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고흥에서 여러 뜻있는 사람이 모여 나눈

토종씨앗 이야기를 옮겨 본다.

인터넷 <고흥뉴스>에 올린 글이다.

 

http://www.gh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886

 

느리더라도 튼튼하고 임자답게

― 고흥여성농업인센터 ‘토종 종자 이야기’ 첫 자리

 

 

  고흥여성농업인센터에서는 ‘토종 종자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를 2012년 12월 19일 저녁 일곱 시부터 고흥읍 전교조 고흥지부 사무실에서 마련했다. 이 자리에서 고흥여성농업인센터 이 아무개 씨는 ‘토종 씨앗’을 지역 농사꾼과 나누려는 뜻을 밝히고, 앞으로 고흥군에서 ‘고흥군에만 있는 토종 씨앗’을 슬기롭게 가꾸고 보듬어서 나눌 수 있는 길을 찾자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이 씨는 이론으로 헤아리는 ‘토종 씨앗 이야기’를 넘어, 고흥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스스로 흙을 아끼고 몸을 튼튼하게 살찌우며 이 삶터에서 스스로 임자답게 살아가는 길이 있으리라 생각한다고 이야기한다. 첫 이야기마당에서는 고흥생태문화모임 느티나무 회원들이 함께했다. 이 씨와 느티나무 회원들이 주고받은 이야기를 갈무리해 본다.

 

   
▲ 고흥여성농업인센터 ‘토종 종자 이야기’ 첫 자리가 열렸다.


- 강원도 종자를 갖고 와서 고흥에서 해 봤는데 여기서는 잘 안 돼. 강원도에 야생인 돌콩이 있어요. 쥐눈이콩보다 작은 게 있는데, 화순에서 심어 보는데 거기도 안 돼. 찰옥수수도 안 돼. 기후하고 토질 면에서 조금씩 차이가 있죠.
- 우리도 강원도 옥수수 심어 봤는데 안 돼요.
- 강원도는 추운 것도 있지만 물빠짐도 잘 돼요. 콩은 흙이 찰지면 안 돼요. 강원도는 마사토도 있고 한데, 호남 지역에서 콩 종자 구하기가 쉽지 않아요. 호남 두부와 충청 두부와 강원 두부를 여러 지역 콩으로 만들어 보았는데, 간수라든지 잘 몽글어지는 게 강원도 것이 가장 나아요. 그 중에서 조금 잘 되는 데는 구례하고 장성처럼 조금 추운 데 것이 잘 돼요. 고랭지 2부 능선에서는 잘 되더라고.


- 토종과 반대는 뭘까요?
- 외래? 개량?
- 왜 토종 씨앗을 써야 할까요?
- 토종은 씨를 계속 받아서 하잖아요. 그런데, 요새는 회사에서 유전자조작 한 것을 사서 쓰잖아요. 회사에서 유전자조작 한 것은 아무리 잘해서 갈무리하고 다음해에 심어도 안 돼. 씨앗회사가 몬산토나 이런 데 통합해서 그러니까 안 돼. 거기서 씨값을 계속 올릴 것 아녀. 고추도 모종 처음 사서 심고 나중에 씨 받아서 하려고 하면 쬐꼬만해.
- 토종 씨앗으로 하자는 것은 자본 논리에 예속되지 말자는 뜻인가요?
- 대부분 씨가 퇴화하는데. 고추라든지 옥수수라든지 그해에 받아서 다음해에 심으면 안 나와. 처음에는 길쭉하게 나오는 것이 다음해에 다시 심으면 10센티미터밖에 안 돼. 퇴화가 더딘 것도 있지만, 토종 씨앗은 유전자가 고정화되니까 씨앗을 받아서 다음해에 계속 심을 수 있다고.
- 콩은 다 유전자조작 콩으로 심어요. 사람들이 국산콩이라 하지만, 그것도 파고들어 살피면 다 유전자조작 콩이에요. 그런데, 그걸 본질은 안 찾고 유전자조작 콩만 심어서 먹거든. 강원도에 ㅌ고추가 있어요. 거기 종자는 강원도 자체에서 지키는 종자인데, 군에서 절대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해. 그 고추가 쬐만한데 빛깔이 되게 고와요. 그런데 그 씨를 군에서 보호하며 보급하거든. 고흥에서도 여기서 자체로 나눌 수 있는 씨를 찾아서 보급해야지. 진해에는 ‘앉은뱅이밀’이라고, 거기 어느 선생님이 토종 씨앗 한 가지만이라도 지키자 하면서 무료로 보급하는 종자가 있어. 고흥에서도 이곳에서 잘 될 만한 것을 이렇게 한 가지이든 두세 가지이든 잡고 해 봐야지.

