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창작에 있어서, 아니 삶의 창조에 있어서 저항이 어떠한 성질의 것이라는 점을 그는 여기서 암시하고 있다 ..  《조태일-고여 있는 시와 움직이는 시》(전예원,1980) 130쪽

 삶을 자기 스스로 가꾸면서 알알이 빚어낼 때, 비로소 글 하나 세상에 태어날 수 있습니다. 제 스스로 제 삶을 알알이 빚어낼 수 있도록 가꾸거나 힘쓸 때, 비로소 제 마음에 드는 글 하나 살포시 건넬 수 있습니다. 제 삶을 스스로 가꾸지도 않고 추스르지도 않으면서 자꾸자꾸 무언가 뽑아내려고 하면, 책상 앞에 앉아 자판을 두들기거나 볼펜을 붙잡고 종이를 마주할 때에는, 머리가 하얘지기만 할 뿐, 또는 헛말만 지루하게 늘어지기만 할 뿐입니다. 삶이 없이 글이 나올 수 없는 한편으로, 남들 삶을 그저 따라만 갈 때에도 글이 나올 수 없습니다. 내 삶을 꾸려야지, 내 길을 걸어야지, 내 일을 해야지, 내 놀이를 즐겨야지, 내 말을 하고, 내 사람을 만나고, 내 눈으로 바라보아야지, 내 귀로 들어야지, 내 마음으로 헤아려야지, 내 살갗으로 느껴야지, 내 몸으로 껴안아야지, 내 발로 디뎌야지, 내 손으로 만져야지, 내 몸뚱이를 움직여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녀야지, 내 머리로 알아챈 책을 책시렁에서 스스로 뽑아내어 내 주머니에 있는 돈, 그러니까 내 땀방울을 흘려서 번 돈을 써서 사들이고 내 품과 시간을 들여서 읽어내어 내 나름대로 곰삭이고 받아들여야지, 비로소 글 하나가 태어납니다. 글은 태어납니다. (4340.8.6.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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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지 <좋은생각>에서 청탁이 들어와서 써 보낸 글입니다.
마감날에 겨우 맞추었네요 ^^;;;;;


― 내 삶에 책 하나 : 마르지 않는 삶을 담은 책


 제가 일하는 책상에는 늘 100∼200권에 이르는 책이 얹히거나 꽂혀 있습니다. 책상 둘레에도 비슷한 숫자로 쌓여 있습니다. 그날그날 제 살림집으로 받아들인 책이 하나둘 모이면서 탑을 이룹니다. 한 번 집어들고 끝까지 쉬지 않고 읽어내리는 책도 있지만, 제 얕은 마음을 휘젓거나 다독여 주는 줄거리를 읽었을 때면 한동안 책을 덮습니다. 지금 막 깨우친 이야기를 차근차근 곰삭이고 싶어서요. 누런 쌀밥을 백 번쯤 우물우물 씹어서 넘기듯, 마음에 밥이 되는 책을 만났을 때는 서두르지 않고 읽습니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한 끼니에 열 그릇이나 스무 그릇을 비울 수 없듯이, 제 모자란 깜냥을 일깨우는 책이라면 하루아침에 읽을 수 있으랴 싶습니다.

 우리들이 만나는 책은 ‘그 책을 짓거나 엮은 사람이 짧으면 한두 해, 길면 열이나 스무 해도 넘는 세월을 바쳐서 만든’ 책이에요. 그래, 열 해라는 세월을 한두 시간만에 후루룩 넘겨버릴 수는 없다고도 느껴요. 이러다 보니 책상맡에는 쌓이느니 책이요, 다 읽고 나서도 좀처럼 ‘따로 마련한 책꽂이’로 옮겨 꽂지 못합니다. 다 읽었어도 더 읽고 싶고, 여러 차례 읽었어도 틈틈이 다시 들추고 싶어서.

