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책을 읽으며


 새로운 책은 얼마나 새로운 책일는지 궁금합니다. 새로 나오는 책은 여태껏 나온 책들에 깃든 좋은 열매를 알알이 얻어 누리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새옷을 입은 책은 이제까지 쏟아진 책들에 서린 아쉬운 대목을 고치거나 손질하거나 다듬으면서 거듭났는지 궁금합니다.

 헌책방에 가면 헌책을 만납니다. 헌책방에서 만나는 헌책은 거의 모두 ‘다시 널리 팔리기 힘들어 보이는’ 책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헌책방마실을 즐깁니다. 오늘날 새로 나온다고 하는 책들이 예전 책들한테서 좋은 열매를 살뜰히 받아먹었다고는 느끼지 않기 때문이요, 지난날 책들한테서 아쉬운 대목을 곰곰이 살펴 고쳐 세웠다고는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책은 똑같은 책입니다. 모든 사람은 똑같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모든 책은 새로 태어나서 읽히다가 스러지고, 모든 사람은 새로 태어나서 자라다가 죽습니다. 다만, 모든 책과 사람은 똑같이 목숨이 있으나, 똑같은 결이나 흐름은 아닙니다. 예전 책은 더 예전에 나온 책한테서 새숨을 물려받으며 제 나름대로 꾸리는 삶을 담다가는 오늘날 책한테 제 숨을 물려주고는 조용히 눈을 감습니다. 나무 한 그루와 풀 한 포기가 앞선 푸나무가 맺은 씨앗으로 태어나며, 앞선 푸나무가 숨을 거두어 온몸으로 삭힌 목숨값으로 새로 살아가듯, 책은 앞선 책들이 있어 새로움이란 옷을 입습니다.

 새책방 책꽂이에는 틀림없이 새책이 꽂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수많은 새책들 가운데에는 예전 책한테서 목숨을 나누어 받지 않았거나 목숨을 나누어 받으려 하지 않는 책이 꽤 많구나 싶습니다. 더욱이, 이 새책들은 스스로 제 목숨을 다 바쳐서 ‘뒷날 새로 나올 다른 책’한테 저희 목숨을 기꺼이 내어줄 생각이 거의 없다고 느낍니다. 껍데기는 틀림없는 새책이나 속살은 하나도 새책이 아니요, 바야흐로 책이라 말할 수조차 없는 녀석, 이를테면 돈나부랭이라든지 권력나부랭이라든지 명예나부랭이로 뒹굴고 있는 종이뭉치이기 일쑤라고 느낍니다.

 새책을 만나며 새마음 새사랑 새힘 새빛이 되기란, 오늘날 우리 누리에서 몹시 힘겹습니다. (4343.6.27.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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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생뚱맞다고 생각하거나 느끼는 분이라는 〈우리교육〉이라는 잡지를 놓고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를 모르는 분일 테지요. 〈우리교육을 걱정하는 사람들 http://cafe.naver.com/saveuriedu〉이라는 자리가 있으니, 이곳에 올려진 글이라도 좀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교육〉이라고 하는 배움책


 대학교를 그만두는 학생은 꽤 많습니다. 돈이 없어 그만두기도 하고, 대학교는 배움터가 아님을 깨달아 그만두기도 합니다. 돈벌이를 일찍부터 하고자 그만두기도 하며, 대학교보다 훌륭한 배움터를 다른 곳에서 찾았기에 그만두기도 합니다.

 고려대학교를 다니던 김예슬 님이 이 학교를 그만두면서 쪽글을 하나 적바림했고, 이 쪽글에 살을 입혀 자그마한 책을 하나 내놓았습니다. 김예슬 님 이야기와 생각이 담긴 책은 참 자그맣고 가벼우며 값이 쌌습니다.

 김예슬 님은 대학교를 그만두기는 했으나, 아직 당신이 걸어갈 길을 스스로 옳고 바르고 착하며 참된 가운데 곱게 깨닫거나 붙잡고 있지는 못합니다. 느낌을 버리지 않고 생각을 붙잡아 대학교를 떨칠 수는 있었으나, 아직은 대학교 떨치기만 했을 뿐, 아름다우며 참되고 바른 삶을 붙잡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김예슬 님 생각을 담은 책이 꽤 사랑을 받으며 팔립니다. 아무래도 이 나라에 여러모로 알려졌기에 사랑받을 만하고 팔릴 만하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책을 ‘생각(주의주장)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닌 삶(실천)으로 살아가는 사람’ 눈길로 들여다본다면 이런저런 부스러기 생각이 모여 있을 뿐, 부스러기로 있는 생각을 어떻게 왜 누구하고 언제 어디에서 그러모으고자 하는지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우리교육〉이라는 잡지는 얼마든지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나야 하는지를 이 새로운 잡지를 만들고자 하는 일꾼들은 어느 만큼 고개숙이면서 삶을 다부지게 붙잡으며 살피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지난날 〈우리교육〉에 몸담고 있던 그대로 〈새 우리교육〉을 만들고자 하시는지요. 쫓겨난 사람들이 모인 〈새 우리교육〉을 만들고자 하시는지요. 그동안 〈옛 우리교육〉에서는 제대로 담아내거나 나타내지 못했던 삶자락을 차곡차곡 담아내어 배움터 안팎에서 땀흘리고 눈물흘리며 피흘리는 이웃과 동무와 살붙이한테 웃음과 눈물이 되고자 〈새 우리교육〉을 만들고자 하시는지요.

