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역할 : ‘일본 한자말’이라는 ‘역할’이지만, 이 일본 한자말을 거르거나 다듬거나 손질하면서 알맞게 우리말을 쓰는 어른이 퍽 적어요. 학교에서나 마을에서나 마찬가지입니다. 왜 어른들은 ‘안 써야 좋은 말’이라고 이야기할 뿐 아니라 신문이나 방송이나 책에서도 이런 말은 털자고 외치면서, 막상 이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쓸까요. 어쩌면, 옳고 바르며 알맞게 쓸 우리말을 모르기 때문이 아닐까요.

[역할(役割) : 자기가 마땅히 하여야 할 맡은 바 직책이나 임무]
※ 역할 분담을 하자
→ 일을 나누어 맡자
→ 일감을 나누자
→ 할 일을 나누자


2. 존재 : 아저씨가 국민학교라는 이름이 붙던 학교를 다니던 1982∼1987년에 학교나 마을에서 ‘존재’라는 낱말을 들은 일은 거의 없다고 떠오릅니다. 어쩌면 이런 말을 들을 까닭이 없습니다. 그러나 요즈음은 초등학교에서도 이 낱말을 쓸 뿐 아니라, 어린이책이나 청소년책에도 이 낱말이 꽤 자주 나타납니다. 말사랑벗님, ‘존재’ 없이는 말을 못하는지, ‘존재’라는 한자말 때문에 정작 내가 나타내고픈 느낌이나 생각을 못 나타내는지 가만히 헤아려 보셔요.

[존재(存在) : 현실에 실제로 있음]
※ 신의 존재를 부인하다
→ 신이 있지 않다고 믿다
→ 신이 없다고 생각하다
→ 하느님은 없다고 여긴다
→ 하느님을 믿지 않는다


3. 시작 : “요이, 땅!”은 일본말이니 쓰지 말아야 한다고들 하지만, “준비, 시작!” 또한 일본 말투인 줄 깨닫지 못하는 우리들입니다. 일본사람이 한자를 일본 말소리로 담은 ‘요이’와 ‘땅(총소리를 빗대어 쓰는 말)’을 ‘준비’와 ‘시작’으로 바꾼다 해서 우리말이 되지 않아요. “이제, 간다!”라든지 “자, 가자!”처럼 말해야 올바릅니다. 생각해 보면, ‘처음’이라는 우리말이 있어도 ‘시작’이라는 일본 말투에 젖어들고 만 우리들입니다. 껍데기는 한자말이지만, 우리들이 즐겨쓰는 ‘시작’이라는 한자말은, 거의 일본사람이 일본글에 쓰던 투 그대로 따릅니다.

[시작(始作) : 어떤 일이나 행동의 처음 단계를 이루거나 그렇게 하게 함]
※ 수업은 9시에 시작한다
→ 수업은 9시에 한다
→ 수업은 9시부터이다
→ 수업은 9시이다
→ 수업은 9시에 처음 한다


4. 생활 : ‘살아감’을 뜻하는 낱말이 ‘생활’이라지만, ‘살아감’을 뜻하는 우리말은 ‘삶’입니다. 집살림과 나라살림과 마을살림이 있고, ‘내 삶’이 있으며, 이러한 삶은 ‘말삶’이나 ‘책삶’으로 이어집니다. 우리는 우리말 ‘살다-살아가다-살아숨쉬다’를 알맞춤하게 쓰는 말솜씨를 어릴 때부터 제대로 익히지 못합니다. ‘살아나다-살아내다’-살아남다‘를 곳에 따라 옳게 쓰도록 참다이 배우지 못합니다. 삶을 꾸리는 곳이기에 삶터요, 삶자리요, 삶마당입니다.

[생활(生活) : 사람이나 동물이 일정한 환경에서 활동하며 살아감 ]
※ 생활이 곤란하다
→ 살기가 힘겹다
→ 살아가기 벅차다
→ 살림이 힘들다
→ 살림살이가 버겁다
→ 삶이 고단하다
→ 삶이 힘에 부치다


5. 이별 : 만나니까 헤어집니다. ‘남만’과 ‘헤어짐’은 서로 맞선 낱말입니다. ‘이별’한다고 말해 버릇하면 ‘상봉’이나 ‘조우’나 ‘접촉’ 같은 또다른 한자말이 자꾸 들쑥날쑥 튀어나옵니다. 한자말을 즐겨쓰니 또다른 한자말을 즐겨쓰고, 우리말을 사랑하면 또다른 우리말을 사랑합니다.

[이별(離別) : 서로 갈리어 떨어짐]
※ 친구와 이별했다
→ 친구와 헤어졌다
→ 동무와 안 보기로 했다
→ 벗을 떠나 보냈다


6. 표현 : 우리는 우리 생각을 ‘나타냅’니다. 내 뜻을 ‘드러내’고, 내 마음을 ‘보여줍’니다. 내 사랑을 가만히 담아 ‘말하’기도 합니다. 내 느낌을 말할 때에는 이야기로 ‘들려주’기도 합니다. 언뜻선뜻 ‘비치’기도 하는 넋이요, 살며시 ‘내보이’는 얼이곤 합니다.

[표현(表現) : 생각이나 느낌 따위를 언어나 몸짓 따위의 형상으로 드러내어 나타냄]
※ 감사의 표현으로
→ 고맙다는 뜻으로
→ 고마운 마음으로
→ 고마운 나머지
→ 고맙기에
→ 고맙다는 뜻을 담아


7. 우려 : 누구나 국어사전을 곁에 놓고 틈틈이 펼친다면 ‘우려’처럼 알맞지 않을 뿐더러 쓸모가 없는 한자말을 함부로 쓰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우리들은 우리말을 너무 모를 뿐 아니라, 우리 스스로 우리말을 알아보려 하지 않아요. 어른들은 한결같이 우리말을 잘 모르는 바보라 할 만합니다. 어른들 때문에 말사랑벗까지 우리말에 마음을 쓰지 못하는 바보처럼 살아가고야 맙니다. 예쁘며 착한 말사랑벗들이 바보스러운 어른들을 잘 토닥여 주셔요. 고우며 씩씩한 말사랑벗님이 걱정스러운 어른들을 잘 일깨우며 이끌어 주셔요.

