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힐을 신은 자전거 - 스타일리시한 라이딩을 위한 자전거 에세이
장치선 지음 / 뮤진트리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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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자가 타는 자전거와 남자가 타는 자전거
 [애 아빠가 오늘 읽은 책 11] 장치선, 《하이힐을 신은 자전거》



 애 아빠는 아직 제 몸으로 돌아오지 않았으나, 아기는 눈썹 위가 크게 찢어져 병원에 안겨 가서 꿰매었습니다. 애 아빠가 조금씩 몸이 나아질 무렵 이제는 아기가 몸이 뜨거워지며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칭얼대기만 합니다. 아파도 아프다 말을 못하는 아기로서는 울고 칭얼댈밖에 없겠지요. 그런데 이렇게 칭얼거리니 꿰맨 자리에 자꾸 피가 배깁니다. 저녁과 밤과 새벽에 반창고를 갈아 붙입니다. 관장을 하며 배속에 있는 똥을 내보내도록 해 줍니다. 옆지기는 아기를 내내 안고 어르고 달래고 젖물리면서 긴긴 밤을 더디더디 보냅니다. 아기하고 씨름하면서 보내고 나니 어느덧 아침이 밝아 옵니다. 묵은 똥을 모두 내보낸 아기는 뜨거움이 많이 가라앉으면서 조용해지고, 엄마 품에서 조금 더 옹알거리다가 비로소 새근새근 잠듭니다. 애 아빠는 아직 성하지 않은 몸으로 이불 한 채를 빱니다. 간밤에 아기가 똥을 퍼질러 놓은 이불입니다. 바야흐로 겨울이 코앞에 닥쳐, 이제부터는 빨아서 개 놓을 이불은 얼른 빨아서 개 놓아야 하니 이불 빨래를 미룰 수 없습니다. 후들거리는 손발로 꾹꾹 누르고 밟고 하면서 이불을 빱니다. 이불 빠느라 손발이 후들거리지만, 내친 김에 기저귀 빨래를 함께 합니다.

 오늘도 아침부터 일하러 서울로 가야 하지만, 집일을 내버려 두고 홀로 나설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밀린 일도 일이지만, 집식구를 함께 건사하지 못하고 바깥일만 챙겨서 좋을 구석은 없다고 느낍니다. 내 이웃한테 보탬이 되는 일을 한다손 치더라도 내 식구한테 함께 보탬이 되는 일이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나저나, 사진쟁이 가운데 저처럼 후들거릴 때까지 손발을 놀리는 사람이 있을까 궁금합니다. 이렇게 후들거리는 손으로는 사진기를 쥘 수 없으니까요. 몇 시간 동안 아무것도 안 하며 쉬어 준다면 후들거림이 잦아들 테지만, 집일이며 바깥일이며 잔뜩 있는데, 이 모두를 남한테 떠넘길 수 없습니다. 비빔질을 하면서 걱정이요, 비빔질을 마치고도 근심입니다.

 아침에 이불을 빨며 곰곰이 헤아려 보는데, 흔히는 ‘자질구레한’ 집일이라고 여기면서 애 엄마한테 이 모두를 맡기고 애 아빠는 슬그머니 몸을 빠져나와 회사로 가 버리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기 관장을 하려면 한 사람이 아기를 붙잡고 한 사람이 줄에다 약을 탄 물을 넣어야 하는데, 이런 일은 엄마 혼자 할 수 없습니다. 죽 하랴 밥 하랴 뭐 하랴, 거기다 빨래하랴 치우랴 뭣뭣 하랴, 아기가 아프지 않아도 엄마들은 혼자서 하루해가 몹시 짧지만, 아기가 아프면 더더욱 하루해가 짧을 뿐더러 잠을 못 이루고 고단함이 가득 쌓입니다.


.. 사람들이 종종 묻습니다. ‘너는 자전거로 멋부리느냐’고. 이런 질문이라면 대답보다는 반대로 물어 보고 싶습니다. ‘이렇게 멋진 물건으로 멋을 부리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하지 않느냐’고 … 잘 모르는 사람들은 미니벨로를 보고 이렇게 말한다. “바퀴가 저렇게 작아서 어디 굴러나 가겠어!” 이는 몰라도 너무 몰라서 하는 말이다. 자전거의 속도는 바퀴의 크기보다는 앞뒤 기어의 비율인 ‘기어비’거 더 많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 미니벨로는 기어비가 큰 편이어서, 작은 바퀴로도 상대적으로 빠른 속도를 낼 수 있는 것이다 … 미니벨로는 도시에서 타기 좋은 자전거인 것이다 ..  (여는 말, 67)


 오늘보다 더 무겁고 아픈 몸이던 어제, 억지로 몸을 일으켜 서울로 일을 하러 가서 몇 시간 자리를 채우고 돌아왔습니다. 서울로 가는 전철길에 《하이힐을 신은 자전거》라는 책을 펼쳤습니다. 자전거를 즐겨타는 사람이 쓴 책이요, 더욱이 ‘자전거를 즐겨타는 여자’가 쓴 책입니다. 이제까지 나라안에 나온 자전거책을 돌아보면 거의 모두 ‘남자만 썼’습니다. 자전거 즐김이가 남자만이 아닐 텐데, 자전거책은 하나같이 남자들만 쓸 수 있는 듯 나왔고, 이 책들은 하나같이 ‘남자가 읽기에 좋도록만’ 엮었습니다. 얼마 앞서 나온 《자전거 홀릭》이라는 책에서는 ‘지름신’을 이야기하며 “가족을 위해 하나를 양보하면 두 개 세 개의 양보를 받을 수 있다. 이러한 배려와 이해가 쌓이면서 자연스럽게 가족들은 나를 이해하게 되고, 다음번에는 기꺼이 남편과 아빠를 위해 그들의 시간을 양보해 줄 것이다(86∼87쪽)”라는 대목이 엿보이기까지 하는데, 자전거 즐겨타기를 오로지 ‘남자 일’로만 여기는 눈길에 갇혀 있는 모습입니다. 더 비싸고 더 고급스럽고 더 겉멋을 부릴 수 있는 자전거 부품을 ‘질러대면서도 아내와 아이 눈치를 안 보려면 어떻게 하면 좋다’는 ‘요령(?)’을 다룬 대목이라 이 책을 읽다가 그만 질렸는데요, 우리는 왜 이렇게까지 하면서 남자들끼리 자전거를 타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참말로 이렇게 ‘여자로서 자전거를 즐기는 일’을 얕잡거나 모른 척해도 되는지 궁금합니다. ‘남자끼리만 타기에 더 좋은 부품을 질러대는’ 데에 돈을 쓰지 말고, ‘부부가 함께 타기에 좋은 자전거를 장만하는’ 데에는 돈을 못 쓰는지 궁금합니다. ‘부부와 아이 모두, 그러니까 식구들 모두 즐겁게 자전거 마실을 하기에 좋은 자전거를 마련하는’ 데에는 돈과 마음 모두 못 쓰는지 궁금한 노릇입니다.


.. “자전거 태워 줄게요.” 이건 나의 로망 〈아멜리에〉의 한 장면이 될 수 없는 시추에이션이었다. 나는 저 자전거를 타는 순간 ‘영심이 인증’ 단계로 접어들게 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탔다. 키다리 아저씨의 자전거도 아니었고, 고가의 근사한 자전거도 아니었고, 내가 꿈꾸는 핑크색 튜닝 자전거도 아니었지만, 나는 탔다. 그리고 기분이 매우 좋아졌다 … 나는 작고 아담한 핑크색 자전거를 꿈꾸었지만, 그는 튼튼하고 뒷자리가 넓은 자전거를 꿈꾸었다 ..  (32쪽)


 《하이힐을 신은 자전거》는 오로지(까지는 아니나, 거의 오로지) ‘여자로서 자전거를 마음껏 즐기자’는 이야기를 다룹니다. 여자로서 자전거를 처음 만나고 장만하고 남자친구하고 자전거를 즐기던 아기자기한 이야기가 찬찬히 나옵니다. 글쓴이처럼 ‘자전거 타는 기본’을 모르고 예쁜 자전거부터 덜컥 장만한 사람들이 자전거를 끌고 길거리로 나오기 앞서 알아둘 여러 가지 이야기를 알맞게 적어 넣습니다. 먼저 겪어 본 사람으로서, 자전거를 타는 기본 예의와 교통법규 들을 곰곰이 되새기자는 이야기가 돋보입니다. ‘오랜 동무(여자들)’하고 함께 자전거를 끌고 마실을 다니기에 좋은(서울 시내에서) 곳이 어디인가를 넌지시 알려주는 대목 또한 볼 만합니다.

 다만, 이런 ‘자전거 타는 기본’ 이야기를 이 책에서 글쓴이가 굳이 왜 적어야 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런 ‘자전거 타는 기본’은, 새 자전거를 살 때 자전거와 함께 곁들여 오는 ‘자전거 설명서’에 훨씬 꼼꼼하면서 알기 좋도록 그림까지 그려서 보여주고 있거든요. 이런저런 이야기를 글쓴이가 제법 긴 쪽수를 마련해서 적바림하는 일은 나쁘지 않지만, ‘자전거 타는 기본과 예의’ 이야기는 딱 한 줄로, ‘자전거를 살 때에 설명서를 반드시 챙겨서 꼼꼼하게 읽읍시다!’ 하고 적어 주면 넉넉해요. 헌 자전거를 산다 할지라도, 동네 자전거집에 들러서 ‘자전거 설명서 한 부 얻을 수 있을까요?’ 하고 여쭈면 열 곳 가운데 아홉 곳은 거저로 줍니다. 우리 나라 자전거꾼치고 자전거 설명서를 꼬박꼬박 챙기고 읽는 사람이 거의 없어, 자전거집마다 설명서가 잔뜩 쌓여 있거든요.


.. 오지랖이 넓은 탓일까? 고리타분한 생각일까? 아니, 어쩌면 늘어나는 중국집 스티커만큼이나 내 머리속도 그 무언가로 채워졌기 때문일까? 환경 비용을 줄이는 일, 그리고 환경운동가가 되는 일은 대부분 이처럼 사소한 일에서 시작된다. 일회용 나무젓가락이나 플라스틱 포크를 사용하지 않는 사람에게 오지랖이 넓다고 비난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오히려 그렇게 살지 못하는 자신을 부끄러워한다. 자장면 배발도 자전거를 이용하면 된다 … 자전거도로가 충분하고 제대로 정비되어 있다면 정장 차림으로 자전거를 타지 못할 이규가 있을까. 자전거 타기가 생활화되었다면 슬리브리스 원피스를 입은 여자들이 자전거를 꺼릴 이유가 있을까 ..  (46, 100쪽)


 저녁에 집으로 돌아오니 옆지기가 묻습니다. 아침에 들고 간 그 자전거책을 읽으니 어떠하느냐고. 머뭇거립니다. 가만히 헤아려 보다가, 재미없었다고 대꾸합니다. 값비싼 자전거가 아니라 ‘좋은’ 자전거라고 느끼기 때문에(누구한테나 도움이 되고 지구환경에 보탬이 되며, 잘생기고 쓸모 많은 자전거라고 느끼기 때문에), 이 좋은 자전거로 한껏 멋을 내면서 살고 싶다는 분이 엮은 자전거 이야기라서, 남달리 눈여겨볼 이야기가 많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정작 무슨 멋을 부리는지는 몇 줄 나오지 않았습니다. 우리 나라 자전거길 현실 몇 쪽에다가 남자친구 자전거 얘기 몇 쪽에다가 아버지와 짐자전거가 얽힌 ‘로망’을 몇 쪽쯤 이야기하다가 책 1/4을 ‘자전거 설명서’에 뻔히 나오는 이야기를 길게 적바림하는 바람에 지루했거든요.

 여느 ‘남자 자전거꾼’이 여느 ‘자전거 타는 삶을 이야기한 책’하고 짜임새가 그다지 다르지 않다고 느끼니 몹시 뻔했습니다. 그래도 여느 남자 자전거꾼처럼 ‘어떤 스펙’을 억지로 밀어붙이지 않아 반갑다고 느꼈습니다. 이거를 갖추고 저거를 갖추지 않고서는 자전거를 타지 말아야 하는 듯 이야기하는 책은 아니라서 괜찮았습니다. 산을 타는 재미니 강을 달리는 즐거움이니 하면서 휴일에 놀러다니는 이야기에만 치우치지 않아 마음에 들었습니다. 도시에서든 시골에서든 자전거 하나를 사랑할 수 있는 마음가짐을 다루고 있어서 새삼스럽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왜 글쓴이 이야기를, 글쓴이 자전거 이야기를, 글쓴이가 자전거를 타고 도시를 쏘다니던 산뜻함과 기쁨과 고단함과 슬픔을 좀더 낱낱이 보여주지 못하고 말았을까요. 왜 어설픈 가르침이나 길잡이에 빠져들고 말았을까요. 왜 몸소 부대끼거나 겪으면서 받아들인 ‘서울 시내에서 일하고 살면서 자전거를 타는 여자로서 내 삶은 이러했고 이러하며 이러하리라 본다’는 고갱이를 붙잡지 못했을까요.

 우리 자전거 문화가 아직은 밑바닥이기에, 자전거를 말하는 책 눈높이조차 밑바닥에서 허덕여야만 하는지요? 우리 자전거 정책이 아직 씨앗이 뿌려졌다고 하기도 어렵기에, 자전거를 즐기는 사람들 목소리 담은 책 또한 이렇게 제 줏대를 잃고 시류나 유행에 끄달려야 하는가요?


.. 자동차는 불편하게! 자전거와 보행자는 편하게! 이것이 암스테르담을 암스테르담답게 만드는 기본이다 … 남자친구의 허리둘레에 그다지 사랑스럽지 않은 핸들 하나가 더 생긴 것도 자동차와 혼연일체로 생활했던 탓은 아닐까 …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데, 청담동에서는 자전거를 주차하기가 왠지 조심스럽다. 자동차 주차 공간을 조금만 할애해 자전거족을 위한 주차 공간을 만들어 주면 고급스러운 청담동 분위기에 어울리는 자전거족이 되어 줄 자신이 있는데 말이다 ..  (54, 58, 122∼123쪽)


 자전거는 틀림없이 굽높은구두도 신을 수 있어야 합니다. 자전거는 고무신도 신을 수 있어야 합니다. 자전거는 짐도 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자전거는 짧은치마도 입을 수 있어야 하고, 청바지나 반바지나 양복 또한 입을 수 있어야 합니다.

 빨리 달리는 자전거와 함께 천천히 달리는 자전거가 골고루 길을 누빌 수 있어야 합니다. 아기를 태운 자전거와 함께 사랑하는 짝꿍이 나란히 앉은 자전거가 어깨동무하며 거리를 오갈 수 있어야 합니다. 자동차 빵빵 소리에 세발자전거와 네발자전거가 놀라지 않을 수 있어야 합니다. 골목길에서든 아파트 주차장에서든 이리 비틀 저리 비틀 달리는 어린이들 자전거보다 빨리 내달리는 자동차가 사라질 수 있어야 합니다. 경주하는 자전거는 경륜장에 가거나 곧게 쭉 뻗은 길로 가야 합니다.

 평화가 되는 자전거이며, 사랑이 되는 자전거에다, 어깨동무가 되는 자전거여야 한다고 느낍니다. 하이힐을 신은 자전거라 한다면, 끌신을 신은 자전거한테도 살짝 눈짓 한 번 보낼 수 있겠지요. 이야기책 《하이힐을 신은 자전거》는 살그머니 눈짓을 할까 말까 망설이다가 그예 콧대를 높이며 흥 하고 돌아섭니다. (4342.11.4.물.ㅎㄲㅅㄱ)


 ┌ 《하이힐을 신은 자전거》(뮤진트리 펴냄,2009)
 ├ 글 : 장치선
 └ 책값 : 1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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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를 안아보았나요
조안 말루프 지음, 주혜명 옮김 / 아르고스 / 2005년 11월
평점 :
절판




 이 책 하나 121 ― 아기를 꼬옥 안아 보았나요
 : 조안 말루프, 《나무를 안아 보았나요》


- 책이름 : 나무를 안아 보았나요
- 글 : 조안 말루프
- 옮긴이 : 주혜명
- 펴낸곳 : 아르고스 (2005.11.7.)
- 책값 : 9800원



 (1) 아기를 꼬옥 안아 보았나요


 요 며칠 사이, 인천에서 전철을 타고 서울로 일하러 가는 길에 뜻하지 않게 자리에 앉고 있습니다. 굳이 자리에 앉을 생각을 하지 않고 있으나 저한테까지 자리가 나기 일쑤이고, 또 다른 사람들이 빈자리가 있어도 안 앉아서 제가 앉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그 빈자리에 앉은 다음 ‘왜 다른 사람들이 여기에 안 앉으려 했는지’를 깨닫습니다. 제 옆에 앉은 다른 사람들이 다리를 쩍 벌리거나 화장품 냄새를 너무 짙게 내거나 엉덩이가 팔꿈치로 밀거나 하면서 고달프게 하기 때문입니다.

