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는 꽃도 아름답다
문영이 지음 / 달팽이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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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익산에서 살아가시는 할머님 모습


- 책이름 : 지는 꽃도 아름답다
- 글 : 문영이
- 펴낸곳 : 달팽이(2007.6.5.)
- 책값 : 7000원



 이 책 하나 21 ― 할머니 삶터도, 내 삶터도 아름다워요
 : 《지는 꽃도 아름답다》를 읽으며



 〈1〉 내가 발딛고 있는 삶터


 태어나고 자란 인천을, 지난 1995년 4월 5일에 떠났습니다. 그리고 2007년 4월 15일, 열두 해 만인지 열세 해 만인지 돌아왔습니다. ‘텔레비전 소리 시끄러운 집안 분위기’ 탓에 인천 부모님 집에서 더 살기 싫어지기도 했지만, 새로 지은 널따란 아파트 방 한켠에서 지내는 일은 꼭 옥살이와 같다고 느꼈습니다. 사람 사이에서 살고 싶었고, 이웃과 어깨동무하고 살고 싶었습니다. 아버지는 넓은 집으로 옮겨 가고 싶어하셨지만, 저는 ‘이렇게 넓지 않아도 좋다’고, 마흔여덟 평짜리 새 아파트보다는, 연탄 때는 낡고 조그마한 5층짜리 아파트였어도, 열세 평짜리 헌 아파트가 훨씬 낫다고 느꼈습니다. 이곳에서는 옆집과 윗집과 아랫집 모두 사촌과 다름없는 이웃이었고, 동네 할머니 할아버지가 모두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와 같았고, 동네 아이들은 모두 제 동생이었으며, 동네 형들은 제 친형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 나도 어릴 때는 어른들 새벽잠 없는 내력도 몰랐고, 번개같이 움직이는 칼날 밑에서 실같이 이어져 내리던 실고추 내력도 몰랐다. 그리고 고단한 잠 깨워 이른아침 대참에 찬이슬로 얼굴 씻기시는 어머니 마음은 더더욱 몰랐다 ..  〈13∼14쪽〉


 나어린 사람한테 열 몇 해는 얼마나 긴 세월일까요. 키가 우쑥우쑥 자라고 몸집이 덩실덩실 커집니다. 나이든 사람한테 열 몇 해는, 늙은 나이에 숟가락 몇 번 더하는 세월일까요. 인천을 떠나기 앞서 보았던 그 골목길이 그대로인 곳에서는 ‘그동안 햇볕에 조금 더 바래고 먼지와 차방귀에 조금 더 까매졌을’ 뿐, 이제나 그제나 다름없는 집과 길과 나무를 만납니다. 그동안 좀더 많은 사람과 일을 겪었을 뿐, 이제나 그제나 다름없이 허리 구부정하고 얼굴에 주름살 가득한 어르신들을 골목길에서 만납니다.


.. 그런데 지난해부터 남편이 조청을 못 만들게 한다. “사서 먹는 것보다 돈도 더 들고, 욕보고” 하지만, 내 건강이 예전 같지 않음을 걱정해서란 것을 안다. 슬며시 ‘그럴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떡방앗간에 가 보면 설탕가루나 당원 봉지를 툭툭 터서 쌀가루에 섞는 것을 보면서, ‘우리 입맛을 버려 놓는 곳이 바로 이곳이구나’ 생각했다. 우리 집 떡을 할 때는 고명이나 떡가루에 그런 잡스런 것을 못 넣게 지킨다. ‘요즘 사람은 다 단것을 좋아한다’고 떡을 하러 온 사람이나, 방앗간 주인이 말리지만, 나는 그 고집을 꺾지 않는다 ..  〈160쪽〉


 문득, 나고 자란 이곳에서 우리 아버지 어머니가 좁고 자그마한 집이기는 해도 마당이나 텃밭 딸린 집에서 오순도순 지내셨다면 당신들께서 인천을 떠나셨을까 싶은 생각(부모님은 인천을 떠나 용인에서 살다가 음성으로 옮기셨습니다). 덧붙여 제가 인천집을 싫어하며 떠났을까 싶은 생각.

 마당이나 텃밭 딸린 집이었다면 마땅히 나무 한 그루를 어린나무로 심거나 씨앗으로 심었을 테지요. 그 나무가 여태껏 자랐다면 나즈막한 지붕을 훌쩍 넘어 담벼락 바깥 골목길까지 그늘을 드리우거나 열매 달린 가지를 내어주었겠지요. 부모님은 부모님대로, 저는 저대로 기둥 굵게 자란 나무를 보며 집구석을 애틋하게 돌보았겠지요.

 창영동, 금곡동, 송현동, 송림동, 화평동, 만석동, 인현동, 송월동, 전동, 북성동, 송학동, 내동, 용동, 답동, 율목동, 신포동, 신생동, 신흥동, 유동, 항동, 선화동, 숭의동, 도원동, 도화동, 주안동, …… 4월부터 다섯 달 동안 두 다리와 자전거로 골목골목 누비고 다니면서 동이름을 하나하나 읊어 봅니다. 어머니 손을 붙잡고 신흥동에서 신포동까지 장보러 걸어오던 일, 북성동을 지나 신생동 은행에 들렀던 일, 답동과 율목동을 가로지르는 싸리재를 넘나들던 일, 국민학교가 있던 신흥동 둘레 숭의동과 선화동과 도원동에 사는 동무네 집에 뻔질나게 드나들던 일, 기찻길로 석탄이 들어오면 연탄공장에서 연탄 찍어서 기찻길로 다시 서울 쪽으로 빠져나가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일, 기차가 안 다닐 때면 하나부터 천까지 헤아리며 기찻길을 밟고 주안동까지 걸어서 오가던 일을 곰곰이 되짚습니다.

 재개발과 도심정비사업과 구시가지정화라는 달콤쌉싸름한 이름을 내건 막개발로 사라진 조그맣고 지붕 낮은 한 층짜리 집들을 떠올립니다. 아직까지 골목집으로 꿋꿋하게 남아 있으면서 해가 뜨면 빨래나 이불을 내놓아 말리고, 아주머니와 할머니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해바라기를 하는 골목길을 생각합니다. 당신들은 예나 이제나 골목길 한쪽에서 일을 합니다. 잠깐잠깐 쉬는 가운데에도 두 손은 재게 놀려 굴이나 조개를 까거나 나물을 다듬어 저잣거리에 내다 팔 준비를 합니다.


.. 나는 무슨 먹을거리든 주된 재료 맛을 살리는 것을 으뜸으로 삼는다. 모든 떡을 소금간만 하듯, 김치도 무배추가 지닌 단맛을 살리려 많은 양념을 넣지 않는다. 올해는 통깨 넣는 것도 그나마 잊어버렸다 ..  〈155쪽〉


 머잖아 재개발로 쓸려나갈 주안동, 수봉공원 옆쪽 구석진 동네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서 감나무를 사진에 담을 때입니다. “거, 뭐하시오?” “네, 감나무가 좋아서 사진으로 담으려고요.” “허, 감나무는 뭐하러 찍나?”

 왜 사진 찍느냐고 말을 건 아저씨네 집에서 자라는 감나무도 찍을걸 그랬나요. 아저씨네 감나무를 사진으로 담았다면, 그 아저씨는 무어라 대꾸를 하셨을까요.

 지난 일요일, 송림동 달동네에 있는 꽃집(꽃을 파는 집이 아니라, 꽃을 많이 키우는 집입니다. 꽃그릇 숫자가 쉰은 훌쩍 넘을 듯하고, 온 집이며 마당이며 남새밭으로 가꾸어 놓아서, 꽃집이라는 이름을 붙여 보았습니다)에서 사진 몇 장 찍고 있으니, 집임자 아주머니가 2층 난간에 기댄 채 물끄러미 내려다봅니다. 잘 자란 까마중을 살짝 쓰다듬고 지나갑니다. 까마중을 따먹었다면 아주머니가 무슨 말씀을 하셨을까나.


