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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덕 일기 1 :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가? 이오덕 일기 1
이오덕 지음 / 양철북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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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갑한 나라에서 살아가는 빛
[이오덕 선생님 책읽기 1] 《이오덕 일기》 1권

 


  겨울에는 별이 빛나는 소리를 들으면서 밤을 누립니다. 아이들도 어버이도 밤별 환하게 빛나는 하늘 가만히 바라보면서 새근새근 잠듭니다. 봄을 맞이하면 멧새들 둥지에 깃들면서 봄꽃 돋는 소리를 들으며 밤을 누립니다. 아이들도 어버이도 새와 꽃이 어우러지는 들판 찬찬히 느끼면서 고단히 잠듭니다. 여름에는 무논에 개구리 노래하는 소리로 마음이 아늑합니다. 도시에서는 낮에도 밤에도 아침에도 저녁에도 온통 자동차투성이입니다. 도시에서는 한갓지게 잠을 이루기 어렵습니다. 밤이 너무 시끄럽고, 지나치게 밝으며, 몹시 어수선합니다. 자동차뿐 아니라 오토바이조차 들어설 수 없는 비알진 골목동네 안쪽에 살림집 있지 않고서야 조용하며 맑은 밤을 누리지 못해요.


  시골마을 가을밤은 개구리 노랫소리 살며시 수그러들면서 온통 풀벌레 노래잔치입니다. 풀벌레는 나뭇잎과 풀잎 사이사이 깃들어 노래를 베풉니다. 나무와 풀은 저마다 밤바람에 나부끼면서 물결이 치는 듯한 가락을 사이사이 곁들입니다. 곡식 익는 냄새에 풀잎과 나뭇잎 물드는 내음 휘감기면서 아름다운 사랑 어디에서 피어나는가 하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 아무도 말을 하지 않는다. 선생질 하고 싶은 아이는 없는 모양이다. “너희들 생각이 좋다. 농사짓는 것도 좋고, 국수 빼는 일도 좋다. 부디 모두 착한 사람, 부지런한 사람 되어라. 다른 것 다 좋은데, 너희들 제발 선생질은 하지 마라. 참 선생질 못할 짓이다. 이렇게 돈 없는 아이들 졸라서 울리고, 날마다 성내고 고함치고 해야 하니 말이다. 난 이제라도 이런 선생 노릇 치우고 다른 일을 해서 돈을 많이 벌고 싶다. 그래서 그 돈으로 너희들같이 돈 없는 아이들에게 공책도 사 주고, 연필도 사 주고, 크레용도 사 주고, 과자도 사 주고 싶다.” (1962년 9월 19일)
- 공부를 못해서 시간마다 꾸지람을 듣는 아이들은 학교생활이 얼마나 괴롭겠는가? (1962년 9월 21일)
- 그렇다. 나는 통일이나 되면 교감이든지 교장이든지 하겠다. 아니, 통일이 되면, 그때야말로 아이들 앞에서 참선생 노릇을 하겠다. 그날이 오기까지 나는 밑바닥에 깔려서 신음하는 사람들과 숨 쉬며 살아갈 것이다. (1967년 3월 9일)

 

 


  내 어릴 적 동네를 떠올립니다. 나는 인천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일곱 살 밑이었던 때는 어떻게 지냈는지 하나도 못 떠올립니다. 국민학교 1학년 적에도 일곱 살에 어떻게 뛰놀았는지를 못 떠올리고, 국민학교 3학년 적에도 여섯 살이나 일곱 살 적에 누구랑 무엇을 하며 놀았는지를 못 떠올립니다. 생각을 기울이고 기울여도 내 일곱 살 밑은 도무지 떠오르지 않습니다. 여덟 살 적부터 또렷하게 하나하나 되새깁니다. 경인고속도로 들머리요 인천부두 곁에 있는 5층짜리 열다섯 동 아파트마을에서 어린 날을 누렸습니다. 아파트마을에서 벗어나면 고속도로 어귀에 커다란 짐차 우글거리며 시끄럽습니다. 아파트마을 앞은 왕복 십이차선이었는지 찻길이 대단히 넓습니다. 건널목 건너자면 한참 걸립니다. 건널목 빨간불일 때에는 부두와 고속도로 사이로 커다란 짐차 우글거리며 귀가 찢어지는 소리를 내고, 건널목 푸른불 들어오면 비로소 모든 시끄러운 소리 멎으면서 ‘자동차가 이렇게 귀를 찢었구나.’ 하고 새삼스레 느낍니다.


  그런데, 열다섯 동 아파트 모인 조그마한 마을로 한 걸음 두 걸음 들어서면 차소리가 사그라듭니다. 세 걸음 네 걸음 접어들면 내 또래와 동생과 언니 들 목소리가 울려퍼집니다. 퍽 넓게 펼쳐진 모래밭 놀이터에는 언제나 아이들이 가득했고, 웃고 울며 뒹구는 소리 넘쳤습니다. 자가용 가진 이는 매우 드물어 주차장은 언제나 또다른 놀이터가 되었습니다. 학교에서 칠판 지우는 주번 일을 하다가 주머니에 슬쩍슬쩍 감춘 몽당분필로 주차장 바닥에 금을 긋습니다. 어느 동에나 아이들이 많으니 놀이터를 차지하며 공을 차거나 치거나 어울리지 못하는 날 잦습니다. 저마다 이곳저곳에서 길바닥에 금을 긋고 놉니다. 금을 안 그어도 재미난 놀이 많고, 금을 그으며 새로운 놀이를 빚습니다. 주차장만큼 넓은 꽃밭에 경비 아저씨 몰래 들어가서 돌을 줍습니다. 돌치기 놀이를 하고 딱지치기를 합니다. 제기를 차고 술래잡기와 숨바꼭질을 합니다. 얼음땡을 하고, 어느 날은 ‘동 대항 달리기’를 합니다. 열다섯 동으로 이루어진 아파트마을에서 아이들 우루루 모여 아파트를 빙빙 도는 달리기대회를 거의 날마다 엽니다. 아파트마을 통틀어 자가용 가진 이가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 적은 터라 길바닥이며 주차장은 모두 우리 차지가 되어 어떤 놀이이든 실컷 합니다.


  겨울이 되면 곳곳에 온갖 눈사람이 수도 없이 섭니다. 이곳저곳에서 눈싸움이 벌어집니다. 아이도 어른도 ‘아이들 눈싸움 놀이’를 하는 결에 날아오는 눈덩이 맞지 않도록 살피며 걸어야 합니다.

  새해를 맞이하면 집집마다 아이들 밖으로 뛰쳐나와 연을 날립니다. 한두 연 아닌 수십 개 연, 때로는 백 개쯤 될 만한 연이 아파트마을 하늘을 뒤덮습니다. 연줄에 풀을 먹입니다. 유리가루 먹이면 더 단단하며 연싸움에서 이긴다 하지만, 나는 유리가루까지 먹이지는 못했습니다. 유리가루 먹이면 연줄을 어찌 잡나 싶었어요. 아이들 누구나 손수 연을 만들 줄 알고, 실을 감을 줄 압니다. 집에서는 언제나 어머니 거들며 바느질도 하고 갖은 집일을 다 하지요. 웬만큼 찢어진 옷은 사내도 가시내도 스스로 기웁니다. 아이들 누구나 바느질 못한다 하면 놀림을 받았어요.


- 교사들이 말하는 지극히 당연한 교육적인 견해가 여지없이 짓밟혀 버리는 곳에 아이들의 인권을 키워 가는 참교육이 이뤄질 수 없는 것은 너무나 환하다. (1963년 1월 6일)
- 두 아이가 다 산문이라고 쓴 것이 절실한 감정을 호소하여 글줄도 감정의 파동을 그대로 자연스럽게 끊어 썼기에 훌륭한 생활 시, 또는 생활 서사시로 되어 있었다. (1963년 5월 13일)
- 어른들은 그림을 그리든지 글을 쓰든지 관념적으로 개념적인 것을 그리고 쓰고 한다. 그런데 아이들은 구체적인 것, 현재 살아 있는 것을 보여준다. (1963년 6월 8일)
- 백일장 행사가 글짓기 교육을 망치고 있다. 작품의 심사도 제대로 되기를 바랄 수 없다. 출제도 옳게 못 하는 사람들이 작품인들 어찌 바로 보겠는가 … 잔디밭에 가서는 씨름을 하고, 또 그밖에 아이들은 온갖 재미있는 놀이를 생각해 내었다. 글짓기고 시 짓기고 그까짓 것이 다 뭘까? 천진하게 뛰노는 아이들의 모습보다 더 아름다운 시가 어디 있는가? 저녁때가 되어도 아이들은 가고 싶어 하지 않았다. (1964년 6월 6일)

 

 


  커서 어른이 되면 무엇이 되거나 무엇을 할는지 걱정하지 않습니다. 나이 한 살 먹기도 되게 힘든데, 언제 어른이 되는 줄 알 턱이 없습니다. 생일떡 한 번 먹자고 한 해를 기다리는 나날이 몹시 길었습니다. 아침부터 밤까지, 공부하기 아닌 놀기로 보내다 보니, 하루가 참 길었겠지요. 아침부터 밤까지 즐기던 놀이 가짓수를 헤아리자면, 아마 백 가지가 넘을 테고, 이백 가지쯤 될 수 있어요. 집에서도, 마을에서도, 학교에서도, 길에서도, 또 동무네 집에서도, 언제나 새롭게 놀이가 떠오릅니다. 아이들마다 새로운 놀이를 몇 가지씩 생각해서, 저마다 생각한 놀이를 모두 다 합니다.


