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에서 짓는 글살림
21. 막말잔치


  어릴 적에는 “아 다르고 어 다르다”라는 옛말을 잘 못 알아들었습니다. 아무래도 어린이가 이 옛말을 알아듣기에는 어려울 수 있어요. 그러나 조금 더 생각을 기울이면 “바람이 살랑 분다”하고 “바람이 살랑살랑 분다”는 결이 다르니, 아 다르고 어 다른 까닭을 어렴풋이 헤아릴 만하기도 합니다.

  이른바 ‘말맛’입니다. 말끝을 살짝 바꾸면서 말맛이 바뀌어요. 다시 말하자면 말끝마다 말결이 달라 말맛이 다릅니다. 말끝을 바꾸기에 말결이 새롭고 말맛이 살아나면서 말멋까지 생길 수 있어요.

말잔치 : 말로만 듣기 좋게 떠벌리는 일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막말 : 1. 나오는 대로 함부로 하거나 속되게 말함. 또는 그렇게 하는 말 ≒ 막소리

  말을 둘러싼 두 가지 낱말을 헤아려 봅니다. 먼저 ‘말잔치’입니다. 말잔치를 한다고 할 적에는 말로 즐거운 잔치가 아니라 떠벌이기를 가리켜요. ‘잔치’라는 말이 붙는데 뜻은 딴판이지요. 다음으로 ‘막말’을 헤아리면, 마구 하는 말이기에 줄여서 막말이에요. 이때에는 말뜻 그대로입니다.

  자, 그러면 새롭게 생각해 봐요. ‘막말 + 말잔치’로 새말을 엮는다면 어떠할까요? 언제부터인가 ‘막말잔치’라는 말을 쓰는 분이 있어요. 요새는 이 ‘막말잔치’를 무척 널리 씁니다. 아직 사전에 안 실립니다만, 사전에 실리든 말든 사람들은 이 낱말이 매우 어울린다고 여겨서 알맞게 써요.

  ‘끝말잇기’가 있어요. 아이들이 스스로 말을 익히도록 놀이로 삼는 끝말잇기입니다. 끝말잇기처럼 ‘앞말잇기’라든지 ‘샛말잇기(사잇말잇기)’도 할 만해요. 처음에는 ‘말’ 하나였습니다만, 어느새 여러모로 가지를 뻗어요. 말잇기놀이를 더 헤아리면 ‘텃말잇기’도 할 수 있습니다. 아직 텃말잇기를 하는 분을 못 보았습니다만, 표준 서울말 한 마디를 놓고, 다 다른 고장 사람들이 모여서 제 고장 텃말로 외치는 놀이예요. 여러 가지 표준 서울말을 놓고 제 고장 말마디를 얼마나 더 살피거나 헤아려서 말할 수 있느냐로 판가름하는 놀이예요.

  텃말잇기를 해 볼 수 있으면 ‘새말잇기’도 해 볼 만합니다. 아직 한국말로 슬기롭게 옮기지 못한 영어나 일본말이나 중국말을 놓고서, 저마다 한 마디씩 새롭게 한국말로 지어 보는 놀이예요. 반드시 국어순화를 해야 한다는 어깨짐이 아닌, 즐거운 놀이로 새말잇기를 해 본다면 뜻밖에도 무척 어울리면서 아름다운 새말을 얻을 만하지 싶어요.

  다시 ‘막말잔치’로 돌아가 볼게요. 한자말로는 ‘폭언·폭설·언어폭력’을 사람들 나름대로 슬기로우면서 알맞고 재미있게 걸러내거나 새로 지은 말씨가 바로 ‘막말잔치’입니다. 막말을 일삼는 사람을 참으로 부드럽게 나무라면서 ‘막말잔치’ 아닌 ‘꽃말잔치’가 되기를 바라는 뜻을 담았다고도 할 만해요. 참말로 ‘잔치’를 즐겁게 펼 수 있는 말을 하라는 뜻으로 ‘막말잔치’를 그만두라고 지청구를 한달 수도 있지요.

  어느새 새말이 하나 또 태어났습니다. 꽃말잔치. 꽃길을 걷듯 꽃말을 나누는 자리라면 이때에는 잔치라는 이름에 걸맞게 즐거운 꽃말잔치입니다. 더 나아가 ‘웃음말잔치·사랑말잔치·꿈말잔치’ 같은 말을 얼마든지 지을 수 있어요. 그리고 꿈말잔치에서 눈을 번쩍 뜬 이웃님이 있다면 ‘버킷리스트’ 같은 영어를 ‘꿈바구니’나 ‘꿈그릇’이나 ‘꿈꽃’처럼 새롭게 써 볼 만하겠구나 하고 느낄 수 있고요.

  말짓기는 참 쉽습니다.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살림을 짓고 사랑을 짓듯 부드러이 마음을 열면 언제 어디에서나 참하게 어울리는 새말을 지을 수 있습니다.

밤손님 : ‘밤도둑’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 밤손

  온누리 모든 말은 저마다 아기자기하면서 재미있는데, 한국말에서 재미난 대목이 있으니, 바로 ‘밤손님’ 같은 낱말입니다. 훔치는 짓을 일삼는 이를 두고 ‘도둑’이라고만 하지 않고 ‘손·손님’이라고 일컬은 셈인데요, 이 말은 오늘날 삶자리로만 생각해서는 제대로 알 수 없지 싶어요. 왜 그러한가 하면 ‘손’이라는 낱말은 “다른 곳에서 찾아온 사람”을 가리키는 오래된 말이에요.

  밤에 몰래 훔치려고 찾아온 이는, 이곳에 있던 이가 아닌 다른 곳에 있던 사람입니다. 다른 곳에서 이곳에 있는 알뜰한 것을 가로채려는 마음으로 모두 잠든 어두운 때에 찾아오니 ‘밤손’입니다. 게다가 이런 밤손에 ‘-님’을 붙여 ‘밤손님’이라고까지 했으니, 님은 님이로되 반갑지 않은 님이요, 이 반갑지 않은 님이 부디 여기 오지 말거나, 님다운 님이 되기를 바라는 뜻까지 담은 셈이에요.

