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숲마실


비온다 (2023.4.14.)

― 부산 〈비온후〉



  이른아침에 옆마을로 걸어가면 08시 시골버스를 탈 수 있습니다. 마을앞 07시 05분 버스를 타면 읍내에서 너무 오래 멀뚱히 서야 하기에 옆마을로 짐을 바리바리 지고서 걸어갑니다. 아침버스에는 할매할배뿐 아니라 푸른씨가 잔뜩 탑니다. 어르신이 잔뜩 탄 아침버스에 가득한 푸른씨는 저녁버스와 달리 얌전하고 조용합니다. 시골 푸른씨는 저녁버스를 타면 허벌나게 막말판(욕판)입니다.


  시외버스가 부산으로 달리는 동안 빗줄기가 조금씩 굵습니다. 먼지띠를 씻어내면서 봄들·봄숲·봄바다를 다독이는 상냥한 빗살입니다. ‘비오다’나 ‘눈오다’를 한 낱말로 삼아서 낱말책에 실을 수 있을까요? 말글지기(국어학자)가 낱말책에 싣나 안 싣나를 바라기 앞서, 우리 스스로 여느 자리에서 말하고 글쓸 적에는 ‘비온다·눈온다’처럼 붙여서 소리를 내지만, 막상 글로 말소리를 옮길 적에는 “비 온다·눈 온다”처럼 띕니다. ‘비옴·빛옴·꽃옴·봄옴’을 가만히 읊어 봅니다.


  부산 사상에서 버스를 내려 전철을 탑니다. 전철에서 내려 걷습니다. 마을책집 〈비온후〉에 닿습니다. 이달부터 ‘여섯 갈래 걸음꽃으로 피어나는 여행빛’을 여섯 판으로 나누어 폅니다. 오늘하고 이튿날은 ‘헌책집’이랑 ‘자전거’로 마실꽃을 누리는 걸음꽃을 들려주면서 생각꽃을 피우려고 합니다.


  “숲노래 씨는 말끝마다 ‘꽃’이란 말을 자주 붙이네요?” 하고 묻는 이웃님이 있습니다. 우리말 ‘꽃’은 ‘꼴찌·꼬마·끝·꿈’하고 말밑이 맞닿습니다. 중국말 ‘화양연화’는 어린이가 못 알아들을 테지만, 우리말 ‘꽃길’은 누구나 알아들어요. 그래서 글꽃(←문학)에 밝꽃(←과학)에 길꽃(←철학)처럼 풀어낼 수 있어요. 말꽃(←사전)으로 풀어도 어울립니다. 이야기꽃·수다꽃(←강의·특강·수업·클래스)으로 풀어내기도 합니다.


  아이 곁에 서면 누구나 느끼고 배울 만합니다. 아이들은 어버이가 ‘아주 작은 무언가’를 할 적에 기쁨(선물)으로도 멍(상처)으로도 받아들여서 오래오래 마음에 품어요. 우리가 아이로 살아가던 지난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이는 어버이 숨결을 모두 받아들여요. 어버이 말씨를 마음씨에 담아요. 그러니 이제 어른·어버이란 몸을 입은 모습으로서 ‘어른답게 철들고·어버이답게 사랑스레’ 말씨앗도 마음씨앗도 이야기씨앗도 책씨앗도 꿈씨앗도 함께 심고 가꾸려고 합니다.


  귀를 기울이고, 마음을 기울이고, 생각을 기울이노라면, 어느새 깊이 들어서면서 기쁘게 만나리라 느껴요. 어렵다고 여기니 어렵고, 사랑으로 여기니 사랑으로 거듭납니다. 빗물을 참빗질로 여기고 마당빗질로 맞아들여 마음도 몸도 씻습니다.


ㅅㄴㄹ


《부산의 고개》(동길산, 비온후, 2022.11.25.)

《부산―포구를 걷다》(동길산, 예린원, 2022,7,15,)

《가볍게 읽는 한국어 이야기》(남길임과 일곱 사람, 경북대학교출판부, 2022.11.25.)

《연극비평지 봄 vol.19》(진선미 엮음, 봄, 2022.12.)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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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마실꽃

2023.4.16.