 

   
▲ 토종 씨앗이 무엇이고, 어떻게 나눌 때에 좋은가 하는 이야기를 차분히 나눈다.


- ‘씨드림’ 행사를 할 때 나눠 주면, 마을 할머니들이 관심 많고 좋아해요. 당신이 잘 건사하시기도 하고, 아직 당신한테 남은 토종 씨앗을 기록하시기도 해요. 고흥에서도 알아보면 집집마다 토종 씨앗이 있을 것 같아요. 고흥만 쪽에 가면 야생팥이 있어요. 두원면 마을 할머니들한테 여쭈면, 그냥 팥을 쑤어서 팥죽을 먹으면 속이 쓰린데, 고흥만 쪽에서 저절로 자라는 야생팥을 먹으면 속이 편하대요. 그리고 야생팥은 불리지 않고 해도 팥이 잘 풀어진대요.
- 국가 차원 종자은행은 있나요?
- 있는데요, 이런 씨드림 행사도 전국농민회에서 따로 주체적으로 하고요. 1년에 한두 번, 전국에서는 번개팅처럼 나누는 자리를 마련해요. 씨앗을 심어서 거두기까지 여러 달 걸리니 꾸준히 진행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어요. 또, 토종 씨앗이 지역에 따라 잘 안 될 수 있으니, 그럴 때에는 애써 건사한 씨앗이 없어지는 셈이고요.
- 일부 콩은 수확이 더 안 나오기도 하니까, 돈 벌라고 하는 게 아니잖아요. 식량전쟁 날 때에, 비싼 종자 안 쓰고, 식량위기와 에너지위기는 같이 올 거니까, 그때에는 기계를 쓸 수도 없을 거고, 토종 종자는 화학비료나 퇴비를 안 주어도 일정 정도 생명력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미래를 보고 하는 거지요.
- 종자 회사가 어느 나라 것인가가 문제 아니지 않나요? 미국 것이라서 나쁘다가 아니고, 우리 것이라도 그것이 자본하고 연결되어 농민한테 피해가 갈 수 있지 않나요?
- 그 유전자조작 콩을 사서 쓰려면 로열티를 내야 하니까.


- 토종 종자로는 무슨 종자를 갖추셨어요?
- 콩과 팥이 주류고요, 오이도 있는데 실패했어요. 오이씨를 나누어 주었는데 잘 키워서 다시 씨를 받지 못하면, 결국 종자를 잃어버린 거지요. 나눠 줄 때 보면, 할머니들이 적극적으로 가져가시고요. 그런데, 그렇게 가져가시고 나서 더 이어지는 결과를 찾지 못할 때에는 아쉬워요.
- 빼깽이 고구마라고, 고흥에 예전부터 있었는데, 빼깽이가 뭔지 아세요? 읍내에 두 군데 있었는데, 썰어서 말린 게 빼깽이인데, 썰면 하얀 액이 많이 나와요. 그런데 지금 종자들이 하얀 물이 잘 안 나와요.

 

   
▲ 목화씨. 목화씨는 솜털을 낱낱이 벗기고 속에 있는 씨앗을 심어야 한단다. 씨를 오래 건사하자면, 이렇게 솜이 붙은 채로 건사한다고 한다.


