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화가 나빠 동화는 내 친구 39
오이시 마코토 글, 햇살과나무꾼 옮김 / 논장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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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책 읽는 삶 106



신나게 놀던 아이가 멋진 어른이 된다

― 장화가 나빠

 오이시 마코토 글

 오보 마코토 그림

 햇살과나무꾼 옮김

 논장 펴냄, 2005.7.25.



  마실을 다닐 적마다 커다란 가방을 짊어집니다. 내가 짊어지는 가방에는 아이들 옷가지랑 아이들 그림책이랑 아이들이 쓰는 여러 가지 살림이 깃듭니다. 아이들도 저마다 제 가방을 하나씩 들고 마실을 다니면서 저희 장난감을 저희 스스로 챙깁니다. 아이들이 아주 어렸을 적에는 아이들 장난감까지 내 가방에 챙겨야 했으나, 다섯 살 작은아이도 제 가방에 제 장난감을 가득 넣고 의젓하게 걸어다닙니다.


  장난감을 스스로 챙길 줄 아는 아이들은 마실길에 화장실에 들를 적에도 혼자 쉬를 할 수 있습니다. “자, 쉬를 좀 해 볼까?” 하고 물으면 큰아이도 작은아이도 저마다 화장실로 달려가서 쉬를 눈 다음 손이랑 낯까지 씻고 나옵니다.


  도시에서는 거님길이 좁고 자동차가 쉴새없이 지나갑니다. 이런 곳에서는 아이들더러 “자, 서로 손을 잡고 천천히 걸어서 가자.” 하고 얘기합니다. 두 아이는 서로 손을 맞잡으면서 재미나고 신나는 걸음걸이가 됩니다.



사유리가 큰 소리로 울자, 오빠는 허둥지둥 사유리를 달랬어요. “이거 가짜야, 가짜. 껌으로 만든 가짜 송곳니라고. 그러니까 그만 울어, 응? 내가 껌 줄게.” 그래도 사유리는 울음을 그치지 않았어요. (11쪽)


비가 온 다음 날, 아키라는 노란 장화를 신고 밖으로 나갔어요. 여기에도, 저기에도 물이 괸 웅덩이가 보여요. 웅덩이마다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이 비쳐요. (20쪽)



  오이시 마코토 님 글에 오보 마코토 님 그림이 어우러진 어린이문학 《장화가 나빠》(논장,2005)를 읽습니다. 이 책에는 예닐곱 살이나 여덟아홉 살 어린이라면 으레 겪는다 싶은 이야기가 흐릅니다. 어린 동생을 장난으로 놀리다가 그만 울리고 말아서 어쩔 줄 모르는 오빠가 나오고, 새로 얻은 장화가 좋아 웅덩이를 신나게 첨벙거리고 돌아다니는 아이가 나옵니다. 인형하고 말을 섞을 줄 아는 아이가 나오고, 사람 아닌 여러 짐승이나 나무하고 이야기를 나눌 줄 아는 아이가 나와요.


  《장화가 나빠》를 읽으며 우리 집 아이들을 가만히 돌아봅니다. 큰아이는 작은아이를 더러 놀리기도 하지만, 살뜰히 아끼면서 함께 놉니다. 작은아이도 큰아이를 가끔 놀리기도 하지만, 알뜰히 아끼면서 같이 놀아요. 두 아이는 둘도 없이 살가운 동무이면서 누나 동생입니다. 두 아이는 곰살궂게 어우러지면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노는 시골순이요 시골돌이입니다.



“난 동물원에서 태어났어. 엄마는 내가 태어나자 몹시 슬퍼하면서 울었어. 내가 죽을 때까지 동물원의 우리에서 살아야 하는 게 너무 슬프기 때문이래. 우리 엄마는 엄마가 자란 아프리카의 넓은 풀밭에서 나를 기르고 싶어 했지.” (31∼33쪽)


아저씨의 세 살배기 딸에게 앵무새한테 고운 말을 가르쳐 주라고 했어요. 예를 들면 이런 말이죠. 할머니, 안녕하세요? 여러분,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이에요. 다녀오세요. 다녀오셨어요? 같은 말. (48쪽)



  아이들은 재미나게 놀고 싶습니다. 아이들은 웃고 떠들면서 놀고 싶습니다. 아이들은 무엇이든 하면서 놀고 싶습니다. 아이들 마음속에는 언제나 놀이가 있어요. 아이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놀면서 자라요.


  아이를 낳은 어버이도 처음에는 아이였습니다. 신나게 뛰놀고 개구지게 뛰놀며 다부지게 뛰놀던 아이가 무럭무럭 자라서 어른이 됩니다. 마음껏 뛰놀고 실컷 뛰놀며 거침없이 뛰놀던 아이가 사랑스레 자라서 어른이 됩니다.


  오늘 이곳에서 두 아이 어버이로 사는 내 모습을 물끄러미 돌아봅니다. 무더운 한여름 밤에 땀을 뻘뻘 흘리면서 부채질을 하는 내 모습을 찬찬히 돌아봅니다. 잠든 아이들이 시원하게 자기를 바라면서 밤새 부채질을 하는 동안 제대로 나는 잠을 이룰 수 없지만, 나는 밤잠을 잊더라도 아이들은 느긋하면서 넉넉하게 잘 수 있기를 바라요. 내가 어릴 적에는 우리 어버이가 나한테 부채질을 해 주셨을 테고, 우리 어버이가 어렸을 적에는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가 우리 어버이한테 부채질을 해 주셨을 테지요.



어느덧 해가 지고 밤이 되었어요. 달이 환하게 떠올랐어요. 목장의 풀이 젖은 듯 반짝거렸어요. 그때까지도 푸른 말과 닷짱은 달리기를 멈추지 않았어요. 즐거운 마음으로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쉬지 않고 달렸어요. (58쪽)


나는 캐러멜 다섯 개를 사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엄마는 우물가에서 빨래를 하고 있었지요. 내가 말했습니다. “엄마, 이거 다 줄게.” 엄마는 깜짝 놀란 얼굴로 나를 보더니 환히 웃으며 말했습니다. “고맙구나. 하지만 엄마는 하나만 있으면 된단다.” (79∼81쪽)



  어린이문학 《장화가 나빠》는 짧은 동화를 묶습니다. 어버이가 아이한테 한 꼭지씩 읽어 줄 만하기도 하고, 아이가 혼자서 한 꼭지씩 씩씩하게 읽을 만하기도 합니다. 짧은 동화는 짤막한 숨으로 서로 아끼는 삶을 넌지시 보여줍니다. 아이들끼리 서로 아끼는 삶을 보여주고, 아이와 어른이 나란히 아끼는 삶을 보여주며, 사람(아이)하고 사람 아닌 숱한 숨결(도깨비 같은 넋이나 자연하고 뭇짐승)이 함께 아끼는 삶을 보여줍니다.


