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랑 놀자 129] 밥아비



  부엌일을 맡아서 하며 밥을 해 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느 때부터인지 부엌일은 가시내만 해야 하는 듯이 여겼기에, 부엌일을 하는 사람을 ‘부엌데기’라 하면서, 밥을 해 주는 사람을 ‘밥어미’라 했습니다. 이를 한자말로는 ‘식모(食母)’라고도 합니다. 오늘날에는 부엌일을 맡아서 하는 사내가 제법 있고, 밥짓기를 즐기는 사내도 차츰 늘어납니다. 그러면, 부엌일을 맡거나 밥짓기를 즐기는 사내를 두고는 어떤 이름으로 가리킬 만할까요? 부엌일을 놓고는 ‘부엌순이·부엌돌이’라 할 만합니다. 밥짓기를 놓고는 ‘밥어미·밥아비’처럼 쓸 만합니다. 밥을 좋아하며 잘 먹는대서 ‘밥순이·밥돌이’라 하는데, 밥을 즐겨 짓는 사람을 놓고도 ‘밥순이·밥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리하여, 나는 곁님하고 아이들한테 밥을 지어 주는 ‘밥아비’나 ‘밥돌이’나 ‘부엌돌이’로 지냅니다. 어른으로서 밥을 지으면 ‘밥어른’이 되고, 아이들이 머잖아 스스로 밥을 지을 수 있다면 ‘밥아이’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4348.6.4.나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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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 없애야 말 된다

 (441) 시간적 1


해수욕도 하려 했었는데 시간적으로 어림없다

《박세욱-자전거 전국일주》(선미디어,2005) 77쪽


시간적(時間的) : 시간에 관한


 시간적으로 어림없다

→ 시간을 따지면 어림없다

→ 시간을 보니 어림없다

→ 시간이 없었다

→ 시간이 안 되었다

→ 시간이 모자랐다

 …



  한국말사전 풀이를 따르면 “시간적으로 어림없다”는 “시간에 관한 어림없다”란 소리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풀이를 해 놓고 보면 어딘가 엉뚱합니다. 아무래도 걸맞지 않다는 느낌입니다. “시간적 배경”이나 “시간에 관한 배경” 모두 어울리지 않고 “시간 배경”이라고 할 때에 비로소 어울린다고 느낍니다. “시간적 순서”나 “시간에 관한 순서” 또한 어울리지 않으며, “시간 순서”라고 적을 때가 가장 어울리는구나 싶습니다.


 시간적 여유가 없다

→ 시간 여유가 없다

→ 여유가 없다

→ 느긋하지 않다

→ 겨를이 없다

→ 틈이 안 난다

→ 짬이 없다

 시간적인 제한이 있다

→ 시간 제한이 있다

→ 시간이 빡빡하다


  곰곰이 헤아려 보면 “시간 여유가 없다”라는 말마디도 어쩐지 어설픕니다. 아무래도 앞뒤가 잘 안 들어맞습니다. 한자말 ‘여유(餘裕)’를 넣어서 어설프기보다는, ‘시간이 넉넉하게 있지 않아 바쁘다’는 뜻과 느낌을 밝힐 적에 한국사람은 으레 “시간이 없다”처럼 말하기 때문입니다. 사이에 꾸밈말을 넣는다면 “시간이 얼마 없다”나 “시간이 넉넉히 없다”처럼 말합니다. “여유가 거의 없다”나 “여유가 하나도 없다”처럼 말합니다.


  그러니까, “시간이 얼마 없다”로 쓰면 손쉽고 수수한 말투인데, “시간 여유가 없다”로 고쳐서 쓰다가 “시간의 여유가 없다”라든지 “시간적 여유가 없다” 같은 말투가 나오는구나 싶습니다. 한자말 ‘여유’를 써서 잘못이 아니요, 한자말 ‘여유’는 안 써야 올바르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한국말 ‘얼마’나 ‘넉넉히’를 뒤로 젖히면서 ‘-의’하고 ‘-적’이 달라붙는 말투가 스멀스멀 나타나고 자리를 차지합니다.


