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영화 〈플랜더스의 개〉


 이향원 님이 그린 만화책 《플랜더스의 개》를 읽는다. 쿠로다 요시오(黑田昌郞) 님이 1975년에 만든 만화영화 〈플랜더스의 개〉도 본다. 이제 이야기책으로 위다 님 글책을 읽으면 마무리된다. 맨 먼저 위다 님 글책을 읽었어야 할 텐데, 어느 책으로 읽어야 좋을는지 몰라 오래도록 망설였다. 누리책방에서 살펴보면 온갖 출판사에서 갖가지 판으로 뜨는데 이 가운데 어느 책이 우리 말로 제대로 옮긴 판일까. 이 많은 책 가운데 영국사람 위다 님이 쓴 문학책을 우리 글로 알뜰히 풀어냈다고 할 수 있을까.

 네 살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디브이디를 본다. 그림을 그리려는 네로를 바라보는 할아버지가 네로한테 기운을 북돋운다면서 한 마디를 들려준다. 네로는 기운을 얻고 씩씩하게 그림그리기를 한다. 그리고 이날 저녁, 네로는 제 살가운 동무 얼굴을 그리면서 할아버지한테 혼잣말처럼 이야기한다. 그림그리기를 놓고 아주 놀라우면서 틀림없는 이야기가 할아버지와 어린이 입에서 조용히 흘러나온다. 학교 문턱은 밟아 본 적이 없고, 이름나다는 분한테서 배운 적 또한 없는 두 사람이지만, 서로를 아끼며 사랑하는 나날이 시나브로 빚어낸 아름다운 말마디라고 여겨, 한손으로 아이 머리를 쓰다듬다가 얼른 종이에 옮겨 적는다.


 할아버지 :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그림을 게으름뱅이가 그릴 수는 없겠지.
 네로 : 마음이라는 건 어떻게 해야 그릴 수 있을까요. 조르쥬의 진짜 마음을 그릴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따스한 사람들 삶을 따스한 눈썰미로 바라보면서 따스한 손길로 담아냈기 때문에 《플랜더스의 개》는 널리 사랑받을 수 있다고 느낀다. 아름다움은 따스한 넋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따스한 눈썰미와 손길에서 비롯한다. (4344.3.14.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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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원의 집》 읽기


 모두 아홉 권으로 된 《초원의 집》 가운데 둘째 권을 읽기로 한다. 로라 잉걸스 와일더 님이 일군 아름다운 옛이야기를 담은 책이기에 후딱 읽어서 치울 수 있으나, 퍽 천천히 읽으려 생각했기 때문에 지난해에 첫째 권을 읽었고 올해 들어 비로소 둘째 권을 펼친다. 내 마음 같아서는 올해에는 둘째 권 이야기만 읽으며 곰삭인 다음 이듬해에 셋째 권을 읽고 싶다. 한두 해 만에 써 내려간 책이 아니라 온삶을 일군 땀방울을 알알이 담은 책인 만큼 금세 읽어치울 수 없다. 나는 아홉 해에 걸쳐 해마다 한 권씩 읽을 수 있다면 더없이 좋으리라 생각한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아이랑 씨름하며 비로소 아이를 재운 뒤 고단한 몸으로 《아기가 온다》(실러 키칭거 씀)를 펼친다. 오뉴월에 태어날 둘째를 생각하면 진작에 다 읽었어야 할 책이지만 아직 못 끝냈다. 읽기가 너무 더디다. 몸이 너무 고단해서 그런가 싶어 책을 덮는다. 《초원의 집》 둘째 권인 “대초원의 작은 집”을 펼친다. 마흔다섯 쪽을 훌쩍 넘긴다. 한참 책에 빠져들다가 흠칫 놀란다. 책을 덮는다. 나도 어쩔 수 없이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를 더 즐길밖에 없다지만, 《초원의 집》만 이토록 빨리 읽으면 어떡하나.

