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의 숲 24 - 신장판
이시키 마코토 지음, 양여명 옮김 / 삼양출판사(만화) / 2014년 9월
평점 :
품절





만화책 즐겨읽기 406



피아노가 자란 숲

― 피아노의 숲 24

 이시키 마코토 글·그림

 양여명 옮김

 삼양출판사 펴냄, 2014.9.27.



  피아노라고 하는 악기는 나무로 만듭니다. 나무가 없다면 피아노도 없습니다. 요즈음은 전자건반이 나오기도 하는데, 전자건반은 건반만 똑같이 틀을 잡아서 만들기에 전자건반이기는 하지만 피아노는 아닙니다.


  그런데, 피아노를 치면서 ‘나무를 친다’고 느끼는 사람은 아주 드물지 싶어요. 노래를 치고 이야기를 친다는 데까지 생각하는 사람은 많을 테지만, 숲에서 자란 나무를 얻어서 새로운 소리로 태어나도록 손질한다는 대목을 헤아리는 사람은 퍽 드물지 싶습니다.



-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게, 너무나도 따스하게 감싸 주는 듯해서, 피아노를, 피아노를 따르자! 이 피아노가 우릴 이끌어 줄 거야! 우린 하던 대로 최고의 연주만 하면 돼!’ (9∼11쪽)

- ‘아, 그렇구나. 이곳은, 이곳은 별빛 가득한 밤하늘 아래야!’ (18∼19쪽)





  피아노라는 악기를 처음 만든 날부터 얼마 앞서까지, 사람들은 손수 숲에서 나무를 베고, 손수 나무를 알맞게 손질하고, 손수 나무를 알맞게 말린 뒤에 비로소 악기로 쓸 틀을 짰습니다. 오늘날에는 피아노라는 악기도 공장에서 만들기 일쑤이지만, 제아무리 공장에서 피아노를 만든다 하더라도 숲이 있어야 나무를 얻고, 제대로 말려야 나무를 쓸 수 있으며, 마지막 소리 하나까지 나무결을 살려야 이 악기를 다룰 수 있습니다.


  영화 〈빌리 엘리어트〉를 보면, 겨울에 추위를 떠는 아이를 따뜻하게 하려고 피아노를 도끼로 찍어서 장작으로 쓰는 대목이 나옵니다. 너무 추운 나머지 피아노를 그만 도끼로 쩍쩍 찍는데, 막상 피아노를 찍어서 장작으로 쓰려고 해도 나무가 얼마 안 돼요. 피아노는 커다란 덩치와는 달리 ‘장작으로 삼을 만큼’ 나무가 많이 나오지 않습니다. 무슨 소리인가 하면, 그야말로 손이 많이 가도록 나무를 많이 자르고 베고 켜고 손질해서 만드는 피아노이지만, 피아노를 다른 데에는 쓸 수 없다는 뜻입니다. 추우면 장작으로라도 쓸밖에 없을는지 모르나, 고작 하루나 한나절 땔감으로 쓰면 사라집니다.


  추운 겨울날 덜덜 떨면서 살 수 없겠지요. 추운 겨울날 피아노로 노래를 친다고 해서 추위기 사라지지 않겠지요. 그러나, 아무리 추워도 집을 뜯어서 장작으로 삼지 않습니다. 기둥도 지붕도 그대로 둡니다. 장작을 얻으려면 다른 데에서 얻어야 합니다.





- ‘바람이, 풀 향기를 몰고 왔어.’ ‘아니, 이건 나무의 향기다.’ ‘카이, 이곳은 숲이구나. 그리운 피아노의 숲이야.’ (31쪽)

- ‘그렇구나. 일일이 숲으로 되돌아가지 않아도, 숲의 피아노는 항상 내 마음속에 있어.’ (111쪽)



  이시키 마코토 님이 빚는 만화책 《피아노의 숲》(삼양출판사,2014) 스물넷째 권을 읽습니다. 스물넷째 권에서 드디어 ‘이치노세 카이’가 피아노를 칩니다. 어린이에서 씩씩한 푸름이로 자란 카이가, 곧 어른이 될 카이가, ‘숲 피아노’를 칩니다.


