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하루 갈무리한 여러 풀이글과 보탬글 가운데 "즐겁다·기쁘다·흐뭇하다" 이 세 가지 낱말 이야기를 맨 처음으로 올립니다. 이웃님들은 어떻게 느끼고 생각하실는지 궁금합니다.

 

..

 

즐겁다
  “마음이 가벼우면서 밝고 좋다”를 뜻합니다. 그런데, 마음이 좋은 느낌이 바깥으로 안 드러나기도 합니다. 바라던 대로 이루어지거나 되지 않더라도 스스로 마음을 가다듬을 줄 알기에, 이러한 때에도 즐거울 수 있습니다.


기쁘다
  “바라던 대로 이루어지거나 되기에, 또는 어떤 일이 생기거나 어떤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좋다”를 뜻해요. 마음이 좋은 느낌이 바깥으로 잘 드러나 다른 사람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흐뭇하다
  “바라던 대로 이루어지거나 되기도 하고, 마음이 가벼우면서 밝기도 해서, 그저 마음이 느긋하면서 꽉 차도록 좋고, 모자라거나 아쉽지 않다”를 뜻합니다. 좋게 바라보는 마음이요 몸가짐입니다. 때로는 “자랑스럽다고 느낀다”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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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treeje 2013-11-25 11:37   좋아요 0 | URL
다 알맞고 좋은 풀이글 같습니다~
저는 '기쁘다'를 어떤 상태가 스스로 마음에 빛으로 꽉 차올라 환해지는 경우에 그렇고
'흐믓하다'가 제일 좋은 것 같아요.
흐믓한 경우는, 자신의 경우보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나 일에서 일어나는 경우에
더욱 넉넉하고 마음이 참 좋아져서 그런가 봅니다~^^;;

숲노래 2013-11-25 11:48   좋아요 0 | URL
기쁘다는 스스로 마음에서 올라오고
흐뭇하다는 다른 사람과 맺는 삶에서 올라오는 느낌이라 할 만해요.
그렇지요~
 

2013년 한글날에 맞추어 내놓으려던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은 2013년 3월 언저리에 나올 듯합니다. 이 책이 나오고 나서 쓰려던 새 글이 있는데, 책이 나오기까지 기다리자니 벌써 한 달이 훌쩍 지나갑니다. 그래서, 책이 아직 안 나왔지만, 2014년 한글날에 맞추어 내놓으려는 책에 쓸 글을 이제부터 쓰려고 해요. 아직 큰이름을 잡지 않았지만, <새로 쓰는 우리말>로 가닥을 잡아 봅니다.

 

<새로 쓰는 우리말>이라는 갈래에 쓰려는 이야기는 '우리말 느낌풀이 견줌 사전" 이야기입니다. 조금 더 알 만하다 싶은 말로 적자면 "우리말 뉘앙스 풀이 사전"이에요.

 

지난날까지 누구나 잘 쓰던 한국말이지만, 어느새 오늘날 어느 누구도 제대로 못 쓰는 한국말이 되었다고 느껴요. 그래서, 다시금 생각하고 새롭게 돌아보면서 한국말을 사랑스럽고 즐거우면서 알맞게 잘 쓰자는 뜻으로 <새로 쓰는 우리말>이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이 갈래로 쓰는 글은 '사전에 넣는 글'이다 보니, 말풀이와 말풀이를 보태는 짤막한 글입니다. 말풀이 + 보탬글로 보면 됩니다. 어려울는지 모르나 쉬울 수 있고, 쉬울는지 모르나 어려울 수 있어요.

 

아직 마무리된 글이 아니고, 차근차근 가다듬으면서 갈무리하는 글을 올립니다. 다 마무리되었을 때에는 책으로 예쁘게 꾸며야지요.

