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숙의 자연식
문숙 지음 / 샨티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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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119



하늘을 먹으면 ‘하느님’, 숲을 먹으면 ‘숲님’

― 문숙의 자연식

 문숙 글·사진

 샨티 펴냄, 2015.7.5. 16000원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은 모두 내 귀로 돌아옵니다. 내가 읊는 모든 말은 남한테 가는 말이라기보다, 언제나 내가 나한테 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금만 생각하면 알 수 있습니다. 내가 하는 말은 늘 내 귀에 맨 먼저 들립니다. 내가 하는 말을 내 곁에서 똑똑히 알아듣지 못할 때가 있지만, 나는 내가 하려는 말을 똑똑히 못 알아듣는 때가 없습니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은 모두 내 몸으로 돌아옵니다. 내가 가꾸는 모든 살림은 한식구를 돌보는 살림이라기보다, 언제나 내가 내 몸을 가꾸는 살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만히 헤아리면 알 수 있어요. 내가 우리 집을 어지르면 누가 괴로울까요? 내가 괴롭지요. 내가 우리 집을 정갈히 치우면 누가 즐거울까요? 내가 즐겁습니다.


  내가 차려서 먹는 밥은 모두 내 삶을 살찌웁니다. 내가 차리는 밥은 남을 먹이는 밥이 되기도 하지만, 누구보다 내 삶을 살찌울 밥입니다. 그러니, 나는 아무 밥이나 함부로 차릴 수 없습니다. 아이들한테 차려 주는 밥도 알뜰히 차려야 합니다만, 아이들한테만 알뜰히 차려 줄 밥이 아니라, 나부터 제대로 먹을 밥이요 올바로 먹을 밥이며 알뜰히 먹을 밥이에요.



‘나의 몸’이라 생각하는 당신의 몸은 그들(미생물)에게도 집이고 마을이며 우주이다. 그러니 정확히 말하면 내 몸은 나만의 것이 아니다. 우주의 기운으로 생성된 당신의 몸에서는 그동안 먹은 지구의 소산물들이 변화되어 만들어지고 또 작동되고 있으며, 언젠가는 이것들을 지구에게 되돌려주어야만 한다 … 몸이란 우리의 ‘큰 자아’가 잠시 머물며 ‘체험’을 하는 작은 성전이다. 느끼고 생각하며 사랑하고 미워하는 모든 것이 몸이 있기에 가능하다. (23, 25쪽)



  문숙 님이 쓴 《문숙의 자연식》(샨티,2015)을 읽습니다. 문숙 님은 이녁 삶에서 온갖 일을 해 보았다고 합니다.


  나는 ‘배우 문숙’을 모릅니다. 아마 적잖은 분은 ‘배우 문숙’을 알 테지요. 나는 오직 ‘밥짓는 즐거움을 나누는 문숙’을 압니다. 왜냐하면, 《문숙의 자연식》이라는 책을 썼기 때문입니다. 나는 《문숙의 자연식》을 읽으면서 바로 오늘 이곳에서 ‘스스로 가장 아름다운 밥을 지어서 먹는 하루를 즐기면서 가장 사랑스러운 삶을 밝히고 싶은 꿈’으로 나아가려는 문숙이라는 고운 이웃님을 만납니다.



“이걸 먹어라” “저게 좋다더라” 하는 남들의 소리에 흔들리지 말고 당신의 깊은 내면에서 울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라. 나만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결국은 내가 깃들어 사는 몸에 대한 문제이니 말이다. 아무도 나의 몸을 나만큼 알 수 없다 … 만드는 사람이 즐거워야 먹는 사람에게도 이롭다. (30, 32쪽)


자연의 변화에 몸을 맡기고 빈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신성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 … 요즘은 채소와 과일이 시도 때도 없이 쏟아져나와 우리를 현혹하지만 이는 건강을 해치는 요소가 될 수 있다. 자연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 흐름에 맞는 식재료를 선택하자. (42, 55쪽)




  요즈음 우리 식구는 밥상맡에서 함께 외치는 말이 있습니다. 밥을 먹을 적에도, 과자를 먹을 적에도, 수박을 먹을 적에도, 초콜릿을 먹을 적에도, 언제나 함께 ‘밥노래’를 부릅니다. “내 꿈이 되어라. 고마워. 사랑해. 물결.” 같은 말마디를 노래처럼 불러요. 무엇을 먹든 내가 마음속에 품은 꿈대로 이루어지라는 뜻으로 노래를 부릅니다. 무엇을 먹든 늘 고마우니 고마운 뜻을 밝혀요. 무엇을 먹든 내 몸과 마음에 사랑으로 스며든다고 여기면서 사랑한다고 말해요. 기쁘게 흐르는 바람결처럼 숨결처럼 물결처럼 고운 마음결이 되기를 바랍니다.


  밥상맡에서 제비처럼 맑은 목소리로 노래하는 아이들을 바라보면, 한여름에 땀을 뻘뻘 흘리며 밥을 짓는 일은 아무것이 아닙니다. 잘 먹어 주는 수저질을 지켜보면서 즐겁습니다. ‘자린고비는 굴비를 쳐다보며 배가 부르다’고 했다면, ‘어버이는 아이들 수저질을 바라보며 마음이 부르다’고 할 만합니다. 몸에는 밥을 넣어 기운을 넉넉하게 얻고, 마음에는 사랑을 담아 웃음을 넉넉하게 누립니다.



사탕수수는 심은 날로부터 2년 만에 수확되는데 그 기간 동안 어마어마한 농약이 살포된다. 농약은 섬 주민들이 숨을 쉬기 어려울 정도로 심각하다. 자기 힘을 잃은 땅은 날로 더 많은 농약을 필요로 한다. (88쪽)



  문숙 님은 《문숙의 자연식》에서 ‘어떤 밥’을 먹으려 하는가 하는 대목 못지않게 ‘어떤 마음으로’ 밥을 먹으려 하는가 하는 대목을 살피자고 이야기합니다. ‘더 깨끗한 것’이나 ‘더 좋은 것’에 앞서 ‘왜 깨끗한 것을 찾는가’와 ‘왜 좋은 것을 바라는가’ 같은 대목을 스스로 물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사람들이 스스로 알아야 하는 대목을 이야기합니다. 설탕과 사탕수수를 놓고 농약이 얼마나 어지러이 춤추는가를 들려주는데, 이는 문숙 님이 하와이 섬마을에서 살며 몸소 지켜본 이야기입니다.



더 깨끗한 소금을 찾아 헤매는 것보다, 더 좋은 식자재를 찾으려 애쓰는 것보다 근본적인 문제이다. 우리 바다, 우리 땅을 오염시키는 일을 당장 멈추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이다. 이것은 환경단체나 정부기관만의 일이 아니다. 당신과 나, 그저 흰 설탕 한 수저를 두고 고민하는 우리 모두의 몫이다. (91쪽)



  나는 사탕수수밭을 본 적이 없어서 사탕수수밭에서 농약을 어떻게 얼마나 뿌려대는지 잘 모릅니다. 다만, 나는 시골마을에서 살기에 여느 논밭에 농약을 어떻게 얼마나 뿌려대는지를 늘 지켜봅니다. 논에 모를 내면서 농약을 뿌리고, 볏포기가 무럭무럭 올라올 적에 농약을 뿌리며, 나락이 익을 무렵 농약을 뿌립니다. 개구리와 잠자리와 새가 모조리 죽을 만큼 농약을 뿌립니다.


  고추밭에는 고랑마다 비닐을 깔고서 농약을 뿌립니다. 고추밭에는 틈이 나는 대로 농약을 뿌리지요. 마늘밭도 양파밭도 파밭도 그예 농약바다입니다. 숱한 열매나무는 모조리 농약범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왜 시골에서는 농약을 칠까요? 새마을운동 때부터 농약을 쓰라고 북돋우기도 했으나, ‘상품 소비자’인 도시사람은 ‘농약을 뿌려서 겉보기로 맨들맨들하게 보이는 것’을 바랍니다. 벌레가 먹어도 정갈하고 좋은 것을 바라지 않는 ‘상품 소비자’입니다. 울퉁불퉁하거나 못생겨도 깨끗하면서 맛난 것을 알아채지 못하는 ‘상품 소비자’예요.




