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 이야기꽃



 내가 바라는 말을 찾기


[물어봅니다]

  이 책에서 짚어본 여러 말은 대부분 겹말이었습니다. 또는 “생각 없이 던진 말”같이 아예 서로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습니다. 이러한 말을 손질하자는 생각에는 많은 사람들이 같이하겠습니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우리말이 있으면 굳이 한자말이나 서양말을 쓰지 말고 그 우리말을 쓰자는 생각도 나누고 있습니다. 이를 놓고 만약에 사람들이, 맞지 않는 표현도 아닌데 서양말이든 한자말이든 내가 원하는 말을 골라써도 되지 않냐며 굳이 우리말을 써야 하는 까닭을 묻는다면 저는 어떤 말로 그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을까요?


[얘기합니다]

  먼저 이렇게 말하고 싶어요. “굳이 우리말을 써야 하는 까닭”을 묻는 그분들을 설득하지 말아 주셔요. 아마 설득이 안 되고, 논쟁이나 토론만 되지 않을까요? 저는 이웃님을 ‘설득’하려고 사전을 쓰지 않습니다. 사전을 쓰는 길에 보기글이며 밑글을 잔뜩 헤아려야 하는데, 이러면서 ‘새롭게 생각을 밝혀서 쓰기’를 함께 살핍니다. 이를 다른 분들은 ‘글손질’로 바라봅니다만, 저는 글손질을 하지 않아요. ‘나라면 이 글에 담은 줄거리를 이렇게 말을 하겠다’는 뜻을 새롭게 밝히는 셈입니다. 보기를 들게요.


칼로 썰어 만드는 칼국수 (보기글 ㉠)

→ 칼로 썰어 끓이는 칼국수

→ 칼로 썰어 먹는 칼국수

→ 칼로 썰어서 하는 칼국수

→ 칼로 써는 국수


  저는 칼국수를 ‘끓여’서 먹습니다. 저는 칼국수를 ‘만들’지 않아요. 그러나 참 많은 분들은 영어 ‘make’를 한국말에 끼워넣어 “국수를 만든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분들은 이 말씨를 스스로 못 고치더군요. 스스로 길들었거든요.


  제대로 말하자면, 국수는 ‘삶’습니다. 삶는 모습은 ‘끓이기’하고 비슷하니 “국수를 끓여서 먹는다”처럼 말할 수 있어요. 밥을 ‘짓다·하다’로 말하니 “칼로 썰어서 하는 칼국수”처럼 말해도 되겠지요. 다른 보기를 들게요.


사람이 사는 데 필요한 세 가지 요소인 의식주(衣食住) 가운데 (보기글 ㉡)

→ 사람이 살며 꼭 곁에 둘 세 가지인 옷밥집 가운데

→ 사람이 꼭 갖추며 살아가는 세 가지 옷밥집 가운데

→ 사람이 살자면 갖출 세 가지 옷밥집 가운데

→ 사람이 갖추며 사는 옷밥집 가운데


  보기글 ㉡을 네 가지로 새롭게 써 봅니다. 손질하지 않아요. 저라면 이러한 줄거리를 이처럼 새로 쓰겠다는 뜻일 뿐입니다. 보기글 ㉡을 잘 보면 ‘필요’하고 ‘요소’란 한자말이 나오는데, 두 한자말은 ‘요(要)’라는 한자가 나란히 깃들어요. 보기글 ㉡은 겹말인 셈이지요. 보기글 ㉡을 쓰신 분은 ‘의식주’라고만 하지 않고 한자로 ‘衣食住’를 달았어요. 저는 이 말씨를 ‘옷밥집’으로 적어 봅니다. ‘옷밥집’으로 적으면 다섯 살 어린이도 알아볼 테니까요.


  이제 물음말을 생각할게요. 우리가 스스로 생각을 깊고 넓게 한다면, 생각도 깊고 넓게 나타낼 테고, 생각을 담은 말이나 글도 깊고 넓게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이때에 볼 대목은 ‘깊거나 넓게 생각을 담은 말이나 글’은 영어인가 한자말인가 일본말인가 독일말인가 프랑스말인가, 아니면 한국말인가라 할 수 있어요.


