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이 아닌 삶으로 읽을 책과 말
― 정재도, 《국어의 갈 길》


- 책이름 : 국어의 갈 길
- 글 : 정재도
- 펴낸곳 : 문헌각 (1962.7.15.)


 오늘날 우리들 주고받는 말과 글은 퍽 엉터리라 할 만합니다. 저부터 아직 엉터리에서 오락가락하는 말을 한다고 느낍니다. 여태껏 꽤 많이 배우며 받아들였으나, 앞으로 새롭게 익히며 살필 대목이 몹시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날마다 쓰는 말과 글인데 이러한 말과 글을 옳고 바르게 보여주거나 이끌거나 가르치는 어른을 둘레에서 만나기 어렵습니다. 예전에는 어른들이 ‘여보게 젊은이, 그런 말은 옳지 않아.’ 하면서 짚어 주었는데, 이제는 이렇게 말씀씀이나 말매무새를 짚는 어른을 만나지 못합니다. 아니, 어른들부터 옳고 바른 말이 무엇인지를 잘 모르니까 서로서로 엉터리로 말하고 글을 읽는지 모릅니다.

 어쩌면 내 나이는 젊은이를 지나 늙은이하고 가깝다 할 만하기에 이제 나한테 내 말씀씀이나 말매무새를 짚어 줄 만한 어른이 없다 할는지 모릅니다. 이제는 내가 젊은이나 어린이나 푸름이한테 옳고 바르게 가눌 말을 이야기해야 한달 수 있습니다.

 그런데, 때때로 몇 가지 말마디를 짚어 주다 보면, 거의 모든 사람들은 발끈해 하거나 못마땅해 합니다. 당신들이 옳게 못 쓰거나 바르게 못 쓰던 말투를 깨닫지 않아요. 받아들이거나 살피거나 알아채거나 하지 않아요. 그동안 얼마나 부끄러이 말하고 글썼는가를 돌이키지 않습니다.

 누군가한테 ‘당신이 바로 이 자리에서 쓴 이 말마디는 올바르지 않아요.’ 하고 말할 때에는 ‘넌 바보요. 넌 똥개야.’ 하는 마음이 아닙니다. 이 말마디 하나를 옳게 아로새기면서 옳은 넋으로 일구어 옳은 삶으로 북돋우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착하고 참다우며 아름다이 생각하고 말하며 살아가기를 비는 마음입니다.

 생각해 보면, 이제는 오늘날 사람들 스스로 착하거나 참답거나 아름다이 살기를 안 바라니까, 말을 이렇게 잘못 쓰든 저렇게 엉터리로 망가뜨리든 아랑곳하지 않는달 수 있습니다. 그리 오래지 않은 지난날까지만 하더라도, 이렇게 쓰던 말투가 알맞지 않다 말해 주면 ‘당신은 이렇게 엉터리로 말을 하니까 입을 다물라’는 뜻이 아니라 ‘당신은 적어도 이런 말투 하나라도 잘 새겨 주소서’ 하는 뜻인 줄을 헤아렸습니다. 이제는 이렇게 헤아리는 사람이 없습니다. 한자말이든 고사성어이든 영어이든 번역투이든, 잘잘못을 낱낱이 짚어 밝히면 ‘마치 이 낱말이나 말투를 안 쓸 때에는 아무런 말을 못하기라도 할 듯’ 여기고 맙니다.


.. 같은 어학자 가운데서도 영어나 프랑스어나 도위치어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남들이 모두 우러러보고 또 자기 자신들도 내로란 듯이 제법 뻐기는 태도를 가지는 대신, 국어를 연구하는 학자들에게는 모두들 대수롭잖게 생각할 뿐더러 어느 의미에 있어서는 거의 업신여겨지다시피 하는 현상인 것을 본다 … 구미 각국의 외국어를 연구하는 이는 마치 외국의 진귀한 상품을 교역하는 무역상과도 같아서 화려할 수밖에 없는 대신, 국어를 연구하는 이는 저 시골에서 논 갈고 밭 갈고 하는 농부와도 같아서 아무래도 고즈넉할 수밖에 없다 ..  (추천글/이은상)


 책이란 삶이라, 내 삶을 송두리째 바치면서 읽습니다. 내 삶을 송두리째 바치면서 읽는 동안 내 삶을 송두리째 아름답게 가다듬습니다.

 말이란 삶이라, 내 삶을 통째로 쏟으면서 주고받습니다. 내 삶을 통째로 쏟는 동안 내 넋이 거듭나고 내 얼이 다시 태어납니다.

 집에서 아이 기저귀를 빨든 집식구 옷가지를 빨든, 손빨래를 하는 동안 우리 살붙이 몸과 마음과 삶을 돌아봅니다. 찬물로 빨래를 하면 손이 얼어붙고 따순물로 빨래를 하면 손이 틉니다. 고무장갑을 껴야 하는구나 생각하다가도 웬만해서는 고무장갑을 안 씁니다. 내 손부터 내 몸으로 오랜 나날 걸쳐 빨래하던 옛사람들 마음이고 싶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새삼스레 다시 겪거나 부대끼면서 내 마음을 다스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자잘하다 싶은 낱말이나 말투 하나를 더 알차고 알뜰히 추스를밖에 없습니다. 나는 내 삶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내 삶을 사랑해서 아주 조그마한 낱말 하나일지라도 사랑하며 보듬고 싶기 때문입니다. 어리석거나 어슬프다고 잘못이 아닙니다. 생각이 없을 때에 잘못이요, 사랑하지 않을 때에 잘못입니다.

 삶을 사랑하는 사람은 제 넋과 말을 골고루 사랑합니다. 삶을 생각하는 사람은 제 얼과 글을 찬찬히 생각합니다.

 이제 이 나라 국어교사조차 말과 글을 사랑하거나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식인은 더더욱 말과 글을 사랑하거나 생각하지 않습니다. 기자이든 정치꾼이든 공무원이든 대학생이든 다르지 않습니다. 지식하고 가장 동떨어졌다 싶은 ‘애 엄마’나 ‘밥하는 아줌마’들이 집에서 아이하고 복닥이면서 누구보다 말과 글을 가장 아끼거나 사랑하거나 생각한다고 느낍니다.


