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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덕 마음 읽기
최종규 지음, 숲노래 기획 / 자연과생태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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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덕 어른이 걸어온 삶을 돌아본 책,

<이오덕 마음 읽기>를 다룬 느낌글입니다.

이 느낌글을 꼭 써야겠다고 여겨

이 아침에 갈무리합니다.

누리신문에도 이 글을 띄우려고 합니다.

넉넉히 포근히 사랑으로 읽어 주셔요.


++



이오덕 ‘책’ 아닌 ‘마음’을 읽는 길



― 이오덕 마음 읽기

 숲노래 기획

 최종규 글

 자연과생태, 2019.7.15.



  〈포카혼타스〉라는 만화영화가 있습니다. 이 만화영화에서 포카혼타스 아가씨가 버드나무 할머니하고 이야기하는 대목이 있는데, 만화영화를 보다가 ‘말도 안 돼! 어떻게 사람이 나무하고 말을 섞어?’ 하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사람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만화영화이니 그냥 만화이거나 영화라고 여기겠지요. 그러나 이 대목에서 곰곰이 생각해 볼 만합니다. 왜 만화나 영화에서만 사람하고 나무가 말을 섞는다고 여길까요? 만화나 영화가 아닌 이 삶자리에서 누구나 나무하고 말을 섞을 수 있는데, 우리 스스로 이 길을 잊지는 않았을까요? 우리 스스로 풀잎하고 꽃송이랑 이야기하는 숨결을 잃지는 않았을까요?


  포카혼타스는 버드나무 할머니한테 궁금한 이야기를 묻고, 버드나무 할머니는 ‘네(포카혼타스)가 너희 어머니하고 똑같은 말을 묻는구나.’ 하고 빙그레 웃으며 대꾸합니다. 이러더니 “listen with your heart”라는 노래를 불러요. 다른 말을 붙이지 않고 오직 이 노래를 되풀이해서 부른 뒤에 가만히 사라집니다.


  영어 노래 “listen with your heart”를 한국말로 어떻게 옮길 만할까요? 아주 쉬운 낱말로 엮은 영어입니다. 이 영어를 중·고등학교 푸름이한테 물어보았어요. 너희는 어떤 한국말로 옮기겠느냐고. 다 다른 쉰 푸름이한테 물어보았더니 “너의 심장과 함께 들어라” 언저리에서 맴도는 대꾸를 합니다. 학교에서 가르친 영어를 바탕으로 ‘심장(heart)’하고 ‘-과 함께(with)’하고 ‘너의(your)’로 직역을 한 셈입니다.


  여러 곳에서 만난 다 다른 푸름이한테 똑같이 이야기를 들려주었어요. 우리 푸른님아, 이 영어 “listen with your heart”는 “마음으로 들어”나 “마음으로 들어 봐”나 “마음으로 들으렴”으로 옮겨야 알맞단다, 하고.



삶을 노래하면서 살림을 짓는 마음으로 이오덕 님 책을 새로 읽어 보았습니다. 꿈을 그리면서 생각을 짓는 손길로 이오덕 님 책을 하나하나 되읽었습니다. 사랑을 지피면서 책을 짓자는 꿈으로 이오덕 님 책을 살며시 쓰다듬으면서 가슴에 품어 봅니다. (9쪽)



  《이오덕 마음 읽기》(자연과생태, 2019)라는 책을 써냈습니다. 이 이름으로 책을 낼 생각은 진작 했으나 책은 2019년 7월에 태어납니다. 떠난 이오덕 어른을 돌아보면서 2003년에 처음으로 기림글을 적어 보았습니다. 2003년 8월 25일에 쓴 기림글이 발판이 되어 이해 9월 30일부터 무너미마을에 깃들어 어른 글자락을 되새기면서 갈무리하는 일을 여러 해 맡았습니다. 이동안 여러 가지 일을 치렀고, 갖은 사람을 만났는데, 이보다는 다른 여러 가지가 제 마음으로 찾아들었다는 얘기를 남기고 싶습니다.


  ‘오늘, 곧 이오덕 어른이 살아서 눈을 뜨고 붓을 쥐어 글을 쓰시던 그곳’은 서재도 작업실도 골방도 교실도 아닙니다. ‘어른이 글을 쓴 곳’은 언제나 멧골아이가 웃고 노래하고 춤추고 떠들고 뛰놀면서 맨발로 흙을 만지고 스스로 숲이 되어 살림을 짓던 터입니다. 어린이 마음을 받아들이는 어른으로 살면서 글자락을 여민 걸음걸이가 이오덕 어른이 살아온 나날이라고 느낍니다. 2003년 가을부터 2007년 봄까지, 이동안 무너미마을에 머물며 돌아보고 갈무리한 어른 글에서 흐르는 숨결은 언제나 ‘숲아이한테서 배워 숲어른으로 살아가고 싶은 사랑어린 슬기’였다고 느껴요.



1974년에 태어난 동시책 《까만 새》가 얼마나 팔리거나 읽혔는지 잘 모릅니다. 어쩌면 팔림새는 안 대수로울 만합니다. 모든 글하고 책은 사람들 가슴으로 스미느냐 하는 대목이 대수로울 테니까요. 글쓴이 넋이 읽는이 넋하고 만나서 새롭게 피어나느냐 하는 대목이 대수로울 테고요. (17쪽)



  떠난 어른이 남긴 책이 많습니다. 어른이 손수 쓴 책도 많고, 어른이 손수 읽은 책도 많습니다. 떠난 어른은 처음에는 문학에 뜻을 두셨지 싶은데, 문학에서도 동시하고 동화라는 길로 나아갔고, 멧골아이하고 어우러지는 삶을 지으면서 ‘동시·동화’보다는 ‘어린이가 손수 쓰는 글’이라는 길에 눈을 뜨셨지 싶습니다.


  어른문학을 하는 어른은 ‘어린이 글’을 문학이란 자리에 안 끼워 줄 뿐 아니라, 매우 얕보거나 깔보기 일쑤였다고 해요. 이런 흐름을 지켜보던 어른은 ‘그래, 어린이가 쓴 글은 굳이 문학이라는 굴레나 쇠사슬이나 수렁에 갇히거나 머물러야 할 까닭이 없지. 어린이가 쓴 글은 ‘문학’이 아닌 ‘글’일 뿐이지’ 하고 깨달으셨구나 싶어요.


  어린이가 손수 글을 쓰는 동안, 어린이는 스스로 길을 엽니다. 어린이가 손수 그림을 그리는 동안, 어린이는 스스로 꿈을 그립니다. 글하고 그림을 스스로 제 삶자리에 바탕을 두어서 새롭게 지으니, 어린이는 언제나 활짝 웃으면서 새터 새마을 새나라 새누리 새삶 새사람 새사랑으로 나아갈 만해요.



이오덕 님은 일제강점기에 아이들한테 일본말만 가르쳐야 했답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에는 아이들한테 일본말을 가르치는 일이 잘못인 줄 못 느꼈다고 합니다. 해방이 되고 난 뒤에야 참으로 크게 잘못했다고 깨달았고 뉘우쳤다고 합니다. (29쪽)



  《이오덕 마음 읽기》라는 책은, 이 이름 그대로 ‘떠난 어느 어른이 남긴 마음을 읽자’는 뜻을 폅니다. 가르침을 읽는다거나, 배움을 얻자는 뜻이 아닙니다. 마음을 읽자는 뜻입니다. 훌륭한 어른한테서 배우자는 뜻이 아니라, 멧골어른으로 살아가면서 고스란히 숲어른이란 빛이 되려던 걸음걸이를 어떤 마음으로 내딛었는가를 읽자는 뜻입니다.


  시골에서도 숲어른이 될 수 있고, 서울에서도 숲어른이 될 수 있으니, 우리가 선 땅보다는 우리가 세우는 마음을 읽자는 뜻입니다. 높이 기릴 만한 어른이 아니라, 어린이하고 상냥하게 어깨동무를 하면서 신바람내며 뛰노는 어른이 되자는 뜻이기도 하고요.



이오덕 님이 마지막 숨을 가늘게 내쉬고서 고요히 눈을 감은 돌집에서 이 글꾸러미를 매만지고 어르면서 날마다 생각했습니다. ‘나무처럼 산처럼’이란 무슨 뜻일까 하고요. 나무처럼 되고 산처럼 되겠노라는 마음을 담은 이름인 줄 얼핏 알겠으나, 그 뜻을 넘어 다른 이야기가 더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를테면 나(이오덕)부터 스스로 나무가 되고 산이 되려 하고, 내(이오덕) 이웃도 나무가 되고 산이 되는 길을 밝히고 싶다는 이야기가 있겠지요. 나무나 산이 되려면 어떠한 길을 걸을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을 이 글꾸러미에서 밝혔을 테고, 나무랑 산이 함께 있는, 바로 숲이라고 하는 터전이란 어떤 자리인가를 이 글꾸러미에서 가만히 짚으려 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42쪽)



  글하고 말, 길하고 마음, 두 가지를 다른 두 가지하고 맞물려서 생각해 봅니다. 둘 더하기 둘은 서로 어떻게 맺을 만할까요?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길을 펴고 싶어 글을 쓴다면, 마음을 나누고 싶어 말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길을 펴려고 씩씩하게 글을 쓰고, 글을 쓰며 씩씩하게 길을 펴요. 마음을 나누려고 즐거이 말을 하고, 말을 하며 즐거이 마음을 나눕니다.


  대단하다 싶은 글을 써야 할 까닭이 없어요. 왜 그럴까요? 모든 글은 저마다 대단하거든요. 굳이 처음부터 ‘대단하다’는 이름을 붙일 일이 없습니다. 그러니, 멋지거나 아름다운 글을 쓸 까닭조차 없습니다. 마땅하지요. 모든 글은 저마다 멋지거나 아름다운걸요. 굳이 이런 꾸밈말이나 저런 덧말을 붙여야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글을 쓰든 말을 하든 이야기를 담으면 됩니다. 바로 우리 이야기를 담지요. 네 이야기나 남 이야기가 아닌 내 이야기나 우리 이야기를 담습니다. 구경한 이야기가 아닌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습니다. 다른 책에서 귀동냥으로 얻은 이야기가 아니라, 스스로 새롭게 지은 이야기를 담습니다.



