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나누는 기쁨 ㉠ 글과 그림과 사진
 ― 한 사람으로 서며 이웃을 사랑하다



 강운구 님 사진이야기 하나 새로 나왔습니다. 진작부터 이런 책이 나와야 했지만, 아직 한국 사진밭은 그리 깊지 못한 탓에 이제서야 한 권 나옵니다. 강운구 님이든 주명덕 님이든 윤주영 님이든, 나라안에서 손꼽을 만한 사진밭 어르신들은 당신이 온삶을 들여 일구어 온 사진을 놓고 ‘사진이란 무엇인가’하고 ‘내가 찍은 사진이란 무엇인가’에다가 ‘내가 보거나 읽는 사진이란 무엇인가’를 알뜰살뜰 풀어 놓아 주실 때에 아름답습니다. 젊은 사람이나 아직 어리숙하다 할 풋내기나 새내기 사진쟁이는 사진 한길 오래도록 걸어간 어르신들 땀방울을 고맙게 받아먹으면서 한결 씩씩하거나 튼튼히 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을 가르쳐야 한다며 어른이 아이 앞에서 주절주절 늘어놓는 말은 따분합니다. 이른바 훈계는 아이한테 도움이 되지 않아요. 그러나 아이들은 옛이야기를 좋아합니다. 그냥 이야기를 좋아해요. 어른들이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가 하는 이야기, 어른들도 아이였을 적에 어떻게 지냈는가 하는 이야기, 어른들은 무슨 놀이를 즐겼나 하는 이야기, 어른들이 좋아하는 삶이란 무엇이라는 이야기 들을 아이들한테 ‘훈계나 교훈이라는 허울’이 아니라 ‘사랑스러운 이야기’라는 따스함으로 조곤조곤 오순도순 아기자기 소근소근 도란도란 들려줄 때에 아름다우면서 도움이 됩니다. 《강운구 사진론》은 이와 같은 이야기책 가운데 하나로 자리매기지 않으랴 생각합니다. 다만, 책이름이 너무 딱딱한데요, “강운구가 즐긴 사진”이라든지 “사진을 찍는 즐거움”이라든지 “사진과 살아온 기쁨”처럼 수수하게 붙이는 이름으로 우리 앞에 선물을 베푼다면 더 좋았으리라 싶어요. 왜냐하면 사진을 하는 분들한테 강운구 님 이름은 드높기도 하지만, 사진을 하는 분들 가운데 강운구 님 이름 석 자 모르는 사람 또한 많거든요.

 강운구 님 사진을 알거나 강운구 님 이름을 안다 해서 강운구 님이 내놓은 작품을 더 잘 헤아리거나 읽거나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사진을 하는 마음이 아름다울 때에 강운구 님 사진작품도 알뜰히 헤아리거나 읽거나 받아들여요. 이름난 분들 작품이라서 더 좋아할 수 없습니다. 이름없는 이들 작품이라서 하찮게 여길 수 없어요. 우리는 오로지 사진으로만 바라보고 사진으로만 읽습니다. 서로서로 계급이나 신분으로 나누지 않고, 오직 사람으로 껴안거나 어깨동무하며, 그예 사람으로 사랑하거나 믿습니다. 내 삶을 꾸리지, 겉치레를 하지 않아요.

 글을 쓰는 사람은 글을 읽거나 씁니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그림을 그리거나 읽습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은 사진을 찍거나 읽습니다.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사진을 찍을 때에, 황순원이나 박수근이나 임응식을 안다 해서 글을 더 잘 쓰거나 그림을 더 잘 그리거나 사진을 더 잘 찍거나 하지 않습니다. 이분들을 모른다고 글을 더 잘 쓰거나 그림을 더 잘 그리거나 사진을 더 잘 찍지도 않습니다. 대학교를 마쳤건 유학을 다녀왔건 아랑곳할 일이 아닙니다. 내 삶을 어떻게 다스리면서 내 길을 어찌 걷는 가운데 내 벗과 살붙이랑 어떠한 결로 어우러지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벨라스케스를 아는 그림쟁이가 그림을 훌륭하게 그리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벨라스케스를 모르는 그림쟁이는 벨라스케스가 베푸는 선물을 받아먹지 못합니다. 벨라스케스가 베푸는 선물을 받아먹지 못할지라도 그림은 알뜰히 그릴 만합니다. 아흔 가까운 나이에도 수채그림을 즐기는 박정희 할머님을 모른대서 그림을 못 그릴 까닭 없습니다. 그러나 아흔을 앞둔 그림쟁이 할머님을 가까이에서 모시거나 이분한테서 그림을 배우고자 말미를 마련하는 사람은 그림을 그리면서 또다른 선물을 받아먹습니다.