 

저는 제 나름대로 제가 갖춘 수많은 국어사전을 바탕으로 제가 어릴 적부터 듣고 배운 말, 또 제 둘레에서 듣는 이야기를 버무려서 풀이글과 보탬글을 씁니다. 이 글에 여러 '글 이웃님 생각'을 보태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앞으로 '새로운 한국말 이야기책(국어사전)'이 나오는 데에 우리 모두 저마다 아름다운 지킴이자 길동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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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덕 님과 ‘우리 글 바로쓰기’
[말사랑·글꽃·삶빛 45] 말과 삶과 넋은 모두 하나

 


  나는 이오덕 님을 딱 두 번 뵈었습니다. 한 번은 1999년 2월 즈음이었지 싶습니다. 나는 1994년 12월에 ‘우리말 한누리’라는 이름으로 동아리를 하나 열어, 우리 말글 이야기를 꾸준히 쓰면서 조그마한 이야기책을 꾸몄습니다. 1995년 가을에 군대에 가서도 이야기책을 꾸몄습니다. 남들 자는 틈에 혼자 조용히 깨어 손으로 글을 써서 열 몇 쪽짜리 이야기책을 꾸몄어요. 휴가를 나오면 복사집에 들러 이야기책을 복사해서 둘레에 나누어 주었지요. 1998년에 사회로 돌아온 뒤에도 ‘우리 말글 이야기책’은 혼자서 씩씩하게 꾸몄습니다. 이즈음 이오덕 님은 과천에서 사셨고, 어떻게 이오덕 님 사는 곳을 알아서 편지로 내 작은 이야기책을 꾸준히 보냈습니다. 오래도록 내 이야기책을 받아보던 이오덕 님이 어느 날 저한테 전화를 걸어, “젊은이가 대견한 일을 하는데 우리 집에 한번 찾아와 보게.” 하셨습니다. 당신은 몸이 힘들어 나를 보러 찾아가고 싶어도 찾아가지 못한다고 하셨어요. 과천에 있는 조그마한 아파트는 벽이며 부엌이며 뒷간이며 수많은 책으로 빼곡합니다. 나는 이오덕 님 앞에서 두 시간 남짓 말없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젊은이가 대견한 일을 하기는 하되, 조금 더 생각할 대목이 있다며 찬찬히 짚어 주시는데, 부끄럽고 얼굴이 벌개져서 고개를 들지 못했습니다. 내가 쓰는 글에서 ‘가끔씩’은 겹말이니 틀린 말이라 ‘가끔’으로 바로잡아야 하고, ‘불린다’라는 낱말은 사람을 ‘부르는’ 자리 말고는 쓸 수 없으니 이 또한 바로잡아야 한다고 하셨어요. 이밖에 더 길게 말씀했지만, 다른 이야기는 떠올리지 못합니다.


  이듬해 2000년 여름에 다시 한 번 뵙니다. 이때에는 먼발치에서만 바라봅니다. 이오덕 님을 처음 뵌 자리에서 《아무도 내 이름을 안 불러 줘》라는 책과 《허수아비도 깍꿀로 덕새를 넘고》라는 책 두 가지를 선물로 받았는데, 나는 바로 이 책을 펴낸 출판사 일꾼으로 들어갔어요. 출판사 일꾼 모두 한국글쓰기연구회 여름모임에 함께하느라 충북 충주 무너미마을에 갔고, 강의 하는 자리에서 가만히 당신 말씀을 귀담아들었습니다.


  그 뒤 나는 어린이 국어사전 만드는 일을 합니다. 2001년 1월 1일부터 이 일을 하다가 2003년 8월 31일에 그만두었어요. 이오덕 님은 2003년 8월 25일에 돌아가셨지요. 어린이 국어사전 만들기는 내 오랜 꿈이었지만, 출판사 흐름과 제 뜻이 안 맞아 그만 꿈을 접어야 했는데, 회사 그만둘 즈음 이오덕 님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듣고 기운이 한풀 더 꺾였습니다. 내 몫을 다른 이한테 물려주도록 ‘인수인계 서류’를 꾸미는 틈틈이 ‘이오덕 님 기리는 글’을 썼어요. 하루에 한 꼭지씩 원고지로 치면 40∼50장쯤 되는 글을 다섯 꼭지 썼어요. 그러고는 출판사는 그만두고 홀로 조용히 생각에 잠기는 나날을 보냈지요. 아프고 슬픈 마음을 달래려고 전화기는 끄고 살았어요. 한 달 즈음 전화기 없이 지내다가 어느 곳에 전화할 일이 있어 퍽 오랜만에 켜는데, 갑자기 전화기가 울렸어요. 왜 그동안 전화가 안 되었느냐고, 죽었는지 살았는지 궁금하다고, 나를 만나고 싶다고, 하는 이야기가 흐릅니다. 누가 이렇게 전화를 하는가 싶었는데, 뜻밖에 이오덕 님 큰아들이었습니다. 이오덕 님 큰아들은 제 아버지하고 비슷한 또래입니다. 큰아들 되는 분은 당신 아버님을 흙에 묻은 뒤 여러모로 ‘추모글’을 찾아서 읽다가 내가 쓴 기나긴 글을 읽으셨다는데, 당신 아버님을 잘 헤아리는구나 싶어 만나고 싶다 하셨어요. 한 주쯤 망설이다가 충북 충주로 찾아갑니다. 그 자리에서 그분은 저더러 “아버지 원고와 책을 자네가 정리해 주면 좋겠는데.” 하고 말씀했어요. “원고와 책 정리는 얼마든지 할 수 있고, 그런 일은 제가 늘 하는 일이에요. 그런데, 정리를 하자면 적어도 세 해는 걸려요. 세 해 동안 아무것(원고를 정리한 결과물인 책)도 안 나올 수 있어요.” “삼 년이면 될까?” “세 해 동안 꼬박 붙어서 하면 되지요.” “그럼 진짜로 해 볼래요?” “다만, 저는 서울에 집이 있으니까 서울 오가는 찻삯은 주시면 좋겠어요.” “차비야 주지. 인건비도 주어야지.” “아니에요. 저는 인건비는 바라지 않아요. 돌아가신 선생님 원고와 책을 정리하는 일로도 저한테는 큰 공부가 되는걸요.”