.. 우리 나라에는 ‘비니루 우산(비닐)’, ‘레루식 아궁이(레일)’, ‘비락 우유(빌락)’, ‘서울 빠다(버터)’, ‘피카디리 극장(피커딜리)’ 들이 익어 버린 것처럼 되어 아주 부끄러움도 없이 마구 쓰이고 있다. 모두 일본식 외래어 표기 방법에서 온 것이다 …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 있다. 우리 나라의 멀쩡한 사람들이 어쩐 일인지 우리식 표기는 모르고, 일본식 표기만 좋아하는 사실이다. 그들은 일본의 압제를 받은 것이 뼈에 사무치게 고마와서 그러는 것일까? 그렇다면, 30여 년이나 일본의 법률에 익었으니까 우리 법률은 아랑곳없다고 할 것인가? … 그와 같은 것에 ‘코리아’가 있다. 영어로는 ‘코리어’, 불어로는 ‘코레’, 독어로는 ‘코레아’인데, 일본식이 ‘고리아’다. 아마 ‘코리아’가 이 일본식에서 나온 소린지 모른다. 그러나, 영어이니까 영어 발음대로 ‘코리어’로 할 것이지, 영어 발음 아닌 일본식으로 할 필요가 없다 ..  (126∼128쪽)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교라는 데에 들어간 다음 헌책방에서 《국어의 갈 길》을 만났습니다. 초등학교랑 중학교랑 고등학교를 다니는 동안 내가 내 말과 글을 어떻게 사랑하거나 생각해야 하는가를 한 번도 배우지 못했습니다. 대학교에서도 똑같았습니다. 이 나라에서는 구태여 비싼 등록금 바치며 학점과 졸업장을 따 보았자 내가 배울 알맹이는 없구나 싶어 다섯 학기만 다니고 그만둔 대학교인데, 어차피 고졸자로 내 가방끈을 맞춘달지라도 한동안 대학물 좀 먹은 사람이라면 이런 사람답게 더 말을 살피고 더 글을 아껴야겠다고 다짐하면서 《국어의 갈 길》을 낱낱이 새기며 읽었습니다.

 《국어의 갈 길》은 빈틈없이 알차거나 아름답지 않습니다. 1994년 대학교 1학년이던 때에 돌아보더라도 서른두 해나 묵은 책이요, 둘째를 낳을 2011년에 헤아리자니 자그마치 마흔아홉 해나 묵은 책입니다. 좀 낡았다 싶거나 케케묵구나 싶은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와 돌이키니 낡거나 케케묵다 싶지, 지난날에는 이런 이야기 하나하나 꼼꼼히 다루며 나누고 싸우며 다독였기 때문에, 오늘 우리들은 한껏 느긋하면서 즐거이 우리 말과 글을 사랑하거나 생각할 수 있습니다.

 지식을 읽는 책이 아니라 삶을 읽는 책입니다. 지식을 뽐내는 말이 아니라 삶을 나누는 말입니다. 지식으로만 읽으려 해도 대단히 도움이 될 만한 《국어의 갈 길》이었지만, 삶으로 맞아들이면 한결 따스하며 넉넉한 작은 책 하나입니다. (4344.2.12.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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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율학습과 보충수업이 읽게 도와준 책
― 주요섭, 《미완성》



- 책이름 : 미완성
- 글 : 주요섭
- 펴낸곳 : 을유문화사 (1962.11.25.)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주요섭을 읽어 고등학교 3학년 즈음에는 주요섭 님이 내놓은 작품을 웬만큼 읽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작품을 다 읽지는 못합니다. 헌책방에서 찾아볼 수 있는 책은 다 훑으며 읽었으나, 퍽 옛날에 나온 드물며 비싼 옛책은 사서 읽지 못했으니까요.

 그렇다고 학교 도서관에서 주요섭 님 책을 찾아 빌려 읽지 못합니다. 제가 고등학교 2학년이 될 무렵 우리 학교에도 비로소 도서관이 열리지만(제가 다닌 학교에서 4회 졸업생입니다), 묵은 예전 책을 자그마한 고등학교 도서관에서 갖출 일은 없으니까요. 그렇다고 인천에 있는 다른 도서관에서 주요섭 님 예전 책을 찾아서 읽을 수 없습니다. 갖추어 놓지를 않거든요.

 그때나 이제나 매한가지인데, 도서관은 묵은 옛책을 장만하려고 힘쓰지 않습니다. 도서관 일꾼 스스로 헌책방마실을 꾸준히 하면서 당신들 도서관에 좋은 책을 알뜰히 갖추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새로 나오는 책 가운데 도서관 일꾼이 보고픈 책이라든지 사람들이 바라는 책 몇 가지를 사 놓을 뿐입니다.

 새책이라는 옷을 입은 주요섭 님 작품은 으레 〈사랑 손님과 어머니〉에서 맴돕니다. 기껏 더 다루어 준다면 〈인력거꾼〉하고 〈대학교수와 모리배〉쯤입니다. 고등학교 때 국어교사로 일하던 분들도 이런 작품까지만 줄거리로 다루면서 대입 논술 시험을 살피라고만 할 뿐, 주요섭을 주요섭으로 읽도록 이끌지는 않습니다.


.. “여보, 내 말 좀 명심해 들어요. ‘건국을 위해서 노력한답시는’ 그 동창생 덕분에 나두 한 턱 잘 얻어먹었어. 그런데 이것 봐요. 하루 저녁 요리값 ‘간죠’가 얼마나 났을 듯하우?” “그런 걸 내가 어떻게 알아요?” “짐작이라도 해 보란 말요. 하두 엄청나니 말야!” “몰라요, 난, 그런 거.” “여보, 놀라서 기절하지 않도록 마음 잔뜩 단단히 먹고 들으시우. 응, 간죠가 말이요, 하루 저녁 요리 먹은 간죠가 말이요, 놀라지 말지어다, 작으만치 일금 이만 원야라. 이만 원!” “가짓뿌리.” “아니야, 참말이야. 그렇지, 거짓말 같은 참말이 지금 우리 반도 안에 어디든지 가득 차 있어. 내 말 좀 들어보. 그 기생년들 말요, 기생년들이 간죠에 끼인 화대 외에 또 따로 팁을 오백 원씩 더 주고야 말더구만. 그러니 지금 세상엔 기생 돈벌이가 제일이겠읍디다. 하루 저녁 연회비가 우리 한 가족 생활비 일 년치 하고도 더 되니, 허어, 우리 일 년 생활비를 그자들은 한 끼에 다 먹어 버린단 말야 …… 여보, 마누라. 여보, 여보! 부르는데 왜 대답도 안 해?” “왜 그래요?” “마누라, 마누라가 날 보구 늘 골샌님이라구, 주변이 없다구 쫑알대 왔지, 기억하우? 그때마다 난 큰소릴 탕탕 치군 했었지. 사람은 돈보다는 절개가 더 중하다구. 허나 지금 우리 나라는 생지옥이야, 지옥! 질서두 없4ㅜ, 절도도 없구, 자존심도 없구, 그저 아무 짓을 해서라도 돈만 모으면 제일 잘난 사람이거든. 흥, 모리배라구? 그럼 어때? 잡혀간다구. 잡혀가문 어때? 검사국에서야 어쨌든 재판소에서는 으레 뻐젓이 무죄 판결로 석방돼 나오는데. 이게 소위 민주주의라는 거거든. 나두 낼부터 모리배 뒷꽁무니나 따라다닐까? 남들은 다 하는데 나 혼자 독야청청한다고 누가 나에게 상 줄까?” “그래두 양심 문제지요.” ..  (203∼205쪽)