.. 어차피 살림은 정성이다. 물을 쓸 때도 무엇을 먼저 씻을까 차례를 잡아서 씻고, 불을 쓸 때도 불을 한 번 지펴 차례를 잡아 잇달아 쓰다가, 시간이 맞지 않을 때만 옆 불구멍을 잠깐 열고 쓰면 좋을 것을 ..  〈148쪽〉


 지난 수요일, 자전거로 광명에서 구로를 지나고 대림동을 지나고 당산동을 지나 신촌까지 달렸습니다. 한참 도림동을 지나갈 무렵에는 일부러 오르락내리락하는 달동네 안쪽 골목길로 접어들었습니다. 서울 도림동 골목집도 조금 묵은 집마다 크고작은 꽃그릇을 계단이며 난간이며 담벽 위며 조그마한 틈이라도 있으면 한둘이든 몇몇이든 올려놓습니다. 좀더 오래 구석구석 돌아보지 못해서 고추 말리는 집까지 보지는 못합니다. 요즈음 인천 동구 골목집들은 고추 말리기가 한창이거든요. 다 말리고 거두어들인 집도 있으나, 웬만한 골목길마다 ‘차 못 다니는 좁은 길’이면, ‘차 뜸한 길’이면 으레 한쪽으로 길게 고추를 펼쳐놓습니다. 비가 오면 비닐이나 천막을 씌워 놓습니다.


.. 옥수수밭을 매고, 나머지 덩굴콩도 심었다. 덩굴콩이란, 빛깔이나 모양이 제비콩 같으면서 동글동글한데, 맛은 그보다 훨씬 좋은 콩이다. 이름을 몰라, 유난히 덩굴져 오르기를 좋아해서 내가 붙인 이름이다 ..  〈120쪽〉


 어제는 항동에서 집으로 걸어옵니다. 우산이 없어서 택시나 버스를 탈까 싶었지만, 가방에 든 것은 비닐로 꽁꽁 싼 다음 걷기로 합니다. 장대처럼 쏟아지다가 멎고, 가늘게 내리다가 이내 굵어지고, 그러다가 다시 멎는 비. 답동성당 옆으로 지나갈 때 뒤따르던 차가 빵빵거립니다. 10초만 기다려 주면 빵빵거리지 않고도 우리 옆으로 스쳐 지나갈 틈이 나오는데. 골목길 한쪽에 함부로 대놓아 길을 좁게 하는 자동차를 보며 빵빵거리지 않는 차들입니다. 꼭 사람한테만 빵빵거립니다.


.. 옛 방식대로 버려지는 쌀뜨물로 그릇을 씻고, 빨래는 환경친화비누로 쓰는 일을 철저한 사명으로 지킨다면 맑은 냇물이 간직되고, 떠났던 가재와 물고기들이 다시 돌아오게 될 것이다. 시냇물이 살아나 예전같이 아무 데서나 손으로 물을 움켜 마실 수 있다고 생각하고, 산을 찾는 배낭 속에서 물병을 빼고 그것을 돈으로 셈해 보면(플라스틱 물병까지) 엄청나리라 ..  〈101쪽〉


 국민학교 다닐 때에는 비가 와서 물이 차거나 넘치는 곳에 가서 헤엄을 치며 놀았습니다. 옛 시외버스터미널 앞길은 비가 조금만 와도 물이 찰방찰방. 곱고 멋진 옷 차려입은 어른들은 이제나저제나 버스가 물살을 가르며 와 주나 걱정하며 처마 밑 계단짬에 주루루 서 있고, 저를 비롯한 꼬맹이들은 우산도 없이 비를 맞으며 가슴까지 물이 찬 터미널 앞길에서 신나게 놉니다.


.. 거름으로 쓰이는 쓰레기는 밥상에 올려지는 밥만큼이나 정갈하게 골라낸 다음이라야 쓸 수 있다. 비닐조각은 없느냐? 유리조각이나 건축폐기물은 아니냐? 화학약품이나 많은 소금기는 없느냐? 건전지, 깡통, 수은, 쇠붙이는 섞이지 않았느냐? ……… 땅도 땅 나름대로 깨끗한 정성을 쏟아야 소화해 내고 살이 된다 ..  〈88쪽〉


 제가 중학생일 때 형은 고등학생. 형은 우산을 거의 안 가지고 다녔습니다. 내리는 비를 그예 맞고 다녔습니다. 어머니는 나한테 우산을 둘 쥐어 주면서 형한테 주라고 하지만, 형은 우산을 받지 않습니다. 저는 우산을 들어 형한테 씌워 주지만, 형은 발걸음을 빠르게 놀리며 비를 맞고 가겠다고 합니다. 비오는 날이면 늘 되풀이되는 실랑이였는데, 오래지 않아 저도 형을 따라 우산을 접고 비를 맞으며 학교를 오갑니다.


.. 자연을 관광자원으로 개발하겠다는 말은 언제 들어도 가슴이 철렁하다. 자연은 자연 그대로일 때가 가장 아름다워서이다 …… 그리 높지도 깊지도 않은 그런 곳에 아스팔트길이 왜 있어야 할까? 몇 십 몇 백 년을 자란 숲을 어떻게 그리 쉽게 벨 생각을 했을까? ..  〈79∼80쪽〉


 아무 걱정도 생각도 근심도 마음도 없이 비를 맞고 걷던 적이 언제였을까. 내리는 비를 하염없이 맞으며 걷기로 하니, 빗방울이 튀어 옷을 적셔도 괜찮습니다. 비가 쏟아지는 길에서 사진기도 비를 맞히며 걷습니다. 골목길 사진 몇 장 찍고 있으니, 옆지기가 “또 흑백으로 찍어요? 비오는 날은 칼라로도 찍어 줘요.” 하고 이야기합니다. “네, 알았어요.” 대꾸하고는 렌즈 앞에 끼운 필터를 빼고 흑백으로 맞춥니다.

 비오는 날 구름을 흑백으로 찍으면 빛도 구름 그림자도 한결 또렷합니다. 빛깔있는 사진으로 찍으면 빗물에 촉촉히 젖어드는 계단이며 골목집 꽃그릇이며 알록달록한 느낌이 살아납니다.


.. ‘요새 젊은이들은 버릇이 없다’고만 생각하지 말고, 바뿐 내 아들딸을 생각하여 고생을 마다하지 않듯이, 늙은 사람도 할 수만 있다면 고단한 젊은이들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마음도 있어야겠다. 자리를 양보 받고 마땅히 받아야 할 자리를 받은 것 같은 마음은 없었는지? 그리하여 건성인 인사치레는 없었는지? 나를 돌아보았다 ..  〈70쪽〉


 예배당에서 나온 듯한 아주머니들이 우산을 쓰고 골목을 걷습니다. 이 가운데 한 분이 신을 벗고 양말발로 걷습니다. 쏟아지기도 하지만 골목길을 줄줄줄 흐르는 빗물 때문에 신을 신으나 마나겠지요.


.. 오빠는 내게 가벼운 심부름 한 번 시키는 일이 없었지. 삼촌들이 어쩌다, “영이야 물 한 그릇 다오.” 하면, “삼촌, 영이도 삼촌하고 똑같은 학생이여. 왜 그 애한테 심부름을 시켜.” 하고 오빠보다 두 살 아래인 삼촌에게 싫은 눈치를 보냈지 ..  〈41쪽〉


 집에 닿습니다. 젖은 옷을 벗고 젖은 가방을 풀어 놓습니다. 가방을 열어 비닐봉지에 담긴 책을 꺼내어 펼쳐놓습니다. 몇 권이 살짝 젖었네요. 비닐봉지에 작은 구멍이라도 나 있는 듯합니다. 가방 빨아 본 지 꽤 되었구나 싶어, 이 김에 함께 빨아야겠다 생각합니다.

 젖은 옷가지와 가방을 들고 살림집이 있는 4층으로 올라가며 창밖을 잠깐 내다봅니다. 어, 고추잠자리 한 마리가 전깃줄을 붙잡고 앉아 있네요. 흔하디흔한 고추잠자리가 이제는 찾아보기 아주 어렵게 되었다는데. 요 고추잠자리가 우리 집 창가 전깃줄에서 비긋기를 하고 있군요.


.. ‘이제 나도 벌레먹은 옥수수가 내 몫이구나.’ 지금 딸아이는 이런 내 모습이 얼마나 아득한 딱한 일로 보일까? 그 마음 이렇게 잠깐인 것을……. “오늘은 벌레먹은 것까지 어렵지 않게 다 팔고 왔다.”며 어린 아들딸 앞에서 즐거워 할 그 옥수수장수를 떠올리며 나도 덩달아 즐거워지는 것은 무슨 마음일까? ..  〈31쪽〉


 밤새, 새벽내, 또 아침나절까지 해가 났다가 비가 쏟아졌다가 가랑비로 바뀌었다가 갰다가 되풀이됩니다. 바람은 몹시 붑니다. 뒷집 너머로 있는 전철길에서는 5분에 한 대쯤 지나가는 전철 소리가 꾸준히 이어집니다. 때때로 석탄 실은 짐열차가 지나갈 때면 구르르릉 하면서 건물이 조금조금 흔들립니다. 1958년에 지은 건물인데, 여태껏 저 짐열차 구르르릉에도 잘 견디며 서 있군요.