  “우리말(한국말)이 있으니 굳이 우리말 아닌 영어나 한자말을 안 쓴다”가 아닙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생각을 가장 잘 나타내면서 스스로 즐거울 뿐 아니라, 이웃하고 한결 즐겁고 상냥하게 어우러지는 길을 살피면서 ‘한국말을 더욱 깊고 넓게 살펴서 쓰는 말결’을 돌아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굳이 우리말(한국말)을 쓰려고는 하지 않아도 좋다”고 이야기하겠어요. 우리 생각을 마음에 슬기롭게 담아서 글이나 말로 사랑스레 펼칠 수 있도록 ‘우리말(한국말)을 한결 깊고 넓게 보듬으며 생각을 펴자’고 이야기하겠습니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사전을 쓰는 사람.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들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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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이야기꽃



 ‘임산부 배려석’에 새 이름을


[물어봅니다] 서울메트로에서 ‘임산부 배려석’을 두면서 홍보 노래를 틀어 주는데, 노랫말이 좀 어색해 보입니다. 숲노래 님이 좀 우리말답게 손질해 주실 수 있을까요? 서울메트로에 노랫말을 고쳐 보라고 건의하고 싶어요.


[이야기합니다] 말씀을 듣고 보니 ‘임산부 배려석’이란 이름부터 안 쉽구나 싶습니다. 되도록 차분하면서 아끼려는 말씨로 이런 이름을 쓰는구나 싶지만, 어린이 눈높이를 찬찬히 생각한다면 한결 부드러우면서 살가이 이름을 지을 만해요. 먼저 ‘임산부’란 “아기 엄마”나 “아기 어머니”입니다. ‘임부 + 산부’인 ‘임산부’라지만, 한국말로는 “아기 엄마”일 뿐이에요. 왜 그러한가 하면, 한국에서는 아기를 몸에 밸 적부터 ‘엄마·어머니’로 여기고, 이때부터 사내도 ‘아빠·아버지’입니다. 아기를 낳은 뒤부터 ‘엄마 아빠’가 아니라, 아기를 밴 그날부터 ‘어머니 아버지’예요.


  이런 살림살이를 들여다본다면 ‘아기 엄마(아기 어머니) ← 임산부’로 가다듬을 수 있어요. 다음으로 ‘배려’란 “마음을 쓰기”예요. 아기 엄마한테 마음을 쓰며 자리 한 칸을 내어주도록 하자면, “아기사랑칸·아기사랑 자리”나 “엄마사랑칸·엄마사랑 자리”처럼 이름을 붙여도 됩니다.


  아기는 혼자 다니지 못해요. 엄마나 아빠가 늘 같이 있어요. 그러니 ‘아기사랑칸’이라고 해도 어울려요. ‘엄마 아빠’는 아기가 쓰는 말이에요. 그래서 ‘엄마사랑칸’이라 하면, 아기를 배거나 갓 나은 분을 헤아리는 이름이 됩니다.


핑크색 자리를 임산부 자리로

우리의 배려가 멋진 하루 만들어줄 거예요


  이제 ‘서울메트로 임산부 배려석 노래’를 살피겠습니다. “핑크색 자리”라든지 “우리의 배려가 멋진 하루 만들어줄 거예요” 같은 대목이 좀 아쉽네요. 빛깔말을 보자면 한자말로 ‘분홍’이 있고, 한국말로는 ‘진달래빛·철쭉빛’이 있어요. 남녘에서 널리 자라다가 이제 서울 쪽에서도 볼 수 있는 ‘배롱나무 꽃빛’인 ‘배롱빛·배롱꽃’이 있습니다. 그리고 ‘배려가 하루 만들어줄 거예요’ 같은 글월은 퍽 엉성합니다. 번역 말씨로군요. 이 노래를 찬찬히 손질해 보겠습니다.


1. 배롱빛 자리를 아기 엄마한테 

우리 사랑으로 멋진 하루를 지어요

2. 배롱꽃 자리를 아기 엄마한테 

사랑스레 마음쓰는 멋진 하루


  ‘배려석’이란 이름을 썼지만 노래에서는 ‘자리’라 했네요. 이 말씨를 잘 살피면 좋겠어요. 그리고 “배롱빛 자리”라 하며, 사람들이 빛깔을 새삼스레 꽃빛으로 느껴서 생각하도록 이끌 만해요. 배롱꽃이 낯설다 하면 ‘진달래꽃’이라 해도 좋아요. 이러면서 전철에 꽃무늬를 그려 넣으면 더욱 좋겠지요. 배롱꽃을 낯설어 하더라도 배롱꽃 무늬를 넣어서 ‘아기 엄마는 배롱꽃처럼 눈부시고 고운 사랑입니다’ 하고 알려도 좋습니다.


