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2002년 1월 첫째 주 토요일치 <한겨레신문>에 실은 글입니다. 그무렵 실은 글에서 몇 군데를 손질해서 이곳에 걸쳐 놓습니다. '함께살기'라는 이름을 얻은 까닭을 밝힌 글입니다. 제 알라딘서재 이름은 '함께살기' 아닌 '된장'인데, 다른 곳에 글을 쓸 때에는 어디에서나 '함께살기'라는 이름을 씁니다. 알라딘서재에서는 무언가 다른 이름을 쓰고 싶었기에 '된장'이라는 이름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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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박이말을 잘 써 보자
 (21) 함께살기


  한 해 마지막날은 섣달그믐입니다. 그러면 한 해 첫날은? 집집마다 새로 걸 달력엔 1월 1일을 으레 ‘신정’이라고 적어요. ‘happy new year’나 ‘謹賀新年’을 찾는 한국땅에서 새해 첫날을 ‘새해 첫날’답게 맞이하기 퍽 힘듭니다. 참말, 새해에 처음 맞이하는 날이니 ‘새해 첫날’이라고 달력에 적을 만하지만, 이와 같이 달력에 적바림하는 곳은 아주 드뭅니다.


  한때는 ‘신정-구정’이라 했고 ‘민속의 날’이라는 어줍잖은 말까지 썼지요. 우리는 ‘설날’을 지켜고 즐기며 ‘설빔’을 입는데. ‘설날’이란 이름을 되찾기마저 무척 힘들었습니다. 독재정권이 명절 이름을 엉터리로 뒤바꾸었다 하더라도 사람들 스스로 명절뿐 아니라 제 넋을 고이 건사한다면 ‘설’도 ‘날’도 잊거나 잃을 까닭이 없습니다. 내 마음을 내가 지킬 때에는 이 나라 달력에 12월 31일을 ‘섣달그믐’으로 적을 수 있고, 1월 1일은 ‘새해 첫날’로 적을 수 있어요.


  새해 첫날입니다. 새해를 맞이하는 첫날 예부터 주고받던 좋은 말(덕담)을 떠올리며 ‘함께살기’라는 낱말 한 마디를 건네렵니다. “함께 살아가는 길, 더불어 살아가는 꿈, 서로 아름답게 어울리는 사랑, 부대끼고 껴안고 부둥켜안으며 따뜻하게 살아가는 빛”, 이 모두를 한 마디로 갈무리해서 ‘함께살기’라는 낱말에 담아 봅니다.


  낱말책을 뒤적여 보면 ‘공동체(共同體)’라는 낱말이 있어요. 가만가만 살펴봅니다. ‘공동체’란 한자말 뜻을 풀어 한겨레 낱말로 담아낼 때에도 “함께 살아가기”요, 곧 ‘함께살기’가 돼요. 그래서 이웃과도 동무와도 어른아이 가르지 않고 모두 ‘함께살기’를 하면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여당과 야당도 ‘함께살기’를 하고, 남북녘도 ‘함께살기’를 하며, 〈한겨레〉와 〈조선일보〉도 ‘함께살기’를 하다가는,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도 ‘함께살기’를 하는 한편, 돈 많은 이와 가난한 이도 ‘함께살기’를 하고요, 기업주와 노동자도 ‘함께살기’를 하고, 도시와 시골도 ‘함께살기’를 하면 좋겠습니다.


  대통령도 이 나라 여느 사람들과 ‘함께살기’를 하며, 세계축구대회를 함께 치르는 한국과 일본도 ‘함께살기’를 하며, 다툼이 아닌 나눔과 사랑과 평화로 서로를 다독이면 더없이 반갑겠습니다.


  싸우고 죽이고 다투는 데 들이는 돈이 너무 많아요. 새해 나라살림 돈에서도 문화를 살리거나 사회를 살리는 돈보다 무기를 사고 군대를 거느리는 돈이 가장 큽니다. 이런 돈 한 푼 두 푼을 애먼 전쟁무기로 바꾸지 말고, 내 나라 말글을 살리고 내 겨레 삶을 살리며 내 마을 보금자리 북돋우는 데에 쓰며 ‘함께살기’를 할 수 있는 새해를 함께 꿈꿀 수 있으면 기쁘겠습니다. 내 삶을 가꾸며 내 말을 함께 가꾸면 참으로 아름답겠습니다. (4334.12.24.달./4345.6.4.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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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서재에 '우리 말 이야기'를 같이 띄운 지 얼마 안 되어, 아직 이 글은 걸치지 않았더군요. 그러께에 썼던 글입니다. 제 서재에 꾸준히 찾아오시는 분이야, 제가 글 끝에 붙이는 'ㅎㄲㅅㄱ'가 무슨 뜻인 줄 다 아실 테지만, 어쩌다 한 번 들르거나, 이제 처음으로 들르는 분들은 뭔 소리인가 여길 테니 이렇게 글을 붙입니다. [사진책 도서관 편지] 게시판 글을 읽으면, '함께살기(ㅎㄲㅅㄱ)'라는 이름을 볼 수 있으니, 제가 이런 글을 띄우지 않아도 다 알 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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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살아가는 말 1] 함께살기

