뱅뱅클럽

 


  지난 2012년 4월, 영화 〈뱅뱅클럽〉이 한국말로 나와 디브이디로 사서 볼 수 있다. 올 2013년 3월, 이야기책 《뱅뱅클럽》이 한국말로 나왔다. 이야기책 《뱅뱅클럽》은 총알이 빗발치는 싸움터에서 죽음을 아랑곳하지 않고 사진을 찍어 ‘전쟁이 얼마나 끔찍하고 나쁜가’를 밝히려 하던 네 사람 삶자락을, 이들 가운데 두 사람이 죽고 두 사람이 남은 뒤 2000년에 내놓은 책이다. 자그마치 열네 해만에 《뱅뱅클럽》이 한국말로 나왔다. 한국사람은 이 책이 한국말로 나오기까지 ‘케빈 카터’를 비롯한 남아프리카공화국 사진기자들 삶과 넋을 조금도 제대로 살피지 못했으리라. 아니, 제대로 살필 틈이 없었겠지. 왜냐하면, 한국말로 된 이야기가 알려지지 못했을 테니까. 그러나, 정보가 없더라도 마음이 있으면 알 수 있으리라. 죽음과 삶 사이에서 죽음하고 훨씬 더 가까운 자리에 서면서 죽느니만 못하다고 느끼는 모습을 날마다 숱하게 부대끼며 사진으로 담아야 했던 사람들 가슴에는 무엇이 있을까. 죽은 사람 곁에서 죽음을 사진으로 찍어야 하고, 곧 죽을 사람들 언저리에서 이들이 삶 쪽으로 돌아가도록 손끝 하나로도 돕기 어려운 형편에 놓인 사진기자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는 동냥하는 사람 곁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내 옆지기도 우리 아이들도 동냥꾼 곁을 그냥 지나가지 못한다. 내 옆지기는 더할 나위 없이 마음이 넓어, 주머니에 5만 원짜리가 있으면 그냥 이 5만 원짜리를 내려놓고 가는 사람이다. 나는 집살림을 조금 돌아보면서 차마 5만 원짜리는 내려놓지 못하고 1만 원짜리로 바꾸어 내려놓는다. 그렇지만, 하루치 살림돈조차 없어 허덕일 때에는 100원짜리 쇠돈 하나 내려놓지 못하고 지나가는 때가 있다. 이때에는 마음만 내려놓고 간다. 우리 식구들은 살림돈 없어 100원 아닌 10원조차 내려놓지 못하지만, 우리 아닌 다른 아름다운 분들이 넉넉히 사랑 베풀리라 믿습니다, 하는 마음을 내려놓는다.


  뜬금없는 소리라 할 테지만, 영화 〈뱅뱅클럽〉을 보고 싶은데 아직 못 본다. 디브이디 살 돈이 못 되어 아직 못 본다. 이야기책 《뱅뱅클럽》도 읽고 싶지만 입에 군침만 흘리면서 못 읽다가, 고마운 어느 분이 이 책을 선물해 주어 이틀에 걸쳐 찬찬히 읽었다. 아이들 밥 차려 주면서 읽고, 아이들과 함께 놀면서 읽었다.


  사람들이 ‘사진과 윤리’ 또는 ‘사진과 도덕’이라는 말을 함부로 내걸며 뭇칼질하는 도마에 오르는 케빈 카터라고 하는 사진기자는 고작 서른셋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케빈 카터라고 하는 사진기자는 ‘콘도르가 지켜보는 아이’ 사진으로 퓰리처상을 받았으나, 이녁 스스로 퓰리처상 받을 생각이 없었을 뿐 아니라, 퓰리처상이 있는 줄조차 몰랐다. 케빈 카터로서는 남아프리카뿐 아니라 아프리카땅 이웃나라 어디에서나 너무 쉽게 마주하는 슬프고 힘들며 고단한 사람들 삶을 사진으로 널리 알려 이들한테 사랑어린 손길이 닿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하나로 사진을 찍었다.


  케빈 카터한테 퓰리처상을 주지 않았다면, 아니 뉴욕에 있는 〈뉴욕타임즈〉 편집자가 ‘뉴스위크 잡지에서는 아직 퓰리처상 받은 사진기자 내놓지 못한 아쉬움’을 풀려고 ‘이 사진 한 장을 일부러 내놓아 상을 받으려 한 꿍꿍이’를 품지 않았다면, ‘이 사진이 퓰리처상을 받은 뒤에라도 이 사진에 깃든 넋과 마음을 슬기롭게 헤아려서 사진기자한테 무거운 짐덩이 들씌우지 않았다’면 어찌 되었을까.


