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우리 마을 이야기 1~7 세트 - 전7권
오제 아키라 지음, 이기진 옮김 / 길찾기 / 2012년 3월
평점 :
절판


지난 2012년 3월부터 5월 사이에 일곱 권이 재빨리 나왔던

<우리 마을 이야기>를 읽은 지 꽤 되었으나

일곱 권 모두를 놓고 쓰는 느낌글은

오늘 마무리를 짓는다.


느낌글 하나를 섣불리 쓸 수 없었기 때문에

내 몸으로 삭히는 대로

내 마음으로 걸러서 하나씩 하나씩

천천히 썼다.


6권 이야기를 쓴 뒤

7권 이야기를 쓰기까지는

꽤 오래 걸렸다.


그동안 책상맡에 이 만화책을 놓으면서

자꾸 들여다보고 생각하면서

이 만화를 바탕으로 우리 삶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하는

실마리를 풀어 보려 했다.


아무쪼록 이 만화를 제대로 읽어

삶을 슬기롭게 일구는 이웃들이 늘어나기를 빈다.



7권 : 우리 마을을 지키는 힘 (2014.8.23.)

http://blog.aladin.co.kr/hbooks/7116573


6권 : 흙을 배우는 삶 (2013.11.6.)

http://blog.aladin.co.kr/hbooks/6677648


5권 : 삶·교육·꿈을 흙과 함께 (2013.2.22.)


4권 : 함께 살아가는 땅 (2012.11.17.)


3권 : 따뜻이 품는 가슴 (2012.9.13.)


2권 : 10년 걸린 밭, 10년 흘린 밥 (2012.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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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마을 이야기 7
오제 아키라 지음, 이기진 옮김 / 길찾기 / 2012년 5월
평점 :
절판





만화책 즐겨읽기 363



우리 마을을 지키는 힘

― 우리 마을 이야기 7

 오제 아키라 글·그림

 이기진 옮김

 길찾기 펴냄, 2012.5.31.



  얼핏 잠이 들려고 하다가 찍찍 하고 제법 크게 우짖는 새소리를 듣고 번쩍 눈을 뜹니다. 아, 새로구나, 새가 한 마리 나무에 앉아서 놀다가 가는구나. 이 새는 무엇을 생각하면서 나무에 앉았을까요. 이 새는 어떤 먹이를 찾아 우리 집 둘레 나무에 앉았을까요.


  나무 한 그루는 천천히 자랍니다. 새가 앉았다가 가는 나무 한 그루는 천천히 자랍니다. 새 한 마리가 앉을 만한 나무라 한다면, 새 한 마리가 어른으로 큰 뒤 새끼를 낳아 새로서는 기나긴 삶을 모두 누리고 흙으로 돌아갈 만한 나날을 살았지 싶어요. 새 한 마리는 나무 한 그루가 갓 싹이 돋고 줄기가 오를 즈음부터 지켜보았을 테고, 흙을 돌아갈 무렵 나무 한 그루가 우람히 자란 모습을 보고는 빙그레 웃음을 지을는지 모릅니다.


  새는 나무를 바라보며, 이만큼 잘 컸구나 하고 생각하겠지요. 나무는 새를 바라보며, 네 새끼들이 내 가지에 앉아서 쉬겠구나 하고 생각하겠지요. 우람하게 선 나무에 처음으로 새가 찾아와서 내려앉을 때부터 새와 나무 사이에 이야기 하나 태어납니다.



- 정부는 강제수용이라는 공권력을 들이밀었지만, 땅굴로 기어들어 가고 요새의 울타리에 쇠사슬로 몸을 묶어서 저항하는 반대동맹 사람들에게 그 어떤 손도 쓸 수가 없었다. 그래도 공단은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는 듯이 우왕좌왕 요새 주변의 나무들을 베어 가져가거나 경호원들이 소년행동대에게 폭력을 휘두르거나 했고, 이른 아침에 출동한 불도저 앞에서 농성 하던 학생들을 기동대가 급습해 200명 넘는 부상자와 14명의 체포자를 내기도 했다. (5∼6쪽)

- “실컷 상대방을 두들겨패 놓고 이제 와서 뭔 놈의 대화여. 우리 농사꾼들이 그렇게 물렁하지는 않다 이거여.” “자자, 그래도 이삼 일은 애들을 학교에 보낼 수 있잖여. 밭일도 어느 정도 돌보고 요새도 보강하자구.” (10쪽)




  나무가 있는 곳에서 사람이 살아갑니다. 나무가 없는 곳에서도 사람이 살아갈는지 모릅니다만, 사람은 으레 나무가 있는 곳에서 보금자리를 가꾸려 합니다. 섬에서든 뭍에서든, 이 나라에서든 저 나라에서든, 나무가 있을 때에 비로소 집이 섭니다. 그리고, 집이 한 채 선 뒤에 다른 집이 두 채 석 채 찬찬히 섭니다. 다른 집이 하나둘 새롭게 서면 어느새 마을이 섭니다. 서로 돕고 아끼면서 어깨동무를 하는 마을입니다. 한집 사람으로 지내는 마을입니다. 한마음이 되고 한몸이 되는 마을입니다. 기쁠 때에 함께 웃는 마을입니다. 슬플 때에 함께 우는 마을입니다. 서로 아끼면서 즐거운 마을입니다. 같이 도우면서 사랑스러운 마을입니다.


  이곳에 마을 하나가 서듯이 저곳에 마을 하나가 섭니다. 곳곳에 마을이 섭니다. 마을은 서로 가까운 자리에 서기도 하지만, 꽤 떨어진 자리에 서기도 합니다. 그러나 똑같은 마을은 없기 때문에, 마을마다 말이 다릅니다. 다만, 말이 아주 다르지는 않아요. 웬만큼 다릅니다. 이럭저럭 다르지요. 마을과 마을은 서로 이야기를 나누지만, 스스로 제 마을에서 쓰는 말로 이야기를 해요.


  내 마을에서 쓰는 말이기에 더 낫거나 훌륭하지 않습니다. 이웃에서 지내는 마을더러 우리 마을에서 쓰는 말로 바꾸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웃에 있는 마을도 우리 마을더러 우리 마을 말을 버리고는 저희 마을 말을 쓰라 할 수 없습니다. 다 다른 마을은 저마다 다른 마을빛을 건사하면서 마을살이를 이룹니다. 다 다른 마을은 서로서로 아름답게 살림을 꾸립니다.



- “선생님! 그렇게 걱정이라면 같이 싸워 주세요!” “요새에 들어가서 함께 싸워요! 다칠 염려는 없어요. 우리가 지켜 줄 테니까!” 30분도 안 돼서 선생들은 도망치듯 돌아갔다. 주위에서 비웃음이 일었다. 선생들은 말로만 우리를 이해하고 동정했을 뿐, 결국 우리를 저버렸다. 아니, 우리가 선생들에 대한 기대를 버렸다. (12∼13쪽)

- “와타세 군. 그런 거 없어도 얼마든지 이길 수 있네. 젊은이들은 생각이 너무 과격해서 탈이란 말여.” “하지만 구와타 아저씨. 불도저로부터 어떻게 요새를 지킨단 말이에요?” “이 싸움은 무저항의 저항으로 간다. 그것이 동맹의 기본 방침이여. 놈들은 지금까지 요새 근처에도 못 왔어. 화염병 같은 걸 던져 봐라. 놈들한테 얼씨구나 공격의 구실을 주는 겨.” “구실이 있든 없든 곧 공격해 올 거란 건 불을 보듯 뻔해요. 그때 허둥대 봤자 이미 늦습니다.” “화염병이 날아다니게 되면 그건 진짜 전쟁이여. 우린 마지막까지 농민다운 싸움을 한다.” (16∼17쪽)




  집이 있고 마을이 있은 뒤에 고을이 있습니다. 비슷한 마을이 곳곳에 모여 고을을 이룹니다. 고을로 아우르는 마을은 저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서로 어깨를 겯을 만큼 살갑거나 가까운 삶입니다. 저마다 다른 삶터에 맞추어 저마다 다르게 삶을 가꿉니다.


