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레이]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 아웃케이스 없음
벤 스틸러 감독, 벤 스틸러 외 출연 / 20세기폭스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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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터가 꿈꾸면 이루어진다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The Secret Life of Walter Mitty, 2013


  월터 미티라고 하는 사람은 영화 〈월터가 꿈꾸면 이루어진다(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The Secret Life of Walter Mitty)〉에서 잡지 《LIFE》에서 필름인화를 하는 일을 열여섯 해를 했다고 나옵니다. 월터 미티라고 하는 사람은 어릴 적에 ‘모히칸 머리’도 하고 ‘스케이드 보드’를 매우 잘 탔다고 해요. 그런데 어릴 적에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뒤로는 ‘꿈꾸는 삶’을 잊고 말아요. 때때로 멍때리기를 하기는 하지만 꿈꾸기로는 좀처럼 나아가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사진잡지사에서 열여섯 해 동안 필름인화를 맡으면서 한길을 걸었어요.

  월터 미티는 앞으로도 필름에 파묻혀서 ‘사진작가들이 온누리를 누비는 이야기’를 필름으로만 만날 수 있습니다. 월터 미티는 스스로 온누리를 누비지는 않고 ‘다른 사람이 온누리를 누비는 이야기’를 먼발치에서 필름으로만 구경하다가 삶을 마무리지을 수 있어요. 그런데 이런 월터 미티한테 큰 고빗사위가 찾아옵니다. 사진잡지 《LIFE》가 더 나오지 못하고 말아요. 인터넷 사회로 크게 구비치면서 바뀌는 물결에 《LIFE》도 더는 어쩌지 못한다고 해요. 《LIFE》를 함께 짓던 모든 사람이 회사를 떠나야 합니다. 이제 마지막 호를 내놓고 모두 어디론가 사라져야 하는데, 마지막 호 겉그림(표지사진)이 될 필름이 어디에 있는지 종잡지 못합니다. 이리하여 월터 미티는 ‘마지막 호 겉그림이 될 필름’을 찾으려는 마음으로, 태어나서 처음으로 ‘모험’하고 ‘여행’을 하지요. 어릴 적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잊고 말았던 꿈을 이제부터 비로소 꾸기로 해요.

  미국 로스앤젤레스를 떠난 월터 미티는 그린란드로 갑니다. 그린란드에서 ‘주정뱅이 헬리콥터’를 타면서 목숨줄이 어디로 가는가를 놓고 아찔아찔합니다. 모험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으니, 주정뱅이 헬리콥터에서 북극 바다로 뛰어들어야 하지요. 모든 것이 꽁꽁 얼어붙은 북극 바다에 뛰어든 월터 미티는 상어하고 싸워야 하는데,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어도 여기에서 끝나지 않아요. 아이슬란드로 가야 하고, 아이슬란드에서 자전거를 타다가 두 다리로 달리다가 스케이드 보드를 얻어서 가파른 내리막을 가로지릅니다. 화산이 터지는 곳에서 겨우 벗어나고는, 이제 내전으로 아슬아슬한 아프가니스탄으로 들어가지요.

  월터 미티는 오직 필름 한 장을 찾으려고 이런 모험이랑 여행을 합니다. 그리고 이 모험이랑 여행을 하면서 차근차근 깨달아요. 왜 사는가 하는 대목을 아주 천천히 느리게 깨닫습니다. 돈 때문에 일자리를 얻어서 살아야 할까요? 삶을 아름답게 누리고 싶어서 일자리도 찾고 돈도 벌어야 할까요? 꿈을 마음에 품고서 기쁜 사랑으로 하루를 누리고 싶어서 돈도 벌거나 일자리를 찾을까요? 월터 미티는 이제껏 어떤 길을 걸었을까요?