  모르는 사람들은 너무 쉽게 말한다. ‘콘도르가 지켜보던 아이는 어떻게 되었느냐’ 하고. 그래, 그러면 그 다음도 물어야지. ‘이 사진 찍은 사람은 그 뒤 어떻게 되었느냐’ 하고. 그리고, 또 다른 이야기도 물어야지. ‘이 사진으로 〈뉴욕타임즈〉 이름값 올리려고 애쓴 그 편집자들은 어떻게 하면서 살아가느냐’ 하고. 마지막으로, ‘이 사진을 본 당신은 오늘 어느 곳에서 어떤 삶 일구느냐’ 하고. 그런데, 이에 앞서 물어야 할 이야기가 있지 않나. ‘왜 그 아이는 굶주린 나머지 콘도르가 지켜보는 앞에서 엎드려 쉬어야 했을까’ 하고. ‘왜 권력자들은 독재정권 뱃살 불리기만 하고, 평화를 외치는 인도주의 나라는 군사무기 만드는 데에 어마어마한 돈을 펑펑 쏟아붓는가’ 하고. 4346.3.29.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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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전업주부

 


  어린이책 《아빠는 전업주부》라는 어린이문학을 읽는다. 독일사람 키르스틴 보예 님이 쓴 책이 하나 있고, 이 책과 이름이 같고 한국사람 소중애 님이 쓴 책이 하나 있다. 한국사람이 쓴 책은 아직 모르겠는데, 한국사람 어린이문학은 판이 끊어졌기에 찾아 읽자면 좀 오래 걸리겠구나 싶다.


  독일 어린이문학을 읽으며, 첫머리부터 깊고 너른 이야기를 짚는구나 하고 느끼며 즐겁다. 그런데, 이야기가 이어지고 또 이어지면서 곁가지 다른 이야기로 빠진다. 곁가지 다른 이야기를 다루면서 ‘남자가 바깥 돈벌이 그만두고 집에서 아이들과 보내는 삶’을 소홀하게 다룬다. 밥을 하고 빨래를 하며 청소를 하고 아이들 돌보는 삶을 찬찬히 보여주지 못한다. 너무 얼렁뚱땅 넘어간다.


  한국 어린이문학은 어떻게 그릴까? 남자 어른이 ‘집안일은 참 어렵구나!’ 하고 깨달으며 뉘우치는 대목을 그리면서 쉬 마무리짓고 말까? 새삼스레 완다 가그 님 그림책 《집안일이 뭐가 힘들어!》가 떠오른다. 그림과 글로 아주 쉽고 단출하면서 또렷하게 ‘집안일 이야기와 삶’을 보여주는 책이다. 집안일을 하찮게 보는 남자 어른 코를 아주 납작하게 해 주되, 사랑스레 품어 주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아무렴, 그렇지. 여자 어른이 집안일을 오래도록 맡아서 했으니, 남자 어른이 바깥일도 할 수 있지, 남자 어른이 집안일을 맡아서 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야말로 뒤죽박죽이었으리라. 남자 어른 가운데 집안일 알뜰히 잘 하는 이도 더러 있을 테지만, 여자 어른은 바깥일뿐 아니라 집안일까지 몽땅 도맡아야 하지 않을까? 그나마, 여자 어른이 집안일을 많이 맡아서 하니, 바깥일을 덜 맡아서 해도 되는(?), 그야말로 어처구니없이 알쏭달쏭한 사회 얼거리가 이루어지는구나 싶기도 하다.


  생각해 보라. 남자 어른치고 집안일 이야기를 찬찬히 쓰거나 그리거나 사진으로 찍을 만한 사람이 몇이나 될까. 아니, 이런 시인이나 소설가나 사진작가나 화가가 있는가? 남자 어른 가운데 아이 돌보는 삶을 찬찬히 쓰거나 그리거나 사진으로 찍을 만한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두말할 것 없다. 남자 어른 스스로 아이 키우는 이야기를 제대로 쓴 책이 여태 한 권도 없는걸! 밥과 옷과 집을 옳고 바르며 슬기롭게 그리며 건사할 줄 아는 남자 어른은 어디에 있을까. 4346.3.26.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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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졸라, 나디아 불랑제

 


