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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사 9
우루시바라 유키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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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YukiUrusibara #蟲師 #むしし #漆原友紀


숲노래 푸른책/숲노래 만화책

- 버려야 할 마음



《충사 9》

 우루시바라 유키

 오경화 옮김

 대원씨아이

 2008.5.15.



  학교에서도, 사회에서도, 강의에서도, 책에서도, 흔히들 “욕심을 버려라” 하고 말합니다. 어릴 적부터 이런 말을 익히 들었습니다. 어릴 때나 요즘이나 매한가지로 느끼는데, 이런 말은 우리 마음에 피어날 싹을 싹둑 끊는구나 싶습니다. 저는 우리 아이들이나 이웃이나 동무한테 “욕심을 버려!” 따위는 말하지 않습니다.



“그럼 아카네는 그 후, 어떻게 된 거요?” “글쎄요. 어쩌면, 할머니처럼 누군가와 뒤바뀌어 어디에선가 살고 있지 않을까요?” (29쪽)



  한자말 ‘욕심(欲心)’을 표준국어대사전은 “분수에 넘치게 무엇을 탐내거나 누리고자 하는 마음”으로 풀이합니다만, ‘欲’이라는 한자는 ‘貪’이란 한자가 아닙니다. 둘은 다르지요.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까? ‘욕심 = 탐내는 마음’으로 풀이한 사전이 알맞나요? 욕심이란 그저 ‘욕 + 심’입니다. 한자 ‘욕’은 “하고자 하다”를 가리킵니다. 이 한자는 ‘좋아하다’를 가리키지요.


  자, 그럼 수수께끼를 풀었을까요? 아니, 이 수수께끼를 스스로 풀어 보시기 바랍니다. 똑똑히 보고 똑똑히 알아보면 좋겠습니다. “욕심을 버려라 = 하고자 하는 마음을 버려라”란 뜻입니다.



“너는 어째서, 계속 그 상태인 거냐? 그래, 넌, 차마 밟지 못한 거구나. 마음씨가 비단결처럼 고운 아이였으니까. 미안해. 난, 네 그림자를 밟은 아이와, 부부가 됐어.” (47쪽)



  예부터 ‘나라(국가)’나 ‘터(사회)’를 세워서 우두머리에 오르고 벼슬아치를 거느리며 구실아치를 부리는 이들은 하나같이 ‘말’로 장난질을 칩니다. 요즈막 우두머리·벼슬아치·구실아치가 치는 말장난 가운데 하나는 “피해 호소인·피해 고소인”입니다. 참 웃기지요. 말인가요, 불낙인가요?


  우리는 “욕심을 버려”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우리가 버려야 할 마음이 하나 있다면 “탐내지 마라”이겠지요. 다만, 저는 이런 말은 안 쓰고 싶습니다. 어린이가 알아듣기에 너무 어렵습니다. 저는 어린이하고 어깨동무하는 말을 쉽게 쓰고 싶습니다. 그래서 “욕심 ○, 탐심 ×”가 아닌 “꿈꾸렴, 시샘하지 말고.”처럼 이야기합니다. “꿈을 그리자, 남을 부러워하지 말고.”처럼 보탭니다.



“네가 그랬지? 벌레에겐 벌레만의 사정이 있다고. 자기 형편에 맞춰 그걸 비틀어버리면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돼. 그 능력을 어떻게 써먹을지는 너 자신에게 달렸다.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해.” (86쪽)



  벌레가 있으니 벌레잡이가 있는지 모릅니다. 《충사 9》(우루시바라 유키/오경화 옮김, 대원씨아이, 2008)은 벌레하고 벌레잡이 사이를 그립니다. 모두 열 자락으로 이야기를 마무르는 만화책인데, 막판에 이른 아홉걸음을 보면 ‘잡이’가 어떤 구실인가를 새삼스레 되짚어 줍니다.


  벌레잡이란 이름에서 ‘잡다’는 무엇일까요? ‘잡아서 죽이다’라는 잡다일는지요, ‘길을 잡다’라는 잡다일는지요. 우리는 어떤 잡다(잡이)로 나아갈 적에 스스로 빛나는 노래가 될 만한가요.


  칼잡이라 할 적에는 두 갈래가 있습니다. 첫째는 칼을 마구 휘둘러서 사람을 잡아 죽이려는 싸울아비가 있겠지요. 둘째는 칼을 알맞게 다잡고 다스리는 부엌님이요 정지님이 있어요. 잡아서 죽이려는 마음일 적에는 스스로 사납고 무서우며 곁에 동무가 없습니다. 알맞게 다잡거나 다스리려는 마음일 적에는 스스로 이웃나눔을 하는 밥짓기에 살림짓기로 나아가니 곁에 동무가 있습니다.



“널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 네가 돌아가야 할 곳이야. 저 하늘 너머에, 널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 매일같이 밥상을 차려놓고 기다리는 엄마. 인형을 숨겨 놓고 같이 놀아 주는 언니. 기억해라. 여긴, 네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니야.” (115쪽)



  벌레잡이는 벌레를 족치는 길이 아닙니다. 벌레잡이는 벌레한테서 푸른별 얼거리를 배우는 길입니다. 모름지기 뭇사람은 마구 휘두르는 칼잡이가 아닌, 한집안을 사랑으로 보듬는 부엌지기라는 칼잡이로 나아갈 노릇입니다.


  통통통 도마질을 노랫가락으로 바꾸어 내는 칼잡이가 되기에 아름답습니다. 토도독 채썰기를 노래잔치르 펼쳐 보이는 칼잡이로 살림하기에 사랑스럽습니다.


  우리가 어른이라면 어린이한테 아름다운 길을 밝혀야겠지요. 우리가 어버이라면 푸름이한테 사랑스러운 살림을 물려주어야겠지요. 우리가 어른이라면 “피해 호소인”이라는 말장난을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버이라면 “피해 고소인”이라는 말장난으로 핑계질을 일삼지 않습니다. 어른은 슬기로울 뿐 아니라 아름답게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어버이는 사랑스러울 뿐 아니라 즐거이 노래하는 사람입니다.



“엄마.” “왜?” “강은 어디서 와?” “산속 계곡에서 흘러내려오는 거야.” “계곡물은 어디서 와?” “하늘의 구름에서 떨어져.” “그럼 하늘의 구름은?” “바다에서 태어나지.” “바다?” “이 강이 마지막에 도달하는 곳. 물이 굉장히 많은 곳이야.” “많아? 얼마나?” “으음, 엄마도 아직 한 번도 못 봤는데.” (156∼157쪽)


“눈에 보이는 사방이 전부 물이래.” “우와. 그럼, 바다도, 강도, 비도, 구름도, 다 똑같네?” “그래. 모양은 달라도 전부 똑같아.” “그렇구나.” (158쪽)



  그 어떤 말장난도 노래가 되지 않습니다. 그 어떤 말치레도 사랑이 되지 않습니다. 모든 말장난은 이 말장난을 일삼는 사람부터 갉아먹습니다. 모든 말치레는 이 말치레를 듣고서 좋아하는 사람부터 무너뜨립니다.