  사진잡지 《LIFE》에 실을 겉그림 필름은 아주 가까운 곳에서 찾아냅니다. 아니 이 필름은 늘 이곳(그곳)에 있었어요. 사진작가는 바로 월터 미티 코앞까지 와서 넌지시 ‘선물’을 남겼거든요. 다만 월터 미티는 사진작가 한 사람이 이녁한테 준 선물이 무슨 뜻인가를 하나도 몰랐어요. 앞으로 새로운 길을 가야 하는 월터 미티 스스로 새로운 꿈을 지어야 한다는 뜻을 조용히 보여주었는데, 월터 미티는 스스로 꿈꾸기를 하지 않은 터라, 사진작가 한 사람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미처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월터 미티는 코앞에 있는 삶이랑 꿈이랑 사랑을 도무지 모르고 살아온 ‘오늘날 모든 사람들’을 나타내는 셈인데, 사진작가 한 사람은 아프가니스탄 어느 깊은 멧자락에서 눈표범을 사진으로 찍을 적에 월터 미티가 스스로 깨달아야 하는 대목을 고요히 알려줍니다. 무엇인가 하면 바로 ‘내가 나를 사랑하면서 내가 나한테 스스로 선물을 주어야 한다’는 대목을 몸소 보여주지요. 눈표범이 ‘카메라 렌즈’에 잡혔어도 단추를 안 누르면서 그저 지켜보기만 하거든요. 바로 그 한때를 지켜보면서 기쁨을 누리는 몸짓을 월터 미티한테 보여주어요. 월터 미티가 스스로 무엇을 깨닫고 배워서 새 길을 걸어야 하는가를 가르칩니다.

  영화 〈월터가 꿈꾸면 이루어진다〉는 이 이름 그대로입니다. 월터가 꿈꾸기에 이루어집니다. 월터가 꿈꾸지 않으면 안 이루어집니다. 월터가 꿈꾸기를 하지 않으면 스스로 꿈이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월터가 꿈꾸기를 하면 스스로 꿈으로 나아갈 삶을 스스로 알고 깨달으며 그대로 나아갑니다. 우리도 누구나 스스로 꿈꿀 때에 앞으로 한 걸음을 내딛어요. 우리도 저마다 스스로 꿈을 지을 때에 새로운 삶으로 거듭납니다. 4349.1.16.흙.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6 - 영화읽기/영화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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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레이] 마고리엄의 장난감 백화점 : 렌티큘러 777장 넘버링 풀슬립 한정판 - 스카나보 킵케이스 + 36p 포토북
자크 헬름 감독, 나탈리 포트만 외 출연 / 인포(INFO)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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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고리엄네 놀랍고 큰 가게 (마고리엄의 장난감 백화점)
Mr. Magorium's Wonder Emporium, 2007


  안 된다고 하는 생각을 심으면 안 되기 마련입니다. 아닐까요? 된다고 하는 생각을 품으면 되기 마련입니다. 안 그러할까요? 그대로 하면 되기에, 참말 그대로 해야 할 뿐입니다. 그대로 하지 않으면 안 되기에, 참말 그대로 안 하는 사람들은 아무것도 못 할 뿐입니다. ‘just do’라는 말은 ‘그냥 하’거나 ‘그대로 하’라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이론으로 따지거나 재지 말고, 마음에 꿈을 씨앗 한 톨처럼 심으면서 즐겁게 하라고 하는 이야기를 들려주어요.

  ‘마고리엄’이라고 하는 사람이 이백마흔세 해를 살면서 빚은 ‘놀랍고 커다란 가게’는 한낱 ‘장난감 가게’가 아닙니다. 이 가게는 놀라우면서 커다란 ‘magic’ 가게예요. 마술과 같은 힘으로 움직이는 가게입니다. 겉보기로는 장난감이 춤을 추거나 날거나 꽃피우는 가게입니다만, 이 가게는 무엇이든 스스로 꿈꾸는 대로 이루어지는 곳이에요. 마고리엄이라고 하는 사람은 이백마흔세 해를 살면서 이 가게를 꾸렸고, 이백마흔 세 해라고 하는 나날은 ‘이 가게를 물려받을 만한 새로운 사람’이 나올 때까지 아기자기하게 가꾸고 꾸며야 하는 나날이라고 할 수 있어요.