 어릴 때에는 마냥 놀기에 바빴고, 중학생이 되고부터는 온통 입시지옥에 갇혀야 했던 몸으로 문학을 문학답게 받아들이기는 참 힘들었습니다. 중학교를 다니는 동안 ‘교과서 아닌 책’을 읽는 학교 동무는 꼭 하나를 보았습니다. 이 아이가 보던 책은 《영웅문》입니다. 한 학년 55∼60명인 열 학급 중학교 세 해를 보내면서 《영웅문》 아닌 책을 읽으려 하던 동무는 이 아이 말고 딱 하나 더 만났습니다. 그러나 이 아이도 고등학교에 가면서 교과서와 참고서에만 파묻힐 뿐, 교과서 아닌 책하고는 사귀지 않습니다. 고등학교에 들어선 다음에도 한 학급 50∼55명인 열 학급에서 교과서 아닌 책을 들고 다니며 읽는 아이는 찾아보지 못합니다. 고등학교에서는 툭하면 소지품검사를 하면서 ‘교과서 아닌 책’은 모두 빼앗아 갔는데, 교과서 아닌 책을 들고 다니다가 빼앗긴 사람은 저 혼자였습니다.

 삼중당문고이든 정음문고이든 마당문고이든 을유문고이든 박영문고이든 서문문고이든, 소지품검사를 달마다 두어 차례씩 하면서 언제나 빼앗겼다가 교무실로 찾아가서 국어교사를 이끌고 ‘이 책을 빼앗아도 되는가 안 되는가’를 학생주임하고 따져서 겨우 되찾습니다. 학교교사라 해서 책을 읽지 않을 뿐더러, 국어교사가 아니고서는 주요섭이든 한하운이든 황순원이든 모릅니다. 더구나 이들 작가 이름을 한글 아닌 한자로 적어 놓으면 도무지 알아채지 못합니다. 박태원이든 김정한이든 하는 이름은 더더욱 모를 뿐더러, 어느 때에는 김수영과 신동엽 시집을 불온도서로 여겼고, 대원사에서 낸 시집 가운데 하나였던 박노해 시집을 놓고는 전교조 어쩌고 하는 소리를 들어야 했습니다.

 이제 와 돌이키면, 어처구니없는 소지품검사와 두발검사 따위로 청소년권을 짓밟던 교사들 때문에 책을 읽었는지 모릅니다. 릴케와 하이네 시집조차 ‘입시공부에 도움 안 되는 쓸데없는 책’을 갖고 다닌다며 빼앗으면서 몽둥이로 두들겨 팼습니다. 없는 돈으로 동네책방하고 대한서림하고 헌책방에서 겨우 장만해서 여러 차례 읽는 책을 터무니없이 빼앗긴 데다가 얻어맞기까지 해야 하니 울화가 치밉니다. 외려 ‘그래? 그러면 내가 더 읽어 주지?’ 하는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밤 열 시 사십 분까지 하던 자율학습 때에는 언제나 교과서 아닌 책을 펼쳐 놓고 읽는데, 짜증스럽고 갑갑한 교실에서 읽지 말고 헌책방에서 읽자고 생각하며 저녁에 학원 가는 아이들 틈에 섞여 담타기를 하며 헌책방마실을 한 주에 한두 차례씩 합니다(입시학원에 다니는 아이들은 자율학습을 안 받고 학원에 가는 특권을 누렸습니다. 학교 앞문에서 학원 수강증 검사를 하니까, 학원 가는 아이들 틈에 섞여 교실에서 빠져나온 뒤 학교 옆담이나 뒷담을 타고 넘어 밤길을 후다닥 달리며 내뺐습니다).


.. 가난은 창피인가? 성현들의 말씀은 그렇지가 않다 했지만 오늘날 이 서울 풍경을 보면 가난은 확실하게 창피요, 또 가난한 살림일수록 어림삥한 풍설에 더 잘 속아 넘어가는 바보다 … 하기는 배급소 지정받는 것도 돈 쓰고 빽 써서 받은 것이니까 세도 쓸만 하겠지만. 그러나 민족의 지도자들을 개 욕하듯 욕설을 두 발 세 발도 더 긴 종이에 써서 도처에 내붙이는 종이는 넉넉하면서도 손바닥만 한 종이 한 장이 헛걸음치는 걸 미안하게 생각할 양심조차 없는 이 나라 장삿군이란 말인가?  그리고 또 오늘 설탕 배급 못 줄 이유는 무엇인고? 수백, 아니 수천 명이 헛걸음치는 걸 미안하게 생각할 양심조차 없는 이 나라 장삿군이란 말인가? … 지금에는 왜놈들은 다 가고 우리 나라 사람들끼리만 살고 있는데, 동포를 ‘소리 안 나는 총이 있으면 쏴 죽이고’ 싶은 생각을 나 같은 여자에게까지도 일으키도록 만들어 주는 이런 비극이 어디 또 있을까! ..  (207, 214, 215쪽)


 오랜만에 《미완성》을 다시 읽습니다. 거의 스무 해 앞서 읽던 책을 다시 펼치니 새삼스러우면서 새롭게 읽힙니다. 철 덜 든 어린 나날 읽던 주요섭 소설하고 아이 아버지로 살아가며 읽는 주요섭 소설은 사뭇 다릅니다.

