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갑한 가슴



  어쩐지 가슴이 많이 갑갑하다. 생각을 기울이고 다시 기울인다. 남이 나를 갑갑하게 하는가, 내가 나를 괴롭게 하는가.


  어떤 이는 밀양이나 강정에서 갑갑하다고 느낀다. 어떤 이는 공장에서 갑갑하다고 느낀다. 어떤 이는 국회의사당이나 청와대에서 갑갑하다고 느낀다. 어떤 이들은 ㅈㅈㄷ신문을 들추면서 갑갑하다고 느낀다. 요즈음 참 많은 이들은 세월호에서 갑갑하다고 느낀다. 그리고, 어떤 이는 시골 논밭에서 갑갑하다고 느끼며, 어떤 이는 한국말을 놓고 갑갑하다고 느낀다.


  한국사람이면서 한국말을 엉터리로 쓰는 줄 느끼지 못하는 얼거리가 갑갑하다. 나는 참말 이 대목이 갑갑하다. 살며시 눈을 감고 마당에 선다. 후박나무 밑에 서서 생각에 잠긴다. 곰곰이 헤아리고 보니, 한국에서 나고 자란 한국사람 스스로 한국말을 제대로 배우려 하지 않고 한국말을 알맞게 쓰려 하지 않는 모습을 어릴 적부터 익히 보면서 내가 이 길로 왔다고 느낀다.


  일제강점기 때문에 한국사람이 엉터리가 되었다고는 느끼지 않는다. 일제강점기 탓도 있지만, 이 하나뿐이겠는가. 사람을 신분과 계급으로 나누어 어마어마하게 짓밟은 조선 사회 탓도 아주 크다. 조선이라고 하는 ‘임금님 권력 봉건 정치’가 무너질 즈음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양반 문서’를 사겠다고 법석댄 꼴을 돌아본다. 얼마나 괴롭고 아팠으면 양반 문서 따위를 돈으로 사서 끔찍한 푸대접에서 벗어나고 싶었을까. 그런데, 양반 문서를 산대서 신분과 계급이 사라질까? 양반 문서를 못 사는 사람은, 돈이 없는 사람은, 이런 문서를 안 사고 버티는 사람은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


  지난날 한겨레가 양반 문서를 사들이려고 악다구니였듯이 오늘날 한국은 대학교 졸업장을 거머쥐려고 악을 쓴다. 이뿐인가. 돈을 더 많이 거머쥐려고 용을 쓴다. 이러는 동안 스스로 삶을 가꾸는 길하고 아주 동떨어진다. 삶이 아닌 신분이나 계급만 바라보니, 삶이 아닌 돈만 바라보니, 삶이 아닌 겉치레만 바라보니, 우리는 스스로 넋을 잃거나 잊는다.


  삶은 생각으로 짓는다. 생각은 말로 짓는다. 그러니, 스스로 말을 올바로 세우지 못한다면 생각을 올바로 짓지 못할 테니, 삶을 올바로 짓지 못하리라 느낀다. 내가 한국말을 살피면서 한국말을 올바로 다스리려고 하는 일을 하는 까닭은 바로 이 대목에 있다고 느낀다. 나부터 스스로 내 삶을 슬기롭게 짓고 싶기에 내 삶을 짓는 바탕이 되는 생각을 슬기롭게 가누고 싶다. 생각을 슬기롭게 가누고 싶으니 말부터 슬기롭게 다스리고 싶다. 나부터 말과 넋과 생각과 삶을 즐겁고 슬기로우면서 사랑스럽게 지으면서, 내 이웃과 동무도 이녁 말과 넋과 생각과 삶을 이녁 나름대로 즐겁고 슬기로우면서 사랑스럽게 지을 수 있기를 꿈꾼다. 4347.9.29.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내 마음 읽기/람타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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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졸업장



  소설쓰는 김훈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나는 이분이 쓴 책이나 글을 거의 안 읽습니다. 어쩐지 나한테는 안 맞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분이 쓴 책이 새로 나와도 궁금하지 않을 뿐 아니라, 책이 새로 나온 줄 아예 모릅니다.


  엊그제인데, 이웃 한 분이 한 가지 이야기를 알려줍니다. 소설쓰는 김훈이라는 분이 1980년대에 ‘전두환 찬양 기사’를 무척 많이 썼고, 2000년대가 넘은 뒤에는 ‘여성비하’와 ‘인종차별’ 이야기를 줄줄이 쏟아놓았다고 알려줍니다.


