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숲마실


책을 읽으라는 말 (2015.11.23.)

― 서울 낙성대역 〈흙서점〉

서울 관악구 남부순환로 1916

02.884.8454.



  나라 곳곳에서 “책을 읽자”는 말은 넘칩니다. 다만 “어떤 책을 읽으며 어떤 사람이 되자”는 말은 좀처럼 안 나오지 싶습니다. “어떤 책을 어떤 책집에서 어떻게 살펴서 어떻게 읽어, 어떤 삶으로 어떻게 거듭나는 어떤 사랑이 되어 어떤 꿈을 짓는 어떤 사람이 되자”는 데까지는 더더욱 안 나아가지 싶어요. 이제는 ‘읽자’보다 ‘어떻게’나 ‘무엇을’을 말할 때이지 싶어요.


  가을이면 새삼스레 듣는 “책을 읽자”란 말이 너무 따분하구나 싶다고 느끼면서 서울마실을 하고, 전철을 갈아타고서 낙성대역에 이릅니다. 언제나처럼 이 마을 한켠에서 책꽃을 피우는 헌책집 〈흙서점〉 앞에 섭니다. 전철역에는 낙성대란 이름이 붙습니다만, 저는 이곳을 ‘아름다이 책꽃을 피우는 헌책집이 있어서 더없이 상냥하며 따사로운 마을’이라고 느낍니다.


  책집 앞에 그득그득 쌓은 책부터 살피고 안쪽으로 들어섭니다. 안쪽 골마루하고 책꽂이를 살피며 책내음을 맡다가, 햇볕이 드리우는 마당으로 나와서 햇볕하고 바람을 나란히 느끼면서 책내음을 맡습니다. 《North American Indian》(Christopher Davis, Hamlyn, 1969)을 먼저 집어듭니다. 어느 책을 만나든 이러한 책을 지어서 펴낸 사람들 숨소리를 느끼며 고맙습니다. 《자연속의 새》(김수만, 아카데미서적, 1988)는 그동안 여러 자락 장만해서 우리 책숲에 두 자락 건사하기도 했고, 이웃님한테 선물하기도 했습니다. 요즈음은 새를 사진으로 찍는 분이 무척 늘었는데, 이 책이 나올 무렵만 해도 참 드물었어요.


  나오미 캠벨, 헬레나 크리스텐센, 신디 크로포드 같은 이들을 담은 《Ten women by Peter Lindberg》(Schirmer, 1996)를 천천히 넘깁니다. 이 책 곁에 함께 있는, 퍽 묵은 어린이책인 《insect society》(Berta Morris Parker·Alfred E.Emerson, Row Peterson com, 1941)하고 《toads and frogs》(Berta Morris Parker, Row Peterson com, 1942)를 집어듭니다. 1940년대에 이런 어린이책을 펴내어 어린이가 삶하고 삶터를 한결 깊이 배우도록 이끈 손길이 있네요. 이 나라에서 1940년대를 살던 어른들은 그무렵 어린이한테 어떤 책을 써서 나누었을까요.


  그림책 《Brillinat Boats》(Tony Mitton·Ant Parker, kinghisher, 2002)를 펼치다가, 손바닥책 《Germinal(extraits)》(Emile Zola, Larousse, 1953)을 집습니다. 꾸밈새가 매우 곱습니다. 손바닥책을 이처럼 가볍고 단단히 엮는 매무새가 훌륭합니다.


  가만히 보면 책이란, 아름다운 책이란, 알맹이부터 엮음새에 꾸밈새를 비롯해서 팔림새까지 모두 아름답게 흐를 적에 우리가 함께 아름다운 빛을 누리는 징검돌이 되지 싶습니다. 알맹이가 알차지만 빛을 못 보는 책이라든지, 알맹이는 허술한데 꾸밈새만 멋진 책이라든지, 알맹이가 비었으나 꾸밈새에 이름값을 내세워 팔림새만 높이는 책이라면, 어딘가 허술합니다.


  작아도 알찬 손길이 곱습니다. 작으면서 듬직한 책집이 반갑습니다. 다음에 마실할 날을 손꼽으면서 오늘 마주하는 뭇책을 쓰다듬습니다. 책집지기가 단단히 꾸려 주는 책짐을 받고서 묵직한 등짐을 짊어지고 새길을 나섭니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사전을 쓰는 사람.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들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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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책을 아름다이 만나는 (2019.8.29.)


