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홀릭 - 두 바퀴 위의 가볍고 자유로운 세상을 만나다
김준영 지음 / 갤리온 / 2009년 6월
평점 :
품절


 



 한국땅에서 ‘자전거 즐김이’는 ‘서울 사는 남자 회사원’뿐?
 [잠깐 읽기 46] 김준영, 《자전거홀릭》



- 책이름 : 자전거홀릭
- 글쓴이 : 김준영
- 펴낸곳 : 갤리온 (2009.6.10.)
- 책값 : 13000원



 (1) 우리 나라에서 자전거란 무엇인가


 지난 5월부터 바로 어제(7월 14일)까지, 모두 아홉 차례에 걸쳐 한 주에 한 번씩, 경기도 파주에 있는 대안학교에서 ‘자전거 정비’ 수업을 맡아 이끌었습니다. 열세 살부터 열일곱 살인 아이들 열둘하고 했던 ‘자전거 정비’ 수업에서는, 망가지거나 다친 자전거를 어떻게 손질하느냐부터, 어떻게 자전거를 타야 우리 몸에 알맞는지, 자전거를 생각하는 마음과 몸짓이란 어떠할 때가 좋은지 들을 골고루 다루었습니다. 그리고, 이 자전거 수업을 이끄는 저는 인천에서 파주로 자전거를 타고 오갔습니다.

 어제는 비바람이 거세게 몰아쳤습니다. 아무래도 인천부터 파주까지 가기에는 만만하지 않을 뿐더러 자칫 다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전철에 자전거를 싣고 길을 나섰으며, 인천부터 파주까지 전철로 가는 두 시간에 걸쳐 책 두 권을 읽었습니다.


.. 뭐니 뭐니 해도 자전거는 본인의 마음에 들어야 하는 게 첫 번째 조건인 것만은 사실인가 보다 … 뭐니 뭐니 해도 자전거 타기의 기본은 기술보다는 마음가짐에 있는 것 아닐까? 아무리 좋은 기술로 현란한 라이딩쇼를 펼친다 하더라도 남을 배려하는 마음과 여유로운 마음이 없으면 자칫 위험한 질주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  (43, 103쪽)


 주엽역에서 책을 가방에 넣은 다음 비닐로 잘 싸 놓습니다. 모자를 쓰고 안경을 끼고 비옷을 입습니다. 비오는 날에는 안경을 쓰곤 하는데, 빗물이 눈에 튈 때 눈을 감다가 미끄러질 뻔한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비옷을 입으면서도 모자를 쓰는 까닭은 비옷만 입으면 머리 쪽에서 흐르는 빗물이 얼굴로 타고 흐르기도 하지만, 빗물이 곧바로 얼굴을 때려서 앞을 보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비옷을 입고 모자를 쓴 채로 달릴 때에는 고개가 많이 아픕니다. 파이거나 기울어진 찻길에는 으레 빗물이 고여 있는데, 이런 길을 살피고 뒷거울로 차흐름을 보노라면 고개를 위로 많이 젖힐 수 없어 이삼십 분이 넘어가면 뒷목이 뻣뻣해집니다.

 여느 날 자전거를 달릴 때에도 늘 느끼지만, 비오는 날이 되니 우리 나라 찻길이 참으로 엉망진창임을 새삼 느낍니다. 왜냐하면, 찻길 가운데 쪽은 어떠할는지 모르나, 자전거가 달릴 찻길 가장자리는 울퉁불퉁한 데에다가 기울어져 있기 일쑤이고 깊이 파인 데가 많습니다. 이런 탓에, 비오는 날 자동차들이 찻길 가장자리에서 씨잉 하고 내달리면, 거님길을 걷던 사람들은 그예 물벼락을 맞을밖에 없구나 싶습니다.

 그런데, 찻길 가운데 쪽을 달리는 자동차 가운데 한 대가 자전거한테 물벼락을 뒤집어씌웁니다. 이 자동차는 빗길임에도 무시무시하게 내달리다가 끼익 하고 멈추었는데, 신호등과 길흐름을 살피며 달리던 제 눈으로 보자면, 이 자동차는 어차피 신호에 걸려 더 달릴 수 없었음에도 내처 달렸고, 아무래도, 빗길 자전거한테 물벼락을 씌워 놀려 주려는 생각이었다고 느낍니다.

 모든 자동차꾼이 이렇게 괘씸하고 심술궂지 않습니다. 100대에 2대 꼴로 이런 심술쟁이 자동차꾼을 만납니다. 그런데, 심술쟁이는 아니더라도 ‘길에는 자동차만 다녀야 한다’고 생각하는 자동차꾼은 100대에 20대 꼴이 아닌가 하고 느낍니다. 왜냐하면, 빗길을 살금살금 달리는 자전거 앞에 난데없이 끼어들어 한참 밍기적거리다가 슬그머니 오른쪽 깜박이를 넣고 아주 느릿느릿 꺾어 들어가는 택시며 자가용이며 있기 때문입니다.


.. 내가 느낀 일본의 자전거는 철저하게 생활 속에 녹아 있다는 점이다. 아침의 출근도, 학생들의 등교도, 엄마들의 장보기도, 아이들의 놀이도, 퇴근도 모두 자전거를 이용하는 사람들로 도로가 북적인다. 재미있는 것은 그들은 헬멧도 없고, 자전거 복장 차림도 아니었다. 양복에 교복에 평상복으로 자전거를 타고 다닌다. 며칠을 둘러보아도 근사하게 차려입고 날쌘 속도로 지나는 라이더를 본 기억이 없다 … 신기한 것은 매장 대부분의 자전거가 분명 유명 브랜드의 산악자전거인데도 고급 부품을 쓰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우리 나라의 경우 보통 LX나 XT급을 중급 부품이라 생각하고 데오레급은 입문용으로 생각하고 있는 데 비해, 미국의 숍은 XT를 굉장히 고급 부품으로 생각한다. 나의 자전거가 XT로 꾸며졌다고 했을 때, 혹시 내가 자전거 선수가 아니냐고 되묻기도 했다. 내가 보는 자전거 문화나 숍의 주인장 얘기를 들어 봐도, 미국은 레저용으로 즐기기 위한 자전거 문화가 많이 발달했음을 알 수 있었다 ..  (78∼79쪽)


 여느 날에는 이십 분이면 넉넉히 달리던 길을 사십 분 남짓 달려 파주에 있는 대안학교 앞에 닿습니다. 그동안 손질해 놓은 자전거 두 대가 비를 고스란히 맞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대안학교 아이들 대여섯이 비 안 맞는 자리에서 놀고 있습니다. 아이들을 불러 “자전거를 이렇게 비 맞게 놓으면 어떡해요?” 하고 묻습니다. 달리 대꾸가 없습니다. “이 자전거들을 애써 손질하고 닦아 주었어도 비 맞히면 예전하고 똑같아지니까, 비 안 맞는 자리로 옮겨 놓으셔요.” “누가 저기다 놓았어? 내가 안 놓았는데.”

 마침 이때에 밖에 있던 아이들이 이 자전거들을 비 맞는 자리에 놓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누가 놓았든, 대안학교 아이들이 모두 번갈아 타는 자전거라면, ‘내 자전거’가 아니어도 잘 간수하고 다스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전거 수업을 하며 아이들한테 이것저것 묻기도 하고 이야기를 나누는데, 아이들 가운데 ‘자전거를 장만한 뒤로 여태까지 자전거를 한 번이라도 닦아 준 적이 있던’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는 참 놀랄 만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자전거뿐 아니라 셈틀도 그렇고 책상도 그렇습니다만, 또 밥상도 그렇고 방바닥도 그렇습니다만, 더구나 옷가지도 그렇고 신발과 악기도 그렇습니다만, ‘닦고 매만져 주지 않아도 되는 물건’이란 있을까요? 오늘날 한국사람이면 누구나 으레 갖고 있는 손전화기에 짜장면 국물이 튀었을 때 국물 자국 그대로 두는 사람이 있을까요? 하다 못해 바짓단에 슥슥 문질러 닦기라도 하지 않을까요? 자전거에 흙탕이 튀면? 자전거가 비를 맞은 다음에는? 자전거에 기름때가 끼었다면? 마땅히 닦아 주어야 합니다.

 아이들한테 “친구들이 자전거를 닦아야 하는 줄 몰랐을 수 있어요. 그러면, 친구들 부모님은 어떠한가요? 친구들 부모님 가운데 친구들한테 자전거를 닦으라고 가르치거나 부모님이 몸소 자전거를 닦은 적이 있는가요?” 하고 다시 묻습니다. 어느 아이도 저희 엄마 아빠가 자전거를 닦은 적이 없고 닦으라 말한 적이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 그럼 두 번째, 자전거는 차와 같은 권리를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는가? 역시 그렇다. 법적으로는 거의 같은 권리가 있다고 할 수 있지만 아쉽게도 자전거는 도로에서 약자가 되어 동등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천덕꾸러기로 취급받기 십상이다. 불공평하지만, 우리 나라 도로 구조와 교통 문화가 많이 개선되었다곤 해도 자전거에는 아직 그리 관대하지 못하다. 그래서 ‘발바리’와 같은 모임이 생겨 자전거의 권리를 찾고자 함이 아닌가? ..  (301쪽)


 파주에 있는 대안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 사는 집은 거의 일산에 있습니다. 일산부터 파주까지는 그리 멀지 않습니다. 걸어가면 한 시간 반 남짓 걸리겠지만, 자전거를 타면, 넉넉잡아 삼십 분 남짓입니다. 그렇지만 이 길을 자전거로 오가는 아이들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리고, 이 길을 자전거로 오가는 선생님이나 학부모님 또한 한 분도 없습니다. 모두 자가용 또는 버스를 탑니다.

 제가 즐겨가는 동네 구멍가게 할아버지는 일흔을 넘긴 나이이지만, 가게 물건을 떼려고 손수 자전거를 끌고 가서 짐받이에 그득그득 묶어서 날라 오곤 합니다. 당신이 입는 양복을 빨래방에 맡기거나 찾아올 때에도 한손으로 양복을 들고 한손으로 손잡이를 잡으며 타고 다닙니다. 동네에 있는 솥집 할아버지도, 동네에 있는 쌀집 할아버지도, 동네에 있는 도매상집 할아버지도, 언제나 자전거 짐받이에 짐을 잔뜩 묶고는 나릅니다.

 이분들 자전거를 보면 짧아도 스무 해를 탄 자전거요, 길면 마흔 해를 훌쩍 넘긴 자전거들입니다. 빠르게 내달리지는 못하는 녀석이지만, 당신들한테 꼭 알맞춤하게 달릴 수 있는 탈거리이며, 당신들이 눈을 감고 이 땅을 떠나는 날까지 당신들한테 두 다리가 되어 주는 길동무 노릇을 하리라 봅니다. 아마, 당신들 스스로 느끼실 텐데, 당신들한테 자전거는 그냥 자전거가 아닌 재산이었고 오랜 길벗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요새 돈 좀 있고 자전거 멋나게 타고 다니는 사람이 보기에’ 하찮거나 시시한 짐자전거일 뿐일지라도, 당신들은 당신 자전거가 낡거나 다치지 않도록 틈틈이 손질하고 닦아 주며, 비바람이나 햇볕에 망가지지 않게끔 간수합니다.


