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로 아이 키우는 일이란 너무 쉽고 미안하다
[애 아빠는 어떻게 사나 2] 쉰닷새와 쉰엿새째 육아일기
(쉰엿새) 물장난
- 날짜 어떻게 가는지 모르는 채 하루하루를 산다. 오늘 새벽부터 이튿날 새벽까지, 발 느긋하게 뻗고 쉬는 때란 잠깐도 없다. 조금 곁을 낼 수 있을 때라면, 밀려 있는 글을 쓰고, 책을 읽고, 집안일을 한다. 쌓여 있는 기저귀가 있으면 기저귀 빨래를 한다. 기저귀 빨래를 하는 사이, 아기가 깨기라도 하면 저와 함께 놀아 달라면서 운다. 처음에는 한두 마디 짤막하게 끊어지는 낮은 소리로. 차츰차츰 길며 높아지는 목소리로.
쉰 날을 맞이하기 앞서까지만 해도 옆지기 몸이 몹시 안 좋았다. 어쩔 수 없이 배앓이를 견디지 못하고 병원에 가서 모진 의사 손을 거쳐서 아기가 태어나느라 아기와 옆지기 모두 몸과 마음이 다치기도 했지만, 옆지기가 제 몸을 되찾는 시간은 더디기만 했다. 이를 지켜본 장모님이나 이웃 할머니나 ‘백일이 괜히 백일이 아니라, 아기와 엄마가 몸을 되찾는 시간’이라고 입을 모았다.
그러면 이런 이야기를 진작부터 해 주었으면 좋으련만. 처음 겪어 보는 우리들로서는 이런 대목까지는 미처 헤아리지 못했다. 아니 헤아릴 수 없었다. 첫 세이레 동안 아기를 지키고 옆지기 어긋난 뼈가 제자리를 찾는 데까지 마음을 기울여야 한다는 대목쯤은 알았으나, 그토록 몸풀이가 오래 끌게 될 줄은 알 수 없었다. 어떠한 책에서도 이런 이야기는 없었고, 어느 자료에서도 이렇게 백일에 걸쳐서 아기와 애 엄마 몸풀이를 돕고 이끌어야 한다는 소리는 없었다.
왜 육아책에는 이런 이야기가 담겨 있지 않을까. 왜 초중고등학교 성교육 때에는 이와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았을까. 가르쳐 주는 교사들부터 겪어 보지 못해서 못 들려주었을까. 나중에 저절로 알게 된다고 생각하며 대충 넘겼을까. 푸름이들 눈길과 생각은 ‘사랑놀이’에 맞춰질 뿐, 아기를 몸에 안고 열 달이라는 삶을 배로 품어낸 다음 세상으로 받아들여서 천천히 세상과 한몸이 되도록 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몰랐을까.
생각해 보면, 지난날에는 굳이 책을 읽지 않아도, 따로 책을 살피지 않아도 집안이 큰식구였기 때문에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거들어 주고 이끌어 주고 도움을 베풀었다. 그래서 크게 걱정하지 않고 집에서 아이를 낳을 수 있었고, 아이를 낳는 동안 아버지나 어머니는 아기 몸과 어머니 몸을 시나브로 다시 배우게 된다. 무엇을 해 먹이고, 어떻게 해 먹이며, 집은 어떻게 꾸미고, 집식구들은 어떻게 매무새를 다스려야 하는가를, 집안 어르신이 차근차근 가르치고 보여주었다. 그런데 이제는 시골도 도시도 큰식구로 살아가기 어려운 한편, 자식뿐 아니라 부모 스스로도 딴살림으로 뿔뿔이 흩어지면서 따로따로 산다. 모두들 제 삶을 저희끼리 홀로 이끌려고 한다. 아기를 낳는 한동안, 아기를 낳고서 얼마쯤 일손을 거들는지 모르나, 일손 거들기를 넘어서 아이 삶과 애 어머니 삶을 깊이 들여다보도록 마음을 틔워 주기까지는 못한다. 그러니 책을 찾아볼밖에 없고, 인터넷이라도 뒤져야 하는데, 이와 같은 이야기를 찾기란 너무도 고달픈 일.