 벨라스케스는 내 어머니하고 같다고 여깁니다. 아흔을 앞둔 그림 할머님은 내 아버지하고 같다고 생각합니다. 벨라스케스를 헤아리듯 내 어머니를 헤아리고, 그림 할머님을 톺아보듯 내 아버지를 톺아봅니다. 꼭 이름난 글쟁이·그림쟁이·사진쟁이를 알아야 하지 않아요. 내 둘레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거나 아낄 사람을 알아보면서 껴안을 줄 알면 넉넉해요.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내 글에 담을 사람이나 삶을 꾸밈없이 껴안으면 되고,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라면 내 그림에 싣는 사람이나 삶을 너그러이 감싸안으면 되며, 사진을 찍는 사람이라면 내 사진에 넣을 사람이나 삶을 아리땁게 보듬으면 됩니다.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쿠델카를 읽습니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으로서 조반니노 과레스키를 읽습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으로서 데즈카 오사무를 읽습니다. 왜냐하면 모두 다 아름다운 넋으로 아름다운 꿈을 아름다운 삶으로 일구거든요. 내 이웃을 알려고 가까이하거나 사귀듯, 유진 스미스이든 구와바라 시세이이든 가까이하거나 사귑니다. 내 살붙이를 헤아리거나 아끼듯, 전민조이든 이해문이든 헤아리거나 아낍니다. 내 어버이를 사랑하거나 믿듯, 기무라 이헤이이든 토몬 켄이든 사랑하거나 믿습니다.

 글을 좋아하거나 사랑하기에 그림과 사진을 아울러 좋아하거나 사랑합니다. 그림을 좋아하거나 사랑하기에 글과 사진을 함께 좋아하거나 사랑합니다. 사진을 좋아하거나 사랑하기에 글과 그림을 좋아하거나 사랑합니다.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그림을 그리는 사람으로서, 사진을 찍는 사람으로서, 내 한길을 좋아하거나 사랑하는 삶을 예쁘게 건사하고픕니다. 글만 쓸 수 없고 그림만 그릴 수 없으며 사진만 찍을 수 없습니다. 글만 읽거나 그림만 읽거나 사진만 읽을 수 없습니다. 빨래도 하고 밥도 하며 설거지도 합니다. 아이도 돌보고 아이랑 놀며 아이를 씻깁니다. 옆지기하고 사랑하며 옆지기 아픈 곳을 주무르는 가운데 옆지기하고 이야기를 나눕니다. 집살림을 꾸리고 이웃살림을 돌아보면서 서로 도울 만한 일은 돕고, 도움받을 일은 도움받습니다. 나 스스로 예쁜 한 사람으로서 내 삶터에 씩씩하게 두 다리를 버티고 섭니다. 다만, 나는 사진쟁이인 까닭에, 내 이웃하고는 꼭 한 가지, 내 손에 언제나 사진기를 쥐는 대목 하나만 다릅니다. (4343.12.22.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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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책 읽는 즐거움 ㉧ 사진책 도서관 열기
 ― 내 고향마을에 작은 책쉼터 하나



 저는 2007년 4월에 사진책 도서관을 열었습니다. 2006년에 도서관법이 바뀌는 바람에 개인이 도서관을 열 때에는 법에 따라서 ‘도서관’이라는 이름을 쓸 수 없지만, 저로서는 나쁜 법은 지키고 싶지 않아서, 제가 그러모아 사랑해 온 책으로 동네에 조그맣게 도서관을 열었을 때에, 일부러 법을 어기며 ‘도서관’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도서관이란 나라나 지자체나 학교에서도 열 수 있으나 개인도 얼마든지 열 수 있어요. 정부나 시나 군이나 구나 동에서 도움돈을 받든 안 받든, 얼마든지 스스로 좋아하면서 열 만합니다.

