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한 사진책 - 삶과 이야기가 있는 사진
최종규 지음 / 눈빛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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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책 읽기 372


사진 없는 사진책으로 숲을 배우다

― 내가 사랑한 사진책, 삶과 이야기가 있는 사진
 최종규
 눈빛, 2018.7.9.


사진은 빛그림이기도 한데, 빛그림이란 우리를 둘러싼 모든 빛(모습)을 담은 그림입니다. 우리가 눈으로 보는 대로, 또는 눈으로 못 보더라도 자외선이나 적외선 같은 다른 테두리 빛을 기계를 써서 담는 그림입니다. 사진은 ‘빛(모습)’을 바탕으로 그림을 그리듯이 나타내는 삶이라 할 텐데요, 사전은 ‘말(생각)’을 바탕으로 그림으로 그리는 삶이라 할 테니, 둘은 ‘그리다’라는 얼거리에서 만납니다. 빛을 그리면서 삶을 나타내거나 나누는 사진입니다. 말을 그리면서 삶을 나타내거나 나누는 사전이에요. (7쪽)


  제가 사진을 처음으로 느낀 때는 열 살 무렵입니다. 그때까지는 누가 사진을 찍거나 말거나 못 느끼기 일쑤였고, 찍든 말든 대수롭지 않았습니다. 아니, 사진이나 사진기를 아예 모르다시피 살았어요. 사진기 앞이라 꺼린다든지, 사진을 찍는다고 해서 얼굴이 굳어질 일도 없습니다.

  열 살 무렵 처음으로 사진을 느낄 적에 ‘스스로 보는 대로 찍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안 쓰느라 놀리는 사진기가 하나 떠올랐고, 필름이 있는가를 살펴서 하늘에 대고 구름을 찍었어요. 4층 툇마루에 기대서서 하늘바라기를 한참 하다가 구름빛이 매우 곱다고 여기면서 구경을 하는데, 끝없이 달라지면서 춤추는 구름짓을 잊지 않고 싶더군요. 마음에 담아도 안 잊겠지만, 구름은 늘 달라지기에 어느 한 가지 모습을 확 붙잡고 싶었어요.


사진을 배우고 싶은 분이라면, 굳이 대학교에 안 가도 됩니다. 구태여 미국이나 유럽이나 일본으로 배움마실을 떠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면 뭘 해야 할까요? 사진을 배우고 싶다면 ‘무엇을 사진으로 찍어서 이야기를 엮고 싶은가?’부터 알 노릇이에요. 무엇을 사진으로 찍겠노라는 생각이 없다면, 그리고 사진으로 어떤 이야기를 엮겠노라는 뜻이 없다면, 우리는 사진을 배울 수 없습니다. (10쪽)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는 ‘사진’이라고 하면 다큐멘터리·신문·광고·패션·예술, 이렇게 다섯 가지 즈음만 사진으로 여기는 듯합니다. 생활 사진을 사진으로 여기는 생각을 마주하기는 몹시 어렵습니다. 리얼리즘이든 사실주의이든, 이런 이론을 떠나서, 삶을 바라보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찍는 사진을 아끼는 눈길이 좀처럼 자라지 못합니다. (22쪽)



  열 살 무렵 구름을 사진으로 찍고서 꽤 오래도록 사진을 잊습니다. 국민학교 6학년 졸업사진을 찍을 즈음 개구쟁이 짓이 사진에 담기면 두고두고 재미있겠다고 여겼다가, 고등학교 수학여행을 다녀올 적에 몇 장 찍어 보는데, 굳이 사진이나 사진기가 있어야 한다고 느끼지 않았습니다.

  가만히 돌아보니 그렇습니다. 종이라고 하는 데에 얹지 않아도 마음에 늘 얹기 마련이에요. 마음에 새기는 이야기라면 종이에 따로 새겨야 하지 않습니다. 종이에 따로 새겨서 모으면 짐이 잔뜩 늘어나거든요. 그런데 이런 마음을 넘어선다면, 종이에 따로 새겨서 모을 적에 짐이 늘어나더라도 좋다고 여기는 마음이 된다면, 벽에 붙이고 사진첩으로 건사하며 이웃한테 선물할 사진을 얻고 싶다면, 비로소 두 손에 사진기를 쥘 만하지 싶습니다.


사진은 늘 오늘을 찍습니다. 사진은 늘 모레를 바라보면서 오늘을 찍습니다. 사진은 늘 오늘을 찍는데, 사진에 찍힌 오늘은 곧바로 어제가 됩니다. 오늘을 찍은 사진은 곧바로 어제가 되지만, 어제가 되는 오늘 찍은 사진은 늘 모레로 나아갑니다. 우리 가슴을 적시는 사진은 언제 어디에서나 오늘과 어제와 모레가 한결로 흐릅니다. 어느 한 가지만 똑 떨어진다면, 이것은 ‘작품’은 될 터이나 사진은 못 됩니다. 어느 한 가지만 두드러진다면, 이것은 ‘기록’은 될 테지만 사진은 안 됩니다. 어느 한 가지만 생각해서 찍는다면, 이것은 ‘문화’나 ‘역사’는 될 테지만 사진은 될 수 없습니다. (76∼77쪽)


  《내가 사랑한 사진책》(최종규, 눈빛, 2018)을 써냈습니다. 1998년 가을에 처음으로 제 사진기를 거느리면서 사진찍기에 발을 담갔고, 사진으로 이룬 책은 1994년부터 눈여겨보았습니다. 한국말사전을 짓는 길을 걷는 동안 둘레에서 사진책도 잘 살펴야 한다는 말을 들었고, 1998년 즈음부터 사진책을 하나둘 장만해서 혼자 배우는 길을 걸었습니다.

  따로 대학교 사진학과를 다니지 않았습니다. 대학교는 통·번역 배움길을 가다가 다섯 학기만 마치고 그만두었는데, 신문방송학과 부전공 네 해치 수업을 한 해 동안 몰아서 다 듣는 동안 보도사진 강좌를 한 학기 들어 본 적은 있습니다. 상업사진 스튜디오라든지 내로라하는 사진가 곁에서 배운 적은 없습니다. 혼자 사진책을 읽고, 혼자 사진을 찍으면서 스스로 배우는 길을 걸었어요. 이러면서 사전짓기(한국말사전을 새로 쓰는 일)로 살림을 꾸렸습니다.

  사전을 지으면서 곁에 사진을 두는 동안 ‘사전·사진’이 매우 닮으면서 다르구나 하고 느꼈어요.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참으로 다르되, 속살은 매우 닮습니다. 담고 싶은 삶을 담는 얼거리가 비슷하고, 눈으로 보이는 그림이나 눈으로 읽는 글이라는 대목이 다릅니다. 나타내고 싶은 마음을 굵고 짧게 나타내는 결이 비슷하고, 기계를 쓰거나 두툼한 종이꾸러미를 쓰는 대목이 다릅니다.



따뜻함을 느끼기에 사진을 찍고, 따뜻함을 느낀 마음으로 사진을 찍습니다. 따뜻함을 나누려고 사진을 찍고, 따뜻한 삶을 이야기하려고 사진을 찍어요. 따뜻한 사랑이 되고자 하며 사진을 찍고, 따뜻하게 어깨동무하는 살림을 짓는 꿈을 노래하면서 사진을 찍습니다. (264쪽)

한손을 거들어 살림하면서 사진이랑 삶이랑 사랑을 가꿉니다. 한손은 집안에 즐거움과 기쁨이 감돌도록 힘을 씁니다. 다른 한손은 집안에 이야기꽃이 피어나도록 도란도란 말을 섞고 사진을 찍습니다. 한손을 거들어 밥을 짓고 글을 씁니다. 한손은 너와 나 사이에 흐르는 꿈을 짓고, 다른 한손은 너와 내가 저마다 나아갈 사랑스러운 길을 닦습니다. (277쪽)


  《내가 사랑한 사진책》은 혼자서 꿋꿋하게 사진을 배우고 사랑하는 길을 걸으면서 ‘배우고 사랑한 이야기’를 다룬 책입니다. 스무 해 남짓 사진길을 걷고 보니, 대학교 사진학과를 굳이 안 다녀도 얼마든지 사진을 즐겁게 찍거나 읽을 수 있다고 깨닫습니다. 한국에서는 ‘어느 대학 사진학과’를 나왔느냐 안 나왔느냐로 줄을 세운다고 합니다. 그 대학 사진학과를 안 나올 적에는 한국 사진밭에서는 따돌림을 받는다고 하는군요. 다만 이마저도 요즈막에서야 알았어요. 대학교도 그만두었고, 사진학과는 아예 한 발도 안 담그며 혼자 사진을 익혔으니, 사진밭에 줄이 그렇게 단단한 줄 알 턱조차 없었습니다.

  그런데 제 곁에는 늘 상냥한 스승이나 벗이 있습니다. 바로 사진책입니다. 화보 같은 사진책도, ‘사진 없이 글로 이야기를 풀어내는 이론서’인 사진책도, 지나간 날을 읽을 수 있는 졸업앨범이라는 사진책도, 나라 안팎 온갖 작가들이 일구어 놓은 사진책도, 독재정권 대통령 비서실 같은 데에서 독재 허수아비를 퍼뜨리려고 내놓은 이승만·박정희·전두환·노태우 화보집 같은 사진책도, 만화로 다루는 사진책도, 그림으로 들려주는 사진 이야기가 흐르는 책도, 저마다 다르면서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주는 스승이자 벗이었어요.

  무엇보다도 사진가란 이름으로 작품이나 예술을 해야만 사진책이 아닌 줄 배웠습니다. 사진가란 이름이 없어도, 또 이름이 안 알려지거나 덜 알려진 사진가 한 사람이 일군 사진책도 매우 아름다운 줄 배웠어요. 외려 이름이 널리 알려진 사진가 가운데 쭉정이 사진이 참 많은 줄 배우기도 했습니다.


‘살면서 찍는 사진’하고 ‘구경하며 찍는 사진’은 다릅니다. 골목마을에 살면서 모든 빛과 어둠을 고스란히 바라보면서 봄·여름·가을·겨울을 누리는 몸으로 아침·낮·저녁·밤·새벽을 마주하는 사진이랑, 골목여행을 한다면서 어쩌다가 한 번 찾아와서 한두 시간 쓱 훑고 지나가며 찍는 사진은 사뭇 다르기 마련입니다. (34쪽)

사진으로 찍어서 보여주기에 문화가 될까요? 글로 적어서 책이나 논문으로 선보이면 역사가 될까요? 사진으로 찍지 않고 마음속에 담는 문화는 무엇일까요? 글로 쓰지 않고 책으로 엮지 않는 역사는 무엇일까요? (172쪽)



  사진찍기는 글쓰기하고 같다고 느낍니다. 사진읽기는 글읽기하고 같다고 느끼고요. 사진찍기는 삶짓기하고 같다고 느끼며, 사진읽기는 삶읽기하고 같구나 싶어요. 말을 다루는 길을 걸으며 사전을 지을 적마다‘ 말 = 삶’이라고 뚜렷이 느낍니다. 이 길을 걸으며 사진을 길벗으로 삼으니‘ 사진 = 삶’이라고 똑같이 느껴요.

  저는 《내가 사랑한 사진책》을 ‘사진이랑 책이랑, 사진마실, 사진벗님, 사진누리, 사진바람, 사진노래, 사진빛살, 사진사랑, 사진수다’처럼 아홉 갈래로 나누어서 써 보았습니다. 사진책 쉰 권을 다루었습니다. 퍽 알려진 사진책을 다루기도 했지만, 비매품 사진책을 다루기도 했고, 사진밭에서 이름이 아예 안 알려진 분이 빚은 사진책을 다루기도 했습니다. 사진책마다 어떤 이야기를 다루는가를 놓고서 먼저 한 줄로 갈무리를 하고서 속뜻을 풀어내 보려 했습니다.