나라에서는, 아기를 집에서 낳으면 돈 얼마를 준다고 하고, 셋째를 낳을 때부터 몇 십만 원을 준다고 하지만, 이런 돈보다도 ‘제대로 된 아이 키우기 정보와 지식’을 물려받을 수 있도록 틀거리를 마련해야 하지 않나 싶다. 아이를 막 낳을 때를 비롯해서 아이를 낳고 집에서 고이고이 기르는 동안 어떻게 하면 좋을지, 아이가 자라는 달수와 날수에 맞추어 아이 몸을 어떻게 느끼고 받아들이면 좋을지를 찬찬히 보여주고 알려주는 ‘진짜 산모수첩’을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 아기 몸씻이를 하다. 옆지기가 조금 힘들어 해서 혼자 씻기다. 내가 아기 한쪽 손을 놓쳐서 떨어뜨리지 않았으나, 아기가 한손으로 물을 튀긴다. 처음에는 그저 아기 한쪽 손이 떨어진 줄 알았으나, 아기 스스로 살짝 웃음기 띤 얼굴로 한손을 들었다 내렸다 하면서 철푸덕철푸덕 한다. 세 번 하고 그만둔다. 목을 가누려면 한참 멀었을 테지만, 지난주 무렵부터는 고개를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고 한다. 몸씻이를 할 때에도 지난주까지만 해도 목 뒤틀리지 않게 붙잡느라 힘겨웠는데, 쉰 날 무렵부터는 걱정이 한결 덜다. 그래도 다치지 않게 잘 붙잡고 지켜보아야지.
이제는 목이 조금씩 보이는 듯해서 접힌 목 안쪽에 때 많이 끼고 벌겋게 붓는 일도 줄어든다. 처음 씻길 때에는 목살 접힌 안쪽까지 씻을 생각을 못했다. 접힌 다리살과 팔살도 마찬가지. 장모님이 아기 씻기는 모습을 꼼꼼히 들여다보고 나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몸씻이를 하면 무척 좋아한다는 느낌이다. 마음 같아서는 하루에 두 번이나 세 번도 씻겨 주면서 지가 좋아하는 물놀이를 시켜 주고 싶지만, 엄마나 아빠나 너무 고단해서 한 번도 겨우 씻긴다.
날마다 안 씻겨도 된다고 하는 말이 들려오지만, 아기 목이 벌겋게 되기도 하는 한편, 아빠를 닮아서인지 더위를 퍽 타는 듯하다. 더욱이 예방주사 부작용 황달이생겼기 때문에 냉온욕을 꼬박꼬박 해 주어야 하는 터. 씻길 때 보면, 거의 누워만 있던 아기임에도 배냇저고리가 살짝 꼬질꼬질하다는 느낌. 아마 아기가 흘린 땀 때문일 테지. 다른 집 아기 키우는 모습과 견주면 우리 아기는 거의 풀어놓고 키우는 셈이지만, 그래도 더위를 타는 듯. 그렇다고 저녁 온도가 19도쯤까지 내려가는데 마냥 풀어놓을 수 없다.
생각해 보면, 나나 우리 옆지기도 어릴 적에 우리들 어머니 손으로 몸씻이를 하지 않았겠는가. 옆지기 어머님은 막내아이가 하도 더워 해서 하루에 아홉 번을 씻기기도 했단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 우리가 하루에 한두 번 겨우 씻기는 일도 아기한테는 모자란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쉰이레) 젖을 먹지도 자지도 않고 울기만 하면
- 밤 앙탈이 갈수록 커진다. 쉰 날을 접어들면서 몸이 많이 나아진 옆지기가 부엌일을 거들며 나를 쉬게 하고 밥을 하거나 먹을거리를 장만하는 동안, 또 내가 너무 지쳐 있으니 내가 쓰러져 잠든 동안 빨래를 하는 사이, 아기가 앙탈 부리듯 운다. 처음 세이레까지, 우리 아이는 거의 울지도 않았을 뿐더러, 쉬를 보고도 또 뭐가 있어도 가만히 기다리기만 했다. 지금도 쉬를 하건 똥을 누건 가만히 있는다. 오히려 한창 찡얼거리다가 뚝 끊은 다음 뭔가 멋쩍다는 얼굴로 ‘끄응’ 하면서 가만히 있으면 똥을 누었다는 뜻.