.. 식혜가 검은빛이 나는 것은 밥이 적게 들어간 것이고, 따라서 달지 않아 설탕을 많이 넣은 억지 맛이다 ..  〈160쪽〉


 〈2〉 일흔세 살 할머님 이야기


 이야기책 《지는 꽃도 아름답다》를 너덧 번 읽습니다. 우리 할머니는, 또 우리 어머니는 어떻게 살아오셨는가 돌아보면서.

 책읽을 틈이 없이 바쁘게 산다는 동무나 선후배한테 이 책을 사서 선물해 줍니다. “너희 할머님이 살아온 이야기라고 생각하면서 읽어 봐.” 하고 말하면서.

 남편바라지에다가 딸아들바라지로 젊은 날을 다 바친 문영이 할머님은, 마지막 아이가 제금을 난 다음, ‘이제부터는 내 하고픈 일을 하나 해 볼라요’ 하고 남편한테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 그러면 그렇게 하시오’ 하고 선선히 받아 주는 말을 듣고, 예순세 살이던 1997년에 문학강의를 처음으로 들어 봅니다. 그 뒤 당신이 지나온 삶을 돌아보면서 띄엄띄엄 짤막한 글을 쓰셨고, 2003년 8월에 이오덕 선생님 책 《우리 글 바로쓰기》를 읽으며, ‘내가 참 바른 말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살아왔구나’ 하고 깨달으면서, 당신이 썼던 글을 ‘우리 글 바로쓰기’에 알맞게 추슬렀습니다. 머리가 허옇게 된 ‘흰바가지’가 되었으나 “동네에 불이 나면 물지게를 지고, 물동이를 이고, 자배기를 안고 저마다 오직 불을 꺼야 한다는 한 생각으로 뭉치던 사람들”처럼 자그마한 글 하나를 써서 나누면서, 말이며 삶이며 사람이며 땅이며 곡식이며 살릴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4340.9.20.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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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포늪 - 원시의 자연습지, 그 생태 보고서
강병국 글, 성낙송 사진 / 지성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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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이름 : 원시의 자연습지 그 생태 보고서, 우포늪
- 글 : 강병국
- 사진 : 성낙송
- 펴낸곳 : 지성사(2003.1.15.)
- 책값 : 12000원


 이 책 하나 16 ― 내 깜냥대로 살면서 읽는 책
 : 《우포늪》을 차근차근 읽은 뒤



 충주에서 인천으로 살림을 옮긴 지 두 달이 지나갑니다. 태어나기를 인천에서 태어나고, 고등학교 마칠 때까지 인천에서 지냈으나, 그 뒤로 열 몇 해를 인천을 떠나 서울로, 충주로 옮겨다니며 살았어요. 이렇게 고향과 멀어진 채 지내고 돌아와 보니, 예전 가게가 그대로인 곳도 많지만, 길과 골목이 퍽 많이 바뀌었습니다. 재개발을 한다며 골목집을 싹 밀어붙이고 아파트가 들어섰으며, 어떤 골목집은 찻길로 바뀌기까지 했습니다. 지금 인천시장은 2014년 아시아경기대회를 치르기까지 중구와 동구에 있는 골목집을 모조리 허물고 아파트와 쇼핑센터로 새로 지을 꿈에 부풀어 있습니다.

 ‘아파트만이 살 길’인가요. 저잣거리에서 사입는 옷보다 20층이나 30층짜리 우람한 쇼핑센터에서 사입는 옷이 우리한테 더 보기 좋거나 아름다울까요. 복닥이는 저잣거리에서 사먹는 밥보다 40층이나 50층짜리 주상복합센터 식당거리에서 사먹는 밥이 우리 몸에 한결 좋거나 알맞을까요.

.. 일제시대 때 소벌을 한자로 쓰다 보니 뜻 그대로 우포(牛浦)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주민들은 지금도 우포보다는 소벌로 더 많이 부르고 있지요. 참고로 목포(나무벌)는 비가 많이 오면 주변의 나무들이 떠내려오던 곳이라서, 사지포(모래벌)은 모래가 많아서, 쪽지벌은 크기가 작다고 해서 붙은 이름들입니다 ..  〈13쪽〉

 해가 떨어지는 저녁이 되면 날씨가 알맞게 선선합니다. 이 선선한 저녁나절에 아내와 골목길 마실을 나섭니다. 인천 배다리 헌책방골목 한켠에 문을 연 도서관은 저녁 여덟 시에 문을 내리니, 밤마실 나가는 때하고 꼭 들어맞아요. 서울에서 지낼 때에는 저녁 여덟 시면 사람들이 한창 술마시고 떠들고 노는 때, 또는 헌책방에 손님이 가득할 때입니다만, 인천에서는, 또 배다리 헌책방골목에서는 저녁 일곱 시만 되면 가게 불빛이 하나둘 스러지고 조용해집니다. 뭐랄까요, 이웃나라 일본하고 비슷한 느낌이랄까요. 일본만 해도 저녁 예닐곱 시면 가게마다 문을 닫잖아요. 저녁나절은 자기 시간을 보낸다고 하면서. 아침에는 일찍 문을 열고요. 이곳도 그래요. 아침 일찍 가게문 열고 저녁에 알맞춤하게 가게문 내리고.

 그래서 동네 골목길이 저녁이나 새벽에 참 조용합니다. 드문드문 지나가는 차들이 씽씽 달릴 때 내는 귀따가운 소리를 빼놓고는 시끄러운 소리가 없습니다. 거리 등불은 알맞게 어둡습니다. 이러다 보니 골목길에 쓰레기 함부로 버리는 사람이 드물고 술주정으로 떠들썩한 사람 찾아보기 어려워요. 뜨는 해를 보며 하루를 열고 지는 해를 보며 하루를 접으니, 사람몸에는 자연스러움이 배고 더도 덜도 아닌 한가위 보름달 같은 마음을 품으며 산다고 할까요.

 좀더 늦게까지 가게문을 열면 살림돈을 더 벌 수야 있겠지만, 돈 몇 푼 더 벌면서 자기 시간을 빼앗기며 자기 삶을 놓친다면 무엇이 좋을까요. 조금 더 번 돈으로 무엇을 즐길 수 있을까요.

.. 1990년대까지만 해도 가시연은 멸종위기에 처한 식물로 엄격히 보호되고 있었지만, 여러 지역에서 발견되면서 환경부의 보호대상 목록에서 제외되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환경은 점차 나빠지고 있고, 이웃나라 일본에서는 이미 멸종 단계에 있기 때문에 우리 나라의 가시연도 언제 사라질 지 안심할 수는 없습니다 ..  〈24쪽〉

 보름쯤 앞서였나, 도원동 골목길부터 해서 신흥동과 유동께를 거쳐 경동과 율목동을 지나 싸리재를 넘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때 싸리재 언덕길 한켠에 서 있는 길알림판을 보노라니 ‘밤나무골길’이라는 푯말이 보이더군요. ‘밤나무골길’? 이름은 참 좋은데, 왜 이런 이름이 붙었을까? 고개를 갸우뚱갸우뚱하다가 불현듯 떠오른 생각. 아하, 그렇구나! 율목동 이름이 한자로 ‘밤 栗 + 나무 木’이네. 말 그대로 ‘밤나무골’이었구나, 이 동네가. 지금 같은 도시가 되기 앞서 예전에는, 지난날에는, 그러니까 수백 해, 아니 수천 해 또는 수만 해 동안 이곳 싸리재 둘레에는 밤나무가 많았겠구나.

 하지만 이제는 찾아볼 길이 없는 밤나무. 밤나무 없는 밤나무골 ‘율목동’. 무시무시한 막개발에 어마어마한 돈을 쏟아붓고 있는 인천시장과 지역개발업자들. 공사는 나날이 끊이지 않으며, 공사비로 들어갈 수 조, 또는 수십 조는 모두 우리 주머니에서 나오고. 우리 주머니에서 나온 돈은 길닦기와 아파트 세우기와 쇼핑센터 짓기로 들어간다고 하는데, 그렇게 많은 돈이라면 주민복지와 교육복지와 문화생태를 가꾸는 데에 쓰고도 남아, 대중교통에다가 택시까지도 누구나 거저로 쓸 수 있도록 할 수 있을 테며, 의료혜택도 거의 거저로 받을 수 있을 텐데. 초중고등학교뿐 아니라 대학교육도 돈없이 마음껏 받을 수 있지 않을까요. 2킬로미터짜리 길을 닦는 데에 수천 억을 들인다고 하는데, 그런 새길을 닦지 말고, 복지 정책과 문화 정책을 잘 추스른다면, 우리들이 살아가는 이 터전은 한결 아름답고 넉넉할 수 있지 싶은데.