  나는 고등학교만 마친 학력이고, 출판사에서 국어사전 기획·편집자로 일하기는 했지만, 딱히 어떤 경력이 있지 않았습니다. 그저 ‘이오덕 님 기리는 글’ 다섯 꼭지를 먼저 알아보시고는 나를 믿고 당신 아버님 글과 책을 맡기셨어요. 그래서 나는 2003년 9월부터 이오덕 님 남긴 글과 책에 파묻혔습니다. 주마다 사나흘씩 충북 충주 무너미마을 멧골집에 머물면서 먼지덩이와 씨름했습니다. 이오덕 님 돌아가신 집은 마을이름 ‘무너미’에서 알 수 있듯 물이 많아요. 이오덕 님 계시던 돌집도 물기가 많아 벽이 온통 새까만 곰팡이였어요. 곰팡이 낀 책을 닦고 털며 햇볕에 말립니다. 곰팡이 기운 퍼지는 원고도 닦고 털며 햇볕에 말립니다. 하도 먼지가 많아 물안경이랑 입가리개를 한 채 일했어요. 일하다가 힘들면 이오덕 님이 드러누워 주무셨다는 침대에 나도 가만히 누워서 생각에 잠겼어요. 어떤 넋과 얼로 이 시골집에서 숱한 이야기를 길어올리셨을까 하고 떠올렸어요. 나는 어떤 인연으로 이오덕 님과 이렇게 ‘글·책’으로 만나는 사이가 되었을까 하고 돌아보았어요.


  충북 충주 무너미마을 돌집에서 먼지덩이에 파묻혀 글과 책을 살피기 앞서까지, 나는 내 깜냥껏 이오덕 님 책을 많이 읽고 갖추었다고 생각했지만, 미처 못 보고 모르던 책이 제법 있었습니다. 아침부터 밤까지는 원고지와 공책과 책하고 씨름을 합니다. 새벽과 밥때에는 ‘아직 못 읽은’ 이오덕 님 책을 읽으며 지냅니다. 책으로 나온 원고를 한쪽으로 모읍니다. 책으로 안 나온 원고를 다른 한쪽으로 모읍니다. 신문과 잡지를 샅샅이 훑어 책에 안 실린 글을 따로 추립니다. 이동안 권정생 님 글 실린 잡지와 신문을 따로 모았고, 이 글은 나중에 《죽을 먹어도》라는 작은 책으로 태어났어요.