  다만, 카이는 이제 ‘숲 피아노’에만 매이지 않습니다. 카이가 치는 피아노는 숲에서 태어났지만, 숲에서 자란 나무가 피아노로 바뀌어 여러 나라 골골샅샅으로 퍼지듯이, 숲에서 자란 나무가 걸상도 되고 책상도 되어 온갖 나라 구석구석으로 퍼지듯이, 숲에서 자란 나무가 종이로 바뀌고 책으로 다시 태어나서 지구별 이곳저곳으로 퍼져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주듯이, ‘숲 피아노’는 카이를 비롯해서 모든 사람들한테 새로운 숨결로 퍼집니다.




- ‘그때 되선 선생님도 나도 불편한 감정을 품은 채 서로 대치하는 걸 그만두고, 현재 가장 우선시해야 할 일을 위해 앞으로 나아갔다.’ (57쪽)

- “그러니까 난 내가 할 수 있는 건 뭐든 할 거야! 그래서 그걸 매일 반복할 거야!” (66쪽)



  카이는 ‘쇼팽 대회’에 가서 ‘쇼팽’을 피아노로 칩니다. 대회에 나갔으니 1등을 하려는 생각이 있을 수 있으나, 카이는 오직 피아노를 치려고 대회에 나갔습니다. 그리고, 대회에 나갔다기보다는 ‘피아노 치는 사람’으로 이웃들한테 인사를 하려고 그 자리에 섭니다.


  카이가 마음을 쓰는 대목은 오직 하나입니다. 숲에서 나고 자란 피아노가 카이를 비롯한 이웃들한테 아름다운 노래로 스며들어서 꿈과 사랑을 들려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직 이 하나를 생각하면서 피아노를 칩니다.


  숲에서 부는 바람을 피아노로 칩니다. 숲에서 자라는 푸릇푸릇 새싹과 봄꽃을 피아노로 칩니다. 숲에 깃들어 살아가는 새와 벌레와 온갖 짐승들 살림살이를 피아노로 칩니다. 숲에서 올려다보는 구름과 무지개를 피아노로 칩니다. 숲에서 밤마다 흐르는 고즈넉하고 고요한 별빛을 피아노로 칩니다. 숲에서 솟아 들을 가로지른 뒤 바다로 나아가는 냇물을 피아노로 칩니다.




- ‘정신을 차리니, 내 곁을 지켜 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깨닫고 보니, 마음 따뜻한 사람들에게 항상, 항상 둘러싸여 있었다.’ (140∼142쪽)



  숲에서 들리는 피아노 노랫소리를 듣는 사람은 저마다 생각에 젖습니다. 저마다 그리운 생각에 젖습니다. 천천히 눈을 뜨고 천천히 웃음꽃을 피웁니다. 그래요. 숲은 모두를 따사로이 보듬습니다. 숲은 푸른 바람을 일으켜 모두한테 고운 숨결을 베풉니다. 너와 내가 하나요, 네가 나와 함께 있어 즐거운 삶을 이야기해요.


  피아노로 다시 태어난 나무는 어떤 마음일까 하고 생각합니다. 책으로 다시 태어난 나무는 어떤 마음일까 하고 돌아봅니다. 걸상이나 책상으로 다시 태어난 나무는, 옷장이나 책꽂이로 다시 태어난 나무는, 빗자루나 젓가락으로 다시 태어난 나무는, 부챗살이나 연살로 다시 태어난 나무는, 연필이나 붓으로 다시 태어난 나무는, 호밋자루나 삽자루로 다시 태어난 나무는, 모두들 우리 곁에서 어떤 숲노래를 들려줄까요? 귀를 기울이면 모든 노래를 들을 수 있습니다. 마음을 기울이면 우리 몸을 타고 흐르는 푸른 기운을 느낄 수 있습니다. 4347.10.30.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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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구리 2014-11-03 2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포일러에요....


카이가 우승 했어요. ㅠㅠ. 팡웨이가 2위 레프가 4위 안창수창우 형제가 6,8위..

이제 아지노는 카이 곁을 떠나련가.. ㅠㅠ

숲노래 2014-11-04 06:13   좋아요 0 | URL
스포일러를 달지 않으셔도
결과는 뻔하게 다 나왔는걸요 ^^

25권 마지막에 `이변`이라는 말이 나왔으니
나중 결과도 다 보이지요 ^^

일본책으로 보셨나 보네요~

아지노는 카이 옆에서 가르치지 않아도
늘 마음으로 가르치리라 생각합니다 ^^

고맙습니다~
 
천국으로의 계단 1
무츠 도시유키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03년 7월
평점 :
절판






만화책 즐겨읽기 405



내 마음도 네 마음도 하늘

― 천국으로의 계단 1

 무츠 토시유키 글·그림

 학산문화사 펴냄, 2003.7.25.