  자, 그러면 마고리엄이라고 하는 사람은 어디로 갈까요? 이백마흔세 해를 지구별에서 산 마고리엄이라고 하는 사람은 앞으로 무엇을 할까요? 이녁한테 이백마흔세 해란 ‘지구라는 별에서 해 볼 수 있는 꿈을 모두 이룬 나날’입니다. 그래서 이 지구별을 떠나서 다른 별로 가요. ‘마고리엄네 가게’에서 종이비행기를 날려서 새로운 별로 떠나요. 몸뚱이는 지구별에 내려놓고 오직 넋만 다른 별로 띄워요. 이러면서 주사위를 남겨요. 나무로 빚은 주사위를 ‘마호니’라는 젊은 아가씨한테 남기면서 가게를 물려주지요.

  그런데 마호니라는 젊은 아가씨는 갑작스레 닥친 일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는지 모릅니다. 그저 ‘일자리’를 잃었다고 하는 생각에 ‘내키지도 않는 피아노 연주’ 일자리를 찾아나섭니다. 영화에 나오는 회계사라고 하는 아저씨는 놀이를 할 줄 모르고 오직 일만 하는데, ‘일’을 ‘죽어도 안 멈추’겠다고 아홉 살짜리 아이한테 버젓이 외치기까지 해요.

  더할 나위 없이 어리석은 ‘어른’입니다만, 어른들은 스스로 얼마나 어리석은지 잘 모릅니다. 죽어라 일만 하기에 죽는 줄 몰라요. ‘죽어라 일만 하’는 삶이란 그저 ‘죽음으로 달리는 삶’인 줄 깨달으려 하지 않아요.

  마고리엄은 이녁 가게에서 일하는 두 사람(아가씨와 아이)한테 조금도 ‘강요’를 하지 않습니다. 아주 부드럽게 ‘꿈짓기(magic)’를 보여주면서 가르치고, 두 사람이 이러한 꿈짓기를 언제 어디에서나 마음껏 할 수 있도록 이끌어요. 마고리엄이 마호니한테 남긴 나무주사위는 양자물리학에서 나오는 바로 그 주사위이면서, 아인슈타인이 양자물리학을 못 받아들이면서 외친 어리석은 한 마디에 나오는 주사위이기도 합니다(영화를 눈여겨보신 분이라면 영화에 ‘아인슈타인 인형’이 나오는 대목을 안 놓쳤으리라 봅니다).

  어른들은 잘 알아야 합니다. 술을 퍼마시고 노래방에 가거나 남녀 사이에 살섞기를 해야 ‘놀이’가 아닙니다. 놀이는 웃으면서 어깨동무하는 사람들이 기쁘게 춤추고 노래하면서 삶을 늘 잔치처럼 일구는 몸짓입니다. 소꿉놀이가 놀이이고, 가위바위보가 놀이이며, 술래잡기와 흙장난이 놀이입니다. 레크리에이션이나 여가생활이나 여행은 놀이가 아니에요. 마음을 홀가분하게 가다듬으면서 고운 생각을 꿈으로 지어서 심을 수 있을 때에 비로소 놀이입니다.

  이제 우리는 똑똑히 보고 슬기롭게 알아야 합니다. 스스로 꿈을 지어야 꿈을 이루고, 스스로 꿈을 짓지 않으니 꿈을 못 이루는 삶인 줄 알아야 합니다. 남(권력·사회·정치·교육·문화·종교)이 시키는 대로 따르거나 휩쓸리기에 꿈을 지어서 품을 겨를이 없이 너무 바쁩니다. 남이 하라는 대로 휘둘리기에 너무 바쁜 탓에 나 스스로 나를 못 볼 뿐 아니라 내가 나를 못 믿는 일마저 벌어져요. 남이 시키는 일을 해서 돈을 벌어야 비로소 ‘먹고살’ 수 있는 줄 잘못 알아요. 〈마고리엄네 놀랍고 큰 가게(마고리엄의 장난감 백화점)〉는 우리가 저마다 얼마나 슬기롭고 아름다우면서 착한가 하는 대목을 재미나게 일깨우면서 보여주는 아기자기한 영화입니다. 4349.1.8.쇠.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6 - 영화읽기/영화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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털실 각시

the yarn princess, 1994



  어머니 자리에 서는 사람은 온마음을 기울여서 아이를 사랑합니다. 어머니 자리에서는 언제나 온마음을 쏟는 사랑으로 삶을 짓습니다. 그러면 아버지는? 아버지 자리에서도 이와 같아요. 온마음을 기울이는 사랑이 아니라면 아이를 마주할 수 없습니다. 온마음을 쏟는 사랑일 적에 비로소 살림을 알뜰살뜰 지을 수 있어요.


