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살림말


비추천도서 이야기를 쓴다 : 추천도서 이야기뿐 아니라 비추천도서 이야기를 쓴다. 추천도서 이야기만 쓰기에도 온누리에 아름다운 책이 그득그득하다지만, 구태여 비추천도서 이야기를 쓰려고 더 품을 들이고 마음을 쏟는다. 주례사 서평이 넘실대면서, 아이가 아이답게 자라는 꿈길에 이슬방울로 삼을 책이 묻힌다. 서평단 서평이 물결치면서, 어른이 어른답게 살림하는 사랑길에 빗방울로 삼을 책이 밀린다. 아이를 생각하기에 추천도서 이야기뿐 아니라 비추천도서 이야기를 쓴다. 어른을 헤아리기에 추천도서만이 아닌 왜 비추천도서인가 하는 이야기를 쓴다. 나 스스로 사랑하기에 이 보금자리숲에 건사할 추천도서뿐 아니라, 이 보금자리숲에 놓지 않을 비추천도서 이야기를 쓴다. 네가 너로서 너를 사랑하는 길에 동무가 되고 싶기에, 우리가 함께 읽을 추천도서뿐 아니라 우리가 구태여 들여다볼 까닭이 없는 비추천도서 이야기를 쓴다. 1995.10.14. ㅅㄴㄹ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숲노래 살림말


인디자인보다 어려울는지 모를 어도비 체험판 결제취소 : 열세 살 큰아이가 꾸준히 선보이는 더없이 아름다운 그림꾸러미를 그림책으로 엮어내려고 생각하는데, 아무래도 스스로 목돈을 여미어서 스스로 꾸며서 책으로 내는 길이 가장 낫겠다고 느낀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어림하면서, 여태 미루고 미룬 ‘인디자인’을 익혀 볼까 싶어, 어도비 체험판을 이레쯤 써 보기로 한다. 그런데 하루를 써 보고는 도무지 나랑 안 맞더라. 차라리 아래한글을 써서 피디에프로 바꾸자는 생각이 들더라. 이러고서 바깥일로 부산·파주·서울을 오가다가 ‘체험판 취소’를 잊었고, 어느새 ‘한 해치 결제’를 한다는 글월이 날아든다. “뭐야?” 하고 갸우뚱하고 보니, 꽤 많은 분들이 ‘어도비 체험판’을 써 보려고 하다가 ‘체험판 취소’가 너무 어렵거나 잘 안 되어 24000원이나 48000원을 쉽게 날린다는 누리글을 잔뜩 본다. 파파고 힘을 빌려서 가까스로 ‘미국 어도비 일꾼’하고 쪽글을 주고받은 끝에 돈을 돌려받은 분도 있던데, ‘체험판 신청’은 그렇게 쉽게 알아보면서 들어가도록 꾸민 이곳 어도비는, ‘체험판 취소’는 그렇게 어렵게 꽁꽁 숨겨 놓았더라. 더구나 ‘체험판 취소’를 하는 누리집으로 들어갔어도 막상 ‘취소 알림글 길잡이’와는 다른 모습이 뜨기 일쑤이네. 그러나 틀림없이 ‘미국 전화번호’ 아닌 ‘한국 전화번호’가 있으리라 여겨, ‘한국 전화번호’를 찾아내려고 한참 뒤졌다. 한국 전화번호인 듯한 곳에 전화를 거니 다시 ‘한국 상담원 있는 번호(080-950-0880)’를 알려준다. ‘상담원 대기’를 1시간 30분을 했다. ‘상담원 통화’로 체험판을 그만 쓰겠노라 밝히고 결제취소에 이르기까지 12분이 걸렸다. 다해서 1시간 42분이지만, 이모저모 알아보고 살펴보고 따지고 한 품을 어림하면 이틀쯤 썼다고 봐야지 싶다. ‘체험판 신청’하고는 다르게 ‘체험판 취소’를 하기 까다롭도록 숨겨 놓아서 사람들 눈치를 못 채게 24000원을 받아먹으려는 마음보라는 생각이 들 뿐이다. 굳이 이렇게 해야 할 어도비일까? 이렇게 하면 사람들이 그곳을 좋아할까? 나중에 어도비 풀그림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할까? 눈가림장사는 머잖아 무너진다. 눈속임장사는 머잖아 민낯이 환히 드러난다. 2020.10.12. ㅅㄴㄹ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숲노래 살림말

.

