ㄴ 책삶 헤아리기

11. 어떤 길 걸으며 책을 쓰는가



  책으로 둘러싸인 곳에서 하루를 보내면, 온통 책내음을 맡으면서 책빛을 바라보고 책노래를 부르기 마련입니다. 나무로 둘러싸인 곳에서 하루를 보내면, 온통 나무내음을 맡으면서 나무빛을 바라보고 나무노래를 부르기 마련입니다.


  오늘날 아이들은 유치원이나 초등학교뿐 아니라 중학교나 고등학교에서도 갖가지 지식을 머릿속에 집어넣어 입시시험을 치르는 얼거리에 젖어듭니다. ‘학교’라는 이름이 붙는 교육시설은 대학바라기일 뿐이고, 대학교에 들어가면 취업바라기일 뿐입니다. 학교에서는 으레 책으로 공부를 시킨다고 하지만, 아이들이 손수 삶을 짓거나 가꾸거나 일구는 길을 보여주거나 밝히지는 않습니다. 책에 담긴 지식을 더 많이 외워서 시험문제를 더 잘 푸는 길만 보여줍니다.


  오늘날 어른이 된 사람들은 어릴 적부터 ‘책읽기’가 아니라 ‘책에 담긴 지식 외우기’만 했습니다. 책을 놓고 즐겁게 삶을 배우는 보람을 누리지 못하면서 하루하루 보냈기에, 학교를 벗어나면 책을 손에 안 쥐고 싶다고 여길 만합니다. 책을 참으로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학교에 있을 때이든 학교에서 벗어난 뒤이든 스스로 즐겁게 책을 사귀어요. 그러니까, 거의 모든 여느 사람들은 책이 짐스럽거나 고단합니다. 즐거움이나 기쁨이나 보람이나 재미하고는 동떨어진 채 초·중·고등학교 열두 해를 보내야 하거나 대학교까지 쳐서 열여섯 해를 보내야 했으니까요.


  4대강사업을 엄청난 돈을 퍼부어 밀어붙이고 말았습니다. 지난날 이 일을 놓고 아주 훌륭하며 뜻있다고 목소리를 내던 사람들조차, 이제는 22조 원이 어쩌느니 하고 나무랍니다만, 이런 일은 앞으로도 다시 되풀이될 듯합니다. 왜냐하면, 대학교를 마치거나 나라밖에서 배우고 온 지식인이나 학자나 벼슬아치(공무원)는 많지만, 정작 숲이나 들이나 멧골이나 시골이나 바닷가에서 지내면서 삶을 누린 지식인이나 학자나 벼슬아치는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시골에서 나고 자라서 벼슬아치가 되었어도 언제나 학교 울타리에서만 맴돌았을 뿐, 들일이나 바닷일을 거들면서 학교를 다닌 뒤 벼슬아치가 된 사람은 찾아볼 길이 없습니다. 이런 몸과 마음인 터라, 삶을 헤아리는 정책을 키우지 못하기 일쑤입니다. 아름답거나 사랑스러운 몸과 마음이 아닌 터라, 삶을 북돋우거나 살찌우는 정책을 펼치지 못하기 마련입니다.


  어떤 책을 읽어야 할까요? 어떤 책을 읽어도 대수롭지 않습니다. 어떤 책을 읽든 스스로 삶을 세우지 못했다면 그리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제아무리 훌륭하거나 아름답거나 사랑스럽다 하는 책을 손에 쥐더라도, 아직 삶부터 스스로 튼튼히 세우지 않았으면, 어떤 책이든 부질없거나 덧없기 마련입니다.


  ‘좋은 책’이나 ‘훌륭한 책’을 많이 읽어야 좋은 사람이나 훌륭한 사람이 되지 않습니다. 삶을 손수 알차게 가꿀 수 있을 때에 좋은 사람이나 훌륭한 사람이 됩니다. 생각을 스스로 지어서 삶을 스스로 지을 만한 하루를 보낼 수 있을 때에 좋은 사람이나 훌륭한 사람으로 거듭납니다.


  책을 읽기 앞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이 되지 않은 채 손에 책을 쥐기만 하기 때문에, 나중에 학자나 벼슬아치가 되고 나서 바보스럽거나 엉성한 짓을 저지르고 맙니다.


  《한국 원전 잔혹사》(철수와영희 펴냄,2014)라는 책을 보면, “원자력의 경제성에 핵연료 폐기물 처리 비용, 폐로 비용 등 ‘드러나지 않는 비용’이 적절히 반영돼 있지 않다는 문제도 있다. 원전의 전기를 실어 나를 대규모 송전선·송전탑이 번번이 지역주민들의 반대에 부딪히며 막대한 사회적 갈등 비용이 발생하고 있다(170쪽).” 같은 이야기가 흐릅니다. 원자력발전소는 큰도시 가까이에 안 짓습니다. 원자력발전소는 큰도시하고 멀리 떨어진 시골에 짓습니다. 원자력발전소를 세우려는 계획은 정부에서 마련합니다. 내로라할 만큼 많이 배우고 똑똑하다는 이들이 계획과 정책을 짭니다. 원자력발전소를 큰도시 가까이에 안 짓는 까닭은 오직 하나입니다. 사람들한테 안 좋기 때문입니다. 원자력발전소는 매우 위험한 시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잘 생각해야 합니다. 시골에는 사람이 없을까요? 시골에 원자력발전소를 지으면, 이 발전소에서 만든 전기를 누가 쓸까요? 시골에서 쓸 일은 없을 테지요? 큰도시에서 전기를 많이 쓰니까, 시골부터 큰도시까지 송전탑을 엄청나게 세워서 송전선을 엄청나게 이어야겠지요? 큰도시에서 사는 사람은 전기를 걱정없이 쓰지만, 시골에서 사는 사람은 원자력발전소 때문에 방사능 피해를 입을 뿐 아니라, 송전탑과 송전선 피해까지 받아요. 원자력발전소를 지으려는 땅에서 살던 사람은 보상금을 조금 받지만, 원자력발전소하고 몇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사는 사람은 피해가 너무 커서 고향을 등지고 다른 데로 삶터를 옮겨야 해요. 게다가 보상금조차 못 받아요.