사랑·꿈으로 오래도록 품을 들인 ‘골목이웃’ 사진 ― 골목안 풍경 전집
우리 곁 고운 이웃을 바라보는 손길 ― 우편집배원 최씨
옛 서울 냇가로 마실을 가다 ― 시간 속의 강
신호등 없던 이쁜 서울을 그린다 ― 변모하는 서울
작은 사진에 담는 작은 꿈 ― 배다리 사진 이야기, 창영동 사는 이야기
곁에 있는 사랑을 사진으로 찍는다 ― 풍경소리에 바람이 머물다
바로 오늘, 처음 한쪽을 넘긴다 ― 예스터데이, 추억의 1970년대



  《내가 사랑한 사진책》은 사진 없는 사진책입니다. 사진을 오직 글로만 풀어낸 사진책입니다. 굳이 사진을 곁들이지 않은 사진책입니다. 사진을 제대로 바라보자면 때로는 사진을 모두 걷어내고서 글만 읽으면서 머릿속으로 사진을 그려 보아야 한다는 줄거리를 다루는 사진책입니다.
  《내가 사랑한 사진책》은 ‘사진기 사랑’이 아닌 ‘사진 사랑’을 말하려는 사진책입니다. 이 책은 ‘사진학과 연줄’이 아닌 ‘사진을 사랑하는 사람’을 말하려는 사진책입니다. 그리고 ‘이름난 작가라는 허울’이 아닌 ‘아름다운 삶을 짓는 알맹이’를 함께 들여다보면서 나누자고 하는 마음을 드러내려 하는 사진책입니다.


개구리 노랫소리와 풀벌레 노랫소리를 담고 싶어요. 소리를 어떻게 사진으로 담느냐 궁금해할 분이 있을 테지만, 참말 소리도 사진으로 담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개구리 노랫소리 들으며 사르르 녹는 즐거움이 사진 한 장 찍으며 천천히 깃듭니다. 풀벌레 노랫소리 들으며 살살 퍼지는 즐거움이 사진 두 장 찍으며 시나브로 뱁니다. (59쪽)


  저는 사진을 배우면서 사진기나 렌즈를 장만하려고 이태나 세 해쯤 목돈을 모으곤 했습니다. 오늘 여기에서 더 나은 사진기나 렌즈를 살 수 있는 돈이 없으면, 돈이 없는 대로 아주 값싼 사진기나 렌즈로 마음을 담아내자고 여겼습니다.

  필름을 사려고 적금을 들지요. 더 나은 필름스캐너를 장만하려고 적금을 들고요. 한 발자국씩, 더디지만 씩씩하게 사진길을 걸으려 했습니다. 번쩍거리는 서울 한복판 갤러리에서 사진을 걸지 않아도 좋다고 여겼습니다. 골목마을 담벼락에 사진을 걸어도 즐거웠고, 헌책집 책시렁에 누름못으로 사진을 걸쳐도 재미있었어요.

  제가 찍는 사진에 오롯이 들어와 준 사람이나 집이 있으면, 반드시 사진을 종이에 앉혀서 나중에 갖다 드리려 했습니다. 찍혀 주는 사람이나 집이 있기에 찍을 수 있는 눈이나 손이 발돋움할 수 있구나 싶었어요. 정갈하면서 아름다이 살아가는 숨결이 이웃에 있으니, 언제나 새롭게 바라보거나 마주하면서 사진을 찍는구나 싶었습니다.


값비싸거나 값진 장비나 기계가 있어야 ‘아이 사진’을 더 잘 찍지 않습니다. 더 뛰어난 장비나 기계를 어깨에 걸쳐야 ‘곁님이나 사랑님 사진’을 더 잘 찍지 않아요. 중형사진기나 대형사진기쯤 있어야 ‘내가 사랑하는 풍경 사진’을 더 잘 찍지 않지요. 사랑으로 다가서려는 마음이 있을 적에 비로소 즐겁게 찍는 사진입니다. 즐겁게 찍고 사랑스레 찍는 사진이라면, 이렇게 찍은 사진은 모두 ‘잘 찍은 사진’이라고 할 수 있어요. 왜냐하면, 사랑으로 다가서면서 찍는 사진에는 늘 이야기가 흐르니까요. (108쪽)

사진에는 좋거나 나쁜 빛이 없습니다. 어떻게 찍든 모두 사진입니다. 스스로 살아가는 모습을 담는 사진이고, 스스로 살아가는 대로 담기는 빛입니다. (155쪽)



  사진은 예술인가 아닌가 하는 말다툼이 꽤 오래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말다툼을 먼발치에서 지켜보면서 참 덧없이 다툼질을 하는구나 싶었습니다. 왜냐하면, 사진은 예술이면서 예술이 아니니까요. 사진은 사진 그대로 언제나 예술이지만, 예술이라는 이름에 갇히려 하면 예술일 까닭이 없습니다.

  사진을 사진으로 바라보며 다루면 언제나 ‘사진이면서 예술’이에요. 그러나 사진을 예술품이나 전시품이나 재산으로 삼으려 하면 언제나 ‘덧없는 허수아비’이지 싶습니다.

  몇 가지 보기를 들 수 있습니다. 비싼값에 팔려는 속셈으로 금소나무를 함부로 벤 사진가 아무개가 있습니다. 비싼값에 작품을 파는 앞모습 뒤에서는 성추행을 일삼은 사진가 아무개가 있습니다. 다른 나라 사진가 작품을 흉내내거나 베끼는 사진가 아무개도 있어요. 공모전이나 협회나 학벌로 금을 그으면서 권력이 되는 사진가 여럿도 있고요.

  다만 사진은 사진일 뿐입니다. 얄궂은 마음으로 바라보면서 얄궂게 찍은 사진은, 그대로 얄궂은 사진입니다. 참한 마음으로 마주하면서 참하게 찍은 사진은, 그대로 참한 사진, 곧 참사진입니다.


사진을 사진답게 찍을 때에 비로소 사진답다고 합니다. 그럴듯한 모습을 찍으면 그저 ‘그럴듯할’ 뿐입니다. 멋있어 보이게 찍는다면 그저 ‘멋있어 보일’ 뿐이지요. 이렇게 만지작거리거나 저렇게 꾸민다고 해서 사진이 빛나지 않습니다. 이렇게 붙이거나 저렇게 자른다고 해서 사진이 도드라지지 않습니다. (332쪽)

사진가는 으레 ‘찍는 사람’으로 여기기 마련이지만, 사진가라고 하는 자리는 숱한 사람을 오랫동안 꾸준히 자꾸자꾸 다시 마주하는 동안 ‘배우는 사람’이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즐거움을 배우면서 즐거움을 사진에 담고, 아름다움을 배우면서 아름다움을 사진에 담으리라 느껴요. 사랑을 배우면서 사랑을 사진에 싣고, 기쁜 꿈을 배우면서 기쁜 꿈을 사진에 실으리라 느껴요. 맑은 눈짓을 배우면서 맑은 눈짓을 사진으로 옮기고, 밝은 웃음을 배우면서 밝은 웃음을 사진으로 옮기리라 느낍니다. (395쪽)



  한국에는 사진가라는 이름으로 사진을 찍는 분이 무척 많습니다. 값지거나 값비싼 사진기도 매우 많이 팔렸습니다. 그렇지만 한국은 사진책이 거의 안 나올 뿐 아니라, 애써 나온 사진책이 거의 안 팔리기 일쑤입니다.

  비싼 사진기를 어깨에 걸친 사람은 많은데, 단돈 1∼2만 원짜리 사진책은 거들떠보지 않는다면, 이이는 사진가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이가 쓰는 사진가라는 이름은 무엇일까요?

  오백만 원짜리 렌즈는 가볍게 장만하고, 이천만 원이나 오천만 원짜리 장비도 거뜬히 장만하지만, 5만 원짜리 사진책은 비싸다고 말한다면, 이이는 어떤 사진가일까요? 오백만 원짜리 렌즈 하나를 덜 장만한다면, 5만 원짜리 사진책을 100권 장만할 수 있습니다. 이천만 원짜리 장비 하나를 덜 산다면, 2만 원짜리 사진책을 1000권 장만할 수 있습니다.

  사진가는 참으로 많고, 사진기도 참으로 많이 팔려서 쓰는데, 왜 한국사람은 한국이라는 터전을 스스로 새로이 바라보거나 마주하면서 사진으로 사랑스레 담아내어 나누는 길에는 좀처럼 서지 못할까요? 작품이나 예술이 되려는 사진이 아닌, 수수한 이웃하고 어깨동무를 하는 삶이나 살림을 사랑하려는 사진은 왜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울까요?

  그리고, 사진이론이나 사진비평은 왜 하나같이 일본 한자말에 번역 말씨로 덮어씌워야 하고, 아예 영어로 가득 채워야만 한다고 여길까요? 문학하는 분들은 시집에 붙은 비평(시평)이 매우 딱딱하고 어렵다고들 말하는데요, 사진비평은 문학비평보다 훨씬 딱딱하고 어려운 말로 뒤집어씌우기 일쑤입니다.


사진기라는 기계는 평등하면서 평등하지 않습니다. 사진기라는 기계가 평등하다면, 대학교 사진학과를 나왔든 나오지 않았든 이 기계를 손에 쥐는 사람은 누구나 사진을 찍을 수 있습니다. 어린이도 할머니도 젊은이도 얼마든지 사진을 찍을 수 있어요. 사진기라는 기계가 평등하지 않다면 값에 따라 값어치가 달라서, 더 돈을 치르면 해상도가 더 빼어난 기계를 손에 쥘 수 있습니다. 그리고 때에 따라서는 대학교 사진학과라든지 사진밭 여러 어른 뒷줄에 서서 이름을 펴기도 합니다. (421∼422쪽)


  삶으로 스밀 수 있기에 비로소 문학이요 사진이라고 느낍니다. 살림을 짓는 살림지기 손끝에서도 넉넉히 태어날 수 있을 적에 비로소 문학이요 사진이지 싶습니다. 어느 대학교 사진학과를 나와서 전문가 노릇을 해야만 찍거나 읽는 사진이 아닙니다. 부엌일을 하는 살림지기 손으로도 찍거나 읽을 수 있을 때에 사진입니다. 신나게 뛰어노는 아이들하고도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면서 새롭게 생각을 지필 적에 사진입니다.

  우리는 두 손을 펴서 두 손가락을 모아 네모틀을 짜면서 ‘눈사진(눈짓을 하며 찍는 사진)’을 찍을 수 있어요. 때로는 손가락을 둥글게 붙여서 둥그런 눈사진을 찍을 수 있습니다.

  사진에 황금분할이 있다고 말합니다만, 황금분할보다는 ‘즐거운 마음’하고 ‘사랑스러운 눈길’이 먼저 있을 적에 아름다우리라 느껴요. 즐거운 마음이기에 작품이란 이름도 따르고, 사랑스러운 눈길이기에 예술이란 이름도 찾아오지 싶습니다.

  이름값이나 학교줄이나 장비병이란 말이 사진밭에서 사라지기를 바랍니다. 이 나라 사진밭에 작가나 독자나 평론가 사이에서 “내가 사랑한 사진책” 이야기가 피어나기를 바랍니다. 저는 2007년 4월에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사진책도서관’을 열었습니다. 이 사진책도서관을 2011년에 전남 고흥으로 옮겨서 ‘사전 짓는 책숲집 숲노래, 사진책도서관+한국말사전 배움터+숲놀이터’로 바꾸어서 꾸립니다. 사진 곁에 사전이 있다고 느껴, 두 갈래 도서관으로 꾸리는데, 사진하고 사전 곁에 숲도 함께 있을 적에 비로소 아름다이 어우러지는구나 싶어서 ‘시골숲 사전·사진 도서관’을 꾸려요. 《내가 사랑한 사진책》은 ‘사진책도서관 + 사전도서관 + 숲도서관’ 열두 해를 사진 없는 말로 지어서 얻은 작은 열매입니다. 2018.7.27.쇠.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책읽기/사진비평/사진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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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잘하고 글 잘 쓰게 돕는 읽는 우리말 사전 3 - 얄궂은 말씨 손질하기 말 잘하고 글 잘 쓰게 돕는 읽는 우리말 사전 3
최종규 글, 숲노래 기획 / 자연과생태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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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궂은 말씨를 손질하면 생각이 살아납니다

[책이 나왔습니다] 쉬운 말이 평화·평등 《읽는 우리말 사전 3》



  지난 선거를 앞두고 전남 고흥 여러 시민모임에서 고흥군수 후보자한테 찾아가서 교육 정책을 제대로 펴야 한다는 뜻을 밝힌 적 있습니다. 이때에 열한 살 큰아이를 데리고 함께 갔습니다. 저는 군수 후보자가 하는 말을 무릎셈틀로 받아적었고, 큰아이는 사진을 찍었어요. 이날 자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큰아이한테 군수 후보자가 믿음직해 보이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큰아이는 좀 머뭇거리다가 “모르겠는데.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어.” 하고 대꾸했습니다.