물은 에너지와 기억을 담고 있는 물질이다. 사랑을 보내면 분자에 사랑을 기억하고, 미움을 보내면 미움을 기억한다 … 좋은 물은 몸을 청결하게 하고 불순물을 몸 밖으로 내보낼 뿐 아니라, 우리 정신과 마음 상태에까지 직접 영향을 미친다. (100쪽)



  하늘을 먹으면 ‘하느님’이 됩니다. 마땅한 노릇입니다. 고구마를 먹으면 고구마 방귀를 뀌듯이, 하늘을 밥으로 삼아서 먹으면 하느님이 되어요. 숲을 먹으면 ‘숲님’이 됩니다. 바다를 먹으면 ‘바다님’이 됩니다. 꽃을 먹으면 ‘꽃님’이 되고, 꿈을 먹으면 ‘꿈님’이 되어요.


  여름날 뜨거운 햇볕과 시원한 바람과 맑은 빗물을 골고루 먹고 자란 남새와 곡식과 열매를 얻거나 장만해서 먹는 사람은 참말 ‘하늘을 먹는 삶’이니 하느님이 되는 삶이라 할 만합니다. 비닐집에서 햇볕 아닌 비닐 기운에, 바람 없는 후덥지근한 기운에, 빗물 아닌 수돗물을 먹고 자란 남새와 열매를 얻거나 장만해서 먹는 사람은 ‘비닐을 먹는 삶’이 됩니다.


  즐겁게 웃으면서 부침개를 부치는 사람이 내놓는 부침개를 먹는 사람은 ‘즐거운 웃음’을 함께 누립니다. 고단하게 찡그리면서 부침개를 부치는 사람이 내놓는 부침개를 먹는 사람은 ‘고단한 찡그림’을 고스란히 받아들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먹어야 할까요? 설이나 한가위 같은 명절에 부엌일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명절이 아닌 여느 날에는 부엌일과 집안일을 어떻게 맡아서 해야 할까요?



한 사람이 한 끼 식사에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많은 것이 달라질 수 있다. 아주 작고 하찮은 것 같은 선택이 개인의 의식을 맑게 하고 다른 생명체를 살게 하며 흙을 살리고 강을 살린다. 대한민국 사람들이 하루만 채식을 한다 해도 엄청난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 다 함께 일주일만 채식을 한다면 그 결과는 상상 이상으로 어마어마할 것이다. (279쪽)




  대통령이 정치를 훌륭히 하셔도 나라와 사회가 달라질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대통령이나 시장이나 군수 같은 사람에 앞서, 나 스스로 내 보금자리에서 내 밥상을 어떻게 차리느냐에 따라 나부터 달라질 수 있습니다. 손바닥만 한 땅뙈기라고 하더라도 손수 텃밭을 가꾸어서 ‘손수 심어서 손수 얻는 남새’를 한 주먹만큼이라도 얻는다면, 바로 나부터 내 밥차림이 달라집니다.


  손수 지어서 누리는 삶으로 나아갈 적에는 나부터 ‘시장 경제’나 ‘상품 경제’에 그만큼 덜 기댈 수 있습니다. 채식을 하든 육식을 하든 딱히 대수롭지 않습니다. 고기를 먹고 싶다면, 손수 닭을 키워서 손수 닭을 잡아 보면 됩니다. 공장에서 죄수처럼 갇힌 채 자란 닭을 공장에서 기계로 잘라서 랩으로 돌돌 만 고기닭이 아니라, 집 한쪽에 닭우리를 엮어서 키운 닭을 손수 잡아서 먹어 보면, 고기맛이 어떻게 다른가를 몸으로 느낄 뿐 아니라, 고기를 언제 어떻게 누구하고 먹을 때에 새로운 맛이 되는가를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오직 돈으로 상품을 장만하듯이 먹을거리를 가게에서 장만해서 먹기만 할 적에는 ‘고운 넋’을 건사하기 쉽지 않습니다. 햇볕이나 바람이나 빗물이나 흙이나 숲은 돈으로 값을 따질 수 없습니다. 햇볕이나 바람이나 빗물이나 흙이나 숲은 우리더러 그들한테 돈을 내라고 따지거나 묻지 않습니다.



치유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지혜의 눈을 기르는 것이다. (222쪽)



  《문숙의 자연식》이라는 책에서는 ‘치유식’에 여러모로 마음을 기울입니다. 몸과 마음을 달래 주는 수수한 밥차림을 꾸준히 이야기합니다. ‘치유’란 “낫게 함”을 가리키고, 아픈 데를 낫게 한다는 밥이 ‘치유식’입니다. 아픈 데를 낫게 하는 일이란 ‘살림’이고, 살리는 밥이라면 ‘살림밥’입니다.


  살리는 밥은 “슬기로운 눈이 되어 삶을 바라보도록 북돋우는 밥”이라고 할 만합니다. 더 나은 밥이나 더 좋은 밥이나 더 깨끗한 밥이 될 때에 ‘치유식’이 아니라, 스스로 삶을 슬기롭게 바라보면서 온 하루를 사랑으로 가꿀 수 있는 몸짓이라면 ‘살림밥’입니다.


  밥 한 그릇을 먹더라도, 과자 한 점을 주전부리로 먹더라도, 고기 한 점을 마련해서 먹더라도, 저마다 슬기롭고 사랑스러우며 아름다운 숨결이 될 수 있기를 빕니다. 무엇을 먹든 모두 내 몸이 되는 줄 깨닫고, 무엇을 먹든 언제나 고마운 줄 알아차리며, 무엇을 먹든 한결같이 기쁜 웃음을 짓는 삶으로 나아가자고 다짐합니다. 4348.8.1.흙.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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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은 묵고 가야제! - 편지 아재 류상진의 우리 동네 사람들
류상진 지음 / 봄날의책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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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193



“도시 사람들은 우추고 산가 몰것어!”

― 밥은 묵고 가야제!

 류상진 글

 봄날의책 펴냄, 2015.6.15.



  서울에 가면 고장말을 내려놓고 서울말을 쓰는 사람이 있습니다. 서울에 가도 고장말을 내려놓지 않고 고장말을 쓰는 사람이 있습니다. 서울 아닌 고장에서 살거나 시골에서 살면서 학교를 오래 다닌 사람일수록 서울에서 고장말을 내려놓기 마련입니다. 서울 아닌 고장에서 태어나거나 시골에서 태어나서 사는 동안 학교를 오래 안 다닌 사람일수록 서울에서도 고장말을 쓰기 마련입니다.


  시골에 있는 학교라고 해서 아이들이 시골말을 쓰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시골학교 교사가 모두 시골사람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교과서는 시골말 아닌 서울말로 나옵니다. 그러니, 아이들은 학교를 다니면서 ‘교과서를 배운다’기보다는 ‘교과서에 적힌 서울말을 배운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영남이는 내 이름이 맞는디 그란디 으디여?” “여기는 보성우체국입니다!” “머시라고? 무챗국이라고? 무챗국이 머시여? 잘 안 들린께 크게 말해봐!” “무챗국이 아니고 우, 체, 국이라니까요오!” “무챗국이 머신디 그래싸아?” (27쪽)


“첨에 우리 아들이 지금 우리 며느리를 지 각시 될 사람이라고 데꼬 왔는디 내가 보기는 으째 센찬하디 센찬해갖고 ‘저거시 참말로 우리 며느리가 되꺼인가?’ 싶드랑께! 그라고 또 ‘저거시 인자 우리 집 며느리라고 와갖고 소가지 읍는 짓거리나 하고 댕기문 으짜끄나?’ 그라고 꺽정을 참말로 만이 했당께! 그란디 시집와서부터 지가 할 일을 척척 해내고 동네서 누가 일 잔 해주라고 그라문 그라고 잘한다고 칭찬을 해싼께. 우추고 도시서 산 사람이 촌 일을 그라고 잘한고 내가 놀래부렇단께!” (265쪽)




  전남 보성에서 우체국 일꾼으로 마흔 해를 일하다가 2015년에 정년퇴직을 했다는 류상진 님이 빚은 《밥은 묵고 가야제!》(봄날의책,2015)를 읽습니다. 시골 우체국 일꾼인 류상진 님은 전남 광주에서 펴내는 잡지 〈전라도닷컴〉에 꾸준히 이녁 이야기를 싣습니다. ‘큰가방속 이야기’라는 이름으로 싣는 이야기로, 2015년 7월호 〈전라도닷컴〉에 예순일곱째 이야기가 실렸어요. 이 이야기는 《밥은 묵고 가야제!》라는 도톰하고 예쁜 책에 고스란히 실립니다.