  학자나 지식인이나 벼슬아치가 된 사람은 책을 꽤 많이 읽었어요. 그렇지만, 삶을 제대로 세우지 못한 채 학자나 지식인이나 벼슬아치가 된 탓에 원자력발전소를 함부로 짓고, 게다가 시골에 짓지요. 큰도시에는 피해가 적다지만 시골에는 피해가 큰 짓을 저질러요. 시골사람은 하나도 생각하지 못할 뿐 아니라, 시골 숲과 들과 냇물과 바다를 모두 망가뜨려요. 여기에서 더 생각을 이어 봐요. 시골이 망가질 적에 도시도 망가질 수밖에 없어요. 도시에는 논밭이 없어요. 쌀을 비롯한 곡식과 모든 남새와 열매를 시골에서 얻어요. 시골이 망가지면, 쌀뿐 아니라 모든 먹을거리가 다 망가져요. 큰도시에 피해를 입히지 않겠다면서 위해시설이나 위험시설을 시골에 지으면, 겉보기로는 큰도시가 피해를 안 입는 듯하지만 막상 큰도시가 더없이 크게 피해를 입는 셈일 뿐 아니라, 시골까지 덩달아 피해를 입어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생각을 어떻게 지어야 할까요?


  원자력발전소뿐 아니라, 모든 위해시설과 위험시설은 큰도시에 있어야 해요. 큰도시에서 쓸 모든 전기와 물건은 큰도시에서 손수 만들어서 써야 해요. 왜냐하면, 큰도시에 원자력발전소를 짓도록 생각을 기울여야 비로소 ‘안전한 원자력발전소’를 지을 수 있어요. 큰도시에 쓰레기소각장과 쓰레기매립지를 짓도록 생각을 기울여야 ‘더럽지 않고 안전한 쓰레기소각장과 쓰레기매립지’를 지을 수 있어요.


  큰도시에서 벗어나 시골에 위험시설과 위해시설을 지으려고 하니 ‘더 안전하지 않게’ 아무렇게나 하고 맙니다. 게다가, 사람이 적은 시골에 위험시설과 위해시설을 지으려고 하니 ‘반대하는 사람이 매우 적’어요. 큰도시에서는 피해를 모르고, 시골에는 사람이 워낙 적으니, 반대하는 목소리가 거의 불거지지 않을 뿐 아니라, 언론에서도 이를 거의 안 다루어요.


  책읽기란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신문사와 방송사와 출판사는 거의 다 큰도시에 있습니다. 대학교도 거의 다 큰도시에 있습니다. 모든 지식과 학문은 큰도시에서 이루어지고, 우리가 읽는 거의 모든 책은 ‘도시에 사는 작가’가 글을 써서 ‘도시에 있는 출판사’에서 책을 만든 뒤, ‘도시에 있는 책방’에서 책을 팔아요. 책을 사서 읽는 사람도 거의 모두 도시에서 살아요.


  우리가 스스로 삶을 짓거나 살피지 않고 책만 읽는다면, 지식이나 정보는 무척 많이 머릿속에 담을 수 있더라도, 막상 삶은 모르기 일쑤입니다. 우리 둘레에 숲이나 들이나 바다가 없다면, 자연도감이나 생태도감이나 환경책을 아무리 많이 읽어도, 정작 4대강사업뿐 아니라 온갖 일이 어떻게 터지고 흐르는가를 제대로 못 짚기 마련입니다.


  어떤 길을 걸으면서 책을 읽거나 쓰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어떤 곳에서 삶을 가꾸면서 책을 읽거나 쓰는지 헤아려야 합니다. 나 스스로 어떤 사람이 되려는지 생각하면서 책을 손에 쥐어야 합니다. 4347.11.26.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청소년 책이야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ㄷ 책숲 느끼기

22. 책은 많이 읽어야 할까



  책을 한 해에 만 권쯤 읽을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생각하기 나름입니다. 누군가는 한 해에 책 만 권쯤 거뜬히 읽습니다. 이와 달리, 누군가는 한 해에 책 한 권조차 손에 쥐지도 못합니다. 왜 두 사람은 이렇게 다를까요? 마음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책을 한 해에 만 권쯤 읽는다고 한다면, ‘그저 빠르게 읽는’ 셈일까요? 아니에요. 어느 한 사람이 스스로 읽고 싶은 대로 손에 책을 쥐니 어느새 이만큼 읽을 뿐이에요. 빠르게 읽지도 느리게 읽지도 않습니다. 그저 이녁 결대로 읽을 뿐이지요. 한 해에 한 권조차 못 읽는 사람은 어떤 모습인가요? 이녁도 이녁 삶결대로 책을 손에 쥘 뿐이에요. 책 한 권을 읽으려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억지로 손에 쥐기는 해도, 하루에 한 줄조차 못 읽고 지나가기 일쑤입니다.


  내가 책을 읽은 지난날을 가만히 돌아봅니다. 책 한 권을 놓고 한 해 동안 읽을 적에 더 깊거나 넓게 읽었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이를테면, 학교에서는 책 한 권을 놓고 한 해에 걸쳐서 야금야금 읽으면서 가르쳐요. 자, 그러면 생각해 보셔요. 한 해에 고작 교과서(책) 한 권 떼는 학교에서 가르치거나 배우는 사람은 ‘교과서 한 권’을 샅샅이 꿰뚫거나 제대로 알아채는가요? 아닙니다. 거의 모든 아이들은 교과서 한 권에 깃든 줄거리를 제대로 모르기 일쑤입니다.


  500쪽짜리 소설책 한 권을 읽으려면 몇 분이 걸릴까요? 이야기에 빨려든 사람이라면, 500쪽짜리 소설책을 30분이면 넉넉히 읽을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이처럼 읽을 수 있을까요? 이야기에 빨려들었기 때문입니다. 열일곱 살이던 고등학교 1학년 때에, 동무와 함께 도서관에 가서 책을 빌려서 읽는데, 나는 두 시간쯤 걸려서 읽는데, 내 동무는 이만 한 두께를 30분 만에 읽은 뒤 다른 책을 잇달아 읽어내더군요. 나는 내 책을 읽다가 동무가 읽는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았습니다. 내 동무 눈알이 움직이는 흐름과 책종이를 넘기는 손길을 가만히 살펴보았습니다. 이 아이는 ‘그냥 막 넘기는 몸짓’이 아니었어요. 그래, 마음을 가다듬어 한껏 모으면, 500쪽짜리뿐 아니라 1000쪽짜리라 하더라도 30분이면 넉넉히 읽을 수 있구나 하고 느꼈어요. 더 빠르게 읽을 수도 있겠지요. 왜냐하면, 마음을 모으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보기를 더 든다면, 외국말을 열 몇 가지나 아주 훌륭히 잘 하는 외국사람을 압니다. 이녁은 ‘아주 다른 세계’에서 쓰는 말을 몇 달 만에 아주 빈틈없이 익힌다고 해요. 어떻게 그처럼 온갖 다른 세계 말을 잘 익히느냐 하고 누군가 물으면, ‘즐겁기’ 때문이라고 말한답니다. 아하, 그렇구나, 하고 깨달았어요. 어떤 사람은 영어 하나를 배우느라 열 몇 해나 스무 해가 들지만, 제대로 영어를 말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영어뿐 아니라 온갖 외국말을 아주 빨리 익히기도 해요. 왜 그럴까요? 서로 마음이 다르기 때문이지요. 마음을 기울이거나 쏟는 크기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책은 얼마나 읽어야 할까요? 읽고 싶은 만큼 읽어야 합니다. 책은 몇 권 읽어야 할까요? 읽고 싶은 만큼 읽어야 합니다. 책은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읽고 싶은 만큼 읽어야 합니다.


