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군내버스에서 읽은 책 2017.12.12.


보성중학교에 가려고 새벽길을 나선다. 서울 같은 고장은 어떠할는지 모르겠는데, 보성이나 고흥 같은 시골에서는 작은 중학교 푸름이한테 ‘시골에 살며 여러 갈래에서 일하는 어른’이 직업적성 길잡이 노릇을 하기도 한다. 나는 시골에서 살며 한국말사전을 새로 짓는, 참으로 한국에서 드문 일을 하는 터라, 시골 푸름이한테 좀처럼 느끼거나 생각하기 어려운 일을 왜 어떻게 하는가 하는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다. 생각해 보면 이런 이야기는 시골 푸름이뿐 아니라 서울 푸름이도 듣기 어렵겠지. 아마 나중에는 서울 같은 큰도시에서도 나를 불러서 ‘한국말사전을 짓는 일이란 무엇이고, 우리도 이런 일을 할 수 있나요?’ 하고 물을는지 모르겠다. 오늘은 보성에서 푸름이를 만난 뒤에 광주를 거쳐서 서울로 가려 한다. 한번 바깥일을 나오려면 길에서 꽤 오래 지내야 하기에 한 가지 일만 보고 들어가자면 하루가 다 가고 만다. 가방에 시집이며 책을 잔뜩 챙겼다. 이 가운데 황선하 님이 쓴 《이슬처럼》을 맨 먼저 읽는다. 아직 해가 뜨지 않아 시린 들녘에서 군내버스를 기다리며 읽는다. 경상도 작은 마을에서 나고 자라서 경상도 작은 마을에서 푸름이를 가르치는 일을 하면서 시를 썼다는 황선하 님은 꽤 느즈막히 첫 시집을 냈다고 한다. 살짝 투박한 멋이 흐르면서도, 가만히 이 땅을 보듬고픈 따스한 숨결이 흐르는 시로구나 싶다. 하늘을 좋아하는 마음을 시에 담고, 하늘바라기를 하는 나무를 좋아하는 마음을 시에 담네. 하늘바라기를 하는 나무를 좋아하는 아이를 즐겁게 웃으며 지켜보는 눈길을 또 시에 담고. 어쩌면 시란 하늘바라기를 하는 살림에서 태어난다고 할 만하다. 참으로 시란 사랑바라기를 하려는 포근한 흙내음에서 비롯한다고 할 만하다.


(숲노래/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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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군내버스에서 읽은 책 2017.12.11.


녹동에 다녀오기로 한다. 곁님이 물고기살을 먹고 싶다 한다. 아이들은 아직 물고기살을 날것으로는 안 먹는다. 그렇지만 버스를 갈아타고 녹동 바닷가에 다녀오려고 생각한다. 바람이 드세게 부는 아침에 고흥읍으로 간다. 마침 바로 녹동 가는 버스가 들어온다. 도양우체국에 들러서 책을 부치고 녹동 바닷가에서 고기잡이배를 구경한 뒤에 횟집 한 곳을 골라서 들어간다. 아이들은 배가 고팠기에 이것저것 집어서 먹기는 하되 물고기살은 씹기가 힘들다며 안 먹는다. 새우도 해삼도 멍게도 소라도 굴도 조개도 낙지도 …… 다 안 먹다가, 마지막에 말갛게 끓인 국은 흰밥을 말아서 먹는다. 한 그릇 반씩. 다시 바닷바람을 쐬고 고기잡이배를 구경한 다음, 아까하고 거꾸로 버스를 갈아타서 집으로 돌아온다. 아침 열한 시에 길을 나서서, 저녁 네 시에 집으로 돌아왔다. 같은 고흥군에서 움직였는데 다섯 시간을 길에서 보냈네. 시골에서 횟집 다녀오기란 이렇게 품이 드네. 그래도 이동안 《만족을 알다》를 찬찬히 읽을 수 있었다. 오늘은 군내버스만 네 차례 탔으니. 《만족을 알다》는 옛날 일본이 얼마나 흙을 알고 사랑하면서 가꾸었나 하는 이야기를 글하고 그림으로 꼼꼼히 짚어서 보여준다. 더욱이 이런 이야기를 일본사람 아닌 미국사람이 적었다. 한국에서는 한국 옛살림을 이렇게 꼼꼼히 밝혀서 글하고 그림으로 살려낸 책이 있던가? 대단히 부끄러우면서 여러모로 배울 대목이 많은 알찬 책이다. 스스로 삶을 짓는 사람들 이야기가 고이 흐르는 이런 책을 여밀 줄 아는 일본은 훌륭하다. 생각해 보라, 조선왕조실록 같은 책에 ‘자급자족을 하는 삶이나 살림’이 한 줄이라도 나오는가? 우리가 쓸 책이나 읽을 책이란 무엇인가?


(숲노래/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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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마당에서 읽은 책 2017.12.10.