.. 반딧불이는 깨끗한 환경에서만 살 수 있는 생물입니다. 공기와 물이 많이 오염된 오늘날 자연환경을 되살려 반딧불이를 다시 만나고자 하는 운동이 많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애벌레 시기를 땅위에서 보내건 물속에서 보내건 물기가 있는 곳에서 살아야 하는 반딧불이에게 물과 공기가 더러워지는 것은 이들에게서 설 땅을 빼앗는 것과 같답니다 ..  〈55쪽〉

 아침에 일어나면 맨 먼저 하는 일은 이불과 깔개를 옥상 담벼락에 널어 놓기. 해가 잘 드는 날 이불과 깔개를 내놓아 말리면, 저녁에 걷을 때 뽀송뽀송한 느낌과 햇볕 냄새가 고스란히 배어 있습니다. 걸레로 방을 훔친 뒤 이불을 펴고 잠자리에 누우면 몸이 좋아합니다. 데굴데굴 구르며 깔개와 이불에 골고루 배어든 햇볕을 받아들입니다. 하루 내 고단했던 몸은, 햇볕 머금은 깔개를 깔고 이불을 덮으며 말끔하게 다시 태어납니다.

 굳이 이불 빨래를 하지 않더라도 개운하며, 꼭 무슨무슨 세제를 써서 빨아야 깨끗하거나 폭신폭신하게 되지 않습니다. 싱그러운 바람과 따순 햇볕이 있으니 넉넉합니다.

.. 황소개구리가 밤낮없이 우는 데 비해 청개구리와 무당개구리는 주로 밤에만 운답니다 ..  〈111쪽〉

 아내가 즐겨먹는 밥은 배추잎과 토마토. 아내가 바꾸어 놓은 제 밥상은 말랑말랑 두부와 선인장채, 때때로 달걀 반 삶은 것. 그동안 된장국에 콩나물 넣어 먹거나 된장국수를 먹곤 했는데, 이렇게 밥상을 바꾸어서 먹어도 몸에서 잘 받습니다. 아니, 이런 밥상이 더 반갑구나 싶어요. 따로 불을 피워서 끓이지 않아도 되는 밥이요 반찬입니다. 불을 피워서 익힌다고 해도 조금만 하면 됩니다.

 배불리 먹기보다는 알맞게 먹으며,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날 때 밥을 차립니다. 하루에 세 끼니를 먹을 수 있으나 두 끼니만 먹어도 나쁘지 않고, 밥상에 반찬이 세 가지가 넘으면 젓가락질할 것이 너무 많다고 느낍니다. 두 가지 반찬만 올려놓아도 푸짐합니다. 꼭 김치를 담가서 먹어야 하지 않습니다. 배추잎을 물에 씻어서 먹어도 좋아요.

.. 습지는 단순히 숨막힐 듯 아름다운 풍경만을 제공하는 것이 아닙니다. 잘 보전된 생태계나 먼 미래의 인류의 윤택한 삶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에 그 중요성이 점점 강조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좁은 국토를 가지고 있는 우리 나라에 습지가 있다는 사실은 여러 가지 면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  〈139쪽〉

 ‘먹는 게 남는다’는 옛말이 있는데, 어떻게 먹어야 남을까요. 무엇을 먹어야 남을까요. 누구와 먹어야 남을까요. 돈 많이 벌어 마음껏 쓰며 사는 일이 그렇게까지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으나, 돈 많이 벌어 펑펑 쓰는 삶이라면, 참 딱하거나 불쌍하겠구나 싶어요. 돈을 걱정없이 쓸 수는 있지만, 돈을 쓰며 자기 스스로를 가꾸거나 이웃들하고 함께하는 즐거움은 얼마나 누릴 수 있을까요. 이웃사람은 돈 한 푼 제대로 못 쓰는데, 자기 혼자 돈을 마음껏 쓰는 일이란 얼마나 신나고 멋진 일이 될까요.

 저도 어릴 적 어느 때인가 ‘돈 많이 벌어서 좋은 일 할 거야’ 하는 생각을 품었습니다. 그러나 이 생각은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며 옅어졌어요. 돈벌어서 해야 할 일이 대단히 많더라구요. 우리 세상 어둡고 괴롭고 짓눌리고 고달픈 곳을 찾아서 풀어내려면 수십 조나 수백 조로는 턱도 없고(1980년대 어림셈으로도), 끝없는 돈으로도 안 되겠더라구요.

 일찍부터 철이 들었다기보다, 구구셈을 해 보니 그랬어요. 그래서 ‘돈 많이 벌 생각은 접자’고 마음을 바꾸었고, 한 해 두 해 나이를 먹으면서 새로 품은 생각은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면서 내 깜냥대로 나누며 살자’였습니다.

 책 하나를 읽어도 그때그때 내 깜냥대로 받아들이고, 내가 속으로 삭여서 몸소 해낼 수 있을 만큼 읽자고, 일 하나를 배워도 내 몸과 마음과 눈높이에 맞게끔만 익혀서 더도 덜도 말고 있는 그대로만 하자고. 할 수 있는 힘이 있으면 기꺼이 나서서 하되, 할 수 있는 힘이 없거나 모자라다면, 하는 데까지만 하고 뒷일은 힘과 기운이 되는 이한테 맡기자고. (4340.6.16.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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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시 호숫가 숲속의 생활
존 J. 롤랜즈 지음, 헨리 B. 케인 그림, 홍한별 옮김 / 갈라파고스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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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 책이름 : 캐시 호숫가 숲속의 생활
- 글쓴이 : 존 J.롤랜즈
- 그린이 : 헨리 B.케인
- 옮긴이 : 홍한별
- 펴낸곳 : 갈라파고스(2006.9.11.)
- 책값 : 12000원

 
― 자작나무 꼭대기가 푸른 하늘에 깃털 모양으로 피어나는 건 오직 5월에만 볼 수 있는 광경이다. (144쪽)


 시골집을 떠나 도시로 왔습니다. 새로운 곳에서 살림을 꾸리니 짐을 풀고 둘레 삶터에 몸을 붙이느라 바쁘고 힘듭니다. 그래도 어릴 적부터 살던 고향이라 한결 홀가분하고 보는 골목과 사람마다 반갑습니다. 그동안 달라진 모습, 아직까지 고이 남은 모습이 한데 어우러집니다.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해가 길어짐을 느끼고, 날씨가 따뜻해짐을 느낍니다. 그러나 인천에 온 지 꼭 보름이 되는 오늘까지, 맑은 햇살을 한 번도 못 보았습니다. 늘 날이 우중충합니다. 구름 한 점 없는 날에도 파란 하늘 보기 어렵습니다. 문득, 서울은 인천보다 더 지저분하면 지저분하지, 깨끗하지 않을 테지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더구나 부산이나 대구나 대전이라고 해서 한결 나을 구석이 없겠다는 생각도 들어요. 얼마 앞서까지 지낸 충주 시골집에서도 비슷했습니다. 해가 갈수록 시골집에서 바라보는 자연과 하늘과 물도 더러워졌습니다. 도시로 나오니 끔찍함이 더 크군요.

 봄은 틀림없이 봄이고, 머잖아 여름을 맞이합니다. 하지만 지금이 봄임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건 무엇일까요. 사람들 옷차림? 가게에서 내놓고 파는 새봄맞이 물건들?

 새벽바람에서도, 아침햇살에서도, 낮이나 저녁 공기에서도, 또 저녁 해거름에서도 시간흐름을 못 느끼겠습니다. 거리마다 환한 등불 때문에 별을 못 보기도 하지만, 하늘엔 워낙 먼지띠가 짙어서 달빛마저도 뿌옇습니다. 이런 하늘을 머리에 진 채, 내려다보는 땅은 시커먼 아스팔트나 잿빛 시멘트. 싱싱한 흙 한 줌, 흙에서 자라나는 푸른 풀과 꽃과 나무, 풀숲에서 살아가는 뭇 목숨붙이는 만날 길 없습니다. 인천 앞바다에서 물고기를 못 잡게 된 지는 한참 되었고, 하늘을 나는 새 또한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러면서 늘어나는 것은 오로지 자동차와 아파트와 높은 잿빛 건물들. 이런 곳에서 한 해 삼백예순닷새를 보내는 우리들은 5월 1일을, 7월 1일을, 또 12월 1일을, 3월 1일을 어떻게 느낄까요. 무엇이 다르다고 느낄까요. 봄이고 겨울이고 ‘돈만 내면 봄나물을 먹을’ 수 있습니다. ‘값만 치르면 여름열매도 먹을’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들 몸은 어떻게 바뀌었을까요. 바뀌는 몸에 따라 마음은 어찌 되었을까요.