  밤손님이 밤에만 슬그머니 다녀가는 사람이 되지 말고 떳떳이 얼굴을 드러내어 이웃‘님’이 되기를 바란다고 할까요. 똑같은 사람이지만 밤손님일 적하고 이웃님일 적은 사뭇 달라요.

  우리는 서로 어떤 님이 될 만할까요? 우리는 서로 어떤 님으로 어울릴 적에 즐겁거나 아름다울까요? 어깨동무를 하는 이웃님이 될까요? 목숨앗이 같은 밤손님이 될까요?

  ‘님’은 고이 여기거나 거룩히 삼으려고 할 적에 붙입니다. 상냥하거나 반가운 동무로 삼으려고 하면서도 붙입니다. 귀엽기에 붙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매우 싫거나 얄궂다고 여길 적에 넌지시 붙여요.

  지난날 사람들은 나라를 다스리는 이를 놓고 ‘임금님’이라 불러야 했습니다. 님을 안 붙이고 ‘임금’이라고만 했다가는 끌려가서 볼기를 흠씬 두들겨맞았겠지요. 그런데 아 다르고 어 달라 재미난 한국말인 터라, ‘님’을 살짝 바꾸면 ‘놈’이 되어요. 나라를 슬기롭고 아름다우며 착하게 다스릴 적에는 ‘임금님’일 테지만, 나라를 엉터리로 휘젓거나 윽박지르거나 억누를 적에는 ‘임금놈’이지요.

  어느 모로 본다면 밤손님을 ‘밤손놈’이라 할 수 있었습니다. 이웃에 있는 분이 참으로 못마땅하면 ‘이웃놈’이라 할 수 있어요. 말끝을 살짝 바꾸는데 뜻이며 느낌이 사뭇 달라요. 이른바 ‘진상고객’이라는 요즈막에 새로 생긴 한자말이 있는데, 얼토당토않는 짓을 일삼는 손(손님)이 있다면 이이를 두고 ‘손님’ 아닌 ‘손놈’이라 하면 어울리겠구나 싶습니다.

  곰곰이 살피면 ‘선생님’을 놓고 ‘선생놈’이라 하기도 해요.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모자라거나 엉터리일 적에 이런 이름을 씁니다. 님은 어느 날 놈이 될 수 있습니다. 거꾸로 놈이 어느 날 님이 될 수 있어요.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말은 아주 작은 한 가지 때문에 스스로 높아지거나 낮아질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해요. 아주 작은 곳부터 찬찬히 살피며 아낄 줄 아는 몸짓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아주 작은 곳이라고 업신여길 적에는 바로 놈이 됩니다. 아주 작은 곳을 살뜰히 돌볼 줄 알기에 시나브로 님이 되어요.

  말 한 마디를 어떻게 다스리느냐는, 삶을 어떻게 다스리느냐 하고 맞닿습니다. 작은 말 하나라고 대수로이 여기지 않으면, 우리 삶도 작은 곳을 대수로이 여기지 않는 몸짓이에요. 말 한 마디는 생각 한 줌입니다. 말 한 마디를 슬기로이 다스리면서 생각 한 줌을 슬기로이 다스립니다. 말 한 마디를 알뜰히 가꾸면서 생각 한 줌을 알뜰히 가꾸어요.

  멋모르고 튀어나오는 막말잔치라기보다는, 여느 때에 삶을 마구 부렸기에 드러나는 막말잔치일 테니, 막말은 막삶에서 비롯합니다. 꽃말은 꽃삶에서 비롯할 테고, 사랑말은 사랑삶에서 비롯하겠지요. 넋과 말과 삶이 늘 한줄기인 줄 몸으로 느끼고 마음으로 살펴서 스스로 아름다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2018.4.18.물.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우리 말 살려쓰기/말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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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서 짓는 글살림 
20. 글을 쉽게 쓰면 멋없을까


  말을 하거나 글을 쓰는 뜻을 헤아릴 줄 안다면, 어떤 낱말로 생각을 담아서 이야기를 할 적에 즐거운가를 느낄 만하리라 봅니다. 멋부리고 싶다면 멋있는 말을 찾을 테고, 치레하고 싶다면 치레하는 말을 찾을 테지요. 수수하게 이야기를 하려는 뜻이라면 수수하게 쓸 말을 찾을 테며, 즐겁게 이야기하려는 뜻이라면 즐겁게 쓸 말을 찾을 테지요.

  말에는 두 갈래가 있습니다. 하나는 쉬운 말입니다. 다른 하나는 어려운 말입니다. 다만, 쉽다고 좋은 말이 아니며, 어렵다고 나쁜 말이 아닙니다. 우리한테 낯익기에 쉬울 수 있고, 우리한테 낯설기에 어려울 수 있습니다.

  ‘쟁기’를 모르면 ‘보습’도 모르고 ‘극젱이’도 모릅니다. 이러한 말을 모르면 ‘골’이라고 할 적에 어떤 골을 가리키는지 모르기 마련입니다. 흙말이나 시골말을 모르는 이한테는 쟁기도 보습도 극젱이도 어려운 말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일면적·이면적·양면적·다면적’은 어떠할까요? 이 말씨를 쉽다고 여기는 이는 누구이며, 이 말씨를 어렵다고 여기는 이는 누구일까요?

