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집놀이터 200. 놀며 돕다



아이들이 하루가 다르게 몸이 자라면서 몸무게랑 몸피가 늘어난다. 이제는 내 등짐 하나로 아이들 옷가지를 건사할 수 없다. 두 아이만이 아니라 한 아이만 이끌고 며칠 묵는 마실을 다니는 길이라면 여행짐을 꾸려야 한다. 두 아이를 이끌고 며칠 묵는 마실이라면 큰 여행짐 하나라든지 작은 여행짐 둘을 꾸려야 하고. 여덟 살을 지나는 작은아이는 여행짐을 끌고 싶다. 게다가 작은 여행짐 아닌 큰 여행짐을 끌고 싶다. 여행짐은 여덟 살 아이가 돌돌돌 굴릴 만큼 수월하다. 내 등짐을 큰 여행짐, 그러니까 끌짐(또는 바퀴짐)에 얹어서 굴리면 등에 땀이 배지 않고 시원하기에 끌짐을 아버지가 끌겠노라 말하지만, 작은아이는 제가 굴려야 한다고 말한다. 한참 실랑이를 하다가 “그러렴, 네가 바라면 그래야겠지.” 하고 여긴다. 이러고서 곰곰이 돌아보는데, 아이로서는 끌짐을 짐이 아닌 놀이로 보았구나 싶다. 나는 등에 메는 등짐, 굴리는 끌짐, 이렇게 ‘짐’이자 고단한 일로 보았고. 이리하여 오늘도 아이한테서 배운다. 작은아이가 놀이하듯이, 아니 오롯이 놀이로 다루면서 큰짐을 돌돌돌 굴린다면, 나도 등에 메는 여러 가지를 등짐 아닌 다른 이름으로 볼 줄 알아야겠구나 싶다. 음, ‘등살림’쯤 되려나? 놀이하는 몸짓으로 돕는 아이처럼, 놀이하는 몸짓으로 신나게 일하고 살림을 하자는 마음이 되려 한다. 말 한 마디를 바꾸며 살림 한 가지가 바뀐다. 이름 하나를 새로 지으며 삶자락 한켠을 새롭게 가꾼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배움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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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집놀이터 199. 놀며 일하다



어릴 적 일을 곰곰이 돌아보면 둘레 어른은 으레 ‘놀이 = 게으른 짓 = 나쁜 일’로 여겨 우리가 노는 몸짓을 썩 안 좋아했구나 싶다. 먹고살기 힘들다고 하면서, 일만 부지런히 해야 비로소 먹고살 만하다는 뜻을 우리한테 새기려고 했지 싶다. 이때마다 입으로 터뜨려 묻지 못하고 마음에만 새긴 수수께끼가 있다. “저기요, 넉넉히 먹고살 수 있은 뒤에는 어떻게 하나요?” 하고. “부지런히 일해서 넉넉히 먹고살 수 있은 뒤에는 어떻게 놀거나 무슨 놀이를 하면 즐겁나요?” 같은. 이런 말을 물으면 둘레 어른들은 되게 싫어했다. 바보 같은 소리를 한다고 나무라기 마련이었다. 나는 일을 안 할 생각이 없다. 다만, 일은 일대로 즐겁게 하되, 놀이는 놀이대로 신나게 해야 하지 않을까? 즐겁게 일하는 삶이라면 기쁘게 놀이할 수 있는 살림이어야 하지 않을까? 죽어라 돈만 모아서 이 삶에 어떤 보람이 있을까? 알맞게 일하고 알맞게 놀면서 알맞게 배우고 알맞게 나누는, 모든 삶에 알맞음이라고 하는 기둥을 단단히 세울 노릇이 아닐까? 일만 있고 놀이가 없다면, 일만 하라고 몰아세우고서 느긋하게 놀거나 쉴 틈을 마련하지 않는다면, 우리 삶은 어찌 될까? 감옥에서조차 해바라기 할 틈을 마련해 준다더라. 학교에서도 아침부터 밤까지 내처 가르치지만 않는다. 틈틈이 쉬도록 한다. 이제 우리는 ‘숨돌릴 틈’뿐 아니라 제대로 놀고, 아름답게 놀며, 사랑스레 놀 줄 아는 살림도 지어야지 싶다. 노래방, 술집, 당구장, 골프장, 운동경기 …… 이런 것 말고 ‘돈을 안 들이고도 웃고 노래하는 잔치판 놀이’를 새로 열어야지 싶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배움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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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집놀이터 198. 조바심