이오덕 님이 ‘글짓기’라는 훌륭한 이름을 두고도 굳이 ‘글쓰기’라는 새로운 이름을 지어서 펴려고 한 뜻을 헤아려 봅니다. 《어린이를 살리는 글쓰기》는 글을 어떻게 하면 잘 쓸 수 있느냐를 다루지 않습니다. 이 책은 글쓰기를 하는 뜻을 다룹니다. 글을 쓰면서 어린이가 무엇을 마음에 담을 만한지를 밝힙니다. 글 한 줄을 쓰는 어린이가 어떻게 앞으로 꿈하고 사랑을 키워서 아름답고 즐거운 살림으로 씩씩하게 한 걸음을 내딛을 만한가를 차분히 들려줍니다. (53쪽)



  하늘을 읽으려고 하는 사람은 참말로 하늘을 읽는 길로 갑니다. 바람을 읽고 싶은 사람은 참으로 바람을 읽는 길로 가요. 어린이 마음을 읽으려고 하는 사람은 어느 길을 갈까요? 숲을 읽거나 꽃을 읽거나 새를 읽거나 나무를 읽고픈 사람은 어느 길을 갈까요?


  《이오덕 마음 읽기》라는 책을 여미면서 열 갈래를 지어 보았습니다. 열 가지 책을 발판으로 삼아서 열 갈래 빛깔로 이오덕 어른 마음을 함께 읽자는 뜻을 펴려 했습니다. 굳이 책 열 자락만 읽어야 하지 않습니다. 스무 자락이나 마흔 자락에 이르는 이오덕 어른 책을 찬찬히 챙겨 읽어도 즐겁습니다. 그리고 애써 열 자락에 이르는 책을 읽지 않아도 좋아요. 열 자락 아닌 두어 자락이나 한 자락 책만 찾아서 읽어도 즐겁습니다.


  더 많이 읽어야 어른 뜻을 짚을 만하지 않아요. 한 자락을 읽더라도 마음은 얼마든지 짚을 만해요. 바로 마음이거든요. 오롯이 마음이에요. 그저 마음입니다. 마음으로 마주하려 하기에 서로 이웃이 되거나 동무가 됩니다. 마음으로 만나려 하기에 우리는 이곳을 아름터나 사랑터나 꿈터나 놀이터나 일터나 그림터로 가꾸는 기운을 스스로 길어올립니다.



떠난 어른은 어린이 글에 군말을 안 붙입니다. 오직 시골 아이 글만 줄줄이 보여 줍니다. 추운 겨울부터 새봄을 지나 여름하고 가을을 맞이하는 한 해 네 철을 가로지르는 이야기를 가만히 보여 줍니다. 눈물짓는 아이들 삶을 아이들이 손수 적도록 이끌어 줍니다. 웃음짓는 아이들 노래를 아이들이 스스로 활개치도록 북돋아 줍니다. 글쓰기란 이렇군요. 잘남도 못남도 없는 있는 그대로가 아름다운 글쓰기입니다. 오직 고운 사랑 한 가지로 마음을 가꾸는 길을 우리가 스스로 여는 글쓰기입니다. (68쪽)



  저는 맨발로 풀밭을 걷기를 즐깁니다. 맨손으로 풀잎을 어루만지를 즐깁니다. 풀을 훑어 나물로 삼든, 풀을 베어 길을 내든, 언제나 맨손입니다. 옷도 가볍게 차릴 뿐더러, 민소매에 깡동치마를 두르고 풀일을 합니다. 뙤약볕이 내리쬐든 말든 해가림갓을 머리에 얹지 않고요. 모기가 물거나 개미가 기어올라도 맨살이 햇볕에 잘 드러나서 까무잡잡하게 거듭나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맨발로 풀밭에 쪼그려앉아 맨손으로 낫을 쥐어 풀을 사그락사그락 베노라면, 풀포기가 저한테 말을 걸어요. “아, 시원하다!” 하고. 때로는 “네가 우리(풀)를 베어도 우리(풀)는 죽을 일이 없어. 왜 그런 줄 아니? 우리는 이 땅(흙)이 기름지도록 즐겁게 새로운 거름으로 돌아갈 생각이거든. 네가 맨손으로 날 만져 줘서 고마워.” 같은 말을 들려줘요. 다만, 풀포기는 입이 아닌 마음으로 저한테 이야기를 들려줘요.


  꽃 곁에 서서 눈을 감고 손가락을 뻗어 꽃잎을 만지면, 꽃잎은 파르르르 떨면서 “네가 내(꽃) 내음을 맡아 주니 얼마나 기쁜지 아니? 네가 마음이 부르도록 네 온 기운을 너한테 줄게!” 같은 말을 마음으로 들려주더군요.


  그러나 저는 예전에는 이런 말을 딱히 듣고 살지 않았어요. 틀림없이 나무이며 풀이며 꽃이며 신나게 수다를 떨었을 텐데, 나무나 풀이나 꽃하고 마음으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줄 생각조차 않았습니다. 이러다가 이오덕 어른이 남긴 글을 마음으로 읽으면서 ‘마음’은 사람한테만 있지 않은 줄 시나브로 돌아보았어요.



아이들이 새로운 삶을 배우려 할 적에 대학교 아닌 길을 일러 주는 어른이 드뭅니다. 아이들이 새로운 사랑을 펴겠노라 할 적에 대학교 졸업장 아닌 길을 밝혀 주는 어른이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어버이는 가르치는 노릇을 할 수 있어야지 싶습니다. 모든 어른은 가르치면서 배우고, 삶을 삶답게 돌보는 구실을 할 수 있어야지 싶습니다. 이오덕 님이 그토록 많은 책을 쓰실 수 있는 바탕은 아이들한테 있겠지요? 늘 아이들한테서 배울 수 있는 마음이기에 새롭게 이야기를 지필 수 있었겠지요? 배울 수 있기에 어른이라고 봅니다. 배울 수 없다면 나이만 먹은 늙은이라고 봅니다. (81쪽)



  떠난 어른은 흙이라고 하는 품에 안겼습니다. 2003년 8월 25일인데요, 그 뒤 한 달 남짓 지난 9월 30일에 저로서는 처음으로 어른 무덤자리에 가려고 멧길을 오르는 동안 숱한 멧새가 신나게 지저귀는 노래를 들었습니다. 속으로 생각했어요. 저 멧새 가운데 어른 넋이 깃든 아이(새)가 있을는지 모른다고, 새는 스무 날이면 알에서 깨고, 바지런히 자라 어미 새하고 나란히 바람을 가르니, 이제 갓 깨어나서 숲을 누비는 어린 새 가운데에는 어른 넋을 품은 아이(새)가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2019년이라는 해에 《이오덕 마음 읽기》라는 책을 써냈습니다만, 2019년에 이 책을 내놓기까지 이오덕 어른을 헤아리는 글을 열일곱 해에 걸쳐 조금조금 써서 갈무리를 하여 조그맣게 한 자락으로 꾸몄습니다만, 저는 이오덕이라는 어른하고 딱히 이어진 끈은 없습니다. 저는 한국글쓰기연구회에 들어간 적도 없고, 그곳 교사나 모람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이오덕 어른이 연 여러 모임에 들어간 일도 없고, 그곳 분을 거의 하나도 모르던 젊은이였습니다.


  제가 걸은 길은 하나입니다. 저 스스로 사람다운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사랑다운 사랑을 해야 하고 살림다운 살림을 지어서 말 그대로 새롭다 싶은 새로운 길이 되려나 하고 돌아본 하루였습니다. 이런 하루를 살던 2001년 1월 1일부터 《보리 국어사전》을 짓는 편집장 자리에 앉았어요. 스물여섯 살 적입니다. 대학교를 그만두었으니 고졸이란 배움끈인데, 혼자서 한국말을 익히고 살아온 발걸음을 고이 여긴 윤구병 님이 저를 떡하니, 스물여섯 살이란 나이인 젊은이를 사전 편집장 자리에 앉히셨지요.



이오덕 님이 《무엇을 어떻게 쓸까》라는 이름으로 들려주려던 이야기란 바로 ‘우리 어떻게 살까’이지 싶습니다. ‘우리 어떻게 사랑할까’이면서 ‘우리 무엇을 노래할까’라고 느낍니다. 자전거를 달리는 동안 바람을 노래합니다. 두 다리로 걷는 동안 이 땅을 노래합니다. 아이를 안고 집살림을 건사하면서 기쁨을 노래합니다. 책 한 권을 읽고 글 한 줄을 쓰면서 사랑을 노래합니다. (92쪽)



  이러다가 2003년 8월을 끝으로 사전 편집장 자리를 그만두기로 했는데, 이 자리를 그만두고 나서면서 원고종이 700쪽 부피로 쓴 이오덕 어른 기림길이 새로운 끈이 되어 이오덕 어른 큰아드님을 만났고, 어른 큰아드님을 만난 그날 ‘아버지(이오덕) 유고를 정리하는 일을 맡아 주면 좋겠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저한테는 ‘배움꾼(가방끈·학력)’은 없었으나, ‘마음끈’ 하나는 있던 셈이지 싶습니다. 내세울 ‘이름끈(명예·인지도)’마저 없었고요. 저는 그저 마음 하나로 한국말이 어떤 숨결인가를 읽으려고 살다가 사전 편집장이 되었고, 떠난 어른이 어떤 마음으로 이 땅에서 살아가셨나 하고 되새기면서 기림글을 쓰고는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하는 일을 맡은 셈입니다.



이오덕 님은 고인 물이 되기를 바라지 않았다고 느낍니다. 이러면서 우리한테도 ‘젊은이여, 그대도 늘 흐르는 물이 되게나’하는 뜻을 밝히려 했다고 느낍니다. 이오덕 님 스스로 마흔 해에 걸쳐 조금씩 글손질을 이으면서 스스로 마음이며 몸이 거듭나는 살림을 보여 주니, 우리가 이 흐름을 좇거나 살필 수 있다면, 오늘 우리가 많이 어설프거나 엉성하거나 어쭙잖은 모습이라 하더라도 웃을 수 있습니다. 오늘은 아직 모자랄 뿐입니다. 오늘 우리가 무엇이 모자란가를 똑똑히 안다면, 우리는 앞으로 스스로 거듭날 수 있으며, 오늘 우리가 무엇이 모자란가를 하나도 모르거나 등을 돌리고 만다면, 우리는 날마다 고인 물이 되거나 쳇바퀴만 돌 뿐입니다. (101쪽)



  《이오덕 마음 읽기》라는 책을 쓴 밑뿌리는 오직 마음입니다. 오로지 마음입니다. 마음 하나 빼고는 이 책을 써낼 수 없었습니다. 다만 마음으로 어른을 뵈었을 뿐이에요. 마음끈 하나가 있는 줄은 나중에야 알았지만, 이 말고는 배움꾼으로도 이름끈으로도 책끈으로도 어른하고 이어진 일이 하나도 없었으니, 어느 모로 보면 갑작스러운 길인데, 스스럼없이 받아들이면서 좋았습니다.