 그렇지만 이 작품 하나는 이 작품을 쓴 사람 목소리와 살내음 그대로 예나 이제나 고이 흐릅니다. 당신이 부대끼며 살던 나날을 낱낱이 싣고 찬찬히 담은 작품은 언제까지나 당신이 발 디딘 그날 그곳 삶자락을 읽도록 이끕니다.

 문학을 문학다이 즐기거나 누리거나 나누기 힘들던 일제강점기이며 해방이며 한국전쟁이며를 거치면서도 문학을 하던 사람이 있기에, 문학이 아닌 입시를 해야만 하던 아이들 가운데 누군가는 문학을 문학으로 받아들이고 싶다며 꿈을 꿉니다. 오로지 돈바라기로만 치닫는 오늘날, 애 아버지로서 돈바라기 아닌 삶을 어찌저찌 힘들거나 고단하면서도 꿋꿋하게 꾸린다면, 먼 뒷날 애 아버지가 흙으로 돌아간 뒤에 우리 아이나 우리 아이가 낳을 아이나 조금이나마 살갑거나 따스한 나날을 흐뭇하게 껴안으면서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으려나요.

 한국 문학쟁이 가운데 세계문학으로 손꼽을 만한 작품을 쓴 사람은 아직 없다고 느낍니다. 참말 없습니다. 그러나 세계문학으로 손꼽히지 않으면 어떻습니까. 한국땅에서 한겨레가 한국사람으로서 오붓하게 즐기며 되새길 수 있으면 넉넉하지 않나 싶습니다. 허먼 멜빌 《모비딕》은 모비딕대로 좋고, 주요섭 님 《미완성》에 담긴 〈해방 1주년〉은 해방 1주년대로 좋습니다. (4344.2.2.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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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움직인 책들’은 헌책방에서
― 로버트 B.다운즈, 《역사를 움직인 책들》



- 책이름 : 역사를 움직인 책들
- 글 : 로버트 B.다운즈
- 옮긴이 : 김지운
- 펴낸곳 : 삼성문화재단 (1976.2.20)



 저녁을 차립니다. 밥이 솔솔 익기 앞서 아이는 배가 고프다 합니다. 아이한테 얼른 무언가 먹을거리를 주어야겠다 싶어, 조금 묵은 능금이랑 미리 삶은 달걀을 송송 썰고 땅콩을 넣어 마요네즈하고 케찹과 조청을 섞으며 비빕니다. 푸성귀가 다 떨어져 푸성귀를 넣지 못해 아쉽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비빈 먹을거리를 아이는 맛나게 먹어 줍니다. 잘 차리지 못한 밥상이더라도 맛나게 먹어 주는 아이를 보면 참으로 고맙습니다.

 밥을 먹이고 나서 책을 들추려고 하다가 셈틀을 켭니다. 미처 마무리짓지 못한 글이 있어 마저 쓰려고 했으나, 아이가 아빠 무릎맡에 앉으니, 도무지 글을 쓸 수 없습니다. 아이가 좋아하는 노래를 틀어 놓고 글쓰기를 이으려 하지만 좀처럼 글이 되지 않습니다. 어영부영 하는 동안 글은 아무것도 못 쓰고 무릎은 아프며 아이는 졸립니다. 그렇지만 졸리면서 더 깬 채 놀고자 하고, 아주 곯아떨어지기 앞서까지 이리 뛰고 저리 춤추며 놉니다.

 아이는 아이라서 이토록 놀아야 하는가요. 아무래도 아이는 아이인 만큼 이렇게 놀아야겠지요. 어른은 어른이라서 아이처럼 마냥 신나게 못 노는지 모르나, 어른이기 때문이라기보다 스스로 벌인 온갖 일에 매이거나 얽히면서 조금 더 느긋하지 못한다고 느낍니다. 오늘 못 다 쓴 글을 꼭 오늘 마무리지을 까닭이 없고, 이듬날이든 이듬달이 되든 그예 마무리짓지 못해도 돼요. 아이처럼 어른도 어디에든 매인 삶이 되지 않을 때에 즐겁습니다. 아이마냥 어른도 콩콩 뛰면서 사뿐사뿐 달릴 때에 기쁩니다. 신나니 노래를 부르고, 재미나니 춤을 춥니다.

 아이가 책을 펼칠 때에는, 책에 길이 있기 때문에 펼치지 않습니다. 뛰놀 때에는 뛰놀기가 재미있으니 뛰놀고, 책을 펼칠 때에는 책이 재미있으니 책을 펼칩니다.

 책이 아주 훌륭한 마음밥이라서 펼치지 않습니다. 마음밥이 되거나 말거나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기쁘게 펼쳐서 예쁘게 읽어 살가이 받아들이면 좋으니까 책을 펼칩니다.

 책이란 어버이가 잔뜩 사 준다 해서 신나게 읽을 수 없습니다. 책이란 어버이가 한 권도 안 사 준다 하더라도 못 읽을 까닭이 없습니다. 집에 책이 멧더미 같아도 안 읽기 마련이고, 집에 책 하나 보이지 않더라도 책을 사랑하는 아이란 많아요.


.. 그는 그의 생각에 기본적으로 중요한 일들, 즉 콩코드의 들판을 소요하고, 직접 자연을 공부하고, 사색하고,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등의 기본적으로 중요한 일들을 하기 위한 한가한 시간을 벌자는데 정열을 태웠다 … 도로(헨리 데이빗 소로우)는 필요 이상의 모든 것에서 벗어난 간소한 생활관을 예시하기 위해 콩코드 근방에 있는 월든 폰드에서 2년을 보냈다. 그는 거기에다 오두막집을 짓고, 콩과 감자를 심고, 가장 간소한 식량(주로 쌀·옥수수·감자 그리고 당밀)을 먹고 사회생활에서 벗어나 홀로 생활했다. 그것은 사색과 집필에 집중한 시기였으며 이에서 생겨난 것이 미국문학사상 최대작품 중의 하나인 《월든》 혹은 《숲속의 생활》(1854년)이었다 ..  (108∼109쪽)


 책은 아이를 가르치지 않습니다. 책은 어른도 가르치지 않습니다. 책으로 배우는 사람은 없습니다. 책으로 가르칠 사람도 없습니다.