 〈옛 우리교육〉은 아마 ‘(주) 우리교육’에서 어떠한 모습으로든 내놓으리라 봅니다. 〈새 우리교육〉을 ‘(주) 우리교육에서 쫓겨난 일꾼’이 낼 수 있으리라 봅니다. 그러나 옷만 새로 갈아입을 뿐, 줄거리와 고갱이와 삶은 예전 그대로는 아닐까 걱정스럽습니다. 새로운 옷을 입었다 할지라도 새로운 삶이 아니라면 어떡하느냐 싶어 걱정스럽습니다.

 새로운 옷을 입었다고 새로운 사람이 되지 않습니다. 새로운 잡지를 낸다고 새로운 이야기를 담는다고 할 수 없습니다.

 새로운 글쟁이들이 새로운 글을 써서 새로운 잡지가 될까요? 새로운 이름이 붙는다고 새로운 잡지가 될까요?

 김예슬 님이 낸 책을 읽으며 ‘이 젊은 넋은 아주 마땅하게도 옳고 바르며 고운 삶을 아직 모를 뿐 아니라, 옳고 바르며 고운 삶으로 나아갈 마음이 없음’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옳고 바르며 고운 삶자락 한 귀퉁이라도 찾아보고자 하는 마음은 있습니다. 〈새 우리교육〉은 어느 무엇보다도 (1) 참됨(올바름) (2) 착함(사랑과 믿음) (3) 고움(아름다움), 이렇게 세 가지를 제대로 깨닫고 찾으면서 담아내는 잡지가 되기를 꿈꿉니다. 이 세 가지를 담아낼 수 있으면 어떠한 잡지이든 괜찮습니다.

 반드시 교육잡지라야 할 까닭이란 없습니다. 꼭 교사와 학부모 중심으로 읽힐 잡지여야 하지 않습니다. 교육이란 교사만 하는 일이 아니요, 학부모만 마음쓸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사 아닌 누구나 교사여야 하고, 학부모 아닌 누구나 학부모로서 우리 마을 아이들을 살피고 사랑하며 돌보아야 합니다. 교사 아닌 동네 아저씨 아주머니 모두 지식이 아닌 삶으로 아이들 앞에서 좋은 스승으로 보여지도록 참다이 살아가야 합니다.

 〈새 우리교육〉을 만들고자 한다면, 무엇보다 알맹이가 참되고 착하며 고와야 하는데, 올바르고 사랑스러우며 아름다워야 합니다. 이러는 가운데 우리 배움터뿐 아니라 책마을까지 슬기로운 넋을 일깨우는 책이어야 합니다.

 이리하여, 〈새 우리교육〉이라 한다면 《김예슬 선언》처럼 자그맣고 값싸며 가벼운 종이를 쓴 잡지가 될 수 있기를 꿈꿉니다. 사진이 들어가도 되고 그림이 들어가도 되지만, 사진과 그림이 한 장조차 없어도 됩니다. 100쪽짜리 잡지여도 좋고 200쪽짜리 잡지여도 좋은데, 주머니에 들어갈 만큼 작은 책이 되기를 꿈꿉니다. 아니면 한손으로 가벼이 들고 다니며 어디에서나 읽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선물하기에 좋은 판짜임이면 좋겠다고 꿈꿉니다.

 참배움(‘참교육’이 아닌)이라 한다면, 학교라는 울타리 안쪽에서만 제대로 가르치는 일이 아니라고 느낍니다. 참되게 살아가는 사람이 되도록 이끄는 모든 몸짓과 넋이 참배움이라고 느낍니다. 참되게 살아가자면 무엇을 알고 느끼며 생각하며 나아가야 할까요? 바로, 무엇보다도 먹고 입고 잠자는 세 가지를 참다이 다스릴 수 있어야 합니다. 교사뿐 아니라 아이들 누구나 내 힘으로 먹고 입고 잠자는 세 가지를 일굴 수 있어야 합니다. 도시에서 살아간다고 해서 돈만 벌면 되겠습니까. 도시에서 살아가면서도 얼마든지 텃밭을 일굴 수 있으며, 교실 안쪽이든 집 안쪽이든 꽃그릇 하나 마련하여 콩을 심어 거둘 수 있습니다. 아이들과 교사가 서로서로 바느질을 하고 손빨래를 하며 청소와 밥하기를 제대로 슬기로이 배우고 가르치는 틀이 〈새 우리교육〉에 담겨야 한다고 느낍니다.

 이제는 ‘사람이 사람다이 살아가는 밑바탕(본질)’을 캐내고 밝혀야 비로소 〈우리교육〉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새 우리교육〉이라는 잡지가 아닌가 싶습니다. 저는 얼마 앞서까지 다달이 나왔던 〈옛 우리교육〉을 보면서 ‘이렇게 지식조각만 가득한 잡지라 한다면 “우리교육”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없을 만큼 부끄러운 잡지’가 아니겠느냐고 생각했습니다.

