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홍바늘꽃 카르페디엠 15
질 페이턴 월시 지음, 햇살과나무꾼 옮김 / 양철북 / 2007년 12월
평점 :
절판




 능금나무는 전쟁을 모릅니다
 [책읽기 삶읽기 32] 질 페이턴 월시, 《분홍바늘꽃》


 20세기 첫무렵 유럽에서는 커다란 싸움판이 두 차례 벌어졌습니다. 흔히들 ‘세계대전’이라 하지만, 가만히 따지면 ‘유럽 싸움’입니다. 유럽사람들이 저희 나라나 겨레를 한껏 살찌우려는 마음으로 이웃 나라나 겨레로 총칼을 들고 밀어붙이면서 벌어진 싸움판입니다.

 그런데 이 싸움판을 벌인 나라나 겨레를 들여다볼 때에, 싸움을 일으킨 나라에서 밑바닥 자리에 있는 사람들, 이를테면 농사꾼이라든지 노동자들은 어떤 삶이었을까 궁금합니다. 밑바닥 자리에 있는 사람들 또한 이웃 나라나 겨레로 총칼을 들고 쳐들어가서 죽이고 죽으며 돈과 보배를 빼앗는 가운데 내 밥그릇을 채우는 일을 기쁘게 맞아들였으려나요. 권력자가 시키는 대로 바보처럼 따르거나 얼간이처럼 못난 짓을 하고 말았으려나요.

 유럽에서 펼쳐진 두 번째 큰 싸움판을 무대로 쓴 청소년소설 《분홍바늘꽃》을 읽습니다. 이 청소년소설을 읽으면서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싸움을 일으킨 독일 권력자는 크나크게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싸움을 일으킨 독일 권력자 뒤에는 세계 경제와 무기시장을 주름잡던 거대재벌이 있었고, 이 거대재벌은 미국에 있는 록펠러와 모건이었다고 합니다. 총칼과 같은 무기란 거대재벌이 돈을 벌어들이는 ‘공장 상품’이고, 더 큰 탱크와 더 빠른 비행기와 더 무서운 항공모함은 더 어마어마하게 큰 돈을 벌어들이는 ‘공장 인기상품’입니다.

 으레 독일하고 이탈리아만 못된 짓을 저질렀다고들 역사책에 적힙니다. 그러나 찬찬히 들여다보면, 영국이든 프랑스이든 네덜란드이든 에스파냐이든 …… 아프리카며 아시아며 중남미며 닥치는 대로 쳐들어가서 식민지를 삼았습니다. 이들 ‘힘있고 돈있으며 이름있는’ 유럽 나라들은 제 나라와 겨레 밥그릇을 더 크게 불리려고 총칼을 앞세우며 싸움박질을 했습니다. 어쩌면, 유럽에서 벌어진 큰 싸움이란 권력자끼리 맞붙은 ‘식민지 넓히기 싸움’이라 해야 알맞을는지 모릅니다. 이 나라 밑바닥 사람이든 저 나라 밑바닥 사람이든 그저 고달파야 하고 싸움터에 병사로 끌려가 총알받이가 되어야 했던 슬픈 굴레인지 모릅니다.


.. 나는 전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어른들은 전쟁에 대해 이야기하고, 전보다 뉴스에 더 많이 귀를 기울였다. 나는 비행기를 보는 것이 좋았다 ..  (17쪽)


 학교에서 가르치는 한국사나 세계사는 거의 모두 ‘싸움박질을 해서 땅넓이를 얼마나 넓혔고, 정치권력자는 언제 어떻게 물갈이가 되었는가’ 하는 데에 머무릅니다. 지난날 사회와 문화를 다루는 대목 또한 ‘한 나라나 겨레를 이루는 수수한 사람들 삶’이 아닌 ‘권력자가 누리던 삶’을 다룰 뿐입니다.

 우리네 전통문화를 들여다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궁중음식과 궁중옷을 전통문화로 다룹니다. 궁중에서 임금님과 신하들이 누리던 노래를 전통음악으로 여깁니다. 따지고 보면, 역사책을 쓰는 사람은 나라에서 돈과 지위를 받아 나라일을 적바림하는 사람이지, 여느 사람들 사이에서 살면서 여느 사람들 삶과 발자취를 살피거나 적바림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예나 이제나 마찬가지인데, 대학교수가 되어 역사를 파고들면서 역사를 쓰지, 골목동네나 시골 농삿집 사이에서 함께 밑바닥 삶을 꾸리는 가운데 역사를 파헤치거나 파고드는 사람은 없습니다.

 “재 너머 사래 긴 밭 언제 갈려 하느냐” 하고 노래하는 시는 있어도, 몸소 밭갈이 논갈이 씨뿌리기 김매기 가을걷이를 하는 가운데 ‘지식인 스스로 생활인이 되어 땀흘리는 삶을 노래하는 시’는 한 꼭지조차 없습니다.

 오늘날에도 이 흐름은 그리 바뀌지 않습니다. 집안에서 살림하고 아이 키우고 밥을 하고 빨래를 하는 나날을 노래하는 대중가요나 문학이나 영화는 얼마나 될는지요. 비정규직이든 대형마트 점원이든 중·고등학교 수험생 자리에서든 내 삶을 노래하는 대중가요나 문학이나 영화는 있기나 한지요.


.. 갑자기 짜릿한 느낌이 등골을 타고 흐르며 몸이 떨렸다. 자유였다. 아무도 나를 돌봐 주지 않을 것이다. 나를 걱정해 주거나, 뭔가를 시키거나, 제때에 먹으라고 하거나, 이를 잡으려 하거나, 다친다고 막아 주지도 않을 것이다. 어른들은 모두 다른 데 정신이 팔려 있었다. 모두들 전쟁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  (44쪽)


 청소년문학 《분홍바늘꽃》은 영국 런던이라는 도시에서 힘겨이 살아남은 아이들이 주인공입니다. 어른들은 어른들끼리 싸움을 일으켜 놓고는 아이들이 걱정스럽다며 ‘도시에서 내보내 시골로 옮기는’ 일을 합니다. 그렇다고 시골에 살붙이나 피붙이가 있지 않은 아이들도 많을 뿐더러, 시골로 옮기기만 한다고 아이들이 잘 살아갈 수 있지 않습니다. 어른들부터 그저 도시에서만 살고파 하면서 아이들만 달랑 시골로 보내서 무엇이 나아지겠습니까. 어른들 스스로 도시에서 득시글거리는 삶을 그치며 시골에서 손수 땅을 일구어 조용히 꾸리는 삶이라 한다면, 아이들 또한 즐거이 시골로 갈 만합니다. 어른들은 도시에서 돈을 벌거나 싸움터로 나아가 이웃 나라 사람들을 죽이는 수렁에서 허덕이는데, 아이들이 시골로 가고파 할까 모르겠습니다.

 책을 덮으며 생각에 잠깁니다. 영국이든 독일이든 프랑스이든 이탈리아이든 …… 이들 나라 사람들이 더 큰 도시를 키우지 않고, 스스로 수수하게 농사지으며 제 살림을 조그맣게 꾸리는 즐거움을 누린다면 싸움이 일어났을까 하고.

 싸움판 이야기는 떠올리기 싫어 책상맡 시집을 하나 꺼냅니다. 갑갑할 때마다 늘 펼치는 신동엽 님 시집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입니다. 책장을 죽 넘겨 〈산문시 1〉를 읽습니다. “스킨디나비아라든가 뭐라구 하는 고장에서는 아름다운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업을 가진 아저씨가 꽃리본 단 딸아이의 손 이끌고 백화점 거리 칫솔 사러 나오신단다 … 하늘로 가는 길가엔 황토빛 노을 물든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함을 가진 신사가 자전거 꽁무니에 막걸리병을 싣고 삼십 리 시골길 시인의 집을 놀러 가더란다.”

 대통령이 청와대 같은 데에서 갖가지 서류에 둘러싸인 채 일하지 않는다면, 대통령이 짐자전거에 막걸리병을 싣고는 슬슬 골목길을 달리고 고샅길을 달리며 시인 아저씨네에 놀러간다면, 온누리 어디에서고 싸움이 터질 까닭이 없습니다. 너 죽고 나 살자는 끔찍한 싸움이란 벌어지지 않습니다. 총칼을 든 싸움이든 돈뭉치로 벌이는 싸움이든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경제대국이 되어야 할 까닭이 없고, 국민소득이 이만 달러이든 이십만 달러이든 되어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국민소득이 이백 달러라 할지라도 얼마든지 아름다우며 즐겁게 살아가는 길이 있어요. 국민소득이 아예 0원이랄지라도 서로서로 예쁘게 어깨동무하며 살아가는 길이 있습니다.


.. 길이 구멍투성이라서 버스가 덜컹거리며 지나갔다. 사람들은 건물 더미 사이로 좁은 길을 힙겹게 빠져나가고 있었다. 가게 진열장들에는 유리창 대신 널빤지가 대어진 채 ‘정상 영업’이라는 글씨가 페인트로 조잡하게 쓰여 있었다. 우리는 아무 말도 없이 바라보았다. 머리카락이 붉은 버스 차장 아주머니가 우리한테 몸을 기울이고 창밖을 보더니 말했다. “맙소사. 똑같이 갚아 줘야 돼!” 줄리가 나에게 물었다. “우리 편도 저렇게 (이웃나라를 폭탄으로 잿더미로 만들어 버리는 짓을) 할까?” 나는 몸소리를 치며 대답했다. “나도 모르겠어.” ..  (66∼67쪽)


 유럽에서 크나큰 싸움이 벌어지던 때, 모든 나라가 무기를 들지는 않았습니다. 몇몇 나라는 그냥 흰 깃발을 들었다고 합니다. 괜한 싸움으로 제 나라 여느 사람들이 다치거나 여느 사람들 살림집이 무너지지 않도록 흰 깃발을 펄럭였다고 합니다. 그래도 밑자락에서는 조용히 싸우는 사람이 있었다지만, 평화를 지키거나 사랑하는 길은 총칼에 있지 않음을 몸소 보여줍니다.

 한국땅에서 더 나은 교육을 꿈꾸거나 바라는 사람들이 미국으로든 독일으로든 프랑스로든 영국으로든 많이들 배우러 떠납니다. 사진을 하든 그림을 하든 문학을 하든 다들 이렇게 나라밖, 아니 유럽에서 이름난 나라들로 떠나곤 합니다. 그런데 요즈음은 이름난 나라들보다 이름이 적게 나거나 덜 나거나 안 난 나라로 가곤 합니다. 이를테면 스웨덴이나 덴마크나 핀란드로 배우러들 갑니다. 이러면서 ‘핀란드 교육혁명’이라든지 ‘스웨덴 교육혁명’을 읊습니다. 이들 핀란드이든 스웨덴이든 덴마크이든 교육을 혁명하지 않았는데, 우리 사회하고는 아주 크게 다르니까 마치 혁명이라도 되는 듯 여깁니다.

 이들 나라는 전쟁이 아닌 평화를 사랑하고, 전쟁무기 아닌 논밭연장을 만듭니다. 지식이 아닌 사랑을 가르치고, 정보가 아닌 믿음을 일깨웁니다.

 저마다 사이좋게 어우러지며 살아갈 사람임을 몸소 드러낼 뿐이니, 혁명이라는 이름은 걸맞지 않습니다. 누구나 오순도순 얼크러지며 기쁘게 웃을 사람임을 스스로 보여줄 뿐이기에, 대단한 교육이라 할 수 없습니다.

 학교에서는 시험을 치를 까닭이 없습니다. 학교는 말 그대로 배움터여야 합니다. 학교에서 교사 일을 맡은 이는 아이들이 참답고 착하며 고운 사람으로 크도록 돕는 한편, 교사 스스로 참답고 착하며 고운 어른으로 당신 넋을 지키는 길을 걸어야 합니다.