- 토종을 왜 보존해야 할까요? 맛도 떨어지고 수확량도 적은데.
- 지금 배추씨 한 봉지에 1만 원인데, 앞으로 10만 원 주고 산다는 거지. 그러면 배추 심어서 팔지도 못해. 씨앗 사는 값도 안 나오니까.
- 아까 이야기 나왔듯이, 고흥만에서 스스로 나는 들팥은 쑤어 먹어도 속이 좋다고 했어요. 사다 먹는 팥은 속이 안 좋다 했고요. 저희도 아이들과 살아가며 먹어 보면 느끼는데, 토종 씨앗으로 심어 비료와 풀약 안 친 곡식이나 열매를 먹으면, 맛이 아주 달라요. 요즘 사람 입맛에는 안 맞을는지 모르나, 더 깊고 짙은 맛과 냄새가 있어요. 그리고, 토종 씨앗으로 제대로 지은 곡식과 열매는 많이 안 먹어도 배가 부르고, 배가 오래도록 안 꺼져요. 그렇지만, 가게에서 쉽고 싸게 사다 먹는 풀이나 곡식이나 열매는 더 많이 먹어도 배가 쉬 꺼지고, 속이 더부룩해요. 그러니까, 토종 씨앗으로 농사를 지으면, 수확량이 적다 하더라도 굳이 많이 안 먹어도 되기 때문에, 적게 먹어도 배부르니까, 우리 몸에도 한결 나으면서 우리 땅도 살리고 여러모로 좋다고 느껴요.
- 요즘 쓰는 씨앗 거의 다 필리핀 같은 나라에서 수입한다고 하는데, 우리 토양이나 체질하고 안 맞는다고 하는 거지. 동양의학에서는 병이 나면 10리 반경에서 약을 구할 수 있다고 하는데, 그것도 먹는 음식에 따라 스스로 낫게 할 수 있지. 토종 씨앗으로 농사를 지어서 먹으면, 병도 안 걸리고 몸도 나아진다는 거지.

 

   
▲ 고흥에서도 토종 씨앗을 아끼고 지키는 모임과 움직임이 몇몇 개인과 고흥여성농업인센터와 아울러, 고흥군에서도 마음을 기울여 함께 애쓸 수 있기를 빈다.


- 씨앗은 어떻게 나눠 주나요?
- 무작정 나눠 주는 것은 아니고, 기르며 기록하고, 그 종자를 늘 확보한다는 원칙이 있어요. 씨앗을 가지면서 지킨다는 거지요. 일정 내 면적을 할애해서 유지해 줄 필요가 있다고 느껴요. 자연을 유지하는 것은 원 종자를 유지하는 것과 맥락이 같다고 할 수 있어요. 내 씨앗이 어디에서 기원했고, 기록하며, 수확할 때에 이웃을 불러 같이 나눠요. 씨앗만 나눠 주지 않고, 서로서로 씨앗에 대한 기록을 주는 거지요.
- 22일 토요일에 장흥에서 ‘토종 종자 나눔회’가 있어요. 제가 거기 가려고 하거든요. 토종 종자를 300∼400가지 가진 분이 있는데, 100가지 종자를 전시한대요.


- 고흥에만 있는 종자가 있을까요?
- 아직 없는 줄 알아요. 시도는 있었지만, 제대로 안 되었어요. 앞으로는 고흥에서도 고흥 종자를 찾아야지요. 토종 종자라고 하는데, 토종 종자 찾는 일을 하면서, 누구보다 나 스스로 변화한다고 느껴요. 내 자리와 뿌리를 찾으면서 삶을 더 낫게 변화시킨다고 느껴요.
- 자기 생활에서 접목이 되어야 유지가 되지. 이념적으로는 못 지켜 가요. 제가 기르는 감자가 토종인지 아닌지 몰라도, 부모 때부터 심은 건데, 요즘 바이러스 떠돈다고 하는데, 계속 심어서 팔고 먹고, 또 심고 그러는데, 제가 심은 것은 사다 심은 감자보다 수확량은 떨어지지만, 보관이 잘 되고, 우리 감자 받아서 먹어 본 사람들은 다 맛이 좋다고 해서, 나는 돈 받고 감자 팔 만큼은 못 되지만, 내가 나눠 주면 먹으쇼 하는 마음으로 심어서 길러.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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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골마을에서 보일러 고치기

