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그림책 / 숲노래 어제책 2023.1.12.

숨은책 800


《정원사 곰》

 피브 워딩턴·셀비 워딩턴

 김세희 옮김

 비룡소

 2002.1.15.첫/2015.3.25.3벌



  1948년에 나왔다는 조그마한 《석탄집 곰 Teddy bear Coalman》이 있다는 얘기를 이 그림책이 나온 지 얼추 일흔 해쯤 지나서야 들었습니다. ‘곰아이(테비 베어 인형)’로 그림책을 여민 두 사람은 1979년부터 틈틈이 뒷이야기를 그렸고, 한글판으로는 《제빵사 곰》, 《정원사 곰》, 《우체부 곰》 세 가지가 2002년에 나왔습니다. 작고 사랑스러운 그림책을 장만하려고 알아볼 즈음에는 이미 판이 끊겼더군요. 몇 해 동안 도무지 찾을 길이 없더니, 한글판 《정원사 곰》하고 《우체부 곰》을 2022년 겨울에 드디어 찾았습니다. 1948년부터 1992년까지 일곱 갈래 일꾼 이야기를 담아낸 작은 삶길은, 어린이가 어른으로 자라나는 길에 해볼 만한 아름다운 손빛으로 여길 만합니다. 하나같이 몸을 쓰면서 하루하루 똑같이 움직이는 듯한 얼거리이지만, 불을 지피고 빵을 굽고 글월을 나르고 풀꽃나무를 돌보고 논밭·꽃밭을 가꾸고 배를 젓고 불을 끄는 일감은, 작고 수수하면서 조용히 빛나는 살림자리라고 느껴요. 우리나라 어른들은 1948년부터 1992년 사이에 이 땅 아이들한테 ‘어떤 살림꾼’ 앞길을 들려주거나 보여주었을까요? ‘3차·4차 산업’이 아닌 ‘스스로 즐겁게 오늘 하루를 짓는 살림빛’을 속삭이는 어진 어른은 어디 있을까요?


ㅅㄴㄹ


#TeddyBearGardener #PhoebeWorthington #SelbyWorthington


《석탄집 곰 Teddy bear Coalman》(1948)

《빵굽는 곰 Teddy bear Baker》(1979)

《우체부 곰 Teddy Bear Postman》(1981)

《훍살림 곰 Teddy Bear Farmer》 (1985)

《밭지기 곰 Teddy Bear Gardener》(1986)

《나루꾼 곰 Teddy Bear Boatman》 (1990)

《불끄는 곰 Teddy Bear Fireman》(1992)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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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어제책/숲노래 만화책 2023.1.5.

숨은책 760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1》

 미야자키 하야오

 서현아 옮김

 학산문화사

 2000.11.25.



  곧잘 지난일을 떠올립니다. 푸른배움터를 여섯 해 다닐 적에는 새벽 일찍 일어나서 캄캄길을 걸었고, 인천하고 서울을 전철로 오갈 적에는 집에서 떠나는 첫 버스를 타고 움직였습니다. 날마다 사람물결이 가득한 인천·서울길이나 수원·서울길이나 의정부·서울길은 그야말로 불수레(지옥철)예요. 그때 그 불구덩이를 견딘 힘은 오직 책 한 자락입니다. 밀리고 밟히고 눌리면서도 한 손에 책을 쥐는데, 아직 바람이(에어컨)가 없던 낡은 칸마다 미닫이를 열면 문득 나비가 팔랑거리며 들어와서 사람바다 위로 가볍게 날다가 다시 밖으로 나가더군요. 멍하니 보았어요.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서울에 일터·배움터를 두고 오가는 얼거리는 ‘얼른 서울에 들어가’거나 ‘얼른 부릉이(자가용)를 몰아야’ 한다고 일깨우는 셈일까요? 또는 서울굴레를 벗어나 조용히 시골로 옮기며 흙을 밟아야 한다는 뜻일까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1》를 처음 읽던 2000년에는 서울 한복판에서 책을 팔며 일했고(출판사 영업부), 일을 마치면 서울 곳곳 헌책집에 들러 철마다 다른 바람과 책빛을 쐬었습니다. 숲이 있기에 종이를 얻어 책을 짓는데, 숲이 있어서 서울은 먹고살며 굴러갈 수 있는데, 우리는 숲길을 잊은 채 아직도 총칼(전쟁무기)을 쥐는 수렁입니다.