#온누리들꽃이여

#만국의노동자여


#부산마실 마치고서

#고흥으로 돌아간다.


한참 달릴 버스에 탄다.

모처럼 만난 #백무산 시집을

되읽어 보려고 한다.


이제는 #일본말씨 는 씻고서

온누리 들풀 들꽃을

보고 만나고

스스로도 풀꽃인 줄 깨닫는

#글동무 가 늘기를 빈다.


노동이 아니라 일이다.

노동자가 아닌 일벗이다.


#부산보수동 #보수동책골목

#대영서점 에서

여러 책을 반가이 만났다.

고맙습니다


#신문 #내가안쓰는말

#숲노래노래꽃 #숲노래동시


이제 졸립구나 #숲노래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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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숲마실


열여섯 해 (2023.3.10.)

― 서울 길음 〈문화서점〉



  2007년 12월에 찾아간 뒤 2023년 3월에 비로소 다시 찾아온 서울 길음 〈문화서점〉입니다. 큰아이가 태어나기 앞서 마지막으로 들르고서 도무지 책마실을 나오지 못 했습니다. 서울에서 ‘문화’란 이름을 붙인 책집이 하나둘 사그라들 적마다 길음 이곳은 잘 계신지 궁금했습니다.


  서울은 예부터 어디에나 사람이 많을 뿐 아니라 책집도 많았습니다. 서울로 일자리를 바라며 깃드는 사람도 많지만, 서울에서 뜻을 펴거나 배움길을 열려는 사람도 많습니다. 서울은 ‘새롭게 배우고 익혀 가다듬는 눈빛’을 북돋우는 사람들이 꾸준히 물결치기에 서울이라는 이름으로 이어가리라 느낍니다.


  스스로 새롭게 배우고 익혀서 가다듬겠노라 마음먹는 사람이 줄거나 책집이 사그라들거나 안 태어나는 고장이라면 죽어가는 고장일 테지요. 어린이가 안 태어나거나 젊은이가 떠나기에 죽어가는 고장이지 않습니다. 책집이 사그라드는 데가 죽어가는 고장입니다. 오늘날 ‘죽어가는(인구소멸·지역소멸)’ 곳을 보면, 어린이와 젊은이뿐 아니라 책집이 없습니다.


  ‘교육’이라는 이름을 붙이면 하나부터 열까지 어렵습니다. 그러나 아이어른이 함께 ‘살림’을 하면, 스스럼없이 하루를 누리고 같이 짓습니다. 잘 해야 하지 않고, 어설프거나 모자라면 천천히 다독이기에 ‘살림’입니다. ‘육아’라는 이름을 붙이면 모조리 ‘굴레’요, 고단하고 지칩니다. 아이어른이 언제나 ‘사랑’을 하면 스스로 웃고 춤추고 수다를 떨고 노래하면서 함께 즐겁습니다.


  대단하거나 훌륭하거나 놀라워야 할 ‘사랑’이 아닌, 숨결 그대로 ‘사랑’입니다. 누구나 ‘부모·학부모’가 아닌 ‘어버이’일 뿐이고, ‘성인’이 아닌 ‘어른’이며, ‘유아·아동·청소년·유소년’이 아닌 ‘아이’입니다. ‘교육·육아’라는 사슬을 떼어내고서 ‘살림·사랑’으로 하루를 노래하고 놀면서 느긋이 누리는 마음이 모이기에 ‘살아나는’ 고장으로 거듭난다고 느껴요.


  지난 열여섯 해에 걸쳐 해마다 한 걸음씩 떼었면 어떤 책빛을 새록새록 누렸을까 하고 어림해 봅니다. 그동안 이곳을 꾸준히 드나든 책손님이 있었기에 그분들은 즐거이 책빛을 누렸을 테고, 책집도 고스란히 이을 수 있을 테지요.


  똑같이 바라보지 않기에 즐거운 벗(삶벗·말벗·책벗)입니다. 둘레를 보면 똑같이 안 바라본다면서 내내 들볶이다가 그만 똑같이 바라보는 틀에 맞추어 가면서 다 다른 눈빛을 잊어버리는 사람들이 가득하구나 싶은데, 우리는 서로 다 다른 책에 마음이 가고 손이 가고 생각을 가꾸기에, 이 별을 곱게 돌보는 씨앗을 심습니다.


