꺼번에 찍습니다. 조금 돈이 있는 학교에서는 학생마다 증명사진 한 장씩 따로 찍어 담지만, 조금 돈이 없는 학교에서는 이렇게 조금 큰 사진으로 뭉뚱그려 졸업사진책을 엮곤 했어요. 학교옷 따로 없는 순천 성남국민학교 1986년 어린이는 저마다 다른 옷차림입니다. 어느 모로 보면 좀 후줄근하게 가난한 모습일는지 모르나, 겉모습 아닌 낯빛을 보고 눈빛을 보면, 또 입꼬리와 눈꼬리를 보면, 착하고 맑은 넋이네, 하고 느낄 만합니다. 몇 장 안 되는 얇은 졸업사진책 끝자락에 봄소풍 사진 있습니다. 1980년대 작은 국민학교는 마을 뒷동산으로 나들이를 갑니다. 아이들은 곁에 비탈밭 있는 뒷동산에서 들놀이를 즐깁니다. 아이들이 들놀이 즐기는 멧자락 밑으로 논배미 넓게 보입니다. 어느 아이는 시내에서 회사원이나 공무원, 또는 가게를 꾸리는 어버이와 살았을 테지만, 어느 아이는 순천에서도 농사를 짓는 어버이와 살았겠지요. 누군가 저승으로 가거나 나라밖으로 떠나면서 헌책방에 한 권 두 권 흘러드는 묵은 졸업사진책이에요. 집을 옮기면서, 낡은 짐을 버리면서, 이런저런 해묵은 이야기 서린 졸업사진책이나 사진첩이 헌책방으로 들어오곤 해요. 나는 이 졸업사진책 임자하고 아무런 끈이 없으나, 이 졸업사진책을 들추며 지난날 발자국을 읽습니다. 1980년대 졸업사진책으로 1980년대를 헤아리고, 1970년대 졸업사진책으로 1970년대를 헤아립니다. 1950년대나 1940년대 졸업사진책을 들추며 그무렵에는 학교와 마을과 어린이가 어떤 모습이었는가 하고 가만히 그립니다.


  헌책방에서는 삶과 마을과 세월을 넘나드는 이야기를 만납니다. 손에 쥐기로는 책 한 권이지만, 이 책 한 권은 돈 몇 푼으로 사고파는 물건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여러 사람이 살아온 땀방울이 스미는 책입니다. 숱한 사람이 부대낀 꿈이 서리는 책입니다. 온갖 사람이 어깨동무하던 사랑이 담기는 책입니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삶을 읽고 사랑을 읽습니다. 내가 오늘 만난 이 묵은 책들은 기나긴 해를 이으며 빛을 선사하는 이야기꾸러미입니다. 헌책방에서 만나는 책은 저마다 다 다른 사람들이 저마다 다 다른 꿈을 품으며 저마다 다 다른 사랑을 일구는 이야기를 길어올리는 책이라고 느낍니다.

 

 

 

 

  구경과 마실


  수십만 사람 또는 수백만 사람이 엑스포를 구경했다고 합니다. 구경거리가 많아 수많은 사람이 찾아갈 만하리라 생각합니다. 헌책방은 작은 책쉼터이기에 수십만이나 수백만에 이르는 사람이 찾아갈 수 없습니다. 한꺼번에 백 사람이 찾아들어도 책을 살피기 어렵습니다. 스무 사람쯤 헌책방 골마루에 서면 북적북적합니다.


  널리 이름난 설악산이나 한라산에, 또 사람 많이 살아가는 서울땅 북한산이나 관악산에, 참으로 많디많은 사람이 발을 디딜 틈조차 없이 우글거리곤 합니다. 워낙 많은 사람이 드나들기에 흙길은 반들반들하며, 시멘트나 쇠붙이나 돌이나 나무로 거님길을 따로 마련하기도 합니다. 이름난 멧자락을 오르내리는 사람들은 ‘길을 밟’지만 ‘흙을 밟’지는 못합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흙을 밟아 내리누르면 풀도 나무도 자라지 못하거든요.