  놀이를 할 적에는 사내나 가시내를 가리지 않습니다. 그저 똑같이 합니다. 국민학교 때에는 사내보다 키와 덩치가 큰 가시내 많았고, 사내보다 힘센 가시내도 많았습니다. 구태여 서로를 가르지 않아요. 때로는 사내와 가시내가 따로 무리를 지어 겨루기도 하는데, 사내 쪽이 밀릴 때가 많습니다.


  놀고 싶으면 혼자 놀아도 되고, 동무를 불러도 됩니다. 동무를 부르고 싶으면 동무네 집 앞에 가서 섭니다. 동무 이름을 큰소리로 외칩니다. 한 번 척 부르면 창문 쾅 소리 나게 열고는 “알았어! 나간다!” 하는 소리가 나옵니다. 두 번이나 세 번 불러도 맞받는 소리가 나지 않으면, 거의 어김없이 이 아이가 집에서 꾸중을 듣습니다. 숙제도 공부도 않고 놀기만 한다고 집에서 꾸지람 듣겠지요. 동무 얼굴 아닌 동무 어머님 얼굴 쏙 나오면서 잔뜩 찌푸린 낯으로 빽 소리 지르시면 엉덩이에 불이 난듯 내뺍니다.


  그러나, 혼쭐이 난대서 놀기를 그칠 아이들이 아니지요. 부르고 또 부릅니다. 내빼고 또 내뺍니다. 동무네 어머님은 지친 나머지 아이를 풀어 줍니다. 어느 때에는 “얘들아, 숙제는 하고 놀게 하자.” 하고 우리를 부릅니다. 그러면 “네.” 하고 말씀드리고는 동무네 집으로 들어갑니다. 둘이 머리를 맞대고 숙제를 하지요. 이십 분쯤 숙제를 하노라면 동무네 어머님이 무언가 주전부리를 내어줍니다. 내 국민학교 적에는 웬 숙제를 날마다 멧더미처럼 안기는지, 하루에 두어 시간 들여도 다 못할 적 많아요. 숙제더미를 해내느라 골을 썩이다가 겨우 마치면, 두 팔 번쩍 치켜들고는 “야, 이제 놀자!” 하고 외칩니다. 동무도 나도 숙제 사슬에서 풀려 홀가분하게 뛰쳐나갑니다.


- 꽃을 꺾지 말라, 나무를 꺾지 말라고 하는 것은 꽃과 나무를 보고 즐겨야 한다는 이유에서만이 아니다. 생명을 아끼고 귀하게 여기는 마음을 길러 주는 일, 이것이 교육의 근본이 되기 때문이다. (1964년 4월 22일)
- 어디 아늑한 마을 한쪽에서 아무도 몰래 살아가고 싶은 마음, 구수한 마을 사람들의 얘기나 들으며, 마을 아이들의 귀여운 웃음과 뛰노는 모습이나 바라보면서, 채소를 가꾸고 염소라도 먹이면서 살아가고 싶은 마음은, 앞으로도 이 고장 구석구석을 돌아다니게 할 것 같다. (1967년 3월 7일)
- 선생들은 손해를 안 보려고 한사코 아이들을 조르는 것이고, 이렇게 다른 직원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도 예사로 잔인한 체벌을 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아이들이 자라나서 교사와 학교와 교육, 그리고 사회 전체에 대해 증오와 복수심을 갖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 … 내 머리는 지금 너무나 어지럽다. 학교 돈을 걷어 먹으려고 눈이 뒤집힌 교장, 술, 아이들이 수라 장판이 되어도 방치해 두는 교사, 기성회비를 안 낸다고, 아니, 안 낼 것이라고 미리 예방 삼아 혹독한 체벌을 주는 ‘모범 교사’, 내가 살고 있는 곳이 바로 지옥이다. (1967년 3월 23일)

 

 


  학교에서 우리들은 벌을 서면서도 놉니다. 두 팔을 들며 벌을 서지만 서로 키득키득 웃으며 놀다가 걸려, 교실 밖으로 쫓겨납니다. 교실 밖 골마루에 서서 또 서로 키득키득 웃으며 놀다가 걸려 흠씬 얻어맞고는 운동장을 빙빙 돕니다. 그러면, 운동장을 헉헉거리며 달리더라도, 또 서로 키득키득 웃으며 놀아요.


  그런데, 국민학교 적에도 교사들은 몽둥이로 두들겨팰 뿐 아니라 손바닥으로 따귀를 때렸고, 주먹으로 머리와 가슴과 배를 후려쳤습니다. 구두 신은 발로 정강이를 차거나 배와 옆구리를 걷어차기도 하고, 쇠자로 팔뚝과 손가락과 손등과 허벅지를 벌겋게 때렸습니다. 당구채로 손톱 끝을 때려 피멍 들게 한 교사가 있고, 출석부 찢어지도록 머리통 후려갈긴 교사가 있습니다. 힘이 그닥 안 센 아줌마 교사나 할머니 교사(할머니 아닌 그저 나이가 쉰 줄 넘거나 예순 줄 가까운 교사였겠지요)는 플라스틱자를 세워 톡톡 내리쳐요. 그러면 손가락이며 손등이며 허벅지이며 빨간 줄이 죽죽 생길 뿐 아니라, 아픔이 오래도록 남습니다. 머리카락 휘어잡아 교단으로 끌어당기는 교사가 있고, 분필을 던져 눈자위에 푸른 멍 들게 하는 교사가 있습니다. 분필지우개를 던져 머리에 분필가루 하얗게 묻도록 하면서 분필가루 못 털게 하는 교사가 있어요. 밀걸레자루로 엉덩이에 피멍 들게 때리는 교사가 있는 한편, 밀걸레를 얼굴에 비비며 ‘걸레만도 못한’ 같은 막말을 아이들한테 퍼붓는 교사가 있었어요.


  내가 다닌 국민학교는 좀 많이 가난한 아이들이 많이 모인 데였습니다. 학교도 가난하고 아이들도 가난합니다. 그러나 교사들은 대놓고 돈봉투를 바랐고, 아침모임이나 저녁모임 자리에서 우리더러 돈봉투 가져오라고 밝히는 날이 퍽 많았습니다. 아이들 집살림 어떠한 줄 뻔히 알면서 돈을 바랍니다. 아이들 집살림 걱정하지 않으면서 돈을 내놓으라 윽박지릅니다.


  무엇이 그토록 교사들을 ‘악마’로 만들었을까요. 왜 그토록 교사들이 ‘악마’가 되어야 했고, 무엇이 이들을 손찌검과 주먹질과 막말을 일삼도록 이끌었을까요.


  나와 동무들은 교사로 오랜 나날 일한 사람이 새해에 담임이 되면 고개를 푹 숙이며 아무 말 못합니다. 누구라도 ‘갓 대학교 마쳐 새로 교사가 된 젊은 여 선생님’이 우리 담임이 되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대학교를 갓 마쳤더라도 남 선생님은 주먹다짐이 드셀 뿐 아니라, 기운이 넘쳐서 신나게 매타작을 합니다. 게다가 군대까지 다녀온 남 선생님이라면 아찔합니다. 이와 달리 스물 조금 넘기고 교사살이 처음 하는 여 선생님은 우리들을 막말이나 주먹다짐으로 다스리려 하지 않아요. 개구쟁이들과 복닥이며 두 해 세 해 네 해 지나고서야 비로소 막말과 주먹다짐이 몸에 붙지요. 당신들 생각하기로는 이 개구쟁이들은 때리고 나무라고 마구 퍼부어야 ‘말을 듣는다’고 여겼을 테고, 무엇보다 학교에서 걷어야 하는 돈과 폐품과 숙제 따위가 어마어마하게 많았어요.


- “남을 욕하는 것은 어째서 나쁜가?” 대답이 없다. 한참 있다가 한 아이가 손을 들었다. 김일겸이다. “그 아이 마음이 나빠집니다.” 옳다. 뜻밖의 대답이다. 이런 대답이 나올 줄은 몰랐다. 참 좋은 대답이다. 남을 욕하거나 놀리거나 때리는 사람은 그 사람의 마음이 나빠지니 좋지 못한 것이다. (1970년 4월 23일)
- 여름마다 아이들은 곤충채집이란 이름으로 생명을 학살하는 훈련을 강요받는다. 이런 아이들이 어떻게 아름다운 심성을 가질 수 있으며, 자라나 어른이 되었을 때 평화로운 통일 민주 국가를 만들어 갈 수 있겠는가? (1970년 4월 28일)
- 나라의 행정 전체가 도시 중심, 있는 사람 중심인데, 말단 월급쟁이들이 이런 산골짜기까지 가난한 사람들 위해 찾아오기 싫어하는 것은 당연하다. (1970년 6월 23일)

 

 


  1962년부터 2003년까지 교사 한 사람이 쓴 일기를 그러모은 책을 읽습니다. 이 가운데 1962년부터 1977년 사이에 쓴 일기를 먼저 읽습니다. 《이오덕 일기》(양철북 펴냄)입니다. 《이오덕 일기》는 모두 다섯 권으로 갈무리해서 나왔고, 1권에는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가?”라는 이름이 붙습니다.