왜 하는가 (글쓴이)
왜 하는 것인가 (엮은이 손질)

  제가 쓴 글을 받아서 싣는 곳에서 이 글월처럼 으레 고칩니다. 저는 ‘것’을 “네가 찾던 것이 여기 있네” 하고 말할 적에만 씁니다. 다른 자리에는 아예 안 씁니다. ‘것’ 쓰임새가 그렇지요. 아무 곳에나 ‘것’을 집어넣으면 말씨나 글씨 모두 거석합니다. 무엇을 어떻게 말하거나 나타내야 하는가를 잘 살피지 않는 바람에 ‘것’ 말씨가 자꾸 퍼져요. 힘주어 말하려는 뜻이라면 “왜 하고야 마는가”나 “왜 굳이 하는가”나 “왜 애써 하는가”처럼 쓰면 돼요.

집에서 가르쳐야 하는 까닭 (글쓴이)
하우스 트레이닝을 해야 하는 이유 (엮은이 손질)

  저는 영어를 싫어하지 않으나 영어로 얘기해야 할 자리가 아니라면 굳이 안 씁니다. 저는 “집에서 가르치다”라고 말을 하고 글을 씁니다. ‘하우스 트레이닝’이라는 말을 처음 듣고 깜짝 놀랐어요. 어버이로서 아이를 집에서 가르치는 분 가운데 이런 말을 쓰는 분이 참말 있는가 보군요. 또는 고양이나 개를 아끼는 분 가운데 집고양이나 집개를 가르치는 일을 놓고 ‘하우스 트레이닝’이라 말하는 분이 있는가 보네요.

오직 석 줄로 (글쓴이)
단 석 줄로 (엮은이 손질)

  다른 분은 ‘단(單)’을 좋아할는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저는 ‘오직’이나 ‘오로지’를 씁니다. 때로는 ‘꼭’이나 ‘딱’이나 ‘다만’이나 ‘다문’을 씁니다. ‘그저’를 쓰기도 합니다.

가시내 (글쓴이)
여자 (엮은이 손질)

  시골에서는 으레 ‘가시내’라 합니다. 가시내이니 가시내라 하지만, 서울에서는 ‘가시내’라 하면 낮춤말이나 비아냥으로 여긴다고 합니다. 이런 얘기를 듣고 깜짝 놀랐어요. 왜 텃말은 낮춤말이나 비아냥으로 여기고 ‘여자·여성·여인’ 같은 한자말은 아무렇지 않게 여길까요? 그렇다면 ‘사내·머스마’도 낮춤말이나 비아냥말인 셈일까요?

새를 지켜보는 화가 (글쓴이)
화가의 새 관찰일지 (엮은이 손질)

  ‘관찰(觀察)’이라는 한자말은 어른한테 쉬울는지 모르나, 아이들은 좀처럼 못 알아듣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이도 다 알아들을 수 있는 ‘보다·바라보다·살펴보다·지켜보다·들여다보다’를 그때그때 알맞게 골라서 씁니다. 그런데 엮은이는 ‘지켜보다’를 ‘관찰’로 바꿀 뿐 아니라, ‘-의’를 집어넣는 말씨로도 바꿉니다. 왜 이럴까요?

아이한테 이렇게 물어볼까요 (글쓴이)
아이들에게 이런 질문해 볼까요 (엮은이 손질)

  아이를 낳아 돌보거나 가르치는 어른이라면 아이한테 섣불리 ‘질문(質問)’이라는 한자말을 안 씁니다. ‘묻다·물어보다’를 쓰겠지요. 또 아이들한테 ‘여쭈다·여쭙다’를 함께 들려주면서 어른한테 달리 쓰는 말이 있다고 가르치겠지요. ‘밥’하고 ‘진지’처럼 ‘묻다’하고 ‘여쭈다’를 쓰도록 이끌 줄 알아야 슬기로운 어른이 되리라 봅니다.

얼음에 홀로 선 펭귄 (글쓴이)
얼음 위에 홀로 선 펭귄 (엮은이 손질)

  얼음 ‘위’에는 못 섭니다. 왜 그러할까요? 얼음 위는 하늘이거든요. 서려면 ‘얼음에’ 섭니다. 나비가 머리에 앉습니다. 그리고 나비는 ‘머리 위’에서 날아다닙니다. ‘위’라는 말을 영어 ‘on’처럼 아무 데나 붙이면 틀립니다.

청소년이 흔들리는 까닭은 자라고 싶어서 (글쓴이)
청소년들이 흔들리는 까닭은 자라고 싶어서 (엮은이 손질)

  ‘들’을 붙인다고 틀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국 말씨로는 ‘들’을 웬만해서는 안 붙입니다. 저도 말이나 글에서 ‘들’을 거의 안 씁니다. 글쓴이가 틀리게 쓰지 않았다면 엮은이가 섣불리 고치지 않아야 한다고 여깁니다.

새는 집을 놀랍게 짓는다 (글쓴이)
새들이 보여주는 놀라운 건축기술 (엮은이 손질)

  집을 짓습니다. 집을 ‘건축(建築)한다’고 말할 분이 있을까 모르지만, 사람도 새도 집을 ‘짓는다’고 하면 됩니다. 그리고 ‘새’라고만 하면 되어요. ‘새들’처럼 ‘들’을 굳이 붙이지 않아도 됩니다.

이 우산가게는 우산이 조금 남다릅니다 (글쓴이)
이 우산가게의 우산은 조금 특별합니다 (엮은이 손질)

  저는 ‘-의’ 없이 말을 하기에 “우산가게의 우산”처럼 제 글을 함부로 고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특별하다(特別-)’는 ‘다르다’를 뜻할 뿐인 한자말입니다. ‘남다르다’를 애써 한자로 바꿀 일이란 없습니다.

  글을 쉽게 써도 얼마든지 멋있습니다. 텃말로 수수하게 쓰는 글도 얼마든지 곱습니다. 한자말이나 영어여야 멋있어 보인다고 여기면 좀 낡은 생각이리라 봅니다. 다 같이 즐거우면서 쉽게 쓰기를 바라요. 2018.3.14.물.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우리 말 살려쓰기/말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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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서 짓는 글살림
19. 책숲마실


  제가 어릴 적에는 어디를 갈 적에 그냥 ‘간다(가다)’고 했습니다. 그저 갈 뿐이었어요. 옆집에 가든 아랫집에 가든 동무가 사는 집에 가든 늘 간다고 했어요. 학교에도 가고 동사무소에도 가며 작은아버지네라든지 고모네에도 그저 갔습니다. 책방에도 가며 가게에도 가고 기차역에도 갔지요.

