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에너지 시장 - 새로운 에너지 사회의 모습
이이다 데쓰나리 지음, 푸른아시아 옮김 / 이후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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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연자원도 ‘돈이 되어야’ 하는가
 [애 아빠가 오늘 읽은 책 22] 이이다 데쓰나리 엮음, 《자연에너지 시장》


 저한테는 운전면허증이 없습니다. 우리 집에는 자가용이 없기도 하나, 저로서는 자가용을 누가 거저로 준다 하여도 운전면허증이 없기 때문에, 이 자가용을 몰 수 없습니다. 누가 자동차 한 대를 준다 한들 받고픈 마음이 없기도 합니다. 자가용을 몰아야 할 만한 일이 있다고 느끼지 않으며, 아이와 옆지기와 저 셋이 자가용을 타고 이곳저곳을 찾아다닌다 해서 더 느긋하거나 즐거울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가고픈 곳이 있으면 두 다리로 걸어서 가면 됩니다. 버스나 전철이나 기차를 얻어타고 움직이면 됩니다. 아이가 좀더 자라면 자전거에 태워 함께 달리면 됩니다. 오늘날 이 나라 사람들한테 자가용이란 거의 ‘생활필수품’처럼 여기는 한 가지입니다만, 제 눈길과 삶결로 바라볼 때에는 ‘사치품’이 아닌가 하고 느낍니다. 자가용을 꼭 타야 할 만한 사람들이 꼭 장만해서 탄다기보다, 남들이 타고 있으니 따라서 탄다든지, 내 몸을 즐겁게 움직이는 일하고 동떨어지면서 탄다든지, 남 앞에서 자랑하거나 얼굴 세우기로 탄다든지, 이냥저냥 세상물결에 휩쓸리면서 으레 타야 하거니 하고 바라보는구나 싶습니다.

 어릴 적에는 ‘기름을 안 먹는 깨끗한 자동차’가 나온다면, 그때에 가서 운전면허증을 따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 때에 아주 손쉽게 운전면허증을 딸 길이 있었으나 굳이 따지 않았습니다. 동무들은 면허시험 문제집을 사서 달달 외운 다음 필기에 붙고(잘 모르겠으면 3번 찍기를 하면서), 오토바이를 좀 몰아 본 손맛으로 실기에 붙곤 했습니다. 준비 한 번 없이 실기를 보고도 붙은 녀석들이 꽤 많았습니다. 나중에 실기시험이 까다로워진다면서 그무렵에 얼른 따야 한다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더더욱 운전면허증을 따는 일이란 부질없다고 느꼈습니다.

 왜 차를 몰아야 하는가를 먼저 깊이 생각할 노릇이요, 차를 몰아야 한다면 어떤 차를 몰면서 어떤 일을 해야 하는가를 곰곰이 따질 노릇입니다. 나중에 쓸 일이 있을 때에 쓰고자 미리 면허증을 딴다는 일은 달갑지 않습니다. 더구나, 아직 제대로 마음닦이가 안 된 사람들한테 차열쇠를 건네는 일은 대단히 근심스럽고 무시무시한 노릇이 아니겠느냐 싶습니다. 우리는 자동차 부속과 교통법을 다루는 지식뿐 아니라, 차와 사람이 올바로 어우러지는 흐름을 함께 익히고 읽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버젓이 ‘학교 앞 길’임에도 경적을 울리며 싱싱 달리는 버르장머리없는 운전수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람들이 걷는 길에 차를 올려놓고는 볼일을 보러 다니는 짓궂은 운전수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짐을 실어서 나를 일이 있지도 않은데 골목길까지 자동차 머리를 들이미는 괘씸한 운전수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몇 미터쯤 걷기 싫어 다른 자동차와 숱한 사람한테 피해를 끼치는 나쁜 운전수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 우리가 누리는 쾌적하고 편리한 생활은 석유 등 화석에너지를 대량 소비함으로써 이루어진다 ..  (78쪽)


 새로운 자동차와 함께 새로운 자전거가 쏟아져나옵니다. 요즈음은 자동차꾼 못지않게 자전거꾼이 제법 늘었습니다. 자전거로 살아간다는 분이 제법 느는 한편, 몸을 생각하고 기름값을 줄이며 ‘자전거 모임’ 사람들하고 어울리는 즐거움을 누리는 분이 퍽 늘었습니다. 그러나 자전거를 즐기는 자전거꾼 가운데에도 깊이 생각하지 않고 자전거를 마련하면서 ‘나 혼자한테는 좋을는지 모르나 다른 이웃한테는 좋을 수 없는’ 매무새를 보여주는 사람이 꽤 많습니다. 아무래도 자전거이든 자동차이든, 이와 같은 탈거리를 내 손에 쥐기 앞서 ‘이러한 탈거리를 내가 왜 타야 하고, 탈 때에는 어떻게 타야 하는가’를 곰삭이는 마음그릇을 제대로 닦지 않은 탓입니다.

 깊이 파고들어 보면, 우리네 학교에서 아이들한테 옳고 바른 길을 가르치기란 대단히 어렵습니다. 아니, 우리네 학교는 아이들한테 옳고 바른 길을 가르치려는 마음이 없는지 모릅니다. 누구나 곱고 애틋한 목숨 하나를 선물받아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깨닫지 않고, 더 높은 점수를 얻어 더 이름값 있는 대학교로 갈 수 있도록 밀어붙이는 데에만 매달리는 학교 틀거리에서 헤어나지 못하는지 모릅니다. 사람됨을 갈고닦는 학문이 아닌, 시험점수 잘 따는 입시기계로 내모는 교과서인지 모릅니다. 아무리 허접한 교과서라 할지라도 교사들이 슬기로우면 되는데, 교사 또한 스스로 쇠밥그릇 월급쟁이에 머물면서 신나게 자가용을 몰기만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 현재 대부분의 목질 연료는 임업과 임산업의 부산물로 생산되고 있고, 최대 공급량은 주산물의 생산량에 따라 결정된다. 목질 연료의 공급을 계속적으로 늘리는 유력한 방안은 성장이 빠른 에너지 수목을 인공적으로 재배하는 것이다 … 나무를 모으거나 마름질해 재목을 만드는 과정에서 기계를 사용하려면 일정 정도의 작업 규모가 확보되어야 한다. 어떻게든 사람의 힘으로 처리했던 시대에는 규모에 따른 생산성의 차이가 적고 소규모 생산으로도 살아남을 여지가 충분했다. 하지만 기계화 시대에는 작업량을 늘리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소유자가 다른 산림을 몇 개의 지역으로 묶어서 솎아베기하는 체계가 필요하다 ..  (56, 73쪽)


 흔히들 자동차를 몰 때에 ‘쾌적하고 편리한 현대 생활’을 이룬다고 생각합니다. 빨래기계를 쓰고 텔레비전을 보며 큰 냉장고를 갖추는 한편, 갖가지 전기제품을 집안에 가득가득 갖추어야 비로소 ‘문명 혜택을 받고 즐거이 꾸리는 삶’을 펼친다고 여깁니다. 그런데 참말로 ‘신나고 즐겁고 깨끗하고 아름다운 삶’은 자동차를 비롯한 전기제품 들을 장만하는 데에 있을까 궁금합니다. 빨래기계를 안 쓰고 손을 쓰면서 두 손에 온통 물집과 꾸덕살이 잡히던 예전 어르신들한테는 신나거나 즐겁거나 깨끗하거나 아름다울 모습이 하나도 없었을까 궁금합니다. 장바구니를 들고 그날그날 저잣거리로 찾아가 먹을거리를 장만한 다음 손수 손질하여 차리는 밥상에는 즐거움이 없고, 자가용 몰고 ㅇ마트 ㄹ마트로 내달려 짐칸 가득 비닐봉지로 꾸역꾸역 채워서 집으로 돌아온 다음 냉장고를 꽉꽉 채워 아무 때나 꺼내어 차리는 밥상이 훨씬 즐거울는지 궁금합니다.

 우리는 우리 몸을 덜 써야 즐거운 삶일까요. 우리는 우리 돈을 더 써야 즐거운 삶인가요. 우리는 우리 마음을 덜 써야 기쁜 삶일까요. 우리는 전기와 물과 자원을 더 써야 기쁜 삶인가요.

 제가 사는 집에서 걸어가 5분 안짝에 있는 구멍가게에서 보리술 한 병을 사면 1700원입니다. 제가 사는 집에서 자가용을 몬다면 5분쯤 달려 ㅇ마트에 닿을 수 있고(저는 자가용이 없으나 차를 타면 이쯤 걸릴 듯합니다), 이곳에서 보리술 한 병에 1530원쯤만 치르고 살 수 있습니다. 구멍가게에서 보리술을 산다면 두어 병만 사는데, ㅇ마트에서는 ‘값이 퍽 싼’데다가 ‘다른 덤을 끼워 주’고 있으니 여러 병을 사고야 맙니다. 그러면, 이렇게 자가용을 모는 현대물질문명을 누리면서 170원을 아끼는 만큼 나한테 더 크게 도움이 된다고 할 만한지요. 보리술 열 병을 사면 1700원을 아끼니 한 병을 더 사고도 170원이 남는다고 셈할 만한지요. 그러면, 자가용 한 대 값이며, 자가용을 10분 동안 굴리며 드는 기름값이며, 자가용이 다녀야 하는 길을 닦는 데 들이는 사회간접자본이며, 자가용에서 내뿜는 배기가스가 더럽힌 우리 삶터이며 ……는 어찌하지요.


.. 풍력발전은 특성상 송전선 등을 포함하여 아주 넓은 용지를 필요로 한다. 용지 확보 기간이 사업 기간에 맞는가, 사업 자산으로서 담보 설정이 가능한가, 토지 소유자의 수가 많은 경우에 원만한 합의 형성이 가능한가 등이 요점이다. 중요한 인프라의 하나인 송전선의 거리가 길다는 것은 경제성을 악화시킬 뿐 아니라 차지하는 면적이 넓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시간이 흐르면 줄어드는 위험이 아니라 사업 성패의 근간에 해당하는 부분으로서 어떠한 경우에도 바람직한 조건을 계약에 명기해야 한다 … 소비자에게 전기란 ‘송전선을 통해 일률적으로 공급되는 것으로 그 발전 방식을 선택할 수 없는’ 것이었다. 또한 전력 공급이 오랫동안 지역 독점 상황에 놓이게 되면서 전기 사업자의 입장에서는 안정적이고 저렴한 전력 공급이 첫 번째 사명이 됐다. 이런 이유로 더욱 소비자에게 전력을 차별화하여 제공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  (96, 128쪽)


 《자연에너지 시장》이라는 책을 읽습니다. 석유도 자연에서 나오고 가스도 자연에서 나온다 하겠으나, 이들은 화석에너지라는 이름이 붙습니다. 똑같이 자연에서 얻는다 하지만, 자연에서 태어난 목숨이 수만 수십만 수천만 해에 걸쳐 썩고 삭아서 이루어진 자원이기에 자연에너지 아닌 화석에너지이고, 이러한 화석에너지를 쓸 때에는 아주 마땅하게도 공해 문제가 불거집니다. 자연에너지란 공해를 일으키지 않으면서 언제까지나 쓸 수 있는 자원을 일컫습니다.