  다시금 곰곰이 헤아려 봅니다. 우리는 지난날에 “그럴 겨를이 없다”나 “그럴 틈이 없다”나 “그럴 새가 없다”나 “그럴 짬이 없다”처럼 이야기를 했습니다. 따로 ‘시간’이라는 낱말을 넣지 않으면서 뜻과 느낌을 알맞게 나타냈습니다. 이제는 누구도 ‘시간’ 같은 낱말은 한자말로 여기지 않고, 이 낱말이 없다면 이야기를 나누지 못한다고 할 만큼 삶터가 달라졌습니다만, 지난날에는 이런 낱말이 없이도 우리 넋과 마음과 생각을 넉넉히 나눌 수 있었습니다. ‘때·겨를·틈·새·틈새·짬·말미’ 같은 낱말을 흐름과 자리에 따라 알맞게 넣으면서 이야기를 하면 됩니다.


 시간적으로 촉박하다

→ 시간이 빠듯하다 / 빠듯하다

→ 시간이 없다 / 겨를이 없다

→ 시간이 모자라다 / (무엇할) 틈이 없다

→ 코앞에 닥치다 / 발등에 떨어지다

 시간적으로 여의치 않은 것으로 결론났다

→ 시간이 되지 않는다고 이야기되었다

→ 시간이 모자라다고 이야기되었다

→ 시간이 없다고 마무리되었다


  찬찬히 짬을 내면서 한국말을 살필 수 있어야 합니다. 넉넉히 말미를 나누면서 한국말을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 한국말을 옳게 가누는지 바르게 추스르는지 알맞게 쓰다듬는지 곱게 매만지는지를 곱씹을 수 있어야 합니다.


  틈을 내고 겨를을 내야 합니다. 차분하게 되짚을 새가 있어야 합니다. 남한테 떠맡기는 말다듬기나 글다듬기로 그쳐서는 안 됩니다. 스스로 깊이 있게 다루는 말이요 손수 갈고닦는 글이 될 때에, 바야흐로 말이 살고 글이 삽니다. 말이 살며 넋이 살고, 글이 살며 얼이 살아날 때에 삶도 꽃처럼 피어납니다. 넋과 얼이 나란히 살 때에 마음이 살고 생각이 살 수 있고, 시나브로 사랑과 믿음이 살 수 있습니다. 사랑과 믿음이 살지 않는다면 참되거나 슬기로운 삶은 뿌리내리지 못합니다. 4339.2.8.물/4343.1.8.쇠/4348.6.2.불.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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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도 들어가려 했는데 시간을 보니 어림없다


‘해수욕(海水浴)’이란 바다에서 헤엄을 치거나 노는 일을 가리킵니다. 그러니, 이 자리에서는 “바다에도 들어가려 했는데”나 “바다에서 물놀이도 하려 했는데”나 “바다에서 헤엄치려 했는데”로 손질해 줍니다.


..


 '-적' 없애야 말 된다

 (1555) 시간적 2


《몽실언니》의 시간적 배경은 한국전쟁 전후이며, 결말 부분에서 30년을 건너뛰며

《선안나-천의 얼굴을 가진 아동문학》(청동거울,2007) 175쪽


 《몽실언니》의 시간적 배경은

→ 《몽실언니》를 쓴 시간 배경은

→ 《몽실언니》를 쓴 때는

→ 《몽실언니》가 다루는 때는

→ 《몽실언니》 이야기가 펼쳐지는 때는

→ 《몽실언니》 이야기가 흐르는 때는

 …



  논문이나 기사나 비평이라고 하는 이름이 붙는 글을 쓰는 분들은 이 보기글과 같은 짜임새에 익숙합니다. “《몽실언니》는 한국전쟁 무렵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며”나 “《몽실언니》는 한국전쟁 때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며”나 “《몽실언니》는 한국전쟁 즈음 삶자락을 보여주는 작품이며”처럼 이야기하는 짜임새에는 익숙하지 않습니다.


  가만히 보면, “《몽실언니》를 쓴 때는”이라든지 “《몽실언니》가 다루는 때”처럼 글을 쓸 수 있고, “《몽실언니》는 한국전쟁 앞뒤를 다루며”처럼 글을 써도 잘 어울립니다. 4343.1.8.쇠/4348.6.2.불.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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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실언니》는 한국전쟁 앞뒤를 다루며, 마지막에서 서른 해를 건너뛰며


“한국전쟁 전후(前後)이며”는 “한국전쟁 앞뒤이며”나 “한국전쟁 즈음이며”나 “한국전쟁 무렵이며”로 손질합니다. “결말(結末) 부분(部分)에서”는 “끝에서”나 “마지막에서”로 다듬고, ‘30년(三十年)’은 ‘서른 해’로 다듬어 줍니다.