 “전쟁 반대”나 “평화 사랑”이라는 목소리를 낼 우리들이 아닙니다. 내 삶을 사랑하며 아끼는 길을 조용히 씩씩하게 걸어가야 할 우리들입니다. 내 고향마을을 아끼고, 내 보금자리인 살림집을 사랑할 우리들입니다. 성경책에는 내 한쪽 뺨을 때렸으면 내 다른 쪽 뺨도 때리라 이야기합니다. 우리 옛말에는 미운 아이 떡 하나 더 준다 했습니다. 삶은 사랑이고, 사랑은 삶입니다. 전쟁은 미움이고 미움은 전쟁인데, 전쟁이든 미움이든 삶하고는 너무 동떨어집니다.


.. 우리 집 양쪽 옆집과 건너편 집 두 채가 무너졌는데, 창문 유리가 길 끝까지 날아갔다. 우리 집이 있던 자리에는 커다란 구멍만 남았다. 하지만 사과나무는 거의 뿌리까지 둘로 가라지기는 했어도 이듬해 봄에 새싹이 돋아났고 그 뒤로 꿋꿋이 살아남았다 … 바보같이 들리겠지만, 아무리 히틀러의 폭격기가 하늘을 가득 메워도 나뭇잎이 황금빛으로 물들고 나무에서 떨어진다는 사실이 너무나 신기해 보였다. 물론 당연히 그래야 하고, 또 그렇게 되었지만 말이다 ..  (63, 76쪽)


 능금나무는 싸움이든 전쟁이든 모릅니다. 분홍바늘꽃 같은 조그마한 들꽃 또한 싸움이든 전쟁이든 모릅니다. 호박꽃이 싸움을 알까요. 오얏나무가 전쟁을 알려나요.

 전쟁무기를 만드는 사람들은 상추 한 잎보다 잘날 구석이 없습니다. 총칼을 움켜쥐며 이웃나라로 쳐들어가서 사람을 죽이거나 괴롭히는 권력자는 시금치 한 포기보다 아름다울 수 없습니다.

 나와 동무를 사랑할 길을 찾을 사람입니다. 내 터와 이웃마을을 고루 아끼는 길을 찾을 사람입니다. 《분홍바늘꽃》에 나오는 아이들은 바보스럽고 우악스러운 어른들 굴레에 빠져들지 않습니다. 처음 제 어버이한테서 목숨을 선물받던 때 느낌 그대로, 사랑과 믿음으로 이 땅에서 튼튼하고 당차게 살아내고픈 꿈을 건사합니다.

 어른들은 힘이 좀 여리면 좋겠습니다. 어른들은 돈이 좀 적으면 좋겠습니다. 어른들은 이름이 좀 없으면 좋겠습니다. 수수하고 투박하면서 고즈넉한 삶을 얼싸안는 참사람으로 아이들과 웃고 떠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4343.12.23.나무.ㅎㄲㅅㄱ)


― 분홍바늘꽃 (질 페이턴 월시 글,햇살과나무꾼 옮김,양철북 펴냄,2007.12.5./9000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대는 이 나라를 사랑하는가
사기사와 메구무 / 자유포럼 / 1999년 1월
평점 :
절판




 예쁜 삶, 예쁜 집, 예쁜 이야기
 : 사기사와 메구무, 《그대는 이 나라를 사랑하는가》(자유포럼,1999)


- 책이름 : 그대는 이 나라를 사랑하는가
- 글 : 사기사와 메구무
- 옮긴이 : 김석희 옮김
- 펴낸곳 : 자유포럼 (1999.1.10.)


 (1) 예쁜 삶


 나날이 군대가 좋아진다고들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예나 이제나 어디에서 군대살이를 하든 힘들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틀림없이 시설이나 장비는 한결 나아질 뿐더러, 뻬치카는 사라지고 최전방부대 가운데 아주 끔찍하게 춥고 오래된 막사는 헐거나 문닫으며 덜 춥고 새로 지은 막사로 옮깁니다. 그렇지만 예나 이제나 어디에서 군대살이를 하든 고달프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 삶터는 나날이 민주와 자유가 널리 퍼지거나 뿌리내린다고 합니다. 군대라는 곳도 지난날을 돌이킨다면 오늘날 군대는 참말 민주와 자유가 넘실거린다 할 만합니다. 아마 앞으로는 한결 민주와 자유가 춤출 테지요. 그러면 이곳 군대에 평화나 사랑이나 통일이란 얼마나 깃들었다고 말할 수 있으려나요.

 2000년대에 군대를 마친 이들은 2010년대에 군대를 마친 이들을 바라보며 ‘세상 좋아졌다’고 말합니다. 1990년대에 군대를 마친 이들은 2000년대에 군대를 마친 이들을 마주하며 ‘좋은 세상 산다’고 말합니다. 1980년대에 군대를 마친 이들은 1990년대에 군대를 마친 이들과 부대낄 때에 ‘꿈 같은 곳이네’ 하고 말합니다. 1970년대에 군대를 마친 이들은 1980년대에 군대를 마친 이들하고 말을 섞으며 ‘놀고먹었다’고 여깁니다. 1960년대에 군대를 마친 이들은 1970년대에 군대를 마친 이들을 보며 ‘수월히 다녔다’고 봅니다. 1950년대에 군대를 마친 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1940년대 일제강점기에 징병으로 끌려갔다가 살아 돌아온 사람들은 다릅니다. 이때에 이르러 군대라는 데가 얼마나 무시무시하며 괴로웁고 슬픈 곳임을 이야기합니다.

 더 돌이켜 조선이나 고려나 고구려나 가야 때에 군대로 끌려가야 했을 여느 농사꾼들 삶을 살필 수 있다면 새삼스러우리라 봅니다. 싸움터에서 누군가를 죽이거나 죽어야 하던 이들은 장군이나 대장이 아닙니다. 언제나 맨 밑바닥 병사입니다. 옛날 싸움은 대장이 한 사람씩 나와서 칼을 부딪히며 싸우며 판가름했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싸우나 저렇게 싸우나 맨 밑바닥 병사들은 수백 수천 수만이 죽어 나가야 했습니다. 맨 밑바닥 병사인 여느 농사꾼들은 고향마을에서 농사를 짓다가 끌려와서는 몇 해고 죽도록 돌과 흙을 날라 성을 쌓습니다. 살아서 돌아갈는지 죽어서 소식조차 못 남길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 그 경찰관은 도시유키가 언뜻 상상했던 만큼 노골적으로 태도를 바꾸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의 말투가 도시유키의 면허증을 보고 나서 갑자기 딱딱하게 바뀐 것을 도시유키는 놓치지 않았다. ‘성명 : 朴俊成, 국적 : 한국’. 도시유키의 면허증에는 이렇게 기재되어 있었던 것이다 … 물론 성장하면서 처음으로 지문날인을 경험하고, 운전면허를 취득할 때의 불편함을 알게 되자, 그 느낌은 어린 시절에 비해 조금 달라졌다. 좀더 현실적인 문제, 예를 들면 투표권이 없는 것과 취직 차별, 주거 차별 같은 불합리한 대우에 대해서는 화가 나기도 했다 ..  (26, 110쪽)


 우리 집 첫째가 딸아이로 태어나도록 마음속으로 빌고 입으로 노래했습니다. 아이가 사내라면 앞으로 군대에 끌려가야 할 텐데 어떡하나 하고 걱정했습니다. 2011년 봄에 태어날 둘째 또한 딸아이로 태어나기를 빌고 바랍니다. 우리 집 아이가 군대로 끌려가서 ‘사람으로서 사람을 죽이는 짓’을 배우거나 이러한 짓에 길드는 일을 바라지 않기 때문입니다.

 일찌감치 제도권 학교를 그만두어 ‘학력이 안 되기에’ 군대에 안 갈 수 있던 후배가 굳이 검정고시를 치고 애써 대학 시험을 보려 하면서 군대에 끌려가는 모습을 보며 혀를 찼습니다. 꿈을 이루는 길은 대학교에 없으며, 삶을 빛내는 길은 검정고시 자격증에 있지 않은데, 이런 데에 매이는 모습이 슬펐습니다. 공익근무를 하든 현역으로 가든 전투경찰이 되든, 계급으로 나누고 신분이 도사리며 명령과 지시에 따라 갖은 욕설과 얼차려와 주먹다짐이 있는 곳이란 사람이 사람다이 살아갈 수 없습니다. 더욱이 착한 넋과 참다운 얼과 고운 꿈하고는 동떨어집니다.

 무기를 든 손은 평화를 지킬 수 없고, ‘사람 죽이는 훈련’을 받는 사람은 사랑을 돌볼 수 없습니다. 군대는 평화를 지키지 않습니다. 군대는 평화를 억누릅니다. 군대는 더 커지려 하고 더 많은 시설과 장비를 갖추려 합니다. 군대가 커지면 커질수록 이 나라는 사회와 문화와 교육과 복지에 쓸 돈이 사라집니다. 더군다나 여느 나라살림을 북돋울 데에 쓸 돈조차 모자라고 말아 세금은 더 무거워지고 물건값은 한층 치솟습니다. 이웃나라가 갖가지 무기로 으르렁거리는데 우리들이 무기를 안 들 수 있느냐 하지만, 이웃나라 또한 우리하고 똑같은 생각으로 무기를 갖춥니다. 서로서로 서로를 바라보며 무기를 더 갖춥니다. 서로서로 평화를 생각한다는 말로 무기를 더 갖춥니다.


.. 도시유키도 중학생이 된 뒤로는 여자애와 만날 약속이 있는 날은 미리 어머니한테 말해서 마늘을 뺀 음식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그런 것을 그다지 중요하게 여긴 적은 없었고, 어머니에게 그렇게 부탁할 때마다 도시유키가 가슴 아파한 적도 없었다 ..  (39쪽)


 평화를 지키려 한다면 참말로 평화를 지킬 수 있는 삶을 일구어야 합니다. 평화를 사랑한다면 참으로 평화를 사랑할 만한 길을 걸어야 합니다.

 비둘기를 하늘에 뿌린다고 평화를 꿈꾸는 일이 되지 않습니다. 평화 노래를 짓거나 평화 포스터를 그린다고 평화가 태어나지 않습니다. 내 삶이 오롯이 평화여야 하고, 내 삶터가 옹글게 평화여야 합니다.

 평화는 꿈나라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로 내 삶이 평화요, 내 나라가 평화입니다. 윽박지르는 데에는 평화가 없고, 입시지옥이나 입시전쟁 사회에는 평화가 없으며, 돈 때문에 아프거나 우는 사람이 있는 터전에는 평화가 없습니다.

 풀포기 하나 마음껏 자라지 못할 뿐더러, 작은 꽃송이나 나무 하나 흙땅에 튼튼하게 설 수 없는 데에는 평화가 자리하지 못합니다. 평화가 자리하지 못하는 삶터에서 아이들이 ‘평화 동화책’이나 ‘평화 그림책’을 읽는다 한들 평화를 배우지 못합니다. 자동차 걱정 없이 골목에서 뛰어놀 뿐 아니라, 까만비닐 나풀대지 않는 논두렁과 밭두렁에서 까불대며 뛰어놀 수 있어야 평화를 배웁니다. 아이부터 어른까지 흙땅을 밟지 못하면서 흙땅을 못 밟는 삶을 깨닫지 못하니, 평화를 가르치거나 배우지 못합니다.