  두루 이름나지 않은 시골마을 작은 멧자락에는 멧마실을 하는 사람이 거의 없거나 아예 없습니다. 시골집 우리 식구는 마을 뒷산을 오릅니다. 흙을 밟기도 하고 나무를 쓰다듬기도 합니다. 풀내음과 나무내음을 맡습니다. 자동차 아닌 멧새 노래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가게에서 울리는 노랫소리 아닌 바람이 일으키는 노랫소리를 듣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든 도시에서는 구경거리를 찾아나설밖에 없는지 모릅니다. 엑스포를 꾀하고 박람회를 마련하며 올림픽이나 월드컵 같은 경기를 치러야 할는지 모릅니다. 야구장이나 농구장에 수천 수만 사람이 몰려서 목청 터지게 외치며 경기를 지켜보아야 비로소 문화가 되거나 여가가 될는지 모릅니다.


  어쩌면 아주 마땅할는지 모르지만, 축구장이나 야구장처럼 2만이나 3만이나 5만을 받아들일 만한 도서관은 아직 한국에 없습니다. 1만이나 5천을 맞아들일 만한 도서관이나 새책방 또한 아직 한국에 없습니다. 나는 인천에서 태어나 자랐는데, 중·고등학생 때 구립도서관에 새벽 일찍 찾아가도 자리가 없어 밖에서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어요. 수험공부를 할 만한 자리조차 찾기 힘들었어요. 두 다리를 뻗고 쉴 만한 물가나 냇가 또한 찾기 어려웠어요. 한 시간 즈음 드러누워 하늘을 올려다보며 쉴 풀숲이나마 찾지 못했어요.


  십만 이십만 삼십만 사람이 살아간다는 도시에 헌책방 한 곳이라 하면, 이곳을 누리기는 퍽 벅차다 할 만합니다. 좋구나 싶은 책을 언제라도 빌려서 읽을 도서관이 마을 곳곳에 크고작게 있어야 하면서, 좋구나 싶은 책을 언제라도 장만해서 예쁘게 건사하도록 돕는 새책방과 헌책방도 마을 곳곳에 크고작게 있을 때에 삶과 문화와 예술과 사랑이 아름다이 무르익을 수 있으리라 느껴요.


  책은 구경거리 아닌 읽을거리입니다. 책방은 볼거리 아닌 생각거리입니다. 표를 끊어 경기장이나 전시장을 찾아가며 무언가를 느끼는 일도 좋을 테고, 만 원이나 이만 원어치 책을 장만할 뜻으로 헌책방 마실을 즐기며 긴 나날과 너른 땅을 가로지르는 책을 느끼는 일도 좋을 테지요.

 

 

  책숲


  사람은 숲이었어요. 나무가 우거진 곳을 일컬어 숲이라 하는데, 나무뿐 아니라 나무하고 어깨동무하고 예쁘게 살던 사람 또한, 오순도순 모여 알콩달콩 이야기를 빚을 때에 사람은 숲이었어요.


  숲이던 사람이기에 손에 연필을 쥐어 글을 써서 책을 엮으면, 이 책은 이야기 감도는 숲, 곧 이야기숲이 돼요. 이야기숲이 되는 책이 하나둘 모여 천 만으로 얼크러지면, 이 책들 모인 곳은 책숲이 돼요.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이 밀려난 도시에서는 푸른 숨을 마시지 못하곤 해요. 이야기 감도는 책이 깃들 곳이 자꾸 사라지는 도시에서는 푸른 넋을 살찌우지 못하곤 해요. 저마다 스스로 어떤 마음숲이었고 어떤 사랑책이었는가를 돌이킬 수 있으면 좋겠어요. 사람들 누구나 스스로 숲이었고 이야기꾸러미였던 삶을 돌아보면서, 오늘 누릴 가장 좋은 생각을 어떻게 빛낼 때에 아름다울까 하고 깨달으면 좋겠어요.


  작은 도시에 작은 책숲인 헌책방이 있습니다. 커다란 도시에 작은 책숲인 헌책방이 있습니다. 도서관 곁에 새책방이 있고, 새책방 둘레에 헌책방이 있습니다. (4345.8.18.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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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사회신문>에 원고지 35장 길이로 싣는 글이다. 이번 호부터 싣는데, 자원봉사로 쓰는 글이다. 한 달에 한 차례나 두 차례 쓸 생각이다. 내가 예쁘게 살아가면서 우리 살붙이들이 아름다이 생각하는 길을 여는 좋은 이웃을 돌아보는 글이 되도록 쓰려 한다. 첫 글은, 전남 고흥에 대기업과 군수가 지으려 하는 '화력발전소'를 둘러싼 이야기이다.