 참고 견디다 못해 슬쩍 눈을 찌푸려 보기도 하지만 못 본 척입니다. 이럴 바에는 그냥 서서 가자며 자리에서 일어나 서서 책을 읽습니다. 이렇게 제가 앉던 자리가 비며 제 앞서 서 있던 이가 앉곤 하는데, 이분들은 좁거나 말거나 끝까지 잘 앉아서 가시고, 또 이내 잠들며 곯아떨어집니다. 저로서는 딱히 내 자리를 내어준다는 생각이 있지도 않습니다만, 제 앞에서 빈자리 얻는 분들 가운데 고맙다는 말 한 마디 건넨 사람은 아직 없습니다.

 아침저녁 미어터지는 때에 아기나 어린이를 데리고 타는 분이 드물게 있습니다. 어이하여 이런 때에 이 전철을 타시나 싶어 안쓰러운데, 이분들은 틀림없이 이분들 다른 일이 있어서 이때에 꼭 타야 했겠지요. 이때 제가 자리에 앉아 있다면 얼마든지 내어드리겠지만, 아기나 어린이를 데리고 타는 어머니나 어버이를 마주칠 때에는 으레 서 있곤 합니다. 아이들이며 어버이며 답답하고 힘들겠구나 싶어 걱정이 되지만, ‘자리에 앉은 다른 분’들 가운데 힘들지 않은 분이 없을 테니, 아기를 안고 있든 다리 아파 괴로워하는 어린이 손을 붙잡고 참으라고 말하고 있든 마음써 주는 모습을 보기는 더없이 힘듭니다. 도시 문명을 탓할 일은 아니지만, 이만큼도 안 되나 싶어 속이 쓰립니다.

 하기는. 찻길 건널목에서 푸른불을 기다리고 있을 때, 푸른불이 들어와도 버젓이 가로지르는 자동차나 버스가 퍽 많으니까요. 건널목 가운데쯤을 지나고 있어도 부웅 지나가는 차가 꽤 되니까요.

 그렇지만, 자가용을 살금살금 모는 이 또한 많고, 골목에서 아이들을 널리 헤아리면서 아주 천천히 달리는 이 또한 많습니다. 빵빵거리지 않고 느긋하게 기다리는 이 또한 많으며, 멈춤줄에 잘 멈추며 건널목이 빨간불로 바뀌어도 곧바로 달리지 않고 더 기다려 주는 이 또한 많습니다. 이웃을 헤아리지 못하는 매무새일 때에는 두 다리로 걸으나 전철과 버스를 타나 자가용을 몰거나 자전거를 끌거나 마찬가지가 되어 볼썽사납습니다. 이웃을 헤아리는 매무새일 때에는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반갑고 거룩하고 아름답습니다.

 숨쉴 틈 얼마 없이 미어터지는 지옥철에서도 공짜신문을 쫙 펼치면서 옆사람이나 앞사람 머리통이나 얼굴이 신문으로 긁히도록 하는 사람들한테 치이며 광화문 한글학회로 온 오늘 아침, 등판과 얼굴에 흐르는 땀을 훔치면서 조용히 생각에 잠기면서 하루일을 엽니다. ‘그 사람들은 당신 아기이든 아는 사람 아기이든 안아 본 적이 있을까?’ ‘그 사람들은 당신 어린아이가 어른들 틈바구니에 끼여 옴쭉달싹 못하고 있을 때 그예 밀어붙이기만 할 수 있을까?’ ‘그 사람들은 너덧 살짜리 아이는 서서 가도록 하고 당신들은 오래오래 자리에 앉아 갈 수 있을까? 아버지로서, 또는 어머니로서?’ ‘그 사람들은 당신 아이를 어떻게 사랑하고 무엇을 사랑하며 왜 사랑하고 있을까?’

 한참 셈틀에 눈을 박고 일하자니 눈이 아픕니다. 화면을 끄고 뒷간으로 가서 오줌을 누고 낯을 씻은 다음 창밖을 내다봅니다. 바람이 퍽 거세게 부는 오늘은 서울하늘조차 꽤 파랗습니다. 파랗고 높은 하늘에 하얀구름 조금조금 떠 있습니다. ‘이렇게 하늘 파랗고 구름 하얀 날은 골목마실 하면서 사진을 찍어야 하는데…….’

 어느 사무실이든 건물 안쪽에 깃들어 있고, 어느 사무실이든 한낮 햇살 따갑고 눈부시게 들어오는 때에도 형광등 불빛을 환하게 켜 놓고 있습니다. 낮밥 때가 되어 이때만이라도 불을 꺼 놓고 도시락을 먹으려고 하니, “사람이 있는데 왜 불을 끄고 있어?” 하면서 다시 불을 켜고는 낮밥 먹는다며 밖으로 나가십니다. 다른 일꾼들이 모두 나가고 난 뒤 슬며시 다시 불을 끕니다. 다문 삼십 분이나 한 시간 만이라도 한낮에는 창문으로 햇살을 받으면서 책을 읽거나 쉬거나 단잠을 자거나 일을 하고 싶습니다. 이 가을을 이 가을답게 느끼고 이 파란하늘을 이 파란하늘로 느끼며 이 거센 바람을 거센 바람으로 제 살결이 받아들이도록 하고 싶습니다.
 







 (2) 《나무를 안아 보았나요》 읽기


 지난 9월 22일부터 읽고 있던 《나무를 안아 보았나요》라고 하는 199쪽짜리 책을 다 읽습니다. 하루면, 아니 몇 시간이면, 아니 인천에서 서울로 가거나 서울에서 인천으로 오는 전철길이면 큰 어려움 없이 다 읽을 만한 부피인 작은 책인데, 금세 읽어치우자니 몹시 아쉬워서 읽고 쉬고 읽다가 멎으면서 10월 19일 아침에 끝을 봅니다.

 이 책을 처음 만나 읽던 지지난주, 책 한귀퉁이에 몇 마디 생각부스러기를 끄적였습니다. “하루아침에 읽어치울 수 없습니다. 누군가는 이 놀랍도록 반갑고 기쁘며 좋은 책을 하루아침에 써냈을는지 모르는데, 이러하다 하여도 우리는 이이가 온삶에 걸쳐 배우고 삭이고 가르치고 나눈 끝에 어느 하루 온힘을 모아 책 하나를 써냈음을 헤아려야 합니다. 그리고, 웬만한 거의 모든 책은 몇 해에 걸쳐 조금씩 꾸준히 쓰는 가운데 한 권으로 모두어집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여러 해, 또는 여러 열 해에 걸쳐 피와 땀이며 사랑과 믿음이며 깃든 책을 하루아침에 읽어치울 수 있겠습니까. 하루 동안만 반가움과 기쁨을 맛보기에는 참으로 아쉽고 아깝고 슬프지 않습니까. 여러 해, 또는 여러 열 해에 걸쳐 아주 조금씩, 차근차근 읽고 또 읽고 다시 읽으며 내 마음을 채우고 덥히고 북돋워야지 싶습니다.”

 대학교에서 생물학과 환경학을 가르친다는 글쓴이 조안 말루프 님은 생물학이라는 학문을 책에 갇히거나 연구실에 매인 지식으로는 다루지 않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와 내 이웃과 우리 터전인 자연을 꾸밈없이 들여다보는 매무새로 생물학을 가르치고, 사람과 자연이 도시나 시골에서 슬기롭게 어울리는 길을 일러 주는 환경학을 가르치겠구나 싶습니다.

 이 책에 처음 붙은 이름은 “Teaching the Trees, Lessons from the Forest”라고 합니다. 이 이름을 우리 말로 옮기며 “나무를 안아 보았나요”로 고쳐썼는데, “나무를 가르치고, 숲한테서 배우기”로 나아가는 첫걸음은 나무를 꼬옥 안아 보는 데에서 뗀다고 합니다. 나무를 온몸으로 껴안아 보지 않고서는 나무를 가르치거나 배울 수 없으며 말할 수 없다고 합니다. 나무를 온 가슴으로 느껴 보아야 비로소 나무를 가르치거나 배울 수 있다고 합니다.

 그지없이 마땅한 소리입니다. 나무란 사람과 같은 목숨인데, 나무를 안아 보지 않고 어찌 나무를 말할 수 있을까요. 나무란 사람과 마찬가지로 온 우주가 깃든 목숨인데, 나무를 안아 보려고 다가서지 않으며 나무를 배운다든지 다룬다든지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들은 나무를 나무 그대로 바라보지 않습니다. 나무를 껴안는 일도 드뭅니다. 나무라는 낱말은 다 알고 있겠지만 나무라는 삶과 목숨은 제대로 모릅니다.

 이와 비슷하게 책을 살포시 껴안는 사람이 얼마나 될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자전거를, 흙길을, 물과 바람을, 어린이를, 할매 할배를, 무지개를, 비와 구름을, 산과 들을, 논과 뻘을, 바다와 시내를, 골짜기와 들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잘 모르겠습니다. 아쉬우나마, 또 모자라나마 이 같은 작은 책이라도 한 권쯤 읽으면서 우리 생각과 마음과 넋과 얼을 새롭게 추스르거나 다독일 수 있으면 좋겠다고 느낍니다. 우리들 걸어갈 앞길에 좋은 마음벗을 사귀고 좋은 마음스승을 모실 수 있으면 반가우리라 생각합니다.
 







 (3) 슬쩍 들여다보기


 책을 덮고 나서 다시 한 번 들춥니다. 책을 읽으면서 가슴으로 한 줄 두 줄 스며든 대목을 차근차근 되짚으면서, 이 알맹이를 섣부른 지식조각이 아닌 마음밥으로 잘 받아먹자고 다짐합니다. 밑줄을 긋거나 별을 그린 몇 대목을 옮겨적어 봅니다. (4342.10.19.달.ㅎㄲㅅㄱ)


[15쪽] 숲에서는 특별한 향기가 난다고 늘 생각했던 나였지만 그날은 숲에 들어가기도 전에 숲 향기를 가슴 깊이 느낄 수 있었다. 자연림이 사라지기 전, 그러니까 나무와 이끼, 새와 곤충이 함께 호흡을 섞던 그 먼 과거에는 내가 살고 있는 지금 이 땅에서도 이런 향기가 나지 않았을까?

[16쪽] 우리는 숲을 잃고도 우리가 진정 잃은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

[30쪽] 학생들을 가르치다 보면 요즘 아이들은 사람이 아닌 어떤 대상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걸 불편하게 여기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더구나 그것이 보호해야 되는 대상이라면 불편해 하는 마음은 더 커지는 것 같다. 내가 학생들에게 나무는 지키고 보호해 줘야 하는 대상이라고 말을 하면 학생들은 금방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면서 몸을 비튼다. 그러나 나는 그들 모두가 깊이 아끼고 사랑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찾고자 애쓴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내가 살아숨쉬는 이 세상을 소중히 여기듯이, 그들은 자신이 소중하게 여겨야 할 무엇인가를 기다리며 여전히 방황하고 있다.

[33쪽] 짚신벌레, 뱀, 나무에게서 누가 경이로움, 경외감, 존경 따위를 느낀단 말인가? 그러나 나는 학생들에게 이들도 경이로운 존재이며, 이들의 생명을 구하는 것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지 보여주려고 노력한다.

[44∼45쪽] 나는 양버즘나무에만 전적으로 의존해서 사는 아홉 마리의 곤충들을 알고 있다. 그 외에도 아마 내가 모르는 곤충들이 더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양버즘나무 한 그루를 벨 예정이라면 어쩌면 그 나무 위에서 자신의 꿈을 찾게 될 아이 하나와 최소한 다섯 종의 곤충들을 잃게 된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어느 날 내가 내 친구에게 이런 사실을 설명해 주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래, 나무는 환경을 이루는 한 요소가 아니라, 나무 자체가 환경이구나.”

[55쪽] 사람들은 곰을 먼저 죽이고, 그리고 나서 너도밤나무 숲을 죽인다. 친구와 내가 다시 숲을 찾았을 때 나무는 대부분 벌목을 당한 후였다. 그날은 일요일이었기 때문에 벌목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 말할 수 없는 고요함 때문에 숲은 더 슬퍼 보였다. 막 잘려나간 나무 밑동은 수액으로 젖어 있었고 남아 있는 나무들은 무력하게 잘려나갈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다고 잘린 나무들이 집이나 가구를 만들 목재로 다시 태어나는 것도 아니다. 이들은 짓이겨져서 버려지거나 태워 없어진다. 그나마 가장 나은 건 나무 판지를 만들기 위한 펄프로 가공되는 경우다. 이 숲의 주인은 이렇게 나무를 통째로 내어줘도 아주 적은 돈을 받을 뿐이다. 그런데 왜 나무를 베냐고? 그것은 너도밤나무가 가치 있지 않기 때문이다(물론 이것은 자본주의 입장에서 말하는 것이다). 앞으로 40년이 지나도 이 너도밤나무들은 지금보다 더 자랄 뿐, 여전히 가치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주인은 나무를 베어내는 것이다.

[61쪽] 그 순간 우린 우리의 잘못을 깨달았다. 죽은 나무는 하늘다람쥐가 가장 좋아하는 보금자리였던 것이다. 이후에도 나는 하늘다람쥐의 보금자리라는 것을 모르고 죽은 나무를 베어버렸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여러 번 들었다. 우리에게 아무 쓸모없는 죽은 나무들조차 생태계에서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고 지내는 것이다.

[69쪽] 더 슬픈 것은 이곳이 이 근처에 남은 마지막 활엽수림이라는 사실이다. 이곳에 있던 나무들이 베어지던 날 이곳에 살던 새들과 동물들은 더 이상 갈 곳을 찾지 못했을 것이다. 숲 주위에 이들이 거처를 옮길 만한 곳은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73쪽] 하지만 산림 관리원이 당신에게 말해 주지 않는 것이 있다. 그것은 도룡뇽과 도마뱀, 그리고 소나무좀을 유용한 양식으로 보는 새들이 함께 어우러져서 사는 건강한 숲에 사는 소나무좀은 절대 소나무에게 심각한 피해를 주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76쪽] 딱따구리가 둥지를 만드는 데에는 보통 1년에서 6년이 걸린다 … 놀랍게도 이들이 주로 먹는 먹이는 바퀴벌레였다. 우리는 바퀴벌레를 먹어 주는 이 새를 사랑해야 한다.

[78∼79쪽] 다만 내가 불만스럽게 생각하는 점은 우리가 나무를 단지 자원으로만 보고 있다는 점이다 … “이제 우리에게 영감을 주는 늙고 아름다운 나무는 없어.” 그렇다. 노목들은 죽음이 얼마 안 남았지만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줄 수 있는 나무들이다 … 나는 아이들과 젊은이들만 살고 있는 도시에는 살고 싶지 않다. 그런데 우리가 숲이라고 부르는 곳에는 어린 나무와 젊은 나무만 있을 뿐이다.

[91∼92쪽] 바구미의 일생이 경이로운 이유는 누군가 그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인내심을 가지고 이 곤충들의 행동을 쫓아서 그것을 기록한 사람은 누구일까? 그 사람은 성충바구미가 나오는 것을 보기 위해서 얼마나 오래 참나무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었을까?

[112쪽] 내가 꽃밭에 아카시아 나무를 두기를 원하느냐, 원치 않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어머니 자연은 그것을 두기로 결정했고, 자연의 선택이 가장 옳다는 걸 안다. 나는 나무와 싸우기를 멈추고 그냥 물러서서 두고보았다. 그냥 내버려두자 나무는 놀라울 정도로 빨리 자랐다. 이제는 15미터가량이 되어서 정원의 한 구석을 든든히 지키고 있다. 나무는 이제 나의 쉼터다.

[127쪽] 종이를 값싸게 얻기 위해 숲을 아름답게 수놓는 붉은꽃산딸나무 꽃을 포기할 것인가? 나는 더 이상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 않기를 바란다.

[129쪽] 나는 내 손 안에 있는 종이가 나무뿐만 아니라 딱정벌레와 아름답게 지저귀던 새들과 벌레를 잡아먹던 박쥐 같은 다른 생명들이 사라진 대가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이 이 작은 도시에 단지 나 하나라는 사실이 몹시도 슬프고 외로웠다.

[140쪽] 우리는 아이들의 교육과 노후를 대비하는 데에는 많은 돈을 쓰고 있지만, 정작 후대에게 물려주어야 할 숲과 산호초와 강을 파괴하고 오염시키는 일에는 무신경하다.

[159쪽] 공원 조성 책임자는 자연과 생태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스스로 숲길을 걸어 본 적이 별로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결국 그는 그곳의 나무들을 판 돈으로 공원 조성에 필요한 자금을 충당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숲이 지금 그대로 보존되길 바라는 나로선 그들의 결정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 나는 사람들이 나처럼, 울창한 숲길을 걸으면서 행복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

[160쪽] 드디어 어느 날 경고도 없이 벌목 기계가 나타났다. 물론 그것은 합법적인 일이었다.