  좋아하는 곳이 따로 있어서 찾아간다고 하더라도 저뿐 아니라 둘레에서도 하나같이 ‘간다’고 했고, ‘가자’고 했으며, ‘갈까’ 하고 물었어요.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여행’이나 ‘산책’ 같은 한자말을 쓰는 분이 나타났습니다. ‘여행·산책’ 같은 말을 곳곳에서 쓰며 ‘간다’고 말하는 사람이 부쩍 줄었어요. 그러고 보면 “바람을 쐰다”고도 으레 말했지만, 이 말도 어느새 자취를 감춥니다.

  저는 책방을 매우 사랑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책방을 퍽 자주 갔습니다. 책방을 자주 가니 ‘드나든다’고 이야기하는 분이 있었고, ‘쏘다닌다’라든지 ‘들락거린다’고 이야기하는 분이 있었어요. 저로서는 그냥 ‘갈’ 뿐이지만 ‘드나들다·쏘다니다·들락거리다’라 말하는 분이 있으면 어쩐지 머쓱했습니다. 제가 그렇게 자주 가는가 싶어 돌아보곤 했어요.

  스무 살이 넘은 뒤에도 책방에 늘 갔습니다. 이즈음부터 둘레에서 저한테 하는 말이 살짝 달라져요. ‘책방 순례’를 한다거나 ‘책방 여행’을 한다고 말하는 분이 생기더군요. 때로는 ‘책방 투어’라든지 ‘북스토어 투어’를 한다고 말하는 분이 있어요.

  깜짝 놀라서 손사래를 쳤습니다. “아니요, 아니라구요. 저는 책방에 그저 ‘갈’ 뿐입니다. 책방에서 저를 부르는 책이 있고, 저 스스로 배울 책이 많아서 책방에 즐겁게 ‘갈’ 뿐이에요.” 하고 말했어요. 그러나 제가 하는 말, “책방에 ‘간다’”를 고스란히 받아들이는 분이 거의 없었습니다. 저로서는 퍽 거추장스러운 ‘순례·산책·여행·투어·답사’를 쓰고 싶지 않은데, “책방에 간다”를 수수하게 받아들이지 못하시는구나 싶어서 몇 가지 말을 지어 보았습니다.

 책방 나들이, 책방마실

  ‘나들이’하고 ‘마실’을 함께 썼어요. ‘나들이’는 세 글씨라 아무래도 “책방 나들이”처럼 띄어야 제맛이라고 느끼고, ‘마실’은 두 글씨라 “책방마실”처럼 붙여도 좋겠구나 싶었어요. 책방을 즐겁게 자주 다닌다면 ‘책방마실’이라 하고, 차 마시기를 좋아하면 ‘찻집마실’이라 할 만하며, ‘산마실·들마실·바다마실·일본마실·섬마실·제주마실·서울마실’처럼 쓸 수 있겠다고 여겼습니다.

  어느덧 ‘책방마실’이라는 이름을 써 본 지 스물다섯 해쯤 되는구나 싶어요. 2018년 1월에 강원도 춘천으로 책방마실을 다녀오는데, 춘천 어느 마을책집에 “싸목싸목 책방마실”이라는 이름이 붙은 알림종이가 있습니다. 전라도 광주에 있는 마을책방으로 싸목싸목 즐겁게 마실해 보자는 이야기를 담은 종이입니다. 깜짝 놀랐어요. 저는 스무 해 넘게 ‘책방마실’이라는 이름을 씁니다만, 이 이름을 곱게 여겨 받아들이는 분은 드문드문 보았거든요. 그런데 이 이름을 광주시에서 덥석 받아안아서 쓰네요.

  책방을 마실하자는 이야기를 공공기관 알림종이로 만나니 싱숭생숭했습니다. 놀랐습니다. 반가우면서 아리송했습니다. 그리고 이 이름 ‘책방마실’을 널리 받아들여 퍼뜨리기까지 스물다섯 해 즈음 걸렸네 싶어 새삼스러웠습니다. 더디다 싶더라도 때가 무르익으면 얼마든지 고이 품어 주는구나 싶었어요. 이러면서 생각을 하나 더 해 보았습니다. 둘레에서 아무도 ‘책방마실(책방 + 마실)’이라는 이름을 안 쓰던 무렵, ‘서점순례’나 ‘북스토어투어’나 ‘서점산책’이나 ‘북투어’ 같은 말만 쓴 지난날 ‘책방마실’이라는 이름을 혼자서 투박하게 써 왔다면, 이제 이 이름은 이웃 여러분이 쓰라고 내려놓고서 제 나름대로 새 이름을 지어서 쓸 수 있겠구나 싶어요.

  책숲마실, 책집마실

  여러 해 앞서부터 ‘책숲마실’이라는 이름을 곧잘 씁니다. 우리가 읽는 모든 책은 숲에서 옵니다. 책을 빚는 종이는 나무요, 책종이로 삼는 나무는 우거진 숲에서 자라요. ‘책 = 종이’라 할 수 있기에 ‘책숲마실’이라 할 만합니다. 더 헤아린다면 ‘책 = 숲’이니, ‘책집마실(책방마실) = 숲마실’이라고 할 수 있어요. 책을 손에 쥐는 우리는 숲을 마실하듯 삶을 읽고 사람과 살림과 사랑을 읽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리하여 책을 고이 갖춘 가게는 ‘서점·책방’이라는 이름이지만 ‘책숲’이나 그냥 ‘숲’이라고만 해도 되리라 여겨요. 이러면서도 나무가 아름다운 숲하고 다르게, 나무한테서 얻은 고마운 종이로 지은 책을 살뜰히 갖춘 곳(집)을 찾아갈 적에는 따로 ‘책숲마실’이나 ‘책집마실’ 같은 이름을 써도 어울리고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이 대목에서 저는 한 가지를 더 생각해요. 저는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을 꾸리기에, ‘도서관’이라는 이름을 한결 살뜰하면서 포근하게 가리키고 싶은 마음이기도 합니다. ‘책 = 숲’이라면, 숲이 깃든 집이면서, 숲이라는 책을 더 아끼려는 집이라면, 도서관을 ‘책숲집’이라고 가리키면 어떠할까 싶더군요.

