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에 한 줄, 춤추며 읽는 책

 


  백 권을 읽든 만 권을 읽든, 책읽기는 삶읽기로구나 하고 늘 깨닫습니다. 삶을 읽지 못한다면, 제아무리 많다 싶은 책을 읽는다 하더라도 ‘읽기’ 아닌 ‘훑기’를 한 셈이요, 삶을 읽을 수 있으면, 한 권이나 열 권을 읽었다 하더라도 사랑과 꿈을 가슴에 품을 수 있으리라 느낍니다.


  한 해에 백 권 읽기라든지 열 해에 천 권 읽기 같은 뜻을 세우는 일이 나쁘다고 느끼지 않아요. 다만, 몇 권을 읽자 하는 뜻은 좀 부질없어요. 나이 몇 살을 먹자는 뜻이 부질없고, 어떤 지위나 계급으로 오르자는 뜻이 부질없으며, 얼마쯤 되는 돈을 모으자는 뜻이 부질없어요. 삶을 누리려는 뜻을 품어야지요. 삶을 사랑하고, 삶을 아끼며, 삶을 나누려는 뜻으로 하루를 빛내야지요.


  비오는 소리를 들으며 비를 느낄 수 있으면 즐겁습니다. 안개 드리우는 소리를 들으며 안개를 느낄 수 있으면 즐겁습니다. 무지개 나타나는 소리를 들으며 무지개를 느낄 수 있으면 즐겁습니다. 해 뜨는 소리를 들으며 햇살을 느낄 수 있으면 즐겁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생뚱맞다고 느낄 분이 있을까요. 아무래도 그럴 테지요. 오늘날 물질문명 사회에서는 ‘달 뜨는 소리’나 ‘구름 흐르는 소리’를 듣지 못하게 가로막는 자동차 소리와 기계 움직이는 소리와 손전화 떠드는 소리가 너무 커요. 송전탑에서 웅웅거리는 소리와 기차나 전철 지나가는 소리가 대단히 큽니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마음을 움직여 바람결 느낄 겨를이 없다 할 만해요. 시골에서 흙을 만지는 사람 아니고서야 풀벌레 노랫소리 듣는 사람이 없어요. 시골에서 텔레비전 없이 아이들과 복닥이는 사람 아니고서야 개구리 노랫소리 즐기는 사람이 없어요.


  시골에서 살아간다면 숲을 걸어요. 도시에서 살아간다면 공원 풀밭을 걸어요. 내 눈과 마음을 살포시 쉬어요. 푸른 숨결 싱그러운 풀빛을 느끼며 살아요. 몸과 마음이 푸르게 거듭나도록 온힘을 기울여요. 사랑을 속삭이고 꿈을 노래해요. 사람으로 태어난 즐거움을 생각해요.


  《거인을 바라보다》(양철북,2011)라는 책 54쪽을 보면, “사람이 고래의 규모를 이해하는 것이 가능할까? 수백 킬로미터 거리를 마치 우리가 한 블록 거리를 걷듯 수월하게 이동할 수 있는 이 동물에게 세계는 과연 무엇으로 느껴질까?” 하는 이야기가 흐릅니다. 오늘날 사람들로서는 고래 움직임을 헤아릴 길이 막혔겠지요. 그러나, 내가 사람이라면, 내가 산 목숨이라면, 내가 푸른 숨결이라면, 고래 움직임이든 참수리 움직임이든 나비 움직임이든 거미 움직임이든, 또렷하게 느끼면서 가슴으로 받아들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회사일과 입시공부에 쳇바퀴처럼 휘둘리면서 참마음을 잃고 참사랑을 잊기에, 소리도 느낌도 잃거나 잊지 싶어요.


  《애니미즘이라는 희망》(달팽이,2012)이라는 책 225쪽을 보면, “배운다고 하면 무슨 대단한 공부라도 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그게 아니라 감동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래요, 마음이 뭉클하게 움직이는 일이 배움이라 하겠지요. 즐거움을 느낄 때에 무언가 배워요. 기쁨을 느낄 때에 무언가 깨달아요. 슬프거나 괴로울 때에도 무언가 배웁니다. 고단하거나 아플 적에도 참말 무언가 알아채요.


