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집놀이터 195. 플라스틱



장사하는 이들은 돈을 벌 생각이다. 착한장사이든 나쁜장사이든 돈을 벌어야 한다. 무엇을 팔아 돈을 번 다음에 이 돈으로 살림을 지으려는 생각이다. 착한장사를 꾀한다면 사람들한테 팔 무엇이 그야말로 상냥하면서 아름답고 즐거울 수 있는 길이 되기를 바라리라. 착한장사가 아닐 적에는 무엇을 팔든 돈을 더 벌어서 살림을 늘릴 수 있기를 바라겠지. 그래서 온누리에 석유와 화학제품과 플라스틱과 비닐과 농약과 화학의약품과 병원과 학교와 감옥과 군대와 정치와 언론 들이 넘치는구나 싶다. 모두 돈하고 맞물리는 장사이다. 이들 장사는 착한장사일까? 생각해 보자. 학원장사는 착한장사인가 나쁜장사인가, 아니면 그냥 돈을 바라는 장사인가? 교사로 일하며 돈을 버는 어른은 참교사인가 거짓교사인가, 아니면 그냥 돈을 바라면서 교원자격증으로 다달이 은행계좌에 숫자가 늘기를 바라는 사람인가? 이 지구별에 플라스틱이 넘칠 뿐 아니라, 가게마다 플라스틱 물건이 가득하고, 아이들 장난감도 플라스틱으로 값싸게 척척 찍는 까닭을 생각해 보자. 착한장사를 헤아렸다면 셈틀도 플라스틱 아닌 나무로 짰겠지. 사진기 겉틀도 이와 같다. 가볍고 단단한 나무도 많다. 그런데 왜 나무로 짠 셈틀이나 사진기가 안 나올까? 착한장사 아닌 나쁜장사이거나 돈장사일 뿐일 테니까. 그러면 돈으로 세간을 장만해서 살림을 꾸리는 어떤 살림을 꾸릴 생각인가? 착한살림인가 나쁜살림인가, 아니면 그저 돈에 맞추어서 움직이는 살림인가?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배움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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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집놀이터 194. 에누리



나는 어릴 적에 에누리하고 덤을 함께 익혔다. 우리 어머니하고 저잣마실을 다닌다든지 이웃집을 만날 적에 으레 두 모습을 보여주셨으니까. 저잣거리나 가게에서는 에누리를 바라셨고, 이웃집에는 덤을 주곤 했다. 이러다가 어느 날에는 저잣거리나 가게에서 “‘우수리’는 가지세요” 하고 말씀하는 모습을 보았다. 이러면서 ‘우수리’라는 말도 배웠다. 어느새 어버이가 된 나는 저잣거리나 가게나 책집에서 에누리를 하는 일이 없다. 어느 것을 사든 고마운 노릇이요, 어느 책을 장만하든 새로 배우는 기쁨을 누리기에 ‘부르는 값’에 오히려 덤을 드리고 싶은 마음이기 일쑤이다. 생각해 보라. 아름답게 누린 책인데 값을 에누리하고 싶은가? 맛나게 먹은 밥인데 값을 깎고 싶은가? 고맙게 택시를 타고 왔는데 굳이 삯을 덜어 달라 하고 싶은가? 제값을 치르는 길, 참값을 나누는 길, 기쁨값이랑 웃음값을 함께하는 길을 아이들하고 헤아린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배움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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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집놀이터 193. 나누는 사이



어버이하고 아이는 나누는 사이로구나 싶다. 길든 짧든 깊든 얕든 무엇이든 나누는 사이라고 할까. 즐거움이든 미움이든, 노래이든 짜증이든, 참말로 아무것도 안 가리면서 모조리 나누는 사이로 하루를 지내지 싶다. 처음에는 이모저모 알려주느라 바쁘거나 힘들거나 벅찰 만하다. 그러나 우리가 품을 들이고 말미를 써서 알려주고 나누는 사이에 서로 새롭게 자란다. 듣는 사람은 품이랑 말미를 들여서 듣는 동안 ‘예전에도 들었지. 그런데 예전에는 아직 살갗에 와닿지 않았어. 이제 조금씩 와닿는구나’ 하고 여기면서 자란다. 말하는 사람은 품이랑 말미를 써서 말하는 동안 ‘예전에 말할 적에 못 알아듣거나 잊었다면 더 살피고 따져서 새롭게 알려주어서 배우도록 해 보자’ 하고 여기면서 자란다. 나누는 사이로 지내기에 나중에는 열 마디 말이 없어도 마음으로 살뜰히 읽으면서 수월히 지낼 만하다. 나누는 사이가 아닐 적에는 처음이든 나중이든 아무런 얘기가 오가지 않았으니 울타리나 담이 높을 뿐 아니라 두툼하다. 우리가 사랑이나 꿈이나 생각을 나누는 사이라 한다면, 번거롭거나 성가시거나 귀찮아 하지 말 노릇이다. 차분히 기다리면서 듣고, 찬찬히 지켜보면서 말할 적에 나눌 수 있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배움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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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집놀이터 192. 손목시계