  고을이 있으면, 고을을 지나 고장이 있습니다. 고장과 고장은 사뭇 다르다고 할 만합니다. 이를테면, 경상도와 강원도는 사뭇 다르고, 충청도와 전라도는 사뭇 다릅니다. 꽤 높다란 멧줄기가 고장과 고장을 가릅니다. 퍽 깊고 넓은 냇물이 고장과 고장을 갈라요.


  우리 마을과 우리 고을로도 넉넉하면서 즐겁기에 굳이 이웃 고장으로 넘어가지 않습니다. 이웃에서도 괜히 우리 고장으로 넘어오지 않습니다. 서로서로 제자리를 지킵니다. 서로서로 제길을 걷습니다.


  바다가 너른 고장이라서 숲이 너른 고장보다 아름답지 않습니다. 멧골이 깊은 고장이라서 들이 넓은 고장보다 아름답지 않습니다. 어느 고장이든 저마다 아름답습니다. 겨울이 더 춥든 여름이 더 덥든, 고장마다 사랑스러운 삶이요 나날입니다. 굳이 여러 고장을 하나로 뭉뚱그려야 하지 않아요.



- “사실, 놈들은 그와 다를 바 없는 거대한 폭력을 앞세워 공항 건설을 추진해 왔다. 그것에 비하면 화염병 정도는 새발의 피지.” “음. 어떤 폭력적인 방법이라도 쓰고 싶을 만큼 열 받는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그렇다고, 정부가 하고 있는 나쁜 짓과 우리들의 폭력을 비교하면 우리 쪽이 훨씬 덜 하다고, 그렇게 생각함으로써 사람을 해치는 일을 정당화하는 것이 말이에요. 뭐랄까, 나 자신을 괴롭히는 일 같아서, 왠지 버거운 일 같아서.” (19∼20쪽)

- 기동대는 어른들의 머리를 방패로 계속해서 찍어 내리고, 아이들을 움켜쥐고 끄집어 내팽개쳤다. 제2요새는 지옥 그 자체였다. (40쪽)

- “잘 알겄다! 아주 잘 알겄어! 이거이 네놈들의 수법인 게여! 우릴 죽여도 상관없다는 것이여! 네놈들은! 오냐, 그렇다면 이쪽도 가만있지는 않을 것이여! 평생 기억해 주마! 오늘 일은!” (42쪽)




  스스로 즐겁게 살림을 가꾸는 사람은 ‘내 집’에서 모든 삶을 이룹니다. 맨 먼저 밥을 짓습니다. 남한테 기대지 않고 스스로 밥을 지어서 이룹니다. 다음으로 옷을 짓습니다. 남한테서 얻으려 하지 않고 스스로 옷을 지어서 이룹니다. 그리고 집을 짓습니다. 집을 지을 적에는 이웃 손길을 받을 수 있으나, 혼자서도 너끈히 집을 짓습니다. 다만, 혼자 집을 지을 때에는 퍽 오래 걸리지요. 그러나, 오래 걸린다는 생각을 할 일이 없어요. 스스로 날마다 새롭게 이루는 삶이니, 집을 천천히 지으면서 즐겁습니다. 조금씩 마무리를 짓는 집 모양을 살피면서 기쁩니다.


  스스로 즐겁게 살림을 가꾸는 사람이 ‘내 집’을 이루는 결대로 하나씩 모여 이루는 마을입니다. 그러니, 한 집만 있어도 이 한 집은 스스로 삶을 이룰 뿐 아니라, 스스로 삶을 이루는 집들이 모인 마을이니, 마을은 언제나 스스로 삶을 이루어요.


  모자랄 일이 없고 아쉬울 일이 없습니다. 집집마다 오순도순 지냅니다. 집집마다 사랑스러우면서 따사로운 노래가 흐릅니다. 노래가 흐르고 이야기가 태어나는 집이 모인 마을이니, 마을살이란 ‘온누리’라고 할 만합니다. 모든 것을 가장 넉넉하고 즐겁게 이룬 삶이니, 언제나 사랑을 길어올립니다.


  그러니까, ‘집’이라고 할 적에는, 스스로 모든 삶을 이루는 살림을 가꾼다는 뜻입니다. 나이가 찬 사람이 제금을 나서 지내는 터가 집이 아닙니다. 아파트 한 채나 다세대주택 한 자리가 집이 아닙니다. 모든 삶을 이룰 수 있는 데가 집입니다. 커다란 장비를 써서 수만이나 수십만 채 집을 똑같이 찍어내듯이 만들어야 집이 아닙니다. 집은 나라에서 지어서 줄 수 없습니다. 집은 장사꾼이 지어서 팔 수 없습니다. 나라가 짓거나 장사꾼이 파는 것은 언제나 ‘부동산’이나 ‘재산’입니다.



- “우리가 틀렸다고 말하는 거냐? 아무리 공단이라도 같은 인간이라고 생각한 것이 잘못이었던 게냐. 놈들은 인간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라는 게냐.” (46쪽)

- “이놈들아! 사람이 올라가 있는 나무를 베면 어떻게 되는지 알면서 그러는 게여! 기동대! 네놈들이 그러고도 경찰이여! 어째서 저놈들을 살인죄로 체포하지 않는 거여!” (59쪽)

- 제1차 대집행에 성공한 적들은 앞으로 제2, 제3의 강제수용을 진행시킬 것이다. 거기에 우리 집이 있고 우리 밭이 있고 우리 마을이 있다. 부상자 1400명. 체포자 400명. 이 나라가 우리들의 땅을 빼앗아 간다는 건, 바로 이런 모습이었던 것이다. (74∼75쪽)

- “저주받을 게여, 반드시. 이 산리즈카를 지옥으로 만들었으니. 아무리, 콘크리트로 땅을 덮어 버린다 해도, 사람의 원한까지 묻어 버릴 수는 없는겨. 우리가 자자손손 이 한을 대물림할 테니께.” (76쪽)




 오제 아키라 님이 빚은 만화책 《우리 마을 이야기》(길찾기,2012) 일곱째 권을 읽었습니다. 첫째 권부터 일곱째 권까지 천천히 읽었습니다. 일본 산리즈카 시골마을 사람들이 일본 정부가 밀어붙이려 하던 나리타공항 때문에 얼마나 아프고 괴로웠으며 힘들었는가 하는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슬픔과 고단함이 듬뿍 묻어나는 만화책을 읽는 동안 내 삶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나는 저 산리즈카 사람들처럼 공권력 때문에 두들겨맞지 않으니, 그럭저럭 지낼 만할까요? 그렇지만, 우리 식구가 지내는 전남 고흥은 군수와 군청 공무원이 포스코와 손을 맞잡고 화력발전소를 끌어들이려고 했습니다. 이태 앞서 이 싸움을 끝냈습니다만, 아직 불씨는 있어요. 게다가 고흥군 군수와 공무원은 다도해 국립공원 바닷가와 맞닿은 숲을 광주시 교육청에 강제수용을 해서 팔았어요. 그러고는 갑작스레 청소년수련원 공사를 밀어붙였지요. 아름드리 숲을 하루아침에 밀어 없앴습니다. 국립공원이던 곳을 조용히 풀더니 하루아침에 강제수용으로 팔았을 뿐 아니라, 숲도 바다도 몽땅 어지럽힙니다. 아름다운 바다라고 해서 해마다 꽤 많은 사람들이 전남 고흥 발포 바닷가를 찾아왔으나, 이제 아무도 발포 바닷가에 가지 않습니다. 청소년수련원 건물을 와장창 지으면서 숲과 바다를 모조리 어지럽히니, 사람들 발길이 뚝 끊어져요. 다른 고장 사람들뿐 아니라, 고흥사람인 나조차도 아이들하고 발포 바닷가에 안 갑니다. 무시무시한 짐차가 수없이 오가는 길이 안 좋기도 하고, 바닷물이 공사장 때문에 더러워져요. 이런 곳에 갈 까닭은 없습니다.