 어떤 분들은 찻집을 열면서 찻집 한켠에 책꽂이를 마련해 놓습니다. 차 한 잔 마시며 책 한 권 즐기도록 하는 셈인데, 이렇게 조그맣게 마련한 ‘책쉼터’ 자리 또한 도서관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진책이 열 권이든 백 권이든 얼마든지 ‘사진책 도서관’을 꾸렸다고 여깁니다. 몇 천 권이나 몇 만 권에 이르는 책을 갖추었대서 도서관이 아닙니다. 수십만 권이나 수백만 권을 갖출 자리가 있는 가운데, 꽤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앉아서 책을 즐기도록 책걸상 알뜰히 갖추어야 도서관이 아니에요.

 책을 나눌 수 있고, 책을 사랑할 수 있으며, 책을 아낄 수 있을 때에 도서관입니다. 도서관은 바로 이 세 가지를 바탕으로 책을 건사합니다. 여러 사람이 책을 나누도록 자리를 마련하고, 여러 사람이 골고루 책을 사랑하도록 소담스러운 책을 손으로 만질 수 있게끔 하며, 여러 사람이 책을 아끼는 마음을 북돋우도록 이야기를 건넵니다.

 지난 2007년부터 꾸리는 제 사진책 도서관에 찾아오는 분들 가운데 4/5가 넘는 사람들은 으레 “이 책들 파나요?” 하고 묻습니다. 이분들은 제 도서관에 찾아오면서 이곳이 ‘도서관’인 줄 뻔히 알면서도 묻고, 모르면서도 묻습니다.

 도서관은 책을 팔지 않습니다. 도서관은 소담스러운 책을 건사해 놓으며 조용히 책에 빠져들도록 문을 열어 놓는 자리입니다.

 이른바 북카페라는 이름을 붙이는 작은 찻집에서도 책은 좀처럼 팔지 않습니다. 때때로 파는 책을 놓기도 하지만, 더 많은 사람들이 두고두고 즐길 만한 책은 팔 까닭이 없고, 팔아서는 안 됩니다. 책을 사 갈 수 있는 사람은 혼자서 ‘좋은 책 건졌다!’는 기쁨이 북받쳐오르겠으나, 한 사람은 기쁨에 북받쳐오를 테지만, 다른 사람들은 이 좋은 책을 구경조차 하지 못합니다.

 저 스스로 저부터 조그맣게 사진책 도서관을 열 때에 꿈을 꾸었습니다. 대단히 많은 돈을 들여 아주 멋들어진 건물을 새로 짓는 도서관은 굳이 없어도 된다고 꿈을 꾸었습니다. 내 살림집 방 하나를 도서관으로 삼든, 내 가게 벽 하나를 책꽂이로 꾸미든, 내가 살아가는 터전에서 조촐히 가꾸는 도서관이면 넉넉하다고 꿈을 꾸었습니다.

 굳이 서울이어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서울이어도 좋고 서울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내 고향마을에서 즐겁게 살림을 꾸리는 가운데 ‘한 주 가운데 하루만 겨우 문을 열어도 괜찮’으니까, 길손이든 동네사람이든 좋은 책을 좋은 넋으로 즐기도록 마을쉼터를 예쁘게 열어 놓는다면 기쁘리라 생각하고 꿈을 꿉니다. 더 많은 책이 있어도 나쁘지 않으나, 더 깊으며 고운 사랑으로 책을 돌볼 수 있으면 한결 좋습니다.

 골목마실을 하다가 다리쉼을 하며 책 하나 들여다보면 넉넉합니다. 마을이웃하고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다가 책 하나 살며시 들추면 포근합니다. 동무랑 만나기로 하는 자리로 삼아, 동무를 기다리면서 책 하나 가만히 넘기면 알뜰합니다.

 책은 삶이고, 사진 또한 삶이며, 사람은 고스란히 삶입니다. 사진책 도서관은 책과 사진과 사람이 어여삐 얼크러지는 쉼터이자 만남터입니다. (4343.12.20.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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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책 읽는 즐거움 ㉦ 사진책 선물하기
 ― 좋은 벗님이기에 좋은 사진책 하나를



 헌책방에서 사진책 한 권을 25만 원을 치르며 산다면 깜짝 놀랄 사람이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25만 원이든 15만 원이든 5만 원이든, 사진책다우면서 사진하고 책이 아름다울 때에는 주머니에서 돈이 나가는 느낌을 쉬 잊습니다. 사진하고 책이 어우러진 이 사진책 하나를 장만하는 데에 든 돈은 언제든지 다시 벌 수 있다고 느끼며 기꺼이 장만합니다. 두 번 다시 마주하기 힘들다 싶은 사진책 한 권을 헌책방에서 25만 원을 치러 장만하는 일은 하나도 놀랍다거나 대단하다고 할 만하지 않습니다.