  이제 ‘욕심·꿈’하고 ‘탐심·시샘(부러움)’ 사이를 다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글을 잘 쓰겠다는 욕심을 부리지 마라” 같은 생각이라면 글은 죽어도 못 쓰기 마련입니다. 말뜻을 제대로 어림하시겠나요? “글을 잘 쓰겠다는 탐심을 부리지 마라” 같은 생각이라면 글이 술술 흘러나오기 마련입니다. “스스로 하루를 즐겁게 살아내고, 이 즐거운 노래를 언제나 스스럼없이 펼치고 싶다는 꿈을 그린다”면 글이든 그림이든 사진이든 춤노래이든, 또 사랑이든 살림이든 일놀이나 그 어떤 길이라 하든 솔솔 풀린다고 생각합니다.


  시샘이나 부러움은 으레 미움이나 밉질로 흐릅니다. 시샘이나 부러움은 어느새 따돌림이나 괴롭힘질로, 또 등돌림이나 콧방귀로 흐릅니다. 때로는 팔짱을 끼겠지요.



“유타. 넌 지금 어디에 있니? 강이니? 바다니? 비니? …… 그래. 넌 어디에든 다 있는 거야.” (187∼188쪽)



  꿈이 없다면 죽은 넋입니다. 꿈을 그리지 않으면 죽은 몸입니다. 꿈이 있기에 싱그러운 넋입니다. 꿈을 그리기에 산뜻하게 피어나는 꽃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빛나는 꽃으로 피어날 씨앗을 마음에 품고서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여깁니다.


  다만, 말장난이나 말치레를 그치지 않으면 씨앗은 안 깨어납니다. 기쁘게 살림하고 즐겁게 사랑하면서 오늘 하루를 꿈으로 그리려는 마음이라면 씨앗은 시나브로 깨어납니다.



‘아마도 한 번 가면 돌아올 수 없는 곳이겠지. 저곳은. 그래도 상관없어. 어차피 내겐 있을 곳 따윈 없으니까.’ (224쪽)


“이 세상에 있어선 안 되는 장소 따윈 아무한테도 없어. 그건 너도 마찬가지야. 이치가 돌아가도록 허락해 줬잖아. 이 세상 모두가 네가 있어야 할 곳이다.” (234∼235쪽)



  애쓰지 않으면 좋겠어요. 애쓰지 말고 사랑하셔요. 힘쓰지 않아도 됩니다. 햄쓰지 말고 노래하셔요. 사랑으로 마주하면 어떤 일이든 스스로 뜻하는 대로 나아갑니다. 노래로 맞아들이면 어떤 고비가 굴레나 수렁이나 울타리라도 사르르 녹이면서 서로 새롭게 어깨동무하는 숲으로 나아갑니다.


  버려야 할 마음인 ‘시샘·부러움’입니다만, 더 생각하면 굳이 안 버려도 됩니다. ‘시샘·부러움’이 우리한테 찾아왔다면, 이런 마음이 찾아올 적에 우리가 어떤 하루가 되는지를 가만히 보면 좋겠어요. ‘시샘·부러움’이란 마음이 있으면서 환하게 웃거나 곱게 사랑할 수 있는가를 살펴보면 좋겠어요. 어떤 마음이 찾아오든 새삼스레 배웁니다. 기꺼이 배우면서 넉넉히 펼칠 적에 ‘사람’이 됩니다.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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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사전을 쓰고 “사전 짓는 책숲(사전 짓는 서재도서관)”을 꾸린다. 1992년부터 이 길을 걸었고, 쓴 책으로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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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사 애장판 3
우루시바라 유키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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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kiUrusibara #蟲師 #むしし #漆原友紀

숲노래 푸른책/숲노래 만화책
민주당 정치독


《충사 3》
 우루시바라 유키
 오경화 옮김
 대원씨아이
 2005.8.15.


  사람이 둘 죽습니다. 한쪽은 때린이인데, 때린짓을 감추려고 죽습니다. 또 한쪽은 맞은이인데, 더 맞고 싶지 않으려고 죽습니다. 때린짓을 감추는 이 곁에는 이 때린짓을 감추어 주는 이들이 물결칩니다. 때린이가 무서워 스스로 죽음길로 간 맞은이는 이 물결치는 주먹질이며 윽박질을 견디기 어려웠다고 여기고 맙니다.


“이 목소리, 무서운 목소리예요. 그래서 망가뜨려 버리려고. 그 동굴에서 이런 목소리가 될 때까지 소리를 질렀어요.” (18쪽)


  “사람은 얼마나 올바른가?” 하고 묻는다면 “글쎄요.” 하고밖에 할 말이 없습니다. 정치·경제뿐 아니라 사회·문화에다가 교육·종교 모두 매한가지인걸요. 더구나 문학·예술마저 “글쎄요”란 말이 아니고서는 말하기 어렵습니다.
  정치를 볼까요. 저쪽에서 빈틈이나 잘못을 보이면 후벼파려고 합니다. 이쪽에서 빈틈이나 잘못이 드러나면 입을 씻거나 모르쇠이거나 딴청을 하거나 핑계를 댑니다. 경제를 봐요. 길미하고 돈에 따라 움직입니다. 사회나 문화나 교육이나 문학을 이루는 틀거리도 ‘내 쪽 네 쪽’이기 마련이고, ‘울타리 안팎’을 가릅니다.


“전에 만났을 땐, 아내의 유품이 발견된 시점에서 이미 살아갈 희망을 다 잃어버린 것처럼 보이던데.” “지금은 다르오.” (77쪽)


  제넋으로는 사회살이를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넋을 버려야 사회살이를 할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정치를 비롯해 문학까지, 옳은길이 아닌 ‘시키는 길’에 맞추어 흐릅니다. 옳은길을 바라보려는 이라면 어느새 사회란 곳을 떠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사회라는 곳은 틀을 세워서 이 틀을 고분고분 말없이 따를 적에는 떡고물을 주지만, 이 틀을 깨거나 없애어 누구나 스스럼없이 노래하는 아름터가 되기를 꿈꾸는 이를 내치거나 자르거나 괴롭히거든요.