  가만히 생각에 잠깁니다. 나는 여름철에 아이들이 잠들 적마다 끝없이 부채질을 합니다. 겨울철에 아이들이 잠들 적에는 끝없이 이불깃을 여밉니다. 아이들은 여름철에 곧잘 “내가 아버지한테 부채질 해 줄게.” 하면서 땀방울을 구슬처럼 흘리면서 부채질을 하겠노라 하고 말합니다. 겨울날에 온갖 집안일을 하다가 힘들어서 살짝 허리를 펴려고 누우면 아이들이 어느새 다가와서 “이불 덮으세요.” 하고 말하면서 이불을 덮어 줍니다.



마사루가 토끼 가슴에 손을 갖다 대 보니까 사람처럼 콩닥콩닥 심장이 뛰어요. (62쪽)



  삶이란 무엇일까요? 너와 내가 함께 가꾸는 하루일 테지요. 어버이와 아이가 서로 북돋우는 하루일 테고요. 먼 마실길이든 읍내 마실길이든, 아버지가 짊어지는 가방이나 짐이 으레 무겁고 커다랗기에 두 아이는 으레 “내가 들어 줄게!” 하고 외치곤 합니다. 그러나 두 아이가 함께 붙잡고 용을 써도 아버지 가방이나 짐을 바닥에서 떼지도 못하기 일쑤입니다. 수박 한 통을 장만할 적에도 그래요. 아이들은 둘이 온힘을 쏟아도 수박 한 통조차 나르지 못합니다. 수박 반 통조차 아이들이 나르기 벅차요. 수박을 반에서 다시 반으로 가른 조각도 아이들한테는 대단히 무겁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수박을 아주 잘 먹어요. 스스로 나를 만한 무게는 아니어도, 수박이 아주 맛있다고 합니다. 이때에 어버이인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씩씩하게 수박을 장만해서 나르든, 우리 집 밭자락에 수박을 심어서 거두든 해야 합니다. 내 몫은 따로 안 남기더라도 아이들이 맛나게 먹도록 알맞게 썰어서 접시에 담아야지요.



내 자리 맞은편 자리에서는 내 또래 여자 아이가 큼직한 책을 열심히 읽고 있었다 … 초등학교 1학년처럼 떠듬떠듬 소리 내어 읽고 있었다. 무슨 책을 저렇게 못 읽냐? 바보같이.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버스에서 내릴 때 그 아이의 책을 슬쩍 넘겨다보았다. 어, 책이 새하얗잖아!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아. 나는 깜짝 놀랐다. 자세히 보니까, 그 아이는 앞을 보지 못하는 아이였다. 손가락으로 더듬으며 점자책을 읽고 있었다. 한 글자 한 글자씩 힘겹게. 나는 갑자기 심장이 쿵쿵 뛰었다. 내 자신이 너무너무 부끄러웠다. (101∼102쪽)



  신나게 놀던 아이가 멋진 어른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어릴 적에 신나게 놀 수 있어야, 어른으로 자라는 동안 마음이 아름다이 자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나게 놀지 못한 아이는 신나게 일하지 못한다고 느낍니다. 어릴 적부터 신나게 못 놀던 아이는, 어른으로 자라면서 제 꿈을 신나게 가꾸는 길로는 좀처럼 못 가는구나 하고 느낍니다.


  어린이문학 《장화가 나빠》는 어린이한테 어떤 책이 될까요? 아무래도 ‘씩씩하게 놀고, 착하게 놀며, 곱게 놀자’는 꿈을 들려주는 책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학교 공부를 더 잘하는 길보다는, 스스로 즐겁게 뛰놀 수 있기를 바라는 책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아이들이 잘나거나 멋지거나 놀라운 어른으로 자라기를 바라는 책이 아니라, 아이들이 사랑스럽고 착하며 슬기로운 어른으로 무럭무럭 자라기를 바라는 책이리라 느낍니다.


  아이들은 “장화가 나빠!” 같은 말을 쉽게 뱉을 수 있어요. 이런 말을 들은 어른은 “음, 모두 예뻐!” 하고 대꾸할 수 있어요. 아이가 울먹이거나 핑계를 들면서 “나빠!” 하고 외치거나 말거나, 어른은 빙그레 웃으면서 “사랑해!” 하고 말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어린이문학이란 바로 ‘늘 웃는 문학’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린이문학이라고 한다면 참말로 ‘언제나 웃으면서 노래하는 문학’이라고 생각합니다.


  초등학교 어린이도, 중·고등학교 푸름이도, 학과 공부는 한동안 젖혀 놓고 마음껏 뛰놀 수 있기를 바라요. 맑고 밝은 넋으로 신나게 놀다가, 마음 가득 따사로운 꿈을 키울 수 있기를 바라요. 동무랑 이웃을 아끼는 아이들이 곱게 자랄 수 있기를 빌어요. 4348.7.28.불.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어린이문학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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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의 달팽이호 아이북클럽 16
사토 사토루 지음, 햇살과나무꾼 옮김 / 크레용하우스 / 200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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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책 읽는 삶 107



버려진 자동차도 놀이터가 된다

― 비밀의 달팽이 호

 사토 사토루 글

 무라카미 쓰토무 그림

 햇살과나무꾼 옮김

 크레용하우스 펴냄, 2000.8.17. 7500원



  마당에 이불을 널면, 이불은 아이들 놀이터가 됩니다. 두 아이는 이불 사이로 들어가서 숨기놀이를 합니다. 마당에 커다란 고무통을 놓으면 이곳에 물을 채워서 놀기도 하고, 물을 안 채워도 안에 숨거나 위에 올라타면서 놉니다. 커다란 고무통은 언제나 아이들 ‘숨기놀이터’ 구실을 합니다.


  두 아이가 퍽 작았을 적에는 평상 밑으로 기어들었습니다. 이제 두 아이는 평상 밑에 기어들지 못할 만큼 몸이 자랐습니다. 아이들로서는 아쉬워 할 수 있습니다만, 시골집에는 이곳저곳 숨을 데가 많습니다. 크게 자란 모시풀 뒤로 숨어도 되고, 큰나무 뒤에 숨어도 되지요. 어디나 놀이터요, 어디나 숨는 곳이며, 어디나 신나는 곳입니다.