 그러나 책상맡에 놓지 않으면서도 꾸준히 들춰보는 책이 있습니다. 잡지 《샘이 깊은 물》. 1984년에 첫호를 낸 《샘이 깊은 물》은 ‘아줌마 독자’와 ‘아가씨 독자’한테 눈길을 맞추어 우리 사는 세상 이야기를 조곤조곤 돌아볼 수 있게 이끌어 줍니다. 폐간되어 새책방에서 사라지고, 도서관에서도 갖추어 놓지 않는 잡지인 터라, 헌책방 나들이를 하면서 한 권 두 권 틈틈이 사서 읽습니다. 책꽂이에서 1987년 10월에 나온 《샘이 깊은 물》을 꺼내어 봅니다. 벌써 스무 해나 지나간 옛글이라 할 테지만, 세월을 건너뛰는 슬기로움을 보여줍니다. 철지나거나 묵었으면 ‘이제는 돌아볼 값어치’가 없다고 여기는 요즘 세상이건만, 이 잡지는 철이 지나고 묵을수록 깊은 된장맛을 냅니다. 잡지가 나오던 지난날에는 지난날대로 세상을 앞서 읽던 줄거리를 담았고, 잡지가 자취를 감춘 오늘날에는 지금 우리 모습과 삶을 가만히 되새기고 돌아볼 수 있는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잡지 이름처럼, 샘이 깊어서 언제까지나 마르지 않고 시원하게 감겨들까요. 섣부른 세상 물결에 휩쓸리지 말되 세상일에 팔짱 끼고 나 몰라라 하지 않도록, 무엇이든 빨리빨리 외치는 세상 흐름에 끄달리지 말되 자기 줏대와 눈길을 추스를 수 있도록, 조용히 외치고 말이 아닌 온몸으로 파고드는, 내 삶에 마르지 않는 샘물 같은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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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우연히 〈오마이뉴스〉에 실린 기사 하나를 보았는데, 이 기사는 〈문화연대〉에서 낸 성명서 하나를 거의 고스란히 옮겨놓은 ‘퍼오기 기사’였다. 이 퍼오기 기사 원글을 인터넷에서 찾아서(http://www.culturalaction.org) 읽어 보았다. 〈시민의신문〉이 문을 닫게 되고 〈시민사회신문〉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 일을 ‘도저히 환영할 수 없다’고 밝히는 성명서.

 이 성명서를 읽으면, ‘그래, 그렇다면 잘못이 누구한테 있고, 이 잘못은 어떻게 고쳐야 하는가?’ 하는 알맹이를 잡을 수 없다. 〈시민의 신문〉이 문을 닫게 한 주범인 이형모 이사를 나무라는 건지, 이형모 이사를 감싸안은 ‘한국 사회 대표 시민사회단체’를 나무라는 건지 알 수 없다. 또한, 애써 이런 답답이들과 싸우며 곧은 목소리를 내온 〈시민의 신문〉 기자들 외침에 귀를 닫고 눈을 감아 온, 주류 매체와 비주류 매체와 주류 시민사회단체와 비주류 시민사회단체를 탓하는 건지도 알 수 없다. 누구 들으라고 쓴 글이며, 상황이 어떻게 돌아갔는지 제대로 짚기나 하고 쓴 글인지 종잡을 수 없다. 문득, 이 단체 〈문화연대〉라는 곳은 그동안 무엇을 해 왔는가 궁금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이보다 더 딱한 것은, 이런 〈문화연대〉 성명서를 거의 그대로 ‘퍼오기 기사’로 실은 〈오마이뉴스〉 기사. 〈오마이뉴스〉에 기사를 올린 그 기자는, 앞뒤 흐름이 어떻게 되었는가를 조금이라도 살핀 뒤 그런 ‘퍼오기 기사’를 썼는가? ‘퍼오기 기사’이니 취재도 안 하고, 책상 앞에서 인터넷만 끄적거리다가 썼을는지 모른다. 둘레에서 몇 마디 나온 이야기를 어느 만큼 그러모아서 쓰기도 했을 테고.

 하지만 〈문화연대〉에서 성명서를 쓴 사람, 또 〈오마이뉴스〉에서 퍼오기 기사를 쓴 사람은 모르리라. 자기들이 얕은 생각으로 함부로 쓴 그런 글 하나 때문에 참과 거짓이 엉뚱하게 알려지게 되는 줄은. 그리고 그 엉뚱하게 알려지는 글 때문에 피해를 입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자기가 쓰는 글에 ‘비판’이라는 꼬리말을 단다고 해서 그 글이 비판인가? 비판이란 아무나 하는 말이 아니다. 비판을 하려면, 누구보다 더 깊이 파고들어야 하며, 누구보다 더 깊이 사랑해야 하며, 누구보다 더 많은 시간을 쏟아야 한다. 그러지 않고서는 비판이 나올 수 없다. 깊이 파고들지 않은 채, 깊이 사랑하지 않은 채, 많은 시간을 쏟지 않은 채 내뱉는 말은 ‘헐뜯기’일 뿐이다.