  푸른별에서 사람 곁에 있는 ‘벌레’를 들려주는 《충사 3》(우루시바라 유키/오경화 옮김, 대원씨아이, 2005)입니다. ‘벌레’란 이름을 붙입니다만, 꼭 벌레라고만 하기는 어렵습니다. ‘깨비(도깨비)’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벌레’란 이름을 받은 그 숨결이 ‘사람’을 바라본다면, ‘벌레란 이름인 숨결이 보기에 사람이란 이름인 숨결이야말로 벌레’로 여길 만합니다.


“괴롭더라도 드세요. 내 생명을 당신이 먹어 줄 거라 생각하니, 왠지 죽음도 두렵지 않아요.” (123쪽)


  오늘 우리는 여태 본 적 없는 나라를 봅니다. 때린이가 우쭐거리면서 힘이며 돈이며 이름을 고스란히 거머쥐고 윽박지르는 나라를 봅니다. 왜 ‘정치권력’이라 하겠어요? 맘대로 휘두를 수 있으니 이런 이름입니다. 왜 서울로 몰리도록 나라를 다스리겠어요? 좁아터진 서울로 들어가는 틈바구니에서 사람들 스스로 다툼질을 하도록 판을 벌여 놓아야 군소리도 딴소리도 쑥 들어가거든요.

  정치권력이나 돈이나 이름이 없는 집에서 태어난 사내는 군대살이를 뼈빠지게 할 뿐 아니라, 군대에서 픽 쓰러져 죽곤 합니다. 정치권력에 돈에 이름이 있는 집에서 태어난 사내는, 이등병이어도 탱자탱자할 뿐 아니라, 군인이면서 대학교에도 다닌다지요.

  정치권력을 거머쥔 그들을 똑똑히 보아야 합니다. 그들이 내건 ‘정당 이름’이 아닌, 그들이 낱낱이 보여주는 모습을 똑바로 보아야 합니다. 그들은 입시지옥을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대학교수하고 알음알음 짬짜미로 얼마든지 졸업장 따위야 쉽게 얻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입시지옥은 나몰라라 하면서 나라밖으로 목돈 들여 그들 딸아들을 내보내지요.

  입시지옥이 안 사라지는 까닭을 생각해야 합니다. 입시지옥을 그대로 두어야 ‘이 나라를 이룬 여느 사람들’, 거의 모든 사람들, 바로 우리들이 그 입시지옥을 바라보고 생각하고 쳐다보느라 권력자 허튼짓을 따지거나 살필 겨를이 없어요. 여느 사람들이 입시지옥에서 헤매 주어야, 여느 집안에서 자라는 어린이·푸름이가 동무를 밟고 올라서는 다툼질에 익숙한 길을 갑니다. 따져야 할 놈은 정치권력이지만, 입시지옥에서 헤매는 사이에 뜬금없이 ‘이웃밟기’에 길든 나머지, 화살을 어느 과녁에 쏘아야 하는가를 잊어버리고 맙니다.


“벼루를 부순다는 건, 아직 이 안에 잠들어 있는 벌레까지 죽이는 짓이잖아.”“음, 그야 그렇지만, 보시오. 벌레에겐 아무 죄도 없어요.” “그리고 이 벼루, 부셔 버리기엔 너무 아름답지 않소? 당신에게도 자기 자식 같은 벼루 아니오?” (177쪽)


  아무리 농약을 친다 한들 풀은 안 죽습니다. 더구나 농약으로 풀을 모조리 죽이려 든다면, 사람도 죽어버리지요. 풀에 친 농약은 언제나 사람한테 고스란히 들어가는걸요. 농약이 사람한테 이바지한다면 구태여 ‘무농약·저농약·친환경·자연농’이란 이름을 붙일 까닭이 없겠지요. 항생제가 사람한테 좋다면 ‘무항생제’란 이름을 굳이 내세울 일이 없겠지요.

  생각하지 않으면 정치권력이 휘두르는 대로 휩쓸립니다. 《충사》는 이 대목을 ‘벌레·벌레잡이’ 사이를 줄거리로 삼아서 넌지시 이야기합니다. 이 푸른별에서 사라져야 할 벌레란 있을 수 없습니다. 이 푸른별에서 파리·모기가 모조리 사라지면 어떤 일이 벌어질는지 생각 좀 해야 합니다. 파리·모기를 미워한대서 푸른별이 깨끗해지지 않아요. 외려 파리·모기가 사라지면 이 별은 끔찍한 쓰레기판이 되어 버립니다.

  지렁이가 징그럽나요? 그대한테 징그러운 지렁이가 없으면 그대는 밥을 굶어야 합니다. 벌레가 싫고 거미가 무서운가요? 벌레나 거미가 없으면 ‘사람이 세운 모든 문명’은 하루아침에 무너집니다.


“존재방식은 다르지만, 단절된 존재는 아니야. 우리 생명의 다른 형태지.” (195쪽)

“두려움이나 분노가 눈을 가리도록 놔두지 말아. 모두 각자의 존재방식대로 존재하는 것뿐. 피할 수 있는 것은, 지혜를 가진 우리가 알아서 피하면 돼. 충사란, 아주 오랜 옛날부터 그 방법을 찾아 헤매온 자들이란다.” (215쪽)


  나무가 없는, 게다가 시늉으로 심은 나무조차 함부로 가지치기를 해버리는, 그런 메마른 큰고장에서는 바람이 매캐합니다. 한밤에 별빛 아닌 전깃불빛이 가득한 큰고장에서는 사람들이 언제나 머리가 지끈지끈합니다. 무시무시하게 떠돈다고 하는 요즈막 돌림앓이를 생각해 보셔요. 나무가 우거지고 숲이 아름다운 터전에서 그 돌림앓이에 걸린 사람이 하나라도 있는지요?

  학교를 제대로 열고 싶다면, 꽉 막힌 시멘트집이 아니라, 탁 트인 숲이나 들에 열 노릇입니다. 사회를 이루고 큰고장이 살기 좋도록 하자면, 찻길을 확 줄이고 자동차가 확 없애면서, 그 자리에 나무를 줄줄이 심고, 10층이 넘는 집은 모조리 치우면서 숲을 가꿀 노릇입니다. 좁은 터에 사람들이 우글우글할 수밖에 없는 판으로 키워 놓고서, 이런 곳에서 돌림앓이가 안 퍼지기를 바란다면, 그야말로 엉터리가 아닌가요? 나라 곳곳이 고르게 흐르도록 살림을 가꾸지 않으니 돌림앓이뿐 아니라 입시지옥에 갖가지 썩어문드러진 짓이 잇따르지 않나요?