  수많은 원고더미 사이에 파묻힌 어느 과일상자에서 이오덕 님 일기가 한 꾸러미 나왔습니다. 얼추 여섯 달 즈음 글과 책을 갈무리하던 때였지 싶어요. 곰팡이 먹는 책을 하나하나 닦고 손질하며 해바라기를 시키던 때인데, 한참 책더미 파고들어 닦다가 만난 상자에서 드디어 이오덕 님 일기장이 나타났어요. 그러고 몇 달 지나서, 이오덕 님이 ‘이원수 님 시에 손수 가락을 붙인’ 악보가 나왔어요. 1960∼70년대에 이원수 님 동요가 널리 나오기는 했지만, 더없이 아름답다 할 동시에 아직 가락이 붙지 못하고, 또 가락이 붙었어도 썩 부를 만하지 못하다 싶은 몇 가지 동시에, 이오덕 님이 손수 가락을 입히셨더군요. 그러고 또 몇 달 지나, 이오덕 님이 경상도 멧골자락에서 멧골아이를 가르치며 손수 등사를 밀어 만든 ‘학교신문’ 꾸러미를 찾습니다.


  이오덕 님 글과 책 갈무리는 두 해 반쯤 될 무렵 모두 마칩니다. 그 뒤 한 해를 더 충북 충주 멧골집에 머물며 이오덕 님 옛글이 새로 빛을 보도록 일합니다. 이오덕 님이 《우리 글 바로쓰기》에 이어 마무리지으려 하셨던 《우리 말 살려쓰기》는 세 권으로 엮어서 내놓았습니다. 다만, 아쉽다면, 이오덕 님이 《우리 말 살려쓰기》 다음으로 내놓고 싶으셨던 ‘우리 말 바로쓰기 사전’까지는 내 손으로 마무리짓지 못했어요. 글과 책 갈무리하는 일은 세 해면 된다고 여겼지만, “우리 말 바로쓰기 사전”을 엮자면 적어도 열 해는 걸리리라 느꼈어요.


  무너미마을 멧골집에서 일을 끝내고 내 고향 인천으로 돌아갑니다. 고향마을에서는 지자체 공무원이 막개발 일삼으며 살가운 골목마을 이웃들 삶터를 짓밟으려 했어요. 나는 고향마을 인천으로 돌아가서 내 책들을 밑천 삼아 ‘사진책도서관’을 열었어요. 내가 마음 기울여 하는 일은 ‘한국말을 한국말답게 살찌우는’ 일인데, 한국말 자료를 찾으려고 헌책방을 자주 드나들었고, 헌책방을 자주 드나들며 헌책방 사진도 찍고 헌책방 이야기도 글로 쓰는데, 이렁저렁 하는 동안 시나브로 ‘사진책’이 많이 모이더군요. 그래서 ‘우리말도서관’ 아닌 ‘사진책도서관’을 열었어요. 내 사진책도서관에는 온갖 국어사전과 한국말 자료를 이천 가지 즈음 갖추었습니다. 이 자료는 나 스스로 앞으로 ‘한국말 사전’이나 ‘한국말 살려쓰기 사전’ 엮을 밑책 노릇을 하리라 생각해요.


  나는 고등학교 3학년 때인 1993년에 《우리 글 바로쓰기》(한길사,1989)라는 책을 처음 알아보았어요. 이때부터 이 책을 틈틈이 되읽어요. 요즈음 이 책을 되읽다가 1권 328쪽에서 다음 같은 대목을 천천히 다시 밑줄 그으며 읽었어요. “지식인들의 말과 글이 백성들의 말이 아니고 남의 말글을 따르고 있다는 것은, 그들의 생각이 남의 것, 즉 백성들 속에 살면서 그 삶에서 얻은 것이 아니라는 것, 책에서 얻은 지식이요 관념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 지식이나 관념만으로 자기의 관점을 세워 나갈 때 문제가 일어납니다. 책에서 얻은 사상은 자기의 삶에서 몸으로 가지게 된 생각과 하나로 될 때 비로소 그 사상은 제것으로 되지요. 제것은 없고 지식만 가지고 제것인 양 여긴다면 그것이 문젭니다. 말은 잘못되었는데 생각만은 바르게 가질 수 있는 것인가? 그럴 수 없다고 봅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 시를 쓰는 사람이든지 소설을 쓰는 사람이든지, 우리 말에 대해 끊임없이 반성하고 비판하는 몸가짐이 없이는 옳은 생각을 가질 수가 없다고 봅니다.”


  나는 처음부터 한국말을 가다듬거나 살찌우거나 다스리는 길을 걸을 뜻이 있지는 않았어요. 이오덕 님 책에서 이 대목을 읽을 적에도 내가 오늘 같은 길을 걸으리라고는 느끼지 않았어요. 그러나, 이 대목은 내 생각을 크게 흔들었어요. 이오덕 님 말씀은 아주 쉽거든요. ‘말 = 삶’이란 이야기예요. 말에 이녁 삶이 모두 드러난다는 이야기예요. 말을 올바로 쓰지 않고서는 삶이 올바로 서지 못한다는 이야기예요.