  사랑이 아니고서는 삶이 될 수 없고, 사랑이 아니라면 살림을 지을 수 없습니다. 아주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이 대목을 제대로 가르치거나 배우는 얼거리가 어느덧 뚝 끊어지거나 싹둑 잘렸지 싶습니다. 한국에서도 다른 나라에서도 이 같은 이음고리가 자꾸 끊어지거나 잘리지 싶어요. 그렇지만 이 대목을 잊지 않는 사람은 어김없이 있고, 이 대목을 자꾸 되새기거나 되살리면서 스스로 새로 일어서는 삶과 사랑과 살림이 되려고 힘쓰는 사람이 있어요.


  영화 〈털실 각시(the yarn princess)〉는 털실처럼 보드랍고 고우며 포근한 숨결인 어머니 사랑을 보여줍니다. 때로는 엉키기 쉽고, 때로는 끊어질 동 말 동하는 털실이지만, 이 털실로 짠 옷은 참으로 보드랍고 고우며 포근합니다. 털실로 짠 옷이 헝클어지더라도 얼마든지 다시 짜거나 뜰 수 있어요. 게다가 아이들 몸이 자라는 결에 맞추어 얼마든지 다시 풀어서 새로 짜거나 뜰 수 있지요.


  영화 〈털실 각시〉에 나오는 어머니는 ‘어머니가 되려고 태어난 숨결’이고, 이러한 숨결대로 아이들을 사랑으로 마주합니다. 사회에서는 어딘가 떨어져 보이는 사람일는지 몰라도, 남보다 느리거나 더디다고 할는지 몰라도, 아이들 앞에서 더없이 따사로운 품이고 곁님 앞에서도 가없이 너른 품입니다. 사회에서 보기에 할 줄 아는 일이 없다고 할 테지만, 못할 수 있는 일도 없다고 할 수 있어요. 다만, 느리거나 더뎌 보이겠지요. 다른 어머니나 다른 사람처럼 후다닥 해내지는 못하겠지요.


  아이라면 어버이 사랑이 무엇인지 가슴으로 압니다. 아이라면 어버이 사랑을 물질이나 재산이나 겉차림으로 읽지 않습니다. 아이라면 어버이 사랑을 가슴으로 읽을 뿐 아니라, 가슴으로 느끼고, 가슴으로 노래해요. 어버이도 이와 같지요. 아이한테 물려주거나 보여주거나 가르치는 사랑은 책이나 지식이 아닌, 온마음을 기울여서 빚는 따사로우면서 너른 살림으로 물려주거나 보여주거나 가르칩니다.


  누구나 아이로 태어나서 어른이 됩니다. 느즈막하게 철이 들 수 있고, 일찌감치 철이 들 수 있는데, 모든 아이는 어른으로 자랍니다. 그리고 모든 어른은 아이로 태어나서 살아온 만큼 아이다운 넋을 언제나 가슴 가득 건사하지요. 아이다운 맑은 눈빛으로 사랑을 북돋우고, 아이답게 밝은 목소리로 사랑을 노래합니다. 어버이가 어버이다울 수 있는 까닭은 아이에서 어른으로 자라는 동안에 즐겁고 슬프며 아프거나 기쁜 모든 이야기를 찬찬히 아로새겨서 들려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가 어머니답고 아버지가 아버지다운 까닭은 ‘내가 겪은 일을 안 물려주’거나 ‘내가 겪은 일을 물려주’겠다는 넋이 아니라, 언제까지나 서로 아끼며 헤아리는 사랑이 되어 삶을 짓겠다는 넋이기 때문입니다.