 우리 삶터뿐 아니라 이웃나라 삶터 또한 화석에너지가 거의 모두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웃나라는 화석에너지를 접어 놓고 자연에너지로 바꾸려는 움직임을 보여줍니다. 화석에너지가 나아가는 길은 뻔히 보이기 때문입니다. 벼랑으로 굴러떨어지는 길임이 뻔히 보이는데, 미련스레 화석에너지만 붙잡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쓰는 자원도 자연에너지가 되도록 고쳐야 하는 한편, 우리 스스로 ‘얼마나 더 많은 자원을 써야 하느냐’ 하고 생각하면서 내 삶을 바꿀 노릇이라고 느낍니다. 화석에너지에서 자연에너지로 돌아서는 모습 또한 우리 스스로 삶을 바꾸는 노릇이고, 화석에너지를 쓰는 부피를 고스란히 자연에너지로 돌리려고 생각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내 마음이 한결 아름답도록 가다듬고, 내 삶이 더욱 싱그럽도록 추스르며, 내 목숨이 사랑스레 빛나도록 올바른 길을 찾아야 합니다. 도시에서 살아가니 어쩔 수 없이 원자력발전소와 화력발전소에서 나오는 전기를 써야 하지 않느냐는 마음과 삶으로 그칠 수 없습니다. 도시에서 살아가든 시골에서 지내든, 나와 내 이웃이 다 함께 아름다울 수 있는 길은 어디에 있는가를 즐겁게 찾고 스스럼없이 어깨동무하는 자리를 마련하고 싶습니다. 나도 웃고 이웃 또한 웃는 삶을 찾고 싶습니다. 나부터 흐뭇하고 이웃 누구나 흐뭇할 곱고 빛나는 삶터를 일구고 싶습니다.


.. 사회적 관심이 국토 개발에만 쏠려 있던 시기에 자연보호를 외치기는 쉽지 않다 … 하지만 건강한 먹을거리처럼 자연보호도 현재 우리 사회에서는 중요한 개념으로, 결코 유행 상품이 아니다 … 전문가라는 일부 사람들의 판단으로 에너지 정책이 강력하게 추진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비민주적인 정책이라는 의심을 피할 수 없다 … 원자력발전소의 입지 지역에는 원자력 정책을 정면에서 부정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될 수 없다. 입지 시정촌의 다수가 국가 정책의 일환으로 많은 교부금 등을 받고 있다. 이 때문에 해당 지자체의 주민은 같은 규모의 다른 지자체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공적인 혜택을 받게 된다. 이러한 현실에서는 원자력 에너지의 유효성에 대한 시비를 과학적ㆍ논리적으로 냉정하게 논의하고 판단하기는 어렵다 … 독일은 자연에너지를 선택할 수 있는 자치 역량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앞서 나가는 추진 대책을 세울 수 있었다. 독일의 경우에도 자연에너지가 단번에 정부 차원의 정책이 된 것은 아니다. 자치의 현장에서 작고 구체적인 방안의 실천이 자연에너지에 대한 이해를 넓혔고, 최종적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인지하는 정책으로 성장하고 있다 ..  (263, 265∼266, 268쪽)


 《자연에너지 시장》이라는 책은 세계 자원시장에서 화석에너지 쓰임새를 줄이고 자연에너지 쓰임새를 늘리고자 하는 몸부림이 어떠한 길을 걷고 있는지를 통계와 표와 갖은 자료로 보여줍니다. 세계경제가 앞으로도 오늘과 같은 살림을 잘 지키면서 다 같이 살아남으려면 자연에너지 시장을 어떻게 새로 일구면서 키워야 하는가 하는 대책을 내놓고 있습니다.

 그런데 두 가지가 빠져 있습니다. 자연에너지를 넓히는 좋은 이야기와 자연에너지가 널리 뿌리내리지 못하는 아쉬움을 찬찬히 들려주고 있지만, ‘자원을 쓰는 우리 삶’을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가 하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일본이든 한국이든 미국이든, 오늘과 똑같은 매무새로 앞으로도 ‘끝없는 성장’만을 한다는 바탕에서 자연에너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연에너지 시장》에서 말하는 자연에너지란, ‘사람들이 고기를 많이 먹는 삶으로 바뀌었’으니, 더 많은 사료를 더 빨리 먹여 더 크고 먹음직한 고기를 길러내는 공장이 되어 버린 축산업과 매한가지로, 에너지로 돌릴 수 있는 자연을 ‘사람 손을 써서’ 더 빨리 더 많이 만들어야 한다는 쪽으로 이야기가 흐릅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삶을 바꾸려는 몸짓이란 하나도 없이, ‘우리 수요’를 넉넉히 채워 줄 수 있는 자연에너지가 더 늘어야 한다는 쪽으로 마무리가 되고야 맙니다.

 올바르게 꾸리는 삶을 헤아리는 마음결을 어떻게 가꾸어야 하느냐는 이야기 하나가 빠진 《자연에너지 시장》입니다. 오늘날 우리 물질문명 터전이 얼마나 아름답거나 괜찮은가를 바라보는 눈썰미 이야기 하나가 담기지 않은 《자연에너지 시장》입니다. 이 두 가지가 없어도 자연에너지를 말할 수야 있습니다. 어차피(?) 우리 사회는 ‘환경사랑’이라는 옷을 걸치면서 끝없이 쓰고 또 쓰라고 부추기는 자본주의 사회이니까요. 그런데 되살림과 되쓰기가 빠진, 허울좋은 ‘환경사랑’ 제품이 참말 환경사랑으로 나아가고 있습니까. 터무니없이 많이 쓰는 화석에너지 높이에 맞추어 자연에너지 시장을 새로 열면 이 지구는 버틸 수 있습니까. 하기는, 자연에너지를 놓고도 ‘시장 개척’을 생각하고 ‘시장 개척 대책’을 생각하는 우리들로서는 자연에너지를 말하는 마당에서도 돈 걱정이 맨 먼저가 될밖에 없구나 싶습니다. (4343.2.7.해.ㅎㄲㅅㄱ)


 ┌ 《자연에너지 시장》(이후,2010)
 ├ 엮은이 : 이이다 데쓰나리
 ├ 옮긴이 : 푸른아시아
 └ 책값 : 17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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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학 개념어 사전
어니스트 칼렌바흐 지음, 노태복 옮김, 박병상 감수 / 에코리브르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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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사람으로 곱고 맑게 살아가는 길이란
 [애 아빠가 오늘 읽은 책 18] 어니스트 칼렌바크, 《생태학 개념어 사전》



 인천과 서울을 오가면서 해야 하던 일을 그친 지 스무 날이 넘었습니다. 스무 날이 넘는 동안 새 살림집을 알아보러 다니고 싶었으나, 그동안 몸이 더 나빠진 옆지기를 돌보고 아이를 함께 보살피느라 어디로도 다니지 못한 채 거의 집에서만 붙어 지냈습니다. 이러느라 서울마실은 한 주에 한 번 살짝 할 뿐이었는데, 모처럼(?) 아침저녁으로 지옥철을 안 타다가 지옥철을 다시 한 번 타 보니 더없이 끔찍합니다. 날은 겨울이라 사람들 옷은 두툼해지니 자리에 앉아도 훨씬 비좁을 뿐더러, 다리를 벌리거나 신문을 쫙 펼치는 남자들 매무새가 짜증스럽습니다. 사람들 틈바구니에 찡기며 책장을 펼칠 때에도 밀치고 밟는 몸가짐은 매한가지라서 고단합니다. 집에서 식구들을 돌보고 쉬는(?) 동안에는 이맛살을 찌푸릴 일이 드물었는데, 고작 하루 지옥철을 다시 타면서 자꾸자꾸 이맛살을 찌푸립니다. 숨이 턱턱 막히면서도 책을 읽다가 덮습니다. 책읽기로 마음닦기를 하기보다 한손으로 이마를 지긋이 누르고 비비면서 마음을 다스려야겠다고 느낍니다. 이 지옥철에서는 나 홀로 고달프지 않을 테니까요. 이 지옥철에서는 나 혼자 끔찍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테니까요.

 그러나, 타고내릴 때에 새치기를 하거나 불쑥 끼어들며 밀쳐대는 숱한 사람들을 부대끼면서 마음이 바뀝니다. 이 지옥철을 타는 사람들은 으레 ‘고단하다고는 안 느끼지’ 모른다고. 아주 자연스러운 당신들 삶으로 여기면서 ‘혼자 빨리빨리’ 갈 길을 가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을지 모른다고. 남이야 어찌 되든 제 몸만 느긋하면 괜찮은 몸가짐으로 살아가고 있겠다고.


.. 환경운동은 근본적으로 경제적이거나 과학적인 주장이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무엇이 옳고 적합하며 아름답고 만족스러운가에 관한 윤리적이고 미학적인 가치를 바탕으로 삼는다 … 집에서 가까운 곳에 머무는 것이야말로 휴가 기간에 당신이 자연을 가장 적게 훼손하는 방법이다 … 장거리 여행은 당신의 ‘생태적 발자취’를 크게 남긴다. 음식 공급 체계를 비롯한 여러 사안과 마찬가지로, 관광에도 ‘지역으로 돌아가기’가 필요하다 ’ 우리의 주요 책무는 우리가 고향이라고 부르는 지역의 가치를 인정하고 보호하는 것이다 … 자동차가 차지하던 땅을 되찾음으로써 우리는 도시를 더욱 푸르게 만들 수 있다 … 보존 운동이 우리 자연 유산이 파괴되는 속도를 늦추긴 했지만, 교육ㆍ정치ㆍ법률적 노력을 더 많이 기울여야 도로 포장과 오염과 벌목이 초래한 결과를 되돌릴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몇몇 주요한 동물 종만 구제할 것이 아니라, 생태계 전체와 그 안에 서식하는 모든 동물을 보존하는 쪽으로 범위를 넓혀야 한다 ..  (17, 39, 58, 90쪽)


 ‘일상(日常)’이라는 한자말이 있습니다. 저는 이 한자말을 쓸 일이 없으나 오늘날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삶이란 바로 ‘일상’이 아닌가 싶습니다. 더욱이 서울 둘레나 한복판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삶 또한 ‘일상’이로구나 싶습니다.

 한자말 ‘일상’이란 “날마다 똑같이 되풀이되는 삶”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말로 하자면 “늘 같은 삶”입니다. 어제와 오늘이 같고, 오늘과 글피가 같으며, 글피와 모레가 같은 삶입니다. 지난날과 오늘날이 같으며, 오늘날과 앞날이 같은 삶입니다. 어버이 삶이 아이 삶하고 같고, 이 아이 삶이 나중에 어른이 되어 낳아 기를 아이 삶하고 같습니다.

 이러한 삶이란, 경쟁과 학벌과 이름과 돈과 아파트와 자가용과 여행이라는 똑같은 틀거리에 맞춘 한결같은 삶입니다. 어버이 스스로 더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삶을 찾거나 누리지 않으면서 아이한테도 더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삶을 찾거나 누리도록 돕거나 이끌지 않습니다. 어버이 스스로 더 많은 돈과 더 높은 이름과 더 큰 힘을 바라면서 아이한테도 더 많은 돈과 더 높은 이름과 더 큰 힘을 바라도록 내몹니다.