 

..

 

대기업 포스코는 전남 고흥에 화력발전소를 지으려고 한다. 처음에는 포항시에 화력발전소를 지으려 했지만, 포항사람들이 반대해서 포항에 못 짓고, 전남 고흥으로 눈길을 돌려 이곳에 화력발전소를 짓겠다고 한다. 포스코에서 화력발전소를 지으려 하는 곳은 전남 고흥군 봉래면 ‘내나로도’이다. 이곳 고흥 봉래면 내나로도에는 ‘우주기지’가 들어서기도 했는데, 우주기지가 있는 곳을 비롯해 내나로도는 통째로 다도해 국립공원이었다. 그런데 2011년 1월, 환경부에서는 내나로도 몇 군데 마을을 국립공원 지역에서 ‘해제’했다. 국립공원 지역에서 ‘해제’된 곳은 바로 2011년 12월에 포스코에서 화력발전소를 짓겠다고 밝히는 발전소 부지라 할 만하다. 포스코는 모두 2000MW 화력발전소를 지으려 하며, 7조 원이 넘는 공사비를 들인다 하고, 고흥군에는 피해보상금으로 수천억 원을 주겠다고 밝힌다. 박병종 고흥군수는 “포스코에서 실시하는 타당성 용역 결과가 나오면 군민에게 소상히 밝히고 군민 뜻에 따르겠다”고 7월 3일 기자회견에서 말한다. 화력발전소를 반대하는 고흥 두원초등학교 강복현 교사는 “나로도가 통째로 개발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그러면 지역사람들이 포기할 것 아닙니까. 그러면 기피 산업시설이 잇달아 들어올 수가 있어요.” 하면서 화력발전소뿐 아니라 이를 발판으로 고흥을 온통 개발판으로 만들려는 움직임이 걱정스럽다고 말한다. 날로 전기가 모자라 발전소를 더 지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은데, 정작 날로 전기를 더 많이 쓰려는 사람들 욕심을 다스리려는 생각은 드러나지 않는다. 화력발전소 때문에 몸살을 앓아야 하는 시골마을 사람들 삶과, 도시에서 너무 동떨어진 채 삶을 못 읽는 이야기를 전남 고흥에서 띄운다.

 


  숲사람 이야기 1 - 화력발전소 때문에 아픈 고흥사람
 
사람은 숲에서 살았습니다

 


  숲사람·숲마을


  해가 뉘엿뉘엿 기울 무렵, 시골마을 들판은 온통 개구리 노랫소리로 가득하다. 나는 옆지기와 아이들하고 이 고운 노랫소리를 듣고 싶어 시골로 살림을 옮겨 뿌리를 내린다. 도시에서는 생협이 가까이 있고, 좋은 일을 꿈꾸는 이웃이나 동무가 많다 하지만, 또한 아름다운 삶터를 바라는 사랑을 도시사람으로 도시에서 꾸리는 일도 좋을 수 있으나, 아이들이 아직 많이 어리고 나와 옆지기가 한 살이라도 더 젊을 적에 시골에서 숲바람을 쐬고 숲마실을 하며 숲살이를 누릴 때에 한결 즐거우리라 생각했다.


  곰곰이 돌이키면 사람은 누구나 숲사람이었다. 나도 옆지기도 아이들도 모두 숲사람이었다. 숲에서 태어나 숲에서 먹을거리를 얻고 숲에서 보금자리를 누리며 숲에서 맑은 숨을 마시는 한편 숲에서 고운 햇살을 쬐는 숲사람이었다. 백 해나 이백 해 앞서를 돌이키지 않더라도, 한국땅 사람들 누구나 숲사람이었다. 고작 쉰 해 앞서인 1960년대만 하더라도 한국땅은 거의 모두 숲마을이었다. 들을 일구고 멧자락에서 땔감과 나물을 얻으며 바다에서 갯것을 얻고 숲에서 풀과 나무하고 벗삼는 숲사람이었다.