.. 어느 날 동료의 자출 자전거를 보니 체인에 오일이 말라 있기에 내가 물었다. “야∼ 너는 자전거 좀 닦아 주고 기름칠 좀 해 주지. 자전거 꼬라지가 그게 뭐냐?” 친구가 내게 그런다. “야∼ 오버하지 마. 청소는 뭣 하러 하는데?” 당당한 그의 한마디에 뭐라 해야 할지 망설였던 기억이 있다 ..  (366쪽)


 할아버지 아저씨한테는 짐자전거가 당신들 생활자전거, 곧 ‘삶자전거’입니다. 할머니와 아주머 가운데에도 짐자전거를 타는 분이 있으나, 으레 바구니 달린 자전거를 타곤 합니다. 이를테면 ‘장바구니 자전거’인데, 장바구니 자전거가 바로 당신들한테 ‘삶자전거’입니다.

 자전거로 살아가는 할매 할배 아재 아지매는 언제나처럼 자전거를 몹니다. 빨리 내닫는 자전거가 아니라 알맞게 바람을 느끼는 자전거요, 길을 느끼고, 동네사람을 만나 인사하며, 짐을 싣는 자전거인 가운데, 서로서로 태워 주는 자전거이기도 합니다.

 그러고 보면, 초중고등학교 아이들 가운데 학교를 오가며 자전거를 타는 아이들이 제법 있기는 있으나, 어느 아이도 ‘짐자전거’나 ‘장바구니 자전거’를 타지 않습니다. 거의 모두 ‘유사 산악자전거’를 타거나 ‘신문 경품 자전거’를 타곤 합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도시에서 돈 제법 받는 회사원쯤 되면 ‘겉보기에 멋지거나 예쁘장한(이른바 뽀대나는)’ 자전거를 큰돈 들여 지릅니다. 멋져 보이는 자전거를 지른 다음에는 자전거옷을 갖추어 입고, 자전거장갑에 자전거모자에 자전거수건에 자전거안경에 자전거가방에 자전거물병에 자전거속도계에 자전거등불에 …… 목돈이 쏠쏠히 빠져나가는 물품 사들이기에 빠져들고 맙니다.
 





 (2) 자전거 ‘매니아’야말로 자전거를 ‘배워야’ 하지 않을까


 김준영 님이 쓴 자전거책 《자전거홀릭》을 읽었습니다. 인천에서 파주로 자전거 수업을 하러 가는 전철길에서 금세 읽습니다. 인터넷 네이버까페 ‘자출사’에서 ‘쭈니’라는 또이름을 쓰는 김준영 님은, 모임이름마따나 ‘자전거로 출퇴근을 하는 사람’입니다. 비록 ‘생활자전거로 출퇴근’을 하는 분이 아닌 ‘산악자전거로 출퇴근’을 하는 분이지만, 자전거 사랑이 남다르며, 섣불리 겉멋을 내세우는 자전거꾼 또한 아닙니다. 그러니, 이와 같은 《자전거홀릭》이라는 책, 우리 말로 하면 ‘자전거중독자’ 또는 ‘자전거에 미친 사람’ 또는 ‘자전거에 푹 빠진 사람’이라는 책을 써낼 수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 무시무시한 속도로 달리는 라이더들에겐 속도 줄이는 것을 병적으로 싫어하는 공통점이 있는 것 같다. 빠르게 달리다가 장애물이 나타나면 속도를 줄이지 않고 아슬하게 피하거나, 호각이나 벨을 신경질적으로 불거나 울려 상대가 피하게끔 만든다. 잠시 멈추었다가 가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가? ..  (107쪽)


 자전거책 《자전거홀릭》에는 ‘후회하지 않는 자전거 구입’, ‘자전거 구조와 명칭에 대한 이해’, ‘내 몸에 자전거를 맞추는 방법’, ‘중고 자전거 구입 요령’, ‘자전거 레이서의 자세’, ‘주행 기술 익히기’, ‘안전하게 자전거를 타기 위한 계명’, ‘기어비 계산하기’, ‘이상적인 페달링 익히기’, ‘자전거 용품 총정리’, ‘자전거 도난 예방하기’, ‘사계절 자출 요령’, ‘자전거 응급 조치 요령’, ‘자전거 사고 시 대처법’, ‘자전거- 업그레이드’, ‘일상적인 자전거 점검’, ‘본격적인 자가정비의 세계로’, ‘주기적인 자전거 청소’, ‘환상의 루트’, 이렇게 여러 가지 자전거 이야기를 다룹니다.

 책날개에는 “자전거 초보와 숙련된 레이서 모두에게 꼭 필요한 유용한 정보들”이라는 말이 붙어 있습니다.

 곰곰이 헤아려 봅니다. 틀림없이 이런저런 이야기들은 ‘도움되는 정보’입니다. 다만, 이 이야기들이 ‘꼭 있어야 할’ 이야기라든지, ‘자전거 새내기가 꼭 익힐’ 이야기라든지, ‘자전거 오래 타거나 잘 타는 사람이 반드시 알아둘’ 이야기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이야기들은 ‘자전거를 사면 딸려 나오는 자전거제품설명서’에 차근차근 실려 있거든요. 더구나 ‘자전거제품설명서’에는 ‘교통법규 및 도로주행 시 유의사항’이나 ‘승차 전 필수 확인사항’도 나와 있으며, ‘점검, 조정의 시기와 방법’에다가 ‘주차 및 보관 시 유의사항’까지 나와 있고, ‘올바른 승차자세와 핸들과 안장 조립 및 높이 조절’이 그림과 함께 낱낱이 실려 있습니다.


.. 내가 자출을 시작한 지도 오래되었다. 자출하면서 늘 느끼는 것이 자전거를 타는 이들 중에 헬멧 쓰는 이가 의외로 많지 않다는 점이다. 도로에서도 강변에서도 자전거 타는 이들의 대다수가 쓰지 않은 것을 볼 수 있다. 연세 있는 분들이나 나이 어린 친구들이 헬멧 쓴 모습은 더욱더 찾아보기 어렵다. 특히 교복 차림의 학생이 헬멧을 쓴 경우는 자전거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 이래 단 한 차례도 본 기억이 없다 ..  (179쪽)


 대안학교 아이들과 자전거 수업을 하면서 “친구들은 자전거를 살 때에 자전거제품설명서를 받았나요?” 하고 물어 보았습니다. 어느 아이도 받지 못했다고 이야기합니다. 아마 못 받았을 수 있는데, 못 받았다기보다 받았는데 쓰레기통에 넣었다고 해야 옳지 않으랴 싶습니다. 가스렌지를 사든, 연고를 사든 어디에나 설명서는 꼭 들어 있습니다. 자전거를 사는데 설명서가 안 들어 있겠습니까. 손전화기를 다루는 설명서만 해도 100쪽이 넘어요. 그런데 자전거 설명서가 없겠습니까.

 저는 제가 단골로 다니는 자전거집에서 여러 가지 자전거설명서를 잔뜩 얻어 놓고 있습니다. 제 둘레에서 자전거를 처음 배우는 사람한테 주려고요. 아직 자전거를 사지 않았더라도 자전거설명서를 읽으면서 하나하나 익혀 나갑니다. 그리고, 이렇게 미리 익힌 이야기를 자전거를 타면서 몸으로 받아들이거나 새기고, 나중에는 스스로 ‘설명서에 못 담은 더 깊은 이야기를 다룬 자전거책’을 한 권 두 권 읽으며 배우도록 이끌어 줍니다.

 자전거설명서 맨 앞에는 “본 제품 사용 설명서는 자저거 사용 전에 잘 읽으시고 올바르게 사용해 주십시오” 하는 말이 적혀 있고, 다음에 빨간 빛깔로 “어린이에게는 반드시 읽어 주고 지도하여 주십시오” 하는 말이 적혀 있습니다.

 자, 생각해 봅시다. 오늘 우리 삶터에서 아이들한테 자전거를 사 주는 어버이 가운데 ‘자전거설명서를 읽어 주는 아빠 엄마’는 몇 사람쯤 될까요? 아이들은 이런 설명서가 있는지 없는지 잘 모를 뿐더러, 생각조차 못합니다. 그러면 우리 어른들은 어떠하지요? 우리 어른들은 ‘산악자전거’를 장만하든 ‘경주자전거’를 마련하든 ‘작은자전거’를 사들이든 ‘짐자전거’를 사서 타든, 이 자전거가 어떤 자전거이며 어떻게 타야 즐겁고 올바르고 서로한테 도움이 될는지를 생각하고 있습니까?


.. 헬멧을 잠깐 벗더라도 두건이 없으면 헬멧에 눌리고 바람에 헝클어진 머리가 좀 흉해 보인다. 또 라이딩 시에 몇 무더기 머리카락이 헬멧 구멍 사이로 나와 휘날리는 경우도 보는데, 썩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다 … 대부분의 고급 기종 자전거에는 물병 케이지를 걸 수 있도록 작은 나사 홈 두 개가 약 10센티미터 간격으로 있다. 생활자전거에 있는 경우는 드문 것 같다 ..  (191, 195쪽)


 자전거책 《자전거홀릭》은 예쁘장한 그림과 부드럽고 쉬운 말씨로 ‘자전거 새내기’와 ‘자전거 솜씨쟁이’한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자전거설명서’에 담긴 밑바탕 이야기 틀을 넘어서지 않는다고 느낍니다. 자전거집에서 자전거를 장만하든 인터넷으로 자전거를 마련하든, 우리가 ‘거저로’ 얻는 설명서에서 다루는 이야기 깊이보다 깊게 파고들지 못했고, 널리 아우르지 못했다고 느낍니다.

 자전거는 길에서 달립니다. 길이란 사람이 걷는 거님길일 수 있고, 자동차가 함께 달리는 찻길일 수 있으며, 서울 같은 데에서는 한강길일 수 있습니다. 어느 곳에서든 ‘길에서 달리는 자전거’입니다. 그런데, ‘길에서 자전거를 어떻게 달려야 하는가’ 하는 이야기가 하나도 안 실려 있습니다. 글쓴이 스스로 ‘길에서 자전거를 어떻게 달리고 있는지’는 몇 줄로 짤막하게 스쳐 지나갈 뿐입니다.

 그러면서 ‘자전거 물품과 장비’를 갖추거나 장만하는 이야기에 너무 많은 자리를 내주고 있습니다. 글쓴이는 ‘지름신’ 이야기까지 합니다만, 자전거를 타는 분들 가운데 지름신에 따라 물품을 더 갖추는 분도 있습니다만, ‘자전거가 내 삶이 되며 언제까지나 즐거운 길동무가 되는’ 분도 무척 많습니다.

 그러면, 《자전거홀릭》은 누구와 자전거 이야기를 나누려 하는 책일는지요. ‘자전거 매니아’한테? ‘자전거 생활인’한테? ‘자전거 출퇴근 일꾼’한테?


