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삶읽기 2023.5.30.

수다꽃, 내멋대로 43 88만원세대



  어릴 적에 골목이나 너른터(운동장)에서 동무들하고 뛰놀다가 갑자기 우르르 서로 무리를 지으며 부른다. “종규야! 이리 와!” 이쪽에서 무리지은 아이들도 동무이고, 저쪽에서 무리지은 아이들도 동무이다. 둘로 나눈 무리는 한 사람을 더 늘리려고 용을 쓴다.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다가 땀을 삐질삐질 흘린다. 드디어 한마디를 터뜨린다. “난 어디에도 못 들어가겠어! 둘 다 동무들이잖아!” ‘그냥 놀 뿐’이라지만, 줄다리기나 오징어나 콩주머니를 하며 끝없이 짝을 바꾸어서 어울리는 놀이가 아닌, 처음부터 무리를 갈라서 누가 이기느냐 지느냐로 다툰다면, 어디에도 안 끼었다. 뒤로 홱 돌아서서 달아난다. 쌩 하고 달아나는데, 동무들은 ‘달리기’를 하자는 줄 여겨 어느새 무리가 풀어지고 달음박질놀이로 바뀐다. 우리는 왜 ‘어느 쪽’에 서야 할까? 어느 해에 태어났기에 ‘태어난해’라는 또래로 묶여야 할까? 어느 해에 무슨 배움터(학교)를 들어갔기에 ‘학번’이라는 금을 갈라야 할까? 우리는 우리 ‘이름’으로 살아갈 뿐, ‘나이·주민등록번호·학번·군번’으로 갈라야 할 까닭이 없다. 이쪽이건 저쪽이건 그쪽이든 똑같다. 저마다 옳다고 외치지만 ‘갈라침·금긋기(분단·분열·분리)’일 뿐이고, 이 무리짓기부터 ‘따돌림(차별)’이 싹튼다. 2007년이던가, 《88만 원 세대》라는 책이 나오고, 둘레에서 이 책을 마구 추켜세우던 그즈음, 나는 어쩐지 코웃음이 나왔다. “무슨 얼어죽을 88만 원?” 그무렵 내 한달벌이는 ‘88만 원’은커녕 ‘50만 원’도 ‘30만 원’도 아니었다. 때로는 ‘10만 원’으로 볼볼 기었다. ‘그들(지식인)’이 금긋는 ‘88만 원 세대’라는 말은 고약했다. 왜 이런 ‘무리짓기(세대갈등)’를 일삼아야 하는가? 일부러 틀(프레임)을 만들어서, 왜 자꾸 갈라치기(이간질)를 하는가? 이 틀(프레임)로 이 나라에 새롭게 불길(분노)을 일으키고, ‘분노 프레임’으로 강단·강의를 차지하면서 ‘새길’이 아닌 ‘불길(분노)’로 금긋기(이분법에 따른 사회분열)로 치닫겠구나 싶었다. 《88만 원 세대》가 ‘나쁜책’일 수는 없되, 이런 책을 쓰고 이야기를 펴는 이들은 ‘통장잔고 0원’을 겪어 본 적이 없을 텐데 싶더라. ‘가난·구조적 차별·학벌’을 따지는(비판하는) 글을 쓰고 강의를 하는 분들 가운데 고졸·국졸인 사람이 있을까? 또는 서울·수도권 아닌 시골에서 사는 사람이 있을까? 가난하지도 않고, 가난을 겪지도 않고, 빈곤층·차상위계층도 아닌 그분들은 ‘근로장려금’을 받은 일도 없겠지. 예전에 최영미 시인이 ‘근로장려금 수령 대상자’로 딱 한 해 된 적 있다는 글을 남긴 적이 있는데, 그저 웃음이 났다. 여태 가난해 본 적이 없다가 꼭 한 해 돈벌이가 줄었대서 징징거리면, 늘 가난하게 살아가는 차상위·근로장려금 수령자는 어찌해야 할까. 달콤발림으로 꼬드기면서 ‘시키는 대로 나팔수가 되면 다달이 통장잔고가 늘어난다’고 다가오는 무리가 늘 있다. 온나라 어느 고장에서나 그 고장 기득권(시장·군수)을 봐주는(옹호하는) 글을 써주면 짭짤한 벌이와 자리(교수 또는 고문 또는 원장)를 준다. ‘나눔’은 아름길이 될 수 있지만 ‘가름·쪼갬’은 서로 미워하고 손가락질하고 불길을 일으켜서 그저 싸움(전쟁)으로 치닫는 굴레이다. 