덮죽, 나들꽃 : ‘덮밥’이란 이름이 처음 태어나서 차츰 퍼지다가 확 자리잡을 무렵을 떠올린다. 그때 적잖은 분들은 ‘덮밥’은 도무지 말이 안 되는 말짓기라고, ‘밥덮’처럼 써야 올바르다고, 이런 말짓기 때문에 우리말이 망가지리라 여겼다. 여러 어르신이나 학자나 전문가나 지식인이 말하는 ‘밥덮’이 옳고 ‘덮밥’은 틀리다는 이야기를 곰곰이 들으면서, 난 좀 다르게 생각했다.


여러 어르신이나 학자나 전문가나 지식인하고 함께 그 낱말을 놓고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저기요, 말얼개나 우리 말씨로 헤아리자면 틀림없이 어처구니없는 말짓기인데 말예요, ‘밥덮’보다 ‘덮밥’이 소리내기에 더 좋구나 싶어요. 제가 혀짤배기에 말을 좀 더듬기도 해서, 조금이라도 소리내기 어려우면 혀에 안 붙더라구요. 그리고 ‘덮밥’처럼 새롭게 말을 지어서 쓸 수 있다는 재미난 얼거리를 젊은 사람들이 엮어냈다고 보아도 되지 않을까요?” 하고 말씀을 여쭈었다.


스물 세 살 즈음 된 젊은이(나)가 이렇게 말하니 그 자리는 한동안 얼어붙었다. 이러다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밥덮·덮밥’ 이야기는 안 하고 다른 이야기로 넘어갔다.


2020년 10월, ‘포항 덮죽’을 놓고 이 이름을 훔쳐쓴 무리 이야기가 불거진다. 쓸쓸하다. 그러나 우리 삶터가 그렇잖은가? 조금이라도 돈이 되겠구나 싶으면 슬쩍해 버린다. 제 앞주머니를 챙기려고 이웃이고 동무이고 없는 판이 오늘날 이 나라이다. 대학입시를 보라. 고등학교를 다니는 푸름이는 대학입시를 앞두고 ‘동무 아닌 경쟁자’만 생각해야 한다. 온나라가 서로돕기나 어깨동무 아닌 ‘나 혼자 살아남기’로 흐른다. ‘덮밥’을 넘어 ‘덮죽’으로 나아가고자 땀흘린 포항 그 밥님은 얼마나 고달팠으면서도 기쁜 나날이었을까. ‘덮죽’이란 이름도 상큼하면서 멋스럽다.


2020년 10월 9일 저녁, ‘나들꽃’이란 이름을 문득 지어 보았다. 숲에서 어린이·푸름이하고 마음밭 살찌우는 길을 나누려고 하는 분들한테 ‘숲나들꽃·숲노래뜰’ 같은 이름을 지어서 건네었다. ‘나들꽃’이란 이름을 문득 지어 보고 나니, 매우 마음에 들어, ‘힐링투어’라든지 ‘치유여행’ 같은 말씨를 ‘나들꽃’으로 담아내어도 좋겠구나 싶고, ‘여행’이란 말부터 ‘나들꽃’으로 담아내면 어울리겠네 싶더라.


이 나라는 틀림없이 아귀다툼판이라고 느끼지만, 이 아귀다툼판에 ‘사랑잔치’를 열면 좋겠다. 이웃이 지은 멋스럽고 알차며 땀내음 물씬 밴 이름을 훔치지 말고, 이웃이 이름을 짓기까지 애쓴 눈빛을 헤아려 우리 나름대로 새 이름을 즐겁게 지어서 말꽃이며 삶꽃이며 생각꽃을 지피기를 빈다. 2020.10.11. ㅅㄴㄹ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숲노래 살림말