.. 여긴 한국이니까 한국말로 하라고, 길거리나 가게에서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 훈계를 들은 경험은 모두 갖고 있었지만, 선진국인 일본에서 일부러 건너와 도대체 뭘 배우려 하느냐는 빈정거림을 받은 사람도 있었다. 남학생들 가운데 병역에 대해 싫은소리를 들은 적이 없는 아이는 하나도 없었다 … 마사미 같은 재일교포는 절대 덮어놓고 일본을 칭찬할 수가 없다. 재일외국인으로서 겪는 불편함, 불리함, 차별 ……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재일교포는 그런 것들을 갖고 있었다. 세금을 내는데도 선거권은 주어지지 않고, 그런 것을 큰소리로 외치면 일본인들은 노골적으로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마사니는 중학교 때 동급생에게 화교로 오인받고 맥이 풀린 적이 있지만, 재일교포에 대한 일본인들의 대응은 ‘차별’이 아니면 ‘무관심’밖에 없다 ..  (162∼163쪽)


 우리 집 아이들은 평화를 사랑하는 예쁜 아이로 자라도록 돕고 싶습니다. 우리 집 아이들부터 평화를 아끼는 어여쁜 아이로 크도록 어버이 몫을 다하고 싶습니다. 자동차 소리와 매연이 넘실대지 않는 조용한 시골에서 흙을 사랑하는 어버이로 살아가는 내 매무새를 내 아이한테 살며시 이어 주고 싶습니다. 아이한테만 시골 아이가 되기를 바랄 수 없어요. 어른부터 시골 어른이 되어야겠지요. 아이한테만 착한 아이가 되라고 말할 수 없어요. 어른부터 착한 어른이 되어야 합니다. 예쁜 아이로 살아가기를 바란다면 예쁜 어른으로 살아야 하고, 마음이 넓은 아이로 살아가기를 바란다면 마음이 넓은 어른으로 살아야 합니다.


 (2) 예쁜 집


 서울사진축제가 서울 시립미술관 별관에서 열립니다. 서울사진축제를 여는 분들이 저한테서 사진책 300권을 빌려 가며 행사를 꾸리기에, 제 책이 어느 자리에 어떻게 놓였는가 돌아보려고 아이를 데리고 찾아옵니다. 눈나라인 시골집에서 실컷 눈이랑 씨름하며 지내다가 시외버스를 타고 서울로 나오니, 서울이나 서울 둘레에는 눈이 하나도 보이지 않습니다. 하기는, 시외버스를 타는 면내만 하더라도 눈이 하나도 안 보입니다. 안쪽으로 조금 깊이 들어가는 시골이거나 멧골이어야 비로소 눈 구경을 합니다.

 지난주에 집식구들이랑 인천마실을 며칠 하고 돌아왔을 때에 날이 몹시 추운 나머지 물이 꽁꽁 얼어 녹을 생각을 안 했는데, 어제 날이 꽤 풀렸을 때에 고맙게 녹아 주었습니다. 얼어붙은 물은 녹는데, 멧등성이와 논밭에 쌓인 눈은 고스란히 남고, 곳곳은 얼음투성이입니다.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지만 참 시골스럽고 멧골스럽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겨울이니까요. 겨울이니까 물이 얼다가 녹을 수 있지만, 다른 데는 겨울다운 모습을 고이 보여줍니다.


.. 가족 중에 한국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버지뿐이고, 그나마도 친척들과 이야기할 때 사용할 뿐이다. 따라서 도시유키에게는 한글이 무슨 기호처럼 보인다. ‘박준성’이라는 본명조차도 한국말로 뭐라고 읽는지 몰랐다. 통명인 아라이 도시유키라는 이름이야말로 자기 이름이라고 도시유키는 20년이 넘도록 믿고 있다 … 통명을 쓰느냐 안 쓰느냐의 차이는 있지만, 순자도 도시유키와 별 차이 없이 성장했을 것이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차별에 분노를 느끼는 일은 있어도, 분노로 직접 이어질 만큼 명확한 차별을 몸소 경험한 적은 없지 않을까 ..  (30, 48쪽)


 시외버스가 서울로 들어서고 강변역에 닿을 무렵, 어마어마하게 많은 자동차와 버스가 뒤섞였습니다. 15분 남짓 한 자리에서 꼼짝을 못합니다. 새삼스럽지는 않으나, 서울로 들어서거나 서울에서 나가거나 서울에서 돌아다닐 때가 가장 힘듭니다. 서울은 너무 많은 사람과 자동차와 건물과 길과 가게와 돈과 물건이 넘치는 바람에 언제나 어디서나 꽁꽁 막히거나 갇히기 일쑤입니다. 보드라운 바람처럼 보드랍게 다니기 어렵습니다. 시원한 바람처럼 시원하게 움직이기 힘듭니다.

 아마 부산도 비슷하겠지요. 인천 같은 데도 옛 도심은 썰렁하지만 새 도심은 복닥복닥 어지럽고 어수선하겠지요.

 전철로 광화문에서 내려 시립미술관 별관이 있다는 경희궁 쪽으로 걸어가는데, 아이하고 이야기를 나누지 못하도록 자동차 소리가 시끄럽고 가게에서 뿜어대는 소리에 귀가 따가웠습니다. 아이는 이쪽저쪽 쳐다보느라 바쁩니다. 제대로 걷지를 못합니다. 볼 데가 많고 눈을 끄는 곳이 수두룩합니다. 좁은 골목에서도 차는 이리저리 쏜살같이 내달리고, 큰길에서는 자동차가 거님길까지 올라와 버젓이 자리를 차지합니다.

 경희궁 앞에 닿으니, 차를 세우면 안 되는 자리에 까맣고 큰 차가 여럿 보입니다. 까맣고 큰 차 앞에는 경찰차가 여럿 섭니다. 둘레에는 까만 옷 차림 아저씨들이 여럿 무리지어 서성입니다. 바로 옆으로 조금만 가면 차 대는 널따란 데가 나오지만, 차 대는 데에 차를 대 놓지 않는군요. 왼편도 오른편도 차 댈 데가 널찍하게 있으나 이런 데에는 ‘무슨무슨 어르신’들 차를 세우지 않는군요. 사람이 걸어서 지나가야 할 한복판을 떡하니 가로막는군요.


.. “거봐. 저도 모르게 우리 말이 나오잖아.” “아니, ‘우리 말’은 또 뭐야?” 도시유키가 어리둥절해 하자, 순자와 수명이 동시에 대답했다. “우리들의 말.” “우리들의 말 …….” … 재미교포 친구들은 대부분, 적어도 마사미가 보기에는 완전히 미국인이 되어 버린 것처럼 보였다. 수업 시간을 빼면 그들은 아무 거리낌없이 서로를 통명-리처드나 스테파니 같은 영어 이름-으로 부르지만, 거기에는 재일교포 대부분 갖고 있는 감정적인 응어리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  (90, 153쪽)


 골목동네 한복판에서 아파트숲인 연수동으로 옮긴 삶터가 달갑지 않아, 고등학교를 마치고 나서 고향마을인 인천을 등졌습니다. 아파트만 빼곡하게 들어찬 연수동이라는 데는 사람이 살 곳이 아니라 느껴 인천을 떠났습니다. 갓 고등학교를 마친 저로서는 뾰족한 재주가 없으니 인천땅 다른 어디에 삯을 얻어 지낼 수 없습니다. 다만, 서울에 있는 대학교 한 곳에 붙어 다니는 무렵이니까, 대학교 앞에 있는 신문사지국에서 일하기로 했습니다. 신문사지국에서는 먹여 주고 재워 주기까지 한다기에 더없이 홀가분하게 고향을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부자 신문 돌리는 지국이 아닌 가난뱅이 신문 돌리는 지국인 터라, 우리 지국은 골목동네 안쪽에서도 지하방이었습니다. 신문사지국에 들어간 뒤 처음으로 지하방을 압니다. 인천에서는 아무리 가난한 살림집이라 하더라도 지하방은 없거든요. 달동네이든 철거촌이든 모두 햇볕 드는 땅에 집을 짓고 해바라기를 하도록 빨래를 내다 널고 햇볕 쬐는 자리에 꽃밭과 텃밭을 일굽니다. 그렇지만 서울이라는 데는 지하방이나 반지하방이 숱하게 많을 뿐 아니라, 햇볕 한 조각 들지 않는 집과 골목이 대단히 많습니다. 가난뱅이 신문을 돌리면서 가난뱅이 골목길을 골골샅샅 누비며 가난뱅이 살림집에 신문을 갖다 주고, 가난뱅이 살림집 사람들한테서 신문값 걷으러 다니며 새롭게 느끼고 배웁니다.

 서울이란 이렇구나.

 서울에는 갖가지 계급이 있고 온갖 신분이 있는데, 다들 용하게 뒤섞인 채 사는구나, 아니 뒤섞인다기보다 계급에 따라 동네와 골목이 갈리어 이렇게들 쪼그라들며 밟히는구나.


.. 마포구청 근처에 차를 세웠다. 길바닥이 갈라진 가파른 비탈길에는 자동차 몇 대가 아무렇게나 세워져 있었다. 불법주차라는 개념은 이 나라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차를 몰고 가다가 이미 주차된 차량 때문에 통행이 불가능한 길을 만나면 요란하게 경적을 계속 울려대고, 이윽고 나타난 주차 차량의 운전자와 한바탕 싸움을 하면 된다 … 접객업소라면 당연히 손님에게 상냥해야 할 텐데, 그런 개념도 이 나라(한국)에는 존재하지 않는구나 하고 마사미는 떨떠름했다 … 길거리에서 남과 부딪혀도 “미안합니다” 하는 한 마디를 들을 수 없었다. 거기에도 익숙해질 수밖에 없다고 체념하고 있었다 … 마사미가 정말로 쓰고 싶었던 것은 ‘나는 곤혹스럽다’는 거였다. 이 나라 사람들의 수선스럽고 거친 태도, 시끄러움, 뻔뻔스러움에 익숙해져야 한다고 아무리 자신을 타일러도 역시 익숙해질 수가 없다고. 한국 국적을 갖고 있는 내가 아직 한국말을 잘 못한다는 이유만으로 왜 이렇게까지 주눅이 들어야 하느냐고. 일본에 있을 때는 한국인임을 부그럽게 여긴 적이 한 번도 없는 내가 내 나라에 와서 이렇게 부끄러움을 느끼는 건 어찌된 일이냐고 ..  (117∼118, 132, 136쪽)


 서울은 사람도 자동차도 건물도 회사도 공공기관도 많습니다. 어떻든 서울에서 비비며 버티면 굶어죽지는 않습니다. 제법 돈을 만질 만합니다.

 서울로 오는 버스길에 새근새근 잠든 아이를 무르팍에 누인 채 톨스토이 님 책을 하나 읽었습니다. 톨스토이 님은 당신 문학을 빌어 ‘우리가 아름답거나 즐거이 살아가는 길’은 무엇인가를 넌지시 밝히거나 살며시 묻습니다. 당신 입으로 아름답거나 즐거이 살아가는 길을 밝히기도 하지만, 짐짓 모른 척하면서 우리한테 묻곤 합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갈 때에 더없이 아름다우면서 그지없이 즐거운 나날일까 헤아려 봅니다. 나부터 내 삶을 어디에서 어떻게 꾸릴 때에 한껏 신나면서 한결 어여쁠까 곱씹어 봅니다.

 제가 쓰는 책이 잘 팔리거나 제가 찍은 사진이 이름을 얻거나 제가 하는 일이 눈길을 널리 받을 때에 제 삶과 일과 놀이가 보람을 거둔다 할 만할까요. 제 살붙이하고 사랑을 나눌 수 있는 겨를을 누리는 보금자리에서 돈도 이름도 힘도 없이 책과 사진과 시골살이를 얼싸안을 때에 보람을 느낀다 할 만한가요.

