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랑 놀자 55] 점점



  일곱 살 큰아이가 어느 만화책을 보면서 노래를 합니다. 초등학교 높은학년 어린이가 보는 만화책을 일곱 살 아이가 읽는데, 이 만화책에 “점점 …….” 하는 말이 자주 나오는 듯합니다. 아마 일곱 살 아이도 열두 살 어린이도, 또 이 만화를 그린 어른도, 이 만화책을 펴낸 출판사 편집부 어른도, 이 만화책을 사 줄 수많은 여느 어버이도 ‘점점(漸漸)’이 어떤 말인지 잘 모르리라 생각합니다. 잘 모르니 섣불리 이런 낱말을 쓸 테지요. 그런데 나도 스물서너 살 언저리까지 ‘점점’이라는 일본 한자말을 멋모르고 썼어요. ‘점점’뿐 아니라 ‘점차(漸次)’도 일본 한자말이고 ‘차차(次次)’도 일본 한자말이에요. 한국말사전에서 이런 낱말을 처음 찾아보았을 때 깜짝 놀랐어요. 그리고 내 둘레 어느 어른도 이런 대목을 안 짚고 안 가르쳤네 싶어 다시 놀랐어요. 한국말은 ‘자꾸’입니다. 또, ‘차츰’이 있고 ‘조금씩’이 있으며, ‘시나브로’가 있어요. 흐름에 따라 ‘거듭’이나 ‘천천히·찬찬히’를 쓸 수 있어요. 일곱 살 아이는 아직 ‘점점’이나 ‘자꾸’가 어떻게 다른지 모를 만합니다. 어느 쪽 낱말을 쓰든 아이로서는 아이 마음을 담으리라 느낍니다. 다만, 예부터 늘 하는 말,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가 있어요. 우리 마음을 담아서 어떤 말을 쓰느냐에 따라 넋과 삶이 모두 달라집니다. 4347.8.8.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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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랑 놀자 54] 여름 성경 학교



  온 나라에 예배당이 아주 많습니다. 큰 예배당이 있고 작은 예배당이 있습니다. 예배당마다 여름에는 ‘여름 수련회’를 마련하고, 여름 수련회를 할 적에 어린이나 푸름이한테는 ‘여름 성경 학교’를 연다고 이야기합니다. 예전에는 이런 이름을 들었어요. 그런데 엊그제 아이들을 자전거에 태우고 면소재지로 나들이를 갔다가, 면소재지 문방구와 빵집과 몇 군데 가게에 붙은 알림종이를 보고 깜짝 놀랐어요. 요즈음은 ‘여름 성경 학교’를 안 하더군요. 이러면서 ‘썸머 바이블 엑스포 미션탐험대’를 한다고 해요. 멍하니 알림종이를 들여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렇지요. 요즈음 이 나라는 온통 영어로 이야기를 하니까요. 어른도 어린이도, 지식인과 전문가와 공무원도, 시골사람도 도시사람도, 너도 나도 그냥 영어로 이야기를 하지요. 4347.8.2.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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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랑 놀자 53] 흙빛