 


  우리 집 보일러가 말썽이 난 지 여러 달 되었는데, 오늘 비로소 고칠 수 있었다. 그렇다고 어떤 부속품을 갈거나 새로 붙이지 않았다. 방바닥으로 물이 들어오는 흐름을 다스리는 손잡이 하나를 움직이고 나서 그동안 일어난 말썽이 모두 사라졌다.


  이제껏 어떤 일이 있었나 헤아려 본다. 맨 먼저 면소재지 ‘보일러 고치는 집’에 연락을 했다. 면소재지 ‘보일러 고치는 집’은 전화를 안 받거나, 전화를 받아도 바쁘다는 핑계로 고작 2∼3분 거리인 시골마을 우리 집으로 찾아오지 않았다. 다음으로, 읍내 ‘보일러 고치는 집’에 전화를 해 보았다. 우리가 들어와 사는 시골집에서 예전에 살던 할머니가 기둥에 붙인 전화번호가 있기에 이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어 보는데, 오겠다 하고는 사흘이 되도록 전화도 없고 오지도 않는다. 이번에는 전화번호부를 뒤져 ‘보일러 만든 회사 서비스센터’ 고흥지점에 전화를 건다. 전화를 받은 지점 일꾼은 ‘수리기사가 굳이 가지 않아도 된다’면서 이것저것 나보고 손수 해 보라고 차근차근 알려준다.


  곰곰이 돌아본다. 마지막에 전화를 걸었을 때 나한테 차근차근 알려준 분이 ‘보일러를 다 고쳐 주었다’고 할 만하다. 다만, 이분은 한 가지를 못 짚어 주었을 뿐이고, 우리 집으로 찾아온 수리기사는 딱 한 마디를 나한테 들려주며 보일러가 제대로 돌아가도록 해 주었다. 그러니까 보일러 수리기사가 우리 집에 왔어도 이녁이 한 일은 아무것 없다 할 만하지만, 말 한 마디를 해 주어 보일러가 제대로 돌아갔으니 수리기사로서는 할 일을 다 한 셈이라 하리라.


  내 옆지기는 나한테 말한다. 시골에서 살자면 무슨 일이든 스스로 다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보일러를 놓아 겨울에 불을 때기로 했다면 보일러를 고치거나 손질하는 일도 스스로 할 수 있어야 한다. 스스로 만지고 다스리며 뚝딱거릴 수 있어야 한다. 더없이 옳은 얘기이다. 나는 올가을에 비로소 보일러 만지는 아주 작은 손길을 하나 익혔다. (4345.11.17.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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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2-11-17 22:03   좋아요 0 | URL
오, 멋져요, 된장 님...
뭔가 잘 만져서 잘 고치시는 분이 저는 멋져 보이더라고요.
그리고 이 페이퍼, 좋아요. 생활의 향기가 묻어날 뿐만 아니라 저처럼 도시에서
사는 사람에겐 이런 글이 구수하답니다. ^^

숲노래 2012-11-18 04:21   좋아요 0 | URL
잘 만져서 잘 고치지 않았어요 ^^;;;
두어 달이나 내버려 두다가
이제서야 겨우 고칠 수 있었어요 ㅠ.ㅜ

누구나 손쉽게 할 수 있던 일인데
이를 제대로 가르쳐 주거나 알려서 이끄는 사람이 없어
그동안 몰랐을 뿐이더라구요.

..

pek0501 님은 좋아하시지만,
다른 분들은 그닥
제 서재를 안 좋아하는구나 싶어요.