ㅅㄴㄹ

#NausicaaOfTheValleyOfWind #風の谷のナウシカ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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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숨은책 2023.1.1.

헌책읽기 6 남의 문화유산 답사기 1



  척 보아도 어느 책을 따라하되 따라하지 않는 척하는 결을 보여주는 《남의 문화유산 답사기 1》를 1997년에는 알지 못 했습니다. 저는 1997년에 강원 양구 멧골짝에서 날마다 금강산을 맨눈으로 바라보면서 한 손에 총을 쥐었거든요. 1997년 12월 31일에 드디어 강원도 멧골짝 눈밭을 떠나고서 새뜸나름이(신문배달부)로 돌아오는데, 둘레에서 전유성 씨 책이 재미있다고 읽어 보라 말하는 이가 제법 있었습니다. 그러나 슥 보고는 어쩐지 재미없더군요. 스물다섯 해가 지난 2022년에 모처럼 다시 들추자니 첫머리가 남다르네 싶었다가도, 바로 17쪽 이야기부터 내내 재미없더군요. ‘유럽 배낭여행 이야기’를 쓸 생각을 했다면서 막상 ‘방송국에서 대주는 돈으로 널널하게 다닌’ 발걸음으로는 뼛골이든 마음으로든 스밀 만한 이야기하고 멀게 마련입니다. 스스로 다리품에 손품을 팔면서 만난 이웃나라가 아니라, 심부름꾼(통역·짐꾼·운전사)을 거느리는데다가 밥값도 찻값도 술값도 길삯도 스스로 치르지 않으면서 무슨 ‘배낭여행’이 될까요? 이러다 보니 발바닥으로 느끼거나 누린 ‘이웃나라 살림(문화유산)이 아니’라 ‘남들(아는 사람들)한테서 주워들은’ 이야기를 잔뜩 끼워넣고, 주저리주저리 잔소리가 가득합니다. 일부러 힘들게 돌아다녀야 배우거나 느끼지 않습니다. 손쉬운 길로 가서 이름을 얻거나 판다면, 누구보다 전유성 씨 스스로 배울거리가 없을 테지요. 다른 곳(익살판)에서는 이름을 날리거나 팔았을는지 모르나, 글판에서는 영 시답잖구나 싶어요. 구태여 ‘익살스러워 보일 글’을 쓰려고 용을 쓸 까닭이 없어요. ‘남’을 이야기할 까닭도, 남들이 들려준 말을 잘 옮겨서 붙여야 할 까닭도 없습니다. 우리나라를 다리품을 팔아서 돌아다니든 이웃나라를 발품을 팔아서 누비든, ‘내 눈(우리 눈)’으로 보면 될 뿐입니다. 책이름조차 그렇습니다. 유흥준 씨 책이름을 흉내내려 했으면, 차라리 “너네 문화유산 답사기”로 붙였으면 그나마 나았으리라 봅니다.


ㅅㄴㄹ


《남의 문화유산 답사기 1》(전유성, 가서원, 1997.4.15.첫/1997.5.25.10벌)



배낭여행에 웬 촬영팀이냐 하면, 우리 부부가 유럽으로 여행을 간다니까 이왕 가는 거 비디오로 좀 찍어서 방송으로 내보내자는 데가 세 군데 있었다. (17쪽)


잘돼 있다고 소문난 파리 지하철이 알고 보면 굉장히 불편하다는 걸 오래 있어 본 사람이나 유학생들은 안다. 화장실 없지 문도 자동이 아니지 칸마다 왔다갔다고 안 되지. 정말 엄청 불편하다고 한 친구가 말했다. 그러자 다른 한 친구가 대답한다. “야, 임마! 대신 잘 빠진 애들이 많이 타잖아!” 그건 그래!!! (36쪽)


산책을 좋아하는 부모들은 아이들을 유모차에 태우고 역사적인 건물들 사이를 지나고 공원을 지나고 다리를 건넌다. (100쪽)


그런데 다니다 보면 음식을 배달해 먹을 수 있는 한국이 역시 좋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물론 피자는 외국에서도 배달해 주지만. 집에서 시켜먹고 싶은 게, 누워서 편안하게 먹고 싶은 게 어디 피자뿐이랴!!! 그래서 우리는 배달민족이다!! (137쪽)