 4만 원짜리 잠집에서 새벽녘에 일어나 고즈넉히 생각에 잠깁니다. 지난번까지는 3만 원짜리 잠집을 찾으러 서울 시내 골목을 다리 아프게 다녔는데, 3만 원짜리 잠집은 불을 잘 안 넣어 주고 침대방만 있어 아이하고 하룻밤 묵으며 고달팠습니다. 1만 원을 더 치르니 조금 낫기는 하지만, 서울에서 하루 얻어 자는 데에도 참 버겁습니다. 온돌방이라지만 씻는 데가 아주 좁습니다. 땅값이 비싼 서울이니 이만 한 데도 고맙게 여겨야 할 텐데, 잠집을 찾으러 아이를 안고 골목을 거닐다가 밤 열한 시가 가까운 데에도 손수레에 과일을 잔뜩 싣고 찬바람을 이기며 앉은 길장수 아지매를 보며 쓸쓸했습니다. 길장수 아지매는 이렇게 힘겨이 일하면서 얼마나 기쁘며 벅찬 보람으로 하루하루를 맞이하시려나요. 가방이 무겁고 아이를 안은 몸이라 능금 한 알 사지 못하고 지나쳤습니다.


 (3) 예쁜 이야기


 번역이 썩 고르지 못해 아쉬운 문학책 《그대는 이 나라를 사랑하는가》를 읽습니다. 재일조선인 문학을 한국말로 옮길 때이든 일본사람 문학을 한국말로 옮길 때이든 ‘알맞고 바르며 착한 한국말’을 찬찬히 살피는 번역쟁이는 너무 드뭅니다. 그렇다고 제가 일본말로 된 책을 읽을 수 없는 형편이니 그저 고맙게 읽어야 하지만, 책을 덮고 나서도 한참을 투덜투덜투덜 또 투덜댑니다.


.. “뭐랄까, 그 사람은 재일한국인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아예 모르고 있다는 느낌이야.” ..  (44쪽)


 문학책에서만 만나는 이야기가 아니라, 딱한 노릇이지만 한국사람은 한국사람이 남녘에만 있는 줄 알기 일쑤입니다. 북녘에도 한국사람이 있고 중국땅과 러시아땅에도 한국사람이 있다고 생각하지 못합니다. 아마 ‘한겨레’라는 낱말조차 제대로 살피지 못하리라 봅니다. ‘재일조선인이 있는 줄은 아예 모르는’ 삶이고, ‘중국조선족이 있는 줄은 까맣게 모르는’ 삶이며 ‘러시아한인이 있다고는 꿈조차 꾸지 않는’ 삶입니다.

 흔히들, 이 나라 정부가 나라밖 한겨레를 모른다고들 하지만, 이 나라 정부에 앞서 우리 스스로 모릅니다. 더욱이, 이 나라 정부를 비롯해 이 나라 사람 스스로 이 나라에서 외롭고 아프며 고단한 이웃을 모르거나 모른 척합니다. 이 나라에서 살아가는 이웃이나 동무가 어떠한 삶인지 가만히 들여다보지 않아요. 누구보다 이 땅 남녘나라에서 우리 스스로 물을 노릇입니다. “그대는 이 나라를 사랑하나요?”


..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내가 ‘아이 엠 코리언’이라고 했더니, 그 애는 기뻐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이 웃으면서 느닷없이 한국말로 말을 걸어 왔어.” “아아 …….” 재일한국인이 외국에 갔을 때 체험해야 하는 그런 종류의 이야기는 도시유키도 몇 번 들은 적이 있었다. “일본에서 태어나 자랐기 때문에 한국말을 못한다고, 서투른 영어로 아무리 설명해도, 그 애는 ‘왜 못해요?’ 하고 자꾸만 묻는 거야.” “으응 …….” “왜 못하냐고 물어도 대답하기 곤란하잖아?” ..  (72쪽)


 《그대는 이 나라를 사랑하는가》를 쓴 사기사와 메구무 님은 재일조선인이 아닙니다. 그냥 일본사람입니다. 이름부터 알 수 있듯, 사기사와 메구무 님을 낳은 어버이는 일본사람이었습니다. 사기사와 메구무 님이 소설쓰기를 하며 당신 집식구 뿌리를 하나둘 살펴 올라가다 보니 당신 할머니가 북녘에서 태어났던 사람이었음을 알았답니다. 당신 아버지는 한국사람 피와 일본사람 피가 반이 섞인 몸이고, 사기사와 메구무 님은 한국사람 피가 1/4 섞인 몸인 셈이에요.

 당신 아버지는 돌아가시는 날까지 한국사람 티를 낸 적이 없었고, 한국사람이라 말한 적이 없을 뿐더러, 어느 구석에서도 한국사람다운 모습을 찾지 못했다고 합니다. 당신 할머니가 당신 아버지한테 ‘네 뿌리는 어디이다’ 하고 안 가르쳐 주었는지, 가르쳐 주었으나 모르는 척하며 지냈는지는 알 수 없다고 합니다.

 사기사와 메구무 님은 당신 집안 뿌리를 알고 난 뒤부터 소설쓰기와 삶읽기가 달라집니다. 그동안 거의 생각하지도 않고 살피지도 않던 재일조선인 삶자락을 생각하거나 살핍니다. 애써 한국말을 배우려고 연세대 한국어학당까지 찾아와서 배웁니다. 재일조선인 삶을 들여다보고 부대끼면서 소설을 씁니다. 연세대 한국어학당으로 찾아와 한국말을 배우던 나날을 돌이키며 《개나리도 꽃 사쿠라도 꽃》(자유포럼,1998)이라는 수필책을 하나 내놓기도 합니다. 재일조선인 소설쟁이로서 ‘남녘나라에서 살아가는 한국사람이 얼마나 한국사람답고, 일본땅에서 살아가는 재일조선인은 어떠한 한겨레이며 일본땅에서 살아가는 일본사람은 또 얼마나 일본사람다운가’라는 대목을 소설로 깊이있게 파헤칩니다.


.. “너무 심해요.” 겨우 말했다. 말해 버리자 더욱 우스워져서, 더욱 요란하게 웃으면서 금방이라도 숨이 끊어질 것처럼 띄엄띄엄 말을 이었다. “역시 이 나라는 심해요.” 처음으로 입밖에 내어 말하고 있었다 ..  (196쪽)


 소설책 《그대는 이 나라를 사랑하는가》는 끝무렵 “아미는 이 나라를 사랑해(217쪽)?”라는 물음과 이 물음에 대꾸하는 주인공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주인공은 무어라 이야기했을까요?

 사기사와 메구무 님은 2004년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서른여섯 나이에 흙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늘까지 살아 마흔둘 나이였다면 이동안 새로 부대끼거나 복닥이는 삶자락 이야기를 더욱 깊고 넓게 담았으리라 생각합니다. 재일조선인과 한국사람과 일본사람이 얼크러지는 아프고 슬프며 고단한 삶을 아리따운 붓끝으로 그렸으리라 생각합니다. 미움과 따돌림을 싫어하고 사랑과 평화를 좋아하는 당신 넋을 실은 살가운 문학이 꽃을 활짝 피웠으리라 봅니다.

 책장을 다시 넘기고, 책을 쓰다듬습니다. 히유 한숨을 쉽니다. 예쁜 이야기를 빚어내는 예쁜 넋은 왜 무거운 짐을 잔뜩 짊어진 채 스스로 흙사람이 되려고 그렇게 빨리 몸부림쳐야 했을까 궁금합니다. 예쁜 넋을 한결 예쁘게 보듬으면서 예쁜 사랑과 예쁜 평화를 둘레 예쁜 벗하고 나누기 힘들었을까 궁금합니다. 밉살스럽거나 짓궂게 살아가는 사람도 많지만 예쁘고 해맑게 살아가는 사람 또한 많고, 밉살스럽거나 짓궂게 살아가는 사람조차 마음녘 한자리에는 어김없이 예쁜 꽃이 옹송그리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소설책 주인공보다 소설쟁이 사기사와 메구무 님은 이 나라를 몹시 사랑했으리라 생각합니다. 사랑하기에 아플밖에 없고 사랑하기에 슬플밖에 없습니다. 예쁜 나라 예쁜 겨레 예쁜 삶터로 거듭나지 못하고 미운 나라 미운 겨레 미운 삶터로 굴러떨어지며 전쟁사랑 돈사랑 학벌사랑 계급사랑 따위로 나아가기만 하니, 예쁜 넋잎 하나는 아파하고 또 아파하다가 그만 찬바람에 바들바들 떨며 숨을 거둡니다. (4343.12.21.불.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꽃이 펴야 봄이 온다 - 다름이라는 사선을 넘어서, 탈북 청소년의 당당한 자기 길 찾기
셋넷학교 엮음 / 민들레 / 2010년 2월
평점 :
품절




 주먹다짐으로 맞서는 남·북녘이기 때문에
 [책읽기 삶읽기 15] 셋넷학교 엮음, 《꽃이 펴야 봄이 온다》



 《꽃이 펴야 봄이 온다》를 읽는다. 남과 북으로 갈라졌을 뿐더러 일본과 중국과 러시아로 뿔뿔이 흩어진 채 살아가는 이 한겨레 조그마한 땅에서, 남녘땅으로 들어와 살아가는 북녘땅 푸름이들 삶과 넋과 꿈이 무엇인가를 담은 조그마한 책을 읽는.

 《꽃이 펴야 봄이 온다》는 북녘땅에서 살다가 남녘땅에서 살아가는 푸름이들 삶과 넋과 꿈을 담는 가운데, 사이사이 ‘남녘땅 셋넷학교 교사 목소리’를 곁들인다. 교사란 아이들을 이끄는 사람이고, 교사란 아이들보다 먼저 태어나서 이 땅에서 살아온 사람이다. 아이들보다 한 가지라도 더 잘 알거나 많이 안다면서 이런저런 앎조각을 나누어 줄 사람이겠지.

 지난 2007년에 나온 《금희의 여행》(민들레)이라는 책을 떠올린다. 《금희의 여행》은 함경도 아오지에서 태어나 살다가 7000킬로미터를 거치고 헤치면서 남녘땅에 자리를 잡은 작은 아이 삶을 작은 아이 목소리 결을 고스란히 살린 이야기책이다. 《꽃이 펴야 봄이 온다》 또한 아이들 목소리 결이 잘 살아나 있으나, 남녘땅 교사들 목소리가 섣불리 자꾸 끼어든다. 아이들 글을 읽거나 아이들하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관람기’와 같은 구경꾼 글을 끼워넣자면 맨끝에 몰아서 적바림을 하거나 아예 덜어야 하지 않았을까. 오늘 이 땅 이 둘레 사람들이 ‘다름을 안다지만 다름이 어떠한 다름인가는 모른다’고 한다면, 이들 푸름이들 목소리를 가만히 귀기울여 들을 노릇이 아닐까 생각한다. 김정길·김영심·김하늘·박영명·박정혁·윤나영·최금희·하복란, 이렇게 아이들 이름을 당차게 적바림하고, 이 아이들 스스로 제 이야기를 털어놓도록 곁이나 뒤에서 조용히 거드는 한편, 이 아이들이 한 자리에 둘러앉아 이야기꽃을 피우면서 ‘어떤 꽃이 피어야 어떤 봄이 올까’ 하는 이야기를 길어올리도록 이끌었어야 하지 않았나 싶다.