  두 아이를 자전거에 태우고 면소재지로 마실을 나옵니다. 아버지가 자전거를 면소재지 초등학교로 돌려서 운동장으로 들어서니, 두 아이는 아주 좋아합니다. 놀이터에 가는구나, 하면서 까르르 웃습니다.


  면소재지 초등학교에 닿은 두 아이는 맨발이 됩니다. 이 가을에 맨발로 운동장을 휘젓습니다. 이 놀이기구를 타고, 저 놀이기구에 매달립니다. 누나가 앞장서서 달리며 동생을 이끌고, 동생은 누나와 함께 이 놀이를 하다가 저 놀이를 합니다.


  포근하게 햇볕이 내리쬡니다. 바람이 싱그럽게 붑니다. 나뭇가지와 나뭇잎은 살랑살랑 흔들리고, 풀내음과 꽃내음이 상큼하게 퍼집니다.



- ‘이, 이건 말도 안 돼! 느닷없이 이런 일이 어딨어? 내 인생은 이제 겨우 시작했을 뿐이잖아. 앞으로도 더욱더 즐거운 일들이 많이 있는데! 죽기 싫어. 장난하지 말란 말야!’ (10쪽)

- “너는 인생의 의미를 생각해 본 적이 있느냐! 나의 존재는 무엇인가? 무엇을 위해 태어났는가? 자신이란? 타인이란? 인간이란? 삶이란? 죽음이란?” (17쪽)

- “너 자신을 믿어 봐. 최선을 다해서 앞으로의 인생을 사는 거야. 너, 너는 그렇게 나쁜 인간이 아니야.” (29쪽)





  일곱 살 큰아이가 문득 작은 꽃송이를 알아봅니다. 조그마한 꽃이 노랗게 폈다고 말하면서 손가락으로 가리킵니다. 그래서 아이한테 이 꽃한테는 괭이밥이라는 이름이 있다고 알려줍니다. 아이는 아버지한테서 들꽃 이름 한 가지를 듣습니다. 다만, 이 들꽃 이름을 이제까지 꽤 자주 들려주었지 싶어요. 아이는 꽃이름을 머릿속에 잘 담아 노래하듯이 읊을 때가 있지만, 그만 잊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집 둘레에서 뜯어서 먹는 풀을 놓고도, 이름을 잘 떠올리는 날이 있지만 이름을 영 모르는 날이 있어요. 한두 번, 또는 열 번이나 스무 번, 또는 백 번이나 이백 번 듣는다고 해서 잘 알 수 있지는 않구나 싶습니다.


  똑같은 일을 되풀이하는 까닭이라면, 이 똑같은 일이 재미있거나 즐겁기 때문이기도 하면서, 이 똑같은 일을 깊이 헤아리지 못하거나 살피지 못하기 때문이지 싶습니다. 마음으로 삭히지 못할 적에는 알지 못합니다. 아는 듯할 적에는 알지 못합니다. 알 때에 압니다.


  맨발로 노는 즐거움을 아니 맨발로 놉니다. 작은 풀꽃이 곱다고 느끼니 어느 곳에 가든 작은 풀꽃을 알아차립니다. 그리 좋아하지 않지만 어느새 몸에 배거나 익었기 때문에 달갑잖은 몸짓이 톡 튀어나옵니다. 밤하늘 별을 올려다보지만 별빛이 무엇인지 깊이 돌아보지 않으니 별숨을 마시지 못합니다.



- ‘이 재수없는 아저씨가 그 코이치 씨란 말이지. 내 아름다운 추억의 만화를 만들어 준 에니메이터였을 줄이야.’ (47쪽)

- “지로가 이루고 싶다고 생각하는 건 뭐든 할 수 있어. 이렇게 손가락을 치켜들고 딱 소리를 내면!” (59쪽)





  무츠 토시유키 님이 빚은 만화책 《천국으로의 계단》(학산문화사,2003) 첫째 권을 읽습니다. 이 만화책에 나오는 주인공 아이는 아직 스물이 안 됩니다. 따로 학교를 다니지 않으며, 아버지한테서 절집을 물려받아 스님 노릇을 합니다. 그런데 이 아이는 절집 일에는 마음을 안 쏟습니다. 바깥에서 노닥거리는 데에 온마음을 쏟습니다. 이러던 어느 날 그만 저도 모르게 목숨을 잃고 하늘나라에 갑니다.


