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살림말


풀잎이슬 : 아침이나 새벽이나 밤에 맞이하는 풀잎이슬은, 보기만 해도 스치기만 해도 잎을 훑어 뺨에 대기만 해도 온몸을 사르르 녹인다. 해가 뜨면 가뭇없이 사라지는 듯한 풀잎이슬이지만, 마른다기보다 찬찬히 풀잎이며 풀줄기이며 꽃송이에 녹아들어 하루를 싱그러이 살아내는 새숨빛이 되는구나 싶다. 들짐승이나 풀벌레는 바로 이 풀잎이슬을 조금조금 나누면서 목을 축인다. 사람도 이 풀잎이슬을 살짝살짝 나누면 하늘처럼 맑고 바람처럼 상냥한 새숨결이 깨어나지 않을까. 2015.10.5.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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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다리 : 얼굴이나 목소리를 모르는 채 마주하는 누리그물인데, 지난날에 종이에 이야기를 담아 주고받던 손글월도 얼굴이나 목소리를 모르는 채 마주하던 마음이다. 손에 쥐어 읽는 책도 매한가지이지. 글쓴이를 만난 사람도 있을 테지만, 글쓴이를 만난 적 없는 사람이 훨씬 많다. 글쓴이를 본 적이 있더라도 스스럼없이 이웃이나 동무가 되어 조곤조곤 깊고 넓게 이야기를 펴 본 사람은 드물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는 웬만한 자리에서 ‘모르는 사람’하고 어울린다. ‘아는 사람’하고 어울려 일하는 일은 드물다. 글을 써서 내놓든, 책을 묶어 펴내든, 살림을 지어 팔든, ‘우리를 아는 사람’보다는 ‘우리를 모르는 사람’이 마주하기 마련이다. 모르는데 어떻게 글이며 책이며 살림을 주고받을까? 아무래도 마음이 다리가 되어 만나기 때문이지 싶다. 스스로 북돋우고 서로 살찌우고픈 즐거운 숨결을 바람 한 줄기에 얹어서 글이나 책이나 살림으로 띄워 보내는 셈 아닐까. 2020.10.1.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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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을 모르는 번역 : 바깥말을 우리말로 옮기는 일을 하는 사람 가운데 서울이나 큰고장이 아닌, 시골이나 숲에 깃들어서 삶을 읽고 새기는 일꾼은 얼마쯤 있을까. 풀꽃나무하고 숲을 곁에 두고 마음으로 품으면서 책을 짓거나 엮거나 쓰는 글님이나 일꾼은 몇쯤 있을까. 풀꽃나무를 곁에 두고 마음으로 함께하지 않고서는 풀꽃나무를 글로든 그림으로든 사진으로든 못 담는다. 처음 태어나는 글·그림·사진은 언제나 풀꽃나무하고 한마음으로 살아낸 길에서 태어난다. 그런데 이렇게 태어난 글·그림·사진으로 엮는 이가 풀꽃나무를 모르거나 등진 삶이라면? 이렇게 해서 나온 이웃나라 책을 우리말로 옮기는 이가 풀꽃나무를 모르거나 등진 살림이라면? 바깥말만 잘 하기에 우리말로 잘 옮기지 않는다. 바깥말만으로는 옮기기를 하지 않는다. 언제나 ‘이 나라 이 땅에서 살아가며 흐르는 말씨’를 읽고 알고 새길 적에 비로소 옮기기를 한다. 더구나 풀꽃나무랑 숲을 다룬 책을 우리말로 옮기는데, 옮긴이 스스로 풀꽃나무하고 숲을 모를 뿐 아니라 생각조차 할 길이 없는 서울 한복판에서 지낸다면? 서울 한켠에 있는 ‘공원’을 드나드는 눈높이로 풀꽃나무를 옮기려 한다면? 우리말을 제대로 몰라서 옮김말이 서툴거나 엉성하거나 뜬금없거나 엉터리이거나 뒤틀리거나 엇갈리는 일도 수두룩하지만, 막상 풀꽃나무하고 숲을 하나도 모르는 채 ‘일감을 받아 옮기기’만 하느라 뭔가 뒤죽박죽이거나 어수선하거나 뜬구름을 잡는 책이 너무한다 싶도록 쏟아진다. 2020.9.29.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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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길 책집 : 하루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책집이 있다면, 마음에 새롭게 기운을 북돋우며 저녁별을 만난다. 하루를 열며 집을 나서는 길에 골목꽃하고 눈을 맞춘 다음 골목나무를 쓰다듬고서 구름송이한테 손을 흔든다면, 마음에 즐겁게 기운을 끌어내며 아침해가 반갑다. 붐비는 버스나 전철이라서 고단하지 않다. 사람 발길 없는 숲이라서 호젓하지 않다. 언제 어디에 있든 어떤 눈빛이 되어 어떤 마음으로 하루를 열고 닫느냐에 따라 다르다. 2001.3.5.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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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밥 : ‘좋은 밥’을 잔뜩 먹어도 ‘바람·해·물’을 누리지 못하면 몸이 아프다. ‘바람·해·물’을 누리면 ‘아무 밥덩이’가 없어도 튼튼하다. 서울 한복판에 살면서 ‘좋은 밥’을 아무리 찾아나선들 몸은 아프기 마련이다. 서울 한복판에 살더라도 ‘바람·해·물’을 제대로 누리는 길을 찾고 생각하고 가꾸고 짓고 돌보면서 나눌 적에는 누구나 튼튼하다. 시골에서 살지만 ‘좋은 밥’만 살필 뿐 ‘바람·해·물’을 헤아리지 않으면 여느 서울내기처럼 똑같이 아플 테지. 우리 몸은 밥덩이가 아니라 ‘바람·해·물’을 바란다. 우리 몸은 ‘좋은 밥’이 아닌 ‘바람·해·물’을 받아들이면서 아름다이 피어난다. 구태여 밥을 먹고 싶다면 ‘좋은 밥’이 아니라 ‘사랑으로 지은 밥’을 먹거나 ‘어떤 밥덩이라도 사랑으로 맞아들여’서 누릴 노릇이다. 1994.9.12.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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