밤에 앙탈을 부리니 서둘러 잠자리에 들고 새벽녘에 깨어나 기저귀 갈고 젖을 먹여야 하는 우리들로서는 몹시 괴롭다. 나만 먼저 자기도 그렇고, 옆지기는 더더구나 잘 수 없다. 우리는 우리 어머니들한테 아직 듣지 못했는데, 우리 아기였을 때에도 이렇게 어머니들을 괴롭혔을까. 궁금하다. 듣고 싶다.
깊어가는 밤, 힘들어서 자리에 누운 옆지기가 “젖을 먹지도 자지도 않고 울기만 하면 어쩌니, 사름아.” 하면서 아기를 달랜다. 왜 그럴까. 우리 두 사람은 아기말을 알아들을 수 없으니 어찌하겠는가. 안고 어르고 달래고 젖을 물리고 효소물을 먹이고 하면서 가까스로 재우며 한숨을 돌린다. 그러나 이렇게 재우고 나면 이 녀석은 슬그머니 또 눈을 뜬다. 꼭 우리를 갖고 노는 듯하다. 자기를 재우고 밀린 일을 하고, 느긋하게 두 사람이 밥상을 마주하고 싶어도 안 된다. 녀석은 꼭 자기가 우리 곁에 있어야 한단다. 옆에 눕히면 울지 않고 가만히 있지만, 모기장 안에 뉘여 놓으면 울어댄다.
- 8월 14일 밤, 첫 배앓이가 있고, 그 이튿날 8월 15일부터 도서관 문을 닫고 있었다. 열 수 없었지. 그리고 10월 11일, 거의 두 달 만에 도서관 문을 다시 열다. 도서관 나들문에 “아기 돌보기와 옆지기 몸풀이 때문에 9월 끝무렵까지 쉬어야겠습니다” 하고 적어 놓기는 했으나, 막상 닥치고 치러 보니까 9월 끝무렵은 뭐, 말도 안 되는 소리이고, 시월도 거의 가운데무렵이 다 되어서야 잠깐 문을 열게 되었다. 그러나 문만 열고 청소만 신나게 했지, 자리를 지킬 수 없다.
손님이 들어와서 책을 보고 있으면, 그 손님한테 마음속으로 ‘도서관 지켜 주셔요’ 하고는 사진기며 노트북이며 그대로 도서관에 있는 채로 살림집으로 후다닥 뛰어올라간다. 아기 달래고 기저귀 빨고 널고 걷어서 개고. 한숨을 돌리며 아기를 안고 내려와서 옆지기를 좀 쉬게 하면서 도서관에 내려와 있자니(이동안 옆지기는 쉬지 않고, 아기 목에 발라 줄 녹즙을 만들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녀석은 ‘뿌지직’. 헉. 똥이냐?
이마에 맺힌 땀이 채 식지 않았으나 부랴부랴 살림집으로 달려 올라간다. 방수천을 깔고 주전자에 물을 끓인다. 기저귀를 벗겨서 뒷똥 나올 때까지 2분쯤 기다린다. 오줌을 눈다. 똥 누고 나서 오줌 누면 더 똥을 안 누겠다는 뜻. 물 온도를 알맞게 맞춘다. 흔히들 비싼 온도계(삼만 얼마짜리) 사서 재곤 하는데, 나는 그냥 손을 담그면서 내 몸으로 느낀다. 이만한 온도가 아이한테 맞는지 안 맞는지를 느낀다. 온도계로 온도를 꼼꼼히 맞추어도 좋을 테지만, 아빠나 엄마 스스로 팔꿈치를 대어 본다든지 얼굴을 대어 본다든지 하면서 온도를 느껴도 되고, 처음부터 자기 손으로 아기 씻기기에 알맞는 온도를 손으로 알아채도록 훈련을 하면 더 좋으리라 본다. 몇 번 훈련하면 어렵지 않게 물 온도 맞출 수 있다.