ㅅㄴㄹ


《문예진흥문고 6 목민의 길》(이원순 글·이우경 그림, 계몽사, 1980.6.5.)

《조선말 큰사전 1》(조선어학회, 을유문화사, 1947.10.9.)

《조선말 큰사전 2》(조선어학회, 을유문화사, 1949.5.5.)

《乙酉文庫 2 要路院夜話記 外 十一篇》(박두세/이병기 옮김, 을유문화사, 1949.5.10.)

《溫突改造論》(김상술, 어문각, 1961.5.30.)

《龍飛御天歌 上》(김성칠 석주, 향문사, 1956.5.30.)

《韓國古詩歌의 硏究》(이상보, 형설출판사, 1975.12.6.)

《나도향 전집 下》(나도향/주종연·김상태·유남옥 엮음, 집문당, 1988.9.20.)

《당신의 肖像》(이승훈, 문학사상사, 1981.5.5.첫/1983.8.15.중판)

《작업일지》(최석, 청하, 1990.3.20.)

《반복》(이준규, 문학동네, 2014.3.10.첫/2015.1.20.2벌)

《전장포 아리랑》(곽재구, 민음사, 1985.10.15.첫/1993.2.10.8벌)

《예레미야의 노래》(박두진, 창작과비평사, 1981.11.20.첫/1983.11.20.3벌)

《겨울 공화국》(양성우, 실천문학사, 1977.8.30.첫/1990.2.15.7벌)

《북치는 앉은뱅이》(양성우, 창작과비평사, 1980.4.25.)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황지우, 민음사, 1985.10.15.첫/1991.1.15.7벌)

《농민》(김광협, 태멘, 1982.1.20.)

《나의 칼 나의 피》(김남주, 인동, 1987.11.15.첫/1988.7.10.4벌)

《쓰다 만 편지인들 다시 못 쓰랴》(김경미, 실천문학사, 1989.2.20.)

《쌈짓골》(김춘복, 창작과비평사, 1977.6.30.첫/1991.4.1.4벌)

《한국지명의 신비》(김기빈, 지식산업사, 1989.10.25.첫/1991.5.20.3벌)

《하늘의 소리》(최남백, 태창문화사, 1977.12.15.)

《사이보그 로닌 상·하》(프랭크 밀러 글·그림/이상 옮김, 가배, 1992.4.18.)

《큰별이 머문 곳》(이석현, 성바오로출판사, 1974.11.30.)

《改訂 中等西洋歷史》(瀨川秀雄, 富山房, 1931.5.16.첫/1934.10.25.4벌)

《동시모음 상명 제3호》(문예부·박수경 엮음, 상명국민학교, 1969.10.10.)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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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들어온다면 (2023.3.10.)

― 서울 〈햇살속으로〉



  아침 일찍 청주에서 서울로 달려갑니다. 이제 나라에서는 버스에 탈 적에만 입가리개를 하면 된다고 밝히지만, 길이나 버스나루에서 입가리개를 하는 사람은 꽤 있습니다. 한동안 이 나라는 ‘밥집·찻집에 들어갈 적에는 입을 가리’되 ‘마시고 먹을 적에만 가리개를 풀라’고 시켰고, 사람들은 고분고분했습니다. 눈가림(조삼모사)은 옛이야기가 아닙니다. 잔나비한테 아침에 능금 넉 알 저녁에 석 알을 주든, 아침에 능금 한 알 저녁에 여섯 알을 주든 매한가지입니다.


  ‘나’를 잊고 ‘나라’에 목매달수록 넋이 사라집니다. ‘나라(정부)’는 ‘나(독립인)’를 바라지 않아요. 홀로서기를 하면서 홀가분히 살림을 짓는 사람은 스스로 삶·살림·사랑을 지으니, 나라가 시키는 일을 안 합니다. 홀로서기를 안 하거나 못 하기에 나라가 베푸는 일자리를 맞아들여서 고분고분 따를밖에 없습니다.