― 문명세계에 사는 주부들의 기준에서 보면, 인디언들의 천막집이 아주 깔끔하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인디언 여인들이 자연에서 얻은 모든 자원을 이용해 거처를 만들고 식량을 구하는 솜씨를 보면, 도시 아낙네들의 입이 떡 벌어질 것이다. (39쪽)


 지금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돈을 버는 몇 가지 솜씨’ 말고 또 무엇이 있을까요. 사랑하는 사람과 밤일 즐기기? 자동차 몰기? 인터넷 검색? 텔레비전 광고 줄줄이 꿰기? (4340.5.1.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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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자연
김준호 지음 / 따님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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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이름 : 사람과 자연
- 글쓴이 : 김준호
- 펴낸곳 : 따님(2001.5.20.)
- 책값 : 6800원


 익산에 사는 할머님 한 분이 보내준 된장과 간장으로 밥을 해먹습니다. 요 된장을 풀어서 끓이면 어떤 찌개든 맛깔스럽다고 느낍니다. 다른 간은 안 합니다. 된장만 반 숟가락 풀어서 국수를 삶거나 버섯찌개를 합니다. 김치나 감자나 빨간무나 호박 들을 두루 넣어 섞어찌개를 할 때도 있고요. 익산 할머님이 보내준 된장은 당신이 콩씨까지 하나하나 가려서 심고 풀약이나 비료를 하나도 안 쓰고 길러서 거둔 뒤, 손수 삶은 다음 메주를 띄워서 빚어내었습니다. 손수 띄워서 빚은 된장을 나날이 먹는 밥으로 먹어 보기는 스무 해 만이 아닌가 싶습니다. 제가 열서너 살 나이 때까지는 집에서 어머니가 손수 된장과 간장과 고추장을 담그셨거든요. 문득, 그때는 그 된장과 간장과 고추장만으로도 밥 한 그릇 맛있게 먹었구나 싶은 생각이 듭니다.


..  우리는 국토 면적이 좁고 인구밀도가 높기 때문에 자연을 개발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많지만, 국토 면적이 좁을수록, 또 인구밀도가 높을수록 더 자연보존에 힘을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현재까지 보존되어 온 자연마저 개발한다면 장차 이 땅에는 손바닥 만하게 보존된 자연마저도 영원히 사라져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즈음 들어 자연보호와 자연보존을 혼동하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자연보호만이라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장소를 가리지 않고 개발만 하려는 생각이 판을 치게 되었음을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  〈145쪽〉


 오랜 술동무 하나가 힘겹게 몸앓이한 끝에 아들아이 하나를 낳았습니다. 저저번달에 돌잔치를 했고, 저번달에 그네가 사는 동네로 찾아가서 저녁을 함께 먹었습니다. 집에서 손님 대접하기는 어려운 형편이라 그네 식구가 자주 찾는다는 오리고기집에 갔는데, 오리고기집은 서울 강서구 방화동에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논 한복판에 있습니다. 오리고기를 얻어먹으며, ‘어떻게 논 한복판에 오리고기집을 차릴 생각을 다했을까?’ 싶었습니다. 김포공항 둘레에는 아직 논밭이 조금 남아 있는데, 이 논밭은 머지않아 모두 갈아엎고 높은 아파트를 올린다고 합니다.

 농사짓는 분들로서는 곡식 거두어 보았자 돈이 안 되고 빚만 되니까, 그 땅이나마 좋은(?) 값에 팔아 딴 데로 떠나거나 고기집 장사를 하는 편이 살림살이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할까요. 재개발업자는 공사 한 건 얻을 테니 돈방석에 앉을 테고, 시나 구에서는 세금을 더 많이 거둘 수 있으니 공사업자와 어깨동무를 하고 힘껏 재개발에 나설 테지요. 논밭 둘레 높직한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도, 자기네 아파트 옆에 논밭보다 높직한 아파트가 나란히 서 있어야 집값이 올라 돈을 번다고 생각하겠지요.


.. 큰 도시가 생기고 생활환경이 열악해짐에 따라 식물은 일방적으로 수난을 당하게 되고, 사람의 마음은 자꾸 황폐해지고 있다. 무엇이 사람과 식물을 이간질하는지 모르는 사이에 둘 사이가 멀어지기만 하는 것 같다. 옛날에는 숲이 바로 안식처였고 생활 터전이었다. 사람은 메마른 마음을 살찌우려고 정원을 만들고 공원을 꾸민다. 정원은 각 민족의 오랜 정서를 모은 자연의 축소판이다 ..  〈67쪽〉


 도시개발 하는 모습을 보면, 여태까지 고이 이어오던 산을 깎고 들을 뒤집어엎어 시멘트로 바른 뒤 아파트를 세웁니다. 그리고 나서 흙을 퍼 오고 나무를 사 오고 꽃을 심고 하며 ‘근린공원(‘근린공원’이란 “가까이 있는 공원”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아파트 재개발을 한 곳에 가까이 마련한 공원이란 소리입지요)’을 조그맣게 만듭니다. 처음부터 재개발을 할 때 숲과 산과 들판을 고이 지키면서 ‘사람 살 집’만 알맞춤하게 지을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모두 때려부수거나 갈아엎은 뒤 돈으로 바릅니다. 그리하여, 뒷날 ‘이번에 새로 지은 아파트’가 낡았다고 여겨지는 스무 해나 서른 해쯤 뒤에는 아파트뿐 아니라 아파트 옆에 있던 근린공원마저도 똑같이 허물고 부수고 새 아파트를 올린 뒤 새 근린공원을 만듭니다.

 있는 것을 지키거나 가꾸기보다, 있는 것을 부수고 새로 만들어야 돈이 된다고 하는 요즘 세상이라서 이렇게 돌아갈까요. 그러면 그 돈이란 어디에서 나오고, 이 돈은 어디에 쓰일까요. 이 돈은 밑도 끝도 없이 샘솟기만 할까요. 돈은 샘솟아도 돈을 쥐고 있는 사람이 숨을 쉴 수 있는 곳, 물을 마실 수 있는 곳, 아늑하게 깃들 수 있는 곳이 다 파헤쳐지거나 무너진 뒤에는 어찌 될까요. 오늘은 4월 5일, 박정희 독재자가 세운 ‘나무심는날’입니다. (4340.4.5.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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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 백작 - 농부는 백가지 일을 하고 백가지 작믈을 기른다
후루노 다카오 지음, 홍순명 옮김 / 그물코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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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이름 : 백성백작
- 글쓴이 : 후루노 다카오
- 옮긴이 : 홍순명
- 펴낸곳 : 그물코(2006.7.22.)
- 책값 : 8000원

 
 이 책 하나 14 - 백성백작
 : 추위를 견디니 달콤한 봄입니다


 엊그제만 해도 겨우내 긴잠에서 깨어난 개구리가 무논에서 왁왁 울어댔습니다. 멀리서도 개구리 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비가 오고 눈이 오며 확 쌀쌀해지니 개구리 소리가 잦아듭니다. 설마 무논에서 꽁꽁 얼어붙었을까요. 다시 땅을 파고 들어가기는 어려웠을 텐데, 어찌 되었을는지.


.. 나는 30년 가까이 벚꽃 피는 계절에 이런 일만 해 왔다. 여러 해 농사를 지었건만 씨를 뿌리고 싹이 날 때까지는 불안과 즐거움이 엇갈리는 나날이 계속된다. 올해는 토마토, 가지, 피망 등 모두 순조롭고 균일하게 싹이 터 두 잎을 벌리고 있다. 그렇게 보통은 표현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는 균일하지 않다. 쌍잎의 방향, 본잎이 나는 방식 등 어느 하나인들 같은 모가 없다. 인간의 얼굴이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다르듯이 자연계는 진정한 뜻으로 다양성에 충만해 있다. 농업은 생산력을 올리기 위하여 인위적으로 가능한 한 이 다양성을 균일화하는 행위일 것이다 ..  〈188∼189쪽〉


 굳이 옛사람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사람들이 먹는 밥과 반찬을 보면 그이 삶과 성격을 헤아릴 수 있습니다. 지난날에는 김치 하나만으로도 밥을 뚝딱 해치운다고 했습니다만, 김치는 배추김치 하나만 있지 않습니다. 무김치도 갓김치도 오이김치도 겉절이도 물김치도 있습니다. 무채도 있고 깍두기도 있으며 섞박지도 있습니다. 따로 김치를 담그지 않고 무나 배추나 오이 들을 날것으로 먹어도 좋습니다. 날이 풀리는 봄이면 들풀과 멧나물을 뜯어서 흙만 털고 먹어도 좋고요. 이처럼 밥 한 그릇을 비워도 온갖 반찬으로 즐기는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모습을 고이 간직한다고 느낍니다. 하지만 자기 입에만 달짝지근하게 느껴지는 반찬에만 손을 대고 흰 쌀밥만을 먹는 사람은, 고이 지닌 자기 모습을 못 찾거나 못 보지 싶어요.