[173∼174쪽] 나는 남성을 혐오하는 사람도 아니고, 남성이 우리의 모든 환경 문제를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폭력적인 사람들은 지구와 나무들에 대해서도 폭력적인 경향을 보인다는 것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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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불편 - 소비사회를 넘어서기 위한 한 인간의 자발적 실천기록
후쿠오카 켄세이 지음, 김경인 옮김 / 달팽이 / 2004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 하나 77 ― 자전거 타기뿐 아니라 살기도 어려운 한국에서
 : 후쿠오카 켄세이, 《즐거운 불편》



- 책이름 : 즐거운 불편
- 글 : 후쿠오카 켄세이
- 옮긴이 : 김경인
- 펴낸곳 : 달팽이 (2004.4.5.)
- 책값 :


 (1) 한국땅에서 자전거 타는 어려움


 아침에 자전거를 몰고 일터인 도서관으로 나옵니다. 살짝 골목마실을 하고 도서관으로 올까 하다가, 무서운 빠르기로 날아가고 있는 먹구름이 하늘에 가득해서, 다른 데에 한눈을 팔지 않고 곧장 도서관으로 옵니다. 가파른 계단을 자전거를 어깨에 메고 올라와서 창문을 여니, 이내 바깥에는 빗줄기가 후둑후둑 떨어지고, 곧 굵은 빗방울로 바뀝니다. 자칫 1분만 늦게 왔어도 큰비를 쫄딱 뒤집어쓸 뻔했습니다. 비옷을 따로 챙겨 나오지 않았으니, 저녁에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걱정이지만, 비가 그치지 않으면 우산을 쓰고 자전거는 두고 가야겠습니다.

 동네에서 가게를 여는 할아버지와 아주머니 들은 으레 자전거를 타고 당신 댁에서 일터로 나오곤 합니다. 헌책방 앞, 문구점 앞, 구멍가게 앞, 쌀집 앞에는 으레 자전거가 서 있습니다. 짐을 나르기도 하는 자전거이지만, 집과 일터를 오가는 자전거이기도 합니다. 요사이는 ‘자출-자퇴’라는 이름으로 ‘자전거로 출퇴근하기’를 하는 사람이 제법 늘고 있는데, 이런 자출-자퇴가 있기 앞서부터, 동네 가게 일꾼들은 언제나처럼 자전거로 집과 일터를 오갔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자전거 문화가 퍼지고, 한 해가 다르게 번쩍번쩍하는 나라밖 고급 자전거가 나라안에 물밀듯 들어오고 있습니다. 새로운 자전거집은 꾸준하게 늘어나고, 길거리에서 ‘자전거옷 쪽 빼입고 달리는 사람’을 만나는 일은 낯설지 않습니다. 이분들 가운데에도 ‘자출-자퇴’가 있겠습니다만, 좀더 많은 분들한테는 ‘레저-취미-운동’이 아닐까 싶습니다. 당신들 집과 일터를 오가는 데에도 더러 이 자전거를 탈 테지만, 집과 일터 사이는 ‘인천과 서울’ 사이일 때가 많고, 이러다 보면 으레 자가용이나 전철로 집과 일터를 오가기 마련이며, 쉬는 날이나 주말에 자전거를 끌고 나오기 일쑤입니다.

 자전거를 타면서 생각하고, 자전거에서 내린 다음 생각하고, 두 다리로 골목마실을 하면서 ‘짐자전거’를 만날 때하고 ‘레저-취미 자전거’를 만날 때마다 생각합니다. 우리한테 ‘삶자전거’라 할 만한 생활자전거란 무엇일까 하고. 우리는 어떤 자전거를 어떻게 타야, ‘내 삶으로 스미는 자전거’라 할 수 있을까 하고.


.. 사람들이 자동차 타기를 그만두기만 한다면, 일본 국내에서 연간 8천 명이 넘는 교통사고 사망자는 사라지게 될 것이고, 수많은 부상자들이 상처 입는 일도 없을 것이다 … 차라는 교통수단으로 우리의 생활은 날로 편해지고, 산업은 발전한다. 하지만 그 덕분에 반드시 희생자가 발생한다. 희생자를 줄이기 위한 방법은 있지만, 그것을 위해서는 막대한 비용이 필요하게 마련인데, 제한된 예산을 거기에 투자를 한다면 산업발전이나 안락한 생활을 지탱해 주는 자동차를 위한 사회적 생산기반의 정비가 늦어진다 … (정부와 사회는) 자동차의 장점을 누리고 있는 자들이 보험료를 지불하고, 그것으로 희생자에게 보상금을 지불함으로써 타협을 도모하자는 방법을 제시했다 … 차의 안전성을 말할 때, 지금까지 우리가 생각해 왔던 것은 항상 차 안에 있는 사람의 안전뿐이었다. 안전벨트도 에어백도 그것을 위한 장치다. 사고를 당한 상대방의 피해를 어떻게 줄일 수 있을까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  (5∼6쪽)


 저전거로 먼나들이를 떠난 이야기를 담은 책이 나옵니다. 자전거를 자전거집에 찾아가지 않더라도 손수 고치거나 만질 수 있는 길을 보여주는 책이 나옵니다. 자전거 정책을 다루는 책이 나옵니다. 나라에서는 새 자전거길을 놓는 데에 몇 조에 이르는 돈을 쓰겠다는 공약을 내놓습니다.

 책방마실을 하면서 ‘자전거책’을 들춰보고 몇 가지를 장만합니다. 저 스스로도 자전거책을 씁니다. 다른 분들이 쓴 자전거책을 읽다가는 끝까지 못 읽고 덮곤 합니다. 자전거 정비를 다룬 책을 읽으며 ‘자전거를 처음 살 때 주는 설명서에 담긴 이야기하고 무엇이 다를까?’ 하는 궁금함을 풀지 못합니다.

 그러다가 나라안 자전거책이 어느 대목에서 서로 닮은지를 어렴풋하게 느낍니다. 자전거 이야기를 다루는 자전거잡지도 마찬가지입니다만, 한국땅에서 자전거책이라 할 때에는 꼭 두 가지 자전거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첫째, 산타는자전거, 영어로 하자면 ‘엠티비’. 둘째로는 길에서 내달리는 자전거, 영어로 하자면 ‘로드바이크’, 이른바 ‘사이클’.

 드문드문, ‘작은자전거’를 ‘미니벨로’라는 이름으로 다룹니다. 그렇지만, 드문드문 다룰 뿐이요, 속깊이 들여다보는 눈길이나 매무새가 되지 못합니다. 어쩌다 들여다본다 할지라도, 사람들이 널리 사랑하고 아끼도록 이끄는 힘을 보거나 느끼기란 퍽 어렵습니다.


.. 남은 길은 오직 하나다! 선진국 국민들이 에너지와 물자의 소비량을 줄이는 길뿐이다. 지금, 선진국에서 소리 높여 외치고 있는 것은 자원과 에너지의 효율화를 추진하여, 낭비를 제거하자는 주장이다. 하지만 어느 일부에서 낭비를 없애고 절약을 할라치면, 절약된 돈을 유혹하는 새로운 소비가 뒤이어 등장하는 것이 자본주의의 속성이다 … 계단이 찾기 어려운 외진 곳으로 쫓겨나고, 그 존재조차 눈에 잘 보이도록 표시해 두지 않게 된 배경에는, 계단보다 안락하고 빠른 엘리베이터를 누구나 선호할 것이라는 ‘상식’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로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고 꾸준히 계단을 이용하다 보면, 꼭 그렇다고 말할 수만도 없다 ..  (17, 50쪽)


 툭 까놓고 하는 말이지만, 자전거 문화이든 정책이든 취미이든 삶이든 무엇이든 말하는 자리에 있는 분들치고, 여느 사람들이 예부터 오늘날까지 꾸준히 타고 있는 자전거(짐자전거와 장바구니자전거)를 차근차근 들여다보고 나서 말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지 않느냐 싶습니다. 어제오늘앞날에 이르기까지, 조용히 꾸준히 자전거를 즐겨 온 사람들 매무새는 한 번도 살갗으로 느껴 본 적이 없지 않느냐 싶습니다.

 그러고 보면, 가게 일꾼이 타고, 아저씨 아주머니가 타는 여느 짐자전거치고, ‘자전거 설명서’가 붙어 있은 적이란 없습니다. 설명서가 붙어 있는 자전거는 우리 나라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유사산악자전거’쯤 되어야 합니다. 튜브에 바람을 넣든, 구멍난 튜브를 때우든, 이래저래 손질을 하건, 안장 높이를 맞추건 손잡이를 맞추건, 언제나 ‘값나가는 자전거’한테만 눈길을 맞춥니다.

 우리네 땅에 자전거길을 놓아야 한다면, 취미나 운동을 삼아서 놓을 수도 있겠습니다마는, 무엇보다도 우리 스스로 집하고 일터를 오가거나 집하고 학교를 오가거나 내 집에서 이웃이나 동무네 집을 오가는 길에서 걱정이 없도록 하는 길을 놓아야 하지 않을까요? 서울 한강 같은 데처럼, 강줄기를 끼고 자전거길을 새로 큰돈 들여 닦아 놓는다면 보기에도 좋고 달릴 때에도 좋고 할 터이나, 정작 자전거 쓰임새 가운데 아주 작은 대목만 누리거나 나눌 뿐입니다. 취미나 운동은 채워 준다지만, 우리가 취미나 운동만 하면서 살 수 있겠습니까? 우리 삶을 꾸리고 우리 일을 하는 가운데 취미가 있고 운동이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늘 살아가는 가운데 자전거를 탈 수 있도록 하는 자전거 정책이요 문화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언제나 자전거를 타고 있는 가운데 한 번 더 마음을 쏟아 즐거이 운동도 하고 취미로도 삼을 자전거 이야기를 펼쳐야 하지 않을는지요?


.. 소유하는 물질과 정보도 훨씬 많고, 에너지도 먹을 것도 넘칠 정도로 소비하고 있으면서, 30년 전의 어버이들이 아이들에게 주었던 정도의 행복감을 우리는 우리 아이들에게 나눠 주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 아니, 오히려 우리 자녀 세대에게 환경파괴니 식량위기니 자원고갈이니 하는 무거운 짐을 떠넘기려 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 에너지와 돈을 써 가면서 자가용이나 전철로 이동하고, 운동부족 해소니 체중감량이니 하는 명목으로 냉난방이 잘 갖춰진 스포츠센터에서 또 에너지와 돈을 들여, 바퀴도 없는 자전거 페달을 밟고 런닝머신에서 제자리뛰기. 내 자녀와 손자들의 자원을 야금야금 축내고, 그 미래를 짓밟아 가면서 ..  (19, 33쪽)


 제가 대통령이 된다면 저는 마땅히 ‘대통령 관용차’를 받아들이지 않을 생각입니다. 대통령이 아닌 국회의원이 되든 시장이나 군수가 되든 마찬가지입니다. 모오든 관용차를 없애고 누구나 ‘관용자전거’를 타도록 틀거리를 마련할 생각입니다.

 행정과 정치를 맡으며 차를 타고 어디를 가야 한다면 택시를 불러야지요. 요새 부름택시가 얼마나 잘 옵니까. 더구나, 관용차 아닌 택시를 쓰면 유지비와 경비는 훨씬 덜 들 뿐더러, 인건비 또한 훨씬 적게 먹습니다. 게다가, 택시는 우리가 가려는 데까지 얼마나 빠르게(?) 모셔다 줍니까. 이러는 가운데, 택시업자들도 한숨을 돌릴 수 있으니, 우리네 일자리 지키기에도 더욱 크게 도움이 됩니다. 이러면서 관용차를 제멋대로 굴리는 일을 막을 수 있어 공직사회 썩은물 갈기에도 이바지를 합니다. 한편으로는 모든 공무원이 자전거로 일터를 오가도록 하면서 배불뚝이 공무원은 머잖아 사라질 수 있고, 공무원 스스로 자전거를 타고 집과 일터를 오가는 동안 ‘대한민국 길이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를 뼛속 깊이 깨달을 테며, 애먼 돈을 해마다 보도블럭 갈아엎는 데에 쏟아붓지 않고 ‘어디에 그 돈을 써야 하는가’를 제대로 알아차릴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러면서 자전거 타기가 늘 몸에 배었을 테니까, 굳이 비행기 타고 머나먼 나라로만 여행을 다니지 않고, 식구들하고 자전거를 타고 나라안 곳곳을 찾아다니는 마실을 떠나기도 하며, 이렇게 나라안 곳곳을 찾아다니면서 ‘허튼 나라사랑’이 아닌 ‘참된 자연사랑’을 조금씩 키울 수 있고, 우리 아이들한테도 땀흘리는 보람과 이웃과 사귀는 기쁨을 가르칠 수 있어요.

 다만, 이런 생각은 아직까지는 덧없는 꿈 같다고 느낍니다. 어쩌면 앞으로도 부질없는 꿈이 아닌가 싶습니다. 공무원뿐 아니라 우리들 누구나 돈을 밝히고 이름에 매이고 힘에 휘둘리고 있으니까요. 내 몸을 나 스스로 움직이며 살아가기보다, 내 입과 손만 께작거리며 살아가려고 하니까요.


.. 우리 식구들이 먹을 채소인 만큼, 농약이나 화학비료는 일절 사용하지 않는다. 사용 후 처리에 문제가 있는 비닐 등의 화학합성재료도 가능한 한 사용하지 않기 위해, 신문지로 대신 쓰고 있다 … 본가의 어머니께 여쭸더니, 봄에서 가을까니는 무농약으로 양배추를 키우기가 어렵다고 하신다. 시판되고 있는 ‘곱디고운’ 양배추의 대부분은 흙에 뿌려진 약제를 뿌리로부터 흡수하며 자라기 때문에 벌레들이 좀처럼 기생하지 못한다고 한다. 그 벌레도 먹지 못할 것을 인간이 먹고 있는 셈이다. 생산자 입장에서는 편하게 곱디고운 상품을 생산할 수 있으니 분명 합리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을 먹는 소비자 입장에서 본다면, 그것이 과연 합리적일까? … 대량으로 생산하기 때문에 가격이 낮아진다. 단가가 낮아지면 대량으로 보급되고, 보급 후에도 생산량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반복적으로 소비하도록 해야 할 필요가 있다. 즉 고장이 나면 버리고 새로 사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낮은 가격이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 ..  (64, 66, 55∼56쪽)


 그러나, 자전거를 탄다고 좀더 튼튼한 생각과 마음으로 살아간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자전거를 안 타거나 못 타면서도 얼마든지 생각과 마음을 튼튼하게 일구거나 지키는 사람이 많습니다. 자전거를 모르면서도 세상을 똑똑히 깨달으며 ‘아름다운 땀방울’ 값어치를 널리 나누는 분이 많습니다.

 꼭 자전거 한 가지를 들어야 한다면, 뭐라고 해야 할까, 한 사람이 한 아이를 낳고 기를 때와 마찬가지로, 좀더 넓고 깊이 들여다보거나 깨닫거나 부대낄 실마리를 하나 더 열 수 있을 뿐입니다. 아이 키우기에서도 자전거 타기와 마찬가지인데, 아이를 낳지 않고 키워 보지 않는다 해서 아이 사랑을 못하란 법이 없습니다. 아이를 돌본 적이 없다 하여 사람과 사람 사이 어우러짐을 잘 모른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저, 한 가지 이음고리가 없다뿐입니다. 그리고, 아이 키우기를 하면서 한 가지 이음고리를 더 뼛속 깊이 깨닫습니다. 갓난쟁이부터 큰 아이가 될 때까지 한팔로 아이를 안고 다른 한 팔로는 장바구니를 들면서 한두 시간을 땀 뻘뻘 흘리며 저잣거리 마실을 하고 돌아와서 식구들 밥상을 차려 본 사람과, 이런 일을 치러 보지 않은 사람 삶과 생각은 같을 수 없습니다. 헬스클럽에서 역기를 들며 한두 시간 운동할 때하고, 아기를 안고 한두 시간 거닐며 어르고 재우는 삶은 같을 수 없습니다. 같은 길을 가더라도 두 다리로 걸을 때하고 자전거로 달릴 때하고 자가용으로 지나칠 때는 사뭇 다른데, 두 다리로 걷던 길을 자전거로도 오가면 더욱 깊이 이 길을 몸과 마음으로 받아안는다고 할까요. 아기한테 젖을 물려 본 삶을 치러내고서 ‘엄마젖 먹이기’를 말하는 삶하고, 아이 키울 마음은 따로 없으나 ‘엄마젖 먹이기’가 중요하다고 말하는 삶하고 다른 셈이라고 할까요. 목소리는 같아도 목소리에 담는 삶이 다릅니다. 목소리는 똑같이 들릴지 몰라도 목소리에 담는 느낌이 다릅니다.


.. 원래 불황이란 물건이 팔리지 않는 상황을 말한다. 그렇다면 왜 물건이 팔리지 않게 되었을까? 당연한 얘기지만, 그것은 사람들이 물건을 사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물건을 사지 않게 되었을까? 그것은 살 필요가 없고, 사고 싶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살 필요가 없고, 사고 싶은 것이 없을까? 그것은 이미 충분히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 이 시점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물질이 팔리지 않으면 당연히 만들 필요도 없다는 점이다. 만들 필요가 없으면, 또 일하지 않아도 좋다는 결론이 된다 … 사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돈은 이제 그다지 필요없다는 것이다. 돈이 그다지 필요치 않게 되었다면, 억척같이 일하지 않아도 됨을 의미한다 … 사람들이 노동시간을 줄임으로써 늘어난 자유시간을 그런 공생을 위한 활동으로 돌린다면, 그러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그와 더불어 인간관계의 폭도 넓힐 수 있고, 삶의 보람도 찾을 수 있다 ..  (125∼128쪽)


 사람들이 자전거를 제대로 안 타 버릇하기 때문에, 자전거 문화가 제대로 뿌리내리기 어렵고 자전거 정책이 올바르게 나오기 어렵습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사회와 문화와 역사와 경제를 올바로 읽지 않기 때문에, 자꾸자꾸 옳지 못한 사람들이 정치꾼으로 나설 뿐 아니라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으로까지 뽑히고 시장이나 군수를 여러 차례 지내기까지 합니다.