 내가 책소개 기사를 거의 안 읽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책소개 기사를 쓰는 기자나 학자들은 ‘자기가 소개하는 책’을 제대로 읽지 않는다. 마음속 깊이 받아들이며 읽지 않는다. 종이에 박힌 활자는 읽을 줄 알아도, 종이 활자에 담은 지은이 마음을 헤아리지 않는다. 책 하나 펴내는 사람은 ‘돈 되는 상품’으로 책을 펴내지 않는다. 뭐, 이런 상품으로 펴내는 사람도 적잖이 있겠지. 그리고 상품을 소개하는 글을 쓰는 기자도 있을 테고. 다만, 나는 상품으로 책 만드는 사람과 상품으로 만들어진 책을 소개하는 기자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다.

 책을 펴내려고 했던 사람이 내놓아 우리 앞에 보여지는 것은 ‘한 권 책(이백 쪽이든 사백 쪽이든)’이지만, 이 한 권을 이루고자 기나긴 세월 땀-사랑-믿음-다리품 모두를 담았다. 서른 해 한삶이 책 하나로 바쳐지기도 하고, 예순 해 한삶이 책 하나로 바쳐지기도 한다. 책 하나를 펴내고자, ‘다른 책’ 10만 권을 읽은 사람이 있고, 책 하나 펴내고자, 세상사람 1만 사람을 만나거나 부대낀 사람이 있다.

 책은 줄거리가 아니다. 그래서 책소개 기사는 줄거리 소개가 아니다. 줄거리 소개로 그치는 기사라면, 또는 지은이와 출판사 요새 형편을 알리는 기사라면, 그리하여 책 하나 펴내는 속뜻과 깊은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기사라면, 모두 쓰레기라고 느낀다. 쓰레기일 수밖에 없지. 그 기사를 읽는 우리들 시간을 아깝게 내버리게 하는 쓰레기, 그 기사가 실린 신문을 더럽히며 종이를 헤프게 버리게 하는 쓰레기.

 책을 읽을 때, 첫 쪽부터 맨 마지막 쪽까지 꼼꼼히 살펴야 ‘읽었다’고 말할 수 없다. 줄거리를 다 외었다고 책을 ‘읽었다’고 말할 수 있으랴? 몇 쪽에 무슨 이야기가 적혀 있는 줄 달달 읊는다고 책을 ‘읽었다’고 할 수 없다. 지은이 해적이를 외우고 출판사 도서목록을 죽 적어내려간다고 해서 책을 ‘읽었다’고 할 수 있나? 참말로 책을 ‘읽었다’고 말하려면, 그래서 책을 ‘소개한다’고 말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책 하나에 담긴 온 우주를 말하지 못하면서 책을 소개한다는 글을 쓰는 일이란 얼마나 아슬아슬하고 몹쓸 짓인가? 책 하나에 담은 한 사람 온삶을 자기 살갗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면서 책을 소개한다고 끄적거리는 일이란 얼마나 얼치기 노릇이란 말인가? 책 하나로 나누려는 사랑과 믿음이 얼마만한 크기이며 부피인지 껴안아 보지 않고서 섣불리 읊는 칭찬과 비판이란 얼마나 부질없는 말장난인가? 책을 펴내는 사람은 ‘사람들한테 제대로 읽히기’를 바란다. ‘많이 팔리기’가 아니라 ‘두루 읽히기’를 바란다. 하지만 책을 소개한다는 글을 쓰는 사람은 어떤 매무새로 글을 쓰는가? 지난 5월 17일에 세상을 떠난 권정생 할아버지는 ‘사람들한테 더 많이 팔리고 읽힐 수 있던 길’을 깨끗이 접어두고, ‘사람들이 어느 때라도 알아보며 찾아 줄 수 있는 길’을 어렵게 걸어갔다. 권정생 할아버지는 자기한테 돌아올 인세를 왜 자기 형제나 피붙이한테 건네지 않고, 북녘 어린이한테 주고 싶어했을까? 이 숙제를 스스로 풀어내지 않으려는 기자라면, 지금 곧바로 글쟁이 노릇을 집어치우고 다른 밥벌이를 알아볼 일이다. (4340.5.21.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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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소개 잡지에 어린이책 추천하는 일을 하면서 몇 군데 출판사에서 보내주어 억지로 떠안게 된 그림책 예닐곱 권을 들고 헌책방에 갑니다. “저한테는 쓸모가 없지만, 이 책을 좋다고 느끼며 사 가실 분이 있겠지요?” 하면서 드립니다. 헌책방 아주머니가 “저희는 이렇게 드릴 수 있어요.” 하면서 만 원짜리 한 장을 건네십니다. “어, 저는 이 책을 거저로 받은 책인데요. 여기 보셔요. ‘드림’ 도장 찍혀 있잖아요.” “저희도 책을 그냥 안 받아요.”