.. 우리들은 달빛 아래 낫으로 벤 벼를 모아 콤바인에 떨었다. 나는 달빛 아래 가족이 함께 일하는 행복을 갑자기 느꼈다. 유기농업의 가장 좋은 점은, 가족들이 함께 일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저녁으로 돈가스와 맥주가 최고였다 ..  〈165쪽〉


 한 사람이 한 해 동안 먹을 만한 곡식을 거두는 논밭은 아주 조그마해도 넉넉합니다. 식구가 늘면 조금 더 있어야 하지만, 네 식구 논밭은 50평으로도 좋습니다. 이웃이나 동무하고 나누고 싶다면 100평쯤이면 꽤 넓을 테지요. 이만한 크기라면 기계 없이 손으로 다스릴 수 있습니다. 기계란 한꺼번에 많이 심고 농약과 비료로 한꺼번에 다스리며, 마지막에도 한꺼번에 거두어들여 일손을 적게 들이고 더 많이 얻어서 돈을 벌려는 생각에서 씁니다.

 장사를 할 때 먹고살 만큼만 벌겠다면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뼈빠지게 일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먹고살 만큼을 넘어, 다른 데에도 돈쓸 일이 있기 때문에 하루 열 몇 시간씩 몸이 무너지도록 일에 시달리고 맙니다.


.. 이곳은 확실히 포도밭이 넓다. 그렇지만 한 집 앞 면적은 작아, 360평에 불과하다. 1년 수입은 15만 엔쯤이라고 한다. ‘사치만 하지 않으면 가족 네 사람 먹고 지낼 만해요.’ 햇빛에 그슬린 얼굴에 웃음을 띄우면서 농민 우씨는 말했다 ..  〈159쪽〉


 없는 이한테는 ‘사치’를 말할 것이 없습니다. ‘살아남기’, ‘살아가기’가 걸린 일이니까요. 그렇다면 있는 이들은 어떻게 해서 그 많은 재산을 쌓을 수 있었을까요. 있는 이들 재산은 이들이 일한 대가대로 알맞게 받은 셈인지요. 또한, 없는 이들은 일한 대가대로 알맞게 버는 셈인지요.

 우리 사회에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있어서, 두 사람이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일을 해도 받는 돈이 다릅니다. 여기에 학력 푸대접이 있어서, 둘이 똑같은 날 회사에 들어가 똑같은 시간을 똑같은 일을 해도 둘이 받는 돈이 다릅니다. 같은 물건이라도 백화점에서 파는 값과 길가 좌판에서 파는 값이 다릅니다. 사람마다 자기가 일한 만큼 올바르고 알맞는 대접을 받고 대가를 얻을 수 있다면, 어느 누구라도 몸이 망가지도록 일에 시달려야 할 까닭이 없다고 느낍니다. 사람 대접, 일한 대접을 못 받으니까 삶이 팍팍해지고 일이 괴로울밖에 없다고 느낍니다.


.. 한편 1950년대 논에는 여러 가지 물고기―물장군, 소금쟁이, 새우, 거머리, 참개구리…… 잠자리도 고추잠자리만 아니라 실잠자리, 가는실잠자리, 갈구리측범잠자리, 왕잠자리, 밀잠자리, 검은물잠자리, 물잠자리 등 다양한 잠자리들이 있었다 … 논에 물고기가 없어지게 된 원인은 복합적이다. 농약과 제초제 이전에 많은 물고기가 죽었다. 그러나 결정적 원인은 논의 경지정리로 연못과 툼벙이 메워지고, 물길이 3면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데 있다 … 독자 여러분, 논에 물고기가 살았던 때를 기억해 보세요. 모르는 분은 상상해 보세요. 논이나 물길에 물고기가 살고 어린이들이 물고기를 잡습니다. 먹을거리 교육이다, 환경이다 하면서 인공 정보를 부자연스럽게 아이들에게 줄 필요가 없습니다. 논에 물고기가 뛰노는 풍경을 재생하면 됩니다. 이것이 아마 아파트 세대의 의무일 것입니다 ..  〈154∼155쪽〉


 부모들은 자기가 낳은 아이들이 사람 대접을 받기를 바라며 학교에 넣습니다. 아이가 어른으로 커 가는 길에 대학교를 굳이 다니지 않아도 올바르고 씩씩하고 훌륭하며 똑똑한 사람이 될 수 있지만, 졸업장이 없으면 사람 대접을 못 받기 때문에 초중고등학교 열두 해에 걸쳐 입시교육으로 몰아세웁니다. 자격증이라는 종이쪼가리가 없어도 차근차근 일을 배우면 무엇이든 못할 일이 없는 우리들이지만, 이 자격증 문서를 보고 사람을 뽑고 일삯을 주기 때문에, 현장과 동떨어진 학원에 돈을 쏟아붓고 시간을 헤프게 씁니다.

 세상 어느 지식이 쓸모가 없겠느냐만, 너무 많은 세상 지식은 외려 우리를 좁은 우물에 가둔 채 더 널리 더 멀리 더 깊이 바라보지 못하게 가로막습니다. 책을 보며 물고기 이름을 외우고 꽃피는 철을 익힌들 무엇하겠습니까. 길가에 자라는 풀이름을 모르고, 어시장에서 물고기 한 마리 사서 다듬거가 반찬으로 다룰 줄 모르는데. 한국사람들이 꼬맹이 때부터 영어를 빈틈없이 배운들 무엇하겠습니까. 정작 한국말은 제대로 할 줄 모르고, 영어 낱말과 말투를 어설피 한국말에 뒤섞으며 지식 자랑을 하는데.


.. 유기농업의 일 가운데 나는 풀매기를 가장 좋아한다. 혼자면 천천히 이런저런 생각을 할 수 있다. 여럿이면 이야기를 할 수 있다. 기계를 사용하는 작업에서는 그렇게 할 수 없다 … 요컨대 잡풀도 해충도 자연의 다양성을 회복하려고 하는 것이다. 농업은 생태계 진화의 법칙을 따르면서 이 법칙을 인공적으로 억제하려고 한다. 그러기 위하여 노동력을 투입한다. 나의 경우 스낵 완두콩의 제초작업니다. 요즘 ‘농업은 환경을 지킨다’는 표현이 자주 쓰이지만, 생태계 진화의 일반 법칙으로 비추어 보면, 이 표현은 좀 이상한 말이다. 농업은 다양해지려고 하는 환경을 오히려 억누르고 있다. 잡풀이나 해충이 생태계를 다양하게 하는 활동을 하는 것을 사람은 자기 필요에 맞추어 무시해서는 안 되리라 생각한다 ..  〈128∼129쪽〉


 시골에서든 도시에서든 걷기와 자전거 타기를 좋아합니다. 걷거나 자전거를 타면 혼자일 때는 제 빠르기에 맞추어 달리며 둘레를 구경할 수 있고, 혼자 깊은 생각에 잠길 수 있습니다. 여럿일 때는 함께 바라보는 둘레 모습에 놀라워하고 기뻐하기도 하다가는,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습니다. 요사이는 시골도 도시도 차가 지나칠 만큼 늘어나서, 길을 걷거나 자전거를 달리며 생각에 잠기거나 이야기를 나눌 수 없습니다. 잠깐 생각에 잠겼을라치면 앞뒤에서 빵빵거리는 차들 때문에 화들짝 놀랍니다. 갑자기 밀어붙이는 차에 치이지 않으려면 마음이 조마조마, 마음을 바짝 조여야 해요. 자동차가 달릴 때 나는 소리는 귀를 째듯 시끄럽습니다. 게다가 도시는 큰길가뿐 아니라 골목길에서도 한갓지고 조용하게 이야기를 나눌 만한 터전이 못 됩니다. 갖가지 소리들이 마음을 어수선하게 흔듭니다.

 오늘날 문명은 우리들이 ‘온갖 소리에 무덤덤하도록 길들이는’ 문명일까요. 더 크고 많고 빠르고 힘센 것을 좇도록 하면서 온갖 소리에 익숙해지도록 내모는 문명일까요.