  여느 책집은 책을 사고파는 구실을 맡으면서 꾸준히 새로운 책이 드나듭니다. 도서관은 책을 고이 건사하면서 두고두고 읽는 자리로 제구실을 합니다. 그래서 ‘책방 = 책집’으로, ‘도서관 = 책숲집’으로, 제 깜냥껏 새롭게 이름을 붙여 보고, 책방이나 도서관을 마실할 적에는 ‘책집마실·책숲마실’ 같은 말을 붙여 봅니다.

  여러모로 이웃님한테 낯설 수 있고, 좀 엉뚱한 이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제가 가꾸는 살림을 돌아보면서 늘 새롭게 이름을 지으려 합니다. 다달이 받아서 읽는 잡지를 ‘월간잡지’라 하기보다는 ‘달책’이라는 이름을 저 혼자서 써 봅니다. 철마다 받아서 읽는 잡지는 ‘계간잡지’ 아닌 ‘철책’이라는 이름을 저 혼자서 써 봐요.

  숲을 사랑하는 책이라면 ‘숲책(←환경책)’이라고 해 봅니다. ‘살림책(←육아서)’이나 ‘밥책(←요리책)’이나 ‘이야기책(←에세이)’이나 ‘글책(←문집, 논문)’ 같은 이름도 붙여 봅니다.

  예전에는 ‘책방 사장님’이라고 말했으나 요새는 ‘책방지기’나 ‘책방지기님’이라고 써요. 그러고 보면 이 이름도 ‘책집지기·책숲지기’라 바꾸어 볼 수 있네요. 저는 ‘출판계’ 아닌 ‘책마을’을 말하고 싶으며, 책마을에서 책을 펴내는 분들한테 ‘책지기(출판사 직원)’라는 이름을 붙여 주고 싶어요.

  책을 쓰는 이웃님이라면 ‘책쓴이(←필자·작가·저자·저술가)’라는 이름을 쓰고 싶습니다. 책을 쓰거나 책집·책숲집을 가꾸는 분은 ‘책길’을 걷는구나 싶고, ‘책넋’을 가꾸는 아름다운 일을 즐겁게 하는 ‘책벗’이자 ‘책동무’라고 느낍니다.

  책을 한껏 펼치기에 ‘책마당’입니다. 책으로 노래하고 춤추고 웃고 어우러지기에 ‘책잔치’입니다. 책을 이야기하는 자리는 ‘책수다’나 ‘책노래’라 할 만하고, 책을 놓고 조곤조곤 이야기를 펼치니 ‘이야기꽃’을 연다고 느낍니다. ‘책밭’을 저마다 알뜰히 가꾸면서 아름다운 ‘책터’를 지어요. 이 땅에 꼭 책만 있을 까닭은 없으나 때로는 ‘책나라·책누리’가 될 수 있겠지요. 책집지기도 책숲지기도 책지기도 ‘책살림’을 여밉니다. 우리는 다같이 ‘책읽기’를 누립니다. 좋다고 여기는 책을 돌려읽으면서 ‘책나눔’을 하고, ‘책고을’이나 ‘책고장’도 하나둘 태어나요. 책을 아주 잘 아는 슬기로운 분이 있다면 ‘책님’이지 싶고, 아이들은 ‘책순이·책돌이’가 되어 ‘책꿈·책사랑’을 키웁니다.

  책으로 길을 열고, 책으로 숨을 틔우며, 책으로 배우기에 ‘책꽃’이 됩니다. ‘책나무’가 서고 ‘책씨’를 심으며 ‘책바람’이 불어요. 광주 이웃님이 문득 받아들여서 써 준 ‘책방마실’이라는 이름이 고운 징검돌이 되어 새로운 ‘책말’이 무럭무럭 자라나면 좋겠습니다. 2018.2.19.달.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말넋/말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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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서 짓는 글살림

18. 번역 말씨는 한국 말씨인가?



  제가 쓴 글을 받아서 신문이나 잡지에 싣는 곳에서 더러 글이름이나 글줄을 고칩니다. 그런데 글이름이나 글줄을 고치면서 고쳤다고 알리지 않기 일쑤입니다. 나중에 신문이나 잡지를 보면서 깜짝 놀라요. 저는 틀림없이 이렇게 안 썼으나 그곳 엮은이가 고쳤거든요.


  한국말을 한국말답게 가다듬거나 살피는 길을 걷는다는 사람으로서 엉뚱하거나 엉성한 글이 제 이름을 달고 나오면 매우 부끄럽습니다. 비록 제가 그렇게 안 썼다고 하더라도, 신문이나 잡지 엮는이가 한국 말씨를 제대로 짚지 않고서 고쳤으니 부끄럽지요. 그 엮는이는 틀림없이 다른 분 글도 엉뚱하게 고치겠지요. 이러면서 얄궂은 번역 말씨는 끝없이 퍼질 테고요.


  엮는이는 엮는이 나름대로 알맞게 고쳤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멀쩡한 글을 번역 말씨로 고친다거나, 입으로 말하듯이 썼는데 딱딱하게 고친다거나, 쉽게 쓴 글에 한자를 입힌다면 좀 따질 노릇이라고 봅니다.