 책은 그저 책입니다. 책에는 이야기가 깃듭니다. 이 이야기는 그저 사람들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이 겪은 이야기이거나 사람들이 생각한 이야기입니다. 사람이 하나도 안 나오는 자연 이야기라 할지라도 자연이 스스로 적바림한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이 바라보거나 생각한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는 누가 누구한테 가르치는 이야기가 아니라, 저마다 다 다른 곳에서 다 다르게 살아온 이야기입니다.

 그렇지만, 오늘날에는 책을 놓고 사람을 가르치려 합니다. 아예 처음부터 가르치거나 배우는 책을 만들기도 합니다. 이른바 교재이고 참고서입니다. 이를테면 문제집이고 수험서입니다. 여기에 기술서와 처세책이 있습니다. 모두모두 가르치려 듭니다. 모두모두 길들이려 합니다. 모두모두 얽매이게 이끕니다.

 인권을 다루는 책이라 할지라도 인권을 가르치지는 못합니다. 그저 인권이 무엇인가 하고 보여줄 뿐입니다. 살아가면서 겪고 치르며 받아들일 인권이지, 책을 읽어 알거나 받아들일 인권이 아니에요. 내가 오늘 이곳에서 마주하는 사람하고 어울리며 북돋우는 인권이지, 머리속으로 헤아린다고 이루어지는 인권이 아니에요.


.. 《톰 아저씨의 오두막집》 저자에게 남부 지방으로부터 분노와 否認과 욕설이 마구 쏟아졌다. 신문들이 스토우 여사의 노예제도 묘사에 에러와 허위가 있은 것같이 폭로할 목적으로 소상한 비판의 논평들을 게재했다. 전형적인 논평은 ‘서던 리터러리 메신저’의 선언으로서, 이 책이 “창작의 고매한 기능이 범죄적으로 타락”한 것이며 스토우 여사는 저자로서의 죄책 때문에 “그녀 자신을 보호의 울타리 없이 남부 비판의 수중에 맡겨 버렸다”는 것이었다. 스토우 여사에게 직접 수천 수만 통의 성난 욕지거리 편지들이 날아들었다. 《톰 아저씨의 오두막집》이 처음엔 남부에서 마구 나돌았는데, 신랄한 반응이 나타난 후로는 남부에서 이 책 한 부라도 가지고 있는 것은 위험했다 ..  (136∼137쪽)


 《역사를 움직인 책들》이라는 자그마한 책을 읽습니다. 여러 차례 읽습니다. 참말 이 작은 책에서 다루는 책들은 온누리 역사를 바꾸거나 움직였다 할 만큼 대단한 책으로 손꼽을 만합니다. 책 하나가 역사를 움직일 수 없습니다만, 언뜻 보기에 이 책들 때문에 역사가 움직였다고 여길 만합니다.

 그러면, 이 책들 때문에 움직였다는 역사는 오늘날 어떤 모습인가요. 앞으로 쉰 해쯤 뒤를 살아갈 뒷사람들이 보기에 2000년대 첫무렵이나 1900년대 끝무렵을 움직였다 싶은 책이란 무엇을 손꼽을 수 있으려나요. 우리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좋겠다고 생각하나요. 우리들은 우리가 살아갈 나날을 우리 스스로 생각하거나 살피거나 찾는가요, 아니면 책을 읽으면서 배우려고 하나요. 우리들은 우리가 사랑할 나날을 우리 스스로 헤아리거나 돌보거나 보듬는가요, 아니면 책을 읽으면서 가르쳐 주려고 하나요.

 1976년에 처음 나온 《역사를 움직인 책들》은 헌책방 책시렁에 묻힙니다. 2011년이 되었으나 되살아날 낌새는 없고, 2076년쯤에 누군가 되살려 펴낼는지 퍽 궁금합니다. 역사를 움직인 책들로 손꼽히는 책들은 2011년이나, 또는 2076년쯤에는 어느 만큼 읽히려나 궁금합니다. (4344.1.31.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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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는 너무 끔찍한 죽음터입니다
― 《민중교육론, 제3세계의 시각》


- 책이름 : 민중교육론, 제3세계의 시각
- 글 : 파울로 프레이리, 이반 일리치, 에브리트 라이머, 브리안 워렌
- 옮긴이 : 채광석, 양한수, 권태선, 김쾌상
- 펴낸곳 : 한길사 (1979.8.20.)


 나는 내 아버지를 미워하지 않습니다. 나로서는 내 아버지이기 때문에 미워할 수 없습니다. 내 아버지가 당신 삶에 걸맞게 아름다우면서 해맑은 삶을 깨달으면서 하루하루 즐겁고 신나는 나날을 맞이할 수 있기를 꿈꿉니다. 먼 뒷날일는지 곧 다가올 날일는지 알 수 없으나, 당신이 숨을 거두어 흙으로 돌아가고 나서야 둘레 사람들한테 사랑을 나누어 주지 말고, 바로 오늘 이곳에서 둘레 사람들한테 사랑을 나누어 주기를 바랍니다.

 곰곰이 생각하고 또 생각해 보면, 아버지로서는 퍽 젊은(?) 나이에 교감이 되고 교장이 되기를 바랄밖에 없다고 느낍니다. 당신 또래 사람들 삶이 그러했으니까요. 일제강점기가 어떠한 삶자락인지 알 길이 없을지라도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해방과 한국전쟁을 치르며 어린 나날을 보내고 나서 집안 사내 맏이로 살아내야 한 어른들이 걸을밖에 없는 길에서 흔들리거나 머뭇거릴 수 없는 노릇입니다.