.. 1950년대 경지정리를 하기 전 우리 마을의 논은 모양이 다양했다. 세모꼴, 바나나꼴, 부채꼴, 긴 막대꼴 등 여러 모습이었다. 논의 높낮이도 제각각이었다. 논 한복판을 손으로 판 배수로가 흐르고 있었다. 그 사이사이 버드나무가 자랐다. 그 당시 논의 둑에는 감나무나 치자나무가 여기저기 자라고 있었다. 경지 정리 이후 논은 대체로 100m×30m의 긴 네모꼴로 정리되었다. 그래서 트랙터나 이앙기, 콤바인 등 기계작업의 효과를 올릴 수 있었다. 그러나 논의 풍경은 획일적이고 단조로워 아무 재미도 없게 되었다. 일본에서 가장 보기 지루한 풍경이 전개되고 있다 ..  〈122∼123쪽〉


 학교 건물을 보면 지루하고 따분하다고 느껴집니다. 높은 울타리, 모두 똑같이 네모난 상자 같은 건물, 굳게 닫힌 창문과 전깃불을 켜지 않으면 어두운 골마루와 교실, 아이들이 뛰어놀지 않는 빈 운동장, 겉보기로 좋으라고 플라스틱 잔디를 깔아 놓은 운동장, 똑같은 옷(학교옷)에 똑같은 머리길이와 머리모양, 똑같은 신에 비슷비슷한 가방을 멘 아이들…… 저 아이들은 가슴에 붙여야 하는 이름표에 적힌 글자만 다를 뿐, 모두 틀에 박힌 붕어빵처럼 똑같은 지식을 머리에 집어넣고 세상일을 똑같은 눈길로 바라보며 똑같은 생각으로 살아가도록 길들여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요새는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학교에 가는 아이들도 줄고, 아버지나 어머니가 모는 자가용에 아늑하게 타서 학교 문앞까지 가는 아이들이 늡니다. 어버이 자가용이 아니더라도 마을버스나 학원버스가 학교 문앞과 집 둘레 골목길 또는 아파트 들머리를 오가며 아이들 다리가 힘을 안 써도 되게 해 줍니다.

 제 어릴 적 동무들과 국민학교를 다니던 무렵에는, 다 다른 옷차림에 머리모양에 머리길이에 누가 누구인지 척 보면 알 수 있었지만, 이제는 초등학교 아이들조차 비슷비슷 매한가지로 느껴집니다. 그나마 조금씩 다르구나 느껴지던 초등학교 아이들은 중학교라는 곳에만 들어가면 한결같이 붕어빵이 되고 맙니다. 한국땅에서 가장 재미없어 보이는 아이들, 가장 지루하고 딱딱하고 메말라 보이는 아이들이라고 할까요. 모두 어슷비슷하게 되면, 이 아이들 머리통에 지식쪼가리 집어넣기는 수월할 테지만, 이 아이들이 저마다 자기 꿈을 간직하고 키워나기란 별따기와 같을 테지요.


.. 밭에 채소만 여러 해 심으면 잡초가 늘고 해충이 늘고 이어짓기 때문에 생기는 병이 는다. 그래서 3년 밭으로 사용하면 다시 논을 만든다. 거기 벼를 심으면 벼만 계속 심던 논보다 튼튼하게 잘 자란다. 거꾸로 논을 밭으로 만들면 잡초나 해충 발생이 매우 적다 ..  〈104쪽〉


 저는 책을 한 권 사서 읽을 때 으레 다음처럼 합니다. 먼저 제가 좋아하는 일을 힘껏 해서 돈을 법니다. 돈을 차곡차곡 모아 둔 뒤 지갑을 채우고 자전거를 타고 책방으로 나들이를 떠납니다. 책방은 가까운 곳에도 있지만 제법 먼 곳에도 있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골목길을 지나고 찻길도 가로지르노라면 이곳저곳에서 저마다 애쓰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부대낄 수 있습니다. 어느덧 가고자 한 책방에 다다르면, 자전거를 세우고 들어갑니다. 땀을 들이며 느긋하게 몇 시간 동안 책을 고릅니다. 딱히 어떤 책을 보아야겠다는 생각은 안 하기 때문에, 그날그날 책방에서 만난 온갖 책을 하나씩 살피며 제 주머니에 든 돈에 알맞는 만큼 책을 고릅니다. 그리곤 가방에 넣고 다시 자전거를 달려 집으로 돌아옵니다. 집으로 돌아온 뒤에 새책은 새책대로 읽고, 헌책은 걸레로 먼지를 닦아 줍니다. 걸레는 제가 손빨래로 빨아 놓습니다. 책을 읽을 때에는 한 손에 볼펜을 듭니다. 읽으며 제 눈길을 끌거나 마음에 와닿는 대목에 밑줄을 긋고 빗금을 치거나 별을 그립니다. 빈자리에 이것저것 적바림할 때도 잦습니다. 책을 다 읽은 뒤에는 책꽂이에 얌전히 꽂아 두는데, 꽂아 두기 앞서 스캐너로 책 겉그림을 긁고, 책읽은 느낌도 몇 줄이나마 적어 봅니다.


.. 그렇게 말하면 ‘뙤약볕 아래 열심히 논에서 일꾼으로 일했던 오리 친구를 잡아먹다니 가엾지도 않아요?’라고 걱정을 듣는 일도 있다. ‘당신은 소고기나 돼지고기, 닭고기, 채소, 쌀도 먹을 것 아니에요? 그들은 불쌍하지 않습니까?’, ‘청둥오리도 소도 돼지도 닭도 생선도 쌀도 채소도 인간도 생명은 하나, 모두 같습니다.’ 그런 때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아마도 문제의 본질은 청둥오리가 가엾다기보다 ‘왜 사람은 평상시 먹는 것에 대하여 가엾다고 생각하지 않는가’에 있을 것이다. 대량생산, 대량소비, 대량폐기, 쓰고 버리는 시대에 우리들은 ‘먹을거리’가 생명이라는 당연한 것을 보지 못하게 된 것이 아닌가 ..  〈97쪽〉


 밥 한 그릇에 우주가 담겼다는 말을 처음에는 너무 대단한 말이라고 느껴서 살갗으로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하루하루 살아가고 뭇 목숨붙이를 가만히 돌아보는 동안 조금씩 받아들이고 있는데, 밥알 하나도 소중한 목숨이고, 김치 한 조각도 소중한 목숨입니다. ‘밥’과 ‘김치’이기 앞서, 이들은 저마다 땅에 뿌리내리며 살아가던 풀목숨이었습니다.

 물고기를 먹든 뭍고기를 먹든 똑같습니다. 우리가 즐기는 밥상에 오르기 앞서는 모두 목숨이었어요. 우리가 즐기는 밥상에 오른 뒤에도 목숨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목숨이 내 몸속으로 들어와 나라는 목숨 하나가 하루 더 살아갈 힘을 얻습니다. 나 하나 살자면 다른 목숨 몇을 늘 받아들여야 합니다. 사람뿐 아니라 다른 목숨붙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어깨동무를 합니다. 서로가 서로한테 힘을 얻어서 살아갑니다. 사람 삶도 ‘더 있는 사람이 나누어 덜 있는 사람과 함께 살아간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한테 더 있는 것을 기꺼이 쓰거나 나누고, 나한테 모자란 것을 기꺼이 얻거나 받습니다.

 모두모두 소중한 목숨이니 밥알 하나 함부로 흘릴 수 없고, 땅바닥에 떨어진 밥풀도 스스럼없이 주워서 먹습니다. 모두모두 소중한 목숨이니 이웃이나 동무를 따돌리거나 괴롭히거나 푸대접할 수 없습니다. 저마다 일한 대가를 알뜰히 받을 수 있도록 마음을 쓰게 됩니다. 생각이 다르고 하는 일이 다르다고 해서 적이 될 수 없습니다. 누구나 소중한 목숨이니, 고달프거나 힘겨운 이를 보면 따순 손길을 나누고 싶고, 한손을 내밀어 돕고 싶습니다.


.. 그렇기는 하나 요즘 논밭에서 일을 거들거나 노는 아이들이 매우 줄었다. 일본 논밭에서 아이들이 사라졌다고 한다. 도대체 이런 현상은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 그것은 일본의 대지에 농약이나 제초제, 화학비료라는 편리하고 위험한 독물을 대량으로 사용하기 시작하고 나서부터일 것이다. 그것은 또 경제의 고도 성장과 궤도를 같이한다 … 밭을 ‘간다’는 것은 마음을 가는 것이고, 동시에 일을 거드는 아이들의 마음을 가는 것이다. 우리는 돈만 내면 외국의 수입 농산물을 손에 넣을 수 있다. 그러나 일본의 논밭을 부모와 자식들이 갈았던 것같이 외국의 논밭을 부모와 자식들이 갈 수는 없다 ..  〈88∼89쪽〉


 우리가 읽는 책은 돈을 주고 사서 읽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집은 돈을 내고 사거나 빌려 깃들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입는 옷은 돈을 치르고 사서 입을 수 있습니다. 돈 하나면 거의 모든 옷밥집이며 문화살이를 즐길 수 있는 셈입니다. 그러면, 참말로 돈 하나면 무엇이든 살 수 있을까요.