  일본 산리즈카에서 일본 정부가 ‘덜 민주스럽게’ 몰아붙였으면, 나리타공항은 짠하고 금세 태어났으리라 생각합니다. 한국 영종도와 용유도에서처럼 한국 정부가 ‘우악스레 강제수용을 해서 밀어붙’이면, 척하고 공항 하나 쉬 들어섭니다. 한국에서 어떤 사람이 얼마나 ‘인천공항 반대’를 외쳤을까요. 예쁜 갯벌을 없애고 예쁜 섬을 밀며 예쁜 소금밭을 망가뜨리면서 공항을 지었을 뿐 아니라, 용유와 영종에 깃든 시골집을 모조리 없애고 아파트로 바꿉니다. 한국이라는 나라에도 ‘민주’가 있을는지 모르나, 한국에서는 민주가 제대로 힘을 내지 않습니다. 아니, 한국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민주에 눈길을 둘 겨를이 없습니다. 모두들 제 코가 석 자입니다. 사람들은 제 코가 넉 자요 닷 자입니다.



- “농사꾼은 말이여, 마을이 있기 때문에 농사꾼인겨. 농사꾼은 혼자서는 살아갈 수가 없는 겨. 마을사람들이 죄다 조건파가 된 그때 이미 이와야마는 할배가 살아갈 수 없는 땅이 된 겨. 할배는 말이다, 마을이 짓밟힌 거에 대한 분노로 지금까지 버틴 게여. 공단에 땅을 팔건 안 팔건 상관없는 겨. 이미 처음부터 빼앗긴 거였어. 하나부터 열까지 말이여.” (115쪽)

- 11명의 학생들이 올라탄 요새의 철탑이 크레인에 끌려 넘어졌다. 거기에 비축해 두었던 화염병에 불이 붙어 몇 사람이 불길에 휩싸였다. 기동대가 환성을 질렀다. 전장이 광기에 휩싸이고, 전쟁은 끝이 났다. (158쪽)

- 기동대는 우리에게 있어서 마을을 위협하는 냉철한 폭력장치일 뿐이었다. 그들과 부딪히면 반드시 몇 사람인가는 그들이 휘두르는 폭력에 상처입었다. 때문에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우리와 같은 가족이 있다거나 다정하게 아이들과 함께 놀며 즐거운 휴일을 보낼 수 있다는 사실을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들도 마찬가지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안은 채 산리즈카에 왔었다는 사실이 나를 당황스럽게 했다. (163쪽)




  경상도 밀양에서 송전탑 때문에 벌어지는 일을 보면, 한국에는 민주도 평화도 평등도 없는 모습을 잘 읽을 만합니다. 그런데, 밀양 송전탑에 앞서, ‘핵발전소’가 먼저입니다. 핵발전소를 처음 지을 적에 한국 정부는 어떻게 했을까요. 핵발전소를 처음 지을 적에 신문·방송은 무엇을 했을까요. 핵발전소를 처음 지을 적에 글쟁이와 교사와 교수 같은 이들은 무슨 말을 했을까요. 핵발전소를 처음 지을 적에 학교는 무엇을 했을까요.


  모든 언론과 학교는 중앙정부 권력을 등에 업고 ‘핵발전소는 깨끗하고 안전하며 돈이 적게 드는 전기’라고 떠벌였습니다. 가장 비싸며 가장 무시무시하고 가장 끔찍한 전기인 줄 가르친 학교는 없었다고 느낍니다. 핵발전소가 어떤 곳인지 낱낱이 밝히거나 알린 신문이나 방송은 없었다고 느낍니다.


  커다란 발전소를 짓고 송전탑을 박을 돈이라면, 집집마다 ‘자가 발전’을 하는 시설을 갖추고도 돈이 아주 많이 남습니다. 집집마다 전기를 스스로 만들어서 쓰도록 시설을 갖추는 데에 들이는 돈은 아주 적습니다. 게다가 쓰레기가 나오지 않습니다. 흙도 바람도 물도 더럽히지 않습니다. 공장이나 아파트나 큰 건물에서도 전기를 스스로 만들어서 쓰도록 하면 됩니다. 못할 일이란 없습니다. 집집마다 만들어서 쓰는 전기가 남으면 이를 모아서 큰 건물이나 공장이나 아파트에 보낼 수 있어요. 이런 장치는 어렵지 않습니다.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중앙정부는 이런 일을 안 했고 아직도 안 하며 앞으로도 안 할 듯합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전기는 권력이기 때문입니다. 집집마다 스스로 전기를 만들어서 쓰면 ‘권력 통제’가 안 되어요. 커다란 발전소를 세워서 중앙정부가 ‘통제’를 해야 사람들을 마구 휘어잡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말을 안 듣는다고 하면 전기만 뚝 끊어도 돼요. 도시에서는 전기와 가스와 물을 뚝 끊으면 아마 도시사람 모두 며칠 만에 모조리 죽을 수 있어요.



- 할머니네 집은 흔적도 없이 무너지고 없었다. 비겁한 눈속임으로 치러진 대집행은 2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피붙이도 없고 아무런 힘도 없는 고독한 할머니의 자그마한 논과 집을 국가가 무력으로 뿌리째 뽑아 앗아갔다. 아니, 빼앗긴 것은 그냥 논과 집이 아니다. 그곳은 할머니에게 있어서 마음 편히 지낼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다. 그 작은 생명을 지켜 주는 단 하나의 보금자리였던 것이다. 피곤할 때는 해님에게 인사하고, 빨래해 널고 목욕하고, 술 두 잔 정도 하고 자면……. (176∼177쪽)

- ‘나는 이제 더 이상 싸울 기력을 잃어버렸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공항을 분쇄할 때까지 온힘을 다해 주세요. 공항 문제가 없었다면 나는 지금쯤 어쩌면 결혼을 해서 훌륭한 농사꾼이 되어 있었겠지요. 그러나 나는 심지가 약해서 이 싸움을 더 이상 견뎌낼 수가 없네요. 보다 인간답게 살아 보려 노력하는 사람들이 어째서 비인간적인 취급을 당해야 하는지, 정말로 국가권력이라는 것은 무섭네요. 살려고 발버둥치는 농사꾼의 생명을 빼앗고 때리고 짓밟으니까요.’ (194∼195쪽)




  권력이 싫어하는 것은 딱 하나입니다. 바로 ‘자급자족’입니다. 사람들이 스스로 밥과 옷과 집을 지으면서 삶을 가꾸는 일을 권력이 아주 싫어합니다. 사람들이 밥과 옷과 집을 스스로 지을 줄 알면, 권력은 아무 힘을 못 써요. 정치권력뿐 아니라 경제권력도 힘을 못 씁니다.