  흙은 흙빛입니다. 흙은 흙이기에 흙빛입니다. 그런데, 흙빛을 두고 ‘황토색(黃土色)’이라 말하는 사람이 있고, ‘황갈색(黃褐色)’이나 ‘갈색(褐色)’이나 ‘황색(黃色)’을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도 어릴 적에는 ‘황색’이나 ‘갈색’이란 낱말을 자주 썼어요. 크레파스나 물감에는 이런 낱말만 적혔거든요. 그림을 그리면서 나뭇줄기에 빛깔을 입힐 때에는 으레 ‘갈색’을 쓰라 했고, 흙에 빛깔을 입힐 적에도 ‘갈색’이나 ‘황색’을 쓰라 했어요. 도시에서 태어나 자라는 동안 흙을 흙빛으로 마주한 일이 드물었기에, 어른들이 말하는 대로 따랐습니다. 나는 이제 마흔 살이 넘는 어른이 되어 아이들을 낳고 시골에서 지냅니다. 시골집에서 지내며 우리 집 흙을 바라보고, 숲이나 멧골에 있는 흙을 바라보며, 농약과 비료를 듬뿍 치는 이웃 논밭에 있는 흙을 바라봅니다. 흙은 자리마다 빛깔이 다릅니다. 농약과 비료를 듬뿍 치는 논밭에 있는 흙은 허여멀건 기운이 감도는 옅누른 빛깔입니다. 풀이 우거진 밭이나 숲에 있는 흙은 까무잡잡한 빛깔입니다. 거칠거나 메마른 흙은 누런 빛깔이지만, 풀이 잘 돋고 나무가 우거지는 데에 있는 흙은 차츰 거무스름한 빛깔로 달라집니다. 시골에서 살며 바라보니, 나뭇줄기라든지 가랑잎 빛깔은 꼭 흙빛을 닮는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시골에서 흙을 밟거나 만지며 살아가는 사람은 낯이나 손발이나 살갗이 흙빛을 닮는구나 하고 느낍니다. 도시이든 시골이든 학교에서 아이들한테 그림을 가르치는 어른들은 한겨레 살빛을 ‘살구알 빛깔’로 그리라고 하는데, 오랜 나날 우리 겨레뿐 아니라 이웃 겨레는 모두 흙빛 살갗이요 얼굴로 시골빛을 가꾸었으리라 생각합니다. 4347.7.31.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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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랑 놀자 52] 바람이



  둘레 어른들은 모두 ‘튜브’라 하고, 때로는 ‘주브’라고도 하는데, 아이들이 물놀이를 하면서 쓰는 놀잇감한테 쉬우면서 재미난 이름을 붙이면 어떨까 하고 생각을 기울여 봅니다. 여느 때에는 쪼글쪼글하지만 입으로 바람을 후후 불어넣으면 탱탱해지니, 바람을 넣는 주머니라는 뜻으로 ‘바람주머니’라 이름을 붙이면 재미있겠다고 느꼈어요. 읍내에서 두 아이 몫으로 바람주머니를 둘 장만한 뒤, 골짜기로 물놀이를 가면서 가지고 갑니다. 두 아이 몫 바람주머니를 후후 불자니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기운을 내어 바람을 다 넣고 아이들한테 건네는데, 네 살 작은아이가 문득 “내 바람이!” 하고 말합니다. 바람을 넣은 주머니인 이 놀잇감한테 작은아이도 제 깜냥껏 예쁜 이름을 붙여서 불렀다고 할까요. ‘바람이’라는 낱말을 혀에 얹어 한참 굴려 봅니다. 예쁘네. 길이도 짧고 살가운 이름이네. 이제부터 우리는 물놀이를 할 적에 ‘바람이’를 데리고 가자. 4347.7.26.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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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랑 놀자 51] 먹을거리



  ‘식당(食堂)’에서는 ‘식자재(食資材)’를 장만해서 ‘식사(食事)’를 차려서 내놓습니다. ‘집’에서는 ‘먹을거리’를 마련해서 ‘밥’을 차려서 내놓습니다. 사회가 커지고 경제를 이야기하면서, 우리가 먹는 밥은 어느새 밥이 아닌 식사나 요리가 됩니다. 식사나 요리를 차리려고 식자재를 장만하지요. 내가 어릴 적에 어머니는 “먹을거리가 다 떨어졌으니 시장에 가자” 하고 말씀했습니다. 예부터 어른들은 밥을 차리려 하면서 혼잣말처럼 “어디 먹을 것이 있나 보자” 하고 이야기했습니다. ‘먹을것’이고 ‘먹을거리’입니다. 먹을거리를 그대로 먹을 수 있고, 먹을거리를 손질해서 밥으로 차릴 수 있습니다. 4347.7.26.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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