  잡지에서 읽은 이야기를 예쁘장한 책으로 다시 읽는 느낌은 새롭습니다. 그런데, 나는 전라도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 아닌 터라, 여러 차례 이 이야기를 다시 읽어도 ‘낯선 말’이 가득합니다.


  우체국 일꾼인 류상진 님은 ‘서울말’을 씁니다. 그렇지만 류상진 님이 만나는 시골 할매와 할배는 언제나 ‘시골말’만 씁니다. 류상진 님도 시골말을 쓴다면 더욱 재미있으리라 생각하는데, 다시 생각해 보면, 류상진 님이 서울말을 쓰기에 이 책이 ‘덜 낯설’ 수 있구나 싶기도 합니다.



“예에? 6천 원을 벌어요?” “우리가 파스 살라고 율포 약국까지 갈라문 오고가고 버스 차비가 6천 원이여! 그라고 또 그냥은 못 온께 멋 좀 사묵고 차 지달리고 그라문 한나잘은 가불고 그랑께 만 원도 더 벌었것네!” (34쪽)

“거시기 혹시 잔돈 잔 이쓰까?” “잔돈이요? 그걸 어디에 쓰시게요?” “혹시 버스 운전수가 내가 만 완짜리 준다고 화내고 그라문 안 된께 미리서 잔 바까갖고 갈라고.” (83쪽)




  아침에 이웃집 할배가 우리 집에 찾아와서 이녁 밭뙈기에서 자라는 약초를 사진으로 찍어 보지 않겠느냐고 물으십니다. 어제 마을 뒤쪽 천등산에 놀러왔다는 서울사람 넷이서 걸어서 우리 마을 쪽으로 내려오다가 할배네 밭에서 자라는 ‘소엽’을 보고는 다른 고장에서는 소엽이 이렇게 이쁘게 자라는 모습을 못 보았다며 사진을 엄청나게 찍었다고 말씀합니다. 제가 사진 찍는 일을 하니, 저도 할배 밭에 와서 사진을 찍어 보라고 하십니다.


  ‘소엽’이 뭘 말하는지 종잡을 수 없습니다. 들깨하고 비슷한 풀을 할배가 밭뙈기 가득 심어서 기르는 줄 알기는 하는데, 그 풀이 무슨 풀인가 하고 더 헤아리지 않고 지냈습니다.


  사전을 찾아보니 ‘소엽(蘇葉)’은 중국에서 ‘자소(紫蘇)’라 일컫는 풀이라 하며, 한국에서는 ‘차조기(차즈기)’라 하는 풀입니다. 아하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입니다. 차조기였구나.


  우리 식구가 전남 고흥 시골로 들어와서 처음 살 무렵, 마을 할매랑 할배가 으레 ‘종자’라고 해서, ‘종자’가 뭔 말인가 하고 한참 갸웃거린 적이 있습니다. ‘종재’라고도 하고 ‘종자’라고도 해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벼 종재’나 ‘벼 종자’라 할 적에 ‘種子’라는 한자말인 줄 알아차렸습니다. 그러니까, 한국말로는 ‘씨앗’입니다. ‘볍씨’라 하거나 ‘씨나락’이라 해야 쉽게 알아들을 텐데, 시골 할매랑 할배는 농협이나 면소재지나 군청에서 쓰는 한자말로 논일이나 밭일을 이야기합니다. 더구나, 시골 어르신들은 농협 일꾼이나 공무원처럼 서울말(표준말)대로 말하지 않고 높낮이를 섞어서 말꼴을 달리 쓰시기에, 한참 듣고 또 들어야 비로소 알아듣는 말이 제법 많습니다.



“내가 항상 아재한테 심바람만 시켜싼께 미안흐다만. 진작부터 멋을 잔 줬으문 좋것다 그랬는디 촌에서 줄 것이 머시 있어야제. 그란디 오늘 이것이라도 있응께 내가 한 주먹 싸주께 갖고 가서 자셔 잉!” (102쪽)

“시방 우리 집 편지통에 애기들이 있당께. 그란께 안 되야!” “애기들이 있다니요? 그건 또 무슨 말씀이세요?” “와따아! 말귀도 징허게 못 알아묵네! 새가 새끼를 까놓고 있는디 거그다 그것을 너문 쓰것어? … 딴 집에 더 크고 널룹고 이삔 편지통도 많은디 해필 우리 집 째깐한 통에다 새끼를 까놨당께. 안 쫍은가 몰것네!” (153쪽)




  《밥은 묵고 가야제!》를 천천히 여러 차례 곱씹으면서 읽습니다. 이 책에 실린 보성 시골말을 보성 시골 할매랑 할배가 어떤 높낮이하고 결로 말씀하는가 하고 헤아리면서 여러 차례 되읽습니다. 귀로만 듣는다면 짐짓 못 알아듣겠네 싶던 말마디여도, 여러 차례 되읽고 내 입으로도 읊어 보니 뜻이나 느낌이 살아납니다. “예쁜 우체통”이 아닌 “이삔 편지통”이라 말하니 한결 재미있습니다. 류상진 님은 “우체국 배달 직원”이지만 시골 어르신들은 하나같이 “편지 아재”라고 부릅니다. “편지 아재”라는 이름도 대단히 살갑습니다. “조그마한 통”이라 않고 “째깐한 통”이라 하니, 말느낌이 사랑스레 살아나는구나 싶습니다. “안 좁은가 모르겠네”가 아닌 “안 쫍은가 몰것네”라 하니, 말빛이 새롭구나 싶습니다.



“아침에 생각하기는 우체국이 가까운께 금방 갖다 와도 되것대! 그란디 장에 가서 생각해본께 징하게 멀드만. 그라고 날은 떠운디 암만 생각해도 다리가 아파서 죽어도 못 가것드란께! 그래서 그냥 갖고 와부렇어!” (189쪽)

“아침 일찍 아들이 직장에 출근한다고 나가고 나문, 그담에는 손지들 학교 간다고 나가제. 며느리도 맞벌이한다고 나감시로 ‘엄니! 멋 잡수고 싶은 것 있으문 이리 전화해가꼬 시켜 드씨요!’ 하고 나가불문, 하루 종일 누구하고 말할 사람이 있는가 으짠가. 그래갖고 도시 사람들은 우추고 산가 몰것어!” “그럼 다시 내려오니 좋으세요?” “인자 편코 좋제에! 아무리 내 집이 작고 혼자 살아도 유제(이웃)에 놀러갈 디도 있고, 이라고 여그저그 돌아댕김서 일도 하고 그라문 하루가 우추고 간지도 모르고 가분디. 도시서 하루 지낼라문 꼭 죄도 없이 징역 사는 것 같응께. 우리 같은 사람은 못 살 것드만!” (305쪽)




  소설을 쓰는 조정래 님이 빚은 《태백산맥》은 벌교를 바탕으로 해서 이야기를 엮었다고 합니다. 벌교는 보성군에 딸린 읍입니다. 벌교에는 조정래문학관이 있습니다. 《밥은 묵고 가야제!》를 쓴 류상진 님은 보성에서만 마흔 해 동안 시골마을을 돌면서 편지를 날랐습니다. 이동안 류상진 님은 보성 시골마을 할매랑 할배가 이녁한테 들려준 ‘말노래’를 귀여겨들은 뒤 차곡차곡 갈무리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류상진 님은 ‘말마디’만 갈무리하지 않고, ‘말마디에 깃든 이야기’를 갈무리했습니다. 그래서, 류상진 님이 빚은 이 책은 ‘말노래’입니다. 삶노래라고도 할 만하고, 사랑노래라고도 할 만합니다. 시골에서 나고 자라서 시골일을 하는 할매랑 할배 가슴마다 싱그러이 살아서 춤추는 노래를 고이 받아안아서 새로운 이야기로 엮은 “편지 아재 삶”이라고 할까요.