  아이를 낳아서 돌보는 어버이는 하나하나 새롭게 배웁니다. 아이를 지킬 뿐 아니라 사랑하려고 삶을 새롭게 배웁니다. 아이를 돌볼 뿐 아니라 가르치려고 사랑을 새롭게 배웁니다. 아이를 이끌 뿐 아니라 아이 스스로 일어서도록 일깨우려고 살림을 새롭게 배웁니다.


  배우는 사람이기에 어버이요, 배울 줄 아는 사람이기에 어른입니다. 배우는 사람이기에 가르칠 수 있고, 배울 줄 아는 사람이기에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아이는? 아이는 기쁨으로 사랑을 가르치는 어버이 곁에서 빙그레 웃으면서 배울 수 있는 숨결입니다. 슬픔이나 괴로움이 있어도 어버이가 들려주는 모든 이야기를 똑똑히 알아채면서 그예 사랑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넋이 바로 아이입니다. 4348.12.31.나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영화읽기)


https://www.youtube.com/watch?v=MOPaIUNKd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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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노키오 - 할인행사
아키야마 타카히코 감독, 나카무라 마사토시 외 출연 / 와이드미디어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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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노키오
Hinokio, 2005


  일만 하는 어버이를 좋아할 만한 아이는 없습니다. 일에 푹 빠진 나머지 집에서 아이하고 어울릴 겨를이 없는 어버이를 좋아할 수 있는 아이는 그야말로 없습니다. 거꾸로 생각한다면, 시험공부나 학교공부만 하느라 어버이하고 말을 섞을 겨를을 내지 않는 아이가 있다면 어떠할까요? 이때에 어버이는 어떤 마음이 될까요? 아이가 게임을 하느라 몹시 바쁜 탓에 어버이하고는 말 한 마디 나눌 틈이 없으면 어떠할까요? 아이가 손전화로 노느라 어버이하고 얼굴을 볼 말미를 내지 않으면 어떠할까요?

  오늘날 참으로 많은 어른들은 어른 스스로 아이하고 말을 섞거나 얼굴을 볼 틈을 제대로 내지 않습니다. 이러면서 아이 탓을 하는 어른이 매우 많습니다. 어른부터 스스로 바깥일에 몹시 바쁜 나머지 집에는 얼마 안 붙어서 지내는데다가, 바깥에서 다른 어른하고 어울려 놀거나 일하기를 즐기는 터라 집에서 아이 얼굴 볼 틈도 제대로 내지 못하는데, 이러면서 아이들이 게임에 빠진다든지 손전화만 붙잡는다느니 하고 말할 만할까요?

  영화 〈히노키오〉는 교통사고로 어머니를 잃은 아이가 다리도 크게 다쳐서 바퀴걸상을 타고 다녀야 하면서 초등학교 6학년을 보내는 이야기를 다룹니다. 아이는 아버지가 어머니하고 말다툼을 한 뒤에 교통사고가 나서 어머니는 죽고 저도 거의 죽을 뻔하다가 살기는 했지만 다리를 크게 다쳤기 때문에 아버지를 매우 미워합니다. 아버지하고 얼굴을 볼 생각도 안 하고 말도 할 생각을 안 합니다. 그러나 ‘아이’이기 때문에 아버지가 차리거나 마련한 밥을 먹지요. 무엇보다도 ‘아버지가 만들어서 준 히노키’라는 로봇을 무선조종을 하면서 학교를 다니고 동무를 사귀어요.

  영화 〈히노키오〉를 보면 게임하고 삶이 뒤섞인 이야기가 흐릅니다. 열세 살 아이는 사람 몸뚱이하고 로봇 쇳덩이하고 뒤섞이면서 지냅니다. 이 아이는 어디에 있을까요? 이 아이는 누구일까요? 로봇 쇳덩이를 빌어서 말을 하고 둘레를 바라보는 아이는 ‘사람인 아이’일까요, 아니면 ‘로봇인 쇳덩이’일까요?