.. 자전거에 취미를 가지다 보면 자연스럽게 사고 싶은 용품이나 부품도 늘어난다. 이것도 써 보고 싶고, 저것도 써 보고 싶다. 그러한 것들 중에는 매달 받는 용돈이나 내가 가지고 있는 비상금보다 가격이 높은 경우도 허다하다. 처음에는 남편의 건강을 위한 투자로 생각해 지원을 아끼지 않던 아내도 계속적인 지원 요구에는 눈살을 찌푸릴 수도 있다. 이때도 현명한 대처가 필요하다 … 가족을 위해 하나를 양보하면 두 개 세 개의 양보를 받을 수 있다. 이러한 배려와 이해가 쌓이면서 자연스럽게 가족들은 나를 이해하게 되고, 다음번에는 기꺼이 남편과 아빠를 위해 그들의 시간을 양보해 줄 것이다 ..  (86∼87쪽)
 





 (3) 자전거로 살아가는 기쁨과 사랑을 찾길 바라며


 《자전거 홀릭》을 읽는 내내, 글쓴이 생각과 삶이 아무래도 ‘서울에서 사무직 회사에 다니는 청장년 남성, 이 가운데 혼인해서 아이가 하나쯤 있는 남성’한테만 눈길을 맞추어 놓지 않았는가 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자전거를 타는 여성한테는, 또 자전거를 타는 중고등학교 아이들한테는, 또 자전거를 타는 아저씨 아줌머 할머니 할아버지한테는, 조금도 눈길을 안 맞추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참말로, 자전거는 남자만, 그러니까 아빠만 타야 할까요? 자전거는 도시에서만, 더욱이 서울 같은 큰도시에서만 타야 할까요? 시골사람은, 시골에서 사무직으로 일하는 사람은, 도시에서 가게를 꾸리는 사람은, 자전거를 어떻게 타야 좋을까요?

 더구나, 책 앞머리에서 ‘자전거 갈래’를 나눌 때에 ‘생활자전거 = 유사 산악자전거’라고 못박으면서 이야기를 펼치는데, 이 대목은 몹시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생활자전거는 생활자전거이고, 유사 산악자전거는 유사 산악자전거입니다. 생활자전거는 ‘짐자전거’와 ‘장바구니 자전거’를 아우르며, 여느 산악자전거이든 경주자전거이든 작은자전거이든 이러한 자전거를 늘 타고다니면 이 자전거들은 곧바로 생활자전거가 됩니다.

 유사 산악자전거는, 이 이름 그대로 ‘산악자전거 비슷하게 만든 짝퉁’으로, 이런 자전거는 자전거가 아닙니다. 값싼 물건입니다. ‘유사 사진기’와 ‘유사 핸드폰’이 있겠습니까? ‘유사 가스렌지’와 ‘유사 버너’라면 얼마나 위험하겠습니까?

 그래서, ‘유사 산악자전거라는 짝퉁 물건을 만드는 자전거회사는 법으로 책임을 물어야’ 하지 않느냐 생각합니다. 자전거 아니면서 모양만 자전거처럼 만들어 아이들 눈을 홀리고 아이들을 위험에 내모는 녀석이 바로 ‘유사 산악자전거’이기 때문입니다(그러나 여느 자전거집 매출 거의 모두를 차지하는 녀석은 바로 유사 산악자전거입니다). 이런 자전거는 만들어서도 팔아서도 타서도 안 됩니다.

 그래, 《자전거홀릭》은 나중에 2쇄를 찍을 때에, 다른 어느 대목보다도 이 대목, 생활자전거를 다루는 자리는 모두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잘못된 정보와 생각으로 사람들한테 잘못된 이야기를 퍼뜨리면 안 될 노릇입니다.


.. [생활자전거 (유사 산악자전거)] 보통 우리 나라 국민의 대다수가 자전거 하면 떠올리는 것이 바로 이 생활자전거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신문을 구독하면 주는 자전거 또는 주유소 경품용 자전거라는 인식이 강했다. 지하철 입구 옆에 묶여 있는 자전거의 80∼90퍼센트가 이런 유의 자전거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 가까운 거리의 출퇴근이나 생활용으로 이용하는데, 도난의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굳이 고가의 고급 자전거를 사용할 이유는 없으므로 어찌 보면 이러한 생활자전거가 더 적합하다고도 할 수 있겠다 ..  (18∼19쪽)


 글쓴이는, 일본 자전거 문화를 이야기하며 “그들은 헬멧도 없고, 자전거 복장 차림도 아니었다”고 밝힙니다. 그런데 한국 자전거 문화를 이야기할 때에는 “교복 차림의 학생이 헬멧을 쓴 경우는 자전거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 이래 단 한 차례도 본 기억이 없다”고 밝힙니다.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일본에서 ‘자전거 = 삶’이라고 말한 글쓴이입니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자전거란 무엇일까요. 일본 청소년한테는 ‘헬멧 없이 자연스럽게 타고다니는 자전거 삶’인데, 한국 청소년한테는 자전거는 무엇이 되어야 할까요?

 또한, 글쓴이는 한강 자전거길에서 무시무시하게 내달리는 자전거꾼을 꾸짖는 이야기를 씁니다만, 이들 ‘무시무시 내달림꾼’이란, ‘자전거 헬멧과 장갑과 가방과 이것저것 다 갖춘 비싸구려 자전거’를 모는 분들입니다. 이들이 타는 자전거 부품은 무척 값비싸며, 이런 값비싼 부품은, 한국을 뺀 다른 모든 나라에서는 ‘자전거 선수나 쓰는 부품’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분들 ‘무시무시 내달림꾼’들은 처음부터 한강길이든 어디에서든 씽씽 달리며 당신들 비싸구려 자전거를 뽐내려 하는 분들입니다. 처음부터 다른 이한테 마음쓸 그릇이 없는 분입니다.

 찻길에서 자전거를 괴롭히거나 못살게 구는 자동차꾼하고 매한가지입니다. 똑같은 차를 몰더라도 남 앞에서 잘나 보이거나 번듯해 보이는 더 비싼 자동차를 장만하려는 사람들 매무새하고 똑같습니다.

 한 마디로 말씀드리자면, 우리 나라에서 자동차이든 자전거이든, 또 책이든 영화이든, 옷이든 화장품이든, 집이든 일자리이든, 나 스스로 참으로 좋아하고 사랑하는 길을 찾는다기보다 남 앞에서 우쭐거리거나 자랑하거나 내보이려는 쪽으로 헛걸음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자전거홀릭》 또한 이러한 흐름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못하다고 느낍니다.


.. 자전거가 삶의 작은 행복을 열어 주는 열쇠가 될 수 있다면 그것으로 흡족할 듯 싶다 ..  (머리말)


 《자전거홀릭》을 쓴 글쓴이께서 첫마음으로 고즈넉하게 돌아갈 수 있다면, 아니, 첫마음을 새롭게 가다듬어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생각해 봅니다. “자전거가 우리 삶에 작은 즐거움을 나누는 열쇠”가 될 수 있는 길을 새롭게 찾고 느낄 수 있으면 더없이 기쁘겠습니다.

 그래서 아빠 혼자서만 낼름낼름 즐기다 그치는 ‘자전거 마니아’가 아니라, 글쓴이 아내한테도 자전거를 가르쳐 주며 함께 타고, 또 글쓴이 아이한테도 자전거를 가르치면서 같이 타는, 이리하여 ‘세 식구가 함께 자전거 타기’를 자전거책에 담을 수 있으면 반갑겠고, ‘세 식구 자전거 장만하기’ 이야기를 새롭게 자전거책에 담을 수 있으면 고맙겠으며, ‘세 식구가 나란히 자전거를 즐기는 길은 어떠한 모습’인가를 차근차근, 더 느리게, 더 천천히, 더 오래 삭이고 묵히면서, 더 깊이 헤아리고 생각하면서, 더 길게 내다보고 어깨동무를 하는 삶자락을, 자전거책에 살포시 담아 준다면 저 또한 흐뭇하겠습니다. (4342.7.15.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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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09-07-16 09:49   좋아요 0 | URL
된장님,자전거 운전 조심하세요.슬쩍 사람만 쳐도 차사고로 간주된답니다.^^

숲노래 2009-07-16 10:57   좋아요 0 | URL
그러믄요. 인도에서는 웬만하면 내려서 끄는데, 인도에서 탈 때에는 아기 아장걸음보다 느리게 달립니다 ^^

말씀 고맙습니다~
 
영혼을 빗질하는 소리 - 안데스 음악을 찾아서
저문강 지음 / 천권의책 / 2009년 5월
평점 :
절판


 
 노래 없는 이 나라에는 노래만 없을까
 [잠깐 읽기 44] 저문강, 《영혼을 빗질하는 소리》



- 책이름 : 영혼을 빗질하는 소리―안데스 음악을 찾아서
- 글ㆍ사진 : 저문강(조영대)
- 펴낸곳 : 천권의 책 (2009.5.1.)
- 책값 : 15000원


 (1) 노래와 춤과 잔치와 삶과


 저문강(조영대) 님은 1999년부터 꾸준하게 ‘안데스 음악 여행’을 하는 분이라고 합니다. 집식구가 있으면서도 안데스 노래에 빠져 홀로 비행기를 타고 중남미를 떠돌며 노래를 듣고 시디를 장만하고 악기를 배우는 당신은, 그동안 안데스 노래를 들으면서, “안데스 음악은 잠들어 있던 감성을 새롭게 일깨워 준다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이 안데스 음악에 대해 물을 때 ‘영혼을 빗질하는 소리’라고 답하곤 한다(311쪽)”는 말처럼 당신 넋을 빗질해 주는 노래와 늘 가까이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이참에 펴낸 《영혼을 빗질하는 소리》라는 책 하나에는, 당신 넋을 빗질해 준 고마운 노래를 찾아나선 발자취를 그러모은 이야기가 듬뿍 담겨 있습니다.


.. 사실 그들과 내 관심사는 전혀 다르다. 알렉스와 아기는 스페인 식민지 영향으로 세워진 성당이며 수녀원 등 식민지풍 건축물에 관심이 많다. 내 관심 밖의 일이지만, 삼사백 년 된 건물들이 여전히 아름답고 훌륭한 자태를 뽐내며 서 있다는 게 감탄스러운 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 알다시피 볼리비아는 경제적 수준이 매우 낮은 나라이다. 개개인은 물론이고 국가 자체가 돈이 많지 않다. 따라서 당연히 사회 간접자본의 축적도 제대로 되어 있지 못하다. 경제적 측면으로 보자면 사람들도 매우 낙후된 생활을 하고 있다. 하지만, 삶의 행복이 단지 경제적인 측면만으로 결정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볼리비아 사람들은 언제, 어떤 곳에서, 어떤 종류의 행복을 찾으며 삶을 즐길까 ..   (41, 112쪽)


 책을 펼쳐드는 저는 ‘안데스 노래’를 잘 모릅니다. 텔레비전도 안 보고 라디오도 안 들으니 다른 노래를 들을 길이 없기도 하지만, 엘피나 테이프를 장만해서 틈틈이 노래를 듣는다 하여도, 나라안에 널리 알려지거나 들을 만한 ‘안데스 노래’란 거의 없거든요. 보름쯤 앞서인가, 동네에 있는 오랜 술집에 잠깐 들렀을 때에 에프엠 라디오에서 ‘빅토르 하라’ 노래 둘을 잇달아 틀어 주어 고맙게 들었습니다만, 하라 노래이건 중남미 노래이건, 또 안데스 노래이건 우리들 여느 사람으로서 만나거나 마주하기란 몹시 힘듭니다.