― 경기 수원 〈책먹는 돼지〉

경기도 수원히 팔달구 세지로 300

http://instagram.com/piggyeatsbooks



  8월 30일에 국립한글박물관에 가야 할 일이 있는데, 낮 1시 무렵까지 가자면 도무지 때를 맞출 수 없어 하루 일찍 움직이기로 합니다. 8월 29일 저녁에 인천 배다리 〈아벨서점〉 책지기님한테 누리신문에 글쓰기를 어떻게 하는가를 알려주기로 하고는, 고흥서 인천으로 가는 길목인 수원에서 내립니다. 함께 움직인 곁님하고 아이들은 기차로 영등포까지 달려서 일산으로 가고, 저는 수원역에서 내려 시내버스를 타고서 지동초등학교 언저리에서 내려 천천히 걷습니다.


  사람도 많고 자동차도 많지만, 팔달문이 한복판에 있습니다. 한복판에 우뚝 선 커다란 문은 이 고장에 살뜰히 숨통 구실을 하는구나 싶어요. 집하고 찻길만 가득하다면 숨통이 막혀요. 나무가 설 틈이나 풀밭을 이룰 자리가 없다면 숨을 쉴 겨를도 없겠지요.


  따사롭게 내리쬐는 여름 끝자락 볕을 누리면서 마을책집 〈책먹는 돼지〉 앞에 섭니다. 초등학교 어린이가 책집 앞을 노래하면서 지나갑니다. 때로는 손전화에 고개를 박고서 지나갑니다. 〈책먹는 돼지〉 앞에 돼지 걸상이 있습니다. 이 돼지 걸상은 책집 앞에서 다리쉼도 하며 해바라기도 하는 자리가 되겠어요.


  책을 먹는 돼지는 무엇을 누릴까요? 책을 먹는 돼지를 아끼는 사람은 무엇을 즐길까요? 책돼지는 마음으로 속삭입니다. ‘넌 돼지가 어떤 숨결인 줄 아니? 너희가 돼지라는 이름을 붙인 우리는 어떤 사랑인 줄 아니?’ 고흥에서 순천을 거쳐 수원으로 가는 길에 ‘돼지’라는 이름을 붙인 수수께끼 한 자락하고 동시 한 자락을 썼어요. 저절로 샘솟더군요. 보들보들한 털에, 곧은 등줄기에, 폭신한 몸에, 똑부러지고 다부진 눈빛에, 씩씩하며 날렵한 몸짓인 돼지는, 해바라기랑 숲놀이랑 흙씻기랑 풀잎 먹기를 즐겨요. 구정물이나 찌꺼기를 즐기는 돼지가 아니라, 더없이 깔끔하면서 정갈한 돼지인데, 사람들이 잘못 길들여요. 다시 말해서 ‘고깃감’으로 태어난 돼지가 아닌, ‘삶을 노래하는 사랑’으로 태어난 이웃이에요.


  이야기책 《명왕성으로 도망간 돼지》(에머 스탬프/양진성 옮김, 푸른날개, 2014)를 살펴봅니다. 줄거리가 살짝 엉성하고, 돼지를 놓고서 한켠으로 치우친 생각이 내내 드러나서 아쉽지만, 돼지가 ‘농장 주인 아저씨’가 어떤 속내인가를 뒤늦게 깨우치면서 새로운 길을 찾는 삶을 찬찬히 그립니다.


  책집 보임칸에 곱게 놓은 《용기를 내! 할 수 있어》(다카바타케 준코 글·다카바타케 준 그림/김숙 옮김, 북뱅크, 2019)는 돼지 어린이가 동무들 곁에서 늘 쭈뼛질을 하던 모습이었지만, 어머니 사랑을 새삼스레 받고서 씩씩하게 바람을 가르는 길을 따사로이 보여줍니다. 참으로 좋군요. 어머니는 사랑으로 가르치고, 아이는 사랑을 받아 기운을 냅니다.