[우려(憂慮) : 근심하거나 걱정함]
※ 네 건강이 우려가 된다
→ 네 몸이 걱정스럽다
→ 네 몸이 근심스럽다
→ 네 몸이 걱정이다
→ 네 몸 때문에 걱정이다
→ 네 몸 생각에 걱정이 한가득이다


8. 정도 : “어느 정도 되는지 본다.” 같은 자리는 “어느 만큼 되는지 본다.”나 “얼마나 되는지 본다.”로 손질해야 알맞습니다. 이제는 아주 많은 곳에서 거의 누구나 ‘정도’ 같은 낱말을 쓰지만, 이 한자말이 우리 삶으로 스며든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어요. 지난날 한겨레가 쓰던 말이란 ‘만큼’과 ‘쯤’입니다. 이야기 흐름에 따라 ‘만큼’조차 안 쓰면서 서로서로 생각과 마음을 나누었습니다.

[정도(程度) : 그만큼가량의 분량]
※ 그 정도 일이야 뭐
→ 그런 일이야 뭐
→ 그쯤 되는 일이야 뭐
→ 그쯤이야 뭐
→ 그 따위 일이야 뭐
→ 그런 쉬운 일이야 뭐
→ 그만 한 일이야 뭐


9. 찬란 : ‘우아(優雅)하다’가 우리말인 줄 잘못 알던 적이 있습니다. ‘우아미 가구’라는 이름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아’란 ‘아름다움’을 한자로 옮긴 낱말이요, ‘미’란 ‘아름다울 美’라는 한자입니다. ‘우아미’란 ‘아름답디아름다움’이랄 수 있지만, 같은 말을 잇달아 적은 겹말이에요. “화려(華麗)하고 아름답게”를 뜻한다는 ‘찬란’ 또한 ‘아름다움’을 가리키는 한자말입니다. “회려하고 아름답게”이니 ‘여느 아름다움’과는 다르다 말할는지 모르지만, ‘화려’란 “환하게 빛나는 아름다움”이에요. 그러면 ‘아름다움’이란 무엇일까요. 우리가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찬찬히 헤아릴 줄 안다면 ‘우아’이든 ‘찬란’이든 어설피 잘못 쓰거나 얄궂게 마구 쓰는 일은 없으리라 생각해요.

[찬란(燦爛) : 빛깔이나 모양 따위가 매우 화려하고 아름다움]
※ 찬란하게 빛나는 태양
→ 아름다이 빛나는 해
→ 아리땁게 빛나는 해
→ 어여삐 빛나는 해
→ 밝고 환히 빛나는 해
→ 맑고 곱게 빛나는 해


10. 사용 : ‘사용법’이란 ‘쓰는법’입니다. ‘사용안내’란 ‘어떻게 써야 하나’를 밝히는 말이니 ‘길잡이’나 ‘알림글’이란 소리이기도 합니다. ‘사용시 주의사항’이란 ‘쓸 때 살필 대목’이에요. 말사랑벗이나 저나 돈을 ‘쓰’지 돈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자동차 사용을 제한하다”는 틀리게 쓰는 말입니다. “자동차를 타지 못하도록 막다”나 “자동차는 못 들어오도록 하다”라 고쳐써야 올발라요. “존댓말을 사용”할 우리들이 아니라 “높임말을 쓸” 우리들이며, “숙소로 사용”할 우리들이 아니요 “잠잘 곳으로 삼”거나 “잠자리로 쓸" 우리들입니다.

[사용(使用) : 일정한 목적이나 기능에 맞게 씀]
※ 우리말을 사용하다
→ 우리말을 쓰다
→ 우리말을 하다

(최종규 . 2011 -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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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우리말 바르게 손보기 ㉡ 잘못 쓰는 말 : 갖가지 한자말 (1)


 우리말 가운데 한자말이 차지하는 부피가 꽤 많다고들 이야기합니다. 어떻게 보면 이 말은 맞지만, 곰곰이 살피면 이 말은 그리 옳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한자말이 우리말 자리를 많이 차지한다’는 이야기는 국어사전에 실린 낱말 숫자로만 헤아리기 때문이에요.

 말사랑벗님이 잘 살펴야 하는데, 국어사전은 국어학자가 엮습니다. 국어학자는 국어사전에 실을 낱말을 ‘보기글(용례)’을 모아서 ‘잦기(빈도수)’를 모읍니다. 보기글은 신문이나 논문이나 문학책에서 뽑습니다. 신문이나 논문이나 문학책에 어떠한 말이 쓰이는가에 따라 국어사전 올림말은 크게 바뀌어요. 신문이나 논문이나 문학책에 손쉬우면서 살갑고 아름답다 싶은 토박이말을 잘 쓴다면 국어사전도 이와 같이 엮겠지요. 그러나 신문이나 논문이나 문학책에 어렵거나 딱딱한 낱말을 많이 쓴다면 국어사전은 이와 같은 결을 따릅니다.

 ‘사고’ 같은 한자말을 생각해 봅니다. 국어사전에 스무 가지 한자말 ‘사고’가 실립니다. 이 가운데 교통사고를 일컫는 ‘사고(事故)’하고 ‘생각’을 한자로 옮긴 ‘사고(思考)’를 뺀 열여덟 가지 한자말은 쓸 일이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생각’이라는 우리말이 있으니 굳이 ‘사고’ 같은 한자말을 써야 하지 않아요. 한편, 회사에서 내는 광고를 일컫는 ‘사고(社告)’는 푸름이가 쓰거나 들을 일이 없지만, 신문사나 회사에서 쓰니 그럭저럭 쓸 만하다 하더라도, ‘司庫-四考-四顧-死苦-私考-私稿-思顧-謝告’를 비롯한 한자말은 쓰임새도 없지만, 우리 삶하고 너무 동떨어진 한자말입니다.