  겉모습 아닌 속마음으로 바라보아 주니 좋습니다. 겉치레 아닌 속가꿈으로 나아가는 길을 함께 가면 좋겠다고 손을 내미니 좋습니다. 그러나 저는 ‘좋다는 느낌’으로 끝낼 마음이 아니었어요. ‘좋고 싫음을 떠나는 마음’이 되기를 바랐어요. 이렇게 어마어마하게 글을 남긴 어른은 어떤 뜻이었는가를 읽고, 이렇게 엄청나다 싶은 책을 읽은 어른은 어떤 사랑이었는가를 읽으려 했습니다.


  남들한테는 ‘겉보기로 유고 정리’일 테지만, 제가 무너미마을에서 맡아서 했던 일은 ‘속에서 흐르는 마음을 차근차근 짚어서 새로 펴는 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때 그 연구회 회원인 교사들은 왜 그랬을까요? 독재권력에 짓눌린 학교교육이 너무 고달파 술이 아니고는 힘든 마음을 풀 길이 없었을까요?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배움모임을 열고서 배우지 않고 술만 마신다면, 학교로 돌아가서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요? 게다가 그분들은 이오덕 님이 써낸 책을 손수 봉투에 담아서 보내 주어도 제대로 안 읽기 일쑤였다고 합니다. 이오덕 님은 책을 새로 낼 적마다 수백 권씩 출판사에서 사들여 교육연구회 회원들한테 하나하나 부쳐 주곤 했는데, 나중에 배움모임에 가서 물어보면 회원들이 책을 읽지 않아 머뭇머뭇하는 모습을 자꾸 보면서, 어른 스스로 헛방아만 찧는구나 하고 느꼈답니다. (115∼116쪽)



  떠난 어른이 남긴 글을 갈무리하는 동안(2003∼2007)에는 어른이 제 꿈에 나타난 적이 없습니다. 떠난 어른이 남긴 글을 갈무리하고서 제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서 무너미마을을 떠나고서 한참 뒤, 큰아이를 낳아서 돌보던 어느 날, 처음으로 이오덕 어른이 꿈에 나타났어요. 그 뒤로 가끔 제 꿈에 넌지시 나타나셔서 말없이 말을 들려주곤 합니다. 이때에 들려주는 말은 크게 둘로 묶을 수 있어요. 하나는 “보라!”이고, 다른 하나는 “사랑!”입니다.


  무엇이든 보아야 하는데 그냥 볼 노릇이 아니라 사랑으로 볼 일이라고 짚어 주신다고 할까요. 무엇이든 사랑해야 하는데 그냥 사랑할 노릇이 아니라 제대로 볼 노릇이라고 알려주신다고 할까요.



우리는 이 책 《우리 글 바로쓰기》에서 말하고 글하고 넋하고 삶이 하나로 될 수 있는 길을 찾으려고 한 이오덕 님 마음을 함께 읽으면 좋겠습니다. 아무리 뜻을 세우고 갈고닦아도 모든 낡은 버릇을 털기까지 얼마나 마음을 제대로 쏟아야 하는가를 읽으면 좋겠습니다. 이 대목을 읽어 낸다면 ‘우리 말글을 바르게 쓰자’는 뜻을 내세우는 적잖은 책이 이오덕 님이 쓴 책하고 어떻게 다른가를 살필 수 있습니다. 이오덕 님은 말만 번드르르하게 손질하는 길을 반기지 않았습니다. 민주·평등·평화를 외치면서 정작 말글은 민주도 평등도 평화도 아닌 지식인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이런 일을 아무나 못 한다는 소리가 아닙니다. 찬찬히 마음을 기울이되 서두르지 않으면 한 걸음씩 나아가면 할 수 있습니다. (135쪽)



  이제 저는 《이오덕 마음 읽기》을 내놓으면서 이오덕 어른하고 맺은 수수께끼도 풀고, 어른이 저한테 준 마음빛도 제 손에서 내려놓으려고 합니다. 제가 할 일을 해야겠지요. 이오덕 어른이 미처 마무리하지 못하신 ‘우리말 바로쓰기 사전’을 제가 새롭게 여미어서 엮을 수도 있을 텐데요, 저는 ‘이오덕 사전’이 아닌 ‘숲노래 사전’을 쓰는 길을 알맞게 가려고 생각합니다.


  제가 곁님하고 사랑으로 낳은 두 어린이가 앞으로 사랑어린 숲사람으로 무럭무럭 자라도록 함께 길을 가는 어버이가 되면서, ‘아름다운 우리말’이 아니라 ‘즐겁게 사랑하는 살림을 짓는 슬기로운 생각을 숲에서 짓는 새로운 숨결로 나누는 말’을 이 땅 모든 이웃님이 같이 누릴 수 있는 사전을 쓰려고 합니다. 그동안 이런 사전을 몇 가지 써내기도 했습니다.


  2014년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을, 2016년에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을, 2017년에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하고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을, 그리고 《읽는 우리말 사전 1·2·3》을 써냈고, 올 2019년에는 《우리말 동시 사전》에다가 《우리말 글쓰기 사전》까지 써냈어요. 이듬해에는 《새로 쓰는 손질말 꾸러미 사전》을 선보이려고 요새 한창 추스릅니다.


  시사용어나 전문용어를 뭉뚱그리는 커다란 사전이 아닌, 이야기를 알맞게 갈래지어서 단출하게 엮는 “읽는 사전”을 새롭게 씁니다. 앞으로 써내어 선보일 새로운 사전이 꽤 많습니다. 부디 이런 새로운 “읽는 사전”이 이오덕 어른이 멧새가 되어 노래하는 멧자락에, 숲그늘에, 무너미마을 한켠에, 나긋나긋하고 포근한 이슬방울로 띄워 보낼 수 있는 꾸러미가 되도록 애쓰려 합니다. 고맙습니다. 떠난 어른도, 살아서 노래하는 이웃님도.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이오덕 마음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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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동시 사전
최종규 지음, 사름벼리 그림 / 스토리닷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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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누리신문 <오마이뉴스> "책이 나왔습니다" 꼭지에 띄우려고

쓴 글입니다. 지은이 스스로 책을 밝히는 꼭지가 있어서

이렇게 손수 제 동시 사전을 밝히는 글을 적어 보았습니다.

너그럽게, 즐겁게, 반갑게, 따스하게 읽어 주시면,

그리고 "우리말 동시 사전"을 사랑해 주시면 좋겠어요.

고맙습니다.


+ + + + +




‘말모이’랑 ‘동시 사전’이 같은 날에 태어났네


― 우리말 동시 사전
 최종규 글
 사름벼리 그림
 스토리닷, 2019.1.15.



  엊그제 저녁에 글(동시)을 하나 썼습니다. 저녁 여덟 시 즈음이면 잠자리를 챙기고 아이들하고 하루를 마무리합니다. 누가 보면 저녁 여덟 시에 벌써 자려 하느냐 물을 테지만, 저는 늦어도 저녁 아홉 시 무렵에 꿈나라로 갑니다. 새벽 두어 시에 하루를 열고요. 시골에 살기에 이런 아침저녁을 보내지 않아요. 인천하고 서울에서 살 적에도 이처럼 하루를 누렸습니다.




나무는 꽃 지고 잎 지며
겨울을 맞아 앙상해도
속으로 꽃을 품어
곱게 푸른 숨소리

할머니는 이 빠지고 주름지며
허리 꼬부랑 느릿걸음이어도
가슴으로 별을 담아
밝게 널리 숨빛

열매는 냠냠 짭짭 꿀꺽
우리가 맛나게 먹어도
작고 단단히 남기는
야물게 깊이 숨씨앗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낱낱 샅샅 꼼꼼 읽어도
마음으로 이야기 심어
새롭게 방긋 숨꽃



  엊저녁에 쓴 글에 ‘꽃’이란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날 저녁에 큰아이하고 책숲집 마실을 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는데, 아이가 문득 “아버지, 나무는 있잖아, 꽃이 지고 잎이 져도 꽃이 있어. 그게, 나무는 언제나 속에 꽃을 품고 살거든.” 하고 노래하듯이 말을 했어요. 이 말을 바로 수첩에 적고 싶었으나, 수첩보다 마음에 먼저 새겼어요. 아이가 잇달아 하는 말을 가만가만 듣고는, “그러네, 나무는 언제나 꽃이로구나.” 하고 대꾸했고, 밤하늘 별잔치를 올려다보면서 이 이야기를 다시 큰아이한테 돌려주자고 생각했어요. 이 마음 그대로 글(동시)을 썼습니다.

  2019년 1월 9일에 《우리말 동시 사전》(최종규·사름벼리, 스토리닷, 2019)이 태어났습니다. 큰아이가 곁에 찾아온 2008년에는 동시를 쓰겠다는 생각을 못 했으나, 이듬해인 2009년부터 아이한테 읽힐 글은 어버이가 손수 삶을 짓는 사랑으로 쓸 적에 가장 곱겠구나 하고 느꼈어요. 이 느낌 그대로 그때부터 글을, 동시란 이름인 글을 썼어요. 열 해 동안 쓰고 다듬고 고치고 새로 손질한 글이 동시집으로 태어났는데요, 마침 1월 9일에 뜻깊은 영화가 하나 나란히 나왔습니다. 〈말모이〉예요.

  우리 보금자리는 전남 고흥이라는 시골이기에 극장이 없고, 새로 나오는 영화는 못 봅니다. 아쉽지만 디브이디로 나올 때까지 기다립니다. 제 동시집이 나온 이야기를 들은 이웃님 한 분이 영화 〈말모이〉가 마침 같은 날에 나왔다고, 이 영화를 곧 보러 가신다면서 이야기를 들려주는데요, 영화는 ‘옛날에 말과 사전을 사랑한 사람들 이야기’라면 ‘최종규 씨는 바로 오늘 말과 사전을 사랑하는 길을 가네요’ 하고 덧붙여 주었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찡했습니다. 이웃님 말씀이 고마워서 찡하고, 이 땅에서 사전짓기란 길을 걸은 사람들 이야기를 이쁘게 영화로 찍어서 선보여 주었기에 찡해요.

  참으로 고마운 손길이 가득하기에 일제강점기에 씩씩하게 사전을 지은 어른이 있었지요. 오늘 저는 그분들 넋을 헤아리며 새롭게 사전을 지을 수 있구나 싶어요.





탐탁하다

싫은 일을 생각하면 있지
그 싫은 일에
새 싫은 일이
자꾸 뒤따르더라

아까 넘어지기는 했는데
무릎은 멀쩡해
뭐 넘어질 수 있지만
씩씩히 일어나면 되더라

못미덥거나 못마땅해서
눈살을 찌푸릴 수 있지만
가볍게 웃어 봐
그러면 달라지더라

탐탁히 보는 눈이 반가워
흐뭇이 듣는 귀가 산뜻해
즐거이 주는 손이 고와
선선히 부는 바람이 가을이야



  사전, 국어사전, 제대로 말하자면 ‘한국말사전’을 제대로 새로 지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1992년에 처음 품었어요. 고등학생 적인데, 대학입시를 앞두고 국어사전을 두 벌 읽었어요. 첫 낱말부터 끝 낱말까지. 이때에 두 가지를 느꼈는데, 하나는 한국말을 담았다는 사전에 웬 일본말하고 영어가 이렇게 잔뜩 있나 싶었고, 다른 하나는 이 따위로 엮는 사전이라면 차라리 내가 짓고 말자 싶었어요.