 〈옛 우리교육〉이라는 잡지를 받아서 읽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분들이 아이들한테 ‘다양한 직업을 찾도록 이끄는’ 모습이 아니라 ‘사람이라면 사람이 마땅히 찾아서 즐길 일거리를 저마다 제 몸과 마음에 맞도록 찾도록 이끄는’ 모습이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옛 우리교육〉이라는 잡지를 받아서 읽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분들 가운데 제도권 교육 얼거리를 스스로 떨쳐내고 당신 삶자리에서 조용하게 당신 삶부터 옳고 바르고 착하게 돌보신 분이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부디 지식은 다루지 않는 〈새 우리교육〉이 되기를 빕니다. 제발 지식이 아닌 땀방울과 굳은살을 다루는 〈새 우리교육〉이 되기를 빕니다.

 다달이 내야 할 까닭이 없는 〈새 우리교육〉입니다. 한 해에 두어 번 내는 ‘무크’가 되더라도, 한 권 한 권 알뜰하고 사랑스러워, 이 잡지를 만드는 일꾼들부터 도시에서 살든 시골에서 살든 사람과 땅과 목숨 모두를 사랑하고 믿고 껴안는 참사람으로 거듭나도록 돕는 〈새 우리교육〉이 되기를 빕니다.

 무슨무슨 꼭지가 있어야 하느냐를 생각하기 앞서, 무슨무슨 마음가짐이어야 하느냐를 생각할 〈새 우리교육〉입니다. 잡지는 한 사람이 만들어도 되고, 열 사람이 만들어도 됩니다. 그냥 ‘갱지에 문고판으로 만들어’도 좋습니다. 왜냐하면 참배움이란 껍데기가 아닌 알맹이요, 껍데기에 눈이 팔리는 사람이 아닌 알맹이를 사랑할 줄 아는 사람으로 이끄는 흐름이기 때문입니다. 껍데기라 하여 허술하게 할 까닭이 없으나, 정작 우리가 살필 모습이란 사람들 겉모습이 아니라 사람들 속마음입니다. 우리 스스로 속마음을 살피고 아끼려는 사람이라 한다면, 잡지를 만들 때에도 속알맹이가 얼마나 아름다우며 참되고 착하도록 짜고 엮어야 하는 데에 온마음을 기울여야 할 줄 압니다.

 속살로 아름다운 〈새 우리교육〉으로 나아가고자 한다면, 저는 이 잡지를 즐겁게 받아볼 생각인 한편, 저 스스로 내 삶을 곱게 일구려고 애쓰면서 부대끼는 이야기를 글이든 사진으로든 갈무리해서 자원봉사로 보내 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나 속살로 아름다운 〈새 우리교육〉으로 나아갈 뜻이 아니라 한다면, 저는 〈헌 우리교육〉이든 〈새 우리교육〉이든 그리 생각해 보고 싶지 않습니다. 아이를 키우는 아빠로 살아가는 데에도 하루 스물네 시간이란 더없이 빠듯하고 고됩니다. (4343.6.18.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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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엉터리 사진, 엉터리 책, 엉터리 말


 엉터리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어김없이 있다. 이들이 찍는 사진을 본다든지 이들이 읊는 사진말을 듣다 보면 참으로 갑갑하며 슬프다. 아니, 이들이 더없이 딱하고 안쓰럽다. 그렇지만 이들은 스스로 엉터리 길을 걸어가면서 엉터리 사진을 찍거나 엉터리 사진을 말하는 줄을 느끼지 못하며, 헤아리지 못하는데다가, 바로잡지 못한다. 이리하여 이들 엉터리 사진쟁이는 불쌍할 뿐 아니라 슬프다.

 나는 이들 엉터리 사진쟁이들을 으레 부대끼거나 마주해야 하는 가운데 나로서는 이렇게 엉터리 길을 걷지 않아야겠다고 다짐한다. 옆에서 보기에 뻔히 어설플 뿐 아니라 볼썽사납기 짝이 없는데, 왜 내가 이들 엉터리 사진쟁이와 같은 길을 걸어가겠는가. 사진을 삶으로 받아들일 줄 모르며, 사진에 깃든 빛과 그림자를 읽을 줄 모르고, 사진으로 사랑과 믿음을 나누려 하지 않는 엉터리한테는 백 마디 말을 들려주거나 백 장에 이르는 사진을 보여준다 하더라도 가슴이 움직이지 않는다. 나는 나 스스로 내 가슴을 울렁이도록 하는 사진을 내 온힘을 바쳐 찍을 노릇이요, 사진을 밝히는 글을 내 온마음을 들여 적바림할 노릇이다.

 엉터리 책을 쓰거나 내는 사람들이 틀림없이 있다. 게다가 많다. 이들이 쓴 책이나 내놓은 책을 살핀다든지 이들이 떠벌이는 광고 글월을 살피다 보면 속이 메스꺼울 뿐 아니라 참말 어이없으며 괴롭다. 아니, 이들이 가없이 가엾고 안타깝다. 그렇지만 이들은 스스로 엉터리 이름놀이를 하면서 엉터리 책을 퍼뜨리는 줄을 느끼지 못하며, 생각하지 못하는데다가, 거듭나지 못한다. 이러니까 이들 엉터리 책쟁이는 우악스러울 뿐 아니라 무시무시하다.