  사람들이 밥이며 옷이며 집을 ‘회사에서 번 돈을 써서 가게에서 사다 쓰도’록 사회 얼거리를 짜야, 비로소 정치와 경제와 문화와 교육과 행정과 과학을 비롯한 모든 권력이 힘을 얻습니다.


  사람들이 스스로 모시와 삼에서 실을 얻어 옷을 지어 입는다면, 옷공장이나 옷회사는 모두 무너집니다. 사람들이 스스로 숲을 가꾸어 숲에서 나무를 몇 그루 얻은 뒤 집을 지으면, 건설회사와 자동차회사와 석유회사 모두 무너집니다. 사람들이 스스로 제 터를 집숲으로 가꾸어 밥을 손수 지어서 먹으면, 식품회사와 약품회사와 병원과 백화점뿐 아니라 모든 도시 얼거리가 무너집니다.


  권력은 도시를 지키려고 사람들한테서 ‘자급자족’이라는 열쇠를 빼앗습니다. 권력은 도시를 키워 사람들을 바보나 노예나 부속품으로 만들려고 학교를 세웠습니다. 학교에서는 모든 아이들이 ‘도시에 가서 회사원이나 공무원이 되거나 전문직이 되거나 운동선수나 예술가 따위가 되어 돈을 버는 길’을 찾도록 이끕니다. 학교에서는 어느 누구도 밥·옷·집을 스스로 짓는 길을 안 가르칩니다. 교과서나 참고서나 문제집은 밥이나 옷이나 집에 아이들이 눈길을 못 두도록 가로막습니다.


  더 헤아려 본다면, 인문책도 사람들한테 길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어떤 인문책도 사람들한테 밥을 스스로 짓고 옷을 스스로 지으며 집을 스스로 지으라고 알려주지 않습니다. 어떤 인문학자와 철학자와 교육자도 사람들한테 밥·옷·집을 스스로 가꾸어 누리면서 살아가라고 말하지 않을 뿐더러, 말할 만한 슬기나 깜냥이 없습니다.


  이 땅에서 태어나는 인문책뿐 아니라 이웃나라에서 나오는 인문책도, 그저 지식조각입니다. 사람들이 머릿속에 새로운 지식조각을 채우도록 이끌 뿐입니다. 사람들이 머릿속에 지식조각만 가득 채워서 스스로 밥도 모르고 옷도 모르며 집도 모르게 내몹니다. 사람들이 그저 돈을 벌어 돈으로 밥과 옷과 집을 사서 쓰도록 이끌듯이, 모든 인문책은 사람들이 ‘자꾸 새로운 인문책을 사서 새로운 지식조각을 머릿속에 쑤셔넣도’록 살살 꼬드깁니다.



- “거기서는 화학비료도 농약도 쓰지 않고 훌륭한 수확을 거두고 있더라.” “그런 게 가능해요?” “가능하니까 신기한 게지. 아니, 신기할 것도 아니여. 나도 요 몇 년 논과 밭의 지력이 떨어진 원인이 뭔지 생각하고 있었다. 흙이 점점 모래처럼 되고 작물도 생생함을 잃고 있어. 농약을 써도 안 써도 해충이 줄어들 기미가 안 보여. 이러다가 논밭이 못 쓰게 되고 먹고살 수 없게 되면 투쟁이고 뭐고 다 소용 없는 겨 …… 그게 말여, 미생물농법이라던가, 유기농법이라던가, 퇴비 만들기부터 시작하는 손이 많이 가는 농사여. 보람이 있을 겨. 잘 봐둬라, 뎃페이. 내가 모두에게 이 농법을 전파시킬랑께. 산리즈카에서 공항 이상으로 가치 있는 농업을 만드는 거여.” (214∼215쪽)

- 그 후에도 투쟁은 끊임없이 계속되었고, 형들이 긴 재판 끝에 혐의를 벗은 것은 그로부터 15년이라는 시간이 흘러서였다. 그리고 정부가 무력으로 반대파를 탄압하는 것을 그만두고 그 잘못을 인정하고 사죄한 것은 21년 후인 1993년이었다. (226쪽)




  우리 마을을 지키는 힘이란, 우리 집을 지키는 힘입니다. 우리 집을 지키는 힘이란 우리 삶을 스스로 지키는 힘입니다. 밥 한 술을 뜰 적에 남이 내 몫을 먹어 주지 못합니다. 내 몫을 남이 먹어서 배가 부르다 하면 그이가 배가 부르지 내가 배부르지 않아요. 옷 한 벌을 입을 적에 남이 내 몫을 입어 주지 못합니다. 내가 내 몸에 옷을 걸쳐야 따뜻합니다. 남이 내 옷을 그이 몸에 걸치면 그이가 따뜻하지, 내가 따뜻하지 않습니다.


  마을을 지키려면, 먼저 내가 스스로 내 집을 가꾸는 슬기를 찾아야 합니다. 내가 오롯한 삶을 가꾸는 집을 지켜야 합니다. 내가 이곳에서 튼튼하고 씩씩하게 살아가는 ‘보금자리 하나’로 있을 때에, 내 이웃은 이웃 나름대로 저곳에서 튼튼하고 씩씩하게 살아요. 내가 있고 네가 있어서, 서로 이웃이 되어서, 천천히 마을로 거듭납니다.


  마을이란 사랑입니다. 집집마다 다 다르면서 모두 새로운 사랑이 있을 적에, 이러한 사랑이 하나로 모여 마을이 됩니다. 마을이란 노래입니다. 집집마다 다 다르면서 언제나 새로운 노래가 흐를 적에, 이러한 노래가 하나로 모여 마을이 됩니다.


  만화책 《우리 마을 이야기》는 산리즈카라고 하는 아주 조그마한 시골마을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중앙정부 권력에 맞서면서 스스로 ‘집을 지키’고 ‘삶을 가꾸’며 ‘사랑을 노래했는가’ 하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나리타공항 반대 투쟁기’가 아닙니다. ‘시골에서 삶을 찾고 깨달아 스스로 사랑이 되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만화책 《우리 마을 이야기》입니다. 이 만화책을 읽는 분들이 마음을 따사롭게 덥히는 슬기를 얻을 수 있다면, 《아나스타시아》(블라지미르 메그레 씀) 여덟 권과 《람타 화이트북》(제이지 나이트 씀)을 나란히 읽으면서, 스스로 집숲을 가꾸는 길과 함께 마음길을 닦는 배움터로 찾아갈 수 있기를 빕니다. 스스로 집을 이루어야 스스로 삶을 엽니다. 4347.8.23.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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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일이 5 - 불꽃이 되어
최호철 그림, 박태옥 글, 고래가그랬어 편집부 / 돌베개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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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 즐겨읽기 362



평화시장에서 바라던 평화

― 태일이 5

 박태옥 글

 최호철 그림

 돌베개 펴냄, 2009.2.23.



  1970년에 노동자 한 사람이 몸에 불을 붙여서 스스로 죽었습니다. 그런데. 스물두 살 앳된 젊은이가 불길에 휩싸여 죽기 앞서 훨씬 앳된 노동자가 수없이 숨을 거두었습니다. 역사책에는 이들 이름이나 숫자가 적혔을까요. 통계청 자료에는 이들 이름이나 숫자가 남았을까요. 신문이나 방송에서는 이들 이름이나 숫자를 다룬 적이 있을까요.


