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좀 생각합시다 20


 한자말은 매우 적다


  흔히 사전에 오른 낱말 숫자를 어림하면서 ‘한국말 가운데 텃말은 매우 적고, 한자말이 거의 모두를 차지한다’고 잘못 이야기합니다. 이 이야기를 잘못이라고 밝힐 수 있습니다. 아주 쉬워요. 왜냐하면 한국말사전을 엮은 이들이 한국 텃말은 일부러 제대로 안 담으면서 정치권력·사회권력·문화권력을 거머쥐었던 지난날 양반이나 임금이나 사대부가 쓰던 중국 한문은 거의 빠짐없이 담으려 했거든요. 이러면서 일제강점기에 스며든 일본 한자말도 잔뜩 담으려 했어요. 일본에서 흔히 쓰던 영어까지 사전에 꽤 많이 담았고요. 국립국어원에서 낸 사전을 보면 중국 땅이름이나 미국·유럽 학자이름에 책이름까지 꽤 많이 담습니다.


  한국말사전에 정작 충청말·경기말·강원말·전라말·경상말·제주말을 제대로 안 담습니다. 예부터 고장마다 서로 다르게 쓰던 말을 조금 담기는 했으나 웬만한 말은 거의 안 담았습니다. 북녘말은 그야말로 몇 줌만 담았습니다. 이를테면, ‘길미’ 한 마디를 놓고 “이자(利子)·이문(利文)·이식(利息)·이전(利錢)·이조(利條)·변리(邊利)·변(邊)·이(利)·이금(利金)”처럼 갖은 한자말을 줄줄이 달아 놓습니다. ‘아이낳기’는 사전에 없으나 “해산(解産)·면신(免身)·분만(分娩)·분산(分産)·출산·해만·해복”을 잔뜩 싣습니다. ‘글월’을 놓고는 “편지(便紙/片紙)·간독·간찰(簡札)·서간(書簡)·서독(書牘)·서소(書疏)·서신(書信)·서장(書狀)·서찰(書札)·서척(書尺)·서한(書翰)·서함(書函)·성문(聲問)·신(信)·신서(信書)·이소(鯉素)·찰한(札翰)·척한·편저(片楮)” 따위를 한가득 실어요.


  중국 한문이 나쁘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그런데 중국 한문을 섬기며 이를 글로 써서 책으로 남겼대서, 이를 오늘날 한국말사전에 그대로 실어야 할까요? 이와 달리 이 땅에서 삶을 짓던 사람들이 고장마다 다르면서 새롭게 쓰던 말은 안 실어도 될까요? 사전에 실린 한자말 가운데 오늘 우리가 쓸 일 없는 낱말은 99%쯤 됩니다. 고작 1%쯤 쓸 만한 한자말이에요. 한국말사전을 제대로 털어야 합니다. 2018.3.7.물.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우리 말 살려쓰기/말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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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좀 생각합시다 19 


 엄마말 아빠말


  오늘날은 엄마말하고 아빠말 사이가 차츰 무너집니다. 한결 나아진 길로 가는 모습이지 싶습니다. 한동안 엄마말은 집안에만 머물며 아이를 돌보고 집살림까지 도맡으면서 쓰는 말이었고, 아빠말은 집밖에서 나돌며 사회에 길든 말이었습니다. 엄마말은 집이라고 하는 보금자리를 살뜰히 돌보는 말이기에 언제나 수수하고 쉬우며 포근한데다가 부드러운 말이라면, 아빠말은 서로 다투고 치고받는 말이거나 일제강점기에 억눌린 말이거나 군사독재에 짓밟힌 말이거나 정치권력으로 내리누르는 말이었다고 할 만합니다.


  발자국을 더 거슬러 보면, 제법 예전에는 엄마말하고 아빠말이 모두 집에서 일하며 쓰던 말입니다. 엄마말은 아기한테 젖을 물리면서 살내음이 물씬 풍기는 말이었고, 아빠말은 아이한테 집짓기를 보여주고 소몰이를 가르치며 쟁기질이나 나무질을 알려주는 숲내음이 잔뜩 묻어난 말이었지 싶어요. 제법 예전에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시골에서 흙을 만지며 살림을 지었고, 사내랑 가시내가 함께 논밭을 지었으며, 가을걷이나 씨뿌리기를 함께하고, 갈무리나 밥짓기도 함께했습니다. 제법 예전에는 엄마하고 아빠가 하는 일이 살짝 갈리기는 해도 둘은 서로서로 더 맡는 일을 함께 알면서 말을 나누는 사이였습니다.


  엄마말하고 아빠말은 함께 집살림을 돌보면서 숲살림을 아우르던 마을짓기를 하던 때에 사이좋게 어깨동무를 했어요. 이때에는 고장마다 고장말이 넘치고, 서로 아끼거나 보살피는 숨결이 말씨에 가득 흘렀습니다. 이러다가 한 줌쯤 되는 정치권력자가 중국 한문을 내세워 거의 모든 사람들을 신분이나 계급으로 내리눌렀어요. 시골말은 낮추고 서울말을 높이던 때이지요.