 제아무리 헌법에 ‘인권과 기본권과 시민권’이 적혀 있다고 하여도 이 나라 푸름이한테는 어떠한 인권도 기본권도 시민권도 없습니다. 중고등학교 아이들은 머리길이를 ‘교칙에 따라’ 짧게 맞추어야 하고, 치마길이와 치마통을, 옷차림과 신발을, 가방에 넣고 다닐 책을, 머리속에 집어넣는 지식을, 그 어느 한 가지 자유와 민주와 창조와 평등에 걸맞게 가다듬을 수 없습니다. 교육감이 무슨무슨 틀거리를 새로 짜야 하는 ‘청소년 머리길이’가 아닙니다. 법에 따라 어찌어찌 적어 놓어야 할 ‘체벌 규칙과 높낮이’가 아닙니다. 헌법에 따라 마땅히 지켜 주고 돌봐 주고 아껴 주는 인권이요 기본권이요 시민권이어야 합니다.


.. 실제로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공기를 거들떠보지 않는다 … 자동차는 공기를 오염시키고, 사람들을 단순한 운전자로만 만들 뿐 관심을 가져야 할 시민으로 대하지 않게 한다 … 세상에 펼쳐진 아름다운은 상당 부분, 생명이 다채롭고 풍부하게 존재하기 때문에 느낄 수 있는 것이다 … 우리는 양식 물고기나 유전자 조작 식물이 언제까지나 우리를 먹여살릴 수 있다고 여긴다. 하지만 정작 그런 음식을 생산하려면 인공적인 먹이와 화학비료가 필요하다는 사실은 망각하고 있다 ..  (30, 57, 112, 143쪽)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우리 스스로 낳아 키우는 어린이와 푸름이한테 참다운 권리를 베풀어 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 어른들부터 참다운 권리를 누리려고 하지 않습니다. 맑은 물을 마시고 시원한 바람을 마시며 깨끗한 터전에서 오순도순 어울리며 즐겁게 두레와 품앗이를 펼치는 삶을 꾸리지 않습니다. 오늘날 어른들 누구나 제 은행계좌 숫자가 높아지고 제 아파트 평수가 넓어지며 제 자가용 크기가 커지기만을 꿈꿉니다. 내 은행계좌에 높아지는 숫자를 가난하거나 어려운 이웃한테 기꺼이 베푸는 어른이 얼마나 될까요? 구세군 냄비에 넣는 돈을 떠나, 소리와 소문이 없이 늘 기꺼이 나누며 삶을 꾸리는 어른은 얼마나 있는가요?

 지옥철을 타면서 ‘마음이 무너지는 끔찍함’에 몸서리치는 까닭은 오늘 하루 몸이 몹시 고달파야 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지옥철이 되도록 서로서로 깎아내리는 이 터전을 비롯하여 우리 삶터 구석구석에서 내 밥그릇만 단단하게 붙잡는 모습이 훤히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1초를 안 기다리고 새치기를 하는 이 사람들이 자가용을 몰 때에는 새치기를 안 할까요? 밀고 밟으며 새치기를 하는 이 사람들이 자가용을 몰며 골목을 달릴 때에 마구마구 빵빵거리며 아슬아슬하게 내달리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요? 아무 데에나 침을 뱉는 일은, 옳지 않은 법이 자꾸 생겨나도 나 몰라라 하는 일하고 같습니다. 한 번 쓰고 나서 쓰레기로 버리는 물건을 끝없이 쓰고 있으면서 입으로는 진보를 외치거나 보수를 외치는 사람은 모두 한통속입니다. 참다운 진보라면 마땅히 이 땅 터전을 옳고 바르고 깨끗하고 곱게 지키는 일에 온마음을 쏟아야 합니다. 참된 보수라면 누구나 이 나라 삶터를 알차고 슬기롭고 맑고 어여쁘게 가꾸는 일에 온몸을 바쳐야 합니다. 그렇지만, 이 땅 이 나라에서 진보요 하고 외는 사람과 보수요 하고 나서는 사람치고 ‘참 자연사랑’으로 삶자락을 추스르는 분은 몇이나 됩니까.


.. 미국에서 처음에 야생 지역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지역이 대부분 ‘바위와 얼음’으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이 산업 시설이나 교외 주택단지를 지을 필요성을 느끼지 않은 공간이었다는 뜻이다 … 우리는 쓰레기와 찌꺼기를 ‘버린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들은 계속 돌고 돈다. 우리가 환경이며 환경이 우리인 셈이다 ..  (150, 210쪽)


 두껍지도 얇지도 않은 《생태학 개념어 사전》이라는 책은 우리가 ‘사람으로 살아가는 밑앎’을 차분하게 들려줍니다. 마르크스를 알든 공병호를 읽든, 대학 졸업장이 있든 대학원 학위가 있든, 우리는 ‘사람으로 태어나 살아가는 밑슬기’를 먼저 닦아 놓고 있어야 함을 이야기합니다. 내 몸이 어떻게 이루어졌고, 내 집이 어떻게 마련되었으며, 내 밥이 어떻게 밥상에 놓이는지를 제대로 깨달아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머리통에 지식을 가득 채운다고 똑똑한 사람이 아니며, 지식인이라는 이름은 가방끈으로 붙일 수 없음을 알려줍니다.

 그런데 이 책 《생태학 개념어 사전》은 몹시 슬픕니다. 이 책 《생태학 개념어 사전》은 굳이 읽어야 할 까닭이 없어 더없이 슬픕니다. 이 책은 ‘생태환경 갈래를 모르는 새내기’한테 길잡이 노릇을 하는 책인데, 생태환경 갈래 이야기를 이 나라 웬만한 지식인들은 한줌 지식으로조차 머리속에 넣어 놓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책으로 읽어 머리속에 넣어 놓을 지식을 담은 《생태학 개념어 사전》이 아닙니다. 우리 스스로 이 땅에서 옳고 바르게 살아가고 있으면 누구나 마땅히 시나브로 깨우치면서 몸뚱이로 익히는 이야기를 담은 책입니다.


.. 소비 자본주의가 부흥하는 내내 서구인들은 기술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며 그것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고, 종교와 문화는 부차적이라는 믿음을 고수했다 … 성숙한 도시일수록 유지 보수에 쓰는 에너지가 더 많으며, 도시 자체의 성장에는 에너지를 덜 쓰게 된다 … 우리 인간은 콘크리트로 뒤덮인 도시로 땅을 점령해 버림으로써 생태계를 어지럽힌다 ..  (18, 56, 113쪽)


 《생태학 개념어 사전》은 길잡이책입니다. 아니 ‘길잡이책을 알아보는 길에 한 번 들추어 보는 읽을거리’입니다. 이 땅과 사람과 목숨붙이 이음고리를 헤아리는 길잡이책이라 한다면 《수달 타카의 일생》(헨리 윌리엄슨)이나 《모래 군의 열두 달》(알도 레오폴드)이나 《슬픈 미나마타》(이시무레 미치코)나 《침묵의 봄》(레이첼 카슨)이나 《체르노빌의 아이들》(히로세 다카시)이나 《놀이터를 만들어 주세요》(쿠루사)나 《나무처럼 산처럼》(이오덕)이나 《우리들의 하느님》(권정생)이나 《너를 부른다》(이원수) 같은 책들입니다. 이러한 책을 먼저 차근차근 곱새겨 읽고 내 온몸으로 바르고 곱고 따뜻하고 즐거운 삶을 꾸려 낸 다음에 비로소 집어들면서 ‘이론을 갈무리해’ 보도록 거드는 《생태학 개념어 사전》입니다.

 《생태학 개념어 사전》은 우리 스스로 옳고 바른 삶을 꾸리고 있을 때에 앞으로 더욱 즐겁고 힘차게 이 길을 씩씩하고 튼튼히 걸어가도록 돕는 길잡이책입니다. 길잡이책이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맨 처음 읽는 책’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처음으로 쥐어들며 읽는 책은 ‘배움책’입니다. 《생태학 개념어 사전》을 배움책으로 삼는다면 생태와 환경을 놓고 ‘지식 쌓기’는 할 수 있으나, ‘삶 다스리기’는 할 수 없습니다. 생태와 환경 이야기란 지식을 쌓으려고 알아보는 갈래가 아닌 만큼, 지식을 쌓으려는 배움책으로 《생태학 개념어 사전》을 만나려 한다면, 차라리 이 책을 안 읽느니만 못합니다.


.. 우선순위의 방향을 경제에서 생태로 전환해야 한다 … 땅 일부를 야생 지역으로 남겨 두면, 인간이 간섭하지 않은 땅이 얼마나 아름답고 풍성한지 언제라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  (190, 206쪽)


 그런데, 책을 덮으며 여러모로 아쉽다고 느낍니다. 《생태학 개념어 사전》이 모자라거나 어리숙한 책이라서 아쉽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번역이 그리 깔끔하지 못하며, 우리 말법과 말투에 알맞지 못한 대목이 많습니다. ‘쉽고 바르게’라는 잣대가 아니라, 우리 삶터에 발맞추는 말과 글이 못 되었으며, 우리 겨레 문화와 발자취를 곰곰이 되돌아보도록 돕는 말과 글이 아니 되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이 책 하나만 번역이 아쉽지 않습니다. 오늘날 수많은 번역책들은 우리 말과 글을 옳게 살피지 않고 쏟아집니다. 외국말은 훌륭히 잘할는지 모르나 우리 말은 너무도 형편없이 못하는 분들이 번역일을 하고 있느라, ‘참 좋은 책’이 우리 말로 옮겨지기는 하지만, ‘참 좋은 모양새’로 태어나지는 않습니다.