 생각해 보면 안데스 노래 만나기만 어렵지 않습니다. 우리 문화라고 하는 ‘굿’을 만나기는 더더욱 어렵습니다. 무형문화재이니 민속문화재이니 뭐니 하고들 이야기를 하고, 돌아가신 김수남 님은 굿 사진을 부지런히 찍어 놓기는 하였어도, 정작 굿소리를 들을 마땅한 자리가 없고, 엘피도 테이프도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굿뿐 아니라 여느 일노래와 놀이노래도 듣기 어렵습니다. 그나마 저는 국민학생이던 1982∼1987년에 동네 골목길에서 동네 동무들하고 숱한 놀이노래를 부르며 술래잡기와 숨바꼭질 들을 하며 놀기는 했으나, 오늘날 동네 골목길 이웃집 아이들한테서 놀이노래를 들을 일이란 없습니다. 우리 집 둘레에 있는 골목집 아이들이 아침저녁으로 골목에서 뛰놀기는 하지만 노래를 부르지는 않습니다. 줄넘기를 하고 손전화 놀이를 하고 유행노래를 부를지라도 ‘언니 오빠 형 누나’한테서 물려받거나 배운 놀이노래는 한 가지도 모릅니다.


.. 나는 오따발로 시내에서 직선으로 난 길로 다니는 파란 버스보다는, 시간은 좀더 걸리더라도 가는 길에 있는 모든 동네를 거쳐 가는 빨간 버스를 더 좋아한다. 파란 버스보다 2배 이상 걸리지만, 온통 푸른 색으로 내 눈을 꽉 채우는 오따발로의 자연이 그대로 펼쳐진 길을 마음껏 달릴 수 있기 때문이다 ..  (154∼155쪽)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는 탓이 있습니다. 가르칠 사람이 없는 탓이 있습니다. 가르치고 싶어도 가르칠 수 없는 탓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저런 탓보다도 어른인 우리 스스로 우리 노래가 무엇인지를 모릅니다. 대중가요도 노래이며 뽕짝도 노래이며 팝도 노래입니다. 락도 노래이고 민중가요도 노래이며 판소리도 노래입니다. 그런데 ‘우리 노래’는 무엇이지요? ‘한겨레 노래’는 무엇이지요? 안데스사람들도 안데스 노래를 차츰 잊어 가거나 멀리하고 있다고 《영혼을 빗질하는 소리》에 나와 있는데, 백두산 넋을 받건 태백산 얼을 받건 한라산 마음을 받건, 우리들은 어떤 넋과 얼과 마음으로 어떤 노래를 즐기고 부르고 나누고 있는가요.

 하긴, 곰곰이 돌아보면, 우리한테는 노래도 없고 춤도 없고 잔치도 없습니다. 관청에서 수 억이나 수십 억을 들이는 ‘축제’나 ‘이벤트’는 있어도, 동네사람 마을사람 어깨동무하면서 들썩들썩 신이 나는 잔치판이란 없습니다. 품앗이와 두레가 없으니 잔치판 또한 없겠습니다만, 어우르는 일, 울력이 없으니 일노래가 없을 테고, 어깨동무 씨동무 할 또래가 없으니 놀이노래가 없을 테지만, 어쩐지 쓸쓸합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노래를 즐기는 매무새로 우리 노래도 함께 부르면서 ‘안데스 노래’를 찾아나설 만한 노래그릇이 못 되고 있다고 생각하니, 몹시 허전합니다.


.. 한 인디헤나가 께추아어로 지은 아이의 이름으로 출생신고를 한다. 그러자 담당자는 께추아어로 이름을 지을 수 없다며 그 자리에서 후안이라고 정해 준다. 그때부터 그 아이의 이름은 후안이 된다. 실제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에꽈도르에서는 께추아어로 이름을 짓는 것이 금지사항이었다고 한다 … 은행뿐 아니라 사회 전반이 그렇다. TV를 보다 보면 스페인 방송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거의 백인들이 브라운관을 차지하고 있다 … 실제로 스페인에는 지금도 중남미를 자신들의 식민지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고 한다 … 인디헤나는 말 그대로 원래 그 땅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다. 인디헤나가 상층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차별은 말아야 하지 않을까 ..  (175∼177쪽)


 그렇지만, 우리는 중남미 인디헤나처럼 ‘우리 이름을 우리 나름대로 짓는 권리를 빼앗기지’는 않았습니다. 아니, 우리 이름을 우리 나름대로 지을 권리가 있는지 없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지난해 8월 17일에 우리 아이(사름벼리) 출생신고를 하러 동사무소에 가니까, “아이 이름을 한자로 어떻게 적지요?” 하고 묻더군요. “우리 아이 이름은 한자가 아닌 토박이말로 지은 이름입니다.” 하고 한마디 해 주니, “그래도 한자로 적어야 하는데요?” 하고 되묻기에 귀고 귓구멍이고 기고 콧방귀고 다 막혔어요. 동사무소(따지고 보면 동사무소가 아닌 동주민센터입니다) 일꾼한테 다시금 따졌습니다. “아니, 왜 아이한테 한자 이름만 지어야 합니까? 우리 말 이름을 지어 주면 안 됩니까?” “주민등록증에 한자를 꼭 입력하도록 되어 있어요.”  “나원참, 그러면, 아이한테 이름을 지어 줄 때에는 반드시 한자로만 이름을 지어 주어야 한다는 소리이네요?” “아니, 그렇지는 않은데.” “우리 아이 이름은 토박이말이니까, 그 토박이말에 한자를 넣고 싶으시면 알아서 넣으셔요. 우리 아이는 한자 이름이 없습니다.”


 (2) 우리 가슴에 《영혼을 빗질하는 소리》란


 1999년으로 떠오릅니다. 그때 김종필 국무총리께서는, 우리 주민등록증에 모조리 ‘한자를 넣도록’ 법을 바꾸었습니다. 그무렵에 대통령이 된 김대중 님은, 김종필 님과 어깨동무하면서 대통령이 되는 가운데 몇 가지를 김종필 님한테 들어 주기로 했고, 그 가운데 하나가 ‘관공서 문서나 주민증 따위에 한자 함께쓰기 또는 밝혀쓰기’를 하도록 하는 일이었습니다.

 처음에는 ‘한자 없는 주민증’을 만들었지만, 그때 국무총리 되신 분이 아주 굳세게 밀어붙여서 나라돈 몇 조를 쓴 줄 알고 있습니다. 그때 길알림판 또한 한자를 넣어 새로 만드는 정책을 억지로 밀어붙였고, 애꿎은 길알림판 또한 모조리 갈아치웠습니다. 이와 같은 정책에 찬반이 4:6이나 3:7쯤 되었으나, 이 정책대로 일이 풀렸고, 아무래도 이때 일 때문에 우리 아이한테까지 불똥이 튀는구나 싶습니다. 이제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잊은 옛일이겠지만, 그때에 주민증에 ‘손그림 넣기’를 억지로 시켜서 이 일을 놓고도 ‘주민증 안 받기’를 하던 분들이 있었습니다.

 주민등록번호라는 숫자란 1968년에 박정희 독재자가 나라사람을 억누르고 휘어잡으려고 만들었습니다. 이제는 이런 일이 왜 있었는지를 떠올릴 줄 아는 사람도 얼마 없지 싶은데, 우리가 입으로는 ‘세계화’를 외치지만, 정작 세계 어느 나라에도 주민등록번호란 없고 주민등록증이란 없습니다. 더욱이, 나라사람을 범죄자로 여기며 지문을 받는 끔찍한 일을 하는 나라는 한국을 빼고 일본뿐인데, 일본은 제 나라 사람한테는 지문을 안 받고, ‘제 나라 사람 아닌 사람’한테만 지문을 받습니다. 그러니까, 일제강점기 때 일본으로 끌려갔거나 넘어가야 했던 재일조선인한테만 지문을 받는 셈이고, 이 일은 아직까지도 풀리지 않은 골칫거리로 남아 있습니다. 인권을 끔찍하게 짓밟는 노릇이기 때문입니다.

 새 주민증을 만든다고 하던 1999년 그때는, 오랜 군사독재정권을 선거라는 민주주의 제도로 뒤집었던 때입니다. 그렇지만, 군사독재정권을 무너뜨린 정권마저도 ‘주민증에 지문 찍기’ 같은 끔찍한 일을 똑같이 되풀이했습니다.

 어느덧 열 해가 흐른 일이니 아득한 일이라고 느낍니다만, 그때에나 이때에나 느끼기로는, 우리들 한겨레는 ‘생각힘이 너무 없’구나 싶습니다. 상상력이 없습니다. 애써 이룬 자유를 자유로 누리지 못하고, 힘써 이룬 민주를 민주로 펼치지 못했습니다.


.. 식사고 뭐고 없다. 넋을 빼놓고 그들의 연주에 빠져든다. 게다가 내가 신청하는 곡을 빠짐없이 하나씩 연주해 주는 것이 아닌가. 자리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암, 안 되지. 자리에 앉아 있다는 건 폴클로레에 대한, 아니 저 연주자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대번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앞으로 나가 선율이 이끄는 대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이번엔 연주자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조그만 동양인 하나가 자기네들의 음악을 신청하고 거기에 춤까지 추자 신기하고 반가웠는지 더욱 신나게 연주해 준다 ..  (44쪽)


 안데스를 밑돌 삼아 안데스 문화를 꽃피웠고 안데스 노래를 조촐히 지켜 나가는 안데스 토박이들은 안타깝게도 제 말과 글을 잃었고 제 삶터에서도 2등이나 3등 자리로 밀려나 있습니다. 이곳 사람들은 어떠할까요. 이곳 안데스사람들도 우리들처럼 생각힘이 없을까요? 아직까지 ‘넋과 얼을 빗질하는 노래’를 부르고 즐기기는 하지만, 구석자리로 밀려난 채, 뒷골목으로 쫓겨난 채, 그저 숨죽이는 가운데 부르거나 즐기고 있을까요?

 《영혼을 빗질하는 노래》를 쓴 분이 안데스 나들이를 하면서도 ‘참다운’ 안데스 노래를 찾기가 만만하지 않았다고 밝히는데, 이럴 수밖에 없는 까닭이 중남미 삶터에 고스란히 묻어나 있지 않을까요?