  1970년대에 사회부 기자를 하던 어느 기자는 1970년에 ‘터진’ 일을 취재하면서 ‘특종’을 노린 이야기를 이녁이 쓴 책에서 밝힌 적이 있습니다. 이이는 그무렵에 ‘전태일 분신자살 후속보도 특종’을 내려고 온갖 짓을 일삼습니다. 신문사 부장이라는 사람은 ‘죽은 노동자가 남긴 일기장’을 찾아서 가져오라며 큰소리를 쳤다 하고, 사회부 기자는 병원과 전태일 식구가 살던 집 언저리를 빙글빙글 돌다가 드디어 찾아내고는 몰래 빼돌려서 신문사로 가져와서 특종으로 신문에 실었다고 합니다. 그 뒤, 전태일 일기장을 이소선 님한테 돌려주었을까요? 아무렴, 돌려주었으니, 만화책 《태일이》도 나오고, 이에 앞서 여러 가지 책도 나왔겠지요(그러나 전태일 님이 남긴 일기를 몰래 빼돌린 조선일보 기자는 일기장을 곱게 돌려주지 않았습니다. 이 일기장은 노동청으로 넘어갔고, 이소선 님이 노동청하고 싸운 끝에 겨우 돌려받았지만, 열 장 남짓 찢긴 채 돌려받았다고 합니다).


  이 얘기는 1977년에 나온 《사회부 기자》(이상현 글,문리사 펴냄)라는 책에 38∼81쪽에 걸쳐 나옵니다. 전태일 님 일기를 빼돌린 기자는 조선일보 기자였고, 이를 기사로 내어 크게 터뜨립니다. 그런데,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였던 이상현 님은 “제대로 배우지도 못한 그에게 일기 같은 게 있을 것인가 말이다(41쪽).” 하고 생각합니다. 이이는 이런 말을 서슴지 않고 씁니다. 아무래도 1970년대라는 흐름이라면, ‘배운 이’가 ‘못 배운 이’를 깔보는 마음이 아주 마땅하다는듯이 퍼졌을 테며, ‘신문기자라는 권력자’와 ‘노동자라는 기계 부속품’ 사이는 하늘과 땅처럼 벌어졌을 테니, 이런 말이 나올 만하겠구나(?) 싶습니다. 참으로 배짱이 두둑한(?) 조선일보 기자라고 할까요.



- ‘그때 장사광주리를 이고 떠나는 만원버스를 타려고 안간힘을 쓰는 아주머니를 보았어. 결국 놓쳤지만! 그 모습을 보고 다들 웃는데 난 웃을 수가 없었어. 삶에 정직하고 충실한 사람이 생존경쟁에 나서는 그 모습을 보고 어떻게 웃을 수 있겠어? 어머니가 떠올랐지.’ (17쪽)





  박태옥 님이 글을 엮고 최호철 님이 그림을 빚은 《태일이》(돌베개,2009) 다섯째 권을 천천히 읽으며 생각합니다. 만화책이 아닌 영화에서도, 또 전태일 평전에서도, 이소선 님이 들려주는 이녁 아이 이야기에서도, 전태일 님은 늘 한 가지를 바랐습니다. ‘평화시장에 평화가 깃들기’를 바랐어요. 널리 알려졌다시피, 전태일 님은 ‘대학생 동무 한 사람’만이라도 있기를 바라기도 했어요. 혼자서 근로기준법을 살펴서 배우자니 너무 힘들었고, 막히는 대목에서 물어 볼 사람이 없었습니다. 1960∼70년대라고 해서 대학생이 없었겠느냐 싶지만, 평화시장 노동자한테 동무가 되어 준 대학생은 그야말로 없었지 싶어요.


  그러면, 오늘날에는 어떤 대학생 동무가 있을까 궁금합니다. 가난하거나 여린 사람들 곁에 대학생이 동무가 되어 있을까요? 늙은 할매와 할배만 가득한 시골마을에 젊은 대학생이 동무가 되어 함께 땀을 흘리거나 흙밥을 먹을까요?


  요새는 ‘농촌봉사활동’조차 거의 안 보이지 싶습니다. 우리 식구가 전남 고흥에서 네 해째 지내는데, 이동안 ‘서울에서건 전라도에서건 대학생이 농활을 온 모습’을 아직 구경하지 못했습니다. 고흥에서 나고 자란 뒤 서울로 대학생이 되어 떠난 젊은이 가운데, 봄가을이나 여름겨울에 시골로 돌아와서 일손을 거드는 젊은이는 얼마나 되는지도 궁금합니다. 도시에서 회사원이나 공무원이 된 뒤에, 아이를 낳은 뒤에, 시골로 돌아와서 들일을 함께하는 젊은이는 얼마나 되는지도 궁금합니다.



- ‘함께 일하지만 서로에게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인 거야. 인간이라기보다는 일만 하는 기계 같은 존재 아닌가? 기계, 기계에는 영혼이 없어. 그러면 우린 뭐지? 영혼이 없는 인간? 인간의 탈을 쓴 기계? 그러다 고장이라도 나면 아주 쉽게 내다 버리겠지. 고장 난 기계처럼 말이야.’ (23쪽)

- “태일 군이 약자를 생각하는 마음은 뭐라 하지 않겠지만 너무 세상을 비판적이고 삐딱하게 보는 것 같네.” “삐딱한 게 아니라 전 세상이 적어도 법대로, 상식대로 굴러가길 원할 뿐입니다. 근로기준법을 모든 공장에서 지키는 것처럼 말이죠.” … “세상은 때론 어쩔 수 없이 큰일을 위해 작은 것은 희생될 때가 있다네.” “희생이요? 작은 것들이요? 자신이 원하는 희생이야 그럴 수도 있지만 강요된 희생이 싫을 땐 어쩝니까? 전 사람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 제겐 신앙은 평화시장 어린 여공들의 행복입니다.” (68∼69쪽)






  늦여름에 비가 내립니다. 늦여름에 여러 날 비가 그치지 않습니다. 일찌감치 이삭이 패어 고개를 숙인 나락이 있지만, 아직 꽃대가 오르지 않은 나락이 많고, 이제 막 꽃대가 올라 이삭이 패려는 나락이 많습니다. 그러니까, 요즈음은 비가 와서는 안 되는 날씨라고 할 수 있어요. 해가 쨍쨍 내리쬐어 나락이 고소하게 영글도록 보듬어야 하는 날씨입니다.


  비가 오는 날, 도시사람은 무엇을 생각할까요. 늦여름에 내리는 비를 놓고, 도시사람은 무엇을 생각할까요. 이삭이 팰 즈음에 내리는 비가 벼한테 얼마나 나쁠는지 헤아리는 도시사람은, 그러니까 ‘도시에서 살며 시골을 이웃으로 여기는 사람’은 얼마쯤 될까요.



- “돈이 있으면서도 줄 돈을 안 주는 심보는 또 뭐야? 부려 먹을 땐 언제고.” “밀린 돈 못 받고 그만두면 돈 떼이는 게 여기 전통인가 했는데 오늘 정말 통쾌하다.” … “역시 뭉치면 안 되는 일이 없어. 전태일 회장의 밀린 임금도 받아 내고!” “사장들도 그걸 무서워하는 거라고. 우리가 똑똑해지고 뭉치는 거.” (108쪽)

- ‘기침 소리는 언제나 내 가슴을 찌른다. 지금도 많은 여공들이 병들어 죽어 가고 있는데. 이런 현실을 세상에 알려야 바꿀 수 있을 텐데. 그게 내가 할 일이야. 세상에 평화시장의 현실을 알리고 고치는 일! 내가 해야 할 일!’ (163쪽)




  생각을 하지 않으면 알지 못합니다. 알지 못하니 느끼지 못합니다. 느끼지 못하니 어깨동무를 하지 못합니다. 어깨동무를 하지 못하니, 참다우면서 착하고 아름다운 길로 함께 나아가지 못합니다. 참다우면서 착하고 아름다운 길로 함께 나아가지 못하니, 이 땅에 사랑이나 평화가 깃들지 못합니다.