 좋은 책에 담긴 좋은 이야기를 좋은 넋을 살리는 좋은 말로 풀어내기란 아직까지 우리 나라에서 대단히 힘든 노릇일까요. 좋은 책을 좋은 말로 엮어내며 좋은 삶을 보여주고 좋은 생각을 어깨동무하기란 우리 터전에서는 참으로 어려운 노릇일까요. 아무쪼록, 앞으로는 우리네 지식인들이 우리 땅과 삶과 사람과 목숨에 걸맞는 ‘생태환경 이야기책’을 즐겁고 알차게 묶어낼 수 있으면 좋겠다고 꿈을 꿉니다. (4342.12.24.나무.ㅎㄲㅅㄱ)


 ┌ 《생태학 개념어 사전》(에코리브르,2009)
 ├ 글 : 어니스트 칼렌바크 / 옮긴이 : 노태복
 └ 책값 : 1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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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하고 소박한 삶 - 아미쉬로부터 배운다 타산지석 12
임세근 지음 / 리수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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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 하나 129 ― 아름다운 삶을 찾아 ‘돈ㆍ이름ㆍ힘’ 버리기
 : 임세근, 《단순하고 소박한 삶》



- 책이름 : 단순하고 소박한 삶
- 글 : 임세근
- 펴낸곳 : 리수 (2009.9.28.)
- 책값 : 15900원



 (1) 내가 선 삶자리를 돌아보며


 날마다 되풀이하는 ‘아기 옷가지 빨래’는 더미더미입니다. 갓난아기일 때에는 날마다 서른 장이 넘는 기저귀를 빨아야 했고, 이제는 기저귀 빨래가 반이 못 되게 줄었으나 다른 옷가지 빨래가 넘칩니다. 오줌가리기를 할 무렵인 터라 아침부터 밤까지는 기저귀를 풀며 지내다 보니, 바지에 오줌을 싸든 마루나 방에 오줌을 지르든 하면서 옷가지 빨래와 걸레 빨래가 끊이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아기한테 젖떼기밥을 먹일 무렵이니 아이 키우기에 가는 손은 더없이 바쁩니다. 지난날 어머니들이 아이 키우고 집살림 도맡고 논일이며 밭일까지 함께 해낸 삶자락을 돌아본다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식구가 맡은 몫은 우습다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난날 어머니들한테는 당신 다른 삶이 아무것 없었습니다. 온통 일에 일뿐이었고 다른 자리에 눈둘 틈을 주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남자 어른만 세상일을 돌보도록 하려고 여자 어른한테는 끊임없고 끝없는 일을 지나치게 무겁도록 얹어 놓지 않았나 싶습니다. 밥하기 옷짓기 빨래하기 집치우기 살림하기 아이보기 농사일 …… 이러한 일을 남자 어른이 하도록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남자 어른 가운데 이 모든 집일을 스스럼없이 떠맡거나 어려움없이 잘 해낼 사람이 얼마나 있었을까요.

 집일은 우습게 여기고 바깥일은 높이 섬기는 오늘 우리 삶터입니다. 어려운 말로 ‘가사노동 인정’을 안 합니다. ‘회사원이나 공무원이 되어 돈을 버는 일’만 받아들입니다. 회사원이나 공무원이 되어 돈을 버는 일이라고 수월하기만 하겠습니까. 그런데 이와 같은 일을 얼마나 집일에 댈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집살림 가운데 다문 한 가지라도 얼마나 해낼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실을 잣고 물레를 돌려 천을 낸 다음 바느질을 하여 옷을 짓는 일을 오늘날 어느 누가 치를 수 있겠습니까. 솜을 틀고 이불을 누비며 빨고 다리고 하는 일을 요즈음 어느 누가 치를 수 있겠습니까. 끼니때마다 절구를 빻고 키질을 한 다음 쌀을 일어 안치고 찬거리를 마련하는 일을 요사이 어느 누가 옳게 치를 수 있겠습니까.

 이제 수많은 기계가 나와 집일 짐을 많이 줄였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빨래기계 밥기계 청소기계가 나온 뒤로 집일 부피는 조금도 줄지 않습니다. 그만큼 더 자주 빨래를 하고 더 자주 온갖 밥을 차리며 더 자주 집 안팎을 치워야 합니다. 지난날 우리들은 그야말로 수수한 밥차림이었습니다. 김치 한 조각만 있든 나물 한두 가지만 있든, 콩밥에 국 한 가지만 마련하든 더없이 수수한 밥차림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밥차림은 요리책을 보며 궁중음식을 배우느니 서양음식을 배우느니 하며 수없이 많은 반찬을 올리도록 합니다. 이에 따라 접시며 밥그릇이 수북하고, 네 식구 살림만 하여도 설거지감이 가득합니다. 집 치우기란 날마다 해야 하는 노릇이라지만, 서로서로 더 넓은 평수 더 큰 집에서 살면서 청소 시간으로 퍽 오래 잡아먹습니다. 아이한테 옳은 삶 착한 마음 바른 몸가짐을 가르치는 어버이는 자취를 감추고, 학원에 보내는 어버이만 늘어납니다. 아이들한테 ‘좋다는 책’을 읽히는 일은 나쁘지 않으나, 아이들한테 ‘어버이로서 좋은 삶을 보여주는’ 일은 찾아보기 몹시 어렵습니다. 아빠나 엄마 되는 분들 모두 집밖에서 돈을 벌거나 다른 일을 하느라 바쁩니다.

 수수함을 잃으며 누리는 물질문명입니다. 수수함을 버리며 즐기는 기계문명입니다. 수수함을 팽개치며 받아들이는 소비문명입니다. 수수함을 등돌리며 껴안는 자본주의 문명입니다.

 오늘 아침에도 어김없이 지난 밤 사이 쌓인 기저귀와 아기 옷가지를 빨래합니다. 미지근한 물을 받으며 빨래를 하는 동안 ‘예전에 혼자 살 때에는 찬물로 빨래를 했잖아? 이제는 미지근한 물로 빨래를 하니 얼마나 나아진 삶이냐?’ 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다가 ‘나는 나대로 이렇게 사는 데에 바쁘고 힘들어 잘 먹고 돈 많다는 사람들 삶을 생각할 수 없구나?’ 하고 느낍니다. 거꾸로 잘 먹고 돈 많다는 사람들은 당신들 나름대로 돈굴리기와 집키우기나 다른 여러 가지로 바쁘고 힘들어 낮은자리에서 가난하고 고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생각할 수 없겠다고 느낍니다.

 꼭 돈이 많고 적음이 아니라, 무엇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갈리리라 봅니다. 가난한 사람이면서 가난한 이웃을 생각하지 못하는 삶이 있습니다. 돈 많은 사람이지만, 돈 많은 이웃이 아닌 가난한 이웃을 생각하는 삶이 있습니다. 스스로 수수하고 낮게 고개숙이면서 살아가는 사람은 수수하고 가난하면서 사랑스러운 이웃을 생각합니다. 스스로 거들먹거리며 이름값과 돈힘을 키우는 사람은 언제나 이름값과 돈힘이 대단한 사람을 이웃으로 삼으려 하겠지요.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책을 좋아하는 벗을 사귀고, 자전거를 즐기는 사람은 자전거를 즐기는 동무를 사귑니다. 땅장사 좋아하는 사람은 땅장사 좋아하는 이웃을 둘 테고, 자동차를 사랑하는 사람은 자동차를 사랑하는 사람하고 가까이 지내겠지요.
 





 (2) 아미쉬 사람들 삶자리를 헤아리며


 《단순하고 소박한 삶》(리수,2009)이라는 책을 읽습니다. 이 책을 읽기 앞서 《Amish Country》(1988)라는 사진책을 읽으며 아미쉬 사람들 삶을 돌아보았고, 《Nicole visits an Amish farm》(1985)이라는 어린이책을 만나며 아미쉬 사람들 삶자락을 좀더 깊이 살펴보았습니다. 번역일 하는 선배가 알려주어 《Amish Country》를 일찍부터 읽을 수 있었는데, 선배는 제 짧은 영어라 할지라도 찬찬히 읽어 보라며 이 책을 건네주었고, 이 책을 살피면서 ‘다른 삶’이 아닌 ‘좋은 삶’을 생각하면서 당신(어른)들 스스로 좋은 삶을 꾸리려 하고 당신 아이들한테 좋은 삶을 물려주려고 하는 아미쉬 삶자락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고 몇 해 뒤 헌책방에서 《Nicole visits an Amish farm》을 읽으며 아미쉬 마을을 더 깊이 들여다볼 수 있었는데, 저처럼 돈없는 사람한테는 헌책방마실을 하며 나라밖 책을 만나는 일이 ‘비행기 타고 나라밖 나들이 떠나는 일’과 같습니다. 몸소 아미쉬 마을을 찾아가 보지 못하지만, ‘니콜’이라는 흑인 여자아이가 아미쉬 마을에 사는 동무를 찾아가 어떻게 지내는가를 겪는 모습을 슬쩍 엿보면서 ‘이렇구나’ 하고 살짝이나마 깨닫습니다. 아무래도 어린이 눈높이에서 다가서려는 이야기책이 좀더 또렷하면서 손쉽게 ‘아미쉬 사람 삶’을 한눈에 보여줄 테니까요.

 그러나, 나라안에서는 이처럼 나라밖 영어로 된 책 아니면 아미쉬 삶을 읽을 길이 없어 아쉬웠습니다. 저야 헌책방마실을 하며 한두 가지 책을 만나서 읽는다지만, 아미쉬 삶을 좀더 많은 우리 이웃들이 읽고 생각하면서 우리 삶을 돌아본다면 우리 터전을 차근차근 가다듬으면서 새롭게 갈고닦을 수 있으리라 보았거든요.

 그나마 아미쉬 삶을 겉훑기로 아는 사람들은 “아미쉬 사람들은 일반인들과 이웃하여 아주 자연스럽게 어울리며 살아가고 있(187쪽)”는 줄 제대로 모르는 일쑤입니다. 아주 외따로 떨어진 채 살아가는 줄 아는 사람이 많습니다. 전기와 전화와 셈틀을 쓰지 않는 이들이 “‘과학의 발전’이 곧 ‘보다 좋은 삶의 질’을 의미하지 않는(208쪽)”고 여기기 때문임을 헤아리는 사람은 얼마 없습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 나라 사람들이 아미쉬 마을을 제대로 모르는 품새는 이 땅에서 옳고 바르게 살아가려는 사람들을 제대로 모르는 품새와 매한가지입니다. 진보니 개혁이니 하는 품새가 아닌 슬기롭고 아름다우면서 낮고 수수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바보’나 ‘미친사람’쯤으로 하찮게 여기는 품새하고 마찬가지입니다.

 돈이 있어 땅 사고 집 사서 시골로 가는 삶이 아닌 마음과 땀방울과 삶으로 시골살이를 하려는 사람들 넋을 읽지 않는 품새하고 똑같습니다. 더 많은 돈을 벌며 더 많이 나누고 살겠다는 품새가 아닌, 조금밖에 못 버는 살림이더라도 늘 푼푼이 나누고 스스로 아끼면서 살겠다는 품새를 읽지 못하는 흐름하고 닮았습니다.

 아미쉬 사람들은 오늘날 물질문명하고는 거의 담을 쌓은 채 지내지만 ‘문명과 아예 담을 쌓지 않’습니다. 당신들이 좋은 삶을 꾸릴 수 있을 만하면서 당신 아이들한테 좋은 삶을 물려줄 수 있는 테두리를 지킵니다. 당신들이 아름답게 삶을 일굴 수 있는 자리에서 당신 아이들한테도 아름답게 새 삶터를 일굴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도록 어우러집니다. 좋으며 즐겁고, 아름다우면서 기쁜 삶을 찾자고 하는 ‘믿음두레’가 아미쉬 사람들이 예부터 이어받고 물려주면서 가꾸는 마을입니다.
 