  그런가 하고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전두환 찬양 기사’가 궁금해서 살펴보니, 참으로 그악스러운 ‘전두환 용비어천가’를 많이 썼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런 ‘전두환 용비어천가’를 놓고 소설쓰는 김훈을 비판하거나 나무라거나 꾸짖은 사람은 매우 드문 듯합니다.


  그나저나, 소설쓰는 김훈이라는 분은 2000년 10월 5일치〈한겨레21〉하고 만난 자리에서 아마 처음으로 ‘전두환 찬양 기사 자기고백’을 했지 싶습니다. 이 때문에 〈시사저널〉 편집장 자리에서도 물러나야 했다는데, 2002년에 〈한겨레〉 사회부 기자로 특별채용이 되어요. 조금 더 알아보니, 소설쓰는 김훈은 〈한겨레〉에 특별채용으로 들어간 일을 나중에 이야기하는데, 신문사에 들어가니 이녁더러 ‘대학교 졸업 증명서’를 달라고 했답니다. 그래서 ‘대학교 졸업 증명서’는 없고 ‘고등학교 졸업 증명서’는 있으니 그것을 주면 되느냐고 물었다고 해요. 소설쓰는 김훈은 대학교에 살짝 발을 담근 적이 있으나 그만두었기에 ‘고졸 학력’입니다.


  이 대목을 알아보고 나서 문득 내 지난날이 떠오릅니다. 나도 ‘고졸 학력’입니다. 나는 1999년 2월에 〈한겨레〉 이사 한 분한테서 ‘특별채용’ 제안을 받았습니다. 그무렵까지 〈한겨레〉에 없던 특별채용이라고 했는데, ‘신문배달을 하던 젊은이를 기자로 채용’하려고 했어요. 그때에 〈한겨레〉 이사로 있던 분은 나한테 ‘대학교 졸업을 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대학교 교육이 너무 부질없고 제대로 학문을 닦지 않는다고 여겨 자퇴했다’고 말했습니다. 〈한겨레〉 이사로 있던 분은 ‘한겨레는 학력제한을 두지 않으니 괜찮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나는 〈한겨레〉에 못마땅하게 여긴 대목이 있었어요. 특별채용을 한다니 무척 기뻤습니다만, 입사시험 자격으로 토익 점수를 내라 했어요. 그래서 이 대목을 여쭈었지요. 학력제한을 두지 않는다고 하면서 토익 점수를 내라고 한다면, 지원자는 처음부터 대학교 졸업장이 있어야 하는 셈 아니냐고, 영어 시험을 보려 하면 ‘1:1 면접’으로 영어 시험을 보아야 하지 않느냐고 여쭈었습니다. 특별채용이니 입사시험을 안 치러도 되지만, 나처럼 ‘고졸 학력’으로 기자가 되고 싶은 사람이 틀림없이 있을 테니, 그런 조항이 사라져야 한다고 느꼈어요. 졸업장이 아닌 스스로 갈고닦은 솜씨로 서류를 내고 입사시험을 치를 수 있어야 올바르니까요. 그때 〈한겨레〉 이사로 있던 분은, ‘젊은이 말이 맞는데, 회사 규칙이라서 어쩔 수 없다’고 했습니다.


  고마운 제안을 받고 나서 곰곰이 헤아렸습니다. 신문배달을 이제 그만두고 신문기자가 되느냐 하는 갈림길이었습니다. 엉성한 회사 규칙은 회사에 들어가서 얼마든지 바꿀 수 있는 노릇입니다. 그러나 나로서는 그 대목이 자꾸 마음에 걸렸습니다. ‘토익 점수’를 바라는 일은 ‘대학교 졸업장’을 바라는 일하고 똑같습니다. 학력제한이 없다는 말은 허울입니다. 허울을 스스로 없애지 않는다면 제대로 된 신문이 될 수 없습니다. 제대로 된 신문이 될 수 없다면, 〈한겨레〉가 아무리 올바른 목소리로 ㅈㅈㄷ신문을 나무라거나 꾸짖는다 하더라도 스스로 올바른 삶이나 넋이 못 됩니다.


  “말씀이 무척 고맙지만, 아무래도 고졸 학력을 넉넉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조직이지 싶어서, 이사님 제안은 사양하겠습니다. 저는 아무래도 〈한겨레〉 기자가 되는 꿈은 접어야겠습니다. 오늘 술이나 한잔 사 주셔요. 신문배달 월급으로는 술도 못 사 마십니다.”


  소설쓰는 김훈이라는 분은 ‘고졸 학력’이면서 어떻게 신문기자 노릇을 했을까요? 1970년대 신문사에서는 학력제한이 없었을까요? 소설쓰는 김훈은 그무렵에 특별채용으로 뽑혔을까요? 글을 잘 쓰기만 하면 누구라도 신문기자가 될 수 있을까요?