  슬기롭게 생각할 일입니다. 따사롭게 바라볼 일입니다. 즐겁게 노래할 일입니다. 서로 손을 맞잡으면서 함께 춤추고 노래할 신나는 삶터를 꿈꿀 일입니다.


  평화시장에 평화가 깃들기를 바란 전태일 님은 평화시장만 잘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재단사로 일하면서 평화시장에 평화가 깃들기를 바랄 뿐 아니라, 막일을 하면서 막일판에서 몸을 쓰는 이웃들한테도 평화가 깃들기를 바랍니다. 돈을 놓고 돈을 먹는 사람들한테도 돈에만 얽매여 스스로 이녁 삶을 놓치거나 모르쇠하는 슬픈 굴레에 갇히지 않기를 바랍니다. 평화시장에서 봉제공장을 꾸리는 사장이 노동자 일삯을 떼먹거나 마구 부려먹는다면, 노동자만 고단하지 않아요. 사람을 마구 부리면서 괴롭히는 사람 스스로 마음이 낡습니다. 낡은 마음으로는 삶을 아름답게 가꾸지 못합니다. 낡은 마음으로는 이웃과 사랑을 나누지 못해요.



- 태일은 경쟁보다는 우애를, 가지는 것보다는 나누는 것을, 남들이 원하는 것보다 자신이 되고자 하는 무엇이 되기 위해 노력했던 우리 모두의 친구였다! (198쪽)





  1970년 11월 13일까지, 독재권력인 대통령을 비롯해서 경찰과 군대 모두 노동자 삶을 헤아리지 않습니다. 신문사 기자와 방송국 피디도 노동자 삶을 돌아보지 않습니다. 그러면, 글을 쓰는 사람이나 사진을 찍는 사람이나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노동자 삶을 얼마나 돌아보았을까요. 예배당 목사와 신부는 노동자 삶을 얼마나 살폈을까요.


  1970년에서 마흔 해가 훌쩍 지나간 오늘날에는 대통령을 비롯해 이곳과 저곳에 있는 사람들이 노동자 삶을 얼마나 살필까요. 그리고, 시골에서 흙을 만지는 사람들 삶을 얼마쯤 헤아릴까요. 덧붙여, 아이들이 입시지옥에서 골골거리는데, 이러한 틀을 깨부수려고 하는 사람은 얼마쯤 있을까요. 멈추지 않는 핵발전소와 물질문명을 멈추도록 마음을 기울이는 사람은 어디에 있을까요.


  예전처럼, 그러니까 1970년처럼, 오늘 우리는 서로 외롭지는 않다고 느낍니다. 다만, 외롭지는 않을 뿐입니다. 외롭지 않은 데에서 끝나지 않기를 바라요. 어깨동무를 하기를 바라요. 공장은 사장한테 남기고, 정치권력은 대통령한테 넘기고, 대학교는 교수들한테 남기고, 모든 발전소와 물질문명은 부자들한테 넘긴 뒤, 다 같이 도시를 떠날 수 있기를 바라요. 우리 스스로 삶을 스스로 짓고, 밥과 옷과 집을 스스로 마련할 때에, 비로소 이 땅에 평화가 찾아올 수 있다고 느낍니다. 4347.8.20.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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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의 왕국 13
라이쿠 마코토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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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 즐겨읽기 363



보고 지어서 함께하는 사랑

― 동물의 왕국 13

 라이쿠 마코토 글·그림

 최윤정 옮김

 학산문화사 펴냄, 2014.5.25.



  2010년부터 지네와 한집에서 삽니다. 비가 자주 내려 축축한 날이면 으레 지네가 나타납니다. 보일러를 돌려 집안을 덥히면 지네는 스스로 밖으로 나갑니다. 되게 커다란 지네가 나오는 날이 있고, 조그마한 지네가 나오는 날이 있습니다. 이럭저럭 지네와 살았구나 싶은데, 엊저녁 지네가 처음으로 내 오른발을 타고 올라와서 발끝을 깨뭅니다. 처음에는 살짝 따끔하다 싶어 모기인가 하고 생각했는데, 발가락이 살짝 간지럽습니다. 뭔가 하고 발을 드니 지네입니다. 어라, 이 아이가 왜 내 발가락을 감고 올라왔을까. 발을 툭툭 털어 지네를 떨굽니다. 지네는 볼볼 기어 어디론가 숨습니다.


  지네는 내 발가락을 왜 물었을까요. 지네는 내 발가락을 문 뒤 어디로 갔을까요. 지네한테는 우리 집이 어떤 터전일까요. 이곳에 사람들이 집을 짓고 살기 앞서부터 지네가 살았을까요. 지네를 비롯해 수없이 많은 목숨들이 이곳을 저희 삶터로 삼아서 살아왔을까요.



- “그곳의 자료로 인간의 역사를 봤다! 인간이 얼마나 전쟁을 되풀이했는지! 그때마다 얼마나 비약적인 과학기술의 진보를 이루었는지! 역시 내 생각이 옳았다. 동물은 서로를 죽임으로써, 가장 머리를 쓰고, 가장 앞으로 나아가려 한다. 그리고 그 동물 중에서, 인간이 가장 최악이다.” (26∼27쪽)

- “너 같은 게 있어서, 이 세상의 고통이 사라지지 않는 거야! 글로뷸! 저런 천박한 자가 가진 천박한 생각으로 만들어진, 천박한 무기에 질 네가 아니다! 천박한 저 녀석의 생각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은 오직 지옥뿐!” (33쪽)




  모기는 사람한테 내려앉아 피를 빱니다. 모기는 피를 빨아서 이녁 목숨을 잇습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은 모기를 보면 잡아서 죽입니다. 요즈음은 약을 뿌려서 죽입니다. 왜 모기는 사람 피를 빨아먹으려 하고, 왜 사람은 모기를 보면 몽땅 죽이려고 할까요. 파리가 지구별에서 사라지면 지구별은 쓰레기로 넘쳐서 망가질 테니 파리는 지구별에 알맞게 있어야 할 텐데, 모기는 지구별에서 먹이사슬을 어떻게 지키는 구실을 할까요. 모기가 모두 사라지면 지구별에 평화가 찾아올 수 있을까요.


  아이들이 모기 소리를 들었다고 하면서 잠에서 깨면, 나도 잠에서 깨어 모기 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 아이들은 모기를 잡을 때까지 다시 잠들지 못합니다. 나는 모기가 물거나 말거나 그냥 자곤 하지만, 모기가 문다 싶어도 모기가 물 만한 자리를 손으로 슥슥 비비면서 잡습니다. 내 피를 조금 내주고 잡으면 된다고 여깁니다. 나와 달리 아이들은 모기 소리가 사라지기를 바랍니다. 어버이로서 내가 밤에 할 일은 아무튼 모기를 때려잡는 일입니다.


  아이들이 아주 어릴 적에는 오줌기저귀를 가느라 밤잠을 못 이루었고, 오줌기저귀를 뗀다 싶으니 밤오줌을 누이느라 밤잠을 못 이루더니, 밤오줌을 이럭저럭 잘 가린다 싶은 요즈막에는 밤에 틈틈이 모기를 잡습니다. 앞으로 아이들이 더 크면 밤에 어떤 일을 맞이할까 하고 생각하다가, 모기란 참말 무엇일까 하고 생각을 기울입니다.