 나는 이들 엉터리 책쟁이들을 늘 만나거나 쳐다보아야 하는 가운데 나로서는 이렇게 엉터리 삶을 꾸리지 않아야겠다고 되뇐다. 곁에서 바라보면 어엿하게 어리석을 뿐 아니라 볼꼴사납기 짝이 없는데, 왜 내가 이들 엉터리 책쟁이와 같은 삶을 꾸려야 하겠는가. 책을 삶으로 녹일 줄 모르며, 책에 담긴 알맹이란 밥처럼 날마다 즐겨먹으며 내 아름다운 일을 하는 밑거름으로 삼을 줄 모르고, 책으로 따스함과 넉넉함을 펼치려 하지 않는 엉터리한테는 즈믄 마디 말을 들려주거나 즈믄 권에 이르는 책을 건네준다 하더라도 가슴이 뛰지 않는다. 나는 나 스스로 내 가슴이 펄떡펄떡 뛰도록 하는 책을 온땀 들여 쓸 노릇이요, 책을 밝히는 글을 내 온피를 쏟아 적어내릴 노릇이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은 죄 엉터리로 살아간다. 죄 엉터리로 학교를 다니고 죄 엉터리로 밥을 먹으며 죄 엉터리로 텔레비전에 파묻혀 있다. 죄 엉터리 가득한 신문에 사로잡혀 있을 뿐 아니라, 죄 엉터리 아파트에서 엉터리 나날을 보내고 있다. 어느 하나 자가용한테서 홀가분한 사람이 없지 않은가. 두 다리를 사랑하고 자전거를 아끼는 사람이 몇이나 있는가. 돈이 아닌 사랑을 믿고, 이름값이 아닌 믿음을 섬기며, 주먹힘이 아닌 꿈을 건사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는가.

 삶이 엉터리이니 넋이 엉터리이다. 넋이 엉터리인데 말이 엉터리 아닐 수 있을까.

 삶이 아름답다면 넋이 아름답고, 넋이 아름다울 때에 비로소 말이 아름답다.

 그지없이 쉬우며 마땅한 이야기인데, 이토록 쉬우며 마땅한 이야기를 쉽고 마땅히 새기거나 품는 사람이란 왜 이렇게 드물까. 지저분한 온누리이니까 예방접종을 다 맞추어야 하고, 더러운 이 땅이니까 농약과 비료 펑펑 써대야 하며, 먹고살기 팍팍한 이 나라이니까 돈벌이만 하면 될까.

 아무래도 이모저모 핑계거리가 있는 우리들이다. 어쩔 수 없이 이 일 저 일에 휘둘릴 수밖에 없는 우리들이다. 집식구를 먹여살린다든지 학교를 다녀야 한다든지 몸이 아프다든지 하면서 얼마나 고단한 하루하루일까. 그런데 이 모두는 집어치울 핑계거리이고, 우리가 돌아볼 대목은 오로지 하나이다. 누구한테든 저마다 주어진 삶은 딱 한 번뿐이요, 이 한 번 주어진 삶은 다른 어떤 사람 삶하고 견줄 수 없이 가장 아름답고 가장 빛나며 가장 즐거운 나날이다. 남하고 나를 견줄 까닭이 없이 나는 나대로 내가 걷는 이 길을 가장 신나게 걸어가면 된다. 가난하면 가난한 대로 즐거움이 있고, 가멸찬 살림일 때에는 가멸찬 살림인 대로 즐거움이 있다. 두 다리가 튼튼하여 힘차게 걸어다니는 사람이라면 힘차게 걷는 길에서 즐거움을 맛보고, 두 다리가 아파 제대로 못 걷는 사람이라면 바퀴걸상을 탄다든지 다른 사람 힘을 빌어 다닌다든지 하며 또다른 즐거움을 맛본다. 밥을 해서 스스로 먹어도 즐겁고, 밥을 차려 먹여도 즐거우며, 밥을 차려 준 분한테서 얻어먹어도 즐겁다.

 사람들이 자꾸자꾸 엉터리 사진을 찍고 엉터리 책을 쓰거나 읽으며 엉터리 말을 일삼는 까닭은 오로지 하나가 아닌가 싶다. 사람들 스스로 당신 삶이 얼마나 아름답고 빛나며 즐겁고 소담스러운가를 깨닫지 못하고 있으니, 자꾸자꾸 엉터리가 되어 버리지 않느냐 싶다. 내 삶을 사랑한다면 내 넋을 사랑하고 내 말을 사랑한다. 내 삶을 사랑하고 있는 사람이 찍는 사진에 사랑이 안 묻어날 수 있겠는가. 내 삶을 사랑하고 있는 사람이 쓴 책에 사랑이 안 담길 수 있겠는가.

 돈에 파묻힌 사람이 찍는 사진에는 돈내음이 폴폴 난다. 권력을 좇는 사람이 쓰는 책에는 권력내음이 구리게 난다.

