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빛 물고기 - 연어 이야기
고형렬 지음 / 최측의농간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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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232



개울에 엎드려 입을 대고 물을 먹었다

― 은빛 물고기

 고형렬 글

 최측의농간 펴냄, 2016.2.4. 14000원



  예부터 모든 마을에는 샘터나 우물터나 빨래터가 있습니다. 마을이니까요. 예전에는 한집에 따로 물꼭지가 있지 않았어요. 어느 집에서건 물동이를 마련했고, 물을 길어다 썼어요. 집안에서 물꼭지를 틀어서 물을 쓰는 일이란 없었다고 할 만합니다. 물을 써야 할 적에는 동이를 이고 두레박이나 바가지를 썼어요.


  마을을 이루는 사람들이 서로 물을 나누어서 쓰던 때에는 어느 곳에서나 맑고 싱그러우면서 단 물이었다고 느낍니다. 나 혼자 쓰는 물이라 나도 너도 쓰는 물이기에 이 물을 더럽히거나 어지럽히는 사람이 없어요. 다 함께 쓰는 물이니 서로 아끼고 보살피면서 살림을 지었어요.



넓지 않은 마당을 품고 있는, 진흙과 나무로 지은 자그마한 너와집. 빨랫줄이 그늘 속으로 들어가서 감나무 허리에 묶여 있다. 고향집에 들어가듯이 고 옹을 따라 문지방 안쪽으로 허리를 구부리고 들어가 문쪽에 앉는다. (20쪽)


10년 전까지만 해도 신기 사람들은 개울에 엎드려 입을 대고 물을 먹었다. 개울은 아래로 흘러내려가고 입에 닿은 물은 꿀꺽꿀꺽 목구멍을 넘어서 뱃속으로 흘러들어갔다. 이처럼 하천과 사람의 내장에 같은 물이 흐르고 있었지만, 지금은 그 물을 먹을 수가 없다. (27쪽)



  고형렬 시인이 쓴 《은빛 물고기》(최측의농간,2016)를 읽습니다. 이 책은 “은빛 물고기”를 다룹니다. “은빛 물고기”라는 이름으로 가리키는 ‘연어’를 좇는 이야기를 들려주어요. 아스라이 먼 옛날부터 깊은 멧골짜기 냇물에서 깨어난 작은 물고기가 바다로 흘러간 뒤에 다시 깊은 멧골짜기 냇물로 찾아가서 알을 낳은 뒤에 빈 껍데기 같은 몸뚱이를 내려놓는 한살이를 찬찬히 짚습니다.


  그런데 고형렬 시인이 은빛 물고기를 만나려고 깊은 멧골짜기를 찾아갈 즈음 이 물고기는 좀처럼 그 깊은 멧골짜기로 찾아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마을사람이 냇물에 입을 대고 물을 마시던 때에는 은빛 물고기가 이 냇물로 찾아왔다지만, 마을사람 누구도 냇물에 입을 대고 물을 마시지 못하는 때에는 은빛 물고기가 이 냇물로 찾아오지 못한다고 해요.



이제 그들은 물속에서 해가 뜨는 것을 보고 물속에서 밤이 오는 것을 알게 된다. 세상은 밝아지기도 하고 어두워지기도 한다는 것도 알게 되고 강풍과 파도와 폭우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된다. (68쪽)


먹이들이 떠다니는 북태평양의 수중 광경은 마치 눈 내리는 지상의 산속과 같다. 그것들이 해류를 따라 흐르고 연어들은 그들을 따라 흘러간다. (145쪽)



  물고기가 마시는 물이 바로 사람이 마시는 물입니다. 사람이 마시는 물이 언제나 물고기가 마시는 물입니다. 물고기가 물을 더 마실 수 없어서 목숨이 끊어진다면, 사람은 냇물을 더 마실 수 없습니다. 사람이 마음 놓고 마실 만한 냇물이 사라진다면, 냇물에서 물고기가 더 살 수 없습니다.


  깊은 멧골에서 졸졸 솟는 작은 물줄기는 내를 거치고 가람을 타면서 바다로 흐릅니다. 바닷물은 다시 뭍이나 하늘을 거쳐서 깊은 멧골로 돌아가서 샘물이나 냇물이 되지요. 똑같은 물이 이 지구별에서 흘러요. 똑같은 물을 사람이 마시고 물고기가 마셔요. 이 물줄기는 목숨줄기이면서 삶줄기입니다. 가느다른 물줄기는 삶줄기이면서 사랑줄기요 살림줄기입니다.


  그러니, 물 한 모금을 고이 여겨서 아낄 수 있을 때에 사람인 나는 내 목숨을 아끼고, 내 이웃인 물고기 목숨도 아낄 수 있습니다. 물 한 모금을 함부로 다루거나 더럽힌다면, 사람인 나는 내 목숨부터 함부로 다루거나 더럽히는 셈이요, 물고기까지 괴롭히듯이 다루거나 더럽히는 셈입니다.



모든 생명의 살과 생각은 마음의 열반과 함께 뒤섞여 있다. 모든 것은 마음의 반영이고, 마음의 작용은 몸의 작용이고, 그 작용은 만물 어떤 것과도 어긋나지 않는다. (200쪽)



  고형렬 시인은 ‘자취가 끊어진 은빛 물고기’를 좇아서 곳곳을 누빕니다. 이 물고기를 따로 기르는 사람을 만나고, 예전에 이 물고기떼를 늘 마주하던 사람을 만납니다. 그리고, 이 은빛 물고기가 냇물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어디까지 올라가는지, 이러는 동안 암컷하고 수컷은 저마다 어떤 헤엄짓으로 만나는지를 살핍니다. 두 물고기가 짝짓기를 하는 마지막 몸짓을 살핍니다. 짝짓기를 마치면서 낳는 알을 살핍니다. 온몸을 뒤틀면서 숨을 내려놓고 빈 껍데기 몸뚱이를 물살에 맡기면서 이승을 떠나는 흐름을 살핍니다.