- “글로뷸의 데이터 수집 완료. 또한 녀석의 전멸 패턴을 완성했다.” (74쪽)

- “어떤 종교든 이 천국에는 ‘죽은 후에만’ 갈 수 있지. 이게 네게 내는 문제야. 종교는 살아 있는 사람을 구원하는 가르침인데, 어째서 죽은 후에만 갈 수 있는 곳에, 천국을 만들었을까?” (84∼85쪽)





  물을 마시면 물은 내 몸이 됩니다. 골짝물을 마시면 골짝물은 내 몸이 됩니다. 냇물을 마시면 냇물은 내 몸이 됩니다. 수돗물을 마시면 수돗물은 내 몸이 됩니다. 소주를 마시면 소주는 내 몸이 됩니다. 막걸리를 마시면 막걸리는 내 몸이 됩니다. 찻물을 마시면 찻물은 내 몸이 되지요.


  자동차가 끝없이 오가는 도시에서 숨을 쉬면, 자동차 배기가스는 내 코를 거쳐 몸으로 들어와 내 숨결이 됩니다. 핵발전소 둘레에서 살며 숨을 쉬면, 방사능이 내 코뿐 아니라 살갗을 거쳐 몸으로 들어와 내 숨결이 됩니다. 광산에서 탄을 캐는 일을 하면, 탄가루가 코와 살갗으로 스며들어 내 숨결이 될 테고, 시골 밭자락에서 일을 하면, 흙내음과 풀내음이 코와 살갗으로 스며들어 내 숨결이 될 테지요. 그런데, 시골에서 농약을 뿌리거나 비료를 치면, 농약과 비료가 내 코와 살갗으로 들어와서 내 숨결이 됩니다.


  아픈 사람은 몸을 아프게 할 만한 것을 꾸준히 몸에 넣었기 때문입니다. 몸을 아프게 할 만한 것을 꾸준히 몸에 넣은 다음, 이를 털어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안 아픈 사람은 몸을 아프게 할 만한 것을 몸에 안 넣습니다. 몸을 아프게 할 만한 것이 몸에 들어왔어도 다시금 몸 바깥으로 내보내면 됩니다.


  누구나 이녁 삶을 스스로 짓는데, 누구나 이녁 몸과 마음 또한 스스로 짓습니다. 아름답거나 튼튼한 몸이 되고 싶은 사람은, 언제나 스스로 아름답거나 튼튼한 몸이 되도록 짓습니다. 아름다움이나 튼튼함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몸이 어떻게 되든 생각을 쏟지 못합니다.



- “넌 자각하지 못했겠지만, 신은 네게 ‘생명을 주는 힘’을 맡겼다. ‘샐러드 우동’, ‘루크’. 네가 만든 키메라는 자아와 진짜 생명을 가졌다. 우리 인간이 아무리 키메라를 연구하고, 생명을 연구해도 이룰 수 없었던 위업을 넌 이루어낸 것이다. 참 아이러니하지? 모든 생명을 죽이려 했던 네게, 신은 ‘생명을 주는 힘’을 맡기다니.” (93쪽)

- “일레인! 이 별을 파괴해선 안 돼! 이 별은 사랑스러운 생명으로 넘쳐나고 있어!” (150쪽)

- “일레인, 생명을 알아 줘! 빼앗기 전에 그 생명의 아름다움을!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모습을!” (159∼160쪽)





  라이쿠 마코토 님이 빚은 만화책 《동물의 왕국》(학산문화사,2014) 열셋째 권을 읽습니다. 이제 이 만화는 곧 끝이 납니다. 열넷째 권이 마지막이라고 합니다. 마지막 권을 앞둔 열셋째 권에서는 ‘사람이 스스로 다른 목숨을 빚는 까닭’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나와 너 사이에서 새로운 목숨이 태어나도록 하는 삶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왜 새로운 목숨을 너와 나 사이에서 빚으려 할까요? 내가 그러모은 돈을 물려주려고? 내가 지은 집을 물려주려고? 내가 쌓은 이름을 물려주려고? 우리는 왜 너와 나 사이에 새로운 목숨을 빚을까요?


  언제나 오직 하나입니다. 사랑 때문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누린 삶을 사랑하기에 새로운 목숨을 빚습니다. 너와 내가 아름답게 하루하루 누리면서 가꾸었기에 사랑으로 새 목숨을 빚고 싶습니다. 새로운 목숨이 태어나 새로운 손길로 이 땅을 한결 아름답고 튼튼하게 돌보면서 가꾸기를 바랍니다. 새로운 목숨이 자라면서 새로운 눈길로 이 땅을 바라보기를 바랍니다.



- “주어지지 않았다면, 만들면 돼.” (111쪽)

- “쿠오우의 울음소리를 들어! 사랑해. 일레인.” (132∼133쪽)

- “그렇다면 마음대로 파괴해. 직성이 풀릴 때까지 부수다 모든 것이 사라지고 나면, 넌 정말로, 태어난 의미를 잃게 될 거야.” (162쪽)

- “그건, 네 몸이 엄마보다도 깊은 사랑에 의해 태어났기 때문이야. 그런 네 몸이, 쿠오우를 사랑하기 때문이지. 이게 온기라는 거야.” (180∼181쪽)




  지구별에 평화가 깃들려면 우리는 누구나 스스로 생각해야 합니다. 스스로 어떤 삶을 날마다 새롭게 지어서 아름답게 하루를 즐기고 싶은지 생각해야 합니다. 지구별에 평등과 민주와 자유가 넘실거리려면 우리는 누구나 저마다 생각해야 합니다. 스스로 어떤 하루를 날마다 새롭게 지어서 사랑스레 하루를 누리고 싶은지 생각해야 합니다.


  생각이 삶을 이루고, 생각이 사랑으로 나아갑니다. 생각이 있을 때에 삶과 사랑이 있습니다. 생각이 없이 이끌리기만 한다면 삶도 사랑도 없습니다. 쳇바퀴를 돌거나 수렁에 갇히거나 기계 부속품이 된다든지 노예처럼 부려먹힐 때에는 삶과 사랑이 없을 뿐 아니라 생각조차 없습니다.


  오늘날 학교교육은 아이들한테서 생각을 빼앗습니다. 입시지옥은 아이들이 생각을 못하게끔 가로막습니다. 입시지옥이 끝난 뒤에는 취업이라는 그물이 있어, 다시금 생각을 가로막습니다. 돈을 벌지 않으면 굶어서 죽는다는 잘못된 지식을 사람들한테 심으니, 사람들은 이러한 굴레에 사로잡혀 그만 생각을 잊습니다. 돈을 버는 쳇바퀴로만 나아가고 말아, 스스로 지을 아름다운 삶과 사랑을 잃습니다.


  살아갈 뜻을 스스로 찾을 때에 살아갑니다. 살아갈 뜻을 스스로 찾지 못하다면 노예이거나 기계 부속품일 뿐입니다. 4347.8.20.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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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백의 소리 1
라가와 마리모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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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 즐겨읽기 361



새하얀 소리는 해맑은 삶노래

― 순백의 소리 1

 라가와 마리모 글·그림

 이상은 옮김

 학산문화사 펴냄, 2012.12.25.