  열여덟 살 푸름이 입에서 불쑥 튀어나온 생각이었는데, 참말로 1994년부터 스스로 이 사전짓기란 길을 걸었습니다. 2001년 1월 1일부터 2003년 8월 31일까지 《보리 국어사전》을 새로 짓는 밑틀을 마련하고 보기글이나 뜻풀이를 헤아렸습니다. 2003년 9월부터는 이오덕 어른이 남긴 글하고 책을 갈무리해서 새로 엮는 길을 걸었어요. 그리고 2016년에 이르러 드디어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철수와영희, 2016)이라는 한국말사전을 작지만 새롭게 손수 선보였어요.

  꽤 걸렸지요. 1992년에 꿈을 품고 1994년부터 한 땀씩 바느질을 하듯 걸어온 길이 2016년에 처음 영글었으니까요. 이 뒤로 《읽는 우리말 사전 1·2·3》을 선보였고,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을 엮었고, 요새는 ‘어린이 첫 사전’을 한창 매만집니다.



풀다

손부터 가볍게 풀자
호미를 쥐든 붓을 쥐든
과일칼이나 꽃을 들든
굳은 손을 풀어 보자

수수께끼 같이 풀자
실마리가 안 보이더라도
열쇠를 못 찾겠어도
막힌 머리를 풀어 보자

실타래를 다 함께 풀자
실뜨기놀이를 하고
실잣기놀이도 하며
서로 마음을 풀어 보자

된장을 풀어 국 끓이고
간장을 풀어 달걀찜 하고
소금을 풀어 겉절이 하며
맛난 밥잔치 즐기자



  사전짓기란 길을 시골에서 홀로 걸으면 그냥그냥 홀가분합니다. 모든 일을 혼자 맡으니, 이러면서 살림을 도맡고 아이들을 돌보자니 꽤나 벅찹니다만, 호젓하게 낱말풀이를 새로 붙이고, 보기글도 새로 써요. 이러면서 저절로 글, 동시를 씁니다.

  제가 쓰는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을 얘기해 본다면, 딱딱하거나 재미없거나 삶하고 동떨어진 낡은 뜻풀이가 아닌, 또 동심천사주의처럼 어린이를 바라보려는 눈이 아닌, 어린이하고 어깨동무하면서 삶이랑 살림을 사랑으로 새로 짓기를 꿈꾸는 숨결을 담으려는 글이 되기를 바라면서 써요.

  ‘가다’나 ‘하다’ 같은 낱말은 뜻풀이를 제대로 붙이자면 여러 달 걸려요. 그러나 수수께끼를 ‘풀’려고 마음을 기울이고, ‘풀다’처럼 풀어낸 이야기를 아이들이 가만히 받아들일 수 있게끔 동시를 새로 씁니다.




가다

냇가로 가서 물놀이를 할까
하루가 다 간 줄 모르고 놀았더니
더운 날씨에 도시락이 맛 갔네
그래도 목소리가 가도록 노래하며 논다

가는 말 오는 말 상냥한 말
꽃길을 가고 숲길을 오는 마실
하늘로 가신 할아버지가 남긴
우리 집 시계는 똑딱똑딱 잘 간다

마음이 가는 결을 살피면서
술술 붓이 가는 그림
으뜸가는 빛이 아니어도
꾸준히 밝게 가면 반가운 그림

주름이 가는 미움이 아닌
기쁜 길로 가려 한다
너도 둘 나도 둘 가는 몫
깊어 가는 저녁에 밤알 같이 먹자



  ‘가다’라는 이름으로 쓴 글을 마무리하는 데에 열 해가 걸렸어요. 어쩌면 앞으로 더 손질하거나 새로 써야 할 수 있어요. 어쩌면 우리 집 아이들이 아버지 동시 말고 저희 목소리로 새롭게 ‘가다’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어요. 동시를 쓰면서 사전을 짓는 아버지 곁에서 아이들도 저희 깜냥껏 글을 쓰면서 놀거든요.

  《우리말 동시 사전》은 모두 264 낱말을 이름씨(명사), 움직씨(동사), 그림씨(형용사), 어찌씨(부사) 네 갈래로 나눈 한국말을 ㄱㄴㄷ 벼리로 짠 동시집이자 사전입니다. 여느 동시집하고 대면 네 권이 될 만큼 두툼한 책이고, 여느 사전하고 대면 좀 조촐하거나 얇다 싶은 책입니다.

  저는 264 낱말을 바탕으로 우리가 늘 쓰는 말을 새로 돌아보면서 어린이하고 ‘어린이랑 어깨동무하는 어른’한테 말씨앗을, 사랑씨앗을, 꿈씨앗을, 노래씨앗을, 이야기씨앗을 심으려 합니다. 이 씨앗을 나누어 받아 주시면 좋겠어요. 저마다 다른 삶터에서 저마다 다른 이야기를 길어올려 온누리 아이들이 말꽃을 가꾸고 글꽃을 지피면 좋겠어요.

  이 책 《우리말 동시 사전》은 동시로 담은 글마다 끝자락에 뜻풀이를 두 줄씩 단출히 붙였어요. 책끝에는 ‘말풀이 모둠’을 따로 묶었습니다.



[가깝다] 얼마 안 떨어지는구나 싶을 적에 가깝다예요. 그래서 사이가 좋을 적도 나타내고, 어느 숫자나 자리에 거의 이르는 모습도 나타내요.
[가다] 여기에 있다가 여기 아닌 곳으로 있도록 움직이기에 가다라고 해요. 다른 데에 있도록 움직이지요.
[나] 바로 여기에서 이 몸을 움직이고 이 마음을 다스리는 사람이 나예요. 저기에서 저 몸을 움직이고 저 마음을 다스리는 사람은 너이지요.
[나무] 기나긴 해를 살면서 줄기가 굵고 가지가 뻗어 그늘을 드리우기도 하는 나무는, 집을 짓거나 살림을 짤 적에 쓰기도 해요.
[다르다] 함께 놓고 볼 적에 하나로 느끼기 어려워 다르다요, 하나로 느낄 만하기에 ‘같다’라고 해요. 다르기에 더 잘 보이기도 합니다.
[듣다] 소리를 느끼거나 알기에 듣다예요. 말을 받아들이거나, 기계가 잘 움직이거나, 꾸짖는 말이 우리한테 올 적에도 듣다이지요.
[물] 우리 몸을 비롯해서 목숨이 있는 것은 물로 이루어졌다고 해요. 바다도 내도 비도 이슬도 모두 물이지요. 마시는 것이란 물이랍니다.
[부르다] : 이름을 소리내어 나타내는 부르다이지요. 이쪽으로 오라고 부르고, 값이나 노래를 부르고, 즐겁게 외치는 소리도 부르다예요.
[하다] 어떻게 움직일 적에 하다랍니다. 옷·밥·집을 마련하고, 몸에 두르고, 악기를 켤 줄 알고, 얼굴빛을 나타내고, 이름을 붙이는 하다예요.
[하루] 지구가 해를 한 바퀴 도는, 그래서 한 낮하고 한 밤이 지나는 때인 하루예요. 해가 뜬 동안, 지나간 어느 때, 그냥 어느 때도 하루이고요.
[한글] 한국에서 쓰는 글이나 글씨에 붙인 이름인 한글이에요. ‘한’을 붙여 ‘한겨레’나 ‘한나라’라 하듯, 글이나 말도 ‘한’을 이름으로 삼아요.



한글

우리가 쓰고 읽는 글은
우리가 나누는 말은
두 눈으로 알아보도록 빚은
또렷하고 가지런한 그림

이 땅에서 읽고 적는 한글은
이 땅에서 살림짓고 살면서
사랑스레 슬기로이 생각하는 숨결
새롭게 담으려고 엮은 그릇

네가 띄워 내가 읽는 글월
내가 옮겨 함께 읊는 노랫말
하늘 바람 해 비 눈 꽃
모두 실어서 같이 즐기는 얘기바구니

물소리 새소리 말소리 노랫소리
글로 받아적으니 새넋 흘러
눈짓 손짓 몸짓 낯짓
한글로 옮겨내니 ㄱㄴㄷ 춤춰



(숲노래/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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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25 17: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숲노래 2019-01-28 17:50   좋아요 1 | URL
마음에 드는 노래꽃을 만나
조카랑 즐거이 노래놀이 누리시겠지요?
^^

여러 이웃님이 이 동시사전을 사랑해 주시기에 고마워요.
알라딘에서 누구보다
보슬비 님이 신나는 서평을 하나 써 주시면
얼마나 놀랍도록 기쁠까 하고도 생각해요 ^^

이제 이튿날 29일
서울 방배동에 있을 ‘이웃님 만나는 이야기꽃 자리‘를 챙기러
이래저래 집안일도 추스르고 여러 가지를 해야겠어요.
반가운 댓글을 느끼면서
기운을 얻습니다 ^^
 
내가 사랑한 사진책 - 삶과 이야기가 있는 사진
최종규 지음 / 눈빛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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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책 읽기 372


사진 없는 사진책으로 숲을 배우다

― 내가 사랑한 사진책, 삶과 이야기가 있는 사진
 최종규
 눈빛, 2018.7.9.


사진은 빛그림이기도 한데, 빛그림이란 우리를 둘러싼 모든 빛(모습)을 담은 그림입니다. 우리가 눈으로 보는 대로, 또는 눈으로 못 보더라도 자외선이나 적외선 같은 다른 테두리 빛을 기계를 써서 담는 그림입니다. 사진은 ‘빛(모습)’을 바탕으로 그림을 그리듯이 나타내는 삶이라 할 텐데요, 사전은 ‘말(생각)’을 바탕으로 그림으로 그리는 삶이라 할 테니, 둘은 ‘그리다’라는 얼거리에서 만납니다. 빛을 그리면서 삶을 나타내거나 나누는 사진입니다. 말을 그리면서 삶을 나타내거나 나누는 사전이에요. (7쪽)


  제가 사진을 처음으로 느낀 때는 열 살 무렵입니다. 그때까지는 누가 사진을 찍거나 말거나 못 느끼기 일쑤였고, 찍든 말든 대수롭지 않았습니다. 아니, 사진이나 사진기를 아예 모르다시피 살았어요. 사진기 앞이라 꺼린다든지, 사진을 찍는다고 해서 얼굴이 굳어질 일도 없습니다.