 ‘고사’ 같은 한자말은 국어사전에 자그마치 스물일곱 낱말이나 실립니다. 말사랑벗은 ‘고사’라는 한자말 가운데 아는 낱말이 있을까요? 나무가 말라죽는다는 ‘고사(枯死)’나 고사성어를 가리키는 ‘고사(故事)’쯤은 알는지 모릅니다. 옛절을 굳이 ‘古寺’로 적는다든지 ‘옛일’을 애써 ‘古事’로 적어야 하지 않아요. 아마, ‘기말고사’ 같은 데에 쓰는 ‘시험’을 가리키는 ‘고사(考査)’도 들었겠지만, 한자로 어떻게 적는지는 모르겠지요. 게다가, 굳이 ‘고사’라 하기보다는 ‘기말시험’이라 말하면 그만이기도 합니다. 국어사전에는 스물일곱 가지 ‘고사’가 실리지만, 막상 우리가 쓰는 낱말이나 쓸 만한 낱말은 서너 가지가 채 안 되고, 나무가 말라죽는 모습을 가리키는 ‘고사’도 ‘말라죽다’로 고쳐써야 올바릅니다.

 ‘국사’ 같은 한자말은 어떨까요. 모두 열한 가지 한자말 ‘국사’가 국어사전에 실려요. 이 가운데 한 나라 역사를 가리키는 ‘국사(國史)’를 뺀 열 가지 낱말은 옛날 역사에서 쓰던 말, 이를테면 조선이나 고려 때 임금이나 신하가 쓰던 낱말인 한문입니다. 국어사전은 역사사전이 아니니까 이런 낱말을 국어사전에 실어서는 안 되지만, 한문을 쓰던 옛날 정치꾼들이 쓰던 낱말을 국어사전이나 역사사전에 실어야 옳으냐 그르냐도 짚어야 해요. 왜냐하면, 2007년부터 대통령을 맡은 분은 ‘비즈니스 프랜들리’ 같은 말을 쓰는 데다가 1998년부터 대통령을 맡은 분은 ‘태스크 포스’ 같은 말을 썼고 이 영어는 아직까지 널리 쓰입니다. 어쩌면 2100년이나 2200년 국어사전에서는 얼토당토않게 쓰던 오늘날 영어를 ‘역사 낱말’로 삼으면서 실을 수 있어요. 그런데, 참말 이런 오늘날 영어를 ‘역사 낱말’로 삼아야 할까요. 이런 오늘날 영어를 알맞게 다듬거나 털어야 할까요.

 부질없거나 쓸모없는 한자말을 국어사전에 너무 많이 실었기 때문에 ‘마치 한자말 없이는 우리말은 살아남을 수 없거나 쓸 수 없는 듯 잘못 알거나 생각’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쓸 만한 한자말이라면 써야 하고, 값있거나 뜻있는 한자말이라면 넉넉히 우리말로 삼아서 주고받을 노릇이지만, 쓸 만하지 않거나 값없거나 뜻없는 한자말을 함부로 국어사전에 싣는다든지 아무렇게나 아무 데나 마구 쓴다면 우리말은 살아남을 수 없어요. 1970년대에는 ‘새마을’ 운동을 하고, 1990년대에는 ‘新도시’를 만들다가, 2000년대로 접어들면서 ‘newtown’을 꾸밉니다. 우리말은 ‘새마을’이고 한자말은 ‘新도시’이며 영어는 ‘newtown’입니다. 셋은 뜻이나 쓰임이 모두 같은 낱말이에요. 한자말을 쓰고플 때에는 써야 할 테고, 영어가 좋다면 영어를 써야겠지요.

 그러면 곰곰이 생각해야 합니다. ‘파출소’를 ‘치안센터’로 바꿀 까닭이란 무엇이고, ‘동사무소’를 ‘동주민센터’로 고쳐야 할 까닭이란 무엇일까요. 우리는 왜 ‘치안지킴터’라든지 ‘동주민마당’처럼 우리말을 아끼거나 사랑하는 결을 나누지 못해야 하나요. 인천에는 ‘선화여자상업고등학교’라는 곳이 ‘비즈니스고등학교’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상업고등학교’ 이름이 낡거나 나쁘다 여겨 ‘비즈니스고등학교’로 바꾸었을 텐데, ‘비즈니스’ 같은 영어를 써야 한결 아름답거나 알맞거나 좋은 이름이 될는지요. ‘상업’이나 ‘비즈니스’란 무엇을 하는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지요. ‘장사꾼’은 나쁜 낱말이고 ‘상인(商人)’은 좋은 말이 되려나요. ‘비즈니스맨(businessman)’이라 하면 뭔가 남다른 낱말이 되는가요.

 잘못 쓰는 한자말을 살피는 까닭은 ‘한자말이니까 쓰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 대문이 아닙니다. 말 그대로 잘못 쓰기 때문에 다듬거나 손질하거나 털어야 하는 한자말입니다. 쓸 만하다면 옳게 쓰고, 쓸 만하지 않다면 안 써야 맞으며, 예부터 곱거나 바르게 잘 쓰던 우리말이 있으면 우리말을 슬기롭게 살찌우거나 살려야 훌륭합니다. 말사랑벗을 비롯한 이 나라 모든 사람들은 우리말을 싱그러이 보듬으며 알맞게 즐기고 기쁘게 사랑할 때에 아름다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최종규 . 2011 -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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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우리말 바르게 손보기 ㉠ 잘못 쓰는 말을 왜 돌아보는가


 잘 쓰는 말이 되려면 내 마음이나 뜻을 잘 나타내는 말이 되어야 합니다. 잘못 쓰는 말이라 한다면 내 마음이나 뜻을 제대로 나타내지 못한 말입니다.

 말을 하거나 글을 쓰는 나 혼자만 잘 안다 해서 잘 쓴 말이나 글이 되지 않습니다. 내 말을 듣는 사람이나 내 글을 읽는 사람이 함께 잘 알아듣도록 말을 하거나 글을 써야 잘 쓴 말이나 글입니다.

 어린 동생한테 말을 건다고 생각해 보셔요. 말사랑벗이 좋아하는 영화나 노래나 취미 이야기를 할머니한테 들려준다고 헤아려 보셔요. 말사랑벗은 좋아할는지 모르나, 말사랑벗한테서 이야기를 듣는 사람한테는 낯설거나 영 모를 이야기를 ‘어떠한 말’로 들려주는지를 곱씹어 보셔요.

 학교에서 말사랑벗을 가르치는 분들은 어떤 말투와 낱말로 교과서를 가르치는지 짚어 보셔요. 집에서 어버이가 쓰는 말은 어떠한지 되뇌어 보셔요. 동무들끼리 주고받는 말이랑, 동네에서 흔히 듣는 말이랑, 신문이나 책이나 교과서에 적힌 글이랑, 가만히 견주어 보셔요.