  길은 언제나 하나입니다. ‘읽고 싶은 만큼’입니다. ‘읽고 싶은 만큼’이란 무엇인가 하면, 책 한 권에 깃든 이야기와 알맹이와 줄거리와 속살을, 이 책을 손에 쥔 사람 스스로 ‘받아먹어서 몸과 마음에 삭히고 싶은 만큼’입니다. 그리고, 읽고 싶은 만큼 읽는다는 말은 ‘즐겁게’ 읽는다는 뜻입니다.


  종이책을 한 해에 천 권 읽는 일은 어려울까요, 쉬울까요? 어렵다고 여기면 어렵고, 쉽다고 여기면 쉽습니다. 종이책을 한 해에 천 권 장만하는 일은 어려울까요, 쉬울까요? 어렵다고 여기면 어렵고, 쉽다고 여기면 쉽습니다. 즐겁게 읽으려 하면 즐겁게 읽을 수 있고, 즐겁게 장만하려면 즐겁게 장만할 수 있어요. 해 보면 다 돼요.


  내가 읽고 장만한 책을 돌아본다면, 나는 열여덟 살이던 고등학교 2학년 때에 책을 백 권 남짓 장만해서 읽었고, 학교도서관과 마을도서관에서 더 많은 책을 빌려서 읽었습니다. 열아홉 살이던 고등학교 3학년 때에는 책을 이백 권 남짓 장만해서 읽었고, 여러 도서관에서 더 많은 책을 빌려서 읽었습니다. 고등학교를 마친 스무 살에는 한 해에 400권이 넘는 책을 장만해서 읽었고, 대학도서관에서 훨씬 많은 책을 빌려서 읽었으며, 스물한 살에는 700권이 넘는 책을 장만해서 읽었을 뿐 아니라, 대학도서관과 구내서점에서 알바를 하면서 일손을 쉴 틈에 더 많은 책을 손에 쥐어 읽었어요. 책방마실을 하면서 ‘돈이 없기에 장만하지 못하는 책’은 눈에 불을 켜고 그야말로 책에 아주 빨려들어 읽었습니다. 그러니까, 책을 한 해에 700권 장만할 적에 내가 ‘돈이 없어 장만하지 못한 채 서서 읽은 책’은 7000권쯤 되지 싶습니다. 군대를 마치고 사회로 돌아와서 다시 신문배달을 하며 책을 장만하던 1998년부터는 한 해에 장만하는 책이 1000권을 넘어섰습니다. 이때부터 ‘하루에 장만하는 책’과 ‘한 해에 장만하는 책’이 몇 권인지 숫자를 세는 일을 그만두었어요. 이때까지 공책에 ‘산 책’과 ‘읽은 책’을 적었는데, 이 공책을 조용히 내다 버렸습니다. 그냥 책만 읽기로 했어요. 내 마음으로 들어오는 책만 바라보기로 했어요.


  어떻게 이렇게 읽을 수 있을까요? 마음을 모으면 됩니다. 그리고, 마음을 모으지 못하면 하루에 한 쪽조차 못 읽습니다. 마음을 가다듬어서 고요하면서 차분하고 사랑스러운 숨결이 흐르도록 가누면, 아침저녁으로 출퇴근을 하는 전철길에서도 책 너덧 권을 가볍게 읽을 만합니다. 내가 《보리 국어사전》을 만들던 2001∼2003년에는 전철로 일터에 출퇴근을 하는 길에 ‘두툼한 인문책’을 으레 두 권 읽고 ‘도톰한 동화책’도 으레 두 권 읽으면서 지냈습니다. 요즈막에는 볼일이 있어 서울마실이나 부산마실을 하면, 시외버스에서 너덧 시간을 보내는 동안 책을 대여섯 권씩 읽습니다. 다른 것에는 마음을 안 빼앗기고 책만 바라보면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책을 많이 읽을 수 있으면 훌륭한가요? 아닙니다.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은 ‘많이 읽었다’뿐입니다. 훌륭하거나 안 훌륭한 대목하고는 아무것도 안 이어집니다.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은, 그저 읽고픈 책이 많기 때문에 많이 읽을 뿐이에요. 밥을 많이 먹는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똑같이 살이 붙지 않습니다. 밥을 많이 먹어도 살이 안 붙는 사람이 있고 밥을 적게 먹어도 살이 잘 붙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오래달리기뿐 아니라 마라톤도 잘하지만, 어떤 사람은 조금만 달려도 지쳐요. 그저 몸과 마음이 다를 뿐입니다.


  책은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앞서 말했듯이 책은 ‘읽고 싶은 만큼’ 읽으면 되고, 스스로 삶을 가꾸거나 짓는 길에 슬기롭게 삭히는 이야기로 받아들이면 됩니다. 1000권 읽은 사람이 훌륭하고 999권 읽은 사람은 안 훌륭할 까닭이 없습니다. 999권 읽은 사람은 훌륭하고 998권 읽은 사람은 안 훌륭할 까닭이 없습니다. 998권 읽은 사람은 훌륭하고 997권 읽은 사람은 안 훌륭할 까닭이 없습니다. 이 숫자를 눈여겨보셔요. 997, 996, 995, 994, 993, …… 3, 2, 1, 0까지 이릅니다. 1000권 읽은 사람이나 0권 읽은 사람이나 똑같습니다. 숫자는 부질없는 놀음놀이일 뿐입니다.


  0권을 읽든 1000권을 읽든 온마음을 기울여서 읽을 때에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책은 종이책에만 있지 않아요. 책은 꽃 한 송이와 나무 한 그루에도 있어요. ‘들꽃 도감’을 펼쳐야 꽃을 알까요? ‘나무 도감’을 100권쯤 읽으면 나무를 잘 알까요? 아니지요. 들꽃을 손수 바라보고, 나무를 손수 가꾸며 돌보아야 꽃과 나무를 잘 알아요. 꽃을 늘 마주하는 사람은 종이책 아닌 ‘꽃책’을 읽습니다. 나무를 늘 돌보는 사람은 종이책 아닌 ‘나무책’을 읽습니다.