.. 여기도 서양 팝 음악이 흘러나오는 디스꼬떼가 많이 있지만, 볼리비아노들은 안데스 폴클로레만을 가지고도 충분히 자기들의 기분을 발산할 수 있다 ..  (114쪽)


 책을 덮으며 생각합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땅에서 참다운 우리 노래를 잃은 지 몹시 오래되었기 때문에 우리 삶터에서는 우리 노래로는 우리 넋과 얼을 빗질할 수 없을밖에 없다고. 그렇다고 안데스땅 곳곳에 안데스 노래가 넘실넘실 넘쳐나면서 안데스 삶터를 어루만지고 있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으나, 군데군데 듬성듬성 안데스 삶자락 어딘가에는 ‘넋과 얼을 빗질하는 노래가 남아’ 있다고. 이 조그마한 실마리를 잡아채어 우리들이 스스로 놓거나 내버린 넋과 얼을 새롭게 추스르고, 다시 태어나는 한 사람이 되자고 조용히 말걸기를 하고 있다고.


.. 힘들기야 하겠지만 한국에서 불가능한 일이 아님에도 다시 여권을 만지작거리는 이유는 단순했다. 한국엔 한국의 바람이 불듯, 안데스엔 안데스의 바람이 불 테니까. 안데스 악기는 안데스의 바람 속에서 본연의 소리를 낼 테니까 ..  (191쪽)


 덮었던 책을 다시금 훑습니다. 339쪽에 이르는 책에는 글과 사진이 골고루 섞여 있고, 책끝에는 ‘추천하는 노래’와 ‘안데스 악기 소개’가 붙어 있습니다. 야무지게 잘 엮었다는 생각이 들고, 감칠맛나는 글은 제법 잘 썼다고 느낍니다.

 다만, 좀더 느긋하게 노래로 스며들고, 더욱 부드러이 노래와 함께했다는 느낌은 옅습니다. 글쓴이 발자취를 바지런히 알려주면서 다른 이들한테도 이 길을 함께 걷도록 이끌려는 마음이었는지 모르나, 이 책이 ‘여행기’나 ‘여행안내서’가 아니라 한다면, 글쓴이 나름대로 가슴속 깊이 파고든 ‘넋을 흔든 노래와 삶’이 무엇인지에 더 많은 자리를 나누어 주어야 했다고 느낍니다. ‘얼을 달랜 노래와 사람’은 어떠했는가를 다루는 글에 좀더 길게 이야기를 모두어야 했다고 느낍니다.

 그래도, 나라안에 ‘안데스 노래’를 맛보도록 이끌거나 일러 주는 이야기책은 몇 가지 없다고 느끼기에, 이만큼 엮고 쓴 책이라도 반갑습니다. 아직은 서툴 수밖에 없다고도 봅니다. 왜냐하면, 글쓴이는 아직 ‘안데스 노래’ 맛보기만 한 분이지, ‘안데스 노래’를 안데스 악기로 신나게 뜯고 퉁기면서 춤판을 벌여 줄 수 있을 만큼 무르익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마무리로 낸 책이 아니라 당신 스스로 첫 걸음마를 데듯 써낸 책이니까요. 이제, 이 첫 걸음마를 발판 삼아, 앞으로는 무르익은 이야기를 한결 곰삭이고 달래면서 펼쳐 줄 수 있기를 바라고 기다리고 꿈꾸어 봅니다. (4342.7.8.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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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행 엑서더스 - 그들은 왜 '북송선'을 타야만 했는가?
테사 모리스-스즈키 지음, 한철호 옮김 / 책과함께 / 2008년 12월
평점 :
절판




 한국과 일본은 역사를 함께 일구어 왔다
 [잠깐 읽기 43] 테사 모리스-스즈키, 《북한행 엑서더스》



- 책이름 : 북한행 엑서더스
- 글 : 테사 모리스-스즈키
- 옮긴이 : 한철호
- 펴낸곳 : 책과함께 (2008.12.15.)
- 책값 : 18000원



 (1) 일본땅 한겨레붙이 삶과 책과


 1959년부터 재일조선인이 북녘으로 배를 타고 옮겨갔습니다. 재일조선인은 1945년 해방을 맞이한 다음부터 일본땅에 머물러 있던 사람들로, 일제강점기 때에 징용으로 끌려왔거나 한국땅에서 먹고살 길이 없어 건너온 사람들입니다. 1945년에 해방을 맞이한 다음 고향나라로 돌아간 이들이 많지만, 고향나라로 돌아가지 못한 이들도 많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온 이들도 있습니다. 잃었던 나라를 찾았다 할지라도 먹고살 길마저 함께 찾을 수 있지 않았을 뿐더러, 해방을 맞이하면서 남녘과 북녘으로 쪼개어졌고 이내 전쟁까지 터지는 바람에 그예 눌러앉은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데 일본에서 눌러앉은 사람은 일제강점기 때에도 온갖 푸대접과 따돌림과 업신여김에 고달파야 했고, 일제강점기에서 풀려난 다음에도 ‘천황을 모시는 신민’이 아닌 ‘해방된 나라 사람’이 되었어도 ‘일본 정부가 보듬어 주고 싶지 않은 외국사람’일 뿐이었습니다. 일자리 얻기도 힘들고 학교를 다니기도 힘들며 조선말 배우기도 힘들었습니다.


.. 한반도를 제외한 전 세계에서 냉전이 끝난 지도 벌써 몇 년이나 지났다. 그러나 냉전은 한반도에서는 살아남았으며, 21세기 소위 ‘테러와의 전쟁’ 속에서 기괴하고 무서운 긴장의 집합점으로 바뀌어 버렸다 … 점령군 병사들은 전쟁의 와중에서 일본에 도착했을 때, 일본의 역사나 문화에 대해서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더군다나 조선인에 대한 쓸 만한 정보를 가지고 있는 병사는 더욱 적었다. 점령군은 조선인을 ‘해방 국민’으로 대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안 사람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 장명수의 책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의 취지는 단순하고도 극단적인 것이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귀국운동은 인도주의의 기수인 일본적십자사가 인종차별주의적인 일본 권력기구를 대신해서 실행한 ‘민족 정화’ 행위였다. 나의 입장과 장명수의 주장은 일치하지는 않지만, 일본적십자사 간부의 행동에 대한 장명수의 가설은 내가 제네바에서 본 정보와 몇 가지 부합되는 것 같다 … 이 문제에 대한 일본 정부의 견해는 단순 명쾌했다. 제국이 사라진 지금, 조선과 대만의 전 식민지 신민은 일본 국민으로 남아 있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 (30∼31, 43∼44, 56, 97쪽)


 재일조선인 삶을 다룬 책은 곧잘 나왔습니다. 남녘사람이 쓴 책도 있고, 재일조선인 스스로 쓴 책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책들은 하나같이 잘 안 팔리고 안 읽히면서 잊혀집니다. 우리한테 쓰라린 발자취이기에 돌아보고 싶지 않은지 모릅니다만, 돌아보고 싶지 않은 지난날이라 하여도 어김없는 우리 발자취요 삶이며 사람입니다. 예나 이제나 ‘한겨레붙이’로서 따스한 품에 안겨 본 적이 없는 우리 이웃이요 동무요 한식구입니다. 많이 팔리고 꼭 읽어야 하는 책이라기보다, 우리 스스로 한겨레붙이라고 느끼거나 생각한다면 마땅히 찾아서 삭이고 헤아리고 보듬을 책이 아닌가 싶습니다.

 정부는 정부대로 한겨레붙이를 따돌렸습니다. 그러면서 1965년 한일협정으로 뒷돈을 챙길 뿐이었습니다. 일제강점기 때에 시달리고 괴로웠던 사람들 아픔을 달래고 생채기를 보듬는 데에 그 돈이나마 쓰지 않았고, 일본에 남고 러시아에 남고 중국에 남고 중앙아시아에 남은 한겨레붙이를 널리 품어 안지 않았습니다.

 두 나라가 아닌 한 나라를 사랑하고 싶던 재일조선인은 남녘은 남녘대로 씁쓸하게 바라보고 북녘은 북녘대로 쓸쓸하게 바라볼 뿐입니다. 이러는 가운데 몇 만에 이르는 재일조선인이 1959년부터 ‘북녘으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 1952년 4월 28일자로 재일조선인은 공영 주택 입주권을 포함해 주요 사회 복지를 향유할 권리를 잃었다. 전후 수십 년에 걸쳐 일본의 복지 제도가 발달해 가는 과정 속에서, 이러한 배제 규정은 더욱 강화되었고, 그 때문에 더욱 엄격해졌다 … 안보조약 개정을 이루어낸 기시 내각은 국민연금제도도 만들었는데, 거기에서 외국인은 배제되었다. 그리고 일본은 그때부터 고도성장기로 돌입했다. 그때까지 존재했던 식민지의 ‘망령’은 안보조약 개정에 의해 일소되고, ‘단일 민족국가’로서의 새로운 복지제도도 만들어졌다. 도시 내 재일조선인 커뮤니티의 인구가 줄어들고 도시 재개발이 진행된 것도 이 시기였다 ..  (100, 323쪽)


 《재일교포 2.5세 ‘노란구미’의 한국ㆍ일본 이야기》(2005)라는 만화책을 보면, 남녘사람들이 재일조선인을 바라보는 엇갈린 눈길 때문에 재일조선인이 얼마나 마음앓이를 하는가를 살며시 부드럽게 다루어 줍니다.

 《재일조선인의 가슴속》(2003)이라는 책을 보면, 일본사람이나 한국사람이나 매한가지로 재일조선인을 어떻게 따돌려 왔고 얼마나 가슴앓이가 컸는가를 날카롭게 낱낱이 다루어 줍니다.

 《해협》(2003)이라는 책을 보면, 일본에서 학문을 파고드는 한 사람이 얼마나 거칠고 고단한 길을 걸어야 했으며, 이 거칠고 고단한 길은 당신한테뿐 아니라 당신 아이들한테까지 길디길게 이어지는가를 곰곰이 되새기도록 해 줍니다.

 《산다는 것의 의미》(2007) 같은 청소년책을 보면, 배울 수 없던 사람과 밑바닥에서 헤매야 한 사람은 무엇을 겪고 보고 듣고 돌아보아야 했는지를 눈물겹게 생각하도록 이끌어 줍니다.

 일본사람 카지무라 히데키 님은 《재일조선인운동》(1994) 같은 책을 쓰며(썼다기보다 강연한 이야기를 글로 옮겨적었습니다만), 일본 사회에서 일본 지식인 스스로 ‘재일조선인’을 너무 모르거나 등돌리고 있음을 환하게 밝혀 줍니다.

 오다 나라찌라는 일본 목사는 일제 강점기 때에 맨몸으로 한국땅으로 건너와 하느님 목소리를 나누려 하면서, 일본에서 신학을 배울 때에는 조금도 알지 못했던 ‘식민지 푸대접과 따돌림과 괴롭힘’이 무엇인가를 온몸으로 삭이며 깨달았고, 해방이 된 뒤에도 죽는 날까지 한국땅에서 ‘일본이 저지른 잘못을 당신이라도 뉘우치고 싶다’는 마음으로 살아가며 《지게꾼》(1980)이라는 책을 남긴 적이 있습니다.