  열 살 무렵 처음으로 사진을 느낄 적에 ‘스스로 보는 대로 찍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안 쓰느라 놀리는 사진기가 하나 떠올랐고, 필름이 있는가를 살펴서 하늘에 대고 구름을 찍었어요. 4층 툇마루에 기대서서 하늘바라기를 한참 하다가 구름빛이 매우 곱다고 여기면서 구경을 하는데, 끝없이 달라지면서 춤추는 구름짓을 잊지 않고 싶더군요. 마음에 담아도 안 잊겠지만, 구름은 늘 달라지기에 어느 한 가지 모습을 확 붙잡고 싶었어요.


사진을 배우고 싶은 분이라면, 굳이 대학교에 안 가도 됩니다. 구태여 미국이나 유럽이나 일본으로 배움마실을 떠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면 뭘 해야 할까요? 사진을 배우고 싶다면 ‘무엇을 사진으로 찍어서 이야기를 엮고 싶은가?’부터 알 노릇이에요. 무엇을 사진으로 찍겠노라는 생각이 없다면, 그리고 사진으로 어떤 이야기를 엮겠노라는 뜻이 없다면, 우리는 사진을 배울 수 없습니다. (10쪽)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는 ‘사진’이라고 하면 다큐멘터리·신문·광고·패션·예술, 이렇게 다섯 가지 즈음만 사진으로 여기는 듯합니다. 생활 사진을 사진으로 여기는 생각을 마주하기는 몹시 어렵습니다. 리얼리즘이든 사실주의이든, 이런 이론을 떠나서, 삶을 바라보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찍는 사진을 아끼는 눈길이 좀처럼 자라지 못합니다. (22쪽)



  열 살 무렵 구름을 사진으로 찍고서 꽤 오래도록 사진을 잊습니다. 국민학교 6학년 졸업사진을 찍을 즈음 개구쟁이 짓이 사진에 담기면 두고두고 재미있겠다고 여겼다가, 고등학교 수학여행을 다녀올 적에 몇 장 찍어 보는데, 굳이 사진이나 사진기가 있어야 한다고 느끼지 않았습니다.

  가만히 돌아보니 그렇습니다. 종이라고 하는 데에 얹지 않아도 마음에 늘 얹기 마련이에요. 마음에 새기는 이야기라면 종이에 따로 새겨야 하지 않습니다. 종이에 따로 새겨서 모으면 짐이 잔뜩 늘어나거든요. 그런데 이런 마음을 넘어선다면, 종이에 따로 새겨서 모을 적에 짐이 늘어나더라도 좋다고 여기는 마음이 된다면, 벽에 붙이고 사진첩으로 건사하며 이웃한테 선물할 사진을 얻고 싶다면, 비로소 두 손에 사진기를 쥘 만하지 싶습니다.


사진은 늘 오늘을 찍습니다. 사진은 늘 모레를 바라보면서 오늘을 찍습니다. 사진은 늘 오늘을 찍는데, 사진에 찍힌 오늘은 곧바로 어제가 됩니다. 오늘을 찍은 사진은 곧바로 어제가 되지만, 어제가 되는 오늘 찍은 사진은 늘 모레로 나아갑니다. 우리 가슴을 적시는 사진은 언제 어디에서나 오늘과 어제와 모레가 한결로 흐릅니다. 어느 한 가지만 똑 떨어진다면, 이것은 ‘작품’은 될 터이나 사진은 못 됩니다. 어느 한 가지만 두드러진다면, 이것은 ‘기록’은 될 테지만 사진은 안 됩니다. 어느 한 가지만 생각해서 찍는다면, 이것은 ‘문화’나 ‘역사’는 될 테지만 사진은 될 수 없습니다. (76∼77쪽)


  《내가 사랑한 사진책》(최종규, 눈빛, 2018)을 써냈습니다. 1998년 가을에 처음으로 제 사진기를 거느리면서 사진찍기에 발을 담갔고, 사진으로 이룬 책은 1994년부터 눈여겨보았습니다. 한국말사전을 짓는 길을 걷는 동안 둘레에서 사진책도 잘 살펴야 한다는 말을 들었고, 1998년 즈음부터 사진책을 하나둘 장만해서 혼자 배우는 길을 걸었습니다.

  따로 대학교 사진학과를 다니지 않았습니다. 대학교는 통·번역 배움길을 가다가 다섯 학기만 마치고 그만두었는데, 신문방송학과 부전공 네 해치 수업을 한 해 동안 몰아서 다 듣는 동안 보도사진 강좌를 한 학기 들어 본 적은 있습니다. 상업사진 스튜디오라든지 내로라하는 사진가 곁에서 배운 적은 없습니다. 혼자 사진책을 읽고, 혼자 사진을 찍으면서 스스로 배우는 길을 걸었어요. 이러면서 사전짓기(한국말사전을 새로 쓰는 일)로 살림을 꾸렸습니다.

  사전을 지으면서 곁에 사진을 두는 동안 ‘사전·사진’이 매우 닮으면서 다르구나 하고 느꼈어요.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참으로 다르되, 속살은 매우 닮습니다. 담고 싶은 삶을 담는 얼거리가 비슷하고, 눈으로 보이는 그림이나 눈으로 읽는 글이라는 대목이 다릅니다. 나타내고 싶은 마음을 굵고 짧게 나타내는 결이 비슷하고, 기계를 쓰거나 두툼한 종이꾸러미를 쓰는 대목이 다릅니다.



따뜻함을 느끼기에 사진을 찍고, 따뜻함을 느낀 마음으로 사진을 찍습니다. 따뜻함을 나누려고 사진을 찍고, 따뜻한 삶을 이야기하려고 사진을 찍어요. 따뜻한 사랑이 되고자 하며 사진을 찍고, 따뜻하게 어깨동무하는 살림을 짓는 꿈을 노래하면서 사진을 찍습니다. (264쪽)

한손을 거들어 살림하면서 사진이랑 삶이랑 사랑을 가꿉니다. 한손은 집안에 즐거움과 기쁨이 감돌도록 힘을 씁니다. 다른 한손은 집안에 이야기꽃이 피어나도록 도란도란 말을 섞고 사진을 찍습니다. 한손을 거들어 밥을 짓고 글을 씁니다. 한손은 너와 나 사이에 흐르는 꿈을 짓고, 다른 한손은 너와 내가 저마다 나아갈 사랑스러운 길을 닦습니다. (277쪽)


  《내가 사랑한 사진책》은 혼자서 꿋꿋하게 사진을 배우고 사랑하는 길을 걸으면서 ‘배우고 사랑한 이야기’를 다룬 책입니다. 스무 해 남짓 사진길을 걷고 보니, 대학교 사진학과를 굳이 안 다녀도 얼마든지 사진을 즐겁게 찍거나 읽을 수 있다고 깨닫습니다. 한국에서는 ‘어느 대학 사진학과’를 나왔느냐 안 나왔느냐로 줄을 세운다고 합니다. 그 대학 사진학과를 안 나올 적에는 한국 사진밭에서는 따돌림을 받는다고 하는군요. 다만 이마저도 요즈막에서야 알았어요. 대학교도 그만두었고, 사진학과는 아예 한 발도 안 담그며 혼자 사진을 익혔으니, 사진밭에 줄이 그렇게 단단한 줄 알 턱조차 없었습니다.

  그런데 제 곁에는 늘 상냥한 스승이나 벗이 있습니다. 바로 사진책입니다. 화보 같은 사진책도, ‘사진 없이 글로 이야기를 풀어내는 이론서’인 사진책도, 지나간 날을 읽을 수 있는 졸업앨범이라는 사진책도, 나라 안팎 온갖 작가들이 일구어 놓은 사진책도, 독재정권 대통령 비서실 같은 데에서 독재 허수아비를 퍼뜨리려고 내놓은 이승만·박정희·전두환·노태우 화보집 같은 사진책도, 만화로 다루는 사진책도, 그림으로 들려주는 사진 이야기가 흐르는 책도, 저마다 다르면서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주는 스승이자 벗이었어요.

  무엇보다도 사진가란 이름으로 작품이나 예술을 해야만 사진책이 아닌 줄 배웠습니다. 사진가란 이름이 없어도, 또 이름이 안 알려지거나 덜 알려진 사진가 한 사람이 일군 사진책도 매우 아름다운 줄 배웠어요. 외려 이름이 널리 알려진 사진가 가운데 쭉정이 사진이 참 많은 줄 배우기도 했습니다.


‘살면서 찍는 사진’하고 ‘구경하며 찍는 사진’은 다릅니다. 골목마을에 살면서 모든 빛과 어둠을 고스란히 바라보면서 봄·여름·가을·겨울을 누리는 몸으로 아침·낮·저녁·밤·새벽을 마주하는 사진이랑, 골목여행을 한다면서 어쩌다가 한 번 찾아와서 한두 시간 쓱 훑고 지나가며 찍는 사진은 사뭇 다르기 마련입니다. (34쪽)

사진으로 찍어서 보여주기에 문화가 될까요? 글로 적어서 책이나 논문으로 선보이면 역사가 될까요? 사진으로 찍지 않고 마음속에 담는 문화는 무엇일까요? 글로 쓰지 않고 책으로 엮지 않는 역사는 무엇일까요? (172쪽)



  사진찍기는 글쓰기하고 같다고 느낍니다. 사진읽기는 글읽기하고 같다고 느끼고요. 사진찍기는 삶짓기하고 같다고 느끼며, 사진읽기는 삶읽기하고 같구나 싶어요. 말을 다루는 길을 걸으며 사전을 지을 적마다‘ 말 = 삶’이라고 뚜렷이 느낍니다. 이 길을 걸으며 사진을 길벗으로 삼으니‘ 사진 = 삶’이라고 똑같이 느껴요.

  저는 《내가 사랑한 사진책》을 ‘사진이랑 책이랑, 사진마실, 사진벗님, 사진누리, 사진바람, 사진노래, 사진빛살, 사진사랑, 사진수다’처럼 아홉 갈래로 나누어서 써 보았습니다. 사진책 쉰 권을 다루었습니다. 퍽 알려진 사진책을 다루기도 했지만, 비매품 사진책을 다루기도 했고, 사진밭에서 이름이 아예 안 알려진 분이 빚은 사진책을 다루기도 했습니다. 사진책마다 어떤 이야기를 다루는가를 놓고서 먼저 한 줄로 갈무리를 하고서 속뜻을 풀어내 보려 했습니다.