 (3) 거듭 읽는 마디마디


 반갑게 읽은 책을 덮고 옆지기한테 건네주었습니다. 끝까지 다 읽은 옆지기는 책 뒤쪽(4부)에 실린 ‘아마쉬 여러 계파 역사와 문화’가 지루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저도 《단순하고 소박한 삶》 뒤쪽에 실린 지식조각은 그리 재미있지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우리 나라에는 낯선 아마쉬 마을 이야기이기 때문에 이 같은 지식조각을 실을 수밖에 없었겠지만, 좀더 단출하게 줄이거나 아예 ‘부록’으로 밀어넣었다면 더 좋지 않았으랴 싶습니다. 이보다는 아미쉬 사람들 여느 삶을 다루는 데에 자리를 더 내주었으면 어떠했을까 싶습니다. 아미쉬 사람들은 ‘지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닌 ‘온몸을 사랑과 믿음에 바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니까요. 잘난 척하지 않고 수수하게 살아가는 사람이면서, 책과 학교와 겉멋과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 스스로를 더 낮추려고 하는 사람이니까요.

 저와 옆지기가 함께 읽으면서 좋았다고 느낀 대목을 밑줄을 긋고 거듭 다시 읽어 봅니다. (4342.12.13.해.ㅎㄲㅅㄱ)
 







[26, 54쪽] 아마쉬 사람들은 거울을 가까이하지 않는다. 용모를 가꾸고 치장을 하는 일을 금하고 있기에 외모를 뽐내기 위한 목적으로 거울을 들여다보지 않는다. 그 대신 그들만의 거울이 있다. 그게 바로 조상들이 흘린 피로 얼룩진 ‘순교자의 거울’이요, 일상을 통하여 마음과 정신을 비추고 가다듬는 일깨움의 거울이다 … 그때 나는 아미쉬 공동체에는 교회가 없고 돌아가며 교인들 집에서 예배를 보며, 예배당처럼 보이는 작은 건물들은 아미쉬 공동체의 학교라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교회가 없으니 십자가를 높이 올린 뾰족한 종탑이 있을 리 없고, 벽이나 천장, 창문 곳곳을 장식한 성화가 있을 리 없다. 은은히 들려오는 예배당의 종소리마저도 아미쉬 마을에서는 들을 수가 없다. 뿐만 아니라, 신학교에서 전문 교육을 받은 성직자가 없고, 위엄을 갖춘 설교연단도 볼 수 없다. 오르간과 성가대도 없고, 화음에 맞추어 부르는 찬송가도 들리지 않는다. 헌금을 하지 않고 성경 공부를 위한 별도의 모임도 없다. 전도를 하지 않고 선교 활동도 지원하지 않기에 그들의 공동체에는 전도사도 없고 선교사도 없다.

[28, 56, 86쪽] 끊임없이 이어지는 전쟁, 살인과 폭력 그리고 마약, 가정 파괴, 낙태와 동성애, 퇴폐 행락 등의 비도덕적 행각이 범람하는 바깥세상은 여전히 그들의 종교적 순수함을 해치는 사악한 사람들의 세상이었다. 이것은 그들이 공동체 밖 이교도들을 경계하며 바깥세상을 향해 둘러친 울타리를 더욱 높이고 튼튼히 하려는 이유이기도 하다 … 그들은 그 어떠한 공격을 받더라도 폭력을 휘두르거나 무력에 의존하지 않으며 보복도 하지 않는다. 군 징집에 응하지 않고 억울한 일을 당해도 법적 소송을 제기하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은 바로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로 ‘용서’를 일깨운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본보기가 되고 있다 … 나는 지금까지 아미쉬 사람들을 접하면서 그들로부터 ‘내 종교가 무엇인지? 교회에 나가는지?’ 등의 질문을 단 한 번도 받아 본 적이 없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믿어야 한다고, 교회에 나가 구원을 받으라는 권유도 들어 본 적이 없다. 하지만 나는 언제부턴가 메리 아줌마와 다니엘을 비롯한 아미쉬 사람들로부터 감응을 받고 있다.

[35, 76, 106∼108쪽] 그들은 온당한 주의 주장을 믿고 따를 뿐, 그 어떤 사람의 명예를 드높여 영웅으로 만들거나 신격화하지 않는다는 점을 내비쳤다 … 그들은 일상생활에서 자녀들에게 아미쉬 교도로서의 삶의 가치와 율법을 보여주고 일깨울 뿐, 이를 평생의 삶의 길로 택하여 교회의 일원이 될 것인지의 여부를 결정하는 일은 전적으로 본인(아이)들의 의사에 맡긴다 … 아미쉬 공동체 사람들은 교회의 리더와 연장자를 존경하고 예우를 해 주고, 또한 교회 리더와 연장자는 평신도와 젊은이들을 존중하고 배려한다. 이는 강력한 권한을 가진 기구나 전문성을 가진 전담 조직 없이도 아미쉬 공동체가 평온하게 유지되고 있는 결정적 이유임이 분명하다 … 통일된 복장의 엄격한 규범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에 관해 명문화된 규정집이 없고, 옷을 짓는 요령에 관해 자세하게 설명한 지침서 하나가 없었다. 그들은 옷을 지으면서 어린 딸아이들이 옆에 앉아 지켜보게 하고 말로 일러 주면서 격식에 맞추어 옷을 만드는 방법을 하나하나 터득게 하는 방식으로 전수해 가고 있음이 분명했다.

[43∼45쪽] 그런 데다 인디언과의 전쟁, 독립전쟁, 남북전쟁 등 신대륙에서도 전쟁은 어김없이 이어져서 무저항 평화주의를 고집하며 참전을 거부하던 아미쉬 사람들에게 가혹한 시련이 닥쳤다 … 1930년대 시행된 고등학교 과정의 의무교육에 아미쉬 사람들은 반대하고 나섰다. 공동체 삶을 영위하는 데 중학교 과정을 넘어선 고등교육은 해가 된다고 판단한 아미쉬 사람들은 자체 교육 프로그램에 의한 학교 운영을 주장했다. 그들은 1971년 연방 대법원으로부터 자녀 교육에 대한 부모의 법적 권리를 얻어내기까지 주 정부로부터 피소를 당하고 벌금, 징역 등의 처벌을 감수했다 … 그들은 정부로부터 사회보장 혜택을 받지 않을 것임을 밝히며 세금 납부를 거부했고, 이로써 연방정부로부터 농지와 주택을 가압류당하고 밭을 갈고 있던 말과 농기구를 강제 경매 처분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123, 154∼156, 164∼165, 166쪽] 아미쉬 사람들은 부부 간에, 또는 부모와 자녀가 긴 시간 떨어져 있는 것은 아미쉬의 전통적 삶의 가치를 훼손하는 일이라고 여긴다. 아미쉬 학교는 ‘지적인 삶보다는 미덕의 삶’, ‘전문적 지식보다는 필수적인 기본 지식’, ‘개별적 경쟁보다는 공동체의 번영’, ‘외부 속세와의 융합보다는 분리’를 추구하는 공동체 삶에 필요한 교육을 구현하는 장으로 운영되고 있다 … 전날보다 향상하는 것을 학습의 목표로 하되 학생들 간에 경쟁심을 불러일으키거나 우열을 가리는 방법으로 학습 효과를 꾀하지 않는다 … 아미쉬 학교의 교사들은 학생들에게 숙제를 많이 내주지 않는다. 이는 방과 후에 집에 돌아가 갖가지 집안일을 해야 하는 학생들을 배려하는 것이다 … 관계 당국이나 외부에서 교사로서의 능력을 겸비할 수 있게 대학교 과정을 이수하라는 권유를 받기도 하지만, 그들은 아미쉬 학교에서 8학년까지 마치고 올바른 삶을 살며 바르게 전수할 수 있으면 족하다고 판단하여 외부의 교사 양성 과정 이수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148쪽] 검소하게 사는 아미쉬 공동체 사람들의 농가나 달리는 마차에 강탈할 만한 값진 물건이 있을 리가 없는데도 아미쉬 공동체 사람들이 좀도둑의 목표가 되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우선 아미쉬 공동체 사람들의 집에는 담이나 울타리가 없고 대문도 없다. 문을 걸어 잠그지도 않는다. 나아가 감시카메라나 경보 장치는 생각할 수도 없다.

[216쪽] 자동차는 개인주의, 자율, 속도, 자유, 이동성을 불러왔으며, 이에 더하여 사회적 신분을 구분하는 또 하나의 상징이 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아미쉬 공동체 사람들에게는 전통적 삶의 가치관에 어긋나는 위해 요소가 되기에 충분했다. 자동차를 허용할 경우 손쉽게 공동체를 벗어나 바깥세상으로 나갈 수 있고, 빨리 움직이는 기동성의 매력에 빠져 생활의 속도가 빨라지고, 개인주의와 자기 과시욕에 들뜨는 등 교도들을 통제하기가 어려워진다. 나아가 분명 공동체의 겸손, 평등, 결속의 전통적 가치가 훼손될 것이었다.

[257쪽] 가족이 모두 모여 세 끼 식사를 함께하는 것을 가정생활의 기본으로 삼고 있는 아미쉬 가정에서 가장이 도시락을 들고 나가 하루 종일 가족과 떨어져 있는 것 자체가 문제를 야기하는 원인이라고 보는 것이다. 농사일을 하면서 어린 자녀를 데리고 다니고, 텃밭을 일구는 어린 딸아이에게 호미를 쥐어 주어야 할 아빠와 엄마를 아미쉬 가정의 어린 자녀들로부터 빼앗아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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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유의 역습 - 당신이 몰랐던 우유에 관한 거짓말 그리고 선전
티에리 수카르 지음, 김성희 옮김 / 알마 / 2009년 10월
평점 :
절판




 우유가 나쁜 줄 모르는 당신은 바보
 [애 아빠가 오늘 읽은 책 15] 티에리 수카르, 《우유의 역습》



 지난 2003년에 《오래 살고 싶으면 우유 절대로 마시지 마라》(이지북,2003)라는 책이 나온 적 있습니다. 책이름 그대로 우리들한테 ‘오래 살기를 바라’는지 ‘오래 안 살아도 먹고픈 대로 먹으며 살기를 바라’는지를 묻는 책입니다. 이 책이 얼마나 읽혔는지 알 길이 없으나, 이 책을 읽고도 우유 마시기를 이어가는 사람이 있을 테고, 이 책을 안 읽었어도 우유를 안 마시는 사람이 있으리라 봅니다. 그러나, 우유를 안 마시는 사람보다는 우유를 마시는 사람이 훨씬 많습니다. 더욱이 오늘날 새로 태어나는 아이들은 병이나 팩에 담긴 우유를 비롯해 가루를 낸 우유까지 먹고 있습니다. 이와 함께 요구르트를 마시고 숱한 유제품을 먹으며 우유를 넣은 빵과 과자를 먹습니다. 우리 둘레에 우유가 섞이지 않은 먹을거리는 거의 없다고 할 만합니다.


.. 어쨌든 피에르 망데스 프랑스 총리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자. 책임감 있고 똑똑한 정치인들이 어째서 유제품이 물, 과일, 채소만큼이나 건강에 필수적인 음식이라고 믿고 국민들까지 설득하게 된 것일까? ..  (34쪽)


 우리가 사서 마시는 우유에는 ‘성분 표시’가 따로 있지 않습니다. 100% 원유로 되어 있다고 적혀 있습니다. 이렇게 100% 오로지 원유라 한다면, 또다른 대목에서 궁금합니다. 우리가 마시는 우유를 빚어내도록 해 주는 젖소는 무엇을 먹으면서 살고 있는지, 어떤 물을 마시고 있는지. 어느 소우리나 들판에서 날마다 어떤 삶을 꾸리고 있는지. 젖소는 사료를 먹는지 풀을 먹는지. 젖소가 사료를 먹는다고 할 때에는 사료에 무엇이 들어가 있는지. 젖소가 먹는 항생제는 얼마나 되며, 젖소가 짚이나 풀을 먹는다고 할 때에 이 짚과 풀은 어디에서 거두어들인 짚이나 풀인지. 이 짚과 풀에는 농약이나 풀약 들이 얼마나 묻어 있는지.