  참말 그런가? 참말 그와 같을까? 두고두고 생각합니다. 두고두고 생각하며 사람들을 만납니다. 사람들을 만나고 사귀면서 늘 깨닫습니다. 참 그렇구나. 말이 번드르르한 사람은 삶 또한 번드르르합니다. 알맹이는 없지요. 말이 수수한 사람은 삶 또한 수수합니다. 알맹이가 야무집니다. 말을 곱게 하는 사람은 차림새도 곱습니다. 어떤 값진 옷을 입어서 곱지 않아요. 정갈한 마음이 정갈한 말에 드러나고, 정갈한 낯빛과 몸빛으로 드러나더군요.


  말만 그럴듯하게 잘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이들은 참말 말도 삶도 그럴듯합니다. ‘아름답다’거나 ‘훌륭하다’는 모습이 아닌 ‘그럴듯하다’는 모습입니다.


  이오덕 님은 《우리 글 바로쓰기》라는 책을 내놓기 앞서 《삶을 가꾸는 글쓰기 교육》이라는 책을 내놓았어요. 책이름부터 환히 드러나지요. 삶을 가꾸는 글(말)이어야 하고, 글(말)을 가꾸면서 삶을 가꾸어야 아름답다는 이야기예요. 우리 글을 바르게 쓰자는 이야기는 우리 삶을 바르게 일구자는 이야기예요. 삶을 바르게 일구지 않고서는 말을 바르게 일구지 못해요. 참 많은 사람들이 ‘우리 말글 바르게 쓰기가 어렵다’고 얘기하는데, 왜 어려운가 하면, 당신 삶부터 바르게 고치기 어렵기 때문이에요. 당신 삶부터 바르게 고치는 나날을 즐거이 누리는 분들은 ‘우리 말글 바르게 쓰기’도 수월하게 하지요. 즐겁게 합니다. 익산에 사는 여든 살 할머니 한 분이 이오덕 님 ‘우리 글 바로쓰기’를 몸소 즐겁게 펼쳐 보이시는데, 내가 느끼기로는 익산 할머니 그분은 ‘삶 바로세우기’부터 늘 즐겁게 하셔요. 삶이 바로서니까 말 또한 저절로 바르게 서요. 삶을 바로세우니 넋도 찬찬히 바르게 섭니다.


  말과 삶과 넋은 모두 하나입니다. 서로 다르지 않습니다. 말만 앞세울 때에는 삶이나 넋 모두 겉치레가 됩니다. 말을 알차게 가다듬을 때에는 삶이나 넋 모두 알차게 가다듬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이 나라 어린이와 푸름이와 어른 모두 말·삶·넋을 아름다이 일굴 수 있기를 빌어요. 말·삶·넋을 아름다이 일굴 때에는 이 땅이 아름답게 거듭나거든요. 말·삶·넋을 사랑스레 돌볼 때에는 이 나라가 사랑스레 거듭나요. 말·삶·넋을 착하게 보듬을 때에는 이 겨레가 착한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요.


  말과 글을 바르게 쓰자는 소리, 또 말과 글을 살려서 쓰자는 소리는, 말과 글에만 얽히는 소리일 수 없습니다. 말부터 정갈히 건사하면서 넋을 정갈히 건사하려는 몸짓입니다. 말과 넋을 정갈히 건사하면서 삶을 정갈히 북돋우려는 몸가짐입니다.  사랑과 꿈과 이야기를 우리 모두 아름다이 아끼면서 믿음과 빛과 웃음을 서로서로 나눌 줄 아는 착하고 참된 길에 설 수 있기를 빕니다. 나는 전라남도 고흥 두멧시골에서 옆지기와 두 아이와 오붓하게 지내며 꿈꿉니다. 나는 이 두멧시골에서 조용히 말삶과 책삶을 밝히고, 내가 밝히는 삶자락은 아이들 꿈날개로 이어져 온누리에 곱게 흐드러지기를 꿈꿉니다. 그래서 오늘 내가 시골에서 살아가며 쓰는 글은 ‘말사랑’이고 ‘글꽃’이며 ‘삶빛’입니다. 4346.1.2.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국어사전 뒤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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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이 게시판에 글을 마저 올리지 않았지만,

[국어사전 뒤집기]라는 이름을 붙여 쓰는 글을

모두 마무리지었습니다!