  숲이 있기에 사람도 새도 짐승도 벌레도 나비도 잠자리도 살아간다. 숲이 있기에, 숲에서 풀이 돋고 나무가 자란다. 숲은 따순 햇살을 푸르게 받아들여 드넓은 땅을 기름지며 구수하게 돌본다. 숲에 깃든 짐승들은 서로 예쁘게 얼크러지면서 사이좋은 사랑을 꾀한다. 숲에 깃든 사람들은 서로 곱게 어깨동무하면서 싱그러운 사랑을 꽃피운다. 푸른 숲은 푸른 사람을 키우고, 푸른 사람은 푸른 생각을 키운다. 푸른 생각은 푸른 마을을 일구고, 푸른 마을은 푸른 지구를 일군다. 숲이 있기에 지구별이 푸를 수 있지, 아파트 바깥벽에 풀빛 페인트를 바른대서 푸른 지구별이 되지 않는다. 풀잎 하나와 나뭇잎 하나가 푸른 씨앗이 되고, 푸른 씨앗은 사람들 가슴에서 푸른 사랑이 된다.

 

 

  서울·고흥, 도시·시골


  1990년 한국은 도시사람이 89.6%라고 한다. 2011년 한국은 도시사람이 91.1%라고 한다. 이 숫자는 앞으로 더 늘어나리라 본다. 1960년에는 도시사람이 39.1%라고 했으나, 머잖아 도시사람이 95%를 넘고 97%나 99%까지 이를 수 있겠지.


  나라에서는 특별도시를 새로 만든다. 서울과 수도권에 행정과 문화와 시설이 너무 쏠렸대서 수도권 바깥으로 공공기관을 옮긴다고 하지만, 수도권 바깥에 새로운 도시를 지으려는 개발계획일 뿐, 정작 시골을 늘리거나 살찌우면서 시골사람을 보살피려는 정책은 없다. 한 번 도시에 깃든 사람은 좀처럼 도시를 떠나 시골사람이 되려 하지 않는다. 이제 한국은 ‘시민(도시사람)’이라 해도 될 만하고, 내 식구들처럼 시골사람이거나 ‘군·면·리’에서 살림을 보듬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할 만하다.


  내 식구들 깃든 곳은 전라남도 고흥. 서울에서 바라보자면 아주 먼 데. 고속도로도 기찻길도 공항도 없어, 서울에서 고흥으로 오는 길은 강진이나 해남으로 오는 길보다 훨씬 멀다. 서울하고도 멀지만 부산이나 광주하고도 멀어, 전남 고흥에는 한국땅에 그토록 흔한 골프장 하나 없을 뿐 아니라, 웬만한 공장도 없고 유흥시설조차 없다. 고흥군은 농사짓기와 고기잡이로 살림을 일군다. 흙과 바다에 기대어 이제껏 살림을 일구었고, 앞으로도 이 흐름은 이어가리라 느낀다. 넓거나 높은 멧자락이나 봉우리가 딱히 없어 관광지가 안 되고, 바닷가는 다도해 국립공원이지만 대중교통으로도 자가용으로도 도시에서 한참 먼 터라, 바깥 나그네는 좀처럼 찾아들지 않는다. 그래서 내 식구들은 이곳 전남 고흥을 먼먼 앞날까지 아이들이 어른 되어 아이를 낳고, 이 아이가 다시 어른 되어 아이를 낳도록 살기 좋은 아름다운 숲터, 숲마을, 숲삶이 되리라 생각한다. 마을에는 할머니와 할아버지뿐이라지만, 흙과 바다와 하늘을 사랑하는 분들이라, 더없이 푸르고 해맑다고 느낀다.

 

 

  화력발전소·원자력발전소


  지난 2010년 11월, 나라에서는 고흥에 원자력발전소를 짓겠다고 했다. 이에 고흥군 사람들은 똘똘 뭉쳐서 나라정책을 가로막았다. 제아무리 나라에서 세운 정책이라 하더라도, 마을사람 삶을 옥죈다면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2011년 12월, 포스코라는 기업에서 고흥에 화력발전소를 짓겠다고 한다. 고흥에 원자력발전소를 짓겠다 할 적에도 ‘뛰어난 기술로 깨끗하며 안전한 발전소’를 짓겠다 말했고, 화력발전소를 짓겠다 하는 요즈음에도 ‘청정·안전 기술’이라 말한다. 그러면서 이 같은 발전소를 고흥군에 짓도록 하면 수천억 원에 이르는 돈을 ‘고흥 발전기금’으로 내놓는단다.