  구석구석 꼼꼼한 손길로 책꽂이를 가다듬은 책쉼터인 〈책먹는 돼지〉입니다. 허술히 놓은 책이 하나도 안 보입니다. 이렇게 꾸리기까지 쏟은 사랑어린 손길을 물씬 느낍니다. 오늘은 책을 석 자락 장만하자고 생각하며 그림책 《자전거 도시》(앨리슨 파랠/엄혜숙 옮김, 딸기책방, 2019)까지 집습니다. 온갖 자전거가 두루 길을 누비는 그림이 재미있습니다. 온갖 자동차 아닌 온갖 자동차가 길을 가득 누빈다니, 얼마나 멋스러울까요. 얼마나 아름다울까요.


  찻길 아닌 자전거길이 된다면, 또 자전거길보다는 ‘사람길’이 되어서, 아기도 아장아장 걸음질을 할 수 있고, 어린이는 길바닥에 돌멩이로 죽죽 금을 긋고서 놀이판을 꾸밀 수 있으면 좋겠어요. 더 빨리 달려야 하는 찻길이 아닌, 누구나 사이좋게 어우러지면서 왁자지껄 이야기꽃이 피어나는 살림길이 되면 좋겠습니다.


  책집지기님이 만화책을 좋아하신다고 해요. 다달이 만화수다를 나눈다고 하시는군요. 만화수다를 나눌 수 있는 마음이기에 책을 더욱 깊고 넓게 즐기며 이웃하고 어깨동무를 하겠지요. 일본만화가 아닌 그저 아름다운 만화를 짓는 테즈카 오사무, 타카하시 루미코, 오자와 마리, 오제 아키라, 이런 분들 만화가 제대로 읽히면 좋겠어요. 《불새》나 《블랙 잭》이나 《우주소년 아톰》도, 《경계의 린네》나 《이누야샤》나 《루미코 걸작 단편집》도, 《이치고다 씨 이야기》나 《은빛 숟가락》도, 《우리 마을 이야기》나 《나츠코의 술》도, 착한 마음을 참하게 그리면서 사랑으로 곱게 펴는 숱한 이야기에 깃든 씨앗이 온누리에 퍼지면 좋겠습니다. 미움이나 시샘이 아닌, 꿈하고 사랑이 씨앗이 되면 좋겠어요.


  다음에 수원마실을 하면서 한결 느긋이 〈책먹는 돼지〉를 비롯해 여러 수원 마을책집하고 헌책집을 누리자고 생각합니다. 책집지기님하고 신나게 수다꽃을 펴느라 많이 늦는 바람에 택시를 불러서 인천으로 씽 하고 달려갑니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사전을 쓰는 사람.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들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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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첫걸음 (2019.7.18.)

― 서울 〈이후북스〉

서울 마포구 서강로11길 18

https://www.instagram.com/now_afterbooks



  오늘 드디어 〈이후북스〉를 찾아냅니다. 몇 해 앞서 이곳에 들르려고 하다가 골목에서 길을 헤매어 못 들렀습니다. 1995년부터 2003년 가을까지는 서울에서 살았는데, 아무리 서울이란 고장을 떠난 지 열여섯 해가 되었다 하더라도, 서울에서 살던 무렵 날마다 서울 온갖 골목을 두 다리랑 자전거로 헤집으면서 헌책집 길그림을 손으로 그렸던 사람이, 이제는 서울 골목이 도무지 헷갈릴 뿐 아니라, 곧잘 전철마저 거꾸로 타거나 엉뚱한 데에서 내리기 일쑤입니다.


  돌이키면 지난날에는 손전화는커녕 1:10000 길그림조차 없었어요. 더구나 헌책집 정보도 딱히 없었습니다. 스스로 모든 골목을 다 걸어다니고 자전거로 지나가면서 어느 곳에 어느 헌책집이 있는지를 살폈고, 스스로 헌책집 번지수랑 주소를 다 살피고 전화번호까지 챙겨서 전국 헌책집 목록까지 엮어서 2006년에 이 목록을 누구한테나 터놓았습니다. 아무튼 눈감고도 서울 골목을 읽던 사람이 어느덧 서울길은 아주 깜깜합니다. 손전화 길찾기가 없었다면 〈이후북스〉를 오늘도 못 찾았겠다고 느낍니다.


  몇 걸음 나가면 큰길이요, 그 큰길에서 조금 더 나가면 엄청나게 복닥거리는 서울 신촌이라지만, 그 복닥판에서 살짝 물러난 마을책집입니다. 겉으로 보면 고요하지만 막상 책집으로 들어서면 책집으로서 더없이 북적북적합니다.