  “멋진 하루를 지어요”라는 대목을 살린다면 “우리 사랑으로”를 앞에 넣어서 꾸미도록 합니다. 이 말씨는 “사랑스레 마음쓰는”을 앞에 넣고 “멋진 하루”로 뒤쪽을 마무리하는 얼거리로 써 보아도 됩니다.


  아기 엄마한테 마음을 쓰면서 사랑을 나누는 멋진 하루가 되기를 바라는 뜻 그대로, 전철에 있는 자리 하나에 붙이는 이름에도 즐거이 마음을 기울이면 좋겠어요. 이 마음을 꽃빛으로, 꽃 가운데에서도 긴긴 날을 해사하게 밝히는 배롱꽃 빛깔로 한결 살뜰하면서 부드럽고 포근하게 비춘다면 더욱 좋을 테고요. 활짝 웃고 노래할 수 있는 마음이 꽃빛으로 곱게 물들기를 바랍니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사전을 쓰는 사람.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들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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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이야기꽃



 순우리말이 더 어렵다면


[물어봅니다] 그 글들은 한 번씩 다 읽어 봤어요. 그런데 읽다 보니 이런 생각도 들더라고요. 순우리말을 쓰지 않아 버릇해서 그런지 순우리말로 쓰면 더 이해되지 않을 때도 있고, 의미가 좀 바뀐다(?)는 느낌도 있어서,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하게 되더라고요


[이야기합니다] 먼저 ‘순우리말’이 무엇인지부터 짚겠습니다. 사전을 살피면 ‘순우리말(純-)’을 “우리말 중에서 고유어만을 이르는 말”로 풀이합니다. ‘고유어’란 낱말을 써서 풀이하니, ‘고유어(固有語)’도 찾아보는데 “1. [언어] 해당 언어에 본디부터 있던 말이나 그것에 기초하여 새로 만들어진 말. 국어에서는 ‘아버지’, ‘어머니’, ‘하늘’, ‘땅’ 따위가 있다 ≒ 토박이말·토착어”로 풀이합니다. 사전풀이로만 본다면 ‘순우리말 = 고유어 = 그 말을 쓰는 터에서 예전부터 쓰던 말’을 가리킨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순우리말’이나 ‘고유어’ 같은 이름을 쓴 지 얼마 안 되었어요. 일제강점기 즈음 이르러 비로소 이런 이름을 썼습니다. ‘토박이말·토착어’ 같은 이름도 쓴 지 얼마 안 된다고 느껴요. 이 또한 일제강점기 어림해서 겨우 불거지고는 더러 썼구나 싶어요.


  예전에는 어떤 말을 썼을까요? 1800년대 첫머리, 1500년대, 1200년대, 800년대, 300년대 같은 무렵에 이 땅에서는 어떤 말로 생각을 나눴을까요? 이천 해나 오천 해 앞서는 어떤 말로 마음을 주고받았을까요?


  요새는 쉽게 ‘우리말’이라 합니다만, ‘우리말’이란 말조차 일제강점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나타난 말이라 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이 땅에서 사는 사람이 ‘말’을, 여느 말을, 예전부터 죽 흐르던 ‘그냥 말’을 쓰지 못하게 가로막힌 때에 한꺼번에 ‘우리말·순우리말·고유어·토박이말·토착어’란 말이 태어났고, ‘고유어·토착어’는 중국말로 지식을 펴는 길이 익숙하던 이들이 일본 한자말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퍼뜨린 말씨요, 이 말씨가 달갑잖으면서 독립운동에 마음을 기울인 쪽에서는 ‘우리말·순우리말·토박이말’이란 말을 새로 지은 셈입니다.


  곰곰이 생각해 봐요. 우리가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한국말(또는 조선말)을 들을 수 없이 일본말만 들으면서 일본 학교에 다니고 일본글이 적힌 책만 읽어야 하는 판이라면 ‘일본말 = 우리말’이에요. 꽤 많은 한국사람이 이러했습니다. 그래서 해방 뒤에 어쩔 줄 몰라하던 분이 무척 많아요. 해방 뒤부터 1970년대에 이르기까지 나온 책이나 신문을 살피면 새까맣게 한자투성이랍니다. 한국말 아닌 일본말(일본 한자말)이 익숙한 분은 글을 쓸 적마다 새까맣게 일본 한자말을 그려 넣어요. 한자를 벗긴 한글로 적으면 낯설어하고, 한자말을 어린이도 알아들을 수 있게 풀이하거나 바꾸면 힘들어했어요.