그 광경을 쳐다본다면 아마 그 빛이 움직이는 하늘이 거대한 하나의 공간이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상상을 넘어서는 공간의 하늘 속에 혹은 하늘벽에 찰나적으로 사라지고 나타나고 지워지는 빛의 신출귀몰은 인간 영혼에 하나의 강렬한 표상을 박아둘 것이다. (238쪽)



  사람은 한 번 짝짓기를 한 뒤에 목숨을 내려놓지는 않습니다. 사람이 물고기처럼 한 번 짝짓기를 한 뒤에 목숨을 내려놓는다면 아기가 태어나지도 자라지도 못할 테지요. 물고기는 제 알이 물속에서 스스로 깨어나서 자랄 수 있도록 모든 숨결을 불어넣은 뒤에 조용히 물길을 떠납니다. 사람은 제 숨결을 두 씨앗에 담아서 하나로 그러모은 뒤에 이 씨알에서 깨어날 새 목숨을 기다리면서 살림살이를 추스르고 보금자리를 가다듬습니다.


  물고기는 알에서 깨어난 뒤에 맞잡이한테 잡아먹히기도 하고, 거센 물살에 휩쓸리기도 합니다. 사람은 아기로 태어난 뒤에 어버이한테서 온사랑을 듬뿍 받으면서 하나씩 새롭게 배웁니다. 물고기는 모든 삶을 스스로 견디고 받아들이면서 새롭게 배우지요. 사람은 어버이한테서 말을 물려받고, 삶과 살림을 고스란히 물려받아요. 물고기는 제 어미한테서 ‘냇물과 바닷물에서 스스로 기운차게 살아남는 길’을 물려받습니다.



삼척으로 돌아온 모든 연어들이 한 번 쉬고 올라가던 그 못이 흔적조차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사람들은 그 최적의 자연의 늪을 불도저와 삽을 동원해서 메워 버리고 그 위에 테니스장을 설치했다. (284쪽)


사랑하는 길은 자연 속에 저들을 가만히 두는 일뿐이다. 저 물빛들을 사랑하다가 오히려 생명을 다칠 것이다. (363쪽)



  《은빛 물고기》를 읽으면서 우리 마을 샘터랑 빨래터를 헤아립니다. 열 몇 해 앞서까지 이 샘터에서 물을 긷고 이 빨래터에서 빨래를 했다는데, 이제 이 샘터나 빨래터는 흙일을 마친 연장을 씻는 노릇을 합니다. 가문 날에는 물을 뽑아내는 노릇을 합니다. 농약을 칠 적에는 농약에 물을 섞으려고 호스를 길게 이어서 빨래터에 꽂습니다.


  빨래를 하지 않는 빨래터에는 물이끼가 낍니다. 물을 긷지 않는 샘터에도 물이끼가 낍니다. 그렇지만 이 샘터와 빨래터에는 다슬기가 살아요. 다슬기는 깨끗한 물살에 깃들어 살몃살몃 춤을 추듯 기어다닙니다. 개똥벌레는 이 다슬기를 먹이로 삼아서 살지요.


  나는 아이들하고 한 달에 두세 차례씩 마을 어귀 빨래터하고 샘터를 치웁니다. 이때에 다슬기는 고스란히 살립니다. 봄에 깨어날 개똥벌레 애벌레가 이 다슬기를 먹고 자라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빨래터 둘레에는 흙이 없으니 개똥벌레가 살 수 없지만, 빨래터를 치우는 동안 다슬기가 물살을 따라 흘러가서 이웃 논도랑으로 가면, 그곳에서 깨어날 개똥벌레가 다슬기를 만나겠지요.



백자가 알의 배꼽으로 들어가면 입을 완벽하게 닫아 거는 알들은 그때부터 생기를 머금고 단단해지며 팽창하는 듯하다가 멈춰서 수정알처럼 빛난다. 수정란들이 붙은 돌은 반석의 든든하고 포근한 요람이다. (370쪽)


꿈이 되지 않는 것들은 죽지 못한다. 생명들은 생명을 낳고 죽는다. 생명을 낳는 것들은 그 전 생명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물과 같은 부드러운 꿈들이었다. (399쪽)



  마을사람이 개울에 엎드려 입을 대고 물을 먹던 나날, 은빛 물고기는 은빛 춤을 추면서 냇물을 거슬러 올랐습니다. 마을사람이 개울에 엎드릴 수 없는 오늘날, 은빛 물고기가 은빛 춤을 추기는 몹시 어렵습니다. 더욱이 지난 몇 해 사이에 이 나라 거의 모든 냇물은 시멘트더미로 탈바꿈했습니다. 커다란 물줄기뿐 아니라 시골마을 작은 물줄기에다가 골짜기 물줄기까지 시멘트더미를 품에 안아야 했습니다.


  시멘트더미가 물줄기와 냇바닥을 뒤덮은 오늘날 우리는 어떤 ‘은빛 춤’을 만날 수 있을까요? 시멘트를 찬양하거나 노래하는 글은 나올 테고, 시멘트길을 따라 자전거나 자동차를 달리다가 ‘인증 사진’ 찍는 놀이는 할 수 있을 테지만, 이제 《은빛 물고기》 같은 이야기를 써 내려 갈 만한 시인은 나오기 어려우리라 느낍니다.


  다람쥐 이야기를 누가 쓸 만할까요? 송사리 이야기를 누가 쓸 만할까요? 딱새나 제비 이야기를 누가 쓸 만할까요? 큰빗이끼벌레 이야기 말고 눈부신 모래밭을 밟으면서 반짝이는 물빛을 노래하는 이야기를 누가 쓸 만할까요?


  모래밭도 맑은 냇물도 물고기도 숲도 나무도 들꽃도 사라지고 온통 시멘트더미와 커다란 시멘트집만 덩그러니 남은 온 나라 물줄기에서 어떤 이야기가 태어날 만할까요? 고형렬 시인이 쓴 《은빛 물고기》는 고운 손길을 받아서 새롭게 옷을 입고 우리 곁에 태어납니다. 살가운 이야기책은 언제라도 이렇게 다시 태어나는데, 살가운 우리 이웃은, 숲이웃은, 냇물이웃은, 바다이웃은, 언제쯤 우리 곁에 고운 눈망울과 숨결로 다시 태어날 수 있을까요? 2016.2.29.달.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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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농, 문명의 뿌리 - 미국의 뿌리는 어떻게 뽑혔는가
웬델 베리 지음, 이승렬 옮김 / 한티재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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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책 읽기 97



‘대규모 문명’은 뭔가 크게 어긋난 모습 아닐까

― 소농, 문명의 뿌리

 웬델 베리 글

 이승렬 옮김

 한티재 펴냄, 2016.1.25. 19000원



  한겨울에도 아이들은 맨발로 뛰쳐나가서 마당을 와아아 달리기를 좋아합니다. 어쩜 이렇게 씩씩한가 하고 뒷모습을 지켜보다 보면, 나도 어릴 적에 이 아이들처럼 놀았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그리고 어릴 적에 우리 어머니가 나를 나무란 말이 문득 떠올라요. 아차, 나도 우리 어머니처럼 우리 아이들을 나무라고 말았네 하고 새삼스레 깨닫지요. 그래서 곧바로 말을 바꿉니다. “얘들아, 겨울에는 양말을 신고 놀자. 발이 아야 하겠네.” 그러고는 한마디를 덧붙여요. “얘들아, 너희가 예쁘다고 여기면서 새로 장만한 이 멋진 신이랑 장화가 여기 있는데 이 신을 안 신어 주면 이 신이 서운해 하지.”