  우리 할아버지는 밥을 따로 넣지 않고 흔들어서 움직이는 시계를 차고 다니셨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이 시계를 물려받았지만, 흔드는 바늘시계는 어린이한테 매우 묵직해서 손목에 차기 힘들었다. 그리고 이즈음 1980년대 첫무렵에 수은전지로 움직이는 가벼운 전자시계가 널리 퍼졌고, 아이들은 이 시계를 얻고 싶어서 저마다 어버이를 졸랐다. 나도 전자시계를 얻었고, 어른들은 먼 마실길을 다녀오면 아이들한테 으레 전자시계를 선물하곤 했다. 처음에는 이렇게 선물받은 시계가 자랑스럽고 좋았는데, 나는 시계를 찰 적마다 손목이 마치 끊어지는 듯 아팠다. 손목에 헐렁하도록 시계를 차더라도 피가 안 흐른다고 느끼면서 저릿저릿했다. 어른들은 왜 이러한지 알지 못했고, 속내를 밝히지 않았다. 다만 내 몸은 손목시계를 비롯해서 팔찌나 목걸이 모두 싫어했고, 얼추 열한두 살 언저리이지 싶은데, 그때부터 내 몸을 시계로 삼으며 살았다. 손목시계를 찰 수 없는 몸이니, 나 스스로 마음으로 몸에 말을 걸어서, 새벽 몇 시 몇 분에 일어나고, 어디로 갈 적에도 스스로 때를 어림하도록 몸한테 맡겼다. 열한두 살부터 마흔다섯 언저리까지 시계 없이 새벽에 일어나고픈 때에 마음대로 일어난다. 새벽 네 시이든 밤 세 시이든 몸이 잘 맞추어서 움직인다. 이러면서 살림을 돌아본다. 우리는 손목시계나 울림시계가 있어야 아침이나 새벽에 잘 일어나지는 않으리라. 옛사람은 시계 없이 바람, 볕, 물, 소리, 풀, 새, 풀벌레, 별, 하늘 들을 살펴서 때를 읽었다. 오늘사람도 누구나 이 여러 숲님을 헤아려 때를 읽을 수 있지 않을까?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배움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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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집놀이터 191. 몸에 맞는 옷



몸에 맞는 옷을 찾기는 쉬울까? 어쩌면 쉽다. 그러나 마흔 살에 이르도록 ‘내 몸에 맞는 옷이란 뭐지?’ 하고 헤맬 수 있다. 어떤 사람은 다른 누가 ‘쉰이나 예순 나이에 짧은치마를 입는다’며 손가락질을 하거나 흉을 본다. 그러나 쉰이나 예순 나이에 이르러 비로소 ‘내 몸에 맞는 옷’을 찾았기에 그 나이에 짧은치마를 입을 수 있다. 이이가 할머니이든 할아버지이든 말이지. 스스로 찾은 제 몸이 기뻐서 다른 사람 눈을 아랑곳하지 않으면서 ‘몸을 누릴’ 수 있다면, 이이는 다른 사람 눈치가 아닌 제 마음길하고 마음속하고 마음결을 바라보면서 하루를 새롭게 걷는 배움길이 된다. 제 몸에 맞는 옷이 아닌, 다른 사람 눈치에 따라서 맞춘 옷이라면, ‘우리 몸이 아닌 다른 사람 눈에 맞춘 옷’이라면, 이런 옷이 우리한테 좋을까? 기쁠까? 알맞을까? 아름다울까? 사랑스러울까? 아마 겉보기로는 멋져 보일 수 있겠지. 그래서 ‘그럴싸하다·그럴듯하다’ 같은 낱말이 있다. 겉보기로는 멋진 듯하지만 속으로는 어울리지 않는 옷을 걸쳤다는 뜻이다. 우리 몸에 맞는 옷은 스스로 헤매면서 찾는다. 누구는 다섯 살부터 찾을 테고, 누구는 쉰 살에 이르러 찾는다. 또 누구는 백 살에 이르러 찾을 텐데, 백쉰 살이 되어도 그만 못 찾을 수 있다. 헤매는 길은 어렵거나 아프거나 고되지 않다. 헤매면서 길을 찾으니, 길을 찾은 뒤에 지을 엄청난 웃음꽃을 생각하면서 우리 옷을, 우리 몸을, 우리 마음을 찾자.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배움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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