 이듬날, 《아기가 온다》를 다시 펼친다. 이 책 또한 한꺼번에 다 읽어치울 수 없는 책이지만 너무 더디 읽어도 안 되는 책이다. 하루에 스무 쪽이나 서른 쪽쯤은 읽어야 하지 않느냐 생각한다. 날마다 꼭 이만큼씩 읽으며 내 생각과 삶을 찬찬히 다스릴 수 있어야 한다고 돌아본다. 책에서는 책대로 첫째 아이와 둘째 아이를 헤아리고, 삶에서는 삶대로 우리 집식구 살림살이를 살펴야겠지.

 오늘 아침에는 갈치조림국을 끓인다. 조림도 국도 아닌 어설픈 조림국을 끓인다. 감자와 무를 바닥에 깔고 토막갈치를 얹은 다음 버슷과 봄동을 더 얹은 국이다. 갈치는 감자와 무가 어느 만큼 익은 다음 얹었어야 했는데, 함께 끓여도 되겠거니 하고 생각하다가 그만 갈치를 너무 끓이고 말았다. 감자와 무는 한결 맛나게 되었으나 갈치는 살짝 퍽퍽하다. 그래도 아이와 옆지기가 갈치하고 감자하고 무하고 버섯하고 봄동하고 잘 먹어 주니 고맙다.

 날마다 온갖 반찬과 찌개를 끓일 수는 없다. 그저 날마다 한 가지씩 알뜰히 차리는 밥살림만큼은 할 수 있다. 더 못하지만 조금씩 하는 살림을 꾸려야지. 집안 치우기를 말끔히 해내지 못할지라도 아주 어질러지지 않도록 갈무리하면서 쓸고닦기쯤은 바지런히 해야지. 먼지가 쌓이지 않도록 돌봐야지. 우리 집에도 내 마음에도 내 가슴과 머리에도 먼지가 쌓이지 않도록 손길을 잘 추슬러야지. (4344.3.14.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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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화책 《아빠는 요리사》 111권


 만화책 《아빠는 요리사》 111권을 사다. 예전부터 이 만화책을 볼까 말까 망설이다가 그예 안 보면서 지냈다. 50권쯤 나왔을 무렵 ‘아이고, 50권이나 되는 만화책을 언제 다 사서 보나.’ 하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생각하며 지나치고 보니 어느새 100권이 나왔다. 그래, 100권까지 되고 보니 ‘으악, 100권이나 되면 이 만화책을 다 장만하자면 돈이 얼마가 되지? 눈알이 핑핑 도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하며 하루하루 지나고 보니, 이제는 111권까지 나온다.

 예쁘게 쌓인 만화책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만화책방에 찾아간 나는 《아빠는 요리사》 111권을 두리번두리번 바라본다. 바로 이 자리에서 이 111권부터라도 읽자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아마 머잖아 150권이 나오는 모습을 볼 테며, 어느덧 200권까지 나오는 모습을 마주할 테지. 이런 생각으로 살아가면, 나로서는 내 눈을 고이 감아 흙으로 돌아가는 때까지 《아빠는 요리사》를 한 권조차 못 보며 지내겠지.

 곰곰이 생각한다. 그래, 앞선 백열 권은 못 읽을 수 있다. 이제부터 읽으면 되지. 만화책방 일꾼한테 여쭈니, 앞쪽 1권부터 100권 사이에는 다시 안 찍는 책이 있기 때문에 짝을 다 맞추기란 몹시 힘들단다. 그러니까, 앞엣권을 사자고 한다면 배부른 꿈일 수 있다. 앞엣권을 빈틈없이 장만해서 읽어도 기쁠 테지만, 111권부터 읽어도 기쁜 일이 되리라 본다. 바야흐로 111권째를 그린 만화쟁이 한 사람 손길과 마음길을 곱씹으면서 이 한 권에 깃든 사랑과 꿈을 내 가슴으로 받아들이면 좋으리라 생각한다.