  똑같은 일이나 몸짓을 놓고 어떻게 바라보고 마주하면서 말을 내놓느냐에 따라 참말 살림이 달라집니다. 나 스스로 늘 느낍니다. 아이들이 겨울에도 맨발로 놀겠다면, 또는 양말바람으로 마당을 뛰어다니겠다면, 이대로 놀라 할 수 있어요. 이러다가 발이 다친다든지 양말에 또 구멍이 나면, 이런 대로 맞아들이면 돼요. 발이 다쳤으면, “그래, 발이 다쳤네. 어떻게 하지?” 하고 되묻고, 양말에 구멍이 났으면, “그래, 구멍이 났네. 어떻게 하지?” 하고 되묻습니다. 아이들이 스스로 느끼고 깨달으면서 새로운 길을 열도록 북돋울 노릇이에요. 무엇보다 아이들 스스로 즐겁게 저희 살림길을 열도록 도와야지요.



착취자의 기준은 효율성이고, 양육자의 기준은 돌봄이다. 착취자의 목표는 돈, 즉 이윤인데, 양육자의 목표는 건강이다. (29쪽)


식량울 무기로 생각하든가 또는 무기를 식량으로 생각하면 소수의 사람들에게 안보와 부의 환상을 심어 줄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사고방식은 모든 사람들의 생명을 직접적으로 위태롭게 만든다. (34쪽)



  웬델 베리 님이 빚은 《소농, 문명의 뿌리》(한티재,2016)라는 책을 읽습니다. 한때 교수로 일하다가 이 교수 일을 접은 뒤에 농사꾼이 되었다는 웬델 베리 님이라고 합니다. 도시에서 지식인으로 지내던 살림을 고이 접은 뒤, 시골에서 농사꾼으로 지내는 살림으로 거듭난 웬델 베리 님이라지요.


  도시하고 시골을 온몸으로 겪은 삶이요, 도시하고 시골에서 온몸으로 일한 삶이기에, 웬델 베리 님이 쓴 《소농, 문명의 뿌리》라는 책에서는 두 문명이 어떻게 다른가 하는 대목을 처음부터 끝까지 낱낱이 짚습니다. 사람들이 도시에서는 무엇을 보고 느끼고 배우는가 하는 대목을 건드리고, 사람들이 시골을 등지면서 무엇을 잃고 잊고 놓치는가 하는 대목을 살핍니다.



전문가가 주도하는 시스템의 가장 잘 알려진 첫 번째 위험은, 많은 비용과 수고를 들여 한 가지 일만을 하도록 훈련되는 사람들, 즉 전문가들이 만들어진다는 점이다 … 예방에는 아무 기술도 관심도 없는, 질병에 대해 값비싼 치료책에만 능숙한 의사들이 생겨난다. (51쪽)


미국 시민들은 “노동력의 96퍼센트는 식량 생산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말을 기꺼운 마음으로 경청한다. 그러나 미국 시민들은 노동력이 ‘해방’된 것은 무엇을 위한 것인지, 또는 그 결과 얼마나 많은 이들이 어떤 형태로든 고용으로부터 해방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다. (79쪽)



  《소농, 문명의 뿌리》라는 책에서 크게 짚는 대목을 꼽자면 ‘앗기·돌봄’입니다. 웬델 베리 님이 두 가지 문명을 두루 겪고 살아낸 나날을 돌이킨다면, 도시살이는 ‘앗기’요, 시골살이는 ‘돌봄’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시골살이도 ‘앗기’랑 ‘돌봄’으로 갈린다고 해요. 한집 사람들 살림을 짓는 “작은 보금자리”가 아니라 “엄청나게 커다란 농장”을 수많은 기계와 화학비료로 ‘운영 관리’할 적에는 ‘앗기’라는 문명이 된다고 해요.


  ‘대규모 농장’은 땅에 땅힘을 되살리도록 북돋우지 않고 ‘더 많은 생산량’에만 목을 매단다고 합니다. 아마 이러한 대목은 여느 도시 이웃도 웬만큼 알리라 생각해요. 이를테면, 양계장 아닌 닭공장에서는 수십만 마리 닭이 옴짝달싹 못하면서 밤낮조차 없이 아주 빠르게 살이 찌다가 죽어야 합니다. 알 낳는 닭도 하루 내내 전구 밑에서 알만 낳지요. 돼지우리나 소우리 아닌 돼지공장이나 소공장이 되고 만 커다란 짐승우리에서도 돼지이며 소이며 옴쭉달싹 못하면서 그저 살만 빨리 찌우다가 죽어야 하는 얼거리예요.


  이 같은 이야기는 방송에서도 곧잘 다룹니다. 그렇지만 이 같은 모습은 안 달라집니다. 왜냐하면, 사람들 스스로 제 밥을 제 손으로 일구는 삶하고 아주 멀어졌기 때문입니다.



안데스 농업은 여기서 벗어날 수 있는 화해의 모델을 제시해 준다. 치료책은 주변부를 체제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 대자연이 가장 생활 속에서 숨 쉬게 하는 것, 다양성을 통일된 전체 속으로 끌어들이는 것, 그런 것이다. (357쪽)


건강한 농장에는 나무들이 심겨 있을 것이다. 농장이 위치한 곳이 애초부터 숲이 울창한 삼림지대일 수도 있고, 과실수와 견과류 나무들, 또는 그늘을 만들기 위한 나무들이 심겨 있거나 방풍림이 조성되어 있을 수도 있다. (363쪽)



  《소농, 문명의 뿌리》를 읽어 보면, 미국에서는 96퍼센트에 이르는 사람들이 ‘도시에서 살아’도 4퍼센트가 될랑 말랑 하는 사람들이 ‘대규모 농장’에서 곡식하고 고기를 뽑아내어도 먹고살 수 있는 얼거리라고 합니다. 이는 오늘날 한국에서도 엇비슷합니다. 한국도 ‘도시 거주 인구’가 90퍼센트를 넘은 지 열 해 즈음 되고, ‘농업 인구’는 ‘시골 거주 인구’ 가운데에서도 얼마 안 되어요.