  나는 피아졸라가 누구인지 모른다. 나는 나디아 불랑제라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모른다. 지난주쯤 《음악가의 음악가, 나디아 불랑제》라는 책이 새로 나왔기에 무슨 책인고 하면서 찬찬히 살피니, 매우 놀라운 이야기를 담아 깜짝 놀랐고, 고흥에서 서울로 사진강의를 오는 먼 기찻길에 이 책을 ⅔쯤 읽는다. 아이들 모두 시골집에서 옆지기가 함께 놀면서 돌보고, 홀로 서울마실을 하니, 기찻간에서 퍽 느긋하게 책을 읽는다. 전주를 지날 적부터 옆에 다른 사람 앉고, 내 옆에 앉은 분은 두 시간 반 가까이 셈틀을 켜고는 인터넷을 누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내 할 일을 하면 된다. 더구나, 《음악가의 음악가, 나디아 불랑제》라는 책이 무척 놀랍기에 둘레에서 이렇게 떠들든 저렇게 복작거리든 다 괜찮다. 어떠한 소리도 움직임도 느끼지 않고 책하고 한몸이 된다.


  음악가한테 음악가가 되었다는 나디아 불랑제라는 사람은, 지휘도 하고 연주도 하고 작곡도 한다지만(나중에 작곡은 그만두었다는데), 어느 무엇보다 어린 아이들이나 젊은 사람들한테 ‘이녁 가슴에 깃든 빛’을 잘 깨우치면서 북돋우는 길을 오랫동안 걸었다고 한다. 그래, 노래스승이란 말이지.


  1887년에 태어나 1979년에 숨을 거둔 나디아 불랑제라는 사람이 들려준 이야기를 갈무리한 이 책은 프랑스에서 1980년에 비로소 처음 나왔고, 한국에는 2013년에 한국말로 처음 나온다. 서른세 해라는 나날이 지나고야 한국에서 빛을 보는 셈이라 할 테니까, 참말 한국 책마을 눈높이를 알 만하다.


  그런데, 한국 책마을 눈높이가 낮다는 뜻에서 이런 말을 하지 않는다. 그저 한국 책마을 눈높이가 이러하다뿐이다. 낮대서 나쁘거나 높대서 훌륭하지 않으니까. 낮으면 낮을 뿐이지, 낮기에 안 사랑스럽고 안 믿음직할 까닭 없다. 가만히 따지면, 한국 책마을이나 노래마을은 스스로 빛을 느끼거나 깨달아 한결 아름다운 자리로 나아가려는 움직임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으니까, 《음악가의 음악가, 나디아 불랑제》 같은 책이 서른세 해만에 나올밖에 없다.


  나라밖 모든 훌륭하거나 아름다운 책이 모두 한국말로 나오기를 바랄 수 없지만, 빠뜨리거나 놓치지 않을 만한 책은 틀림없이 있다고 느낀다. 이 나라 사람들 스스로 이녁 삶을 사랑하도록 이끄는 책이라면, 이 겨레 사람들 스스로 이녁 삶이 얼마나 고운 빛인가를 깨닫도록 돕는 책이라면, 돈있고 이름있는 출판사에서건 돈 적고 이름 적은 출판사에서건 씩씩하게 내놓을 수 있기를 빈다. 책은 빛이니까. 사람도 빛이고, 노래도 빛이며, 책 또한 빛이니까. 4346.3.20.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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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맹호, 고은, 인문서점, 《聖·高銀 엣세이》

 


  헌책방 한켠에 놓인 낡은 책 하나 바라본다. 이제 책을 다 골랐다 싶어 책값을 치르려고 기다린다. 멀뚱멀뚱 있으면 재미없으니 두리번두리번 책탑과 책시렁을 살펴본다. 《聖·高銀 엣세이》라는 이름 붙은 책이 궁금해서 뒤적인다. 어떤 이가 이런 이름을 붙여서 책을 냈는가. 1933년에 태어난 고은 님은 이 책이 나올 무렵 아직 새파란 나이라 할 텐데, 이 책을 펴낸 출판사는 어떤 생각으로 이런 책이름을 붙였을까.


  1967년에 첫 쇄를 찍은 《聖·高銀 엣세이》는 ‘人文書店’이라는 곳에서 나왔고, 인문서점이라는 출판사 대표는 ‘朴孟浩’라 나오며, ‘서울 종로 청진동 청진빌딩 32호실’이라는 주소가 보인다. 이 책을 처음 사서 읽은 분은 ‘1968.5.8.명동에서’ 샀다고 볼펜으로 적는다. 《聖·高銀 엣세이》를 펼치면 첫 글에 ‘젤소미나’ 이야기가 나온다. 아하, 고은 님도 영화 〈길(라 스트라다)〉을 보았구나. 1960년대 첫머리 한국 극장에 이 영화가 걸렸구나. 스님이라는 길을 그만둔 고은 님은 극장에서 〈길〉을 보면서 눈시울을 적셨구나.