  “도시 사람들은 우추고 산가 몰것어!”라고 읊은 할매 말을 가만히 돌아봅니다. 시골을 떠나 도시에서 자리잡은 아들네에서 여러 날 지내면서 괴로웠다는 할매는 끝내 시골집으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아들은 이녁 어머니가 시골에서 ‘고된 일을 그만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을 테지만, 시골 할매인 어머니는 ‘아무 일도 안 하고 가만히 아파트 방 한켠에 앉아서만 지내’자니 죽을 맛이었다고 합니다. 더군다나 만날 이웃도 없고, 어디가 어디인지 알 길이 없어서 길을 잃을까 걱정스러워 나들이도 못 다닌다고 하니까, 참말로 시골 할매한테 큰도시 아파트는 ‘징역살이’일 만하겠구나 싶습니다.


  그런데 시골 할매한테만 아파트살이가 힘들지 않아요. 나도 곁님도 우리 아이들도 도시에서는 길찾기가 무척 벅찹니다. 모두 똑같이 줄을 지은 아파트와 건물이요, 찻길도 자동차도 똑같이 생긴 도시에서 길을 안 잃기란 수월하지 않습니다. 가끔 서울마실을 할 적에 으레 길을 잃고 한참 헤매기 일쑤입니다. 그리고, 도시에는 다리를 쉴 만한 나무그늘을 찾기 어렵고, 아픈 다리를 쉴 만한 풀밭조차 없습니다.



지난주 회천면 도강마을 우편물을 배달하다 군에서 보낸 편지 한 통을 가지고 마을의 중간쯤에 살고 계시는 할머니 댁 마당으로 들어가 “오늘은 반가운 소식이 왔네요!” 하였더니 방문이 ‘덜컹!’ 열리며 “반간 소식이라니? 그라문 우리 영길이가 편지 보냈어?” 하며 고개를 내미셨다. “네, 영길이가 편지를 보냈어요.” “그란디 머시라고 왔어? 어서 일거봐! 어서어! 아이고오! 애린 것이 을마나 고생을 많이 하고 있으까? 날도 징하게 춥고 그란디.” 하시는 할머니 눈가에는 어느새 이슬이 맺히기 시작하였다. “지금 울려고 그러시는 거죠? 그렇지요?” “아니이! 안 울어!” (292쪽)



  가슴이 따순 이웃을 만난 마흔 해 삶자락이 도톰한 책 한 권에 흐릅니다. 웃음하고 눈물로 어우러진 수수한 이웃이 살아가는 노래가 ‘이삔’ 책 한 권에서 흐릅니다.


  흙을 만지고 사는 할매랑 할배한테서는 흙내음이 납니다. 풀을 뜯고 나물을 무쳐서 먹는 할매랑 할배한테서는 풀빛이 돕니다. 나무하고 이웃하는 삶이기에 나무와 같이 듬직합니다. 새파란 하늘숨을 마시는 나날이기에 너른 하늘처럼 드넓고 푸른 넋입니다. 멧새와 풀벌레와 개구리가 노래하는 보금자리에서 살림을 꾸리니, 모든 말마디는 언제나 노래가 되어 빛납니다.


  나는 오늘 이 ‘쪼깬한’ 시골마을에서 아이들하고 ‘우추고’ 살면서 사랑스러운 꿈을 꿀 만한가 하고 생각해 봅니다. ‘멋’을 하면서 일하거나 놀고, ‘멋’을 가슴에 담으면서 하하하 하고 웃을까 하고 헤아립니다. 4348.7.10.쇠.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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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초 밥상
이상권 지음, 이영균 사진 / 다산책방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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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숲책 읽기 75



풀밥 먹고 꽃밥 먹는 시골살이

― 야생초 밥상

 이상권 글

 이영균 사진

 다산책방 펴냄, 2015.7.3. 13000원



  전남 고흥 도화면 동백마을에 깃든 조그마한 우리 집에서는 요즈음 쇠무릎잎을 즐겁게 뜯어서 먹습니다. 밥을 지을 적에는 모시잎을 훑어서 잘게 썬 뒤에 섞어 모시밥을 먹습니다. 고들빼기잎이랑 쇠무릎잎은 풀무침을 해서 먹기도 하고, 날로 먹기도 하며, 고기를 익히거나 구울 적에 잔뜩 넣어서 먹기도 합니다.


  어성초꽃이 지는 요즈막에는 까마중 흰꽃도 함께 피고 지면서 조그마한 풋알이 맺힙니다. 소리쟁이는 붉으죽죽 마르면서 씨앗을 맺고, 오월까지 흐드러지던 유채꽃이랑 갓꽃은 꽃대와 줄기까지 모조리 녹아서 흙으로 돌아갑니다. 아주까리잎이 펑퍼짐하게 퍼지고, 잘 자란 쑥은 곧 꽃을 피울 듯합니다. 환삼덩굴이랑 사광이아재비풀이 나무를 타고 오르려 하고, 호박꽃이 피며, 감알도 무화과알도 탱글탱글 익으려 합니다. 조그마한 모과꽃에서 맺히는 모과알은 어찌나 굵은지 나뭇가지가 찢어질 듯 대롱대롱 매달립니다.


  이른봄부터 신나게 뜯어먹던 정구지는 이제 쓴맛이 짙어서 볶음을 할 적에만 뜯습니다. 봄에 고맙게 먹던 민들레잎도 어느덧 거의 자취를 감추고, 별꽃나물은 시듭니다. 꽃이 진 돌나물은 씩씩하게 더 넓게 퍼지려 하고, 살이 통통하게 오르는 비름나물은 틈틈이 꺾어서 고맙게 누립니다.  



어슬어슬 땅거미가 깔리면 여인들은 일어나서 자신들이 솎아 놓은 보리순을 망태기에 담아서 집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마당에다 망태기를 엎어 놓고는 보리순을 칼로 다듬어서 국을 끓인다. 그러니까 보릿국을 끓여먹기 위해 일부러 보리순을 캐지는 않았다. (22쪽)


“아이고 말도 마라. 뿌리 끝 이파리가 붙어 있는 곳에 까만 때가 붙어 있어서, 그것을 손톱으로 긁어내면서 다듬는 일이 아주 힘들어. 이파리가 붙어 있는 부분을 조각조각 뜯어내고 까만 때를 벗겨내야만 먹을 수가 있거든. 냉이를 캐서 씻는 것도 성가신 일이지만 솔구쟁이 캐서 씻는 일하고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30∼31쪽)



  봄에는 봄풀을 먹습니다. 여름에는 여름풀을 먹습니다. 가을에는 가을풀을 먹고, 겨울에는 겨울풀을 먹어요. 겨울에 무슨 풀을 먹느냐 물을 수 있을 텐데, 늦가을부터 봄까지꽃이랑 갓이랑 유채가 스멀스멀 싹이 돋아요. 한겨울에도 유채풀이랑 갓풀을 누릴 수 있습니다. 겨울이 채 끝나지 않을 무렵부터 쑥하고 냉이를 누립니다.


  이상권 님이 글을 쓰고 이영균 님이 사진을 찍은 《야생초 밥상》(다산책방,2015)을 읽습니다. 책이름에 붙은 ‘야생초(野生草)는 ‘야초(野草)’라는 한자말처럼 일본사람이 즐겨 쓰는 낱말입니다. 일본에서는 이밖에도 ‘산초(山草)’나 ‘산야초(山野草)’ 같은 한자말을 즐겨 써요. 그러면 한국에서는 어떻게 이야기할까요? 들에서 나는 풀이면 ‘들풀’이라 합니다. 산(메)에서 나는 풀이면 ‘멧풀’이라 합니다. 그래서, 들에서 뜯는 풀 가운데 즐겁게 먹는 풀은 ‘들나물’이라 하고, 산(메)에서 뜯는 풀 가운데 즐겁게 먹는 풀은 ‘멧나물(산나물)’이라 합니다. “야생초 밥상”은 들에서 나는 풀을 뜯어서 차리는 밥상인 만큼, “풀 밥상”이나 “들풀 밥상”이나 “들나물 밥상”인 셈입니다.