  한두 정치무리한테 너무나 커다란 힘을 얹어 주니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요? 우리는 이 막짓을 오늘 코앞에서 하나하나 마주할 수 있습니다. ‘박정희 군사독재’를 나무란 그들이 ‘민주당 정치독재’를 한가득 펼쳐 보이는 요즈음입니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사전을 쓰고 “사전 짓는 책숲(사전 짓는 서재도서관)”을 꾸린다. 1992년부터 이 길을 걸었고, 쓴 책으로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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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종일각 신장판 7
다카하시 루미코 지음, 김동욱 옮김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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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たかはしるみこ #高橋留美子 #めぞん一刻


숲노래 만화책/숲노래 푸른책

눈치 보거나 부끄러울 겨를



《메종 일각 7》

 타카하시 루미코

 김동욱 옮김

 서울미디어코믹스

 2020.3.30.



  열 살이란 나이를 살아가는 작은아이를 샛자전거에 태우고 함께 마실을 합니다. 2020년에는 열 살인데, 앞으로 열다섯 살도 스무 살도 살아가겠지요. 머잖아 맞이할 작은아이 열다섯 살은 오직 그 한 해뿐입니다. 스무 살도 바로 그 한 해뿐이에요. 더 지나 서른 살이나 마흔 살도 딱 한 해뿐이요, 쉰 살이며 예순 살도 그저 한 해뿐입니다.


  흔히들 푸릇푸릇한 열 살이나 스무 살만 ‘한 해뿐’이라 여기지만, 무르익는 서른 마흔 쉰도, 깊이 물드는 예순 일흔 여든도 오롯이 ‘한 해뿐’입니다. 우리는 열 살 어린이로 살든 아흔 살 어른으로 살든 언제나 ‘한 해뿐’인 나날을 처음으로 맞아들이면서 새롭고 즐겁게 누릴 숨결입니다.



“유사쿠, 고맙구나.” “아…….” “정말 즐거웠다.” (6쪽)



  자전거 발판을 구르는 아이는 졸거나 잠들지 않습니다. 눈이 반짝반짝 이마에 땀이 비질비질 온몸은 이리저리 춤추어요. 이와 달리 자가용을 얻어타는 아이는 이내 졸거나 잠들지요. 어른도 매한가지입니다. 시외버스를 한나절 달린다든지 비행기를 하룻내 날 적에 신나서 바깥구경을 하거나 춤출 만할까요?


  나라 곳곳을 꿰뚫거나 가로지르는 빠른길이 나쁘다고 여기지는 않습니다만, 그 빠른길을 달리며 얼마나 즐겁거나 신나서 춤추고 노래할 만할까 궁금해요. 빠른길을 200킬로미터로 달리며 노래할 수 있는지요? 이렇게 달리다가는 딱종이를 뗄 텐데, 딱종이는 둘째치고 200∼300킬로미터로 달리면 아슬아슬해서 노래고 춤이고 생각할 겨를이 없겠지요. 120킬로미터로 달려도 마찬가지입니다.


  빠른길 아닌 여느 찻길에서도 골목이라면 30킬로미터조차 대단히 빠른 셈이라, 샛골목에서 나올 사람을 눈을 밝혀 살펴야겠지요. 자, 더 생각해 보기로 해요. 자가용 손잡이를 잡고 싱싱 달리면서 콧노래를 부르거나 춤을 출 만한가요?



“정 그러시다면 먼저 들어가서 쉬시는 게…….” “그럴 수는 없어요.” ‘여기서 내가 없어졌다간 분명 밤을 새서 놀 거야. 하지만 내가 있어도 딱히 다르진.’ (11쪽)



  아버지 뒤에서 샛자전거에 앉은 작은아이더러 “얘야, 넌 손잡이 안 잡아도 돼. 아버지가 앞에서 든든히 달리잖니. 너희 누나랑 아버지랑 이 자전거를 탈 적에 너희 누나는 거의 손잡이를 안 잡고 두 팔을 활짝 벌리고 바람을 먹고 구름하고 놀았단다.” 하고 들려줍니다.


  튼튼자전거에 샛자전거를 달아 세바퀴로 달립니다. 작은아이가 갓난쟁이일 적에는 수레를 더 붙여서 수레에 누여 다녔어요. 이제 두 아이 모두 의젓하게 자랐으니 수레는 작아서 못 쓰지만, 작은아이는 샛자전거에 앉아 제법 멀리 마실을 다닐 만합니다. 눈을 감고 팔을 벌립니다. 큰고장 찻길이라면 엄두를 못 낼 노릇이지만, 시골 들길에서는 그저 자전거만 있으니 홀가분히 팔을 벌려 바람을 안습니다. 눈을 뜨고서 구름을 같이 품습니다. 멧자락에 내려앉은 구름처럼, 구름 사이로 보이는 새파란 하늘빛처럼, 우리 두 다리는 오늘 새 이야기를 적바림합니다.



“잘 챙겨 드리시네요.” “이이가 아프기라도 하면, 내일부터는 나도 집에서 놀면서 술이나 마실 수가 없잖아.” (40쪽)



  이웃 일본에서는 2500만이 넘도록 팔린 만화책이라는 《메종 일각 7》(타카하시 루미코/김동욱 옮김, 서울미디어코믹스, 2020)을 읽습니다. 제법 긴 꾸러미라지만 2500만이라면 장난이 아니지요. 이 만화를 그린 분이 선보인 다른 만화책 《란마 1/2》이나 《이누야샤》는 그보다 더 팔렸다고 합니다.


  무슨 이야기를 다루기에 이토록 읽힐까요. 《메종 일각》은 ‘일각관’이라는 낡은 나무집에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다루는데요, 그냥그냥 흔한 살림살이입니다. 오래된 나무집에 깃든 다 다른 사람들은 마을 아저씨요 아줌마이고, 마을 어린이에 마을 젊은이입니다. 이뿐입니다.


  그저 수수한 사람들이 복닥이는 하루를 그릴 뿐이지만, 이 수수한 사람들 사이에서 흐르는 ‘오늘 하루는 어제하고 다르니, 오늘을 오늘대로 즐겁게 살자’고 하는 마음을 차근차근 짚어냅니다.



“코즈에 씨가 떠준 거죠?” “아, 네.” “그렇게 살금살금 가릴 것 없는데.” ‘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이런 걸 보면 엄청나게 히스테리를 부리면서.’ (81쪽)



  낡은 나무집에 깃든 젊은이는 이 나무집을 돌보는 지기님, 이른바 ‘돌봄이(관리인)’를 짝사랑하면서, 대학교에서 만난 아가씨하고 만나는, 다시 말해 ‘두 다리’입니다. 돌봄이인 분은 고등학교를 마치고 짝을 맺은 분이 있으나, 이분이 일찍 저승으로 갔다지요. 저승으로 일찍 떠난 님을 잊고 싶지 않은 마음이 짙으면서도, 앞으로 긴긴 나날을 어떻게 살아가면서 스스로 달래면 좋을는지 어지럽기도 합니다.