.. 처음 버스를 탈 때 잘못 타게 되었는데 ‘푸른마을까지 가려면 어떻게 가야 하나요?’라는 말이 내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우물거리는 나를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한국사람들이 순간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한민족이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모든 것이 달라 있었다. 한국 아이들이 입은 옷도 나와 달라 보였고, 그들의 말투 행동도 달랐다. 내 고향 아오지와 전혀 다른 서울에서의 삶은 불안의 연속이었다 … ‘도대체 왜 강원도에서 왔다고 말한 거야? 함경북도 아오지가 내 고향이라고 말하면 어때서?’ … 차라리 굶더라도 북한에서 친구들과 마음껏 말하고 뛰어놀며, 어디를 가도 내가 아는 사람들이어서 낯설거나 두렵지도 않았으면 더 나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 ‘그래, 나 아오지 여자야. 그래서? 너희 한국사람들은 북한사람 사귀면 감옥에 가냐? 그게 그렇게 창피한 일이야?’ ..  (19∼21쪽)


 아이들은 그냥 아이들이다. 이 아이들한테 꼬리표나 이름표를 붙이려 한다면 ‘탈북 청소년’이 아닌 ‘함경도 아이 아무개’라든지 ‘평안도 아이 아무개’라든지 ‘해주 아이 아무개’처럼 불러야 옳다고 느낀다. 《꽃이 펴야 봄이 온다》라는 책을 살피면, 책날개에 아이들 소개하는 글을 적어 넣을 때에 ‘탈북 청소년’이라 하고 ‘아이들 학력’을 달아 놓았다. 책날개에서 ‘탈북 청소년’이라는 이름은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아이들 학력을 굳이 달아야 했을까. 달아야 한다면 아이들 고향마을 이름을 달아야 옳지 않은가. 아이들은 남북녘·일본·중국·러시아라는 울타리를 넘어 서로 같은 한겨레임을 느끼면서 즐거이 어깨동무하기를 바랄 텐데, 이 아이들을 언제까지 이런 눈길로 바라보아야 하는가.

 아이들은 탈북 청소년이 아닌 그저 청소년이다. 꼭 대학교를 다녀야 무언가 일할 솜씨가 생기는 아이들이 아니다. 대학교라는 곳이 아닌 삶자리를 찾으며 아름다운 나날을 일굴 아이들이고, 분단과 전쟁이 아닌 평화와 통일을 꿈꿀 아이들이다.

 남녘이든 북녘이든 일본이든 중국이든 러시아이든 전쟁무기 만드는 일을 그쳐야 한다. 남녘이랑 북녘이랑 ‘군대 시설 현대화’는 집어치워야 한다. 남북녘 모두 군량미를 차츰 줄이고 군인 숫자를 나날이 줄여, 바야흐로 군대가 이 땅에서 모조리 사라지도록 해야 한다. 아이들한테는 군사훈련이 아닌, 착하고 참다우며 고운 마음을 갈고닦는 올바른 일거리와 놀잇감을 베풀어야 한다. 아이들은 손수 땅을 일구어 내 밥그릇을 햇볕과 바람과 물과 흙 기운을 담아 고맙게 얻는 흐름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나부터 아름다운 사람으로 거듭나면서 살가운 동무와 이웃을 사귀는 즐거움을 맛보아야 한다. 씩씩한 넋, 튼튼한 얼, 착한 마음, 고운 생각으로 푸르디푸른 삶을 보듬어야 한다. 나라에서는 군부대에 쏟아붓던 돈을 사람들 누구나 골고루 아늑하면서 즐거이 살아갈 수 있게끔 써서 문화와 복지와 교육과 의료를 가다듬는 데에 마음을 기울이고, 푸름이들은 서로를 한껏 사랑하고 아끼는 따스한 가슴을 북돋아야 한다.


.. 많은 교회가 북에서 온 우리들에게 도움을 주지만 그 목적이 선교를 위한 것이다. 전도하기 위해 접근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중국에서 일 년 동안 하루에 열두 시간씩 무릎 꿇고 성경을 읽은 경험이 있다 … 사람들한테 굳이 이런 공연을 보여주지 않아도 어디 가서든 당당하게 살 수 있는데, 하필 어릴 때 불렀던 노래를 부르게 하는지, 이해가 되면서도 반발심이 생겼어요 … 문제는 남과 북 모두 서로가 다름을 알고 있으나, 어떻게 다른가에 대해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  (27, 166, 251∼252쪽)


 연평도에 폭탄이 떨어졌으니 황해도 해주에 폭탄을 돌려주어야 한다면, 황해도 해주에서는 인천이나 서울이나 경기도에 미사일을 되퍼부어야 할 테고, 인천이나 서울이나 경기도에서는 평양이나 평안도에 미사일을 돌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하고야 만다.

 서로서로 얼마나 믿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며 아끼지 못했기에 이렇게 툭탁툭탁 다투어야 하나. 서로서로 얼마나 살피지 못하고 보듬지 못하며 어루만지지 못했기에 이토록 주먹다짐에 윽박지르기에 손찌검으로 마주해야 할까.

 총 한 자루 만드는 돈은 너무 아깝다. 총 한 자루 만든다며 바칠 땀은 몹시 슬프다. 총 한 자루 만드는 일꾼 품이랑 총 한 자루 움켜쥘 사람들 손길이랑 더없이 딱하다. 총이 아닌 쟁기를 쥐어야 하고, 총이 아닌 책을 들어야 하며, 총이 아닌 연필을 들어야 한다.

 어른들부터 꽃다운 삶을 돌보고, 아이들 또한 꽃다운 삶을 가꾸도록 힘써야 한다. 어른들이 앞장서서 손을 맞잡고, 아이들이 나중에 기쁘게 어깨동무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야 한다.


.. “아무리 내가 좋은 대학을 나와도 한국 아이들을 따라갈 수 없어. 경쟁이 심하고 아는 것이 별로 없는 우리로선 이 땅에서 공부를 해도 힘들어.” … ‘탈북자’라는 이름을 선호하는 사람들은 북에서 온 사람들이 새로운 사회에 정착하기 위한 사람이라고 인식하기보다, 살기 힘들어 북한을 탈출한 사람들이라는 점을 더 강조하는 것 같다. 또한 이 이름은 북한 사회의 부정적인 측면을 부각시키기 위한 이름이기도 하다 ..  (31, 243∼244쪽)


 《꽃이 펴야 봄이 온다》를 덮으며 생각한다. 가만히 보면, 이 땅 남녘나라에서는 북녘땅을 고향으로 둔 푸름이들 목소리를 찬찬히 담아낸 책 하나 거의 없지만, 정작 남녘나라에서 예쁘며 착하게 살아가는 푸름이들 목소리를 알뜰히 실어낸 책 하나 거의 없다. 아프고 힘겨이 살아가는 푸름이들 목소리조차 듣기 어렵다. 글쎄, 찾아볼 수 있을까? 다문 몇 권이나마 찾아낼 수 있으려나? 열다섯 푸른 아이 목소리를 어느 책이 실었을까. 열여섯 푸른 아이 삶무늬를 어느 책이 보여줄까. 열일곱 푸른 아이 마음결을 어느 책이 껴안을까.

 서로서로 사랑으로 꽃이 펴야 한다.

 남녘나라 어른들이 남녘나라 아이들을 참다이 사랑하지 않으니, 이런 메마르고 거친 곳에서는 북녘나라 아이들이 찾아왔을 때이건 일본땅이나 중국당 아이들이 찾아들 때이건 곱고 따스한 봄이 찾아오지 못한다. 찬바람 씽씽 부는 이 남녘땅에 무슨 꽃 무슨 봄이 있는가. 매몰찬 이 남녘나라에서 어떤 푸름이가 꽃다운 나이를 누릴 수 있는가. 꽃다운 푸름이를 군대에 집어넣어 살인기계로 바꾸어 내는 남·북녘 모두 사람이 사람다이 살아갈 수 없는 슬픈 불지옥이다. (4343.11.29.달.ㅎㄲㅅㄱ)


― 꽃이 펴야 봄이 온다 (셋넷학교 엮음,민들레 펴냄,2010.2.27./9000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평화는 어디에서 올까?
나카무라 유미코 외 지음, 이시바시 후지코 그림, 김규태 옮김 / 초록개구리 / 2009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읽기로 가르칠 수 없는 ‘전쟁과 평화’
 : 오노 카즈오·나카무라 유미코+이시바시 후지코, 《평화는 어디에서 올까》


- 책이름 : 평화는 어디에서 올까
- 글 : 오노 카즈오·나카무라 유미코
- 그림 : 이시바시 후지코
- 옮긴이 : 김규태
- 펴낸곳 : 초록개구리 (2009.3.25.)
- 책값 : 8500원



 (1) 청소년책이 있기는 있을까


 푸름이한테 읽히려는 책이 푸른책입니다. 푸름이가 푸른날을 말 그대로 푸르게 보내며 몸과 마음을 아름다이 일구도록 손길을 내미는 책이 푸른책입니다.

 나라안 어른이 일구는 좋은 푸른책이 있을 테고, 나라밖 어른이 마련한 좋은 푸른책이 있을 테지요. 그러면 나라안 어른은 이 나라 푸름이한테 어떤 책을 읽히려 할까 궁금합니다. 나라밖 어른은 당신이 살아가는 나라 푸름이한테 어떤 책을 읽히려 하나 궁금합니다.

 시골 살림집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아이와 복닥이며 생각합니다. 우리 아이한테 가장 사랑스러우며 기쁜 책은 무엇일까 하고.

 우리 아이가 좋아하는 그림책 하나가 우리 아이한테 가장 사랑스러운 책이 될까요. 우리 아이가 쏙 빠져드는 이야기책 하나가 우리 아이한테 가장 좋은 책이 되려나요.

 아이는 책을 읽으며 웃을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아이는 엄마나 아빠가 가슴과 가슴을 맞대어 포옥 안으면 으레 웃습니다. 가슴과 가슴을 맞대며 포옥 안을 때에 웃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제아무리 낑낑대더라도 제아무리 졸립더라도 가슴과 가슴을 맞대어 포옥 안을 때처럼 따사롭거나 넉넉한 때는 없다고 느낍니다.


.. 유타는 도모미가 까닭 없이 때리거나 발길질만 하지 않으면 정말 친하게 지낼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그런 유타의 마음도 모른 채 갑자기 도모미가 다가와 또 유타가 메고 있는 가방에 발길질을 하고는 도망가 버렸어요. 유타는 더는 참을 수 없어 도모미를 쫓아가 때려 주려 했지요. 그때 짝이 유타를 말리며 말했어요. “그러지 말고 그냥 말로 해. 아니면 너도 똑같아지잖아.” ..  (25쪽)


 지지난달에 일 때문에 아이 아빠 혼자 자전거를 끌고 서울로 마실을 나왔습니다. 이때에 좋은 벗님을 만나 신나게 술을 마셨습니다. 그러고는 잠자리를 찾아 비틀비틀거리면서 자전거를 끌었습니다. 자전거를 어딘가에 묶어 두고 택시를 타면 좋았으련만, 또는 가까운 잠집으로 찾아들었다면 좋았으련만, 술이 들어간 아이 아빠는 제 마음을 제대로 차리지 못했습니다.

 언덕길을 힘겨이 오르며 생각합니다. 왜 이렇게 힘들게 자전거를 타야 할까 하고. 그러다가 어두운 밤거리에서 길바닥에 무언가 떨어져 있는데 미처 살피지 못했고, 미처 살피지 못했기 때문에 무언가에 걸려 확 고꾸라집니다.

 어깨가 긁히고 무릎이 깨집니다. 안경은 다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자전거는 크게 다칩니다.

 이 망가진 자전거를 겨우 손질해서 이듬날 인천으로 끌고 갑니다. 그러나 망가진 자전거를 낑낑거리며 시골집까지 끌고 돌아갈 엄두가 나지 않아 놓고 돌아옵니다.