  이 대꾸를 듣고서 곰곰이 돌아보았어요. 사회에서 적잖은 어른들은, 또 정치 같은 자리에 나서는 어른들은, 여느 자리에서 살아가는 사람하고는 다른 말을 쓰기 일쑤입니다. 형식이라고 하는 겉치레에 매인 말을 흔히 써요. 게다가 일본 한자말 같은 딱딱한 말씨를 써야 하는 듯 여기기도 하고, 좀더 어려운 말씨를 써야 유식해 보인다고, 이른바 똑똑해 보인다고 여기기도 합니다.



인문책에서도 시집에서도 만화책에서도 그림책에서도 생태도감에서도 아리송하거나 얄궂은 말씨를 쉽게 찾아낼 수 있습니다. 어느 모로 본다면 이제 이런 말씨가 워낙 흔하기에 이런 말씨를 얄궂거나 아리송하다고 하기보다는 ‘새로운 현대 한국 말씨’로 여길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런 말씨로 공무원이 공문서를 쓰면 우리는 하나같이 ‘공무원은 왜 이렇게 글을 어렵고 얄궂게 쓰느냐’며 나무랍니다. 공무원이 쓰는 공문서도 쉽고 바르며 알맞고 곱게 가다듬을 노릇인데, 이에 앞서 우리 누구나 글을 가다듬어서 말도 함께 살찌우면 좋겠습니다. (4쪽)



  《읽는 우리말 사전》 셋째 권을 냈습니다. 책이름이 살짝 깁니다만, 《말 잘하고 글 잘 쓰게 돕는 읽는 우리 말 사전 3 얄궂은 말씨 손질하기》(자연과생태, 2018)라는 “읽는 사전”입니다. 이 책은 우리 집 큰아이뿐 아니라, 이 나라에서 살아가는 모든 이웃님이 즐겁고 쉽게 생각을 나누도록 돕는 말을 찬찬히 살펴서 쓰는 길에 이바지하고 싶은 마음으로 썼어요.


  모든 말이나 글을 어렵게 쓰지 말자고, 어려워서 못 알아듣는 사람이 생기게 하지 말자고, 말이나 글 때문에 사람 사이에 울타리나 문턱을 높이지 말자고, 쉬운 말로 얼마든지 생각을 널리 펴고 환하게 나눌 수 있다는 뜻을 밝히려고 쓴 “읽는 사전”입니다.


  굳이 얄궂게 써야 하지 않습니다. 굳이 겉치레를 해야 하지 않습니다. 굳이 있어 보이는 말씨를 써야 하지 않습니다. 굳이 일본 한자말을 골라서 써야 잘나 보이는 글이나 말이 되지 않습니다. 수수하게 말하거나 글을 쓸 적에 참으로 수수하면서 쉬울 뿐 아니라, 서로서로 생각을 한결 부드러우면서 넓고 깊게 나눌 수 있기도 합니다.



10만 그루에 대한 벌목이 시작됐다

→ 10만 그루를 벤다

→ 나무 10만 그루를 벤다


무사히 땅에 정착한 거미는 영역을 지키고 거미그물을 만들면서 삶의 터전을 잡아 갑니다

→ 땅에 잘 내려온 거미는 자리를 지키고 거미그물을 짜면서 삶터를 잡아 갑니다

→ 땅에 잘 떨어진 거미는 터를 지키고 거미그물을 지으면서 삶자리를 잡습니다

→ 땅에 잘 내려선 거미는 터를 지키고 거미그물을 치면서 삶자리를 잡습니다



  ‘-에 대한’은 번역 말씨입니다. 영어 ‘about’은 ‘-에 대한/-에 대하여’로 옮길 만하지 않습니다. 한국 말씨로는 ‘-을/-를’을 쓰면 되어요. “10만 그루에 대한 벌목이 시작됐다” 같은 글월에서 한자말 ‘벌목’을 꼭 쓰고 싶다면 “10만 그루를 벌목했다”처럼 손질해 줍니다. ‘벌목’이란 한자말은 ‘나무베기’를 가리키니 “10만 그루를 벤다”나 “나무 10만 그루를 벤다”로 손질하면 한결 나아요. 이렇게 하면 어린이도 다 알아들을 만한 말로 거듭나요.


  거미가 그물을 짜거나 짓거나 치려고 땅에 잘 내려오는 모습을 놓고도 “땅에 잘 내려온”이라 하면 되지요. 굳이 “무사히 땅에 정착한 거미”처럼 한자말로 꾸며야 하지 않습니다. 이런 한자말을 써야 거미를 다루는 생물학이 되지 않습니다. 이 글월에서 말씨를 더 살피면 “거미그물을 만들면서”에서 ‘만들다’는 잘못 썼어요. 아무 자리에나 ‘만들다’를 넣지 못해요. 거미줄은 ‘짠다’나 ‘친다’나 ‘짓는다’고 해야 올발라요. “삶의 터전”이라는 일본 말씨는 ‘삶터’나 ‘삶자리’처럼 짧게 끊어야 또렷할 뿐 아니라, 글월도 매끄럽지요.



가로등 아래 나무 그림자가 일렁이고 있다

→ 가로등 밑에 나무 그림자가 일렁인다

→ 가로등 곁에 나무 그림자가 일렁인다


내가 건강한 삶을 유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 내가 튼튼하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우리는 말을 쉽게 쓰는 길을 살피면서, 한국말을 한국말답게 쓰는 길을 갈 적에 한결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가로등 ‘아래’”라고 하면, 가로등을 세운 ‘땅바닥 아랫자리’를 가리킵니다. 그림자를 살핀다면 “가로등 밑”이나 “가로등 곁”처럼 낱말을 제대로 가려서 써야 알맞습니다. “일렁이고 있다”에서 “-고 있다”는 번역 말씨입니다. “일렁인다”라고만 해야 알맞고, 느낌을 더 살리고 싶다면 사이에 꾸밈말을 넣어 “한창 일렁인다”나 “막 일렁인다”나 “이제 일렁인다”나 “가만히 일렁인다”로 쓰면 됩니다.


  “건강한 삶을 유지하려면”은 일본 말씨하고 번역 말씨가 뒤섞인 모습인데요, “튼튼하려면”이나 “튼튼하게 살려면”으로 가다듬어 줍니다.



우리는 일찍이 오랜 기간 경제적으로 부족한 생활을 해 왔다

→ 우리는 일찍이 오랫동안 돈이 없이 살아왔다

→ 우리는 일찍이 오랫동안 살림돈이 모자랐다

→ 우리는 일찍이 오래도록 가난하게 살았다

→ 우리는 일찍이 퍽 오래 가난한 살림이었다


햇살과 바람을 무상으로 공급받는 나는

→ 햇살과 바람을 거저로 받는 나는

→ 햇살과 바람을 그냥 받는 나는



  돈이 없기에 “돈이 없이 살다”라 하고, 돈이 모자라기에 “돈이 모자라게 살다”라 말합니다. 이를 “경제적으로 부족한 생활을 해 왔다”처럼 한자말을 잔뜩 넣어야 학문 같은 글이 된다거나, 멋있어 보이는 글이 되지 않습니다.


  “무상으로 공급받는”도 덧없는 말자랑이에요. 더욱이 “공급 + 받다”는 뜬금없습니다. ‘공급(供給)’이라는 한자말은 ‘주다’를 뜻해요. ‘공급받다 = 줌을 받다’라 말하는 셈이니 앞뒤가 어긋나는 말씨이기도 합니다. “거저 받다”나 “그냥 받다”처럼 쉽게 쓰면 됩니다.



영어가 지구상의 모든 말을 밀어낼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가질 수도 있다

→ 영어가 지구에서 모든 말을 밀어낼지도 모른다며 두려울 수 있다

→ 영어가 온누리 모든 말을 밀어낼지도 몰라 두려울 수 있다

→ 영어가 온누리 모든 말을 밀어낼지도 몰라 두려워할 수 있다


자기보다 큰 수컷과의 일전을 불사해야 하는데

→ 저보다 큰 수컷하고 한판 붙어야 하는데

→ 저보다 큰 수컷과 한바탕 싸워야 하는데



  “지구상의 모든 말을”은 일본 말씨입니다. “지구에서 모든 말을”로 손봅니다. “공포를 가질 수 있다”는 번역 말씨입니다. “두려울 수 있다”나 “두려워할 수 있다”라 하면 쉽고 깔끔합니다.


  “큰 수컷과의 일전을 불사해야 하는데”는 오롯이 일본 말씨입니다. 껍데기는 한글이되, 알맹이는 일본 한자말에 일본 말씨이지요. “큰 수컷하고 한판 붙어야”나 “큰 수컷과 한바탕 싸워야”처럼 쓸 적에 아이들도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건으로 발전하게 될지 그 귀추가 자못 주목된다

→ 어떤 일로 커질는지 자못 눈여겨볼 만하다

→ 어떤 일로 불거질는지 자못 지켜볼 만하다

→ 어떤 일로 불거질는지 자못 궁금하다


나비 한 마리 돌 위에 앉아 졸고 있다

→ 나비 한 마리 돌에 앉아 존다

→ 나비 한 마리 돌에 얌전히 앉아 존다

→ 나비 한 마리 돌에 앉아 꾸벅꾸벅 존다

→ 나비 한 마리 돌에 앉아 가만히 존다



  ‘귀추(歸趨)’라는 한자말을 넣어 “귀추가 주목된다”처럼 써야 글멋이 나지 않습니다. 한자말을 써야 뭔가 있어 보인다는 생각은 이제 접을 때이지 싶습니다. “눈여겨볼 만하다”나 “지켜볼 만하다”라 하면 되고, ‘궁금하다’라 해도 되어요.


  “돌 위에 앉아 있다” 같은 번역 말씨를 어린이책에 쓰는 어른이 꽤 많습니다. 그런데 나비나 새나 사람이 “돌 위”에 앉을 수 있을까요? 영어에서는 ‘on’ 같은 전치사를 넣을 테지만, 한국말은 ‘위’를 넣어 “돌 위”라고 하면, 돌에서 하늘로 붕 뜬 곳을 가리킵니다. 앉으려면 “돌에 앉아”야 합니다.



나의 차가운 혀도 뜨거운 무언가(無言歌)를 삼키리라

→ 내 차가운 혀도 뜨거이 말 없는 노래를 삼키리라

→ 내 차가운 혀도 뜨거이 고요노래를 삼키리라

→ 혀도 뜨겁게 괴괴노래를 삼키리라


두 언어가 지닌 차이는 아래와 같다

→ 두 말이 다른 대목은 이와 같다

→ 두 말은 다음처럼 다르다

→ 두 말은 이렇게 다르다



  ‘무언가(無言歌)’는 재미난 말놀이일까요? 아니면 한자를 좀 안다는 말자랑일까요? 우리는 한국말로 “말 없는 노래”처럼 쓰거나 ‘고요노래’나 ‘괴괴노래’ 같은 새말을 지을 수 있습니다.