 집에서 밥하기를 도맡는 아버지로서, 나는 우리 살림집에서 우리 살붙이한테 어떠한 밥을 어떠한 맛이 나도록 어떠한 손품을 들여 얼마나 알뜰살뜰 사랑스레 차리는가를 돌아본다. 아이가 밥상머리에서 딴짓을 하거나 제대로 말을 안 듣는다며 골을 부리면서 무서운 얼굴을 하지 않느냐 되씹는다. 아버지로서 사랑을 담아 밥상을 차리면 아이 또한 시나브로 아버지 사랑을 느끼면서 즐거이 먹지 않겠는가. 채근한대서 더 맛나게 먹을 수 없다. 닦달하거나 나무란대서 아이가 밥을 더 기쁘게 먹을 수 없다. 차리는 마음은 차리는 마음대로 웃음으로 차리고, 차린 밥상 앞에서 다 함께 조용히 비손을 하면서, 오늘 우리한테 좋은 먹을거리가 되어 준 목숨한테 고맙다고 꾸벅 절을 하면 넉넉하다. (4344.3.5.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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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공원을지키는시민모임 소식지에 넣는 글을 하나 쓰다. 


 함께 읽는 책 1 : 삶을 일구는 결대로 책을 사랑합니다


 첫째 아이를 낳던 지난 2008년에 《티베트 의학의 지혜》(다이쿠바라 야타로 씀,박영 옮김,여강 펴냄,1991)라는 책 하나를 헌책방에서 만났습니다. 두 어버이한테서 사랑으로 받은 목숨을 두 사람이 또 다른 사랑으로 이루려 했던 첫째 아이 목숨이기에, 사람을 돈값으로 헤아리면서 갖은 항생제와 예방주사와 처방전만을 쓰는 병원에서는 아이를 낳고 싶지 않았던 우리 식구한테 이 책은 여러모로 고마웠습니다. 판이 끊어져 헌책방 아니고서는 찾아볼 길이 없는 책이지만, 오래도록 헌책방마실을 즐긴 터라, 반가우면서 고맙게 맞아들였습니다.

 둘째 아이를 낳을 올 2011년을 앞두고 《아기가 온다》(실러 키칭거 씀,강영숙 옮김,하늘출판사 펴냄,1995)라는 책 하나를 또 헌책방에서 만납니다. 첫째 아이를 집에서 낳으려 했으나 끝내 집에서 못 낳고 병원으로 실려 갔으나, 둘째 아이는 집에서 즐겁게 맞이하고 싶어 이 책을 읽습니다. 둘레에서 집에서 아이를 낳으라 하는 사람이 없을 뿐더러, 집에서 아이를 낳으면 끔찍하거나 나쁜 일이라도 일어날 듯 여기는 터라, 할머니한테든 할아버지한테든 도움말을 듣거나 도움을 받기 퍽 어렵습니다. 사람한테서 ‘아이 낳는 슬기’를 귀담아듣기 힘들다면 책을 살피며 ‘아이 낳을 슬기’를 우리 스스로 깨우쳐야 합니다. 비록 책 하나 읽는다고 모든 일을 알뜰히 해낼 수 있지는 않고, 책 하나에는 모든 자리 모든 때를 밝히는 이야기를 담을 수 없지만, 몸으로 부대낀다 하더라도 모든 자리 모든 때를 스스로 빈틈없이 깨닫거나 깨우치지는 않습니다. 내가 미처 살피지 못하거나 돌아보지 못하는 대목을 새삼스레 알아채거나 느끼는 길잡이가 됩니다.

 인터넷에 ‘안전한 예방접종을 위한 모임’이 있습니다. ‘안예모’라고 찾기창에 적어 넣으면 손쉽게 찾아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예방접종이 그저 안전하다고만 여기는 분이 참으로 많은데, 예방접종이란 병이 일어나기 앞서 병원균을 화학조합으로 만들어 사람들 몸에 미리 집어넣는 일입니다. 살아숨쉬는 목숨인 병원균이 아니라 화학조합으로 만드는 죽은 병원균입니다. 오늘날 환경재앙을 걱정하면서 라면이나 과자에 엠에스지를 안 넣는다고 다들 떠들썩하게 밝히지만, 엠에스지는 안 넣으면서 다른 화학조합물은 엄청나게 넣습니다. 아마, 아이 키우는 어버이들은 엠에스지 같은 화학조합물 깃든 먹을거리를 아이한테 안 먹이겠지요. 그러면 예방접종은? 예방접종을 아이한테 거의 어김없이 맞히면서 예방접종 성분이 무엇인지를 살피는 어버이는 몇 사람이나 될까요. 《예방접종 어떻게 믿습니까?》(스테파니 케이브 씀,차혜경 옮김,바람 펴냄,2007) 같은 책이 하나 있는데, 이 책을 읽은 사람을 아직 제 둘레에서 만나지 못했습니다. 의사로 일하든 간호사로 일하든 아이를 낳아 키우든 환경운동을 하든 진보나 개혁을 외치든 지식인이라 하든 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든, 예방접종이 무엇인지 옳게 헤아리는 분을 만날 수 없습니다.