 바야흐로 날이 쌀쌀해지며 겨울이 코앞입니다. 임자 잃은 자전거가 안쓰럽게 홀로 우는 소리를 날마다 듣습니다. 도무지 이 자전거를 그대로 인천 골목동네 한켠에 그대로 둘 수 없습니다. 비를 맞지 않게 지붕 밑에 놓았으나 걱정스럽습니다. 더 추워지기 앞서 얼른 찾아와야겠다고 생각합니다. 바보스러운 짓을 했기에 바보스러운 짓을 씻고자 아이 아빠는 몸이 더 고단합니다. 이러는 동안 시골 살림집에는 몸이 무거워 고단한 아이 엄마가 홀로 아이하고 부대껴야 합니다. 아이 아빠가 깊이 생각하지 않은 채 저지른 잘못 하나로 여러 사람이 고달픈 셈입니다. 아이 아빠가 먼저 깊이 생각하며 차근차근 알뜰살뜰 살아내야 비로소 아이 아빠부터 즐겁고, 아이 아빠랑 함께 살아가는 아이 엄마랑 아이 모두 즐겁습니다.

 어쩌면 이렇게 바보스러운 짓을 저질렀기 때문에 나 스스로 얼마나 바보스러운가를 새삼스레 깨닫는달 수 있습니다. 넘어져 무릎이 깨져 보아야 아픔이란 얼마나 고단한가를 깨우치니까요. 뜨거운 물에 데어 보기도 하고, 칼질을 하다가 손가락을 베어 보기도 하며, 조그마한 텃밭을 쟁기로 갈며 이 조그마한 텃밭을 갈 때조차 힘이 얼마나 드는가를 느껴 보기도 해야 합니다. 이렇게 온몸으로 살아내야 내가 살아숨쉬는 한 사람임을 느껴요.

 좋아하는 노래를 조용히 읊습니다. 노래 한 가락 조용히 읊으며 되뇝니다. 나한테 가장 사랑스러울 책일 때에 내 아이한테도 가장 사랑스러울 책이 된다고 느낍니다. 이렇게 나부터 나 스스로 가장 사랑스럽다고 느낄 책이란 바로 내 삶이요, 내 삶을 담은 책을 내 아이하고 가장 사랑스레 즐길 수 있다고 느낍니다.

 이 나라에 청소년책이 있다면 아이 아빠나 아이 엄마로서 아이 아빠 삶이나 아이 엄마 삶을 담은 책이 있다는 소리라고 생각합니다. 이 나라에 청소년책이 없다면 아이 엄마나 아이 아빠 되는 사람이 제 아이를 알뜰히 사랑하는 마음이 아직 없거나 얕다는 소리라고 느낍니다.


 (2) 청소년한테 책읽기란


 이제 곧 전철을 타고 길을 나서면 머잖아 인천에 닿을 테며, 인천에 닿으면 골목마실을 살짝 한 다음 자전거를 찾을 테지요. 전철길에는 가방에서 책 하나 꺼내어 읽습니다. 전철길은 털털탈탈 흔들한들 하는데 이 흔들거림을 내 몸으로 받아들이며 고개를 이리 갸우뚱 저리 갸우뚱 하는 가운데 책을 읽습니다.

 전철길에 책 하나 다 끝내기도 하지만, 부러 몇 쪽을 남기기도 하며, 일부러 몇 쪽만 읽고 다른 책을 꺼내기도 합니다. 책읽기란 어느 책 하나를 첫 줄부터 끝 줄까지 빠짐없이 재빨리 읽어치우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한 줄을 즐기며 한 줄을 다시 즐길 수 있는 책읽기입니다. 한 줄로도 즐거운 책이요, 한 줄로 넉넉히 고마운 책이에요.

 전철길에서든 버스길에서든 책을 읽다가 문득 고개를 듭니다. 흔들리는 탈거리에서 책에 푹 빠지다 보면 고개가 아프거든요. 목을 풀고자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립니다. 이럴 때에 으레 둘레를 한 번 휘 둘러봅니다. 아, 이 전철길이나 이 버스길에서 책을 읽는 사람은 거의 나 혼자뿐이구나. 어, 오늘은 모처럼 책을 읽는 사람이 드문드문 보이네, 저이는 어떤 책에 저렇게 푹 빠졌으려나.

 흔들거리는 전철이나 버스를 타며 책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은 어릴 때부터 책을 가까이한 사람입니다. 흔들거리는 전철이나 버스를 타며 책을 읽을 줄 모르는 사람은 어릴 적부터 책을 가까이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어느 쪽이 더 낫다 말할 수 없습니다. 책을 읽는다고 대단하거나 훌륭하지만은 않고, 책을 안 읽는다고 안 대단하다 할 수 없으나, 그렇다고 또 대단하다 할 수도 없어요. 왜냐하면 책읽기란 삶읽기이거든요. 책읽기를 삶읽기로 깨우치며 살아간다면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더 아름다운 매무새로 거듭납니다. 책읽기를 삶읽기로 받아들이는 몸가짐일 때에는 비록 책을 손에 쥐지는 못하지만 살결 그을리며 일하는 기쁨을 압니다. 머리가 아닌 몸으로 알고, 머리가 아닌 몸에 새기는 일이며 놀이예요. 다른 사람이 적바림한 다른 사람 삶 담긴 책은 모르지만, 내가 적바림할 만한 내 삶 담을 책을 알아요.


.. 할아버지가 어릴 때에는 집 가까이 있는 개울에 물고기가 헤엄치고 살았답니다. 그래서 물고기를 잡아 저녁 반찬으로 먹었다고 해요. 그때에는 물고기를 잡는 일이 아이들 몫이어서 많이 잡아 오는 날이면 식구들에게 크게 칭찬을 받았답니다. 하지만 지금은 개울이며 시내가 사람들이 함부로 버린 쓰레기로 시궁창이 되고 말았어요 … 요즘처럼 아무 때나 가게에 가면 바로 살 수 있는 채소는 제맛이 나지 않는다고 하셨어요 ..  (29∼30쪽)


 이 땅 푸름이가 책을 가까이한다면 이 땅 푸름이를 키우는 어버이가 책을 가까이한다는 뜻입니다. 이 땅 푸름이가 책을 가까이하지 않으나 책삶과 땀삶과 눈물삶과 웃음삶을 고이 일군다면 이 땅 푸름이를 돌보는 어버이 스스로 알뜰한 살림꾼으로 힘차게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청소년범죄란 따로 없습니다. 이리하여 청소년문화란 따로 없습니다. 마땅하게 청소년책이란 따로 없습니다. 그예 범죄이고 문화이며 책이에요.

 어른만 몰래 즐기는 놀이란 없고, 청소년만 몰래 노닥거리는 놀이란 없습니다. 어른만 살짝 맛보는 삶이란 없고, 청소년만 살짝 맛보는 삶 또한 없어요. 누구나 한 사람 고운 목숨으로 살아내는 하루요, 어디에서나 다 함께 어깨동무할 나날입니다.

 그러나 우리 삶터는 참 바쁘고 퍽 메마릅니다. 애써 ‘청소년한테 청소년책을 읽히려고 힘을 쏟는 모임이나 출판사’가 있어야 하고, 교사들은 아이들한테 아이들 눈높이에 걸맞는 책을 찾아 주려고 용을 써야 합니다. 아이들한테 따로 이러저러한 책을 읽도록 해 주어도 나쁘지 않지만, 아이들과 더 오래오래 어울리면서 삶을 누리지 못하니까, 그나마 책이라도 쥐어 주려 합니다.

 어린이책이라 할 수 있고 청소년책이라 할 수 있으며 어른책이라 해도 틀리지 않는 《달걀 한 개》라는 이야기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훌륭하다 여길 수 있고 썰렁하다 볼 수 있으며 그냥 그렇다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어찌 되든 이야기책 하나인 《달걀 한 개》인데, 이 책에는 ‘몸 여린 시골 교사 한 사람이 아이들하고 살아 있는 공부’를 했던 이야기 한 자락 실립니다. 이 시골 교사가 얼른 몸이 나으라며 시골 어머님들은 아이 손에 달걀을 하나둘 쥐어 주며 선물로 드리라고 말합니다. 시골 교사는 시골 어머님들한테서 달걀을 잔뜩 받습니다. 왜냐하면 한 집에서 한두 알씩 주었지만, 열 집이면 열이나 스무 알이요, 스무 집이면 서른이나 마흔 알이 되거든요.

 시골 교사는 달걀을 홀로 먹지 않습니다. 홀로 먹을 수 없을 만큼 너무 많습니다. 어찌 할까 헤아리다가 이 달걀로 ‘산 배움’을 나누기로 마음먹고, 아이들을 불러 아이들 스스로 달걀을 삶아 먹도록 이끕니다.

 이 달걀 삶기는 교과서에 안 나옵니다. 요리책에 딱히 안 실립니다. 왜냐하면 시골 아이들이랑 시골 교사가 즐긴 ‘달걀 삶기’는 아이들이 산에서 삭정이를 주워 와 손수 불을 지핀 다음 가마솥에 불을 붓고 달걀을 넣어 삶는 일이거든요. 이렇게 달걀을 삶으라고 이야기하는 요리책이란 없어요. 그렇지만 시골 교사는 이렇게 달걀 삶기를 함께 즐겨요. 그러니까, ‘시골 교사 달걀 삶기’란 바로 ‘책 하나’인 셈이요, 아이들 모두하고 ‘책읽기’를 즐긴 셈입니다.


 (3) 《평화는 어디에서 올까》를 읽으려면


 청소년책이라 해도 되고 어린이책이나 어른책이라 해도 되는 《평화는 어디에서 올까》를 읽으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습니다. 이 나라 오늘날 도시 교사 가운데, 또 시골 교사 가운데 《달걀 한 개》에 나오듯 아이들하고 어울리면서 달걀 삶기를 할 만한 분이 한 사람쯤 있을까 궁금하거든요. 《평화는 어디에서 올까》 같은 이야기책을 아이들한테 들려주어도 좋으나, 어른과 아이가 함께, 교사와 학생이 함께, 어버이와 아이가 함께, 달걀 삶기를 하듯이 삶읽기를 즐기면 더욱 좋거든요.


.. 지금 대인지뢰를 없애기 위해 국제연합과 전 세계 여러 나라가 노력을 기울이고 있어요. 1997년 12월에는 세계 여러 나라 대표들이 캐나다 오타와에 모여, 대인지뢰를 모두 없애고 더는 만들지 말자는 뜻으로 ‘대인지뢰 금지 협약’을 채택해 서명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지뢰를 만들고 있는 미국, 러시아, 중국 같은 나라가 이 협약에 서명하지 않고 있답니다 ..  (57쪽)


 《평화는 어디에서 올까》에 담은 이야기는 남다르지 않습니다. 대단한 지식을 다루지 않습니다. 놀랍거나 새롭거나 어마어마하거나 훌륭한 이야기를 다루지 않습니다. 그저 누구나 어디에서나 살아가는 이야기를 다룹니다.

 전쟁이란 늘 우리 곁에 있고, 평화 또한 노상 우리 둘레에 있어요. 우리 스스로 못 느낄 뿐인 전쟁이고 평화예요. 그래서 《평화는 어디에서 올까》를 읽으며 전쟁과 평화를 가르칠 수 있으나, 이 책을 함께 읽는달지라도 전쟁이든 평화이든 가르칠 수 없기도 합니다.

 제아무리 빼어나거나 좋은 책이더라도 추천목록이나 권장목록에서 박제처럼 굳을 수 있습니다. 그냥 아이 스스로 깨달으라 하면서 던져 줄 수 없는 책입니다. 아이한테 책을 읽히자면 아이 삶으로 스며들도록 해 주어야 하고, 아이 삶으로 책 하나 스며들자면, 아이한테 책을 건네는 어버이나 교사가 먼저 당신 몸으로 책을 녹여 놓아야 합니다.