  “두 언어가 지닌 차이는 아래와 같다”는 번역·일본 말씨입니다. “두 말은 다음처럼 다르다”라고 하면 끝납니다. “언어가 지닌 차이”라 하면 ‘언어’가 임자말인 셈인데, 한국말로는 이렇게 안 씁니다. ‘언어’가 ‘차이’를 ‘지닌’다니요, 아무리 생각해도 한국말이 될 수 없어요. ‘말’은 서로 ‘다를’ 뿐입니다. “아래와 같다”는 일본사람이 글종이를 쓸 적에 위에서 아래로 써 버릇 하면서 나타난 일본 말씨인데요, ‘아래’ 아닌 ‘다음’으로 바로잡아야 알맞습니다.



재채기는 기침과 달리 주로 상부기도(코)가 자극을 받아서 나오게 됩니다

→ 재채기는 기침과 달리 흔히 코가 간지러워서 나옵니다

→ 재채기는 기침과 달리 으레 윗숨길이 간지러워서 나옵니다


처음 서울에 올라와서 기숙사에서 살게 된 겁니다

→ 처음 서울에 와서 기숙사에서 살았습니다

→ 처음 서울에 와서 기숙사에서 살아 보았습니다

→ 처음 서울에 가서 기숙사에서 살았습니다



  ‘상부기도(코)’라고 적을 까닭이 없어요. 그냥 ‘코’라고 하면 됩니다. “살게 된 겁니다” 같은 번역 말씨는 “살았습니다”로 손질해 줍니다.


  그리고 “서울에 올라와서”는 얄궂지요. 이는 지난날 봉건계급질서를 따라서 ‘서울은 위, 시골이나 지방은 아래’로 여긴 낡은 말씨입니다. ‘상행선·하행선’ 같은 말씨가 아직 안 사라졌는데요, ‘-길’을 넣어서 ‘서울길·부산길’이나 ‘서울길·시골길’처럼 써야 올바릅니다.


  서울에는 갈 뿐입니다. “서울에 가다”라 하면 됩니다. 시골로 가는 일을 때때로 ‘낙향’이라 말하는 분이 있는데, “시골에 내려가다”나 “시골로 떨어지다” 같은 결로 쓰는 ‘낙향’도 ‘상경·서울에 올라가다’하고 맞물리는 지역차별을 담은 낡은 말씨입니다.



청소가 아니라 수리가 필요하겠군

→ 쓰레질이 아니라 고쳐야 하겠군

→ 비질이 아니라 손질을 해야겠군

→ 쓸고닦기 말고 손질을 해야겠군

→ 쓸고닦지 말고 손봐야겠군


시적 언어의 정제가 조금은 더 요구되는 지점도 있지만

→ 싯말로 조금은 더 가다듬어야 하는 대목도 있지만

→ 시답게 말을 조금 더 손질해야 하는 곳도 있지만

→ 싯말스럽게 조금 더 갈고닦아야 하는 데도 있지만



  ‘필요’ 같은 한자말을 써야 한다면 쓸 수 있을 테지만, 이 일본 한자말을 자꾸 아무 곳이나 안 쓰기를 바랍니다. 조금 더 쉽게 헤아려 보면 좋겠어요. “수리가 필요하겠군”은 “고쳐야 하겠군”이나 “손질해야겠군”이라 손볼 만합니다.


  문학을 말씀하는 분, 이른바 문학평론가는 “시적 언어의 정제가 조금은 더 요구되는 지점도 있지만” 같은 말을 매우 쉽게(?) 쓰시니 참으로 어렵(?)습니다.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요? 굳이 갖가지 일본 한자말하고 일본 말씨를 끌어들여야 문학평론이 될까요? 쉬운 한국말을 쓰면 문학평론이 안 될까요?



늦게나마 매운탕으로 영양을 보충하고 정자에서 잠시 휴식을 취해서

→ 늦게나마 매운찌개로 배를 채우고 정자에서 살짝 쉬면서

→ 늦게나마 매운국으로 배불리 먹고 정자에서 가볍게 쉬어서


언어 발달이 눈이 부시게 이루어지는 3살 무렵의 유아

→ 말이 눈이 부시게 피어나는 세 살 무렵 아이

→ 말이 눈이 부시게 깨어나는 세 살 무렵 아이

→ 말이 눈이 부시게 자라나는 세 살 무렵 아이

→ 말이 봇물처럼 눈부시게 터지는 세 살 무렵 아이


나는 식탁에서 옷을 만들 원단을 재단하고 있었어요

→ 나는 밥상에서 옷을 지을 천을 마름했어요

→ 나는 밥상맡에서 옷을 지을 천을 잘랐어요


코코넛 물을 이용한 디톡스를 해 보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방법이며, 건강에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

→ 코코넛물로 독을 빼는 길이 가장 나으며, 몸에도 좋다

→ 코코넛물로 독을 빼면 가장 좋으며, 몸에도 낫다


물건의 사이즈를 맞출 수 있는 것이 큰 장점입니다

→ 물건 크기를 맞출 수 있어 크게 좋습니다

→ 물건 크기를 맞출 수 있어 한결 낫습니다

→ 물건 크기를 맞출 수 있어 매우 좋습니다

→ 물건 크기를 맞출 수 있어 무척 좋습니다

→ 물건 크기를 맞출 수 있어 참 좋습니다


그다음은 말할 것도 없이 폭풍 흡입했다

→ 그다음은 말할 것도 없이 퍼먹었다

→ 그다음은 말할 것도 없이 게걸스레 먹었다

→ 그다음은 말할 것도 없이 마구 먹었다

→ 그다음은 말할 것도 없이 허겁지겁 먹었다

→ 그다음은 말할 것도 없이 숨도 안 쉬고 먹었다

→ 그다음은 말할 것도 없이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먹었다



  《읽는 우리말 사전 3 얄궂은 말씨 손질하기》는 184쪽으로 조촐하게 꾸렸습니다. 모두 161꼭지 보기글을 책에서 뽑았고, 쉽게 부드럽게 즐겁게 곱게 새롭게 손질하는 길을 밝히려 했습니다. 보기글을 더 많이 뽑아서 더 두툼하게 글손질 이야기를 펼 수 있지만, 언제라도 홀가분하면서 산뜻하게 ‘사전을 들고 다니며 읽기’를 바라면서 조촐히 엮었습니다.


  사전은 말풀이만 담은 책이 아닙니다. 사전은 말을 다루는 길을 밝히는 책입니다. 말풀이만 그러모은 사전이라면, 우리는 손전화를 켜서 슥슥 찾아보면 그만이겠지요. 그러나 때랑 곳이랑 흐름을 살펴 알맞으면서 즐겁고 새롭게 말을 하고 글을 쓰는 길을 익히려면 “읽는 사전”을 손에 쥐거나 곁에 두어야지 싶습니다.


  《읽는 우리말 사전》 셋째 권은 다음처럼 세 갈래로 큰 얼거리를 살필 수 있습니다.



ㄱ. 번역 말씨 가다듬기

‘뜨거워짐을 느꼈습니다’ 같은 말씨를 많이 쓰지만 ‘-ㅁ을 느꼈습니다’는 번역 말씨입니다. 한국말에서는 이야기를 맺을 때 그림씨나 움직씨를 섣불리 이름씨 꼴로 바꾸지 않습니다. 이럴 때는 ‘뜨거웠습니다’로 고쳐 쓸 만합니다.


ㄴ. 우리 낱말 살려 쓰기

‘비즙을 배설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와 ‘콧물을 뺄 수 없다’는 글 가운데 어느 쪽이 더 또렷하게 말하고자 하는 바를 나타낼까요? 한자말을 쓰는 일이 그르지는 않지만 우리말로 쓰면 말뜻을 더욱 똑똑히 밝힐 수 있습니다.


ㄷ. 머리를 맞대고 함께 엮는 우리말 사전

흔히 서울에 갈 때는 ‘올라간다’고 하고 지방으로 갈 때는 ‘내려간다’고 합니다. 이제는 민주와 평화와 평등을 헤아리면서 어디든 ‘가다·오다’라고만 하고 ‘서울 상행선’은 ‘서울길’로, ‘부산 하행선’은 ‘부산길’로 바로잡으면 좋겠습니다.



  쉽게 가려서 말하는 길을 함께 익히기를 바라요. 쉬우면서 즐겁게 글을 쓰는 길을 서로 나누기를 바랍니다. 쉽고 즐거우면서 아름답게 생각을 살찌우는 길을 말글에서 나란히 찾는다면 이 땅에 참답고 상냥하게 민주·평등·평화를 더 넉넉히 북돋울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고맙습니다. 2018.7.2.달.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책읽기/말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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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익힘글 놀이(독서골든벨) 1 : 숲노래 *



‘독서골든벨’을 하는 학교가 많다고 들었습니다. 2018년 올해에 두 군데 고등학교에서 제 책을 놓고서 이러한 놀이잔치를 마련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제 나름대로 스스로 ‘책익힘글’을 뽑아 보기도 했어요. 어떤 책으로 하면 재미있을까 하고 생각하다가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철수와영희, 2017)를 보기책으로 삼기로 했습니다. 저는 이 사전을 이웃님이 즐거운 ‘글쓰기 길동무책’으로 여기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글을 쓸 적에 무엇을 살피고, 말을 하면서 어떻게 생각을 갈무리하며, 이야기를 꽃피울 적에 마음을 어떻게 펴면 즐거울까 하는 실마리를 이 사전에서 시나브로 얻을 만하리라 봅니다. 그래서 이 사전에서 48가지 익힘글을 뽑아내었는데요, 쉬울는지 어려울는지 모르겠습니다.


풀이는 따로 안 붙이겠습니다 ^^ 《겹말 사전》을 읽으시면 저절로 풀이를 알 수 있을 테니까요. 2018.4.20.쇠.ㅅㄴㄹ



1. 이 가운데 잘못 쓴 겹말은?

㉠ 낱낱이 ㉡ 이따금씩 ㉢ 가끔가끔 ㉣ 곰곰이


2. 이 가운데 바르게 쓴 말은?

㉠ 가끔씩 ㉡ 이따금씩 ㉢ 하나하나씩 ㉣ 두셋씩


3. 이 가운데 잘못 쓴 겹말은?

㉠ 누가 ㉡ 누군가 ㉢ 누군가가 ㉣ 뭔가


4. 이 가운데 바르게 쓴 말은?

㉠ 무언가 ㉡ 뭔가가 ㉢ 무언가가 ㉣ 어딘가가





5. 이 가운데 잘못 쓴 겹말은?

㉠ 외가 ㉡ 초가 ㉢ 장삿집 ㉣ 처갓집


6. 이 가운데 바르게 쓴 말은?

㉠ 초가집 ㉡ 외갓집 ㉢ 기와집 ㉣ 민박집


7. 이 가운데 잘못 쓴 겹말은?

㉠ 손녀딸 ㉡ 외동딸 ㉢ 맏딸 ㉣ 어이딸


8. 이 가운데 바르게 쓴 말은?

㉠ 야밤 ㉡ 한밤중 ㉢ 오밤중 ㉣ 한밤




9. 이 가운데 잘못 쓴 겹말은?

㉠ 모래밭 ㉡ 흰모래밭 ㉢ 모래벌 ㉣ 모래사장


10. 이 가운데 바르게 쓴 말은?

㉠ 나란히 있다 ㉡ 나란히 병행하다 ㉢ 나란히 평행선 ㉣ 나란히 평균


11. 이 가운데 잘못 쓴 겹말은?

㉠ 그물망 ㉡ 철망 ㉢ 철조망 ㉣ 그물눈


12. 이 가운데 바르게 쓴 말은?

㉠ 가는 도중에 ㉡ 가는 중에 ㉢ 가는 가운데 ㉣ 가는 길에



13. 이 가운데 잘못 쓴 겹말은?

㉠ 아무 대안이라도 ㉡ 다른 대안이라도 ㉢ 어떤 대안이라도 ㉣ 무슨 대안이라도


14. 이 가운데 바르게 쓴 말은?