  삶은 언제나 배움입니다. 삶은 날마다 새롭기에 날마다 새롭게 배웁니다. 하루하루 새삼스레 찾아오니, 하루하루 새삼스레 배웁니다. 아이는 어른한테서 배우고, 어른은 아이한테서 배웁니다. 우리는 풀잎 하나를 마주하면서 새 숨결을 배우고, 바람 한 닢 살결로 느끼며 새 넋을 배웁니다. 별빛을 바라보면서도 배우고, 도시를 가득 메운 전깃불빛을 바라보면서도 배워요.


  《십중팔구 한국에만 있는》(삼인,2008)이라는 책 60쪽을 보니, “일반 서민들은 아끼고 또 아끼고, 나아가 인생 자체를 소모하다시피 하며 아파트에 매달리지만, 그렇다고 모두가 원하는 결과를 얻는 것도 아니다.” 하는 이야기가 쏙 튀어나옵니다. 그런가, 하고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그러네, 하고 무릎을 칩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는 사람들 스스로 삶을 찾지 못하고 삶을 덧없이 흘리고 말아요. 삶을 어떻게 누려야 하는가 생각하지 못해요. 삶을 아름답게 즐기는 길을 걷지 못해요.


  대학교에 갈 까닭이 없어요. 자격증을 따야 할 까닭이 없어요. 학문을 하거나 책을 읽을 까닭조차 없어요. 왜냐하면, 삶을 누려야 하거든요. 아니, 삶을 누리려고 태어난 목숨이거든요. 사랑을 하려고 태어난 우리들입니다. 꿈을 키우며 환하게 빛내려고 얻은 목숨이에요.


  《도화동 사십계단》(청사,1990)이라는 시집에 실린 〈불타는 눈〉이라는 작품을 읽습니다. “신문팔이 새끼야아! / 신문팔이 새끼야! / 심술궂은 아이가 따라오며 놀렸다 / 때려주고 싶었지만 / 누가 들을까봐 도망치다가 / 목구멍이 뜨거워졌었다 / 신문팔이에겐 막 대해도 된다고 / 어디서 배웠을까 / 아이보다 세상이 더 무서웠던 / 그날부터 / 삼키는 눈물은 주먹처럼 굵어졌지만 / 눈이 눈물없이 불탔었다.” 삶을 배우지 못하는 아이들이 막말을 일삼고 맙니다. 사랑을 배우지 못하는 아이들이 이웃을 아끼지 못합니다. 꿈을 배우지 못하는 아이들이 도시에서 톱니바퀴 같은 노예가 되어 멍한 눈으로 바쁘게 구릅니다. 아이들 어깨가 너무 무겁습니다. 아이들 눈망울에 빛이 감돌지 못합니다. 아이들 얼굴에 환한 웃음이 없습니다. 아이들 목소리에 고운 노래가 감돌지 않습니다. 좋은 삶을 춤추도록 이끌 책 하나 어디에 있을까요. 4346.2.4.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내 삶에 한 줄, 새롭게 읽는 책

 


  예전에 읽은 책을 부러 다시 장만하기도 합니다. 책방마실을 하다가 문득 내 눈에 들어온 책 하나 가슴 두근두근 마음 콩닥콩닥 북돋우면, 살며시 집어들어 살살 쓰다듬어 봅니다. 그러고는 새로 장만합니다.


  지난날 읽은 책인 줄 알고, 내 서재도서관에 두 권 꽂힌 줄 알지만 굳이 새롭게 장만합니다. 서재도서관에 둔 책으로 다시 읽을 수 있지만, 이렇게 책방마실을 하는 길에 새삼스레 장만해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시외버스에 앉아 느긋하게 읽고 싶습니다. 1989년에 새 옷을 입은 신동엽 님 서사시 《금강》(창작과비평사)을 읽습니다. 첫머리에 “그 가슴 두근거리는 큰 역사를 / 몸으로 겪은 사람들이 그땐 / 그 오포 부는 하늘 아래 더러 살고 있었단다(7쪽).” 하는 이야기가 흐릅니다. 귀로 듣거나 눈으로 지켜본 이야기 아닌 몸으로 겪은 이야기를 헤아립니다. 남들이 들려준 이야기나 책에서 읽는 이야기 아닌 몸소 겪은 이야기를 돌아봅니다.