  졸업장은 사람을 알려주지 못합니다. 자격증은 사람을 밝히지 못합니다. 졸업장은 학교를 마친 증명일 뿐입니다. 학교를 마쳤기에 더 많이 배우거나 잘 알지 않습니다. 자격증이 있기에 기계를 더 잘 다룬다든지 어떤 지식이 더 빼어나지 않습니다.


  아기는 어머니나 아버지한테 졸업장을 묻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어버이가 차린 밥을 먹으면서 어버이한테 자격증을 묻지 않습니다. 졸업장이 있어야 문학을 할 수 있지 않습니다. 자격증이 있어야 신문을 만들어 기사를 쓸 수 있지 않습니다. 그뿐입니다. 4347.9.11.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내 마음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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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머리카락



  머리숱이 그리 안 많은 채 태어났습니다. 우리 식구 가운데 왜 나만 머리숱이 적을까 하고 생각하며 어릴 적부터 여러모로 힘들다고 느꼈습니다. 그러나, 머리숱이 적어서 힘들 일이란 없을 수 있어요. 가만히 보면, 내가 머리숱이 적다고 해서 누가 나를 쳐다볼 일이 없으며, 내 머리카락 숫자를 셀 사람도 없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내 적은 머리숱을 쳐다볼는지 몰라’ 하고 혼자 생각할 뿐입니다.

  머리를 감을 때마다 자꾸 빠지는 머리카락을 보면서 ‘숱이 그리 많지도 않은데 이렇게 빠지면 어떡하나’ 하고 여겼습니다. 빠지는 머리카락을 보면서 거울을 들여다보면 참말 머리숱이 훨씬 줄어들었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이렇게 머리숱 걱정으로 살던 어느 무렵, 아마 서른 살 언저리였을 텐데, 머리숱이 줄고 줄어 자꾸 줄면 ‘머리카락을 다 밀고 살면 되지’ 하고 생각했습니다. 머리숱이 자꾸 줄어든다고 걱정할 일 없이, 머리숱이 줄어들면 민머리로 살면 됩니다.

  그러고는 이때부터 거울을 안 보고 삽니다. 집에도 거울을 안 둡니다. 나는 내 머리숱도 안 보지만, 내 낯도 안 봅니다. 내 몸도 안 봅니다. 머리숱이라는 데에 마음을 빼앗길수록 정작 내 모습이 무엇인지를 놓친다고 느꼈어요.

  이렇게 몇 해가 지난 어느 날 문득 한 가지를 알아차렸습니다. 많이 줄었구나 싶던 머리숱이 꽤 늘었습니다. 그렇다고 머리카락이 수북해지지는 않았으나, 예전에는 가까운 이웃이나 동무가 “머리숱이 많이 줄었네.” 하고 말하곤 했는데 “얘, 네 머리숱 다시 늘었네.” 하고 알려주었습니다.

  내 손등과 발등을 뒤덮은 사마귀하고 똑같은 일이었습니다. 손등에 돋은 사마귀는 들여다보고 건드릴수록 늘어날 뿐입니다. 손등에 돋은 사마귀는 안 들여다볼 뿐 아니라 잊어버리면 사라집니다. 머리숱이 줄어든다고 걱정하면서 자꾸 쳐다보니 머리숱은 차츰 나한테서 사라집니다. 머리숱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스스로 걸어갈 길을 즐겁게 걸어가면 머리숱이 돌아옵니다. 4347.8.28.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내 마음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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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나이 있는 양반



  스무 해 앞서 으레 듣던 말을 떠올립니다. 그무렵 내 글을 읽던 이들은 ‘나이도 어린’이나 ‘나이가 어린’과 같은 말을 참 흔하게 썼습니다. 이런 말은 마흔 살이 될 무렵까지 자주 들었습니다. 이런 말을 들을 적마다 왜 이렇게 나이를 따지려 하나 알쏭달쏭했습니다. 이야기를 나누려면 ‘이야기’를 보아야지, 왜 자꾸 ‘나이’를 보려 하나 싶어 쓸쓸했습니다. 나이를 들추려는 사람하고는 아무 이야기를 나눌 수 없다고 느꼈습니다. 이야기가 아닌 나이를 보니까요. 이야기가 아닌 나이를 생각하니까요.