프랑스 성인 프로그램은 어떻게 보면 일본 것보다 더 야하다. 굉장하다. 충격을 받는다. 수요일, 금요일, 토요일 밤 열두 시 넘어서 케이블TV 채널을 이리저리 돌려 보아라. 공중파는 수요일날 틀어 보아라. 여기 처음 온 사람들은 처음에 열심히 보지만 나중엔 안 본단다. 남이 하는 것 보면 뭘 하냐! 본인이 직접 해야지!!! (229쪽)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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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읽기 / 숲노래 어제책 2022.12.28.

헌책읽기 5 아톰의 철학



  예전에는 그림책을 낮잡는 분이 많았으나, 이제는 많이 바뀌었습니다. 만화책을 낮잡는 분이 많습니다. 앞으로도 만화책을 낮잡는 물결은 바뀌기 어려울 듯싶습니다. 그림책을 안 읽어 본 사람이라면 그림책을 낮잡게 마련이요, 얼핏 그림책을 펼쳤더라도 찬찬히 읽고 누리려는 마음이 아니라면, ‘그림책을 조금 맛보았어도 낮보는 마음이 안 가십’니다. 만화책을 놓고도 매한가지요, 사진책을 놓고도 비슷합니다. 서울에서 살기에 ‘서울을 맛보며 알아갑’니다. 오늘날은 거의 모두 서울(도시)에서 살기에, 다들 서울을 맛보면서 꽤 알 뿐 아니라, 서울에 익숙합니다. 이와 달리 거의 모두 시골에 안 사는 터라, ‘막상 시골에서 태어난 사람’조차 시골을 모를 뿐 아니라, 시골을 알 마음조차 없게 마련입니다. 《아톰의 철학》은 ‘만화책이란 무엇인가’하고 ‘사람들이 만화를 누구나 즐기도록 확 바꾸어낸 테즈카 오사무는 어떤 사람인가’ 두 가지를 들려주려 합니다. 만화를 만화로 바라보면서 누구나 곁에서 새롭게 마음을 다스리는 길동무로 삼기를 바라는 마음이 물씬 흐르고, 이 만화를 어린이·푸름이하고 어른 곁에 살포시 놓는 살림빛을 가꾸고 편 테즈카 오사무는 ‘무슨 마음으로 그리고, 무슨 넋이 만화에 흐르는가’를 풀어내는 줄거리예요. 흔히 “만화님(만화의 신)” 같은 이름을 붙이지만, 이보다는 “만화사랑”이란 이름이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오직 사랑이기에 환하게 피어나도록 가꾸거든요. 오로지 사랑이기에 “누구나 만화책”으로 돌봅니다. 그림책은 “애들이나 보는 책”일 수 없어요. 만화책도 “애들이나 볼 책”일 수 없습니다. ‘한두 쪽으로 펼친 그림에 이야기를 얹는 그림책 얼거리’라면 ‘칸으로 크고작게 쪼개어 글·그림을 여미는 이야기에 얹는 만화책 얼거리’입니다. 어깨동무(평화)를 이루는 길은 늘 사랑 하나라는 마음을 그림꽃(만화)에 담기에 두고두고 아름다이 누립니다. 네, ‘그림꽃’이란 이름이 어울리는 ‘만화’입니다.


ㅅㄴㄹ


《아톰의 철학》(사이토 지로/손상익 옮김, 개마고원, 1996.8.20.)



동물원의 우리 속에서 평생 인간이 주는 먹이를 받아먹으며 산다는 것은 판쟈 왕가의 왕자에게는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24쪽)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발표된다는 기약도 없는 만화를 매일매일 그려 나갔던 데즈카. 만화를 그리는 것도 보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던 전쟁이란 상황으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만약 또 전쟁이 일어나 자유롭게 만화를 그릴 수 없는 사회가 된다면 큰일이다. 절대로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결의가 이 젊은 만화가를 열정적으로 만화에 매달리게 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전쟁은 1945년 8월 15일에 끝나지 않았다. (45쪽)