 스물세 권에 이르는 만화책 《우주소년 아톰》(데즈카 오사무 그림,박정오 옮김,학산문화사 펴냄,2001)이 있습니다. 이 만화책을 찬찬히 새겨읽은 분이 얼마나 있을는지 모릅니다. 아이한테 이 만화책을 사 주는 어버이가 있을는지 모르고, 이 만화책을 제대로 즐기는 어린이나 어른이 얼마쯤 있을지 또한 모릅니다. 1951년부터 그렸다는 만화 《우주소년 아톰》이니, 우리로 보자면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때에 나온 로봇만화입니다. 옆에서는 죽느냐 사느냐 하는 마당에 일본에서는 ‘뭐 저놈들은 1950년대에 2000년대 공상과학만화 따위나 그리며 키득키득거린담?’ 하고 여길 만한지 모르지만, 데즈카 오사무 님은 일본이 전쟁미치광이 짓을 하던 때에 군수공장으로 끌려가 억지로 일을 해야 하면서도 틈틈이 땡땡이를 치며 만화를 그렸습니다. 꿈도 삶도 평화도 사랑도 사람도 아무것도 없이 메마르며 팍팍하고 슬픈 일본이라는 나라에서 당신 스스로 꿈과 삶과 평화와 사랑과 사람과 모두를 보듬으면서 아끼고픈 마음으로 만화를 그렸습니다. 《우주소년 아톰》은 바로 이 모두를 풀어서 보여주는 따스한 열매입니다. 일본사람이 《우주소년 아톰》을 그토록 사랑할밖에 없던 까닭은 오직 하나입니다. 아무도 사랑을 말하지 않던 때에 배를 곯으며 사랑 담는 만화를 그렸고, 누구도 평화를 외치지 못하던 때에 가난에 찌들면서 평화를 외치는 만화를 그렸어요.

 지난겨울에 나온 《텃밭 속에 약초》(김형찬 씀,그물코 펴냄,2010)를 진작 장만했지만 아직 한 쪽조차 못 펼쳤습니다. 겨우내 읽었으면 곧 맞이할 봄에 온 들과 멧자락에 돋을 봄나물을 둘러보며 우리 멧골집 둘레 좋은 풀을 사귈 수 있을 텐데, 집살림하고 아이돌보기 하면서 좀처럼 이 책을 펼칠 짬을 못 냅니다. 그러나, 이렇게 책상맡에 얌전히 모셔 놓았으니 언제라도 읽을 수 있겠지요.

 아이하고 함께 살아가면서 아이하고 함께 즐길 책을 찾아서 읽고 같이 보듬습니다. 아이를 낳은 옆지기하고 나란히 살아가기에 옆지기하고 서로 즐길 책을 장만해서 읽으며 도란도란 이야기꽃 피웁니다. 누구나 살아가는 대로 일하고 놀며 책을 읽습니다. 삶에 따라 책을 느끼고, 삶을 일구는 결대로 책을 사랑합니다. (4344.2.11.쇠.ㅎㄲㅅㄱ)


《티베트 의학의 지혜》(다이쿠바라 야타로 씀,박영 옮김,여강 펴냄,1991)
《아기가 온다》(실러 키칭거 씀,강영숙 옮김,하늘출판사 펴냄,1995)
《예방접종 어떻게 믿습니까?》(스테파니 케이브 씀,차혜경 옮김,바람 펴냄,2007)
《우주소년 아톰 1∼23》(데즈카 오사무 그림,박정오 옮김,학산문화사 펴냄,2001)
《텃밭 속에 약초》(김형찬 씀,그물코 펴냄,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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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화영화 〈빨간머리 앤〉


 만화영화 〈빨간머리 앤〉 디브이디를 사려고 했으나 모두 품절이 되어 몇 해 앞서부터 장만하지 못했다. 고작 하나만 겨우 장만했는데, 이 디브이디 하나는 인천에 살던 때에 이마트에 갔다가 하나 보여서 장만한 녀석. 1편부터 5편까지만 있으니 이 디브이디를 보면 늘 1편부터 5편까지만 볼밖에 없다. 인터넷으로 찾아보면 누군가 고맙게 올려준 파일에 따라 처음부터 끝까지 볼 수 있기도 하다. 지난해에는 이렇게 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 다시 본 적이 있다.