 


  내 몸에는 어떤 이야기가 아로새겨졌을까요. 나는 어떤 이야기를 가슴에 아로새기며 살아갈까요. 우리 아이들은 어떤 이야기를 저마다 아로새기며 하루를 누릴까요. 서사시는 흘러 “3천의 / 농민들이 대창 들고 관청에 몰려와 / 병사 내쫓고 아전 죽이고 / 노비문서 불살라버렸다(12쪽).” 하는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동학농민혁명 이야기입니다. 아니, 이에 앞서 이른바 ‘민란’이라 이름 붙은 지난 역사 이야기입니다. 흙을 일구던 이들은 대나무 깎아 창을 만들어 관청으로 몰려갑니다. 흙을 일구던 이들은 무기 하나 이름 하나 권력 하나 돈 하나 없이 두레와 품앗이로 살아갔습니다만, 이들 흙일꾼을 억누르거나 들볶거나 죽이기까지 하던 관청사람과 궁궐사람 때문에 더는 견디지 못하고 벌떡 일어서요. 이러면서 농사꾼들이 한 일은 ‘노비문서’ 불사르기예요.


  읽던 시집을 가만히 덮고 생각에 잠깁니다. 궁궐사람과 관청사람은 노비문서를 만들고 족보를 만들어요. 사람은 다 아름다운 사람인데, 저마다 계급을 짓고 울타리를 세우며 신분을 갈라요. 손에 흙 한 줌 물 한 방울 대지 않고도 기름진 밥을 누릴 뿐 아니라, 나랏일을 돌본다느니 민생을 걱정한다느니 읊어요. 참말, 나랏일을 돌보려 한다면 흙일꾼과 나란히 흙을 일구면 되는데요. 참으로, 민생을 걱정한다면 세금 거둘 생각 말고 공무원 권력과 양반 신분을 불사르면 되는데요.

 


  겨울날에도 눈부시게 파랗디파란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시를 다시 읽습니다. “사람은 한울님이니라 / 노비도 농사꾼도 천민도 / 사람은 한울님이니라 // 우리는 마음속에 한울님을 모시고 사니라 / 우리의 내부에 한울님이 살아 계시니라 / 우리의 밖에 있을 때 한울님은 바람, / 우리는 각자 스스로 한울님을 깨달을 뿐, / 아무에게도 옮기지 못하니라(21∼22쪽).” 하는 이야기가 흐릅니다. 그러고 보니, 초·중·고등학교를 다니며 ‘동학’이 무엇인지 배운 적 없습니다. 고등학교 철학 수업 때에도, 중학교 도덕 수업 때에도, 대학교 교양강좌 때에도, 어느 누구도 동학을 이야기하지 않았어요. 철학자나 지식인 가운데 동학을 이야기하는 사람도 없어요. 기독교 학교나 천주교 학교는 있지만 ‘동학 학교’는 없어요.


  동학은 종교일까요. 동학은 지식일까요. 동학은 학문일까요. 아니, 동학은 ‘흙 만지고 물 만지는 사람들 삶을 사랑하는 이야기’는 아닐까요. 어린이도 늙은이도 모두 한울님이라 말하고, 풀도 나무도 모두 한울님이라 밝히는 동학 이야기를 왜 오늘날 이 나라 이 땅 이 마을에서는 들을 수 없는지 고개를 갸웃갸웃해 봅니다.

 


  “봄이면 꽃 / 여름이면 하늘 / 가을이면 귀뚜라미 / 겨울이면 추위 // 전봉준은 자주 / 아들의 손을 이끌고 / 아내의 무덤 앞 찾아와 / 말없이 / 몇 시간씩 / 서 있다 가곤 했다. // 그림이었으리라(75쪽).” 하고 흐르는 이야기를 읽다가 우리 집 아이들 노랫소리를 듣습니다. 그래, 밥할 무렵이로구나. 집에서 살림하는 아버지가 얼른 밥을 차려야지. 너희 배고프겠네. 조금 더 놀면서 노래하렴. 아버지가 맛난 밥 예쁘게 차릴 테니까, 그동안 신나게 뛰놀렴. 마당에서도 뛰놀고, 마루에서도 뛰놀렴. 마당에서는 하늘바라기를 하고, 집에서는 누나와 동생 서로 사이좋게 아끼면서 놀렴.