 아이 머리칼을 쓰다듬으면서 볼에 뽀뽀 한 번 하고 영차 하고 안아올려 까르르 웃음짓게 하는 여느 삶에 평화가 듬뿍 배어 있습니다. (4343.11.10.물.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도미니크 - 생활 팬터지 익사이팅북스 (Exciting Books) 22
윌리엄 스타이그 지음, 서애경 옮김 / 미래엔아이세움 / 2006년 5월
평점 :
절판



 사랑과 꿈을 가슴에 품고 있나요
 [푸른책과 함께 살기 67] 윌리엄 스타이그, 《도미니크》



- 책이름 : 도미니크
- 글·그림 : 윌리엄 스타이그
- 옮긴이 : 서애경
- 펴낸곳 : 아이세움 (2003.1.30.)
- 책값 : 7500원


 (1) 이웃을 사랑하는 삶


 온누리에는 책이 참으로 많이 나와 있습니다. 이 가운데에는 짓궂거나 못나거나 볼썽사나운 책이 제법 있으나, 훌륭하거나 거룩하거나 아름다운 책이 참 많습니다. 짓궂은 책만큼 훌륭한 책이 많고, 못난 책만큼 거룩한 책이 많으며, 볼썽사나운 책만큼 아름다운 책이 많습니다.

 잘 팔리는 책이면서 훌륭한 책이 있습니다. 잘 팔리지만 짓궂은 책이 있습니다. 널리 알려진 책이면서 거룩한 책이 있습니다. 널리 알려졌으나 못난 책이 있습니다. 두루 손꼽히는 책이면서 아름다운 책이 있습니다. 두루 손꼽히기는 하나 볼썽사나운 책이 있어요.

 책을 마주하는 매무새는 삶을 마주하는 매무새하고 닮습니다. 나로서는 참 훌륭하거나 거룩하거나 아름답다고 여기는 삶을 붙잡으며 씩씩하게 걸어간다고 생각할는지 모르나, 정작 내가 걷는 이 길이란 더없이 짓궂거나 못나거나 볼썽사나울 수 있습니다. 나 홀로 못 느낄 수 있어요. 이와 마찬가지로, 더할 나위 없이 짓궂거나 못나거나 볼썽사나운 책을 즐겨읽으면서 이 책이 얼마나 짓궂거나 못나거나 볼썽사나운지를 못 깨달을 수 있습니다.

 아는 만큼 책을 찾아 읽지 못해요. 내가 살아가는 만큼 책을 찾아 읽어요.


.. 한 번도 가 보지 못한 낯선 세상에 나가면 자기 앞에 무슨 일이 닥칠지 알고 싶었던 것이다. 그 일이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상관없었다 … “나도 내 운수에 관심이 많습니다만, 무슨 일이 일어날 때마다 그때그때 맞혀 보는 게 더 재미있을 것 같은데요.” … 도미니크에게 도전은 기쁨이었다. 살면서 맞닥뜨리는 일은 무엇이든 한 생명의 재주와 능력에 대한 이런저런 시험이었다 ..  (11, 13, 26∼27쪽)


 내가 아는 대로 책을 읽지 못하는 얼거리 그대로, 내가 아는 대로 이웃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내가 아는 대로 이웃을 사랑해 준다지만, 내 이웃은 내가 보내는 사랑이 싫거나 못마땅하거나 껄끄럽거나 괴롭거나 힘들 수 있습니다. 나로서는 사랑을 보낸다며 보내지만, 내 사랑을 받는 쪽에서는 못 견뎌 할 수 있어요,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나 속으로는 앓거나 아파할 수 있답니다.

 참말로 사랑이라 한다면 ‘보내는 사랑’이기 앞서 ‘받는 사랑’이어야 합니다. 보내는 내가 ‘나로선 할 만큼 하는’데 ‘저이는 왜 이렇게 못 받아들이느냐’고 투덜댄다면, 이는 사랑일 수 없습니다. 받는 사람이 ‘저이가 사랑을 보냈나?’ 하고 느끼지 못할 만큼 찬찬히 스며들 때라야 비로소 사랑입니다. ‘내가 이만큼 해 주었다’고 하면서 우쭐거리는데 무슨 사랑이겠습니까. 이런 마음씀이란 권위이거나 권력이라는 이름이 붙는 못난 짓입니다. 흔히 이웃사랑이라는 이름을 내걸며 ‘불우이웃돕기’ 같은 일을 벌이는데, 이웃을 돕겠다면 그냥 ‘이웃돕기’를 해야지 ‘불우이웃’을 돕는다는 일은 말이 안 됩니다. ‘불우’란 무엇이며, 누가 ‘불우’한 삶인가요(더 살핀다면 이웃‘돕기’라는 이름도 어울리지 않습니다. 돕는다니 뭘 도와? 돈푼 좀 보탠다고 돕는 셈인가?). 나한테 돈이 조금 더 있다고 나보다 돈이 더 적은 이를 섣불리 ‘불우’하다고 깔볼 수 없습니다. 내가 돈 좀 보태 줄 수 있다면서 나한테서 돈을 얻는 이를 얕볼 수 없어요.

 사랑이라 한다면, ‘사랑을 받아 주는 쪽’이 훨씬 거룩하며 아름답습니다. 사랑을 받아 주는 가슴이 얼마나 넓고 깊은지를 ‘사랑을 베푼다는 쪽’은 으레 못 느끼거나 못 알아채거나 못 깨닫곤 합니다.


.. 두 시간 전만 해도 바솔러뮤 배저 노인은 살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저 세상으로 가고 없었다 … 많은 이들이 지금 도미니크가 하듯이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놓고 질문을 하겠지. 새로운 목숨들의 세상이 오면 도미니크의 세상은 끝나 있을 것이다. 많은 이들이 지금 이 시간을 과거로 생각하겠지. 그때가 되면 미래는 현재가 될 테고 … 슬픔이 밀려들자 그 아름다움도 빛을 잃었다. 슬픔이 물러가면 아름다운 세상이 다시 얼굴을 드러내겠지 ..  (50, 51, 52쪽)


 천주교나 기독교 같은 서양 종교를 믿는 한국사람이 참으로 많습니다. 이 서양 종교를 밝히는 성경책에는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며 아끼라 이야기하는 한편, 이런 이야기를 노래로 지어 자주 부릅니다.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여길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사랑이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내 이웃한테 사랑을 베푼다 할 때에 내 이웃이 ‘불우’해질 때까지 기다릴 수 없습니다. 내 배가 고프면 금세 알지요? 하루에 한 끼니만 걸러도 배가 고프며 기운이 딸리지 않습니까? 그러면 내 이웃이 하루 내내 배를 곯는다든지 살림돈이 모자라 몇 달째 허덕인다든지 대물림을 하듯 가난을 대물림하고 있다면 어찌해야 하나요? 나중에 내 이웃이 파산신고까지 하고 나서야, 달삯방조차 얻지 못해 길바닥에서 구르고 있을 때라야, 라면 몇 상자와 쌀 몇 봉지와 연탄 몇 장 가져다주면 사랑이 되겠습니까.

 지난날, 굳이 이웃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으며 이웃으로 지내던 이들은 ‘쌀이 없지만 티를 내지 않으려고 가마솥에 불을 끓이며 굴뚝에 연기를 내보내는지, 참말 밥을 하며 굴뚝에 연기를 내보내는지’ 알아챘습니다. 왜냐하면 밥을 하면 밥냄새가 나잖아요. 숟가락 딸그락거리는 소리가 날 테고요. 오늘날처럼 자동차가 드글드글대지 않던 지난날에는, 흙으로 벽을 바른 자그마한 이웃집에서 내는 조그마한 소리조차 다 들리곤 했습니다. 구태여 숟가락 숫자가 몇인지 세지 않아도 뻔히 아는 살림입니다.

 요즈음은 이웃을 돕고자 돈을 내어놓기보다, 내 살림을 지키고자 감시카메라 마련하여 달아 놓는 데에 돈을 씁니다. 이웃하고 오순도순 나누고자 돈을 덜기보다, 내 자동차를 더 크고 빠른 녀석으로 바꾸는 데에 돈을 씁니다.

 이런 이야기들은 어른한테만 할 이야기는 아니라고 느낍니다. 어른들이 이와 같이 살아간다면, 푸름이와 어린이도 이와 같이 살아간다고 느낍니다. 어른들 이야기를 하나하나 따질 때에 우리 푸름이와 어린이 앞날을 하나하나 톺아보는 셈이라고 느낍니다. 우리 푸름이와 어린이 들이 학교에서 시험을 치를 때에 옆 짝꿍 시험지를 훔쳐보거나 어딘가에 쪽글을 적바림해 놓고 몰래 베낀다 한다면, 어른들이 이런 짓을 하니까 푸름이와 어린이가 따라하지, 푸름이와 어린이 스스로 새로 만들어서 못된 짓을 일삼지 않아요. 푸르거나 어린 넋이 새로 만드는 못난 짓이란 없습니다. 구지레한 짓을 일삼는 어른이 푸르거나 어린 넋을 못난 사람으로 물들입니다.

 내가 착하게 살고 싶으면 내 이웃도 착하게 살도록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내가 사랑스레 살고 싶다면 내 이웃 또한 사랑스레 살도록 어깨동무를 해야 합니다. 내가 즐겁게 살고 싶을 때에는 내 이웃이 언제나 즐겁게 살도록 마음을 기울여야 합니다.


.. 착한 이들하고만 행복하게 살 수 있다면 그보다 기쁜 일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이 세상 누군가가 악당과 싸우고 있는 한, 착한 이들과 함께 있다고 마냥 행복해 할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  (182쪽)


 (2) 살붙이 사랑하는 삶


 어제 낮, 스물일곱 달째 함께 살아가는 딸아이가 똥을 누고 나서 밑을 씻기고 머리를 감기며 몸을 씻어 줄 때에 좀 미지근한 물로 씻겼습니다. 미리 보일러를 돌려 물을 덥혔어야 했는데 보일러를 늦게 돌리는 바람에 따뜻한 물을 쓰지 못했습니다. 아이는 몸을 말끔히 씻은 다음 덜덜 떱니다. 여느 때에는 양말을 벗는다느니 바지를 한 벌만 입겠다느니 웃옷을 얇게 입겠다느니 그러더니, 어제는 어머니 품에 꼭 안기며 이불을 뒤집어쓴 채 꼼짝을 안 합니다. 저녁이 되니 몸이 후끈거립니다. 여느 때에는 말괄량이인 아이가 아주 얌전합니다. 고단한 아버지가 자리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드러누워 아이를 부릅니다. 아이를 눕히고 그림책을 읽습니다. 아이는 이불을 폭 쓴 채 그림책을 너덧 권 함께 봅니다. 그런데 아이 눈에 눈물이 송글송글 맺히더니 또르르 구릅니다. 이런, 아이가 참으로 몹시 아프구나.


.. 도미니크는 생각했다. 만약 만물을 창조하는 일이 자기에게 주어졌다 해도, 만물을 하나도 똑같지 않게 만들었을 것 같았다. 나뭇잎마다 꼭 알맞은 자리에 있었다. 자갈, 돌멩이, 꽃, 이 모든 것들이 꼭 있어야 할 자리에 있었다. 물은 흘러야 할 곳으로 흘렀다. 하늘은 꼭 알맞게 푸르렀다. 모든 소리는 조화로웠다. 모든 것들이 알맞은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도미니크는 자기 자신의 주인이었고, 세상과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  (33쪽)


 아이를 일찍 재우려 하지만, 아이는 일찍 잠들려 하지 않습니다. 일찍 안 자려 하는 모습은 아플 때에도 마찬가지로군요. 하는 수 없이(?) 아이 아버지는 일찌감치 쓰러집니다. 이내 아이도 잠자리에 듭니다. 아주 고맙게. 아이는 자는 내내 아버지 곁에서 “쫀!” 하면서 아버지보고 손을 달라 하며 붙잡습니다. 아이 어머니는 잠들고 나서 잘 깨어나지 못하거든요. 아니, 깨어나지 못한다기보다 몸이 무거워 머리는 깨었어도 몸을 못 움직입니다. 이리하여, 지난주부터 어젯밤까지 밤새 아이하고 아이 아버지는 잠을 못 잡니다. 잠들라 치면 아이가 “아부지, 쫀!” 하면서 손을 달라 합니다. 조금 잠이 들어 쉴라치면 어느새 기저귀에 오줌을 누고는 “젖었어!” 하고 외칩니다. 새벽 네 시 사십오 분까지 어영부영 버티다가는 조용히 큰방으로 건너와 셈틀을 켜고 글쓰기를 하자니, 또 다섯 시 반까지 이렇게 복닥복닥합니다. 그나마 후끈 달아오르던 아이 몸이 많이 가라앉았습니다.