  하늘나라에 간 주인공 아이는 어리둥절합니다. 하늘나라가 어떤 곳인지 처음 가 보았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생각한 적 없고, 죽은 뒤 어찌 되는가를 헤아린 적 없습니다. 막상 죽어서 하늘나라에 가니 비로소 두려움과 무서움이 겹칩니다. 어떻게 손을 쓸 수 없는 줄 알아차립니다.



- “뭐가, 뭐가 운명이야! 그런 게 운명이라면, 여기서 내려다보는 당신들 눈엔 우리가 얼마나 하찮게 보이겠어! 인간을 만들어 놓구선! 책임도 안 지고! 내가 보기엔 당신들이 더 쓰레기야! 사람 마음의 아픔도 모르는 인정머리 없는 쓰레기들이라고! 수명이라면 얼마든지 내 수명을 줄 수 있어!” (84쪽)

- “인간의 눈물에는, 그것 말고도 ‘무언가’가 더 들어 있는지도 모르겠소.“ (91쪽)





  죽고 나서야 죽음을 생각하면 우리 넋은 어떻게 될까요. 죽지 않고 아직 씩씩하게 살 적에 삶을 생각할 수 있으면 우리 넋은 어떻게 흐를까요.


  사는 동안 삶을 즐겁게 돌아보면서 아름답게 가꾸는 길은 어디에 있을까요. 삶을 아끼고 돌보면서 하루하루 씩씩하게 살림을 보듬는 길은 누가 찾을 수 있을까요.


  하루가 흘러 밤이 되다가는 다시 아침이 됩니다. 아침에 동이 튼 뒤 밝고 따스한 낮이 됩니다. 차츰 해가 기울어 저녁이 되고 별이 돋는 밤이 됩니다. 하루는 언제나 흐릅니다. 삶은 언제나 흐릅니다. 내 삶은 한 자리에 고이지 않습니다. 늘 흐르면서 달라지고, 언제나 흐르면서 새 모습이 됩니다.


  즐겁게 노래하는 사람은 바로 나요, 즐거움을 모르는 채 노래를 못 부르는 사람도 바로 나입니다. 기쁘게 웃는 사람은 바로 나요, 기쁨을 모르는 채 눈물조차 없이 메마른 사람도 바로 나입니다.



- “회사는 처음부터 다시 할 수 있어! 하지만 아이는 돌아오지 않아! 아버지도, 아마 그걸 바라고 계실 거야!” (157쪽)

- “저런 악마는 아니지만, 나도 가끔 인간이란 참 바보 같단 생각을 하곤 해. 하찮은 이유로 전쟁을 일으켜 많은 사람이 죽고, 돈 때문에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을 죽이는 사람도 있어.” (191쪽)





  내 마음이 하늘인 줄 안다면, 네 마음이 하늘인 줄 압니다. 내 마음이 사랑인 줄 안다면, 네 마음이 사랑인 줄 압니다. 내 마음이 하늘인 줄 모르기에, 네 마음이 하늘인 줄 모릅니다. 내 마음이 사랑인 줄 모르니, 네 마음이 사랑인지 아닌지 사랑이 있는지 없는지 하나도 모릅니다.



- “초능력 따위 빌리지 않겠어! 엄마는, 내가 내 힘으로 구할 거야!” (200쪽)

- ‘마음속까지 벚꽃이 피었다.’ (109쪽)



  만화책 《천국으로의 계단》은 넌지시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아름답게 삶을 가꾸는 길은 바로 이곳에 늘 있다는 이야기를 넌지시 들려줍니다. 나 스스로 찾는 삶이 나 스스로 가꾸는 삶입니다. 나 스스로 사랑할 하루가 나 스스로 누리는 하루입니다.


  새벽에 큰아이가 잠에서 깹니다. 쉬가 마렵답니다. 쉬를 누이고 들어가는 길에 미역을 끊어서 불립니다. 동이 트고 멧새가 우리 집 마당으로 찾아와 노래를 부르면, 천천히 일어나 새롭게 미역국을 끓여야지요. 국물이 잘 우러나도록 끓이는 미역국은 우리 집 네 사람이 모두 맛나게 먹으면서 몸에 새 기운을 불어넣습니다. 4347.10.29.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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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천무 1
김혜린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1998년 10월
평점 :
절판





만화책 즐겨읽기 404



가을풀내음과 함께

― 비천무 1

 김혜린 글·그림

 대원문화출판사 펴냄, 1997.1.15.