 고작 2500원을 주고 장만하는 사진책 하나라지만, 앞으로 헌책방에서고 도서관에서고 찾아볼 수 없는 책이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어느 책이든 두 번 다시 마주하기 힘들지 않나 싶습니다. 값이 좀 싸다 싶은 책이라서 자주 만난다거나, 값이 좀 비싸다 싶은 책이라서 가끔 만나지 않아요. 저마다 사람들이 얼마나 잘 알아볼 수 있느냐에 따라 자주 보느냐 가끔 보느냐가 갈립니다. 무엇보다 나 스스로 사진이랑 책이랑 어느 만큼 아끼거나 사랑하느냐에 따라 내 눈길과 마음길로 찾아드는 사진책이 달라집니다.

 돈이 아주 많다고 모든 ‘좋다는 사진책’을 다 장만할 수는 없습니다. 돈이 얼마 없다고 웬만큼 ‘괜찮다는 사진책’ 하나 장만하기 벅찰 수는 없습니다. 돈은 있으나 마음이 없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요. 돈은 없으되 마음이 있는 사람 또한 얼마나 많나요.

 돈이 있어 더 값나가는 장비를 갖춘 사람이 더 값나가는 사진을 찍지 못합니다. 돈이 없어 더 값싼 장비를 쥔 사람이 더 값없는 사진을 찍지 않습니다.

 사진은 삶이요, 사진찍기란 삶찍기이며, 사진읽기란 삶읽기입니다. 내 삶을 사랑하는 만큼 사진을 즐기고, 내 삶을 아끼는 대로 사진을 찍으며, 내 삶을 어루만지는 결에 따라 사진을 읽습니다. 나 스스로 내 삶을 사랑하는 만큼 사진책을 마주합니다. 나 스스로 내 삶을 아끼는 대로 사진책을 장만합니다. 나 스스로 내 삶을 어루만지는 결에 따라 사진책을 선물합니다.

 저는 누구보다 저한테 사진책을 선물합니다. 나 스스로 사진을 한결 잘 읽고 싶어 사진책을 나한테 선물합니다. 우리 옆지기하고 아이랑 사진을 한껏 즐기고 싶기에 사진책을 장만합니다. 좋은 사진은 좋은 마음이 담겼고, 좋은 넋이 넘치며, 좋은 꿈이 빛납니다. 좋은 사진을 일군 사람들은 좋은 마음으로 좋은 삶을 가꿀 뿐더러 좋은 넋으로 좋은 사랑을 나누는 삶이며 좋은 꿈으로 좋은 이야기를 펼치는 삶이에요.

 그림이 그럴듯하다고 해서 모으는 사진이나 책이나 사진책이 아닙니다. 내 삶으로 애틋하게 받아안고 싶어 한 권씩 꾸준하게 장만하는 사진책입니다.

 사람들이 저마다 사진으로 어떤 삶을 담아내면서 이야기꽃을 피우는가 궁금해서 한 권씩 차근차근 사들이는 사진책입니다. 이 사람한테서는 이 눈길에 따라 이 삶을 보고, 저 사람한테서는 저 손길에 따라 저 삶을 만납니다. 다 다른 사람들이 다 다른 곳에서 다 다른 마음밭을 돌보면서 다 다른 사진기로 다 다른 이야기를 다 다른 사진에 담아 다 다른 책으로 엮습니다. 사진책을 보는 재미는 다 다른 삶에 있습니다.

 좋은 벗을 만날 때면 으레 책을 한두 권 선물하곤 합니다. 만화책도 선물하고 글책도 선물하지만 사진책도 선물합니다. 만화책이라 해서 돈이 더 적게 든다든지, 글책이라서 그렁저렁 알맞춤하다고 느낄 선물이 아닙니다. 만화책을 한꺼번에 여러 권 선물하기도 합니다. 판이 끊어져 사라진 책을 헌책방 책시렁을 뒤져 선물하기도 합니다. 사진을 하는 사람이건 아니건, 사진 하나에 영근 빛나는 보배를 소롯이 오래오래 느껴 주기를 마음속으로 빌면서 사진책을 선물합니다.