 모든 말과 글은, 첫째, 잘 알아들을 수 있게끔 써야 합니다. 잘 알아듣기 힘들게 썼다면 옳지 못한 말이나 글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모든 말과 글은, 둘째, 옳고 바르게 써야 합니다. 말법을 옳게 맞추고 말투를 바르게 가다듬어야 합니다.

 모든 말과 글은, 셋째, 슬기롭고 착하게 써야 합니다. 어영부영 말할 때에는 어영부영 듣고 맙니다. 어설피 말하니까 어설피 듣습니다. 모든 잘잘못은 말이나 글을 처음 꺼낸 사람한테서 비롯합니다. 슬기롭게 말을 한대서 꼭 슬기롭게 듣는다 할 수 없으나, 슬기롭게 받아들여 주기를 바라면 슬기로이 말하는 넋을 추슬러야 합니다. 착하게 말한다 하더라도 착하게 듣지 않는 사람이 많으나, 착하게 어깨동무하기를 꿈꾸면 착하게 말하는 얼을 다스려야 좋아요.

 말하기와 글쓰기 밑틀은 이 세 가지로 넉넉하다고 느낍니다. 여기에 몇 가지를 덧붙인다면, 맞춤법까지 잘 맞추고 띄어쓰기를 알맞게 살필 수 있으면 참으로 좋을 테고, 어차피 나눌 말이라면 한결 따스하면서 살가이 펼칠 때에 더욱 좋습니다. 군더더기 없도록 돌아보면 더 좋고, 너무 길거나 너무 짧지 않은 알맞춤한 길이로 말을 하거나 글을 쓰면 참으로 좋아요.

 다음으로 하나를 더 살핀다면, 내가 쓰는 말이 참말 우리말답다 할 만한지 살핀다면 아주 고맙습니다. 이 대목까지 바라기는 몹시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오늘을 살아가는 말사랑벗은 영어를 더 잘 쓰거나 한자 지식을 더 익히거나 갖가지 자격증을 더 갖추도록 내몰리거든요. 바쁘고 힘든 나머지 말사랑벗 스스로 말사랑벗이 날마다 쓰는 말글을 사랑스럽거나 아름다이 건사할 겨를이 없어요. 대학입시로도 바쁠 뿐더러, 대학입시가 아니라 이 일 저 일 아주 고단할 텐데, ‘참말 우리말다운지’를 살피라 하는 일은 무거운 굴레를 뒤집어씌우는 셈입니다.

 이리하여, 말하기와 글쓰기 밑틀은 딱 세 가지로만 듭니다. 더 기운을 낼 수 있거나 더 사랑을 쏟을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우리말 바르게 손보기”를 읽으면서 생각을 기울여 주셔요. 괜히 섣부른 지식쌓기로 “우리말 바르게 손보기”를 읽다가는 머리가 핑핑 돕니다. ‘우리말 달인’이 되자며 읽을 “우리말 바르게 손보기”가 아니에요. ‘우리말 깨끗이 지키기’를 하자는 “우리말 바르게 손보기” 또한 아닙니다. 말사랑벗 스스로 깨끗하다고 느끼는 삶을 사랑하면서 지내면, 저절로 우리말을 깨끗하게 지킵니다. 나 스스로 맑으면서 고운 삶을 돌본다면, 내 넋과 말은 시나브로 맑으면서 고운 결을 이을 수 있어요.

 “우리말 바르게 손보기”는 말꼬리잡기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얄궂게 말을 하거나 글을 쓴다’ 해서 “당신은 뭔데 말을 요로코롬 하우?” 하고 따지자는 말꼬리잡기가 아니에요. 우리말을 바르게 손보면서 내 삶을 바르게 추스르자는 “우리말 바르게 손보기”입니다. 우리말을 바르게 손보는 가운데 내 마음밭을 알차게 일구겠다는 “우리말 바르게 손보기”예요. 책을 읽을 때에 더 깊이 읽으면서 더 제대로 헤아리자는 “우리말 바르게 손보기”입니다. 내가 늘 쓰는 우리말이 얼마나 우리말다운가를 톺아보면서 내 꿈을 한껏 알뜰히 보살피고프다는 “우리말 바르게 손보기”입니다.

 이 말은 맞고 저 말은 그릇되니까 엉터리라 일컫는 “우리말 바르게 손보기” 또한 아닙니다. 이렇게만 써야 하고 저렇게는 써서는 안 된다는 “우리말 바르게 손보기”도 아니에요.

 우리말이 어느 만큼 우리말다운가를 살피면서, 우리말다움을 빛내는 길이란 어떻게 찾아서 걸어가야 즐거운가를 함께 어깨를 겯고 생각하자는 “우리말 바르게 손보기”로 삼아 읽어 주면 좋겠습니다. “이 상자에 담아.”랑 “이 박스에 담아.”를 놓고 본다면, “이 상자에 담아.”로 써야 알맞고 올바르지만, “이 박스에 담아.”라 말하는 사람을 함부로 깎아내리거나 손가락질해서는 안 됩니다. 나 스스로 즐거이 옳고 바르게 말하면서 착하고 참다이 살아가면 됩니다. 내 삶을 사랑하면서 내 꿈을 빛내는 길에서 함께할 “우리말 바르게 손보기”입니다. (4344.1.17.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1 -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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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우리말 착하게 가꾸기 ㉨ 살려쓰면 좋은 우리말 : 겨레말


 새로 태어난 아이한테 이름을 지어 줄 때, 몇 해 앞서부터는 아버지 성씨만이 아니라 어머니 성씨를 붙일 수 있도록 법이 바뀌었습니다. 첫째는 아버지 성씨를 붙일 수 있고, 둘째는 어머니 성씨를 붙일 수 있어요. 그렇지만 새로운 성씨를 만들어 쓰지는 못합니다. 아버지나 어머니 성씨 가운데 하나만을 쓰도록 법으로 못박아요. 가만히 따지면, 어머니 성씨라 하더라도 ‘어머니를 낳은 아버지 성씨’이니, 이러거나 저러거나 늘 ‘아버지 성씨’만 쓸 수 있는 셈입니다. 아버지와 어머니 성씨를 함께 쓰는 분들이 있습니다만, 밑바탕을 따지면 ‘아버지(남자) 성씨 두 가지’를 함께 쓰는 모습이에요.