..


 '-적' 없애야 말 된다

 (1713) 시간적 3


하지만 꽃의 일부가 살눈으로 변해 종피가 없어 겨울을 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싹이 정상적으로 자랄 시간적 여유가 너무 없어 보여 걱정이다

《주원섭-오늘도 숲에 있습니다》(자연과생태,2015) 68쪽


 정상적으로 자랄 시간적 여유가

→ 제대로 자랄 시간이

→ 제대로 자랄 여유가

→ 제대로 자랄 틈이

→ 제대로 자랄 겨를이

→ 제대로 자랄 수가

 …



  이 보기글에서는 ‘시간’으로만 적거나 ‘여유’로 적으면 됩니다. 또는 ‘틈’이나 ‘겨를’ 같은 낱말을 넣을 수 있고, 이 모두를 덜고 “제대로 자랄 수가”로 적어도 됩니다. 4348.6.2.불.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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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꽃 한쪽이 살눈으로 바뀌어 씨껍질이 없으니 겨울을 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싹이 제대로 자랄 틈이 너무 없어 보여 걱정이다


‘하지만’은 ‘그렇지만’이나 ‘그러나’로 손보고, “꽃의 일부(一部)가”는 “꽃 한쪽이”로 손보며, ‘변(變)해’는 ‘바뀌어’로 손봅니다. ‘종피(種皮)’는 ‘씨껍질’로 손질하고, ‘정상적(正常的)으로’는 ‘제대로’로 손질하며, ‘여유(餘裕)’는 ‘겨를’이나 ‘틈’으로 손질합니다.


(최종규/숲노래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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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  없애야 말 된다

 (650) 전문가적 1


시간성, 기록성 그러니까 무슨 전문가에게나 해당되는 말처럼 들릴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결코 전문가적 입장에서 하는 말이 아니다

《한정식-사진, 예술로 가는 길》(눈빛,2006) 68쪽


전문가적 : x

전문가(專門家) : 어떤 분야를 연구하거나 그 일에 종사하여 그 분야에 상당한 지식과 경험을 가진 사람


 전문가적 입장에서 하는 말

→ 전문가로서 하는 말

→ 전문가들이나 하는 말

→ 전문가 자리에서 하는 말

→ 전문가 눈으로 하는 말

 …



  전문가이면 그냥 전문가입니다. 전문가가 아니라면 그저 전문가가 아닙니다. 뒤에 ‘-적’을 붙일 일이 없습니다. 한국말사전에도 ‘전문가적’이라는 낱말은 안 실립니다.


  전문가는 “전문가로서 말합”니다. 의사는 “의사로서 말합”니다. 농사꾼은 “농사꾼으로서 말합”니다. 저마다 ‘-로서/-으로서’ 말합니다. 또는 “전문가 눈”이나 “전문가 눈길”이나 “전문가 눈썰미”로 말한다고 할 만합니다. 4339.9.14.나무/4348.6.2.불.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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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성, 기록성 그러니까 무슨 전문가한테나 어울리는 말처럼 들릴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조금도 전문가로서 하는 말이 아니다


“전문가에게나 해당(該當)되는”은 “전문가한테나 어울리는”이나 “전문가한테나 걸맞는”으로 다듬고, ‘결코(決-)’는 ‘조금도’로 다듬습니다. ‘입장(立場)’은 ‘자리’로 손볼 만한데, 이 글월에서는 “전문가로서”처럼 손보아도 잘 어울립니다.


..


 '-적' 없애야 말 된다

 (1711) 전문가적 2


레아가 학교에 원고를 제출하기 전에 아빠가 먼저 읽고 문맥을 다듬어 주거나, 전문가적인 조언을 해 준다

《카롤린 필립스/유혜자 옮김-황허에 떨어진 꽃잎》(뜨인돌,2008) 17쪽


 전문가적인 조언

→ 전문가다운 도움말

→ 훌륭한 도움말

→ 멋진 도움말

 …



  전문가는 어떤 일을 잘 알거나 잘 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러니, 전문가는 도움말을 할 적에 훌륭하거나 멋지게 해 주곤 합니다. 이 보기글에서는 아버지가 아이한테 “차근차근 도움말을 들려준다”라든지 “꼼꼼하게 도움말을 해 준다”나 “하나씩 짚으며 도움말을 들려준다”라든지 “알맞게 도움말을 해 준다”처럼 쓸 수 있습니다. 4348.6.2.불.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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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아가 학교에 글을 내기 앞서 아버지가 먼저 읽고 글투를 다듬어 주거나, 도움말을 훌륭히 해 준다


“원고(原稿)를 제출(提出)하기 전(前)에”는 “글을 내기 앞서”로 손질하고, ‘문맥(文脈)’은 ‘글투’나 ‘글흐름’으로 손질하며, ‘조언(助言)’은 ‘도움말’로 손질합니다.