사랑·꿈으로 오래도록 품을 들인 ‘골목이웃’ 사진 ― 골목안 풍경 전집
우리 곁 고운 이웃을 바라보는 손길 ― 우편집배원 최씨
옛 서울 냇가로 마실을 가다 ― 시간 속의 강
신호등 없던 이쁜 서울을 그린다 ― 변모하는 서울
작은 사진에 담는 작은 꿈 ― 배다리 사진 이야기, 창영동 사는 이야기
곁에 있는 사랑을 사진으로 찍는다 ― 풍경소리에 바람이 머물다
바로 오늘, 처음 한쪽을 넘긴다 ― 예스터데이, 추억의 1970년대



  《내가 사랑한 사진책》은 사진 없는 사진책입니다. 사진을 오직 글로만 풀어낸 사진책입니다. 굳이 사진을 곁들이지 않은 사진책입니다. 사진을 제대로 바라보자면 때로는 사진을 모두 걷어내고서 글만 읽으면서 머릿속으로 사진을 그려 보아야 한다는 줄거리를 다루는 사진책입니다.
  《내가 사랑한 사진책》은 ‘사진기 사랑’이 아닌 ‘사진 사랑’을 말하려는 사진책입니다. 이 책은 ‘사진학과 연줄’이 아닌 ‘사진을 사랑하는 사람’을 말하려는 사진책입니다. 그리고 ‘이름난 작가라는 허울’이 아닌 ‘아름다운 삶을 짓는 알맹이’를 함께 들여다보면서 나누자고 하는 마음을 드러내려 하는 사진책입니다.


개구리 노랫소리와 풀벌레 노랫소리를 담고 싶어요. 소리를 어떻게 사진으로 담느냐 궁금해할 분이 있을 테지만, 참말 소리도 사진으로 담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개구리 노랫소리 들으며 사르르 녹는 즐거움이 사진 한 장 찍으며 천천히 깃듭니다. 풀벌레 노랫소리 들으며 살살 퍼지는 즐거움이 사진 두 장 찍으며 시나브로 뱁니다. (59쪽)


  저는 사진을 배우면서 사진기나 렌즈를 장만하려고 이태나 세 해쯤 목돈을 모으곤 했습니다. 오늘 여기에서 더 나은 사진기나 렌즈를 살 수 있는 돈이 없으면, 돈이 없는 대로 아주 값싼 사진기나 렌즈로 마음을 담아내자고 여겼습니다.

  필름을 사려고 적금을 들지요. 더 나은 필름스캐너를 장만하려고 적금을 들고요. 한 발자국씩, 더디지만 씩씩하게 사진길을 걸으려 했습니다. 번쩍거리는 서울 한복판 갤러리에서 사진을 걸지 않아도 좋다고 여겼습니다. 골목마을 담벼락에 사진을 걸어도 즐거웠고, 헌책집 책시렁에 누름못으로 사진을 걸쳐도 재미있었어요.

  제가 찍는 사진에 오롯이 들어와 준 사람이나 집이 있으면, 반드시 사진을 종이에 앉혀서 나중에 갖다 드리려 했습니다. 찍혀 주는 사람이나 집이 있기에 찍을 수 있는 눈이나 손이 발돋움할 수 있구나 싶었어요. 정갈하면서 아름다이 살아가는 숨결이 이웃에 있으니, 언제나 새롭게 바라보거나 마주하면서 사진을 찍는구나 싶었습니다.


값비싸거나 값진 장비나 기계가 있어야 ‘아이 사진’을 더 잘 찍지 않습니다. 더 뛰어난 장비나 기계를 어깨에 걸쳐야 ‘곁님이나 사랑님 사진’을 더 잘 찍지 않아요. 중형사진기나 대형사진기쯤 있어야 ‘내가 사랑하는 풍경 사진’을 더 잘 찍지 않지요. 사랑으로 다가서려는 마음이 있을 적에 비로소 즐겁게 찍는 사진입니다. 즐겁게 찍고 사랑스레 찍는 사진이라면, 이렇게 찍은 사진은 모두 ‘잘 찍은 사진’이라고 할 수 있어요. 왜냐하면, 사랑으로 다가서면서 찍는 사진에는 늘 이야기가 흐르니까요. (108쪽)

사진에는 좋거나 나쁜 빛이 없습니다. 어떻게 찍든 모두 사진입니다. 스스로 살아가는 모습을 담는 사진이고, 스스로 살아가는 대로 담기는 빛입니다. (155쪽)



  사진은 예술인가 아닌가 하는 말다툼이 꽤 오래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말다툼을 먼발치에서 지켜보면서 참 덧없이 다툼질을 하는구나 싶었습니다. 왜냐하면, 사진은 예술이면서 예술이 아니니까요. 사진은 사진 그대로 언제나 예술이지만, 예술이라는 이름에 갇히려 하면 예술일 까닭이 없습니다.

  사진을 사진으로 바라보며 다루면 언제나 ‘사진이면서 예술’이에요. 그러나 사진을 예술품이나 전시품이나 재산으로 삼으려 하면 언제나 ‘덧없는 허수아비’이지 싶습니다.

  몇 가지 보기를 들 수 있습니다. 비싼값에 팔려는 속셈으로 금소나무를 함부로 벤 사진가 아무개가 있습니다. 비싼값에 작품을 파는 앞모습 뒤에서는 성추행을 일삼은 사진가 아무개가 있습니다. 다른 나라 사진가 작품을 흉내내거나 베끼는 사진가 아무개도 있어요. 공모전이나 협회나 학벌로 금을 그으면서 권력이 되는 사진가 여럿도 있고요.

  다만 사진은 사진일 뿐입니다. 얄궂은 마음으로 바라보면서 얄궂게 찍은 사진은, 그대로 얄궂은 사진입니다. 참한 마음으로 마주하면서 참하게 찍은 사진은, 그대로 참한 사진, 곧 참사진입니다.


사진을 사진답게 찍을 때에 비로소 사진답다고 합니다. 그럴듯한 모습을 찍으면 그저 ‘그럴듯할’ 뿐입니다. 멋있어 보이게 찍는다면 그저 ‘멋있어 보일’ 뿐이지요. 이렇게 만지작거리거나 저렇게 꾸민다고 해서 사진이 빛나지 않습니다. 이렇게 붙이거나 저렇게 자른다고 해서 사진이 도드라지지 않습니다. (332쪽)

사진가는 으레 ‘찍는 사람’으로 여기기 마련이지만, 사진가라고 하는 자리는 숱한 사람을 오랫동안 꾸준히 자꾸자꾸 다시 마주하는 동안 ‘배우는 사람’이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즐거움을 배우면서 즐거움을 사진에 담고, 아름다움을 배우면서 아름다움을 사진에 담으리라 느껴요. 사랑을 배우면서 사랑을 사진에 싣고, 기쁜 꿈을 배우면서 기쁜 꿈을 사진에 실으리라 느껴요. 맑은 눈짓을 배우면서 맑은 눈짓을 사진으로 옮기고, 밝은 웃음을 배우면서 밝은 웃음을 사진으로 옮기리라 느낍니다. (395쪽)



  한국에는 사진가라는 이름으로 사진을 찍는 분이 무척 많습니다. 값지거나 값비싼 사진기도 매우 많이 팔렸습니다. 그렇지만 한국은 사진책이 거의 안 나올 뿐 아니라, 애써 나온 사진책이 거의 안 팔리기 일쑤입니다.

  비싼 사진기를 어깨에 걸친 사람은 많은데, 단돈 1∼2만 원짜리 사진책은 거들떠보지 않는다면, 이이는 사진가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이가 쓰는 사진가라는 이름은 무엇일까요?

  오백만 원짜리 렌즈는 가볍게 장만하고, 이천만 원이나 오천만 원짜리 장비도 거뜬히 장만하지만, 5만 원짜리 사진책은 비싸다고 말한다면, 이이는 어떤 사진가일까요? 오백만 원짜리 렌즈 하나를 덜 장만한다면, 5만 원짜리 사진책을 100권 장만할 수 있습니다. 이천만 원짜리 장비 하나를 덜 산다면, 2만 원짜리 사진책을 1000권 장만할 수 있습니다.

  사진가는 참으로 많고, 사진기도 참으로 많이 팔려서 쓰는데, 왜 한국사람은 한국이라는 터전을 스스로 새로이 바라보거나 마주하면서 사진으로 사랑스레 담아내어 나누는 길에는 좀처럼 서지 못할까요? 작품이나 예술이 되려는 사진이 아닌, 수수한 이웃하고 어깨동무를 하는 삶이나 살림을 사랑하려는 사진은 왜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울까요?

  그리고, 사진이론이나 사진비평은 왜 하나같이 일본 한자말에 번역 말씨로 덮어씌워야 하고, 아예 영어로 가득 채워야만 한다고 여길까요? 문학하는 분들은 시집에 붙은 비평(시평)이 매우 딱딱하고 어렵다고들 말하는데요, 사진비평은 문학비평보다 훨씬 딱딱하고 어려운 말로 뒤집어씌우기 일쑤입니다.


사진기라는 기계는 평등하면서 평등하지 않습니다. 사진기라는 기계가 평등하다면, 대학교 사진학과를 나왔든 나오지 않았든 이 기계를 손에 쥐는 사람은 누구나 사진을 찍을 수 있습니다. 어린이도 할머니도 젊은이도 얼마든지 사진을 찍을 수 있어요. 사진기라는 기계가 평등하지 않다면 값에 따라 값어치가 달라서, 더 돈을 치르면 해상도가 더 빼어난 기계를 손에 쥘 수 있습니다. 그리고 때에 따라서는 대학교 사진학과라든지 사진밭 여러 어른 뒷줄에 서서 이름을 펴기도 합니다. (421∼422쪽)


  삶으로 스밀 수 있기에 비로소 문학이요 사진이라고 느낍니다. 살림을 짓는 살림지기 손끝에서도 넉넉히 태어날 수 있을 적에 비로소 문학이요 사진이지 싶습니다. 어느 대학교 사진학과를 나와서 전문가 노릇을 해야만 찍거나 읽는 사진이 아닙니다. 부엌일을 하는 살림지기 손으로도 찍거나 읽을 수 있을 때에 사진입니다. 신나게 뛰어노는 아이들하고도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면서 새롭게 생각을 지필 적에 사진입니다.

  우리는 두 손을 펴서 두 손가락을 모아 네모틀을 짜면서 ‘눈사진(눈짓을 하며 찍는 사진)’을 찍을 수 있어요. 때로는 손가락을 둥글게 붙여서 둥그런 눈사진을 찍을 수 있습니다.

  사진에 황금분할이 있다고 말합니다만, 황금분할보다는 ‘즐거운 마음’하고 ‘사랑스러운 눈길’이 먼저 있을 적에 아름다우리라 느껴요. 즐거운 마음이기에 작품이란 이름도 따르고, 사랑스러운 눈길이기에 예술이란 이름도 찾아오지 싶습니다.