 사진책을 선물하면서 책갈피로 쓰라며 사진 한 장 살짝 곁들일 수 있습니다. 또, 이렇게 해 보면 더 즐겁습니다. 선물받는 사람 모습을 찍어 준 사진이든, 우리 집 아이를 담은 사진이든, 골목동네 삶자락이나 헌책방 책시렁을 담은 사진이든, 내가 손수 찍어 종이로 뽑아 놓은 사진 한 장을 슬며시 끼워 넣고 뒤쪽에 짤막히 편지를 적바림해 보곤 합니다.

 아직 몇 번만 해 보았는데, 혼인잔치를 하는 동무나 후배한테 도톰한 사진책 하나 선물하는 일도 꽤 괜찮다고 느낍니다. 남자들이 여자친구한테 으레 꽃다발을 선물한다고들 하는데, 백한 송이 장미이든 몇 송이 장미이든 선물해 보아도 좋을 텐지만, 다달이 사진책 한 권씩 선물해 보는 일도 퍽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요즈음처럼 거의 모든 사람들이 사진찍기를 즐긴다 할 때에는 다달이 십만 원쯤 사진책 선물하는 값으로 써 본다면 꽤 남다를 뿐더러 훨씬 돋보이리라 생각합니다. 여자친구나 남자친구한테뿐 아니라 할머니하고 할아버지한테도 사진책을 선물할 수 있어요. 중학교 다니는 딸한테든 대학생인 아들한테든 얼마든지 사진책을 선물할 만합니다. 생일잔치를 한다거나 학교 입학·졸업 선물로도 사진책은 참 좋은 선물감이 아닐까 하고 생각합니다.

 나라밖으로 다녀오면서 사진책 하나를 선물로 사 올 수 있겠지요. 나라밖으로 볼일을 보러 나가는 길에 한국 사진책을 몇 권 사들고는, 나라밖 벗님한테 선물해 볼 수 있어요.

 그림책과 만화책과 사진책 세 가지는 나라와 겨레를 넘나들면서 살갑고 애틋하게 나눌 수 있는 좋은 징검다리요 이음고리라고 느낍니다. (4343.12.18.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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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책 읽는 즐거움 ㉥ 사진삶과 사진앎
 ― 사진을 사랑하여 맞아들이는 길


 사진을 찍고 싶다면 사진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림을 그리고 싶으면 그림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노래를 하는 사람이나 춤을 추는 사람이나 똑같습니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려는 사람이라면 학교와 아이들을 내 삶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리하여 사진쟁이한테는 사진삶입니다.

 사진책을 읽고 싶다든지 사진을 읽어내고 싶다면 사진을 알아야 합니다. 아이를 낳아 키우고 싶다면 아이를 알아야 할 뿐더러 아이 삶과 아이 목숨을 알아야 하고, 아이가 하는 옹알이부터 더듬더듬 하는 말 모두를 알아야 합니다. 남녀가 짝짓기를 한다 해서 낳는 아이가 아닙니다. 남녀가 사랑으로 어우러지면서 즐겁게 만날 때에 비로소 아이를 낳습니다. 이리하여 사진을 좋아하거나 사랑하고픈 분들한테는 사진앎입니다.

 그저 사진책과 사진을 좋아하면서 사진삶을 함께 맞아들일 수 있습니다. 사진쟁이인 한편 사진즐김이로서 사진앎에 한 발 두 발 다가설 수 있습니다. 사진을 찍거나 사진을 좋아하거나 사진삶과 사진앎을 함께 어우를 수 있으면 가장 좋습니다. 다만 가장 좋은 길이라 해서 모두 이 길을 걸어야 하지는 않아요. 저마다 내 주제와 그릇과 깜냥과 슬기와 몸가짐과 살림살이에 맞추어 차근차근 가다듬으면 됩니다.

 사진기를 늘 곁에 둘 뿐 아니라, 뒷간에 똥을 누러 갈 때마저 사진기를 챙기는 사람이 있겠지요. 꼭 사진을 찍으려는 마음이 아니라, 사진기를 내 몸과 같이 여기면서 언제나 어깨에 걸거나 손에 쥐는 사람이 있어요. 사진을 찍는 자리에서는 번개같이 찍되, 구태여 사진기를 안 챙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느 쪽이 사진삶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둘 모두 다른 빛깔 다른 내음 다른 소리로 사진을 즐기거나 맞아들인다고 여겨야 옳습니다.

