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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일이 4 - 노동자의 길
최호철 그림, 박태옥 글, 고래가그랬어 편집부 / 돌베개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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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 즐겨읽기 401



톱니바퀴, 빨갱이, 노동자, 그러나

― 태일이 4

 박태옥 글

 최호철 그림

 돌베개 펴냄, 2009.2.23.



  박태옥 님이 글을 쓰고 최호철 님이 그림을 그린 《태일이》(돌베개,2009) 넷째 권을 읽습니다. 모두 다섯 권으로 된 《태일이》 가운데 넷째 권은 전태일 님이 서울 청계천에서 재단사로 일하는 동안 겪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좁다란 공장에서 톱니바퀴가 되어 굴러가는 이녁을 되새기고, 좁다란 공장에서 쥐꼬리보다 작은 일삯을 벌려고 몸과 마음이 모두 다치는 어린 동생을 바라보며, 고단한 삶을 이기지 못하고 숨을 거둔 아버지를 지켜봅니다. 시키는 대로 굴러가는 쳇바퀴가 아니라, 스스로 모임을 열고 동무를 사귀면서 ‘우리가 할 말을 하자’는 아주 조그마한 이야기조차 꽉 막히고 마는 어둡고 까마득한 곳에서 힘들면서 슬픈 나날을 잇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1960년대 남녘에서 ‘노동자’는 어떤 사람이어야 했을까요. 일제강점기도 아닌데, 왜 노동자는 제 목소리를 내면 안 되었을까요. 식민지 노예도 아닌데 왜 노동자는 아주 낮은 일삯을 받으면서 온갖 거친 말을 들어야 했을까요. 군대를 앞세워 정치권력을 거머쥔 이들은 왜 총칼을 휘두르며 윽박질렀을까요.



- “재단사, 나 좀 봐요. 월급이 이게 뭐야, 너무 적잖아! 이번에 일이 많기도 했지만 모양이 어려웠던 것도 재단사가 잘 알잖아. 원래 재단사가 한 벌당 얼마씩 받아야 한다고 사장님한테 얘기해야 하잖아. 그런데 왜 일한 만큼 돈이 안 나오는 거야? 열심히 일한 시다나 보조들한테 할 말이 있어야지.” “저, 누나. 이번만.” “그리고 먼저 재단사가 일을 망쳐서 본 손해를 왜 우리가 져야 하냐고? 그건 사장님이 책임져야지. 우린 죽어라 고생하고 사장님은 하나도 손해 안 보는 게 말이 돼? 그리고 그때 재단사는 엉망으로 일했어도 우리가 열심히 해서 물량 맞춰 준 걸로 아는데 무슨 손해가 났다는 거야? 혹시 재단사만 따로 더 받은 거 아냐?” (32∼33쪽)





  서른 해 즈음 앞서, 어머니는 우산 꿰매는 일을 하셨습니다. 일을 맡기는 집에 가서 일감을 받아 집에서 바느질로 한 땀 두 땀 꿰매는데, 나는 옆에서 우산살 꼭대기에 동글천을 끼운 다음, 우산 겉천을 꼬챙이 쪽에 끼우고는, 꼭지 마개를 살짝 조여서 어머니한테 건넵니다. 그러면 어머니는 잰 손놀림으로 살과 천을 꿰맵니다. 이에 앞서 살과 천을 잇는 작은 꼭지마개도 하나하나 꿰매요.


  어머니가 꿰맴질을 마치면, 나는 우산을 차곡차곡 예쁘게 접습니다. 어느 한 군데 눌리거나 어긋나면 다시 접어야 합니다. 반듯하게 펴서 ‘새 것’이 되도록 접습니다. 아무렴, 새 우산으로 팔 물건이니 ‘새 것’이 되도록 곱게 접어야지요. 주름 하나 없이 깔끔하게 접은 뒤 우산꾸러미를 가슴에 안고, ‘일을 맡기는 집’에 가져갑니다. 우산 하나는 무겁지 않지만, 열이나 스물이 되면 제법 묵직합니다. 공장에서 갓 나온 비닐천은 석유 냄새가 물큰합니다. 우산을 꿰매고 접는 동안 손과 몸에 석유 냄새가 배고, 접기까지 마친 우산을 들고 나르면 옷에도 석유 냄새가 뱁니다.


  이 일을 하신 어머니가 얼마나 받았는지 모르지만 아주 적은 돈인 줄 압니다. 그래도 이 일거리를 아쉬워 했고, 이 일거리는 아버지가 모르게 했습니다. 이무렵 아버지는 학교에서 교사로 일했는데, 오늘날 아닌 예전에는 교사 한 달 일삯이 무척 적었어요.



- ‘내가 하는 일 외에는 무아지경. 내가 없다. 일의 순서대로 순간마다 해야 할 행동만이 질서정연하게 자동으로 이루어진다. 실제 나는 내 일의 방관자, 내 육신은 일을 하지만 누가 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 공장의 소란스러운 분위기가 나를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몇 인치, 몇 푼을 가리키면 긋고 펴고, 또 재단 기계를 잡고 그은 금대로 자르는 것이다. 누가 잘랐을까 이렇게 생각할 땐 역시 내가 잘랐다는 걸 새삼 알게 된다. 왜 이렇게 의욕 없는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어렴풋이 생각히 확실해질 때는 퇴근시간이 다 된 10시 무렵이다.’ (60∼61쪽)





  만화책 《태일이》는 아주 작은 이야기를 보여줍니다. 새벽부터 밤까지 죽어라 일을 하지만 일을 한 대가를 거의 제대로 받은 적이 없는 작은 사람들 이야기를 보여줍니다. 틀림없이 누군가는 돈을 벌 텐데 누가 돈을 버는지 알 길이 없는 이야기를 넌지시 들려줍니다. 고작 스무 살도 안 된 아이들이 공장에서 시달리거나 들볶이는 이야기를 조용히 들려줍니다.