 아버지한테든 어머니한테든 우리들은 이름이나 돈이나 지식이나 이름값이나 권력 따위를 물려받지 않습니다. 어버이한테서 물려받으려 한다면 따스한 사랑과 너른 믿음과 아름다운 넋과 즐거운 삶이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말사랑벗들이 돌아볼 때에는 어떠할까 모르겠는데, 제가 보기에 이 나라에서는 아름다운 넋을 물려주는 어버이는 몹시 드물고, 힘들여 버는 돈이나 집 같은 재산만 물려주면 된다고 여기지 싶습니다.

 돈이 나쁘다 할 수는 없으나, 돈만 살핀다면 나쁩니다. 돈이 있어야 먹고산다지만 돈으로만 먹고살지는 않아요. 큰 도시에서는 텃밭이든 무논이든 일굴 땅이 없으니 모조리 사다 먹어야 하지만, 우리 식구 밥상에 올릴 푸성귀라면 조그마한 꽃그릇에 심어 알뜰살뜰 길러 먹을 수 있습니다. 도시에서도 집안 한쪽에 거름통을 마련해 내 똥오줌을 거름으로 삭혀 쓸 수 있어요. 도시사람 스스로 애쓰거나 마음쓰지 않아서 그렇지, 골목동네 할매랑 할배 들은 조그마한 텃밭을 아기자기하게 일구곤 합니다. 흙을 사랑하는 넋이 바로 우리 겨레 넋이고, 손수 땀흘리는 몸가짐이 우리 겨레 몸가짐입니다.

 우리 집 첫째 딸아이 이름은 ‘사름벼리’ 넉 자입니다. 법으로는 새 성씨를 지을 수 없지만, 우리 살붙이끼리는 딸아이 성씨를 ‘사름’으로 삼고 이름을 ‘벼리’로 삼습니다. 요즈음 거의 모든 한국사람 이름이 ‘한 글자 성씨’에 ‘두 글자 이름’이니, 우리 아이는 이름만으로도 꽤나 남달라 보이고 맙니다. 의료보험증에는 네 글자까지만 찍히는 터라 ‘최 사름벼’까지만 찍히고 이름 한 글자가 잘려요. 이름을 길게 지어 붙인 사람은 아예 생각조차 않는다 할까요.

 이름을 두 글자, 때로는 한 글자로 짓는 틀은 지난날 ‘한문으로 살며 한자로 이름을 지어 붙이던 양반 삶자락’에서 비롯합니다. 농사짓는 여느 사람들은 이름을 한자로 지을 일이 없습니다. 농사짓는 여느 사람들은 한문으로 살지 않을 뿐더러, 한문을 배울 까닭이 없기도 하지만, 농사짓는 여느 사람한테 한문을 가르치지도 않았어요. 한문이란 양반 권력과 계급을 누리는 사람만 배울 수 있었고, 한자를 따져 짓는 이름 또한 양반만 붙이는 이름이었습니다. 말사랑벗이 학교에서 역사 공부를 하며 배울 텐데, 조선 나라가 막바지에 이를 때 양반 계급이 크게 흔들리거나 무너지면서 ‘돈으로 양반 신분을 사는’ 일이 흔히 생겼고, 이무렵부터 한자 성씨를 쓰거나 한자 이름을 쓰는 사람이 부쩍 늘었어요. 족보 없이 얼마든지 넉넉하거나 아름다이 살아오던 이들이 하루아침에 우지끈 뚝딱 하면서 족보를 만들었어요. 한문으로 권력을 누리던 사람들 등쌀에 너무 고달팠고 참으로 힘들었기 때문이겠지요.

 아마 고등학교부터 ‘고전문학’이라는 이름으로 먼 옛날 한겨레가 누리거나 즐겼다는 문학을 배우는 줄 압니다. 고전문학을 가만히 살피면, ‘고전문학을 일군 사람’은 모조리 양반이나 사대부 계급입니다. 농사짓거나 고기잡는 여느 사람들이 일군 문학은 고전문학으로 배우지 않아요. 왜냐하면 농사짓거나 고기잡던 여느 사람들은 ‘글을 배울 수 없’었고 ‘배운 글이 없으니 종이에 글을 쓸 수 없’었어요.

 농사짓거나 고기잡거나, 여기에 장사하던 사람들은 입으로 문학을 했습니다. ‘입 문학’이라 할 텐데, 한자로 붙이는 이름으로 ‘구비문학’입니다. 달리 보자면, ‘입’으로는 ‘이야기’를 나누니까 ‘이야기문학’이라 할 수 있어요. 일을 한다든지 쉬엄쉬엄 쉰다든지 아이들이 마을에서 어울려 논다든지 하면서 입으로 흥얼흥얼 노래를 부릅니다. 하루 일을 마치고 잠자리에 들 무렵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당신 딸아들인 어른하고 당신 딸아들이 낳아 기르는 아이들을 둘레에 앉히든 함께 짚신을 삼든 집일을 마무리짓든 하면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이른바 ‘옛이야기’나 ‘옛날이야기’입니다. 심청전이나 흥부전 같은 판소리 이름은 들어 보았을 텐데, 이들 판소리란 여느 농사짓고 고기잡으며 장사하던 사람들이 입에서 입으로 물려주면서 나누던 옛이야기를 ‘판소리를 하던 사람들이 그러모으거나 갈무리한’ 문학입니다.

 ‘한문이라는 글을 배우지 못했고 배우지 못하도록 가로막혔던’ 여느 사람들이 펼친 문학은 책으로 적바림되지 않았습니다. 여느 사람들이 즐기는 노래 또한 책에 적바림되지 않았어요. 일제강점기에 일본 인류학자나 문화학자가 비로소 책으로 받아적다가 뒤늦게 한국 인류학자나 문화학자에다가 국어학자가 책으로 받아적습니다. 이제는 골골샅샅 뒤져 보아도 입에서 입으로 문학과 문화를 물려주던 어르신을 만날 수 없습니다. 이름을 남기지 않았고 이름을 남길 까닭 없이 살던 한겨레 놀이삶과 일삶이란 송두리째 사라졌어요. 이러면서 이러한 자리에 텔레비전 연속극이 스며들고, 저나 말사랑벗 누구나 쓰는 ‘한자 성씨’하고 ‘한자 이름’이 남습니다.