  그런데, 오늘날에는 사람들이 ‘자급자족’을 하지 않아도 되는 살림이라지만, 막상 ‘돈을 버는 일’ 때문에 너무 바빠요. 손수 흙을 일구어서 밥이나 고기를 얻지 않아도 된다고 하지만, 막상 느긋하게 도시 문명을 누리거나 즐기지 못하기 일쑤예요.


  집집마다 자동차는 있는데, 이 자동차로 길을 나설라치면 언제나 길이 잔뜩 막혀요. 도시에서는 쉴 만한 자리나 공원도 마땅하지 않은데, 주말에 바깥 나들이라도 가려 하면 그야말로 길이 막히고, 기차도 시외버스도 빈자리가 드물지요. 참말 뭔가 많이 뒤틀리고 만 사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족농을 하는 농부는 이익과는 관계없이 그저 밭을 거닐지만, 산업농에 종사하는 농부나 관리인은 오로지 필요 때문에 농장을 돌아본다. (375쪽)


아미쉬 농업은 현대적이거나 진보적이지 않다. 그러나 결코 무지하거나 비지성적인 것이 아니다. 올바른 기준으로 볼 때, 그것은 정통농업보다 정교하다. (423쪽)



  교수님 아닌 농부님 살림을 짓는 웬델 베리 님은 우리한테 묻습니다. 그대는 ‘진보’를 좋아하려는가 하고 묻습니다. 그대는 ‘현대’ 문명이 좋으냐고 묻습니다. 웬델 베리 님이 도시에서 교수로 살다가 시골로 옮겨서 오랫동안 농사꾼으로 사는 동안 몸소 겪고 지켜보노라니, ‘진보와 현대’라는 이름은 거의 허울뿐이었다고 밝힙니다. 우리 삶은 굳이 ‘현대적’이지 않아도 되고, ‘진보’가 아니어도 된다고 밝혀요. 그러면 우리 삶은 어떠해야 할까요?


  《소농, 문명의 뿌리》라는 책에서 웬델 베리 님은 우리 삶이 나아가야 할 길이라면, ‘아름다운 삶’이나 ‘즐거운 살림’이나 ‘착한 사랑’이나 ‘참다운 꿈’이나 ‘기쁜 웃음’이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도시로 내다 팔아서 돈을 얻어야 하니까 그렇게 농약이나 비료를 많이 쓸 수밖에 없지만, 한집 사람들이 손수 먹을 곡식이나 열매나 고기라면 그처럼 함부로 ‘땅을 괴롭히면서 농사를 짓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우리 집 아이들이 내 곁에서 깔깔거리며 노는 웃음소리를 들으며 웬델 베리 님 책을 읽습니다. 아무것도 아니다 싶을 만한 종이소꿉을 손수 오려서 둘이 신나게 오랫동안 노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참말 그렇습니다. ‘작은 흙지기’가 되면 스스로 즐겁게 흙을 짓습니다. ‘작은 살림꾼’이 되면 시골에서뿐 아니라 도시에서도 참으로 기쁘게 하루를 짓습니다.


  우리는 돈을 더 많이 벌어야 할 사람이 아니라, 기쁜 살림을 언제나 아름답게 누리면서 아이들하고 함께 누릴 사람이지 싶습니다. 우리는 너무 바쁘게 일해야 할 사람이 아니라, 아이들한테 사랑을 물려주고 꿈을 북돋울 어른이나 어버이여야지 싶습니다. 2016.2.17.물.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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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자 식물 - 식물 영과 함께하는 치유 가이드
팸 몽고메리 지음, 박준식 옮김 / 샨티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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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145



새봄에 신나게 뜯을 쑥을 기다리면서

― 치유자 식물

 팸 몽고메리 글

 박준식 옮김

 샨티 펴냄, 2015.12.28. 18000원



  설날이 지나면서 겨울은 한껏 누그러집니다. 아직 이월이지만 우리 집 뒤꼍에서 자라는 뽕나무 둘레에는 쑥이 몽실몽실 돋습니다. 뽕나무 둘레뿐 아니라 이곳저곳에서 쑥싹을 만납니다. 곧 새봄 쑥을 신나게 뜯어서 먹을 수 있습니다.


  겨울이 저물면서 쑥이 돋는 요즈음은 코딱지나물이나 곰밤부리나 봄까지꽃도 함께 올라옵니다. 갈퀴덩굴도 살그마니 고개를 내밀어요. 냉이도 이 작은 새봄 들꽃 곁에서 살짝살짝 인사를 합니다.


  겨우내 찬바람에 옹크리면서 포근한 볕을 기다리던 들풀은 곧 온누리를 푸르게 덮으리라 생각해요. 추운 바람이 불던 겨울이 길었어도, 이 긴 겨울 끝에는 포근하면서 보드랍고 살가운 봄바람이 찾아온다는 꿈을 나누어 주어요.



우리는 원래 식물과 교감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태어났으며, 따라서 식물과 우리를 하나로 연결시키는 공통의 언어를 발견해 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35쪽)


할머니는 식물을 사랑하는 분이셨다. 집안일을 모두 끝낸 오후만 되면 할머니는 풍성한 정원으로 나가서 무언가를 따거나 꺾곤 했는데, 일하는 내내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듯 계속 중얼거리셨다. (38쪽)



  팸 몽고메리 님이 쓴 《치유자 식물》(샨티,2015)을 읽으면서 봄풀을 가만히 돌아봅니다. 미국에서 ‘약초 치료사’이자 ‘식물 영 힐러’로 일한다고 하는 팸 몽고메리 님이에요. 이 책을 읽으면서 미국 같은 서양에도 ‘약초 치료사’라는 사람이 있구나 하고 생각하다가, 한국 같은 동양뿐 아니라 지구별 어디에서나 ‘풀로 몸을 다스리는 사람’은 늘 있었지 하고 새삼스레 느낍니다. 왜냐하면, 먼 옛날부터 이 지구별에서 살아온 사람들은 땅을 일구어서 곡식이며 열매를 얻었으니까요. 땅을 일구기 앞서는 들풀이나 나무열매를 얻었어요. 언제나 풀과 나무한테서 밥을 얻었으니, 따로 치료사나 약초 치료사가 아니어도 풀을 잘 알거나 살피기 마련이에요.