  1980년대를 지나며 책이나 신문에서 한자가 많이 걷혔습니다. 해방 뒤에 태어난 사람이 부쩍 늘어난 탓이에요. 1990년대를 지나고 2000년이 되니 이제 신문에서 한자를 쓰는 일이 없다시피 해요. 2010년대를 지나는 요새는 한자 쓰는 이가 거의 없으나, 새롭게 영어를 쓰는 이가 늘지요. 우리는 이 흐름을 잘 읽어야 해요. 일제강점기에 앞서는 사람들이 ‘순우리말이나 토박이말이나 고유어가 아닌 그냥 한국말’을 스스럼없이 즐겁게 썼어요. ‘깨끗한 우리말’이 아닌 ‘삶·살림을 사랑으로 담은 수수한 말’을 나누었습니다. 그때에는 사투리만 있었으니, 다른 고장 사투리가 처음에는 낯설어도 꾸준히 말을 섞으면 다 알아차렸어요. 이와 달리 일제강점기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 나라에는 ‘삶을 사랑으로 담은 수수한 말’보다는 ‘일본 한자말, 중국 한자말, 영어, 번역 말씨’라는 네 가지 굴레가 판을 치면서, 이러한 말씨가 책하고 신문에다가 교과서에 방송까지 차지했습니다.


  이리하여 앞으로는 새로운 한국말을 살피고 가꿀 노릇이라고 느껴요. 우리가 갓난아기한테 들려주는 말을, 다섯 살 어린이한테 가르치는 말을, 열 살 어린이가 기쁘게 배울 만한 말을 새로 찾고 살찌울 일이라고 느낍니다. 중·고등학교 교과서나 여느 어른이 쓰는 말씨를 열 살 어린이한테 그대로 쓰면 알아들을 만할까요? 아니지요? 저는 ‘열 살이나 다섯 살 어린이’도 함께 알아들을 수 있도록 말을 가다듬으려 합니다. 누구나 스스로 익숙하게 듣고 쓰던 낱말이 아니면 아리송하거나 ‘뜻이 바뀌었네’ 하고 느껴요. 꼼꼼히 밝힐 뜻도 살피되, 말에 담는 마음과 숨결을 함께 살펴 주시면 좋겠습니다. ‘순우리말’ 아닌 ‘삶·살림을 사랑으로 담은 말’을 함께 생각해요.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사전을 쓰는 사람.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들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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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쓰사살, 안버림, 즐안삶


[물어봅니다] 환경 문제에 관심을 가지면서 제로 웨이스트 카페에 가입을 하고 활동을 하고 있는데, ‘제로 웨이스트’는 우리말로 옮기면 뭐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야기합니다] 말뜻대로 본다면 “쓰레기 없애기”나 “쓰레기 치우기”가 되겠네요. 이 말뜻 그대로 쓸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온누리에 쓰레기가 없어지기를 바란다면 “쓰레기 없애기”를, 온누리에 있는 쓰레기를 치우기를 바란다면 “쓰레기 치우기” 같은 이름을 쓰면 되어요.


  그런데 이 이름으로는 아무래도 수수하구나 싶어서 다른 이름을 찾아볼 수 있어요. 어느 분은 수수한 그대로 좋아서 수수한 이름을 쓸 만하고, 어느 분은 좀 남다르면서 도드라지는 이름을 쓰고 싶을 만해요. 그래서 수수한 이름 말고 다른 이름도 생각해 볼게요.


 쓰레기 살리기. 쓰레기에 새 숨결을. 쓰레기를 사랑으로 살려쓰기


  쓰레기는 나쁘지 않습니다. 쓰고 남기에 쓰레기일 뿐입니다. 쓰고 남은 것은 저절로 흙으로 돌아가서 새로운 숨결로 피어나요. 자, 나무를 헤아려 봐요. 숨을 다해서 마른 나뭇잎은 가지에서 톡톡 떨어집니다. 가랑잎이란 무엇일까요? 언뜻 보면 쓰레기이지만, 가랑잎은 흙을 살찌워 나무를 새롭게 북돋우는 구실을 합니다. 그러니까 ‘쓰레기’란 이름이 붙는 것은 우리 살림터에서 새롭게 피어나는 숨결이나 바탕인 셈입니다. 이를 생각하면 “쓰레기 살리기”나 “쓰레기를 사랑으로 살려쓰기”나, 이를 줄인 ‘쓰사살’ 같은 이름을 쓸 수 있어요.