  안전하다고는 하지만 일본 후쿠시마에서 원자력발전소가 터졌다. 발전소 일꾼이 잘못하지 않더라도 자연재해로 터질 수 있다. 고흥은 태평양에서 찾아드는 태풍이 제주섬을 지나 맨 먼저 닿는 뭍이다. 깨끗하다고는 하지만 원자력발전소가 터지니 일본 앞바다뿐 아니라 한국 옆바다까지 바다에서 난 것을 마음껏 먹을 수 없을 뿐더러 빗물조차 걱정스럽다 말한다.


  그런데 무엇보다 한 가지 궁금하다. ‘깨끗하며 걱정없는’ 발전소 설비라 한다면, 전기를 많이 쓰는 도시에 지어야 알맞을 텐데. 서울과 큰도시하고 아주 먼 고흥에 발전소를 지으면 우람한 송전탑을 끝없이 어마어마하게 세워야 할 텐데. 시골에서 도시로 전기를 실어나르자면 전깃줄에서 버려지는 전기가 아주 많을 텐데.


  가만히 살피면, 도시 한복판에 원자력발전소는커녕 화력발전소조차 안 짓는다. 도시 한복판에 송전탑이 가로지르는 일이란 없다. 사람들 목숨을 걱정하기 때문이다. 화력발전소 매연이 깨끗하다면, 송전탑 설비를 굳이 할 까닭 없이, 도시에 화력발전소를 지어야 마땅하다. 게다가, 시골에 발전소를 지어 시골마을 땅과 하늘과 바다와 냇물을 더럽히면, 도시사람이 먹는 곡식과 열매와 푸성귀가 모두 더러워지고 만다.

 

 

  국립공원·먹을거리


  고흥 바닷가는 다도해 국립공원에 들어간다. 고흥 뭍 가운데 팔영산이 지난 2011년 1월부터 다도해 국립공원에 들어갔다. 고흥땅 곳곳은 언제라도 국립공원이 될 수 있다 할 만큼 푸른 숨결과 빛깔이 맑다. 그만큼 고흥 시골마을에서 심어 거두는 곡식이나 열매나 푸성귀는 맑고 깨끗하다 할 만하다. 하늘이 내린 좋은 자연을 마음껏 누리는 한편, 이 좋은 자연에서 얻은 먹을거리를 도시사람 누구나 기쁘게 누릴 수 있다.


  도시사람은 제주섬에서 길어올린 맑은 샘물을 사다 마신다. 동해 깊은 곳에서 퍼올린 맑은 샘물이나 강원도 멧골짝 맑은 샘물이나 속리산이라든지 지리산이라든지 계룡산이라든지, 참말 햇살·바람·흙·들판·나무 좋은 시골마을 샘물을 뽑아올려 사다 마신다. 도시사람이 도시 한복판에 구멍을 파서 땅밑 물을 퍼올려 마시는 일은 없다. 서울도 부산도 대구도 인천도 도시 한복판에 구멍을 내어 땅밑 물을 퍼올리지 않는다. 도시 한복판에는 논이나 밭을 만들지 않는다. 도시 한켠을 흐르는 냇물 가장자리에서 고기를 낚아 어시장에서 사고파는 일도 없다. 언제나 가장 깨끗하며 좋은 흙땅에서 거둔 곡식과 열매를 먹으며, 늘 가장 깨끗하며 좋은 바다에서 낚은 물고기를 먹는 도시사람이다.


  그러니까, 시골마을에는 원자력발전소뿐 아니라 화력발전소나 골프장이나 공장을 함부로 지어서는 안 된다. 시골마을 햇살·바람·흙·들판·나무를 더럽히거나 망가뜨리는 일은 곧장 도시사람 먹을거리를 몽땅 더럽히거나 망가뜨리는 일이 되니까. 시골이 무너지면 도시도 무너지니까. 도시사람이 91%이고 시골사람은 9%라지만, 논밭은 46.9%이고 도시는 16.6%이며, 30% 남짓은 숲이나 멧자락이라 한다. 거의 모든 사람이 도시에서 살아가더라도 시골이 널찍하면서 깨끗하지 못하면 도시사람은 숨도 밥도 옷도 집도 누릴 수 없는 셈이라 하겠다. 이제는 도시를 키우거나 온갖 시설을 짓느라 화석연료 전기를 쓰는 일은 그쳐야 맞고 옳으며 아름답다.