  비가 오는 날에는 빗소리가 흐릅니다. 눈이 오는 날에는 눈소리가 흩날립니다. 흔히들 빗소리는 들어도 눈소리는 못 듣는다고 하지만, 눈이 오는 날에도 소리가 흐릅니다. 갑자기 고요한 기운이 돌면서 소복소복 톡톡 하는 소리가 납니다. 자동차가 끊임없이 드나들고 온갖 기계가 끝없이 움직이는 도시에서는 눈소리를 듣기 어려울 수 있어요. 그러나 눈이 펑펑 내려 자동차를 멈추게 하고 기계도 멈춘다면, 바야흐로 눈소리가 어떠한가를 알 수 있습니다. 겨울에 눈이랑 즐겁게 노는 아이들은 아직 눈이 쌓이지 않았을 적에도 눈소리를 듣고는 눈을 번쩍 뜨면서 창밖을 내다봅니다.



- ‘조금만 더 버티면 봄이었는데.’ (5쪽)

- “지금, 내 안은 텅 비었거든. 그래서 뭔가를 얻을라고 찾아 헤매는 듯한 느낌이데이.” (23쪽)

- “츠가루. 츠가루샤미센.” “아아, 요시다 형제나 아가츠마 같은? 하긴, 요즘 유행이니까.” “유행? 정식으로 하는 사람은 유행 같은 거 상관 안 한데이/” (33쪽)




  모기가 날며 애앵애앵 날갯소리를 냅니다. 파리가 날 적에도 날갯소리를 냅니다. 벌도 날갯소리를 내요. 그러면, 나비는 어떠할까요. 나비가 날면서 내는 소리를 알아차릴 수 있겠어요? 잠자리나 개똥벌레는 어떠할까요. 이들 날벌레가 하늘을 가르는 소리를 헤아릴 수 있겠어요?


  요즈음에는 전문직업으로 노래를 하는 사람이 무척 많습니다. 어떤 이는 ‘절대음감’이라고도 합니다. 평론을 하든 심사를 하든, ‘가수가 되고 싶은’ 사람이 부르는 노래를 놓고 이러쿵저러쿵 따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아주 자그마한 소리까지도 알아채거나 살피는 듯합니다.


  그러면, 이들 평론가나 심사자는 ‘가수가 되고 싶은 사람이 내지르는 소리’라든지 ‘가수인 사람이 내지르는 소리’뿐 아니라, 바람이 풀잎과 나뭇잎을 간질이는 소리라든지, 풀벌레가 풀잎에 내려앉는 소리라든지, 애벌레가 잎을 갉아먹는 소리라든지, 매미가 허물을 벗는 소리라든지, 나비가 꿀과 꽃가루를 빨아먹는 소리를 얼마나 알아차리거나 헤아릴 수 있을까요.



- “때리는 것도 모자라서, 악기까지 상하게 할 셈이야?” (16쪽)

- “유나 씨가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되나? 존재만으로도 위로가 되는데.” (44쪽)

- “타케토. 너는 정말 밴댕이 소갈딱지구나? 너는 음악을 할 자격이 없어! 좋고 싫고의 문제가 아니야! 그 사진은 뭐냐? 어떻게 악기를 다루는 팔을 짓밟을 수 있어?” (82∼83쪽)





  시골에서 할매나 할배는 ‘호미질 하는 소리’나 ‘낫질 하는 소리’만 듣고도, 호미나 낫을 쥔 사람이 어떤 마음이요 몸인가를 느낍니다. 지겨워 하는 빛인지 즐거워 하는 빛인지 곧바로 알아채거나 느낍니다. 공책에 연필로 글을 쓰는 사각사각 소리를 들으면서, 지겨운 숙제를 하는지 즐겁게 글빛을 가꾸는지, 이런 소리로 마음빛을 헤아릴 수 있는 어른이나 어버이가 있습니다.


  설거지를 하며 내는 소리를 듣고는 어떤 삶빛이 흐르는가를 읽을 수 있어요. 처마를 따라 똑똑 또는 줄줄 흐르는 물방울 소리를 들으면서 날씨가 어떠한가를 읽을 수 있어요. 하늘 따라 흐르는 구름이 어떤 소리를 내는지 귀여겨듣는다면 하루 날씨뿐 아니라 며칠 동안 어떤 날씨가 될는지 읽을 수 있어요.


  동이 트면서 해가 저 멧등성이 너머로 올라올 적에도 소리를 듣습니다. 빛과 볕만 느끼지 않아요. 소리가 함께 있습니다. 바닷물이나 냇물이 찰랑거릴 때 물결소리만 있지 않아요. 물내음과 물빛이 함께 있습니다.



- ‘내는 말이제, 봄이 좋다. 하지만도, 겨울이 싫은 건 아니데이. 츠가루의 겨울은 얼어붙을 만큼 춥지만, 해님이 나와서 조금씩 눈을 녹이면, 소리가 변하제. 여름도 가을도 똑같은 기라. 계절마다 소리가 변하니까네. 그 소리를 언제든지 낼 수 있으면 행복한 기라.’ (88∼90쪽)

- “내는 내가 좋아서 켜는 것 외에는 관심 없다!” (149쪽)





  라가와 마리모 님 만화책 《순백의 소리》(학산문화사,2012) 첫째 권을 읽으면서 눈과 귀와 살갗이 모두 즐겁습니다. ‘새하얀 소리’란 무엇일는지 가만히 헤아리면서 즐겁습니다. ‘해맑은 소리’란 무엇일까 하고 곰곰이 짚으면서 즐겁습니다.


  오래된 악기 하나를 켤 줄 알기에 남다른 소리가 흐르지는 않습니다. 서양 악기를 켜든 한국 악기를 켜든 그리 대수롭지 않습니다. 마음을 담아 켜는 악기일 때에 비로소 대수롭고 아름다우면서 즐겁습니다.



-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을 돌아보게 만드는 기다. ‘소리’를 줄이면 안 된데이.” (160쪽)

- “연주의 우열은 뭘로 정해지노? 아무리 곡에 감정을 실어도, 서투른 건 서투른 기다.” ‘‘할배’의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할배’의 소리가 없어졌다는 건, 길러 준 부모와 스승을 동시에 잃었다는 뜻이다. 우리 형제는 똑같이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180∼181쪽)





  악기를 타면서 ‘소리를 줄일’ 까닭이 없습니다. 밥을 지으면서 ‘밥맛을 줄일’ 까닭이 없습니다. 어버이가 아이를 사랑하면서 ‘사랑을 줄일’ 까닭이 없습니다. 삶은 늘 그대로 나아갑니다. 스스로 아름다운 빛이 되어 누리는 삶이기에 나 스스로 아름다우면서 즐겁고, 내 둘레 이웃과 동무한테도 아름다우면서 즐거운 노래를 들려줍니다.


  가수가 되어야 노래를 하지 않아요. 요리사가 되어야 밥을 짓지 않아요. 재단사가 되어야 옷을 짓지 않아요. 작가가 되어야 글을 쓰지 않아요. 사진가가 되어야 사진을 찍지 않아요. 언제나 스스로 삶으로 짓고 가꾸는 노래입니다.



- “연주의 우열 말이다. 내는 기준 같은 거 모르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수많은 샤미센이 울려도 형의 소리를 알 수 있데이.” (184쪽)



  한국에서 꼭 가야금을 타거나 거문고를 뜯는 이야기를 다루는 만화책이 나와야 하지는 않습니다. 대금이나 소금이나 풀피리를 부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만화책이 꼭 한국에서 나와야 하지 않습니다. 다만, 빛을 노래하고 들으면서 삶을 가꾸는 따사롭고 착한 사람들이 어떻게 서로 사랑하는가 하는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 만화를 그리는 사람이 태어날 수 있기를 빕니다. 만화책 《순백의 소리》는 아주 아리땁습니다. 4347.8.15.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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