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살아가는 말 130] 달모임

 


  반가운 사람은 날마다 만나도 반갑습니다. 즐거운 사람은 날마다 만나도 즐겁습니다. 아니, 어여쁜 사람은 날마다 만나며 어여쁘고, 아름다운 사람은 날마다 만나면서 새롭게 아름다움을 느낍니다. 좋다 여기는 사람이라면 날마다 만날 적에 좋구나 하는 느낌이 새삼스레 일어나겠지요. 서로서로 만납니다. 어깨동무하듯 사귑니다. 오순도순 이야기꽃을 피웁니다. 그런데, 저마다 여러 가지 일이 바쁘거나, 삶자리가 조금 멀리 떨어졌다면, 날마다 보고 싶어도 날마다 못 볼 수 있어요. 이레에 한 차례 만난다든지, 보름에 한 차례 만난다든지, 한 달에 한 차례 만날 수 있습니다. 날마다 만나면 ‘날마다모임’이 될 수 있고, ‘날모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레마다 만나면 ‘이레모임’이 되겠지요. 보름마다 만나면 ‘보름모임’이요, 달마다 만나면 ‘달모임’입니다. 한 해에 한 차례 만나는 ‘해모임’도 있으리라 생각해요. 반가운 이라면 날마다 보든 달마다 보든 해마다 보든, 때로는 열 해나 스무 해만에 보든, 환한 웃음 북돋우며 밤늦도록 이야기잔치 벌입니다. 4346.2.24.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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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살아가는 말 129] 풀지기

 


  山野草, 野生草, 山草, 野草는 모두 중국말이거나 일본말입니다. 한국말이 아니요, 한국말일 수 없습니다. 다만, 이 낱말은 몽땅 한말사전에 실려요. 그러면, 한국말은 무엇일까요? , 한국말은 입니다. 이래도 풀이고 저래도 풀입니다. 굳이 가르자면, ‘들풀이고 멧풀입니다. ‘들멧풀이나 메들풀처럼 써도 되겠지요. 그러나, 예부터 한겨레는 그저 이라 했어요. 들에서 나든 멧골에서 나든 풀은 입니다. 풀 스스로 씨앗을 퍼뜨려 자라는데 사람이 먹는 풀은 나물이라고 다른 이름을 붙여요. 풀 가운데 사람이 씨앗을 받아 밭에 따로 심으면 남새라고 새 이름을 붙여요. 나물과 남새를 아울러 푸성귀라고 하지요. 간추리자면, 사람이 심든 들과 멧골에서 얻든, 사람이 먹는 풀은 푸성귀인 셈입니다. 옛날사람은 누구나 시골사람이었고 흙사람이자 들사람이었어요. 옛날 옛적에는 누구나 땅을 손수 일구고 갈아서 먹을거리를 얻었어요. 그러니, 누구나 흙에서 일하기에 흙사람이고, 누구나 들에서 일하기에 들사람입니다. 누구나 흙을 만지는 삶터를 누리니 시골사람이고요. , 풀씨를 받아 풀을 먹던 옛사람입니다. 풀을 즐기고 누리며 먹으니, ‘풀먹기남새먹기라 할 테고, 옛사람은 누구나 풀을 잘 알고 건사하며 지켰기에 풀지기남새지기라 할 만합니다. 요즈음은 야생초 전문가라느니 산야초 전문가라고들 하지만, 옛사람은 풀지기에 남새지기에 흙지기에 시골지기에 삶지기였습니다. 4346.2.22.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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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살아가는 말 128] 치마저고리

 


  여섯 살이 된 큰아이가 음성 할머니한테서 설빔 한 벌 얻습니다. 치마저고리입니다. 치마가 있고 저고리 있어 치마저고리입니다. 세 살 된 작은아이는 바지저고리 한 벌 있으며, 아직 넉넉히 입을 만합니다. 세 살 작은아이도 누나처럼 무럭무럭 자라서 몸이 크고 키가 크면, 할머니한테서 설빔 새로 얻을 수 있을 테지요. 먼먼 옛날부터 가시내는 치마랑 저고리를 입고, 아득한 옛날부터 사내는 바지랑 저고리를 입습니다. 우리 겨레는 언제부터 치마하고 바지를 나누어 입었을까요. 가시내는 치마를 입는다지만, 겨울날 추위에는 솜바지를 사내랑 나란히 입었겠지요. 고운 빛깔 눈부신 치마와 저고리를 입는 아이가 환하게 웃습니다. 어여쁜 무늬 아리따운 바지와 저고리를 입는 아이가 맑게 뛰놉니다. 아이도 어른도 정갈한 마음에 정갈한 옷을 갖추고, 따스한 사랑에 따스한 삶을 꾸립니다. 4346.2.16.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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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살아가는 말 127] 짐시렁