㉠ 판이하게 다르다 ㉡ 특이하게 다르다 ㉢ 특별하게 다르다 ㉣ 재미있게 다르다


15. 이 가운데 잘못 쓴 겹말은?

㉠ 새벽빛 ㉡ 새벽녘 ㉢ 새벽길 ㉣ 새벽여명


16. 이 가운데 바르게 쓴 말은?

㉠ 시작한 시점 ㉡ 시작한 시발점 ㉢ 처음 시작하다 ㉣ 처음으로 하다



17. 이 가운데 바르게 쓴 말은?

㉠ 삼세번 ㉡ 삼세판 ㉢ 세판 ㉣ 삼셋째


18. 이 가운데 잘못 쓴 겹말은?

㉠ 깊게 숨쉬다 ㉡ 깊게 들이쉬다 ㉢ 깊게 심호흡하다 ㉣ 심호흡하다


19. 이 가운데 바르게 쓴 말은?

㉠ 같이 함께하다 ㉡ 같이 어울리다 ㉢ 같이 동행하다 ㉣ 같이 동참하다


20. 이 가운데 잘못 쓴 겹말은?

㉠ 젊은 청년 ㉡ 젊은 아이 ㉢ 젊은 사람 ㉣ 젊은 숨결




21. 이 가운데 바르게 쓴 말은?

㉠ 맑고 청명하다 ㉡ 맑고 쾌청하다 ㉢ 맑고 화창하다 ㉣ 맑고 눈부시다


22. 이 가운데 잘못 쓴 겹말은?

㉠ 학교에 가다 ㉡ 학교에 등교하다 ㉢ 학교를 마치다 ㉣ 학교를 다니다


23. 이 가운데 바르게 쓴 말은?

㉠ 잘 어울리다 ㉡ 잘 맞다 ㉢ 잘 들어가다 ㉣ 잘 들어맞다


24. 이 가운데 잘못 쓴 겹말은?

㉠ 박수를 치다 ㉡ 손뼉을 치다 ㉢ 박수를 보내다 ㉣ 손뼉을 두드리다




25. 이 가운데 바르게 쓴 말은?

㉠ 작은 숙부 ㉡ 작은 숙모 ㉢ 작은 숙주 ㉣ 작은 숙조부


26. 이 가운데 잘못 쓴 겹말은?

㉠ 당구를 하다 ㉡ 축구를 차다 ㉢ 테니스를 하다 ㉣ 제기를 차다


27. 이 가운데 바르게 쓴 말은?

㉠ 회색빛 ㉡ 백색빛 ㉢ 녹색빛 ㉣ 파란빛


28. 이 가운데 잘못 쓴 겹말은?

㉠ 탁구를 치다 ㉡ 윷을 놀다 ㉢ 공을 치다 ㉣ 골프공을 치다





29. 이 가운데 바르게 쓴 말은?

㉠ 씨앗을 파종하다 ㉡ 가을추수를 하다 ㉢ 직파로 뿌리다 ㉣ 가을걷이를 하다


30. 이 가운데 잘못 쓴 겹말은?

㉠ 파도가 물결친다 ㉡ 바다가 물결친다 ㉢ 물결이 넘실댄다 ㉣ 너울이 일다


31. 이 가운데 바르게 쓴 말은?

㉠ 일하는 노동자 ㉡ 일하는 작업대 ㉢ 일하는 근무지 ㉣ 일하는 푸름이


32. 이 가운데 잘못 쓴 겹말은?

㉠ 붉게 물들다 ㉡ 붉게 젖어들다 ㉢ 붉게 충혈되다 ㉣ 붉게 퍼지다




33. 이 가운데 바르게 쓴 말은?

㉠ 버림받은 유기묘 ㉡ 버림받은 아이 ㉢ 버림받은 유기견 ㉣ 버림받은 유기물


34. 이 가운데 잘못 쓴 겹말은?

㉠ 고단하고 게으르다 ㉡ 능글맞고 게으르다 ㉢ 나태하고 게으르다 ㉣ 짓궂고 게으르다


35. 이 가운데 바르게 쓴 말은?

㉠ 함께 걷다 ㉡ 함께 참여하다 ㉢ 함께 동참하다 ㉣ 함께 협력하다


36. 이 가운데 잘못 쓴 겹말은?

㉠ 지치고 피로하다 ㉡ 지치고 졸립다 ㉢ 지치고 슬프다 ㉣ 지치고 아프다




37. 이 가운데 바르게 쓴 말은?

㉠ 즐겁고 산뜻하다 ㉡ 즐겁고 유쾌하다 ㉢ 즐겁고 반갑다 ㉣ 즐겁고 재미있다


38. 이 가운데 잘못 쓴 겹말은?

㉠ 고운 손 ㉡ 고운 얼굴 ㉢ 고운 미인 ㉣ 고운 말


39. 이 가운데 바르게 쓴 말은?

㉠ 다른 타향 ㉡ 다른 타인 ㉢ 다른 사람 ㉣ 다른 남


40. 이 가운데 잘못 쓴 겹말은?

㉠ 글꼴 ㉡ 글씨체 ㉢ 글무늬 ㉣ 글결





41. 이 가운데 바르게 쓴 말은?

㉠ 태어난 출생지 ㉡ 태어난 고향 ㉢ 태어난 마을 ㉣ 태어난 출신


42. 이 가운데 잘못 쓴 겹말은?

㉠ 남녀노소 누구나 ㉡ 모든 사람이 ㉢ 아무 사람이나 ㉣ 어떤 사람이나


43. 이 가운데 바르게 쓴 말은?

㉠ 농사일 ㉡ 집안일 ㉢ 노동일 ㉣ 작업일


44. 이 가운데 잘못 쓴 겹말은?

㉠ 살아남은 사람 ㉡ 살아남은 두엇 ㉢ 살아남은 어른 ㉣ 살아남은 생존자




45. 이 가운데 바르게 쓴 말은?

㉠ 크게 외치다 ㉡ 고함을 치다 ㉢ 고함을 지르다 ㉣ 소리를 치다


46. 이 가운데 잘못 쓴 겹말은?

㉠ 마른 잎 ㉡ 마른 뿌리 ㉢ 마른 낙엽 ㉣ 마른 바늘잎


47. 이 가운데 바르게 쓴 말은?

㉠ 떨어지는 낙엽 ㉡ 마른 가랑잎 ㉢ 마른 갈잎 ㉣ 떨어지는 나뭇잎


48. 이 가운데 잘못 쓴 겹말은?

㉠ 진흙물 ㉡ 뻘흙물 ㉢ 흙탕물 ㉣ 흙물


(숲노래/최종규 . 말넋/말삶/사전읽기/읽는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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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잘하고 글 잘 쓰게 돕는 읽는 우리말 사전 2 - 군더더기 한자말 떼어내기 말 잘하고 글 잘 쓰게 돕는 읽는 우리말 사전 2
최종규 글, 숲노래 기획 / 자연과생태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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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 사랑하는 일본이웃한테 한국말 강의
[책이 나왔습니다+일본 강의] 군더더기 한자말 떼어내기 《읽는 우리말 사전 2》


말을 할 적에는 한자말이 어떤 한자인가를 밝히면서 말하지 않기 마련입니다. 이와 달리 글을 쓸 적에는 한자말에 묶음표를 치고 한자를 넣는 분이 있습니다. 한자로 된 낱말이기에 한자를 꼬박꼬박 밝히거나 묶음표를 쳐서 한자를 그때그때 넣어야 할까요? 학교는 그저 ‘학교’입니다. ‘學校’라고 하지 않아도 됩니다. 자동차는 그저 ‘자동차’입니다. ‘自動車’를 밝혀 주지 않아도 됩니다. 전화기를 ‘전화기’ 아닌 ‘電話機’로 적는들 알아보기에 좋지 않습니다. 우리가 쓰는 말 가운데 한자말은 얼마나 될까요? 우리는 한자말을 모르면 말을 못 할까요? (4쪽)


  2018년 3월 31일 낮 12시부터 일본 도쿄 진보초에 있는 〈책거리〉에서 이야기꽃을 폈습니다. ‘이야기꽃’이란, 다른 말로 하자면 강의입니다. 둘레에서 으레 쓰는 대로 ‘강의’라고도 할 수 있으나 굳이 ‘이야기꽃’이라는 이름을 지어서 써 봅니다. 사람들 앞에서 혼자 말을 편다기보다, 함께 말을 주고받으면서 생각을 새로우며 곱게 피어내는 즐거운 마당이라고 여겨서, 이야기로 피우는 꽃이라는 느낌을 나누려고 이야기꽃이라고 합니다.

  일본 도쿄 진보초에 있는 ‘한국책 전문 책집’인 〈책거리〉에는 이날 일본 이웃님이 책집 가득 찾아오셨습니다. 한국문학을 사랑하여 한글로 적힌 문학책을 사서 찬찬히 읽는 분들인데요, 이분들한테 사십 분 즈음 통역 없이 오로지 한국말로만 이야기꽃을 폈고, 그 뒤 한 시간 즈음은 일본말로 통역을 하는 분하고 나란히 서서 이야기꽃을 폈습니다.

  일본 이웃님은 일본에서도 보기 힘든 ‘사전 지음이(집필자)’를 눈앞에서 마주하셨는데, 사전 가운데에서도 한국말사전을 쓰는 뜻, 사전이란 어떤 책인가, 한국말사전에 담는 한국말이란 무엇인가, 말은 어떤 길을 거쳐 사전이란 책에 담기는가, 문학에서 쓰는 말하고 살림자리에서 쓰는 말은 어떻게 다른가, 책을 읽고 말을 살피며 삶을 돌아보는 흐름은 어떻게 맞물리는가, 일본하고 한국은 문학과 책과 사전으로 어떻게 만나 서로 이웃이 되는가, 같은 이야기를 펴 보았습니다.


가장(家長) · 15쪽
집안을 이끄는 사람을 한자말로 ‘가장’이라 하니 “한 집안의 가장(家長)”이라 하면 겹말입니다. 보기글은 한자를 덧달기까지 하는데, ‘한 집안을 이끄는 사람’이라고 수수하게 적으면 됩니다. 또는 ‘한 집안 기둥’이나 ‘한 집안 주춧돌’이라 해 볼 수 있습니다.

* 천 번이고 무릎 꿇고 밥을 구하는 것이 이 땅 노동자다. 한 집안의 가장(家長)이다
→ 천 번이고 무릎 꿇고 밥을 얻는 이가 이 땅 노동자다. 한 집안 기둥이다
→ 천 번이고 무릎 꿇고 밥을 얻는 이 땅 노동자다. 한 집안을 이끄는 사람이다


  제가 2017년부터 내는 “읽는 우리말 사전” 꾸러미는 얼핏 한국 이웃님한테도 안 쉬울 책일 수 있습니다. 일본 이웃님한테는 더욱 안 쉬울 책일는지 모르고요. 그러나 일본 이웃님은 “읽는 우리말 사전” 꾸러미도 차근차근 읽어 주십니다. 처음에는 한국말을 외국말로만 익혀서 외국문학인 한국문학을 읽을 생각이셨을 텐데, 삶자리에서 쓰는 말하고 책에 적히는 말이 다르다는 대목, 또 오늘날 한국 작가들이 쓰는 말이 퍽 가난하며 군더더기가 많다는 대목에 살짝 놀라시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불편’이라는 일본 한자말을 놓고 재미난 실랑이가 있었어요. 제 말을 일본말로 통역해 주시는 분이 얼핏 ‘불편하다’라는 말을 하셔서, 저는 이 말을 받아 “저는 그다지 ‘거추장스럽지’ 않았습니다” 하고 말했어요.

  어쩌면 ‘불편(不便)’이라는 한자말은 퍽 쉬운 한자말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곰곰이 파고들면, 우리가 때와 곳에 맞게 다 다르며 알맞게 쓰던 숱한 말이 일본 한자말 ‘불편’한테 밀리기도 합니다.