  무엇을 가르쳐야 할까요? 네, 삶을 가르쳐야지요. 어떤 삶을 가르쳐야 할까요? 네, 아름답게 누릴 삶을 가르쳐야지요. 아름답게 누릴 삶은 어떻게 가르쳐야 할까요? 네, 사랑으로 가르쳐야지요. 아름답게 누릴 삶을 사랑으로 가르치면 어떻게 될까요? 네, 아이들 모두 사랑을 받아먹으면서 아름다운 어른으로 자라겠지요.


  1975년에 도시인 인천에서 태어나서 1982년에 국민학교에 들어간 내 지난날을 더듬으면서 《이오덕 일기》 1권에 나오는 시골마을 아이들 삶을 곰곰이 돌아봅니다. 시골마을 아이들 삶에다가, 시골마을 아이들을 만나며 삶을 가르치려 하는 이오덕 선생님 모습을 떠올립니다.


  나는 1982년부터 1987년까지 여섯 해에 걸쳐 국민학생으로 지내는 동안, 교사들이 왜 이다지도 ‘악마’와 같이 모질고 짓궂으며 끔찍한 짓을 저지르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습니다. 왜 이 사람들은, 그러니까 나한테 작은아버지뻘이거나 사촌형이거나 이웃집 아저씨 같은 이 사람들은, 또 나한테 작은어머니뻘이거나 사촌누나이거나 이웃집 아줌마 같은 이 사람들은, 왜 이렇게 무시무시한 얼굴로 아침부터 저녁까지 우리를 들볶으며 괴롭히는지 궁금했습니다.


  왜 우리한테 숙제 지옥을 날마다 선물했을까요. 왜 우리한테 시험 지옥을 다달이 여러 차례 베풀었을까요. 왜 우리한테 체벌과 폭력과 따돌림과 편애와 인권침해와 인격모독을 언제나 끊임없이 쏟아부었을까요. 왜 우리한테 그토록 많은 돈을 거두어들이면서 당신들은 날마다 숙직실에서 술잔치를 벌였을까요.


  남 선생님이 담임이 되면, 이들은 으레 아침 수업을 안 합니다. 남 선생님들은 아침 한두 시간쯤 으레 자습(자율학습)을 시킵니다. 지난밤에 술을 잔뜩 먹은 나머지, 교실에 있는 ‘교사 책상’에 엎디어 자기 일쑤요, 때로는 양호실 침대에 누워서 자기도 하고, 어느 날에는 숙직실에서 못 일어나 곯아떨어진 채 있기도 해요. 주번이 되면 숙직실이나 양호실이나 어디 빈 교실 돌아다니면서 ‘우리 담임’이 어디에서 술에 절어 뻗는 바람에 수업에 안 들어오는지를 찾기 일쑤였습니다.


- 이 벙어리 같은 아이들을 어떻게 하면 좋은가? 그런데, 이 아이들이 저희들끼리 골목이나 운동장에서 놀 때나 싸울 때는 조금도 거침없이 내뱉는 말이 있다. 개새끼! 씨팔년! 하는 말이다. 이런 욕설밖에 배운 말이 없다는 것인가 … 원인은 바로 이것이다. 군대식 훈련, 통제와 강압적인 명령으로 이뤄지는 교육, 여기에 무슨 민주적인 대화가 있으며, 협의와 토론과 참된 의견의 교환과 삶의 창조가 있을 수 있겠는가? 위에서 내려오는 지시 명령만의 질서와 체제에서는 아이들이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고, 노예처럼 길들여지는 동물이 될 수밖에 없다. (1971년 10월 23일)
-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 현실 속에 서민성을 찾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는가 싶다. 귀족과 서민은 이조 시대나 그 이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있다. (1973년 10월 14일)
- 동화책 하나 변변히 읽지 못하는 아이들, 책이라고는 교과서밖에, 그것도 그냥 겉읽고 지나갔을 이 아이들, 노래 하나 배우지 못하고, 배웠더라도 그런 것은 다 잊어버리고 유행가와 욕설과 도시 동경 병에 걸려 있는 이 아이들, 이 아이들을 어찌하겠는가! (1974년 2월 11일)

 


  내 이학년 일학기 때에 담임을 맡은 분은 우리 가운데 어느 누구도 안 때렸습니다. 우리들을 주먹으로도 손바닥으로도 몽둥이로도 출석부로도 밀걸레자루로도 안 때린 이학년 일학기 때 담임 여 선생님은 그만 일학기 마치고 학교를 떠나셨습니다. 학교를 떠나는 날에는, 한 반 예순 아이들 모두한테 다 다른 선물과 편지를 마련해서 하나씩 안겨 주며 울었습니다. 그때에는 하나도 생각하지 못했는데, 이분은 교무실에서 다른 교사들한테서 어떤 말을 들었을까요. 교무주임과 교감과 교장한테서 어떤 말을 들었을까요. 왜 아이들을 안 때려서 당신 수업 때에는 아이들이 시끄럽게 떠드느냐는 핀잔을 어떻게 견뎠을까요.


  내 육학년 이학기 때에 갑자기 새로 와서 담임이 된 분은 남 선생님인데에도 으레 싱글벙글 웃는 얼굴이었습니다. 학교에서 남 선생님은 누구나 차갑고 매서운 얼굴로 우리를 쏘아보기만 했습니다. 여 선생님조차 우리를 바라보며 안 웃기 일쑤였어요. 아이들한테 웃음을 보이면 얕잡힌다고 생각했을까요. 아이들한테 웃어 보이면 헤벌레 하다고 생각했을까요. 싱글벙글 웃으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산수 깜지 쉰 장’을 숙제로 내주는 무서운 사람이었는데, 다른 남 선생님들과 달리 공도 같이 차고, 웬만한 놀이를 함께 하면서 하루를 보냈습니다. 졸업사진첩 사진을 찍을 때에 내가 이분 곁에서 옆구리를 간지럽히고 코딱지 파는 모습을 보여주어도 나를 꾸짖지 않고 ‘사진 찍는데 웃기지 마라’ 하면서 웃음을 참으며 모두를 귀엽게 바라보았습니다. 육학년 일학기까지 ‘남 선생님들 술에 절어 아침마다 숙직실에서 해롱거리는 모습’ 지켜보기 일쑤였지만, 이분을 찾으러 숙직실에 간 적은 떠오르지 않아요.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우리를 모질게 때리고 우리한테 거친 말 일삼던 분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우리한테 상냥한 눈빛과 웃음으로 나긋나긋 조곤조곤 이야기를 건네던 분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교육대학에서는 무엇을 가르쳐 주었을까요. 교과서는 우리한테 어떤 어른으로 크라는 이야기를 담았을까요. 동시는 왜 이쁘장한 말재주 놀이만 가득하고, 우리가 학교에서 보내는 삶은 왜 한 줄로도 보여주지 않았을까요. 학교에서는 왜 뻔질나게 돈을 걷고, 걷은 돈은 어디로 갔을까요. 방위 성금, 불우이웃돕기 성금, 평화의댐 성금, 때때로 전투기 성금과 구축함 성금 같은 돈은 모두 어느 주머니로 들어갔을까요. 학교에 왜 어린이은행이 있었고, 이 어린이은행은 왜 육학년 졸업을 해야만 돈을 찾을 수 있었을까요. 학교에서는 왜 다달이 쌀을 걷었으며, 학교에서는 왜 빈병과 신문종이를 잔뜩 모으느라 부산을 떨어야 했을까요. 교육대학은 이런 짓 하라고 교사를 길렀나요. 교육대학에서는 이런 짓 시키는 교육을 하고, 아이들 때리고 윽박지르며 얕잡아보는 교육이론을 가르쳤을까요.


- 그까짓 교육장들 비위 맞춰 동네사람들 등지는 것보다 교육장 꾸중 들어도 지방사람들이 나를 믿어 주는 것이 마음 편한 것이다. 학교는 교육장이 주인이 아니다. 아이들과 그들의 부모가 주인이어야 하니까. (1975년 11월 25일)
- 가장 중요한 것은 아이들을 정직하고 진실하게 길러 보겠다는 교사의 사랑이다. 이것만 있으면 그 다음의 방법은 모두 각자가 창조해서 할 일이다. 여러분들이 이론을 만들고 교육을 할 것이지 무슨 유명한 문학가들의 말을 너무 믿지 말라고 강조했다. (1976년 8월 19일)
- 국민학교 아이들은 선으로 어떤 모양을 그린다는 것이 아주 서툴고, 한편 색채로 감정을 나타내는 일에서는 색의 선택에서나 색의 조화에 있어서 선천적인 자질을 가지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지금까지 색채로 그리는 일에만 주로 의존하고 있었고, 따라서 색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아주 중요한 것임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 이웃 아이들의 그림을 보고 흉내내고부터 그만 그림이 아주 엉망이 되어 버리고 전혀 창의성이 없어져 버린 것이다 … 오늘날같이 아이들이 억압된 상태에 있어서는 감정의 해방이 지극히 중요하며, 이것은 사물을 리얼하게 표현하는 일에 어쩌면 앞서야 할지 모른다. (1977년 11월 22일)

 


  《이오덕 일기》를 읽으며 곰곰이 생각합니다. 내 국민학교 담임으로 이오덕 선생님이 한 해, 아니 한 학기, 아니 하루라도 있었으면 얼마나 즐거웠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왜 교사들은 구타와 폭력과 체벌과 인권침해와 인격모독과 편애와 돈걷기와 점수매기기와 차별과 따돌림을 일삼아야 했을까요.