 


  순천 기차역에서 기차표 한 장 끊습니다. 기차에 올라탄 다음 내 커다란 짐을 시렁에 올려놓습니다. 시렁이 조금 더 넓으면 좋을 텐데, 하고 생각합니다. 떨어지지는 않겠지요. 책 몇 권과 물과 먹을거리 담은 작은 가방은 발밑에 둡니다. 기차가 슬슬 움직이고, 안내방송이 흐릅니다. “선반에 올려놓은 물건은 ……” 자리에 앉아 책을 펼치려다가 문득 생각합니다. 그래, 모두들 ‘선반(懸盤)’이라고만 말하는구나. 하기는, 버스에서든 기차에서든 비행기에서든 배에서든 모두 ‘물건(物件)’이나 ‘화물(貨物)’이라고만 말하지, ‘짐’이라 말하지 않습니다. ‘짐칸’이라 하는 사람보다 ‘화물칸’이라 말하는 사람이 많고, ‘짐차’라 하는 사람보다 ‘화물차’라 말하는 사람이 많으며, 그냥 ‘트럭(truck)’이라고까지 하지요. 짐을 올려서 ‘짐시렁’일 텐데, 이런 낱말을 쓸 사람이 있을까 궁금합니다. 다만, 책을 얹는 ‘책시렁’ 같은 낱말은 더러 쓰는구나 싶어요. ‘옷시렁’이나 ‘이불시렁’이나 ‘그릇시렁’ 같은 낱말 쓸 사람이 있을까 모르겠어요. 부엌에서 그릇 물기 빼려고 놓는 것은 ‘살강’인데, 도시에서나 시골에서나 으레 ‘식기건조대(食器乾燥臺)’ 같은 메마른 낱말만 씁니다. 4346.2.1.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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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살아가는 말 126] 맑은빛

 


  조잘조잘 말놀이 즐기는 여섯 살 큰아이가 자꾸자꾸 묻습니다. “아버지 이거 뭐야?” “그래, 그것은 무얼까?” 여섯 살 큰아이는 눈에 보이는 대로 이름을 묻습니다. 두런두런 이름을 알려주다가 “그래, 그것은 무엇처럼 보이니? 스스로 이름을 붙여 봐. 느끼는 대로 이름을 붙이면 돼.” 하고 말합니다. 알록달록한 무언가 있으면 큰아이는 또 묻습니다. “아버지 이거 무슨 빛깔이야?” 빛깔이름 하나씩 말하다가는 “무슨 빛깔로 보여?”라든지 “무슨 빛깔이라 하면 좋을까?” 하고 되묻습니다. 아이랑 이러쿵저러쿵 말놀이를 하다가, 엊저녁 새삼스러운 ‘빛깔 묻기’를 할 적, 속이 환히 비치는 작은 핀 같은 못을 가리키며 또 “무슨 빛깔이야?” 하기에, “음, 이것은 속이 맑게 비치네. 맑은빛이로구나.” 하고 말합니다. 속으로는 ‘투명(透明)’이라는 한자말을 떠올리는데, ‘어라, 사람들도 나도 으레 ‘투명’이라 말하곤 하는데, 가만 보니 한국말로는 ‘맑은빛’이네.’ 싶습니다. 때로는 ‘물빛’이라는 낱말로 속이 비치는 느낌을 나타내곤 합니다. 물빛은 물빛대로 좋고, 맑은빛은 맑은빛대로 좋다고 느낍니다. 빨간빛이나 파란빛이라고도 말하듯, 맑은빛이라고 새로 짓는 빛깔이름 하나 곱다고 느낍니다. 어느 때에는 ‘밝은빛’을 말할 수 있겠지요. ‘고운빛’이나 ‘기쁜빛’이나 ‘웃음빛’이나 ‘눈물빛’을 노래할 수 있겠지요. 4346.1.20.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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