매일 아침 새로운 날을 시작하면서 나는 밖으로 걸어 나가, 따스한 숨을 보내 주는 태양에 감사하고, 나에게 먹을 것을 주는 대지에 감사하며, 산소를 제공해 주는 나무에 감사하고, 이 땅에 생명수를 주고 내 몸에 필요한 수분을 제공해 주는 하트스프링의 순수한 물에 감사한다. (107쪽)


생명을 죽이는 방식의 현대화와 세계화가 전 세계를 잠식해 감에 따라 서구 외의 지역도 그 뒤를 바짝 뒤쫓고 있다. 자연의 상품화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참된 본성, 즉 우리가 지구를 통해서 영과 연결되어 있음을 아는 우리 자신의 본성으로부터 분리된 상태가 직접적으로 반영된 것이며, (129쪽)



  한국에는 한의사가 있습니다. 한의사로 일하는 분들은 한약을 바로 ‘풀’에서 얻습니다. 풀 아닌 것으로도 한약을 재거나 달입니다만, 한약은 언제나 ‘풀’이 바탕이 된다고 할 만해요. 쑥뜸을 뜨더라도 쑥이 있어야 쑥뜸이 되어요. 쑥을 가리켜 그냥 ‘쑥’이라고도 하지만 ‘약쑥’이 따로 있고, 쑥을 잘 말려서 찻물로 끓여서 마셔요.


  우리는 보리를 말린 뒤에 ‘보리찻물’을 끓여서 마셔요. 보리는 보리밥도 되지만 찻물로 거듭나는 ‘약물’이 되기도 하는 셈입니다. 옥수수차이든 결명자차이든 모두 매한가지예요. 요즈음 널리 퍼진 ‘허브’라는 풀도 바로 ‘풀’입니다. 약풀이기 앞서 언제나 풀이에요.


  가만히 보면, 아침저녁으로 먹는 밥도 풀입니다. 나락이라고 하는 풀을 논에 씨앗으로 심어서 거둔 뒤에 겨를 벗겨 쌀알을 얻어요. 이 쌀알로 지은 밥이니, 밥도 ‘풀숨’이라고 할 만합니다. 풀 기운을 먹는 밥이라고 하겠지요.



내가 학생들과 하는 활동 가운데 하나가 밤 산책이다. 많은 사람이 어둠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이는 자기 안의 두려움들을 대면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211쪽)


우리가 육체의 눈만 사용해서 보는 까닭에 주변에 있는 것들의 전체 모습을 보지 못하고 한평생 살아간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274쪽)



  《치유자 식물》은 우리 몸을 달래거나 다스리도록 돕는 풀을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잊고 지낸 풀을 이야기하고, 우리가 조금만 돌아보면 쉽게 만날 수 있는 풀 한 포기가 바로 우리 몸을 곱게 보살펴 준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어요. 멀리 있는 어떤 대단한 풀(약초)을 찾을 노릇이 아니라, 가만히 마음을 열어서 우리 보금자리를 둘러싼 풀을 알아보자는 이야기를 들려주지요.


  내 몸을 살리는 풀은 벼(쌀밥)가 될 수 있고, 보리가 될 수 있습니다. 쑥이 되거나 냉이가 될 수 있습니다. 씀바귀나 고들빼기가 될 수 있습니다. 서나물이나 민들레가 될 수 있고, 젓가락나물이나 피나물이 될 수 있어요. 토끼풀이나 꽃다지가 될 수 있고, 머위나 뱀밥이 될 수 있지요.


  상자나 그릇에 담아서 키우는 상추 한 포기가 우리 몸을 살릴 수 있고, 고춧잎이나 깻잎이나 콩잎이 우리 몸을 살찌울 수 있어요. 배춧잎이나 무잎이나 유채잎이 우리 몸을 보듬을 수 있을 테고요. 어느 풀이든 ‘눈을 크게 뜨’고 ‘마음을 활짝 열어’서 마주할 때에 비로소 풀숨이 우리 몸으로 스며든다고 합니다.



보호와 관련해서 기억해야 할 중요한 점은, 여러분이 허용하지 않는 한 아무것도 여러분에게 해를 끼칠 수 없다는 것이다. (304쪽)


우리는 바구니를 들고 민들레가 엄청나게 피어 있는 큰 들판으로 향한다. 그 꽃의 숫자만으로도 이 평범한 꽃의 성공이 입증된다 … 민들레 같은 식물이 우리의 현관 바로 앞에서 엄청나게 자라고 있다는 사실은 무척이나 의미심장하다. (336, 337쪽)



  새봄에 신나게 뜯을 쑥을 기다립니다. 새봄을 부르는 늦겨울비를 맞으면서 쑥잎을 쓰다듬습니다. 쑥잎 곁에서 하얗게 꽃을 피운 곰밤부리도 가만히 어루만집니다. 곰밤부리 둘레에서 보랏빛 꽃송이를 앙증맞게 터뜨린 봄까지꽃도 살며시 건드립니다. 빗방울이 톡 터지듯이 퍼집니다. 풀거미가 사는 거미줄에도 빗방울이 조롱조롱 달리고, 겨울을 이기고 맺힌 꽃눈하고 잎눈에도 빗방울이 알롱달롱 달립니다.


  우리 집에서 돋는 봄풀이 우리 식구한테 새로운 숨결이 되어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들여다봅니다. 우리 이웃집에서 돋는 봄풀은 우리 이웃집 사람들한테 싱그러운 숨결이 되어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바라봅니다. 이웃 마을과 들에서 돋는 봄풀은 모든 이웃한테 사랑스러운 숨결이 되어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지켜봅니다. 2016.2.13.흙.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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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의 재발견 - 소리 풍경의 사상과 실천
토리고에 게이코 지음, 한명호 옮김 / 그물코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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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228



‘소음’한테 자리를 빼앗긴 ‘소리’를 되찾기

― 소리의 재발견

 토리고에 게이코 글

 한명호 옮김

 그물코 펴냄, 2015.9.20. 12000원



  아침이 되면 아침을 여는 소리를 듣습니다. 도시에서는 도시대로 아침 소리를 듣고, 시골에서는 시골대로 아침 소리를 들어요. 봄에는 봄대로 봄 소리를 듣고, 겨울에는 겨울대로 겨울 소리를 듣지요.