 ‘우리말 착하게 가꾸기’라는 이름을 걸고 ‘살려쓰면 좋을 우리말’을 이야기해 왔는데, 착하게 가꿀 우리말이란 ‘글을 배울 수 없으나 글이란 없어도 즐겁게 살아오던 여느 농사짓고 고기잡으며 장사하던 사람들’이 즐겁게 나누던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토박이말이란 농사꾼 말이랑 고기잡이 말이랑 장사꾼 말이에요. 한문을 배워 이름을 떨친 양반이나 사대부나 임금님이나 권력자들 말이 아닙니다. 이들 양반과 권력자들 말이란 한문이고 한자말입니다. 우리 겨레는 신분과 계급이 또렷하게 갈린 채 오래도록 살았는데, 신분과 계급이 있다는 사람은 5%가 채 안 되었고, 신분과 계급이 없다는 사람이 95%가 넘었어요. 글 없고 신분 없으며 계급 없으나, 흙을 사랑하고 논밭을 아끼며 바다와 냇물과 멧구비를 돌본 여느 사람들이 주고받은 말마디가 곧 겨레말이라고 느껴요.

 겨레말은 ‘돕다’나 ‘거들다’입니다. ‘협동(協同)’이나 ‘협조(協助)’는 겨레말이 될 수 없다고 여깁니다. ‘상부상조(相扶相助)’ 또한 겨레말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해요. 겨레말은 ‘두레’나 ‘울력’입니다. ‘서로 돕기’와 ‘어깨동무’가 겨레말입니다.

 겨레말은 ‘말’입니다. ‘언어(言語)’는 도무지 겨레말이 될 수 없습니다. 겨레말은 ‘쓰다’입니다. ‘사용(使用)’이나 ‘이용(利用)’은 참말 겨레말이 될 수 없구나 싶습니다. 겨레말은 ‘물고기’이지 ‘생선(生鮮)’이 아닙니다. 겨레말은 ‘해오라기’입니다. “하얀 새”를 일컫는 ‘해오라기’ 옛말은 ‘하야로비’인데, 이를 한자말로 담아 ‘백조(百鳥)’라 해서는 겨레말이 될 수 없습니다. 겨레말은 ‘밥’이지 ‘식사(食事)’가 아니에요. “진지 자셔요”가 겨레말입니다. “살펴 가셔요”가 겨레말이요 “잘 계셔요”가 겨레말입니다. ‘안녕(安寧)’이나 ‘바이바이(byebye)’를 사람들이 아주 흔히 자주 쓴달지라도 겨레말이 될 수 없어요. 말버릇으로 굳었으면 말버릇이지 겨레말이 아닙니다. 다들 쓰는 말이면 다들 쓰는 말일 뿐 겨레말은 아닙니다. 편가르기나 금긋기가 아닙니다. 서로를 옳게 살피고 서로서로 쓰는 말을 제대로 깨달으면서 서로 다른 삶임을 곱게 받아들여 좋은 목숨붙이로 함께 살아야 할 뿐입니다. 겨레말은 겨레말대로 옳게 새기고, 바깥말은 바깥말대로 제대로 알며, 우리말은 우리말대로 슬기롭게 가다듬을 노릇입니다. 영어는 영어대로 참답게 살피어 쓰고, 일본말이나 중국말은 일본말 결과 중국말 무늬를 헤아리면서 알맞게 쓸 노릇이에요. 왜냐하면 우리는 한국땅에서 한국사람으로 살아가며 한국말로 한국넋을 나누는 겨레이니까요.


1. 눈물 : “눈에서 나오니 눈물인가 누운물(눈:물)인가”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제 말사랑벗은 긴소리와 짧은소리를 따로 안 배울 텐데, 제가 중·고등학교를 다닐 무렵 학교에서는 막 ‘긴소리랑 짧은소리 안 가르치기’를 했습니다. 입으로 읊는 말과 들짐승 말은 소리값이 달라요. 사람 몸에 붙은 눈이랑 하늘에서 내리는 눈 또한 소리값이 다르고요. 아마 저를 낳은 어버이가 한창 젊은 나이일 1960년대 무렵부터가 아닌가 싶은데, 해방 뒤부터 이무렵까지 ‘우리말에 있던 높낮이’가 사그라들었습니다. 제 또래가 국민학교를 다니고(1980년대) 중·고등학교를 마칠(1990년대) 무렵에는 길고 짧은 소리값이 사그라들고요. 우리말에는 소리와 모양이 같은 낱말이 제법 있습니다만, 이 낱말은 모두 높낮이와 소리값으로 나누었어요. 영어나 서양말을 배울 때에는 이들 높낮이와 소리값을 꼼꼼히 가르지요? ‘억양’이나 ‘악센트’나 ‘장단음’이라고들 하면서. 아주 마땅히 우리말에도 이들 높낮이와 소리값이 있습니다만 이 말결은 아주 사라지고 된소리만 남습니다. 국어학자나 국어교사가 오늘 우리 겨레말에서 짚거나 살피는 대목이란 “‘자장면’이 옳으냐 ‘짜장면’이 옳으냐”라든지 “‘장마비’가 맞느냐 ‘장맛비’가 맞느냐”에 그칩니다. 눈물나는 말삶이요, 눈물겨운 겨레말이며, 눈물로 얼룩진 사람들입니다. 


2. 질그릇 : 진흙으로 구운 그릇이 질그릇입니다. 나날이 그릇으로 구울 진흙은 줄어들고, 진흙으로 애써 굽기보다 석유에서 뽑아낸 플라스틱으로 값싸게 찍어내는 플라스틱 그릇이 넘칠 뿐입니다. 깨지면 흙으로 돌아가고, 오래오래 살뜰히 건사하며 쓰던 질그릇입니다. 가볍게 쓰다 버리고, 버리면 쓰레기가 되는 플라스틱입니다. 플라스틱과 석유 문명은 삶뿐 아니라 말까지 플라스틱 냄새가 나게 바꿉니다. 