  민음사라는 출판사를 만든 박맹호 님은 1966년 청진동 옥탑방에 출판사를 꾸렸다 말하는데, 그 출판사가 처음에는 ‘인문서점’이었구나. 옥탑방이라 하지만 32호실이라 나오는데, 옥탑방이 여럿 있었을까. 옥탑방이라 하더라도 32호실이라고 어엿하게 방 번호를 붙였을까.


  마흔여섯 해를 묵은 책 하나 내 손에 들어온다. 마흔여섯 해 앞서 ‘사람 고은’을 ‘거룩한 고은’이라고 이름을 붙인 책 하나 내 손바닥에 놓인다. 책을 쓴 사람도, 책을 낸 사람도, 마흔여섯 해를 잘 살아왔구나 싶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건대, ‘거룩한 고은’ 아닌 ‘사람 고은’이라고 책이름을 붙였으면 훨씬 더 물결을 일으키지 않았으랴 싶다. 사람들은 스스로 ‘사람’인 줄 못 느끼거나 생각 안 하는 채 살아가니까. 4346.2.8.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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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 《피아노의 숲》

 


  나는 《피아노의 숲》을 왜 읽는가. 피아노를 아주 잘 치는 아이들을 보려고? 콩쿠르 대회에서 멋들어진 피아노를 들려주는 모습을 보려고? 저마다 어떤 솜씨를 뽐내는지 보려고?


  아니다. 나는 만화책 《피아노의 숲》에서 다른 이야기를 읽는다. 스스로 가장 아름답다고 여기는 길을 씩씩하게 걸어가면서, 스스로 맑게 웃고 싶은 아이들 꿈이 무엇인가 하는 대목을 느끼려고 이 만화책을 읽는다. 피아노 숲에서 자란 아이들은 피아노 숲에서 배운다.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다. 어떤 스승한테서 배우지 않는다. 피아노 치기를 일깨우는 스승이나 동무나 길잡이는 있다. 그러나, 스승이나 동무나 길잡이가 있기 때문에 피아노를 칠 수 있지는 않다. 피아노 치는 삶을 누리고 싶은 ‘내’가 있기에, 나한테 스승이 찾아오고 동무가 찾아오며 길잡이가 찾아온다. 내 마음속에서 피아노 삶을 꿈꾸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나한테 찾아오지 않는다.


  이찌노세 카이라 하는 아이한테 여러 사람이 찾아오는 까닭은 오직 하나이다. 카이는 피아노를 치고 싶기 때문이다. 즐겁게 피아노를 치고 싶은 카이한테는 ‘피아노 삶을 즐기려는 스승’이 찾아온다. ‘피아노 삶을 즐기지 못하는 동무’도 찾아온다. 왜냐하면, 피아노 삶을 즐기지 못하는 동무는 마음속으로 ‘이게 아닌데’ 하며 갈피를 못 잡으면서 헤매니까. 헤매는 동무는 갈피를 잡고 싶어 떠돌다가, 카이를 보고는, 가만히 다가와서, 카이가 누리는 ‘피아노 즐기는 삶’을 바라보고는, 천천히 깨닫는다. 피아노 삶을 즐기지 못한 나날이란 무엇이었고, 앞으로 나아갈 길은 어디인가 하고 느낀다.


  피아노 솜씨는 대수롭지 않다. 이를테면, 밥하는 솜씨라든지 빨래하는 솜씨라든지 노래하는 솜씨는 그닥 대수롭지 않다. 솜씨는 차츰 무르익는다. 게다가, 솜씨는 차츰 무르익어도, 솜씨가 무르익는 줄 스스로 느끼지 않는다. 오래도록 한길을 걸어가는 사람은 ‘솜씨’ 아닌 ‘사랑’에 마음을 기울인다. 사랑을 어떻게 펼치고, 사랑을 어떻게 나누며, 사랑을 어떻게 즐기는가 하는 대목 하나에 온마음을 기울인다. 카이는 바로 피아노 삶을 씩씩하게 걸어가면서 ‘피아노 숲에서 이루는 사랑’을 환하게 열매로 맺고 싶어한다. 4346.2.1.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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