우리가 스스로 사랑을 지피지 않고서 불길(분노)만 지필 적에는, 모든 정치·문단·언론·교육 권력자들이 뒤에서 팔짱끼며 낄낄댄다. 그들은 우리가 ‘아름다운 책’이 아닌 ‘분노를 지피는 책’을 더 많이 읽어서, 스스로 ‘생각을 멈추기’를 바라더라. “생각하는 사람이라야 산다”는 말씀이 있듯, 참말로 우리는 ‘사람’일 노릇이다. 우리말 ‘사람·살다·살리다·사랑·사이·새(멧새)·생각’은 말밑이 같다. ‘살(살갗)’도 같은 말밑이다. ‘살빛(살색)’은 나쁜말이 아닌, “사람 겉몸을 감싼 얇으면서 빛나는 옷”인 ‘살’을 드러내는 빛깔인데, ‘살빛’이란 낱말을 따돌림말(차별어)로 여겨 ‘살구빛’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목소리(논리)가 판치는 대목도, 우리가 스스로 사람됨과 사람빛을 잊어버리도록 내몰고 만다. 그런 목소리도 다 ‘금긋기(분열·이간질)’일 테지. 거짓말을 앞세워 틀(질서·프레임)을 지켜야 한다고 여기는 목소리가 높은 곳에는 어깨동무(평화)가 깃들 틈새가 없다. 그래서 나는 혼길을 걷는다. 몸에도 마음에도 날개를 달면서 뚜벅뚜벅 걷는다. 먼길을 갈 적에는 버스를 얻어타고, 버스에서 내리면 하늘빛을 머금으며 걷는다. 걷다가 멈추어 들꽃을 보고, 바람길을 읽고, 구름꽃을 느낀다. 나는 ‘그들이 세운 틀·무리’에 깃들 마음이 없다. 언제나 ‘아이들’하고 도란도란 어울리고, ‘곁님’하고 ‘나 스스로’ 우리 보금자리를 숲빛으로 가꾸는 길을 가려는 마음이다. 나는 아무 또래(세대)가 아니다. 그저 ‘숲사람’이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밑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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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삶읽기 2023.5.29.

수다꽃, 내멋대로 42 딴청



  어릴 적을 돌아보면, 나로서는 일곱 살까지 신나게 놀던 나날이 있고, 여덟 살에 이르러 어린배움터(국민학교)에 깃든 나날이 있다. 여덟 살에 이르기까지 둘레 어른들이 으레, 거의 날마다, 자주 하던 “그래, 여덟 살 때까지는 내버려 둬. 그때까지는 실컷 놀아야지.” 같은 말이 있다. 더 옛날에는 더 달랐겠지. 더 옛날에는 아이들이 무엇을 하든 ‘딴짓·딴청’이라 여기지 않고 ‘놀이’나 ‘소꿉’이라 여겼다. 그러나 ‘틀’에 가두려 하면 모든 놀이·소꿉은 그만 ‘딴짓·딴청(주의력 결핍)’으로 여기면서 ‘나쁜짓(태도 불량)’으로 못박더라. 아무래도 ‘틀(제도권·학교·군대·감옥·정부·사회)’이라는 눈으로는 이렇게 보겠지. ‘틈(자유·기회·시간·소통·대화)’을 두지 않는 ‘틀·굴레’이기에 ‘단단’하게 ‘틀어막’고 ‘틀어쥔(거머쥔)’다. 사람들 넋(영혼)을 틀어쥐어서 마음대로 부리려 하는 나라이다. ‘틈(자유·기회)’이 없으니, ‘틔울(싹틔울)’ 수 없고, ‘틈(시간·대화)’이 없으니, ‘열(생각을 열·말길을 열)’ 수 없다. 우리가 배움터(학교)를 따로 세워서 겪은 지는 이제 고작 온해(100년)이다. 