  2000년대로 접어든 남녘에서 《태일이》에 나오는 이야기는 찾아보기 어렵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남녘에서 사라진 비좁고 캄캄한 공장은 다른 나라로 옮겼습니다. 다른 나라에서 《태일이》와 똑같은 이야기가 흐릅니다. 중국에서 베트남에서 인도에서 이 같은 이야기는 똑같이 불거집니다.


  중국에도 전태일 같은 사람이 있을까요. 있다면, 그이는 어떻게 하루하루 살아갈까요. 베트남에도 전태일 같은 사람이 있겠지요. 있다면, 그이는 어떻게 꿈을 키우면서 힘을 낼까요. 인도에도 전태일 같은 사람이 있으려나요. 있다면, 그이는 씩씩하게 목소리를 내면서 제 삶과 이웃 삶을 지키는 길을 걸을 수 있을까요.



- “특히 태일 씨는 할 얘기가 많은가 봐요.” “그런데 어쩌죠? 벌써 들어가 봐야 할 시간이네. 뭐 점심시간이 워낙 짧으니.” “같이 가요. 저 태일 씨 공장 있는 같은 층에서 일하는 거 모르셨죠?” “그래요? 잘됐네요. 자주 볼 수 있겠네요. 어쩐지 낯이 익더라니.” (85쪽)





  스무 해쯤 앞서, 나는 신문배달을 하며 먹고살았습니다. 새벽 두 시부터 일을 하는데, 가끔 ‘신문 한 부 사겠다’면서, 신문배달 자전거를 부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들은 거의 다 ‘신문값을 100원이든 200원이든 더 에누리를 해서 사려는 마음’입니다. 참말 신문 한 부 바라서 부르는 이가 더러 있습니다만. 왜 사람들이 신문배달부를 부르는가 하면, 신문배달부는 신문을 집집마다 돌리러 다니지, 주머니에 잔돈을 챙겨서 다니지 않습니다. 두 다리로 신문을 돌리든, 자전거를 몰아 신문을 돌리든, 쇠돈 몇 푼이건 지갑이건 주머니에 넣지 않아요. 신문을 돌린 적 있는 사람은 알 테지만, 쇠돈 몇 개조차 무겁습니다. 처음에는 그러려니 하지만, 50부를 돌리고 100부를 돌릴 무렵이면 온몸이 땀으로 흥건해요. 200부쯤 돌릴 무렵에는 입에서 말이 잘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니, 새벽에 신문을 돌리는 일꾼더러 ‘신문 한 부 사겠다’고 하면서 만 원짜리나 천 원짜리 종이돈을 깊은 새벽나절에 내미는 사람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신문값이 잔돈으로 내밀면서 사려고 하던 사람을 거의 못 보았습니다. 어떤 이는 신문을 몰래 훔칩니다. 자전거를 세우고 연립주택에 넣으려고 들어가면 슬그머니 자전거 바구니에서 한 부 빼냅니다. 새벽운동을 한다면서 신문을 훔치는 이가 있고, 동네를 순찰한다면서 신문을 훔치는 경찰이 있습니다. 한 부라도 사라지면 신문을 돌리다가 애먹기 때문에, 훔친 이를 보면 끝까지 쫓아가서 도로 찾아야 합니다.



- “걱정 마세요. 전 빨갱이도 아니고 빨갱이가 뭔지도 모르니까요. 전 그저 우리가 좀더 잘 사는 길을 찾으려고 하는 것뿐입니다.” “전 태일 씨를 믿어요. 빨갱이라니요” “그래, 우린 빨갱이가 아냐. 빨갱이가 무서워 우리가 하고 싶은 얘기도 못 하면 안 되잖아. 평화시장을 움직이는 재단사일 뿐이야.” “우리끼리 이렇게 친하게 지내자는데 누가 뭐라겠어?” (119쪽)




  사회를 억누르고 정치를 짓밟으며 문화를 옥죄는 이들은 으레 ‘빨갱이’라는 한 마디를 툭 던집니다. 민주와 평화와 평등이 없는 나라이기에, ‘빨갱이’라는 한 마디는 꽤 오랫동안 힘을 내며 목을 조입니다.


  어느새 ‘이웃’이라는 이름은 사라집니다. ‘빨갱이’라는 이름이 떠돕니다. 어느새 ‘동무’라는 이름은 스러집니다. ‘적’이나 ‘경쟁자’라는 이름이 흐릅니다.


  우리가 서로 이웃이라면 정치권력자가 생길 일이 없습니다. 우리가 서로 동무라면 돈 때문에 악다구니를 벌여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우리가 서로 이웃으로 지낸다면 도시를 자꾸 키울 일이 없습니다. 우리가 서로 어깨동무를 한다면 언제나 즐겁게 삶을 지으면서 두레를 합니다.


  저 사람은 노동자나 사장이 아닙니다. 내 이웃입니다. 저 사람은 빨갱이나 대통령이 아닙니다. 내 동무입니다. 함께 먹고 함께 살며 함께 웃는 사람입니다.


  나라를 다스린다는 벼슬아치는 ‘법’을 만들었으나 법을 살피지도 않고 법을 지키지도 않습니다. 나라를 이룬 사람들은 ‘법’을 모르면서도 아름답고 사랑스레 살았으나, 바로 이 ‘법’ 때문에 등허리가 휘면서 고단한 나날을 보내야 합니다. 근로기준법이든 노동법이든, 법이 있으면서 왜 법을 따지지 않고 지키지 않으며 살피지 않을까요. 노동3권이 있다지만, 노동3권을 짓밟거나 흔드는 일은 왜 예나 이제나 똑같이 일어날까요.