  ‘종이책 읽은 숫자’를 드러내는 일은 그냥 그런 숫자일 뿐이에요. 훌륭한 숫자도 바보스러운 숫자도 아닙니다. 이를테면, 내 나이를 밝히는 일하고 같아요. 내 나이가 스물이면 젊고 마흔이면 늙을까요? 내 나이가 마흔이면 젊고 예순이면 늙을까요? 아니에요. 나이는 숫자로 치지 않습니다. 나이는 늘 마음으로 칩니다. 마음이 젊을 때에 젊고, 마음이 늙을 때에 늙지요. 책은 마음으로 읽습니다. 마음을 기울이면 한 해에 천 권이 아니라, 하루에 천 권도 읽습니다. 해 보면 됩니다. 사람들이 스스로 해 보려 하지 않으니 못 할 뿐이에요. 그리고, 굳이 하루에 천 권을 읽을 까닭이 없겠지요. 하루 내내 책만 읽으면 삶이 재미없을 테니까요. 4347.11.20.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청소년 책이야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ㄹ 책빛 먹기

28. 어른 되면 어린이책 안 읽어도 되나



  어린이책을 읽는 어른이 매우 드뭅니다. 청소년책을 읽는 어른도 몹시 드뭅니다. 아이를 낳아 돌보는 어버이가 아니라면 어린이책을 좀처럼 안 읽습니다. 이녁 아이가 자라 푸름이가 되지 않고서야 청소년책을 손에 쥘 일이 거의 없는 어른입니다. 그러면, 어린이책은 어린이만 읽는 책인 셈일까요? 청소년책은 푸름이일 때에만 읽는 책인가요?


  만화책은 ‘아이들이나 읽는 책’인 줄 잘못 아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림책도 ‘아이들이나 읽는 책’으로 여기는 사람이 많습니다. 동화책을 읽자고 이야기를 나누는 어른은 참 드뭅니다. 소설책이 아닌 동화책을 읽어 보라고 건네면 이녁을 마치 깔보는 줄 여기는 사람까지 있습니다.


  문학을 하는 어른 가운데 동시를 읽거나 쓰는 이는 무척 드뭅니다. 문학을 한다면 ‘어른 시’만 읽고 써야 하는 줄 여기곤 합니다. ‘동시’나 ‘청소년 시’는 아예 생각조차 안 하는 어른이 많습니다. 문학평론을 하는 이들도 ‘어른 시’만 다룰 뿐입니다. 더러 동시나 청소년 시를 다루는 문학평론가가 있지만, 어린이나 청소년이 읽을 만하도록 평론을 쓰는 사람은 아주 드뭅니다. 어른이 읽어도 알아듣기 어려운 말로 평론을 할 뿐입니다.


  테드 랜드 님 그림에 빌 마틴 주니어 님과 존 아캠볼트 님이 글을 넣은 그림책 《손, 손, 내 손은》(열린어린이 펴냄,2005)이 있습니다. 나는 이 그림책을 처음 만나던 날 아주 깜짝 놀랐습니다. 처음에는 손이나 발이나 귀나 눈이나 몸을 놓고 아이들 눈높이에서 잘 살피거나 헤아리도록 돕는 책인가 하고 생각했는데, 막상 이 책을 장만해서 아이와 함께 읽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그림책 《손, 손, 내 손은》을 읽으면, 다음처럼 아주 짤막한 말만 잇달아 나옵니다. “발, 발, 내 발은 또박또박 걷고 우뚝 멈춰요(4쪽).”라든지 “코, 코, 내 코는 흠흠 냄새 맡고 쌕쌕 숨쉬어요(8쪽).”라든지 “눈, 눈, 내 눈은 또랑또랑 쳐다보고 뚝뚝 눈물 흘려요(10∼11쪽).”라든지 “뺨, 뺨, 내 뺨은 쪽 뽀뽀해 주면 발그레 빨개져요(19쪽).” 같은 말이 찬찬히 흐릅니다.


  이 그림책을 엮은 세 어른은 짤막한 한 줄로 우리 몸을 슬기롭게 알려줍니다. 그리고, 우리 몸을 보여줄 적에 지구별 여러 겨레 여러 어린이를 보여줍니다. 유럽과 아시아와 북극과 아프리카와 중남미 여러 어린이가 차근차근 나오면서 몸 한쪽을 살그마니 가리키면서 빙그레 웃습니다.


  그림책 《손, 손, 내 손은》은 아무것도 외치지 않습니다. 그저 손과 발과 코와 눈과 뺨 이야기를 한 줄로 들려줍니다. 그러나, 오직 한 줄로 들려주는 글과 오직 한 칸으로 보여주는 그림은 지구별 이웃과 동무를 새롭게 바라보도록 이끕니다. 교훈이나 감동을 내세우지 않는 작은 그림책인데, 오래도록 다시 읽고 또 보면서 생각에 잠기도록 이끕니다. 그렇지요. 지구별이 평화를 이루는 길은 하나입니다. 둘이 아닌 하나입니다. 나라마다 온갖 전쟁무기를 갖춘대서 평화롭지 않습니다. 모든 나라에 핵무기가 있을 때에 평화롭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느 때에 평화일까요? 모든 전쟁무기를 없애서 낫과 쟁기로 바꾸고, 모든 핵무기를 없애면서 ‘지역 자가 발전’을 이루면 평화입니다.


  전쟁무기가 있는 곳에는 전쟁이 있습니다. 전쟁무기가 없는 곳에는 전쟁이 없습니다. 아주 마땅합니다. 자동차가 있는 곳에는 자동차가 달립니다. 자동차가 없는 곳에는 자동차가 안 달립니다. 아주 마땅해요. 꽃이 있는 곳에 꽃이 피고, 숲이 있는 곳에 푸른 바람이 붑니다. 그럼요. 아주 마땅하다 마다요.


  지구별에서 우리가 사이좋게 어깨동무를 하는 길이란 무엇일까요? 천 쪽이나 만 쪽에 이르는 두툼한 인문책을 쓰거나 논문을 쓰면 이 길을 밝힐까요? 아닙니다. 인문책으로는 십만 쪽이나 백만 쪽을 써도 못 밝힙니다. 그러나, 그림책으로는 오직 한 줄로도 지구별 평화를 밝힙니다. 내 몸을 사랑하고 내 이웃과 동무 몸을 사랑하며 서로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되자, 하는 한 마디면 지구별 평화를 밝힙니다. 더욱이, 그림책 《손, 손, 내 손은》은 우리가 함께 지키고 가꿀 ‘인권’을 살며시 밝힙니다. 모든 나라 모든 겨레 모든 인종은 하나입니다. 모두 사랑스럽고 모두 아름답습니다. 모두 착하고 모두 참답습니다.