  그런데 여러 해 만에 이 마을책집을 찾아내어 들어왔어도 머물 틈은 얼마 안 됩니다. 저녁에 볼일을 보러 다시 움직여야 합니다. 오늘은 어느 골목으로 들어와서 어떻게 찾아가면 되는가를, 또 이쪽으로 찾아드는 마을버스는 어디에서 멈추고 어디로 움직이는가를 어림하자고 여깁니다. 이렇게 첫걸음을 했으니 다음에는 수월히 두걸음을 하리라 여기면서 두 가지 책을 손에 쥡니다.


  그동안 미처 장만하지 못한 《동물은 전쟁에 어떻게 사용되나?》(앤서니 J.노첼라 2세와 세 사람/곽성혜 옮김, 책공장더불어, 2017)를 쥐고, 《はしぶくろでジャパニ-ズ·チップ》(辰巳雄基


, リトルモア, 2019)를 쥡니다. 젓가락싸개로 새롭게 이야기를 엮은 책이 새삼스럽습니다. 이른바 ‘젓가락 종이싸개’로 즐긴 종이접기라고 할 텐데요, 밥집마실을 다니면서 마주하는 작은 종잇조각을 살뜰히 건사하는 손길이기에 이 손길로 책까지 새로 여미어 내는구나 싶습니다.


  큰손이 아니어도 마을책집을 가꿉니다. 작은손이어도 마을책집을 보듬습니다. 사랑손이 될 수 있다면, 웃음손이나 기쁨손이 될 수 있다면, 누구라도 마을책집을 누리고 아끼면서 도란도란 이야기꽃으로 피어날 만하지 싶습니다.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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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빛을 누리는 길 (2019.7.24.)

― 광주 〈소년의 서〉

광주 동구 충장로46번길 8-17

https://www.instagram.com/boysbookshop



  여름이 깊어갑니다. 햇볕이 후끈하고 바람이 시원하며 구름이 해맑고 소나기가 죽죽 온누리를 적시는 기운을 듬뿍 머금으면서 온통 푸르게 물들기에 여름빛이라고 느낍니다. 더우니까 여름이랄까요. 이 더운 기운을 온몸으로 누리면서 새롭게 어깨를 펴는 여름이랄까요.


  우리 집에서는 선풍기조차 없이 바람을 끌어들입니다. 나무하고 풀을 스치는 바람이 찾아들면 부채조차 부질없습니다. 바람이 후 불면 그저 눈을 감고서 이 싱그러우면서 시원한 바람으로 온몸을 샅샅이 씻습니다.


  여름에 바람을 쐬면 매우 튼튼할 수 있습니다. 땀이 좀 흐르더라도 바람은 땀을 맑게 씻어 줍니다. 둘레 볕살을 섣불리 떨어뜨리지 않으면서 살갗이 즐겁게 숨을 쉬도록 이끌어요. 이와 달리 선풍기는 둘레 볕살하고 동떨어진 바람이요, 에어컨은 아예 둘레 볕살을 가로막는 바람이니, 이 두 가지를 자꾸 쏘이면 몸이 무너지겠구나 싶습니다.


  여름이기에 홑옷을 가볍게 두른다든지, 아예 맨살을 해랑 바람에 드러내면 좋을 텐데, 이제 이 땅 어디를 가든 시골버스나 군청 같은 데조차 너무 차가운 에어컨이 춤을 추면서, 여름에 외려 긴소매에 겹옷을 두르는 이들이 늘어납니다. 자동차에서 하나같이 에어컨이니 여름에는 긴소매에 겨울에는 뜬금없이 반소매를 두르는 사람이 늘어나요.


  그러께에 광주 〈소년의 서〉를 찾아올 적에는 광주라는 고장이 어떤 길인지 잘 몰라서 택시를 탔습니다. 그동안 이태가 지났다고 이제 광주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움직이는 길을 조금 익혔습니다. 버스나루에서 일곱걸음이던가, 부드럽게 달려서 충장로 쪽에서 내리고, 어디로 가야 하나 하고 어림하면서 천천히 걸어서 〈소년의 서〉에 닿습니다.