 꿈을 품을 노릇이지 검은 속셈을 키울 노릇이 아니다. 꿈을 이루고자 땀을 흘릴 노릇이지 돈을 벌고자 땀을 쏟을 노릇이 아니다. 사진으로 이루는 꿈을 살피고, 책으로 이루는 꿈을 곱씹으며, 내 땀을 알뜰살뜰 곱게 들이며 이루는 꿈을 찾을 노릇이다. 성적표는 숫자가 아닌 사랑으로 채워야 하는데, 참말 사랑으로 성적표를 쓰고자 하는 스승이라면 아예 성적표란 집어치우고 아이들한테 편지를 써 주어야 한다. 그러니까 ‘사랑으로 쓰는’ 성적표라고 제대로 된 아름다움이 아니란 얘기다. 제대로 된 아름다움이란 ‘사랑으로 쓰는’ ‘편지’ 한 가지이다.

 옳게 살고 착하게 살며 곱게 살면 된다. 옳은 마음을 깨닫고 착한 마음을 다스리며 고운 마음을 보듬으면 된다. 옳은 일을 하고 착한 일을 즐기며 고운 일을 나누면 된다. 옳은 사진을 찍고 착한 사진을 나누며 고운 사진을 펼치면 된다. 밑바탕을 차리고 밑틀을 세우며 밑돌을 닦으면 된다. 갈래는 스스로 좋아하는 대로 다 다르게 나아가면 된다. 맨 먼저 밑자리를 슬기롭게 뿌리내리도록 애쓰면서 살아가면 된다. (4343.6.14.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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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로 가는 길과 책으로 가는 길
 ― 좋은 영화와 책은 어떻게 태어나는가



 이탈리아 영화 〈길(라 스트라다)〉을 보았습니다. 이와 함께 〈바드다드 카페〉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천국보다 아름다운〉이라는 영화도 보았습니다. 오늘날은 나라 안팎 좋은 영화를 집에 앉아 내리 여러 편을 볼 수 있습니다. 텔레비전으로 보든 비디오로 보든 디브이디로 보든 인터넷으로 보든 아주 손쉽게 옛날 영화부터 요즈음 영화까지 볼 수 있습니다. 자그마치 쉰여섯 해를 묵은 영화를 아무런 어려움 없이 봅니다. 퍽 어린 아이를 키우는 우리 식구로서는 극장마실을 할 수 없는 터라, 집에서 영화를 함께 볼 수 있는 대목이 몹시 고맙습니다. 더구나, 비디오나 디브이디를 갖고 있으면 한 번 보고 나서 가슴이 젖어든 영화를 잇달아 다시 볼 수 있습니다. 극장에서 커다란 화면으로 자잘한 곳까지 눈여겨보는 맛하고 견줄 수 없습니다만, 집에서 여러 차례 볼 때에는 극장에서 맛볼 수 없는 새로운 맛이 있습니다. 오줌 마려운 아이한테 오줌을 누이느라 살짝 멈추었다가 다시 보아도 되고, 배고픈 아이한테 밥을 차려 주며 밥을 먹이는 가운데 영화를 볼 수 있습니다.

 영화 세 편을 보고 나서 소설 《모비딕》을 펼칩니다. 《모비딕》을 손에 쥔 지 석 달째입니다. 아직 이 책 하나를 다 끝내지 않고 있습니다. 휙 읽어치울 수 있습니다만, 허먼 멜빌이라는 분이 한 땀 두 땀 이루어 낸 결을 헤아리면서 찬찬히 읽습니다.

 다른 책을 읽다가 ‘《모비딕》이야말로 문학이란 이름이 어울린다’는 대목을 곧잘 만납니다. 우리 옆지기 또한 《모비딕》만 한 소설이 아니라면 읽을 만하지 않다고 이야기합니다. 얼마 앞서 새로운 번역으로 나온 《모비딕》인데, 언제가 될는지 모르나 이 책을 헌책방에서 영어판으로 찾아내어 영어로 읽을 수 있으면 더없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번역이 아주 나쁘지는 않으나 책을 읽는 사이사이 턱턱 막힌다거나 그리 알맞아 보이지 않는 대목이 눈에 뜨이기 때문입니다. 못한 번역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모비딕》이 훌륭한 문학이라 한다면, 훌륭한 문학에 걸맞을 훌륭한 번역이라 할 수 있느냐고 묻는 자리에서는 고개를 젓겠습니다. 괜찮은 번역이지만 훌륭한 번역문학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맙니다. 이 나라에서는 어쩔 수 없는 노릇이라 할 테지만, 번역을 할 때에도 번역쟁이 한 사람이 창작을 하던 글쟁이 한 사람만큼 품과 땀과 시간과 마음을 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출판사에서 번역쟁이한테 좀더 긴 시간을 좀더 나은 일삯을 내주어 문학 하나를 아름다이 꽃피울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해 준다면, 허먼 멜빌 《모비딕》 새로운 번역은 이름만 ‘새로운’ 번역이 아니라 이름으로도 ‘아름다운’ 번역이거나 ‘훌륭한’ 번역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출판사에서는 돈을 따지지 않을 수 없으니 더 넉넉히 일삯을 챙기지 못하는 한편, 번역할 시간을 넉넉히 마련하지 못합니다. 이러면서 새로운 번역을 내놓을 때에 ‘새 번역’이라느니 ‘완역’이라느니 하는 이름만 붙이는데, 정작 어느 새로운 완전번역 작품이라 할지라도 ‘아름다운’ 번역이라는 이름이나 ‘훌륭한’ 번역이라는 이름은 못 붙입니다.