  전태일기념관이 서고, ‘전태일 동상’과 ‘전태일 다리’가 서울 청계천에 생깁니다. 그러나 이 나라에는 아직 노동자도 여느 사람들도 그예 짓밟히는 일이 똑같이 생깁니다. 아버지에 이어 대통령이 된 분은 전태일 동상에 꽃을 바치기도 했다지만, 꽃을 바치기는 하더라도 법을 지키는 일은 없구나 싶습니다. 4347.10.22.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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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나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1
나치 미사코 지음, 이기선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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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 즐겨읽기 401



우리가 서로 나누는 이야기

― 네가 나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1

 나치 미사코 글·그림

 이기선 옮김

 AK커뮤니케이션즈 펴냄, 2014.10.25.



  나치 미사코 님이 빚은 만화책 《네가 나에게 들려주는 이야기》(AK커뮤니케이션즈,2014) 첫째 권을 읽다가 빙그레 웃습니다. 아주 마땅하면서 마땅하디마땅한 이야기가 흐르기 때문입니다. 이 만화책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고양이와 이야기를 나눌 줄 아는 사람’이 펼칩니다. 언제 어디에서라도 마음을 살며시 열면 고양이한테 말을 걸 수 있을 뿐 아니라, 고양이가 들려주는 말을 들을 수 있습니다.



- “아지, 들리니? 이 세상엔 나쁜 사람만 있는 게 아냐. 다정한 사람들이 훨씬 더 많단다.” (14쪽)

- ‘어느 날 집 담장에 처음 보는 고양이가 있었다. 그리고 그 고양이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마음속으로 들려오는 건, 확실치 않은 멜로디와 특별한 의미는 없는 라의 연속.’ (24쪽)



  만화책 《네가 나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를 읽으며 다시금 웃습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고양이와 사람이 서로 아끼고 사랑하면서 이야기를 주고받기도 하는 우리 삶인 한편,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제대로 생각을 주고받지 못하는 일도 아주 잦기 때문입니다.


  서로 해코지를 하는 사람이 꽤 많습니다. 서로 딴죽을 걸거나 괴롭히거나 따돌리는 사람이 퍽 많습니다. 서로 푸대접을 하기도 하고, 서로 못 본 척을 하기도 하며, 서로 밟고 올라서려 하기까지 합니다.


  우리는 왜 그러할까요? 우리는 ‘같은 사람’끼리 왜 서로를 아끼거나 사랑하는 마음을 안 키울까요? 우리는 왜 ‘같은 사람’ 사이에서 아름다운 이야기를 길어올리려고는 안 할까요?



- “이치고. 여기 매일 오는 건 유키에를 만나기 위해서니?” “아니. 여기 있는 애들을 만나기 위해서야. 겁내는 아이한테도 얘기해. 괜찮아. 아무것도 안 무서워.” (51쪽)

- ‘마이코는 응원하고 있다. 마이코는 항상 응원한다. 언덕을 올라가는 노인을. 아이들을. 마이코의 마음은 자유로워서, 밖으로 쫓겨난 것도 전혀 신경 안 쓴다.’ (64∼65쪽)



  읍내마실을 나갈 적에 만나는 다른 마을 할매와 할배는 늘 이웃입니다. 읍내 저잣거리에서 스치는 모든 사람은 이웃입니다. 시골에서 벗어나 도시로 갈 적에 이 시외버스를 모는 일꾼도 이웃이고, 옆자리에 앉은 낯선 사람도 이웃입니다. 도시에 가득가득 넘치는 엄청나게 많은 사람도 이웃이에요. 이웃이 아닌 사람이 없습니다. 이 지구별에 있는 사람은 누구나 서로 이웃입니다.


  서로 이웃이기에 돕습니다. 돈이나 밥을 안 바라면서 그저 즐겁게 돕습니다. 서로 동무이기에 어깨를 겯습니다. 어깨동무를 해요. 아무것도 안 바라면서 어깨동무를 하지요. 왜냐하면, 서로 아끼고 좋아하면서 사랑하거든요.



- ‘사람과 함께 지내는 동물은 사람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애정이 깊다.’ (103쪽)

- “뮤우는 이 가족을 잃고 싶지 않은 거예요.” “뮤우는 바보구나. 버릴 리가 없잔아. 뮤우 어서 자라렴. 많이 먹고 쑥쑥 자라렴. 정말 좋아해.” (133쪽)



  만화책에 나오는 아가씨는 어떻게 ‘고양이 목소리’를 알아들을까요? 아주 쉽습니다. 마음을 열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열면, 고양이 목소리뿐 아니라 참새와 까치 목소리도 듣습니다. 풀꽃과 들꽃 목소리도 들을 수 있어요. 잘리거나 꺾인 나뭇가지 목소리도 들을 수 있습니다. 짓밟힌 가랑잎 목소리도 들을 수 있고, 애꿎게 죽은 날벌레와 풀벌레 목소리도 들을 수 있습니다.


  지난날 천성산에서 도룡뇽을 지키려던 지율 스님 같은 분은 천성산이 외치는 소리를 들었고, 도룡뇽이 슬피 우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지율 스님은 여러 해 앞서부터 낙동강과 내성천이 들려주는 소리를 들었어요. ㅈㅈㄷ신문을 비롯해서 다른 진보신문조차도 지율 스님 이야기를 곧이듣지 않았는데, ㅇㅁㅂ이라는 분이 대통령에서 내려서기 무섭게 모두들 한목소리로 4대강사업을 나무랍니다. ㅈㅈㄷ신문을 비롯한 수많은 지식인과 여느 사람들은 ‘목소리를 듣고’ 누군가를 나무라지 않아요. 그저 떠도는 소문과 유행처럼 나무랄 뿐입니다.


  마음을 열 때에 사랑을 할 텐데, 마음을 열지 않은 채 지식과 정보를 소문과 유행처럼 받아들인다면, 아무것도 바꾸지 않습니다. 마음을 열 때에 사랑이라는 씨앗을 스스로 심고 뿌리고 가꾸고 돌보기에, 무엇이든 바꿉니다. 마음을 열지 않는다면 씨앗을 심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 삶을 북돋우지 못하지만, 마음을 열면 언제나 씨앗을 심고 돌보는 따사로운 손길이기에 언제 어디에서나 스스로 삶을 일으킵니다.