  샛골목에는 바람이 가볍게 일렁이지만, 책꽂이가 빽빽한 〈소년의 서〉에는 좀처럼 바람이 스며들지 못합니다. 이런 여름날에는 〈소년의 서〉 책꽂이를 모두 골목으로 빼내고 해가림천을 세워서 ‘골목바람을 누리는 책집’으로 꾸미면 어떠려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나는 누구입니까》(리사 울림 셰블룸/이유진 옮김, 산하, 2018)를 문득 봅니다. 옮긴이 이름이 낯익습니다. 스웨덴말을 한국말로 옮기느라 애쓰셨네 하고 느끼면서 읽습니다. 한국에서 낳은어버이를 잃고서, 스웨덴에서 ‘기른어버이’ 품에서 자라며 고된 삶을 지은 이들이 온마음 바쳐서 엮은 알뜰한 이야기꾸러미입니다.


  《이갈리아의 딸들》(게르드 브란튼베르그/히스테리아 옮김, 황금가지, 2016/고침판)은 1996년에 한국말로 처음 나왔다는군요. 그해 1996년은 강원도 양구 멧골짝에서 군인으로 지냈습니다. 이해에 나온 책은 한 가지도 모릅니다. 2016년에 고침판으로 새로 나왔다는 이 소설책을 이제야 손에 쥐어 봅니다. 가시내하고 사내가 이 지구별에서 맡은 몫을 확 뒤집어서 그대로 그립니다. 재미있으면서도 거북하게 잘 그렸구나 싶어요. 이 ‘거북함’이란, 이 지구별에서 사내들이 느껴야 할 대목일 텐데, 사내들 주먹다짐 같은 힘으로 굴러가는 오늘날 얼거리란 어깨동무하고 동떨어진 ‘거북한 길’인 줄 깨닫고서 이를 다같이 고쳐 나가야 할 노릇 아니겠느냐 하고 대놓고 따지는 줄거리이지 싶어요.


  광주에 살짝 들른 터라 고흥으로 돌아갈 길을 어림하는데, 〈소년의 서〉 책지기님이 이곳에서 걸어서 가까운 〈러브 앤 프리〉를 꼭 가 보라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꼭 가 봐야겠지요. 걸어서 갈 만하다는 말씀에 걸어서 가 보는데, 등짐이 없이 가벼운 차림이라면 사뿐한 길이지만, 등짐을 잔뜩 짊어진 몸으로는 그리 가뿐하지는 않네 싶습니다.


  그나저나 〈러브 앤 프리〉를 들러서 버스나루로 가려고 하는데, 두 분한테 길을 여쭈었으나 두 분 모두 엉뚱한 데를 알려주었어요. 곰곰이 생각하니, 요새는 도시에서도 시내버스를 안 타는 분이 많겠구나 싶어요. 버스나루에서 책집까지는 시내버스로 잘 왔으나, 버스나루로 돌아갈 적에는 엉뚱한 곳에서 헤매다가 택시를 잡았습니다. 택시일꾼이 문득 한말씀 합니다. “저도 택시만 모니까 시내버스나 전철은 어떻게 다니는 줄 몰라요.” 이제 버스길이나 전철길은 ‘마을사람’ 아닌 ‘손전화’한테 물어볼 노릇이로군요.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사전을 쓰는 사람.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들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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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있으렴 (2015.12.18.)

― 서울 홍제동 〈대양서점〉



  서울 홍제동에 헌책집 한 곳이 있었습니다. 홍제동도 제법 큰 마을이기에 퍽 예전에는 이곳에서 헌책집이 여럿 있었을 테고, 이 마을을 밝히는 크고 작은 새책집도 여럿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홍제동에 있던 여러 헌책집은 하나씩 자취를 감추었고 〈대양서점〉 한 곳이 씩씩하게 자리를 지키면서 책손을 맞이했습니다. 홍제동이라는 마을에 헌책집이 꼭 한 곳만 자리를 지킨 지는 얼추 스무 해 남짓 되었지 싶습니다. 이러다가 홍제동에 새로운 헌책집이 한 곳 생겼어요. 〈대양서점〉을 지키는 정종성 님 아들 정태영 님이 ‘대양서점’이라는 이름을 함께 쓰는 다른 가게를 열었어요.