  어른이기에 어린이책을 더 읽을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린이 마음을 헤아리고 어린이와 함께 즐겁게 가꿀 삶터를 그리도록 도우니, 어른이라면 어린이책을 읽을 만합니다. 어른으로 살기에 어린이책을 더 신나게 읽을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린이를 사랑하고 아낄 때에 우리 삶자락을 사랑스레 돌보는 길을 여는 슬기를 얻을 테니 어른이라면 어린이책을 읽어야지 싶습니다.


  어린이책은 어린이부터 읽는 책입니다. 청소년책은 청소년부터 읽는 책입니다. 동시는 어린이도 알아듣고 즐길 수 있는 아름다운 시입니다. 청소년 시는 청소년도 가슴으로 느끼면서 기쁘게 나눌 수 있는 시입니다.


  우리 어른들이 어린이와 함께 누릴 만한 시를 짓고 글을 쓴다면 아주 아름다우리라 생각합니다. 아이를 낳은 어버이로 살든 아이를 낳지 않고 혼자 살든, 저마다 제 보금자리에서 사랑을 길어올리는 이야기를 따사롭고 넉넉하게 지을 수 있으면 아주 아름다우리라 생각합니다. 4347.10.10.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푸른 책과 함께 살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ㄷ 책숲 느끼기

19. 아이를 낳고 돌보며 읽는 책



  오늘날 학교에서는 ‘성교육’을 합니다. 그러나 ‘사랑교육’은 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학교에서 하는 ‘성교육’은 푸름이가 앞으로 어버이가 되어 새로운 아이를 기쁨으로 맞이해서 사랑스럽게 돌보도록 이끄는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습니다. ‘정자와 난자가 만나는 얼거리’와 ‘피임’을 어떻게 하는가를 알려주면서 성교육이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여성과 남성이 서로 어떻게 다른지를 보여주기는 하지만, 여성과 남성이 함께 이루는 삶과 사랑과 꿈은 보여주지 못합니다. 그나마 오늘날 학교는 대학입시에 목을 매달다 보니, 대학입시하고는 많이 동떨어진 성교육조차 제대로 안 하거나 못 합니다. 그러면 푸름이는 고등학교를 마친 뒤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요. 대학교에 가면 성교육이나마 할까요. 여성과 남성이 서로 어떻게 다른 몸인가를 헤아리지 못하면서, 또 여성과 남성이 서로 아름답게 어우러지는 삶과 사랑과 꿈을 읽지 못하면서, 스무 살 젊은이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게다가 성교육도 사랑교육도 제대로 못 받은 몸으로 사내는 군대에 갑니다. 군대에 간 젊은 사내는 총과 칼로 사람을 죽이는 훈련을 여러 해에 걸쳐 배워야 합니다. 계급과 신분에 따라 사람을 갈기갈기 쪼개는 틀에 길들어야 합니다. 한국 사회에서 젊은 사내는 무엇을 보고 배우는 어른이 될까 궁금합니다.


  고등학교를 마친 푸름이는 대학교에 가거나 일자리를 얻습니다. 고등학교를 마치거나 대학교까지 마친 젊은이가 일자리를 얻어 여러 해 지나면 여느 어버이는 젊은이한테 ‘시집·장가’를 가야 한다고 말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나이가 스물다섯이나 서른이 되었어도 성교육은커녕 사랑이 무엇이고 삶과 꿈이 무엇인지 배우거나 듣거나 마주한 적이 거의 없다시피 한 젊은이입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젊은이더러 시집과 장가를 가서 아이를 낳으라고 여느 어버이마다 닦달하곤 합니다.


  짝꿍은 어떻게 만나야 할까요. 살림은 어떻게 꾸려야 할까요. 짝을 만나 제금을 난다면, 살림뿐 아니라 밥은 어떻게 지어서 먹고, 집안은 어떻게 돌보아야 할까요. 시집이나 장가를 가서 아이를 낳은 젊은이는 아이를 어떻게 돌보거나 키워야 할까요. 갓 태어난 아기를 유아원에 넣거나 어린이집에 보내거나 유치원을 다니게 하면 될까요.


  어버이로서 아이를 낳아 돌보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삶을 생각해야 한다고 느낍니다. 어버이로서 스스로 아름답게 삶을 지어 즐겁게 하루하루 누릴 수 있는 길을 걸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그리고, 어린이와 푸름이가 저마다 스스로 삶을 짓고 즐겁게 하루를 누릴 수 있는 힘을 내도록 도와야 한다고 느낍니다.


  대학입시를 걱정할 노릇이 아니라, 앞날을 생각해야지 싶습니다. 시험성적을 따질 일이 아니라, 우리 마음밭에 사랑과 꿈이 싹틀 수 있도록 헤아려야지 싶습니다.


  《람타, 현실 창조를 위한 입문서》(아이커넥 펴냄,2012)라는 책을 읽습니다. 어른으로서 우리 집 아이들과 즐겁게 살아갈 길을 생각하려고 읽습니다. 우리 집 아이들이 앞으로 무럭무럭 자라서 스스로 삶을 짓는 길을 찾도록 이끌자고 생각하면서 읽습니다.


  나는 ‘육아서’라는 책은 읽지 않습니다. 아이를 낳아서 돌보는 삶을 책으로는 배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먼먼 옛날부터 그랬어요. 어떤 어버이도 책을 읽으면서 아이를 돌보지 않습니다. 어떤 어버이도 책에 따라 살을 섞어서 아이를 낳지 않습니다. 어떤 어버이도 아이한테 밥을 차려 줄 적에 책에 따라 밥을 짓지 않아요. 젖을 물린다든지 기저귀를 간다든지 빨래를 하거나 걸레질을 하거나 설거지를 하는 모든 집일을 책으로 배우는 사람은 없어요. 아니, 책으로 쓸 수 없고, 책으로 가르칠 수 없습니다. 삶은 오직 삶으로 가르칩니다.


  “당신 존재가 순수한 상태에 있을 때에는 낮은 차원을 이해할 수 있는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71쪽).”와 같은 이야기를 곰곰이 돌아봅니다. 내 마음이 맑고 정갈한 사랑으로 가득하다면 내 눈길은 어떠할까 헤아려 봅니다. 맑고 정갈한 사람은 맑고 정갈한 삶을 바라보겠지요. 맑고 정갈한 길을 걸으려 할 테며, 맑고 정갈한 사랑을 나누려 하겠지요.