 참으로 훌륭하다고 하는 책, 마음을 살찌운다고 하는 책을 ‘돈’으로 살 수 있을까요. 책이라는 ‘물건’이라면 얼마든지 살 수 있겠지요. 하지만 책에 담긴 ‘줄거리’는 돈으로 살 수 없습니다. 많은 돈을 치러서 책이라는 ‘물건’을 산다고 해서 책에 담은 ‘줄거리’를 자기 것으로 삼을 수 있을는지요. 값싼 헌책 한 권을 사면 ‘줄거리’를 못 얻을까요.

 큼직큼직한 책방에 마일리지 쌓으러 가고, 인터넷책방에서 턱없이 깎아주거나 끼워팔기마저 하는 책을 손쉽게 산다고 해서 ‘책읽기’가 제대로 이루어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책을 산다면, 틀림없이 책이라는 ‘물건’은 우리 손에 쥘 수 있습니다. 하지만 책 하나가 이루어지는 ‘땀방울과 흐름’은 못 느끼지 싶어요. 책 하나에 담긴 ‘줄거리’를 빚어내려고 애쓴 글쓴이 땀방울, 책에 담는 줄거리를 알뜰히 엮어내어 살가이 보여주려고 힘쓴 출판사 손길, 애써 꾸려낸 책이 우리들한테 두루 보여질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한 책방사람 움직임, 책방을 둘러싼 우리네 마을과 사회 터전, 이 여러 가지까지 함께 느끼며 책에 담은 ‘줄거리’를 느끼자면, ‘물건’이 아닌 다른 것을 자기 것으로 삼을 수 있어야지 싶습니다.


.. 퇴비만으로 키운 밀가루에는 미묘한 맛의 차이가 있다. 부추를 썰어 넣고 프라이팬에 기름을 쳐서 굽기만 해도 정말 맛이 있다. 조미료를 넣을 필요가 전혀 없다. 원래 밀에는 밀의 맛이 있고, 쌀에는 쌀의 맛이 있고, 무에는 무의 맛이 있다. 그 맛을 내는 농법과 요리법, 즉 자연과의 관계가 중요하다 ..  〈79쪽〉


 시골집에서 밥을 해서 먹을 때와, 서울 같은 큰도시에 있는 밥집에서 돈을 치르고 사먹을 때 맛이 크게 다릅니다. 밥하는 사람 마음도 다르겠지만, 쓰는 물도 다르니까요. 제아무리 유기농으로 지은 쌀로 밥을 한들, 도시에서는 맛있는 밥을 먹을 수 없습니다. 그 좋은 쌀을 씻는 물이, 그 좋은 쌀이 익으면서 어우러지는 공기가 깨끗하지 못하니까요. 그렇다고 깨끗한 물을 멀리서 사들인 뒤 짓는다면 밥이 맛있을까요? 글쎄, 얼추 비슷해지기는 해도 따라갈 수 없습니다. 나 혼자만 깨끗한 물 길어 와서 쓰면 뭐해요. 이웃들은, 다른 사람들은 더러운 물에 더러운 공기로 살아야 하는걸요.

 시골에서든 도시에서든 누구나 맛있는 밥을 지어 먹을 권리가 있습니다. 어느 곳에 살든 깨끗한 물과 공기를 즐기며 살아갈 권리가 있습니다. 자동차가 씽씽 달릴 찻길을 끝없이 새로 닦는 공사판보다, 사람들 살림집이 조금 낡았다고 해서 저마다 자기 나름대로 알뜰살뜰 살아오던 사람들을 죄다 내쫓고 재개발한다고 싸그리 무너뜨리는 막개발보다, 서로서로 웃고 어우러지며 살아갈 신명나는 한마당을 가꾸어야지 싶습니다.


.. 아이들을 죽순 캐는 데 데리고 갔다. 아이들은 눈높이가 낮아서일까, 죽순을 정말 잘 발견한다. 흙 표면에 낙엽을 뾰죽이 치밀어 올리는 죽순을 차례차례 발견하면서 좋아라 날뛰고 있다. 죽순 찾기에 싫증이 나면 나무를 오르거나 언덕에서 미끄럼을 탄다. 뒷산은 아이들의 천국이다. 부모들이 일하는 옆에서 놀고 있다. 농사를 지어서 좋았다고 생각하는 풍경의 하나다 ..  〈24쪽〉


 어버이가 하는 일을 딸아들이 이어서 하는 일을 보기 힘들어지는 우리 삶터입니다. 어버이가 하는 일을 딸아들이 남부끄럽다고 생각하는 탓도 있고, 어버이부터 딸아들은 돈을 더 많이 벌고 이름을 한껏 날리며 몸을 덜 쓰며 아늑하게 일할 자리를 얻어 주길 바라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요즘 우리들, 어버이가 아닌 딸아들 나이에 있는 사람들이 하는 일은 어떠한가요. 지금 우리들이 하는 일은 우리들이 낳아서 기를 딸아들한테 물려줄 만한지요. 자기가 아주 소중하게 여기는 동무나 동생들한테 물려줄 만한 일을 하고 있는지요. 자기가 좋아하는 다른 사람한테 지금 자기가 하는 일을 가르쳐서 이어주고 싶은지요.

 어버이 된 사람으로서 먹고사는 길로 할 만한 일이라면, ‘자기가 낳아서 기르는 아이들’과 함께할 수 있는 일, 그리고 ‘자기가 사랑하며 온삶을 같이 살 사람’과 함께할 수 있는 일이어야지 싶습니다. 이런 일이 아니라면, 자기 딸아들한테든 자기가 소중히 여기는 이웃이나 동무한테든 자기가 지금 하는 일을 물려줄 수 없겠지요.


.. 식물의 잎은 태양의 빛을 받게끔 되어 있다. 그런 의미에서는 속이 앉은 배추 쪽이 본래의 모습이라 할 수 없다. 시금치도 연둣빛을 띠고, 잎끝이 조금 갈색이 되어 있다. 데쳐서 먹어 보면 뿌리도 잎도 달아 맛이 각별하다. 잎이 땅바닥에 기는 당근도 입안에서 녹듯이 부드럽고 달다. 추위를 견뎌냈기 때문일 것이다 ..  〈14쪽〉


 추위를 견뎌냈기 때문에 부드럽고 단 빨간무입니다. 추위를 견뎌내지 못한 빨간무라면, 비닐집에서 키운 빨간무라면 부드럽고 달 수 없습니다. 산에 들에 자라는 산딸이나 나무딸이나 들딸은, 햇볕과 바람과 물과 흙을 있는 그대로 머금어서 달고 새큼하고 달짝지근하고 시기도 합니다. 비닐집에서 비료와 물만 잔뜩 머금고 굵직굵직하게 나오는 비닐딸은 먹음직스러워 보이기는 하지만 설탕을 묻혀 먹지 않으면 단맛을 느낄 수 없습니다. 퍽퍽하거나 푸석푸석하지요. 땅에 없는 기운을 비료로 먹였으니까요. 햇볕이 아닌 전깃불을 먹였으니까요. 하늘을 흐르는 바람과 땅을 흐르는 물이 아닌 갇힌 공기와 억지로 퍼올린 수도물을 마셨으니까요.

 이야기책 《백성백작》은 “농부는 백 가지 일을 하고, 백 가지 작물을 기른다”는 이야기를 우리한테 건넵니다. 농사꾼만이 아니라 농사꾼 아닌 우리들 모두 ‘백 가지’ 일을 하며 ‘백 가지’ 사람을 만나고 ‘백 가지’ 생각으로 이 세상을 보듬고 살아갑니다. 아니, 이렇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다만, 지금 우리들은 백 가지 일을 하며 백 가지 사람을 만나고 백 가지 생각을 품기보다는, 한두 가지 일만 하려들고 몇몇 사람만 만나려 하며 좁은 생각 몇 가지로 울타리를 쌓고 재미없거나 따분하게 자기 삶을 옥죄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들은 언제쯤 높은 울타리를 걷어내고 따뜻한 햇볕과 시원한 바람과 맑은 물을 함께 즐기는 너른 땅으로 뛰어나올 수 있을까요. (4340.3.6.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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