엉덩이와 발에 묻은 노란 똥은 손에 물을 묻혀서 닦는다. 밑은 손수건을 물에 담가서 닦는다. 엉덩이와 잠지를 물에 폭신 담그고 슬슬 닦기도 한다. 똥을 왕창 누어 주었기에 비누도 발라 준다. 다 씻고 기저귀 천으로 닦아 준다.
빨래하고 씻기고 뭐 하고 한참 만에 도서관에 내려온다. 손님은 말없이 책을 읽어 준다. 고맙다.
- 오늘 저녁은 옆지기가 몸에서 밥을 잘 받는다고 해서 여러 가지를 차린다. 어제 가톨릭우리농매장에 가서 장만한 오얏과 푸성귀 몇 가지를 씻어서 날것으로 올리고, 말린묵과 버섯과 마른오징어와 양파와 감자 하나 썰어 넣고 밀싹국수를 끓인다. 나는 감자를 갈고 옆지기는 감자지짐이를 한다. 오붓하게 먹으려고 하는 때, 아기님은 어김없이 울어 주신다. 옆지기는 밥 먹으랴 아기 젖 물리랴 바쁘다. 이럴 때면, 남자로 아이 키우는 일이란 너무 쉽고 미안하다는 느낌뿐.
배앓이도 안 하지, 몸도 안 무겁지, 입덧도 없지, 온몸이 부서지라 아기를 낳지도 않지, 아기 낳고 후들거림도 없지, 아기 낳고 나서 한 달 남짓 피내림도 없지, 물건 하나 들 수 없을 만큼 온몸에 힘빠질 일도 없지, 젖몸살도 없지, 젖 물 때 아플 일도 없지, 젖이 불어서 아프지도 않는 데다가, 젖을 짤 일도 없고, 아기가 마냥 젖을 물고 있어서 지쳐 늘어질 까닭도 없다.
아기 아빠 된 사람으로서, 이 모든 고마움을 느끼고, 이 모든 고마움을 자기 옆지기를 돌보고 아기를 좀더 돌보는 데에 바쳐야 하지 않느냐 싶다. 그동안 집안일을 많이 했던 아기 아빠라면, 좀 힘들지 모르나 지난날보다 조금 더 힘을 쏟아 주고, 여태껏 집안일에는 담을 쌓고 있던 아기 아빠라면, 이제부터라도 집안일에 소매 걷어붙이고 나서야지 싶다.
으레, 회사 나가서 돈벌어야 하니 고단하고 힘들어서 집안일을 어찌하느냐고, 아기를 어찌 어르느냐고 하지만, 아기 어머니들이 산전휴가와 산후휴가를 내듯, 아기 아버지들도 마땅히 산전산후 휴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야기를 들어 보면, 대기업 일꾼이나 공무원이 아닌 바에야 산전산후 휴가는 꿈도 꿀 수 없다고 하는데, 산전산후 휴가를 꿈도 꿀 수 없이 만드는 일터라 하면, 마땅히 노동조합을 꾸려서 아기 아버지와 아기 어머니가 누려야 할 권리를 받아야 한다. 그래서 노동조합이 있지 않는가. 그러니까 노동조합에 가입을 하고 힘을 보태지 않는가. 그리하여 사회운동이 있다. 그래서 정치운동을 하고 교육운동을 하고 문화운동을 하면서 우리 삶터와 사회를 바꾸자고 한다.
아기를 낳은 어머니가 백일도 되지 않은 아기를 집에 놓고서 회사에 나가서 돈을 벌도록 하는 나라라면 이 나라에 무슨 복지가 있고 교육이 있다고 하겠는가. 백일이 안 된 아기를 돌보기보다 분유값이든 기저귀값이든 벌어야 한다며 어머니도 돈 벌러 가고 아버지도 돈 벌러 나가게만 하는 나라요 회사라면, 노동자 복지와 권리는 무슨 꿈나라 이야기며, 세계 일류 국가라든지 국민소득 이만 달러라고 하는 이야기는 웬 귀신 봉창 두들기는 소리인가. 아기가 아기답게 어머니 사랑과 아버지 사랑을 골고루 듬뿍 받으면서 자랄 수 없다면, 이 나라 앞날이 어찌 되겠는가.