 사람마다 좋아하는 사진기가 다르고, 저마다 살림살이가 다르기 때문에, 누구나 다른 사진기를 씁니다. 대형사진기 쓰는 사람이 있을 테고, 조그마한 사진기 쓰는 사람이 있을 테며, 똑딱이 쓰는 사람이 있겠지요. 사진기를 무엇으로 삼느냐에 따라 사진이 달라지기는 하는데, 더 값비싼 사진기를 쓰는 사람이 더 값있는 사진을 얻지 않아요. 더 비싸고 빠른 차를 가졌다 해서 더 빨리 달리지는 않잖아요. 더 값나가는 자전거를 달린다고 해서 자전거 달리기에서 1등을 하지 않아요. 내 사진기를 내가 얼마나 받아들이며 좋아하느냐에 따라 내 사진이 달라져요. 내가 사진책이나 사진을 어떻게 좋아하려는가에 따라 내 눈썰미와 눈길과 눈높이가 거듭나요.

 운동경기에서는 등수를 가리지만, 정작 따지고 보면 등수란 부질없습니다. 문화와 예술을 ‘상품이나 작품으로 사고팔 때’에 돈으로 값을 매기곤 하지만, 숫자란 덧없습니다. 우리가 마음쓸 대목은 ‘내 사진’이냐 아니냐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진’이냐 아니냐입니다. ‘내 마음을 담은 사진’이냐 아니냐예요. ‘내 삶을 깃들여 놓은 사진’이냐 아니냐입니다.

 사진을 읽을 때에도 ‘내 눈길로 읽은 사진’이냐 아니냐에 마음을 쓸 노릇입니다. ‘내 눈높이를 즐기는 사진’이냐 아니냐에 마음을 기울일 노릇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우든 말든 아랑곳할 일이 아닙니다. 내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울 만한 사진인가 아닌가를 읽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깎아내리든 말든 돌아볼 일이 아닙니다. 내 눈으로 들여다볼 때에 참말 깎아내릴 만큼 값없거나 어설픈 사진인가 아닌가를 살펴야 해요.

 잘난 사진삶이 없고, 잘난 사진앎이 없습니다. 빈틈없는 사진삶이란 없으며, 빈틈없이 들어맞는 사진앎이란 없습니다. 더 나은 사진삶을 바랄 수도 없습니다. 있는 그대로 내 모습을 늘 받아들이며 꾸리는 사진삶 한 가지만 있습니다. 더 깊은 사진앎을 꿈꿀 수조차 없습니다. 꾸밈없이 내 가슴과 마음과 손길과 눈길에 따라 노상 맞아들이며 다독이는 사진앎 한 가지만 있어요.

 사진 한 장으로 사회를 바꾼다는 얘기가 있으나, 사진 한 장으로 사회를 바꿀 일이란 없습니다. 사진 한 장이 사람들 삶으로 스며들 때에 사회를 찬찬히 바로세울 수 있습니다. 사진 한 장을 사람들이 삶으로 아로새기면서 생각과 마음을 갈고닦을 때에 비로소 사회는 제자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글 한 줄과 그림 한 장도 마찬가지이며, 노래 한 가락과 춤 한 자락 또한 매한가지입니다. 혁명을 하는 노래나 책이나 그림이 아닙니다. 혁명을 하는 내 삶을 담는 노래나 책이나 그림이에요. 사진을 하는 삶이라면, 내 삶을 혁명을 하는 삶으로 북돋울 노릇이요, 사진을 읽는 앎이라면, 내 삶을 아름다우며 착하게 가꿀 노릇입니다. (4343.12.13.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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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나라를 바라보는 눈길·마음·생각
 [따순 손길 기다리는 사진책 14] 강형원, 《From the streets to the Olympics》(아트스페이스,1989)


 이레쯤 지나면 스물아홉 달째 함께 살아가는 우리 아이가 며칠 앞서부터 “벼리가 그렸어.” 하고 말합니다. 아이는 제 엄마랑 아빠가 하듯이 볼펜을 손에 쥐고 종이에 그림 그리기를 즐깁니다. 엄마랑 아빠는 그림을 그린다기보다 글을 종이에 쓰는데, 곁에서 이 모습을 늘 지켜보면서 아이로서는 그림을 그리면서 배우는 셈입니다. 아이한테는 하루하루 둘레에서 마주하며 바라보는 사람들 삶이 곧바로 제 삶으로 스며듭니다. 아이한테 건네는 말마디라든지, 곁에서 어른들이 주고받는 말마디는 모조리 아이가 배울 만한 말마디가 됩니다.