  아이는 앞으로도 언제까지나 로봇 쇳덩이에 기대어 살 수 있을까요? 어머니가 죽은 자리에서 아버지도 죽어서 사라지면, 이 아이는 앞으로도 로봇 쇳덩이에 기대어 살 수 있을까요? 집에서 아버지까지 사라지면 이 아이는 밥이라도 먹을 수 있을까요? 아니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있을까요?

  ‘히노키오’라는 이름을 얻은 로봇 또는 아이는 스스로 히노키오처럼 삽니다. 스스로 사람인 몸을 떠나서 로봇인 히노키오하고 한마음이 되려고 합니다. 어머니가 저를 두고 먼저 간 하늘나라로 가려고 합니다. 그곳이 천당인지 지옥인지 알 길은 없으나, 아무튼 이승을 떠나서 저승으로 가야 어머니를 만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히노키오가 아닌 ‘사토루’라는 이름을 부르는 동무들은 이 아이가 이승을 버리지 않고, 또 로봇 쇳덩이에 기대지 않으면서, 다리를 절든 어떠한 몸이든 아랑곳하지 않으면서 씩씩하게 이 땅에 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로봇 쇳덩이에 기대는 아이는 조금도 철이 들지 않았을 뿐더러 혼자 마음이 다쳤다고만 생각하지만, 아이 둘레에 있는 동무나 어른들도 똑같이 마음이 다쳤으나 모두 이 땅에 꿋꿋하게 두 다리를 버티고 서서 삽니다. 철이 덜 들든 많이 들든 삶을 사랑할 수 있을 때에 이승에 있거나 저승에 있거나 비로소 사람다운 넋이라는 대목을 함께 어깨동무를 하면서 느낄 수 있기를 바라지요.

  영화에서 사토루라는 아이는 하늘나라에 갑니다. 어머니를 만나지요. 아이는 하늘나라에서 언제까지나 아이인 채로 어머니 곁에 머물고 싶습니다. 하늘나라에 있는 어머니는 이녁 아이가 언제까지나 아이로 있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마음으로 사랑을 나눌 수 있기를 바라고, 아이가 무럭무럭 자라서 새로운 숨결로 거듭나기를 바라요. 어버이라면 누구나 이녁 아이가 새로운 사랑이 되기를 바라니까요. 뒤만 돌아본다면 끔찍할 테지만, 앞을 바라볼 수 있고 달려갈 수 있으면 스스로 웃을 수 있다는 대목을 영화 〈히노키오〉는 차분하게 보여줍니다. 4348.12.17.나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영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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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레이] 쉘 위 댄스 : 일반판 - 투명 엘리트케이스로 출시
수오 마사유키 감독, 야쿠쇼 코지 외 출연 / 디에스미디어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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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춤출까요? (쉘 위 댄스)

Shall We Dance?, 1996



  “우리 춤출까요?” 이 한 마디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하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나는 이 말을 마흔 살이 넘도록 한 번도 못 들었습니다. 춤추는 집이라고 하는 댄스홀이나 이 비슷한 곳을 간 적이 없으니 “우리 춤출까요?” 하고 말하는 이웃이나 동무가 없었을는지 모르나, 한국 사회는 여느 자리에서 수수하게 어울리면서 즐겁고 신나게 춤추며 노래하는 놀이가 어느새 자취를 감추었어요. 집이나 마을이나 학교나 일터에서 서로 허물없이 재미나게 춤을 추며 노는 일이 아주 드물거나 거의 없다시피 해요. 나랑 춤추자고 말하는 동무도 없지만, 나도 동무한테 함께 춤추자고 선뜻 말하지 못했어요. ‘춤’을 달라나라 별나라 이야기라도 되는 듯 여겼습니다.


  곰곰이 돌아보면 한겨레는 예부터 들일을 하며 들노래를 불렀습니다. 두레와 품앗이를 나누면서 언제나 함께 일하고 함께 춤추며 함께 노래하고 함께 놀았다고 해요. 다만, 나는 도시에서 나고 자라며 이러한 삶을 구경하거나 누리거나 지켜보거나 겪거나 한 적이 없습니다. 요즈음에도 이러한 삶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오늘날 사회는 그저 메마르기만 한 터라, 즐겁게 춤추면서 삶을 가꾸자는 목소리나 기쁘게 어깨춤을 추면서 일하자는 노랫소리가 흐르지 못합니다. 먹고살기 바쁜 나머지 일만 하고 돈만 버는 굴레에 갇힙니다.