 

 

  돈·자가용·아파트


  포스코 회사에서 고흥땅에 화력발전소를 짓겠다면서 들일 건설비는 7조 원이 넘는다고 한다. 발전소 짓는 돈만 7조 원이요, 한전에서 송전탑을 지어 먼먼 도시까지 전깃줄을 잇자면 훨씬 크고 어마어마하다 싶은 돈이 들밖에 없다. 그런데 화력발전소를 지으려는 곳은 포스코 한 곳이 아니다. 다른 회사들은 삼천포와 삼척과 여수에 화력발전소를 지으려 한다. 화력발전소는 앞으로 더 늘어난다 하고, 대기업은 화력발전소를 지어 돈을 아주 많이 벌 수 있다고 밝힌다. 포스코 회사에서 고흥군에 수천억 원에 이르는 ‘보상지원금’을 주겠다고 밝히는 까닭은 화력발전소를 지어 얻는 큰돈이 수천억 원을 훨씬 넘기 때문이다. 아주 크나큰 돈을 벌어들일 수 없다면, 애써 화력발전소를 짓겠다고 나서지 않는다. 한국땅에서 도시사람이 91%가 넘는데다가 자꾸자꾸 시골을 없애고 도시를 지으니 전기가 모자라다고 한다. 아파트도, 아파트와 이어지는 대형마트나 문화편의시설도 모두 전기로 움직인다. 도시는 한밤조차 한낮처럼 전기로 불을 밝힌다. 아파트나 건물을 지으면서 햇볕에너지를 쓰거나 재생에너지를 쓰려고 하지 않는다. 화석연료 아닌 햇볕힘이나 재생힘으로 구르는 자동차는 만들지 않는다. 일터나 학교에 자전거를 타고 가거나 두 다리로 걸어서 가는 일은 거의 사라진다. 도시뿐 아니라 시골에서도 으레 자가용으로 일터와 학교를 다니는 요즈음 사람들이다. 이른아침부터 저녁까지 햇볕에 기대어 물건을 사고파는 저잣거리는 차츰 줄면서, 스물네 시간 내내 전기로 불을 밝히는 대형마트가 꾸준히 늘어난다.


  이제 사람들은 삶을 바라보지 않는다. 이제 한국땅 사람들은 사랑을 꿈꾸거나 슬기로운 생각을 빚으려 하지 않는다. 돈을 더 벌려 하고, 더 번 돈을 더 신나게 쓰려 한다. 오직 돈을 벌어서 돈을 쓰는 굴레에 스스로 갇힌다. 어른들은 돈버는 일에 바쁘고, 아이들한테는 돈버는 지식만 배우도록 하며, 그저 대학교에 보내면 끝으로 여긴다. 아이들한테 삶과 사랑과 꿈을 물려줄 생각이 안 보인다.

 

 

  지구별·한국


  나는 며칠 앞서 자전거를 타고 ‘포스코에서 고흥땅에 지으려 하는 화력발전소가 들어설 곳’을 다녀왔다. 내가 사는 고흥군 도화면 신호리 동백마을에서 화력발전소 예정지인 고흥군 봉래면 예내리·외초리까지는 30킬로미터가 조금 안 된다. 멀지 않다 할 수 있으나 가깝지도 않다. 높고 낮은 멧길을 숱하게 오르내려야 해서 퍽 힘들었다. 한 시간 반을 달려 찾아갔고, 한 시간 반을 걸려 집으로 돌아왔다.


  자전거를 타고 도화면을 지나 포두면을 거치고 동일면을 누비고는 봉래면에 닿는다. 자전거로 15번 국도를 즐겁게 달린다. 이웃마을 사람들이 비알진 땅에 곱다랗게 일구는 비탈논과 비탈밭을 바라본다. 구름이 내려앉아 쉬고 가는 멧봉우리를 올려다본다. 맑은 바닷물 짠내음 실은 시원한 바람을 쐰다. 따사로운 여름햇살을 온몸으로 받는다.