  맑고 정갈한 삶을 맑고 정갈한 넋으로 가꾸는 사람은 허튼 짓이나 엉뚱한 짓이나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습니다. 허튼 짓이나 엉뚱한 짓이나 어리석은 짓을 하는 사람은, 삶과 넋이 모두 허튼 길로 빠졌거나 엉뚱한 곳으로 기울어졌거나 어리석게 뒤틀렸기 마련입니다. 사랑스레 살아가는 사람은 사랑스러운 일과 놀이를 합니다.


  우리가 책을 바란다면 어떤 책을 바라는지 생각해 볼 노릇이에요. 마음이 착한 사람은 착한 책을 바라면서 즐겁게 읽겠지요. 마음이 아름다운 사람은 아름다운 책을 바라면서 기쁘게 읽겠지요. 마음이 착하거나 아름다운 사람이 ‘치고 박고 죽이고 싸우는 이야기 그득한 책이나 영화’를 볼 일이 없습니다. 이른바 막장연속극을 착하거나 아름다운 사람이 즐길 일이 없습니다. 방송이 막장연속극으로 가득하다면, 착하거나 아름다운 사람은 텔레비전을 끌 뿐 아니라, 집에서 텔레비전을 치우겠지요.


  “물, 물고기, 꽃이 활짝 핀 나무, 가시덤불, 새, 도마뱀, 아이들과 함께 정원에 두고 아이들이 숨을 수 있는 동굴을 만들어 주면, 삶이 얼마나 아름답게 펼쳐지는지 볼 수 있을 것이다 … 나는 날씨로부터 배웠고, 낮으로부터 배웠고, 밤으로부터 배웠다. 그리고 파괴와 전쟁의 와중에 여기저기 널려 있는 연약하고 하찮은 생명으로부터 배웠다. 내 존재의 스승은 절대 근원이었다(95, 96쪽).”와 같은 이야기를 새삼스레 생각합니다. 학교를 다니며 시험공부만 하던 젊은이는 무엇을 배웠을까요? 학교를 다니더라도 들길과 숲길을 걸어서 오간 젊은이는 무엇을 배웠을까요? 학교를 안 다녔으나 어버이한테서 사랑을 물려받은 젊은이는 무엇을 배웠을까요?


  우리 삶자락을 돌아보면, 19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거의 모든 사람이 시골에서 흙을 만졌습니다. 1940년대라면 더 많은 사람이 시골에서 흙을 만졌고, 1900년대라면 몇몇 사람을 빼고는 모두 시골에서 흙을 만졌습니다. 이무렵 학교를 다닌 사람은 매우 드뭅니다.


  학교를 안 다닌 사람은 무엇을 보고 배울까요? 바로 비와 바람과 해를 보고 배우겠지요. 흙과 풀과 나무를 보고 배우겠지요. 새와 벌레와 짐승과 물고기를 보고 배우겠지요. 《람타, 현실 창조를 위한 입문서》라는 책을 더 읽어 봅니다. “사람들은 수많은 생을 통해서 이미 실패라고 입증되었던 믿음, 이해, 삶과 사고방식들을 여전히 고수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들은 자신의 변형된 에고로 인해 비틀거리고, 자신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하기를 두려워하며, 단지 죽음으로밖에 이끌 수 없는 위선 속에 살아간다(97쪽).”와 같은 이야기를 밑줄을 그으며 읽습니다. “신으로서 살라. 그러면 진정으로, 당신은 자신을 용서할 수 있고, 왜 그렇게 살아왔는지를 알고 이해하게 될 것이다(116쪽).”와 같은 이야기도 밑줄을 그으며 읽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우리들은 일본 제국주의에 짓밟히면서 종살이를 했다고 합니다. 그러면, 조선이라는 나라에서는 어떠했을까요? 소작을 짓던 수많은 시골지기는 일제강점기에서나 조선에서나 똑같이 소작을 지었습니다. 일제강점기에도 ‘소작쟁의’라는 이름으로 시골지기가 들고 일어선 일이 잦았지만, 조선에서도 ‘농민항쟁’이 그치지 않았어요. 내 땅이 없어 땅 부자한테서 땅을 조금 얻어 흙을 일구던 사람들은 땀값을 거의 못 받았어요. 엉터리처럼 짓밟힌 채 지내다가 도무지 견딜 수 없어 낫과 쟁기를 손에 쥐고 벌떡 일어섰어요.


  일제강점기에서 풀린 한국 사회이지만, 요즈음은 돈 때문에 쪼들리는 사람이 많아요. 사장님 앞에서 굽신거려야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비정규직이 아주 많은데, 정규직이라 하더라도 공장에서 똑같이 여덟 시간씩 기계를 만집니다. 한 주에 닷새를 일한다 하더라도, 다른 이틀은 ‘닷새 동안 일을 안 쉬고 공장에 나와서 기계를 만질 수 있도록 몸을 되살리는 겨를’일 뿐입니다.


  어버이는 어떻게 살아가는 사람일까 궁금합니다. 어른은 삶을 어떻게 꾸리는 사람인지 궁금합니다. 어린이와 푸름이는 무엇을 배워서 어떤 젊은이로 자라 꿈과 사랑을 키울 숨결일는지 궁금합니다.


  책은 무엇을 가르칠까요. 책에서 무엇을 배울까요. 학교는 무엇을 가르치나요. 학교에서 무엇을 배우나요. 졸업장을 따야 하기에 학교를 가야 한다면, 학교란 곳은 매우 쓸쓸합니다. 졸업장을 따야 한다면 억지로 몇 해를 버티지 말고, 돈을 주고 졸업장을 살 노릇이지 싶습니다. 학교에서 참다운 삶을 배우고 아름다운 사랑을 익히며 맑은 꿈을 키울 수 있다면, 우리는 중학교나 고등학교를 잘 다니고서 졸업장은 안 받아도 됩니다. 학교가 참답고 아름다우며 사랑스럽다면, 일곱 학기를 다닌 뒤 마지막 학기는 안 다닌 채 그만두어도 됩니다. 우리는 졸업장이 있어서 어떤 일을 잘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삶을 배우고 사랑을 익히며 꿈을 키울 때에 어떤 일이든 잘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읽을 책이라면, 내 삶을 나 스스로 제대로 바라볼 수 있도록 이끄는 책이어야지 싶습니다. 내가 스스로 내 삶을 제대로 바라본 뒤, 제대로 깨닫고, 제대로 알아채서, 제대로 하루를 짓도록 이끄는 책이라면 얼마든지 읽을 만하지 싶습니다.


  지식을 알려주거나 정보를 보여주는 책은 굳이 안 읽어도 된다고 느껴요. 왜냐하면, 더 나은 지식이나 더 빠른 정보를 다른 책이 알려줄 테니까요. 그리고, 더 나은 지식이나 더 빠른 정보가 있어도 또 다른 책이 이런 책을 앞지르겠지요. 다시 말하자면, 지식이나 정보를 다루는 책은 어떤 책이든 한 가지조차 볼 만한 까닭이 없습니다.