  이 두 사람이 얽히고 맺다가 풀어지고 다시 얼크러지는 줄거리가 복판에 있습니다만, 이 둘을 둘러싼 숱한 사람들이 새삼스레 얽히고 맺다가 풀어지고 다시 얼크러지는 줄거리가 거미줄처럼 튼튼하면서 부드럽게 이어갑니다.


  거미줄이라 할 만합니다. 끈끈하면서 가볍고, 튼튼하면서 쉬 끊어질 듯 보이기도 합니다. 이러면서 해맑은 빛살을 품은 끈이요, 이슬이 맺히면 이슬이 아롱다롱 빛나는 거미줄마냥 눈부시지요. 새가 푸드덕 지나가면 툭 끊어져 헐렁한 거미줄처럼 때로는 서로서로 으르렁대거나 툭탁거리면서 후줄근해요.



“저를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신다면, 질투 같은 건 그만 좀 하세요!” “제, 제가 언제 질투를.” “실은, 실은 오늘요, 코즈에랑 헤어질 생각이었어요.” “그럼 왜 스웨터 같은 걸 받아온 거예요!” “그럼 거절하란 건가요? 관리인 님도 누군가에게 주려고 뜨개질을 한 적이 있을 거 아녜요?” (83쪽)


“이젠 눈치 보거나 부끄러워할 겨를도 없나 봐.” “온 동네에 다 들리게 생겼네.” (83쪽)



  눈치를 봐야 할 삶이 아닙니다. 눈길을 다스릴 삶입니다. 눈치에 매여야 할 삶이 아니에요. 눈빛을 밝힐 삶입니다. 잘못을 저질러서 부끄러울 수 있어요. 그러나 잘못을 저질렀으니 깊이 뉘우치고서 새로 일어서면 됩니다. 잘못한 만큼 값을 치르고서 씩씩하게 거듭난다면 한결 어엿하면서 믿음직하기 마련입니다.


  눈치를 보니 달아납니다. 눈치에 매이니 굽신거립니다. 잘못을 감추려 드니 자꾸 감춤질이 잇달아요. 잘못을 뉘우치면서 값을 달게 치를 마음이 못 되니 다시금 새롭게 잘못을 저지르는 수렁에 사로잡힙니다.



“미타카 씨, 목발 좀 빌려 줘요.” “응? 어떻게 된 거야.” “아하하, 전철 안에서 깜빡했지 뭐예요.” “그랬군, 잘했어.” “우리∼, 꼭 한소리 해주자고요.” “후후후, 놀란 얼굴이 눈앞에 선한걸∼.” (205쪽)



  어디로 가든 길입니다. 자가용을 장만해서 씽씽 달려도 길이요, 자전거를 마련해서 아이를 태우고 느긋느긋 노래하며 숲길을 달려도 길입니다. 어느 길이 더 낫거나 훌륭하거나 좋다고 가를 마음은 없습니다. 그저 우리 나름대로 맞아들이면서 겪어 보는 길일 뿐입니다.


  다만 하나는 말하고 싶어요. 어느 길을 가더라도 스스로 깎아내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 길을 가든 저 길을 보든 망설이지 않기를 바라요. 어느 쪽에 서면서 나아가든 온마음을 다하면서 신나게 노래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길을 달려 보았으면 이제 그 길은 접어도 좋아요. 다른 길을 스스로 찾아봐요. 새로운 길을 스스로 내기로 해요.


  똑같은 길에서 쳇바퀴질을 하지는 않으면 좋겠어요. 모든 길을 환한 노래로 맞이하면서 덩실덩실 춤추는 가벼운 걸음걸이가 되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웃고 노래하려고 이 땅에 태어난걸요.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사전을 쓰고 “사전 짓는 책숲(사전 짓는 서재도서관)”을 꾸린다. 1992년부터 이 길을 걸었고, 쓴 책으로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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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게게의 기타로 4
Mizuki Shigeru 지음, 김문광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10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숲노래 푸른책/숲노래 만화책

너는 어떤 사람이니



《게게게의 기타로 4》

 미즈키 시게루

 김문광 옮김 

 AK 커뮤니케이션즈

 2010.2.18.



  놀이를 하는 아이는 풀꽃을 함부로 안 꺾습니다. 함께 노는 아이들은 나뭇가지를 함부로 다루지 않습니다. 풀꽃을 함부로 꺾는다든지, 발밑에 있는 풀꽃을 아무렇지 않게 밟고서 알아차리지 않는 어른이라면, 마음자리에 놀이가 없을 뿐 아니라, 동무랑 사이좋게 어우러지는 즐거우면서 상냥한 길을 모른다는 뜻이로구나 싶어요. 풀꽃을 마구 밟는 사람이면서 착한 마음이 될까요? 땔감으로 쓰거나 살림으로 건사할 뜻이 아닌 채 나뭇가지를 그냥 꺾거나 나무를 괴롭히는 사람이라면 참된 몸짓이라 할 만할까요?


  자가용을 모는 일이 나쁘다고 여기지 않으나, 아무 때나 깊이 생각하지 않고서 자가용을 타고내리기만 한다면 좀 달리 보아야지 싶습니다. 타야 할 적에는 타야겠지만, 여느 때에는 늘 걷고, 해를 머금고, 바람을 마시고, 풀벌레랑 이야기하고, 새하고 손짓을 할 줄 알아야 비로소 어른이지 싶습니다.


  저는 자전거를 즐기지만 언제나 자전거만 타지 않아요. 웬만하면 걷습니다. 걸으면서 바람결을 느끼려 하고, 햇살이 퍼지는 흐름을 읽으려 해요. 자전거를 달릴 적에는 조금 더 빠르게 바깥일을 보려는 뜻입니다만, 자전거를 달리면서 땅바닥이며 옆마을 들판이며 하늘빛이며 멧자락이며 구름결을 더 곰곰이 마주하곤 합니다.



갓이 팔리지 않아 설떡을 살 돈을 마련하지 못했다. 그러다 날이 저물고, 눈이 내리기 시작했기 때문에, 할아버지는 어쩔 수 없이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가다가 넓은 들판에 접어들었을 무렵에는 혹독한 눈보라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들판에는 지장보살이 서 있었다. “어이쿠, 이 눈보라를 그냥 맞고 계시니 얼마나 추우실꼬. 도롱이는 고사하고 삿갓 하나 없으시니.” 할아버지는 팔지 못한 갓을 지장보살에 하나씩 씌워 주었다. (8∼9쪽)



  잘 걷지 않는 사람하고는 어쩐지 나눌 만한 말이 얼마 없다고 느낍니다. 아니, 제가 늘 걷는 사람이라서, 저한테는 안 걸어다니는 사람이 사귈 만하지 않아요. 으레 자가용을 모는 분이라면 이분은 이분처럼 자가용을 모는 다른 사람이 이웃으로 지낼 만하며 서로 나눌 말이 있겠지요.