어젯밤에는 그냥 잤다. 개수대에 가득한 빈 그릇을 보고서 설거지를 할까 살짝 생각하다가 그만두었다. 이 빈 그릇을 쓴 사람 가운데 누구라도 설거지를 하기를 바라 보았다. 새벽이 되어 부엌을 들여다보니 빈 그릇이 그대로. 아무도 안 건드렸구나. 이 빈 그릇을 모조리 그대로 두면 아침에 아이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아이들 그릇이나 수저를 모두 지저분한 채 두어도 아이들은 저희 그릇이나 수저를 설거지할 생각을 안 할까? 설거지를 마치고, 쌀을 씻어서 불리고, 미역을 끊어서 불린다. 해가 갈수록 난날(생일)이라는 날짜가 가물가물하다. 내가 난 날도, 곁님이나 아이들이 난 날도, 우리 어머니 아버지 형이 난 날도, 곁님 어머니 아버지 동생들이 난 날도, 동무들 난날도 모두 잊는다. 몸을 얻어 이 땅에 나온 날은 하루뿐일 터이나, 우리는 날마다 아침에 새롭게 깨어나기에 난날이란 삼백예순닷새 내내라고 느낀다. 설거지를 한창 할 즈음 새끼 고양이가 운다. 마당을 보니 겨울비가 내린다. 고흥에 살면서 아이들한테 눈을 보여주기 매우 어렵다. 한겨울에도 으레 찬비가 내릴 뿐이다. 마루에 앉아서 아이들이 일어나기를 기다린다. 아이들이 일어나면 고양이밥은 아이들이 손수 주라고 이야기할 생각이다. 눈 아닌 비를 보면서 그림책 《눈이 사뿐사뿐 오네》를 읽어 본다. 비를 보면서 눈 이야기 그림책을 넘긴다. 투박한 그림결이 겨울 곡성 시골마을 눈밭하고 잘 어울리는구나 싶다. 다른 고장에는 눈송이가 날리려나? 다른 고장은 눈잔치를 누리려나? 눈발이 날리는 고장에서는 길고양이도 무척 춥겠구나.


(숲노래/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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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밥하면서 읽는 책 2017.12.9.


《엄살은 그만》은 밥하면서 읽기에 좋은 책일까? 어쩌면 밥상을 차려서 아이들하고 둘러앉아서 이 책에 흐르는 이야기를 하기에 좋다고도 할 만하다. 배고파서 죽을 동 살 동을 하던 사람 이야기가 흐른다. 배가 고파 죽을 노릇이지만 이웃이나 동무한테 밥을 얻으려고 하지는 않고, 스스로 고픔을 달래고 풀꽃을 뜯어먹고, 냇물을 퍼서 마시면서 하늘바라기만 하던 사람 이야기가 흐른다. 배고파 죽을 노릇이지만 이웃이나 동무는 이이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단다. 이이 스스로도 찢어지게 가난한 살림을 굳이 드러내려 하지 않았단다. 그런데 그 찢어지게 가난한, 더욱이 어머니도 아버지도 없는 아이가 나중에 이름난 모델이나 배우가 될 줄 누가 알았을까. 배고프고 가난해서 어릴 적부터 늘 하늘만 올려다보며 살았다는 글쓴이는 눈이 3.0이라고 한다. 2.0이 아닌 3.0이라니. 하늘을 그렇게 올려다보며 살았다면 하늘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이모저모 헤아려 보면, 이 책은 “엄살은 그만”이 아닌 ‘엄살’이 무엇인지 하나도 모르는 채 자란 사람이 스스로 삶을 지어낸 이야기라고 할 만하지 싶다. 생각해 보라. 가난하거나 배고픈 사람 가운데 누가 엄살을 부리는가. 엄살은 돈이 많거나 배가 부를 적에나 나온다.


(숲노래/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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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마실길에 읽는 책 2017.12.5.


청주마실을 하면서 ‘앨리스의 별별책방’에서 《교토대 과학수업》을 장만했다. 시외버스를 기다리면서, 시외버스에서 내린 뒤에 낯선 고장에 익숙해지려고 슬슬 거닐다가 빵집 걸상에 앉아서, 이야기꽃을 피울 자리를 기다리면서, 저녁에 잠자리에 들기 앞서, 조금씩 읽어 본다. 다른 수업이 아닌 과학수업을 말하는 책이기에 눈길이 갔는데, 한국에서 이렇게 ‘대학 강의 한 갈래’를 따로 책으로 엮는 일이 얼마나 흔한가 하고 헤아려 본다. 없거나 드물지 않을 수 있지만, 어쩌면 생각 밖으로 퍽 드물 수 있다. 주어진 틀에 맞추는 강의만 넘친다면, 틀에 맞추는 강의로는 책을 못 엮겠지. 해마다, 또는 학기마다 똑같이 강의를 한다면, 이때에도 책으로 못 엮을 테고. 교사이든 강사이든 한 학기나 한 해에 걸쳐서 하는 강의를 따로 강의록으로 엮어 책으로 내려고 생각할 수 있을 적에 가르치는 자리뿐 아니라 배우는 자리에서도 새롭게 즐거울 만하리라 본다. 그리고 대학교뿐 아니라 고등학교나 초등학교에서도 ‘교과서 정규수업’을 하더라도 이러한 정규수업을 마칠 적마다 따로 ‘○○수업’을 책 하나로 새롭게 여밀 수 있다면…… 우리 배움터는 얼마나 달라질까 하고도 생각해 본다. 꼭 책 하나로 여미어야 하지는 않으나, 가르치고 배우는 이야기를 책으로 넉넉히 그러모을 수 있을 만큼 알차면서 새로울 수 있기를 빌어 본다.


(숲노래/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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