(최종규/숲노래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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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 안 써야 우리 말이 깨끗하다

 (1956) -의 자유 1


대학생이 된 내가 누릴 수 있었던 그나마의 자유는, 그저 20년 동안 공부로 쌓인 것을 다 풀어내겠다는 듯 어른들의 밤거리를 닮은 대학 밤거리에서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것

《김예슬-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느린걸음,2010) 30쪽


 그나마의 자유는

→ 그나마 있던 자유는

→ 그나마 얻은 자유는

→ 그나마 남은 자유는

 …



  “그나마 + 의” 꼴로 쓴 보기글입니다. 이 자리에서는 ‘-의’가 끼어들면서 자유가 ‘그나마 어떻게’ 있는가를 제대로 밝히지 못합니다. 그나마 ‘있던’ 자유일까요, 그나마 ‘얻은’ 자유일까요, 그나마 ‘남은’ 자유일까요? 어느 자유인지 제대로 밝힐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보기글 앞쪽을 보면 “내가 누릴 수 있었던”이라는 말마디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글을 쓴 분은 그나마 ‘누릴’ 자유를 말하고 싶은 셈입니다.


 대학생이 된 내가 그나마 누릴 수 있던 자유는

 대학생이 된 내가 그나마 누린 자유는

 대학생이 된 내가 그나마 자유로운 때는


  ‘그나마’를 임자말 ‘내가’ 다음에 넣거나 글 맨 앞쪽으로 옮겨야 합니다. ‘그나마’를 제자리에 넣지 않은 탓에 그만 “그나마의 자유” 같은 글꼴이 되었습니다. 4343.9.21.불/4348.6.2.불.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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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이 된 내가 그나마 누릴 수 있던 자유는, 그저 스무 해 동안 공부로 쌓인 것을 다 풀어내겠다는 듯 어른들 밤거리를 닮은 대학 밤거리에서 술에 절어 비틀거리는 짓


“20년(二十年) 동안”은 “스무 해 동안”으로 손볼 수 있습니다. “어른들의 밤거리”는 “어른들이 누비는 밤거리”나 “어른들 밤거리”로 손질하고, “술에 취(醉)해”는 “술에 절어”나 “술에 곤죽이 돼”나 “술에 빠져”로 손질하며, “비틀거리는 것”은 “비틀거리기”나 “비틀거리는 짓”으로 손질합니다.


..


 '-의' 안 써야 우리 말이 깨끗하다

 (2261) -의 자유 2


가로수에게도 두발의 자유를

《주원섭-오늘도 숲에 있습니다》(자연과생태,2015) 282쪽


 두발의 자유를

→ 두발 자유를

→ 머리카락 자유를

→ 자유로운 머리카락을

 ¨…



  한자말 ‘두발(頭髮)’은 “머리털”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두발의 자유”라고 하면 “머리털의 자유”인 셈인데, 무엇을 말하려는지 또렷하지 않습니다. “머리털 자유”나 “머리카락 자유”라고도 할 수 있으나, “자유로운 머리털”이나 “자유로운 머리카락”처럼 앞뒤를 바꾸어 적어야지 싶습니다.


 거리나무도 자유롭게 가지를 뻗도록

 길나무도 마음껏 자라도록


  이 보기글에서는 ‘길나무’가 가지를 마음껏 뻗지 못하는 일을 ‘학교에서 학생들 머리카락을 함부로 짧게 치는 일’하고 견주어서 말합니다. 학교에서는 흔히 ‘두발 자유’를 말합니다. 그런데, ‘두발’이라는 한자말은 일제강점기부터 퍼진 낱말입니다. 학교에서뿐 아니라 사회에서도 참다운 자유를 누리도록 하는 길을 헤아리려 한다면, ‘두발’이라는 낱말도 한국말 ‘머리카락·머리털’로 고쳐쓸 수 있어야지 싶습니다. 4348.6.2.불.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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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나무도 마음껏 자라도록


‘가로수(街路樹)’는 ‘가로(街路)’에 심은 ‘나무(樹)’를 가리킵니다. 그러니, ‘길나무’나 ‘거리나무’로 고쳐쓸 수 있습니다. ‘자유(自由)’는 그대로 두어도 되는데, 글흐름을 살펴서 ‘마음껏’으로 손볼 만합니다.