  이 가을에 풀이 새롭게 돋습니다. 가을에 돋기에 가을풀입니다. 풀은 봄에도 돋고, 여름에도 돋으며, 가을에도 돋습니다. 더구나 겨울에도 풀이 돋아요. 추위를 이기고 돋는 겨울풀이 있고, 추운 겨울에도 볕이 포근하게 여러 날 내리쬘 적에 그만 ‘봄으로 잘못 알고’ 깨어나는 풀이 있습니다. 한겨울에 붉은 꽃송이를 터뜨리는 동백꽃도 겨우내 따순 기운을 받아서 우리한테 찾아오는 고운 숨결입니다.


  풀은 언제나 돋습니다. 그래서, 풀을 먹고 사는 짐승은 언제나 풀을 먹을 수 있습니다. 토끼도 사슴도 고라니도, 철마다 돋는 풀을 즐겁게 누리면서 삶을 잇습니다. 풀을 먹는 사람들도 철마다 새롭게 돋는 풀을 고맙게 얻으면서 삶을 이어요. 봄에는 봄내음을 맡으면서 풀을 먹고, 여름에는 여름내음을 맡으면서 풀을 먹다가, 가을에는 가을내음을 맡으면서 풀을 먹어요.



- “너희들 나빠! 아무리 거지라고 막 그러는 거 아냐.” “설리! 너 또 계집애 주제에!” (28쪽)

- “너도 한족이지? 너도 몽고인 싫어해?” “난 그런 건 몰라. 그래도 엄마랑 아버지가 있다는 건 좋은 걸 거야.” (41쪽)

- “너 이상한 소릴 한다? 나눠 먹는 게 뭐가 나빠서? 우리 엄마가 사람들이 서로 나눠 먹는 건 좋은 거랬단 말야!” (51쪽)




  태평양과 맞닿은 남녘 바닷마을은 가을이 깊은 시월에도 따스합니다. 아침저녁으로 찬이슬이 내리지만, 해가 하늘 높이 솟는 때에는 제법 후끈후끈합니다. 들판을 가득 채우는 곡식한테도 드리우는 햇볕이고, 가을에도 개구지게 뛰노는 아이들한테도 찾아가는 햇볕입니다. 우리는 모두 이 햇볕을 머금으면서 추위를 잊고 따스함을 생각하면서 사랑을 짓습니다.


  바람이 붑니다. 바람은 늘 풀을 스치고 나뭇가지를 간질입니다. 풀을 스치는 바람은 풀노래를 부릅니다. 아직 겨울잠에 들지 않은 풀벌레는 군데군데 남아 가을노래를 베풉니다. 밤이 깊으면 멧새도 추위에 웅크리면서 잠이 들지만, 밤에 깨어나 먹이를 찾는 새들이 밤이 깊을수록 한결 그윽하게 노래를 부르면서 시골마을 곳곳에 이야기를 나누어 줍니다.


  바람은 저 먼 데에서 이곳으로 옵니다. 바람은 이곳에서 저 먼 데로 갑니다. 바람은 이곳과 저곳을 오가면서 이야기를 실어 나르고, 바람은 저곳과 이곳 사이를 흐르면서 저마다 짓는 냄새와 숨결과 노래를 갈무리합니다.



- ‘난 나만 좋아해 주는 착한 사람이랑 행복하게 살 거야.’ (33쪽)

- “난 춤추는 걸 좋아하는데 우리 엄만 싫어하시거든. 엄마처럼 되면 안 된대. 그래도, 난 춤이 추고 싶어서 봉이라도 들고 막 뛰어다녀. 한참 빙빙 돌다 보면 내 친구가 되어 버리거든. 햇빛이랑, 바람이랑, 꽃이랑, 나무랑, 그리고 하늘도!” (54쪽)





  가난한 사람이 밥을 먹습니다. 가멸찬 사람이 밥을 먹습니다. 어른이 웃습니다. 아이가 웃습니다. 젊은이도 모서리에 부딪히면 아야 소리를 내면서 피가 납니다. 늙은이도 돌이 걸려 꽈당 넘어지면 무릎이 깨져 피가 흐릅니다.


  너나 없이 사랑입니다. 나한테만 포근한 사랑은 없습니다. 나한테 포근한 사랑이라면, 내 이웃과 동무한테도 포근한 사랑입니다. 너나 없이 아름다움입니다. 나한테만 즐거운 아름다움은 없습니다. 나한테 즐거운 아름다움이라면 이웃과 동무 모두한테 똑같이 즐거운 아름다움입니다.