 아버지가 읽으셨는지 모르나, 아버지가 경기도 성남 쪽 초등학교 교장으로서 한창 힘과 이름을 날리실 때에 《할아버지의 부엌》이라는 일본책(한글로 번역된 책)을 선물한 적 있습니다. 나는 우리 아버지가 집 바깥에서 그토록 힘과 이름을 날리는 삶을 보내느라 애먼 나날을 흘리기보다, 밥하고 반찬하며 빨래하고 청소하는 ‘날마다 되풀이해도 끝나지 않고 그지없이 쌓이기만 하는’ 집살림을 돌아보면서 사랑할 줄 아는 어른으로 지낼 수 있기를 비손했습니다. 왜냐하면, 교장 선생님이라는 자리에 선 분부터 ‘집에서 일하는 삶’을 몸으로 받아들일 때에 비로소 당신이 교장으로서 꾸리는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부터 ‘수많은 학원에 얽매이는 고리’를 조금이나마 풀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경기도 부천에 있는 초등학교에서 교감 선생님으로 계실 때에, 그 학교조차 ‘다니는 학원이 10군데 넘는 아이가 10%가 넘는다’는 소리를 당신 입으로 들었습니다. 아버지는 아이들이 학원을 그토록 많이 다니는 일이 어떠한 삶인지를 얼마나 살갗으로 받아들이셨는지 궁금합니다. 아이들이 학교와 학원에 붙들리며, 정작 집에서조차 느긋하게 드러누우며 쉬거나 놀 겨를이 없는 줄을 얼마나 헤아리며 걱정했는지 궁금합니다.


.. 많은 학생들 특히 빈곤한 집안의 학생들은 학교가 자신들에게 무엇을 해 주는가를 직관적으로 알고 있다. 학교는 과정과 실체를 혼돈하도록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 졸업증서와 사회적 능력·말의 유창함과 무언가 새로운 것을 말할 수 있는 능력과를 혼동하게 된다 … 학생의 상상력은 학교화되어서 가치 대신에 서비스를 받아들이도록 길들여진다. 의사의 진료행위는 곧 건강보호로 착각하고 사회활동은 시민생활의 개선이며 경찰보호는 안전이며 무력균형은 국가안보이며 맹목적으로 열심히 일만 하는 것이 생산적인 활동인 것으로 오해하게 된다 … 학습이나 정의는 학교에 의해서 증진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교육자들은 교육과정 이수와 자격획득을 결부시키도록 강요하고 있기 때문이다 … 학교교육이 의무화되면서 학교교육은 학교교육 그 자체를 위한 것이 돼 버렸기 때문이다. 즉 의무교육이란 특권을 누리는 교사집단 속에 학생을 강제수용시키는 것이 되며, 결과적으로 그러한 집단을 더 많이 만들어 내게 된다 ..  (77, 88, 94쪽)


 학교가 학교로 되려면, 학교는 졸업장이 없어야 합니다. 학교가 학교다우려면, 학교는 상장이 없어야 합니다.

 저는 한때 ‘대안 상장’ 같은 상장이 있으면 좋겠거니 생각한 적이 있는데, 대안 상장도 똑같은 상장입니다.

 그러니까, 대안학교라는 곳도 똑같이 학교입니다. 대안학교도 똑같이 학교이기 때문에, 이 대안학교를 다니는 아이나 이 대안학교에 아이들을 보내는 어버이나 똑같은 굴레에서 허덕입니다. 아이들은 학교에 보내면 안 되고, 아이들은 아이들을 사랑할 어버이가 함께 어울릴 수 있는 곳에서 자라야 합니다.

 아이는 자라야 하지, 아이는 배워야 하지 않습니다. 아이는 무럭무럭 커야 하지, 아이는 길들어야 하지 않습니다.

 아이는 책을 읽어야 합니다. 아이는 책 줄거리를 외워야 하지 않습니다. 책을 쓴 사람이나 책을 펴낸 곳 이름을 외워야 하지 않습니다. 책을 읽고 나서 가슴에 북받치는 아름다움이 꽃피어야 합니다.

 아이는 일을 해야 합니다. 돈을 벌어들이는 일이 아니라, 스스로 땀을 흘리며 즐겁고 기쁘며 보람찬 일을 해야 합니다. 일이란, 제가 우리 멧골집에서 아이한테 “벼리야, 이 접시 좀 밥상에 갖다 주렴.” 하고 시키는 일 따위입니다. 일이란, 제가 우리 시골집에서 아이보고 “벼리야, 아빠 빨래하러 가는데 같이 가자(겨울날 집에 물이 얼어붙어 웃마을로 가서 빨래를 하고 물을 걷습니다).” 하고 부르며 손을 잡고 멧길을 오르내리는 일 따위입니다.


.. 가난한 학생들이 학습이나 자기발전을 학교에만 의존하는 한 일반적으로 부유한 학생에게 뒤떨어지기 마련이다. 빈민에게 요구되는 것은 학습을 가능케 하는 자금이지 그들에게 부족되고 있다고 인식되는 제도적 혜택을 증명받는 일은 아니다 … 의무교육은 사회를 필연적으로 분극화시킬 뿐만 아니라 국제적인 카스트(신분) 제도로 국가를 등급화시킨다 … 대부분의 사람들은 학교 밖에서 거의 모든 지식을 얻는다. 학교 안에서 지식을 얻는다는 것은 몇몇 부국에 있어서 사람들의 일생 동안 학교 안에 갇혀 사는 기간이 점점 길어지게 되었다는 점에서 그렇게 말할 수 있다 ..  (83, 86, 89쪽)


 우리 살붙이 살아가는 조그마한 살림집 물이 얼어붙은 지 달포가 넘고 두 달이 가깝습니다. 이동안 물을 길어 쓰고, 집에서는 차디찬 물로 설거지를 하면서, 어느새 내 손가락 마디마디 언손이 되고 맙니다. 왜 이렇게 손가락이 시리고 쑤시는가 했더니, 내 젊은 날 강원도 양구 가장 깊은 멧골짝 군대에서 스물여섯 달을 보내던 때에 겪던 일과 똑같은 일이 새삼스레 찾아왔습니다. 얼음생채기입니다.

 오늘 아침 비로소 내 손가락이 어떠한 줄을 깨닫습니다. 둘째를 밴 옆지기가 몸이 몹시 힘들어 밤새 잠을 못 자고 뒤척이다가 새벽 다섯 시 삼십오 분에 비로소 잠들었는데, 새근새근 자는 옆지기가 깨어날 낮나절 지아비 손가락이 어떠한가를 얘기해 주어야 말아야 하나 망설입니다. 옆지기가 새벽 다섯 시 삼십오 분에 잠들었으니, 지아비는 그동안 잠을 거의 못 잔 채 누웠기만 했습니다. 그렇다고 이제서야 비로소 두 발 뻗고 잘 수 없습니다. 아픈 손가락으로 찬물을 받아 쌀을 씻어 놓습니다. 오늘 아침에 아이가 일어나서 먹을 밥을 마련해야 합니다. 밥을 먹이고 나서 설거지를 하고, 밤새 나온 오줌기저귀 빨래를 해야 합니다.