3. 고운손 : 이제는 제법 많다 싶을 만큼 온갖 문방구가 나옵니다. 온갖 회사에서 온갖 이름을 달고 공책이나 연필이나 지우개 들을 만들어요. 예전에는 ‘바른손’하고 ‘모닝글로리’ 두 회사가 첫째와 둘째를 겨루곤 했습니다. 오른손을 일컫는 다른 이름이 ‘바른손’이기도 하지만, 참다우거나 아름다운 결이 바른손이기도 합니다. ‘모닝글로리’란 ‘나팔꽃’을 가리키는 영어 이름입니다. 영어를 쓰는 사람들한테는 ‘모닝글로리’가 아주 어여쁜 이름이겠지요. 영어를 쓰는 나라에서는 외려 ‘나팔꽃’이라는 한국 꽃이름을 예쁘게 여겨 공책 이름으로 쓸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아직까지 한겨레 회사이름이든 공책이름이든 무슨 이름으로도 찔레꽃이니 진달래꽃이니 감자꽃이니 원추리꽃이니 봉숭아꽃이니 나리꽃이니를 붙이는 모습을 보기 어렵습니다. 바른손이 있기에 고운손도 있고 예쁜손이나 멋진손이나 착한손이나 살진손이나 믿는손이나 좋은손이나 빠른손이나 따순손이나 하얀손이나 푸른손이나 기쁜손도 있을 법하나, 싱그러우면서 살뜰히 가지뻗기를 하지는 못합니다. 


4. 흙 : 흙은 흙빛입니다. 나무는 나무빛입니다. 잎은 잎빛입니다. 가을에는 가을빛이고 겨울에는 겨울빛이에요. 사람은 사람빛이 나고 고양이는 고양이빛을 뿜습니다. 시골은 시골빛일 테고 도시는 도시빛이겠지요. ‘창백(蒼白)’한 얼굴이 아닌 ‘파리한’ 얼굴을 놓고 ‘사색(死色)’이라고도 하지만, 우리말은 ‘흙빛’입니다. 땡볕을 받으며 구슬땀 흘리는 사람은 얼굴이며 살결이며 구리빛이 됩니다. 구리빛이란 흙빛이기도 합니다. 흙에서 흙처럼 일하며 흙빛이 되는 사람들입니다. 한국사람이든 미국사람이든 필리핀사람이든, 흙에서 일하는 사람은 한결같이 흙빛 살결입니다. 


5. 두레 : 이제 이 나라에도 곳곳에 ‘생활협동조합’이나 ‘협동조합’이 차츰 태어납니다. 나라에서 펼쳐 주는 복지나 문화를 바라는 손길이 아니라, 조그마한 내 손길을 하나둘 그러모아 서로 돕는 협동조합(協同組合)이에요. 협동조합은 이탈리아가 아주 훌륭하다고 합니다. 한국 생협은 일본 생협에서 많이 배웠습니다. 우리로서는 끔찍하게 아픈 역사가 있는 터라 우리 스스로 예부터 익히 이어오던 삶을 송두리째 빼앗겼으니 일본한테서도 배우고 이탈리아한테서도 배워야 하겠지요. 밑뿌리를 내 삶에서 찾으려 한다면, 우리 땅 두레와 울력을 깨달을 테고, 우리 땅 우리 옛사람 슬기와 얼을 받아들인다면, 앞으로는 ‘두레모임’이나 ‘울력바탕’도 태어나리라 생각합니다. “두레를 하는 모임이나 모둠”을 한자말로 옮겨적을 때에 ‘협동조합’이 됩니다.

(최종규  . 2011 -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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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우리말 착하게 가꾸기 ㉧ 살려쓰면 좋은 우리말 : 넋말


 저는 학교를 열두 해 다니는 동안, 학교에서 ‘넋’이나 ‘얼’이라는 낱말을 거의 못 들었습니다. 제가 학교를 다니던 때에는 어른들이 한문이나 한자말을 즐겨쓰곤 해서 ‘혼(魂)’이나 ‘백(魄)’이나 ‘영혼(靈魂)’이나 ‘기백(氣魄)’이라는 낱말만 으레 들었습니다. ‘마음’이라는 낱말보다는 ‘정신(精神)’이라는 낱말을 자주 들었습니다. 요사이에도 한문이나 한자말 즐겨쓰는 교장·교감 선생님이 많겠지요. 그러나, 이제는 이런저런 한문이나 한자말보다는 ‘마인드(mind)’나 ‘스피릿(spirit)’ 같은 영어를 즐겨쓰는 분이 훨씬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한국사람입니다. 한국에서 살아가니 한국사람이에요. 그러나 ‘한국사람’처럼 적지 못합니다. 국어사전 띄어쓰기로는 토박이말 ‘-사람’은 뒷가지 구실을 못한다고 되었기에, ‘한국 사람’이라 적고, 한자말 ‘-人’을 붙여야 비로소 ‘한국인’이라 할 수 있답니다. 더구나, ‘불란서인’은 붙이고 ‘프랑스 인’은 띄도록 하는 띄어쓰기예요.

 말사랑벗도 생각할 말이고, 저도 생각할 말이며, 우리 집 아이랑 옆지기도 생각할 말입니다. 우리는 다 함께 살아가며 서로서로 즐거우면서 흐뭇할 나날을 생각하여 말을 합니다. 운전면허증이나 자격증을 따듯이 ‘한글자격증’을 따거나 ‘한글능력시험’을 볼 수 없어요. ‘한글자격증’이나 ‘우리말자격증’을 따든, 또는 ‘한글능력시험’이나 ‘우리말능력시험’을 치러서 점수가 높아야 한글이나 우리말을 잘 쓴다 할 만하려나요. 방송에 나와 ‘우리말 달인’이 되어야 우리말을 슬기로우면서 아름다이 쓸 만하려나요.

 몇몇 사람만 빼어나게 잘할 수 있거나, 몇몇 사람만 빼어나게 잘하면 되는 말이 아닙니다. 몇몇 사람만 손꼽히도록 잘하는 말이란 우리가 다 함께 쓸 만한 말이 못 됩니다. 모든 사람이 즐거이 나눌 수 있어야 비로소 말입니다. 누구라도 내 마음과 꿈과 생각을 알뜰살뜰 담을 때라야 바야흐로 말이에요. 글이란, 이러한 말을 담는 그릇입니다.