- “마린은 지지 않아. 병원도 약도 아무렇지 않아. 정말 정말 좋아하는 가족이 있으니까.” (167∼168쪽)

- ‘죽은 애완동물들은 아무 데도 가지 않아요. 당신의 웃는 얼굴이나 눈물에 살며시 다가옵니다. 계속 계속 언제가지나.’ (188쪽)



  우리는 모두 ‘같은 사람’입니다. 지구별에서 우리는 서로서로 이웃입니다. 이웃이 들려주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요. 내가 들려주는 목소리를 함께 들어요. 네가 들려주는 목소리는 늘 노래이니, 즐겁게 들을게요.


  서로 손을 맞잡고 씨앗을 한 톨씩 심어요. 메마른 땅에 심고, 쪼개진 시멘트 틈에 심어요. 도시에도 나무를 심고, 시골에도 나무를 심어요. 나무 때문에 그늘이 져서 곡식이 덜 여물까요? 그럴 일은 없습니다. 곡식도 때로는 그늘을 바라요. 곡식은 나무그늘 때문에 괴로운 일이 없어요. 곡식이나 열매는 나무그늘이 아닌 ‘시골에서도 밤새 켜는 등불’ 때문에 괴롭습니다. 4347.10.20.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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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리빵 1
토리노 난코 지음, 이혁진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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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 즐겨읽기 400



나무 한 그루와 새

― 토리빵 1

 토리노 난코 글·그림

 이혁진 옮김

 AK커뮤니케이션즈 펴냄, 2011.2.10.



  아침에 일어나서 뒤꼍 감나무를 살핍니다. 박새 한 마리 살포시 내려앉아서 이리저리 가지를 건너뜁니다. 작은 박새는 이쪽저쪽으로 날렵하게 옮겨 앉습니다. 감을 쪼아먹으려나, 애벌레를 찾으려나. 새빨갛게 익은 우리 집 감알은 건드리지 않고, 이리저리 건너다니며 놀다가 뽀로롱 다른 곳으로 날아갑니다.


  한참 박새를 올려다보다가 집으로 돌아갑니다. 감알을 하나 딸까 하다가 어제 딴 감알이 남았다고 떠오릅니다. 아이들도 곁님도 우리 집에서 딴 감알을 그 어느 감알보다 맛나게 먹습니다. 오늘은 어제 딴 감알을 먹고, 이튿날 새 감알을 따서 먹자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감알은 내가 손수 딸 수 있지만, 감에서 톡 떨어지기도 합니다. 우리 집에서 자라는 나무는 나뭇줄기 둘레로 풀밭이면서 가랑잎밭입니다. 풀을 따로 베거나 뽑지 않아서 땅바닥이 폭신합니다. 그래서 감나무에서 감알이 툭툭 떨어져도 풀바닥에서 감알이 터지지 않아요. 새빨갛게 잘 익은 감도 모양이 반듯합니다.


  아침저녁으로 감나무 둘레를 살피면서 그새 떨어진 감알이 있는가 살핍니다. 모과나무 둘레에서도 모과알이 떨어졌는지 살핍니다. 사다리나 장대를 쓸까 싶다가 그만두었는데, 감알은 스스로 익어서 알맞게 떨어집니다. 때때로 바람이 불어 고맙게 손길을 덥니다.





- ‘여름에는 정원석의 작은 홈에 언제나 물을 채워 둔다. 참새들의 물놀이터가 되기 때문이다. 더 큰 접시에 물을 채워 놓아도 사용하지 않는다. 저 정도가 참새에겐 딱 맞는 크기인 것 같다.’ (8쪽)

- ‘우리 동네 주택가 뒤편에는 반짝이는 은색 잎이 나고 빨간 열매가 맺히는 멋진 덤불이 있다. 이곳은 작은 새들의 주택가가 됐다.’ (10쪽)



  낮에 마당에서 이불과 깔개를 텁니다. 대문 위로 드리운 전깃줄에 통통한 새가 앉습니다. 까치도 까마귀도 아닌 저 새는 어떤 새일까 헤아려 봅니다. 직박구리일까, 뻐꾸기일까 갸웃갸웃하지만 잘 모르겠습니다. 통통한 배만 아래에서 올려다보니 좀처럼 모르겠습니다.


  볕이 좋은 날 이불을 말리거나 털면, 이런 새 저런 새가 전깃줄에 앉아서 우리 집을 들여다보곤 합니다. 새한테는 이불이 없을 테니 재미난 구경거리일 수 있습니다. 이불 터는 사람이 전깃줄에 앉은 새를 해코지할 일도 없을 테니 서로 모여 앉아 재재거리며 구경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나는 이불을 털면서 새를 올려다봅니다. 저 새들은 어떤 몸짓으로 춤을 추면서 노래를 하는가 하고 살펴봅니다. 새는 그저 저희끼리 이야기를 나눌는지 모르는데, 나는 새들이 우리 집 둘레에서 노래를 베푼다고 여깁니다.




- ‘햄 3장으로 살아났으니 이름은 햄코. 햄코는 추위로 약해져 있는 것 같았다. 따뜻해지니까 조는 모습은 사람이나 새나 비슷하구나.’ (25쪽)

- ‘따뜻해질수록 입맛이 까다로워지는 새들이지만, 겨울에는 말 그대로 필사적으로 먹는다. 그 작은 몸의 얼마 안 되는 털로 영하의 기온을 버텼다고 생각하면.’ (29쪽)



  아이들과 대나무밭에서 대나무를 베는데, 큰아이가 깃털을 하나 줍더니 보여줍니다. 어느 새 깃털이었을까요. 깃털 크기로 보건대 아주 작은 새 깃털 같았어요. 아마 대나무밭 사이사이 난 찔레알을 먹으려고 찾아왔을 수 있어요.