  즐겁게 일하고 즐겁게 놀면 아름다운 삶 될 텐데요. 즐겁게 웃고 즐겁게 사랑하면 저절로 교육 이루어질 텐데요. 채찍질을 한대서 말이 잘 달리지 않아요. 당근과 채찍을 함께 써야 하지 않아요. 아이들은 노예가 아니에요. 아이들은 기계가 아니에요. 아이들은 바보가 아니에요. 아이들은 장난감이 아니에요. 아이들은 아이들이에요.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아요. 교사로 일하는 어른들 모두 아이들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아요. 어버이가 된 어른들 모두 아이들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아요. 아이들과 두 눈 똑바로 마주하면서 이야기를 해 봐요. 아이들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주먹질을 하든 막말을 퍼붓든 해 봐요. 할 수 있나요? 할 수 있겠습니까? 할 만한가요?


  어른도 아이도 사랑받을 때에 즐겁게 웃어요. 어른도 아이도 사랑받을 때에 즐거워요. 교육이란 사랑이에요. 사랑을 하지 않으면 교육을 이루지 못해요. 아이들은 사랑을 배우려고 학교를 다녀요. 교사들은 사랑을 가르치려고 학교를 다녀요. 교과서를 배우려고 학교 다니는 아이란 가여워요. 교과서를 가르치려고 학교 다니는 어른이란 불쌍해요. 교과서를 배우러 학교에 간다면, 처음부터 학교에 갈 까닭 없어요. 집에서 며칠 달달 외우면 그만인 교과서예요. 교과서 달달 외우도록 시키려는 교사라면, 처음부터 교사가 될 까닭 없어요. 교사가 없어도 아이들은 교과서 얼마든지 달달 외울 수 있어요.


  아이들한테 무엇을 가르쳐야 할까요? 바로 어른들 스스로 배우고 싶으며 누리고 싶고 즐기고 싶은 사랑을 가르쳐야지요. 아이들한테 무엇을 보여주어야 할까요? 바로 어른들 스스로 이녁 삶 사랑하는 아름다운 눈빛과 손길과 마음밭을 보여주어야지요. 4346.6.23.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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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treeje 2013-06-23 0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함께살기님의 느낌글과, 사진으로 올리신 이오덕 선생님의 글을 함께 천천히 오래오래 읽습니다. 그리고 또 제 어린 날의 시간과 교육과 우리 아이들에게 정말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가를 또 생각하고 생각하게 되는 시간입니다.
오래전에 이오덕 선생님의 책을 읽는다고 읽었긴 하나, 그저 아이들을 참교육으로 가르치고자 하시는 분의 글,이라 생각하고 눈으로만 읽었지 실상 진정 마음으로 하나하나 그 빛을 헤아리며 읽지는 못했던 듯 싶었지요. 참 귀한 글과 귀한 책을 지금에야 마음에 새기며 읽습니다.
참 선생질 못할 짓이다...그러니 학생들도 학생 노릇이 얼마나 고달픈가 생각 듭니다. 정말 어른들도 자기가 사랑받을 때 기쁘고 살맛이 날텐데 그 살맛나는 사랑으로 아이들을 마음으로 보듬으며 함께 누리는 삶 살아간다면 얼마나 좋은 세상, 행복한 세상이 될까 하네요.
마음빛 비추며, 온 마음으로 쓰신 아름다운 글 감사히 받아 잘 읽었습니다.~^^
덕분에 오늘 저도 또 새로운 빛으로 새 하루를 예쁘고 아름답게 시작합니다.~

숲노래 2013-06-23 11:49   좋아요 0 | URL
이오덕 선생님 책을 새롭게 다시 읽으면 언제나 새로운 빛이 마음속으로 스며든다고 느껴요. 이오덕 선생님하고 오랜 벗님으로 지낸 권정생 님 책도, 또 전우익 님 책도 늘 새로운 이야기빛을 우리한테 베풀어요.

마음속에서 빛이 샘솟도록 이끄는 힘이 있을 때에 비로소 사랑이 되고, 사랑이 될 때에 시나브로 아름다운 꿈을 이루는구나 싶어요.

<이오덕 일기>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2013년 오늘 돌아볼 때에도 그닥 나아지거나 달라지지 못했다고 느껴요. 더 고단한 입시지옥으로 바뀌었고, 시골은 아주 망가져 버려 도시바라기에서 허덕이며, 도시는 도시대로 월급기계처럼 뒹구는 흐름이 짙어요.

사랑을 찾아보기 어려운 이 나라에 사랑이 언제쯤 싹틀 수 있을까요...

잎싹 2013-07-20 0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마음에 드는 서재를 찾은 느낌입니다.
저도 이 책 사보고 싶어요.
좋은 글도 잘 읽고 갑니다. 자주 들릴게요.~~^^

숲노래 2013-07-20 00:28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언제나 즐겁게 마실해 주셔요.

다섯 권 장만하는 데에 목돈이 들지만,
찬찬히 목돈 모으는 즐거움도 있으리라 생각해요.

삶을 누리는 빛 늘 곱게 여미시기를 빌어요~
 
동화를 어떻게 쓸 것인가
이오덕 지음 / 삼인 / 2011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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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화는 누가 써서 누구한테 읽히는가
 [어린이책 읽는 삶 9] 이오덕, 《동화를 어떻게 쓸 것인가》(삼인,2011)



- 책이름 : 동화를 어떻게 쓸 것인가
- 글 : 이오덕
- 펴낸곳 : 삼인 (2011.9.16.)
- 책값 : 15000원


 (1) 동화읽기


 어린이는 어른으로 자라고, 어른은 어린이를 낳습니다. 어린이는 어른으로 크는 길을 걷고, 어른은 새로 빚는 어린이 목숨을 늘 몸속에 건사합니다.

 어른이 되면서 어린이였던 나날을 잊는 사람이 많은데, 참말 뼛속까지 몽땅 잊는 사람이 많은데, 사람은 사람이기 때문에 스스로 아름다이 살아갈 길을 찾으려 마음을 바치고 땀을 흘릴 수 있다면, 언제라도 어린이 넋을 되찾으면서 사람다운 꿈을 길어올릴 수 있으리라 믿어요.

 내 아이들을 바라보며 노상 생각합니다. 내 아이들이 예쁘게 놀거나 심부름을 하거나 잠드는 모습은 내 아이들이 저희 어버이 두 사람한테서 물려받은 사랑씨라고 느껴요. 이와 함께, 내 아이들이 미운 짓을 한다거나 소리만 꽥꽥 지르면서 뒷북놀이를 한다면, 이때에도 이 슬프거나 못난 몸가짐이란 저희 어버이 두 사람한테서 이어받은 아픔이나 생채기라고 느껴요.

 착한 넋으로 사랑스레 살아가는 어버이일 때에는 착한 넋으로 사랑스레 살아가는 아이들이에요. 샘 내는 몸가짐으로 안쓰러이 살아가는 어버이일 때에는 샘 내는 몸가짐으로 안쓰러이 살아가는 아이들이고요. 어버이는 어버이 스스로 즐거우면서 아름다울 길을 찾아야, 어버이인 나부터 즐거우면서 내 아이들 또한 즐겁습니다. 아이들만 예쁘게 자랄 수 없어요. 아이들만 숱한 학교를 다니며 똑똑해질 수 없어요. 아이들만 큰도시로 나아가 회사원이 되어 돈을 많이 벌며 ‘잘살’ 수 없어요. 어버이와 아이가 나란히 잘살아야 해요. 어버이와 아이가 다 함께 예쁘게 살아야 해요. 어버이와 아이가 서로서로 사랑을 나누어야 해요.


.. 요즘은 어린이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줄 사람이 없다. 어머니고 할머니고 아버지고 텔레비전을 들여다보면서 벙어리가 되었고, 어린이들은 어른들이 보는 텔레비전을 함께 보면서 시간을 보낸다 … 우리 모두가 참되게 살아가기 위한 더욱 높은 자리에 서서 나날의 일들을 바라보게 된다면 그 나날의 일들이 결코 평범한 이야기로 처리될 수 없을 것이다 …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벌써 오래 전에 민간설화를 모아 정리하는 일을 끝내고 이를 바탕으로 하여 저마다 자기 나라의 풍토에 맞는 아동문학을 창조해 왔으며, 2차 대전 이후에는 아프리카·동남아의 여러 약소국가들도 모두 설화를 수집·정리·보존하는 일에 힘을 기울여 왔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아직도 사회에서는 거의 내버려둔 상태다 … 민중을 멸시하고 민족을 열등시하는 처지에 서 있는 사람은 민중의 전통을 멸시하고 옛이야기를 열등시할 것이 당연하다. 민중을 높이 보고 민족에 애정을 갖는 사람만이 민중들의 느낌과 말을 사랑하고 그들이 남긴 이야기를 속속들이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 일본인들이 자기 나라의 문화유산을 아끼고 가꾸려는 태도는 대단하며, 아이들도 그렇게 풍부하게 기록된 옛이야기를 즐겨 읽으면서 자라고 있다 ..  (11, 25, 59∼60, 66, 67쪽)


 나는 내 어버이한테서 이원수 동시나 권태응 동시나 권정생 동시나 임길택 동시를 배우지 못했습니다. 현덕 동화라든지 이주홍 동화를 익히지 못했어요. 이원수라는 이름은 〈고향의 봄〉이나 몇 가지 동시 때문에 이름을 외워야 했지만, 막상 이원수라는 어른이 어떤 동시와 동화를 남겼는지는 하나도 모르는 채 자랐습니다. 아버지가 국민학교 교사였으며 무척 똑똑하신 분이었으나, 당신 아들한테 아름다운 어린이문학을 물려주지 못했어요.