 아무래도 어렵겠지만, 《모비딕》을 우리 말로 옮기려 한다면 적어도 다섯 해쯤은 시간을 주어야 하며, 웬만하면 열 해쯤은 시간을 주되 오로지 이 하나에만 온힘을 쏟도록 할 노릇이라고 느낍니다. 낱말 하나 글월 하나 말투 하나 짜임새 하나 촘촘하면서 너르게 보듬는 옹근 번역이 되도록 북돋우자면 책 하나 섣불리 내놓지 말 노릇이라고 봅니다.

 1954년 이탈리아 영화 〈길〉을 보고 나서 세 식구는 잠자리에 듭니다. 고단하고 졸립고 힘들어, 누운 채 몇 마디 이야기를 주고받습니다. 오늘 본 영화 모두 훌륭하기는 훌륭한데, 이 가운데 100번을 내리 볼 영화를 고르라면 아무래도 〈길〉을 꼽겠다는 말을 나눕니다.

 페데리코 펠리니 님은 〈길〉이라는 영화에서 사람이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슬프며 아름다운 길을 여러 갈래에서 꾸밈없이 보여줍니다. 사람이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슬픈 길이든 즐거운 길이든 어두운 길이든 밝은 길이든 저 멀디먼 구름 같은 나라에만 있지 않음을 수수하게 보여줍니다. 딱히 밑바닥 사람들 삶을 보여주지 않고, 굳이 잘난 사람들 삶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그예 사람 삶을 보여줍니다. 사람이 걷는 길을 보여주고 사람이 살아가는 길을 보여줍니다.

 예전에 자리가 될 때마다 보느라 네 번 본 장이모 님 〈집으로 가는 길〉이라는 영화에서도 사람이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슬프며 아름다운 길이 여러 갈래로 나와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도 굳이 어떤 장치를 쓰거나 따로 무언가 꾸며서 내보이려 하지 않습니다. 그저 있는 그대로 사람들과 삶자락과 보금자리를 보여주는 가운데 이 영화를 보고 있는 사람 스스로 우러나오는 뭉클함을 보듬습니다. 사람이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길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한테 어디 먼 남쪽나라이든 북쪽나라이든 밖에서만 길을 찾다가는 길이고 뭐고 볼 수 없음을 넌지시 이야기합니다.

 좋은 영화 세 가지를 하루 만에 보고 나서 날마다 야금야금 읽고 있는 《모비딕》을 바닥에 펼쳐 놓고 야금야금 읽는 동안 새삼스레 깨닫습니다. 문학 《모비딕》이 훌륭하다는 소리를 듣는 작품이라 할 때에는 이 문학 하나에 사람이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길을 여러 갈래로 보여주되 따로 무슨 장치를 하거나 딱히 어떤 꾸밈거리가 가득하지 않기 때문이겠구나 하고. 사람들이 복닥이고 있는 결을 글쓴이부터 고스란히 껴안는 한편 깊이 삭이고 있으며, 사람들이 웃고 우는 삶을 글쓴이부터 스스럼없이 맞아들이는 한편 신나게 즐기고 있습니다. 따로 미움이라 이름붙일 수 없는 삶을 바라봅니다. 굳이 기쁨이라 이름붙이지 않아도 될 삶을 들여다봅니다. 좋은 영화이든 좋은 문학이든 바로 우리 곁에서 이야기를 얻고 있음을 말하고 있고, 좋은 영화나 좋은 문학이 나오는 샘터는 바로 우리 가슴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길〉이든 〈바그다드 카페〉이든 〈집으로 가는 길〉이든 《모비딕》이든, 참 쉬운 영화이고 쉬운 책입니다. 참 아무것 아닌 영화이고 아무것 아닌 책입니다. 참 흔한 이야기를 다룬 영화이며 문학입니다. 참 가볍게 일군 영화이자 문학입니다.

 다만, 이렇게 좋은 영화나 책(문학)이란 영화쟁이나 문학쟁이가 당신 삶을 차곡차곡 바칠 수 있으면 언제 어디에서나 얼마든지 일굴 수 있습니다. 품을 들이고 땀을 들이고 세월을 들이면 누구나 아름다운 영화와 책을 선보일 수 있습니다.

 엊그제 여든여덟 나이를 꾸리는 그림할머님을 뵈었습니다. 그림할머님은 “나도 다섯 살이었고, 나도 열다섯 살이었는데, 이제는 여든여덟이라우.” 하면서 “내가 돈을 숭배하는 사람이었으면 돈이 바라는 대로 따르며 살았겠지만, 나는 하나님을 숭배하는 사람이라서 하나님이 바라는 대로 따르며 살았다우.” 하는 말씀을 들려주었습니다. 그림할머님을 낳아 키운 박두성이라는 어른은 일제강점기에 ‘앞 못 보는 사람’한테 빛이 되고자 한글로 된 점글을 만들었습니다. 그림할머님은 당신 아버님이 시키는 대로 손과 팔과 허리가 아프도록 송곳으로 꾹꾹 누르며 점글책을 만들어 앞 못 보는 사람한테 나누어 주는 일을 함께하셨습니다. 당신 아버님이 숨을 거두고 당신 남편 또한 저승사람이 된 뒤에는 당신이 당신 아이들하고 살고 있는 집에 ‘평안 수채화의 집’이라는 새 문패를 세우고는 아흔이 코앞인 나이에도 신나게 그림을 그리며 이웃사람들한테 사랑을 나누어 주고 있어요. 여든여덟이라는 길에서 당신이 걸어온 이야기와 삶이란 어느 하나 돈 될 구석이 없는데, 여든여덟 해에 걸쳐 밥을 굶지 않았을 뿐더러 둘레에 밥을 나누기까지 했습니다. 그림할머님 당신으로서는 돈이 아닌 믿음을 섬기고 사랑을 모셨기 때문입니다.