  ‘제로 웨이스트(zero-waste)’를 더 생각해 볼게요. 사람들이 ‘제로 웨이스트’를 한다면서 펴는 다짐을 살피니 “환경보호·되살림·다시쓰기·플라스틱 줄이기”, 이쯤으로 간추릴 만해요. 이런 네 가지는 무엇을 쓰거나 다루거나 장만할 적에 “쓰레기가 나오지 않도록 하겠다”는 다짐이라고 할 만해요.


  몇 가지로 새로 간추려 볼게요. “버려지지 않도록. 버리지 않기. 쓰레기 줄이기. 쓰레기 없애기.” 이렇게 간추리면 어떤 이름이 어울릴 만한가를 짚기에 좋아요. 이 다짐을 바탕으로 “안 버리기·안 버려요” 같은 이름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널리 말할 만한 이름이라면 ‘안버림’처럼 짧게 붙여서 쓰고, ‘안버림삶’이나 ‘안버림살림’처럼 뒷말을 붙여도 되어요.


  즐안삶. 즐안살림. 즐안길


  그런데 어떤 물결이든 일부러 하려면 힘들기 마련입니다. 아무리 좋은 뜻이라 하더라도 ‘좋은 뜻만 너무 앞세우’면 좀 벅차거나 힘이 빠질 수 있어요. 그래서 ‘제로 웨이스트’라는 물결에서도 ‘즐겁게 하자’는 마음을 담으면 한결 나으리라 여겨요.


 즐안삶 : 쓰레기가 나오지 않도록 즐겁게 안 쓰는 삶 + 쓰레기가 없도록 즐겁게 안 버리는 살림

 즐안날 : 쓰레기가 나오지 않도록 즐겁게 안 쓰는 날 + 쓰레기가 없도록 즐겁게 안 버리는 날


  ‘즐’을 앞에 넣으면 어떨까요? 쓰레기가 나오지 않도록 즐겁게 안 쓰는 삶, 쓰레기가 없도록 즐겁게 안 버리는 삶, 이렇게 해보아도 돼요. 오래오래 즐겁게 푸른길이며 푸른삶을 지으면 좋겠지요.


  어떤 영어를 어떤 한국말로 ‘고치면 좋을’까 하는 생각이 아니라, 어떤 새로운 살림을 어떤 새로운 마음으로 ‘담아내어 새롭게 지으면 즐거울’까 하고 생각하면 좋겠어요. 먼저 수수한 이름으로, 이다음에는 즐거운 이름으로, 이러면서 뜻있고 사랑스러운 이름을 하나하나 혀에 얹으면 좋겠어요.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사전을 쓰는 사람.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들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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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서로 이슬떨이


[물어봅니다] 숲노래 님이 쓴 책을 읽다가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어서 질문을 드려도 될지요? ‘이슬떨이’라는 뜻을 조금 더 알고 싶습니다. 사전에서의 뜻을 살펴보지 못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이 낱말을 언제 어떻게 사용할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문득 어떤 느낌일지 상상은 되지만 몸에 길들여진 말이 아니라 그런지 겉핡기 식으로 느껴져서요.


[이야기합니다] 물어보신 말씀을 듣고서 사전을 뒤적여 보았어요. 사전을 보니 ‘이슬떨이’를 올림말로 삼기는 하지만, 막상 보기글을 하나도 안 붙였네요. 보기글 없이 뜻풀이만 달랑 있으니, 어쩌면 사람들은 이 낱말을 여느 자리에서 어떻게 쓰는가를 모를 수 있고, 배우기 어렵다고 느낄 수 있겠어요.