 몇 해 앞서인가, 어느 진보 신문을 펼쳐 ‘대입시험 교육’을 다루는 자리를 넘기다가 ‘초등학생 때부터 영어로 일기를 써야 일기로 생각하여 말하는 솜씨를 키울 수 있다’는 글을 읽었습니다. 참으로 마땅한 소리이지만, 이 마땅한 소리를 적바림하는 신문이 참으로 무섭다고 느꼈어요. 영어로 일기를 쓰자니 저절로 영어로 생각할 테며, 마음속으로나 입으로나 영어를 읊을밖에 없습니다. 책을 읽는 사람은 누구나 내가 손에 쥔 책에 적힌 글을 마음속으로나 입으로나 읽어요. 이 책이 한글로 적혔으면 한글로 읽는데, 한글로 적혔으나 창작이나 번역 글투가 엉성궂다면 엉성궂은 글을 읽으며 이 글월, 그러니까 엉성궂은 글월에 내 머리나 입이나 눈이 익숙해집니다.

 마음속으로 엉성궂은 글월을 자주 읽었다면, 나도 모르게 엉성궂은 글월이 튀어나옵니다. 마음속으로 영어를 생각해서 일기를 꾸준히 쓴다면, 언제 어디에서라도 자연스러운 영어가 튀어나옵니다.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책을 생각하며 책일기를 쓰면 책을 깊고 넓게 헤아리는 마음밭을 기릅니다. 노래를 헤아리며 노래일기를 쓰면 노래를 깊고 넓게 살피는 마음자리를 가꾸어요. 아이를 키우는 어버이가 아이키움일기를 쓰면 아이 삶을 한결 깊고 넓게 돌아보는 마음바탕을 일굽니다. 곧, 말사랑벗님이나 저나, 참답고 착하며 고운 말을 마음속으로 되뇌며 살아간다면 언제나 참답고 착하며 고운 말이 스며들어 샘솟습니다. 착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착하다 싶은 말이 튀어나오지 않아요. 곱게 헤아리지 않는데 곱다 싶은 말이 튀어나올 수 없습니다.

 우리들은 말다운 말을 해야 합니다. 어른인 저부터 푸름이인 말사랑벗님까지 말다운 말을 해야 해요. 말다운 말을 하자면 생각다운 생각을 하면서 삶다운 삶을 꾸려야 합니다. 삶은 엉망이면서 생각은 똑바르지 못해요. 삶이 어수선한데 생각이 가지런할 수 없어요. 삶을 알차게 돌보면서 생각을 알차게 돌보고, 생각을 알차게 돌보기에 말 또한 알차게 돌봅니다. 삶을 사랑스레 가꿀 때에 넋이나 얼을 사랑스레 가꾸고, 넋이나 얼을 사랑스레 가꾸는 가운데 말과 글 또한 사랑스레 나눕니다.

 어린이를 가리켜 꿈나무라 합니다. 말사랑벗인 푸름이를 바라보는 저는 말사랑벗을 생각나무라 가리킵니다. 꿈나무가 커서 생각나무가 된다면, 생각나무가 커서 어떠한 나무가 되려나요. 말사랑벗은 앞으로 어떠한 어른나무가 되고 싶은가요. 어린나무는 푸른나무를 거쳐 어른나무가 될 텐데, 차츰 어른나무로 자라나서 숲을 이룰 말사랑벗은 둘레에 어떤 보금자리와 터전과 마을을 일구고 싶나요.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아끼며 무엇이랑 어깨동무하면서 살아가고 싶을까요.


1. 생각나무 : 생각은 나무와 같습니다. 삶 또한 나무와 같아요. 말도 나무와 같습니다. 책이든 노래이든 영화이든 꿈이든 공부이든 밥이든 글이든 이야기이든 나무하고 같아요. 삶나무, 말나무, 책나무, 노래나무, 영화나무, 꿈나무, 공부나무, 밥나무, 글나무, 이야기나무입니다. 


2. 마음닦이 : 마음을 닦아 마음닦이입니다. 마음을 돌봐 마음돌봄입니다. 마음을 가꿔 마음가꿈입니다. 마음을 빛내기에 마음빛냄입니다. 내 삶과 내 말과 내 마음을 나란히 살린다면 마음살림입니다. 


3. 마음밭 : 마음밭에는 콩씨를 심을 수 있고 팥씨를 심을 수 있어요. 볍씨를 심든 보리씨를 심든 할 수 있습니다. 사랑씨를 심는다든지 믿음씨를 심을 수 있습니다. 책씨나 노래씨나 춤씨나 다 좋아요. 아름다이 여길 만하며, 온삶을 바칠 만한 씨앗 하나 보듬어 주셔요. 


4. 겨레얼 : ‘민족정신(民族精神)’이 아닙니다. 겨레얼이에요. 우리는 한겨레입니다. 한겨레는 ‘한겨레얼’입니다. 어느 때에는 한겨레넋이고 어느 때에는 한겨레삶이며 어느 자리에서는 한겨레꿈입니다. 


5. 속셈 : 속으로 셈을 하기에 속셈입니다. 셈을 하는 속이라서 셈속입니다. 꿈 같은 셈이라 꿈셈이고, 빛나는 셈이라서 빛셈입니다. 말을 셈하니 말셈입니다. 삶을 셈할 때에는 삶셈이고, 일을 셈하니 일셈이군요. 놀이하는 놀이셈, 노래하는 노래셈, 사랑하는 사랑셈, 아름다운 아름셈, 꽃다운 꽃셈입니다. 


6. 열린가슴 : ‘오픈 마인드(open mind)’가 아니어도 좋아요. 즐거울 때에는 ‘열린가슴’이고, 성날 때에는 ‘열린뚜껑’입니다. 


7. 겉치레 : 말치레를 하거나 글치레를 하거나 옷치레를 하는 사람이 매우 많습니다. 오늘 우리들 살아가는 터전은 거의 돈치레이거나 아파트치레이거나 자가용치레입니다. 몸치레가 나쁜 일이 아니고 삶치레는 알맞게 할 만합니다. 그렇지만 사랑치레나 믿음치레처럼 따사로우며 넉넉히 얼싸안는 치레가 아닌 겉치레가 너무 판칩니다. 속치레를 하고 마음치레를 하면서 넋치레와 얼치레를 하는 말사랑벗 푸른치레가 그립습니다. (4344.1.12.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1 -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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