온해 앞서라 하더라도 누구나 배움터를 다니지 않았고, 가난하거나 종(노예·백성·천민)이라는 자리에 있던 사람은 얼씬조차 못 했다. 우리는 너무 쉽게 잊거나 모르는데, 1400년대에 세종임금이 훈민정음이란 글을 지었다고 하더라도, 이 글을 배우거나 구경할 수 있던 사람은 한줌(1%)조차 안 된다. 한문을 익혀서 쓰던 나리(권력자)가 아니면 훈민정음을 듣거나 배울 길이 없었다. 종살이(노예살이·농부·천민)를 하던 사람들은 언제나 짓밟힌 삶이었고, 종이나 붓은 만질 수 없었고, 종이랑 붓은 너무 비싸기까지 했고, 종(노예·백성·천민)으로 살던 사람들은 나리(양반·사대부·권력자)가 쓰는 글을 어깨너머로 구경하려다가 들키면 볼기(곤장)를 얻어맞거나 목숨까지 잃었다. ‘훈민정음·정음·언문·암클’은 1900년대에 접어들 즈음까지 참말로 ‘아무나 못 배우고 못 쓰던, 숨죽이던 글’이다. 나는 1993년에 푸른배움터(고등학교)를 마쳤는데, 그무렵에는 배움터에서 이 대목을 가르쳐 주었고, 적잖은 책에 이 대목이 나왔지만, 어쩐지 요새에는 이 대목을 안 가르칠 뿐 아니라, 마치 1400년대부터 ‘종(노예·백성·천민)으로 억눌린 숱한 사람들’이 글살이(문자생활)를 할 수 있었다는 듯, 거짓말을 가르치는 분이 부쩍 늘었다. 아무튼, ‘딴짓·딴청’이 무엇인가 하고 헤아려 보면, ‘시키려는 쪽에서 시키는 대로 안 한다’요, ‘심부름을 맡기려는 쪽에서 말하는 대로 안 듣는다’라고 하겠다. 그렇다면 이제 생각해 보자. 아이들은 왜 딴짓이나 딴청을 할까? 어른이 시키는 일·짓·말이 썩 달갑지 않거나 어렵거나 모르기 때문이다. 아이는 아이 나름대로 스스로 생각하고 살필 틈이 있어야 한다. ‘어른들은 다 아는 말’이라지만, ‘아이로서는 다 모르는 말’이기 일쑤이다. 아이 곁에서 ‘한자말이나 영어나 일본말씨’를 손질하거나 걸러야 하는 까닭을 다들 제대로 모르는데, 아이들한테 너무 어려워서 뭔 소리인지 알 길이 없거든. ‘어른들이 교과서나 책으로 적은 글’은 ‘아이한테는 뜬구름잡는 헛소리’이거나 ‘우격다짐으로 외워야 하는 굴레’이곤 하다. ‘숲·숱하다·수북하다·수박·수수하다·수두룩하다·쉽다·쉬다·숨·숨다’는 말밑이 같으며 얽힌다. ‘스스로·스승·스님’도 말밑이 같으며 얽히는데, ‘숲·스스로’는 만난다. 아주 쉬워 흔한 우리말은, 서로 잇닿으면서 생각을 북돋우고 틔우며 연다. 우리가 어른이라면 아이 곁에서 ‘쉽고 수수한 우리말’을 써야, 어른으로서도 어질게 철이 들고, 아이로서도 즐겁게 소꿉놀이를 하면서 마음틔움·생각열기·사랑나눔으로 뻗게 마련이다. ‘집(보금자리·살림터)’이라면 가두지 않는다. ‘틀(학교·군대·감옥·정부·사회)’이라면 가둔다. ‘집’은 심부름이나 시킴질이 안 흐르는, 함께 짓고 가꾸고 일구어 나누는 ‘날개’이다. ‘틀’은 오직 심부름과 시킴질이 판치면서, 외워야 하고 똑같아야 하고 따라가야 하는 ‘수렁’이다. 아이들은 차림옷(교복)을 입으면 안 된다. 똑같은 옷을 맞춰 입히는 데는 ‘틀’인데, 이런 틀은 ‘학교·군대·감옥·정부’인걸. 옷과 몸짓과 말이 틀에 박히면 ‘날개(자유·민주·평화·평등)’를 못 편다. 마음껏 무엇이든 할 수 있을 때라야, 날개를 펴면서 틈을 내어 철빛을 읽는 어른으로 자라날 만하다. 틀로 틀어쥐어 억누르고 똑같이 맞추면, 틀에 박히고 말아 마음도 생각도 사랑도 살림도 집도 없이 ‘학생·회사원·지식인’이라는 굴레에 갇혀서 종살이로 흐른다. 