  어떤 이는 나이조차 아닌 ‘학번’을 묻습니다. 그래서, “저는 고졸입니다. 학번이란 무엇인가요?” 하고 되묻는데, 이렇게 되물어도 “그래도 학번으로 치면 뭔지 알지 않느냐?” 하면서 끝까지 ‘나이 아닌 학번’으로 사람을 따지거나 재려는 사람이 꽤 있었습니다. 그래, 참다못해 “저는 토끼띠입니다.” 하고 말했더니, 띠로 나이를 헤아릴 줄 모르는 사람도 많더군요.


  글을 쓰려면 어느 만큼 나이를 먹어야 할까요? 어떤 글을 쓸 만한 사람은 어느 만한 나이를 먹은 사람뿐일까요?


  모차르트나 베토벤 같은 사람을 안 뒤에는, 내 글을 놓고 ‘나이’를 들먹이는 사람한테 “모차르트가 지은 노래를 들으면서, 모차르트가 몇 살에 이 노래를 지었는지를 따질 생각이느냐?” 하고 물었습니다. 노래가 아름다우면 아름다운 빛을 느낄 노릇이고, 노래가 사랑스러우면 사랑스러운 숨결을 느낄 일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물으면 엉뚱하게 “네가 모차르트인 줄 아니?” 하고 되묻는 사람이 퍽 많았습니다.


  세계대회에서 1위를 거머쥐는 운동선수는 나이가 어리거나 젊기에 1위를 거머쥐지 않습니다. 스스로 솜씨를 쌓고 재주를 키웠기 때문에 1위를 거머쥡니다. 무척 어린 나이에 테니스 대회나 골프 대회에서 1위를 차지하기도 하고, 무척 늙은 나이에 테니스이건 수영이건 골프이건 1위를 차지하기도 합니다. 그뿐입니다. 스스로 어떤 일을 할 수 있는 까닭은, 스스로 몸과 마음을 하나로 다스리면서, 스스로 나아갈 길을 걸어가기 때문이라고 느껴요.


  나는 어느새 마흔 살 나이로 접어듭니다. 마흔 살이 지나니, 이제 내 글을 읽으면서 ‘나이도 어린’이나 ‘나이가 어린’이나 ‘나이가 젊은’과 같은 말을 하는 사람이 부쩍 줄어듭니다. 아니, 이제는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지 싶습니다. 그리고, 예전과 달리 ‘나이 있는 양반’이라든지 ‘나이가 있는 사람’이라든지 ‘나이를 먹은 어른’이라든지 ‘나이도 먹고 애도 있는 양반’과 같은 말을 듣습니다.


  이 나이를 먹고 다시금 ‘나이’ 소리를 들으니 헤헤 하고 웃음이 납니다. 히히 하고 웃음이 터집니다. 내 나이가 어리다 할 적에는, 또 내 나이가 많다 할 적에는, 나는 내 이웃한테 어떤 모습인 셈일까 궁금합니다. 나이가 어리면 ‘이렇게 해야’ 하고, 나이가 있으면 ‘저렇게 해야’ 할까 궁금합니다.


  나이가 어려도 깨달은 사람은 깨달은 사람입니다. 나이가 많아도 안 깨달은 사람은 안 깨달은 사람입니다. 나이가 어려도 참거짓을 바라볼 줄 아는 사람은 바라볼 줄 아는 사람입니다. 나이가 많아도 참거짓을 가릴 줄 모르는 사람은 가릴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아이들은 서로 나이를 묻지 않습니다. 어른이라는 사람들만 자꾸 이웃과 동무한테, 또 아이들한테까지 나이를 묻습니다. 이러다 보니, ‘나이를 안 묻고 살던 아이들’조차 동무끼리 나이를 따지면서 누가 오빠이니 언니이니 누나이니 동생이니 하고 자꾸 금을 긋고 맙니다. 4347.7.17.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빛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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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죽 찢어진 왼팔