 제가 돈없이 살아가니 겨울날 집안 물이 얼어붙는다 할 수 있으나, 돈이 있고 없고를 떠나 집살림을 옳게 건사할 줄을 아직 제대로 모르는 서른일곱 나이인 탓에 이렇게 되고 맙니다.

 군대라는 곳은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끔찍한 재주를 배우는 무시무시한 곳입니다. 이 무시무시한 곳에 아이들을 보내는 일은 너무 슬픕니다. 저는 우리 둘째가 사내가 아니기를 빌고 또 빕니다. 제아무리 착하고 참다운 아이일지라도, 군대에 끌려가 사람 죽이는 재주를 익히며 길들어야 한다면, 그 착하며 여린 마음에 얼마나 깊은 슬픔을 아로새겨야 할까요.

 그러나, 깊으며 괴로운 슬픔을 아로새기기 때문에 더욱 착하며 힘차게 살아갈 수 있는 기운을 얻기도 하겠지요. 밟혀도 다시 일어서는 뭇 들풀처럼.

 그래, 저는 군대라는 데에서 사람 죽이는 숱한 재주를 몸에 사무치도록 배우는 한편, 군대에 가기까지 고등학생이던 때에는 겪지 못했던 온갖 일을 했습니다. 군대에서 비로소 시멘트와 자갈과 모래와 물을 섞어 비빔질을 하는 일을 배웠고, 천 삽 뜨고 허리 한 번 펴는 일을 익혔으며, 곡괭이질은 어떻게 해야 하고, 짐은 어떻게 날라야 하며, 멧길과 눈길은 어떻게 오르내려야 하는가를 배웠습니다. 학교에서는 안 가르치는 숱한 삶을 외려 군대에서 배웠습니다. 어쩔 수 없겠으나, 군대는 사람을 죽이는 모진 곳이면서도 이곳 또한 ‘사람이 살아가는 곳’이라서, 모진 죽음과 죽임이 판치는 가운데에도 ‘사람답게 살고 싶은’ 몸부림이 꼬물꼬물 꼬리를 치면서 이런저런 ‘사람이 사람다이 살 길’을 서로 나누면서 보여주었습니다.


.. 교육이 국민문화에 기여하기 위해서는 특수한 제도에 강제 수용할 것이 아니라, 전 인구를 이에 동원해야 할 것이다. 학습 및 교육에 자기의 능력을 행사하기 위한 개개인의 평등한 권리는 현재 자격증을 소지한 교사들에게 점유당하고 있다. 반대로 능력 발휘는 학교 내로 제한되고 있다. 그 결과 일과 여가는 서로 괴리되고 있다 … 의무교육의 존재가 바로 사회를 두 개의 영역으로 구분하고 있다. 즉 특정한 시간대·특정한 과정·특정한 처지나 전문직업은 학술적이고 교육적인 것이고, 기타는 그렇지 않은 것으로 구분된다. 이와 같이 사회 현실을 구분하는 학교의 권력엔 한계가 없어서 교육은 비세속적인 것으로 되고, 비교육적인 것이 되고 말았다 ..  (99∼100쪽, 102쪽)


 저는 우리 옆지기를 좋아하고 우러릅니다. 좋아하면서 우러릅니다. 우리 옆지기를 비롯해서 제가 좋아하며 우러르는 사람들은 우리 옆지기처럼 학교를 덜 다닌 사람이거나 일찍부터 뛰쳐나온 사람입니다. 또는, 학교를 이냥저냥 다니면서도 학교와 사귀지 않던 사람입니다.

 학교와 사귄 사람들은 어쩐지 말을 섞기 버겁습니다. 학교와 살가운 사람들은 어쩐지 동떨어진 별나라 사람 같습니다.

 사람들이 저하고 처음 만나서 이름을 나누고 할 때에 “학번이 어떻게 되셔요?” 하고 물을 때면, 그저 빙긋 웃으며 “저는 고등학교만 나와서 그런 건 잘 모르겠네요.” 하고 대꾸합니다(고등학교만 마쳤으니 학번을 알 턱이 없어요). 저는 학교가 참 싫습니다. 아이들 앞에서 삶을 가르치거나 나누거나 물려주는 어른은 되고 싶지만, 교원자격증을 따고 무슨무슨 대학졸업증을 거머쥔 교사가 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선생님도 싫고 교사도 싫습니다. 그저, 우리 아이한테 ‘아버지’라는 이름이듯, 뭇 아이들 앞에서는 ‘아저씨’라거나 ‘어른’이고픕니다. 저는 우리 아버지가, 저를 비롯해 뭇 아이들 앞에서 똑같이 ‘할아버지’이면서 ‘어른’인 삶으로 마지막 고운 나날을 맞이하고 누리신 다음 아주 흐뭇하게 웃으면서 흙으로 돌아가실 수 있기를 비손합니다. (4344.1.30.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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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하는 삶과 공부하는 아이
― 현진건, 《B舍監과 러브레터》



- 책이름 : B舍監과 러브레터
- 글 : 현진건
- 펴낸곳 : 동서문화사 (1977.9.1.)



 중·고등학교를 다니며 입시공부를 해야 하기 때문에 현대소설을 읽습니다. 학교에서는 아이들이 대학입시를 잘 치러 이름난 대학교에 더 많이 들어가도록 채찍질을 하고자 현대소설을 가르칩니다.

 국민학교를 마치고 중학교에 들어서던 1988년 3월, 학교에서는 갱지에 등사한 종이를 나누어 줍니다. 1991년 3월에 고등학교에 들어갈 때에도 갱지에 등사한 종이를 나누어 줍니다. 이 갱지에는 ‘중학생이 읽을 권장도서’라든지 ‘고등학생이 읽을 필독도서’가 깨알같이 적힙니다.