어느덧 아키라도 초등학생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유치원 때와 달라진 건 별로 없었습니다. 반 아이들은 다들 아키라를 왠지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아이라고 여겼죠. 하지만 아키라는 여전히 자기가 굼뜨고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아이들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19쪽)



  사토 사토루 님이 빚은 어린이문학 《비밀의 달팽이 호》(크레용하우스,2000)를 읽습니다. 이 책에 나오는 ‘달팽이 호’는 ‘버려진 자동차’입니다. 마을 한쪽에 빈터가 있고, 빈터에 버려진 자동차가 있습니다. 빈터는 오래도록 빈터입니다. 빈터에 들어가지 말라며 줄을 쳐 놓지만, 아이들은 어떻게든 개구멍을 내어 빈터에서 놀려고 합니다. 어른 눈치를 보지 않을 만한 놀이터를 찾고 싶고, 다른 동무는 모르는 호젓한 ‘숨기놀이터’를 얻고 싶거든요.



다쓰오는 외아들인데 목에 열쇠를 걸고 다니진 않았습니다. 집에 할머니가 계시니까요. (25쪽)


“다쓰오, 저 자동차 말이야, 우리 비밀 기지로 삼지 않을래?” “기지?” “응. 국제 구조대나 우주 순찰대 같은 건 모두 비밀 기지를 갖고 있잖아.” (49쪽)



  가만히 돌아보면, 어른들은 아파트를 짓거나 재개발을 할 적에 어린이를 생각하는 일이 드뭅니다. 온갖 시설을 갖춘 아파트를 짓는다든지, 오래된 마을을 밀고 새로운 마을로 바꾸려고는 하지만, 아이들이 신나게 뛰놀 만한 마을을 생각하지는 못합니다. 아파트 한쪽에 놀이터를 마련하기는 하더라도, 놀이기구가 아니라 ‘아이들이 마음껏 다루거나 뚝딱거릴 수 있는 놀잇감’은 생각하지 못해요.


  아이들은 흙을 파고 싶습니다. 아이들은 나무를 타고 싶습니다. 아이들은 냇물에서 멱을 감고 싶습니다. 아이들은 들판을 달리다가 뒹굴고 싶습니다. 아이들은 온몸에 흙투성이가 되도록 놀고 싶습니다. 실컷 놀다가 드러누워서 낮잠을 잘 만한 잔디밭이나 나무 그늘을 헤아리면서 놀이터를 짓는 건설회사 어른은 얼마나 될까요?



다카시는 책을 좋아하는 아이라서, 책을 아주 많이 갖고 있었습니다. 보통 책은 물론이고 오래된 만화 잡지도 몽땅 모아 두었죠. 다쓰오와 아키라는 그걸 빌려 읽었고요. 그럴 때면 달팽이 호는 마치 작은 도서관 같았습니다. (77쪽)



  내가 태어나서 살던 도시에도 버려진 자동차가 제법 있었습니다. 어떻게 그곳에 버려진 자동차가 있는지 알 길은 없습니다. 누가 그곳에 자동차를 버렸는지 알 노릇도 없습니다. 다만, 마을 한쪽에 버려진 자동차가 있었고, 마을 아이들은 저마다 그 버려진 자동차를 놀이터로 삼습니다.


  다만, 주먹힘이 센 아이가 맨 먼저 놉니다. 주먹힘이 센 아이가 없으면 살살 살피다가 조용히 이 자동차에 들어가 봅니다. 운전대를 잡아서 돌려 보고, 이곳저곳 뒤집니다. 여러 아이가 자동차 지붕에 올라타기도 하고, 뒷자리에 앉아서 여기를 가라는 둥 저기를 달리라는 둥 조잘조잘 떠들면서 어디로든 달립니다. 버려진 자동차는 언제나 한곳에 멈춘 채 있지만, 이 자동차를 탄 수많은 아이들은 마음으로 그리는 새로운 터전으로 훨훨 날아갑니다.


  그런데, 버려진 자동차에서 한창 놀다가 어른들이 지나갈라치면 조용히 숨습니다. 마을 어른한테 들키면 크게 나무라면서 내쫓거든요. 어른이 지나갈 적에 조용히 숨을 죽이면서 숨는 몸짓도 재미난 놀이입니다.



다쓰오는 달팽이 호에서 얻은 소중한 백미러를 책상 앞에다 장식해 두었습니다. 그리고 이금 들여다보았죠. 보통 거울과 똑같은 아주 평범한 거울이었지만, 다쓰오는 때때로 그 거울 속에서 커다란 분화구가 빽빽이 늘어선 달 표면이 보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125쪽)



  아이라면 누구나 말타기를 좋아합니다. 어머니나 아버지가 말이 되어 아이를 태워 주면 몇 시간이고 말타기를 누리려 합니다. 어머니나 아버지 등짝을 말등으로 삼은 아이는 방하고 마루 사이를 오가더라도 ‘방하고 마루’가 아니라 너른 들이나 숲이나 골짜기를 달린다고 여깁니다. 여러 별 사이를 가로지른다고 여기기도 하고, 높은 봉우리를 타넘는다고 여기기도 합니다.


  그리 멀지 않은 지난날, 모든 아이들이 시골에서 시골일을 하면서 소등에 올라타며 놀던 무렵, 아이들은 무엇을 보고 느끼면서 하루를 보냈을까 하고 헤아려 봅니다. 고작 쉰 해 앞서만 하더라도, 백 해 앞서만 하더라도, 아이들은 언제 어디에서나 ‘가슴이 따뜻한 집짐승’ 등짝을 어루만지면서 들길을 걸었겠지요.


  이제 오늘날 아이들은 어머니나 아버지가 모는 자동차를 타고 어디로든 갑니다. 커다란 할인마트에도 가고, 고속도로도 달리며, 놀이공원이나 바다로도 갑니다. 학원버스를 타고 학원을 빙글빙글 돌기도 하고, 큰도시에 촘촘히 있는 지하철을 타기도 합니다.


  탈것도 많고, 버스나 자동차가 아주 많은 요즈음입니다. 아이들은 어버이와 함께 비행기나 기차나 배도 어렵잖이 타고 돌아다닐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요즈음 아이들은 이것 저것 타면서 얼마나 꿈을 키우거나 놀이를 즐기려나요. 요즈음 아이들은 기쁘게 웃고 노래하면서 온 하루를 놀이로 보낼 수 있으려나요. 4348.7.19.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어린이문학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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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회복의 교육 - 에밀의 스승 루소와 이름 없는 교사들에게 드리는 편지
성래운 지음 / 살림터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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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배움책 35



숲(시골)에서 아이한테 삶을 가르친다

― 인간 회복의 교육

 성내운 글

 살림터 펴냄, 2015.5.28. 13000원



  어젯밤부터 비가 내립니다. 이 비는 가문 땅을 촉촉히 적시고, 못을 그득 채워 주겠지요. 나무가 더욱 푸르게 자라도록 북돋우고, 온갖 씨앗이 씩씩하게 트도록 이끌어 줄 테고요.