 사람들이 자전거를 타도, 내 삶으로 곰삭이는 자전거가 아닌 취미나 멋이나 명품이나 뽀대나 레저나 지름신이나 매니아나 유행이나 소비이기 때문에, 자전거 문화가 튼튼히 뿌리내리기 힘들고 자전거 정책이 슬기롭게 나오지 못합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삶을 헤아리려고 애쓰면서 책을 찾아 읽는다든지, 우리 이웃을 굽어살피고자 마음문을 연다든지 하지 않으니까 자꾸자꾸 범죄가 늘고 아이들뿐 아니라 어른들 말씨가 거칠어지며 갖가지 아프고 슬픈 일이 끊이지 않습니다.

 아이들 스스로 보충수업과 자율학습과 머리단속과 교복통제를 떨쳐내지 못하지만, 어른들 또한 아이들이 더 높은 대학교에 동무를 짓누르고 들어가기를 꿈꾸고 있기 때문에 교육 문제가 풀리지 않습니다. 이런 얼거리를 모르는 어른은 드무리라 봅니다. 이와 매한가지입니다. 길에서 자전거를 타는 일이 아슬아슬하지 않으려면, 우리 스스로 자전거를 타고 길에 나와야 합니다. 자전거 문화이든 정책이든 제대로 나오고 뻗어가려면 우리 스스로 내 자전거와 이웃 자전거를 꾸밈없이 바라보고 껴안을 줄 알아야 합니다. 셈틀 앞에 앉아 인터넷바다를 휘저으며 지름신을 꿈꾸는 가운데 자전거 문화란 싹이 트지 못합니다. 값비싼 자전거이든 값싼 자전거이든 언제나 스스로 즐겁게 타고다니는 버릇을 들이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엉터리 자전거 정책만 쏟아지면서 나라돈을 엉뚱한 데에 쏟아붓고야 맙니다.


 (2) 한국에서 살아가는 어려움


 며칠 앞서 어느 혼인잔치에 다녀왔습니다. 여느 혼인잔치와 거의 똑같이 이루어졌으나, 신랑과 신부가 혼인서약을 할 때에 조금 다르던데, 저마다 맞은편 앞에서 ‘내 다짐’을 읽는데, 신부 되는 분께서 “신랑 내조를 잘하겠으며……” 하는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읽었습니다. 나중에 이야기를 들어 보니, 스물너덧밖에 안 되었을 신부는 ‘남편 내조 잘하는 아내’가 꿈이라고 하더군요.


.. “지금 현대인의 생활상을 보면, 그런 생생한 삶의 근원과 관련된 작업을 모두 가정 밖으로 몰아내서, 눈에 보이지 않게 하고 있잖아요? 출산도 사람이 죽는 것도 병원에서 하고, 고기도 생물을 죽임으로써 비로소 얻어진다는 흔적도 찾아볼 수 없게, 포장돼서 진열냉장고에 깨끗하게 장식되죠. 그것을 들고 계산대에 가서 돈만 내면 내 것이 되니.” … “지금은 교육비가 많이 들어간다며, 부모는 돈을 벌기 위해 정신없이 바쁘게 살지만, 우리 아이들은 실제 돈보다는 부모님의 시간과 정성을 더 바라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  (149, 150쪽)


 남편을 잘 모시는 일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거꾸로, 아내를 잘 섬기는 일 또한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주 마땅한 노릇입니다. 남편과 아내는 서로를 더 알뜰히 모시고 섬겨야 합니다. 앞에서는 받드는 척하다가 뒤에서는 깎아내리는 짓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신부 되는 젊은 아가씨 다짐을 들으면서 더없이 거북했습니다. 당신 스스로 그렇게 밝히지 않아도, 2000년대 한국 삶터에서는 옛날하고 크게 다르지 않도록 ‘남편 모시기’를 해야 할 텐데, 굳이 스스로 더 굽히고 들어갈 까닭이 있느냐 싶고, 젊은 아가씨네 어머니와 아버지는 젊은 아가씨한테 무엇을 가르쳤는지 알쏭달쏭했습니다.

 그나마 저는 한국땅에서 남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한국땅 여자와 견주어 ‘먹고들어가는 뭔가’가 있습니다. 덧붙여, 저한테는 형이 있으니, 첫아들이 아닌 데에서 ‘홀가분한 뭔가’가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제가 여자였다면 오늘과 같이 저 하고픈 일을 제 꿈대로 하나하나 이루어 가면서 할 수 없습니다. 제가 첫째였다면 이제와 같이 저 가고픈 길을 제 깜냥껏 우격다짐으로 걸어올 수 없습니다.


.. “폐기물처리장이나 댐은 대개 시골에 만들어집니다만, 지금까지는 시골사람들이 너무 착해서 도시사람들 멋대로 하게 내버려 둔 점도 있지 않았습니까?” … “지금의 아이들은 환경문제 등 어둡고 칙칙한 이야기들만 들으면서 성장하고 있기 때문에, 미래에 대한 밝은 꿈을 갖기가 어려워졌어요.” … “결국 모든 것이, 생명의 기쁨을 느낄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큰 기회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  (204, 206, 311쪽)


 옆지기는 가끔 저한테 “형한테 고마워 해야 해요”나 “형한테 미안해 해야 해요” 하고 말합니다. 이 말이 아니더라도 형한테 늘 고마우면서 미안합니다. 그런 한편으로, 제가 형이었다면, 또는 제가 맏이이면서 여자였다면, 또는 둘째이면서 여자였다면 어떠했을까를 곱씹어 보는데, 저는 제가 어떤 자리에서 어떤 모습으로 태어났어도 오늘과 같은 길을 걸었다고 느낍니다. 그저, 이 길을 걷는 동안 부딪힌 울타리가 달랐을 테고, 달랐던 울타리만큼 제 마음밭도 다르게 일구었을 테고, 다르게 일군 마음밭만큼 더 일찍 거듭났거나 더 늦게 거듭났을 테지요. 아직도 어리숙한 자리에서 헤맬는지 모르고, 일찌감치 훌륭히 거듭나면서 더 바지런히 제 삶을 붙잡고 있는지 모릅니다.

 맏이이자 남자였다면, 집안일 짐이 어마어마했을 터이나, 이 어마어마한 짐 때문에 또다른 눈길로 또다른 삶을 내다볼 수 있습니다. 맏이이자 여자였다면, 내 앞길을 헤쳐나가는 데에 나 스스로 더 많이 애쓰지 않으면 안 되었을 테니 더 다부지고 단단해졌을 테지요. 둘째이자 여자였다면, 글쎄, 잘 모르겠습니다. 설렁설렁 살았을는지, 저도 며칠 앞서 혼인잔치 자리에서 본 젊은 아가씨처럼 ‘얌전하고 다소곳하게 지아비 섬기는 한 사람’으로 머물자고 생각했을는지 모릅니다. 외려 더 홀가분하게 저 가고픈 길을 마음껏 갔을는지도 모릅니다.


.. “시간에 쫓기다 보면, 자기 스스로 무엇을 해 보고자 하는 의욕이 사라지죠.” … “모두 너무 바쁘니까 좀처럼 그렇게 해 줄 수 없는 게 현실입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그렇게 바쁜지, 잘 모르겠지만.” … “세상은 어쨌든 편리해졌습니다. 하지만 편리해졌다고 행복한가 하면, 반대로 아주 힘든 시대가 되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 “아이들이 놓여 있는 상황은, 그대로 어른의 상황과 똑같다는 느낌도 듭니다. 어른도 지금보다 장래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있잖아요. 노후를 위해서라거나 좀더 유명해진다거나 하는 잡음이 끼어들죠. 지금을 최대한 즐겁게 사는 것이 아니라, 내일을 위해 준비해라, 오늘은 내일을 위한 희생양으로 삼아라 하고. 내일이 되면, 또 다른 내일을 위해 희생하라고. 그러니 아무리 내일이 오고 또 와도 생명을 구가할 수 없게 되는 거죠.” ..  (215, 225, 230, 236쪽)


 지난 2008년 8월 16일에 딸아이를 낳으면서, 저는 속으로 제발 제발 딸아이가 나와야 한다고 빌었습니다. 왜냐하면 한국땅에서 아들아이로 태어나면 어김없이 군대에 끌려가기 때문입니다. 설렁설렁 노닥거리는 군부대도 틀림없이 있으나 우리 아이가 그런 데에 갈는지 알 길이 없는 한편, 노닥거리는 군부대에 간다 해서 아이 삶자리가 걱정이 없거나 나아지리라 여길 수 없습니다. 착하고 풋풋한 열아홉스물짜리 젊은 한 사람을 살인병기로 만들면서 바보가 되도록 굴리는데다가 주먹다짐을 몸에 배도록 하는 군대라는 곳을 몸소 겪었기 때문에, 둘레에서 만나는 어린 후배한테마다 ‘웬만하면 군대에 안 가는 길을 잘 찾길 바란다’고 이야기합니다. 군대에서 썩는 젊음은 돌이킬 수 없음을 들려줍니다.

 그러나 저로서는 군대라는 곳에서 스물여섯 달을 썩어 보았기 때문에, 한국이라는 삶터가 얼마나 살기 팍팍한가를 새삼 깨닫고 보고 삭였습니다. 베트남전쟁 때에도 고엽제를 써서 많은 분들이 뒤탈을 앓고 있는데, 제가 있던 군부대에서도 비무장지대 철조망을 가리는 푸나무를 베어내거나 뽑아낸다면서 고엽제를 뿌렸습니다. 고엽제를 ‘당까(‘들것’이 바른 말인데, 언제나 이렇게 말했습니다)’에 두어 포대씩 얹어 신나게 날랐고, 포대를 그냥 북 뜯어 하이바로 퍼서 뿌렸습니다.

 간첩이 아닌 ‘귀순’을 한다던 북녘 병사를 옆 중대 아이들이 잘못해서 쏘아죽였던 일이 있고, 이웃 소초 말년병장이 지뢰를 밟아서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밤새 근무를 서면서 지뢰 터지는 소리를 못 들었는데 뭔 소리인가 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던 일이 있으며, 온도계로 영하 47도까지 떨어진 모습을 보며 이를 덜덜 떨었던 일이 있고, 우리가 사격을 엉터리로 한다고 마구 총질을 해대며 ‘다 죽어 버려!’ 하고 외치던 중대장이 있었습니다. 이 중대장 방을 청소하다가 침상 밑에 빨간 잡지 두 권이 있는 모습을 보고는, ‘이 녀석도 사람이긴 사람이네. 군대가 사람을 미치게 만들었나 보군’ 하고 생각했고, 고참병들이 쉴새없이 주먹질을 해대며 울먹여야 할 날이면 주먹을 불끈 쥐면서 ‘군대에서 죽을 수 없어. 나한테도 전역날이 있을 테니까 기다려라, 밖에 나가서 보자 xxx들’ 하고 다짐하는 한편 ‘나는 너희처럼 고참병이 되어도 이 따위 주먹질 발길질은 안 할 테다’ 하고 굳게 다짐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군대였지만, 영하 22도를 오르내리던 혹한기훈련 때 ‘우리 주둔지보다 따뜻하잖아?’ 하고 생각하며 국을 뜨다가 그만 숟가락이 입천장에 붙는 바람에 뜨거운 물을 입에 얼른 부어 떼어내던 일을 겪으며, 추위란 이렇구나 하고 새삼 생각했습니다. 배고픈 행군을 열 몇 시간 끝없이 하면서 눈을 퍼먹는 동안 그 옛날 한국전쟁 때 피난 가던 사람들도 이렇게 눈을 퍼먹었을까 하고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사진과 영상으로만 보던 고슴도치를 두 눈으로 보며 살며시 품에 안아 보던 기쁨은 전역한 지 열 몇 해가 되었어도 어제일처럼 떠오릅니다. 산에서 우쑥우쑥 자라는 돌배와 개복숭아가 얼마나 맛있는지를 이때 처음 알았고, 내 뺨으로 두 번을 재야 할 만큼 날개가 큼직한 사향제비나비 무리를 보았을 때에는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습니다. 맨눈으로 금강산을 바라보고 스탈린고지와 김일성고지를 바라볼 때에는 그저 하염없이 좋았습니다. 남과 북은 고작 저 쇠가시울타리로 가를 수 없다고, 저쪽에서도 맨눈으로 남녘땅을 바라볼 수 있겠지 하고 생각하며 통일이란 무엇인가 하고 곰곰이 되뇌었습니다.

 누구나 치러내기 나름이니, 잘 치러내면 군대라는 곳은 좋은 배움터가 됩니다. 누구나 치러내기 나름이라서, 군대에 가지 않고 젊음을 마음껏 누릴 수 있다 하여도 어영부영 흘려보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는 꼭 젊은 넋한테 살인병기 되는 솜씨를 가르쳐야만 할까요. 젊은 넋이 더 젊고 싱싱하고 푸르게 거듭나는 길을 보여주거나 이끌 수 없을까요.


.. “지금까지는 소비를 위해 일한다는 면이 강했죠. 즉 소비를 위한 노동이었던 셈입니다 … 필요없으니까 사지 않는 것인데, 필요없는 것을 만든다는 건 곧 쓰레기를 만들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죠.” … “왜 자전거도로는 그대론데, 고속도로만 점점 늘어나는 것일까? 역시 정치가 자동차 회사나 물류기업, 즉 기업 생산자들 편만 들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이 참 많아집니다.” ..  (251, 276쪽)


 아들아이 아닌 딸아이를 낳아 군대 시름은 살짝 놓았지만, 더 깊이 헤아리면 우리 아이가 군대를 안 간달지라도 우리 아이가 나중에 만날 남정네는 하나같이 군대를 갔다 와야 합니다. 우리 아이가 군대에서 살인병기 되는 훈련을 안 받는달지라도 우리 아이하고 사귀거나 함께 살아갈지 모를 남정네는 군대에서 살인병기 되는 훈련을 받으며 사람을 깔보거나 얕보는 마음이 어느새 깃들게 될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 앞날까지 근심하기 앞서, 바로 오늘 우리 아이를 가르치도록 할 학교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가 더 큰 근심입니다. 교육부장관이 누가 되고 교육감을 누구로 뽑느냐에 따라 하루가 다르게 교육 정책이 달라지는데, 교과서는 아이한테 삶을 밝히는 빛줄기가 아닌 시험성적으로만 다가가도록 짜여 있는데, 교사들은 큰어른이나 스승이기보다는 월급쟁이에 훨씬 가까운데, 도시락을 안 싸도 되고 급식을 내어준다지만 급식 밥차림이 생채식이거나 생협 물품일 수는 없는데, 학교 건물은 어디나 감옥소와 똑같이 지어져 있고 모든 아이 생각과 몸을 한 가지로 틀에 박히도록 짜맞추고 있는데, …….


 (3) 《즐거운 불편》을 읽는 어려움


 이야기책 《즐거운 불편》을 읽습니다. 2005년에 한 번 읽었고 2008년과 2009년 이태에 걸쳐 거듭 읽습니다. 《즐거운 불편》을 쓴 후쿠오카 켄세이 님은 일본 〈마이니치신문〉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 몸도 ‘즐거운 불편’을 겪은 열두 달 이야기에다가, 일본에서 ‘맑고 밝은 앞날을 생각하며 뜻있게 사는’ 열두 사람을 만나서 나눈 이야기로 묶습니다. 그러니까, 글쓴이 스스로 꼭 이태에 걸쳐 쓴 책이라는 소리입니다. 이에 따라 읽는이까지 글쓴이 흐름에 맞출 까닭은 없지만, 《즐거운 불편》 같은 책은 꼭 이태에 걸쳐서 한 달에 한 꼭지씩 읽어낸다면 한결 새삼스럽지 않겠느냐는 느낌입니다.

 왜냐하면, 《즐거운 불편》은 ‘읽기책’이 아니거든요. ‘하기책’입니다. 이론이 아닌 실천을 밝히는 책이요, 지식으로 생각하라는 책이 아니라 몸으로 부딪히면서 세상과 내 삶을 바꾸자는 책입니다.


.. 자전거 통근으로 쉽게 배가 고파지고, 배가 고프면 아무리 찬밥이라도 맛있게 먹을 수 있으니, ‘외식을 하지 않고 도시락을 지참한다’는 불편도 그다지 힘들지 않았다. 밖으로 점심을 먹으러 가는 시간을 생각하면, 도시락을 싸는 시간 정도는 아무것도 아닌 게 되고, 도시락을 아내와 함께 준비하다 보면, 부부 간의 대화 시간도 늘어나니 그 또한 즐겁지 않은가! … 여기서 중요한 열쇠가 되는 것은 ‘즐긴다’는 것이다. 머리를 불끈 동여매고 결연히 뭔가에 도전하는 식의 금욕적 방법으로는, 한때 공산주의 국가가 만들어 냈던 모범시민처럼, 소소의 의식이 깨어 있는 사람들만의 행동을 유발하는 데 그치고 말 것이다 ..  (31, 38쪽)


 1인출판사 ‘달팽이’에서 펴낸 《즐거운 불편》은 이 조그마한 출판사를 대표하는 책입니다. 첫발부터 1인출판 길을 걸었고, 첫발부터 오늘날까지 생태환경책을 중심으로 바른 사회눈과 종교눈을 틔워 줄 이야기책을 펴내 오는 이곳 삶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책이기도 합니다. 말 그대로 ‘즐거운 불편’이니까요.