  책이란 무엇일까 하고 돌아봅니다. 우리나라 책자취(출판역사)를 돌아보면 《용비어천가》를 비롯해 숱한 글바치는 ‘해바라기(임금 섬기기)’에 글힘을 쏟았어요. 남·나라가 시키는 대로 스스로 넋을 무너뜨린 이 나라 글바치입니다. 오늘날 숱한 책도 ‘나 스스로 하기’가 아닌 ‘남·나라가 시키는 대로 하면서 돈을 잘 벌고 이름을 드날리고 힘을 거머쥐기’라는 줄거리로 치우칩니다.


  어제 청주에서 밤을 맞이하면서 “모든 책은 헌책이다”란 이름으로 노래(동시)를 지었습니다. 헌책이지 않은 책은 없고, 새책이지 않은 책은 없습니다. 숲이지 않은 책은 없고, 사랑이지 않은 책은 없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빛을 잊거나 잃는다면 헌책도 새책도 숲도 사랑도 아닌, ‘돈·이름·힘’에 얽매인 끄나풀입니다.


  〈햇살속으로〉로 찾아갑니다. 길음역 가까이에서 여러 해째 책살림을 이으신다고 했는데, 오늘 알아보았습니다. 천천히 뿌리내리면서 든든히 퍼지는 책빛이 새삼스러운 마을책집입니다.


  책집 골마루를 거닐면서 생각합니다. 말끔이(청소부)가 벼슬(장관·대통령·국회의원)도 맡고, 벼슬꾼이 말끔이를 맡으며, 아이 돌본 아줌마가 벼슬(시장·군수·도지사)을 하고, 벼슬꾼(시장·군수·도지사)이 아이를 돌보면서 조용히 일할 수 있다면, 이런 나라라면 아름다우리라 생각합니다.


  우리가 스스로 손을 쓰면 언제나 스스로 짓고 가꾸어 누립니다. 우리가 스스로 손을 안 쓰면 언제나 남이 시키는 대로 길들어 넋이 나갑니다. 우리 손을 쓰면 살림꾼이라는 길을 가고, 우리 손을 안 쓰면 눈속임꾼(종교 지도자)이 꾀거나 홀리는 대로 길들면서 빛을 잃습니다. 햇살로, 별빛으로, 사랑으로 고스란히 녹아듭니다.


ㅅㄴㄹ


《커피집》(다이보 가쓰지·모리미츠 무네오/윤선해 옮김, 황소자리, 2019.6.25.)

《헌책 낙서 수집광》(윤성근, 이야기장수, 2023.2.8.)

《0원으로 사는 삶》(박정미, 들녘, 2022.10.28.)

《곁말, 내 곁에서 꽃으로 피는 우리말》(숲노래·최종규, 스토리닷, 2022.6.18.)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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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랗게 물결치는 (2022.10.12.)

― 정읍 〈서울서점〉



  미루지 말자고 생각하며 새벽바람으로 광주로 시외버스를 타고 갑니다. 곧장 갈아타서 정읍으로 건너갑니다. 정읍나루에서 내려 시내버스를 살피니 30분 넘게 기다려야 합니다. 새벽부터 다섯 시간 남짓 버스를 탔으니 좀 걷자 싶어 두리번두리번 정읍 곳곳을 구경하면서 〈서울서점〉까지 걷습니다.


  1킬로미터는 꽤 가깝습니다. 100미터를 고작 열 판 가면 됩니다. 2∼3킬로미터도 가깝지요. 동무랑 이야기하노라면 어느새 걷습니다. 혼자 거닐더라도 4∼5킬로미터는 거뜬해요. 달려갈 까닭이 없습니다. 큰길이라면 소릿줄을 귀에 꽂고서 노래를 듣고, 골목길이라면 새가 내려앉고 바람이 흐르는 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


  푸나무도 숲짐승도 겨울에는 두툼히 입고 봄에는 가볍게 벗고 여름에는 새롭게 피어납니다. 비옷을 챙기지 않고 비롤 고스란히 맞아들입니다. 해가림을 안 하고 노상 모든 해를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살아내는 데에 온힘을 쓰면 밤에 깊이 잠들 수 있습니다. 하루하루 살아내기에, 아침을 새롭게 맞이하면서 기운이 솟아요. 빛나는 숨결을 담은 책에는 햇빛이나 별빛이나 빗빛이 부드러이 스밉니다.