  아침마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늘 다른 소리가 찾아오는구나 하고 느낄 수 있습니다. 시골이 아닌 도시여도 아침하고 새벽하고 낮하고 저녁하고 밤은 늘 다른 소리가 흐릅니다. 숲이 아닌 도시여도 봄하고 여름하고 가을하고 겨울에는 언제나 다른 소리가 흘러요.


  도시에 있기에 늘 같은 소리이지 않고, 시골이나 숲에 있기에 언제나 다른 소리이지 않아요. 해가 움직이는 결을 살피면서 바람이 흐르는 결을 느낄 수 있다면, 우리는 언제 어디에서라도 새롭게 태어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어요.



오늘날에는 명소라고 하면 대개 벚꽃 명소 등 시각적 경치를 즐길 수 있는 곳을 떠올린다. 그런데 당시 에도 거리에는 벌레 소리라는, 자연의 콘서트를 즐길 수 있는 특별한 장소가 있었다. (13쪽)


숲에서 울리는 소리는 단지 ‘공기의 진동인 음향’이 아니다. ‘싱싱(しんしん,소복소복)’이라는 기이한 소리는 깊은 산속의 냉기, 나무들의 향기, 산의 신비 등을 전부 결합한 전체적인 감각이다. (21쪽)



  토리고에 게이코 님이 쓴 《소리의 재발견》(그물코,2015)을 읽으면서 소리를 새롭게 헤아려 봅니다. 새가 노래하는 소리라 하더라도, 까치랑 까마귀가 노래하는 소리가 다릅니다. 까치떼랑 까마귀떼가 노래하는 소리도 달라요. 참새와 박새와 콩새와 딱새가 노래하는 소리가 다르고, 제비와 직박구리와 물까치가 노래하는 소리가 달라요. 개똥지빠귀하고 검은지빠귀가 노래하는 소리도 사뭇 다르고요. 그런데 우리가 새를 눈여겨보지 않으면 새마다 다른 노래를 느낄 수 없어요. 새를 눈여겨보지 않으면 새가 노래하는 줄 아예 못 느낄 수 있어요.


  마주앉은 사람을 찬찬히 바라보지 않으면 마주앉은 사람이 들려주는 말을 듣지 못해요. 마주앉은 사람을 찬찬히 바라보면서 마음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나와 마주앉은 사람이 들려주는 말을 한귀로 듣더라도 다른 한귀로 이내 흘려 보내고 말지요.


  소리를 다시 찾는다고 할 적에는, 소리하고 얽힌 삶과 살림을 다시 찾는다고 하는 셈이라고 봅니다. 소리를 새롭게 찾는다고 할 적에는, 소리를 둘러싼 삶과 살림을 새롭게 찾는다고 하는 셈이로구나 싶어요.



음악가는 이제 오로지 콘서트홀 안의 소리에만 관심을 집중하며 바깥의 환경음에는 귀 기울이지 않는다. (41쪽)


‘꽃’과 ‘황성의 달’의 작곡자로 널리 알려진 다키렌타로는 어떤 소리 풍경 속에서 소년 시절을 보냈을까. 그의 감성을 키운 것은 어떤 소리 풍경이었을까 하는 것에 흥미를 느꼈다. 그가 살던 옛집의 소리 풍경을 알 수 있다면 방문객들이 이를 조금이라도 체험할 수 있도록 소리 풍경을 설계하는 것을 프로젝트의 기본 콘셉트로 삼고 싶었다. (148쪽)



  《소리의 재발견》은 우리를 둘러싼 소리가 ‘소리’인지 ‘소음’인지 ‘노래’인지 ‘가락’인지 ‘결’인지, 아니면 이도 저도 아닌지, 아니면 이 모두를 아우르는 숨결인지를 생각해 보자고 이끕니다. 오직 눈에만 기대어 바라보는 삶과 살림이 아니라, 귀를 열고 마음을 열면서 온몸과 온마음으로 삶과 살림을 바라보자고 이야기해요.


  일본에서 어느 작곡가 옛집을 되살리는 일을 맡은 적에 있다는 글쓴이는, 작곡가하고 얽힌 유물이나 건축에만 마음을 쓰기보다는 ‘노래를 지어서 사람들한테 선물처럼 들려준 숨결’이 되기까지 ‘작곡가 한 사람이 이녁 보금자리에서 늘 들은 소리’가 무엇인가에 깊이 마음을 쓰려고 했답니다. 그래서 어느 작곡가 옛집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작곡가 한 사람이 늘 들은 소리’를 함께 들을 수 있도록 그곳을 꾸미려 했다고 해요.


  이런 이야기를 읽다가 문득 전남 벌교에 있는 ‘태백산맥 문학관’이나 전북 전주에 있는 ‘혼불 문학관’이나 강원 원주에 있는 ‘토지 문학관’ 같은 곳이 떠오릅니다. 태백산맥이라는 문학을 기리는 문학관에 찾아가면 ‘태백산맥이라는 작품에 나오는 전라도 고장말’을 얼마나 듣거나 느낄 만할까요? 혼불이라는 문학을 기리는 문학관에 찾아가면 ‘혼불이라는 작품에 나오는 삶말’을 어느 만큼 듣거나 느낄 만할까요? 토지라는 문학을 기리는 문학관에 찾아가면 ‘토지라는 작품과 얽힌 사랑과 삶과 꿈이 흐르는 말’을 어떻게 듣거나 느낄 만할까요? ‘말’을 다루는 문학인데, 막상 문학관에서는 ‘말소리’나 ‘말결’이나 ‘말투’에는 거의 마음을 못 기울이지 않느냐 싶어요.



풍경이란 원래 오감으로 파악하는 것이고, 거기에는 본래 소리의 요소도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풍경의 존재 방식을 염두에 둔다면 귀로 파악한 풍경만을 따로 끄집어내서 소리 풍경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부자연스럽다. 하지만 굳이 소리 풍경이라고 한 것은 풍경에 본래 있어야 할 것이 포함되어 있지 않은, 즉 소리가 거의 의식되지 않는 현대 사회의 상황 때문이다. (181쪽)



  우리가 소리를 되찾거나 되살리려고 한다면, 전남 벌교에 있는 문학관에서는 ‘벌교말’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으면서 지리산 자락에서 흐르는 바람소리를 들을 만해야 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부산에 있는 박물관이나 문학관이라면, 마땅히 부산말로 이야기를 듣고 자료를 살피거나 돌아볼 만해야 하지 않으랴 하고 생각해요. 이를테면 이런 것도 있어요. 대구에 있는 롯데리아에서는 ‘대구말로 주문을 하고 셈을 치를’ 수 있으면 재미있고, 광주에 있는 맥도널드에서는 ‘광주말로 주문을 하고 셈을 치를’ 수 있으면 재미있을 테지요. 서울 표준말은 서울에서 쓰도록 하고, 대전에서는 대전말을 울산에서는 울산말을 제주에서는 제주말을 ‘고장 표준말’로 삼을 수 있으면 얼마나 재미있을까 싶어요.