 

  1994년부터 ‘함께살기’라는 이름을 씁니다. 줄여서 ‘ㅎㄲㅅㄱ’처럼 적곤 합니다. 어제 은행에 가서 통장갈이를 했더니 은행 일꾼은 ‘ㅎㄲㅅㄱ’가 아닌 ‘해서’로 읽더군요. 어떻게 이리 읽을 수 있나 싶은 한편, 사람들이 당신 이름을 적바림하는 자리에 으레 알파벳을 쓸 뿐 한글로 쓰는 일이 드무니 어쩔 수 없구나 싶었습니다. 한글 닿소리로 내 이름을 적바림하는 사람은 아직 몇몇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저는 용케 한글 닿소리 이름을 적바림하고 한글로 내놓는 글이름 하나 마련했습니다. 어릴 적 이웃집에 사는 형이 저한테 옷 하나 선물해 주었는데, 당신이 다니던 서울산업대학교에서 후배들이 만들어 준 옷 앞자락에 “함께 사는 길”이라는 글월이 적혔어요. 이 글월이 참 마음에 들었습니다. 저는 이 글월을 줄여 ‘함께살기’란 이름을 내 깜냥껏 지었고, 어느덧 스무 해 가까이 이 이름을 즐겨씁니다. 제가 “함께 사는 길”을 슬기로우며 알차게 이루어 내기에 이 이름을 쓰지는 않습니다. 이모저모 부딪히고 배우면서 차근차근 이루고픈 꿈이기 때문에 이 이름을 좋아하고 아낍니다. (2010.5.8.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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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2-06-05 01:55   좋아요 0 | URL
ㅎㄲㅅㄱ라 마치 히브리어를 보는 듯한 느낌이네요.히브리어는 자음만의 글이라고 하는데 그러다보니 고대 성경같은 경우 해석에 상당한 논란이 있다고 하네요^^

숲노래 2012-06-05 08:29   좋아요 0 | URL
저는 한글만 알고 히브리 글자를 몰라서 잘 모르겠습니다..

책읽는나무 2012-06-05 07:23   좋아요 0 | URL
함께살기...부끄럽지만 저도 이제 알았네요.^^
매번 보면서 무슨뜻이었을까? 궁금했었습니다.
여쭤보리라 생각했다가 또 까먹고,
지난번 아이들의 이름도 물어보고 까먹다 한참만에 사전을 찾았어요.ㅋ

숲노래 2012-06-05 08:29   좋아요 0 | URL
이런 거를 늦게 알아챘다고 부끄러울 일이 없어요.
그저 그런 이름일 뿐이에요.
 

[함께 살아가는 말 96] 꽃읽기

 

  꽃에 둘러싸여 살아가기에 꽃을 읽습니다. 풀에 둘러싸여 살아가자면 풀을 읽습니다. 멧자락 차곡차곡 이어진 멧골에서 살아가면 멧등성이를 읽습니다. 도시에서 살아가면 도시를 읽고, 시골에서 살아가면 시골을 읽어요. 누군가는 신문을 읽겠지요. 누군가는 책을 읽겠지요. 누군가는 지식을 읽고, 누군가는 정보를 읽어요. 누군가는 마음 고운 사람을 읽고픈 꿈을 키울 테고, 누군가는 생각 깊은 슬기를 읽고픈 꿈을 키울 테지요. 사람들이 서로서로 사람을 읽습니다. 내 삶을 일구고, 옆지기랑 살림을 보듬으며 삶을 읽습니다. 글을 읽고 노래를 읽으며 사진을 읽습니다. 그림을 읽고 만화를 읽으며 영화를 읽습니다. 뜨개질을 읽고 빨래를 읽습니다. 걸레질을 읽고 설거지를 읽습니다. 흙을 읽고 나무를 읽습니다. 재벌총수를 읽고 공무원을 읽습니다. 누군가는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을 읽겠지요. 누군가는 가랑잎을 읽거나 감잎을 읽겠지요. 저마다 가장 좋아해서 스스로 누리는 삶자락을 읽는다고 느낍니다. 이런 신문을 읽든 저런 신문을 읽든, 이런 책을 읽든 저런 책을 읽든, 어떠한 읽기이든 곧 이녁 삶이에요. 그래서 나는 내 삶을 사랑으로 북돋울 가장 좋은 벗님이 무엇일까 하고 헤아린 끝에 꽃읽기를 하자고 다짐합니다. 나무읽기를 하고, 풀읽기를 하는 한편, 해맑은 아이들을 읽고 옆지기를 읽자고 새삼스레 다짐합니다. (4345.5.31.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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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살아가는 말 95] 은지은지