.. 그처럼 날씨나 기후의 변화를 몸으로 직접 느끼기는, 참으로 자극적이고 신선한 경험이었다. 거기에 살아 있는 생물이라도 하나 더해지면 금상첨화다! 강변을 따라 달리고 있을 때, 한 마리 갈매기가 내 자전거 바로 옆을 나란히 날았을 때는, 나도 모르게 “고맙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 이 작은 논에 두둑을 치는 것만으로 이 정도라니! 기계화가 되기 전의 농촌 노인들의 허리가, 그렇게 ‘ㄱ’자로 굽어진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 우리가 감상에 젖어 바라보는 농촌의 황금들판이, 허리가 ‘ㄱ’ 자로 굽어질 정도의 중노동을 묵묵히 해내는 농부님들 공덕이라는 건 생각지도 못했다 … ‘지키라’고 입으로 말하기야 쉽지만, 그것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의 노동이 필요함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 여름은 무덥고, 겨울은 춥다. 산다는 것은, 이 정도로 시간과 수고를 필요로 한다. 현대인이 지금처럼 불손해진 것은, 아마 그것을 실감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  (32, 77, 138쪽)


 어린이들 또는 갓난쟁이들 앞에서 담배를 태우지 않는 매무새도 ‘즐거운 불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작은 불편이지만 즐거운 불편입니다. 그런데 어린이들 또는 갓난쟁이들 앞에서 담배를 태우지 않는 매무새라 한다면, ‘아이 밴 엄마’ 앞에서도 담배를 태우지 말아야겠지요. 나아가, ‘아이 키우는 아빠’가 가까이 있을 때에도 매한가지입니다. 애 아빠는 집에 가서 아이를 품에 안을 텐데 애 아빠 옷이나 몸에 담배 냄새가 배어 있으면 어떡합니까.

 즐거운 불편이란 생각이 생각 꼬리를 잡고 이어집니다. 이런저런 생각 꼬리를 잡고 이어지다 보면, 나 스스로 담배를 아무리 좋아한다고 하여도 ‘길에서 담배를 피울 수 없’습니다. 내가 담배를 좋아해서 길에서 담배를 피우면 ‘아이이든 아이 엄마든 아빠이든 또 아이와 얽힌 사람 누구한테라’도 담배 냄새를 퍼뜨리거든요. 담배를 안 피우거나 담배 냄새 때문에 골치를 썩는 사람한테도 잘못하는 노릇입니다.


.. 엄마에게 배워 가면서 찢어진 의자를 바느질하는 큰딸. 누덕누덕 기운 만큼 정성이 가득 담겼다 … 운전을 즐기는 마음이 없다면 안전운전을 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에게 가장 부족한 것이 즐기는 마음이 아닐까? … 농촌생활은 결코 안락하지만은 않다. 하지만 광활한 자연을 상대하는 만큼, 몸과 머리와 마음을 움직일 기회가 듬뿍 있다. 시간도 충분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사고는 본질적인 것으로 향하게 된다 ..  (95, 162, 260쪽)


 담배 한 가지를 들었지만, 담배 한 가지만을 놓고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삶터 모든 곳에서 똑같습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삶을 즐긴다고 하는 온갖 ‘일과 놀이’가 얼마나 내 삶을 북돋우거나 채워 주는 일과 놀이인지를 돌아볼 수 있어야 하는 가운데, 내 둘레로는 어떻게 퍼져 나가는가를 톺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테면, ㅈㅈㄷ이라는 신문을 좋아해서 나 스스로 이 신문을 받아본다고 한다면, 이 신문을 보는 나는 나대로 좋을는지 모르나, 내 이웃은 어떻게 될는지, 그리고 내 이웃한테는 어떤 삶결이 펼쳐지게 될는지를 곱씹을 수 있어야 합니다. 과자봉지 하나를 길바닥에 그냥 버리면 나쁜 일이라고 아이들한테 말할 노릇이 아니라, 이렇게 버려지는 과자봉지가 어떻게 흐르고 흐르는지, 또 이 과자봉지는 어떻게 누가 만들었고, 버려진 과자봉지는 길바닥에서 어떻게 뒹굴게 되는지를 살피면서 쓰레기 문제를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돈 한 푼을 쓰면서도, 이 돈이 누구 손을 거쳐 어떻게 쓰이는지를 좇을 수 있어야 합니다.


.. ‘즐거운 불편’이라는 명목으로 자전거 통근을 사람들에게 권장하던 당사자가, 2년 간의 자전거 통근 끝에 교통사고로 죽을 고비까지 넘겼다. 불편은 결국, 즐거운 것이 아니라 고통스럽기만 하다는 걸 증명한 셈이 되고 말았다는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책까지 낸다는 것은, 진정한 ‘즐거운 불편’에게 죄를 더하는 결과가 되지 않을까? 그렇게 좌절하고 있는 나를 격려해 준 사람은 아내였다. 그녀는 눈물을 머금으면서 말했다. “당신,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자전거를 타고 밤에도 안심하고 다닐 수 있는 도로를 만들지 않고, 미성년자에게 오토바이나 자동차 같은 위험한 것을 타도록 면허증을 내준 나라가 잘못한 거지! 당신이 주장하고 실천해 왔던 게 틀린 건 아니잖아요!” ..  (363쪽)


 어찌 보면 딱딱하고 따분하다 여길 수 있을 텐데, 《즐거운 불편》은 일부러 ‘어렵게 살자’고 말하는 책이 아닌 ‘즐겁게 살자’고 말하는 책입니다. 불편한 몇 가지를 받아들일 수 있을 때에 우리 삶이 한결 즐거워진다고 몸소 치러낸 이야기를 들려주는 책입니다. 불편한 몇 가지를 받아들이지 않는 삶이야말로 더없이 즐겁지 못하며 아름답지 못하고 반갑지 못함을 글쓴이 스스로 겪어낸 이야기를 보여주는 책입니다.

 글쓴이 옆지기 말마따나 “당신이 주장하고 실천해 왔던 게 틀린 건 아니잖아요!”입니다. “자전거를 타고 밤에도 안심하고 다닐 수 있는 도로를 만들지 않고, 미성년자에게 오토바이나 자동차 같은 위험한 것을 타도록 면허증을 내준 나라가 잘못한 거지!”입니다.

 책 맨끝에 실린 글쓴이 마지막말을 거듭거듭 읽으며 눈가가 촉촉히 젖어들었습니다. 저 또한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숱하게 뺑소니 사고를 겪으며 죽을 고비를 넘겼기 때문이고, 이렇게 가까스로 살아난 저를 보고 제 둘레 좋은 벗님과 옆지기는 언제나 “당신이 잘못하지 않았어요!” 하고 북돋워 주었거든요. 좋은 벗님과 옆지기는 한결같이 말했습니다. “자동차 모는 사람들이 당신을 죽도록 치어 놓고 꽁무니를 빼도록 가르치고 이끈 우리 사회와 교육과 정치가 잘못이지!” (4342.7.18.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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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위 나의 인생
마거릿 D. 로우먼 지음, 유시주 옮김 / 눌와 / 2002년 3월
평점 :
절판




 이 책 하나 115 ― 두 아이 키우는 여자 과학자 삶이란
 : 마거릿 D.로우먼, 《나무 위 나의 인생》



- 책이름 : 나무 위 나의 인생
- 글 : 마거릿 D.로우먼
- 옮긴이 : 유시주
- 펴낸곳 : 눌와 (2002.3.11.)
- 책값 : 1만 원



 (1) 남자 세상과 여자 세상


 어제는 옆지기하고 아기와 함께 서울마실을 했습니다. 출판사에 들러 책을 하나 건네주어야 할 볼일이 있었습니다. 아기가 아침에 똥을 누지 않았기에 모르는 노릇이라 바지며 기저귀며 더 챙깁니다. 아기가 아주 갓난쟁이였을 때에는 함께 서울마실을 하러 길을 나설 때에는 기저귀를 열 몇 장을 챙겨도 빠듯했습니다. 어제는 고작 여섯 장을 챙겼으나 꼭 석 장만 썼습니다.

 하루하루 무럭무럭 자라는구나 싶습니다. 하루하루 튼튼히 자라나며 일손을 더는 대목이 있는 가운데, 새로운 일손이 찾아드는 대목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기저귀 빨래는 조금 줄어 빨래감이 줄었습니다만, 그만큼 아기가 헤집고 다니는 품새가 늘어 옷가지를 자주 갈아입혀야 하니, 따지고 보면 빨래감이 줄지 않습니다. 나날이 무게가 느니 안고 다닐 때에도 팔이 더 빠지는데, 그래도 때때로 말귀를 알아들으니 여기 기웃 저기 기웃 끼어들고 싶어 뗑깡을 부리면 고단합니다.

 으레 남자가 바깥 볼일을 도맡고 여자가 집안 살림을 도맡습니다. 우리 나라도 그렇고 다른 여러 나라도 그렇습니다. 남녀평등이 잘 이루어져 있다는 서양나라라고 해서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여자 권리가 높다는 중국이라고 해서 썩 다르지 않습니다. 더구나, 아이 하나 세상에 태어난 뒤로는 ‘남자 몫 여자 일’은 아주 또렷하게 금을 긋듯 갈립니다.


.. 그전에 나는 퀸즐랜드의 우림 속에서 포스터사의 맥주깡통으로 장식을 해놓은 (새들이 사는) 구애용 침실들을 본 적이 있었다. 자연이 인간의 습관에 적응한 슬픈 이야기들이다 … 우리들 가운데 누구도 환경을 소홀히 다루고, 오염시키고, 그것이 보내는 악화의 징후를 무시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과학자, 목축업자, 농부, 경제학자, 삼림관리자, 토지관리자, 정치인, 납세자 할 것 없이 우리 모두가 잎병의 치유법을 찾아내고, 더 이상 잎병이 발생하지 않게 하고, 죽어가는 산과 들을 되살려 놓을 책임을 나누어 가져야 한다 ..  (82, 99∼100쪽)


 서울마실을 떠나기 앞서 동네 머리방에 들릅니다. 옆지기가 머리를 짧게 친다고 해서 집에서 잘랐는데 아무래도 듬성듬성이 되어 놔서 손질을 할 생각입니다. 숱이 많아 삼십 분 남짓 걸려 머리를 다듬었고, 목덜미께 닿을 만큼 손질하니 시원하고 아기를 업었을 때 손을 뻗어 잡아당기지 못할 듯합니다.

 우리 아이가 크는 동안에는 웬만하면 집에서 머리를 잘라 줄 텐데, 나중에 차츰 크면서 제 머리 모양이나 길이를 어떻게 생각할는지 궁금합니다. 옆지기는 아이가 웬만큼 자라면 머리를 다 밀겠다고 하는데, 아이는 사내아이 머리길이와 계집아이 머리길이를 어떻게 생각하거나 받아들이게 될까요. 제 엄마 아빠가 ‘남자 = 짧게, 여자 = 길게’라고 딱히 못박지 않을 뿐더러, 엄마가 아빠보다 머리가 짧고, 아빠는 머리를 기른다기보다 머리털이며 수염이며 그대로 두고만 있을 뿐인데, 이런 모습을 늘 바라보면서 무엇을 느끼게 될까요. 우리 집에서야 이렇다 하지만, 집 밖으로 나가면, 모든 ‘남자 = 짧은머리, 여자 = 긴머리’인 모습을 바라보면서 무엇을 느껴야 할까요.


.. 훼손되지 않은 생태계 안에서 연구를 진행하는 과학자들이 당면하는 또 하나의 무거운 과제는 생태계를 있는 그대로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다. 섬은 대단히 예민한 생태계이다. 규모가 작고 본토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내부의 어떤 요소가 사라지거나 밖에서 어떤 것이 들어오면 그 영향이 극대화된다. 해충 한 마리가 침입한 것이 그 지역의 식물상 전체가 궤멸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버린 온갖 찌꺼기들 또는 임의로 치워 버린 것들도 자연적인 평형 상태, 즉 자연의 균형에 그와 똑같이 파괴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이다 ..  (121쪽)


 사람들이 우리 아이를 보며 으레 “남자 아이지요?” 하고 묻습니다. 어느 할머니는, “사내대장부답게 잘 커야지.” 하고 말씀하셔서 쓰겁게 웃었습니다. 아이가 계집아이라고 여러 번 말씀드려도 ‘사내대장부’를 말씀하셔서, ‘사내’면 어떻고 ‘계집’이면 어떠한데 하는 생각이 자꾸자꾸 들었습니다. 사내답게 키우는 길과 계집답게 키우는 길이 따로 있을까요.

 모르는 노릇이지만, 우리 딸아이는 하루하루 크면서 ‘여느 집하고는 아주 많이 다른’ 삶을 속속들이 느끼고 받아먹으리라 봅니다. 밥하기며 빨래하기며 집치우기며 웬만한 집안일은 아빠가 다하고, 또 밥벌이 삼는 글쓰기며 바깥일이며 아빠가 도맡다시피 하는 모습이니까요. 언뜻 보면 엄마는 아무것도 안 한다고 생각할 텐데, 애 엄마도 집 안팎에서 하는 일이 많고, 또한 몸과 마음이 아픈 사람으로서 퍽 많은 일을 짐지워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 눈길로 우리 옆지기가 ‘일을 얼마 못하거나 안 하는’ 듯 느껴진다 하여도 거리낄 까닭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똑같은 눈높이로 온갖 일을 똑같이 해내야 하지 않으니까요. 이만큼 할 수 있는 사람이 있고 저만큼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힘이 세면 그만큼 더 할 노릇이고 힘이 여리면 그만큼 덜 할 노릇입니다. 누군가는 날마다 원고지 100장씩 글을 쓸 수 있다지만, 누군가는 한 주에 원고지 10장 겨우 채울 수 있습니다. 나날이 100장씩 쓰는 사람이 한결 훌륭하다거나 사람답다 말할 수 없고, 한 주에 10장 겨우 채우는 사람은 못났다거나 사람답지 않다 말할 수 없습니다.


.. 우리는 5인치밖에 안 되는 어린 나무가 35살이나 먹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는데, 이는 우림의 보존에 관한 우리의 견해를 확실하게 변화시킬 수 있는 중요한 사실이다. 나는 어린 것들의 유아기와 성장기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다. 새싹과 아이들, 그 둘은 기쁨과 시련을 선사하며 내 삶을 풍요롭게 해 주었다 … 어린 시절, 우리는 나무를 사랑하는 법을 배운다. 나무를 기어오르고, 큰 가지 위에 요새를 짓고, 나무 밑 풀밭에 몸을 누이고, 바람에 흔들리는 가지들을 쳐다보고, 민첩하게 나무를 타는 원숭이와 새들을 부러워하고, 썩어가는 나무 둥치 속에서 살아가는 조그만 동물들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그 중에서 가장 기이한 것은, 극히 제한된 시야밖에는 가질 수 없는 공간, 즉 땅 위에 서서 경이로운 심정으로 나무를 쳐다보며 많은 시간을 보낸다는 것이다 ..  (167, 169쪽)


 아이는 어버이한테서 배웁니다. 어머니한테서 배우고 아버지한테서 배웁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한테서도 배우고, 언니와 오빠와 동생과 형과 누나한테서도 배웁니다. 피붙이와 이웃한테서도 배우고 동무한테서도 배웁니다. 누구나 가르치고 누구나 배웁니다. 나이가 먹었다고 가르치기만 하지 않으며, 나이가 어리다고 배우기만 하지 않습니다. 나이가 어려도 배울 일은 배우고 가르칠 일은 가르칩니다. 나이가 많아도 배워야 할 일은 배워야 하고 가르칠 때에는 가르치기 마련입니다.

 이리하여, 어버이 된 사람은 어버이가 되기 앞서도 제 몸가짐과 마음가짐을 옳게 추슬러야 합니다만, 스스로 아이를 낳아 기르는 몸이 될 때에는 한결 무르익는 몸가짐과 마음가짐이 되도록 훨씬 힘써야 합니다. 때때로 길에서 스치는 이웃으로서 이웃 아이와 배우고 가르치는 사이를 넘어, 늘 함께 먹고 자고 부대끼는 식구로서 내 아이와 배우고 가르치는 사이가 되었으니까요.

 어버이가 아닌 자리에서도 나 스스로 올바르고 아름답고 맑고 빛나야 했던 애틋한 목숨인 우리들이었고, 어버이가 된 자리에서도 나 스스로 꿋꿋하고 야무지게 올바르고 아름답고 맑고 빛나야 할 사랑스러운 목숨인 우리들입니다. 내가 살아가는 대로 내 아이가 배우고, 내가 생각하는 대로 내 아이가 생각하며, 내가 말하는 대로 내 아이가 말합니다.