  《소리의 재발견》이라는 책은 우리가 현대문명에 길들면서 스스로 잊은 ‘소리 풍경’을 스스로 되찾기를 바라는 마음을 들려줍니다. 눈으로만 바라보는 풍경이 아니라 소리로도 누리는 풍경이 되고, 냄새로도 누리는 풍경이 되며, 살갗으로도 누리는 풍경이 될 때에 오롯이 참다운 풍경이 되리라 하는 이야기를 이 책에서 들려줍니다.


  그러고 보면 그래요. 밥 한 그릇은 맛으로만 먹지 않아요. 눈으로도 먹고, 냄새로도 먹지요. 또 아삭 바삭 아구 냠냠 씹는 소릿결로도 먹어요. 밥상맡에 둘러앉은 사람들이 나누는 이야기라든지 기운으로도 함께 먹지요.


  소리를 되찾으면서 풍경뿐 아니라 삶을 되찾습니다. 소리를 새롭게 찾으려 하면서 살림살이를 되찾고, 서로서로 기쁘게 나눌 사랑을 되찾습니다. 4349.1.26.불.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6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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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의 실천
게리 스나이더 지음, 이상화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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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226



학교에서 말을 가르치는 까닭은?

― 야생의 실천

 게리 스나이더 글

 이상화 옮김

 문학동네 펴냄, 2015.12.12.18. 13000원



  1990년에 미국에서 “The Practice of the Wild”라는 이름으로 나온 책을 한국말로 옮긴 《야생의 실천》(문학동네,2015)을 읽습니다. 이 책은 지난 2000년에 《야성의 삶》이라는 이름으로 한 번 나온 적 있습니다.


  ‘야성(野性)’이라는 한자말은 “자연 또는 본능 그대로의 거친 성질”을 뜻하고, ‘야생(野生)’이라는 한자말은 “산이나 들에서 저절로 나서 자람”을 뜻합니다. 새로운 번역으로 나온 책에 붙은 ‘야생’은 ‘야생마·야생화’처럼 쓰기도 하는데, 이는 한국말로 ‘들말·들꽃’을 가리켜요. 그러니까 야생이란 ‘들’을 나타내는 셈이고, 야성이란 들 같은 숨결을 나타내는 셈입니다.


  지난날에 함석헌 님은 ‘들사람’을 말한 적이 있어요. ‘들사람’이란 바로 ‘야생인’이라 할 테고, 이는 야성으로 살거나 야생인 삶이라 할 테지요.



‘자연’이라는 말 자체는 위협적인 말이 아니지만, ‘야생’의 개념은 문명사회에서는 유럽이나 아시아에서나 똑같이 종종 제멋대로임, 무질서, 푹력과 연결됩니다. (29쪽)


야생지의 문화들은 자급자족 경제가 가르쳐 주는 삶과 죽음의 교훈에 맞춰 삽니다. 그러나 지금 ‘야생적인’이라든지 ‘자연’이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할 수 있을까요? (32쪽)



  우리는 들에서 나고 들에서 죽는 사람일까요? 사람이 살아온 발자국을 가만히 돌아봅니다. 예부터 지구별 삶을 돌아보면 누구나 들에서 나고 들에서 죽었지 싶습니다. 들에서 난 목숨은 들에서 자라는 목숨(풀, 열매)을 먹어요. 들에서 자라던 목숨은 들로 돌아가서 새로운 흙이 됩니다. 몸뚱이는 들에서 돌고 돕니다. 몸뚱이는 들에서 새로 깨어나고 새로 살다가 새로운 들이 되어요. ‘논밭’이란 ‘들’을 가리키는 이름이기도 하고, 들판이나 들녘 같은 말은 우리 스스로 먼 옛날부터 누구나 들사람이었다는 대목을 넌지시 비추지 싶어요.


  그렇지만, 오늘날 지구 사회는 물질문명이 넘치면서 도시가 커집니다. 고작 서른 해나 쉰 해 앞서만 해도 거의 모든 사람들이 들에서 나고 자라다가 들로 돌아갔다면, 이제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들이 아닌 도시에서 나고 자라다가 도시에서 자취를 감추어요. 이제 오늘날 지구에서 거의 모든 사람들은 들을 볼 겨를이 없고 들길을 걸을 틈도 없으며 들내음을 맡을 말미조차 얻기 힘들어요.


  참말 오늘날 사회에서는 들바람을 쐬기가 어렵기에 어떻게든 틈을 내어 ‘올레 걷기’처럼 스스로 온몸을 맡기면서 숲이나 들을 걸으려고 하는구나 싶습니다. 이렇게 하지 않고서는 도시 사회나 문명 사회에서 버티기 어려울 테니까요.



학교에서 언어를 가르치는 목적은 우리를 얼마 안 되는 언어행동 영역의 울 안에 가두고 몇 가지 선호하는 특징들만을 양성하자는 것입니다. 직업을 구하거나 파티석상에서 사회적 신용을 주는 데나 도움이 될 문화적으로 한정된 엘리트 형식들인 것이지요. (51쪽)


걷는 일은 굉장한 모험이며 최초의 명상이며 인간에게는 으뜸가는 진심과 영혼의 실천입니다. (52쪽)



  《야생의 실천》을 쓴 게리 스나이더 님은 이 책을 빌어 ‘학교에서 말을 가르치는 까닭’을 찬찬히 짚습니다. 사람들이 스스로 삶을 지어서 살지 못하도록, 그러니까 사람들이 자급자족을 하지 못하도록 하면서, 도시에서 문명 사회로 스며들어 일자리를 찾거나 문화를 누리는 데에 얽매이도록 하려는 뜻으로 학교에서 말을 가르친다고 이야기해요.


  그러고 보면, 교과서에서 다루는 말이나 사회에서 쓰는 말은 ‘도시에서 지내기에 어울리는 말’입니다. 교과서를 비롯해서 수많은 인문책이나 신문이나 방송에서 흐르는 말도 ‘도시에서 문화를 누리기에 어울리는 말’이에요.