  저는 어른이란 몸으로 살림을 합니다만, 어린이하고 푸름이를 마주하는 자리에서도 매한가지예요. 즐겁게 걷거나 자전거를 달리는 어린이나 푸름이라면 서로 나눌 말이 많습니다. 풀꽃하고 노래하고 풀벌레하고 사귀고 푸나무를 어루만질 줄 알 뿐 아니라, 바람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멧새가 노래하는 뜻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어린이랑 푸름이하고는 하룻내 수다를 떨 만합니다.


  대학입시만 바라보는 푸름이하고는 딱히 할 말이 없습니다. 손전화에 눈이 빠진 어린이하고도 따로 할 말이 없습니다. 맨손으로 냇물을 쓰다듬고 맨발로 풀밭에서 춤추며 놀지 않는 어린이나 푸름이라면 어쩐지 가까이하고 싶지 않습니다.



“떡은 어떻게 됐수?” “그만 갓을 하나도 못 팔았구먼. 그래서 어귀의 지장님께 다 씌워 드리고 왔네.” “그랬수? 갓이야 갖고 들어온다고 떡이 될 것도 아니고, 잘하셨수. 설은 무짠지랑 죽으로 보냅시다.” (10쪽)


‘기타로랑 얘기 좀 해봐야겠다. 마침 누리카베네 집에 놀러와 있으니까. 원래 요괴들은 옛날부터 이렇게 가엾은 사람들을 돕곤 했다구.’ (11쪽)



  풀벌레가 좋아해 마지않는 도깨비 ‘기타로’가 있다고 해요. 일본에서는 한자말로는 ‘요괴’란 이름을 씁니다만, 한국말로는 도깨비나 깨비라고만 하면 됩니다. ‘깨돌이’라고 해도 어울릴 기타로일 텐데, 깨비 사이에서도 기타로를 좋아하는 이웃이 한쪽에 있고, 깨비 둘레에서도 기타로를 멀리하는 이웃이 다른쪽에 있어요. 이런 이야기가 《게게게의 기타로》(미즈키 시게루/김문광 옮김, AK 커뮤니케이션즈, 2010) 일곱 자락에 흐릅니다.



“기타로라면 할 수 있을 거예요.” “기타로?” “기타로라고 왜 애들이 자주 얘기하잖아요.” “모르겠는데.” “아무튼 내가 편지를 써서 한번 부탁해 볼게요.” “나 참, 기타론지 뭔지 애들 말을 어떻게 믿는다고 그래.” (38쪽)



  깨돌이 기타로를 좋아하거나 반기는 다른 깨비는 상냥하면서 즐겁게 숱한 깨비뿐 아니라 사람이며 뭇목숨이며 푸나무하고 어우러지고 싶은 숨결입니다. 깨돌이 기타리를 싫어하거나 꺼리는 다른 깨비는 짓궂으면서 사납게 혼자 나대거나 돈바라기·힘바라기·이름바라기에 사로잡힌 숨결입니다. 같은 깨비가 아닙니다. 모두 다른 깨비입니다. 깨비나라 우두머리가 되고픈 깨비가 있고, 사람누리도 깨비 힘으로 거머쥐어서 이 별을 통째로 사로잡아 으뜸지기가 되겠노라는 깨비가 있습니다.


  착하게 살아가지만 ‘안 착한 사람들 등쌀’에 시달리는 사람을 가여이 여기면서 조용히 돕는 깨비가 있어요. ‘안 착한 사람들’하고 손을 잡고서 착한 사람을 들볶으면서 우쭐거리는 깨비도 있다지요.


  깨돌이 기타로는 이 틈새에서 춤을 춥니다. 고약한 깨비를 나무랍니다. 상냥한 깨비하고 동무를 합니다. 괘씸짓을 일삼는 깨비를 따끔하게 지청구해요. 고운 마음결로 눈부신 깨비를 만나면 저절로 웃음이 터지면서 같이 노래합니다.



“거울은 2천 년 이상 묵으면 저절로 물질이 변해 거울 속에서 운외경이라는 요괴가 나타난다고 했다. 하지만 말로만 들었지 직접 보는 건 처음이구나.” (132쪽)


“하지만 한국말도 모르고…….” “기타로! 무슨 소릴 하는 거냐. 요괴에 국경이 어디 있어! 당장 가 보거라. 요괴한테 고통 받고 있는 인간을 돕는 게 우리 사명이야.” (141쪽)



  우리는 어떤 사람인가요? 우리는 어떤 어린 나날을 보내면서 어떤 푸른 철을 가로질로서 어떤 어른 자리에 서는 사람인가요?


  너는 누구인가요? 나는 누구인가요? 우리는 누구인가요? 만화책 《게게게의 기타로》는 꾸준히 묻습니다. 깨비나라 숨결과 사람나라 숨결이 어떻게 어울릴 적에 서로 즐거울 만한가 하고 묻습니다. 사람나라에서 사람들은 어떤 얼개를 짜면서 보금자리나 마을을 가꾸려는 길인가 하고 묻습니다. 사람나라 어른들은 아이들한테 어떤 살림을 보여주면서 스스로 철든 숨결로 땀흘리고 노래하느냐고 물어요.



‘인간들 손이 안 닿은 이런 원시림 속의 민달팽이가 제일 맛있어.’ (201쪽)


“저, 저건! 23년 전에 전쟁터에서 돌아가신 저희 아버지예요! 아버지는 남풍을 타고 섬을 넘고 넘어 23년이나 걸려 고국으로 돌아오신 거네요. 그리고 고아가 된 절 내내 지켜주고 계셨던 거예요.” 그 순간 요화의 꽃잎이 일제히 떨어지며 온 산을 붉게 물들였다. 넷은 정성스럽게 하나코의 아버지를 묻어주고 그 섬을 떠났다. (229쪽)



  오디졸임은 딸기졸임하고 맛이 다르고, 무화과졸임이나 살구졸임이나 포도졸임이나 능금졸임하고도 맛이 달라요. 졸이는 달콤수수는 매한가지일 테지만, 바탕이 될 열매는 저마다 달라 모든 졸임은 맛이 다르고, 결이며 빛깔이며 숨이 다릅니다.


  나무에 달린 열매를 그자리에서 톡 따서 누리는 맛이랑, 열매를 찬찬히 재워서 두고두고 누리는 맛은 저마다 달라요. 어느 쪽이 낫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다르게 맞이하는 맛이나 깊이도 너비도 서로 다르면서 즐겁습니다.