다 다른 아이들이 ‘다 다른 몸짓·말짓·눈짓’은 ‘딴짓(다른 짓)’을 해야 맞다. 손가락도 꼬물거리고, 발가락도 꼼지락거리면서 놀아야 아이답다. 아이 아닌 어른도 매한가지이니, 얌전히 앉아서 듣기만 하거나 외우기만 해서는 둘 다 갇힌다. 이른바 ‘수업·강의’에서도 왁자지껄 떠들고 수다를 펴면서 생각과 마음을 주고받아야 ‘교사(강사)·학생’ 모두 날개를 펴며 신나게 새길을 배운다.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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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밑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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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삶읽기 2023.5.5.

수다꽃, 내멋대로 41 꾸중돌이



  어릴 적에 내 하루는 꾸중으로 열어 꾸중으로 닫았다. 이른바 나로서는 “하루라도 꾸중을 듣지 않거나, 하루라도 매를 맞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히나?” 하고 돌아보던 나날이라고 여길 만했다. 뭔가 입을 벙긋하면서 말을 할라치면 말을 더듬거나 소리가 새는 혀짤배기였고, 하루 세끼 밥자리에 둘러앉으면 김치를 비롯해 못 먹는 곁밥이 잔뜩 있으니 깨작질을 한다고 꾸지람에 꿀밤을 맞아야 했고, 어린배움터(국민학교)에서 뭔가 줄을 세워서 시킬 적에 ‘이미 다 알거나 할 수 있거나 풀 수 있는 일’이어도 더듬더듬하거나 쭈뼛쭈뼛하면서 그르치거나 미처 못 하거나 틀리기 일쑤라, 하루에 적어도 열∼스물은 꾸중에 꿀밤에 매에 회초리에 주먹질에 깎음말을 흠씬 맞아들이곤 했다. 이런 하루가 고단하고 괴로워 “어떡해야 빨리 죽을 수 있을까?” 같은 생각을 날마다 숱하게 했다. 날마다 하도 여러 사람, 그러니까 어버이랑 길잡이(교사)하고 또래나 언니한테 얻어맞다 보니까 ‘맞을 적에 어떻게 고개를 살짝 돌리거나 엉덩이나 허벅지나 종아리를 씰룩하면 덜 아프거나 견딜 만한가’ 하고 살피기도 했다. 날마다 숱하게 얻어맞는 나날을 보내던 어느 때에 ‘맞을 적에 숨을 안 쉬면 아픈 줄 못 느끼고 지나간다’고 깨달았다. 저놈(어른이건 언니이건 또래이건)이 나를 때릴 적에 ‘내 몸은 여기에 있을는지 몰라도 내 넋은 다른 데에 있으니, 넋이 없이 빈 몸뚱이를 아무리 두들겨패더라도 난 아픈 줄 못 느껴’ 하고 여기기 일쑤였다. 어릴 적에는 잘 몰랐으나 커서 알았는데, 얻어맞을 적마다 ‘몸벗기(유체이탈)’를 했다. 그들은 날 두들겨패지만, 나는 몸을 밑에 내려놓고 넋은 위로 올라와서 빤히 지켜본다. 얻어맞는 몸을 지켜보는 넋은 혼잣말을 한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하지 않아? 저렇게 두들겨패면 사람 죽겠는걸?” 얻어터지는 자리로 살아 본 적이 없는 이는 맞는이(피해자)가 어떤 삶이고 마음인지 하나도 알 수 없다. 아프거나 앓아 본 적이 없는 이들이 어떻게 ‘권정생 할아버지’처럼 아파하거나 아픈 이웃을 알 길이 있겠는가? 