  비가 오는 날에 아이들은 비노래를 부릅니다. 큰아이는 비야 비야 오너라 하고 노래를 부르고, 작은아이는 비야 비야 그쳐라 하고 노래를 부릅니다. 큰아이는 나무가 살려면 비가 와야 한다고 노래합니다. 작은아이는 비가 그쳐야 마당에서 뛰논다고 노래합니다. 큰아이는 동생한테 다시 말합니다. 이렇게 비가 와야 놀이터 미끄럼틀이 뜨겁지 않다고 말합니다. 비가 와 주어야 우리가 더 신나게 놀 수 있다고 덧붙입니다.


  비는 그치지 않습니다. 배불리 밥을 먹은 두 아이는 비를 맞으면서 마당에서 뜁니다. 옷이 젖든 몸이 젖든 대수롭지 않습니다. 이 비를 맞으면서 깔깔깔 노래합니다.



한동네 어느 집도 가난하게 살고, 한집 어느 식구나 허기지련만 배 안에 아기 가진 이만은 넉넉히 먹고 입었습니다. 아득한 옛적부터 온 동네, 온 식구가 그를 그리 대접해 왔습니다. 사람은 태어나고부터가 아니라 어머니 배 안에 생겼을 때부터였습니다. (23쪽)


갓난아기로야, 같은 방에 늘 함께 있는 사람이기에 새 경험은 없이 만날 똑같은 나날일 것 같지만, 아기 돌보는 어른이 하기에 따라서는 하루하루가 새날임은 물론, 반나절조차 오만 가지 새 경험으로 채워지기 마련입니다. 새로운 경험은 그 사람을 온통 새롭게 합니다. (35쪽)



  성내운 님이 쓴 《인간 회복의 교육》(살림터,2015)을 새롭게 읽습니다. 이 책은 1982년에 처음 나왔고, 성내운 님은 1926년에 태어나서 1989년에 흙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온 삶을 오롯이 교육운동에 바치면서 한길을 걸은 성내운 님이 쓴 《인간 회복의 교육》은 《에밀》이라는 책을 읽은 뒤 이 책을 한국 사회에 맞추어 새롭게 풀어서 쓴 이야기꾸러미입니다.


  《에밀》은 1700년대 프랑스에서 아이를 가르치고 돌보는 길을 밝힌 이야기입니다. 이 책 한 권으로도 넉넉히 알차거나 아름답다고 여길 수 있고, 좀 오래된 유럽 이야기로 여길 수 있습니다. 성내운 님은 이 이야기를 오늘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라는 아이들한테 새로운 이야기로 들려주려고 했습니다. 이 이야기에 깃든 넋을 헤아려서 한국 어린이와 어버이가 2000년대에 새롭게 거듭나서 아름답게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들려주고 싶어서 《인간 회복의 교육》이라는 책을 쓰셨습니다.



이른바 조기 교육이 크게 강조되고 있는 요즈음입니다. 두 살이면 두 살배기 아기로서 알차게 발달시키려는 생각이라기보다는 머리만 어른스러운 아기이기를 바라는 생각일 경우가 많지 않은가 생각됩니다. (64쪽)


선생님은 에밀이 어린 동안은 책으로 하는 공부를 시키지 않았습니다. 에밀을 둘러싼 모든 것을 책 삼아 공부하게 하셨습니다 … 선생님은 어린 에밀을 우선 개구쟁이로 자라게 하셨습니다. (73, 76쪽)



  1982년에 처음 나온 책이기에, 《인간 회복의 교육》을 읽으면 1970∼80년대 한국 사회와 교육이 어떤 모습인가를 엿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책을 2010년대에 새롭게 읽는 동안 한 가지 모습을 더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한국 사회와 교육은 1970년대부터 2010년대에 이르기까지 거의 달라지지 않았어요. 시설이나 건물은 번쩍번쩍 빛나고, 대학교를 마치거나 외국에서 배우고 온 사람은 부쩍 늘었습니다만, 입시지옥은 더욱 단단해지고 학력 차별은 사그라들지 않아요. 1970년대나 2010년대나 똑같이 아이들은 학교에서 삶을 배우지 못합니다. 지난 마흔 해 사이에 학교교육은 언제나 입시교육으로만 흐를 뿐, 삶하고 사랑하고 사람을 아끼거나 섬기는 교육으로 거듭나지 못합니다.


  《에밀》에서든 《인간 회복의 교육》에서든, 아이는 ‘개구쟁이’나 ‘말괄량이’로 뛰놀면서 자라야 한다는 이야기가 흐릅니다. 그리고, 아이는 ‘시골’에서 뛰놀 수 있도록 어버이와 어른이 마음을 기울여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두 가지 책에서 나오는 ‘시골’은 그냥 시골이 아닙니다. 숲이 우거진 삶터입니다. 나무가 아름드리로 크고, 냇물이 싱그러이 흐르며, 온갖 들짐승이 함께 살고, 풀내음이 짙은 바람이 불며, 손수 씨앗을 심어서 가꿀 수 있는 삶터를 ‘시골’이라는 이름으로 가리킵니다.


  ‘개구쟁이’나 ‘말괄량이’는 어떤 아이일까요? 기쁘게 놀고, 신나게 노래하며, 아름답게 웃을 수 있는 아이입니다. 장난감이나 텔레비전이나 인터넷이나 손전화에 기대지 않고도 얼마든지 싱그러이 웃고 뛰놀 줄 아는 아이가 바로 개구쟁이요 말괄량이입니다.



모든 동포가 먹고 입는 것을 생산하는 가장 쓸모 있는 기술이 가장 덜 버는 기술이 되고, 일부 사람들을 위해서 사치품을 사다 파는 가장 쓸모없는 기술이 가장 많이 버는 기술이 되고 있다면, 그러한 사회적 현실을 우리는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가? 우리 교사들 자신도, 사람에게 쓸모는 적지만 돈은 많이 버는 기술을 우러러보고, 쓸모는 많지만 돈은 적게 버는 기술을 얕잡아 보고 있는 것이 아닐까? (111쪽)


교과서에 실려 있는 역사가, 선량한 민중이 평화를 염원하며 살아온 발자취라기보다는 그 민중을 지배해 온 왕과 귀족들이 전쟁을 일삼으며 살아온 발자취라는 데에 문제가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교과서를 외우고 있노라면, 학생들은 부지불식간에 임금들의 은혜를 입어 민중들이 그만큼이라도 살아온 듯이 느끼도록 쓰여 있는 점입니다. (145쪽)



  잘 놀고 자란 아이들이 착합니다. 마음껏 놀며 자란 아이들이 아름답습니다. 기쁘게 놀면서 동무하고 어깨를 겯던 아이들이 참다운 마음을 가꿉니다.