  “삶이 지루하다고 느끼는 이유 중의 하나가 당신은 자신이 진리라고 믿고 있는 것만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매주 토요일 밤이나 일요일 아침 그리고 직장에서도 똑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143쪽).”와 같은 이야기를 차근차근 되읽습니다. 참말 그렇습니다. 대학입시를 앞둔 수험생은 대학입시만 생각하며 하루를 맞이합니다. 아이를 대학교에 넣고 싶은 어버이는 늘 대학입시만 생각하며 하루를 맞아들입니다. 다른 길이나 다른 삶이나 다른 꿈은 생각하지 않아요. “마음이 현실을 창조한다. 당신의 모든 나날은 지금까지 당신이 생각하는 방식으로 일어난 결과이다(152쪽).”와 같은 이야기를 여러 차례 되읽은 뒤 마음에 새깁니다. 참으로 그렇거든요. 대학입시에서 손을 뗄 적에는 대학교라는 길은 갈 수 없을 테지만, 다른 길을 열어요. 대학입시에서 눈길을 거둘 적에는 대학교라는 길을 더 볼 수 없을 테지만,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어요.


  나는 대학교를 다섯 학기만 다니고 그만두었습니다. 아예 안 갈 수도 있었으나, 대학입시를 치러 대학교에는 들어갔어요. 그런데 막상 대학교라는 곳에 들어가서 ‘학문을 익히’려 하는데, 교수뿐 아니라 동무와 선·후배 모두 학점 아닌 일에는 마음을 쓰지 않습니다. 오직 학점을 따려고 ‘숙제 베껴쓰기’를 하고 ‘시험 때 훔쳐보기’를 합니다. 학문을 하고 배움길 찾는 교수와 학생이 아예 없지 않습니다만, 참으로 찾아보기 어려웠어요. 그래서 나는 혼자 배움길을 가겠노라 생각하며 대학교를 그만두었습니다. 학기마다 큰돈을 학교에 바치기보다, 이만 한 큰돈으로 내 넋과 삶을 북돋울 만한 책을 스스로 한 권씩 찾아서 장만하여 읽어서 스스로 배우자고 생각했어요.


  내가 즐거운 마음일 때에 삶이 즐겁습니다. 부잣집 아이로 태어났기에 내 삶이 즐겁지 않아요. 부잣집 아이로 태어났어도 스스로 어두운 마음이면 삶이 어두워요. 마음에 따라 삶이 달라집니다. 시험성적이 잘 나왔어도 마음이 어두우면 즐거울 일이 없고, 대학교 졸업장이 있어도 어둡고 슬픈 마음으로 삶이 어둡고 슬픈 길로 흐른다면 그저 어둡고 슬프기만 합니다. 대학교 졸업장이 있어도 마음이 따스하지 않다면, 나중에 하는 일도 따스하기 어렵습니다.


  사랑은 따스한 마음으로 합니다. 사랑은 포근한 손길로 나눕니다. 사랑은 아름다운 꿈으로 짓습니다. 어린이는 어린이로서 삶을 즐겁게 누리도록 이끄는 책을 읽을 때에 즐겁습니다. 푸름이는 푸름이로서 삶을 곱게 누리도록 북돋우는 책을 읽을 때에 고운 넋이 됩니다. 어버이와 어른은 삶을 참되게 누리도록 돕는 책을 읽을 때에 참삶을 가꿉니다.


  이 땅 모든 푸름이는 곧 스무 살이 됩니다. 이 나라 모든 푸름이는 머잖아 어른이 되거나 어버이 자리에 들어섭니다. 앞으로 걸어갈 길을 헤아리면서 어떤 책을 곁에 두고 어떤 동무를 둘레에 두며 스스로 어떤 넋이 될 때에 아름다운 삶을 일굴 만한지 생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4347.10.8.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푸른 책과 함께 살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ㄴ 책삶 헤아리기
9. 책에 담긴 이야기란


  책에는 이야기를 담습니다. 이야기를 담지 않는 책은 없습니다. 다만, 사람에 따라 이야기를 달리 받아들여요. 어느 책에 담긴 이야기는 나한테 반갑거나 즐거울 수 있고, 다른 어느 책에 담긴 이야기는 나한테 따분하거나 재미없을 수 있어요. 이와 거꾸로, 내가 반갑게 여긴 책을 내 이웃은 재미없다고 여길 수 있어요. 내가 따분하다고 여긴 책을 내 동무는 신나게 읽을 수 있습니다.

  같은 책을 놓고 두 사람은 왜 다르게 받아들일까요? 왜냐하면,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서로 다른 곳에서 태어나고, 서로 다른 곳에서 자라며, 서로 다른 곳에서 사랑을 받아 살았어요.

  나는 집에서 집일을 합니다. 집에서는 누구나 ‘집일’을 할 테지요. 그런데, 나는 아버지이자 사내로서 집일을 합니다. 밥도 하고 청소와 빨래도 하며 아이돌보기를 도맡습니다. 다만, 내 둘레에서 아버지나 사내로서 이렇게 집일을 하는 이웃을 아직 만나지 못합니다. 도시에서도 시골에서도 비슷합니다. 날마다 밥을 차려 아이를 먹이는 아버지는 몇이나 될까요? 아이들이 갓 태어났을 적에 손수 똥오줌 기저귀를 빨아서 햇볕에 말린 뒤 정갈하게 개서 샅에 댄 아버지는 얼마나 있을까요?

  얼마 앞서 이웃집에 나들이를 다녀왔는데, 이웃 어느 집을 가든 아버지나 사내 자리에 있는 사람이 엉덩이를 방바닥에서 떼는 일을 보기란 참 어렵습니다. 거의 모든 집에서 어머니나 가시내 자리에 있는 사람이 두 다리 쉴 틈이 없이 부산스레 움직입니다.

  우리는 저마다 어느 자리에 서서 책을 읽는지 돌아볼 노릇입니다. ‘남녀평등을 말하거나 사회불평등을 나무라는 인문책’은 읽되, 집에서 엉덩이는 방바닥에 붙인 채 안 떼는 삶은 아닌지 돌아볼 노릇입니다. ‘덜떨어지거나 낡은 정치와 사회와 경제를 꾸짖는 인문책’은 읽지만, 집에서 집일은 하나도 안 하거나 거의 안 하거나 겨우 시늉을 하듯 거드는 척하는 삶은 아닌지 되새길 노릇입니다. ‘역사와 문화와 예술을 밝히는 인문책’은 읽으면서도, 집에서 아이와 복닥이고 부대끼며 함께 노는 사람하고는 동떨어진 채 지내는 ‘가부장 권력’은 아닌지 짚을 노릇입니다.