  “우리 춤출까요?”는 왜 아름다운 말이 될 수 있을까요? 서로 마음을 열고 즐겁게 춤을 추는 동안 찬찬히 피어나는 사랑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비가 바람을 타고 춤을 추듯이, 새가 하늘을 가르며 춤추는 몸짓으로 날듯이, 사람도 이 땅에서 고운 발놀림하고 손놀림하고 몸놀림으로 바람결을 어루만질 적에 춤이 이루어집니다. 연예인이나 전문 춤꾼이 선보이는 몸짓이 아닌, 그저 스스로 우러나오는 춤사위일 때에 즐거운데, 이 대목을 알려주는 어른이 몹시 드뭅니다.


  영화 〈우리 춤출까요?(Shall We Dance?)〉를 보면 삶을 새롭게 가꾸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어떻게 해야 삶을 스스로 새롭게 가꿀 수 있는지 도무지 모르는 여느 회사원이 나옵니다. 이녁은 즐거움이나 재미나 기쁨을 배운 적이 없습니다. 일하는 보람이나 집을 장만하는 보람 한 가지만 있다고 할 만합니다. 자랑스러운 사회 지위라든지 자가용쯤이 더 있다고 할 만하지요. 아무래도 어릴 적부터 학교를 다니는 동안 더 나은 성적을 얻고 더 높은 대학교에 들어가는 길만 걸었을 테지요. 삶을 차분히 돌아보면서 사랑을 찬찬히 가꾸어 사람다운 넋을 곱게 북돋우는 길은 배운 적도 본 적도 느낀 적도 드물었겠지요.


  영화에 나오는 회사원 아저씨는 춤바람이 납니다. 다만, 이 춤바람이란 춤에 미쳐서 다른 일을 젖히는 바보짓이 아닙니다. 이 춤바람이란 식구를 모두 버리고 혼자만 살겠노라 하고 등을 지는 얼간이 노릇이 아닙니다. 춤을 추는 바람이 불면서 마음속에 그동안 맺힌 응어리가 천천히 풀립니다. 춤을 추는 바람을 스스로 일으키면서 새로운 몸이 되고, 새로운 마음이 되며, 새로운 꿈을 키웁니다.


  그런데, 영화에 나온 아저씨는 혼자서 춤을 출 뿐입니다. 곁에 있는 사람하고 함께 춤을 추자는 생각을 미처 못 해요. 게다가 이녁 딸하고 함께 춤을 출 생각조차 조금도 못 하지요. 춤사위가 베푸는 기쁨을 누리면서도 정작 춤을 가르치는 학원에서만 춤을 출 수 있다는 생각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지요. 이때에 이녁 딸아이는 아버지를 북돋웁니다. 딸아이는 춤을 추는 아버지가 멋있다고 여길 뿐 아니라, 어머니하고 함께 춤을 추기를 바랍니다. 아이 어머니도 곁님더러 ‘왜 나하고는 춤을 추자고 하지 않았느냐?’고 뒤늦게 묻는데, 이렇게 물을 일이 아니라, 이녁 곁님한테 ‘춤 학원에서 배운 춤을 나한테도 가르쳐 주어서 언제나 함께 추어요!’ 하고 먼저 말했어야지요.


  함께 나누기에 기쁨입니다. 혼자만 누리기에 즐거움입니다. 춤은 즐거움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혼자 일하며 춤을 출 적에는 즐거움일 테고, 여럿이 함께 일하며 춤을 출 적에는 기쁨입니다. 삶과 살림을 짓는 춤사위는 기쁜 사랑으로 흐릅니다. 기쁜 사랑이 흐르는 곳에서 마을살이가 곱게 깨어납니다. 기쁜 몸짓이 넘치는 곳에서 살림살이를 아름답게 북돋웁니다. 4348.11.29.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영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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