 어버이 된 사람이 ‘딴 사람 안 보는 자리이니까 허튼 짓을 해도 괜찮겠지’ 하는 마음이라면, 이 마음은 고스란히 내 아이한테도 이어갑니다. 어버이 된 사람이 ‘내가 바빠 죽겠는데 골목에서 저 애들은 왜 뛰놀고 법석이야’ 하면서 빵빵대며 싱싱 내달린다면, 이 매무새는 그예 내 아이한테도 옮아갑니다. 어버이 된 사람이 국회의원 대통령 뽑는 매무새 그대로 아이들이 어른과 정치와 사회를 보는 매무새로 스며듭니다. 어버이 된 사람 하루하루가 당신 아이 하루하루를 엮어 나가고 이루어 나갑니다.


.. 수없이 개미들에게 물리면서 나는 어떤 경외감 같은 것을 느끼게 되었다. 자기보다 수천 배나 큰 존재를 공격해대는, 그리하여 마침내 승리를 쟁취하는, 그 조그마한 생명체의 극성스러움에는 탄복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 조용히 걸어다니며 숲을 관찰하던 중, 우리는 나무 위에서 거미원숭이가 재롱을 피우는 모습도 보았고, 타이라 일가족이 나무들 사이로 돌아다니는 모습도 보았다. 야생 동물들은 우리가 숲속에서 조용히 있을 때 모습을 보여준다. 우리는 인류라는 종족의 한 사람으로서 숲의 거주자들과 함께 숲을 감상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  (226, 292쪽)


 옆지기와 저는 아이를 배고 낳고 키우는 어제오늘 또 모레글피 한결같이 생각합니다. 우리는 딸아이를 낳아 기르지만, 딸아이가 아닌 ‘한 사람’을 낳아서 기른다고 생각합니다. 너나와 똑같은 아이요, 어른아이 가르지 않는 목숨이며, 꼭 같은 한 사람 몫임을 느끼면서 함께 살아가는 벗님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땅에서 아름다운 한 사람이 되어 가기를 바라며, 이 삶터에서 아이 스스로 우뚝 서면서 사랑과 믿음을 다른 누구한테보다 나 먼저 참되게 맛보고 깨달으면서 이웃하고 살가이 주고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어떤 일을 해야 할까


 아이는 아직 돌이 안 되었습니다. 다음달이 돌입니다. 우리는 돌잔치를 따로 할 겨를이 없기도 하지만, 돌잔치보다는 이웃을 한 집씩 불러 집에서 밥상 하나 차려 함께 나누어 먹고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로 마련할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제 겨우 돌이라지만 세월은 금세 흐르기에, 우리는 이 아이가 뒷날 학교에 들어가도 될까 안 될까를 곰곰이 생각하기도 합니다.

 꼭 학교에 가야 할 까닭이 없으며, 굳이 학교를 안 다닐 까닭이 없습니다. 아이 스스로 다니고프면 다닐 노릇인데, 학교에 간다고 동무를 더 사귈 수 있지 않고, 학교에 안 간다고 동무를 못 사귈 수 있지 않습니다. 또래동무를 여럿 두어야 아이가 맑고 밝게 크지 않으며, 또래동무란 학교 울타리 안쪽에만 있지 않습니다.

 저보다 나이든 살가운 동무가 있고, 저보다 나어린 살뜰한 동무가 있습니다. 아이한테는 아이 스스로 좋아하며, 아이를 좋아할 동무가 있으면 넉넉할 뿐입니다.


.. 나는 내가 어머니이고 아내임을 좋아했다. 그러나 내 영혼은 그와 더불어 과학을 향한 열정도 지니고 있었다 … (첫) 남편은 내 연구가 가족보다 우선할 수는 없으므로, 가족용 차를 몰고 대학 도서관으로 가는 일은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충고했다 … 1970년대의 호주는 백인 남성에게는 ‘행운의 나라’였을지 몰라도, 미국인 여성 과학자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 여자가 숲 우듬지를 연구하기 위해 혈혈단신 1만 마일을 날아 멀리 떨어진 대륙으로 온다는 것은, 내가 만난 호주인 남자들 대부분에겐 상식적으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황당한 일일 뿐 아니라 도대체가 미심쩍은 일이었다. 사실, 남자나 여자나 호주 농촌의 많은 사람들에겐, 부엌이나 침실에서 실용적으로 전혀 써먹을 데가 없는 어떤 지적인 생각을 추구하기 위한 것이라면, 아마 1백 마일을 여행하는 것조차도 우스꽝스럽게 보았을 것이다 ..  (14, 25, 44쪽)


 다만, 아이를 학교에 넣지 않으려 한다면, 그만큼 어버이 된 사람한테 주어진 몫이 큽니다. 지난날에는 어느 어버이도 아이를 학교에 안 넣고 죄다 집에서 가르쳤는데, 그만큼 어머니와 아버지라는 사람이 할 일이 많았고, 챙길 일이 많았으며, 살피고 보듬을 일이 많았습니다. 요즈음은 이런저런 어버이 노릇을 온통 ‘돈’에만 맡기고 있을 뿐입니다.

 제도권학교도 돈이요 대안학교도 돈입니다. 제도권학교라고 돈을 안 내겠습니까. 우리가 낸 세금으로 꾸리는 곳이 제도권학교인걸요. 대안학교를 넣으려 하면 어버이 된 사람은 돈을 더 많이 벌어야 합니다. 때때로 ‘대안학교에 넣었으면서 아이와 어울릴 틈이 더 없’기까지 합니다. 배움삯 벌려면 그만큼 허리가 휘니까요.

 여섯 살 아이를 유치원에 넣는 제 옛동무는 한 해 배움삯이 500만 원을 웃돈다고 이야기합니다. 유치원에 바쳐야 할 돈이 대학등록금 못지 않다고 푸념입니다. 대학생들 목소리가 어린이들 목소리보다 커서 그렇지, 어린이들이 제 어버이 된 사람들 살림을 걱정하며 ‘유치원 배움삯은 나라가 내라!’ 하고 외치지 않는다면, 이 나라 어버이들은 줄줄이 파산을 해야 할 수 있습니다. 요새는 셋째가 아닌 둘째를 낳아도 구나 시에서 돈(출산장려금)을 준다고도 하는데, 아이를 낳았다고 돈을 얼마 준다고 해서 살림이 필까요? 나라가 아이와 어버이한테 돈을 대어줄 노릇이 아니라, 아이와 어버이가 걱정없이 아이를 키우고 가르칠 터전과 삶터를 일구는 데에 올바로 돈을 써야 할 노릇입니다. 해마다 되풀이되는 ‘보도블럭 까뒤집기’는 이제는 참말 그만두고서라도. 고속도로 새로 하나 더 늘리는 일은 그만두고서라도. 말이야 바른 말이지, 고속도로 하나 더 늘리지 않는다고 길이 막히지 않습니다. 고속도로 하나 덜 내면서 ‘아이 키우는 품’에 댈 보건복지예산을 늘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내가 학생이었을 때 나의 지도교수는 모두 남성이었는데, 그분들은 임신한 몸으로 현장 작업을 수행하는 데 대해 어떤 조언도 해 주지 못했으며, 남성 동료들과 정글 속에서 함께 생활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어떤 아이디어도 제공해 주지 못했다 … 20세기가 이룩한 수많은 업적에도 불구하고, 내가 알고 지내던 이웃 농장의 여성들은 그들의 삶이 어머니 또는 시어머니의 삶과 다르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고민하고 의기소침해 있었다 … 일반적으로 젊은 여성들은 지적으로 가장 왕성한 시기에 가장 무거운 ‘짐’을 지게 된다. 아이들, 융자금, 갚아야 할 학자금, 연로하신 부모, 일반적으로 가정 밖으로 나가려는 여성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배우자 … 이상하게도, 나는 (첫) 남편과 헤어지고 나서야 오히려 내 인생의 다른 어떤 시기보다 더 폭넓게세상의 이곳저곳을 볼 수 있었다. 나는 난생처음 사탕가게에 들어간 아이처럼, 가깝게는 집 근처의 하버드대학, 멀게는 내가 상상하는 한 가장 먼 곳이었던 카메룬의 야운데까지 여러 곳을 돌아다녔다 ..  (19∼20, 137, 201∼202, 236∼237쪽)


 어쩌면, 아이한테는 국어니 수학이니 영어니 하는 교과목 지식이란 하나도 없어도 됩니다. 이런 지식이 없다 하여 세상 못 살아가지 않을 테니까요. 다만, 아이가 여느 큰회사 사무직 일꾼으로 일하고자 한다면, 또는 은행 일꾼이나 병원 일꾼으로 일하고자 한다면, 이런저런 지식 갈래에서는 ‘대학졸업장’을 바라고 있으며, 대학졸업장을 따려면 갖은 시험지식을 높이높이 따내어야 합니다.

 이와 달리, 아이가 큰회사 사무직 일꾼을 바라지 않는다면, 농사꾼을 바라든 글쟁이를 바라든 시민모임 일꾼을 바라든 헌책방 일꾼을 바라든 한다면, 아이한테는 사뭇 다른 앎과 삶을 깨닫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양복 차려입고 구두 신은 채 도심지 한복판에서 자가용 달려 셈틀 앞에 하루 내내 앉아서 일하기를 바란다면, 옆지기와 저로서는 크게 마음쓸 대목이 없다 할 수 있습니다. 그냥 제도권학교에 넣으면 그만이고, 이렇게 학교에 넣으며 두 사람은 훨씬 기나긴 말미를 얻어 두 사람 마음 내키는 대로 먼 나들이도 다니고, 책도 읽고, 다른 일도 할 수 있으니까요. 그러나, 아이가 스스로 제 앞가림을 하면서 제 마음과 몸을 함께 살찌우는 길찾기를 하려 한다면, 어머니 된 우리 두 사람은 아이와 함께 오래도록 어깨동무를 하는 길동무가 되면서 아이한테 새길을 보여주고 우리 스스로도 새길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 두 사람으로서는 아이가 어느 길을 가든 아이 몫이니, 아이한테 여기로 가라느니 저기로 가면 안 된다느니 하고 손가락질을 할 마음이 없습니다.


.. 아이는 《초록색 알과 햄》을 독파했을 뿐 아니라 오레일리의 우림에 있는 여관에서는 밥 먹을 때마다 메뉴를 주르륵 읽어내렸다. 그때 동행했던 동료들도 그 일을 나처럼 경외감을 갖고 바라보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부모가 된다는 것과 과학을 한다는 것, 그 두 가지 모두를 할 수 있는 특권을 누리게 된 데 대해 깊이 감사드린다. 나는 버스 안에서 아들과 함께 책을 읽었던 그 특별한 날을 가능케 해 준 것이 다름아닌 과학이라는 내 일이었음을 잊지 않았다 … 아이들은 엄마와 함께 열대 우림 탐사에 나선 것이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했다 … 우듬지는 (아들) 에디와 제임스에게는 완전히 새로운 세계였고, 아이들의 눈높이로 그걸 보게 된 나에게도 역시 그러했다 … 진흙투성이가 된 아이들은 원시 그대로의 우림 속에서 우림의 거주자들과 함께 지낼 수 있었던 자신들을 매우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안타깝게도 많은 어린이들이 열대의 진흙에 몸을 적셔 보지도, 정글 속의 모험을 즐겨 보지도 못하고 자랄 것이다. 그리고 지금과 같은 속도로 우림이 계속 파괴된다면, 우리 아이들이 누렸던 그러한 특혜도 더 이상은 불가능할 것이다 ..  (141, 259, 272, 274∼275쪽)


 우리 아이는 ‘우리 집 아이’이기 앞서 ‘한 사람’입니다. 우리 아이는 두 사람이 배앓이하고 몸앓이하면서 낳고 키우는 ‘재산’이 아닌 ‘홀로선 사랑스러운 목숨’입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먼저 우리 삶을 즐기고 넉넉히 채울 일거리를 찾습니다. 우리 아이 또한 제 스스로 제 삶을 즐기며 넉넉히 채울 일거리를 찾으면 될 뿐이라고 느낍니다. 즐거운 삶은 한 가지만이 아니며, 반드시 어느 곳에 있어야만 즐거운 삶이지 않습니다. 어김없이 어떠한 일을 해야만 즐거운 삶이 아니며, 더 많은 돈을 벌든 더 적게 돈을 벌든 훨씬 보람있는 일이라 잘라말할 수 없습니다.

 만드는 삶이지 만들어진 대로 흐르는 삶이 아닙니다. 꾸리는 삶이지 틀에 맞추는 삶이 아닙니다. 몇 분 동안 기저귀를 삶고 햇볕에 몇 시간 쬐여 말린 다음 몇 센티미터로 나누어 개야 하는 빨래감이 아닙니다. 그때그때 다르며, 그때그때 알맞게 하면 될 뿐입니다. 아침에 아기 먹을 죽을 끓이고 어른 두 사람 먹을 밥을 하면서, 늘 어림으로 쌀을 푸고 콩을 퍼서 하루 동안 불려서 냄비밥을 합니다. 냄비밥을 하면서 시간을 잰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그날그날 냄새를 맡고 김빠짐을 살피고 하면서 밥물을 맞추고 밥을 할 뿐입니다.


 (3) 《나무 위 나의 인생》이라는 책은


 ‘마거릿 D.로우먼’이라는 분이 쓴 책, 《나무 위 나의 인생》을 읽습니다. 식물학자라고 해야 할까, 생물학자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과학자인 글쓴이입니다. 그러나 글쓴이는 깊이 생각을 하지 않는 가운데 덜컥 혼인을 하면서 호주 시골에서 아이를 둘 낳는 엄마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엄마가 되면서 과학자였던 당신 삶은 하루아침에 사라졌고, 호주에 있는 (옛) 남편이나 시어머니나 마을사람들은 당신이 과학자였든 아니든 ‘이제부터는 시골 농장을 일구며 아이를 돌보는 엄마일 뿐’이라고만 외칩니다.

 이에, 글쓴이는 아이 엄마로서도 훌륭히 살고 싶지만, 아이 엄마이기 앞서 ‘마거릿 D.로우먼’이라는 제 이름에 걸맞는 과학자로 걸어가려던 당신 길 또한 훌륭히 걷고 싶어서 마음앓이를 합니다. 그리고, 이 마음앓이를 고이 간직하면서 지내고 길찾기를 하면서, 드디어 ‘20세기, 아니 21세기에도 버젓이 살아남아 있을 뿐 아니라, 어쩌면 더 거세게 휘감고 있다 할 남성가부장권력’을 박차고 나옵니다.


.. 나의 부모님은 과학자는 아니었지만, 차를 타고 가다가 내가 무언가 건질 만한 것을 발견하면 언제라도 차를 세워 주실 만큼 이해심이 깊으셨다. 어머니는 무척 끔찍해 했지만, 내 침실 작은 장에는 생쥐가 살았다. 생쥐들은 나의 수집품 가운데 하나였던 자연 섬유들을 아주 좋아했는데, 그것으로 북부 뉴욕의 추운 겨울을 나게 해 줄 둥지를 지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자연이 내려준 소중한 선물로 나의 삶은 은혜로웠고, 나의 수집품은 과학적 호기심의 토대가 되었다 ..  (12쪽)


 《나무 위 나의 인생》은 과학자로서 한길을 걷는 사람 이야기를 하나 선보입니다. 다음으로, 두 아이를 키우는 어머니 이야기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당신 스스로 올바르며 곧은 길이란 무엇인가를 돌아보며 가누어 본 ‘사람다운 삶’이란 무엇인가를 톺아보았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삶터가 한 사람을 어떻게 다루고 있으며 한 사람으로 ‘한 사람’으로 받아들여지도록 하려면 어떡해야 할까를 가슴 깊이 되뇌었던 이야기를 펼쳐 보입니다.


.. 숲 우듬지 속엔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많은 비밀들이 숨겨져 있다. 무엇보다 시급한 일은 우리들이 가진 과학적 데이터들을 유권자, 경제학자, 정치가들, 즉 천연자원의 보존과 관련된 결정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사람들이 쓰는 일상적 언어로 바꾸어 내는 것이다. 나는 미래에도 나의 아이들이 그 속에서 즐거이 뛰놀 수 있는 자연림이 남아 있기를 기도한다. 그리고 나는 일반 대중들과 소통할 수 있는 과학자들의 능력이야말로 숲의 보존을 좌우할, 절대적으로 중요한 변수라는 걸 알고 있다 ..  (304쪽)


 저로서는 《나무 위 나의 인생》이라는 책에서 네 가지 이야기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이 책을 다시 읽는다면 다섯째 이야기와 여섯째 이야기도 찾아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옆지기가 이 책을 함께 읽어낸다면, 또 우리 아이가 커서 이 책을 새롭게 읽어낸다면 일곱째와 여덟째 이야기가 나타날 테지요.

 그때그때 읽는 사람에 따라, 《나무 위 나의 인생》은 다 다른 이야기를 우리한테 베풀어 줍니다. 어떤 사람한테는 네 가지 아닌 한 가지 이야기만 느껴질 테고, 어떤 이한테는 한 가지조차 느껴지지 않으리라 봅니다.