 아주 마땅하다 하지만, 사람들은 아주 마땅히 잊고 말지만, 아이들이 저지르는 잘못이란 따로 없고, 청소년이 일으키는 범죄 또한 따로 없습니다. 어느 잘못이나 범죄이든 어른이 빚습니다. 어른이 저지르기 때문에 아이들과 푸름이들이 보고 배우거나 어느 결에 젖어들고 맙니다. 우리 어른들부터 옳고 바르며 착하고 어여삐 살아간다면, 아이들이든 푸름이들이든 옳고 바르며 착하고 어여쁜 매무새를 받아들입니다. 아이들이 티없는 눈망울로 온누리를 맑고 밝게 바라보며 껴안기를 바랄 노릇이 아니라, 어른들이 바로 이곳에서 오늘부터 티없는 눈망울로 온누리를 맑고 밝게 바라보며 껴안아야 합니다.

 이 나라에서 살아가는 어른들은 예나 이제나 좀처럼 티없는 눈망울로 온누리를 바라보지 못합니다. 맑고 밝은 몸가짐으로 이웃을 사랑하지 못합니다. 틀림없이 이 나라에는 몇몇 군사독재자가 서슬퍼런 칼과 총을 휘둘렀습니다. 몇몇 군사독재자에 앞서는 일본 제국주의자가 총과 칼을 휘둘렀습니다. 일본 제국주의자에 앞서는 봉건시대라 하면서 계급과 신분이 나뉘었을 뿐 아니라 여느 사람들은 글을 배울 수 없었고 잔뜩 짓눌려 지내야 했습니다. 나랏님은 예나 이제나 나랏사람을 군인으로 끌고 가거나 노역을 시키거나 합니다. 지난날에는 그예 노역장으로 끌고 가서 성벽을 쌓거나 궁궐을 짓거나 하도록 시켰다면, 오늘날에는 일삯을 주고는 고속도로를 닦는다거나 4대강 정비를 한다거나 시킵니다. 굳이 사회 탓이나 나라 때문이라 하기는 어렵지만, 사회 물결이나 나라 흐름으로 본다면, 이 나라 여느 어른들은 해맑은 눈빛과 마음밭을 갈고닦을 겨를이 없기도 했습니다. 다만, 제아무리 사회랑 나라가 뒤죽박죽 어수선이라 할지라도 어른들 스스로 다소곳하며 참다운 넋을 추스를 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어른이기 때문입니다.

 사진책 《From the streets to the Olympics》(아트스페이스,1989)를 보면서 생각합니다. 미국에서 〈Los Angeles Times〉하고 〈Time Magazine〉 사진기자로 일하는 동안 1987년 6월부터 1988년 올림픽까지 한국땅을 밟으며 취재를 한 발자취를 그러모은 강형원 기자는 “나는 내가 간직하고 있는 사진 중 가장 잘 된 사진을 고르는 대신, 가장 적절한 순간들을 택하여 이 이야기를 전하려고 노력했다”고 말합니다. 민주의 거리·노사분규·대통령 선거의 열풍·통일·재24회 서울 올림픽, 이렇게 다섯 자리로 나누어 사진을 실은 《From the streets to the Olympics》인데, 남녘나라 사진기자들은 도무지 담아내지 못한 모습들이 가득합니다. 이를테면 최루탄 조각 때문에 숨을 거둔 이석규 님 주검이 지나는 모습을 담은 사진에는, 저 멀리 대우조선소 모습이 비치고, 길가에는 여름철 풀이 우거졌는데, 호박꽃이 한창 흐드러지게 피었습니다. 시위를 하는 대학생들이나 최루탄을 사람 머리로 겨누며 쏘는 전투경찰 모습을 굳이 ‘흑백’사진이 아닌 ‘빛깔’사진으로 담습니다.

 흑백 아닌 빛깔 사진으로 바라보니, 소주병을 불꽃병으로 삼은 아이들(대학생) 모습이 참 앳되어 보입니다. 게다가 플라스틱 바가지를 끈으로 꿰어 머리에 뒤집어쓴 모습에는 웃음이 절로 납니다. 물안경을 쓴 모습도 우습고요. 불탄 파출소에 앉은 경찰 아저씨 또한 우습습니다. 서로서로 똑같은 한겨레일 뿐 아니라, 옷과 무기를 내려놓으면 살가운 동무이자 이웃입니다. 서로서로 어디에서 만나고 어떻게 어깨동무를 하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제대로 짚지 못한 채 애꿎은 사람들끼리 툭탁거리고 맙니다. 기껏 스물을 갓 넘었을 전투경찰들은 왜 제 형이나 어머니나 작은아버지 같은 사람들한테 최루탄을 쏘거나 방패와 곤봉을 휘둘러야 했을까요. 무엇보다, 조그마한 짐차를 타고 선거유세를 하던 대통령 후보들 모습이 새삼스럽습니다. 그래요, 다들 이렇게 조그마한 짐차에 타고는 ‘선거유세를 할 때만큼’은 동네 골골샅샅을 누볐지요. 텔레비전 토론마당이 아닌 짐차 탄 선거유세였기 때문에 노태우 후보는 ‘투명방패’에 몸을 숨기며 억지웃음을 지었어요.