  지지난해에는 제비 깃털을 몇 얻었어요. 제비를 잡아서 뽑는다든지, 제비집에서 줍지는 않았습니다. 자동차에 치여 죽은 제비를 풀밭으로 옮기면서 깃털이 셋 빠져서, 이 깃털을 건사했어요.


  지지난해에는 제비를 처음으로 손에 안기도 했습니다. 사람 손을 섣불리 타면 안 되는 줄 알지만, 막 날갯짓을 익히려던 어린 제비가 그만 구석진 데에 빠져서 헤어나지 못하기에 살살 달래서 손으로 안아서 올려 주었습니다.


  처마 밑에서 바라볼 적에도 어미이든 새끼이든 참으로 작은 줄 알기는 했지만, 손으로 안으니 그야말로 작아요. 어미 제비가 낳은 알이 한 번 깨진 적 있어서 제비알을 본 적도 있는데, 제비알은 메추리알과 대면 반토막보다 훨씬 작아요. 아이들 새끼손톱만 한 크기인 제비알이에요.





- ‘늦봄에서 여름이 끝날 때까지 창문을 열고 밤공기를 맞으며 자는 것을 좋아한다. 한밤중 두견새와 물총새의 울음소리를 듣고 새벽녘 산비둘기와 뻐꾸기 울음소리를 듣는데, 차가운 풀냄새가 들어올 때쯤, 나는 이런 꿈을 꾸고 있다.’ (54쪽)

- ‘아침부터 함석지붕 위를 초등학생들이 뛰어다니고 있는 것 같은 이 소리는 까마귀의 짓이다. 작게 두드리는 소리는 참새. 종종걸음으로 뛰어다니는 녀석, 누군지 확실치 않음.’ (67쪽)



  토리노 난코 님이 빚은 만화책 《토리빵》(AK커뮤니케이션즈,2011) 첫째 권을 한참 읽었습니다. 우리 집 일곱 살 큰아이도 함께 읽습니다. 시골마을 조그마한 집에서 늘 만나는 여러 새를 떠올리면서 읽습니다. 우리 집은 굳이 새한테 먹이를 주지 않습니다만, 새한테 먹이를 챙기려는 마음을 알 만합니다. 얼마나 사랑스러운데요. 얼마나 즐겁고 환한데요.




- ‘어느새 벌레 울음소리가 이렇게 많아졌다. 밤의 그림자는 희미하고 길다.’ (94쪽)

- ‘별의 반짝임을 보는 건, 지구를 둘러싼 바람을 보는 것이기도 하구나.’ (98쪽)

- ‘재작년에 이 근처에서 가장 큰 나무를 베어냈다. 오래된 나무라 위험하기 때문이라는 것 같다. 나무가 사라진 하늘은 왠지 처량해 보였다. 그해 겨울에는 폰짱도 쇠딱따구리도 오지 않았다. 참새조차 여기까지 한 번에 날아오는 게 아니라, 여기저기 중계점을 거쳐서 온다.’ (125쪽)



  우리 집에 풀밭을 이루어 풀벌레와 애벌레를 키우는 일도 어느 모로 본다면 새를 부르는 일입니다. 우리 집 나무 열매를 많이 남기는 일도 어느 모로 살피면 새를 맞이하려는 일입니다.


  나무 한 그루가 있어 새가 깃듭니다. 새는 아주 조금만 먹어도 배가 찹니다. 새는 나무에 둥지를 틀거나 이냥저냥 풀숲에 살며시 내려앉아 새근새근 잡니다. 때로는 나뭇가지를 단단히 붙잡고 잠들어요.


  사람과 새는 오랜 나날 가까운 벗으로 지냈습니다. 새와 사람은 오래도록 살가운 이웃으로 살았습니다. 이러다가 고작 쉰 해도 안 된 요즈막에 사람들 스스로 새를 그악스럽게 괴롭힙니다. 새가 살 만한 오래된 나무를 뭉텅뭉텅 베지요. 도시에서는 나무가 좀 자랐다 싶을 무렵 동네 재개발을 한다면서 와장창 무너뜨리지요.


  도시에서는 사람들이 고향이 없다고 할 텐데, 도시에서는 새 또한 고향이 없다고 할 터입니다. 새가 깃들 만한 데가 없으니까요.


  고향을 잊거나 잃은 사람은 즐거움이나 사랑과 차츰 멀어지고, 즐거움이나 사랑과 차츰 멀어지는 사람은 이웃을 아끼는 마음이 천천히 옅어집니다. 나무 한 그루가 사라질 때마다 사람들은 메마르면서 쓸쓸한 마음으로 나아갑니다. 4347.10.18.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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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유교수의 생활 34
야마시타 카즈미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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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 즐겨읽기 394



삶을 배우는 길

― 천재 유교수의 생활 34

 야마시타 카즈미 글·그림

 학산문화사 펴냄, 2013.11.25.



  밥을 차릴 수 있는 사람은 무척 즐겁습니다. 밥 한 그릇을 베풀 수 있으니까요. 배고픈 아이들한테 밥을 차려서 함께 먹고, 배고픈 이웃이 있으면 밥 한 그릇 덜어서 함께 나눕니다. 가만히 앉아서 밥상을 받을 수 있는 사람도 매우 즐겁습니다. 살붙이나 이웃이 지은 사랑을 고맙게 받을 수 있어 즐겁습니다. 내 살붙이나 이웃은 사랑을 베풀 사람이 있어 즐겁고, 나는 내 살붙이나 이웃한테서 사랑을 받을 수 있어 즐겁습니다.


  새벽에 일어나서 쌀을 씻어 불립니다. 아이들은 아침 일찍 일어나서 놀고, 도란도란 오순도순 온갖 놀이를 아침부터 누리고 싶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노는 아이들은 곧 배가 고플 테며, 아이들이 배고프다는 소리가 나올 즈음 천천히 밥을 지으면, 아이들은 밥 익는 냄새를 맡고는 더 신나게 놉니다.