하기는, 그도 그럴 까닭이
저희 식구처럼 도시를 떠나 시골서 사는 사람은 매우 적어요.
다들 그냥저냥 도시에서 살거나
도시가 좋아 도시에서 살아가요.
꽤 많은 도시내기한테는 제 글이 퍽 꺼림칙하거나 싫거나
그렇기도 하겠구나 싶어요.

게다가 '집안일 안 하는 아저씨와 아가씨'들이 제 글을
그닥 안 좋아하는 듯하기도 하더군요.

무언가 생각이 깨였다 싶은 아저씨들도
제가 집안일을 도맡고 아이키우기까지 도맡는다고 할 때에는
어딘가 '이상한 사내'라고 바라보더군요.

참... 이 나라가 얄딱구리해서 말예요...
스스로 바보로 살아가지 말고,
스스로 '아름다운 사랑이'로 살아가면 참으로 기쁜데...
 

 

 시골 사는 즐거움이라면
 [고흥살이 13] 아이들 마을놀이

 


  시골 사는 즐거움이라면 아이들 마을놀이가 아닌가 느낍니다. 아이들은 자동차 빵빵 뿡뿡 시끄럽지 않은 시골에서 맨발로 논을 달리고, 고샅길을 이리저리 저희 땅으로 삼아 돌아다닙니다. 마당에서도 놀고, 마을에서도 놉니다.


  아이들은 어린이집이나 유아원이나 보육원이나 유치원에 보내야 하지 않아요. 아이들은 집과 마을과 숲에서 저희끼리 신나게 뛰놀 수 있으면 돼요.


  나라에서 보육비 지원을 해 주어야 보육정책이 아름답지 않습니다. 어버이로 살아가는 어른들 누구나 회사일에 적게 얽매이면서 아이들하고 도란도란 어울릴 겨를이 넉넉할 때에 비로소 아름다운 보육정책이 되리라 느껴요. 아이들 얼굴도 보기 힘든 오늘날 문명사회가 참말 ‘문명’다운지 알쏭달쏭해요. 맞벌이를 해서 돈은 많이 번다지만, 아이들은 돈을 몰라요. 아이들은 돈을 쓰지 않아요. 아이들은 그저 신나게 뛰놀 뿐이에요.


  아이들이 개구지게 뛰놀고 달리듯, 어른들도 개구지게 뛰놀고 달려요. 이름표도 계급장도 모두 내려놓고, 나이값도 밥그릇 숫자도 모두 내려놓으며 즐겁게 뛰놀고 달려요. 가을바람을 쐬고 가을햇살을 맞으며 가을내음을 듬뿍 들이켜요. (4345.11.10.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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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골사람 병원 안 가기

 


  나는 도시에서 살 적에도 병원을 가지 않았다. 왜 안 갔느냐. 병원을 생각조차 안 하고 살았으니까. 나는 내 삶을 꾸릴 뿐이지, 이렇거나 저런대서 병원에 갈 일이란 없다고 받아들였다. 도시를 벗어나 외진 두멧자락 시골에서 살아가는 동안에도 병원을 가지 않는다. 왜 안 가느냐. 병원이란 내 삶자락 가까이 없기도 하고, 생각할 까닭이 없기도 하며, 하루하루 새롭게 맞아들이는 삶이 기쁘니까.


  병원을 드나드는 누군가를 떠올려 본다. 왜 병원을 드나들까. 병원을 드나들며 ‘아픔’이나 ‘슬픔’이나 ‘생채기’나 ‘멍’이 아물까. 병원을 드나들며 ‘무언가 되겠지’ 하는 생각뿐 아닐까.