하나도 없다. 목숨을 내려놓자는 생각은 하루에도 끝없이 했다. 꾸중을 들으며, 김치도 못 먹고 저 밥도 못 먹어서 “넌 한국사람이 아니야!”란 말을 날마다 적어도 석 판은 들으며 살아도, 스스로죽음(자살)을 그리지는 않았다. 스스로 숨을 끊는 길이 이 수렁에서 벗어나는 가장 빠르거나 나은 길일까 하고 날마다 헤아리기는 했으나, “내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고 해서 울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겠구나! 아니, 어머니는 하루쯤 울어 주실 수 있겠구나.” 하고 느끼자, 더더욱 스스로죽음(자살)은 안 하기로 다짐했다. 얻어맞으면서 빙그레 웃고, 얻어터지면서 다시 일어서서 “그래, 더 때려 봐?” 하고 눈을 똑바로 마주보면서 한 마디를 얹고서 더 얻어터지는 하루를 보냈다. 덩치도 키도 힘도 훨씬 큰 또래나 언니나 어른이 흠씬 두들겨팰 적에는 그야말로 넋이 나갈 노릇이었지만 악착같이 견디었다. 열다섯 살 즈음 이르러, 우리 언니가 집어넣은 ‘특전무술 도장’에 들어가서 ‘여태 얻어맞은 주먹질보다 더 얻어맞으면’서 버틴 뒤로는, 스물한 살에 들어간 싸움터(군대)에서 얻어맞을 때까지 더 얻어맞을 일은 사라졌다. 그들(어버이·길잡이·또래·언니)은 왜 나를 두들겨패거나 꾸중했을까? 왜 그들은 날마다 그 짓을 되풀이했을까? 나는 왜 날마다 얻어맞으면서 여덟∼열다섯 살을 살아냈고, 싸움터에서 스물하나∼스물두 살에 죽음벼랑에 내몰려야 했을까? 때리고 밟고 막말을 일삼는 그들 눈을 가만히 바라보면 어느 누구한테서도 ‘반짝이는 별빛’이나 ‘따뜻한 사랑’이 안 보였다. 얻어맞거나 꾸중을 들으며 늘 속으로 생각했다. “아, 이들은 사랑을 받은 적도, 사랑을 배운 적도, 스스로 사랑을 그리거나 생각한 적도 없구나? 그렇다면 나는 어떡해야 하지? 나도 나이를 먹으면 동생을 때려야 하나? 아니면, 나는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철이 들면서 참된 어른이 되어 사랑을 느끼고 찾고 배우고 맞아들이고 온몸으로 녹여내어 둘레에 빙그레 웃음짓으로 보여주면 될까? 그나저나 날마다 얻어터지는 내가 사랑을 스스로 찾을 수 있을까?” 어느새 쉰 살이란 나이에 이르고서 돌아보자니, 내가 ‘어른’이 되었는지, ‘철이 들었’는지, ‘사랑을 보거나 아는’지 하나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나한테 심은 씨앗은 언제나 하나 ‘사랑’인 줄 안다. 꾸중돌이는 사랑씨앗을 손바닥에 얹고서 품으려고 웅크리면서 모든 발길질과 주먹질과 깎음말을 흠씬 맞아들이는 길을 걸어왔다.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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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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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삶읽기 2023.4.30.