  내 오른손은 사마귀로 뒤덮였다가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내 왼팔은 손목 언저리부터 어깨에 이르기까지 죽 찢어진 적이 있습니다. 국민학교 몇 학년 무렵인지는 떠오르지 않습니다. 다만, 국민학교 이학년이나 삼학년 무렵이었지 싶습니다. 그때 동무들은 서로 ‘담력 내기’를 곧잘 했습니다. 그무렵 살던 동네는 5층짜리 아파트가 열다섯 동이 모인 공동주택단지였는데, 모래밭 놀이터가 두 군데 있었고, 공동주택인 아파트에 공동난방을 하면서 나오는 연기를 내뿜는 커다란 굴뚝이 둘 있었어요. 아파트 지킴이 할배가 알아채면 무섭게 다그치며 나무라지만, 우리들은 5층 아파트보다 더 높이 솟은 굴뚝에 붙은 사다리를 타고 몰래 올라가면서 놀곤 했습니다. 그리고 아파트에 전기를 넣으려면 변압기인지 전압기가 있어야 했으니, 이 시설이 놀이터 구석에 있었고, 쇠가시그물로 높게 울타리를 쳤어요. 그런데, 이 쇠가시그물 맨 위쪽은 5센티미터쯤 판이 놓였습니다. 쇠울타리를 버티는 판이었겠지요. 이 판 둘레로 날카롭고 뾰족한 쇠가시그물이 잔뜩 있었는데, 동무들 사이에서 쇠울타리를 잡고 올라가서, 위쪽 5센미터밖에 안 되는 좁다란 판을 걷는 ‘담력 내기’를 하곤 했어요. 거의 모두 몇 발자국 걷지 못하고 놀이터 모래밭으로 펄쩍 뛰어내렸는데, 나는 “이 끝에서 저 끝까지 갈 수 있어!” 하고 외쳤어요.


  어디에서 이런 마음이 솟았을까요. 동무들은 “그럼 해 봐!” 하고 소리쳤고, “얼마든지 하지!” 하면서 척척 쇠울타리를 잡고 올라가서, 좁은 판을 천천히 한 걸음씩 떼면서 걸었습니다. 아주 많이 걸었어요. 동무들은 모두 입을 헤 벌리며 놀랐습니다. 그런데, 아주 많이 걷다가 거의 끝에 다다를 무렵 그만 미끄러졌어요. 미끄러지면서 몸이 흔들렸고, 몸이 흔들리면서 모래밭으로 쿵 떨어졌는데, 쿵 떨어지면서 날카롭고 뾰족한 쇠가시그물에 왼팔이 깊고 길게 찢겼습니다.


  떨어지면서 거의 넋을 잃었지 싶어요. 그래도 죽지는 않았다고 느꼈어요. 어떠한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어떠한 모습도 보지 못했어요. 그저 내 둘레로 동무들과 아이들이 몰려들어서 울고 소리치는 모습만 멍하니 보았어요. 그 다음에는 우리 형이 어머니한테서 크게 꾸지람을 듣는 소리와 모습을 멍하니 보았고, 그 다음에는 병원에 드러누운 모습을 보았어요.


  나는 이때 일이 아주 커다랗게 아로새겨졌기에 국민학교 높은학년에서도 중·고등학생 때에도, 나중에도 어머니와 형한테 이 얘기를 하곤 하는데, 아무도 이때 일을 떠올리지 못합니다. 나더러 거짓말을 지어서 한다고 말합니다.


  문득 돌아보면, 이무렵부터 나는 ‘내 몸을 떠나서 나를 바라보기’를 할 수 있었는지 몰라요. 내 몸에서 아픈 데를 느끼지 못하면서 나를 보았으니, 내 몸을 떠나서 나를 보았겠지요.


  그동안 잊던 한 가지가 얼마 앞서 생각났는데, 어머니는 나더러 내 왼팔을 쳐다보지 말라고 했습니다. 병원에서는 내 왼팔이 너무 길고 깊게 찢어져서 도무지 꿰맬 수 없다 했어요. 나이가 어려 마취를 함부로 할 수 없다고 했어요. 어머니가 나한테 했던 말은 “거기 쳐다보지 마. 다 괜찮아. 다 나아.”였지 싶어요. 나는 이 말을 듣고는 깊이 잠들었고, 병원에서 나와 학교를 다시 다닐 적에도 왼팔을 쳐다보지 않으며 지냈습니다. 자꾸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도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리며 살았어요.


  이렇게 한참 지내다가 왼팔이 찢어졌다는 생각까지 잊던 어느 때, 내 왼팔을 문득 보았는데, 감쪽같이 생채기가 사라졌습니다. 딱히 왼팔에 무엇을 했다고는 느끼지 않아요. 어머니가 날마다 소독만 해 주었겠지요. 오십 센티미터 남짓 찢어졌을 텐데, 이 생채기는 무엇이었을까요. 이 생채기는 왜 나한테 왔다가 사라졌을까요.


  내 왼팔이 찢어졌다가 아문 지 서른 해쯤 됩니다. 이제 나는 두 아이와 살아가는 아버지입니다. 아이들이 넘어지거나 부딪혀서 어딘가를 다칠 적에, 피가 나거나 찢어지거나 할 적에, 아이들한테 늘 말합니다. “괜찮아. 다 괜찮아. 다 나아. 그러니 그냥 놀아.” 4347.7.6.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빛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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