 중학교에 들어서거나 고등학교에 들어서며 받는 ‘꼭 읽으라 하는 책’을 살피면, 그즈음에 나온 새로운 책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즈음뿐 아니라 ‘오늘날 두루 읽히거나 읽을 만한 책’ 또한 하나도 없습니다. 문학이라 하면 모두 현대소설로 쏠리고, 김동인이니 이광수이니 현진건이니 김유정이니 이효석이니 황순원이니 하는 분들 작품 가운데에서도 일제강점기에 쓴 작품에 쏠립니다. 해방 뒤에 문학을 한 사람들 작품은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을 뿐더러 입시에서도 다루지 않습니다. 더러 한두 작품 한두 대목이 나오기는 하지만 일제강점기 작품에 견주면 아무것 아닙니다. 문학이란 철지난 문학이고, 문학하는 사람은 숨을 거두어 흙으로 돌아가고 나서야 빛을 보는 셈입니다.


.. “그래 음악회에 가기 싫단 말인가?” “자네 혼자서 다녀오게.” “여보게 음악은 모른다 하더래도, 여학생 구경이라도 가세그려. 주최가 여학교 측이고 보니, 그 학교 학생은 물론이겠고, 서울 안의 하이칼라 여학생은 다 끌어올 것일쎄.” 하고 매우 초조한 듯이, “입장권은 내가 삼세. 음악이 싫거든 여학생 구경이라도 가세.” “왜?” “왜라니, 여학생 구경이라도 가자는밖에.” “여학생은 보아 쓸데가 무엇이란 말인가?” ..  (216쪽/까막잡기)


 학교에서 나누어 주는 갱지를 훑으며 ‘들어 본’ 이름과 ‘처음 듣는’ 이름을 헤아립니다. 들어 본 사람 작품이건 처음 듣는 사람 작품이건 하나하나 찾아서 읽기로 합니다. 어찌 되었든, 이 갱지에 적힌 사람들 작품을 ‘학교에 책을 가져가서 쉬는 시간이나 점심 시간에 읽는다’면 무어라 따지지는 않을 테니까요. 학교에서 읽으라 한 책인 만큼 이러한 책을 읽는다 할 때에 책을 빼앗는다든지 무어라 꾸중할 핑계거리가 없습니다.

 학교에서는 현진건 님 작품 〈빈처〉와 〈운수 좋은 날〉을 읽으라 했지, 〈불〉이나 〈그립은 흘긴 눈〉은 읽으라 하지 않습니다. 〈술 권하는 사회〉나 〈피아노〉 같은 작품이 ㅅㄱㅇ 같은 대학교 논술시험에 나오기도 하니, 학교 모의시험에 이들 작품 지문이 나오기는 하지만, ㅅㄱㅇ 논술시험 지문하고 똑같이 나올 뿐입니다. 〈우편국에서〉나 〈할머니의 죽음〉이라든지 〈사립정신병원장〉이라든지 〈고향〉이라든지 다루거나 이야기하는 국어 교사는 없습니다. 중·고등학교 국어 교사 가운데 이들 작품을 읽은 분이 있을는지 모르나, 어쩌면 이들 작품은 안 읽거나 못 읽은 분이 더 많을는지 모릅니다. 교대나 사범대에 다닐 때뿐 아니라, 막상 학교에서 국어 교사로 일하면서도 ‘당신들이 학생 적에 못 읽은 한국 현대문학’을 뒤늦게 읽는다든지, 이때부터 바지런히 읽는다든지 할 겨를을 못 내는지 모릅니다.

 헌책방을 다니며 책을 하나둘 그러모읍니다. 현진건 문학을 읽으려고 생각한 때에는 현진건 님 문학책을 펴낸 갖가지 판본을 모두 살펴서, 겹치지 않은 작품이 하나라도 실렸으면 냉큼 사들여서 읽습니다. 이무영 소설이든 안수길 소설이든 박태원 소설이건 마음껏 읽습니다. 장용학 소설이건 이청준 소설이건 즐거이 읽습니다.

 현대소설을 읽으면서, 또 현대를 지난 오늘날 소설을 읽으면서, 오늘날과 가까울수록 문학하는 사람들 말이 재미없다고 느낍니다.

 일제강점기에 한글을 마음껏 펼치지 못하면서 적어 내려간 작품에는 ‘깰락졸락’이라느니 ‘큰심부름 잔심부름’이라느니 ‘꾸중받이’라느니 ‘맞방망이’라느니 ‘염통이 파득파득’이라느니 ‘신트림’이라느니 ‘여기 오는 맡’이라느니 ‘퉁을 주었다’라느니 ‘까막잡기’라느니 ‘멋질린’이라느니 ‘뭇주룩하게’라느니 ‘겅성드뭇’이라느니 ‘무안새김’이라느니 ‘치훑고 내리훑고’라느니 ‘샐닢’이라느니 하는 말마디를 마주합니다. 따로 살려쓴다는 토박이말이 아니라, 여느 자리에서 수수하게 주고받는 말마디입니다. 그런데, 이런 말마디 가운데에도 “만족의 미소” 같은 일본 말투가 끼어들곤 합니다.


.. “저를 모르시겠읍니까. 제가 ××이 아닙니까.” “응, 네가 ××이냐…….” 우는 듯이 이런 말을 하고 그윽하나마 내가 잡은 손에 힘을 주는 듯하였다. 그 개개 풀린 눈동자 가운데도 반기는 빛이 역력히 움직였다. 할머니의 병환이 어젯밤에는 매우 위증해서 모두 밤새움을 한 일, 누구누구 자손을 찾던 일, 그 중에 내 이름도 부르던 일, 지금은 한결 돌린 일 …… 온갖 일을 중모는 나에게 아르켜 주었다. 나는 그날 밤을 누울락앉을락, 깰락졸락 할머니 곁에서 밝혔다. 모였던 자손들이 제각기 돌아간 뒤에도 중모만은 할머니 곁을 떠나지 않았다. 불교의 독신자인 그는 잠오는 눈을 비비기도 하고 기침으로 목청을 가다듬기도 하면서 밤새도록 염불을 그치지 않았다 ..  (130∼131쪽/할머니의 죽음)


 오늘날 중학교와 고등학교에서도 아이들한테 ‘권장도서목록’이나 ‘필독도서목록’을 내어주며 이러한 책을 안 읽으면 두들겨 팬다든지 몽둥이찜질을 한다든지 할까 궁금합니다. 문학이란 대학입시를 치르며 살필 시험문제로만 여기면 그만이라고 다루는지 궁금합니다. 삶을 다루는 문학을 학교에서 배울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아니, 학교에는 아이들 삶이 있는지 궁금하고, 집에서는 아이들이 스스로 삶을 사랑하며 일굴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지 궁금합니다. (4344.1.27.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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