  미국에서 1939년에 처음 나왔고, 한국말로는 1996년에 처음 나온 《마이크 멀리건과 증기 삽차》(버지니아 리 버튼 글·그림, 시공사 펴냄)라는 그림책이 있습니다. 퍽 오래되었다고 할 만한 그림책입니다. 이 그림책을 그린 분은 1909년에 태어나 1968년에 숨을 거두었습니다. 《작은 집 이야기》라는 그림책도 선보였는데, 이 그림책은 부동산이 아닌 보금자리라 할 집 하나는 어디에서 어떻게 뿌리를 내리면서 아름답게 피어나는가 하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말괄량이 기관차 치치》라는 그림책도 선보였으며, 이 그림책은 오래된 증기기관차가 새로운 길로 나들이를 가면서 겪는 아기자기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생명의 역사》라는 그림책도 선보였고, 이 그림책은 지구별에서 사람이 걸어온 발자국을 서양 문명 눈높이에서 보여줍니다. 아무튼, 버지니아 리 버튼이라는 분은 아이들한테 따스한 삶과 이웃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으로 그림책을 그렸어요. 누구보다 이녁이 낳아 돌보는 아이한테 따스한 삶을 보여주고 포근한 사랑을 물려주며 살가운 꿈을 북돋우려고 그림책을 그렸습니다.

  “커다란 배가 지나다닐 수 있도록 널따란 운하를 판 이들이 누구겠니? 바로 마이크 멀리건 아저씨와 메리 앤이야. 물론 다른 사람들도 함께 일을 거들었지(5쪽).”와 같은 이야기라든지, “이 위에다 새 시청을 지을 건데 뭐하러 메리 앤을 끌어 내요? 메리 앤은 새 시청에 쓸 난방 기구가 되면 되고, 마이크 멀리건 아저씨는 수위 아저씨가 되면 되잖아요. 그러면 우린 새 난방 기가룰 살 필요도 없고, 아저씨한테 하루 만에 지하 공사를 끝낸 돈도 드릴 수 있어요(39쪽).”와 같은 이야기를 살가운 그림과 함께 읽습니다. 여러모로 멋이 있고 뜻이 있습니다. 새로운 삽차가 나오면서 ‘증기 삽차’는 낡은 것으로 밀리는 사회 흐름을 잘 보여주는 그림책이라고 할 만합니다. 그런데, 나는 이 그림책이 그닥 재미있지 않습니다. 애틋하고 아름다운 빛과 무늬가 흐르는 그림책인 《마이크 멀리건과 증기 삽차》이지만, 삽차로 숲을 밀어 도시를 만들고, 이 도시에서 다시 더 큰 건물을 짓는 이야기만 흐르니, 도리어 심심하거나 따분하네 하고 느낍니다.

  스웨덴에서 1874년에 태어나 1953년에 숨을 거둔 엘사 베스코브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분이 1912년에 스웨덴에 처음 선보이고, 한국에서는 2002년에 처음 나온 《펠레의 새 옷》(2002년 지양사 옮김,2003년 비룡소 옮김)이라는 그림책이 있습니다. 자그마치 백 해가 넘는 그림책입니다. 이 그림책을 보면, 글이 아주 짤막하게 한두 줄만 나오면서 시원하게 큼지막한 그림이 하나씩 나옵니다. 짤막하게 넣은 글은 “펠레는 할머니의 당근밭에서 잡초를 뽑았습니다. 그동안 할머니는 펠레의 양털을 빗어서 솜처럼 부풀렸습니다(8쪽).”라든지 “펠레는 할머니의 암소를 돌보고, 할머니는 양털을 물레로 자아 실을 뽑았습니다(12쪽).”라든지 “펠레는 어머니한테 갔습니다. ‘어머니, 이 실로 옷감을 짜 주세요.’ ‘그러구 말구. 그동안 네 여동생을 돌보아 주겠니?’ 펠레가 여동생을 보살피는 동안, 어머니는 베틀에 앉아 옷감을 짰습니다(20쪽).”라든지 “그리고 일요일 아침, 펠레는 새 옷을 입고 아기 양을 찾아갔습니다. ‘아기 양아, 고맙다. 너의 털로 새 옷을 지을 수 있었어.’ ‘음매애-애-애.’(28쪽)”와 같이 흐릅니다. 백 살이 넘은 스웨덴 그림책에 나오는 어린 펠레는 옷 한 벌을 얻고 싶어서 퍽 오랫동안 ‘일’을 하고 ‘심부름’을 합니다. 그러고는 기다리지요. 그리고 손수 물을 들입니다. 나이로 치면 아마 열 살 즈음 되었지 싶은데, 이 아이는 온갖 일을 거들거나 스스로 한 끝에 새 옷을 얻어요.

  그림책 《펠레의 새 옷》에 나오는 아이는 옷을 돈으로 사지 않습니다. 이 아이는 돈이 없기도 할 테지만, 돈을 벌거나 쓰지도 않습니다. 이 아이와 이웃에 있는 사람들도 이 아이한테서 돈을 받지 않습니다. 서로 품을 팔아요. 이른바 품앗이라고도 할 만합니다.

  오래된 그림책 두 가지인데, 하나는 도시와 문명과 사회를 보여줍니다. 다른 하나는 시골과 삶과 사랑을 보여줍니다. 어느 쪽이 더 낫거나 좋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나는 도시보다 시골이 끌리고, 문명보다 삶이 반가우며, 사회보다 사랑이 즐겁습니다.

  책에는 모든 이야기를 담을 수 있습니다. 도시나 문명이나 사회를 책에 담았다고 해서 나쁠 까닭이 없습니다. 도시 이야기를 다루면서도 얼마든지 사랑스럽고 아름답게 엮을 수 있습니다. 이와 달리 시골 이야기를 다루지만 정작 안 사랑스럽거나 안 아름다울 수도 있어요.

  책에 담는 이야기란, 책을 짓는 사람이 스스로 가꾸는 삶입니다. 미국에서 그림책을 그린 버지니아 리 버튼이라는 분은 이분 나름대로 아이와 함께 지내면서 물려주고 싶은 사랑을 그림책에 담습니다. 스웨덴에서 그림책을 그린 엘사 베스코브 님은 이분 나름대로 아이와 함께 살면서 물려주고 싶은 사랑을 그림책에 실었습니다.

  책을 짓는 사람뿐 아니라 책을 읽는 사람도, 책 한 권을 앞에 놓고 삶을 생각하거나 그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책 한 권에서 감도는 사랑과 꿈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4347.10.6.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푸른 책과 함께 살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