.. 북한이 대량 귀국에 본격적으로 관여하게 된 것은 결국은 국가적 차원에서 이기적으로 따져 본 결과였다. 김일성 정권이 노동력을 필요로 했던 것, 세계가 주목할 만한 경제 발전을 이룬다는 장대한 꿈, 일본ㆍ한국ㆍ미국의 삼자 관계에 훼방을 놓고픈 욕구, 그리고 전 세계적 차원의 무대에서 프로파간다의 승리에 대한 동경, 그러한 모든 것에서 귀국이 득책이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한국의 이승만 정권은 귀국사업을 방해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것을 성공시키지 못한 이유는, 이 정권 자체가 정치범을 부당하게 다루고 있었고, 재일조선인의 남쪽 귀국을 지원하려고 하지 않았으며, 재일조선인을 일본과의 외교적 침체 상태를 타개할 협상의 재료로 이용하는 쪽에 열심이었기 때문이다 ..  (308∼309쪽)


 헌책방마실을 하면서 《재일 한국인 지문 거부 운동》(1987)이라는 책하고 《지문날인 거부자가 재판하는 일본》(1990)이라는 책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두 가지 책은 처음 나왔을 때에도 그리 눈길을 끌지 못했을 뿐더러 사랑받지 못했습니다. 판이 끊어지고 난 다음에도 헌책방에서 그리 손길을 타지 못하는 한편 두루 읽히지 못합니다. 이와 같은 이야기책은 ‘나라안에서 내로라하는 인문사회과학 출판사’ 가운데 어느 곳에서도 펴내지 않았습니다. ‘돈이 될 만하지 않아’ 안 냈는지, ‘처음부터 재일조선인 문제는 생각하지 않아’ 안 냈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다만, 재일조선인이 일본에서 받는 창피와 업신여김이 얼마나 큰가를 알아보려는 한국 지식인 사회 움직임은 거의 없었다고 해도 옳다고 느낍니다.

 그나마 《학살의 기억 관동대지진》(2005) 같은 책은 우리 말로 나온 적이 있으나, 1995년에 《조선인의 죽음》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나올 때에는 다른 재일조선인 이야기책하고 마찬가지로 금세 파묻히고 사라졌습니다.

 강재언 님이 쓴 《한국근대사》(1990)라든지 《근대한국 사상사 연구》(1983)라든지 《조선의 서학사》(1995)라든지 《한국의 개화사상》(1989)이라든지 《한국근대 사회와 사상》(1989)이라든지 《한국 근대사 연구》(1986)라든지 《일제하 40년사》(1984) 같은 책이 수두룩하게 옮겨진 일은 퍽 놀랄 만합니다. 그렇지만 한국 역사와 문학에 눈길을 두는 대학생이나 지식인 가운데 ‘강재언’ 같은 이름을, ‘이진희’ 같은 이름을, ‘강덕상’ 같은 이름을, ‘김달수’ 같은 이름을, ‘김석범’ 같은 이름을 찬찬히 훑거나 꿰거나 살피기라도 한 사람은 얼마나 될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없지는 않을 테고 드물지는 않을 테지만,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이 아니랴 싶습니다.

 《김석범 ‘화산도’ 읽기》(2001) 같은 책이 우리 말로 옮겨지기는 했어도, 정작 《화산도》라고 하는 책은 찾아볼 길이 없습니다. 김석범 님 다른 작품 《까마귀의 죽음》(1988)이 한 번 옮겨진 적이 있으나, 거의 팔리지도 읽히지도 않은 채 먼지처럼 사라지기만 했습니다.


.. 21세기의 북한 난민은 1950∼1960년대의 귀국자와 마찬가지로 전 세계적 차원의 정치라는 체스판에서 참으로 편리한 ‘말’이어서 큰 전략에 필요하면 사용되고 필요성이 없어지면 언제든 잊혀진다. 국제 정치의 이해관계 속에서, 이들의 작지만 각기 다른 인간적인 필요성은 쉽사리 눈에 띄지 않는다. 북한 정부에게 이들은 배신자이자 반역자다. 투옥시키고 때에 따라서는 고문을 가하거나 처형하기도 한다. 중국 정부의 입장에서는 이들은 밀입국한 불법 노동자로, 김정일 정권과 우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인도해 주어야만 한다. 한편 미국의 정치적인 입장은 이들 전부를 일괄적으로 미국적 자유민주주의를 갈망하는 정치 망명자로 규정한다. 북한에 대한 미국의 인권 정책은 난민을 잠재적으로 유익한 ‘체제 변혁’분자로 보고 국경을 넘는 대규모 탈출을 권장하고 있다. 이는 가뜩이나 약한 입장에 있는 사람들을 공포의 위험성에 노출시키는 행위다. 또한 중국 국경에서는 위기에 처한 난민들 속에서 영혼을 구할 가능성을 엿본 많은 기독교 단체가 열의와 금전을 퍼붓고 있다 ..  (397∼398쪽)


 따지고 보면, 우리들은 재일조선인 삶에 등돌리는 사람들만은 아닙니다. 남녘땅 이웃 삶에도 등돌리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재일조선인 이야기책에 등돌리고 있지만은 않습니다. 남녘땅 낮은자리 사람들 이야기책에도 등돌리고 있어요.

 내 이웃 삶을 곰곰이 들여다보고 있는가요? 내 동무들 삶자락이 어떠한가를 가슴 깊이 헤아려 보려고 하는가요? 내가 발디딘 동네에서는 어떠한 일이 얼마나 어찌어찌 벌어지고 있는지 찬찬히 들여다보기는 하는가요?

 우리 스스로 우리 삶터에서 우리 삶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하고 가까운 이웃 또한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이러한 몸짓이 재일조선인을 바라보는 자리에서도 똑같이 이어간다고 느낍니다.


 (2) 《북한행 엑서더스》라고 하는 책


 《북한행 엑서더스》라고 하는 책을 읽습니다. 다른 수많은 ‘일제강점기 역사’와 ‘재일조선인 역사’를 다룬 책들이 으레 ‘일본사람 손으로 나오고 있음’을 생각해 본다면, 재일조선인이 북녘으로 배 타고 간 일을 다루는 책 또한 일본사람이 쓰는 일은 하나도 얄딱구리하지 않습니다. 대단히 마땅하고 옳은(?) 일입니다.

 남녘나라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발자취’를 돌아보는 역사학자 숫자도 몇 없지만, 머나먼 옛날이 아닌 ‘아직 얼마 안 된 요즈음 우리 발자취’를 돌아보는 역사학자 숫자도 그리 안 많다고 느낍니다.


.. 일본 측은 재일조선인의 대부분이 징용노동자로서 일본에 강제 연행되었다는 ‘일반의 오해’를 불식시키는 일에 특히 열성적이었다. 일본 정부는 7월 11일, 이 문제에 관해 특별한 신문 보도자료를 내놓았고, 그 사본을 당연히 제네바에도 보냈다. 이 발표에 따르면, 태평양전쟁 종결시 일본에 있던 200만 명의 조선인 중 본인의 의사에 반해 징용된 노동자는 ‘작은 비율’에 지나지 않았고, “말할 것도 없이 이들에게도 표준 임금이 지불되었다.” 게다가 그 대부분이 종전시에 귀국했다 … 재일조선인 역시 본질적으로 ‘메구미’ 양과 다를 바 없을 텐데, 그들의 처지를 이해하거나 배려하려는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  (299, 413쪽)


 책을 넘기면서 마음 한 자리가 가볍지 않습니다. 그러나, 일본사람이 쓴 책이라 하여 나쁠 까닭이 없고, 일본사람이 쓴 책이기 때문에 훨씬 더 많은 자료를 만질 수 있다 할 수 있으며, 한결 차분하게 우리 발자취를 더듬어 나갈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더욱이, 마음 착하고 올바르게 살아가는 일본 지식인은 우리가 제대로 몰라서 그렇지, 꽤 많습니다.


.. 으르렁거리며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면서 발코니에 나가 보니, 눈 아래에는 아주 먼 청록색의 언덕까지 도시가 뻗어 있다. 만성적인 에너지 부족 탓일 것이다. 평양의 공기는 이제까지 방문한 어느 나라 수도보다 맑았다. 평양 하면 곧 생각나는 버드나무가 양쪽 강가에 늘어서 있고, 깊은 청록색 물이 천천히 도시 중심부를 뚫고 흐른다 ..  (258쪽)


 그런데 2008년 12월에 나온 책을 2009년 7월이 되어서야 다 읽고 덮습니다. 틀림없이 제 눈길을 끄는 책이요, 1959년에 일본과 북녘 사이에 벌어진 이야기를 좀더 깊이 알도록 도와줄 만한 책이라고 느꼈습니다만, 어인 까닭인지 책장이 잘 안 넘어갑니다.

 글쓴이 ‘테사 모리스-스즈키’ 님이 학술논문이 아닌 가벼운 수필처럼 읽을 수 있도록 이야기를 풀어나간 탓은 아니요, 역사를 바라보는 눈길이 비뚤어져 있기 때문은 아닙니다. 1959년 그때 그 사람들은 어떠했을까를 차근차근 헤아리며 그때 그 길을 곰곰이 밟아 나가는 흐름은 더없이 좋습니다. 그렇지만, 자꾸 흐려집니다. 일본과 북녘과 미국과 남녘 정부가 저마다 어떤 셈속과 꿍꿍이로 ‘일제 강점기 때에 고달팠던 사람들 아픔’을 더 고달프게 하고 아프게 했는가를 밝히는 이야기가 자꾸자꾸 흐려집니다. 기득권을 움켜쥔 이들이 벌이는 머리싸움과 힘싸움 때문에 누구 새우등이 터지고 있는지 하는 이야기가 흐려지고, 이러한 역사를 밝히는 일을 왜 해야 하는지가 흐려지며, 이와 같은 발자취는 지난 한때로 그치지 않고 있음을 사람들이 안 느끼고 있다는 이야기가 흐려집니다.


.. (국제적십자위원회 파리 대표) 윌리엄 미셸은 상당히 놀라면서도 다음과 같은 몇 가지가 드디어 분명해졌다고 적어 놓았다. 1. 일본에서 조선인 문제에는 전체적으로 봐서 인도적 배려는 없다. 2. 일본 정부는 생활이 곤궁하며 공산주의적인 데가 있는 조선인 수만 명을 배제함으로써, 안전 보장 문제와 (현재 빈궁한 조선인에게 거액의 돈이 지출되고 있다는 이유로) 예산 문제를 일거에 해결하고 싶어 하고 있다. 3. 이노우에 씨에 따르면, 일본 정부는 필요하다면 북한에 가고 싶어 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요구를 부채질해서라도 귀국사업을 실시할 결의를 갖고 있다 ..  (178쪽)


 책을 다 읽고 처음부터 다시 헤아리다 보니 178쪽에 나온 이야기가 이 책에서 글쓴이가 하고픈 말마디, 아니 ‘1959년부터 재일조선인 북송은 왜 이루어졌는가’를 밝히는 말마디 모두가 아닌가 하고 느낍니다. 그래, 이 말마디를 1쪽부터 447쪽까지 되풀이 말하거나 거듭 되뇌었구나 싶습니다. 한국과 일본이 서로 똑같이 꾸리고 있는 역사 한 자락을, 일본은 일본 정부 나름대로 제 배속만 차리려 한다는 정책이지만, 한국 또한 한국 정부 나름대로 제 배속만 채우려 한다는 정책일 뿐임을, 조금은 지루하게 살짝살짝 에돌며 이야기하고 있구나 싶어요. (4342.7.2.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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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녀들 봉기하다 : 영화 감독 김기영 - 오마주아 총서 003
이효인 지음 / 하늘아래 / 2002년 10월
평점 :
품절


 

 나라안에 ‘드문’ 영화감독과 영화책이긴 한데
 [잠깐 읽기 41] 이효인, 《김기영, 하녀들 봉기하다》


- 책이름 : 김기영, 하녀들 봉기하다
- 글 : 이효인
- 펴낸곳 : 하늘아래 (2002.10.1.)
- 책값 : 1만 원


 (1) 영화와 삶


 아기와 함께 살기 앞서도 극장마실은 거의 못했다고 떠오릅니다. 딱히 극장까지 찾아가서 볼 만한 영화가 있었는가 싶기도 했고, 먹고살기에 바빠서가 아니라 동네 문화 지키는 일에 힘을 쏟느라 극장마실은 꿈을 꾸지 못했습니다. 독립다큐영화인 〈어느 날 그 길에서〉(황윤 감독)를 마지막으로 극장마실은 해 보지 못했지 싶습니다.