쓰레기를 생각해 본 적 있나 (글쓴이)

쓰레기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있나 (엮는이 손질)


  “-에 대(對)해”나 “-에 관(關)해”는 번역 말씨입니다. 영어 ‘about’을 이 두 말씨로 옮기는 분이 많은데, 이는 알맞지 않아요. 자리에 따라 다르게 옮겨야 할 ‘about’인데 웬만한 자리는 ‘-을/-를’로 옮겨야 알맞습니다. 때로는 “-과 얽혀/-을 놓고”로 옮기지요. “-란 무엇인지”나 “-를 얼마나”로 옮길 수 있어요.


아이한테 말하다 (글쓴이)

아이에게 답하다 (엮는이 손질)


  저는 ‘-에게’라 글을 쓰지 않습니다. 글에서든 말에서든 늘 ‘-한테’만 써요. ‘-한테’는 입말이요 ‘-에게’는 글말이라고 사전풀이에 나옵니다만, 썩 알맞지 않은 풀이라고 느낍니다. 우리는 말하는 대로 글을 쓰면 됩니다. 광주사람이 서울말로 글을 쓸 까닭이 없고, 강릉사람이 굳이 서울말로 말을 할 까닭이 없습니다. 고장마다 즐겁게 고장말로 글을 쓰면 되듯, 입말·글말을 따지지 말고 부드러이 말하면 됩니다.


  제가 ‘-한테’로 쓰는 말글을 엮은이가 ‘-에게’로 고치는 몸짓이란, 고장말을 얕보거나 사람마다 달리 쓰는 말씨를 깔보는 셈이라고 볼 만하지 싶어요. ‘-한테’가 틀린 말이 아닌데 고치니까 말이지요. 오히려 ‘-에게’를 ‘-한테’로 고치면서 글도 한결 부드러우면서 술술 읽히도록 하는 길이 나을 수 있습니다.


어린 날 (글쓴이)

어린 시절 (엮는이 손질)


  저는 ‘시절(時節)’이라는 한자말을 안 씁니다. 쓸 까닭이 없다고 여깁니다. 제가 쓰는 말은 ‘날·나날·때·적·철·즈음·무렵·쯤’ 들입니다. 자리에 맞추어 알맞게 낱말을 골라요. “어린 날”을 왜 “어린 시절”로 고쳐야 할까요? 거꾸로 “어린 시절”을 “어린 날”이나 “어릴 적”으로 고쳐야 알맞을 텐데요.


해마다 천 권 (글쓴이)

매년 천 권 (엮는이 손질)


  제가 쓰는 말은 ‘날마다·주마다·달마다·해마다’입니다. ‘사람마다·책마다·마을마다’입니다. ‘매일(每日)·매주(每週)·매월(每月)·매년(每年)’을 구태여 써야 할까요? 한국말 ‘-마다’가 있는데 왜 꼭 ‘매(每)-’에 매달려야 할까요? 한자 ‘각(各)’도 ‘-마다’를 가리키는데, 이를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면 “각 개인마다” 같은 겹말을 쓰지요.


누군가 울거든 (글쓴이)

누군가 울고 있거든 (엮는이 손질)


  말끝에 ‘있다’를 붙이면 겹말이자 일본 번역 말씨입니다. 일본사람은 영어 현재진행형을 ‘중(中)’이라는 한자로 옮겼고, 이를 지식인이 일제강점기에 ‘작업중·취침중·공부중·수업중’처럼 껍데기만 한글인 말씨로 받아들였어요. 이러다가 “작업하는 중”이라든지 “작업하고 있는 중” 같은 겹말이 번지기도 했다가 ‘중’을 ‘가운데’로 옮긴 “작업하고 있는 가운데”나 “작업하는 가운데” 같은 엉성한 말씨가 생기기까지 했습니다.


  한국말로는 “일하면서”나 “일하며”입니다. 한국말은 여느 말씨로도 ‘현재형·현재진행형·과거형’까지 모두 나타냅니다. 한국말은 말끝에 다른 말을 안 붙이고 결이나 흐름을 살펴서 때매김을 가릅니다. 이러한 한국 말씨를 헤아리지 않는 “-고 있다”는 찰거머리처럼 사람들 입에 들러붙고 말았는데요, 영어를 가르치는 자리에서도 자꾸 잘못 가르치고, 한국말로 문학을 하거나 여느 글을 쓰는 분마저 제대로 살피지 않는 탓에 끝없이 퍼지지요.


요가를 한다 (글쓴이)

요가를 하는 중이다 (엮는이 손질)


  저는 “한다”라고만 말합니다. “하고 있다”도 “하는 중이다”도 “하는 가운데이다”도 “하고 있는 중이다”도 “하고 있는 가운데이다”도 안 씁니다. “한다”처럼 짧게 끊으면 될 말에 군더더기를 늘어뜨리지 않아요.


  우리가 글쓰기나 말하기에서 헤아릴 대목이 있습니다. 군더더기를 붙이는 일은 멋이 아닙니다. 글맛이나 말맛을 더해 주지도 않습니다. 한국말은 군더더기 아닌 꾸밈말을 넣으면서 새롭고, 말끝을 살살 바꾸면서 즐겁습니다. “요가를 즐겁게 한다”나 “요가를 고요히 한다”처럼 꾸밈말을 넣어요. “요가를 하지”나 “요가를 하네”나 “요가를 하는군”이나 “요가를 하더라”나 “요가를 한단 말이다”처럼 말끝을 바꿉니다.


우리가 잘 모르는 온갖 버섯 이야기 (글쓴이)

당신은 잘 모르는 버섯의 모든 것 (엮는이 손질)


  저는 “온갖 버섯 이야기”라고 적었습니다. ‘온갖’을 덜고 “버섯 이야기”라고만 적어도 됩니다. 이를 일본 말씨 ‘-의’를 넣어 “버섯의 모든 것”이라고 고쳐야 할는지 아리송합니다. ‘-의’를 넣는대서 뜻이 살아나지 않고, 글이 멋있지 않습니다. 그저 일본 말씨일 뿐입니다.