  밥이 보글보글 끓습니다. 국이 자글자글 끓습니다. 밥상에 수저를 놓습니다. 나물을 버무리고, 무를 썹니다. 밥과 국이 다 되면 작은아이 것을 맨 먼저 뜹니다. 작은아이는 뜨거운 것을 못 먹으니, 맨 먼저 작은아이 것을 떠서 식힙니다. 이 다음으로는 큰아이 것을 뜨고, 어머니와 아버지 몫은 나중에 뜹니다. 이제, 날마다 새로운 밥을 즐겁게 먹을 때입니다. 4345.12.15.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2)

 

 

아이야, 너는 마음껏 놀며 생각날개를 펼치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 삶에 한 줄, 해맑게 읽는 책 ― 가을바람 누리는 책읽기

 


  가을 어귀에 들어서면서 가을바람이 여름바람하고 사뭇 다릅니다. 12월이 되면, 가을을 떠나 보내는 바람이 선뜻선뜻 차가우면서 서늘하겠지요. 눈을 이끄는 눈바람일 수 있고, 겨울비 뿌리는 비바람일 수 있어요. 고흥 앞바다부터 부는 바람결에 고흥 시골마을 들판을 가득 채운 누런 벼가 뿜는 내음이 묻어납니다. 들에 서면 온몸이 벼내음으로 빛납니다. 가을햇살과 가을내음이 싱그럽습니다. 배부릅니다.


  남도기행 이야기를 첫 꼭지로 담는 박완서 님 여행산문집 《잃어버린 여행가방》(실천문학사,2005)을 읽습니다. 첫머리를 여는 글 11∼12쪽에 “친구의 잘못이었는지 고의였는지 광주에서 해남까지의 장거리도 직행버스도 못 타고 수도 없이 정거하는 그냥 시외버스를 타게 됐다. 그러나 그동안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조금도 예기치 못한 일이었다. 내가 지금까지 해 온 여행은 과정을 무시한 목적지 위주의 여행이었다. 그게 얼마나 바보 여행이었던가를 알 것 같았다.”와 같은 대목이 있습니다. 천천히 밑줄을 긋습니다. 누구라도 도시에 살면, 또 서울에 살면, 어디에서 어디까지 가장 빨리 가는 길을 찾습니다. 사람들이 자가용에 붙이는 ‘길찾기 기계(네비게이션)’는 으레 가장 빨리 달리는 길을 알려줍니다. 골목을 누린다든지, 냇물이나 숲을 누린다든지, 조용하며 한갓진 길을 누리도록 알려주지 않아요.


  서울에서 부산으로, 또 서울에서 목포로, 또 서울에서 여수로 신나게 달린다는 고속철도도 그래요. 사람들이 더 빨리 가고 싶다 하니까 고속철도가 생겨요. 모든 역을 두루 돌며 천천히 달리는 기차는 사라져요. 직행버스가 늘어나면서 완행버스는 줄어들어요. 완행버스가 줄어들면서 시골길은 호젓해지되, 사람들 눈·코·귀·입은 시골을 차츰 잊습니다. 사람들은 숲을 모릅니다. 나무를 만나지 못합니다.


  박노해 님이 쓴 시를 그러모은 두꺼운 시집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느린걸음,2010)를 읽다가 〈무엇이 남는가〉라는 시를 오래도록 되읽습니다. 박노해 님은 “정치가에게 권력을 빼 보라 / 무엇이 남는가 // 부자들에게 돈을 빼 보라 / 무엇이 남는가 // 성직자에게 직위를 빼 보라 / 무엇이 남는가 // 지식인에게 명성을 빼 보라 / 무엇이 남는가 // 빼 버리고 남은 그것이 바로 그다 // 그리하여 다시 / 나에게 영혼을 빼 보라 / 나에게 사랑을 빼 보라 / 나에게 정의를 빼 보라 // 그래도 내가 여전히 살아 있다면 / 그래도 태연히 내가 살아간다면 // 나는 누구냐 / 나는 누구냐” 하고 노래합니다. 참말 나한테서 돈을 뺀다면 어떠할까요? 참말 나한테서 사랑을 뺀다면 어떠할까요? 돈을 뺄 때하고 사랑을 뺄 때에는 어떻게 다를까요? 둘 가운데 하나를 빼야 하는 갈림길에 선다면, 나는 돈과 사랑 가운데 나한테서 무엇을 빼면서 삶을 꾸릴 수 있을까요? 아니, 무엇을 빼거나 더는 삶이 아니라, 스스로 무엇을 찾거나 붙잡아서 누리는 삶이라 할까요?