  전쟁은 누구한테 좋을까요. 경쟁과 개발은 누구한테 도움이 될까요. 전쟁을 벌여 돈을 버는 사람이 있다면, 이녁은 전쟁을 사랑할는지 몰라요. 그러나, 전쟁이 터지면, 전쟁으로 돈을 버는 사람도 언젠가 전쟁 때문에 눈물을 흘려야 할 때를 맞이합니다. 혼자만 전쟁 소용돌이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전쟁 때문에 숲이 망가지고 마을이 무너지면, 지구별에 흐르던 바람에도 핏빛이 실리고 핏내음이 깃들기 때문입니다.




- ‘세상이 이렇게 되어 있는 거, 몽고인들만의 탓이 아니죠. 설리랑은 더더욱이 관계 없는 일이고요. 그녀도 피해자여요! 삼촌도, 사실은 그렇게 생각하고 계시면서, 제 자신보다 더 제 마음을 잘 알고 계시면서!’ (96쪽)

- “소저를 시비(하녀)로 착오케 한 것 또한 하늘의 배려인 것만 같은데, 이런 기연이 어디 있겠소? 허니, 너무 허물치 말고 이 몸과.” “하녀는 함부로 대해도 되나, 뿌리 있는 계집은 그렇지 않다, 말씀입니까? 소녀, 하녀와 다름없는 서출이니 공자의 태도 돌변하심이 외려 우습습니다 …… 공자께서 정중히 사과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건 죽리관입니다. 취했음을 가장하여, 아무도 내 마음을 몰라주네 하고, 만 사람을 비웃으며 맑은 노래를 우롱하셨습니다.” (136∼ 137쪽)



  김혜린 님 만화책 《비천무》(대원,1997) 첫째 권을 읽습니다. 중국이라는 나라에서 살던 사람들 이야기를 수수하게 다루는 만화입니다. 만화에서 다루는 사회나 역사라면 중국에서 원과 명 언저리라 할 테지만, 만화에 나오는 사람들은 ‘권력자’나 ‘정치꾼’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 숨결을 얻어 이 땅에서 사랑을 속삭이는 사람이 이 만화에 나옵니다.


  다만, 이런 권력자나 저런 정치인이 살몃살몃 고개를 내밀기도 해요. 그러나, 이들은 이 만화를 이루는 ‘주인공’이 아닙니다. 이 만화에 나오는 ‘주인공’은 바로 ‘우리’입니다. 이 지구별에서 서로 사랑으로 어우러지고 꿈으로 어깨동무를 하며, 노래로 잔치를 즐기는 ‘우리’입니다.


  총이나 칼이나 창을 든 바보가 아니라, 따사로운 손길로 흙을 보듬으면서 밥과 술과 떡을 서로 나눌 줄 아는 수수한 사람이, 바로 이 만화를 이루는 넋입니다.




- “하지만, 세상을 구제한다는 종교가 어째서 약탈과 살상을 방법으로 삼아야 하죠?” “언제나 문제점은 종교나 사상이 아니라 그걸 운용해 가는 사람들한테 있느니. 해서, 진심으로 애쓰는 사람이 외려 핍박받고 쓰러지는 경우도 많지.” (149쪽)

- ‘삼촌, 사람을 죽였습니다. 나쁜 놈들이었는데, 그런데, 저랑 똑같은 행색을 하고 허옇게 죽었어요! 눈밭 위에 떨어진 피가 빨간 꽃처럼 번졌어요. 토할 것만 같아요!’ (168쪽)

- ‘실없는 화풀이! 사람을 죽여 본 자는 이렇듯 쉽게 살의가 뻗치는 건가.’ (208쪽)



  가을바람이 가을풀내음을 싣습니다. 전남 고흥에서 돋는 가을풀은 바람결에 푸른 내음을 얹어서 저 멀리, 전라북도로도, 충청남도로도, 경기도로도, 서울로도, 평양으로도, 신의주로도 보냅니다. 신의주에서 부는 추운 바람은 평양을 지나고 경기도와 서울을 거쳐 다시 충청도와 전라도로 돌아옵니다.


  사랑을 실어 날리는 바람이라면, 우리한테 사랑이 돌아옵니다. 미움이나 싸움을 실어 날리는 바람이라면, 우리한테 미움과 싸움이 돌아옵니다.