그러나 나는 이 나라 앞날까지는 걱정하고 싶지 않다. 아니, 이 나라 앞날까지 생각할 겨를이 없다. 아기 기저귀를 빨고 널고 개고 갈고 하는 데에만도 하루해가 짧다. 밥하고 반찬 해서 옆지기를 먹이고 나도 먹는 데에만 해도 눈썹이 휘날리도록 뛰어다녀야 한다. 내 코가 석 자라서, 나라 걱정은 나라일 맡은 정치꾼 님들께서 하시라고 믿고, 나는 내가 선 이 자리에서, 이 동네에서, 아기 울음소리가 끊기는 옛 도심지 골목집에서, 우리 식구 깜냥껏 이 보금자리를 지키고 싶다.
- 옆지기가 말한다. 우리 집은 다른 건 다 나빠도, 옥상 넓게 쓰면서 빨래를 햇볕에 보송보송 말릴 수 있어서 참 좋다고. 다른 어느 집에 가더라도 이렇게 해바라기 잘할 수 있는 집은 없다고. 참말 나도 빨래를 마치고 왼 팔뚝에 걸친 다음 하나하나 옥상 빨래줄에 걸 때 얼마나 개운하고 시원한지. 집 건너편으로 쉴새없이 지나다니는 전철을 보면서 손을 흔들어 주고도 싶다. 막힌 울타리 때문에 전철에서는 우리 집에서 손 흔드는 모습은 못 볼 테지만.
옆지기가 또 말한다. “당신, 앞으로 또 무슨 책 쓸 거 있어요?” “아이 키우는 이야기도 쓰고.” “그건 나중에 가서 해도 되고.” “왜?” “아니, 그림책이나 요새 나오는 책들을 보면 다 자료 가지고서 다시 만드는 책이라서 너무 재미가 없어. 그냥 장난 같아.”
아이 키우는 이야기를 책으로 써야겠다는 생각은 따로 하지 않았다. 그러나 요새 들어서 이 생각을 자꾸 하게 된다. 아이 키우는 이야기를 찬찬히 다루어 주는 책이 없다고 느껴서이다. 나라안 사람들이 쓴 책도, 나라밖 사람이 쓴 책을 옮겨 놓은 책도 너무 없다. 아기를 낳기 앞서 얼마나 어떻게 몸과 마음을 갖추어 놓고, 아기를 낳을 때 어떻게 하며, 아기를 낳고 나서 어떻게 지내는가를 아이 엄마와 아기 아빠 눈높이와 눈길에 따라서 엮어 내려간 책을 찾아보기란 참 힘들다. 생생한 목소리가 없다. 눈물콧물 나는 힘겨움과 고단함을 그려낸 발자국이 없다. 무엇보다도, 아이 키우기를 거의 애 엄마 몫으로만 돌리는 사회 흐름을 거스를 만한 책, 아이 키우는 아빠가 되어 가는 삶을 담는 책이 없다. 육아책은 넘치지만 육아책이라 알뜰히 이름붙여 줄 육아책은 찾아보기 힘들다고 할까.
지난 쉰 날까지는 생각만 했지, 수첩에 이런저런 생각과 이야기를 적을 조각 틈마저 없었다. 옆지기가 조금씩 몸이 나아지고 아기 칭얼거림에 어떻게 맞이해야 하는가를 비로소 몸으로 느낀 이즈음, 조금 숨을 돌리면서 책상 앞에 앉아서 몇 글자 끄적이게 된다. 돌이켜보면 쉰 날까지는 거의 똑같은 하루하루였다. 거의 똑같이 정신없고 바빠맞은 하루하루였다. 날마다 조금씩 바뀌기는 하는데, 이 쉰 날을 고비로 제법 크게 달라지는 모습이 있다고 느낀다. 오늘부터 하루하루 이야기를 적어 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