창작하는 사람의 ‘이런 것을 말하고 싶다’는 메시지가 포함되어 있지 않은 만화는 오랫동안 독자의 사랑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데즈카는 반복해서 말하곤 했다. 그러나 그 메시지가 강요된다거나 독선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가장 경계한 사람 역시 데즈카였다. (64쪽)


데즈카는 … 또 시대상황과 관계없이 단지 하루하루 생계를 꾸려가는 민중을 묘사하면서 결코 ‘정의와 악’이란 상투적인 도식을 쓰지 않았다. 각 개인의 삶의 방식에 모두 애정을 담아 묘사하는 것으로, 그의 만화 창작관을 실증해 보였다. (163쪽)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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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읽기 / 숲노래 어제책 2022.12.28.

헌책읽기 4 할아버지의 부엌



  나라에 이바지하고 일터(회사)에 몸바치는 사내가 수두룩합니다. 요새는 사내 못잖게, 때로는 사내보다 더 나라하고 일터에 이바지하거나 몸바치는 가시내가 참 많습니다. 곰곰이 보면 어린배움터부터 ‘바깥살이(사회생활)’를 해야 마치 ‘나찾기(자기계발)’를 이룬다고 가르칩니다만, 참말로 집밖을 오래 떠돌면서 돈을 벌고 이름을 얻고 힘을 부려야 ‘나찾기’일까요? 요새는 손수 밥차림을 하는 사내가 부쩍 늘었으나 아직 밥차림을 등지거나 못 하는 사내가 수북해요. 더구나 밥차림을 익히거나 다루면 ‘가시내답지 않다(성평등하고 멀다)’고 여기면서 손에 물을 안 대는 분이 차츰 늘어납니다. 1990년에 우리말로 나온 《할아버지의 부엌》은 나라나 일터에만 온마음을 다하고 살다가 자리에서 물러난 사내들이 ‘마을에 동무도 이웃도 없을 뿐 아니라, 마을을 하나도 모르고, 집살림이며 집안일은 더더욱 모르는 바보스러운 하루’를 나이든 딸아이가 하나하나 짚고 가르쳐 주는 줄거리를 들려줍니다. ‘할아버지가 되고서야 비로소 홀로서기다운 홀로서기를 처음 배우는 아장걸음’은 사내를 보여줘요. 그런데 앞으로는 “할아버지 부엌”뿐 아니라 “할머니 부엌”을 말할 때로 다가간다고 느껴요. 2030년을 지나고 2040년 무렵이면 부엌칼도 도마도 다룰 줄 모르는 가시내가 수북하지 않을까요? 손전화로 시킬 줄은 알되 집에서 살림할 줄 모르는 순이돌이가 넘실거리겠지요? 그동안 나라지기(대통령)를 마친 이들은 하나같이 우람집(대궐)을 짓고서 숨었습니다. 시골 오두막이나 서울 골목집에 깃들어 ‘수수한 들꽃살림’을 짓는 이가 없습니다. 높다란 벼슬이나 감투를 거머쥔 이도 매한가지입니다. 글이름을 판 사람도 엇비슷합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을 바라보는 삶일까 처음부터 짚을 노릇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이 배움터에서 무엇을 보고 자라는지 다시 돌아봐야지 싶습니다. 부엌일이며 집안일을 안 하고서 배움터만 오래 다니는 사람은 누구나 바보라는 굴레에 스스로 갇힙니다.


ㅅㄴㄹ


《할아버지의 부엌》(사하시 게이죠/엄은옥 옮김, 여성신문사, 1990.5.10.)



아버지가 ‘혼자살기’를 선언한 때부터 나는 경제적으로 가계를 꾸리는 방법, 혼자 사는 방법을 아버지에게 가르쳐 드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34쪽)


언니들은 아버지가 욕심쟁이고 자기 멋대로라고 한다. 그러나 혼자 사는 나는 아버지의 기분을 손에 쥐듯 알 수 있다. 나는 너무 바쁘다 보니 외로움을 뼛속 깊이 느낄 사이가 없지만 아버지는 하루 종일 자유시간. (190쪽)


회사를 위해 일생을 바치고, 가족을 위해 이를 악물고, 때로는 마음에 들지 않는 일도 해왔다. 그리고 나서 문득 돌이켜보니, 거기에는 따뜻하게 마음을 쉴 수 있는 가정이 없었다. (207쪽)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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