 우유보다 두유가 좋다고 하며 콩물을 사다 마시는 사람이 제법 많습니다. 그러나 우유를 사서 마시든 두유를 사서 마시든 이와 같은 마실거리에 ‘어떤 첨가물’이 들어 있는지를 낱낱이 살피는 사람은 드뭅니다. 과일에서 짜낸 물을 담았다는 과일주스이든 콜라이든 매한가지입니다. 우리는 ‘공장에서 만들어서 가게에서 파는 마실거리’가 어떠한 재료를 어떻게 다루어서 어떻게 내놓는지를 궁금해 하지 않습니다. 어쩌다가 텔레비전에 나온다든지, 이렇게 책으로 나와 주어야 비로소 한 번 들여다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한 번 들여다본 다음에 잊습니다. ‘맛있는걸’ ‘나는 좋은걸’ ‘그러거나 말거나 내 몸이 아프지 않은걸’ ‘나중에 아프면 병원에 가면 되는걸’ …….

 생각줄기를 더 이어 본다면, 우유가 들어간 먹을거리라는 유제품은 어떤 우유를 어떻게 다루어 넣었는가를 알기 어렵습니다. 빵집에서 파는 우유식빵에는 어떤 우유를 쓸까요. 가게에 잔뜩 쌓여 있는 과자에는 어떤 우유를 쓸까요. 초콜릿에는 어떤 우유를 쓸까요. 밥집에서 마련해 주는 밥에는, 술집에서 장만해 주는 안주에는 어떤 우유가 들어갈까요.


.. 막대한 규모의 시장이 문을 열었다. 바로 아이들을 겨냥한 시장으로, 그 시작은 유아를 대상으로 했다. 당시 농산업계로서는 전략적인 공략이었는데, 어릴 때 얻은 식습관은 평생 지속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을 노린 것이다 … 1920년대 말부터 영국의 우유 생산업자들은 ‘우유를 알리기 위해’ 학교에 저렴한 가격으로 우유를 공급하기 시작했고, ‘영양실조를 없애기 위해 애쓸 것’을 약속했다 ..  (37, 39쪽)


 좀더 따지면, 우유 하나만 헤아릴 노릇이 아닙니다. 우유보다 훨씬 많이 먹는 우리들 쌀밥을 곰곰이 헤아려야 합니다. 우리 땅 논밭에서 농약이나 풀약이나 비료나 항생제를 쓰지 않고 농사를 짓는 땅은 얼마나 될까요. 우리 나라 농협은 농사꾼이 비료와 농약을 쓰라고 하는가요, 안 쓰라고 하는가요.

 겨울을 앞두고 김장을 하는데, 김장에 쓰는 배추는 또 어떠한 배추이겠습니까. 약과 비료와 항생제 없이 거두고 있는 배추입니까, 무입니까, 고추입니까. 시금치며 상추며 깻잎이며, 이와 같은 푸성귀에는 어떠한 약품이나 방부제나 항생제가 어느 만큼 깃들어 있을까요.

 곡식과 푸성귀 말고, 가공식품은 어떠한지를 따지기도 해야 합니다. 과자 한 봉지에, 또 커피 한 봉지에, 또 감기약 한 봉지에는 어떠한 화학성분이 깃들어 있겠습니까. 우리가 아이들한테 맞도록 하는 예방주사는 ‘생약’일까요, ‘화학약’일까요. 예방주사는 어떠한 성분을 어떻게 엮어서 만들고 있을까요.

 며칠 앞서 ‘빼빼로 날’이라고 했습니다. 이 빼빼로 날에 과자 빼빼로를 서로서로 주고받곤 하는데, 우리들은 과자 빼빼로를 주고받으면서 ‘빼빼로 하나에는 어떤 성분이 들어가 있는지’를 생각해 보고 있겠습니까. 성분을 하나하나 꼼꼼하게 살피고 나서도 기쁘게 선물을 할 수 있겠습니까.


.. 그들은 우유 섭취량이 확인된 약 4만 명의 남성과 여성에 대한 자료를 수집했고, 사람들의 답변을 골다공증 골절의 위험과 연결지어 검토했다. 그런데 연구진을 놀라게 하는 결과가 나왔다. 골절 위험과 관련해서 우유 애호가들과 우유를 전혀 혹은 거의 마시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었던 것이다 … 아이들 대부분은 그(우유에 들어 있는) 단백질을 제대로 소화하지만 일부는 주로 유전적인 이유로 소화해내지 못한다. 소화되지 못한 단백질 조각들은 혈액 속으로 유입되는데 면역계는 그것을 침입자로 인식하고 파괴에 들어간다. 그런데 그 단백질의 일부가 인슐린을 만드는 췌장 세포와 닮아 있는 까닭에 면역계는 착각하여 췌장 세포까지 파괴해 버린다. 그 결과 아이는 인슐린을 분비할 수 없게 되어 제1형 당뇨병에 걸리는 것이다 ..  (111∼112쪽)


 누구나 알듯, 우유란 소젖입니다. 소젖이란 어미소가 송아지가 잘 자라도록 내어주는 밥입니다. 사람은 사람젖이 나와서 아기를 먹여살립니다. 사람은 엄마젖으로 아기를 키웁니다. 사람한테서 나오는 사람젖은 어린이가 자라나는 데에 도움이 되는 영양이 골고루 담겨 있습니다. 소젖에는 마땅하게도 송아지가 잘 자라도록 도움이 되는 영양이 골고루 담겨 있습니다.

 사람은 천천히 자랍니다. 소는 빨리 자랍니다. 송아지는 어미소 배에서 바깥으로 나오면 곧바로 섭니다. 사람은 엄마 배에서 밖으로 나와도 곧바로 서지 못합니다. 거의 돌이 지나야 비로소 서며, 걸을 때까지 퍽 걸립니다. 사람한테서 나오는 젖은 아기가 알맞게 자라도록 이끕니다. 하루아침에 선다든지 뛴다든지 하도록 영양을 내어주지 않습니다. 차근차근 사람 삶에 걸맞게 영양을 내어줍니다. 이와 달리 소젖은 송아지한테 영양을 퍽 빨리 내어줍니다.

 《우유의 역습》이나 예전에 나온 《오래 살고 싶으면 우유 절대로 마시지 마라》라는 책에서도 다루지만, ‘빨리빨리 우쑥우쑥 크도록 이끄는 우유’이기 때문에, 이와 같은 우유를 마시면 ‘사람도 송아지마냥 좀더 빨리 더 크게 자랄’ 수 있으나, 이렇게 빨리 더 크게 자라는 만큼, ‘사람한테 알맞춤한 흐름에 따라서 자라지 않는’ 탓에 뜻하지 않게 병치레를 할 수 있다고 걱정합니다. 더디 자라며 더디 살기에 백 살 안팎으로 살아가는 사람인데, 빨리 자라며 빨리 살아가는 우리들로 바뀐다면, 우리 앞날이 어찌 될는지는 뻔한 노릇입니다. “인구 집단별 연구들은 우리에게 간단명료한 한 가지 정보를 알려준다. 바로 우유와 동물성 단백질을 적게 먹는 나라일수록 국민들이 더 건강한 뼈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우유를 거의 마시지 않는 나이지리아의 경우, 식물성 단백질에 대한 동물성 단백질의 비율이 독일에서 조사된 비율보다 10배 더 적고 대퇴골 경우 골절 발생율은 99%나 낮다(100쪽)”는 이야기를 굳이 읽지 않더라도, ‘우유의 역습’이 아니라 ‘우유가 보여주는 결과’는 훤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가난한 나라를 돕는다고 하면서 아이들한테 우유를 마시도록 합니다. 지난날 우리 나라가 무척 가난하다고 했을 때에도 우리 아이들은 우유를 마시면서 자라야 했습니다. 저 또한 국민학교 다닐 때에 학교에서 ‘거의 의무’처럼 우유값을 학교에 내고 날마다 받아서 마셔야 했습니다. 속에서 우유가 받지 않는 아이들마저 우유를 억지로 마시도록 했고, 우유를 마시고 속이 얹히거나 재채기가 끊이지 않아도 반드시 마시도록 했습니다. 이무렵 어느 누구도 ‘우유를 마셔야 키가 크고 튼튼해진다’고만 이야기를 들었으며, 어버이나 교사 또한 ‘우유를 안 마시면 안 된다. 적어도 우유라도 마시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 한 가지 의문이 더 생긴다. 유제품을 먹으면 살이 빠진다고 계속해서 단언하고 있는 네슬레를 비롯한 유제품 기업 연합의 구성원들과 영양학자들에게 책임을 묻는 의사 단체가 왜 이제는 하나도 없는 것일까? 보건 당국과 소비자 보호 및 불공정 거래 감시국의 방관은 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 ..  (204쪽)


 사람에 따라서는 우유가 몸에 잘 맞을 수 있습니다. 또한, 식품첨가물이나 화학조미료나 화학성분이 들어간 마실거리라 하더라도 몸에 잘 받으며 맛있고 즐겁게 마시는 사람이 있습니다. 농약을 쳤든 비료를 먹였든 ‘엄마가 해 주는 밥’이면 다 맛있다는 이야기를 흔히 듣습니다. 농담처럼 주고받는 말이지만, 어느 모로 보면, 우리 아이들한테는 우유 한 잔보다 ‘자동차 배기가스’ 한 모금이나 ‘담배연기’ 두 모금이 몸에 훨씬 나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참과 거짓을 제대로 따져 본다면, 우유를 비롯해 배기가스와 담배연기 모두 나쁩니다. 어느 한 가지만 나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뿐 아니라 우리 아이들한테 ‘나쁜 것은 되도록 줄여’ 주어야지, ‘더 나쁜 것도 늘 마시는데 이거 하나 더 얹는다고 달라지거나 더욱 나빠지겠어?’ 하는 매무새여서는 안 됩니다.

 또한, 우유는 우리 삶터에 ‘역습’하듯 불쑥 고개를 들이밀지 않았습니다. 처음 소젖을 사람한테 먹이려 했을 때부터 ‘부작용’이나 ‘반작용’은 어림할 수 있던 일입니다. 논밭을 밀고 아파트를 지을 때, 산을 깎고 고속도로나 공장을 세울 때, 갯벌을 메워 공항을 닦을 때, 우리 자연 삶터가 더러워지며 우리 사람 삶터 또한 나빠질 수밖에 없음을 모르는 이란 없습니다. 꼬리치레도룡뇽이나 맹꽁이 한 마리만 사라지지 않습니다. 꼬리치레도룡뇽이 살 수 없는 만큼 우리들 또한 살 수 없는 터전이 됩니다. 맹꽁이 한 마리 뿌리내릴 수 없는 만큼 우리들이 마시는 바람과 물은 끔찍하게 더럽혀지고 매캐해집니다.