  ‘이슬떨이’라는 낱말하고 닮은 ‘이슬받이’라는 낱말이 있어요. 사전은 ‘이슬받이’도 올림말로 삼아서 뜻풀이를 하지만, 이 낱말에도 보기글이 하나도 없네요. 이는 두 가지로 읽을 만해요. 첫째, 뜻풀이는 있되 보기글이 없는 사전이라면, 이 사전을 엮은 분들이 낱말 쓰임새를 아직 찾아내지 못했다는 소리예요. 둘째, 문학이나 언론이나 학문에서 어느 낱말을 어떻게 쓰는가를 찾아내지 못했으면, 사전을 엮는 분들 스스로 보기글을 붙이면 돼요. 그러나 그 사전을 엮은 분은 스스로 보기글을 붙일 생각을 안 했거나 못 한 셈입니다.


  사전이라면 뜻풀이 곁에 보기글을 두어야 해요. 두 가지가 함께 있어야 비로소 사전이라는 책답게 밑꼴을 갖추는 셈이에요. 보기글은 낱말이 태어나고 자라면서 흐르는 결을 어린이부터 누구나 느낄 수 있도록 알맞게 붙일 수 있어야 하고요.


 ㉠ 네가 어제 이슬떨이가 되어 주었지. 오늘은 내가 이슬떨이가 될게.

 ㉡ 어머니는 언제나 이슬을 떨어 주면서 앞장서서 씩씩하게 가셔요.

 ㉢ 앞에서 이슬을 모조리 맞으며 옷자락이 젖었어도 걱정이 없대요.

 ㉣ 이슬을 머금은 푸나무는 싱그럽게 자란단다. 이 이슬을 온몸에 받았으니 한결 싱그럽겠지. 곧 떠오르는 해는 젖은 곳을 모두 따뜻이 말려 준단다.


  ‘이슬떨이’는 이슬을 앞에서 먼저 떨어 주어서 뒤따르는 이는 이슬에 젖지 않도록 하는 모습을 나타내요. ‘이슬받이’는 이슬을 앞에서 모두 받아 주면서 뒤따르는 이가 이슬에 안 젖도록 하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이런 얼거리를 살펴서 ㉠ ㉡ ㉢ ㉣ 같은 글을 새로 써 봅니다. 이슬은 나쁜 것이 아니에요. 밤새 고요히 잠든 푸나무는 이동안 천천히 맺은 이슬을 머금으면서 아무리 뜨거운 한낮에도 시원하게 하루를 나요. 푸나무는 새벽이슬을 품고서 후끈후끈 더운 불볕에 조금씩 물기운을 밖으로 내보내는데, 이렇기에 풀밭이나 숲은 더운 날씨에도 참으로 상큼하고 시원하지요.


  가만히 보면, 앞에서 가는 사람이 이슬이라는 물을 온몸으로 떨거나 받으면 이이는 몸이나 옷이 젖으니, 뒷사람은 옷이 안 젖어요. 성가신 일을 기꺼이 받아들일 뿐 아니라, 어느 길을 가야 알맞은가를 온몸을 던져서 찾아내는 노릇을 한달 수 있어요. 그런데 이슬이란 푸나무를 살리는 아름다운 숨결이에요. 이슬떨이나 이슬받이 노릇을 하는 사람은, 이녁이 맞아들일 낯설거나 고되거나 만만찮은 일을 싫어하지 않아요. 멀리하거나 꺼리지도 않아요. 모두 이녁을 살찌우는 마음밥으로 삼지요. 그렇기에 ‘이슬떨이·이슬받이’를 멋지면서 야무지고 아름다운 길잡이를 가리키는 이름으로 쓸 수 있어요.


이슬동무 : 새벽을 여는 이슬을 맞이하는, 또는 새벽을 여는 이슬을 떨어 주듯 먼저 나아가는 길에 같이 있는 사이

이슬벗 : 새벽을 여는 이슬을 맞이하는, 또는 새벽을 여는 이슬을 떨어 주듯 먼저 나아가는 길에 같이 있는 가까운 사이


  사전에 ‘이슬동무·이슬벗’ 같은 낱말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이 두 낱말을 새롭게 지어서 써요. 이슬떨이나 이슬받이는 한 사람일 텐데, 둘이나 셋이 나란히 이슬떨이로 나설 수 있어요. 서로 즐거이 웃으며 어깨동무하며 앞장서서 나아가기에 이슬동무랍니다. 자, 그러면 더 생각해 봐요. 우리는 이런 여러 낱말을 바탕으로 또 새로운 말을 지을 만해요. 어떤 말을 더 지을 수 있을까요?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사전을 쓰는 사람.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들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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