  저는 ‘우리’라고 말을 했는데, 엮는이는 ‘당신(當身)’이라는 한자말로 고쳤습니다. 저는 한자말 ‘당신’을 안 씁니다. 저는 ‘이녁’이라 하거나 ‘너·자네·그대·너희’ 같은 한국말을 써요.


  잘 모르거나 잘못 알아서 틀리게 쓴 곳이 있다면 얼마든지 고쳐야지 싶습니다. 그러나 멀쩡한 글은 멀쩡하게 살릴 노릇이라고 봅니다. 아무리 번역 말씨가 널리 퍼지더라도 글쓴이나 엮는이나 교사나 교사나 지식인은 한국 말씨가 무엇인가를 찬찬히 돌아보고 곰곰이 되짚으면서 하나하나 새로 배우는 마음이 되어야지 싶어요. 2018.1.14.해.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우리 말 살려쓰기/말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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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서 짓는 글살림 
17. 다람쥐를 다람쥐라 못하다


  2017년 가을께 전남 고흥군 고흥읍에 있는 시외버스역 뒷간에 ‘아짐찬하요’라는 글월이 붙었습니다. 뭔 뜬금없는 글월인가 하고 쳐다보니, 사내들이 오줌을 눌 적에 한 걸음 가까이 다가서면 ‘아짐찬하다’는 소리입니다. 다만, 고흥 바깥 전라말로는 ‘아심찬하다’로 씁니다.

  흔히 전라사람은 뭔 말을 할라치면 ‘거시기하다’라 한다고들 합니다. 고흥에서는 ‘거시기하다’라고는 거의 안 쓰고 ‘거석하다’라고 합니다. 사전을 살피면 ‘거석’을 경남말로만 다루는데, 경남말로만 여겨도 될까 아리송합니다.

  그리고 ‘거시기하다’는 전라말이기만 하지 않습니다. 온나라에서 두루 쓰는 말입니다. 고흥에서 흔히 쓰는 ‘거석하다’를 놓고 사전은 ‘거식하다’라는 표준말을 싣기도 합니다.

  더 헤아려 보면 ‘머시기’라는 말이 있고, 뭔가 뭉뚱그려서 말하는 자리라든지 또렷하게 안 떠오르지만 나타내고 싶은 말이 있을 적에 ‘무엇’이나 ‘거기’나 ‘그것’이나 ‘것’이나 ‘거’를 쓰곤 합니다. 고장마다 말씨가 살짝 다를 수 있어도 마음은 같을 터이니, 엇비슷한 말이 감칠맛나게 태어나고, 이런 감칠맛나는 말이 삶이나 넋을 한결 북돋아 주지 싶습니다.

mouse : 1. 쥐, 생쥐 2. [컴퓨터] 마우스
마우스(mouse) : [컴퓨터] 컴퓨터 입력 장치의 하나

  요즈음 셈틀을 안 쓰는 사람은 없다시피 합니다. 시골 할매나 할배를 뺀다면 참말로 거의 모든 사람이 셈틀을 씁니다. 셈틀을 쓸 적에는 두 손으로 글판을 두들길 테고, 한 손으로 작고 둥그스름한 뭔가를, 머시기를 쥐기 마련입니다. 이 머시기를, 또는 거시기를 뭐라고 할까요? 아니, 뭐라고 이름을 붙이면 어울릴까요?

  영어 이름 그대로 ‘컴퓨터’를 받아들인 이들은 ‘마우스’라는 영어를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글을 치는 판을 놓고도 처음에는 ‘키보드’라는 영어를 그대로 받아들이더니, 요새는 ‘자판(字板)’이라는 한자말로 조금 손질해서 쓰곤 합니다.

  먼저 ‘판’을 놓고 여러 가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를 ‘윷판’ 같은 자리에서 쓰는 한국말 ‘판’을 받아들여, 글쓰기에서 새로운 자리를 여는 뜻으로 ‘글판’이라 해 볼 만합니다. 꼭 한자 ‘판(板)’만 써야 하지 않습니다.

  다음으로 ‘셈틀’을 헤아려 봅니다. ‘셈 + 틀’입니다. 베틀이나 재봉틀처럼 사람이 손으로만 일하기에는 살짝 벅차서, 좀 수월하게 일할 수 있도록 마련한 연장을 ‘틀’이라 해요. ‘셈’은 ‘생각’하고 뿌리가 같은 낱말이고, ‘세다(셈)’는 ‘헤다(헤아리다)’하고 뿌리가 같습니다. 컴퓨터라는 기계는 2진법으로 움직여요. 다시 말해서 2진법 숫자(세다) 얼거리요, 생각을 넓히는(헤다) 틀거리입니다. 이런 짜임새와 구실을 돌아볼 수 있다면 ‘셈틀’이란 낱말은 참으로 멋지고 알맞습니다.

  이다음으로 ‘마우스’를 살필게요. 영어사전을 살피지 않더라도 영어 쓰는 나라에서는 생쥐도 ‘마우스’요, 셈틀을 다룰 적에 손에 쥐는 거시기도 ‘마우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생각해 보아야지요. 생쥐이든 쥐이든 다람쥐이든 숲이나 들이나 구멍에서 사는 짐승도 온갖 ‘쥐’요, 셈틀을 다루면서 곁에 두는 머시기도 ‘쥐’라 할 만합니다. 그냥 ‘다람쥐’를 움직여 셈틀을 다룬다고 해도 됩니다. 또는 ‘다람이’라는 이름을 써도 되고, ‘잡이쥐(잡고 쓰는 연장이되 쥐처럼 생겼다는 뜻)’라 한다든지 ‘셈쥐(셈틀을 다룰 적에 쓰는 연장이되 쥐처럼 생겼다는 뜻)’라 한다든지 ‘손쥐(손으로 쥐고 움직여 셈틀을 쓰도록 하는 연장이되 쥐처럼 생겼다는 뜻)’ 같은 새말을 빚을 만해요.