언제 되려나 하고 조바심을 낼 수 있다. 아무래도 안 될 듯싶어 조바심을 내다가 그만 불뚝 성을 낼 수 있다. 성을 낼 뿐 아니라, 짜증에 갖은 거친 말까지 터뜨릴 수 있다. 그리고 차분히 기다릴 수 있다. 조바심을 내지 않기에 기다릴 줄 아는데다가 마음이며 몸을 차분히 가다듬어서 새롭게 생각을 지필 수 있다. 이때에는 부드러우면서 따뜻한 말이 온몸을 감싸지 싶다. 빨리 가기에 좋지 않고, 많이 하기에 낫지 않고, 크게 하기에 대단하지 않고, 널리 하기에 기쁘지 않다. 함께 하면서 좋고, 넉넉히 하면서 낫고, 알맞게 하기에 대수롭고, 노래하면서 하기에 기쁘다. 삶이란, 배우는 삶이란, 배우면서 가르치는 삶이란, 배우고 가르치고 물려주고 물려받으면서 새로 키우는 삶이란, 곰곰이 지켜보면서 조바심 아닌 즐거움을 맞아들이는 마음이 되는 길이지 싶다. 돌아가도 좋고, 하루를 미루어도 좋다. 한 해를 늦추어도 좋고, 열 해쯤 느긋하게 보아도 좋다. 오늘을 보되, 오늘만 보는 눈이 아니라면 된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배움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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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집놀이터 197. 무덤



사람들은 오늘날 ‘학교’라 할 적에 ‘졸업장을 주고받는 시설’을 이야기한다. 이러한 시설에 보내야 아이들이 배울 수 있다고 여기는데, 막상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는 제대로 못 보지 싶다. 학교가 학교다우려면 ‘무엇이든 배우는’ 곳이 아니라 ‘무엇을 어떻게 왜 배워’서 ‘스스로 어떤 사람으로서 우뚝 서며 슬기롭고 사랑스레 살림을 짓는 길을 걷는가’를 나눌 줄 알아야 하지 않을까? 무턱대고 배우기만 하는, 더욱이 숫자라고 하는 점수에 얽매이는 오늘날 학교는 무덤과 같지 싶다. 학교는 무덤일까 삶터일까? 무덤 같은 학교는 감옥일까 배움터일까? 감옥에 가깝지 싶은 학교는 쳇바퀴질일까 새로짓기일까? 쳇바퀴질에서 좀처럼 못 벗어나지 싶은 오늘날 이 나라 학교는 틀에 맞추어야 하는 질서일까, 스스로 길을 찾는 날갯짓일까? 아이들은 무덤자리에서조차 뛰놀면서 까르르 웃는다. 아이들은 때나 곳을 굳이 가리지 않는다. 어른들은 허울이나 허수아비를 자꾸 세우면서 아이들이 못 놀도록 막아선다. 이곳에서는 이래야 하고 저곳에서는 저래야 한다는 틀을 자꾸 집어넣는다. 우리, 조금 느슨해져도 좋지 않을까? 지켜야 할 것을 너무 많이 아이들 몸이나 마음에 새기기보다는, 가꾸면서 활짝 웃고 노래할 길을 조금 더 이야기하면서 나누어야 아름답지 않을까?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배움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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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집놀이터 196. 엉성



빈틈없이 잘 아는 사람이라면 굳이 배우지 않아도 될까. 빈틈없이 잘 아는 터라 새로 배우지 않아도 된다면, 아무리 빈틈없이 잘 알더라도 늘 제자리걸음이 되리라 느낀다. 빈틈없는 모습이 외려 빈틈이 된달까. 빈틈있는 사람이라면 여러모로 엉성하겠지. 엉성하거나 어설프기에 배우려 할 테고, 하나하나 배우면서 빈틈을 채울 텐데, 배움길을 걷는 사람은 즐겁거나 알차거나 아름다이 삶을 바라보는 눈을 키우면서도 이래저래 틈을 보일밖에 없지 싶다. 이러한 틈이 있으니 배우는데, 이러한 틈을 기꺼이 드러내면서 나누기에 한 걸음을 더 내딛을 만할 테고. 빈틈있는 아이를 어떻게 마주하면 될까? 빈틈있는 어른으로서 어떻게 가르치거나 이끌면 될까? 서로서로 빈틈이 있다는 대목을 서로서로 어느 만큼 받아들이거나 너그럽게 헤아리는가? 배우는 사람이기에 빈틈없는 살림이 아닌, 배우는 사람이기에 빈틈있어 고꾸라지기도 한다는 대목을 자꾸 되새긴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배움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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