 수많은 사진기자는 이애주 교수 살풀이춤을 가까이에서만 담으려 했으나, 강형원 기자는 아주 멀찍이 떨어진 자리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가만히 동그랗게 둘러앉아 살풀이를 함께했는가를 보여줍니다. 우리는 모두 작은 사람이고 여린 사람이에요. 1988년 올림픽을 치르느라 숱한 사람이 철거민이 되었는데, 또다른 자리에서는 어슷비슷하게 가난하며 조그마한 어른들과 아이들이 길거리에 ‘태극기 든 동원행사’로 몰려나오면서도 호돌이 인형하고 손을 잡아 보며 좋다고 웃기도 했습니다.

 사진책 《From the streets to the Olympics》에서 아쉽다 한다면, ‘올림픽이 이루어지는 빛’만큼 ‘올림픽 때문에 드리워진 그늘’이 짙었는데, 이 짙은 대목까지 담지 못합니다. 아무래도, 강형원 님은 미국 시사잡지 사진기자로서 시사 이야기를 담아야 했기 때문일 터이나, 집회 마당이든 올림픽경기장 둘레이든 고작 십 분만 안쪽 골목으로 걸어서 들어가 보면 ‘짙게 드리워진 그늘’을 몸으로 부대낄 수 있었고, 몸으로 부대끼는 만큼 사진으로 엮을 수 있었어요. 반드시 ‘상계동 올림픽’을 강형원 님까지 담을 일은 아니나, 《From the streets to the Olympics》 같은 짜임새와 엮음새를 돌아본다면, 강형원 님이 한 발 더 따사롭고 조그맣게 발걸음을 내려 딛었다면 훨씬 사랑스러우면서 눈물겹고 애틋한 사진책으로 자리매겼으리라 생각합니다. 더욱이, 이 사진책은 ‘어둡고 슬픈’ 나날인데 ‘안 어두운 척 안 슬픈 척 내보이고 싶어하던 독재정권 무렵’ 이야기를 빛깔 고운 사진으로 담았습니다. 한결 차분하면서 한껏 티없는 눈결로 남녘나라 구비치는 한 자락을 보듬는 사진넋으로 서울 시내 한복판 가난한 사람들이랑 서울 시내 바깥쪽 수수한 사람들 삶 두 자락을 보듬어 주면 얼마나 기뻤을까요.

 그러나 다른 사람이 아닌 ‘어릴 때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살다가 비로소 올림픽에 발맞추어 취재를 나온’ 강형원 님한테 이것저것 바랄 수 없습니다. ‘올림픽 뒤켠 그늘 자리’는 남녘나라에서 사진기를 쥔 기자들이랑 사람들이 살펴서 담아야 합니다. 남녘나라 사진쟁이 스스로 살뜰히 담지 못했거나 않았으면서 미국시민 강형원 님한테 함부로 바랄 일이 아닙니다. 저 머나먼 나라 미국땅에서 당신 고향나라가 민주와 통일을 이룰 수 있기를 꿈꾸며 보드라이 어루만지는 손길로 일군 이 사진책 하나만 해도 참으로 고맙습니다. “이 책은 3개의 언어로 쓰여졌다. 한국어, 영어, 그리고 사진어어가 그것이다.”라는 말마디처럼, 우리들 남녘나라 사람들은 이 책을 이루는 세 가지 말을 찬찬히 아로새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 세 가지 말과 아울러 살며시 감도는 ‘사랑말·믿음말·나눔말’ 세 가지 말마디를 나란히 느낄 수 있으면 더욱 좋겠습니다. (4343.12.12.해.ㅎㄲㅅㄱ)


― From the streets to the Olympics(민주화의 현장) (강형원 사진,아트스페이스,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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