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었다는 핑계
두 아이를 이끌고 읍내마실을 다녀오는 길입니다. 두 아이는 저마다 짐을 하나씩 들어 줍니다. 그렇다고 해 보아야 퍽 가벼운 짐이지만, 이렇게 두 아이가 “나도 하나씩 들겠어” 하고 얘기해 주면 한결 홀가분하다고 느낍니다.
집으로 돌아가려면 읍내 버스역으로 가야 합니다. 셋이서 나란히 걷다가 언제나처럼 작은아이가 콩콩 가벼운 발놀림으로 앞서갑니다. 작은아이가 어느 건물 앞을 지나갈 무렵 문득 오른쪽에서 하얀 자동차가 불쑥 튀어나옵니다. 이러면서 작은아이를 가볍게 칩니다. “보라야, 옆을 보렴.” 하고 작은아이를 부릅니다. 작은아이는 이 소리에 오른쪽을 보더니 자동차가 멈추지 않고 뒷걸음처럼 나오는 모습을 보고는 한 걸음 물러섭니다.
하얀 자동차는 유리 문을 열지 않은 채 그냥 뒷걸음으로 빠져나오려 합니다. 한길에서도 다른 자동차를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유리 문은 아직도 안 엽니다. 다른 자동차가 빵빵거리니 그제야 멈춥니다. 나는 아이를 이끌고 운전석 쪽으로 가서 운전수를 부릅니다.
“아저씨, 문 여세요. 그냥 가면 안 됩니다.”
하얀 자동차는 문을 한동안 안 열다가 15초쯤 지나서야 유리 문을 올립니다. 하얀 자동차를 모는 이는 할아버지.
“아저씨, 자동차가 빠져나오려 할 적에는 뒤를 잘 살피셔야지요. 그냥 나오면 안 되지요.” “내가 늙어서 그래요. 늙어서 못 봤어요.” “늙었다고 못 볼 수 없어요. 늙었다고 하시지 말고, 늙으셨으면 더 잘 살피고 다니셔야지요.” “네, 네, 내가 늙어서 그래요.” “아저씨, 아저씨가 뒤로 나오면서 안 살피다가 아이를 쳤어요. 사람을 쳤다고요.” “네, 네, 내가 늙어서 그렇습니다.”
하얀 자동차를 모는 분은 ‘늙은 사람’이기 때문에 둘레를 안 살펴도 될까요? 할아버지가 자동차를 몰면 다른 자동차는 아랑곳하지 않아도 될까요? 그리고 사람을 함부로 치고 그냥 내빼도 될까요?
저는 이분한테 “늙어서 못 봤다고 하지 마시고, 늙어서 잘 안 보인다면 더 찬찬히 살펴서 더 천천히 다니셔야 합니다. 아시겠어요? 다음부터는 더 천천히 더 살피고 다니셔요.” 하는 말을 남기고 우리 길을 가기로 합니다. 자동차 뒷걸음질로 아이를 쳤으나, 이를 이 운전자한테 잘잘못을 따질 생각이 없습니다. 아이가 안 다쳤기에 안 따지려는 생각이 아닙니다. 골목에서든 건물 앞에서든 자동차를 모는 이는 사람을 더 잘 살필 노릇이고, 더욱이 아이는 더더욱 잘 살펴야지요. 자동차를 모는 이라면 이를 아주 마땅히 늘 헤아려야 한다는 대목을 제대로 이야기해 주려고 했습니다.
작은아이는 아무렇지 않습니다. 이내 다른 놀이를 떠올리면서 싱긋싱긋 걷습니다. 버스역에 닿아 아버지가 표를 “자, 표를 들어 주겠니?” 하고 내미니 더 좋다면서 군내버스를 기다립니다. 모처럼 커다란 자동차(버스)를 타면서 읍내마실을 할 수 있어서 좋았고, 모처럼 과자도 하나 장만해서 집으로 들어가니 좋은 아이입니다.
아이한테도 차근차근 이야기해 주었어요. “얘야, 자동차를 모는 사람은 다른 사람더러, 그러니까 길을 가는 사람더러 ‘비켜!’ 하고 말할 수 없고, 그래서는 안 돼.” “왜?” “자동차는 너무 빨리 달리기 때문에 자동차를 모는 사람이 걷는 사람을 안 살피면 사람들이 크게 다쳐. 그런데 자동차를 모는 사람은 잘 안 살필 때가 있어. 그러니, 보라 네가 걸을 적에 골목이나 자동차가 있는 곳에서는 더 살피면서 잘 가자.” 2017.3.23.나무.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