  밥은 입으로 먹어도 배가 부르지만, 밥내음을 코로 맡아도 즐겁습니다. 우리는 입으로 밥을 씹어서 먹는 한편, 코와 살갗으로 밥기운을 맞아들이면서 새롭게 기운을 내는구나 싶어요. 그러니, 햇볕을 쬐면서 뿌듯하고 즐겁습니다. 바람을 마시면서 개운하며 기쁩니다.





- ‘나는 지금, 무척 동요하고 있다. 중증이 아니라는 설명을 그토록 듣고 왔는데도, 나는 어쩌면, 자신의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게 아닐까? 내 연구에 언젠가 끝이 온다는 것을, 나는 몰랐던 게 아닐까?’ (13쪽)

- ‘그렇다. 수많은 인생계획을 생각했지만, 우선순위는 뻔하지 않은가. 처음에 떠올린 것은 아내의 얼굴이 아니었나. 오늘 이날도 마치 그날처럼.ㅣ 나는 앞으로도 변함없는 하루하루를 살 것이다.’ (25쪽)



  아직 내 몸에 힘이 크게 솟지 않으면 힘을 많이 써야 하는 일을 하지 못합니다. 이를테면, 너덧 살 아이가 제 신을 스스로 복복 비벼서 빨기란 수월하지 않습니다. 대여섯 살 아이가 제 옷가지를 스스로 복복 비벼서 빨기란 만만하지 않습니다. 이무렵에는 어른이 거의 모든 일을 도맡아서 합니다.


  아이들이 차츰차츰 자라면서 몸과 손에 힘이 붙으면, 이제 스스로 신을 빨고 옷가지를 복복 비빌 수 있습니다. 스스로 이를 닦고, 스스로 손발을 씻습니다. 스스로 걸레를 빨아서, 스스로 방바닥을 훔칩니다.


  어른이 스스로 즐겁게 방바닥을 훔치면, 아이들은 이 모습을 가만히 지켜봅니다. 이러다가 어느 날 스스로 걸레를 빨아 보고, 물을 짜 보며, ‘아이인 탓에 물을 덜 짠 물걸레’로 방바닥을 물바다로 만듭니다.


  내 어릴 적을 가만히 돌아봅니다. 내가 방바닥이나 마룻바닥을 물바다로 만들었을 적에, 어머니는 “이리 줘 봐.” 하면서 걸레를 비틀어 물을 죽죽 짰습니다. 물기를 쪽쪽 빼낸 걸레를 건네셨어요. ‘아하 그렇구나’ 하면서 다음에는 물기를 짜려고 악착같이 용을 씁니다. 어려서 물기짜기가 도무지 안 되겠다 싶으면, 젖은걸레로 한 차례 닦은 뒤 마른걸레로 다시 닦습니다.





- ‘그도 나쁜 뜻은 없었을 테고, 그의 개성으로서 존중할 필요는 있지만, 경영자로서는 다소 문제가 있다. 그는, 실패할 만했기에 실패한 것이 아닐까? 나는 쿠루스 군의 실패를, 음미하고 있나?’ (52쪽)

- “아무리 우여도 아빠는 몰라. 그러니까 언니야가 엄마 해 주께. 아빤 공부할 땐 아무 쓰모가 없쪄. 엄마가 그랬거든? 아빤 언제나 ‘공부’란 놀이만 하고, 힘들고 지저분한 건 다아 내 차지라고. 다아 나한테만 떠맡겨서 힘드여 주께쩌.” (71∼72쪽)



  나는 즐겁게 걷습니다. 먼 길이건 안 먼 길이건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그냥 걷습니다. 두 시간이나 서너 시간이 걸리는 길도 그냥 걷습니다. 그냥 걸어 봅니다. 한참 걷다가 다리가 아프면, 좀 멀다 싶은 길을 걸으려 했네 하고 생각합니다. 어디 마땅한 곳을 찾아 앉습니다. 다리를 쉬면서 바람을 마십니다. 하늘을 바라보고 동네를 살핍니다. 다리를 툭툭 두들긴 뒤 일어나 다시 걷습니다. 걷고 걸으며 또 걸어서 드디어 내가 가려는 곳에 닿습니다.


  여덟 살 적 일을 떠올립니다. 나는 여덟 살 적부터 그예 씩씩하게 걸었습니다. 혼자 학교까지 걸었습니다. 학교에서 다시 집까지 걸었습니다. 이무렵, 나와 함께 그 길을 걸어서 다닌 동무는 없습니다. 모두 버스를 타고 그만 한 길을 다녔어요. 중학교 적에도 고등학교 적에도 똑같습니다. 삼십 분이나 한 시간 즈음 걸어서 학교를 다닌 동무를 만나기 어렵습니다. 함께 길을 걸으면서 생각에 잠기거나 하늘바라기를 할 만한 동무는 좀처럼 못 만납니다.


  걸음동무는 사귀지 못했지만, 혼자 오랫동안 길을 걸으면서 생각에 잠깁니다. 오직 내 생각에 사로잡힙니다. 오로지 내 생각에 젖어듭니다. 이제껏 내가 걸은 길을 헤아리고, 앞으로 내가 걸을 길을 돌아봅니다. 어제까지 내가 걸은 길을 되짚고, 오늘부터 내가 걸을 길을 톺아봅니다.





- “이츠코는 어떻게 이런 걸 잘하게 됐지?” “아빤 좀 가만 있어요.” “미안하다. 계속하거라.” (79쪽)

- ‘나는 집에서 일어나는 일을 아무것도 보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집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늘 눈여겨보던 이츠코는, 내가 모르는 사이 놀랄 만큼 자라 있었다. 이 순간의 감동을 기록하고 싶다. 가족의 기록을 남기고 싶다.’ (82∼83쪽)

- “당신 그럼, 밤엔 이츠코한테만 맡겼다고요?” “응?” “그런 갓난쟁이를? 애가 밤새 콜콜 잠만 자는 줄 알아요? 난쟁이 요정이 밤마다 기저귀를 갈고 분유를 타 줬을 리도 없는데, 밤엔 애를 대체 어떻게 한 거야!” (88쪽)



  야마시타 카즈미 님이 빚은 만화책 《천재 유교수의 생활》(학산문화사,2013) 서른넷째 책을 읽으며 생각합니다. 만화책에 나오는 유택 교수는 언제나 삶을 배웁니다. 언제나 삶을 찬찬히 지켜보면서 생각을 기울이고, 생각을 기울인 끝에 스스로 즐겁게 배웁니다.