  솜씨좋은 어른이 척척 반죽을 해서 굽는 빵도 맛나겠지만, 아직 서툰 아이가 조물조물 반죽을 해서 굽는 빵도 맛있습니다. 어느 쪽이 더 맛나다고 할 수 없지만, 한 가지는 달라요. 솜씨가 좋기에 척척 구워내면 한결 매끈할 테고, 아직 서툴기에 느릿느릿 구워내면 한결 오래 손빛을 담으며 투박합니다. 매끈맛도 투박맛도 몸이랑 마음을 함께 살찌우는 즐거운 기운이에요.


  어버이는 아이한테 손길을 물려줍니다. 어버이한테서 손길을 물려받는 아이는 제 마음을 새로 얹어서 한결 다르면서 알뜰한 손길을 일굽니다. 아이가 새로 일구는 알뜰한 손길을 바라보는 어버이는 그동안 물려준 손길을 새삼스레 가다듬거나 추스를 길을 엿봅니다. 아이가 스스로 살림을 짓는 손길이 되기까지는 어버이가 내도록 물려주기만 했다면, 어느새 아이 손빛이 어버이를 신나게 다른 길로 나아가도록 북돋우는 손놀림으로 피어납니다.


  삶이란 새롭게 짓는 손길을 모은 자리이지 싶습니다. 가로채거나 빼앗거나 거머쥐어서는 도무지 알 길이 없지만, 함께 가꾸거나 같이 짓거나 나란히 누리는 동안 차근차근 알아내면서 새롭게 살찌우는 길을 스스로 찾아내는 자리이지 싶어요. 



“그럼 전에 나로 둔갑해서 인어를 팔러 다녔던 게 네놈이었단 말이지.” “그래! 그러면 순진한 넌 반드시 여길 찾아올 줄 알았다. 자, 그럼 슬슬 먹어 보실까.” “먹어?” “네놈 고기를 먹고 더 강한 신통력을 갖고 싶거든.” (237쪽)



  마당에 나무를 한 그루씩 늘리면 좋겠습니다. 아이가 태어나서 자라는 동안 마을숲에 나무를 한 그루 두 그루 아이 손으로 심도록 이끌면 좋겠습니다. 자가용을 댈 자리를 늘리느라 숲을 밀지 말아요. 자가용을 줄이고, 찻길을 줄이면서 다시 숲을 늘리기로 해요. 공장도 발전소도 군대도 이제부터 차근차근 줄여서 숲으로 자라나도록 하면 좋겠어요. 마을하고 마을 사이를, 고을하고 고을 사이를, 자가용이나 버스나 기차로만 이으려 하지 말고, 두 다리나 자전거로 천천히 오가는 숲길을 늘리면 좋겠어요.


  왜 찻길에 지붕을 안 씌울까요? 찻길마다 햇볕을 맞아들여 전기를 얻도록 지붕을 씌우면 좋을 텐데요. 왜 자동차에 지붕을 안 씌울까요? 자동차마다 햇볕을 받아들여 전기를 얻도록 하면 될 텐데요.


  나무를 심고 돌보고 어루만지고 타고놀면서 자라는 아이는 착하면서 참답고 슬기로운데다가 사랑스러운 어른으로 우뚝 선다고 느낍니다. 나무하고 동떨어진 채 자동차에 몸을 싣고 손전화를 들여다보다가 이런저런 시험문제를 풀어 대학교에 들어가는 아이라면 착한 길도 참한 길도 슬기로운 길도 사랑스런 길도 모두 등지고 만다고 느낍니다.


  풀벌레깨비인 기타로가 묻습니다. “넌 어떤 사람이니?” 나무깨비인 기타로가 묻네요. “사람은 어떤 숨결이니?” 숲깨비인 기타로가 다시 물어요. “푸른별에서 살아가려면 어떤 마음으로 사랑을 나누면 즐겁겠니?” ㅅㄴㄹ


#水木しげる #MizukiShigeru #ゲゲゲの鬼太郞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한국말사전을 쓰고 “사전 짓는 책숲(사전 짓는 서재도서관)”을 꾸린다. 1992년부터 이 길을 걸었고, 쓴 책으로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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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학의 시 2
고다 요시이에 지음, 송치민 옮김 / 세미콜론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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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푸른책/숲노래 만화책

물려주고 싶은 마음만 가꾸자



《자학의 시 2》

 고다 요시이에

 송치민 옮김

 세미콜론

 2009.12.15.



  나를 괴롭히는 이는 언제나 나 스스로입니다. 남이 나를 괴롭히지 못합니다. 곁에서 누가 우리한테 돈을 주기에 우리 살림이 넉넉하지 않고, 옆에서 누가 우리 돈을 가로채기에 우리 살림이 메마르지 않아요. 돈을 받아도 스스로 넉넉한 마음이 아니면 쪼들립니다. 돈을 가로채는 이가 있어도 스스로 넉넉한 마음이라면 고스란히 넉넉합니다.


  둘레에서 게걸스레 먹는 사람이 있어서 우리 배가 고프지 않아요. 둘레에서 무엇을 먹건 말건 쳐다볼 까닭이 없습니다. 저 사람이 저런 집에 살고, 그 사람이 그런 자가용을 몰고, 이 사람이 이런 이름값이 있다 한들, 우리랑 이어진 끈이란 하나도 없습니다. 저 사람은 저렇게 살라지요. 그 사람은 그렇게 가라지요. 이 사람은 이렇게 하라지요. 우리가 스스로 마음을 바라보지 못할 적에 휘둘려요. 우리가 스스로 마음을 가꾸지 않을 적에 아프거나 괴롭거나 힘들어요.



“아가씨, 배가 고픈 것 아냐? 다코야키 먹어라.” 먹으면 아버지의 빚이 늘어날 것만 같아서 손을 댈 수 없었습니다. (40쪽)



  모기가 물면 싫어할 수 있습니다. 모기를 싫어하는 나머지 모기 물린 자리를 벅벅 긁다가 부어오릅니다. 모기를 잡는다며 갖은 화학약품을 집안에 끌어들이다 보면, 어느새 모기보다 사람을 잡을 일이 되고 맙니다.


  모기가 물건 말건 쳐다보지 않으면, 모기가 한 방울조차 안 되는 피를 빨아먹고 갔어도 간지럽지 않고 붓지 않습니다. 우리 몸은 모기가 가져간 피를 고스란히 되살려 놓습니다. 가시에 찔린 자리도 어느새 사라지고, 나뭇가지에 긁힌 데도 조용히 아물어요. 가만 보면 우리 몸은 스스로 살아나는 힘, 또는 스스로 살려내는 기운이 대단합니다. 바깥힘에 기대는 흐름을 멈추고서 마음힘을 사랑하는 길로 접어든다면, 언제나 새롭게 피어나는 몸이 될 만하다고 느낍니다.