 

오늘 종이로 뽑고, 출판사로 보낼 생각이에요.

첫 글을 쓰고 마지막 글을 쓰기까지

얼추 한 해가 꼬박 걸렸네요.

 

부디 출판사에서 즐거이 받아들여서

2013년에 예쁜 책으로 태어날 수 있기를 빕니다.

 

혼자 즐겁게 노래를 불러요.

만세! 만만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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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3-01-02 12:45   좋아요 0 | URL
또 책이 나오겠군요.
열심히 살림하고 사진찍고 글쓰고 책 만들고~~ 대단하셔요!
새해에도 가족과 함께 건강하고 행복하시기를....^^

숲노래 2013-01-02 21:52   좋아요 0 | URL
1월 10일에 서울 마실을 가는데, 그때 출판사 사장님을 뵙고 이야기를 들으며, 올해에 책이 나올는지, 아니면 책이 안 나올는지... 판가름나요. ^^;;; 아직 기다려야 한답니다~~~
 

‘한자교육’과 ‘영어교육’
[말사랑·글꽃·삶빛 42] 아이들한테 가르칠 말

 


  텔레비전을 보는 아이들은 텔레비전에서 흐르는 소리를 가만히 귀를 기울여 듣고는, 하나하나 따라서 합니다. 좋은 말이거나 나쁜 말이거나 따지지 않습니다. 들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아이들 저희 말을 가다듬습니다.


  도시 한복판에서 자동차 지나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아이들은 자동차 소리가 익숙합니다. 전철 소리나 버스 소리가 익숙합니다. 층을 이룬 높은 집을 오르내리는 기계 소리에 익숙하고, 손전화 울리는 소리에 익숙합니다.


  시골에서 지내는 아이라면, 무엇보다 바람 부는 소리가 익숙합니다. 바람이 나뭇잎을 스치는 소리, 바람이 들판을 누비는 소리, 바람이 나뭇가지와 지붕을 흔드는 소리, 바람이 물결을 일렁이는 소리가 익숙합니다. 다음으로, 멧새와 들새가 지저귀는 소리에 익숙합니다. 풀벌레 노래하는 소리에 익숙합니다. 호미질 하는 소리, 괭이질 하는 소리에 익숙합니다. 논밭에서 하루 내내 지내다 보면, 푸성귀 자라고 잎사귀 퍼지는 소리도 들을 수 있어요. 그러나, 시골이라 하더라도 오늘날에는 드나드는 자동차가 제법 많으니, 시골 아이들 또한 자동차 소리를 차츰 익숙하게 받아들입니다.


  어른들은 도시와 시골을 어떻게 일구어, 아이들한테 어떤 소리를 들려주는가요. 어른들은 이 나라 삶자락을 어떻게 가꾸어, 아이들한테 어떤 빛깔과 모습을 보여주는가요. 어른들은 서로서로 어떻게 어깨동무를 하면서 사랑을 나누고, 아이들한테 어떤 사람살이를 물려주는가요.


  살아가는 대로 말하고, 생각하는 대로 말합니다. 살아가는 결이 어떠한가에 따라 말하는 결이 바뀝니다. 생각하는 무늬가 어떠한가에 따라 말하는 무늬가 달라집니다. 곧, 착한 삶일 때에는 착한 말이 샘솟고, 고운 생각일 때에는 고운 말이 솟아나요. 슬픈 삶일 적에는 슬픈 말이 샘솟겠지요. 어두운 생각일 적에는 어두운 말이 솟아날 테고요.