  한여름 시골길에서 홀로 자전거를 달리며 생각한다. 이 좋은 길을 우리 아이들하고 천천히 느긋이 달리면 아주 좋으리라 생각한다. 마을마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경운기를 몰기도 하지만, 으레 두 다리로 걸어서 당신 집부터 논밭을 오가며 들일을 한다. 밭둑에 앉아서 쉬고 논둑에 앉아서 해바라기를 한다. 따순 햇살이 들판을 감돌고, 좋은 구름 그림자가 흙일꾼 땀을 식힌다. 논마다 왜가리가 개구리를 잡느라 바쁘다. 바닷가마다 굴 ·김·매생이·바지락을 얻는 손길이 바쁘다. 고운 햇살과 맑은 바닷물과 싱그러운 흙과 푸른 숲이 얼크러지면서 가장 좋고 아름다운 먹을거리를 베푼다. 여태껏 어떤 위해시설이나 위험시설도 고흥땅에 깃들지 않았기에 이토록 어여쁜 시골마을이 고흥땅에 넓게 자리할 수 있으며, 이토록 어여쁜 시골마을 숲내음을 마시고 자란 아이들은 ‘비록 시골을 떠나 도시에서 살아가’더라도 맑은 생각과 밝은 사랑을 나누는 씩씩하고 튼튼한 사람으로 삶을 누릴 수 있겠다고 느낀다.

 

 

  꿈·사랑·생각·이야기


  사람은 숲에서 살았다. 오늘날 한국사람 거의 모두 숲에서 안 산다 하지만,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누구나 ‘숲에서 거둔 곡식과 열매와 푸성귀’를 먹어야 목숨을 잇는다. 도시사람이든 시골사람이든, 푸른 숲이 맑게 가꾸는 좋은 샘물을 마시면서 활짝 웃는다.


  만화영화 〈미래소년 코난〉을 보면, 세계전쟁이 끝나고 지구별이 거의 망가진 뒤, ‘인더스트리아’라 하는 도시에서는 플라스틱을 그러모아 빵을 만들어 먹는다. 일굴 흙이 없는 도시이기 때문에 과학자들이 머리를 맞대고는 플라스틱으로 먹을거리를 만드는 솜씨를 뽐냅니다. 아마, 플라스틱 빵이라 하더라도 영양소만 갖추면 사람 목숨을 잇도록 하겠지. 오늘날 어느 가게라도 다 갖춘 가공식품처럼.


  곧, 화력발전소나 원자력발전소는 ‘플라스틱에서 쌀밥을 만드는 길’을 걷는 셈이다. 우라늄이나 석탄을 때서 전기를 만드는 일은 환경공해를 일으키며 전기를 만드는 일에서 그치지 않고, 사람들 스스로 가장 아름다운 삶하고는 동떨어진 채 물질문명에 젖어드는 삶이다. 컴퓨터도 텔레비전도 전기가 있어야 켠다지만, 반드시 화석연료를 땐 전기를 써야 할까 생각할 노릇이다. 컴퓨터나 텔레비전, 또 자가용이나 아파트, 또 은행계좌나 대학졸업장, 또 신분이나 계급, 또 상표 붙은 옷이나 신발 들이 꼭 있어야 내 삶이 아름답거나 사랑스러울지를 생각할 노릇이다.


  ‘환경은 조금 더럽히겠지만 친환경 화력발전이라 하는데, 지역경제 살리는 돈을 벌면 좋으리라’ 하고 여긴다면, 이 말마따나 돈을 얼마쯤 손에 쥘 수 있겠지. 그러나, 깨끗한 물·흙·햇살·바람·숲은 모두 잃어야 한다. 갯벌을 메워 땅을 넓힌 독일은 다시 땅에 바닷물을 들여 갯벌로 돌아가도록 어마어마하게 큰돈을 들이붓지만, 다시 갯벌로 돌아갈는지 모른다고 한다. 고흥 바닷가는 국립공원이요, 바닷가뿐 아니라 마을과 숲 모두 국립공원과 똑같이 아름답다. 이곳은 사람이 사랑스레 살아갈 꿈터요 살림터이다. 그리고, 서울 또한 고작 백 해 앞서는 숲에 둘러싸인 마을이었고, 천 해 앞서는 숲이었다. 이제 숲하고 멀어지거나 숲을 자꾸 없애느라 서울사람은 착한 넋과 고운 꿈과 맑은 사랑을 그예 잊는다. (4345.7.5.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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