  구드룬 파우제방 님이 쓴 청소년문학 《첫사랑》(양철북,2012)을 읽습니다. 211쪽에 “너한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내가 얼마나 일찍 눈치챘는지 아니? 사랑은 완전히 가릴 수 없단다. 특히 너처럼 아주 젊은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은 온몸에서 행복을 발산하지.” 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구드룬 파우제방 님은 1928년에 태어나셨으니 여든다섯 할머님입니다. 이 첫사랑 이야기는 1940년대에 독일이 이웃나라로 쳐들어가며 독일 젊은이가 이웃나라에서 애꿎게 죽고, 이웃나라 젊은이는 독일군한테 포로로 사로잡혀서 독일 시골이나 공장에서 부역을 해야 하던 일을 다룹니다. 누군가는 슬픈 전쟁을 일으키지만, 누군가는 맑은 사랑을 꿈꾸어요. 생각해 보면, 전쟁통에도 사랑을 꽃피우던 젊은 넋이 있어 이 지구별이 오늘날까지 이어질 수 있구나 싶어요. 사랑이 있었기에 아이들이 태어나고, 사랑이 있었기에 어머니들이 아이들을 아끼며 보살폈겠지요.


  로저 디킨 님은 《나무가 숲으로 가는 길》(까치,2011)이라는 책 33쪽에서 “나무는 오랜 시간 동안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 준다. 처음에는 우리가 그 나무를 베어 넘어뜨릴 때이고, 그 다음에는 싣고 올 때이며, 그 다음에는 톱질해서 장작으로 만들 때이다.” 하고 말합니다. 연필도 종이도 책도 모두 ‘나무’입니다. 편지종이도 편지봉투도 나무입니다. 가만히 보면, 종이돈도 나무라 할 만하고, 나무는 숲에서 벱니다. 우리는 어디에서나 숲을 누리는 사람이지만, 정작 숲을 잊는 사람이기도 하지 않나 싶어 고개를 갸우뚱해 봅니다. 가랑잎이 집니다. 뒤꼍 감나무와 뽕나무는 앙상한 몸으로 겨울을 맞이합니다. (4345.9.13.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 삶에 한 줄, 살며시 읽는 책

 


  책은 마음으로 읽습니다. 지식으로 읽는 책이란 없습니다. 누군가 지식을 가득 담아 책을 쓴다 하더라도, 읽는 우리들은 마음으로 읽습니다. 왜냐하면, 책 하나를 손에 쥐어 읽는 우리들은 스스로 삶을 가꾸거나 북돋우거나 살찌울 때에 스스로 즐겁거든요.


  대학교 졸업장이 내 이름을 높이지 않습니다. 값진 옷차림이 내 얼굴을 드높이지 않습니다. 새까만 자가용이 내 눈빛을 밝히지 않습니다. 오직 내 마음으로 내 이름을 빛냅니다. 오로지 내 마음으로 내 얼굴을 곱게 가꾸고 내 눈빛을 싱그러이 추스릅니다. 김원숙 님이 빚은 이야기책 《그림 선물》(아트북스,2011) 33쪽을 읽으면 “그러고 보면 삶을 움직이는 원동력은 아무래도 사랑이다.” 하는 말마디가 나옵니다. 그림쟁이가 그림을 그리든, 사진쟁이가 사진을 찍든, 글쟁이가 글을 쓰든, 저마다 언제나 ‘사랑’ 하나 있어 삶을 일굽니다.


  시골마을 할머니 할아버지가 흙을 만지며 숲과 들과 바다를 지킬 수 있는 힘이라면 그예 한 가지 ‘사랑’입니다. 딸아들은 모두 도시로 떠나 보내지만 정작 당신은 시골마을에 남아요. 딸아들이 도시로 당신을 부르려 해도 손사래를 칠 뿐, 시골마을을 떠나지 않아요. 허리가 아프네 눈이 어둡네 하지만, 시골뿐 아니라 도시에서 사람들 배부르게 먹을 온갖 곡식과 열매를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거두어요.


  편해문 님은 《아이들은 놀이가 밥이다》(소나무,2012)라는 책 53쪽에서 “대한민국은 작은 골목을 없애 도로를 만들고 동네 마당을 메꾸어 큰 건물을 지어, 이제는 아기자기한 골목도 마당도 보기 쉽지 않다. 골목과 마당이 사라지니 아이들도 함께 자취를 감추었다.” 하고 말합니다. 도시라는 곳은 돈을 더 만들고 돈을 더 벌며 돈을 더 쓰도록 나아가니까, 골목도 마당도 없애기 마련입니다. 나중에서야 겨우 나무 몇 그루 심고 공원 흉내를 내는데, 공원 흉내를 낸 그 자리는 지난날 숲이었어요. 처음부터 숲을 고스란히 살리면 될 노릇이지만, 도시에서는 숲을 되살리거나 지키지 않아요. 언제나 돈을 들여 무언가 뚝딱거립니다.


