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중에 보이는 책



  책방마실을 하면서 책탑이나 책꽂이를 사진으로 찍는다. 사진을 찍기 앞서나 사진을 찍을 적에 책탑과 책꽂이를 찬찬히 살펴서 ‘내 마음에 드는 책’을 다 골랐으리라 여기지만, 막상 ‘책방마실을 하며 찍은 사진’을 집으로 돌아와서 큼지막하게 키워서 들여다보면, ‘어라, 내가 왜 이 책을 코앞에 두고도 안 골랐을까?’ 하면서 쓸쓸하기 일쑤이다. 참말 이 책들을 코앞에서 사진기를 디밀면서 바라보았는데, 왜 사진기 눈으로도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사진기에 앞서 두 눈으로 쳐다볼 적에도 왜 깨닫지 못했을까.


  나중에 보이는 책 가운데 나중에 다시 책방마실을 할 적에 고맙게 만나는 책이 더러 있다. 그러나, 나중에 보이는 책은 나중에 다시 책방마실을 하더라도 으레 다시 못 만나기 일쑤이다.


  앞으로 다른 책방을 나들이하면 만날 테지. 몇 달이나 몇 해쯤 지나야 만날는지 모를 노릇이지만, 앞으로 다른 책방에서 틀림없이 만날 테지. 믿고 믿는다. 기다리고 기다린다. 4347.12.3.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헌책방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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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 앞에 서면



  책방 앞에 서면 살짝 떨린다. 오늘 이곳에서 어떤 책을 새롭게 만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며 설렌다. 나는 어떤 책을 만날까. 나는 어떤 책을 손에 쥘까. 나는 어떤 책을 어떻게 읽으면서 어떤 마음으로 거듭날 수 있을까.


  책방 문을 열고 들어서기까지 나한테 찾아올 책을 알 수 없다. 새책방에서든 헌책방에서돈 모두 같다. 새로 나온 책 가운데 신문이나 방송이나 인터넷 어디에서도 눈길을 받지 못한 책이 있기 마련이고, 헌책방 책시렁에 놓인 책 가운데 이제껏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한 책이 있기 마련이다. 어느 책을 마주하든, 책을 알아볼 몫은 나한테 있다. 책을 아끼고 사랑할 사람은 바로 나이다.


  책방 앞에 서면 큰숨을 한 차례 들이마신다. 가만히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긴 뒤 눈을 즐겁게 다시 뜬다. 이러고 나서 책방 문을 연다. 기쁜 목소리로 책방지기한테 인사를 한 뒤 가방을 내려놓는다. 홀가분한 몸으로 책시렁을 찬찬히 둘러본다. 4347.11.19.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헌책방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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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무엇인가



  이제 사라졌지만, 부산 보수동 책방골목에 있는 어느 헌책방에서 “‘책’은 인증용 소품이 아닙니다.”라고 적은 쪽종이를 바깥에 살그마니 내놓은 적 있다. 무슨 소리일까? 무슨 뜻일까? 쪽종이에 적은 말 그대로이다. 책은 ‘책’일 뿐, ‘소품’이 아니다. 보수동 책방골목에 ‘사진만 찍으러 오는 나그네’를 겨냥해서 하는 말이다.


  제주섬 억새밭에 사진을 찍으러 가는 일은 나쁘지 않다. 좋거나 나쁘다고 가를 수 없다. 그저 억새를 누리려 가는 길이니까. 억새밭에 가면 억새를 바라보고 만지고 누리다가 사진을 찍는다. 억새밭을 마음껏 달리다가 사진을 찍고, 억새밭에 드러누워서 사진을 찍기도 할 테지.


  책방골목이나 헌책방에 가면 무엇을 할 만할까? 사진을 찍을 만할까? 책을 ‘소품’으로 삼아서 멋들어진 모습을 훌륭히 찍을 만할까?


  책을 소품으로 삼고 싶다면 도서관에 갈 노릇이다. 도서관에 가서 ‘소품인 책’을 늘어놓고 찍을 노릇이다. 책을 소품으로 여기고 싶으면 커다란 새책방에 갈 노릇이다. 수십만 권에 이르는 책이 꽂힌 커다란 새책방에서 신나게 사진을 찍을 노릇이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할 노릇이다. 도서관이나 큰 새책방 가운데 ‘사진 마음껏 찍으시오’ 하고 밝히는 데가 있을까? 없다. 도서관이나 큰 새책방에서는 ‘사진을 못 찍게 가로막’는다. 왜 그러할까? 왜 도서관이나 큰 새책방에서는 사진을 찍지 말라고 할까? 도서관과 큰 새책방에 찾아온 책손한테 거슬리기 때문이다. 책을 누리는 다른 사람한테 성가시거나 귀찮기 때문이다.