 요즈음, 아이는 만화영화 〈빨간머리 앤〉에 꽂혀 날마다 이 만화영화를 또 보자고 한다. 오늘 아침에도 〈빨간머리 앤〉 디브이디를 상자에서 꺼내어 제가 셈틀에 넣는다며 낑낑댄다. 그러나 아이가 디브이디를 넣으면 돌아가지 않는다. 왜냐하면, 디브이디를 손가락으로 비벼대서 손그림 자국이 가득 묻었기 때문. 아버지는 옆에서 “벼리야, 아직은 네가 넣으면 볼 수 없어.” 하고 말한다.

 디브이디를 꺼낸다. 사진기 렌즈를 닦는 두꺼운 천으로 디브이디 앞뒤를 깨끗이 닦는다. 다시 넣는다. 영화가 돌아간다. 〈빨간머리 앤〉 2편에서 앤이 풀빛지붕집에서 저녁을 함께 먹는 자리에 앉으나, 사내아이 아닌 계집아이가 이 집에 와서 쓸모가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슬프고 서러워 아무것도 먹을 수 없어 미안하다고 말하는데, 이 대목에서 앤은 “저요, 2년 전에 초콜릿을 하나 먹어 봤는데 아주 맛있었어요.” 하고 덧붙인다. 이러면서 이태 앞서 먹은 초콜릿이 얼마나 맛있었는지, 이 맛을 틈틈이 떠올린다고 얘기한다.

 이때에 마릴라와 매튜 얼굴이 참 볼 만하다. 왜냐하면 두 사람으로서는 ‘아이들이 초콜릿이라는 먹을거리를 자그마치 이태 앞서 처음으로 맛을 보고 다시는 먹은 적이 없는데, 이토록 애타게 그리는 마음’을 이제껏 겪거나 느낀 적이 없기 때문이다.

 〈빨간머리 앤〉은 외롭고 불쌍한 ‘고아 소녀’ 한 사람 이야기를 보여주는 만화영화는 아니다. 틀림없이 앤은 ‘외롭고 불쌍하다’ 할 아이라 할 만하고, ‘고아 소녀’이기도 하다. 이 만화에 나오는 주인공이니까. 그러나 ‘주인공 삶’은 이러하지만, 정작 〈빨간머리 앤〉이 들려주려는 이야기는 ‘외롭고 불쌍한 아이가 얼마나 외로우며 슬픈가’ 하는 대목이 아니다. 언제나 착하며 예쁘게 꿈을 꾸면서 살아가는 해맑은 넋이란 어떠한 삶을 일구면서 둘레 사람들하고 즐거운 나날을 보내는가 하는 대목이라고 느낀다.

 그리고, 만화영화는 하얀 빛이 감도는 잇빛 능금꽃으로 가득한 길을 얼마나 어여삐 담아서 보여주는지 모른다. 소설은 소설대로 내 나름대로 시골마을 삶자락을 꿈꾸거나 생각할 수 있어 즐겁고, 만화영화는 만화영화대로 앤이라는 아이가 깃들어 지내던 시골마을 삶자락을 눈부시게 만날 수 있어 즐겁다.

 3편에서 앤이 아침을 먹고 설거지를 마친 다음 이불을 치우려 하는데 제대로 치우지 못한다. 뒤에서 마릴라가 “설거지는 잘 하지만 침대 정돈은 못 하는구나.” 하고 말한다. “하지만 이런 새털이불에서는 잠자 본 적이 없거든요.” 하고 대꾸한다. 참 스스럼없어 좋고, 이 스스럼없는 맑은 넋을 고이 쓰다듬거나 어루만지듯 껴안아 주니 좋다. (4344.2.28.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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