수다꽃, 내멋대로 40 모르는 책



  책집에 가면 ‘모르는 책’을 살펴서 읽고 산다. ‘아는 책’이나 ‘이미 읽은 책’을 다시 사기도 하는데, 이때에도 ‘예전에 읽어서 안다는 마음을 버리고, 오늘 처음으로 만나는 책’이라 여기면서 바라본다. 책숲마실(책집마실)이란, 모르는 책을 두근두근하는 마음으로 만나면서, 새록새록 새기려는 꿈으로 읽고서, 싱글벙글 웃음꽃으로 살림을 스스로 짓는 매무새를 가다듬는 나들잇길이라고 느낀다. 책시렁을 돌아볼 적에는 ‘읽을 책’이나 ‘건사할 책’을 찾는다고 할 텐데, “찾는 책을 찾을 마음”이 아니라 “책집에 있는 책을 집어들어 읽을 마음”이다. 어느 책집에서나 책집지기하고 책손 사이에서는 “뭐 ‘찾는 책’ 있으셔요?” “네, 이런저런 책 있나요?”라든지 “사장님, 그런저런 책 있나요?” “네, 그런 책은 있고, 저런 책은 없습니다.” 같은 말이 자주 오간다. 그러나 나는 어느 책집에 가든 “책 좀 보러 왔습니다.” 하고 짧게 말하고는 책시렁만 쳐다본다. 책집에 가면 ‘그곳에 있는 책’을 보려는 마음이다. ‘그 책집 그 책집지기가 여태 건사하고 추스르고 갈무리하고 품은 책’을 돌아보면서 ‘그 책집이 깃든 마을과 고을과 고장에 흐르는 숨결’을 느끼면서 읽는다. 더 좋은 책이나 훌륭한 책을 바라거나 찾은 적이 없다. 그 책집에 있는 책을 문득 읽다가 장만하고는, 집으로 돌아와서 다시 읽어 보는데 참 아름답거나 사랑스럽다고 느끼는 책이 있을 뿐이다. 집으로 돌아와서 다시 읽고 보니 어쩐지 얄궂거나 허술하거나 모자라구나 싶다고 느끼는 책도 꽤 있다. 아직 모르던 책을 처음으로 만나거나 새삼스레 만나서 아름답다고 느낄 적이든, 이미 알든 여태 몰랐든 읽고 되읽는 사이에 허접하다고 느낄 적이든, 이 푸른별에 다 다른 사람이 다 다르게 바라보고 하루를 살아가는구나 하고 돌아본다. 저마다 뜻이 있으니 저마다 다르게 이야기를 여민다. 저마다 하루를 살아가니 저마다 다른 눈길로 오늘을 바라본다. 낯익은 이름(글쓴이·펴냄터)에 매이면 눈썰미가 흐리게 마련이다. 낯선 이름으로 한 발짝 다가서면 눈망울이 빛나게 마련이다. 조각(지식·정보)을 외우려고 옆에 놓는 책이 아니다. 슬기(어진 눈빛·넋)를 북돋우면서 깨우려고 곁에 두는 책이다. 열 벌을 읽었든, 쉰 벌을 되읽었든, 다시 들출 적마다 ‘모르는 책’이라는 마음으로 차근차근 짚고 새길 줄 안다면, 어느 책을 손에 쥐더라도 스스로 마음을 가꾸면서 꽃으로 피어난다. ‘남들이 많이 읽는 책’이라든지 ‘큰보람(큰상)을 받은 책’을 물결에 휩쓸리듯 빌리거나 장만해서 읽는다면 ‘내 눈(우리 눈)’을 스스로 잊다가 잃으면서, 틀에 박힌 굴레에 잠겨들면서도 굴레를 못 느끼기 일쑤이다. 한집에서 살아가는 아이어른 사이는 날마다 얼굴을 마주하지만 날마다 새롭게 바라보면서 어우러지는 사이로 살기에 서로 반갑고 포근하고 아늑하다. 누가 어제 설거지를 하다가 그릇을 깼다고 이 일을 내내 들먹인다면 한집안이 아니다. 밤마다 고요히 잠들면서 꿈을 그리고, 아침마다 새로 깨어나면서 새마음에 새몸으로 어우러지는 보금자리이다. 어제 읽은 책이어도 오늘 읽을 적에는 다르다. 지난해에 읽은 책도 올해 읽으면 다르다. 숲에서 자라는 나무는 해마다 다르지. 해마다 다를 뿐일까? 날마다 다르다. 