  책을 소품으로 삼는 일은 나쁘지도 좋지도 않다. 소품으로 삼으려면 얼마든지 삼을 만하다. 다만, 책을 책으로 바라보지 않고 소품으로만 여긴다면, 책을 눈앞에 두고도 책을 펼칠 줄 모른다면, 수박이나 능금이나 딸기를 수박이나 능금이나 딸기로 여기지 않고 소품으로만 삼는다면, 무슨 재미나 보람이 있을까.


  수박이나 능금이나 딸기를 소품으로 삼아 멋있게 사진으로 찍을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여러 날 소품으로만 삼으면, 어느새 이 열매는 흐물흐물 늘어진다. 일본사람 기무라 아키노리 님이 숲을 가꾸며 거둔 ‘기적 사과’가 아니고서야, ‘소품이 되는 열매’는 모두 못 먹어서 버려야 한다.


  책은 열매처럼 쉬 곯거나 썩지는 않는다. 그러나, 책을 소품으로만 여기면, 책은 종이라서 바스라진다. 먼지가 더께로 바뀐다. 무엇보다, 책에 깃든 아름다운 알맹이를 못 받아먹는 사람 스스로 아름다움하고 동떨어진다.


  책은 무엇인가? 책은 책이다. 참말, 책은 책이다. 책을 책으로 여길 수 있을 때에 책이 빛난다. 밥을 밥으로 여기고, 숲을 숲으로 여기며, 사람을 사람으로 여기고, 아이를 아이로 여기며, 이웃을 이웃으로 여기는 마음결을 살려서, 책을 책으로 여길 줄 아는 마음을 가꿀 때에 사랑이 자란다. 4347.11.19.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헌책방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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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판 바꾸면 헌책방 살아나는가?



  책방을 찾는 사람은 간판을 보고 찾아가지 않는다. 책방에 깃든 책을 보려고 책방에 간다. 그런데, 공무원이 책방을 돕겠다면서 하는 일이란 ‘간판 바꾸기’이다. 이명박이라고 하는 분이 서울시장으로 있을 적에 ‘청계천 살리기’를 한다면서 서울 청계천 둘레에 있던 헌책방 간판을 새 것으로 갈아 주었다. 그리고, 올해 2014년에 네이버라는 회사에서 이곳 서울 청계천 헌책방 간판을 새것으로 갈아 주었단다. 헌책방에서 쓰던 간판이 한글이 아니었는가? 그동안 모두 한글 간판을 붙였을 텐데, 네이버에서 한글날을 맞이해서 ‘한글 간판’으로 바꾸었다면서 홍보를 하니 아리송하기만 하다. 처음부터 한글이던 간판을 ‘다른 한글 간판’으로 바꾼 일이 얼마나 대단한가? 게다가 ‘청계천 살리기’를 한다면서 제법 돈을 들여 바꾼 간판이 얼마나 낡았다고 벌써 새 간판을 올려야 했을까? ‘오래된 책방 간판’은 역사나 문화가 아니라는 뜻인가?


  헌책방을 돕고 싶다면 ‘간판 갈기’ 같은 일은 안 하기를 바란다. ‘책방 간판 갈기’는 도시에서 ‘보도블록 새것으로 갈기’하고 똑같은 일이다. 간판 바꿀 돈이 있으면, 이 돈으로 책방 임대료를 돕는 데에 쓸 수 있기를 바란다. 또는, 헌책방 문화를 살릴 수 있는 잡지나 단행본을 내는 데에 돈을 쓰기를 바란다. 또는, 헌책방 영업을 배우고 싶은 젊은이를 키우는 데에 돈을 쓰기를 바란다. 4347.10.14.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헌책방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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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treeje 2014-10-14 22:32   좋아요 0 | URL
예, 정말 맞는 말씀이세요.
`책방 간판 갈기`는 도시에서 `보도블록 새것으로 갈기`.
참 어처구니 없고 기가 막힌 일이죠...
멀쩡한 걸 죄다 뜯어내고 엉뚱한 짓이나 벌이는 삽질들,,,

숲노래 2014-10-15 00:52   좋아요 0 | URL
간판 갈이를 하고서
서울시장하고 네이버 대표하고...
신나게 사진놀이를 하고 손바닥그림도 찍고...
온갖 것을 다 하시던데,
그런 무대에서
정작 `청계천 헌책방거리 사장` 가운데
어느 분 얼굴도 볼 수 없었습니다...
 