우리는 천천해 해당화꽃밥을 입안에다 밀어넣고, 그 모든 향과 맛을 음미하듯이 천천히 씹었다. 내게는 옛날 생각까지 더해져서 그 맛과 향이 더 깊게 배어들었다. (68쪽)


“어린 풀도 씹을 만하네요. 진짜 쓴맛은 하나도 없고 온통 풀냄새뿐이네요. 이걸로 국을 끓이면 무슨 맛이 날까? 맛은 몰라도 국물 색깔은 기가 막히겠네요.” (89쪽)




  풀은 어디에서나 돋습니다. 풀은 시멘트나 아스팔트 틈바구니를 뚫고 돋기도 합니다. 이러한 풀을 바라보면서 참말로 억세다고들 하지만, 풀로서는 시멘트와 아스팔트한테 모질게 짓밟히거나 짓눌리면서도 ‘꿈을 잃지 않’기에 씩씩하게 돋을 수 있습니다. 현대 문명이 도시와 시골을 가리지 않고 흙바닥을 단단히 눌러서 다진 뒤 시멘트랑 아스팔트를 들이붓더라도, 조그마한 풀씨는 흙 기운을 찾아나서면서 뿌리를 내리려 해요.


  시인 김수영 님이 풀을 노래하기도 했습니다만, 풀은 시골사람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줍니다. 임금님하고 양반한테 짓눌리면서 살아온 수수한 사람이 시골사람이요, 성곽을 쌓거나 병졸로 끌려가는 사람이 시골사람입니다. 궁궐에서 심부름꾼이나 종이 되어야 하는 사람이 시골사람입니다.


  시골사람은 풀처럼 씩씩합니다. 시골사람을 풀을 먹으면서 풀빛 같은 마음입니다. 시골사람은 풀을 뜯고 풀을 손질하며 풀을 다루는 동안, 어느새 온몸이 풀물이 들고, 풀내음이 가득합니다.


  사람도 풀을 먹고 짐승도 풀을 먹습니다. 더욱이 벌레도 풀을 먹습니다. 게다가 겨울이 되어 온누리가 차갑게 얼어붙으면, 풀은 시들어 죽으면서 흙으로 돌아가요. 봄부터 가을까지 지구별 모든 목숨붙이를 먹여 살리던 풀은, 겨우내 새로운 흙으로 거듭납니다. 풀이 겨우내 흙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 땅(흙)에 새롭게 씨앗을 심어서 거둘 수 있어요.



“곰밤부리야 사방에 천지에 깔렸으니까. 게다가 고것은 비료도 안 주고 농약도 안 주고 한마디로 농사꾼들이 신경을 쓰지 않아도 저절로 자라는 풀이니까, 고걸 뜯어다 나물로 하면 우리도 좋지요. 우리야 저런 것 먹고 컸지만 요새 사람들이 어디 그러요?” (112∼113쪽)


“제가 새팥 깍지를 따면 이 동네 어르신들도 다 저보고 손가락질하고 그래요. 제 친구들도 몇 와서 보더니, 왜 이렇게 힘들게 사냐고 하기도 해요. 전 힘들지 않아요. 이게 좋아요. 남들 보기에는 심란해 보이기도 할 것이고, 야생콩이나 풀뿌리 캐먹고 백년 천년 살 거냐고 비웃기도 하지만, 제가 오래 살려고 이러는 건 아닙니다.” (129쪽)




  풀밥은 풀을 뜯어서 지은 밥이요, 지구별 뭍을 두루 덮은 풀내음을 담은 밥입니다. 풀 한 포기에서 꽃이 피면, 이 꽃을 갈무리해서 꽃밥을 짓기도 합니다. 꽃밥은 풀꽃밥이요, 지구별 모든 목숨붙이한테 기쁨과 웃음을 베푸는 사랑스러운 꽃내음을 실은 밥입니다.


  가만히 보면, 우리는 풀이랑 꽃이랑 알(열매)을 골고루 먹습니다. 맨 처음에는 새싹을 먹어요. 다음으로 풀잎이랑 풀줄기를 먹습니다. 어느덧 풀알(풀열매, 곡식)을 먹고, 나중에는 풀뿌리를 먹습니다. 풀 한 포기를 모조리 골고루 먹어요.


  사람은 모든 풀을 다 먹지 못합니다. 사람이 못 먹고 남은 풀은 겨우내 삭으면서 까무잡잡한 새로운 흙이 되고, 새로운 흙은 온누리를 기름지게 바꾸어 주어요.


  더 생각해 보면, 풀이 돋는 땅이기에 비가 와도 흙이 쓸리지 않습니다. 풀이 돋는 땅이기에 사막이 안 됩니다. 풀이 돋는 땅이기에 싱그러운 풀내음이 가득한 바람이 붑니다. 풀이 돋아 풀밭이 되기에 아이들이 마음껏 뛰놀 만하고, 풀밭이 우거지기에 풀짐승이 고요히 깃들 만하며, 풀밭이 예쁘장하기에 사람들이 숲집을 짓고 숲살림을 기쁘게 건사합니다.


  이야기책 《야생초 밥상》은 바로 이 대목을 들려주려고 합니다. 먼먼 옛날부터 모든 시골사람이 저마다 제 고장에서 제철 풀을 뜯고 누리던 삶을 보여주려고 합니다. 눈부신 풀이나, 돋보이는 풀이나, 빼어난 풀이나, 대단한 풀이나, 놀라운 풀이나, 엄청난 풀을 알려주려고 하지 않습니다. 시골사람이면 누구나 흔하게 먹으면서 널리 사랑하던 풀을 함께 나누려고 하는 마음을 밝히려고 합니다. 너랑 나랑 함께 먹고, 오순도순 같이 먹으면서 노래를 부르는 삶을 글로 남기려고 합니다.



“옛날 사람들은 뱀밥이 맛있는 나물이라는 것은 다 알았지만, 너무 손이 많이 가서 잘 해먹지 않았어. 옛날에는 시골이 늘 바빠서 한가롭게 반찬 할 틈이 없었거든. 그래서 손쉽게 뜯어다 살짝 데쳐서 무쳐먹는 나물을 가장 많이 먹을 수밖에 없었어.” (193쪽)


구량배미 할매는 닳아질 대로 닳아진 손톱으로 그 무시무시한 마름 껍질을 까서 아이들에게 골고루 나눠 주었다. “야, 맛있다! 밤 맛이다!” “아니, 깨금(개암) 맛이다!” 아이들은 신기한 표정을 지으면서 마름을 씹어먹었다. (249쪽)




  《야생초 밥상》이라는 책에서 글을 쓴 이상권 님은 이녁이 어릴 적부터 듣고 보고 겪은 즐거운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이 책에 사진을 찍은 이영균 님은 ‘글로만 읽을 적’에는 요즈음 도시사람이 제대로 헤아리거나 살피기 어려운 모습을 멋스럽게 되살려서 사진으로 보여줍니다.


  보리, 소리쟁이, 원추리, 점나도나물, 해당화, 광대나물, 뚝새풀, 조팝나무, 별꽃, 새팥, 댑싸리, 옥매듭, 쇠무릎, 피, 쇠뜨기, 무릇 같은 풀이랑 꽃을 맛나게 먹는 삶을 읽으면서 가만히 생각합니다. 이상권 님이 책에서도 쓰듯이 ‘별꽃나물’을 전라도에서 ‘곰밤부리’라고도 합니다. 이상권 님이 ‘새팥’이라고 하는 아이는 전남 고흥에서는 ‘돌콩’이라고 합니다. 돌콩이 익는 철이면 바지런한 할매는 돌콩밭을 찾아가서 광주리를 채우고, 우리 아이들도 돌콩깍지를 하나씩 손에 쥐고는 주머니에 넣습니다. 돌콩깍지를 살살 쥐어 주머니에 빨리 넣지 않으면 깍지가 탁 소리를 크게 내면서 터집니다. 이러면 돌콩이 이곳저곳으로 흩어져서 못 주워요.


  푸짐한 풀밥상을 《야생초 밥상》이라는 책으로 만나면서 우리 집 밥상도 한결 푸르게 북돋우자고 생각합니다. 넉넉한 꽃밥상을 《야생초 밥상》이라는 책으로 마주하면서 우리 집 밥차림도 더욱 싱그러이 가꾸자고 생각합니다.