 자가용하고 헤어지지 못하는 분들은 더 많은 돈을 벌어야 하고, 더 많은 일을 해야 하고, 더 많은 사람을 만나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틀리지 않은 말입니다. 장사를 하고 영업을 하고 무엇무엇을 하는데 자가용을 안 몰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자가용을 몰면서 더 많은 돈을 벌고 더 높은 이름값을 얻는 만큼, 우리는 우리 자연 삶터를 망가뜨리거나 더럽힙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자연 삶터를 망가뜨리거나 더럽히면서 시나브로 우리 사람 삶터를 나란히 더럽히거나 망가뜨립니다.

 우유 한 잔? 뭐, 마셔도 좋고 안 마신다면 더 좋습니다. 우유를 마셔야 하느냐 안 마셔야 하느냐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우리 삶을 얼마나 속깊이 들여다볼 수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삶을 어떻게 가다듬으며 우리 발걸음과 몸짓을 고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바라는 대로 살기 마련입니다. 돈을 더 벌고 싶다면 돈을 더 벌면서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돈을 더 버는 만큼, 더 아름답게 살지는 못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더 아름답게 살고 싶다면 돈은 덜 벌밖에 없습니다. 이웃하고 더 사랑을 나눈다든지 내 아끼는 고운 님하고 더 사랑스럽게 어울리고 싶다면, 이때에도 돈은 덜 벌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아주 마땅하지만 돈을 더 바란다면 내 아이와 옆지기하고 보내는 시간은 줄어듭니다. 내 동네를 살피거나 내 고향마을을 돌아보는 겨를은 마련하기 힘듭니다. 내 몸이나 마음을 살필 틈조차 줄어들고, 내 어버이나 스승을 찾아가 인사를 여쭙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눌 느긋함마저 마련하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길은 하나입니다. 두 갈래 길에서 어느 갈래로 가느냐입니다. 내 삶을 사랑하면서 살겠습니까? 돈을 더 사랑하면서 살겠습니까? 우리 아이를 더 아끼며 살겠습니까? 우리 아이한테 입힐 옷과 먹을 밥과 지낼 집과 다닐 학교를 더 생각하며 살겠습니까? 우리가 걷는 길에 따라서 ‘우유와 우리 삶’ 이음고리는 달라지고, 우유는 일찌감치 우리 삶을 파고들며 좀먹고 있었음을 뒤늦게나마 깨달을 수 있습니다.


.. 내가 하는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하길 바란다. 식사를 즐겁게 만들어 주는 요구르트와 치즈, 우유에 대해서는 나도 찬성이다. 나는 포도주 한 잔에 신선한 핸드메이드 치즈를 곁들여 먹는 걸 누구보다도 좋아하는 사람이다. 유제품을 소화해 내고 면역계가 거부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면 하루에 하나쯤 먹는다고 해가 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니까 즐거움을 위해 먹는 거라면 괜찮지만 의무적으로 먹지는 말라는 것이다. 건강을 위한다는 핑계로 사람들에게 그토록 많은 유제품을 먹도록 계속 권장하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라고 본다 ..  (머리말)


 《우유의 역습》이라는 책을 덮으며 생각합니다. 우유가 어떤 마실거리인지를 일찌감치 알고 있던 분한테는, 또 지난 2003년에 나온 《오래 살고 싶으면 우유 절대로 마시지 마라》를 읽은 분한테는 하나도 새삼스럽지 않은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또한, 예방접종이나 가공식품이나 화학조미료나 식품첨가물 문제를 일찍부터 헤아린 분한테는 조금도 새롭지 않은 이야기일 뿐입니다. 더구나, 이 책은 우리 나라 이야기가 아니라 프랑스 이야기입니다. 이 책에는 ‘한국 형편’을 다루는 부록이 따로 실려 있지 않습니다.

 우유란 ‘완전한 마실거리나 식품’이 아니지만, 《우유의 역습》이라는 책 또한 ‘완전한 책’이 아닙니다. 그저, 우유가 어떠한 마실거리인지 제대로 모르는 분들한테는 놀랄 만한 이야기가 됩니다. 덧붙여, 우유가 어떻게 우리 삶터 구석구석 스며들어 이렇게 널리 마시도록 하는지를 살피지 않았던 분들한테는 끔찍하다고 여길 만한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4342.11.18.물.ㅎㄲㅅㄱ)


 ┌ 《우유의 역습》(알마,2009)
 ├ 글 : 티에리 수카르 / 옮긴이 : 김성희
 └ 책값 : 1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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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앗은 힘이 세다 - 앙성댁 강분석이 흙에서 일군 삶의 이야기
강분석 지음 / 푸르메 / 2005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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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 하나 122 ― 사랑씨 없는 도시사람이 되어 간다지만
 : 강분석, 《씨앗은 힘이 세다》


- 책이름 : 씨앗은 힘이 세다
- 글 : 강분석 (http://www.angsung.com)
- 펴낸곳 : 푸르메 (2006.5.19.)
- 책값 : 9000원



 (1) 서울 같은 큰도시에서 찾는 씨앗


 사람은 누구나 씨앗 하나 품고 있다고들 이야기합니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어버이한테서 목숨을 받아 태어날 때부터 씨앗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으로 태어날 목숨씨를 아버지와 어머니한테서 함께 받습니다. 어느 한쪽 씨앗만으로는 우리가 태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먹는 모든 곡식에는 씨눈이 있습니다. 이 씨눈이 트고 자라며 더 많은 열매를 맺어 우리 밥상에 오릅니다. 쌀과 보리뿐 아니라 콩과 팥 또한 씨앗이며 곡식입니다.

 우리가 먹는 모든 고기에도 씨앗이 있습니다. 사람이 어버이한테서 목숨씨를 얻듯 짐승 또한 제 어미한테서 목숨씨를 얻습니다. 그저 우리들 거의 모두 언제나처럼 ‘토막토막 잘게 썰린 채 불에 익히기를 기다리는’ 고깃점만 보거나 밥집에서 다 익혀 놓은 고깃점을 받아들일 뿐이라 살갗으로 못 느끼고 있을 뿐입니다.

 사람이든 푸나무이든 물뭍짐승이든 씨앗에서 비롯합니다. 씨앗에서 비롯하며 씨앗을 남깁니다. 씨앗에서 비롯하여 씨앗을 남기기까지 고이 삶을 꾸리는 한편, 다른 목숨한테 밥이 됩니다. 사람이든 푸나무이든 물뭍짐승이든, 저마다 목숨을 잇자면 다른 씨앗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다른 목숨을 내 몸에 삭여 새 기운을 얻어야 합니다. 홀로 살 수 없는 사람이요, 홀로 살지 못하는 푸나무요, 홀로 살아가지 못하는 물뭍짐승입니다. 우리가 자연을 지켜야 한다고 외칠 때에는 깨끗하고 아름다운 자연이 이어가도록 하자는 뜻일 텐데, 이 자연 지키기란 다름아닌 ‘먹이사슬이 흐트러지지 않게끔 다양성을 건사하는 일’입니다. 사람만 배불리 먹는다든지, 사람 가운데 몇몇 겨레나 나라만 배터지게 먹는다든지 하지 않게끔, 알뜰살뜰 올바르게 추스르자는 소리입니다.

 그런데 우리 삶터는 어떻습니까. 우리 삶터는 서로가 서로를 지키거나 보듬거나 껴안거나 사랑하는 삶터인지요? 우리 삶터는 서로서로 오붓하고 즐겁게 지낼 수 있을 만한 넉넉하고 따스한 삶터인지요?

 서울 광화문에 자리한 한글학회에 일을 나오고 있는 요즈음, 낮밥 때에 맞추어 문방구에 다녀옵니다. 문방구 다녀오는 길에 큰길 안쪽 모퉁이에 큼지막하게 문을 연 ‘ㅎ플러스 슈퍼마켓’이라는 데를 들여다봅니다. 요사이 말 많은 곳 가운데 하나인데, 돈이 많은 큰 회사들이 ‘동네 구멍가게’ 씨를 마르게 한다는 그 ‘슈퍼마켓 아닌 슈퍼마켓’입니다.

 가게에서 일하는 사람이 바글바글이요, 가게를 드나드는 손님 또한 바글바글입니다. 곰곰이 헤아려 봅니다. 서울 광화문 같은 데에는 ‘동네 구멍가게’가 들어설 수 있을까?

 지난주에 종로 안쪽 골목을 거닐다가 ‘동네 구멍가게’에서 보리술 한 병을 살까 하고 값을 여쭈니 640들이도 아닌 500들이 중간병을 2100원 달라고 합디다. 이 구멍가게에서 150미터쯤 떨어진 편의점에서도 640들이 보리술을 2000원 받고 있는데. 구멍가게 할매는 외국 관광객한테 바가지를 씌우면서 당신 살림을 꾸리거나 가게를 지키는 셈이었을까요? 자리값을 그쯤은 받아야 하는 셈이었을까요? 아무래도 서울 종로 같은 데에는 골목길이 골목길이 아니라고 느낍니다. 이런 곳 구멍가게 또한 구멍가게라 하기 어려우며, 구멍가게가 들어설 수 없겠구나 싶습니다. 서울 광화문이나 종로거리에는 ‘근대화슈퍼’나 ‘연쇄점’ 같은 구멍가게는 또아리를 틀 수 없고, ‘ㅎ 슈퍼마켓’과 ‘ㄹ 슈퍼마켓’만 들어서야겠다고 느낍니다.

 낮밥 때를 맞추어 길거리에 쏟아져 걷는 사람들 숲을 헤치고 일터로 돌아왔습니다. 하나같이 잿빛이나 검은빛 양복을 갖춰 입은 사람들은 담배나 커피잔을 들고 하하호호 웃고 맑은 얼굴빛입니다. 문득, 속으로 ‘서울 도심지에는 굳이 봄이나 여름이나 가을이나 겨울이 따로 없구나.’ 하고 느끼면서, ‘서울뿐 아니라 부산과 대구와 인천과 광주와 대전 같은 큰도시 번화한 거리에도 아무런 철과 날씨가 아랑곳하지 않겠구나.’ 하고 느낍니다. 철이 바뀌어도 철이 바뀌는 줄 모를 뿐더러, 느낄 까닭이 없는 이곳에서는 사람이든 푸나무이든 짐승들이든 옹근 목숨씨 하나로 자리잡기 힘들겠다고 새삼 느낍니다. 언제나 똑같은 회사일이요 사무직이지, 무슨 씨앗이고 철이고 목숨이고 있겠습니까. 좀더 나은 대접과 연봉과 보고서와 성적이지, 어떤 하늘이고 꽃잎이고 바람이고 깃들겠습니까.