 하는 수 없이 만 원짜리 한 장을 받습니다. 책방 안쪽으로 들어갑니다. 일본 손바닥책 있는 자리를 두리번두리번 살핍니다. 예전에 왔을 때 돈이 모자라서 못 산 몇 가지 책을 고르려고. 무샤고오지 사네야쓰라는 분이 쓴 《人生雜感》이라는 책, 구와바라 타케오라는 분이 쓴 《文學入門》이라는 책, 일본 어린이 노래를 살핀 책, 병상에서 아흔아홉 날 동안 싸우며 적어내린 수기를 엮은 책, 가와바타 야스나리라는 분이 쓴 《新 文章讀本》, 오에 겐자부로라는 분이 쓴 《小說のたくらみ, 知の樂しみ》라는 책 들을 고릅니다. 책값은 8000원. 어, 그래도 2000원이 남네.

 저로서는 ‘버린다’는 책을 들고 갔지만, 외려 책 여러 권과 돈 2000원까지 얻고 돌아나옵니다. 오늘은 맑은 햇살이 내리쬡니다. 어제 비가 좀 내린 뒤인지 하늘이 살짝 맑네요. 그동안 하늘에 잔뜩 끼어 있던 먼지띠 가운데 얼마쯤이 씻긴 듯합니다. 그러면 씻겨진 먼지들은 어디로 갈까요. 흙으로? 바다로? 내로? 먼지띠는 다시 땅으로 돌아갈까요?

 문득, 우리 사는 이 땅에 가랑비가 자주 내려서, 이 먼지띠를 틈틈이 씻어 주면 좋겠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스스로 먼지띠를 만들지 않는 삶으로 몸가짐을 바꿀 우리들 사람이 아니기에, 가끔이나마 먼지띠 살짝 걷힌 맑은 하늘을 바라보고 느끼면서, 우리한테 참으로 소중한 일이 무엇인지를 깨달을 수 있도록, 배울 수 있도록, 느낄 수 있도록 해 주어야지 싶습니다. (4340.5.2.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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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관 열 준비를 하며 책을 닦습니다. 하나하나 닦습니다. 대충 닦고 지나칠 수 없습니다. 나중에 도서관을 찾아와 구경할 사람을 생각하면, 어느 하나 허투루 닦을 수 없어요. 여러 만 권 되는 책을 하나씩 닦자면 얼마나 긴 시간이 걸릴까 어림해 봅니다. 날마다 수백 권에 이르는 책을 사고파는 헌책방 임자는 얼마나 지루하게 책을 닦으랴 싶은 생각도 듭니다. 이 일을 지루하게 생각한다면, 고달프게 생각한다면, 며칠 버틸 수 없으리란 느낌도 듭니다.

 책을 한참 닦고 꽂아 놓은 뒤, 지금 닦은 이 책을 앞으로 언제 또 닦아 줄 수 있을까 헤아려 봅니다. 글쎄, 다시 닦아 줄 날이 있을까.

 앞으로 도서관을 꾸린다면, 이곳에 찾아와서 본 책을 제자리에 꽂아 놓지 말고 책상 위에 올려놓아 달라고 해야겠구나 싶습니다. 그래야 그때 한 번이라도 더 걸레질이나 행주질을 해서 꽂아 놓을 수 있겠지요. 몇 달에 한 번씩은 도움이를 불러 책들을 다 들어낸 뒤 책꽂이도 닦아야 할 테고요.

 헌책방 일꾼처럼 한 번 팔아버리면 그만인 책하고, 언제까지나 고이 간직하며 나누어야 할 책을 바라보는 눈길, 다루는 손길은 그만큼 달라야 함을 느낍니다. 헌책방 일꾼 손은 쉴 틈이 없고 물기에서 헤어날 날이 없는데, 도서관 일꾼 손 또한 쉴 틈이 없고 물기에서 헤어날 날이 없겠습니다. 걸레 냄새가 손에 짙게 배겠어요. (4340.4.24.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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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7-04-25 08:46   좋아요 0 | URL
책에 대한 애정이 물씬 풍기는 글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