  깊은 가을날, 아이들 이끌고 바다로 마실을 갑니다. 사람들은 여름바다에서만 물놀이를 하는데, 봄바다에서도 가을바다에서도 물놀이를 즐길 만합니다. 겨울바다라고 물놀이를 못 즐길 까닭이 없습니다. 바다에서는 물을 밟고 만지며 튕길 수 있어 좋아요. 숲에서는 풀을 밟고 만지며 뜯어먹을 수 있어 즐거워요. 들에서는 바람을 쐬고 햇살을 누리며 풀내음 짙게 맡아요.


  돌이켜보면, 책이란 곧 삶이지 싶어요. 삶이 바로 책이지 싶어요. 바다에서 책을 읽어요. 논배미와 유자밭에서 책을 읽어요. 나락을 말리는 할머니 손길에서 책을 읽어요. 풀개구리 한 마리한테서 책을 읽어요.


  카렐 차페크 님은 《원예가의 열두 달》(맑은소리,2002)이라는 책을 쓰며 138쪽에서 “관청의 창가에는 아무것도 피어 있지 않거나 빨강과 흰색의 제라늄만이 피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관청에서 자라는 식물에 대해서는 공무원 또는 장관의 의지와 호의와 일정한 전통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리고 철도청 관리 아래서 식물은 가장 왕성하게 성장하며, 우체국과 전화국에서는 도무지 아무것도 피지 않는다.” 하고 노래합니다. 참말, 시골 군청이나 면사무소에서조차 ‘꽃’도 ‘풀’도 ‘나무’도 보기 힘들어요. 자동차 세우는 터만 널따랗습니다. 잔디밭조차 구경하기 어려워요. 건물은 커지기만 할 뿐, 숲이 늘어나는 일이 없어요. 사람들은 애써 수목원으로 나무내음 풀내음 즐기려 간다고 하지만, 정작 이녁 삶자리에 숲이 우거지고 나무가 푸른 잎사귀 흔들며 바람노래 들려주도록 하지 않아요.


  이선관 님 시집 《우리는 오늘 그대 곁으로 간다》(실천문학사,2000)를 읽습니다. 〈만약 통일이 온다면 이렇게 왔으면 좋겠다〉라는 짤막한 시를 찬찬히 곱새깁니다. “여보야 / 이불 같이 덮자 / 춥다 / 만약 통일이 온다면 이렇게 / 따뜻한 솜이불처럼 / 왔으면 좋겠다” 겨울날 솜이불 함께 덮는 ‘통일’이로군요. 겨울날 고구마 쪄서 나누어 먹는 ‘통일’도 되겠지요. 따순 봄을 함께 꿈꾸는 ‘통일’도 될 테고, 찬바람 싱싱 불어도 노랗고 하얀 꽃송이 뽐내는 가을 들꽃 어깨동무하며 바라보는 ‘통일’도 될 테지요. 삶을 살며시 읽으며 책을 마음 깊이 녹입니다. (4345.11.5.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 삶에 한 줄, 씩씩하게 읽는 책

 


  도시에서나 시골에서나 가을을 말합니다. 도시에서나 시골에서나 봄을 말합니다. 그런데 도시에서 가을이나 봄을 느끼기는 어렵습니다. 도시에서는 때때로 찻길 한켠 나무들이 노랗거나 빨간 잎사귀를 떨구어 가랑잎 수북한 모습을 만들어 주지만, 도시 청소부들은 ‘쓰레기 잔뜩 쌓였다’면서 힘겹게 치웁니다. 자가용 싱싱 모는 이들 또한 길가에 수북히 쌓인 가을잎을 눈여겨보지 않아요. 아니, 자가용 싱싱 몰며 신호등이랑 옆 자동차를 봐야지, 길가 가을잎을 살필 겨를이 없습니다.