 영화를 좋아하는 분들이 보기에는 ‘어떻게 저 사람들은 극장 한 번 안 가느냐?’ 할 텐데, 우리 사는 동네에 극장은 꼭 하나만 살아남은 가운데 이곳에 걸리는 영화는 온통 ‘흥행’과 ‘값싼 시간 죽이기’ 느낌이 짙기 때문에 굳이 극장마실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기도 했습니다. 마음을 뭉클뭉클 움직이거나 눈길을 사로잡는 영화를 꾸준히 내거는 극장이 가까이 있었다면 열 일을 젖히지는 못했을 터라도 한두 일은 젖히고 극장마실을 했으리라 생각합니다.


.. 그(김기영)는 스스로를 만족시키지는 못했지만, 영화의 예술적 성취를 이룬 행복한 감독이었고, 영화 시장에서도 결코 운 나쁜 감독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는 전무후무한 독창성으로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길을 한국 영화사에 열어 놓았다 … 그는 ‘한국 영화다운’ 감독이었지만, ‘가장 빨리 그리고 가장 많이’ 한국 영화를 벗어던진 감독이기도 했다. 그가 활발하게 활동했던 1960년대 한국 영화계는, 얼치기 장사치들이 도박하는 심정으로, 또 여배우를 직접 만날 수 있다는 재미로 돈 보따리를 싸들고 활개를 치던 시절이었다. 영화 기자재나 시설에 투자하는 제작자는 거의 없었고, 대부분이 일확척금을 노리는 투기꾼들로, “예술 같은 소리하네” 하며 아무런 부끄러움도 없이 대중의 속류 취미에 영합하는 영화를 만들던 시절이었다 ..  (12∼13, 35쪽)


 곰곰이 생각해 보면, 아기 때문이라는 말은 핑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 두 사람이 아기를 함께 보고 있기에 함께 극장마실을 못한다 할지라도, 한 사람씩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고 올 수 있을 테니까요. 이렇게 하자면 몹시 힘이 들기는 들지만, 극장마실 못하란 법이 없습니다. 극장에 아기를 데리고 찾아가 느긋하게 즐길 수 있을 만한 시설을 바라기란 꿈 같은 노릇이라 할는지 모르는데, 이 나라에 애 키우는 어버이가 한둘이 아님을 헤아린다면, 이렇게 바랄 수 있어야 하고, 또 바라야 하며, 또한 시설을 갖추어야 할 노릇이 아닌가 싶습니다. 덧붙여, 바퀴걸상을 타고도 극장을 드나들 수 있게끔 시설을 갖추어야 할 테고, 나무다리 짚고도 어려움 없이 극장을 찾아갈 수 있게끔 시설을 갖추어야 한다고 봅니다. 전철역에만 ‘장애인 화장실 자리’를 마련할 일이 아니라, 극장에도 마련해야 하고 큰 건물뿐 아니라 작은 건물에도 바퀴걸상을 끌고 들어갈 만한 뒷간을 마련해야지 싶어요.

 왜냐하면, 영화란 ‘있는’ 사람만 즐기는 문화나 예술이 아닐 테니까요. 책이란 ‘있는’ 사람만 즐기는 문화나 예술이 아닌 한편, ‘배운’ 사람만 누리거나 맛보는 문화나 예술이 아닙니다. 누구나 누리거나 맛볼 문화나 예술이며, 언제 어디서라도 함께할 만한 문화나 예술이라고 느낍니다.

 좀더 나아간다면, 팔다리가 없는 사람도 영화를 만들 수 있는 터전이 닦여 있어야 할 테며, 영화찍기를 배우고자 하는 이들이 드나들 대학교 문턱이 활짝 열려야 합니다. 스크린쿼터제를 말하기 앞서, 우리가 영화를 영화답게 즐기면서 받아들일 터전이 뿌리내려야 합니다. 시골이나 도시 변두리에도 극장 하나 들어서기를 바라기 앞서, 영화를 우리 삶으로 느낄 만한 터전이 자리잡고 있어야 합니다.


.. 그런 와중에 김기영이 〈이어도〉를 생각해 낸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의도적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주류였던 속류 리얼리즘 영화의 외풍 속에서 한국의 무속적 주술을 배경으로 인간의 욕망을 참담할 정도로 끝까지 밀고 간 것이다. 또 곁들인 것에 불과하긴 하지만, 그는 그때 이미 생태계 문제까지 거론했다. 김기영이 ‘김기영’일 수 있는 것은 (당대의 역사적 문맥을 벗어난) 완벽성보다는 (당대의 미학적 문맥을 향하여) 먼저 미끄러지면서 속류 리얼리즘이라는 억압적 주류에 결코 동의하지 않았다는 점 때문이다 ..  (81쪽)


 영화만이 아닙니다. 또, 책만이 아닙니다. 춤과 노래도 매한가지입니다. 연극과 공연도 한동아리입니다. 모든 문화와 온갖 예술은 우리 삶에 밑바탕을 두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 삶자락을 함께 이루는 이웃들하고 어깨동무를 하고 있어야 합니다. 동네에서 즐길 수 있는 영화이면서 너른 공연장에서 즐길 수 있는 영화여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즐길 수 있는 책 하나이면서, 먼 뒷날 우리 뒷사람이 함께 즐길 수 있는 책 하나여야 합니다. 우리 겨레가 흐뭇하게 받아들이는 춤과 노래이면서, 이웃 겨레가 손잡고 흐뭇하게 받아들이는 춤과 노래여야 합니다. 돈으로 이루어지는 연극이나 공연이 아니라, 돈이 없이도 넉넉히 즐기고 돈이 있으면 있는 만큼 푸지게 잔치판을 벌이는 연극과 공연이어야 합니다.

 계급이 아니니까요. 신분이 아니니까요. 내려다보기가 아니니까요. 올려다보기 또한 아니니까요.

 하늘나라에서 베풀어 주는 선물이 아닌, 바로 이 땅에서 우리 손으로 일구어 영글도록 하는 문화로서 영화입니다. 바깥나라에서 보내어 주는 선물이 아닌, 바로 우리 스스로 땀흘리며 이루고 맺도록 하는 예술로서 영화입니다.


.. 산만하게, 마치 모래를 흩뿌리는 것처럼 김기영은 ‘…다’로 끝나는 각양각색의 삼류 잠언들을 영화 곳곳에 심어 놓는다. 그에게는 사랑도 없고, 믿음도 없으며, 오로지 관객들을 ‘놀래킬 영화’만이 중요했는지 모른다 … 단순히 ‘비참한 현실을 봉합’만 한 것이 아니라, ‘하녀들’을 실컷 욕보이다가 우리들의 세상을 ‘욕보이는 것’으로 끝을 맺은 것이다. 결과적으로 김기영의 ‘하녀들’은 세상에 ‘능욕 당하면서도’ 세상을, 아니 우리들을 ‘능욕한’ 것이었다 ..  (95, 126쪽)


 그러나, 우리들은 우리 터를 우리 손으로 내버리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우리 만남터를 우리 손으로 내팽개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우리 쉼터를 우리 손으로 짓뭉개고 있습니다. 우리 살림터를 우리 땀방울로 허물고 있어요.

 여럿이 어울릴 너른 터를 버리고 자가용 세워 놓는 터로 바꾸어 놓습니다. 옹기종기 어울리면서 살아갈 마을을 없애고 높다란 아파트로 부동산 노릇을 하도록 고쳐 놓습니다. 조그마한 골목길까지 자가용으로 밀고들어오며, 학교 운동장을 줄이고 교사들 자가용 세울 자리를 마련해 놓습니다. 운동기구나 놀이시설이 변변하게 없었어도 너른 운동장에서 갖가지 놀이를 즐기던 아이들은 하나둘 사라졌는데, 노는 아이들만 사라지지 않고 ‘서로 어울려 노는 어른들’ 또한 사라졌습니다. 우리는 으레 ‘골목길에 아이가 사라지고 시골에 아이가 사라진다’고만 말하지만, 아이들이 사라지기 앞서 ‘어른이 먼저 사라’졌습니다. 더 많은 돈과 더 많은 이름값과 더 많은 권력을 바라보면서 시멘트와 쇠붙이로 이루어진 사무실에 틀어박혀 버렸고, 이웃이 사촌이 되고 옆집 사람과 서로 동무를 맺던 흐름을 깨 버렸습니다. 깨어진 틈바구니에서 아이들이 끼어들 자리란 없었고, 아이들은 놀이터도 운동장도 골목길도 고샅길도 빼앗긴 가운데 방구석으로 움츠러들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되면서 어른들이 아이들한테 내어주는 옷이며 밥이며 집이며 교육제도며 ‘옛날보다 나아졌다’고 할지라도, 어른들이 아이들한테 나누어 주는 사랑이며 믿음이며 따스함이며 넉넉함이며 송두리째 스러져 버렸어요.

 이리하여, 오늘날은 책은 책대로 넘치지만, 껍데기 책이 훨씬 많지 않느냐 싶습니다. 오늘날은 지난날처럼 온갖 가위질에 쩔쩔매는 영화가 거의 없다지만, 알맹이 영화는 외려 나오기 힘들지 않느냐 싶습니다.

 삶이 망가진 자리에는 책 또한 망가지니까요. 삶이 망가진 자리에서 영화 또한 망가지고 마니까요.


 (2) 《김기영, 하녀들 봉기하다》라는 이야기책


 영화이야기를 즐겨쓰는 이효인 님이 2002년에 펴낸 《김기영, 하녀들 봉기하다》를 읽습니다. 벌써 일곱 해나 흘렀고, 이 책에서 주인공이 되는 김기영 님은 저승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영화뿐 아니라 모든 문화와 예술이 뒤처져 있는데다가 제대로 자료를 간수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모르는 노릇이지만 김기영이라고 하는 영화감독 삶자락을 돌아보면서 갈무리하기로는 이효인 님이 거의 처음이 아닌가 싶고, 또 마지막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처럼 낱권책 하나로 영화감독 한 사람을 다루는 일로는.