  놀지 못한 채 학교에서 시험공부만 하던 아이들은 삶을 가꾸는 보람을 어릴 적부터 못 배웁니다. 놀이하고 등진 채 입시공부만 하다가 대학교에 들어온 아이들은 사랑을 고이 돌보는 기쁨을 어릴 적부터 못 배웁니다. 놀이를 영 모르는 채 학교랑 학원 사이만 오가던 아이들은 사람이 얼마나 거룩하면서 예쁜 숨결인가를 어릴 적부터 못 배웁니다.


  시험공부만 하던 아이들은 숫자랑 돈이랑 성적만 배워서 알 뿐입니다. 입시공부에 얽매이던 아이들은 어른이 되어 짝꿍을 만나더라도 서로 아끼는 사랑을 헤아리기 어려울 뿐입니다. 진보를 외치는 입으로 데이트폭력을 일삼고 마는 슬픈 모습은 무엇일까요? 머리에 지식은 있으나, 이 지식을 다스리는 숨결이 없다는 뜻입니다. 책으로 읽어서 얻은 지식은 있되, 몸으로 깨우치거나 느끼거나 배운 넋은 없다는 뜻입니다.


  아이들은 책으로 배울 수 없습니다. 기쁘게 놀고, 사랑스레 놀며, 아름답게 노는 사이에 튼튼하고 씩씩하며 의젓한 어른으로 설 수 있습니다.



지금의 세계 어린이들이 어른들과는 달리 전쟁을 모르고 평화 속에서 창조를 즐기며 살아가게 하는 길은, 지금 그들에게 우리의 과거와는 달리 평화를 살게 하는 것뿐입니다. (174쪽)


남이 가진 것 나는 없대서 슬퍼하지도 아니하고, 남이 없는 것 나는 가졌대서 우쭐하지도 않는 학생들이었습니다. 나는 남과 다를 뿐, 도리어 그래서 남이 대신 못할 사람이 될 수 있는 ‘나’라는 것을 믿고 있는 학생들이었습니다 … 저는 학생들이 이리 된 것이 우연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선생님들이 이 학생들을 어떻게 보고 있느냐와 매우 깊은 관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245, 246쪽)



  《인간 회복의 교육》이라는 책에서도 밝히듯이 ‘평화를 살아’야 ‘평화를 지을’ 수 있으며,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아이들한테 전쟁훈련을 시키면 아이들은 무엇을 배울까요? 바로 전쟁과 전쟁훈련을 배워요. 아이들한테 매질을 하면 아이들은 무엇을 배울까요? 바로 주먹질(폭력)을 배웁니다.


  아이들한테 따스한 말을 들려줄 때에 사랑을 배웁니다. 아이들한테 착한 몸짓을 보여줄 때에 삶을 배웁니다. 아이들하고 씨앗을 심으면서 살림을 가꾸는 어른이 될 적에 아이들한테 사람을 가르칠 수 있습니다.


  전쟁무기를 만들고 군대를 키우느라 수천억 원이나 수조 원에 이르는 돈을 해마다 쏟아부어야 하지 않습니다. 도시이든 시골이든 아름드리 숲이 되도록 삶터를 가꿀 수 있어야 합니다. 4대강사업처럼 냇물을 망가뜨리는 짓에 어마어마한 돈을 퍼붓는 바보짓이 아니라, 냇물을 사랑하면서 들을 보살피는 숨결에 손길을 뻗을 줄 알아야 합니다.


  ‘시골(숲)’이 어떤 곳인지 제대로 바라보면서 알아야 합니다. 씨앗 한 톨은 비료와 농약으로 자라지 않습니다. 거름을 주면 열매를 더 알차게 맺습니다만, 거름이 없어도 씨앗은 자랍니다. 무엇보다도 숲에 거름을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사람이 숲에서 베어서 쓰는 나무는 사람이 거름 한 방울조차 주지 않아도 수백 해나 수천 해를 곧게 자랍니다. 모든 아이는 ‘나무처럼’ 뛰놀면서 자랄 수 있어야 합니다. 모든 어른은 아이가 ‘숲처럼’ 포근한 품이 되어 삶자리를 가꿀 수 있어야 합니다. 《인간 회복의 교육》이란 무엇일까요? 바로, 사람됨을 되찾는 가르침입니다. 사람다운 길로 돌아가는 배움입니다. 스스로 사람인 줄 제대로 깨달으면서 슬기롭게 사랑할 때에 아름다운 삶입니다. 4348.7.7.불.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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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하루 - 엄마인 당신께 드리는 선물
작자미상, 이토우 히로미 엮음, 노경아 옮김, 시모다 마사카츠 그림 / 보누스 / 2015년 6월
평점 :
절판


사랑하는 배움책 34



아이하고 사랑을 속삭이는 ‘오늘 하루’

― 오늘 하루

 글쓴이 모름

 이토 히로미 편역

 시모다 마사카츠 그림

 노경아 옮김

 보누스 펴냄, 2015.6.10.



  아침에 일어나서 곁님하고 빙그레 웃음을 지으면서 마음을 열면, 온 하루가 기쁜 웃음으로 흐릅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곁을 돌아보지 않고 낯부터 찡그리며 ‘어제와 똑같이 되풀이할 괴로운 일’을 마음속에 그리면 그야말로 온 하루가 괴롭기만 합니다.


  아침에 기지개를 켜며 일어난 아이를 마주보면서 빙그레 웃음을 지으며 말을 건네면, 온 하루가 재미난 놀이로 부풀어오릅니다. 아침에 일어난 아이한테 잔소리부터 하면, 아이도 어버이도 온 하루 잔소리투성이에 짜증덩어리에 그지없이 고달픈 불꽃이 튀기만 합니다.



침대는 엉망이고, 담가 놓은 지 오래된 기저귀에서는 차츰 냄새가 나고. (11쪽)


더러워진 창문은 아무렇게나 그린 예술작품 같은데, 비가 오기 전까지는 그대로일 거야. (14쪽)



  《오늘 하루》(보누스,2015)라는 책을 읽습니다. 파란 빛깔로 조그마한 책은 빨간 띠종이가 살며시 감쌉니다. 띠종이를 벗기면 책겉에 영어로 ‘Today’라 적혔고, 영어로 한 줄 두 줄 짤막한 이야기가 흐릅니다. 《오늘 하루》는 어떤 책일까요?



다른 사람이 보면 이게 뭐냐고 하겠지? (16쪽)




  작은 배움책 《오늘 하루》는 짤막한 글 하나가 바탕이 되어 태어났다고 합니다. 뉴질랜드로 육아와 복지를 배우러 간 일본사람이 있었고, 이녁은 뉴질랜드에 있는 어느 육아지원소 벽에 붙은 짤막한 글을 보았다고 합니다. 벽에 붙은 짤막한 글은 누가 썼는지도 모르고, 누가 붙였는지도 모른다고 합니다. 그저 누구나 읽고, 누구나 생각하며, 누구나 느낀다고 해요.