 아침마다 시청역에서 내려 광화문으로 걸어오며 하늘을 올려다보면 경복궁과 인왕산 위로 하늘이 시커멓습니다. 먹구름이 깔려 시커멓지 않고, 서울에 잔뜩 깔린 먼지와 배기가스 때문에 시커멓습니다. 가뜩이나 서울은 우줄우줄 산 때문에 바람이 쉬 빠져나가지 못하는데, 인왕산과 북한산 둘레로 높직높직 아파트가 새로 올라서면서 먼지와 배기가스는 하염없이 늘기만 합니다. 경제위기 소리가 잦아든 지 오래이고, 기름값 걱정 같은 소리는 하기 좋아서 하는 말 뿐이며, 음식쓰레기는 늘기만 할 뿐 줄어들지 않습니다. ‘밥그릇 비우기’를 하는 분이 제법 늘어 몇 만 사람쯤 되는 듯하지만, ‘밥그릇 비우기’를 안 할 뿐 아니라 생각조차 않는 사람은 수천만 사람입니다. 서울땅에서 씨앗을 찾거나 말하거나 나눌 수 있는 길은 좀처럼 보기 힘듭니다.


 (2) 시골 농사꾼이 되며 깨달은 씨앗


 벌써 열두 해째 농사짓기를 하고 있는 강분석, 유근세 두 사람은 당신들 땀방울을 그러모아 지난 2006년에 《씨앗은 힘이 세다》라는 책을 내놓았습니다. 당신들은 당신들을 찾아온 사람들한테 ‘도시에 있었다면 이런 글을 쓰지 못했’으리라 생각한다면서, 땅한테도 고맙고 당신들이 지은 곡식을 사 주는 도시사람한테도 고맙다고 이야기합니다. 처음 시골에 자리잡을 때에는 마땅한 벌이구멍이 없어 번역일을 하며 겨우겨우 메꾸었다고 했는데, 이렇게 메꾸면서도 ‘죽어라 일만 하는 허리 휘는 농사꾼 삶’이 아닌 ‘농사짓는 틈틈이 쉬면서 하늘을 볼 느긋함’을 품을 줄 아는 가슴 따스하고 넉넉한 사람이 되기를 꿈꾸었다고 합니다.

 시골살이를 몰랐을 뿐 아니라 생각조차 않던 두 사람인데, 어느덧 쉰다섯 나이 가운데 열두 해를 시골에서 보냈고, 앞으로 시골에서 보낼 햇수는 길어지기만 할 테니, 머잖아 도시살이 햇수 못지않게 시골살이 햇수가 채워질 테고, 차츰차츰 당신들이 도시살이 하던 나날을 떠올리기 힘들지 않을까 싶습니다. 시골에서 땅을 부치고 땅한테서 얻으며 보내는 하루하루는 언제나 새로운 배움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이 배움은 앞으로도 꾸준하게 새로워지리라 봅니다. 아닌게 아니라 시골살이 봄여름가을겨울은 2009년과 2008년이 다릅니다. 2008년과 2007년이 다르고, 2006년과 2010년이 같을 수 없습니다. 해마다 다르고 달마다 다르며 날마다 다릅니다. 늘 똑같이 하는 일이란 없고, 늘 똑같이 느낄 모습이란 없습니다.

 산이, 논밭이, 내와 물이, 바다가 언제 똑같은 모습으로 우리 앞에 선 적이 있겠습니까. 늘 다른 자연 터전입니다. 다만, 우리가 늘 다른 자연 터전을 알아차릴 수 있느냐 없느냐일 뿐입니다. 늘 다른 자연 터전을 우리가 어느 만큼 새기고 삭이며 받아들일 수 있느냐일 뿐입니다.

 이리하여, 늘 다른 자연 터전을 가슴으로 껴안는 우리들이 될 때에는, 하루하루뿐 아니라 사람사람을 다 다른 목숨으로 돌아보면서 껴안는 우리들이 될 수 있습니다. 저마다 다른 삶이요 생각이요 움직임임을 느끼는 우리들이 됩니다. 나를 속깊이 들여다보며 사랑할 뿐 아니라, 내 둘레 사람들 또한 속깊이 톺아보면서 믿고 손잡는 길이 어디에 있는가를 깨닫는 우리들이 됩니다.

 《씨앗은 힘이 세다》라는 책은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나 잘 나거나 너 못난 삶이 아닌, 나 스스로를 못 보고 너 스스로도 못 느끼는 삶을 이제는 멈추자고 하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구나 싶습니다. 날마다 새로 배우는 고맙고 넉넉한 삶일 때 가장 알차고 아름답겠습니다만, 이렇게 꿋꿋하고 다부지게 ‘돈-이름-힘’을 훌훌 내던지고 홀가분하게 살아갈 수 있음을 당신들 스스로 먼저 보여주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고 봅니다. 그러면서, 도시에서 앞으로도 내처 살든, 도시에서 앞으로는 떠나려 하든, 우리 스스로 사람다운 씨앗이 누구한테나 가늘게 떨면서 옹송그리고 있음을 거듭 헤아리자는 목소리를 담고 있습니다.


 (3) 거듭 읽는 글월


 2006년에 장만한 뒤에 오래도록 책상맡에 꽂아 두고 틈틈이 넘기던 책을 이제 마감하면서, 그동안 밑줄을 그으며 읽던 대목을 하나하나 손소 옮겨적어 봅니다. 마음에 아로새길 만한 이야기라면 타자로 쳐서 종이로 뽑든 손으로 종이에 옮겨적든 해 보면 한결 깊고 널리 살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4342.11.5.나무.ㅎㄲㅅㄱ)


[머리말] 아직 밥벌이도 안 되고 농사와 사람의 일로 어려움도 있지만, 저는 지금 이곳에서 농사를 짓고 사는 것에 후회가 없습니다. 자연과 농사가 제게 준 것이 그토록 크기 때문입니다. 이제껏 우리가 가꾼 이 땅에서 언제까지나 농부로 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28쪽] 시골 와서 두 번째 맞는 겨울, 금융위기로 서울의 아파트가 팔리지 않아 돈줄이 막혔는데, 두릅 묘목이며 농자재며 경운기를 사느라 돈이 자꾸 들어갔다. 우연히 신문에 난 공고를 보았는데, 공공근로사업으로 정보화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영어와 컴퓨터 지식이 있는 사람을 모집한다는 거였다. 게다가 재택근무라니 딱이다 싶어 부랴부랴 서류를 갖추어 면사무소에 제출했더니 전업농가라 안 된다고 했다. 시골에 3백 평 이상의 땅을 가지고 있으면 전업농가로 분류되는데, 그렇지 않아도 부족한 농업 인력이 다른 근로사업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전업농가는 지원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볼펜으로 짚어 가며 공문을 읽어 주는 면사무소 직원에게 나는 한 마디만 했다. “3백 평 땅에 농사지어 먹고살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어이도 없고 속도 상하고, 그리고 비참했다. 집에 돌아와 애꿎은 막걸리 잔만 비웠던 것조차 씁쓸하게 기억된다.

[73, 195쪽] 처음 방문한 곳은 사과 농장이었다. 방충시설과 환풍시설을 완벽하게 갖춘 농장을 둘러보고 나서도 어딘지 모르게 묵직한 분위기는 가시지 않았다. 누군들 최고의 시설을 갖추고 싶지 않으랴. 가진 돈이 없으니 아무리 좋은 시설도 그저 그림의 떡일 뿐이다 … 한 달에 50만 원이면 빠듯하게나마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 년에 6백만 원. 설마 그 돈을 못 벌랴 했는데, 서울에서 내외가 한 달이면 벌던 그 돈은 초보 농군이 넘보기에는 너무나 큰 거금이었다. 하루아침에 얼마가 올랐다는 서울 아파트 값 얘기를 듣고 있노라면 꼭 남의 나라 이야기같이 느껴진다 … 도시에서 사는 자식들이야 돈도 몇 푼 안 되는데 그만두시라고 쉽게 말한다지만, 농협빚 고지서에 농약청구서를 생각하면, 또 여름방학 때 당신 찾아 내려올 손주들을 생각하면 도저히 그럴 수가 없는 것이다.

[106, 142쪽] 거실에서 바라보이는 영수 할아버지의 직사각형 논 위에 커다란 삿갓 모양의 짚가리 여섯 개가 일정한 간격으로 나란히 서 있다. 꼭 조형미술 작품 같다. 봄부터 겨울까지 영수 할아버지의 논은 거대한 종합 예술관이다. 자연의 흐름에 따라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야외 예술관 … “매화 꽃망울이 조금씩 커지면서 분홍이 되었다가 다시 하얀 꽃으로 피는 것은 매년 보아도 똑같이 감동스러울 거예요.” 경주에서 매실 농사를 짓는 마로 어머니는 그 말씀을 하실 때 소녀처럼 해맑은 얼굴이 되었다.

[175, 227, 238쪽] 며칠 전, 맨발로 우리 논에 들어섰던 아이도 언젠가는 어른이 되겠지. 어른이 된 어느 날, 도시의 빌딩숲을 정신없이 걷다가 문득 어린 날 빨간색 반바지를 입고 산골짜기 논에 들어섰던 기억을 떠올릴 수도 있겠지 … 내 손으로 논에 모를 심고 잡초를 뽑고 벼를 거두고 나서야 나는 “이 세상 모든 것이 상품이 될 수 있는 게 아님”을 몸과 마음으로 확인했던 것이다 … 만약 내가 지금도 도시에 있다면, 일 년 내내 푸른 잎을 자랑하는 화분의 나무를 바라보며 내 삶도 그렇게 늘 푸르러야만 한다고 떼를 쓰고 있을지도 모르지요. 이곳에서야 나는 느티나무가 늘 푸르기만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으니까요. 그리고 푸른 느티나무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는 것도요.

[199, 231쪽] 소비자들이 때깔이나 크기로만 농산물을 선택한다면 이 땅의 농부들은 농약을 안 칠 수 없을 것입니다 … “대통령 못해먹겠다”는 말은 어록에 기록되어 저 아득한 후대에까지 전해지겠지만, “농부 못해먹겠다”는 말에 누가 콧방귀나 뀔까요?

[218쪽]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듯 하늘이 험악했지만 남겨 놓은 두 골이 영 눈에 밟혔다. 다솜이네서 팥을 얻어 다시 밭에 올랐다. 남은 두 골에 팥을 넣는 동안 비가 계속 내렸다. 온몸을 두들기는 장대비를 우산으로 가리는데 아람이 할아버지가 하신 말씀이 생각났다. “오늘 못하면 내일 하지, 농사는 그렇게 지어야 혀.”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어 내려오는 길, 마음은 뿌듯했다.

[223, 226쪽] 10년이 넘게 농부가 되겠노라고 노래를 불렀으면서도 변변한 준비와 공부가 없었던 것이 우리의 귀농에서 가장 큰 잘못이라고 하겠다. 그 땅에 대궐 같은 집을 짓는 것으로 우리의 실수는 돌이키기 어려운 것이 되고 말았다. 집을 짓는 과정에서 예상외로 많이 들어갔던 자금도 그랬지만, 더욱 치명적인 것은 집 때문에 발목이 묶인 것이었다 … 그러나 농사지어 먹고사는 일도 만만치도 않거니와, 시골에도 이웃으로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 그것도 오래고 단단한 문화와 습관을 가진 사람들이 있음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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