  아버지 헌책집은 높은찻길(이제는 헐려서 사라짐) 바로 옆에 있었고, 아들 헌책집은 골목 안쪽에 있었습니다. 아들 헌책집은 가게를 여러 판 옮겨야 했고, 이동안 〈기억속의 서가〉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헌책집 〈기억속의 서가〉는 홍은동 쪽으로 새터를 찾아서 옮기기도 했는데, 건물 임자가 그 건물을 헐고 빌라로 새로 짓겠다고 하면서 다른 곳으로 또 옮겨야 했습니다. 이러면서 2015년에 다시 홍제동 쪽으로 옮겼고, 바로 이해 2015년 12월 31일에 〈대양서점〉은 이 이름을 내리고 문을 닫기로 합니다. 헌책집 〈대양서점〉이 문을 닫기로 한 까닭은 여러 가지일 테지요. 어느 한 가지만 들 수 없습니다. 


  “어이고! 아니, 어떻게 알고 오셨나! 먼 데서 사실 텐데!” “아무리 먼 데서 살더라도 그동안 얼마나 고마운 곳이었는데, 마지막 절은 해야지요.” “내가 이제 책방을 접을 텐데요, 그래도 그동안 하던 버릇이 있어서, 책 정리를 멈출 수가 없네요. 아무리 내일 영업을 더 하지 못한다고 해도 책이 반듯반듯하게 꽂혀야 돼요.” 골마루 셋이 있는 조그마한 헌책집을 한 바퀴 돌면서 삐죽 튀어나온 책이 있으면 차곡차곡 갈무리하고, 이 책을 앞에 놓으면 좀 눈여겨보는 손님이 있을까 생각하면서 추스르는 손길이 정갈합니다.


  책집지기 손길을 느끼면서《작고 가벼워질 때까지》(박남준, 실천문학사, 1998)하고 《한국의 황제》(이민원, 대원사, 2001)를 고르다가 생각합니다. 한국에 ‘황제’가 있었던가? 굳이 이름으로 댄다면 없었다고 하기도 어렵지만, 구태여 “한국 황제”로까지 바라보아야 하나 아리송합니다.


  더 생각하면, “한국 시골사람”이나 “한국 멧골사람”이나 “한국 바닷사람”을 이야기로 엮어서 나오는 일이 매우 드뭅니다. 어쩌면 없다고까지 할 수 있습니다. 수수한 시골사람이나 멧골사람이나 바닷사람 이야기를 글로 적은 일은 예부터 드물고, 글로 얼마 안 적히기도 했을 뿐 아니라,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제대로 글로 적거나 사진으로 찍거나 그림으로 그리는 일도 드뭅니다. 학자라고 하는 분들은 ‘어쩔 수 없다’는 말로 ‘글로 자료가 남은 임금이나 지식인’ 이야기를 다루고 그치지요.


  〈대양서점〉을 찾아오며 언제나 손바닥책을 즐겁게 장만했습니다. 오늘도 《지성에 대하여》(쇼펜하우어/박범수 옮김, 박영사, 1974), 《유토피아》(토머스 모어/나종일 옮김, 박영사, 1976), 《헤밍웨이 평전》(김병철, 박영사, 1974), 《파우스트》(괴에테/박종서 옮김, 박영사, 1975), 《悉達多》(H.헷세/이병찬 옮김, 박영사, 1974)를 고르는데, 《싯다르타(실달다)》 뒤쪽에 ‘부산 영광도서’ 책표가 남았습니다. 1976년에 이런 책표를 썼다는 자국이에요.


  《風と共に去りめ 第二冊》(Margaret Mitchell/大久保康雄 옮김, 三笠書房, 1938)을 집습니다. 꾸밈새가 곱기에 살펴보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1937년에 마무리가 되었고, 이 책은 1938년에 처음 나왔으며, 이 책을 옮긴 분은 1905년에 태어나 1987년에 숨을 거두기까지 오랫동안 옮김님으로 일했다고 하는군요. 일본은 세계문학을 한 해 만에 일본말로 옮겨서 누렸는데, 한국은 언제쯤 한국말로 누렸을까요? 일제강점기였을 1938년에 한국 지식인은 일본글로 이 문학을 누렸겠지요. 그 자취를 오늘 이 헌책집에서 찾아봅니다.