  평등한 말을 이루자면, 정치나 사회에서만 평등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집 바깥에서 돈벌이를 하더라도 언제나 집안에서 모여 함께 밥·옷·집을 손수 지으면서 어깨동무를 하기 마련입니다. 엄마말하고 아빠말이 집살림을 함께 건사하고 서로 북돋우면서 즐거이 어우러진다면, 이때에 ‘사이좋은(평등한)’ 말이 새로 자랍니다. 2018.3.7.물.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우리 말 살려쓰기/말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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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좀 생각합시다 18


 좋은 생각


  영어로는 “굿 모닝!”이라 말하면서 서로 절을 합니다. 영어를 고스란히 옮겨 “좋은 아침”이라 말하는 분도 있으나 매우 어설픈 말씨입니다. 이른바 번역 말씨예요. 한국 말씨로 제대로 한다면 “아침입니다!”나 “아침이야!”라고만 하면 됩니다. “아침입니다. 반갑습니다!”라든지 “아침이야. 반가워!”처럼 ‘반갑다’라는 말을 덧붙일 수 있어요. 한국 말씨로는 따로 아침 낮 밤을 가리지 않으니 “반가워!”나 “반갑습니다!”라고만 해도 되어요.


  번역 말씨 가운데 우리 삶터로 널리 퍼진 “좋은 생각”이 있어요. 잡지이름으로도 있지요. 워낙 널리 많이 오래 팔린 잡지이다 보니 아예 뿌리를 내리는구나 싶은데, “그것 참 ‘좋은 생각’이야.”처럼 쓰기도 해요.


  이때에 고개를 갸우뚱해 볼 수 있을까요. 한국 말씨로는 예부터 “그 ‘생각’ 참 ‘좋네’.”나 “그렇게 ‘생각하니’ 참 ‘좋구나.’”라 했습니다. 또는 “그 참 ‘생각’ ‘잘’ 했네.”나 “참말 그리 ‘생각해’ 볼 만하네.”라 했고요.


  ‘좋은’을 앞에 넣을 수 없지 않습니다. “‘좋은’ 생각”을 아예 안 쓸 까닭도 없습니다. 다만 ‘좋은’을 지나치게 아무 곳에나 쓰지 않는가를 헤아릴 수 있어야지 싶습니다. 좋은자리, 좋은님, 좋은벗, 좋은하루, 좋은날, 좋은그림, 좋은말, ……처럼 ‘좋은-’을 잘 살려서 재미나거나 새롭게 말결을 살릴 만합니다. 이렇게 여러모로 새로운 말길을 열되, 이 터전에 알맞으면서 부드러이 흐르는 말결을 돌아보면 좋겠어요.


  ‘좋다’라는 낱말은 품이 무척 넓에서 섣불리 “뭐 ‘좋은 생각’ 없니?”라 물으면 “뭐가 ‘좋은’데?” 하고 되묻겠지요. 두루뭉술하게 말하려고 ‘좋은’을 넣을 수 있으나, 즐겁기를 바라는지 재미나기를 바라는지 새롭기를 바라는지 사랑스럽기를 바라는지 아름다웁기를 바라는지 어느 하나를 또렷하게 짚어서 밝혀야지 싶습니다. 한국말은 흐르는 말결이라, “아침이 좋아!”나 “아침이야, 좋아!”라든지 “생각 좋네!”나 “생각 좋구나!”처럼 써야 어울립니다. 2018.3.6.불.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우리 말 살려쓰기/말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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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좀 생각합시다 17

 

 예쁜 토박이말

 

  ‘예쁜 토박이말’이나 ‘아름다운 토박이말’을 살리자고 하는 얘기를 신문이나 책이나 방송에서 곧잘 다룹니다. 이런 얘기를 더러 읽거나 듣다 보면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러네 이런 말이 있었네 하고 생각하는데, 이렇게 생각하다가도 얼마 뒤에 몽땅 잊기 일쑤입니다. 예쁘거나 아름답다고 하는 토박이말이 좀처럼 머리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예쁘거나 아름답다고 하는데 왜 머리에 안 들어오는가 하고 생각해 봅니다. 아무래도 예쁘기만 하거나 아름답기만 하기 때문은 아니랴 싶습니다. 삶을 짓거나 살림을 꾸리면서 여느 자리에 수수하게 쓸 만한 말이 아니라, 한국말사전 어느 구석에 숨은 말이기 때문이라고 느낍니다.


  예쁘거나 아름다운 토박이말이라고 해서 더 낫지 않으며, 딱히 나쁘지 않습니다. 좋거나 나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쓰임새를 잃은 말이라면, 또 우리 스스로 쓰임새를 잊은 말이라면, 이러한 말에는 새로운 숨결이 흐르기 어려우리라 느낍니다. 늘 마시는 바람처럼 쓸 수 있는 말일 적에는 이 말을 굳이 외우지 않습니다. 늘 마주하는 해님처럼 마주할 만한 말일 적에는 이 말을 놓고 예쁘다거나 아름답다고 따로 느끼지 않습니다.