저는 초등학교 6학년. 아직 12살. 인생에 져버리고 말 것 같습니다. (78쪽)


나는 중학교 3학년. 열다섯 인생이 점점 더 무거워져서, 당장이라도 지고 말 것 같습니다. (120쪽)



  스스로 깎아내리는 마음으로 살아왔다는 사람이 걸어온 지난날하고 걸어가는 오늘날을 나란히 담은 네칸만화로 이야기를 엮은 《자학의 시 2》(고다 요시이에/송치민 옮김, 세미콜론, 2009)입니다. 묵직한 판으로 두걸음으로 이야기를 여미는데, 만화에 나오는 분은 어머니 사랑도 아버지 품도 느끼지 못한 채 힘든 나날을 보냈다는 생각에 스스로 파묻힙니다. 그런데 이분이 걸어온 길을 보면, 어릴 적부터 집안일을 도맡고 집살림까지 꾸려야 했으니, 집에서 노닥거리는 곁님이 툭하면 노름을 한다며 살림돈마저 거덜을 내니, 겉보기로는 ‘난 너무 못났어!’ 하고 스스로 깎아내릴 만하기도 하겠구나 싶습니다.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후지사와가 되고 싶어.” “바보. 너에게는 너만의 좋은 점이 있는데 말이야.” “지금 무슨 말 했어?” “아냐.” (172쪽)



  나한테는 돈도 없고, 멋진 어머니 아버지도 없고, 빚쟁이가 찾아오는 가난한 집만 있고, 한겨울에도 손이 얼면서 신문을 돌리면 술꾼 아버지가 일삯을 가로채서 술이나 마신다는 삶이었다지요. 이 삶은 어찌해야 좋을까요. 집이 집 같지 않은데 그냥 학교를 다니고, 그냥 술심부름을 하고, 그냥 눌러앉으면서 제살깎기를 하면 될까요.


  아니면 스스로 사랑하며 살아갈 집을 새롭게 찾겠다면서 ‘태어난 집’을 떠나 ‘보금자리가 될 집’을 두 손으로 일구겠다고 일어설 수 있을까요. 또는 우리 집 이야기를 둘레에 하면서 술꾼 아버지를 바꾸는 길을 찾아볼 수 있을까요.



“당신 진짜 나 같은 사람이라도 괜찮아요?” “좋아.” “여러 남자한테 버림받았던 여자예요.” “그 녀석들이 바보지.” “그것만이 아니에요.” “됐다니까.” (279쪽)



  우리를 깎아내리거나 괴롭히는 사람은 남이 아닌 바라 나라면, 거꾸로 생각해 볼 만합니다. 우리를 일으키거나 가꾸면서 사랑할 사람도 바로 남이 아닌 나예요. ‘제살깎기’라 하듯 ‘제사랑(나사랑)’입니다. 우리는 어느 길로든 갈 수 있습니다. 오래오래 제살깎기로 살다가 어느 날 불현듯 깨닫고는 ‘이 별에 태어난 이 삶을 제살깎기를 실컷 했으니, 이제부터는 나사랑을 해보자’ 하고 생각을 돌릴 만해요.


  옆집 사람이 우리 집 아이를 사랑해 주어야 우리 아이가 사랑스럽지 않습니다. 또래 아이들이 우리 집 아이하고 놀아 주어야 우리 아이가 잘 크지 않습니다. 내가 어버이라면 어버이로서 못나고 잘나고 따지지 말고서, 그저 온사랑이 되어 우리 아이를 보살피면서 함께 웃는 길을 찾으면 됩니다. 내가 아이라면 아이답게 뛰고 달리고 노래하면서 오늘을 한껏 누리면 됩니다.


  놀려고 태어난 아이입니다. 사랑하려고 되는 어른입니다. 놀면서 배우는 아이입니다. 사랑하면서 살림을 익히는 어른입니다.



엄마에게. 이 세상에는 행복도 불행도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뭔가를 얻으려면 반드시 뭔가를 잃게 됩니다. 뭔가를 버리면 반드시 뭔가를 얻게 됩니다. 단 하나뿐인,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을 잃었을 때는 어떨까요? (287쪽)


엄마, 이제부터는 무슨 일이 일어난대도 무섭지 않습니다. 용기가 생깁니다. 이젠 인생을 두 번 다시 행복이냐 불향이냐 나누지 않을 겁니다. 뭐라고 할까요? 인생에는 그저 의미가 있을 뿐입니다. 단지 인생의 엄숙한 의미를 음미하면 된다고 하면 용기가 생깁니다. 엄마, 언젠가 만나고 싶어요. 엄마를 항상 사랑하고 있어요. (289쪽)



  제살깎기로 치닫던 분은 ‘나를 낳은 어머니 얼굴’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고 하는데, 어머니 얼굴이 떠오르지 않기에 ‘난 틀림없이 사랑 아닌 버림만 받은 아기였겠지!’ 하고 지레 생각했답니다. 그러나 이녁 몸에 아기를 밴 뒤, 그리고 이 아기를 낳은 뒤, 이 아기를 낳을 즈음 고등학교 적 마음동무를 오랜만에 다시 만난 뒤, 모든 생각을 확 뒤집기로 했다지요. 《자학의 시》란 만화책이 ‘제살깎기(자학) + 시’라는 이름을 붙인 뜻이 있겠지요.


  아파도 노래요, 기뻐도 노래입니다. 눈물이 흘러도 노래요, 웃음이 넘쳐도 노래입니다. 노래를 부르면 돼요. 노래하는 마음을 찾으면 돼요.


  먼먼 옛날부터 온누리 모든 수수한 어버이는 일하며 노래를 불렀습니다. ‘일노래’예요. 아스라히 먼 옛날부터 모든 투박한 어버이는 일하며 고된 몸일지라도 아이를 품에 안고서 노래를 불렀어요. ‘자장노래’입니다. 어버이나 어른 곁에서 일노래하고 자장노래를 들으며 자라는 아이는 동무하고 놀면서 ‘놀이노래’를 불렀지요.


  누구나 노래입니다. 다같이 노래입니다. 이 노래는 삶을 사랑하는 즐거운 마음이 흐르는 말씨(말씨앗)입니다. 눈물을 노래하면서 아프거나 힘든 하루를 달랩니다. 웃음을 노래하면서 기쁘거나 신나는 사랑을 북돋웁니다. 노래하는 사람은 사랑으로 나아갑니다.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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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한국말사전을 쓰고 “사전 짓는 책숲(사전 짓는 서재도서관)”을 꾸린다. 1992년부터 이 길을 걸었고, 쓴 책으로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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