어느 하루라도 똑같은 모습이거나 숨결인 나무는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나무를 자꾸 가지치기를 한다. 모든 나무가 날마다 철마다 해마다 다른데, 늘 다르게 자라는 숨결을 ‘가지치기’란 이름으로 싹둑 쳐낸다. 서울(도시)에서는 나무가 나무스럽지 않다. 꽃도 꽃스럽지 않다. 책도 책스럽지 않다고 할 만하다. 줄기가 곧고 길게 뻗으면서 가지가 숱하게 자라는 나무에 끝없이 돋는 새잎이 찰랑찰랑 춤추는 빛살을 느낄 적에 비로소 ‘나무를 조금 보았다’고 여길 만하다. 나무마다 깃드는 나비는 다 다르다. 나무마다 어떤 나비가 찾아드는지 살피고, 나무 한 그루에 새가 얼마나 자주 찾아오는가를 볼 수 있다면, ‘나무를 조금 더 보았다’고 느낄 만하다. 무럭무럭 자라는 나무처럼 책을 읽고 마음을 가꾼다. 앞으로 얼마나 클는지 모르지만 두근두근하는 마음으로 나무를 바라보고, 책집에서 책시렁을 돌아본다. 우리는 ‘모르는 줄 알기’에 배운다. ‘모르는 줄 모른다’면 배우지 않아 늙고 만다. ‘모르는 줄 아는 눈빛’으로 ‘아직 모르는 책’을 찾아서 새삼스레 한 발짝을 뗀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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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삶읽기 2023.4.29.

수다꽃, 내멋대로 39 사전 사진 사람



  말더듬이에 혀짤배기인 몸으로 살기란 만만하지 않았다. 어릴 적에는 날마다 꾸지람이나 놀림을 받았고, 때로는 얻어맞았다. 어릴 적 다닌 배움터(국민학교)는 가난한 마을 아이들이 우글우글 모였고, 똑소리 나는 참한 가시내가 많았는데, 6학년이던 열세 살에, 부반장을 맡은 가시내가 “동무는 놀리지 않아!” 하고 큰소리를 내주어, 이때 뒤로는 더 놀림받는 일은 없었다. 열 살이던 4학년에 마을 할배한테서 천자문을 배우는데, 할배는 즈믄(1000) 글씨를 다 가르치지 못 하고 돌아가셨다. 864 글씨였던가? 아무튼 나머지 한자는 스스로 익혔고, 옥편이랑 국어사전을 뒤지면서 ‘말더듬이에 혀짤배기인 어린이’가 소리내기 힘든 모든 한자말을 ‘누구라도 수월하게 소리를 낼 쉬운 우리말’로 바꾸어 말하는 길을 스스로 찾아서 익혔다. 이를테면, 배움책에 “늠름한 위인입니다”라 나오면 “씩씩한 분입니다”로 바꾸어 읽었다. “필요한 사항입니다”라면 “그리 해야 합니다”로 바꾸었다. 1975년에 태어난 또래는 1993년에 첫 수능(수학능력시험)을 치르면서 본고사도 나란히 치러야 했는데, 이때에 ‘언어영역 시험공부를 하려면 국어사전을 읽어야 한다’고 알려주기에, 고1∼고3 세 해 동안 틈틈이 국어사전을 읽었다. 두 벌을 통째로 읽은 날 밤에 책상을 쾅 내리치면서 “아, 이렇게 쓸데없는 영어와 일본말이 가득한 국어사전이라면 차라리 내가 쓰지!” 하고 외쳤다. 그런데 말더듬이 혀짤배기인 몸을 다 바로잡지 않았어도 어쩐지 통·번역이란 일을 하고 싶었고, 1994년에 한국외대 네덜란드말 학과에 들어가지만 정작 그때까지 ‘네한사전(네덜란드·한국말사전)’이 없더라. 1학년이면서 ‘사전원고 입력 자원봉사’를 했다. 어쩜 이 나라는 순 엉터리일까? 말소리가 좀 샌대서 놀리고, 국어사전은 우리말 꾸러미가 아니고, 이웃말(외국말)을 가르친다는 곳에는 이웃말 꾸러미가 아직 없으니 말이다. 