 책이란, 읽는 사람 몫이기 때문입니다. 쓰는 사람은 온삶과 온마음을 쏟아낸 책이지만, 읽는 사람 스스로 ‘책을 쓴 사람 삶’과 같은 자리에 서면서 헤아리지 않으면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못해, 아무것도 빨아먹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 많은 여성들이 길에 놓인 장애물들을 피하느라 먼 길을 돌아왔다. 현장 생물학에서 내가 여성으로서 부닥쳐야 했던 어려움들은 역설적으로 오히려 나를 단련시켰고, 내게 확고한 신념을 심어 주었다 … 나고, 자라고, 썩고, 다시 재생하는 잎처럼, 나도 개인적인 생활에서나 직업적인 길에서나 그러한 과정을 경험했다 … 불평을 하는 대신 소리 지르는 법을 배우라, 그것이 내가 배운 가장 값진 가르침이었다 ..  (305쪽)


 두 아이 키우는 여자 과학자 삶으로, 참 눈물겹고 애틋하며 딱하지만 힘차고 다부지고 당찬 이야기로 《나무 위 나의 인생》이라는 책을 맞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오늘날 우리 삶터에서 ‘아이 키우는 엄마’들이 어떠한 삶인가를 헤아릴 수 있고, ‘아이 키우는 아빠’들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 삶인가를 짚을 수 있습니다. 글쓴이는 나무를 타고 우듬지를 돌아보면서 당신 삶을 찾았는데, 우리들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우리 삶을 찾을 수 있을까요. (4342.7.7.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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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는 폭력이다 - 평화와 비폭력에 관한 성찰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조윤정 옮김 / 달팽이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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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 하나 113 ― 오늘날 정부와 권력자는 폭력덩어리일 뿐이다
 : 레프 톨스토이, 《국가는 폭력이다》


- 책이름 : 국가는 폭력이다
- 글 : 레프 톨스토이
- 옮긴이 : 조윤정
- 펴낸곳 : 달팽이 (2008.7.25.)
- 책값 : 12000원


 (1) 머리 아프도록 읽는 책 하나


 이제는 사라진 잡지 가운데 《샘이 깊은 물》이 있습니다. 이 잡지를 이끌어 나간 ‘설호정’이라는 분은 1992년부터 1995년 사이에 〈이 인물의 대답〉이라는 꼭지를 꾸렸고, 이 꼭지에서 설호정 편집장은 당신이 만나본 사람이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을 만한 구석을 꼬치꼬치 파고들면서 깊이있는 이야기를 이끌어 냈습니다. 설호정 편집장한테 꼬치꼬치 대꾸를 해야 하는 사람으로서는 힘겹고 고단하고 짜증스러울 수 있을는지 모르나, ‘설호정이라는 사람까지도 뭔가 속시원히 풀리지 않는 대목이 보이고 느껴지기 때문에 환히 밝혀질 때까지 파고들어 캐낸다’는 흐름이었습니다.

 1992년 9월치 《샘이 깊은 물》에서는 〈이 인물의 대답〉 꼭지에서 《녹색평론》을 펴내는 김종철 교수와 만나보는 자리를 마련합니다. 이 자리에서 김종철 교수는 설호정 편집장이 꼬치꼬치 묻는 말에 벌컥 성을 내며 소리를 높였다고 하는데, 그래도 설호정 편집장은 아무렇지도 않게 더 가시돋힌 말을 묻고, 이런 이야기들이 오가면서, 잡지 《샘이 깊은 물》을 읽는 사람들로서는 ‘1992년에 막 새로 나온 환경잡지 《녹색평론》은 뭐를 하려는 책인가?’ 하는 궁금함을 많이 풀 수 있습니다.

 물음을 받는 분으로서는 괴롭겠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런 괴로운 물음을 받아야 서로서로 발돋움합니다. 우리 스스로 못 느끼는 내 모자람과 어리숙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 슬그머니 넘어갔거나 대충 흘려보낸 어설픔과 어리석음을 깨달을 수 있어요.

 이를테면, 김종철 교수가 너무 뜬구름잡듯 ‘철학적ㆍ추상적 이론’만 늘어놓고 있다 보니 설호정 편집장은 “사실 무슨 이념을 펼치는 데는 정권을 장악하는 게 최선 아닙니까?” 하고 한 마디를 쏘아붙입니다. 그러며 “지구의 광범위한 지역에서는 계속해서 미국 식의 소비 문화가 지속될 터인데 개인 몇 만 명이 책을 통해서건 명상이나 직관을 통해서건 각성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무력하기 짝이 없는 일 아닙니까?” 하고 덧붙입니다. 이때 김종철 교수는 성남을 참지 못하고, “그거는 그야말로 산업화된 사회에서 세뇌된 논리입니다. 저는 종교적인 배경이 없는 사람이지만 예컨대 예수라는 존재가 하나 있었기 때문에 인류가 얼마나 변했습니까?” 하고 대꾸하는데, 설호정 편집장은 거침없이 “장기적으로는 그런 소수가 인류를 의미있는 방향으로 몰아갈 수는 있기도 하겠지만, 이런 식의 개발 일변도로는 세계는 백 년 앞도 내다볼 수 없다는 것 아닙니까?” 하고 따지고, 다시금 “모든 사람이 부처 될 만한 싹수를 가졌다고 해서 부처가 된다는 법도 없고, 또 되더라도 아주 장구한 세월이 필요할 것 같고, 그때가 되기 전에 세상은 이미 든 망조 때문에 망해 버릴 것 같다는 말입니다.” 하고 못을 박습니다.

 이에 김종철 교수는 “그건 오만한 얘기예요. 우리가 당장 부처입니다. 또 지금 지구가 망하느냐, 안 망하느냐, 망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할 일을 안 한다든지 그건 불필요한 얘기라고 생각해요…….” 하고 말을 잇지만 그리 가슴에 와닿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이런 이야기들, 김종철 교수가 하는 이야기는, 일찌감치 설호장 편집장이 몸을 담았던 ‘전두환이 없앤 잡지’인 《뿌리 깊은 나무》에서 해 왔던 일인 한편, 지금 편집장으로 몸담은 《샘이 깊은 물》에서도 하기 있기 때문입니다. 설호정 편집장은 당신이 몸소 겪어 왔을 뿐 아니라 헤쳐나가고 있는 일을, ‘설호정 당신 눈과 머리’가 아닌 ‘환경잡지라는 빛깔있는 목소리로 한길을 걸어가려는 다른 사람 눈과 머리’가 무엇인가를 듣고 싶어 이렇게 물었지만, 김종철 교수는 이때까지 제대로 당신 생각을 펼치지 못했습니다.


.. 오늘날 정부와 지배 계급은 정의 아니면 권리 비슷한 것에조차 기초해 있지 않고, 오로지 발달된 과학의 도움으로 정교하게 고안된 조직에 의존하고 있다 ..  (21쪽)


 올해는 2009년입니다. 1992년부터 열일곱 해가 흘렀습니다. 2009년 오늘날 《녹색평론》은 ‘대구 변두리’를 떠나 ‘서울 한복판’으로 일터를 옮겼습니다. 어느덧 열일곱 해가 지난 이야기인데, 열일곱 해 사이, 서울 한복판에서 환경잡지를 펴내는 《녹색평론》 김종철 교수 생각과 삶은 어떻게 거듭났을까 궁금합니다. 오늘에 와서 지난날 물음에 대꾸를 해야 한다면 어떤 말씀을 펼치실까 궁금합니다.

 설호정 편집장은 “저와 같은 패배주의자들한테 들려주실 수 있는 얘기이기는 하겠습니다. 그러나 제 개인으로 말하자면 이 책을 탐독하기 시작한 뒤로 구체적으로 훨씬 더 패배주의자가 된 것은 사실입니다. 속되게 말해 고민만 늘었다는 말이지요.” 하고 말합니다. 김종철 교수는 “자꾸 사람을 고민하게 만들었다는 건 제가 상당히 성공하고 있다는 얘기 같은데요?” 하고 묻습니다. 설호정 편집장은 “그런데 이런 책이 진실로 성공하려면 저 같은 사람이 실천에까지 이르도록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책에 제시되는 문제들을 끊어버릴 힘이 제겐 없습니다.” 하고 한 마디 받아칩니다.

 두 어른이 주고받는 이야기를 아주 멀찌감치 떨어진 자리에서, 더구나 열일곱 해 만에 다시 읽는 저는 피식 웃습니다. 쓴웃음이 저절로 새어나옵니다. 그러면서 제 옷깃을 여미게 됩니다. 제가 읊는 말마디가 나 스스로 내 삶을 고쳐 나가는 말마디인가를 돌아보게 되며, 내 말마디를 듣는 이웃이 당신 스스로 당신 삶을 고쳐 나가는 말마디로 받아들일까를 돌아보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 노동자에게 땅이 없고 게다가 자신과 가족을 부양할 양식을 땅에서 얻을 수 있는 인간 본연의 권리조차 없다면, 그것은 그가 그런 상황을 바랐기 때문이 아니라 어떤 특정한 사람들(지주들)이 노동 계급한테서 땅과 그 권리를 박탈했기 때문이다. 이 비정상적인 사물의 질서는 군대에 의해 지탱된다 … 모든 정부와 통치 계급은 기존의 제도를 유지하기 위해 군대를 필요로 한다. 이런 제도는 결코 사람들의 요구에 의해 마련된 게 아니며, 국민의 이익을 침해하며 오로지 정부와 통치 계급에게 봉사한다 … 군비와 전쟁을 위해 사람들에게서 징수한 세금은 군대가 보호한다고 하는 노동 생산물의 대부분을 앗아간다. 또 전 남성 인구가 평소 하던 일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면서, 노동의 가능성 자체가 상실된다. 언제라도 발발할 수 있는 전쟁의 위험 때문에 사회적 삶의 개선은 헛되고 무익한 것이 되고 만다 … 정부는 외국의 침략을 막기 위해 군대가 필요하다고 주장하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군대는 주로 국내에서 억압적 통치를 하기 위해 필요하고, 군대에 들어간 모든 사람은 국민에 대한 정부의 폭력에 동참하는 자가 된다 … 병역 의무를 져야 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국가의 의미에 대해 성찰해 보아야 한다 ..  (35∼40, 44쪽)


 퍽 긴 꼭지로 마련한 〈이 인물의 대답〉이 막바지에 이를 때, 설호정 편집장은 가장 날카롭게 파고드는 말 한 마디를 묻습니다. “《녹색평론》의 이념을 선생님은 삶에서 어느 정도 실천하세요?” “대부분 못하죠. 그러니까 《녹색평론》은 제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어느 정도 실천하시는지.” “가급적이면 외식 안 하려고 하고.” “보신주의라고 하는 거 아니에요?” “보신주의 나쁠 거 없어요. 나한테 좋은 게 지구한테도 좋은 거예요. 또 고기 안 먹고. 제 생활은 간단하게 단순하게 살고. 여행을 잘 안 하고. 거의 안 합니다. 도시를 벗어나지 않고. 집하고 여기하고 학교하고밖에 왔다갔다 안 하고. 또 식구한테 빨래 자주 하지 말라는 얘기를 합니다. 그리고 빨래 해결해야 되는 과제가 아파트로부터 나와야 하는 일입니다.” “선생님 가족들이 공감하세요?” “내년이면 애들이 다 우리를 벗어납니다. 대학을 가니까.” “서울로 간단 말이죠?”

 김종철 교수는 2009년에는 ‘아파트를 벗어나셨’는지, 그리고 당신 잡지에 실은 이야기 가운데 ‘거의 하나도 실천을 못했다는 대목 가운데 어느 대목을 실천하고 있으’신지 궁금해집니다. 그러나, 이런 대목을 궁금해 하기보다는, 어딘가 뒤끝이 많이 남는다는 느낌을 지우지 못합니다. 왜 스스로 못하는 일을 ‘마치 스스로 하고 있는 듯 느껴지도록’ 글을 쓰고 생각을 하고 책을 내고 해야 할는지요. 왜 우리 스스로 즐겨하고 좋아하는 일이 아닌, 머리로만 굴리는 일을 해야 할는지요.

 저는 아파트가 싫고 텔레비전이 싫어 부모님 집을 박차고 나왔습니다. 부모님께서 저한테 당신 아파트(이제는 전원주택이 되었습니다)를 물려주실는지 안 물려주실는지 모를 노릇이지만, 저로서는 부모 재산을 물려받을 마음이 없습니다. 옆지기 또한 내가 내 부모한테, 또 옆지기는 옆지기 부모한테 재산을 물려받을 까닭이 없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책이 제대로 못 읽히는 나라에서 책을 제대로 느끼도록 돕는 일을 하는 도서관 운동’을 하기 때문에 일부러 인천에 남아 있지만(인천이 우리 나라에서 책을 가장 안 읽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아파트 아닌 골목동네에서 살아간다 할지라도 자연이 아닌 기계와 시멘트와 석유로 온통 가득한 터전에서는 우리 스스로 숨이 막힙니다. 이리하여 텔레비전은 마땅한 노릇이고, 세탁기나 냉장고나 이런저런 가전제품을 처음부터 들여놓지 않았습니다. 우리 몸에 알맞게 씻고 빨래를 합니다. 굳이 맛난 바깥밥을 찾아 먹으러 돌아다니지 않으나, 밖에서 밥을 먹어야 할 때에는 옳고 바르게 애쓰는 집을 찾아서 즐겁게 먹습니다.

 환경운동이란, ‘환경운동’이라는 이름이 붙기 앞서에도 언제나 있어 왔던 일이니까요. 지식 있는 분들이 환경운동을 외치고 환경모임을 열고 환경책을 펴내기 앞서 우리 어머니와 아버지와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자연 삶터와 사람 삶터를 고루 사랑하는 매무새를 고이 지켜 오셨으니까요.


.. 왜 이런 죄수 같은 일을 하냐고 내가 묻자 그들은 “그럼 뭘 한단 말입니까?”라고 되물었다. “하지만 왜 36시간을 쉴 새 없이 일하는 겁니까? 작업을 교대제로 할 수는 없나요?” “우리는 시키는 대로 하는 것뿐이에요.” “그래요. 하지만 왜 그저 시키는 대로 하냐 이겁니다.” “먹고살아야 하기 때문이죠. 보나 마나 ‘싫으면 그만둬.’라고 할 거라구요. 작업에 한 시간이라도 늦으면 당신에게 허가증을 집어던지며 나가라고 하죠. 당장 일할 수 있는 사람이 10명은 된다구요.” … 노예 주인은 말할 것도 없고 마차 주인조차도 자기 말에게 그런 일을 시키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말은 비싸기 때문이다. 힘든 일을 시켜 값비싼 동물의 생명을 단축하는 것은 비경제적인 일이리라 … 실상 우리들, 즉 부자들, 자유주의자들, 인도주의자들, 사람의 고통뿐만 아니라 동물의 고통에도 매우 민감한 사람들은 그런 노동으로 덕을 보고 있으며, 게다가 더욱더 부자가 되고 싶어 한다. 즉 그런 노동으로 더 큰 덕을 보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러고도 우리는 완전히 평온한 마음으로 지내고 있지 않은가 … 우리 주위에서 천천히 그리고 대개 고통스럽게 죽어가고 있는 수백만 명의 노동자들에 관한 한, 그들의 노동 생산물로 우리가 편의와 쾌락을 얻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두 눈을 굳게 감고 있다 ..  (105, 108, 111∼112쪽)


 옆지기는 저와 혼인하기 앞서 《녹색평론》을 정기구독하고 있었으나 지난해에 끊었습니다. 저는 고등학생 때부터(1992년) 책방에 서서 《녹색평론》을 읽었지만, ‘쉽게 누구나 하고 있는 일을 어렵고 딱딱하고 긴 글로 적는 일’은 그리 안 달갑다고 느꼈습니다.

 참다운 “푸른 이야기”라 한다면, 지식 있는 사람만 새겨읽을 수 있는 글이 아니라, 지식 없는 누구나 기꺼이 읽을 수 있는 글이어야 한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아름다운 “푸른 이야기”라 한다면, 나부터 오늘까지 꾸준히 이어온 내 삶을 글로 담아낼 노릇이요, 아직까지 못하던 일이라면 오늘부터 신나게 펼쳐 나가려 하는 몸짓을 실어낼 노릇이라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노동운동이든 정치운동이든 사회운동이든, 입으로 할 수 있는 운동이란 없습니다. 몸으로 하는 운동입니다. 남녀평등을 이루려는 운동이든 장애인 권리를 지키려는 운동이든, 입이 아닌 몸으로 하는 운동입니다. 환경운동은 더더욱 밑바탕이 되면서 커다란 운동인데, 환경운동이라 할 때에는 다른 어느 운동보다도 나 스스로 내 삶이 되어 가면서 말하는 운동이어야 하고, 나부터 먼저 즐겁게 한몸으로 받아들인 이야기를 내 이웃과 식구와 동무한테 스스럼없이 말하고 함께하도록 어깨동무하거나 손을 맞잡는 운동이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 정부는 사람들을 어린아이의 의식 수준에서 붙잡아 두기 위해 노력했다. 칭얼대는 아이에게는 돌봐 줄 어머니가 있어야 한다는 식이었다 … 당신들은 국민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세금을 거두어 우리를 파탄에 몰아넣는다. 세금으로 함대를 유지하고 무장을 강화하고 전략적 철도를 건설하지만, 그것은 당신들의 야망과 허영을 충족시키기 위해 필요한 것일 뿐이다 … 토지 재산을 보호하고, 그 결과로 지가가 상승하는 일이 없었다면, 사람들은 좁은 공간 안에 와글와글 모여 사는 일이 없었을 것이다. 아직 세계에 넘쳐나는 자유로운 땅으로 퍼져 나갔을 것이다 … 싸움에서 유리한 자는 땅을 일구며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언제나 정부의 폭력에 참여한 사람이 된다 ..  (157, 159쪽)


 책을 읽는 손이 무겁습니다. 그러나 책을 손에서 놓을 수 없습니다. 책을 읽는 가슴이 어둡습니다. 그렇지만 책을 눈에서 뗄 수 없습니다. 책을 읽는 머리가 지끈거립니다. 그러하나 책을 내 삶에서 떨굴 수 없습니다. 안타깝고 아쉬운 대목이 많이 보이지만 《녹색평론》을 내치지 못하는 한편, 《뿌리 깊은 나무》와 마찬가지로 이 땅에서 조용히 사라져 버린 잡지 《샘이 깊은 물》을 헌책방마실을 하면서 하나하나 찾아내어 차곡차곡 갖추어 놓고 틈틈이 다시 꺼내어 읽으며 내 오늘날을 돌아봅니다.