  손바닥책을 더 살핍니다. 《문화를 보는 눈》(C.레비스트로스/김치수 옮김, 중앙일보사, 1978), 《삼림의 역사》(미셀 드베즈/임경빈 옮김, 중앙일보사, 1978), 《인류의 위기》(로마 클럽/김승한 옮김, 삼성문화재단, 1972), 《일제시대의 항일문학》(김용직·염무웅, 신구문화사, 1974)을 고릅니다. 《아름다운 우리말 찾아쓰기 사전》(김정섭, 한길사, 1997)도 눈에 뜨여서 집습니다. 이 사전은 ‘이렇게 잘못 쓰는 말씨를 다음처럼 고쳐쓰자’고 하는 ‘순화어 사전’입니다. 뜻은 틀림없이 좋은데 엮음새는 꽤 아쉽습니다.


  졸업사진책을 둘 봅니다. 《서울 재동국민학교》 65회(1973)하고 《성정여자고등학교》 22회(1980)를 보는데, 성정여고 학교 건물에 붙인 글씨 “국적있는 교육, 새역사의 창조”가 눈에 뜨입니다. 1980년이니 이때에도 여고에서도 교련옷을 입혀 제식훈련을 시킨 자취를 사진으로 돌아봅니다.


  《the Chronicles of NARNIA 5》(C.S.Lewis, HarperTrophy, 1994)하고 《the Chronicles of NARNIA 7》(C.S.Lewis, HarperTrophy, 1994)이 있는데, ‘대한민국 정보통신부 행정자료실’에서 나온 책입니다. 정부기관 행정자료실 책도 이렇게 버려지는군요.


  《ペスタロッチ-傳 第一卷》(ハインリヒ·モルア/長田 新 옮김, 岩派書店, 1939)을 보고는 깜짝 놀랍니다. 이렇게 묵은 책을 오늘 이곳에서 만나다니요. 생각해 보니, 앞서 만난 《風と共に去りめ 第二冊》을 읽은 어르신이 이 책도 읽으셨지 싶어요. 책이 나온 해가 비슷합니다. 옮긴님 오사다 아라타 님은 ‘高松藤三郞’이란 분한테 이 책을 드렸다는데, 책을 받은 분은 어떤 분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누구보다 페스탈로치를 잘 헤아린 사람은 바로 일본사람이라지요? 일본 보통교육은 무척 짜임새가 있다고 할 만합니다. 다만, 그런 짜임새있는 보통교육에서도 엉터리 같은 일이 벌어지고, 따돌림은 사라지지 않아요.


  “모처럼 오랜만에 오셨는데, 오늘도 책만 보시나?” 책집지기 아저씨 말씀에 아차 싶습니다. 저는 마지막길에 책을 하나라도 더 장만하면 책짐이 좀 홀가분하려나 하고 생각했습니다만, 책은 책이되, 책집지기 아저씨하고 이 책터를 둘러싼 이야기꽃을 펴는 길이 나았겠네 하고 뒤늦게 느낍니다. “우리 책방을 알려주느라 그동안 얼마나 애쓰셨는데, 이제 문을 닫고 맙니다. 이제 영업을 중지합니다. 그날(31일)이 되어 보아야 알겠지만, 아직까지는 괜찮네요. 그날이 되면 눈물이라도 흘리려나? 허허.”


  자그마한 〈대양서점〉에 늙수그레한 손님이 두 분 찾아옵니다. “아니, 그동안 안 보이던 양반이, 이제 책방을 닫는다니까 얼굴을 보이네. 허허, 책방을 닫는 일도 나쁘지는 않네? 이렇게 반가운 얼굴도 볼 수 있고 말이야.” “자주 찾아오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그래도 이렇게 인사는 해야지 싶어서.” “아니요. 이렇게 와 주시니 고맙지요. 차 한 잔 드릴까요?”


  1979년부터 2015년까지, 스물두 해 더하기 열다섯 해, 모두 서른일곱 해 걸음을 마무리짓는 길입니다. 마지막 하루까지도 책시렁을 반듯하게 갈무리하는 손길인 책집지기 한 분이 오랜 일을 비로소 쉴 이 책터를 돌아보면서 눈을 감고 속삭입니다. ‘잘 있으렴, 그동안 애썼구나, 마을책집. 네 숨결을 받은 사람들은 곳곳에서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오늘 하루를 지으리라 생각해. 고맙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사전을 쓰는 사람.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들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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