  제가 ‘거추장스럽지’ 않다고 말하니, 이 소리를 들은 일본 이웃님 가운데 한 분은 “‘고추장스럽지’ 않다? ‘고추장스러운’이 뭔가요? ‘고추장’인가요?” 하고 물으셔요. 이렇게 묻는 일본 이웃님 옆에 앉은 다른 일본 이웃님은 “아, ‘거추장스럽다’는 옷에 단추가 많아 풀기에 힘들다를 가리킬 적에 쓰는 그 말이지요?” 하고 말했어요. 다들 ‘거추장스럽다’를 모르셨으나 꼭 한 분은 아셨어요. 그래서 이분들한테 몇 가지 비슷하면서 다른 낱말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저는 ‘불편하다’라는 일본 한자말을 안 써요. 이 일본 한자말을 안 쓰는 까닭은, 이 일본 한자말을 쓸 때마다 한국말을 잃거나 잊기 때문이에요. 이를테면 ‘번거롭다’가 있어요. ‘번거롭다’는 할 일이 많거나 어지러워서 손이 많이 갈 적에 써요. ‘성가시다’도 있어요. 저는 바라지 않는데 자꾸 저한테 들러붙어서 마음에 안 들 적에 써요. ‘귀찮다’가 있어요. ‘귀찮다’는 마음에 안 들어서 어떤 일이나 말을 안 하고 싶을 적에 써요. ‘거북하다’도 있지요. 뱃속이나 마음이 안 좋아서 잘 움직일 만하지 않을 적에 써요. 말마다 결이 달라서 쓰는 자리가 다른데, 이를 ‘불편’ 하나로 뭉뚱그리면 말맛이 사라지고 따분해요. 이런 대목을 요즈음 한국에서도 문학하는 사람뿐 아니라 꽤 많은 지식인이나 전문가도 제대로 가릴 줄 모르더군요.”


거묘(巨猫) · 20쪽
고양이가 크다면 ‘큰 고양이’라 하면 됩니다. 고양이를 놓고서 ‘큰고양이·작은고양이’처럼 쓸 수 있고, 이 얼거리를 살려서 ‘큰냥이·큰냥’이나 ‘작은나비·작은괭이’처럼 쓸 수 있습니다. ‘큼직하다·우람하다’라는 낱말을 써서 ‘큼직냥·우람냥’이라 해도 잘 어울립니다.

* 저와 함께 사는 거묘(巨猫) 이응 옹을 소개합니다
→ 저와 함께 사는 큰고양이 이응 할매(할멈)를 소개합니다
→ 저와 함께 사는 큼직냥 이응 할배(할아범)를 소개합니다
→ 저와 함께 사는 우람냥 이응 할배(할아범)를 소개합니다


  《읽는 우리말 사전 2 군더더기 한자말 떼어내기》(자연과생태, 2017)라는 책은 한국에서 글을 쓰는 분들이 한자말을 너무 군더더기로 쓰는 보기를 257가지 모았습니다.

  가심(歌心), 감우(甘雨), 거년(去年), 고(告), 공백(空白), 관목(灌木), 기도(祈禱), 난분분(亂紛紛), 녹음(綠陰), 다음(多飮), 도화(桃花), 두한족열(頭寒足熱), 모자(母子), 못(池), 박색(薄色), 방하착(放下着), 복토(覆土), 비(雨), 생목(生木), 설산(雪山), 소(小), 습(習), 언피해(凍害), 염치(廉恥), 월편(月片), 이세계(異世界), 장고(長考), 즐문토기(櫛文土器), 진선미(眞善美), 촌락(村落), 타(他), 파랑(波浪), 한역(漢譯) 문자(文字), 해무(海霧), 화신(花信), 흑백(黑白)……처럼 굳이 한자를 안 붙여도 될 자리에 붙였거나, 쉬운 한국말을 안 쓴 여러 보기를 살폈습니다.

  쉽게 말하면 될 말을 쉽게 말하지 않은 보기를 모은 《읽는 우리말 사전 2 군더더기 한자말 떼어내기》입니다. 우리가 말을 쉽게 하고 글을 쉽게 쓸 적에 생각을 한결 넓고 깊게 나눌 수 있다는 뜻을 다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말글로 나타낼 생각을 더 깊이 바라보자는 뜻을 다루기도 합니다.


마음의 눈(心眼) · 80쪽
‘심안’이라는 한자말은 사전에 나오는데 ‘마음눈’이라는 비슷한말이 있다고 덧붙입니다. 사전은 ‘마음눈’을 풀이하며 “= 심안”으로 적습니다. 퍽 아쉽습니다. 뜻풀이는 우리말 ‘마음눈’에 붙여야 올바를 텐데요. 보기글은 ‘마음의 눈’으로 잘 적은 뒤에 군더더기를 붙이고 맙니다. 굳이 한자로 ‘心眼’을 붙여야 했을까요? 오히려 보기글은 ‘마음눈’으로 적으며 ‘-의’를 덜어야 올바릅니다.

* 전에도 말했잖아요. 마음의 눈(心眼)으로 본다고
→ 예전에도 말했잖아요. 마음으로 본다고
→ 예전에도 말했잖아요. 마음눈으로 본다고
→ 예전에도 말했잖아요. 마음에 있는 눈으로 본다고


  ‘사고(思考), 궁리(窮理), 고찰(考察)’ 같은 한자말은 어떤 결을 나타낼 수 있을까요? 우리는 한국말로 ‘생각하다, 헤아리다, 살피다, 돌아보다, 짚다, 셈하다, 어림하다, 여기다, 보다, 새기다’ 같은 낱말이 어떤 결인가를 차츰 잊거나 잃지는 않을까요?

  〈책거리〉에서 이야기꽃을 함께 피우는 자리에서 어느 일본 이웃님은 “최 선생님이 쓴 책을 읽으며, 나는 내가 어떤 일본말을 쓰는가 하고 새롭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나는 ‘착한’ 일본말을 얼마나 썼는지 돌아보면서, 앞으로 ‘착한’ 말을 쓰기로 생각했습니다.” 하고 이야기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려준 분은 카프카 문학을 사랑해서 독일말로 카프카 문학을 다 읽으셨다고 해요. 그래서 독일말로 카프카 문학을 읽으며 느낀 대목을 “카프카가 어떤 독일어로 글을 쓴 줄 아십니까? 카프카는 매우 쉬운 독일어를 썼습니다. 카프카는 매우 쉬운 독일어로 아주 깊은 철학을 문학으로 담아냈습니다.” 하고도 덧붙여 주었습니다.

  군더더기 한자말을 떼어내는 글쓰기란, 쉬운 한국말로 문학을 펴고 생각을 펴며 이야기를 펴는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군더더기를 떼어내면 말이 살아나고 글이 빛날 수 있습니다.


유성우(流星雨) · 190쪽
별똥이 비처럼 쏟아진다고 할 적에 한자말로 ‘유성우’라 합니다. 이를 ‘별똥비’나 ‘별비’라고 하면 구태여 ‘流星雨’라고까지 안 밝혀도 됩니다.

* 지금 남해안에서 막 유성우(流星雨)를 맞고 있다는 문자가 떴다
→ 남해안에서 막 별똥비를 맞는다는 쪽글이 떴다
→ 이제 남녘 바닷가에서 별비를 맞는다는 쪽글이 떴다


  이제 우리는 새롭게 생각해 볼 줄 알아야지 싶습니다. 쉬운 말로 쉽게 생각을 펴면서 글이나 문학이나 지식을 살리는 길로 갈 수 있어야지 싶습니다. ‘어려운 말’을 ‘쉽게’ 써 버리고 마는 몸짓이나 글버릇이 아닌, 쉬운 말을 쉽게 쓰면서 깊고 너른 숨결을 한결 넉넉하면서 즐겁게 나누는 길을 찾아야지 싶어요.

  굳이 ‘유성우(流星雨)’처럼 써야 할까요? 한자만 뗀 ‘유성우’도 다시 생각해야지 싶습니다. ‘별똥비’라 하면 되고, ‘별비’라 할 수 있습니다. 어느 분은 ‘불꽃비’라든지 ‘불똥비’라고도 할 수 있어요. ‘반짝비’나 ‘불반짝비’ 같은 이름을 새롭게 지어도 재미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외려 새로운 말을 쉽게 지으면서 뜻이나 결을 훨씬 즐겁게 살릴 만합니다. 우리 누구나 새롭게 말을 지어서 쓸 수 있는데, 새롭게 지은 말이 매우 쉽고 재미나서 말살림을 북돋울 만합니다.

  밤하늘에는 별비라면, 낮에는 꽃비입니다. 봄에 꽃잎이 비처럼 내리니 ‘꽃비’예요. 그러면 밤하늘 별비도 ‘별꽃비’나 ‘꽃별비’처럼 더욱 새롭게 이름을 지어 볼 수 있습니다. 낮에 누리는 꽃비도 ‘꽃잔치비’라 할 수 있고, 별비를 놓고 ‘별잔치비’나 ‘밤꽃비’라 해도 어울립니다.


화양연화(花樣年華) · 267쪽
. 화양연화: ×
. 연화(年華): = 세월(歲月)
‘화양연화’라는 이름을 붙인 중국 영화가 나온 뒤로 이 말마디가 제법 퍼졌습니다. 사전에는 ‘화양연화’가 나오지 않습니다. 보기글에 나오듯이 이 중국말은 삶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날을 나타내는데, 중국사람이 중국말로 ‘花樣 + 年華’를 쓴다면, 한국사람은 한국말로 ‘꽃 + 날’을 써 볼 만합니다. 또는 ‘꽃길’, ‘꽃빛’, ‘꽃다운 날’, ‘꽃 같은 날’이라 할 수 있습니다.

* “화양연화(花樣年華).”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을 표현하는 말
→ “꽃길.” 삶에서 가장 아름답고 즐거운 나날을 나타내는 말
→ “꽃날.” 살면서 가장 아름답고 기쁜 때를 나타내는 말
→ “꽃빛.” 사는 동안 가장 아름답고 기쁜 날을 나타내는 말


  ‘꽃비’를 생각하고 ‘별비’를 생각하다 보면, 저절로 ‘별꽃비’나 ‘꽃별비’ 같은 이름을 새롭게 얻는데, 요즈음 부쩍 널리 쓰는 ‘꽃길’하고도 맞물려서 ‘별꽃길·꽃별길’ 같은 말을 새로 지어서 쓸 수 있습니다. 누구는 ‘꽃길’을 걷고, 누구는 ‘꽃날’을 누리며, 누구는 ‘꽃빛’으로 웃음이 가득합니다. 이밖에 어떤 ‘꽃-’을 앞뒤에 넣어서 새말을 기쁘게 지을 만할까요?

  그런데 이처럼 새말을 기쁘게 지으려면 홀가분해야지요. 군더더기를 달고 살아서는 새롭게 태어나기 어렵습니다. ‘꽃길·꽃비’ 같은 낱말은 열 살 어린이나 대여섯 살 어린이도 쉽게 알아들을 수 있어요. 그러나 ‘화양연화’라면 열다섯 살이나 스무 살한테도 쉽지 않을 만합니다. ‘화양연화(花樣年華)’처럼 군더더기를 붙이면 더욱 어렵겠지요.


한글로 적어도 알아보기 어려운 낱말은 한자가 무엇인가를 밝혀 주어도 알기 어렵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린이도 어른도 모두 알기 쉽도록 한국말을 새롭게 짓거나 가꾸도록 마음을 기울일 노릇입니다. 사전을 뒤적여 한자말이 어떤 한자인가를 살펴서 묶음표에 붙이는 글버릇은 이제 멈추고, 쉽게 알아들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우리가 쓰는 한국말을 알차며 곱게 가꿀 수 있도록 새롭고 쉬우며 고운 말결을 헤아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5쪽)


  일본 도쿄 진보초 〈책거리〉에서 편 이야기꽃은 “제가 사전을 짓는 길을 걷는 까닭을 돌아보면, 우리가 생각을 즐겁게 펴서 기쁘게 살림을 짓는 아름다운 사랑을 배우는 자리에서 상냥한 도움벗이 될 수 있기를 바라는 뜻이라고 여깁니다.” 같은 말로 마무리를 지었습니다.