  아이들과 손을 맞잡고 들길 걷는 어버이는, 아이들한테 ‘손을 맞잡는 느낌’과 ‘들길을 걷는 느낌’을 물려줍니다. 아이들을 자가용에 태우고 고속도로를 달리는 어버이는, 아이들한테 ‘자동차 타는 느낌’과 ‘고속도로 달리는 느낌’을 물려줘요. 학교에서 입시교육을 받아야 하는 아이들은 중·고등학교 여섯 해를 거치며, 입시교육에 얽힌 말을 받아먹습니다. 생각과 마음과 넋과 얼 모두 입시교육 틀에 갇혀요. 입시교육을 마치고 대학교에 간 아이들은 이제 회사원이나 공무원이 되는 길에 들어서면서 새로운 틀에 갇힙니다. 이른바 ‘영어 더 잘 해야 한다’는 울타리에 갇혀요. 초등학교부터 영어를 가르치고, 어린이집과 유치원조차 아이들한테 영어노래를 가르치는데, 이렇게 영어를 가르쳐도 모자란지, 아니 스무 살 될 때까지 영어를 가르쳐도 영어를 옳게 말하지 못하는지, 대학생 된 아이들은 학원을 더 다니며 영어를 배우려 합니다.


  그러면, 회사나 공공기관에서는 영어를 얼마나 쓸까요. 회사나 공공기관은 영어를 얼마나 써야 할까요.


  요즈음 초등학교에서는 아이들이 ‘한자 급수 자격’을 따도록 북돋웁니다. 천자문이건 한자 학습만화이건 바지런히 읽혀 한자를 외우도록 몰아세웁니다. 그러면, 아이들은 나중에 한자를 어느 자리에 얼마나 써야 할까요. 예전에는 ‘신문에 적힌 한자를 읽을 줄 알아야 한다’면서 한자를 가르쳤어요. 그러나 오늘날에는 ㅈㅈㄷ이라는 신문조차 신문이름에나 한자를 적을 뿐, 신문글에 한자 쓰는 일은 아주 없다 할 만해요. 때로는 신문이름을 그저 한글로 적고, 때로는 신문이름을 알파벳으로 적습니다. 이제 ‘한자 몰라 신문 못 읽을 한국사람’ 없습니다.


  한자는 왜 가르쳐야 하고, ‘한자 급수 자격’은 왜 따야 할까요. 관공서나 회사에서는 서류에 왜 어려운 한자말을 굳이 넣어야 할까요. 또는, 왜 영어를 곁들여 서류를 꾸미거나 여러 이름을 지어야 할까요.


  한국사람이 한자를 배워야 할 까닭은 없습니다. 한국사람이 배울 말은 첫째로 한국말입니다. 무엇보다 한국말을 가장 옳고 바르며 알맞게 가르쳐야 합니다. 한국말을 가르칠 때에는, 글솜씨나 글재주 부리는 한국말 아닌, 한겨레 삶과 꿈과 사랑을 북돋우며 ‘내 삶을 스스로 글로 쓸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이 쓴 글, 이른바 ‘문학’을 즐겁게 읽으며 누릴 수 있도록 가르쳐야겠지요.


  둘째로 외국말을 가르칠 노릇입니다. 외국말로 영어를 배울 노릇이고, 또 다른 외국말로 중국말이나 일본말을 배울 만하겠지요. 학교에서 가르칠 외국말은 ‘외국사람과 서로 생각을 주고받으며 이야기를 나눌 만큼’ 가르쳐야 합니다. 한국말을 가르칠 적에 ‘내 마음과 생각과 뜻을 슬기롭게 드러내어 서로 즐거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가르쳐야 알맞듯, 외국말을 가르치는 자리에서도 ‘외국사람과 즐거이 이야기를 나누’도록 가르치는 한편, ‘외국문학을 즐거이 읽고 누릴 수 있’도록 가르칠 노릇이에요.


  한자는 왜 가르쳐야 할까 생각해 봐요. 한자를 가르치면 어디에 어떻게 쓸 수 있을까 헤아려 봐요. 참말, 한자는 어디에도 쓸 자리가 없습니다. 한자는 어느 누구도 쓸 일이 없습니다. 한자는 한국글이 아니고 한자말은 한국말이 아니에요. 무언가 가르쳐야 한다면, 한자 아닌 ‘한문’을 가르쳐야 합니다. 한겨레 옛사람이 한문으로 쓴 글을 읽을 수 있게끔 한문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나, 모든 아이들이 한문을 읽어내도록 가르치자면, 중·고등학교 여섯 해로는 턱없이 모자랍니다. 대학교를 다니는 동안 한문을 더 가르친들 옛사람 한문을 읽기는 아주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옛사람 한문 읽는 일이란, 이 일을 하고픈 꿈을 품는 학자한테 맡길 일이에요.