  육아지원소 벽에 붙은 글은 ‘아이와 지내는 삶’을 노래합니다. “다른 사람이 보면 이게 뭐냐”고 할 만한 살림살이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오늘 하루” 아이하고 어떤 삶을 누렸는가 하는 이야기를 살며시 들려줍니다.


  아이하고 사는 어버이라면 누구나 이러한 마음이 될 만하리라 생각합니다. 어른 눈길로 보자면 아이들은 온 집안을 ‘어지럽힙’니다. 그러나 아이 눈길로 보자면 아이는 늘 ‘새로운 놀이’를 찾아서 이리 움직이고 저리 헤집습니다.


  아이는 집 바깥에서 흙놀이를 할 적에 몇 시간이고 꼼짝을 않으면서도 신나게 놉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흙집을 짓고 흙마을을 꾸밉니다. 이런 아이가 집에서 논다고 하면 온갖 살림살이를 방바닥이고 마룻바닥이고 잔뜩 늘어놓을 수밖에 없을 테지요.


  그러니까, 아이는 집안을 ‘어지럽히’지 않습니다. 아이는 놀면서 삶을 새롭게 배웁니다. 아이는 이것저것 만지고 놀면서 생각을 새롭게 다스리고, 꿈을 새롭게 키우며, 사랑을 새롭게 북돋웁니다.




나는 아이가 잠들 때까지 어부바를 해 줬어. (20쪽)


나는 아이랑 숨바꼭질을 했고, 나는 아이를 위해 장난감을 흔들었어. (24쪽)



  서로 사랑을 속삭이는 ‘오늘 하루’가 될 때에는 아름다운 하루입니다. 서로 사랑을 속삭이지 못하는 ‘오늘 하루’가 될 때에는 웃음도 노래도 없습니다. 서로 사랑을 속삭이는 ‘오늘 하루’가 되기에 기쁘게 어깨동무를 합니다. 서로 사랑을 속삭이지 못하는 ‘오늘 하루’가 되기에 그만 고단하고 지치고 괴롭고 짜증스럽고 슬프고 힘을 잃습니다.




오늘 하루, 나는, 눈이 맑고 머리카락이 몽실몽실한 이 아이를 위해 (34∼36쪽)



  아이는 함께 놀기를 바랍니다. 아이를 왜 낳겠어요? 어머니와 아버지는 아이를 왜 낳을까요? 가시버시로 짝을 지었으니 살곶이를 하다가 애가 불쑥 튀어나왔나요? 두 어른으로서 사랑을 속삭이면서 ‘새로운 숨결’인 아이한테 어머니 피와 아버지 살을 물려주려는 뜻이 아니었나요? 아이가 노는 모습을 따스하게 바라보지 못한다면, 어버이로서 오늘 하루는 어떤 뜻이요 보람이며 기쁨일는지요?


  아이는 어버이한테서 사랑을 물려받기를 바랍니다. 아이는 어버이한테서 꿈을 이어받기를 바랍니다. 참말 아이는 어버이한테서 날마다 삶을 새롭게 내려받으려고 합니다.


  가만히 손을 내밉니다. 아이들 머리를 부빕니다. 가만히 손을 뻗습니다. 빗으로 아이들 머리를 정갈하게 빗습니다. 가만히 손을 댑니다. 보드랍고 맑은 아이들 볼이며 살을 어루만지다가 번쩍 안아서 까르르 웃음이 터지게 합니다. 오늘 하루는 늘 기쁨이면서 사랑입니다. 오늘 하루는 언제나 노래이면서 춤입니다. 오늘 하루는 한결같이 웃음꽃이면서 이야기잔치입니다. 4348.6.28.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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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와 통하는 한국사 - 국민이 주인 되는 우리 역사 이야기 10대를 위한 책도둑 시리즈 3
고성국.서인원 지음, 심상윤 그림 / 철수와영희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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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책과 함께 살기 120



‘천 년 뒤’ 사람들은 ‘오늘’을 어떻게 볼까?

― 10대와 통하는 한국사

 고성국·서인원 글

 심상윤 그림

 철수와영희 펴냄, 2010.10.26.



  새벽마다 제비가 처마 밑에서 노래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하루를 엽니다. 제비한테는 시계가 없을 테지만, 제비는 몸으로 때를 헤아립니다. 언제 일어나서 둥지에서 날아올라 먹이를 찾아야 하는가를 몸으로 압니다. 저 멧자락 너머로 살몃살몃 희뿌윰하게 빛이 퍼질 무렵 일어나서 부산하게 노래하고 날갯짓을 합니다.


  아득하게 멀지 않은 쉰 해쯤 앞서만 헤아려도, 제비집은 이 땅에 대단히 많았습니다. 쉰 해쯤 앞서라면 제비집은 서울 한복판에도 있었고, 시골에서는 모든 집에 제비집이 몇 채씩 있었을 테지요. 제비집 숫자를 알뜰히 적어서 ‘기록’으로 남긴 학자는 없을 테지만, 한 집에 ‘제비 한 식구’가 있다고 할 만큼 제비는 한겨레하고 오래된 벗입니다.


  제비한테 책과 연필이 있다고 한다면, 제비는 무엇을 책에 적바림할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제비가 지켜본 ‘사람들이 치고받으며 죽이고 죽은 발자취’를 적바림할까요, 아니면 땅임자가 소작농을 짓누르던 모습을 적바림할까요, 아니면 시골사람 누구나 손수 밥이랑 옷이랑 집을 지으면서 착하게 어깨동무하는 삶을 적바림할까요.



우리는 과거를 이해하기 위해서 역사를 보지만 미래를 예측하고 대비하기 위해서도 역사를 봅니다.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어디서부터 왔는지, 어떤 길을 통해 ‘지금 여기’에 와 있는지를 알면,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또 그곳에 가기 위해서는 어떤 길을 선택하는 것이 좋을지에 대해서도 비교적 합리적 근거를 갖고 판단할 수 있게 됩니다 … 이 시기(구석기 시대)에는 지배하는 사람도 지배받는 사람도 없이 모두가 한 무리가 되어 평등하게 살았습니다. 사회가 복잡하지 않아 계급도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17, 34쪽)



  제비가 역사를 글로 남긴다고 한다면, ‘고단한 제비집’을 적바림할 수 있습니다. 흥부 놀부하고 얽힌 이야기도 제비 눈길로 적바림할 테고, 한국전쟁 때 온통 불바다가 되어 시골집이 타 버려 사라질 적에도 제비는 시골집과 함께 불타서 죽었겠지요. 어미 제비는 불타는 마을에서 벗어났을 테지만 날갯짓을 못하는 새끼 제비는 슬픈 사람들하고 함께 슬프게 죽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제비는 새마을운동을 맞이하면서 삶이 우지끈 무너집니다. 도시에서는 재개발하고 아파트 몸살에 보금자리를 빼앗깁니다. 시골에서는 보기 싫다며 둥지를 빼앗깁니다.