 나는 이 모든 어린이문학 일꾼을 스물네 살을 넘기고 나서야 스스로 찾았습니다. 가만히 보면 스스로 찾았다기보다 ‘집안에 이분들 책이 없으’니 ‘바깥에서 이분들 책을 찾을 수 있던’ 셈이라 할 만하지요. 다른 집에서는 예닐곱 살에 이원수 동요와 동시를 읽거나 듣고, 아홉열 살에 권정생 동시와 동화를 읽을 뿐 아니라, 열두어 살에 이주홍 동화를 읽지만, 나는 어느 한 가지도 가까이하지 못했습니다. 그나마, 임길택이나 권태응이나 현덕 어린이문학은 1990년대가 지나서야 알려지고 책으로 나왔기에, 느즈막하게 어린이문학에 눈을 뜬 나로서는 몹시 반가이 이분들 책을 만났어요. 고맙게 사귀었어요.

 다시금 가만히 헤아리면, 나로서는 어린 나날 이원수이든 권정생이든 이주홍이든 알지 못하며 자랐으니까, 나중에 이런 이름을 찾아나서며 책읽기를 하고, 또 이 책읽기가 임길택이나 권태응이나 현덕으로도 이어질 수 있구나 싶어요. 곧, 내 어버이는 나한테 이원수를 가르치거나 물려주지 못했지만, 나 스스로 이원수를 배우면서 찾아나설 씨앗을 물려주었다고 할까요. 어린 나날 더 좋거나 더 아름답거나 더 기쁘거나 더 빛나는 어린이문학을 만나지 못하고 사귈 수 없었으나, 집에서 어머니 일을 거들고 동네에서 동무들하고 뛰놀면서 내 가슴을 씩씩하게 일구는 길을 걸을 수 있었구나 싶어요.


.. 감수성이 예민한 어린이들에게 바르고 아름다운 우리 말을 가르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아무리 그 뜻을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으리라 … 문장이 어려운 것은 그 뜻이 깊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내용은 아무것도 아닌데 글이 알 수 없게 되어 있다 … 일제시대에 슨 작품, 더구나 아동문학 작품에서는 이런 잘못 쓴 말을 그대로 두지 말고 마땅히 우리 말로 고쳐서 읽도록 하는 것이 옳고, 그렇게 해야 작품을 써서 남긴 분의 뜻도 바로 이어 주는 일이 된다고 본다 ..  (33, 36, 275쪽)


 두 아이를 옆지기와 함께 낳고 살아가면서 언제나 찬찬히 돌아봅니다. 이 아이들 나이 즈음에 나는 내 어버이하고 어디에서 어떻게 지냈을까 하고 곰곰이 되새깁니다.

 나는 어느 한 가지도 떠올리지 못합니다. 나이가 좀 든 다음 일도 제대로 떠올리지 못하기 일쑤입니다. 그저, 우리 집 두 아이 모습에 기대면서 내 어린 나날 내 어버이가 나를 보살피며 사랑하는 동안 얼마나 많은 땀과 품과 겨를과 꿈을 바쳤을까 하고 느낍니다. 나는 내 어버이가 나와 형한테 했듯이, 내 두 아이한테 내 모든 땀과 품과 겨를과 꿈을 바치면서 이 아이들이 사람다운 넋과 얼을 올바로 건사하는 예쁜 목숨으로 자라도록 어깨동무할 ‘어른’이로구나 하고 느껴요.

 어버이인 내가 먹고 싶은 것을 아이 또한 먹고 싶어 합니다. 어버이인 내가 즐겁게 차려서 맛나게 먹는 밥을 아이 또한 맛나게 먹어요. 어버이인 나부터 아이하고 옆지기한테 예쁘며 곱고 빛나는 말로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아이들도 나와 옆지기한테 예쁘며 곱고 빛나는 말로 이야기꽃을 피웁니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지만, 이보다는 ‘흐르는 사랑’이에요. 나한테서 아이한테 흐르는 사랑이 있고, 아이한테서 나한테 흐르는 사랑이 있어요. 나한테서 옆지기한테 흐르는 사랑처럼, 옆지기한테서 나한테 흐르는 사랑이 있습니다.

 착한 길을 반가이 맞아들이면, 어버이요 어른인 나부터 기쁜 나날을 누립니다. 착한 길을 반가이 맞아들이는 어버이요 어른하고 함께 살아가는 아이라면, 이 아이는 하루하루 씩씩하게 착한 길을 반가이 맞아들이면서 어여삐 자랄 수 있어요. 어버이 스스로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 아이들 삶이 달라져요. 이름나다는 학교나 훌륭하다는 학교에 보낸들 아이들 삶이 좋아지지 않아요. 아이들은 학교에 넣으면 안 돼요. 아이들은 어버이가 살아가는 곳에서 함께 살아가면서 제 사랑꽃을 피울 수 있어야 해요.


.. 이러한 민중들의 소망과 지혜가 담긴 교훈성이 있기에 옛이야기는 오늘날까지도 문학으로서 살아 있는 것이다 … 어린이들은 어른들(더구나 글을 쓰는 사람들)같이 사색에 잠기거나 추상된 이론 같은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은 직감으로 진리를 깨닫는다. 삶 속에 움직인다. 공상도 어디까지나 현실에서 출발한다 … 저들을 잡아먹으러 올라오는 호랑이에게 도리어 올라오는 수를 가르쳐 주는 아이들이기에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고, 기적이 기적이 아니게 되는 것이다. 아이들의 마음, 아이들의 말은 하늘과 땅의 모든 목숨에 가 닿는다. 하느님이 아이들의 소원을 어찌 모르겠는가 … 자연 속에서 자연과 함께 살고 있는 아이들은 모두가 시인이다. 그런데 아이들에게 시를 가르친다고, 문학교육을 한다고 아이들을 방 안에 가두어 놓고 죽은 글만을 읽게 하고 외우게 하는 것이 오늘날의 교육이다. 이래서 아이들과 교육은 교과서에 올려놓은 그 죽은 글과 함께 죽어 가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자연은 그 모든 것이다. 자연을 잃은 아이들은 모든 것을 잃은 것이다. 자연을 빼앗긴 아이들은 모든 것을 빼앗긴 것이다. 아이들에게 자연은 언제나 포근하게 안아 주는 어머니가 된다 ..  (79, 80∼81, 131, 207쪽)


 아이들에 앞서 어른들부터 아름답고 푸르디푸른 자연과 벗삼으면서 흙을 사랑하는 나날을 일구는 터전이라면, 이러한 시골마을 학교는 ‘제도권 학교’가 아닌 ‘사랑스러운 터전이자 보금자리’예요. 이만 한 학교라면 옆지기도 나도 아이들을 학교에 넣고 싶어요. 그러나 자연을 예쁘게 품에 안은 시골마을이라 하더라도 어른이나 아이들 꿈이 ‘도시·돈·이름값·자가용·물질문명’이라 한다면, 이러한 터전에 둘러싸인 시골마을 학교는 도시와 똑같은 제도권 학교예요. 지식과 기능과 학벌과 점수로 움직이는 슬프며 안타까운 죽음터이고 말아요.


.. 가난하게 살아가는 노마네 아이들은 노마를 중심으로 해서 돈이나 책으로서가 아니라 자연 속에서 놀이를 즐기는 가운데 서로 도우면서 사람다운 마음을 키우고, 슬기를 배우고, 몸을 단련하면서 자라난다 … 아이들의 놀이 속에는 교육, 문학, 철학, 정교, 그밖에 우리 어른들이 쌓아 놓은 모든 고귀한 것들의 알맹이가 되고 바탕이 되는 것, 근원이 되는 것이 들어 있다는 생각이 든다 … 놀이가 없는 공부는 참 공부가 될 수 없다 … 사람은 누구든지 놀이로 된 어린아이들의 삶을 그대로 연장해서 죽을 때까지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고 … 어른들이 아이들을 억압해서 자라나는 것을 방해하거나 비뚤어지게 하지 않는다면, 그래서 아이들이 자연스럽고 평화스러운 자리에서 놀게만 한다면, 이 아이들은 지금까지 어른들이 상상도 못했던 참으로 놀랍고 훌륭한 공부를 스스로 즐기면서 하게 되리라고 나는 확신한다 ..  (186∼187, 195, 196, 200쪽)


 어른들부터 하루 빨리 다람쥐 쳇바퀴 도시를 떠나야 합니다. 아이들을 살리고 싶다면 시골에서도 다람쥐 쳇바퀴 물질문명을 붙잡으면 안 됩니다. 아이들을 살리는 길이란 누구보다 어버이요 어른인 나부터 살리는 길입니다. 아이들과 어른들이 함께 살아나면서 어깨동무할 꿈누리를 이루는 길을 걸어가야 사랑과 믿음이 이루어져요. 예식장 하얀 면사포는 사랑이 아니에요. 높다란 뾰족탑 예배당은 믿음이 아니에요. 다이아반지와 아파트 열쇠꾸러미는 사랑일 수 없어요. 두툼한 성경책과 거룩한 미사로는 믿음이 살아나지 못해요.

 두 발로 흙을 디뎌야 합니다. 두 손으로 흙을 만져야 합니다. 흙에서 태어나는 아름다운 목숨인 내 삶을 깨닫고, 흙으로 돌아가는 아리따운 목숨인 내 죽음을 알아차려야 해요.