  예쁘다고 생각하지 않으면서 늘 쓰는 수수한 말이기에 안 예쁘지 않습니다. 늘 쓰는 수수한 말이기에 내 삶으로 뿌리를 내리고 내 살림을 가꾸는 바탕이 되어 줍니다.


  말 한 마디가 예쁜 까닭은 ‘사전에 묻힌 말’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토박이말이기 때문에 더 예쁘지 않습니다. 어느 말 한 마디를 바라보거나 마주하거나 쓰는 사람이 스스로 예쁘게 마음을 가꾸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즐겁게 삶을 짓고 기쁘게 살림을 가꾸며 곱게 사랑을 속삭일 줄 안다면, 우리 손과 입에서 흐르는 말은 늘 예쁠 만하리라 봅니다.


  말은 외워서 쓰지 못합니다. 말은 살면서 씁니다. 말은 예쁘거나 안 예쁘다는 틀로 가리지 못합니다. 말은 살림을 짓는 바탕이 되도록 슬기롭게 다스리면서 씁니다. 2016.7.11.달.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우리 말 살려쓰기/말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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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좀 생각합시다 16


 심심한 사과의 말씀


  ‘심심하다’라는 낱말을 놓고 아이들은 “아이 심심해.” 하고 말합니다. 하는 일이 없어서 재미가 없다는 뜻입니다. ‘심심하다’라는 낱말을 두고 살림하는 어른들은 “국이 심심하네.” 하고 말합니다. 국물 간을 좀 싱겁게 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한자말 ‘甚深’이나 ‘深深’을 쓰는 지식인이 있습니다. 이 한자말은 “심심한 감사”나 “심심한 사과”나 “심심한 조의”나 “심심한 경의”처럼 쓴다고 하는데, 한국 말투가 아닌 한자를 널리 받아들여서 쓰는 일본 말투입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는 영어도 널리 쓰니까 한자말쯤이야 그리 안 대수로울 만합니다만, “심심한 사과의 말씀”처럼 말하는 어른을 아이가 바라본다면 무엇을 느낄 만할까요? “심심한 감사의 말씀”처럼 말하는 지식인을 여느 살림꾼이 마주한다면 무엇을 생각할 만할까요?


  아마 아이는 뭔 ‘사과’를 ‘재미없게’ 하는가 하고 고개를 갸우뚱할 테지요. 아마 살림꾼은 뭔 ‘사과’를 ‘싱겁게’ 하는가 하고 고개를 갸웃거릴 테지요.


  누구한테 사과한다고 말하려 한다면 “깊이 사과”하면 됩니다. “고개 숙여 사과”하면 돼요. “거듭 사과”할 수 있을 테고, “머리를 조아리며 사과”할 수 있습니다. 4349.1.14.나무.ㅅㄴㄹ



우선 우레시노 시민 제위께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전한다

→ 먼저 우레시노 시민 모두한테 깊이 사과하는 말씀을 올린다

→ 먼저 우레시노 시민 여러분한테 고개 숙여 사과 말씀을 여쭌다

《손민호-규슈 올레》(중앙북스,2015) 40쪽


(최종규/숲노래 . 2016 - 우리 말 살려쓰기/말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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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6-01-14 18:11   좋아요 0 | URL
정말 무게를 실어야하는 말에는 함부로 쓸수없을 듯.
진심이 어딘지 애매해지니까..

숲노래 2016-01-14 21:08   좋아요 1 | URL
한자말이든 영어이든 알맞게 쓰면 좋을 텐데,
한국말에 영 어울리지 않는 말을
함부로 쓰는 일이
사라지면서
슬기롭게 말과 생각을 나눌 수 있기를 비는 마음입니다..

[그장소] 2016-01-15 00:33   좋아요 0 | URL
저 댓글을 쓰기 바로 전에 저는 심심한 위로 ㅡ라면서 반 장난같은 말을 ㅡ하고 내려온 참이어서 그게 더 와닿았던 참이었어요.가서 고쳐야할까 하다 말았는데 늘 어렵습니다.말은 .
^^

숲노래 2016-01-15 05:16   좋아요 1 | URL
저도 말놀이나 말장난 같은 이야기를 그동안 즐겨 쓰기는 했는데
제대로 슬기로운 뜻을 담아서
말놀이나 말장난을 할 때에
비로소 스스로 생각을 살찌울 수 있다는 대목을
요즈음 들어서 새삼스레 해 봅니다.

그리고 모든 말을 굳이 어린이 눈높이에서 해야 하지는 않을 테지만,
어린이와 시골사람과 할머니와 할아버지와
학교를 안 다닌 사람도 함께 나눌 수 있는 눈높이를 헤아리면서
말을 쓸 때에 비로소 아름다울 수 있으리라 생각해요 ^^

[그장소] 2016-01-15 12:50   좋아요 0 | URL
좋은 이야기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