  참말로 교과서나 인문책에는 농사짓기하고 얽힌 말이 나오지 않아요. 고기잡이하고 얽힌 말도 나오지 않아요. 어머니가 아기를 낳아서 돌보는 살림하고 얽힌 말도 나오지 않습니다. 씨앗을 심고 가꾸는 시골말뿐 아니라, 집을 짓고 밥을 지으며 옷을 짓는 살림살이를 두루 아우르는 말도 나오지 않습니다. 풀이나 꽃이나 나무를 가리키는 말도 나오지 않고, 방아나 절구나 베틀이나 물레나 빨래나 낫이나 호미 같은 말도 교과서하고는 아주 동떨어진 말이거나 박물관에 갇힌 말이기 일쑤예요.



모든 전통 문화에는 춤이 있습니다. 춤을 공부하러 올 때 젊은이들은 그들의 비길 데 없는 영원한 아름다움과 힘을 함께 가져옵니다. (110쪽)


신성한 산과 그 산으로의 순례는 아시아에서는 깊이 자리잡은 민중종교의 특징입니다. (198쪽)



  ‘걷기’가 대단한 모힘이며 명상이고 실천이라고 밝히는 게리 스나이더 님은 지구별 모든 곳에서 오래도록 이어온 삶에서는 ‘춤’이라고 하는 기쁨이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러면서 ‘거룩한 산’을 이야기해요.


  춤이란 무엇일까요? 방송에 나오는 연예인이 궁둥이만 흔드는 몸짓이 춤일까요? 산이란 어디일까요? 온갖 장비와 옷을 갖춘 뒤에 오르락내리락하는 데가 산일까요?


  어떤 틀이 있어서 그 틀에만 맞추어야 하는 춤이라고 느끼지 않아요. 아이들이 즐기는 춤을 보면 그야말로 몸 가는 대로 손이며 발이며 뻗고 활짝 웃어요. 남 눈치를 보면서 춤을 추는 아이는 없어요. 그야말로 신나고 즐겁게 춤을 춥니다.


  산이라고 하는 곳은 ‘산’일 뿐 아니라 ‘숲’입니다. 나무 한 그루 없는 데를 놓고 ‘거룩한 산’이라 하지 않아요. 나무가 우거지고 풀이 곱게 드리운 숲일 때에 비로소 산다운 산이에요. 숲짐승이 있고 숲바람이 부는 고즈넉하고 그윽하며 고요한 곳이 바로 아름다운 숲이면서 산입니다.



오늘날 지중해에서 사는 사람들은 그들의 잿빛 암산이 한때는 작은 숲과 야생동물이 풍부한 곳이었다는 것조차 모릅니다. 집중적인 파괴는 농업 유형의 한 기능이었습니다. (255쪽)


딸기는 누구를 위한 것일까요? 딸기는 새와 곰을 유혹해서 기꺼이 먹힙니다. 그것은 선물입니다만 또한 답례이기도 합니다. 열매의 씨앗이 그들에게 실려 멀리 갈 것이기 때문이지요. (315쪽)



  《야생의 실천》을 읽으면서 오늘 우리가 얻은 것과 잃은 것을 차분히 되새깁니다. 오늘 우리가 얻은 것이라면 컴퓨터와 인터넷과 스마트폰과 자가용과 고속도로과 텔레비전 같은 것일까요? 오늘 우리가 잃은 것이라면 자급자족과 두레와 품앗이와 마을과 사랑 같은 것일까요?


  오늘 우리는 돈을 벌고 쓰는 살림을 얻습니다. 오늘 우리는 마음을 가꾸고 사랑을 나누는 살림을 잃습니다. 오늘 우리는 학교를 다니면서 졸업장과 자격증을 얻습니다. 오늘 우리는 집에서 어버이가 사랑으로 가르치고 물려주는 살림을 잃습니다. 오늘 우리는 도시라고 하는 문명 사회를 얻습니다. 오늘 우리는 시골과 숲과 산과 들이라고 하는 터전과 보금자리를 잃습니다.



커다란 정신의 내부에 있는 것처럼 동물과 인간은 모두 말할 수 있지요. 그리고 이곳을 통과한 자는 남을 치유하고 도와줄 힘을 갖게 됩니다. (320쪽)


우리 문화가 불을 밝히는 것은 우리가 어떤 현실의 일을 함께하고, 혹은 놀고, 이야기를 들려주고, 문제를 일으킬 때, 또는 누군가가 아프거나 죽거나 태어날 때, 혹은 추수감사절 같은 모임에서입니다. (347쪽)



  나는 우리 집 두 아이하고 시골에서 살며 이 아이들을 학교나 유치원이나 학원 어느 곳에도 보내지 않습니다. 우리 집이 고운 보금자리가 되면서 즐거운 삶터가 되고 앞으로는 너른 숲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집에서 아이들이랑 함께 배우고 가르칩니다. 아이들이 졸업장을 따기보다는 말다운 말을 삶에서 배우기를 바라면서 이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아요. 아이들이 문명인이나 사회인이 되기보다는 슬기로운 어른이 되고 씩씩한 사람으로 자라기를 바라면서 집에서 함께 배우고 가르칩니다.


  그러고 보면, 아이에 앞서 나부터 들사람이나 시골사람이나 숲사람으로 거듭나려는 꿈으로 사는 셈입니다. 나도 아이도 함께 웃고 노래하고 춤추고 이야기꽃을 피우면서 고운 들사람으로 거듭나고 예쁜 시골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며 슬기로운 숲사람으로 살림을 가꾸려는 꿈을 키웁니다.


  “야생의 실천”이란 “들을 살다”를 가리키지 싶습니다. 들내음을 맡고 들바람을 마시면서 들꽃을 마음밭에서 피울 수 있는 살림일 때에 “들을 살다”라 말할 수 있지 싶습니다. 손수 흙을 일구고 손수 씨앗을 심어서 손수 살림을 짓는 하루를 누릴 적에 바야흐로 “들을 살다”라 말하면서 가없는 기쁨으로 이웃하고 어깨동무를 할 수 있지 싶어요. 내 넋이 ‘들넋’이 되기를 빕니다. 내 손길이 ‘들결’ 같은 사랑이 되기를 빕니다. 내 몸짓이 ‘들춤’처럼 흐드러지기를 빕니다. 4349.1.15.쇠.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6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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