 아이하고 함께 살아가며 늘 내 어머니하고 내 아버지를 떠올립니다. 내 어머니하고 내 아버지는 내가 우리 아이만 한 나이였을 적에 나를 어떻게 돌보았을는지 궁금합니다. 내 몸은 그리 튼튼하지 않아요. 어릴 적에 늘 갤갤거렸습니다. 우리 아이는 꽤 씩씩하고 튼튼해서 어버이한테 걱정을 끼치는 일이 드뭅니다. 어쩌다 한 번 이렇게 몸앓이를 해요. 그렇지만 아이 아버지인 저는 어릴 적에 자주 몸앓이를 했는데, 이때마다 내 어머니하고 아버지는 어떤 마음 어떤 느낌 어떤 생각이었을까요. 저처럼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며 고단해야 했을 텐데 어떻게 받아들여 주었을까요.

 아이를 낳아 기른다고 모두 어른이 된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아이를 낳아 기른다지만 아이하고 보내는 겨를이 몹시 짧거나 거의 없는 어버이가 이 나라에 얼마나 많습니까. 나이 서른 마흔 쉰이 된다고 어른이지 않습니다. 아이를 하나 둘 셋 넷 낳아 기른다고 어른이지 않아요. 삶과 넋과 말이 오롯이 어른이어야 해요. 삶과 넋과 말을 오롯이 아이하고 부대끼면서 살아내야 어른으로 자리잡아요.


.. 도미니크는 호락호락 물러나지 않았다. 보물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도미니크는 어떤 종류의 악한 짓도 증오했다 ..  (57쪽)


 집일을 남자가 하는 집은 썩 많지 않습니다. 예전보다는 늘었다 하겠으나 집일은 으레 여자가 합니다. 또는 밥어미를 두겠지요. 아니면 할머니를 모시고 산다 하면서 집일을 할머니한테 맡기든지요.

 아무리 몸이 힘들다 할지라도 그날그날 저녁을 먹은 다음 설거지를 하면서 이듬날 아침에 새로 밥을 할 쌀이나 곡식(콩이나 옥수수나 다른 곡식)을 씻어서 불려야 합니다. 누런쌀이라면 저녁에 불려놓고 이듬날 아침에 하고, 흰쌀이라면 새벽에 씻어서 불린 뒤 아침에 밥을 지으면 됩니다. 이래저래 손이 많이 가며 품을 많이 들입니다. 그나마 저는 살림을 잘하는 사람이 아닌 터라, 밑반찬은 거의 안 하고 찌개 하나를 끓입니다. 그런데 이렇게만 하는 데에도 얼마나 많은 품과 땀과 틈을 들여야 하는지요. 밑반찬을 꼬박꼬박 새로 만들거나 도시락을 싸는 이 나라 수많은 어머님들은 집살림에 아주 온삶을 바치는 셈입니다. 이 나라 남자들은 이 나라 여자들 땀과 품과 틈으로 먹고산달 수 있어요. 이른바 ‘가사노동’은 돈이 나오지 않는다 하고, 돈으로 따지지 않으며, 아예 노동으로 안 치기까지 합니다. 죽은 전태일 열사는 생각하지만 산 이소선 어머님은 생각하지 못해요. 그나마 이소선 할머님이 오래오래 살아가니까 이소선 ‘어머님’을 기리거나 모시는 이들이 있지, 당신이 일찍 숨을 거두었으면 ‘(남자) 노동자’만 돌아볼 뿐, ‘(여자) 살림꾼’은 돌아보지 않습니다. 그나마, 이소선 할머님을 떠올릴 때에도 으레 ‘전태일 어머니’라고만 여기지, ‘집살림을 하는 여자’로는 살피지 못합니다.


.. 혈맹파 패거리가 세상을 파괴하는 온갖 짓을 일삼는 동안, 말 못 하는 나무들은 한 폭의 그림처럼 둘러서서 아무 행동도 하지 못하고 꾹 참고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일을 지켜보면서 분노와 슬픔과 모욕감을 차곡차곡 쌓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나무들이 사랑하는 개 도미니크는 나무들 가운데서, 숲의 심장 한가운데서 목숨을 잃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무들은 오랜 침묵을 깨뜨리고 뜻을 전하기 위해 스스로 가지를 꺾고 분질렀다. 도미니크는 그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깨어나 모든 상황을 알아차렸다. 악당들은 무기를 높이 쳐든 자세를 하고 있었지만 두려움에 몸이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바로 그 순간 나무들이 악당들을 향해서 몸을 굽히고 말했다. “부끄러운 줄 알아라!” ..  (187쪽)


 날마다 밥을 새로 하고 설거지를 잔뜩 하며 이불을 털고 방바닥을 쓸고닦는데다가 빨래를 해서 털고 널고 걷고 개면서 생각합니다. 아이를 안고 어르며 놀면서 생각합니다. 새벽에 졸립고 지친 몸을 일으켜 글을 쓰면서 생각합니다. 빛나는 옛 어르신은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목구멍에 가시가 돋힌다 말씀하셨는데, 저로서는 하루라도 밥을 하지 않거나 걸레질을 하지 않거나 손빨래를 하지 않거나 아이하고 복닥이지 않으면 온몸에 두드러기가 돋습니다. 사람이 사람다이 살아가는구나 하고 느끼지 못합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손빨래가 퍽 고단하다고 느끼지만 빨래를 기계한테 맡길 수 없습니다.

 아직 힘이 있어 할 만한지 모르지만, 서두르지 않으며 차근차근 나누어 하면 손빨래를 얼마든지 할 만합니다. 밥하기이든 쓸고닦기이든 이불털기이든 매한가지입니다. 아이하고 놀 때에도 신나게 놀다가 드러누워서 “얘야, 좀 쉬면서 놀자.”고 말할 수 있으며, 아이 스스로 다른 놀이를 하도록 놀잇감이나 책을 내어 주고서는 한동안 등허리 펴자며 드러누울 수 있습니다. 아이가 이것저것 잔뜩 늘어놓거나 어지른다면 한숨이 절로 나오지만, 아이가 스스로 치울 수 있게끔 잘 타이르며 가르치면 됩니다. 어쩌면, 아이가 이것저것 늘어놓기 때문에 차곡차곡 갈무리하도록 가르칠 수 있습니다.

 돈으로 살 수 없을 뿐더러, 이름값이나 권력으로 지키거나 누릴 수 없는 사랑입니다.


 (3) 나를 사랑하는 삶


 이야기책 《도미니크》를 읽습니다. 이야기책 《도미니크》를 이끄는 주인공은 멍멍이인 ‘도미니크’입니다. 도미니크는 새로운 삶을 찾아 고향마을을 떠나기로 하며 이야기 첫머리를 엽니다. 도미니크는 길디긴 모험을 해 보고자 합니다. 낯선 땅으로 찾아가 낯선 사람을 만나며 낯선 삶을 부대끼는 가운데 낯선 일을 만나고 싶어 합니다. 멍멍이 도미니크는 한창 젊은 나이이거든요. 이대로 고향마을에서 눌러 지내도 좋을는지, 다른 무슨 일을 찾아야 좋을는지, 이제껏 모르던 꿈이 있는지를 알아보고자 먼 나들이를 떠납니다.


.. “내 나이는 올해로 백 살이네.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전부 다 하려면 백 년이 걸릴 걸세.” ..  (40쪽)


 도미니크가 만난 돼지 할아버지는 백 살이랍니다. 백 살치 이야기는 백 해에 걸쳐 해도 다 못할 수 있어요. 그러면 도미니크는? 글쎄요. 아마 며칠쯤 하다 보면 금세 동이 날는지 모릅니다. 도미니크가 살아온 햇수가 스무 해라 할지라도 스무 해치 이야기를 ‘어떻게 어느 만큼 어찌어찌’ 풀어내면 즐거울는지를 도미니크 스스로 아직 모르거든요.


.. “세상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 참 아름답습니다. 나는 그것을 있는 그대로 그려서 살아 있는 것들에 경의를 표하지요.” … “나는 아주 위대한 예술가인 코끼리의 작품을 알고 있어요. 하지만 코끼리는 섬세한 그림을 그리지 못해요. 그럴 능력도 인내심도 없지요.” … “온 세상이 눈에 뒤덮여 있을 때면 나뭇잎을 볼 수 있소? 쓸쓸한 한겨울에 봄이 오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다면, 내 그림에서 수선을 보고 봄이 눈앞에 있으니 다시 돌아온다는 것을 확신하게 될 것이오. 여름 무더위에 고생하고 있다면, 맨프레드 라이언이 그린 차가운 겨울 풍경을 보고 기운을 차릴 수 있을 거요. 내가 그린 초상화를 보고 곁에 없는 친구나 사랑하는 이랑 함께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수도 있을 거요.” ..  (113, 114, 115쪽)


 도미니크는 짓궂은 사람을 만날 때이든 반가운 사람을 만날 때이든 ‘내가 만난 사람이 나한테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입니다. 들을 만한 이야기이든 들을 만하지 않은 이야기이든 어찌 되든 귀담아듣고 봅니다. 그런 다음 받아들일 만하다 싶으면 받아들이고, 아니다 싶으면 손사래를 칩니다.

 왜냐하면, 바로 도미니크는 도미니크로 지내는 ‘내 삶’을 사랑하기 때문이에요. 다만, 도미니크는 내 삶을 사랑하기는 사랑하는데, 무엇을 사랑하는지 모르고, 어떻게 사랑해야 할는지 모르며, 어느 만큼 사랑하는지조차 모릅니다. 모름투성이입니다. 알쏭달쏭투성이요, 아리송투성이예요.

 앞으로 도미니크 삶이 어떻게 이어갈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모험을 하러 떠났다가 하루 만에 숨을 거둘 수 있고, 두어 해쯤 살다가 저승사람이 될는지 모릅니다. 부자가 될 수 있으며, 가난뱅이가 될 수 있겠지요. 어찌 되든 좋습니다. 도미니크는 ‘도미니크다운 도미니크 삶’을 누리고 싶을 뿐입니다. 도미니크로서 도미니크 삶을 꾸릴 수 있다면 부자라고 더 기쁘지 않으며 가난하다고 더 슬프지 않아요. 스스로 알차게 여미는 삶을 붙잡을 수 있고, 스스로 힘차게 일구는 삶을 다스릴 수 있습니다.

 《도미니크》를 쓴 윌리엄 스타이그 님은 멍멍이 도미니크를 빌어 이야기 한 자락 풀어놓습니다. 내 삶에 걸맞게 내 길을 걸어가자고. 내 삶을 사랑하면서 내 이웃 삶을 사랑하자고. 내 삶을 즐기면서 내 살붙이와 어우러지는 하루하루를 고맙게 받아들이자고. 도미니크는 모험가이기 앞서 젊은이이고, 이 책에서는 영웅이기 앞서 수수한 한 사람입니다. 밥 한 그릇을 고맙게 받아들이고, 나무 한 그루를 사랑스레 보듬을 줄 아는 따스한 목숨붙이입니다. (4343.11.5.쇠.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