 가을바람이 불고 겨울바람이 다가옵니다. 가을햇살이 내리쬐니, 이윽고 가을걷이를 마치면 겨울햇살이 찾아오겠지요. 햇살은 봄부터 겨울까지 골고루 내리쬡니다. 봄과 가을이 사라지고 여름과 겨울만 남는다 하더라도, 이 햇살이 있어 사람들은 누구나 밥을 얻고 옷을 얻으며 물이랑 바람뿐 아니라 집과 마을을 얻어요.

 누리며 나눌 사랑을 알아야 해요. 즐기며 꽃피울 믿음을 깨우쳐야 해요. 바로 이 때문에 아이들한테 좋은 동시와 동화를 읽힐 뿐 아니라, 어른부터 좋은 동시와 동화를 먼저 만나야 합니다. 사랑과 믿음이 사람한테 가장 고마운 마음밥이거든요.


 (2) 사랑읽기


 이오덕 님이 남긴 글을 그러모아 엮은 책 《동화를 어떻게 쓸 것인가》(삼인,2011)를 읽습니다. 이 책에 실린 글은 이오덕 님이 1980년대 언저리에 여러 잡지에 실었던 글입니다. 이 글이 처음 잡지에 실렸을 때에 읽은 분이 있을 테지만, 이렇게 책으로 묶이고 나서야 처음으로 읽는 분이 훨씬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나는 이 책에 실린 글을 2003∼2006년 사이에 수없이 되읽었습니다. 이무렵에 이오덕 님 글과 책을 갈무리하는 일을 맡으면서 《동화를 어떻게 쓸 것인가》라는 책에 실린 글을 쉰 차례 넘게 읽었어요. 말마디 하나하나가 새삼스럽고, 글투 하나하나가 남다릅니다.

 같은 글을 어떻게 쉰 차례 넘게 되읽는가 할 수 있지만, 되읽을 만한 글이라면 쉰 차례뿐 아니라 백 차례나 이백 차례 넘게 되읽을 수 있습니다. 삶을 밝히는 글이라 한다면 오백 차례나 즈믄 차례를 못 읽을 까닭이 없어요. 다만, 오늘날 이 나라에서 오백 차례나 즈믄 차례를 거듭 읽을 만하다 싶은 글이 얼마나 있는지 잘 모르겠어요. 무척 잘 썼다 싶은 어느 글은 열 차례쯤 되읽을 만하구나 싶기도 하지만, 스무 차례를 되읽는다든지 서른 차례를 되읽을 만한가 하고 곱씹을 때에는 고개를 살래살래 젓습니다.


.. 동화문학이란 것을 좀더 자세히 말하면, “자기 눈으로 세상을 보고 사람들이 살아가는 참모습을 어린이들이 읽을 수 있는 이야기로 쓰는 글”이다. 또는 “사람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어린이들이 알 수 있는 이야기로 쓰는 글”이다 … 인간으로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야 동화를 쓸 수 있다 … 인간과 사회에 대한 성실성, 어린이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있으면 되는 것이다 … 참으로 어린이를 사랑하고 그들의 행복을 바라는 사람만이 동화작가가 될 수 있다 … 이렇게 옷을 깁고 신을 삼으면서 아이들에게 들려주던 것이 옛이야기였던 것이다. 그러니 이야기가 전수되던 자리는 온 식구가 모여 앉아 일을 하는 자리, 생산을 하는 자리였다는 것, 이야기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창조하는 사람과 받아 누리는 사람, 어른과 아이가 온전히 하나로 되어 있었다는 사실에서 민중성의 본질을 이해해야 되는 것이다 ..  (17, 20, 75쪽)


 오늘날 수많은 글쟁이와 지식쟁이는 그야말로 ‘글로 글을 쓰’고 ‘지식으로 지식을 다룹’니다. 글로 쓰는 글은 한 차례조차 읽고 싶지 않습니다. 지식으로 지식을 다룰 때에는 아예 거들떠보고 싶지 않아요.

 왜냐하면, 글로 쓰는 글이나 지식으로 다루는 지식에는 사랑이 없거든요. 따뜻하지 않아요. 너그럽지 않을 뿐 아니라, 믿음조차 없어요. 나는 내 삶에서 지식을 더 쌓고 싶지 않고, 내 마음밭에 글조각을 채우고 싶지 않아요. 나는 내 삶을 알차게 일굴 나무 한 그루가 사랑스러워요. 나는 내 삶을 알뜰히 보듬을 풀 한 포기가 믿음직해요.

 이리하여, 내 어린 나날 이름조차 모르고 읽지도 못하던 이원수·권태응·권정생·현덕·임길택·이주홍 같은 분들 동시와 동화를 어른이 된 뒤부터 차근차근 읽습니다. 차근차근 한 차례 다 읽고 나서 다시 읽습니다. 여러 차례 되읽은 다음 내 아이들과 옆지기도 함께 읽을 수 있도록 책을 여러 권 갖춥니다. 내가 읽는 책 따로, 살붙이 읽을 책 따로 건사합니다. 아주 마땅한 노릇인데, 사랑으로 쓴 글에 서린 따스한 마음과 넉넉한 꿈이 고마우면서 좋으니까, 이분들 책을 즐거이 장만해서 수없이 되읽어요.


.. 이 생각(주제)을 그대로 바로 쓰면 설교가 되고 논문이 되지만, 사람이 살아가는 이야기 속에서 감동으로 느껴지도록 쓰면 소설이 되고 동화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 주제는 이야기 속에, 이야기 속에 나오는 사람의 행동과 말과 사건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가 있어서 독자들이 이야기를 재미있게 읽는 동안에 자신도 모르게 그 생각에 따르고 공감하도록 해야 한다. 따라서 주제는 지은이의 인격을 보이는 것이라 하겠으니 훌륭한 삶의 태도와 인생관, 역사관을 가진 사람이라야 훌륭한 동화를 쓸 수 있는 것이다 … 동화를 어린애들에게 주는 장난감이나 과자 같은 것 정도로 보아 온 작가들에게는 어려운 것이 당연하지만, 어린이와 겨레가 살아가는 문제를 진정으로 생각하고 있는 부모나 교사들이라면 철학이 있어야 동화를 쓸 수 있다는 말을 당연하게 받아들일 것이다 .. (28, 29쪽)


 이오덕 님은 《동화를 어떻게 쓸 것인가》라는 어린이문학 비평책에서 동화를 쓰려고 하는 사람은 무엇보다 ‘사랑’을 해야 한다고 밝힙니다. 어린이를 사랑해야 하고, 어린이를 사랑하는 어른 삶인 나 스스로를 사랑해야 한다고 밝힙니다. 사랑이 없이는 아무런 어린이문학을 펼칠 수 없을 뿐 아니라, 사랑이 없을 때에는 어떠한 어른문학도 일굴 수 없다고 밝힙니다. 또한, 문학만이 아니라 정치이든 사회이든 교육이든 노동운동이든 환경운동이든, 늘 사랑으로 할 일이지, 지식이나 잔재주나 이름값이나 다른 바깥힘으로 할 수 없다고 밝혀요.

 사랑이 없는 교실에서는 무엇을 가르칠까요. 사랑이 없는 청와대에서는 무슨 정책이 나올까요. 사랑이 없는 대형할인마트에서는 무엇을 장만할까요. 사랑이 없는 신문이나 방송에는 어떤 기사가 실릴까요.


.. 농과대학을 나와도 농사지을 줄 모르고, 대학을 나와도 취직할 데가 없어 빈둥거리면서 놀고, 그러다가 그제야 무슨 기술을 배운다고 전문대학에 다시 입학하는 꼴로 되어 있는 것이 우리 교육의 현실이다 … 그토록 알뜰히 배우고 널리 익혔지만, 정작 가장 중요하고, 그 모든 배움의 알맹이가 되고 밑바탕이 되는 것은 못 배웠다. 그것이 무엇인가? 사람의 목숨을 이어가는 데 필요한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기르고 가꾸고 해서 그것을 장만하는 일이다 ..  (153, 159쪽)


 동화는 어른이 써서 어린이한테 읽힙니다. 그런데, 어린이는 동화책이든 동시책이든 스스로 돈을 치러 장만하지 못해요. 어린이가 읽는 동화책이나 동시책은 모두 어른이 책방에서 사서 선물해야 합니다. 독후감 숙제로 읽히는 동화책이든 마음밥 살찌우는 이야기꾸러미로 읽히든, 한결같이 어른이 사들인 다음에 어린이가 읽을 수 있어요.

 그러니까, 동화란 어른이 써서 어른이 읽는 글입니다. 어른이 써서 어른이 읽은 다음에 찬찬히 거르거나 가리거나 솎아서 내 아이한테 조금씩 베푸는 이야기예요. 어린이와 살아가는 어른이 온사랑을 기울여 쓴 동화와 동시를 어린이와 살아가는 또다른 어른이 온사랑을 기울여 알뜰살뜰 읽은 다음에 온사랑을 기울여 보살피는 내 아이한테 읽히는 책이 동화책입니다.