  오로지 현대문명 잣대로만 본다면, 제비 한 마리가 있거나 없거나 대수로울 일이 없습니다. 현대문명에서는 살충제와 농약을 쓰면 풀벌레나 날벌레나 애벌레를 손쉽게 죽입니다. 시골살이에서는 제비가 날마다 수백 마리에 이르는 풀벌레나 날벌레나 애벌레를 잡아서 먹습니다. 제비랑 참새랑 콩새랑 박새 같은 조그마한 새들은 그야말로 온갖 벌레를 날마다 어마어마하게 잡습니다.


  아무튼, 제비는 새마을운동 바람이 부는 동안 애꿎게 목숨을 잃고 새끼를 잃으며 집을 잃습니다. 사람만 시골을 떠나 도시에서 공돌이·공순이가 되어 ‘고향을 잃’지 않습니다. 사람만 댐을 크게 짓느라 ‘고향을 잃’지 않습니다. 갑작스레 도시가 되고, 갑작스레 아파트가 서며, 갑작스레 농약바람이 춤을 추니, 제비는 수천 수만 수십만 해에 이르던 ‘사람하고 맺은 사이좋은 삶’을 하루아침에 빼앗기거나 잃을 뿐 아니라 ‘고향을 잃’습니다.



백제는 ‘백성이 즐겁게 따랐다’는 뜻입니다. 한강 유역은 일찍부터 철기 문화가 발달한 데다가 바다를 통해 중국의 선진 문화를 받아들이기 좋은 곳이었기 때문에 백제는 다른 두 나라에 비해 조금 더 빨리 국가 체제를 정비해 나갈 수 있었습니다 … (고려에서) 무신들이 정권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은 백성들과 일반 군사들의 지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문벌 귀족들 밑에서 백성들은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 그러나 정권을 잡은 무신들은 백성들의 기대를 저버렸습니다. 무신들은 백성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권력을 잡기 위해 정변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57, 97쪽)



  고성국·서인원 두 분이 글을 쓰고, 심상윤 님이 그림을 넣은 《10대와 통하는 한국사》(철수와영희,2010)를 읽습니다. 《10대와 통하는 한국사》는 초·중·고등학교 교과서로는 더 깊거나 넓게 다루지 못하는 한국사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시험문제로 한국사를 바라보도록 하지 않습니다. 한국이라고 하는 나라가 그동안 어떤 발자국을 남겼는지 차분히 돌아보자고 이야기합니다. 임금님 이름을 줄줄이 늘어놓는 역사가 아니고, 전쟁기록이나 전쟁영웅 몇 사람을 치켜세우자는 역사가 아닙니다. ‘사람이 살아온 이야기’를 ‘역사’라는 거울로 바라보자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학교에서 다루는 역사책을 보면, 지구별에 처음 사람이 태어난 이야기라든지 이 땅에 처음 한겨레가 생긴 이야기를 제대로 다루지 않습니다. ‘기록’이 없어서 다룰 수 없다고 하지만, 기록이란 ‘책’이 아닙니다. ‘글’을 아는 사람이 ‘책’을 써야만 기록이 되지 않습니다. 글을 아는 사람이 참거짓을 뒤틀어서 책을 쓴다면, 이러한 책을 앞으로 ‘즈믄 해(천 년) 뒤’에 어떻게 바라볼까요? 참거짓을 뒤틀어서 쓴 책도 ‘역사’나 ‘기록’으로 여겨야 할는지요?


  2000년대에 선 우리는 오늘 이곳에서 어떤 지식인이나 작가가 ‘짜깁기’나 ‘표절’이나 ‘뒤틀기’를 하더라도 웬만큼 알아채거나 알아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천 년 뒤에 이곳에서 살 사람들로서는 ‘1000년치 글과 책과 자료’가 쌓일 테니, 이 모두를 샅샅이 살피거나 따지면서 무엇이 옳거나 그른가를 헤아리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천 년 뒤에는 거짓 기록이 참 기록을 뒤집을 수 있습니다.



지금의 한복은 조선 시대가 되어서야 만들어졌습니다. 그 이전에는 지역에 따라 각각 다르게 입었습니다. 고구려나 백제의 고분 벽화를 통해 고대 사람들이 입었던 옷 모양을 보면 지금의 한복과 크게 다릅니다 … 1787년 5월 해군 대령 라페루즈의 지휘 아래 부솔 호는 제주도 해안을 측량한 다음, 동해를 거슬러 올라가다가 또 다른 섬을 발견했습니다. 자기네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은 섬이었으므로, 같이 타고 있던 프랑스 육군 사관학교 교수 이름을 따서 ‘다줄레 섬’이 바로 울릉도입니다. (128, 161쪽)




  학교에서 교과목으로 가르치기에 배워야 하는 역사가 아닙니다. 시험문제에 나오니 달달 외워야 하는 역사가 아닙니다. 정치권력 입맛에 따라 바뀌는 역사 지식이나 정보를 시사상식처럼 머릿속에 넣어야 하지 않습니다.


  내가 살고 네가 사는 이야기를 가슴에 담을 노릇입니다. 우리 어버이가 살아왔고 너희 어버이가 살아온 나날을 가슴에 새길 노릇입니다. 서로 아끼고 돌보면서 함께 가꾼 살림살이를 마음에 담을 노릇입니다. 기쁘게 사랑하면서 아름답게 일군 보금자리와 마을을 마음이 새길 노릇입니다.


  말 한 마디마다 역사가 어립니다. ‘쑥’이나 ‘마늘’ 같은 낱말 하나를 얻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나물과 남새를 뜯거나 기르면서 슬기를 쌓았습니다. 이런 낱말 하나는 몇 천 해가 되었는지 몇 만 해가 되었는지, 또는 수십만 해가 되었는지 까마득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나 ‘사랑’이라는 낱말도, ‘하늘’과 ‘아이’라는 낱말도, ‘님’이나 ‘꽃’이라는 낱말도, 대단히 오래된 말이요 아주 깊은 역사가 깃든 말입니다.


  어버이는 ‘시내’나 ‘샘’이라는 말을 아이한테 물려주면서, 시냇물과 샘물을 어떻게 찾고 얻고 다루고 돌보면서 삶을 짓는가를 가르칩니다. 어버이는 ‘호미’나 ‘낫’이나 ‘쟁기’라는 말을 아이한테 물려주면서, 호미나 낫이나 쟁기라는 연장을 어떻게 벼리고 쓰고 다루고 아끼면서 삶을 짓는가를 가르칩니다.