  한국문학을 사랑하는 일본 이웃님이 더욱 포근하고 넉넉하며 알찬 한국말로 한국문학을 누릴 수 있기를 바라요. 한국에서 한국말로 한국문학을 누리는 한국 이웃님도 상냥하면서 눈부신 한국말로 한국문학을 누리면 좋을 테고요.

  군더더기 아닌 따사로운 손길로 말을 보듬습니다. 군말 아닌 꽃말로 문학을 가꿉니다. 말꽃도 생각꽃도 살림꽃도 홀가분하면서 고운 말 한 마디를 나누면서 새롭게 피워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2018.4.3.불.ㅅㄴㄹ


말 잘하고 글 잘 쓰게 돕는 읽는 우리말 사전 2 군더더기 한자말 떼어내기》
숲노래 기획·최종규 글, 자연과생태, 2017.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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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최종규 글.사진, 사름벼리 그림 / 스토리닷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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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누리신문 오마이뉴스에 올리려고 씁니다.

시민기자 가 손수 쓴 책을

다른 사람 소개 아닌 스스로 소개하는 꼭지가 있어요.

아마 어쩌면 아무래도

글쓴이가 글쓴이 책을 가장 잘 말할 수 있을까요?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하고 짝꿍책입니다.

이 글을 너그러이 읽어 주시면서

두 가지 책을 넉넉히 사랑해 주시면 좋겠어요.

모두 고맙습니다.

모두 사랑해요! 


+ + +


살림하는 아버지가 사랑을 아이한테 가르쳐요

[책이 나왔습니다] 아이랑 살며 배운 사랑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참말로 쓰고 싶은 책을 드디어 썼습니다. 2017년 한 해에만 다섯 권에 이르는 책을 썼는데, 이 가운데 12월 첫무렵에 태어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스토리닷, 2017)은 지난 열 해를 통틀어 가장 손꼽아 기다리던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말사전을 새로 짓는 길을 걷기에, 언뜻 보기로는 저한테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2016)이나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2017)이나 《읽는 우리말 사전 1·2》(2017) 같은 책이 더없이 뜻있는 책이 아니냐고 물을 수 있어요.


  그런데 저는 아이들하고 살림을 함께 지으며 살아온 지난 열 해를 통틀면서 다른 어느 책보다 ‘아이들을 만나서 삶을 새롭게 바라보고 살림을 새롭게 가꾸는 길을 걸은 이야기’를 쓰고 싶었습니다.


  여느 ‘육아일기’를 쓸 마음은 없어요. 제가 쓰고픈 이야기는 ‘살림노래’입니다. 고된 육아나 힘겨운 집안일 이야기가 아닌, 아이를 낳아서 하나부터 열까지 보듬고 돌보는 동안 새롭게 배운 이야기란 늘 노래처럼 제 삶을 곱게 북돋아 주는구나 하고 느껴서, 이 이야기를 살림노래를 쓰고 싶었어요.



이 땅 모든 사내한테 물어보고 싶어요. 여보세요, 우리 사내들, 이녁은 김치를 먹나요 안 먹나요? 김치를 먹는다면, 그대는 김치를 담그나요 안 담그나요? 김치를 먹는 그대들은 김치를 담글 줄 아나요 모르나요? 김치를 좋아하는 그대는 소매 걷어붙이고 즐겁게 김치를 담그는가요 안 담그는가요? (31쪽)


집 바깥자리에서 큰 이름을 드날린다고 하더라도 집 안자리에서 살림을 거느리지 못할 적에는 반토막이 된다고 느끼며 자랐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밥하기도 배우시고 김치 담그기도 배우시면 좋겠다는 마음은 있으나, 그보다 저 스스로 이런 안살림을 차근차근 잘 익혀서 해 보고 나서 말씀을 여쭙자는 마음입니다. (39쪽)



  저는 김치를 담근 지 몇 해 안 됩니다. 아마 큰아이가 일곱 살 무렵까지 김치를 안 담그고 살았지 싶습니다. 이제는 틈틈이 김치를 담가요. 지난날에는 제가 매운김치를 못 먹기 때문에 안 담갔다면, 이제는 ‘안 매운김치’를 담그면 되는구나 하고 뒤늦게 깨달아 김치를 담급니다.


  참 더디게 깨닫지요? 매운김치를 못 먹으면 안 매운김치를 담그면 되었을 텐데요. 그리고 제가 김치를 못 먹더라도, 찬국수를 몸에서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곁님이나 아이들을 더 헤아리는 살림이라면 훨씬 진작부터 김치 담그기나 살림짓기를 더 씩씩하게 했으리라 느낍니다.


  그런데 이러면서 배운 대목이 있어요. 왜 사내라는 사람은 이렇게 핑곗거리가 많아서 뭐를 못 하거나 뭐를 안 하는가를 가만히 되새겼습니다. 저를 낳은 어머니하고 아버지가 지은 살림을 되새기면서, 학문으로는 훌륭할는지라도 집안일은 한 가지조차 못하던 아버지를 다시 바라보았어요.


  우리 아버지한테는 미안한 노릇이지만, 저는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이라는 책에서 우리 아버지 이야기를 곧잘 적었습니다. 이를테면 우리 아버지는 ‘남이 해 주는 밥’만 먹고 사신 터라, 스스로 밥을 지을 줄 모르십니다. 이뿐 아니라 혼자서 라면을 끓여서 드실 줄도 모르셨어요.



아이들한테 하나하나 맡겨 봅니다. “자, 작은 도마를 꺼내고 작은 칼을 꺼내 보세요. 한 사람씩 오이를 썰어 봐요.” “누나가 오이를 썰면 동생은 토마토를 썰어 봐.” “스스로 먹을 만큼 주걱으로 밥을 푸세요.” “어머니 수저를 누가 챙겨 줄까?” “밥상을 펴면 행주로 잘 닦아 주세요.” (43쪽)


저희가 아이들한테 물려주려고 하는 땅은 그냥 땅이 아닌 ‘숲 보금자리’나 ‘보금자리 숲’입니다. 숲이 될 보금자리, 또는 보금자리가 될 숲을 아이들이 물려받을 수 있기를 바라면서 차근차근 가꾸지요. (52쪽)



  흔히들 말하기를, 밥은 못 할 수 있더라도 어떻게 라면도 못 끓이느냐고 물을 만해요. 이때에 저희는 아이들을 보며 새삼스레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이들은 많이 어릴 적에는 밥은커녕 라면도 못 끓여요. 아이들은 밥상에 버젓이 밥하고 국하고 반찬이 있어도 손수 수저를 챙겨서 밥을 먹으면 배가 안 고프다는 대목을 모르기 일쑤입니다.


  아직 아이들은 매우 어리고 철이 덜 들었기에 코앞에 있는 먹을거리를 못 알아봐요. 게다가 노느라 바쁘고, 놀이가 좋은 나머지, 배고픈 줄을 늘 잊기까지 합니다. 이는 어른도 매한가지라고 할 수 있어요. 내로라하는 숱한 ‘남성 지식인·남성 정치인·남성 고위 공무원’ 가운데 밥할 줄 알거나 김치 담글 줄 아는 사내는 몇이나 될까요? 아기가 울 적에 어떻게 안아서 달래며 자장노래를 불러야 하는가를 아는 사내는 몇이나 될까요? 천기저귀를 어떻게 접어서 아기 샅에 대어야 아기가 좋아하는가를 몇 사내쯤 알까요? 천기저귀나 행주나 걸레는 어떻게 삶고 말려야 하는가를 몇 사내쯤 알려나요?



제가 열한 해째 곁님 핏기저귀를 삶고 헹구면서 살아온 바탕에는 이런 뜻이 있어요. 비록 저 한 사람 몸짓이라 하더라도, 작은 한 사람 몸짓으로 살림을 조금씩 가꿀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우리 집 두 아이는 어버이한테서 손으로 가꾸거나 지어서 흙을 보듬는 살림을 물려받을 수 있을 테고요. 시골에서도 서울에서도 기저귀 빨래가 따사로운 볕을 받고 싱그러운 바람을 쐬면서 눈부시게 춤추는 모습을 그려 봅니다. 집집마다 빨랫줄을 걸고서 즐겁고 아름답게 옷살림을 다스리는 새로운 모습을 그려 봅니다. (77쪽)



  그렇다고 제가 이 모두를 처음부터 잘 알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저한테 아이들이 찾아오기 앞서까지 ‘머릿속 성평등주의자’로 살았어요. 아이들이 찾아오고 나서는 ‘머릿속 성평등주의자’를 몽땅 내려놓았습니다. 아이들한테는 ‘온몸으로 사랑님’이 되어야 한다고 깨달았어요.


  곁님 어머니한테서 천기저귀 접기를 배웠습니다. 마을 할머니한테서 천기저귀를 얻었습니다. 곁님한테서 핏기저귀를 삶아서 말리고 건사하는 길을 배웠습니다. 바깥에서 밥을 사다 먹거나, 이웃집에 마실하여 밥을 함께 먹을 적에는 으레 어깨너머로 반찬하기를 살피거나 이모저모 여쭈면서 집에서 스스로 해 보곤 했어요.


  제가 못 먹는 밥이 있더라도 아이들이 맛을 볼 수 있도록 지어서 차려야 하는구나 하고 배웠어요. 저는 참말 못 먹지만 아이들은 맛나게 잘 먹는 반찬이 있네 하고 깨달으면서, 어버이로서 아이한테 무엇을 보여주거나 가르치거나 물려줄 적에 서로 즐겁고 슬기로운가를 비로소 헤아렸습니다.



대학 교육 네 해에 들일 돈으로 책을 사서 읽는다면, 거의 사오천만 원에 이르는 책을 사서 읽을 수 있어요. 엄청나답니다. 사오천만 원에 이르는 돈을 스스로 책방에 가서 책을 골라서 읽고, 이렇게 읽어서 모은 책으로는 저마다 마을도서관을 열 수 있지요. 네 해에 걸쳐 사오천만 원에 이르는 돈으로 책을 읽어서 모아 두었으면, 앞으로 이 책으로 헌책방이나 마을책방을 열 수 있기도 해요. 마을도서관도 열 수 있지만, 스물네 살 젊은이 나름대로 새롭고 재미나게 멋진 책방을 열 만해요. (83쪽)



  아이들을 낳아서 돌보는 어버이로, 아버지로, 어른으로 살기 앞서, 저한테는 늘 한 가지만 있었어요. 혼자서 오랫동안 살면서 책만 사고 책만 읽고 책만 건사했습니다. 곁님이나 아이들이 저한테 오기 앞서인 2007년 봄에 인천에서 ‘사진책 도서관’을 열었는데요, 이 사진책 도서관은 이제 ‘사전 짓는 책숲집 + 숲놀이터’로 거듭난 모습으로 전남 고흥에서 잇습니다만, 예전에는 그저 책만 아는 어리보기였습니다.


  그래도 책 한 가지에 사로잡힌 채 살면서 배우거나 얻은 깨달음도 있어요. 이를테면 대학교 졸업장을 거머쥐지 않고도 책으로 얼마든지 삶이나 사회를 배울 수 있는 줄 알았습니다. 저는 고등학교 졸업장만으로도 스물여섯 살에 ‘국어사전 집필을 도맡는 편집장’ 일을 했습니다. 대학교 졸업장이 없을 뿐 아니라 사회나 단체에 아무런 줄이나 끈조차 없었지만, 2003년 여름에 이오덕 어른이 돌아가신 뒤에는, 이오덕 어른을 기리면서 쓴 원고종이 1000장에 이르는 글 하나를 쓴 터라, 이 글이 징검돌이 되어 이오덕 어른이 남긴 글하고 책을 갈무리하는 일을 맡았지요. 스물아홉 살 적입니다.