 영화 하나를 찍으면서 이 영화가 얼마나 사랑받거나 팔리는가를 헤아린다면 어쩔 수 없이 어느 만큼 사랑받거나 웬만큼 팔리는 영화가 될 수 있습니다. 어쩌면 1000만이 보는 영화가 될 수 있고 500만이 본 영화가 될 수 있겠지요. 그런데 2010년에 1000만이 본 영화를 2020년에는 몇 사람이나 다시 볼 만할까요. 2050년에는 몇 사람이나 다시 볼까요. 2100년을 맞이할 때에는 2010년에 1000만이 본 영화를 몇 사람이나 좋아하며 챙겨 볼는지요.

 2010년 오늘 100만 권이 팔리거나 10만 권이 팔리는 책이라고 하면 이 책에는 베스트셀러라는 이름이 붙습니다. 베스트셀러라는 이름이 붙은 책은 역사에도 남아 길이길이 이어지곤 합니다. 그런데 베스트셀러라는 이름이 붙은 책을 놓고 ‘가슴시린’ 문학이라 하거나 ‘아름다운’ 문학이라 하거나 ‘훌륭한’ 문학이라 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아니, 아예 없다고 해야 알맞으리라 봅니다. 많이 팔린 책이 훌륭한 책이지는 않으니까요. 훌륭한 책이면서 많이 팔릴 수 있으나, 훌륭한 책이기에 많이 안 팔리기도 하며, 많이 팔리지 않으려는 훌륭한 책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훌륭한 책이란 돈을 바라거나 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훌륭한 책이란 처음부터 사랑과 믿음을 섬기고 아낍니다. 훌륭한 책 하나를 빚고자 땀흘리는 사람은 처음부터 ‘다문 열 사람이 사서 읽어 주기’조차 바라지 않습니다. 오직 ‘이 책 하나가 얼마나 내 한 사람이 고운 한 사람으로서 착하고 참되게 살아가는가’ 하는 뿌리를 캘 뿐입니다.

 영화로 가는 길이란 책으로 가는 길하고 같으면서 다릅니다. 영화나 책으로 가는 길이란 사람이 살아가는 길하고 같으면서 다릅니다. 농사짓는 길하고 같으면서 다른 영화길과 책길입니다. 사람을 섬기는 뜻을 담으면 어떠한 영화이든 아름다울밖에 없고, 사람을 사랑하는 넋을 실으면 어떠한 책이든 훌륭할밖에 없으며, 사람을 아끼는 얼을 깃들이면 어떠한 곳에서 무슨 일을 하든 참될밖에 없습니다. 영화쟁이이기 앞서 참사랑 나누는 수수한 한 사람이어야 하고, 책쟁이이기 앞서 참믿음 펼치는 조촐한 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집살림을 꾸리든 돈벌이를 하든 참마음 고이 다스리는 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4343.5.25.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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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가용을 버려야 책을 읽는다
 ― 늘어나는 자동차만큼 무너지는 나라


 늘어나는 자동차만큼 텔레비전이 늡니다. 이제는 버스나 전철을 타면서 손전화로 텔레비전을 즐길 수 있습니다. 차를 몰면서 손전화를 받으면 다른 차를 받을까 걱정이라고 하던 소리는 까마득히 잊힙니다. 눈과 귀는 자가용 한켠에 붙인 작은 텔레비전에 꽂힙니다.

 자가용 손잡이를 붙들고 텔레비전 모습과 소리에 마음을 기울이는 가운데 길가 한쪽에서 달리는 자전거를 눈여겨보기란 몹시 어렵습니다. 골목에서 자전거 타는 어린이를 쉬 알아채지 못하곤 합니다. 누군가 차를 몰고 있으면, 차 바깥에서 걷다가 서 있던 사람은 물러서야 합니다. 아무리 무거운 짐을 이고 골목을 걷거나, 잠든 아이를 품에 안고 비탈을 오르고 있더라도, 사람이 차한테 길을 내주어야 합니다.

 사람이 뭐 잘나서 길 한복판을 걷느냐 하실 분이 있을 테지요. 네, 사람은 잘나지 않았습니다. 못난 사람인 까닭에, 골목마다 빼곡히 들어서 있는 자동차를 비껴 걷자니 골목 한복판을 걷고, 이러다 보면 쉴새없이 오가는 차 때문에 길가에 선 차 사이사이에 구겨져 옴쭉달싹 못하고 찡기는 몸이 됩니다. 무거운 짐이나 잠든 아이를 들고 안고 기다립니다.