헌책방은 ‘지저분하다’는 잘못된 생각



  헌책방은 책먼지 때문에 지저분하다고 생각하는 이가 꽤 있다. 그런데 이들은 하나도 모르고 둘도 모른다. 그러면, 도서관은 안 지저분할까? 도서관에 와서 책을 빌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도서관 책들은 얼마나 오랫동안 책꽂이에 꽂아 놓는가? 도서관은 책꽂이를 얼마나 자주 닦으면서 먼지를 털거나 없애는가? 한편, 새책방은 안 지저분할까? 새책방에서 일하는 사람들치고 면장갑을 안 끼는 사람은 없다. 새책을 다루면서 면장갑을 안 끼면, 책을 나르다가 날카로운 책등이나 책종이에 긁혀서 피가 나기 일쑤이다.


  새로 나온 책에도 책먼지가 많다. 새책에서 나오는 먼지는 하얗다. 외려 헌책에는 새책보다 먼지가 적다. 왜 그런가 하면, 새책을 누군가 사서 읽으면, 이동안 책먼지가 천천히 날아간다. 한 번 읽은 책은 아예 안 읽은 책과 견주면 먼지가 적다. 두 번 읽은 책은 한 번 읽은 책보다 먼지가 적다. 세 번 읽은 책은 두 번 읽은 책보다 먼지가 적다.


  헌책방에 있는 책에 왜 먼지가 있다고 여길까? 헌책방에 들어오는 책에는 왜 먼지가 많이 묻는다고 여길까?


  책이 흐르는 모습을 살펴야 한다. 헌책방에서는 출판사한테 연락해서 책을 받지 않는다. 새책을 사서 읽은 사람이 내놓을 때에 헌책이 되어 헌책방에 책이 들어간다. 그러니, 새책을 사서 읽은 사람이 책을 지저분하게 팽개치듯이 두다가 내놓으면, 이런 책은 하나같이 지저분하다. 새책을 사서 읽은 사람이 정갈하게 건사한 뒤 내놓으면, 이런 책은 아주 깨끗하면서 먼지를 찾아보기도 매우 어렵다.


  무슨 뜻인가 하면, 한국에서 새책을 사서 읽는 사람들이 책을 제대로 건사하거나 다루지 않는 탓에, 헌책방에 들어오는 헌책이 지저분하기도 하다는 뜻이다. 헌책방을 탓할 일이 아니라, ‘책을 사서 읽는 사람들 매무새’를 탓할 일이다. 잘 보라. 헌책방에 책을 내놓는 사람들은 으레 어떻게 하는가? 오랫동안 쳐다보지 않고 들추지 않은 책을 그냥 묶거나 상자에 담아서 헌책방에 가져간다. 헌책방에 책을 내놓으면서 ‘집에 고이 모시느라 그동안 쌓인 먼지’를 알뜰히 닦아서 가져가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헌책방 일꾼은 모두 안다. 책먼지를 닦고 가져오는 책인지, 집에 팽개친 뒤 ‘처분’하려고 가져오는 책인지 척 보면 안다. 책먼지를 닦고 고이 가져오는 책은, 책손 스스로 정갈하게 묶거나 상자에 담는다. 책먼지를 안 닦고 팽개친 책을 헌책방에 팔려고 가져오는 이들은 아무렇게 묶거나 아무렇게나 담는다. 책을 팔려고 가져온 사람 스스로 보기에도 ‘책먼지가 지저분해 보이’니 그야말로 아무렇게나 다룬다.


  자, 그러면 헌책방 일꾼은 이 책을 어떻게 받을까? 책을 하나하나 알뜰히 닦고 곱게 건사해서 가져오는 사람이 있으면, 헌책방 일꾼은 ‘똑같은 책이라 해도 더 값을 치러서 사들여’ 준다. 책을 아무렇게나 더럽힌 채 마구 가져오는 사람이 있으면, 헌책방 일꾼은 ‘똑같은 책이라 해도 그냥 싸게 값을 매겨서 사들인’다.


  새책을 쌓아 놓는 창고에 가 본 사람이 드물리라. 출판사 영업부에서 일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배본소나 도매상에 가 본 일이 드물겠지. 배본소나 도매상에 갈 수 있다면, 가 보기를 바란다. 배본소 일꾼이 날마다 얼마나 어마어마하게 ‘새책 먼지’를 마시면서 기관지를 앓는지 들여다보라. 도매상에도 얼마나 책먼지가 많이 날리는지 살펴보라. 새책을 다루는 창고는 책먼지 때문에 모두 면장갑에 입가리개를 한다. 이렇게 안 하면 숨이 막히고 코가 막히며 눈이 냅다.


  헌책방이 지저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참 잘못 보는 사람이다. 책을 알뜰히 다루는 사람은 언제나 정갈하고, 책을 마구 다루는 사람은 언제나 지저분할 뿐이다. 4347.9.17.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헌책방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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