  너무 모르는 사람들은 잘못 생각한다. 시골에는 병원이 없으니 ‘아플 때에 어떡하느냐’ 하고 걱정하는데, 시골에는 아플 일이 없고 아픈 사람이 없으니 병원이 있을 까닭이 없다. 숲과 멧자락과 냇물과 들이 있으니, 사람 아플 일이 없다. 먼 옛날 사람을 죽이던 돌림병이란 무엇인가. 모두 도시에서 비롯한 죽음이다. 모두 도시에서 권력을 거머쥔 이들이 삶자락을 거칠게 짓밟거나 끔찍하게 억누르면서 생겨난 죽음이다. 전쟁을 일으키고 정쟁을 벌이면서 ‘시골 숲사람 삶’을 마구 어지럽혔다. 무거운 세금과 피말리는 소작료를 잔뜩 얹으니, 숲사람이던 시골사람 누구나 시름시름 앓다가 쓰러질밖에 없었다. 병원이 없어서 쓰러진 사람은 없다. 모진 미움과 끔찍한 전쟁이 사람 스스로 사람 죽이는 꼴이었다.


  도시에 살던 사람이 도시를 벗어나 시골로 간다든지, 시골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 그예 시골에서 살아간다든지, 시골에서 삶자리 마련해서 뿌리내리려는 사람은 ‘병원에 갈 마음’이 없다. 몸이 아프면 내 몸이 의사요 내 손이 약손이다. 몸이 아프도록 일할 까닭이 없다. 몸이 즐거울 만큼 일한다. 마음이 흐뭇하도록 삶을 일군다. 몸이 가볍고 마음이 곱다면, 어느 누구라도 아플 일이 없다. 몸이 가볍지 않고 마음이 곱지 않으니, 자꾸자꾸 몸이 처지거나 힘들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병원을 곁에 둘밖에 없다. 스스로 톱니바퀴 구실을 하느라 몸이 메마르고 지친다. 스스로 쳇바퀴 구르는 삶에 얽매이면서 마음이 허물어지거나 다친다. 도시사람 아픈 몸은 시골에서 여러 날 조용히 지내면 나을 수 있지만, 좀처럼 톱니바퀴 굴레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도시사람 아픈 마음은 시골에서 푹 쉬며 숲바람을 쐬고 들햇살을 쬐면 달랠 수 있는데, 참말 쳇바퀴 수렁에서 헤어나지 않는다.


  아픈 사람들아, 부디 병원 말고 시골로 오렴. 시골로 와서 몸도 마음도 홀가분하게 내려놓고 맑은 바람과 밝은 햇살을 마시렴. 싱그러운 물과 고운 밥을 맞아들이렴. 약 아닌 사랑을 먹고, 처방전 아닌 믿음을 가슴속에 새기렴. (4345.10.31.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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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름달 지는 시골

 


  보름달빛 하얗게 온 고을과 들판을 적신다. 달빛이 아주 환해 길과 집과 들이 훤하게 보인다. 밤하늘이 그리 깜깜하지 않다. 달빛을 받으며 훤히 열린다. 그러나, 이 달빛은 깊은 시골에서만 달빛이 될 뿐, 면내나 읍내로 나가더라도 전깃불빛한테 가로막힌다. 도시사람은 달빛이 있는 줄 느낄까. 도시사람은 별빛이 나란히 온 지구별을 감싸는 줄 생각할까. 달을 느끼지 않고 별을 바라보지 않으며 해가 뜨더라도 고작 하루가 되풀이되는 줄 여기기만 한다면, 삶을 누리는 보람은 어디에 있을까.


  보름달 지면서 하늘은 한결 까맣게 빛난다. 밤하늘이 까맣게 빛나면서 온갖 별이 반짝인다. 비로소 미리내를 볼 수 있고 아주 자그맣게 보이는 별을 만날 수 있다. 저 멀디먼 별 가운데에는 지구에서 보내는 빛을 받는 곳도 있겠지. 저 멀디먼 별나라에서는 지구빛을 어떤 빛으로 맞아들이거나 느낄까. 지구별 스스로 빚는 빛으로 느낄까, 지구별을 갉아먹는 전깃불빛 매캐한 공해덩어리 빛으로 느낄까. (4345.10.29.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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