  이름값이나 학교줄이나 장비병이란 말이 사진밭에서 사라지기를 바랍니다. 이 나라 사진밭에 작가나 독자나 평론가 사이에서 “내가 사랑한 사진책” 이야기가 피어나기를 바랍니다. 저는 2007년 4월에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사진책도서관’을 열었습니다. 이 사진책도서관을 2011년에 전남 고흥으로 옮겨서 ‘사전 짓는 책숲집 숲노래, 사진책도서관+한국말사전 배움터+숲놀이터’로 바꾸어서 꾸립니다. 사진 곁에 사전이 있다고 느껴, 두 갈래 도서관으로 꾸리는데, 사진하고 사전 곁에 숲도 함께 있을 적에 비로소 아름다이 어우러지는구나 싶어서 ‘시골숲 사전·사진 도서관’을 꾸려요. 《내가 사랑한 사진책》은 ‘사진책도서관 + 사전도서관 + 숲도서관’ 열두 해를 사진 없는 말로 지어서 얻은 작은 열매입니다. 2018.7.27.쇠.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책읽기/사진비평/사진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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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잘하고 글 잘 쓰게 돕는 읽는 우리말 사전 3 - 얄궂은 말씨 손질하기 말 잘하고 글 잘 쓰게 돕는 읽는 우리말 사전 3
최종규 글, 숲노래 기획 / 자연과생태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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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궂은 말씨를 손질하면 생각이 살아납니다

[책이 나왔습니다] 쉬운 말이 평화·평등 《읽는 우리말 사전 3》



  지난 선거를 앞두고 전남 고흥 여러 시민모임에서 고흥군수 후보자한테 찾아가서 교육 정책을 제대로 펴야 한다는 뜻을 밝힌 적 있습니다. 이때에 열한 살 큰아이를 데리고 함께 갔습니다. 저는 군수 후보자가 하는 말을 무릎셈틀로 받아적었고, 큰아이는 사진을 찍었어요. 이날 자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큰아이한테 군수 후보자가 믿음직해 보이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큰아이는 좀 머뭇거리다가 “모르겠는데.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어.” 하고 대꾸했습니다.


  이 대꾸를 듣고서 곰곰이 돌아보았어요. 사회에서 적잖은 어른들은, 또 정치 같은 자리에 나서는 어른들은, 여느 자리에서 살아가는 사람하고는 다른 말을 쓰기 일쑤입니다. 형식이라고 하는 겉치레에 매인 말을 흔히 써요. 게다가 일본 한자말 같은 딱딱한 말씨를 써야 하는 듯 여기기도 하고, 좀더 어려운 말씨를 써야 유식해 보인다고, 이른바 똑똑해 보인다고 여기기도 합니다.



인문책에서도 시집에서도 만화책에서도 그림책에서도 생태도감에서도 아리송하거나 얄궂은 말씨를 쉽게 찾아낼 수 있습니다. 어느 모로 본다면 이제 이런 말씨가 워낙 흔하기에 이런 말씨를 얄궂거나 아리송하다고 하기보다는 ‘새로운 현대 한국 말씨’로 여길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런 말씨로 공무원이 공문서를 쓰면 우리는 하나같이 ‘공무원은 왜 이렇게 글을 어렵고 얄궂게 쓰느냐’며 나무랍니다. 공무원이 쓰는 공문서도 쉽고 바르며 알맞고 곱게 가다듬을 노릇인데, 이에 앞서 우리 누구나 글을 가다듬어서 말도 함께 살찌우면 좋겠습니다. (4쪽)



  《읽는 우리말 사전》 셋째 권을 냈습니다. 책이름이 살짝 깁니다만, 《말 잘하고 글 잘 쓰게 돕는 읽는 우리 말 사전 3 얄궂은 말씨 손질하기》(자연과생태, 2018)라는 “읽는 사전”입니다. 이 책은 우리 집 큰아이뿐 아니라, 이 나라에서 살아가는 모든 이웃님이 즐겁고 쉽게 생각을 나누도록 돕는 말을 찬찬히 살펴서 쓰는 길에 이바지하고 싶은 마음으로 썼어요.


  모든 말이나 글을 어렵게 쓰지 말자고, 어려워서 못 알아듣는 사람이 생기게 하지 말자고, 말이나 글 때문에 사람 사이에 울타리나 문턱을 높이지 말자고, 쉬운 말로 얼마든지 생각을 널리 펴고 환하게 나눌 수 있다는 뜻을 밝히려고 쓴 “읽는 사전”입니다.


  굳이 얄궂게 써야 하지 않습니다. 굳이 겉치레를 해야 하지 않습니다. 굳이 있어 보이는 말씨를 써야 하지 않습니다. 굳이 일본 한자말을 골라서 써야 잘나 보이는 글이나 말이 되지 않습니다. 수수하게 말하거나 글을 쓸 적에 참으로 수수하면서 쉬울 뿐 아니라, 서로서로 생각을 한결 부드러우면서 넓고 깊게 나눌 수 있기도 합니다.



10만 그루에 대한 벌목이 시작됐다

→ 10만 그루를 벤다

→ 나무 10만 그루를 벤다


무사히 땅에 정착한 거미는 영역을 지키고 거미그물을 만들면서 삶의 터전을 잡아 갑니다

→ 땅에 잘 내려온 거미는 자리를 지키고 거미그물을 짜면서 삶터를 잡아 갑니다

→ 땅에 잘 떨어진 거미는 터를 지키고 거미그물을 지으면서 삶자리를 잡습니다

→ 땅에 잘 내려선 거미는 터를 지키고 거미그물을 치면서 삶자리를 잡습니다



  ‘-에 대한’은 번역 말씨입니다. 영어 ‘about’은 ‘-에 대한/-에 대하여’로 옮길 만하지 않습니다. 한국 말씨로는 ‘-을/-를’을 쓰면 되어요. “10만 그루에 대한 벌목이 시작됐다” 같은 글월에서 한자말 ‘벌목’을 꼭 쓰고 싶다면 “10만 그루를 벌목했다”처럼 손질해 줍니다. ‘벌목’이란 한자말은 ‘나무베기’를 가리키니 “10만 그루를 벤다”나 “나무 10만 그루를 벤다”로 손질하면 한결 나아요. 이렇게 하면 어린이도 다 알아들을 만한 말로 거듭나요.


  거미가 그물을 짜거나 짓거나 치려고 땅에 잘 내려오는 모습을 놓고도 “땅에 잘 내려온”이라 하면 되지요. 굳이 “무사히 땅에 정착한 거미”처럼 한자말로 꾸며야 하지 않습니다. 이런 한자말을 써야 거미를 다루는 생물학이 되지 않습니다. 이 글월에서 말씨를 더 살피면 “거미그물을 만들면서”에서 ‘만들다’는 잘못 썼어요. 아무 자리에나 ‘만들다’를 넣지 못해요. 거미줄은 ‘짠다’나 ‘친다’나 ‘짓는다’고 해야 올발라요. “삶의 터전”이라는 일본 말씨는 ‘삶터’나 ‘삶자리’처럼 짧게 끊어야 또렷할 뿐 아니라, 글월도 매끄럽지요.



가로등 아래 나무 그림자가 일렁이고 있다

→ 가로등 밑에 나무 그림자가 일렁인다

→ 가로등 곁에 나무 그림자가 일렁인다


내가 건강한 삶을 유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 내가 튼튼하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우리는 말을 쉽게 쓰는 길을 살피면서, 한국말을 한국말답게 쓰는 길을 갈 적에 한결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가로등 ‘아래’”라고 하면, 가로등을 세운 ‘땅바닥 아랫자리’를 가리킵니다. 그림자를 살핀다면 “가로등 밑”이나 “가로등 곁”처럼 낱말을 제대로 가려서 써야 알맞습니다. “일렁이고 있다”에서 “-고 있다”는 번역 말씨입니다. “일렁인다”라고만 해야 알맞고, 느낌을 더 살리고 싶다면 사이에 꾸밈말을 넣어 “한창 일렁인다”나 “막 일렁인다”나 “이제 일렁인다”나 “가만히 일렁인다”로 쓰면 됩니다.


  “건강한 삶을 유지하려면”은 일본 말씨하고 번역 말씨가 뒤섞인 모습인데요, “튼튼하려면”이나 “튼튼하게 살려면”으로 가다듬어 줍니다.



우리는 일찍이 오랜 기간 경제적으로 부족한 생활을 해 왔다

→ 우리는 일찍이 오랫동안 돈이 없이 살아왔다

→ 우리는 일찍이 오랫동안 살림돈이 모자랐다

→ 우리는 일찍이 오래도록 가난하게 살았다

→ 우리는 일찍이 퍽 오래 가난한 살림이었다


햇살과 바람을 무상으로 공급받는 나는

→ 햇살과 바람을 거저로 받는 나는

→ 햇살과 바람을 그냥 받는 나는



  돈이 없기에 “돈이 없이 살다”라 하고, 돈이 모자라기에 “돈이 모자라게 살다”라 말합니다. 이를 “경제적으로 부족한 생활을 해 왔다”처럼 한자말을 잔뜩 넣어야 학문 같은 글이 된다거나, 멋있어 보이는 글이 되지 않습니다.


  “무상으로 공급받는”도 덧없는 말자랑이에요. 더욱이 “공급 + 받다”는 뜬금없습니다. ‘공급(供給)’이라는 한자말은 ‘주다’를 뜻해요. ‘공급받다 = 줌을 받다’라 말하는 셈이니 앞뒤가 어긋나는 말씨이기도 합니다. “거저 받다”나 “그냥 받다”처럼 쉽게 쓰면 됩니다.



영어가 지구상의 모든 말을 밀어낼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가질 수도 있다

→ 영어가 지구에서 모든 말을 밀어낼지도 모른다며 두려울 수 있다

→ 영어가 온누리 모든 말을 밀어낼지도 몰라 두려울 수 있다

→ 영어가 온누리 모든 말을 밀어낼지도 몰라 두려워할 수 있다


자기보다 큰 수컷과의 일전을 불사해야 하는데

→ 저보다 큰 수컷하고 한판 붙어야 하는데

→ 저보다 큰 수컷과 한바탕 싸워야 하는데



  “지구상의 모든 말을”은 일본 말씨입니다. “지구에서 모든 말을”로 손봅니다. “공포를 가질 수 있다”는 번역 말씨입니다. “두려울 수 있다”나 “두려워할 수 있다”라 하면 쉽고 깔끔합니다.