.. 잘못된 공부라는 짐에 짓눌려 그 몸과 마음이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진 아이들을 어떻게 살릴 것인가? 곧 아이들에게 삶을 어떻게 돌려줄 수 있겠는가? … 거의 모든 동요시인들이 겨레의 삶과 아이들의 현실을 등지고 방 안에서 읽은 글 속에 갇혀 머리로 고운 말만 꾸며 만들어 내어서 아이들에게 읽히고 노래 부르게 하였다. 그리하여 우리 어린이들의 참된 삶과 노래의 전통이 거의 끊어지다시피 되었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다행히 아이들의 삶에 가까이 다가가서 그들의 눈이 되고 귀가 되고 입이 되어 준 동요시인이 있었다. 권태응과 이원수 두 사람이다 ..  (307, 318쪽)


 동화가 이러하다면, ‘동화 비평’이나 ‘동시 비평’은 어떻게 해야 하는 일이 될까요. 동화나 동시 모두 사랑으로 쓰고 사랑으로 읽는다면, 동화와 동시를 비평하는 글은 어떻게 써야 참답게 비평이라는 이름표를 붙일 만할까요.

 오직 하나일 테지요. 글쓰기도 사랑으로 이루어지고, 글읽기도 사랑으로 이루어집니다. 글나눔이든 글꽃이든 모두 사랑으로 이루어집니다. 내 삶도 사랑이며 내 아이들 삶도 사랑입니다. 내 이웃과 동무들 모두 사랑이에요. 풀과 꽃과 나무와 벌레와 짐승 모두 사랑입니다. 구름과 바람과 들판과 바다와 멧자락 모두 사랑이에요. (4344.10.11.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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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가꾸는 어린이문학 - 이오덕 문학정신 이오덕 교육문고 2
이오덕 지음 / 고인돌 / 2010년 7월
평점 :
절판




 문학으로 어린이와 어른을 함께 지키는 길
 [어린이책 읽는 삶 2] 이오덕, 《삶을 가꾸는 어린이 문학》(고인돌,2010)


 1925년에 태어나 2003년에 흙으로 돌아간 이오덕 님은 1984년에 《어린이를 지키는 문학》(백산서당)을 내놓습니다. 1977년에 《시정신과 유희정신》(창작과비평사)을 내놓은 다음 두 권째 내놓은 어린이문학 비평입니다. 《시정신과 유희정신》은 2005년에 ‘굴렁쇠’ 출판사에서 새옷을 입혀 다시 냈고, 《어린이를 지키는 문학》은 2010년에 ‘고인돌’ 출판사에서 새옷을 입히며 책이름을 고쳐서 다시 냅니다.

 이오덕 님이 2003년이 아닌 2011년까지 사셨다면 《시정신과 유희정신》이나 《어린이를 지키는 문학》에 뒤이은 새로운 어린이문학 비평을 내놓았으리라 생각합니다. 가만히 살피면, 2002년에 몸이 많이 아프던 나날에도 《어린이책 이야기》(소년한길)와 《문학의 길 교육의 길》(소년한길)을 내놓았습니다. 2001년에도 병하고 싸우면서 《농사꾼 아이들의 노래》(소년한길)를 내놓았어요. 《시정신과 유희정신》은 1970년대까지 이루어진 이 나라 어린이문학을 발판으로 어린이 삶과 넋을 사랑하고 믿으려는 이야기를 담았다면, 《어린이를 지키는 문학》은 1980년대까지 이루어진 이 나라 어린이문학을 깊이 헤아리면서 빚은 어린이사랑과 어린이배움입니다. 2001년과 2002년에 내놓은 세 가지 어린이문학 비평은 1990년대를 거쳐 2000년대로 접어드는 이 나라 어린이문학이 앞으로 어떠한 길을 씩씩하며 착하게 걸어가면 아름다울까를 돌아보는 생각밭입니다.

 1977년부터 2002년까지 이루어진 어린이문학 비평책을 읽다 보면, 이 나라에 새로 태어나는 어린이문학을 샅샅이 톺아본 흐름을 짚을 수 있기도 하지만, 이동안 이오덕 님 스스로 당신 말과 넋을 더 단단하며 알차게 가다듬으려고 애쓴 발자국과 손길을 느끼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이동안 이오덕 님이 내놓은 또다른 열매 가운데 하나는 《우리 글 바로쓰기》(한길사) 세 권이거든요. 1977년에는 우리 말글을 올바로 쓰는 데에는 마음을 쓰지 못했고, 1984년에는 조금 마음을 기울였으나 살짝 건드렸을 뿐인데, 2001년과 2002년에는 아주 깊이 파고들면서 당신 말씨와 말투를 많이 고치거나 바로잡았습니다. 2010년대까지 사셨더라면 2001년과 2002년에 이룬 ‘글쓴이 말매무새 거듭나기’를 한껏 알차게 꽃피웠으리라 생각합니다.


.. (동화란) 장사하는 아주머니나 농민이나 노동자나 사무원이나 누구든지 가까이 다가가고 즐길 수 있다. 그런 문학이라야 진짜 문학이다 … 어려운 한자말을 쓰지 말아야 한다. 깨끗한 우리 말로 바꿀 수 있으면 우리 말로 쉽게 풀어서 쓰도록 해야 할 것이다 … 절실한 생각은 절실한 체험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 흐리멍텅한 생각은 체험의 바탕이 없는 데서 나오고, 머리로 억지로 만든 실제로 없는 얘기는 어설프고 재미없는 동화가 된다 … 아무리 시가 개성 있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많은 독자들의 가슴을 건드리는 것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  (20, 40, 59, 163쪽)


 2010년에 다시 태어난 《삶을 가꾸는 어린이 문학》(고인돌,2010)이라는 책이지만, 이 책은 2010년 책으로 읽을 수 없습니다. 1984년 책으로 읽습니다. 1984년에 이룬 열매이면서 2010년이든 2020년이든 2030년이든 얼마든지 새롭게 읽고 아로새기면서 내 삶길과 삶결을 보듬는 길동무나 밑거름으로 삼을 책으로 읽습니다.

 이오덕 님은 어린이문학을 바라보는 글을 쓰면서, 이 글을 바탕으로 어린이가 착하고 참다우며 아름다이 살아갈 터전을 생각합니다. 어린이가 착하고 참다우며 아름다이 살아갈 터전을 생각하면서, 이러한 터전은 어린이를 비롯해 모든 어른이 착하고 참다우며 아름다이 살아갈 터전이 되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어린이한테만 좋으며 훌륭한 밥을 ‘쌀밥과 책밥과 말밥과 배움밥’으로 먹여야 할 뿐 아니라, 어른부터 좋으며 훌륭한 밥을 ‘쌀밥과 책밥과 말밥과 배움밥’으로 함께 먹으면서 즐겨야 한다고 거듭 힘주어 이야기합니다.

 마땅한 노릇입니다. 어른 스스로 학벌 사회와 비정규직 사회를 단단히 세우고서는 아이들한테 이 나라에서 예쁜 어른으로 자라도록 할 수 없습니다. 아이들한테 영어나 한자나 교과서를 잘 가르친다 한들, 어른이 빚은 학벌 사회와 비정규직 사회에서 어떤 어른으로 살아갈 수 있겠어요.

 모든 아이가 어른으로 자라고 나면 도시에서 아파트를 얻어 회사원이 되는 길로만 등떠미는 제도권 학교교육인데, 이러한 얼거리를 그대로 둔 채 아이들이 착하거나 참답거나 아름답게 살도록 돌볼 수 없어요. 아이들은 그림책에서만 꽃을 보고, 그림책에서만 흙을 만지며, 그림책에서만 꿈나라를 밟습니다. 아이들은 동화책에서만 구름을 바라보며, 동화책에서만 고양이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동화책에서만 이웃사랑을 나눕니다. 정작 아이들이 두 다리를 딛는 이 터전에서는 살가이 사귈 동무나 이웃을 찾기 어렵습니다. 아이들이나 어른들이나 집을 나서면 곧바로 자가용에 올라타고, 자가용에서 내리면 높다랗거나 깊은 건물로 들어섭니다. 아이들이나 어른들이나 햇볕을 쬐거나 낮하늘이나 밤하늘을 올려다볼 틈이 없어요.


.. 일본사람들이 자기 나라의 문화 유산을 아끼고 가꾸려는 몸가짐은 대단하며, 아이들도 그렇게 넉넉하게 기록된 옛이야기를 즐겨 읽으면서 자라고 있다 … 글쓴이 자신이 어린이가 사는 현장에서 함께 숨을 쉬는 민중성을 몸소 겪어야 한다 … 오늘날 어린이들이 교과서에 나오는 어린이같이 그렇게 행복하지 않다는 것, 그리고 외국 동화에 나오는 꿈같은 세계의 어린이들과 매우 다른 역사의 삶 속에 숨쉬고 있다는 것, 이것을 모르고서 동화고 소설이고 시를 쓴다면, 그런 글쓴이나 시인이 역사와 겨레에서 동떨어진 슬픈 사람이 될 것이란 사실은 불을 보는 일보다 더 환하다 … 교훈을 너무 밖으로 드러내어 보이는 훈화나 도덕 교과서의 글같이 되었다면 그것은 문학작품이라 할 수 없지만, 교훈성 그 자체를 죄다 빼려고 하는 것은 어린이문학의 본질을 모르기 때문이다. 교훈을 꺼리고 무서워하는 사람일수록 재미없고 해로운 작품을 쓰는 것이다. 교훈이 없다는 것은 글쓴이의 의도가 없고 사상이 없다는 것이고, 역사와 사회·어린이에 대한 믿음과 정열·사랑이 없는 것을 말해 준다 ..  (84, 98∼99쪽)


 2010년에 책이름을 《삶을 가꾸는 어린이 문학》으로 바꾸었습니다만, 이오덕 님이 여느 때에 들려준 말씀 가운데 하나가 “삶을 가꾸는 글쓰기 교육”입니다. 글쓰기와 배움(교육)과 글쓰기 가르치기 세 가지가 ‘삶을 가꾸는 일’이 된다는 뜻입니다. 삶을 가꾸는 일이란, 삶을 돌보거나 일구거나 사랑하거나 믿거나 좋아하거나 보듬거나 일으키거나 껴안거나 어깨동무하거나 즐기거나 다스린다는 이야기입니다. 돌보거나 일구거나 사랑하기로는 삶만이 아닙니다. 동무도 사랑하고 이 겨레도 돌보며 푸나무도 껴안습니다. 시골도 사랑하고 멧등성이도 보듬으며 자전거도 즐깁니다. 이름을 바꾸어 본다면, ‘자전거를 사랑하는 글쓰기 교육’이 되기도 하고, ‘설거지를 즐기는 글쓰기 교육’이 되기도 해요.