  생각해 봐요. 모든 사람이 영어를 익혀 모든 영문학 책을 영어로 읽어야 하지 않아요. 영어 잘 하는 이가 한국말로 곱게 옮긴 책으로 읽으면 돼요. 일본말을 모든 사람이 배워서 일본책을 읽거나 일본영화를 봐야 하지 않아요. 일본말 깊고 넓게 즐거이 익힌 이가 한국말로 예쁘게 옮긴 책과 영화를 누리면 되지요.


  학교에서는 시험공부 아닌 삶공부를 이끌어야 옳습니다.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은 시험공부에 얽매여서는 안 됩니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삶을 배우면서, 삶을 북돋우는 길을 익혀야 합니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배울 말은 ‘서로 생각을 아름답게 나눌 말’입니다.


  《어린이병원에서 만난 작은 천사들》(한울림,2005)이라는 책을 읽다가 13쪽에서 “마지막까지 인간미 넘치는 병원의 따뜻한 온정을 느끼면서, 마사미의 아버지는 지난 일주일을 찬찬히 떠올려 보았다.” 같은 대목을 봅니다. 이 글월을 살피면 “따뜻한 온정”이라고 나오는데, ‘온정(溫情)’은 “따뜻한 사랑”을 뜻해요. “따뜻한 온정”처럼 적으면 겹말이에요. 이렇게 쓰는 글은 엉터리예요. 그러나, 전문 지식인이라는 분들은 이처럼 글을 쓰거나 말을 하고, 여느 사람들은 이런 글을 읽거나 말을 들어도 ‘잘못된’ 줄 못 깨달아요. 잘못된 말이 자꾸 퍼져요. 엉터리 글이 자꾸 늘어요. 학교부터 한국말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탓이고, 학교를 마친 한국사람 스스로 한국말을 제대로 배우려고 마음을 기울이지 않은 탓입니다.


  이 보기글에는 ‘인간미(人間味)’라는 한자말도 나와요. 이 한자말은 “인간다운 따뜻한 맛”을 뜻한다고 해요. 그러니까 ‘따스함’을 가리킨다 할 테고, “인간미 넘치는 …… 따뜻한 온정”은 세 낱말이 겹치기가 되는 셈입니다. “마사미의 아버지”라는 글월은 어떨까요. 이제 한국사람은 일본사람이 ‘の’를 아무 데나 붙이듯 아무 데나 ‘의’를 집어넣어요. 한겨레는 오랜 옛날부터 “마사미 아버지”나 “마사미네 아버지”처럼 글을 쓰거나 말을 한 줄 까맣게 잊고 말아요. 또 ‘일주일’ 같은 낱말도 살펴봐요. 이제 이런 한자말쯤 누구나 흔히 쓴다지만, 한국사람은 ‘한 주’와 ‘한 달’과 ‘한 해’처럼 말해 버릇했어요.


  지구별이 지구마을처럼 한동아리 된다는 오늘날이기에 영어를 더 잘 배워야 한다면, 더 잘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나, 지구별이 지구마을처럼 서로 어깨동무를 하더라도, 다 다른 나라와 다 다른 겨레는 서로서로 다른 삶을 누려요. 한국에서도 전라도말과 경상도말이 달라요. 전라도에서도 전주말과 고흥말이 달라요. 자그마한 시골 고흥에서도 읍내와 면내 말이 다르고, 고흥 작은 면에서도 이쪽 마을과 저쪽 마을 말이 달라요. 왜냐하면, 삶터가 다르면서 살림살이가 다르고, 더 깊이 파고들면 모든 사람은 낱낱이 다 다르거든요. 같은 서울사람이라 하더라도 모두 말씨와 말결과 말투가 달라요. 저마다 말느낌이 다르고, 말마디에 담는 꿈과 사랑이 달라요.


  학교에서 아이들한테 한국말부터 옳고 바르며 슬기롭게 가르칠 수 있어야지 싶어요. 한국말부터 아름답고 착하며 참답게 가르치면서, 한국사람이 이웃 여러 나라 사람들과 사이좋게 어울리도록 북돋우는 외국말을 알맞고 바르게 가르칠 수 있어야지 싶습니다.


  지식이나 시험공부로 가르치는 외국말은 이제 그칠 수 있기를 빌어요. 삶을 살찌우면서 마음을 보살피는 참다운 말을 따스한 목소리로 가르칠 수 있기를 빌어요. 4346.1.1.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국어사전 뒤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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