  어떤 바람이 불게 하고 싶습니까. 어떤 바람이 불 때에 너와 내가 즐거울까요. 나는 어떤 바람을 맞고 싶은가요? 내 사랑스러운 이웃과 동무는 어떤 바람을 쐬면서 하루를 누릴 때에 즐거울까요? 4347.10.26.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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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에서 만화읽기'라는 꼬리말을 붙이면서 쓴 글이

이제 400꼭지가 된다. 396째 글을 아직 안 썼지만,

401째 글을 먼저 썼기에, 꼭 400째 글이 된다.


만화책 이야기를 꾸준히 쓰는 이웃은

거의 찾아볼 수 없기도 하지만,

만화책을 깊이 읽거나 이야기하려는 이웃도

거의 찾아볼 수 없기도 하다.


앞으로도 꾸준히 만화읽기 이야기를 띄울 텐데,

'별점 등록'을 하는 누리집에 올린 글로 살피자면,

'별 다섯'을 붙이는 작품이 아니라면

다시 읽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


별 다섯을 붙였어도 굳이 다시 읽지 말자고 느끼는 작품이 있다.

만화읽기 느낌글로 올린 글에서

'별 셋'이나 '별 둘'이나 '별 하나'를 붙인 책은

추천하고 싶지 않고 소개하고도 싶지 않은 작품이다.


'별 다섯'을 붙인 책만

둘레에 이야기해 주고 싶다고 할까.


오늘도, 시골집에서

밤별을 잔뜩 누리면서

만화책 이야기를 하나 썼다.

밤에 별을 누릴 수 있는 곳에서 사니까,

나 스스로 별이 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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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드 & 1
오카자키 마리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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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만화책 즐겨읽기 395



스스로 길을 찾아야지

― 앤드(&) 1

 오카자키 마리 글·그림

 대원씨아이 펴냄, 2012.9.15.



  밤에 곁님이 슬쩍 한 마디 합니다. 오늘 밤 별이 무척 밝다고. 그렇구나 하면서 마당에 나와 밤별을 올려다봅니다. 곁님 말대로 별이 무척 맑습니다. 별빛은 언제 보아도 곱습니다. 그젯밤에 아이들과 올려다본 별을 떠올립니다. 그젯밤에도 별빛이 아주 밝았어요. 그젯밤에는 미리내를 보았습니다.


  한동안 마당에서 서성이면서 별을 올려다봅니다. 마을 곳곳에 있는 등불은 손으로 가리면서 별을 올려다봅니다. 나는 바로 이 별을 보고 싶어서 시골에서 사는구나 싶어요. 별빛을 가슴에 품고, 별내음을 온몸으로 맡으며, 별노래를 마음으로 들으려고 시골에서 사는구나 싶습니다.



- ‘정말 원하는 것은 언제나 내가 원하는 형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13쪽)

- “성추행인가요?” “재판을 걸어도 상관없어. 소송에는 익숙하니까.” “이기면 전 뭘 얻을 수 있죠?” “글쎄. 하긴 닳는 것도 아니니까.” “닳아요.” (162쪽)




  별을 바라보면 마음이 차분합니다. 별을 바라보는 동안 몸이 느긋합니다. 나무를 바라보거나 풀밭을 바라볼 때에도 마음이 차분합니다. 숲에서 걷거나, 숲에 우거진 나무를 쓰다듬을 때에도 마음이 차분합니다.


  시외버스를 타고 도시로 나들이를 가면서 마음이 차분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스스로 차분해지자고 생각하면서 달래면 차분할 수 있지만, 이리저리 흔들리는 버스를 따라 흔들리면 몸도 마음도 어지럽습니다. 도시에서 시외버스를 내려 걷거나 지하철을 탈 적에도, 스스로 마음을 다스리지 않으면 몹시 어지러우면서 힘들어요.


  아마 도시에서는 누구나 다 똑같을 텐데, 별을 볼 수 없고 나무도 풀밭도 숲도 만날 수 없으니, 좀처럼 차분하기 어렵고 따스하기 힘들며 너그럽지 못할 수 있구나 싶습니다. 마음을 달래거나 쉴 만한 곳이 없으니까요.


  도시에서는 누구나 내 마음부터 고단하거나 힘드니, 이웃이나 동무를 살피거나 헤아리기도 어렵지 싶습니다. 내가 힘드니까 이웃도 힘들겠구나 하고 생각하기보다는, 내가 힘든 탓에 다른 사람은 살피지 않고 골을 내거나 짜증이 피어나기 쉽구나 싶어요.