  “큰 수컷과의 일전을 불사해야 하는데”는 오롯이 일본 말씨입니다. 껍데기는 한글이되, 알맹이는 일본 한자말에 일본 말씨이지요. “큰 수컷하고 한판 붙어야”나 “큰 수컷과 한바탕 싸워야”처럼 쓸 적에 아이들도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건으로 발전하게 될지 그 귀추가 자못 주목된다

→ 어떤 일로 커질는지 자못 눈여겨볼 만하다

→ 어떤 일로 불거질는지 자못 지켜볼 만하다

→ 어떤 일로 불거질는지 자못 궁금하다


나비 한 마리 돌 위에 앉아 졸고 있다

→ 나비 한 마리 돌에 앉아 존다

→ 나비 한 마리 돌에 얌전히 앉아 존다

→ 나비 한 마리 돌에 앉아 꾸벅꾸벅 존다

→ 나비 한 마리 돌에 앉아 가만히 존다



  ‘귀추(歸趨)’라는 한자말을 넣어 “귀추가 주목된다”처럼 써야 글멋이 나지 않습니다. 한자말을 써야 뭔가 있어 보인다는 생각은 이제 접을 때이지 싶습니다. “눈여겨볼 만하다”나 “지켜볼 만하다”라 하면 되고, ‘궁금하다’라 해도 되어요.


  “돌 위에 앉아 있다” 같은 번역 말씨를 어린이책에 쓰는 어른이 꽤 많습니다. 그런데 나비나 새나 사람이 “돌 위”에 앉을 수 있을까요? 영어에서는 ‘on’ 같은 전치사를 넣을 테지만, 한국말은 ‘위’를 넣어 “돌 위”라고 하면, 돌에서 하늘로 붕 뜬 곳을 가리킵니다. 앉으려면 “돌에 앉아”야 합니다.



나의 차가운 혀도 뜨거운 무언가(無言歌)를 삼키리라

→ 내 차가운 혀도 뜨거이 말 없는 노래를 삼키리라

→ 내 차가운 혀도 뜨거이 고요노래를 삼키리라

→ 혀도 뜨겁게 괴괴노래를 삼키리라


두 언어가 지닌 차이는 아래와 같다

→ 두 말이 다른 대목은 이와 같다

→ 두 말은 다음처럼 다르다

→ 두 말은 이렇게 다르다



  ‘무언가(無言歌)’는 재미난 말놀이일까요? 아니면 한자를 좀 안다는 말자랑일까요? 우리는 한국말로 “말 없는 노래”처럼 쓰거나 ‘고요노래’나 ‘괴괴노래’ 같은 새말을 지을 수 있습니다.


  “두 언어가 지닌 차이는 아래와 같다”는 번역·일본 말씨입니다. “두 말은 다음처럼 다르다”라고 하면 끝납니다. “언어가 지닌 차이”라 하면 ‘언어’가 임자말인 셈인데, 한국말로는 이렇게 안 씁니다. ‘언어’가 ‘차이’를 ‘지닌’다니요, 아무리 생각해도 한국말이 될 수 없어요. ‘말’은 서로 ‘다를’ 뿐입니다. “아래와 같다”는 일본사람이 글종이를 쓸 적에 위에서 아래로 써 버릇 하면서 나타난 일본 말씨인데요, ‘아래’ 아닌 ‘다음’으로 바로잡아야 알맞습니다.



재채기는 기침과 달리 주로 상부기도(코)가 자극을 받아서 나오게 됩니다

→ 재채기는 기침과 달리 흔히 코가 간지러워서 나옵니다

→ 재채기는 기침과 달리 으레 윗숨길이 간지러워서 나옵니다


처음 서울에 올라와서 기숙사에서 살게 된 겁니다

→ 처음 서울에 와서 기숙사에서 살았습니다

→ 처음 서울에 와서 기숙사에서 살아 보았습니다

→ 처음 서울에 가서 기숙사에서 살았습니다



  ‘상부기도(코)’라고 적을 까닭이 없어요. 그냥 ‘코’라고 하면 됩니다. “살게 된 겁니다” 같은 번역 말씨는 “살았습니다”로 손질해 줍니다.


  그리고 “서울에 올라와서”는 얄궂지요. 이는 지난날 봉건계급질서를 따라서 ‘서울은 위, 시골이나 지방은 아래’로 여긴 낡은 말씨입니다. ‘상행선·하행선’ 같은 말씨가 아직 안 사라졌는데요, ‘-길’을 넣어서 ‘서울길·부산길’이나 ‘서울길·시골길’처럼 써야 올바릅니다.


  서울에는 갈 뿐입니다. “서울에 가다”라 하면 됩니다. 시골로 가는 일을 때때로 ‘낙향’이라 말하는 분이 있는데, “시골에 내려가다”나 “시골로 떨어지다” 같은 결로 쓰는 ‘낙향’도 ‘상경·서울에 올라가다’하고 맞물리는 지역차별을 담은 낡은 말씨입니다.



청소가 아니라 수리가 필요하겠군

→ 쓰레질이 아니라 고쳐야 하겠군

→ 비질이 아니라 손질을 해야겠군

→ 쓸고닦기 말고 손질을 해야겠군

→ 쓸고닦지 말고 손봐야겠군


시적 언어의 정제가 조금은 더 요구되는 지점도 있지만

→ 싯말로 조금은 더 가다듬어야 하는 대목도 있지만

→ 시답게 말을 조금 더 손질해야 하는 곳도 있지만

→ 싯말스럽게 조금 더 갈고닦아야 하는 데도 있지만



  ‘필요’ 같은 한자말을 써야 한다면 쓸 수 있을 테지만, 이 일본 한자말을 자꾸 아무 곳이나 안 쓰기를 바랍니다. 조금 더 쉽게 헤아려 보면 좋겠어요. “수리가 필요하겠군”은 “고쳐야 하겠군”이나 “손질해야겠군”이라 손볼 만합니다.


  문학을 말씀하는 분, 이른바 문학평론가는 “시적 언어의 정제가 조금은 더 요구되는 지점도 있지만” 같은 말을 매우 쉽게(?) 쓰시니 참으로 어렵(?)습니다.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요? 굳이 갖가지 일본 한자말하고 일본 말씨를 끌어들여야 문학평론이 될까요? 쉬운 한국말을 쓰면 문학평론이 안 될까요?



늦게나마 매운탕으로 영양을 보충하고 정자에서 잠시 휴식을 취해서

→ 늦게나마 매운찌개로 배를 채우고 정자에서 살짝 쉬면서

→ 늦게나마 매운국으로 배불리 먹고 정자에서 가볍게 쉬어서


언어 발달이 눈이 부시게 이루어지는 3살 무렵의 유아

→ 말이 눈이 부시게 피어나는 세 살 무렵 아이

→ 말이 눈이 부시게 깨어나는 세 살 무렵 아이

→ 말이 눈이 부시게 자라나는 세 살 무렵 아이

→ 말이 봇물처럼 눈부시게 터지는 세 살 무렵 아이


나는 식탁에서 옷을 만들 원단을 재단하고 있었어요

→ 나는 밥상에서 옷을 지을 천을 마름했어요

→ 나는 밥상맡에서 옷을 지을 천을 잘랐어요


코코넛 물을 이용한 디톡스를 해 보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방법이며, 건강에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

→ 코코넛물로 독을 빼는 길이 가장 나으며, 몸에도 좋다

→ 코코넛물로 독을 빼면 가장 좋으며, 몸에도 낫다


물건의 사이즈를 맞출 수 있는 것이 큰 장점입니다

→ 물건 크기를 맞출 수 있어 크게 좋습니다

→ 물건 크기를 맞출 수 있어 한결 낫습니다

→ 물건 크기를 맞출 수 있어 매우 좋습니다

→ 물건 크기를 맞출 수 있어 무척 좋습니다

→ 물건 크기를 맞출 수 있어 참 좋습니다


그다음은 말할 것도 없이 폭풍 흡입했다

→ 그다음은 말할 것도 없이 퍼먹었다

→ 그다음은 말할 것도 없이 게걸스레 먹었다

→ 그다음은 말할 것도 없이 마구 먹었다

→ 그다음은 말할 것도 없이 허겁지겁 먹었다

→ 그다음은 말할 것도 없이 숨도 안 쉬고 먹었다

→ 그다음은 말할 것도 없이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먹었다



  《읽는 우리말 사전 3 얄궂은 말씨 손질하기》는 184쪽으로 조촐하게 꾸렸습니다. 모두 161꼭지 보기글을 책에서 뽑았고, 쉽게 부드럽게 즐겁게 곱게 새롭게 손질하는 길을 밝히려 했습니다. 보기글을 더 많이 뽑아서 더 두툼하게 글손질 이야기를 펼 수 있지만, 언제라도 홀가분하면서 산뜻하게 ‘사전을 들고 다니며 읽기’를 바라면서 조촐히 엮었습니다.


  사전은 말풀이만 담은 책이 아닙니다. 사전은 말을 다루는 길을 밝히는 책입니다. 말풀이만 그러모은 사전이라면, 우리는 손전화를 켜서 슥슥 찾아보면 그만이겠지요. 그러나 때랑 곳이랑 흐름을 살펴 알맞으면서 즐겁고 새롭게 말을 하고 글을 쓰는 길을 익히려면 “읽는 사전”을 손에 쥐거나 곁에 두어야지 싶습니다.


  《읽는 우리말 사전》 셋째 권은 다음처럼 세 갈래로 큰 얼거리를 살필 수 있습니다.



ㄱ. 번역 말씨 가다듬기

‘뜨거워짐을 느꼈습니다’ 같은 말씨를 많이 쓰지만 ‘-ㅁ을 느꼈습니다’는 번역 말씨입니다. 한국말에서는 이야기를 맺을 때 그림씨나 움직씨를 섣불리 이름씨 꼴로 바꾸지 않습니다. 이럴 때는 ‘뜨거웠습니다’로 고쳐 쓸 만합니다.


ㄴ. 우리 낱말 살려 쓰기

‘비즙을 배설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와 ‘콧물을 뺄 수 없다’는 글 가운데 어느 쪽이 더 또렷하게 말하고자 하는 바를 나타낼까요? 한자말을 쓰는 일이 그르지는 않지만 우리말로 쓰면 말뜻을 더욱 똑똑히 밝힐 수 있습니다.


ㄷ. 머리를 맞대고 함께 엮는 우리말 사전

흔히 서울에 갈 때는 ‘올라간다’고 하고 지방으로 갈 때는 ‘내려간다’고 합니다. 이제는 민주와 평화와 평등을 헤아리면서 어디든 ‘가다·오다’라고만 하고 ‘서울 상행선’은 ‘서울길’로, ‘부산 하행선’은 ‘부산길’로 바로잡으면 좋겠습니다.



  쉽게 가려서 말하는 길을 함께 익히기를 바라요. 쉬우면서 즐겁게 글을 쓰는 길을 서로 나누기를 바랍니다. 쉽고 즐거우면서 아름답게 생각을 살찌우는 길을 말글에서 나란히 찾는다면 이 땅에 참답고 상냥하게 민주·평등·평화를 더 넉넉히 북돋울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고맙습니다. 2018.7.2.달.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책읽기/말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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