  ‘말’이란 ‘마음에 담는 생각을 드러낸 소리’입니다. 말을 배운다고 할 적에는 마음을 소리로 옮겨서 나누는 길을 배운다는 뜻입니다. 요새는 “대화와 소통”이란 어려운 말에 너무 갇히고 기우는데, 막상 우리말이 무엇인지부터 차근차근 익혀 나가고, 우리 낱말책(사전)을 찬찬히 새기는 길을 헤아리면, 어느덧 말을 말답게 다루어 마음을 마음대로 돌보는 길을 열 만하리라 느낍니다.


  이제 〈서울서점〉에 닿습니다. 파랗게 물결치는 하늘이지만 조금 땀이 돋습니다. 책집 할머니는 이제 다리가 몹시 아파서 책집을 못 여는 날이 잦다고, 미리 전화를 하면 열어 주는데, 오늘은 마침 일찍 열었는데 손님이 왔다면서 반기십니다.


  책집 할머니는 책자취(간기)에 붓(연필)으로 책값을 그려 놓았습니다. 미처 그려 놓지 못한 책도 있습니다. 골마루는 안으로 깊고, 안쪽에는 더 안칸이 있고 왼칸에 또 깊숙한 칸이 있습니다. 골목에서 얼핏 보면 그저 작아 보일 수 있으나, 정읍이란 고장에서 책빛을 펴면서 책살림을 일군 손길을 곰곰이 어림할 만합니다.


  나즈막한 자리에서 보는 모습도, 높이 올라가서 보는 모습도, 스스로 눈길을 틔우는 길입니다. 하늘빛을 담는 손도, 살림빛을 추스르는 손도, 붓을 쥐거나 책을 넘기는 손도, 스스로 눈을 밝히는 길이고요.


  알고 싶은 마음이 생기면서 읽고, 읽으면서 넉넉히 피어나는 생각에 즐겁습니다.


《도시락 365日》(민경자 감수, 금성교과서, 1983.1.20.첫/1983.8.25.중판)

《소년소녀 세계명작왕국 16 우리나라 자랑》(이영철 엮음, 진현서관, 1981.5.10.)

《祖國과 함께 民族과 함께》(김대중, 한섬사, 1980.4.1.)

《바웬사》(프랑소와 고/장행훈 옮김, 예조각, 1981.11.10.첫/1981.12.23.2벌)

《實錄 眞相은 이렇다, 惡名높은 金正一의 正體》(김현수·오기완·이항구, 한국교양문화원, 1978.6.23.)

《마추삐추의 山頂》(빠블로 네루다/민용태 옮김, 열음사, 1986.2.20.)

《日本포켓가이드 1989年度》(아키야마 데루지, 재단법인 포린·프레스 센터, 1989.3.30.)

《춤추는 눈사람, 신춘문예 당선작 모음》(편집부, 인간사, 1985.11.25.)

《세일즈맨의 일기》(한상원, 풀빛, 1985.10.30.)

《미완의 귀향일기 상권》(홍동근, 한울, 1988.8.30.)

《이 땅에 살기 위하여》(박석률과 30사람, 녹두, 1989.9.30.)

《바람이 전하는 말》(조용필, 융성출판, 1985.9.30.)

《할아버지의 부엌》(사하시 게이죠/엄은옥 옮김, 여성신문사, 1990.5.10.)

《빛이 내리는 소리》(전원범, 아동문예사, 1976.10.25.)

《무동타는 아이들》(김윤배, 지방시대사, 1989.11.1.첫/1990.2.1.3벌)

《남영동》(김근태, 중원문화, 1987.9.30.첫/1988.6.10.3벌)

《동구 이야기》(김철성, 삼정, 2000.4.22.)

《여성취업과 탁아운동》(편집부, 등에, 1989.7.5.)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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