  풀 한 포기가 햇볕이랑 빗물이랑 햇볕을 먹으면서 흙에 뿌리를 내리면서 싱그럽습니다. 풀 두 포기가 멧새 노랫소리랑 개구리 노랫소리랑 풀벌레 노랫소리를 듣고 자라면서 해맑습니다. 풀 세 포기가 아이들 손길을 타면서 까르르 웃습니다. 풀 네 포기가 내 눈길을 받고 내 마음길하고 이어지면서 즐거이 춤을 춥니다.


  풀밥을 먹고 풀노래를 부르면서 풀사람이 됩니다. 풀밥상을 차리고 풀사랑을 나누면서 풀꿈을 키웁니다. 온누리 모든 사람들이 텃밭이랑 마당을 누리면서 손수 밥상을 차릴 수 있기를 빌어요. 지구별 누구나 텃밭하고 마당에서 예쁜 삶을 짓는 슬기로운 생각을 빛낼 수 있기를 빌어요. 4348.7.8.물.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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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섬에서 미래를 보았다
아베 히로시.노부오카 료스케 지음, 정영희 옮김 / 남해의봄날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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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115



‘돈’ 아닌 ‘삶’을 보면 ‘꿈’이 있다

― 우리는 섬에서 미래를 보았다

 아베 히로시·노부오카 료스케 글

 정영희 옮김

 남해의봄날 펴냄, 2015.6.10.



  어제 아침에 큰아이하고 ‘흙 옮기기’를 했습니다. 우리 집 처마를 따라 빙 두른 빗물받이가 있는데, 집 뒤쪽에 있는 빗물받이에는 흙이 쌓였습니다. 이 흙을 긁어서 마당 한쪽에 있는 앵두나무 둘레에 뿌려 주기로 했습니다.


  나는 뒤꼍 감나무 옆에 서서 ‘빗물받이에 쌓인 흙’을 꽃삽으로 긁습니다. 빗물받이에 쌓인 흙은 처음부터 흙이지는 않았습니다. 집 뒤꼍에 감나무가 우람하게 자랐는데, 감나무에서 풋감이 떨어지고 감잎이 떨어집니다. 때로는 하늘타리나 호박이 지붕까지 뻗습니다. 이러면서 이 넝쿨줄기가 겨우내 삭습니다. 나뭇잎이랑 풀잎이랑 풀줄기랑 풋열매는 한데 어우러져서 천천히 삭습니다. 빗물받이가 거름통 구실을 하는 셈입니다.


  작은아이는 누나랑 아버지가 일하는 모습을 보면서 물총놀이를 합니다. 누나가 있는 집 뒤쪽으로 왔다가, 아버지가 있는 뒤꼍으로 올라옵니다. 뒤꼍에서 감나무랑 석류나무한테 물을 주기도 하고, 고들빼기나 모시풀한테 물을 주기도 합니다. 이 자그마한 아이한테 물총은 물뿌리개와 같습니다.



격무에 쫓기던 스물다섯의 어느 날, 불현듯 마음속에 의문 하나가 떠올랐다. ‘도대체 내 앞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 나는 인간이 본래 따뜻한 마음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등산과 도보 여행을 통해 배웠다. 그러나 도시에서는 그런 것이 생활 속에서 조용히 틀어지고 만다. 조금 깊이 들여다보니 자본주의 등 문명의 발전만을 중시해 온 사회 시스템의 한계가 아닐까 싶었다 … 회사는 자신의 전문 분야를 특화하면 된다. 그러나 시골에서는 부분이 아닌 전부를 할 수 있어야 한다. 부분이 아닌 전부를 해 나갈 수 있어야만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다. (18, 21, 57쪽)



  그리 크지도 작지도 않은 섬에서 ‘즐거운 앞날’을 바라보면서 크지도 작지도 않은 회사를 열어서 산다는 젊은이들이 쓴 《우리는 섬에서 미래를 보았다》(남해의봄날,2015)라는 책을 읽습니다. 스물을 조금 넘긴 젊은이들은 처음에 도시에서 ‘커다란’ 회사에서 일했다고 하는데, 이들은 ‘크지도 작지도 않은’ 섬으로 삶자리를 옮깁니다. 돈을 넉넉히 모아서 섬(시골)으로 가지 않습니다. 뭔가 대단히 잘 알기에 섬으로 가지 않습니다. 귀농이나 귀촌이라는 이름이 아닌, 그저 ‘삶’을 생각하면서 섬으로 갑니다.


  섬이나 시골에서 젊은이가 회사를 열어서 ‘돈을 벌’거나 ‘먹고살’ 만할 수 있을까요? 섬이나 시골은 젊은이가 꿈을 품고 삶을 누릴 만한 터전이 될 수 있을까요?



도시에는 생태학이나 지속가능한 사회에 대해 배울 기회가 풍부하다. 그러나 시골에는 그것을 실천하는 데 필요한 일자리가 부족하다 … 조금이라도 빨리 지역으로 들어가 땀과 눈물을 흘리며 나 자신의 언어로 그것에 대해 말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래서 ‘지금 바로 아마로 간다’는 선택지를 고르게 됐다 … 이익 창출도 중요하다. 그러나 이익만을 창출하는 건 도시에서도 할 수 있다. 그 행사를 통해 섬이기에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지 좀더 깊이 고민해야겠다고 마음을 고쳐먹게 됐다. (33, 37, 53쪽)




  ‘돈’ 아닌 ‘삶’을 보아야 ‘꿈’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돈을 본다면 언제나 돈만 보이기 마련이라고 느낍니다. 돈을 더 모으고 자꾸 모으는 길로만 가는구나 싶어요. 삶을 본다면 언제나 삶을 마주하면서, 이 삶을 곱게 가꿀 꿈으로 나아가기 마련이라고 느낍니다. 삶을 보기에 꿈을 생각할 수 있고, 꿈을 생각하기에 삶을 사랑으로 가꾸는구나 싶어요.


  돈을 버는 일이 나쁘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돈만 버는 일’이라면 삶이 없을 뿐입니다.


  브레히트 님이 엮은 《전쟁교본》이라는 사진책이 있습니다. 이 사진책 첫머리를 보면, 철공소에서 일하는 노동자 사진이 나옵니다. 철공소 노동자는 ‘먹고살려’는 뜻에서 쇠붙이를 다룹니다. 그러면, 철공소에서 노동자는 어떤 일을 할까요? 장갑차를 만들고 탄환을 만듭니다. 비행기도 만들고 총도 만듭니다. 온갖 전쟁무기를 철공소에서 만듭니다.


  먹고살아야 한다면 ‘전쟁무기 만드는 공장’에서라도 일거리를 얻어서 돈을 벌어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전쟁무기 만드는 공장에서 일거리를 얻어서 돈을 벌고, 이 돈으로 밥을 사다가 먹는다면, 우리 삶은 어디로 나아갈까요? 철공소 노동자한테는 쇠붙이를 다루는 재주밖에 없으니, 어쩔 수 없이 군수공장에서 일거리를 찾아야 할까요? 쇠붙이 다루는 재주를 내려놓고, 삶을 가꾸는 길로는 갈 수 없을까요? 손수 논밭을 갈아서 손수 밥을 얻는 길로 나아갈 수는 없을까요?



얼굴을 마주보는 관계가 되면 이분법 개념이 아닌, 함께 걸어 나갈 길을 찾는 관계가 된다 … 고향의 감정을 느끼게 해 주는 시골은 정신문화를 보존하고 있다. 그 문화가 거창한 것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세계유산일 필요도 없고 중요문화재일 필요도 없다 … 콩은 내가 밭에서 직접 키운 검은콩을 썼고, 간수는 근처 아키야 해안에서 퍼온 바닷물을 질냄비에서 뭉근히 끓여 소금과 간수를 분리해 썼다. 완성된 두부에 직접 만든 소금을 뿌려 먹었는데 그게 얼마나 맛있었는지 모른다. (80, 101, 165쪽)




  《우리는 섬에서 미래를 보았다》에 나오는 젊은이는 섬(시골)에서 젊은 나날을 보내며 새로운 삶을 날마다 깨닫는다고 합니다. 도시에 있던 큰 회사에서는 ‘몇 가지 일만 전문으로 하면 끝’이었으나, 섬에서는 혼자서 모든 일을 다 할 줄 알아야 한다지요. 도시에서는 언제나 ‘전문직 일꾼’이었지만 섬에서는 언제나 ‘종합 일꾼’이어야 한다지요.