완벽하게 짜인 각본에 의해 대한제국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습니다. 국제 정세의 변화를 외면하여 근대화에 뒤처졌고, 문호가 개방된 이후에도 제국주의 열강들에 기대어 독립을 유지하고자 했던 대한제국의 실낱같은 희망은 냉엄한 국제 현실 앞에서 힘없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 박정희 정부는 경제 개발 계획을 추진하기 위해 많은 자금이 필요했는데, 일본으로부터 3억 달러의 지원금과 3억 달러의 차관을 받기 위해 전 국민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일 국교 정상화를 추진했습니다. 이때 일본이 내건 조건이 식민지 지배에 대해 사과하지 않는 것과 독도를 ‘돌려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184, 190∼191쪽)



  이 땅에서 스스로 삶을 지은 여느 사람들, 이른바 민중이나 백성한테는 ‘삶이 역사’입니다. 여느 사람들, 이른바 민중이나 백성한테는 ‘살림이 역사’요, ‘사랑이 역사’이자, ‘사람이 역사’입니다.


  이 땅에서 권력을 세워서 정치나 사회를 세우려 한 사람들, 이른바 권력자한테는 ‘통치기간이 역사’입니다. 권력자한테는 ‘전쟁기록과 전쟁영웅이 역사’일 테고, ‘지식인 이름이나 행정기록이 역사’일 테며, ‘훈장과 외교가 역사’일 테지요.


  가만히 보면, 역사라고 할 적에 두 가지 역사가 있습니다. 한 가지 역사는 사람들이 스스로 지으면서 가꾸는 삶입니다. 다른 한 가지 역사는 사회와 정치가 사람들을 길들이려고 퍼뜨리는 지식입니다.


  법을 몰라도 착하게 사는 사람은, 통치자나 집권자 이름을 모를 뿐 아니라 통치자나 집권자하고 얽힌 역사를 몰라도 언제나 착하게 삽니다. 법을 잘 알고 통치자나 집권자 이름을 잘 아는데다가 통치자랑 집권자하고 얽힌 역사를 잘 안다고 해서 착하게 살지는 않습니다.




유럽에서는 전쟁을 일으킨 독일이 분단됐는데 아시아에서는 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분단되지 않고 우리나라가 분단되었습니다. 이는 일본의 전략적 위치 때문이었습니다 … 광복 직후부터 주요 정당과 사회단체들은 민족 반역자인 친일파들을 처단하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미군정은 자신들의 군정 통치를 위해 친일파들을 처벌하지 않고 관리로 임명해 행정을 담당하게 하거나 민족 지도자 행세를 할 수 있도록 허용했습니다 … 1954년에는 대통령 중인 제한을 초대 대통령에 한해서 철폐하도록 개정하여 장기집권을 꾀했습니다. 이승만 정부는 이때 전 세계적으로 조롱거리가 되는 행위를 저질렀습니다. (225, 230, 240쪽)



  청소년 인문책 《10대와 통하는 한국사》는 청소년한테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합니다. 먼저, 역사란 무엇인가 하고 밝힙니다. 다음으로, 아스라히 먼 옛날에 이 땅에 처음 나타난 사람은 어떤 삶을 가꾸려 했는가를 헤아립니다. 그리고, ‘글’이나 ‘책’이 생긴 뒤 학교에서 가르치는 ‘역사 지식’을 놓고서, 이러한 역사 지식이 우리 삶하고 어떻게 이어지는가 하는 대목을 살핍니다. 여기에, 한 가지 이야기를 덧붙입니다. 아프거나 슬프거나 구비진 역사를 놓고서, 청소년이 스스로 옳고 바르면서 아름답고 사랑스레 생각을 북돋울 수 있는 실마리를 찾아보려고 합니다.


  정치권력이 이 땅에서 무슨 일을 왜 했는가를 짚고, 정치권력을 거꾸러뜨린 사람들은 어떤 꿈을 품었는가를 다루며, 2000년대 오늘을 살면서 3000년대 ‘천 년 뒤’를 내다보면서 살아갈 청소년한테 ‘삶을 스스로 지어서 기쁘게 가꾸는 길’을 걷는 동안 길동무로 삼을 ‘이야기’가 무엇인가 하는 대목을 밝히려 합니다.




박정희 정부는 국가 안보와 지속적인 경제 성장을 위해서는 정치적 안정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내세워 강압적인 통치에 나섰습니다. 1971년 12월 국가 비상사태를 선언해 대통령에게 초법적인 비상대권을 부여하고, 1972년 10월 이른바 ‘10월 유신’을 선포하여 모든 권력이 대통령에게 집중되는 유신 헌법을 공포했습니다 … 박정희는 우리나라에 서구식 민주주의는 맞지 않아서 ‘한국적 민주주의’인 유신 헌법이 필요하다고 강변했지만, 유신 체제는 민주 헌정의 기본 질서를 철저하게 파괴한 비민주적, 권위주의적 통치 체제였습니다. 국민의 기본권과 자유를 근본적으로 제약하는 독재 체제였습니다. (245쪽)



  어미 제비 두 마리가 하루 내내 그야말로 바지런히 들과 숲을 가로지릅니다. 어미 제비 두 마리는 아주 먼 옛날부터 해 왔듯이 새끼를 돌봅니다. 오직 사랑으로 새끼를 낳아서 돌보고는, 여름이 저물 무렵 너른 바다를 넘어서 따스한 고장으로 갑니다.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한국사람은 어디에서 무엇을 왜 하면서 하루를 여는가 하고 돌아봅니다. 이 나라를 버티는 바탕이 될 여느 사람들은 어떤 하루를 보내고, 이 나라에서 대통령이나 공무원이나 정치 일꾼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어떤 하루를 보낼까 하고 돌아봅니다.


  신문이나 방송에서는 대통령이나 정치 일꾼 목소리나 발자국을 꽤 크게 다루거나 싣습니다. 그러나, 이런 목소리나 발자국을 두고 ‘역사’라고 말할 사람은 없습니다. ‘기록’은 될 수 있어도 역사라고는 하기 어렵습니다.


  우리가 어버이요 어른으로서 아이나 청소년한테 역사를 물려주거나 가르치려고 할 적에는, 아이나 청소년한테 삶을 아름답게 가꾼 발자취와 슬기를 물려준다는 뜻이면서, 삶을 기쁘게 누리는 웃음과 어깨동무를 가르친다는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두 손에 따순 마음을 담아서 역사를 씁니다. 두 눈에 밝은 넋을 실어서 역사를 짓습니다. 4348.6.26.쇠.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청소년 인문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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