 자동차는 거님길에까지 올라와 있기까지 합니다. 오토바이라고 다르지 않으며, 오토바이는 거님길에서 쌩쌩거리며 무시무시하게 내달립니다. 못나고 구지레한 ‘걷는 사람’은 모든 차한테 업신받고 놀림받습니다.

 예부터 ‘걷는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거나 시를 읊거나 노래를 부르거나 책을 읽거나 들꽃을 바라보거나 하늘을 올려다보거나 새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오늘날 ‘걷는 사람’은 이 가운데 어느 하나조차 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걷는 사람’이 할 수 있으며 해야 하는 일은 오가는 자동차 살피기입니다. 오가는 자동차가 브레이크를 안 밟고 씽씽 쌩쌩 휭휭 내달릴 수 있게끔 비키는 일을 해야 합니다.

 달리는 차를 멈춰 어르신 짐을 싣고 댁에까지 모셔 드린다든지 하는 일은 오늘날로서는 꿈조차 꿀 수 없습니다. 1980년대 끝무렵까지 제가 살던 골목동네에서는 어르신 앞을 자가용이 함부로 앞지르거나 빵빵거리지 않았으며, 아이 손을 잡고 걷거나 아이를 안고 걷는 어버이한테 윽박지르지 못했습니다.

 자가용을 몰면서 손전화를 받고 텔레비전을 봅니다. 영화를 내려받아 볼 수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자가용을 몰면서 책을 읽지는 못합니다. 달리는 차를 멈추고 낮잠을 자거나 사랑을 나누는 사람은 있습니다. 고속도로 쉼터에서 밥을 사먹는 사람은 있습니다. 그러나, 달리는 차에서는 책을 읽을 수 없을 뿐 아니라, 달리는 차를 멈추어 책을 읽겠다는 사람을 아직까지 못 보았고, 이런 사람이 있다는 얘기 또한 못 들었습니다. 책을 읽어야 하기에 자동차를 기꺼이 내동댕이친 사람 이야기는 아직 들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자가용을 장만하겠다고 생각한 바로 이때부터 책하고는 등을 돌리는 셈입니다. 운전학원 값이면 책이 몇 권일까요. 차 한 대 값이면, 여느 사람으로서는 죽을 때까지 신나게 책을 사읽고 둘레에 선물해도 돈이 남아돕니다. 책 사읽을 값을 아이한테 물려주어도 다 못 쓸 수 있을 만한 차값입니다. 아니, 차에 넣는 기름값만큼 다달이 책을 사읽으려 한다면, 우리는 다달이 얼마나 많은 책을 넓고 깊게 살피며 마음밭을 살찌울 수 있을는지요.

 나는 꿈을 꿉니다. 현대, 대우, 삼성, 기아 들이 자가용 더 팔려고 용을 쓰지 말고, 자동차공장을 이제 줄이며, 우리 삶을 사랑하고 아끼는 책마을을 조그맣게 온나라 곳곳에 세우면 얼마나 기쁠까 하고. 자동차 만들던 일꾼이 온나라 곳곳에서 농사를 지으며 글을 쓰고 책을 만들어 저마다 뿌리내린 마을에서 스스로 일구어 먹고사는 한편 슬기롭고 아름다운 마음결 북돋우는 배움마당을 꾸릴 수 있으면 이 얼마나 좋으랴 꿈을 꿉니다.

 전라도 함평이나 경상도 거창뿐 아니라, 대구 시내와 서울 한복판에까지 아스팔트와 시멘트를 걷어내고 아파트를 허문 다음에 논밭을 일구며 조촐한 ‘농사짓는 책마을’을 아주 앙증맞도록 자그맣게 꾸리며 섬길 수 있으면, 땅과 사람과 삶 모두 따스하고 넉넉히 보듬을 수 있지 않으랴 싶습니다.

 자동차를 버려야 전쟁을 막는다고 읊은 동화 할배가 있습니다. 자동차를 버리면 전쟁뿐 아니라 독재를 막고, 4대강을 비롯한 숱한 막개발이니 신자유주의이니 한미자유무역협정이니 국가보안법이니 학벌주의이니 무어니 모두를 막을 수 있습니다. 이러면서 우리는 누구나 맑고 밝은 가슴과 넋으로 정갈한 먹을거리를 스스로 일구어 저마다 어여쁘고 훌륭한 사람으로 튼튼히 설 수 있습니다. (4343.5.19.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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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nt236 2010-05-22 22:11   좋아요 0 | URL
현실적으로 책마을을 만드는 것은 어렵겠지요. 정말 꿈으로 끝나겠지요. 그렇지만 자동차를 줄여야 책을 본다는 말에는 십분 동의 합니다. 당장 저마저도 걸어다니거나 대중 교통을 이용하면 책을 보지만 운전을 하면 거기에 온통 신경을 솓아야 하니 말이지요.

숲노래 2010-05-23 07:34   좋아요 0 | URL
경기도 파주에 수천 억을 들여 짓는 책마을이 아닌, 수천만 원조차 아닌 땀방울로 작게 여미는 책마을이 되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책을 사 주어 돈을 번 출판사들은 건물 하나 짓는 데에 수십 억씩 쓰면서 엉터리 책마을을 꾸며 놓았으니. 참 슬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