  다만, 유택 교수는 혼자 생각해서 혼자 배울 뿐, 좀처럼 이 슬기와 즐거움을 둘레에 나누어 주지 못해요.


  이러던 어느 날, 유택 교수는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 살아온 줄 깨닫습니다. 그러나, ‘죽음 뒤 인생설계’는 생각하면서도 정작 ‘유택 교수 곁에 있는 사람과 나눌 이야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합니다. 스스로 생각을 기울이고 갈고닦아서 ‘옳구나!’ 하고 깨달으면서, 이 기쁨을 이야기꽃으로 펼치지 못해요.





- “내가 죽은 다음에는 어떻게 될까? 어쩌면 새로 사귀는 친구들 중에는, 손 한 번 잡을 일 없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구나.” (122쪽)

- “너는 참 이유도 많구나. 벚꽃을 보면, 나는 네 어머니가 생각난다. 오오, 벚꽃처럼 덧없고 아름다운 나의 추억이여. 오오, 신이여!” (168쪽)

- “유택이는 감정이 없는 게 아닐까?” “그렇지 않아요. 나는 저 아이가 웃는 얼굴을 자주 보거든요.” “그런가? 그렇다면 좋겠지만.” (185쪽)



  《천재 유교수의 생활》에 나오는 유택 교수네 아버지는 이 대목을 날카롭게 짚습니다. ‘내 아들’이면서도 이런 모습이 참으로 못마땅하다고 말하지요. 그리고, 아들인 유택 교수는 이런 아버지 말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참말 그렇지요. 유택 교수는 아직 배울 것이 많습니다. 배울 것이 많다는 얘기는 모르는 것이 많다는 뜻입니다. 유택 교수는 새롭게 배울 생각을 하면서 참말 스스로 새롭게 배우는데, 새롭게 배우면서 이러한 이야기를 이웃하고 나누는 일에서는 퍽 어리숙합니다. 어릴 적 유택 교수네 어머니가 어린 유택한테 들려주던 이야기도 ‘유택 교수가 손녀를 본 나이’가 되어서야 어렴풋하게 헤아릴 뿐입니다.



- ‘어머니와 벚꽃을 보던 시절, 앞으로 몇 번이나 이렇게 벚꽃을 볼 수 있을지는 생각한 적도 없었다. 봄이 매년 오는 것이 당연하던 그 시절, 벚꽃이 그렇게 아름다운 줄은 몰랐다.’ (187쪽)



  예순 줄 나이를 한참 넘겨서야 벚꽃을 벚꽃 그대로 바라본 유택 교수입니다. 유택 교수는 아기 기저귀를 갈 줄조차 몰랐습니다. 유택 교수는 밥짓기도 못하고, 집살림은 영 할 줄 모릅니다. 생각조차 하지 않고, 쳐다보지도 않으니까요.


  다시 말하자면, 유택 교수는 스스로 쳐다보고 생각한 것만 스스로 깨닫습니다. 스스로 쳐다보지 않은 것은 아예 유택 교수 마음에 없고, 마음에 없는 것은 알 수 없을 뿐 아니라, 어떻게 되든 아랑곳하지 않아요.


  앞으로 유택 교수는 이녁 삶에서 무엇을 더 바라보고 새롭게 배우면 즐거울까요? 집 바깥에서 다른 삶을 바라보고 배워야 할까요? 아니면, 유택 교수 스스로 ‘맨 먼저 떠올리는 곁님 얼굴’처럼, 곁님이 무엇을 좋아하고 사랑하고 아끼고 돌보는가 하는 대목을 서로 조곤조곤 이야기꽃을 피우면서 ‘내 마음에서 바라볼 것’을 바라보면서 배울까요?


  우리는 언제 어디에서나 배웁니다. 우리는 늘 배웁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배웁니다. 마음을 열면 다 보이고, 마음을 열 때에 다 깨닫습니다. 4347.10.17.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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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풍경 - 이희재의 스케치여행
이희재 지음 / 애니북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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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 즐겨읽기 398



따스한 사람들이 어깨동무

― 낮은 풍경, 이희재의 스케치여행

 이희재 그림·글

 애니북스 펴냄, 2013.7.26.



  우리가 사는 이곳에는 ‘낮은 사람’이나 ‘높은 사람’이 따로 없습니다. 그러니, ‘낮은 삶’이나 ‘높은 삶’도 따로 없습니다.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을 하는 사람은 높지 않습니다. 의사나 판사 같은 일을 한대서 높지 않습니다. 대학교 졸업장으로 사람이 높아지지 않으며, 외국에서 배웠거나 대학원을 마치기에 사람이 높지 않습니다.


  돈을 많이 거머쥔대서 높지 않으며, 어버이가 부자라서 높지 않습니다. 땅을 많이 거느리는 사람이 높지 않고, 이름을 드날리는 사람이 높지 않습니다.


  사람을 높이로 따지는 사람치고 바보스럽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을 높이뿐 아니라 크기나 부피 따위로 재는 사람치고 어리석지 않은 사람은 없어요.





.. 7월 5일, 낮부터 비가 내리더니 저녁 집회시간이 다가오자 비가 멎었다. 날씨 따라 어둡던 마음도 개운해졌다. 많은 시민이 다시 모였다. 촛불은 밤을 밝혔고 물결처럼 거리로 휘돌며 빗나간 권력에 맞대응했다 ..  (촛불)



  그런데, 사람을 바라보는 눈길은 한 가지 있습니다. 오직 한 가지 있습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이녁한테 사랑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대목을 살필 수 있습니다. 나 스스로 사랑스러운가 아닌가를 헤아릴 수 있습니다. 서로 사랑으로 삶을 가꾸는가를 돌아볼 수 있습니다.