 (2) 몸이 아프도록 돌보는 목숨 하나


 옆지기는 엊그제부터 아기 ‘오줌 가리기’를 시키려고 애씁니다. 열 달을 넘어간 아기가 이제부터 차근차근 오줌 누기를 가릴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아기는 아직 변기에 앉아 쉬를 할 마음이 없어 보입니다. 이웃 분들 말씀으로는 ‘바지를 벗기고 있으면’ 얼마쯤 방바닥 닦느라 애먹겠지만 이내 쉬를 가릴 수 있다고 합니다. 우리 아기도 그와 같은 길을 걸어가 준다면, 아기 기저귀 빨래에서 한 시름을 놓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아기 기저귀에서 한 시름 놓인다고 할지라도, 이제부터는 다른 빨래가 새 시름으로 다가오리라 느낍니다. 아기 옷가지가 부피가 커질 테며 신발도 있을 테니까요.


.. 애국심을 조장하는 일은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 참되고 올바른 애국심이 무엇인지 우리는 아직까지 들은 바가 없다 … 애국심은 자기 국민만을 사랑하는 감정이며, 자기 마음의 평정, 재산을 희생하고, 심지어 목숨까지 바치며 적들의 침략과 학살로부터 자기 국민을 보호한다는 신조이다. 애국심은 모든 국가의 국민들이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 다른 나라의 국민들을 침략하고 학살하는 것을 당연한 일로 생각하던 당시의 개념이다 … 애국심과 그 결과(전쟁)는 신문사에 엄청난 수입을 안겨다 주고, 다른 많은 업계도 이로부터 이득을 챙긴다. 작가나 교사, 교수 등 직업이 안전한 사람일수록 더욱 열정적으로 애국심을 찬양한다. 왕과 황제는 더 큰 명성을 얻을수록 애국심에 더 깊이 빠져든다. 지배 계층은 군대, 돈, 학교, 교회, 언론을 손안에 쥐고 있다. 그들은 학교 역사 수업에서 그들 민족이 최상의 민족이며 언제나 옳다고 가르치면서 아이들에게 애국심을 이식한다 ..  (51, 57, 59쪽)


 아기 먹일 죽을 날마다 새로 끓이고, 아빠 엄마 먹을 밥 또한 날마다 새로 끓입니다. 빨래하는 데에도 한짐이요, 밥하는 데에도 한짐입니다. 그렇다고 아기가 밥을 낼름낼름 받아먹어 주느냐?

 저로서는 제 어릴 적을 떠올리지 못하지만, 저 또한 우리 아기처럼 우리 어머니를 고달프게 했을지 어떠했을지 궁금합니다. 보나 마나 제가 아기였을 때에도 어머니를 몹시 고달프게 하지 않았으랴 싶습니다. 이웃집에서는 ‘뭘 그리 힘들게 아이를 키우느냐’고 하지만, 우리 어버이나 이웃 어르신이나 아이를 낳아 키울 때 어려움과 고단함 없던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리고, 이렇게 아이 키우는 고단함이 있으니 아이 키우는 보람이 있지 않느냐 싶어요.


.. 공장 일꾼, 나아가 일반적인 도시 노동자들이 감수하는 비참한 환경은 오랜 노동 시간과 적은 보수가 아니라, 자연과 접촉하는 정상적인 환경을 빼앗기고, 자유를 빼앗기고, 다른 사람의 지시에 따라 강제적이고 단조로운 작업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말한다 … 세상의 모든 현자와 시인들은 인간 행복의 이상을 언제나 농촌 생활의 조건 안에서 찾고 있다. 또 생활 습관이 왜곡되지 않은 노동자들의 경우, 무엇보다 농업 노동을 선호하고 있으며, 공장 일이 언제나 유해하고 단조로운 반면 농업은 건강하고 다양성을 제공하는 일이다. 농업은 자유롭고 농민들은 자기 마음대로 일하거나 쉴 수 있는 반면, 공장 일은 공장이 노동자들의 소유라고 하더라도 언제나 기계 작동에 따라 일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공장 일은 부차적인 반면, 농사일은 일차적이다. 농업이 없으면, 공장은 존재할 수 없다 ..  (119, 122쪽)


 아침마다 똥을 누는 아기를 씻기고, 틈틈이 아기를 안고 바깥마실을 다니며 바람을 쐴 때면 팔이며 허리며 등짝이며 쑤시고 저립니다. 아직 걸음마를 떼지 못하니까요, 그래도, 아기를 안고 골목마실을 하다 보면, 우리처럼 아기를 안고 있는 동네이웃을 곧잘 만납니다. 서로 모르는 사이이지만, 마음으로는 ‘저쪽 집에서도 우리와 똑같거나 비슷하겠지’ 하는 생각이 됩니다. 마음으로 ‘힘들겠지만 힘내셔요’ 하는 인사를 보냅니다.

 아기 아빠는 바깥일 때문에 가끔 아기 엄마랑 아기만 집에 두고 서울마실을 하는데, 이렇게 홀가분한 몸이 되면 ‘이렇게 돌아다니는 일은 얼마나 신나고 즐거운가?’ 하고 새삼 느낍니다. 몸이 아파 오래도록 몸져눕던 사람이 비로소 자리를 훌훌 털고 일어나 햇볕을 쬐고 바람을 마시며 숲길을 걸을 때 짜릿함과 아름다움을 느끼듯, 아기한테서 잠깐 풀려난(?) 때에 이토록 신나고 즐거운 바깥마실이 다 있었다고 느끼면서, 집에 홀로 남아 아기랑 씨름하는 옆지기한테 미안해집니다. 그러다가 ‘나 혼자만 이렇게 신나게 다녀서는 안 되겠다’고 느끼고, 다음부터는 나 혼자 볼일을 보지 말고 온 식구가 다 함께 움직이자고 마음먹습니다. 칠월까지 대안학교 아이들하고 자전거 정비를 가르치고 배우는 자리는 어쩔 수 없지만, 다른 때에는 늘 함께하자고 다짐합니다.


.. 사치품은 내버려야 한다. 폭력과 자본, 발명이 불필요한 물품의 생산에 치우쳐 있는 한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 필수품의 경우 누구도 일정 정도 이상은 사용하지 못한다. 하지만 사치품의 경우는 한도 끝도 없다. 수천 톤의 금으로 집을 장식할 수 있으며, 수백만 에이커의 땅을 공원으로 조성할 수도 있다 ..  (185, 196쪽)


 이렁저렁 따지면, 혼자 살 때에 얼마나 크고 너르게 홀가분함을 누리는지 모르는 노릇입니다. 혼자 밥하고 빨래하고 살림 꾸리는 일이란, 얼마나 넉넉히 시간을 쓰며 내 삶을 가꾸는 셈인지 모릅니다. 혼인을 하면 저마다 제 시간을 빼앗긴다지만, 아이를 낳아 키울 때를 생각하면 우스울 뿐입니다.

 이러한 이음고리를 일찌감치 깨달았기 때문에, 적잖은 예술가와 글쟁이들은 ‘혼인 않고 아이 안 낳고’ 사는지 모르겠다고 느낍니다. 힘들고 고되니까, 힘듦과 고됨에 당신들 예술과 슬기를 빼앗기고 싶지 않아, 홀로 조용히 당신들 삶을 즐기는구나 싶습니다.

 그래, 참 바보스러운 사람들이 아이 낳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제 삶이든, 제 시간이든, 제 겨를이든 하나도 없으니까요. 제 삶이며 시간이며 품이며 땀이며 온통 아이한테 쏟아붓고 바쳐야 하니까요. 제 살을 깎아 주고 발라 주고 모조리 내놓아 주어야 하니까요.


.. 폭력을 없애기 위해서는 어느 누구도 어떤 구실에서든, 심지어 가장 흔한 처벌의 구실에서도 폭력을 행사해서는 안 된다 … 과거의 혁명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주로 육체노동에서 벗어나 있는 고급 직종 종사자와 이들이 이끄는 도시 노동자들이었다. 반면, 다가오는 혁명의 참여자들은 주로 농촌의 대중들이 될 것이다 … 오늘날 사람들은 별개의 자유, 즉 언론의 자유, 출판의 자유, 양심의 자유, 집회의 자유, 이런저런 형태의 선거의 자유, 결사의 자유, 노동의 자유, 그리고 다른 여러 가지 자유에 관해 말한다. 이것은 사람들이(지금의 러시아 혁명가들처럼) 자유에 관해 매우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거나, 아니면 자유가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그런 단순한 자유는 어떤 사람에게 그의 바람과 이익을 무시하고 어떤 행동을 하도록 요구하는 권력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을 말한다 ..  (234, 257, 270쪽)


 아이와 함께 살면서 집살림이 버겁다고 느끼지만, 버거운 만큼 새로운 길을 엿봅니다. 아이가 없었다면 한결 단출하고 홀가분하게 살림을 꾸렸을 텐데, 이렇게 살림을 꾸렸다면 우리 두 사람이 미처 깨닫지 못하거나 느끼지 못하며 지나칠 숱한 일을 알게 되고 보게 되고 헤아리게 됩니다. 아이 키우는 고단함만큼 둘레사람들 고단함을 새삼스레 돌아보고, 우리가 미처 모를 또다른 숱한 고단함은 무엇일까를 살피게 됩니다.

 아이를 돌보면서 책 펼칠 겨를이 몹시 줄어든 만큼 아무 책이나 허투루 읽으며 나한테 애틋한 말미를 함부로 버리지 않도록 하는 가운데, 글 한 줄을 쓰면서도 더 마음을 쏟도록 해 줍니다. 동무나 이웃이 저를 볼 때면 “얼굴에 살이 쏙 빠졌네요.” 하고 말을 거는데, 이런 말을 들을 때면 “아이 키우는 사람은 다 그렇잖아요. 그래도, 힘드니까 그만큼 보람이 있어요.” 하는 말이 절로 튀어나옵니다.


 (3) 톨스토이 님이 남긴 《국가는 폭력이다》


 사람들한테 ‘문호(文豪)’ 아닌 ‘대문호’ 소리를 듣는 톨스토이 님 이름을 모르는 분은 얼마 없으리라 봅니다. 톨스토이 님 작품을 찬찬히 읽어 보지는 못했어도 이분 이름은 익히 알 테며, 러시아 사람들 여느 이야기를 그러모아 엮은 옛이야기 또한 온누리 사람들한테 두루 퍼져 있습니다. 이를테면, 〈한 사람한테는 땅이 얼마나 있어야 하느냐〉 같은 작품은 무척 짧은 글이요 쉬운 글이면서도 어린이부터 어른 모두한테까지 ‘내 삶에서 내가 깊이 돌아보고 사랑할 대목이 어디에 있는지’를 느끼게 합니다. 우리 나라에는 1930년대부터 우리 말로 옮겨지며 읽힌 이야기인데, 설익은 가르침이나 어설픈 밀어붙이기가 아닌 따뜻한 사랑과 튼튼한 믿음으로 우리 스스로 우리 삶을 아름다이 가꿀 길을 보여줍니다.


.. 사람들은 다시 이렇게 말한다. “하지만 정부가 없다면, 사람들은 서로에게 폭력과 살인을 일삼을 것이다.” 왜 그렇단 말인가? 폭력의 결과로 생겨난 조직이, 폭력을 행사하기 위해 세대를 넘어 이어져 온 조직이, 이제는 아무 필요도 없어진 그런 조직이 사라진다고 해서 왜 사람들이 서로에게 폭력을 행하고 서로를 죽인단 말인가? ..  (75쪽)


 톨스토이 님 산문모음 《국가는 폭력이다》를 읽습니다. 산문모음 《국가는 폭력이다》는 무척 억세고 굳은 목소리로 오로지 한 가지 말마디를 외칩니다. “한 나라는 그 나라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한테 주먹다짐만 하고 있다.”고. “사람들한테는 정부가 아닌 자치만 있어야 하며, 모든 전쟁은 정부가 일으킬 뿐 아니라, 전쟁을 일으키려고 사람들을 억누르고 있다.”고. “정부는 애국심이라는 이름으로 사람들한테 나라 지키기에 몸바치도록 이끌려 하지만, 정부가 말하는 애국심이란 다름아닌 권력자 밥그릇 지키기요, 권력자 밥그릇을 크게 키우려고 우리 뼈와 살을 온통 발라 주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고.

 그러니까, 《국가는 폭력이다》는 “나라와 정부는 있어야 한다. 그리고 지켜야 한다.”는 말마디가 얼마나 그릇되고 잘못되고 엉터리인가를 낱낱이 밝히는 책입니다.

 《국가는 폭력이다》를 읽는 동안 조지 오웰 님 산문모음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이 떠올랐습니다. 조지 오웰 님 스스로 파리와 런던 밑바닥에서 가난뱅이나 떨꺼둥이로 지내면서 ‘프랑스와 영국이 나라 안팎으로 내세우는 거짓된 이름과 껍데기’가 무엇인지를 밝힌 책으로, 톨스토이 님과 조지 오웰 님이 살았던 곳이 다르고, 느낀 바는 다르지만, 두 사람이 만나는 자리는 같습니다. 우리는 우리 삶을 우리 손으로 가꾸는 길에서 자꾸자꾸 멀어지고 있으며, 우리 손으로 가시울타리를 쳐 놓고 이 안에 우리 스스로 갇혀 있다고.


.. 우리 시대에 모든 사람들이 인류를 변화시킬 생각을 하고 있지만, 정작 아무도 자기 자신을 변화시킬 생각은 하지 않고 있다 … 참여는 희생을 요구한다. 사람들이 진정으로 자신의 지위뿐만 아니라 형제ㆍ동포들의 지위를 향상시키기를 원한다면, 익숙해 있는 삶의 방식을 바꾸고 그동안 누리고 있던 유리한 지위를 포기하려는 마음가짐을 가져야 할 뿐 아니라 격심한 투쟁에 대비해야 한다 … 사람들이 이웃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취해야 할 행동은 새로운 형태의 체제를 건설하는 것이 아니라, 우선 자기 자신과 타인의 품성을 바꾸고 개선하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  (88, 174, 220쪽)


 그러면, 이 나라는 이 정부는 왜 폭력덩어리가 되었을까요. 우리들은 왜 나라와 정부가 폭력덩어리가 되도록 손을 놓고 있을까요. 아니, 우리들은 나라와 정부가 폭력덩어리가 되도록 이끄는 한편 떡고물을 얻어먹고 있지는 않는가요. 얄딱구리한 나라얼개를 뜯어고치는 데에 마음쏟기보다는, 고시에 붙어 죽는 날까지 쇠밥그릇 떵떵거리면서 살아가기만을 바라지는 않는가요.

 스스로 아름답게 꾸릴 내 삶을 찾지 않는 가운데, 스스로 바보가 되어도 좋으니 돈만 있으면 그만인 내 삶이 되도록 굴러떨어지고 있지 않습니까. 스스로 사랑과 믿음이 가득한 훌륭하고 멋진 사람이 되도록 힘쓰지 않는 가운데, 이웃이고 동무이고 식구이고 밟고 타올라가며 내 밥그릇 두둑히 챙기면 좋다고 여기는 삶이 되도록 망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 사람들을 돕는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다. 스스로 좋은 삶을 사는 것이다 … 다른 모든 수단은 환상이다 ..  (223쪽)


 스스로 아름답게 살아가는 사람만이 아름다이 말을 하고, 아름다이 일을 합니다. 스스로 아름답지 않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겉보기로는 예쁘장한 말을 할는지 몰라도 속알맹이까지 예쁘지 않을 뿐더러, 겉보기로만 훌륭해 보이는 일을 할 뿐, 조금도 안 훌륭한 일을 합니다. 내가 나를 돕지 않고서는 내가 발디딘 이 나라를 도울 수 없습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고서는 내가 몸담은 이 마을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내가 나를 살찌우지 않고서는 내 이웃과 동무와 식구가 오순도순 살가운 보금자리를 이룰 수 없습니다. 나부터 ‘폭력덩어리’이기 때문에, 나와 같은 숱한 폭력덩어리가 하나둘 뭉치면서 ‘나라와 정부라고 하는 어마어마한 폭력덩어리’가 망나니처럼 나대고 짓찧고 까불며 법석을 떱니다. (4342.6.22.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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