 어떤 틀에 박힌 이야기가 아니며, 어떤 틀에 매려는 교훈이 아니에요. 사람이 사람다이 살아가는 길을 어른부터 밝히면서 어른이 좋은 짝꿍을 사귀어 혼인을 하면서 아이를 낳아 어버이가 될 때에, 내 아이한테 어떠한 삶말과 삶책과 삶꿈과 삶사랑을 물려줄 수 있느냐를 찾자는 이야기입니다.

 이리하여, “어린이를 지키는 문학”이라 할 때에는 “어른을 지키는 문학”이기도 하고, “사람을 지키는 문학”이기도 합니다. 이오덕 님이 돌아보기에, 이 나라 어른들은 어린이도 못 지키고 어른도 못 지키기 때문에 이렇게 《어린이를 지키는 문학》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어린이문학 비평을 내놓았습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요즈음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데, 어린이문학이란 어린이만 즐기는 문학이 아닌 줄 아직 어른들은 제대로 깨닫지 못해요. 어린이부터 즐기는 어린이문학이고, 글을 깨친 사람 누구나, 이를테면 여느 노동자나 시골 흙일꾼 누구라도 읽거나 즐기는 어린이문학입니다. 권정생 님이 이룬 어린이문학은 어린이만 즐기는 문학이 아니라 ‘어린이가 읽을 수 있는 글’ 눈높이로 맞추어서 할머니 할아버지도 기쁘게 즐기는 문학이에요.

 곧, 어린이를 지키는 문학일 때라야 어른을 지키고 사람을 지킵니다. 이 땅을 지키고 이 나라를 지킵니다. 핵무기나 군대가 이 나라를 지키지 않습니다. 어린이문학이 이 나라를 지킵니다. 경제성장률이나 대기업이 이 나라를 지키지 않습니다. 어린이문학이 이 나라를 지켜요.

 이 나라를 지키는 가장 아름다우면서 사랑스럽고 참다운 길이 무엇인가를 밝히려고 1984년에 내놓은 책이 《어린이를 지키는 문학》입니다.


.. 어린이문학은 어린이에 대한 사랑이 밑뿌리로 되어 있어야 하는 문학이다. 어린이에 대한 사랑이란 아이들의 귀여움에 빠져 버리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아이들의 마음, 아이들이 살아가는 현실을 깊이 이해하여 그들이 안고 있는 문제를 풀어 주고, 그들이 사람답게 자라나도록 하려는 정신이 곧 어린이 사랑이다 … 지금까지 학교에서 진행되어 온 사람됨을 짓밟는 시험경쟁 교육은 어떻게 해서라도 고쳐야 하겠다. 단편 지식을 집어넣고 외우는 경쟁 대신에 자발성과 자율성을 우러르고 창의성을 뻗쳐 주는 종합 사람교육으로, 물질 가치만을 가장 높게 생각하는 교육에서 정신 가치를 탐구하는 철학교육과 예술교육으로 방향이 바뀌어야 한다 … 아이들을 사랑하고 그들이 참된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어린이문학인이라면 마땅히 어린이가 참되게 자라는 것을 가로막고 있는 걸림돌에 대해 관심을 가질 것이고, 이를 없애려고 애쓸 것이다 … 어린이교육에서 철학이고 과학이고 역사고 모두 문학으로 해 나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합니다. 어린이문학은 철학과 종교와 과학과 역사와 어학 들을 모두 아우르며 그것을 이론으로가 아니라 살아 있는 문학으로 진리로 깨닫게 하는 데 귀한 값어치가 있습니다 ..  (209, 256∼257, 264쪽)


 2010년에 이르러 책이름이 바뀐 채 다시 나옵니다. 다시 나온 책을 새롭게 읽으면서 곰곰이 생각합니다. 2010년에 이 책에 새 이름을 붙여야 마땅한지 찬찬히 돌아봅니다. 이제, 이 나라 어린이는 어느 만큼 지킨다 할 만하니까, “삶을 가꾸는”이라는 이름으로 고칠 만한지 가누어 봅니다.

 이 나라 어린이가 어린이답게 어린이 삶을 꾸리면서 어린이다운 사랑을 마음껏 누리거나 나누면서 활짝 웃음꽃을 피우니, 이제는 “어린이를 지키는” 일은 안 하거나 살짝 손을 내려놓아도 될는지 생각합니다. 초등학교 낮은학년부터 거칠거나 막된 말을 쉬 내뱉는 아이들이 서울부터 제주까지 가득가득한데, 이 나라에서 “어린이를 지키는” 일은 그만두거나 그치거나 멈추어도 될 만한가 헤아립니다. 초등학교 영어 교육에 뒤이어 초등학교 한자 교육까지 다시 시키려 하는 정부요 언론이요 학습지회사요 교사요 지식인이요 어버이인데, 어느 누구도 “어린이를 지키는” 데에는 마음을 안 쏟아도 괜찮은지 알쏭달쏭합니다.

 어린이한테 착한 삶과 참다운 넋과 아름다운 꿈을 보여주거나 물려주거나 가르치거나 함께하는 어른이 거의 안 보이는데, 이제는 “어린이를 지키는” 일은 이름부터 그닥 알맞지 않다고 여기는 일이 옳거나 바르거나 괜찮은지 아리송합니다.


.. 어린이문학을 신앙처럼 믿고 평생을 가난한 겨레의 어린이를 생각하며 살아가신 (이원수) 선생은 겨우내 차가운 몸으로 언 땅에 나 있는 밀과 보리를 덮어 주고 나뭇가지를 안아 주다가 드디어 봄이 오자 녹아 버리는 때묻은 눈 바로 그것이었다 … (《북미 최후의 석기인 이쉬》에 나오는) 이쉬가 온갖 문명의 이기를 보았을 때, 어떤 것은 재미있게 여기고 어떤 것은 놀라워 하지만, 다른 어떤 것은 대수롭지 않게, 또는 시시하게 여기는 것이 참말 재미있다. 그런 이쉬의 취향을 샅샅이 살펴보면 문명 세계의 빈 구멍이 남김없이 드러날 것 같다 … 내가 보기로 이쉬의 이런 취향은 오늘날 눈먼 기계문명을 날카롭게 비판한 말없는 철학이 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1911년 황금문 공원에서 해리 파울러가 대륙횡단 비행을 위해 이륙했을 때 모든 사람이 흥분했지만 이쉬만은 차가운 반응을 보였다는 것은 무엇을 말해 주는가? 만일 이쉬가 오늘날까지 살아 있었더라면 온갖 원자무기와 우주항공 물체에 대해서 한층 더 차가웠을 것이 틀림없다 ..  (307, 508∼509쪽)


 어린이를 안 지키면 사랑할 줄 모릅니다. 어린이를 안 지키는 어른은 어린이도 어른도 사랑할 줄 모릅니다. 지키는 일은 감싸고 도는 일이 아닙니다. 지키는 일은 울타리를 치는 일이 아닙니다. 지킨다 해서 예방주사를 놓는다거나 방부제를 먹이는 일이 아닙니다.

 지키는 일이란 사랑하는 일입니다. 지키는 일이란 아이 스스로 메마르거나 거친 이 땅에서 씩씩한 몸가짐과 맑은 마음가짐으로 착한 길을 꿋꿋하게 걸어가도록 보살피면서 함께 살아가는 일입니다.

 아이들이 어린이문학을 참답게 즐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아이들이 초등학교 6학년을 마치고 중학교 1학년이 되더라도 어린이문학을 실컷 누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중학교 2학년이 되니 갑작스레 청소년문학만 즐겨야 할 아이들이 아닙니다. 어린이문학은 고등학생도 대학생도 즐기는 문학입니다. 회사원도 대통령도 국회의원도 즐길 어린이문학이고, 할머니와 아저씨와 아줌마와 할아버지가 함께 즐기는 어린이문학이에요.

 청소년문학이란 청소년부터 즐기는 문학입니다. 어른문학은 말 그대로 어른부터 즐기는 문학이 되겠지요. 어른문학을 쓰거나 즐기려면, 어느 어른이더라도 어린이와 청소년을 거치니까, 어린이문학과 청소년문학이 예쁘게 바탕이 될 때라야 비로소 예쁘게 어른문학을 꽃피웁니다. 어린이문학을 지키지 않는 터전에서 어른문학도 어른사회도 지킬 수 없하고, 지킬 힘을 스스로 북돋우지 못합니다. (4344.7.11.달.ㅎㄲㅅㄱ)


― 삶을 가꾸는 어린이 문학 (이오덕 글,고인돌 펴냄,2010.7.20./1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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