  아주 마땅합니다. 시골사람은 씨앗을 심거나 뿌린 뒤, 씨앗을 돌보고, 씨앗에서 돋아서 핀 꽃이 지고 열매를 맺기까지 지켜보며, 열매가 무르익으면 거두어서 갈무리한 다음, 이 열매를 스스로 다듬고 손질해서 ‘먹을거리’로 가꾸어야 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 사람이 다 해내야 하는 몫’입니다.


  시골에서는 전화 한 통으로 끝낼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스스로 실마리를 찾아서 요모조모 해 보고 다듬어 보고 고꾸라져 보기도 하면서 스스로 배웁니다. 스스로 부딪히지 않고서야 알 수 없습니다. 스스로 온몸으로 겪지 않고서야 배울 수 없습니다.


  섬으로 간 젊은이들이 “섬에서 미래를 보았다”고 말할 수 있는 바탕은 이러한 자리에 있다고 느낍니다. ‘앞날’이란 앞으로 살아갈 나날입니다. 예순 살 남짓이 되어 연금을 받으면서 ‘일할 걱정이 없어도 되는 삶’이 앞날일 수 없습니다. 일흔 살이 되고 여든 살이 되어도, 내 삶을 스스로 가꾸고 돌볼 수 있는 나날이어야 비로소 ‘앞날’이라고 느낍니다.


  ‘돈이 없어도 되는 살림’이 아닙니다. ‘돈이 아니어도 되는 살림’입니다. 오직 돈만 바라보도록 내모는 오늘날 물질문명 사회에서, 삶을 마주하고 사랑을 바라보면서 꿈을 지을 수 있다고 깨달았기에, 여러 젊은이가 섬(시골)에서 날마다 새로운 기쁨을 누린다고 합니다.




미래에 대한 다양한 가설을 지역에서 만들고 그 가치를 전국으로 발신할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 만약 그럴 수 있다면 ‘앞으로 일본이 존재할 곳’은 도시가 아니라 지역이 될 것이다 … 요즘 같은 시대, 도시와 시골 생활 양쪽 모두를 경험하면서 나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됐다. 지역과 미래를 연결하는 모두의 일이 존재하는 사회에서 살아가는 게 훨씬 더 만족스럽다고 말이다. (197, 205쪽)



  시골에서는 철마다 삶이 다릅니다. 시골에서는 달마다 삶이 다릅니다. 시골에서는 날마다 삶이 다릅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네 철에 따라 다 다른 삶입니다. 날마다 동이 트는 때가 다르고, 해가 하늘에 걸린 길이가 다릅니다. 아이들은 날마다 새롭게 자라면서 날마다 새로운 놀이를 찾습니다. 새벽이 밝고 아침이 찾아오면, 나는 맨 먼저 잠에서 깨어 일어나 하루를 그립니다. 새벽물을 길어서 쌀을 헹구고 낯을 씻으면서 하루를 그립니다. 마당과 뒤꼍을 돌며 우리 집 나무한테 인사를 하는 동안 하루를 그립니다. 오늘 하루는 아이들하고 어떤 삶을 지을 적에 함께 웃고 노래하면서 기쁠까 하고 생각을 짓습니다.


  스스로 생각하면 길을 열 수 있습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길을 엽니다. 먹고 입고 자는 세 가지를 스스로 건사하는 길을 생각하면서, 아이들은 저마다 재미있게 놀이를 찾고 생각을 빛냅니다.


  이웃나라 일본에서 여러 젊은이가 섬마을에서 ‘기쁜 앞날’을 찾았다면, 나는 이 나라 시골마을에서 아이들하고 ‘기쁘며 재미난 앞날’을 찾으려 합니다. 흙을 만지고 밟으면서, 흙이 새롭게 태어나는 얼거리를 느끼고 배우면서, 바람이 흙을 살찌우고 햇볕이 흙을 북돋우는 숨결을 헤아리고 알아차리면서, 스스로 숲노래를 부르는 착한 숲사람으로 사는 길을 찾으려 합니다. 4348.6.27.흙.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인문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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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버드 - 지구에서 달까지, B95의 위대한 비행 생각하는 돌 12
필립 후즈 지음, 김명남 옮김 / 돌베개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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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책 읽기 80



달까지 날아오르는 붉은가슴도요

― 문버드, 지구에서 달까지 B95의 위대한 비행

 필립 후즈 글

 김명남 옮김

 돌베개 펴냄, 2015.5.18.



  우리 집 마당에는 우리 마을에서 가장 큰 후박나무 한 그루가 있습니다. 지난날에는 어느 집 마당에나 큰나무가 있었을 텐데, 새마을운동 바람이 불었고 한국전쟁이 있었으며 일제강점기를 흐른 탓에, 마을에서 숲정이가 사라지고 집집마다 자라던 큰나무도 거의 다 사라졌습니다.


  우리 집 마당 후박나무는 우리 마을에서는 제법 큰 나무이지만, 다른 마을이나 바닷가에서 자라는 듬직한 후박나무에 대면 아직 ‘아기’라고 할 만합니다. 그래도 해마다 우듬지가 높아지고 가지를 넓게 뻗습니다. 마당에 드리우는 나무그늘이 차츰 넓어집니다.


  마을 뒤쪽으로는 멧줄기가 포근하게 감쌉니다. 그래서 새벽이랑 아침이면, 또 저녁이면, 숲에서 사는 새들이 살짝살짝 마을로 드나듭니다. 먹이를 찾으려고 드나들고, 즐겁게 나들이를 다니면서 드나듭니다. 이때에 여러 새가 우리 집 마당으로 찾아와서 후박나무에 앉습니다. 다른 집에는 크게 자란 나무가 없으니 우리 집 마당에서 자라는 후박나무가 멧줄기랑 마을을 잇는 징검돌이 된다고 할까요. 숲새는 후박나무에 앉아서 노래를 부르면서 날개를 쉰 다음, 다시 포로롱 날아올라서 바다 쪽으로 가든지, 건너편 다른 멧줄기로 갑니다.




붉은가슴도요 아종 루파 전체가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B95와 무리가 휴식을 취하고 연료를 보금하는 데 중요한 장소들, 말하자면 기나긴 연간 이동 경로에서 징검돌에 해당하는 장소들이 인간의 활동으로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 1995년 과학자들은 붉은가슴도요 루파의 개체수를 약 15만 마리로 추정했다. 그러나 2000년 무렵부터 이 새들은 수천 마리씩 죽어 가기 시작했다. (7, 11쪽)



  필립 후즈 님이 쓴 《문버드, 지구에서 달까지 B95의 위대한 비행》(돌베개,2015)이라는 책을 읽습니다. ‘문버드’는 ‘붉은가슴도요’한테 붙인 새로운 이름이라고 합니다. 해마다 수만 킬로미터를 훌쩍 넘는 하늘길을 날아서 오가는 200그램조차 안 되는 조그마한 새한테 붙인 이름이라고 해요. 한국말로 하자면 ‘달새’일 텐데, 110그램에서 180그램 사이라는 조그마한 새는 지구와 달 사이를 오가듯이 머나먼 길을 씩씩하게 날아다니면서 삶을 짓는다고 합니다.


  《문버드》는 수많은 붉은가슴도요한테 바치는 책이요, 이 가운데 ‘B95’라는 글씨를 새긴 발찌를 차고는 스무 해 남짓 기운차게 살아남아서 아직도 해마다 수만 킬로미터를 훌쩍 넘는 하늘길을 날아다니는 조그마한 새한테 드리는 책이라고 할 만합니다. B95가 이제껏 날아다닌 하늘길은 523,000킬로미터가 넘는다고 합니다.