겪었으면 쓰지요 : 나는 몸소 겪지 않고 마음으로 보지 않은 삶을 한 줄은커녕 한 마디로도 못 쓴다. 내가 쓰는 모든 글은 몸소 겪었거나 마음으로 본 이야기이다. 읽지 않은 책이라면 느낌글을 쓸 수 없으니, 책느낌글은 모조리 읽은 책만 놓고서 쓴다. 그리고 한 벌만 읽고서 느낌글을 쓰지 않는다. 적어도 서너 벌은 읽고서야 그 책을 놓고서 느낌글을 쓰고, 아름책으로 여긴다면 열 벌 스무 벌 쉰 벌 거듭거듭 읽고서 느낌글을 쓰는데, 자꾸자꾸 새롭게 느낌글을 쓰고 싶더라. 겪지 않았다면 몸이며 마음에 스며든 이야기가 없으니 쓸 말이 없다. 겪었기에 몸이랑 마음으로 바라보고 헤아린 이야기가 수두룩하여 쓸 말이 많다. 밥을 안 지어 본 사람이 밥 이야기를 쓸 수 있을까? 사랑을 안 한 사람이 사랑 이야기를 쓸 수 있을까? 자전거를 안 탄 사람이 자전거 이야기를 쓸 수 있을까? 아이들 똥오줌기저귀나 곁님 핏기저귀를 손빨래로 정갈히 건사한 살림을 꾸려 보지 않고서 성평등 이야기를 쓸 수 있을까? 모두 그렇다. 겪기에, 하기에, 살아가기에 쓸 뿐이다. 어떤 글이든 꾸밀 까닭이 없다. 글을 왜 꾸미겠는가? 안 겪은 이야기를, 안 한 이야기를, 하나도 모르는 이야기를 억지로 쓰자니 겉멋에 허물좋은 꾸밈결로 쓰겠지. 2020.10.8. ㅅㄴㄹ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숲노래 살림말


씨앗한테 물주기 : 마늘싹이 엊그제 마음으로 나한테 들려준 노래를 옮겨적었다. “우리(씨앗)는 너희(사람) 손길을 받으면 반가워. 즐거워서 확 달라오르고 웃음이 나와. 그런데 우리는 굳이 너희 손길을 받을 까닭이 없어. 너희 손길이 없이 스스로 의젓하게 싹을 틔우고 뿌리를 내려 푸른바람으로 들숲을 빛내기에 너희가 이 풀물결을 마주하면서 기뻐서 웃음지을 적에 우리도 새삼스레 기쁘단다. 우린 이슬을 먹기에 따로 물을 안 줘도 되는데, 너희가 물을 줄 때마다 길들어서, 너희 물이 없으면 말라버리는 아이들이 있어.” 이렇게 옮겨적고서 생각에 잠기다가 밤에 꿈을 꾼다. 꿈에서 내 몸은 씨앗이 되어 들을 누비고, 때로는 물방울이 되어 구름을 누빈다. 다시 씨앗이 되어 숲에 깃들고, 어느새 아지랑이가 되어 바람을 탄다. 이렇게 갖은 몸이 되는 사이에 새롭게 헤아린다. 들이나 숲에서 푸나무가 떨군 씨앗 가운데 사람이 애써 심거나 물을 주는 일이란 없는데, 들이며 숲은 언제나 푸르고 싱그러우며 아름답다. 풀씨나 꽃씨나 나무씨는 어느 만큼 잠을 잔 다음에 어느 때에 알맞게 깨어나서 삶을 지으면 튼튼한가를 다 아는 셈이지 싶다. 사람은 어떨까? 아이를 낳은 어버이는 아이한테 무엇을 얼마나 보여주고 이끌고 가르쳐야 하는가? 어른이나 어버이가 무엇을 보여주거나 이끌거나 가르치더라도 아이는 아이 나름대로 미리 꿈꾼 길에 맞추어 하나씩 새롭게 맞이하면서 삶을 짓지 않는가? 오늘날 제도권학교는 아이들이 스스로 싹트고 뿌리내리면서 줄기를 올리고 잎을 틔운 다음 꽃을 피워 열매를 맺기까지 나아갈 길을 모두 똑같은 틀에 가두지 않는가? 다 다른 씨앗을 모조리 똑같이 짜맞춘 뒤에, 언제나 똑같은 먹이에 길들도록 내모는 셈 아닌가? 농약·비료·비닐·기계·전기·석유가 아니라면 도무지 싹트지도 못하고 자라나지도 못하도록 아이들(씨앗)을 송두리째 가둔 오늘날 제도권 교육이자 학교이자 마을이자 터전은 아닐까? 어른은 하늘이 되어 바람을 품고 구름하고 노니는 숨결로 가야지 싶다. 어버이는 바다가 되어 물방울을 품고 빗방울로 온누리를 적시고 보듬는 숨빛으로 가야지 싶다. 2020.10.5. ㅅㄴㄹ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