(최종규/숲노래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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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삶 64 자전거



  자전거는 ‘스스로 구르는 바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언제 스스로 구르는가 하면, 내가 발판에 한 발을 디딜 적에 스스로 구릅니다. 그러니까, 자전거는 ‘스스로 구르는 바퀴’이되, 내가 한 발을 발판에 디뎌야 비로소 스스로 구릅니다.


  내 삶은 내가 짓습니다. 그런데, 내가 마음에 아무런 생각을 심지 않으면 나는 내 삶을 못 짓습니다. 내가 내 삶을 지으려면 나는 언제나 맨 먼저 스스로 생각을 품어서 마음에 씨앗으로 심어야 합니다. 이때에 곧바로 내 마음은 내 몸한테 ‘일(놀이)’을 알려줍니다. 내 몸은 내 마음한테서 받은 씨앗(어떤 일이나 놀이를 하라는 뜻)을 받아들여서 곧바로 움직입니다. 내 몸도 자전거와 똑같이 ‘스스로 움직이는 몸’이지만, 마음이 생각을 건네주어야 비로소 ‘스스로 움직이는 몸’이 됩니다.


  자전거는 바람을 가릅니다. 자전거는 바람을 마십니다. 자전거는 바람을 달립니다. 자전거에 몸을 실은 ‘나’는 자전거 발판을 구르면서 어느덧 자전거와 ‘한몸’이 되고, ‘한마음’으로 움직입니다. 이제 나는 스스로 구르는 바퀴요, 스스로 움직이는 몸이며, 스스로 짓는 삶입니다.


  자전거를 달릴 수 있으려면, 두 바퀴로 이 땅에 서야 합니다. 처음에는 새끼 바퀴를 뒷바퀴에 붙일 수 있으나, 이때에는 자전거답게 달리지 못합니다. 아기가 처음에 걸음마를 하듯이, 자전거를 달리기 앞서 새끼 바퀴를 붙여서 ‘걸음마 자전거’로 조금 움직이는 셈입니다. 걸음마를 마친 아기가 걸음을 걷듯이, 새끼 바퀴를 붙인 자전거는 ‘자전거’가 되려고 애씁니다. 마음을 쓰고 몸을 쓰며 기운을 씁니다. 이리하여, 어느 날 비로소 두 바퀴 자전거가 됩니다. 두 발로 이 땅에 우뚝 서서 걷듯이, 걷고 나면 뛰거나 달릴 수 있듯이, 두 바퀴로 오롯이 달릴 수 있는 자전거는, 바야흐로 ‘스스로 구르는 바퀴’로 거듭납니다.


  가만히 선 자전거는 그저 가만히 선 자전거입니다. 가만히 선 자전거는 구르지 않습니다. 생각이 없는 마음으로 사는 사람은 그저 가만히 있는 사람입니다. 생각을 마음에 심어야 꿈이 자랍니다. 꿈이 자라는 마음일 때에 몸으로 할 일(놀이)이 있습니다. 몸으로 할 일이 생길 때에 비로소 사랑스레 하루를 짓습니다. 사랑스레 하루를 지으니 아름다운 삶으로 나아갑니다.


  자전거 발판을 구르면서 바람을 가르고, 바람을 마시면서, 바람을 달립니다. 내 온몸으로 삶을 지으면서 바람을 가르고, 바람을 마시면서, 바람을 달립니다. 바람을 가르며 내가 갈 곳을 찾습니다. 바람을 마시면서 내가 깃들 보금자리를 살핍니다. 바람을 달리면서 내가 지을 꿈을 이룹니다.


  자전거와 함께 살면서 내 몸을 새롭게 바라봅니다. 자전거와 하나되면서 내 마음을 새롭게 가꿉니다. 자전거와 한덩이로 달리면서 내 넋은 싱그러운 바람을 타고 언제나 싱그러이 춤을 춥니다. 4348.3.3.불.ㅎㄲㅅㄱ


(최종규/숲노래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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