B95는 출발 며칠 전까지 몸을 채우는 데 집중하다가, 어느 순간 노선을 바꾼다. 이제 B95는 좀더 부드러운 먹이를 좀더 조금 먹는다. 비행하는 동안 필요하지 않은 내장 기관은 줄어들기 시작한다. 간과 장이 쪼그라들고 다리 근육도 줄어든다 … B95는 무리와 함께 라고아두페이시에 몇 주 머무른다. 낮에는 달팽이를 잡아먹고 밤에는 석호에서 존다. 공연히 몸을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면서 단백질을 지방으로 전환한다 … 얼음이 녹고 땅이 폭신폭신해지면 이윽고 녀석들이 풀려난다. 모기들은 고인 웅덩이에 곧장 알을 낳아 단백질이 풍부한 유생을 잔뜩 생산한다. 이 또한 붉은가슴도요들의 먹잇감이다. (45, 55, 106쪽)



  《문버드》는 작은 새 한 마리가 날아다니는 길을 차근차근 좇습니다. 어디에서 태어나서 자라다가, 어느 곳으로 날아가는가를 살핍니다. 한 번 날아오른 뒤 여러 날 쉬지 않고 날아서 어느 곳에 내려앉아서 어떤 먹이를 찾는가를 헤아립니다. 북반구 끝자락에서 남반구 끝자락을 오가는 작은 새가 어느 곳을 징검돌로 삼아서 나들이를 다니는가를 찾아봅니다.


  새 한 마리가 아무리 멀리 오랫동안 잘 날더라도 ‘내려앉아서 쉴 곳’이 있어야 합니다. 징검돌이 있어야 합니다. 수많은 과학자와 자원봉사자는 ‘B95’ 발찌를 단 새를 눈여겨보았고, 새떼가 지나가는 길을 알아내려고 했답니다. 이들은 ‘과학 조사’나 ‘학문 연구’ 때문에 작은 새 한 마리를 눈여겨보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살아가는 이 지구별에는 사람뿐 아니라 수많은 목숨이 함께 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사람대로 아름답게 살고, 새는 새대로 사랑스레 살며, 뭇목숨은 뭇목숨대로 곱게 살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지구별에 사람만 남으면 사람은 모두 죽습니다. 아무것도 못 먹기 때문입니다. 숲짐승도 물고기도 벌레도 새도 함께 지구별에서 살아야 합니다. 모기가 없어지면 어떻게 될까요? 새는 먹이 한 가지를 잃습니다. 새가 먹이 한 가지를 잃으면 어떻게 될까요? 모기를 먹으며 살찌우던 몸이니, 다른 먹이, 이를테면 사람들이 밭에서 기르는 열매를 노릴 테지요. 파리가 없어지면 어떻게 될까요? 이때에도 새는 먹이 한 가지를 잃는데, 새가 먹이를 잃을 뿐 아니라 사람한테도 끔찍한 일이 됩니다. 파리가 없어지면 ‘썩은 것’이 사라지지 않으니까요. 파리가 있고 지렁이가 있으며 쥐가 있기에 ‘썩은 것’이 사라질 수 있습니다.


  시골에 논과 밭만 있어서는 밥을 제대로 못 먹습니다. 왜 그러한가 하면, 논과 밭만으로는 싱그러운 바람이 불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아무도 안 건드리는 고요한 숲이 깊게 있어야 합니다. 숲이 우거져야 합니다. 나무가 수백 해나 수천 해쯤 느긋하게 자랄 수 있을 때에, 사람들은 ‘집을 지을 나무’를 숲에서 틈틈이 얻을 만합니다. 이리하여 예부터 어느 마을이든 숲정이를 두었고, 숲이 마을하고 함께 있을 때에 비로소 논이랑 밭도 한결 기름지면서 정갈하게 건사할 수 있습니다.




어떤 길을 고르든 이 여정은 대단히 험난한 도전이다. 몇몇 새들은 연료가 떨어져 탈진한 나머지 하늘에서 떨어질 것이다. 나머지는 최후의 몇 시간까지 근육을 태운 뒤 가까스로 델라웨어 만에 내릴 것이다 … B95의 부모는 석 달 동안 14000킬로미터를 날고 연료를 보급하고 이동한 끝에 6월 초 캐나다 북부에 도착했다. 깃털은 붉은색으로 밝아졌지만 셀 수 없이 많이 날갯짓을 한 탓에 비행깃 깃가지가 죄다 너덜너덜해졌다 … 태어난 지 한 달도 안 된 B95 새끼들은 자기들끼리 남았다. 새끼들은 착실히 먹고, 갈수록 무겁고 강해지며, 비행깃을 훈련하고, 어른의 보호 없이 스스로 위험을 감지하는 법을 익힌다. 그렇게 툰드라에 머무르며 8월 초가 된 어느 날, 새끼들은 문득 떠나고 싶다는 욕구에 사로잡힌다. (57, 104, 110쪽)



  철새한테는 곳곳에 징검돌이 될 쉼터가 있어야 합니다. 사람한테는 숲이 있어야 합니다. 텃새한테는 숲정이도 숲도 나란히 있어야 합니다. 사람한테는 논밭을 비롯해서 너른 마당이랑 풀밭이랑 꽃밭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붉은가슴도요는 해마다 끝없이 먼 하늘길을 날아서 오갑니다. 철마다 붉은가슴도요가 이끌리는 맛난 먹이가 넉넉히 있는 곳에서 부는 바람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붉은가슴도요는 바람을 따라 훨훨 납니다. 즐겁게 지낼 새로운 쉼터를 찾아서 날고 또 날며 다시 납니다.


  사람은 어디에서 어디로 움직일까 하고 헤아려 봅니다. 사람은 어떤 바람을 느끼거나 마시면서 어느 곳에서 쉬거나 사랑을 속삭이는가 하고 생각해 봅니다. 새한테는 징검돌이 될 아름다운 곳이 있어야 한다면, 사람한테는 이 지구별이 어떤 보금자리나 마을이 되어야 삶을 즐겁게 지을 만할까 하고 되새겨 봅니다.




모든 생물종은 각각의 에너지와 활동이 복잡하게 얽힌 생태계라는 그물망에 소속되어 있다. 그 그물망들은 작은 미생물에서 거대한 나무까지 모든 생명을 잇는다 … 우리와 함께 지구에서 살아가는 종들은 모두 나름대로 성공한 존재들이다. 우리 동료 생명체들은 저마다 기발한 생존 전략을 진화시켰고, 그 전략을 성공적으로 실행했다. 매혹적이고 때로 아름답기까지 한 생명체들이 없는 지구에서 산다는 것은 훨씬 더 초라한 세상에서 사는 것이리라. (154, 163쪽)



  오늘 아침도 휘파람새하고 검은등지빠귀가 잇달아 마당에 내려앉아서 노래합니다. 이 숲새가 숲에서 노래할 적에는 고운 소리가 마루를 거쳐서 고즈넉하게 퍼집니다. 이 숲새가 우리 집 마당에 내려앉아서 노래할 적에는 대단히 우렁차면서 맑은 소리가 온 집안을 쩌렁쩌렁 울립니다. 후박나무 우듬지나 빽빽한 나뭇가지 사이에 살짝 깃들어 노래하니 아직 휘파람새랑 검은등지빠귀가 어떤 모습인지는 알아보지 못합니다. 다만, 노랫소리로 이 새가 아침을 열어 주고, 새벽을 밝히며, 다시 저녁이 저무는 바람을 알려주는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제비가 부산하게 날면서 노래하고, 처마 밑 빈틈에 둥지를 튼 참새도 어미 새와 새끼 새가 나란히 노래합니다. 뒤꼍 감나무와 마당 초피나무에는 딱새와 박새가 낮나절 내내 드나들면서 노래합니다. 때로는 까치나 까마귀가 매화나무나 모과나무 꼭대기에 앉아서 노래합니다. 엊그제는 높은 하늘에서 까치떼가 누렁조롱이를 쫓아내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하도 까치들이 시끄럽게 깍깍거리기에 하늘을 보았더니, 까치가 떼를 지어 누렁조롱이하고 맞서더군요.


  필립 후즈 님은 《문버드》라는 책을 빌어서 우리한테 “모든 생물체는 나름대로 환상적이고 신비롭다(161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참말 그렇습니다. 붉은가슴도요는 붉은가슴도요대로 놀라우면서 아름답습니다. 참새는 참새대로 놀라우면서 아름답습니다. 제비와 까치도 제비와 까치대로 놀라우면서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우리 사람도 저마다 놀라우면서 아름답습니다. 이 지구별에서 서로 사랑하고 보살피고 아끼고 헤아리면서 넉넉하게 어우러지는 삶을 꿈꾸어 봅니다. 4348.6.13.흙.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숲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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