통·번역을 하자면 이웃말도 잘 다스려야 할 뿐 아니라, 우리말도 옳게 가누어야 한다. 우리말을 모르는 채 이웃말만 잘 하면, 이웃말을 우리말로 못 옮긴다. 마땅한 노릇이다. 그런데 예나 이제나 우리나라 통역가·번역가는 뜻밖에도 ‘우리말 익히기’에 게으르거나 마음을 잘 안 쓴다. 우리말을 모르면서 어떻게 이웃말을 우리말로 옮길 수 있을까? 나는 우리말꽃(국어사전)이란 꾸러미를 쓰는 길을 얼결에 걸었다. 26살에 《보리 국어사전》을 엮는 편집장·자료조사부장을 맡았는데, 21∼23살에 싸움터(군대)에 가서 강원도 양구 멧골짝에서 벌벌 기어야 하던 무렵에는, 뒷내기(후임병)가 ‘싸움말(군대용어)’을 못 알아듣기에, 모든 뒷내기가 쉽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일본말로 된 싸움말을 우리말로 쉽게 손질해서 알리는 일’을 했다. 하나하나 짚자면, 말더듬이나 혀짤배기가 아니었다면, 새 틀거리(입시제도)가 서지 않았다면, 네한사전 없는 한국외대에 안 들어갔다면, 싸움터에 들어가서 뒹굴지 않았다면, 우리말을 우리말로 바라보는 살림이나 눈길을 스스로 갈고닦자는 마음을 덜 일으켰거나 조금 뒷전으로 미뤘거나 대수롭잖게 여기지 않았으려나 알쏭달쏭하곤 하다. 지나온 날은 하나같이 가시밭이었다고 여길 수 있되, 가시밭길을 꿋꿋하게 헤치면서 ‘살아남자’고 여기던 발걸음이 뜻밖에 스스로 살려주었다고 느낀다. 무엇보다 이동안 “그냥 살아남고 싶지는 않아. 웃고 춤추고 노래하며 살아남겠어. 아니, 웃고 춤추고 노래하며 살림을 짓고 사랑을 배우고 나누며 살겠어.” 하는 다짐을 곁말로 새기는 나날이었다. 인천·서울에 살던 무렵에는 날마다 두세 군데 헌책집을 돌면서 숱한 책을 곁에 두었고, 아이를 낳고서 시골로 옮긴 뒤로는 틈틈이 꾸러미로 온갖 책을 장만해서 새롭게 익힌다. 그리고 시골에서 풀꽃나무랑 들숲바다를 품으면서 ‘말이 없이 말을 들려주는 이웃숨결’을 헤아려서 낱말을 살핀다. 우리가 쓰는 모든 말은 주시경도 세종도 아닌, 아스라이 먼 옛날부터 고장마다 사투리로 스스로 지은 말이다. 밥옷집을 스스로 짓던 시골 순이돌이가 아이를 사랑으로 낳아 돌보며 스스럼없이 지은 우리말이다. 이런 얼거리를 책숲마실을 하면서 늘 새롭게 배웠고, 이러다 보니 마을책집을 둘레에 두루 알리고 싶어 ‘책집 사진’을 1998년부터 찍었다. 사전은, 사랑으로 살림을 지은 삶을 사람이 생각을 담아 마음으로 여민 말을 담는다면, 사진은, 사랑으로 살림을 짓는 삶과 나란히 흐르는 숲빛을 사람이 생각을 실어 마음으로 여민 꿈을 옮긴다고 할 만하다. 사전을 새로 쓰고, 그동안 나온 아쉬운 사전을 곰곰이 읽는다. 사진을 새로 찍고, 이웃이 찍는 사진을 물끄러미 본다. 우리 사이에 숲바람이 불기를 바라고, 서로서로 푸른별에서 어깨동무하는 길을 마음으로 익힐 수 있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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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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