  사람은 높거나 낮다고 가를 수 없으나, 따스한가 차가운가를 놓고 나눌 수 있습니다. 사람은 돈이나 이름값 따위로 가를 수 없지만, 사랑스러운가 안 사랑스러운가를 살피며 나눌 수 있어요.


  그러나, 사람이라면 누구나 뜨거운 피가 흐릅니다. 사랑이 없는 사람이란 없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사랑 없는 사람은 없기에 누구나 사랑입니다. 그저 아직 사랑에 눈을 뜨지 못했을 뿐입니다. 사랑이 없이 차갑구나 싶은 사람이라면, ‘아직 사랑에 눈뜨지 못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사랑을 밟거나 부수려는 사람이라면, ‘아직 사랑을 모르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 어떤 대상이고 처음 붓을 들면 낯설다. 사물에 익숙해지는 데는 대상이 도구와 교감하고 몸에 들어앉을 수 있는 시간의 뜸을 들여야 한다. 집과 집은 다닥다닥 옆구리를 맞대고 있다. 골목으로 들어서면 리어카 하나 비켜설 수 없는 조밀한 곳, 집마다 삶의 내력과 세월에 배어 있을 것이다 ..  (중계동 산동네 백사마을을 가다)



  만화를 그리는 이희재 님이 《낮은 풍경, 이희재의 스케치여행》(애니북스,2013)이라는 작품을 선보입니다. 우리가 마주할 풍경 가운데 ‘낮은 풍경’이나 ‘높은 풍경’이란 따로 없으나, 이희재 님은 스스로 ‘낮은 풍경’을 찾아서 그림에 이야기를 담습니다.


  낮은 곳은 어디일까요? 서울 광화문 촛불집회가 낮은 곳일까요? 도시에 있는 달동네가 낮은 곳일까요? 한국 정부에서 버린 윤이상 같은 사람이 낮은 곳에 있었을까요? 미얀마라는 나라가 낮은 곳에 있을까요?


  이희재 님은 굳이 “낮은 풍경”이라고 책이름을 붙입니다. 아무래도, 이 나라 정부와 사회와 경제와 문화와 예술이 ‘어떤 사람과 마을’을 낮게 깎아내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희재 님 스스로 ‘낮은 사람’이 되어 ‘낮은 이웃’을 만나려고 ‘낮은 나들이’를 즐깁니다.





.. 통영의 영산 미륵산 꼭대기에서 바라본 통영 앞바다. 둥둥 떠 있는 섬들은 어린 시절부터 청년기까지 윤이상의 눈에 밟히던 고양이다. 윤이상은 이곳으로 돌아오기를 바라고 바랐음에도 끝내 조국은 문을 닫아버렸다 ..  (윤이상을 찾아서)



  따스한 사람들이 어깨동무를 합니다. 따스하지 않은 사람은 어깨동무를 하지 않습니다. 따스한 사람들이 서로 아끼면서 어깨동무를 합니다. 따스하지 않은 사람들은 혼자 잘났기에 굳이 어깨동무를 할 까닭을 못 느낍니다. 따스한 사람들이 사랑을 주고받으면서 어깨동무를 해요. 따스하지 않은 사람들은 사랑을 모르니 어깨동무라는 낱말조차 모르리라 느낍니다.


  만화를 그리는 이희재 님이 바라보면서 그림으로 담은 ‘낮은 풍경’이란, 바로 따스한 사람들이 어깨동무를 하는 모습이지 싶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낮은 풍경’이란, 바로 따스한 사람들이 서로 아끼고 사랑하면서 돌보는 모습이지 싶어요.





.. 나는 둑길에 앉아 점심을 먹는 것도 잊고 장터의 흥정에 홀려 사람들을 그렸다 ..  (황금의 땅 부처의 나라 미얀마)



  낮은 곳에는 입시지옥에 없습니다. 낮은 곳에는 주식투자가 없습니다. 낮은 곳에는 스포츠나 연예인이 없습니다. 낮은 곳에는 법원도 국회의사당도 청와대도 대학교도 없습니다. 아니, 이런 것이 있을 까닭이 없습니다. 낮은 곳에는 밭이 있고 마을이 있으며 골목이나 고샅이 있습니다. 낮은 곳에는 나무와 풀과 꽃이 함께 자랍니다. 낮은 곳에서는 풀벌레와 개구리와 멧새가 함께 노래를 부릅니다. 낮은 곳이란 아이들이 즐겁게 뛰노는 보금자리입니다.


  더 들여다본다면, 낮은 곳에는 돈도 이름도 힘도 없습니다. 낮은 곳에서는 돈도 이름도 힘도 쓸 일이 없습니다. 낮은 곳에는 책도 문화도 예술도 없습니다. 낮은 곳에는 작가도 예술가도 공무원도 교사도 없습니다.


  낮은 곳에는 오직 사랑이 있고, 오로지 꿈이 크며, 그예 삶이 피어납니다. 낮은 곳에서는 모든 사람이 아버지요 어머니입니다. 낮은 곳에서는 서로서로 아재와 아지매입니다. 낮은 곳에서는 다 같이 언니요 동생입니다. 낮은 곳에서는 모두 동무이면서 이웃입니다. 낮은 곳에서는 저마다 다르면서 몽땅 한동아리가 되는 사람입니다.


  낮지도 않고 높지도 않습니다. 높지도 않고 낮지도 않습니다. 사랑에는 높낮이가 없습니다. 사랑은 너비나 깊이로 따지지 않습니다. 사랑은 언제나 따스하거나 포근합니다. 사랑은 늘 즐겁거나 아름답습니다. 4347.10.15.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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