- “그때 일부러 그런 거지?” “뭘?” “지난번 버그 고칠 때, 승산이 있으니까 일부러 그녀 앞에서 한 거잖아.” (88∼89쪽)

- ‘아아. 어떡하지. 직접 간판을 내걸고 뭔가를 한다는 것은, 실패하면 안 된다는 뜻.’ (94쪽)





  오카자키 마리 님이 빚은 만화책 《앤드(&)》(대원씨아이,2012) 첫재 권을 읽으며 문득 생각합니다. 이 만화책에 나오는 사람들이 ‘도시 한복판’에 있는 병원이 아닌 ‘섬이나 외딴 시골’에 있는 병원에서 일한다고 할 적에도, 이 만화와 같은 줄거리가 흐를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언제나 마음을 차분히 달래면서 쉴 수 있는 터전에서 일하는 사람과, 언제나 빠듯하면서 고단하게 하루를 보내야 하는 사람은, 저마다 얼마나 다를까요.



- “다들 처음에는 기뻐하지. 목숨을 건졌다는 사실을. 하지만 이윽고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네. ‘이 사람은 언제까지 이런 상태일까?’” (117쪽)

- “위로하는 거니? 화나게 만들고 싶은 거니? 사실이면 무슨 말을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152쪽)



  스스로 길을 찾아야 합니다. 스스로 삶을 열어야 합니다. 스스로 사랑을 가꾸어야 합니다. 남이 해 줄 수 없습니다. 내가 하는 일입니다. 내 삶은 내가 일구지, 남이 일구어 주지 않습니다. 내가 배고플 때에는 내가 밥을 먹어야지, 옆에서 밥을 먹어 준들 내 배가 부르지 않습니다.


  너그럽거나 포근한 시골에서 살든, 메마르거나 바쁜 도시에서 살든, 그리 대수롭지 않습니다. 어디에서 살든 나 스스로 즐거운 넋이어야 즐겁습니다. 어디에서 살든 나 스스로 아프거나 고단한 넋이라면 늘 아프거나 고단합니다.




- ‘이윽고 하늘이 하얗게 밝아오고 거리가 출근하는 사람들로 가득 찰 때까지, 그대로 꼼짝도 하지 못했다. 춥지 않을까? 그런 바보 같은 생각에 조금 당황하면서, 발밑의 감각이 사라지고 머릿속이 마비되어 새햐얘질 때까지.’ (181쪽)



  도시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너무 고단한 나머지 밤새 술을 마시면서 새벽을 맞이하기도 합니다. 시골에서는 밤새 술을 마시다가 새벽을 맞이하는 일이 드물어요. 왜냐하면, 시골에서는 새벽부터 할 일이 있거든요. 아무리 술을 마시더라도 새벽에 일어나야 합니다. 그러니, 도시하고는 사뭇 달라요. 시골일은 회사일과 달라 ‘일요일이나 주말이 없’습니다. 다만, 시골일은 날마다 살피고 마주하되, 날마다 새롭고 싱그럽습니다. 더 살펴본다면, 시골에서 맞이하는 새벽과 아침은 무척 고즈넉하면서 차분합니다. 도시처럼 북적거리지 않고, 도시처럼 바빠맞지 않습니다. 이슬을 머금으면서 풀과 나무와 꽃이 깨어나는 시골입니다. 별이 하나둘 지면서 꽃이 하나둘 돋는 시골입니다.


  시골 저녁은 어떠할까요? 시골 아침은 별이 지면서 꽃이 돋는다면, 시골 저녁은 꽃이 지면서 별이 돋습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거의 모든 사람(99%)이 도시에서 살아요. 그래서 도시 언저리만 살필 텐데, 도시에서도 꽃을 찾을 수 있고, 별을 그릴 수 있습니다. 도시에서는 시골처럼 온갖 들꽃이 흐드러지지 않을 테지만, 눈을 밝히고 찾아보면 골목꽃을 찾을 수 있습니다. 도시에서는 시골처럼 미리내를 보기 어렵지만, 고개를 들어 살피면 달빛이라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 스스로 밝은 숨결이 되어 고운 웃음꽃으로 깨어날 수 있습니다. 이 땅을 씩씩하게 디디면서 이웃들과 환하게 어깨동무를 하는 아름다운 사람이 될 수 있어요. 언제나 스스로 길을 찾아서 엽니다. 4347.10.25.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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