  신영복 님은 《변방을 찾아서》(돌베개,2012)라는 책을 내놓으며 16쪽에서 “모든 교육은 인간교육이어야 하지 않을까.” 하고 말합니다. 참 맞는 말이로구나 싶어 무릎을 치지만, 이내 무릎을 살살 비빕니다. 사람을 가르치는 배움터가 아니라 한다면 학교라 하는 이름이 어울리지 않다고 느낍니다. 학교란, 사람을 가르치는 배움터입니다. 시험공부를 시켜 더 이름 높으며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보내려고 하는 데가 학교일 수 없어요.


  제가 살아가는 시골마을인 전남 고흥은 전라남도에서도 가장 외진 시골입니다. 해마다 사람 숫자가 사오천쯤 줄어드는 외진 시골입니다. 아직 어린이와 젊은이가 제법 남았으니 해마다 사오천쯤 사람들이 줄어든다 할 만할 텐데, 앞으로 열 해쯤 지나면 그때부터는 해마다 사오백쯤 줄어들겠지요.


  왜 이렇게 사람들이 줄어드는가 하면, 시골 아이들이 고등학교를 마치기 무섭게 고향마을을 떠납니다. 시험공부 잘 하던 아이들은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가느라 시골을 떠나고, 시험공부 그럭저럭 하던 아이들은 도시에 있는 대학교에 가느라 시골을 떠납니다. 시험공부는 그닥 못하지만 실업계 학교를 다닌 아이들은 도시에 있는 공장에 일자리를 얻어 시골을 떠납니다. 그래서 시골에서는 아이들이 고등학교를 마치면 거의 몽땅 도시로 가요.


  시골을 떠난 아이들은 시골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명절에도 바빠 웬만해서는 시골을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저는 두 아이와 함께 시골이 좋아 시골에 집을 얻어 살아가지만, 시골에서 나고 자란 다른 아이들은 도시에서 문화와 물질과 문명을 누리고 싶다고 말하면서 시골을 등집니다. 저는 두 아이와 함께 숲과 들과 바다를 언제나 누리니 즐겁지만, 시골에서 나고 자란 다른 아이들은 어릴 적부터 유치원과 보육원을 오가며 외려 숲이나 들이나 바다도 누리지 않으면서 도시에서 지내고픈 꿈을 키운다고 합니다.


  정진국 님이 쓴 《사진가의 여행》(포토넷,2012)이라는 책 95쪽을 읽다가 “존은 다른 사람과 다른 세상을 만났을 때 서로 질겁하지 않고, 정답게 눈길을 주고받을 때에나 나올 만한 사진을 찍었다.” 하는 대목에 밑줄을 긋습니다. 도시나 시골이나 사람이 살아가는 곳입니다. 더 나은 곳이나 더 좋은 곳은 없습니다. 스스로 사랑할 때에 사랑스러운 삶터이고, 스스로 아낄 때에 살가운 보금자리요, 스스로 즐길 때에 아름다운 삶자리예요.


  고흥군은 어디나 정갈한 시골이라 국립공원입니다. 공장도 골프장도 고속도로도 널따란 찻길도 송전탑도 발전소도 없는 데는 한국에서 고흥군 빼고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곳 시골 아이들은 저희 고향마을이 어떠한 삶자락인지 느끼지 못해요. 중학생도 고등학생도 학교 기숙사에 머물며 ‘도시에 있는 대학교’에 붙는 입시공부에 바쁘거든요. 고흥과 이웃한 여수나 보성이나 장흥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서울로 가고 싶습니다. 서울로 못 가면 인천이나 부산이나 대전이라도 가고 싶습니다. 도시가 어떤 곳인지 모르면서 도시를 바라지만, 막상 시골이 어떤 곳인지조차 모르며 시골에서 살아가는 오늘을 누리지 못해요.


  노정임 님 글과 이경석 님 그림이 어우러진 《땅속에 누가 살아?》(웃는돌고래,2012)라는 어린이책을 읽다가 62쪽에 나오는 “이렇게 동식물과 바위의 가루로 만들어진 흙들이 다 섞여서 지구를 덮고 있는 흙이 되어요.” 하는 대목을 가만히 되새깁니다. 흙이 있어야 논밭과 멧자락과 갯벌이 있어요. 논밭과 멧자락과 갯벌이 있어야 우리 먹을거리를 얻어요. 시골 아이가 도시로 간다 하더라도 시골이 있어야 밥을 먹고 삶을 누려요. 시골 아이가 시골을 떠나도 누군가 시골을 지켜야 사람들이 숨쉬고 살아갈 수 있어요. 씩씩한 시골아이는 어디에 있을까요. (4345.10.26.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