  모두 생각하기 나름입니다. 영어로 ‘마우스’가 두 가지를 가리키듯, 한국말로 ‘다람쥐’가 두 가지를 가리켜도 즐겁습니다. 또는 한국사람 나름대로 슬기를 뽐내어 새로운 낱말을 지어도 즐거워요.

  전주마실을 하던 얼마 앞서 문득 “‘이무로운’ 사이”라는 말이 귓등을 스칩니다. 곁에 앉은 분들이 이야기를 하다가 서로 이 말을 쓰는데, 이제 전라살이 여덟 해쯤 되는 저한테는 낯설면서 낯익은 말입니다. 제가 나고 자란 곳은 인천 바닷가라서 ‘이무롭다’라는 말을 들을 적마다 어쩐지 ‘이물·고물’이 퍼뜩 떠오르지만, ‘무르다’라든지 ‘물’이라는 낱말도 함께 떠오릅니다. ‘허물없다’라든지 ‘사이좋다’라고만 하기에는 살며시 결이 다른 ‘이무롭다’를 혀에 얹으면서 새삼스럽네 싶습니다.

  마치 ‘살갑다’하고 ‘슬겁다’가 뜻으로는 같다고 하더라도 결로는 달라서 혀에 감기는 이야기가 가만히 벌어지는 느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나라나 겨레도 매한가지일 텐데, 영어라면 o 다르고 i 다르다 할 테고, 한국말에서는 아 다르고 어 다르다 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쓰는 말은 품사나 맞춤법이나 문법이라는 이름으로는 가르거나 따질 수 없는 남다른 맛이 있어요. 서양 말법에 맞추어 과거형이나 현재진행형이나 동사나 형용사를 잘게 따져서는 말맛을 살리지 못한다고 할까요. 한국말은 예부터 임자말하고 꾸밈말하고 풀이말, 이렇게 크게 세 갈래로 나누던 말이기에, 이러한 결에 따라 이야기꽃을 살릴 적에 아이도 어른도 말을 한결 푸근하면서 무던히 익히거나 주고받을 만하지 싶습니다.

  이를테면 ‘자장면’이라 한들 ‘짜장면’이라 한들 대수롭지 않습니다. 저는 아이한테도 이웃한테도 ‘짜장국수’라고 말합니다. ‘냉면’이란 말도 잘 안 써요. 저는 ‘찬국수’라고 합니다. 예부터 한국사람이 즐겨먹은 국수라면 ‘잔치국수’라는 이름이 있지요. ‘막국수’란 두 가지로 읽힐 수 있는데, 하나는 투박하게 삶은 국수라면, 다른 하나는 이제 갓 삶은 국수입니다. 그래서 막걸리도 이처럼 ‘투박하게 거른 술’ 하나하고 ‘이제 바로 거른 술’ 두 가지로 읽을 만합니다. 왜 그러한가 하면, 술이란 빨리 삭이지 못하는 마실거리이거든요. 마실 술이 되려면 꽤 오래 기다려야 하는데 막걸리는 그리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마실 수 있어요.

  어쩌면 ‘막-’이라는 낱말은 투박한 맛하고 이제 바로 담근 맛을 아우르는 낱말이라고 할 만합니다. 그래서 ‘막’하고 ‘갓’은 서로 쓰임새가 아주 부드러우면서 새삼스레 갈릴 테고요.

  이 대목까지 생각줄을 이었으면 바야흐로 새롭게 말 몇 가지를 짓는 길을 열 수 있습니다. ‘막국수’에다가 ‘갓국수’를 쓸 수 있습니다. ‘갓’이라는 낱말은 투박한 결까지 담지는 않으니 ‘갓국수’라고 하면 그야말로 이제 바로 건진 뜨끈한 국수만을 나타낼 이름이 됩니다. 술을 놓고는 ‘갓술’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갓 지은 밥이라면 ‘갓밥’입니다.

  생각을 하기에 새로운 살림을 가꿉니다. 생각을 하지 않으면 남이 시키는 일만 하기 마련입니다. 생각을 스스로 하려 하지 않으면, 남이 시키는 일만 할 뿐 아니라 모든 살림을 돈으로 사다가 쓰는 얼거리가 됩니다.

  남이 시키는 일만 해도 나쁘지는 않고, 모든 살림을 돈을 치러 사다가 써도 나쁘지는 않습니다. 다만, 이때에는 나다움이란 없기 마련이에요. 남이 시키는 일만 할 적에 나다움이란 없지요. 공장에서 똑같이 찍은 것을 돈으로 사다가 쓰는데 나다움이 싹틀 자리란 없어요.

  ‘나다움’은 ‘아름다움’하고 이어집니다. 우리가 뭔가 보고서 아름답다고 느낀다면, 이 아름다움이란 ‘바로 그곳(거기·거시기)에만 있는 멋’을 느꼈다는 뜻입니다. “거시기 잘 모르겠지만 아름답네” 하고 느낄 적에는 스스로 새롭게 길을 열면서 환하게 웃음짓는 모습이라는 뜻이에요.

  아이들한테 맞춤법이나 띄어쓰기를 가르치기 앞서, 아이들이 저마다 ‘아이다움’을 살릴 수 있도록 마음을 북돋우고 가꾸는 길을 보여주면 좋겠습니다. 우리 어른들도 스스로 새롭게 생각하고 하루를 짓는 즐거운 노래를 부르면 좋겠습니다. 고장말이란, 사투리란, 텃말이란, 스스로 제 보금자리를 새롭게 짓는 사람이 저마다 손수 지은 즐거운 말입니다. 2017.12.18.달.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우리 말 살려쓰기/말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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