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는 까닭



  일본에서 하루를 묵은 어제 볼펜 한 자루가 사라지고, 머리핀 하나가 사라집니다. 파란병에 물을 담아 햇볕일 쪼일 적에 쓰려던 스텐잔 넷도 함께 사라집니다. 이 아이들이 어디로 왜 사라지는지 알 길이 없지만 감쪽같이 사라지더니 오늘 세 아이가 어디에선가 갑자기 나타납니다. 등짐이며 길손집 곳곳이며 몽땅 뒤질 적에 안 나오더니, 틀림없이 없던 곳에서 얌전히 고개를 내밀어 혀를 내둘렀습니다. 그런데 세 아이가 나타나더니 글막대가 새삼스레 자취를 감춥니다. 낮에 스미노에공원에서 무릎셈틀을 쓰고 나서 틀림없이 천주머니에 넣었는데, 이 아이는 또 어디로 숨었을까요? 여러 살림이 숨바꼭질을 놀듯이 이리 숨었다가 짠 나타나고 저리 숨었다가 짜잔 하고 나타나는군요. 놀자는 뜻으로, 즐겁게 삶을 바라보자는 뜻으로, 그리고 더 마음을 기울여서 상냥하게 살림을 짓자는 뜻으로, 조용히 숨었다가 깜짝 놀래키듯 나타나리라 여기면서 바라보기로 합니다. 2018.7.20.쇠.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노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졸립지 않아



  새벽 네 시에 하루를 열면서 짐을 꾸립니다. 아침 일곱 시에 모두 짐을 챙겨서 길을 나섭니다. 아이들은 스스로 일찍 일어나서 저희 짐을 꾸려 줍니다. 집 안팎을 좀 치우고서 움직이는데, 순천에서 기차를 갈아타니 몸이 스르르 풀리며 눈이 감길 듯합니다. 그렇지만 오늘 이 기찻길에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스토리닷 출판사에서 오늘 글꾸러미를 마무리해서 인쇄소에 넘긴다고 했어요. 틀리거나 빠진 글씨가 있는지 마지막으로 살피는 일을 해야 합니다. 10초쯤 눈을 감고서 생각에 잠깁니다. “나는 튼튼해. 나는 내 일을 즐겁게 해. 서두르지 않되 늦추지 않아. 즐거이 일을 마치고 몸이며 마음 활짝 쉬는 길을 가자.” 혼잣말을 하고서 일손을 잡습니다. 두 시간 반에 걸쳐서 글을 다 살폈고, 고칠 곳 일곱 군데를 찾아냅니다. 종이책으로 나올 적에는 더 손볼 데가 없으리라 여기면서 무릎셈틀을 닫습니다. 졸립지 않아요. 큰아이를 무릎에 누여 재우면서 기차가 부산 사상역에 닿기를 기다립니다. 2018.7.19.나무.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노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파란 길을 꿈꾸다



  가시어머니가 고흥으로 마실을 오십니다. 가시어머니가 고흥에 오시면, 곁님하고 아이들하고 함께 새로 짓는 배움살림을 가시어머니하고도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스스로 나아가려는 길을 스스로 그려서 스스로 마음을 쏟아 짓는 하루를 이야기하려 해요. 살림돈이 없어서 걱정이라든지, 몸이 아프고 힘들어서 걱정이라든지, 병원에 가야 하지 않겠느냐는 걱정이라든지, 일자리를 어떻게 얻느냐는 걱정이라든지, 모든 걱정은 언제나 걱정을 낳으니, 걱정 아닌 꿈하고 사랑을 마음에 심어서, 언제나 꿈하고 사랑을 낳는 꿈하고 사랑에만 마음을 쓰는 길을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하늘처럼 새파란 마음이 되려고 합니다. 하늘 같은 바람을 마시는 살림으로 몸을 다스리면서 마음을 가꾸는 길을 걸으려고 해요. 가시어머니를 모시고 일본 오사카에 있는 blu room에 다녀오면서 파란 길이란, 파랑 사랑이란, 파란 숲집이란 무엇인가를 더 깊고 넓게 배울 생각입니다. 오늘 씨앗 한 톨을 새롭게 심습니다. 2018.7.15.해.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노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종이잔에 받는 초코라떼



  찻집에 들어가서 차분히 앉아 찻물을 누리려 하는데 종이잔에 준다면? 이를 거의 헤아리지 않고 살다가 오늘 종이잔을 받고서 문득 돌아봅니다. 집에서 찻물을 끓여 즐길 적에 종이잔을 쓰는 일이 없습니다. 아이도 어른도 저마다 마음에 드는 꽃잔을 씁니다. 유리잔이든 도자기잔을 써요. 고흥읍에 볼일이 있어 나왔다가 한 시간쯤 길에서 보내야 하기에 놀이터나 팔각정에 가 볼까 하다가 그동안 안 가 본 어느 찻집에 들렀는데, 종이잔에 초코라떼를 주는군요. 조용히 바라보다가 그저 즐겁게 받아들이기로 합니다. 2018.6.21.나무.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노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나무네



  나막신은 나무로 짠 신. 일본에서만 꿴 신이 아닌 한국이나 여러 나라에서도 두루 꿰던 신. 그런데 오늘날 한국에서는 거의 안 꿰는 신이요, 일본에서는 오늘날에도 제법 꿰는 신. 일본마실을 하며 곁님이 일본 나막신을 한 켤레 장만해서 발에 꿰어 보고는 이렇게 좋은 신이 있었나 하고 놀랍니다. 화학섬유 아닌 나무로, 또 천으로 두룬 신이란 얼마나 아름다운가 싶군요. 게다가 이런 신값이 그리 안 비싸네요. 오히려 화학섬유 신값이 무척 비싸요. 천연섬유로는 신을 짓지 않거나 못하는 오늘날, 우리는 어떤 신을 발에 대어 걸어다니는 삶일까요. 2018.6.9.흙.ㅅㄴㄹ


(숲노래/최종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