  대학교 졸업장이 아닌, 오직 스스로 배우고 스스로 갈고닦은 앎 하나로 국립국어원에서 강사 노릇도 해 보았고, 한글학회나 문화체육관광부나 한글문화연대나 경기도청에서 맡기는 ‘공공언어 순화’ 같은 일도 해 보았습니다.


  저는 제가 하고 싶은 일을 스스로 찾아서 하는 터라, 어떠한 졸업장이나 자격증도 부질없는 줄 알았습니다. 스스로 새롭게 길을 닦으면서 살아가면 되더군요. 스스로 깊고 넓게 파헤치면서 어느 한쪽에 기울지 않는 슬기로운 몸짓이 되면 무슨 일이든 다 할 수 있고요.



저는 갓 스물이 넘을 무렵 ‘스무 살까지 학교를 다니며 배운 모든 것은 아무 쓸모가 없네’ 하고 느꼈어요. ‘스무 살까지는 학교에서 아무 쓸모가 없는 것을 쓸모없이 가르쳤구나 하고 몸으로 아로새긴 나날이었네’ 하고도 느꼈어요. 저로서는 스무 살 적부터 0살이라고 생각했어요. 스무 살 나이를 모두 버리고, 그때부터 스스로 0살이니 처음부터 모조리 새로 하자고 다짐했어요. (105쪽)



  곁님을 만나서 함께 살림을 짓는 동안 날이면 날마다 꾸지람을 들었습니다. 책을 그렇게 많이 읽은 주제에 어쩜 이 쉬운 살림은 이다지도 모르느냐는 꾸지람에 지청구에 나무람에 …… 참으로 할 말이 없더군요. 그래서 스무 살부터 마흔 살까지는 책으로 배운 살림이었다면, 마흔 살부터는 스스로 0살이라 여기면서 살림으로 살림을 배우자는, 온몸으로 손수 짓는 살림길을 걸으면서 새롭게 살림을 배우자는 마음으로 하루를 맞이합니다.


  요즈막에는 곁님이 저를 나무라면 빙그레 웃으면서 한 마디 해요. “자, 자, 너무 성을 내지 말고, 가만히 돌아봐요. 내가 좀 어리보기라서 느즈막하게 달라지지만, 지난 열 해를 돌아보면 나는 한 걸음씩 스스로 고치면서 나아가는 삶이에요. 오늘은 아직 어리숙하게 하느라 못 바꾸거나 못 고쳤지만, 틀림없이 모레에는, 모레에 안 되면 다시 더 지내고서, 그때에도 또 못 바꾸거나 못 고치면 그다음에는 바꾸거나 고치려고 늘 마음하고 몸을 써요. 느긋하고 너그러이 기다려 봐요. 우리, 서두르지 말고 하나하나 즐겁게 바꾸거나 고쳐요.” 하고 이야기를 합니다.



저는 집에서 ‘밥짓는 사내’로 삽니다. 밥을 손수 지어서 아이들한테 열 해째 먹이는 살림을 꾸리는데, 이러는 동안 늘 ‘밥말’을 들려줍니다. ‘밥말’이란 밥하고 얽힌 말이나 이름입니다. 부침개를 할 적에 ‘부침개’가 뭔지 알려주고, ‘부침(부치다)’하고 비슷하지만 다른 ‘지짐(지지다)’을 알려줍니다. 또 ‘볶음(볶다)’을 알려주며, ‘무침(무치다)’이나 ‘데침(데치다)’이나 ‘버무림(버무리다)’을 알려주지요. (113쪽)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이라는 책은 ‘우리 집안 책’이 되기를 바라면서 썼습니다. 저 스스로 제 삶과 살림과 사랑을 다시 새기면서 첫마음이 되려는 뜻으로 썼어요. 우리 아이들이 앞으로 삶이나 살림이나 사랑이 궁금하다고 물어보면 언제나 선뜻 기쁘게 내어줄 책으로 썼어요.


  우리 어머니하고 아버지한테 보여줄 책으로, 곁님 어머니하고 아버지한테 보여줄 책으로, 그리고 온 이웃님한테 보여줄 책으로 썼어요. 우리는 이렇게 날마다 새롭게 배우면서 기쁨으로 살림을 짓는 길을 걸으려 한다는 뜻을 담아서 썼어요.


  비록 아직 어설프거나 어정쩡하거나 어수룩한 대목이 많으나, 지난 열 해를 이렇게 배우며 살았다는 이야기를 썼습니다. 앞으로 새로운 열 해 동안 더욱 씩씩하고 신나게 한 걸음씩 내딛으면서 배우려는 마음이라는 이야기를 썼습니다.



아이들은 어버이와 둘레 어른이 일하고 놀이하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며 배우고 살아갑니다. 아이들은 어버이와 둘레 어른이 여느 자리에서 으레 쓰는 말마디를 귀기울여 듣고 하나하나 따라하며 배웁니다. 아이들은 여느 때 여느 사랑을 나누는 어버이와 둘레 어른 삶을 받아먹으며 저희 꿈과 이야기를 빚습니다. (125쪽)


어떤 분이 묻더군요. “어떻게 같은 영화를 서른 번이나 백 번을 볼 수 있어요?” 저는 그분한테 되물어요. “어떻게 백 번이나 이백 번쯤 볼 만한 영화를 즐겁게 안 보고, 딱 한 번 보고 그칠 영화만 자꾸자꾸 보시나요?” (131쪽)



  곁님한테서 듣는 꾸지람 가운데 하나는 ‘왜 자꾸 책을 더 사요?’입니다. 곁님은 늘 말합니다. ‘한 번 보고서 덮을 책은 그만 사자’고요. ‘한 번 아닌 백 번을, 아니 천 번을, 아니 날마다 새로 읽으면서 날마다 새로 배울 수 있는 책 하나만 있으면 넉넉하다’고 말합니다.


  저는 고개 숙여 대꾸하지요. “그대 말이 참말 맞아. 그대 말대로야. 그래서 나도 생각해 보았어요. 앞으로 내가 지으려는 새로운 사전을 다 짓고 나면, 이제는 책을 이렇게 끝도 없이 사들이는 몸짓은 그치려고요. 꼭 열 해까지만 이렇게 할게요. 열 해 뒤에는 사뭇 달라지리라 생각해요.”


  우리 아이들을 바라보든 제 어릴 적을 돌아보든, 새로운 만화책이나 만화영화가 더 재미있지 않습니다. 가장 재미있는 만화책이나 만화영화를 참말로 끝도 없이 다시 보고 또 봅니다. 볼 때마다 재미있고 새로우니 자꾸 보고 다시 볼 수 있어요. 볼 때마다 배울 수 있기에 언제나 즐겁게 볼 수 있어요. 볼 때마다 나를 깨우치고 북돋우기에 활짝 웃으면서 새삼스레 볼 수 있어요.



제가 살아가며 얻는 목숨(밥)은 흙에서 얻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흙으로 집을 지어서 살아야 제 목숨을 옳게 건사할 만합니다. 그러면 저는 제가 밥을 삼을 터를 이루는 흙하고 같은 흙으로 집을 지어야 합니다. 쓰레기를 파묻는 흙땅이 아니라, 목숨이 살아숨쉴 흙땅이어야 합니다. 내 하루하루 살림에서 쓰레기를 내는 삶이 아니라, 꿈을 낳고 사랑을 피우는 삶이어야 합니다. 덜 쓰고 아끼는 삶이 아닙니다. 아름다이 누리며 착하게 꾸리는 삶입니다. (223쪽)



  아이들이 아침에 상냥하게 웃으면서 나를 바라봅니다. “아버지, 잘 주무셨어요?” “그래, 우리 이쁜 아이들도 잘 자고 일어났을까? 밤새 즐거운 꿈을 꾸면서 하늘을 날았을까? 지난밤에는 어떤 꿈을 꾸었니?” 서로 묻고 서로 이야기하고 서로 따스히 안습니다.


  이제 두 아이(2017년으로 큰아이는 열 살, 작은아이는 일곱 살입니다)는 모두 스스로 밥을 지을 줄 압니다. 갑작스레 두 아이가 밥을 잘 짓더군요. 아홉 살 여섯 살이던 때에는 두 아이가 밥을 안 짓거나 못 지었어요. 열 살 일곱 살로 접어든 2017년에 참말로 갑작스레 밥을 지어내요. 큰아이는 손수 반죽을 하고 부풀려서 빵도 굽지요. 작은아이는 누나한테 질세라 달걀삶기를 해 보았고, 이제 제법 잘 삶아냅니다. 설거지도 걸레질도 비질도 제법 야무집니다. 아직 아이들 아귀힘이나 팔힘으로는 빨래가 만만하지 않으나, 빨래를 마친 옷가지를 잘 널고 잘 걷어서 잘 갭니다.


  요새는 일부러 아이들한테 감 깎기를 시키곤 해요. “오늘은 누가 감을 이쁘게 깎아 보려나?” 하고 묻습니다. 두 아이는 저마다 감 한두 알을 깎느라 십 분 이십 분 넉넉히 씁니다. 반듯한 칼질하고는 아직 멀지만, 손수 칼을 쥐고서 깎고 썰고 접시에 곱게 놓는 즐거움을 누립니다.



이렇게 하고 나서 나도 잠자리에 누우려다가 물 한 모금 마시려고 부엌으로 가는데 부엌 바닥에 뭔가 하얗게 있는 듯해요. 허리를 숙여서 부엌 바닥을 짚는데 어라 아무것도 안 집힙니다. 아니, 별빛이 집히네요. 달빛하고. (270쪽)



  저는 온누리 이웃 어버이나 어른한테 살며시 말을 건네고 싶어요. 이웃 푸름이하고 어린이한테도 가만히 말을 건네고 싶습니다.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이라는 책 하나를 슬며시 건네면서 말을 걸고 싶어요. 손수 지은 밥이 가장 맛있다는 이야기를 건네고 싶어요. 손수 지은 살림을 손수 고쳐서 쓰면 늘 웃음꽃이 피어난다는 이야기를 건네고 싶습니다.


  밤에 쉬 마렵다고 아버지를 깨우는 아이를 이끌고 쉬를 누이고는 물 한 모금 마시고 누우려다가 부엌에서 달빛을 주워 보셨나요? 마실길에 다리가 힘들다는 아이를 품에 안으니 어느새 새근새근 곯아떨어져요. 어버이 품에 제 온몸을 맡긴 채 꿈나라로 빠져드는 아이 가슴에서 내 가슴으로 스미는 따스함을 느껴 보셨나요? 갓난쟁이일 무렵 하루에 마흔 장 남짓 오줌기저귀에 똥기저귀를 내놓던 아이가 어느새 씩씩하게 커서 밥도 짓고 국 끓이기를 배우는 대견한 모습을 보셨나요?


  살림짓기는 사랑짓기라고 생각해요. 살림하기는 사랑하기라고 생각해요. 아직 살림에 등을 돌린 이웃 사내한테 여쭈고 싶어요. 바깥일을 줄이면서 집안일을 함께 배우면서 해 봐요. 온 집안에 사랑이며 평화가 흐른답니다. 어설프거나 어리숙한 사내하고 사느라 고단한 이웃 가시내한테 여쭈고 싶어요. 조금 더 느긋하게 기다리면서 차근차근 알려주고 가르치면서 어깨동무를 해 봐요.


  어릴 적부터 살림짓기를 배운 적도 어깨너머로 구경한 적도 없는 철없쟁이 사내가 슬기로운 어버이로 거듭나려면 적어도 열 해는 지내야지 싶습니다. 열 해가 흘러야 멧골도 들도 냇물도 바뀌어요. 살림하는 아버지는, 또 살림하는 어버이는, 아이한테 사랑을 물려주고 가르칩니다. 아이를 만나고 나서야 사랑을 똑똑히 깨닫고는 마음으로 사랑씨앗을 심으면서 새롭게 배우고 가르쳐요. 2017.12.21.나무.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책넋/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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