 

  생각을 스스로 가둔 사람은 말 또한 스스로 가둡니다. 말을 스스로 가두는 사람은 사랑 또한 스스로 가둡니다. 사랑을 스스로 가두는 사람은 삶을 스스로 가두어요. 삶을 스스로 가두기에 이웃이나 동무나 살붙이를 아름다이 어깨동무하지 않고, 자꾸 어떤 굴레를 씌워 가두려 합니다. 내가 알맞으며 바르고 아름다이 말을 하거나 글을 쓰자면, 나부터 즐겁게 생각을 열어야 합니다. 생각을 열면서 사랑을 열어야 합니다. 사랑을 열며 삶을 열어야 하고, 삶을 여는 동안 내 좋은 둘레 사람들 꿈길을 나란히 열어야 해요. 국어사전을 통째로 외운대서 말을 슬기롭게 빚지 못해요. 대학교나 대학원을 다닌대서 한국말을 알차게 빛내지 못해요. 똑똑하다는 사람이 말을 똑똑하게 쓰지는 못해요. 사랑스레 마음을 열면서 생각을 돌보는 사람일 때에 비로소 말을 슬기롭게 가다듬으면서 어여삐 일구는구나 싶어요. 그래, 나는 어릴 적부터 좋은 삶과 꿈과 넋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한 나머지 너무 많은 이야기를 지식으로 받아들였어요. 개구리하고 함께 지내며 노랫소리 듣지 못했고, 제비랑 한 지붕에서 살아가며 노랫소리 듣지 못했어요. 언제나 교과서에 적힌 울음소리 틀에 따라 참새는 ‘짹짹’ 병아리는 ‘삐약삐약’이라고 여겼어요. 아이들 낳고 삶터를 시골로 옮기며 개구리랑 제비랑 참새랑 냇물이랑 함께 살아가며 비로소 소리를 듣고 노래를 느끼며 사랑을 깨닫습니다. 우리 집 첫째 아이가 어느 멧새 노랫소리를 듣다가, “저 새는 은지은지 하고 우네.” 하고 읊는 얘기를 들으며 빙긋 웃습니다. (4345.5.31.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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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살아가는 말 94] 그림자빛

 

  나는 사진을 찍기 때문에 사진을 생각합니다. 사진을 찍으면서 주고받는 말을 곰곰이 헤아립니다. 나는 사진을 사랑스레 찍고 싶기 때문에 사랑스레 찍을 사진을 생각합니다. 사진을 사랑스레 찍을 때에 서로서로 사랑스레 주고받고 싶은 말을 하나하나 헤아립니다. 그래서, 나로서는 ‘카메라’나 ‘촬영’ 같은 말이 달갑지 않습니다. 나로서는 그저 ‘사진기’로 ‘찍을’ 뿐입니다. 나는 ‘사진 찍는 사람’이나 ‘사진쟁이’일 뿐, ‘사진작가’나 ‘포토그래퍼’가 아닙니다. 나는 ‘사진말’을 붙이지 ‘캡션’을 붙이지 않아요. 다른 분들은 ‘플래쉬’를 터뜨린다 하지만, 나는 굳이 ‘불’을 터뜨리며 찍지 않습니다. 나는 사진기를 손에 ‘쥘’ 뿐, ‘그립’을 쓰지 않습니다. 때때로 ‘세발이’를 쓰지만, ‘트라이포트’나 ‘삼각대’를 쓰는 일은 없어요. 무엇보다, 내 눈으로는 온누리가 ‘무지개 빛깔’ 아름다운 모습이로구나 싶어 ‘무지개사진’을 찍습니다. 꼭 ‘칼라사진’을 찍어야 한다고 느끼지 않아요. 빨강이라 하더라도 모두 같은 빨강이 아니듯, 까망이나 하양도 늘 같은 까망이나 하양이 아니에요. 그래서 ‘까망하양’으로 이루어졌다 하는 ‘흑백사진’을 찍는 자리에서도, 여러모로 헤아린 끝에, 빨강도 푸름도 파랑도 노랑도 ‘까망하양’ 결로 다 달리 녹여내어 품는 ‘그림자사진’으로 찍는다고 이야기합니다. (4345.5.29.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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