.. 그는 이런 자신의 가족들의 관계와 이력을 무척 자랑스러워했다. 인텔리 집안 출신이며 예술적 재능을 지닌 혈족의 일원이라는 점이 김기영 자신에게는 평생 동안 남들과 구분 짓는 선민 의식의 뿌리였다. 그의 영화가 거의 언제나 대중들의 생활 속에 있으면서도 가끔 ‘너희들은 몰랐지?’라는 발언을 하는 까닭도 여기에서 연유된 것인지도 모른다 … 김수용과 유현목 (감독)은 대체로 예술 엘리트주의의 입장이었다. 그들이 아무리 서민의 고통을 다룬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엘리트들의 연민으로 보이거나 그 묘사 방식에서도 엘리트적이다. 신상옥은 대중의 고통 따위는 영화적 소재에 불과할 뿐 진정한 문제제기나 해결책의 모색과는 전혀 거리가 먼, 보다 더 고압적인 엘리트의 입장이다. 이런 점에서 이만희는 비교적 김기영과 비슷한 입장이라고 볼 수 있지만, 이만희는 통속적이기는 하되 통속  그 자체에 묻혀 버린 영화적 경향을 가지고 있다. 반면 김기영 역시 통속적인 흥행성을 대단히 추구했지만, 그만의 독특한 감성은 대단히 매혹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기 영화의 매혹에 대해 아마도 성 묘사가 노골적이며 많았기 때문이며, 예술 작품이라고 하면 손님이 안 드니까 장르로 관객과 씨름한 데에 기인한 것이라고 말한다 ..  (23, 44쪽)


 저는 김기영 님 영화를 본 적이 없습니다. ‘김ㆍ기ㆍ영’이라는 이름 석 자 또한 낯섭니다. 영화를 잘 몰라서도 그러할 테지만, 부모님 집에서 함께 살던 고등학생 때까지(1993년까지) 텔레비전에서 ‘김기영 영화’를 보여주었다는 생각은 한 번도 떠오르지 않습니다.

 어쩌면, 언젠가는 잠깐 스쳐 보았을는지 모릅니다. 보고도 모를 수 있고, 보고도 못 느꼈을 수 있습니다. 널리 이름난 몇몇 영화감독이 아니고서는 여느 사람한테까지 두루 알려지지 못할 테니 어쩔 수 없다 말하고 넘어가도 되겠지만, 우리 사회에는 ‘다양성’과 ‘개성’이란 좀처럼 스며들기 어렵지 않느냐 싶습니다. 다양성이든 개성이든 받아들이지 않는 우리 삶터가 아닌가 싶습니다. 정치권력이, 제도권교육이, 월급쟁이 회사원 얼거리가, 그리고 이런저런 사회 얼거리를 넘어 바로 우리들 삶부터.


.. 특히 박정희 군사 정권의 집권 연장을 위한 강압적 통치는 한국 영화를 말살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우선 박 정권은 비현실적인 영화사 등록제를 시행하여 일정한 시설과 장비 그리고 인력을 갖추지 않은 영화사는 영화 제작조차 못하게 했다 … 이런 행정적인 규제보다 더 불리한 조건은 박 정권의 정치적 검열이었다. 가혹한 검열에 의해 많은 영화들이 현실의 어두운 면을 드러내거나 미미한 신체 노출이 있다거나 하는 것이 빌미가 되어 ‘반공’과 ‘도덕’이라는 잣대로 가위질을 당했다. 여기서 말하는 현실의 어두운 면이란, 가난한 동네가 배경이 된다던가, 길거리에 연탄재가 나와 있다거나, 방안에 요강이 있다거나 하는 따위의, 실제로는 지극히 현실적인 장면들이었다 … 당시 모든 영화는 시나리오 단계에서 정부 기관의 검열을 거친 뒤 허가가 나야만 제작에 착수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 뒤에도 제작자는 제작자대로 검열을 했고,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도 촬영장, 편집실, 시사실 등 모든 과정은 검열의 과정이었다 … 결과적으로 한국의 명망 있는 감독들이 택할 수 있는 길은 세 가지밖에 없었다. ‘반공 영화’, ‘새마을 영화’, ‘이순신 장군 영화’같이 국책에 부응하는 영화를 만드는 방법이 그 하나였고, 무색무취하되 말초적인 흥행 감각만을 좇아 만드는 방법이 두 번째 방법이었으며, 마지막으로 외화 수입 쿼터를 따낼 수 있는 ‘우수 영화’ 선정을 노리는 방법이 세 번째 방법이었다 … 그(김기영)는 영화 인생을 유지하고 빚을 갚기 위해 사십대와 오십대를 보냈고, 억압적인 정치 환경과 이율배반적인 검열을 빠져나가기 위해 뒤틀린 표현을 하느라 오십대와 육십대를 흘려보냈다 ..  (47∼49, 67쪽)


 영화감독 김기영 님은 ‘빚 갚기’와 ‘뒤틀린 골짜기에서 허덕이기’를 하면서, 당신 영화문화와 영화예술을 빛내도록 할 나날을 허투루 보내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나날을 보냈기 때문에, 이제 와 돌이켜볼 때에 ‘김기영한테는 김기영 빛깔이 있다’는 영화를 빚어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박정희 군사독재가 영화며 책이며 연극이며 춤이며 온갖 문화와 예술을 짓밟는 짓거리를 하지 않았다면, 김기영 영화는 어떠한 쪽으로 흘렀을까요. 그때에는 한결 아름답고 훌륭하며 거룩한 길을 걸었을까요. 그때에도 오늘 우리한테 남겨진 영화와 마찬가지인 길을 걸었을까요. 그때에는 영화에는 아예 눈길 한 번 안 보내고 의사라는 길을 걸었을까요. 그때에는 더더욱 상업주의 영화로 깊이 파고들었을까요.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영화를 찍는 분들은 어떤 매무새로 영화를 만나고 있는가요. 오늘날 영화 감독들께서도 ‘빚 갚기’에 허덕이고 있으신가요. ‘뒤틀린 골짜기에서 허덕이기’를 똑같이 되풀이하고 있으신가요. 애써 만들었어도 걸어 놓을 극장을 얻지 못해 고달프신가요. 돈이 되는 영화를 빚어내느라 진땀을 빼고 있으신가요. 돈에 앞서 사람마음을 건드릴 영화에 온 넋과 얼을 바치고 있으신가요.


.. 그는 모든 허례나 허식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관객과의 대화에서 한 관객이 “왜 영화 속에 비정상적인 체위가 나오느냐?”고 묻자 그는 “난 변태니까”라는 말로 그냥 받아넘길 정도였다. 그에게는 실질, 실속, 실익만이 중요한 것이었다. 실제로 그의 영화에는 상업적 코드가 대단히 많이 들어 있다. 그가 “어린이 같은 사람”이라는 견해를 수용한다면, 김기영 감독이 관객과의 대화에서 그런 식으로 말한 것은 또다른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예술 영화를 추구하는 감독으로 인식되면 투자자가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는 염려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물론 그는 예술가다 ..  (152쪽)


 《김기영, 하녀들 봉기하다》를 덮습니다. 나라안에 드문 영화감독 김기영이었던 만큼, 이 책 《김기영, 하녀들 봉기하다》 또한 나라안에 드문 ‘영화를 말하는 책’입니다.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영화 이야기를 다루어 주었고, 여느 사람은 건드리기 힘든 영화 자료를 곳곳에 잘 자리잡아 놓으면서 ‘글뿐 아니라 사진으로도 즐겁게’ 넘겨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책을 펼치는 내내, 또 책을 덮은 뒤로 무언가 자꾸 까끌까끌하게 입안에 남습니다. 애써 책 하나로 ‘나라안에 드물었던’ 영화감독 한 사람 삶과 생각을 다루려 했는데, 이렇게밖에는 못하나 싶은 까끌까끌함입니다. 아직은 ‘책 하나로 영화감독 김기영을 속속들이 밝혀 말하기 어려웁다’고 할는지 모르지만, 좀더 차분하게 발자취를 밟아 볼 수 없었나 싶어 아쉽습니다. ‘남다른 영화감독한테 바치는 꽃다발’로 엮은 책인지, ‘남달랐지만 아쉬운 영화감독을 바라보며 오늘날 영화감독은 거듭나기를 바라는 채찍질’로 엮은 책인지, ‘나는 김기영을 좀 아는데, 김기영은 이렇더라구’ 하는 수다떨기를 하려고 엮은 책인지 갈피를 잡기 힘듭니다.

 그리 길지 않은 책임에도 같은 이야기가 되풀이된 대목이 있고, 쓸데없이 어려운 말을 집어넣은 대목이 자주 보입니다. 이를테면 “그 특정 장르에 어울리는 도상圖像icon이 필요할 때마다”처럼 글을 쓴 대목입니다. ‘도상圖像icon’이란 도무지 무슨 소리인지,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모습인지 알 노릇이 없습니다.

 모쪼록, 그동안 일곱 해라는 세월이 흐른 만큼, 그사이 김기영 감독과 얽힌 새로운 자료가 더 나왔을는지 모르고, 여러 증언과 이야기와 필름이 나왔을는지 모릅니다. 글쓴이 스스로도 좀더 글매무새를 다독이는 세월이 되었을는지 모르고요.

 부디 이 책 《김기영, 하녀들 봉기하다》가 그저 ‘나라안에 드물었던 영화감독’을 다루는 ‘나라안에 드문 책’쯤으로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아니었기를 바랍니다. 앞으로는, 영화에 온삶을 바친 영화감독 발자취와 삶자락이 좀더 깊고 너르게 드러나는 이야기꽃을 피워내 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영화를 ‘지식’을 얻자고 들여다보지 않는 만큼, 영화감독과 영화작품을 다루는 자리에서도 ‘지식’이 아닌 ‘감동’이 있는, 그러니까 영화감독 ‘삶’이 물씬 묻어내는 이야기꽃을 펼쳐내 주면 고맙겠습니다. (4342.6.26.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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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개발 아파트 시 읽는 어린이 27
김영미 지음, 심보영 그림 / 청개구리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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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땀’ 없이 ‘생각’만으로 쓴 문학은 빈 껍데기
 [잠깐 읽기 36] 김영미, 《재개발 아파트》



- 책이름 : 재개발 아파트
- 글 : 김영미
- 그림 : 심보영
- 펴낸곳 : 청개구리 (2009.5.5.)
- 책값 : 8000원



 (1) 동시는 어떻게 쓰는가?


 2006년에 ‘황금펜아동문학상(동시)’을 받고, 2008년에 ‘한국일보 신춘문예(동시)’에 뽑혔으며, 광주에서 어린이집을 꾸리는 김영미 님이 동시모음 《재개발 아파트》를 펴냈습니다. 그무렵 신춘문예 심사를 맡은 분들은 “새로운 시적 발견인가 하는 점에서는 다소 주저되는 면이 있긴 하지만,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따스하고 진지한 점이 돋보인다(한국일보 2008.1.2.)”고 적습니다. 출판사 인터넷방에 적힌 소개글을 살피면 “현실을 바라보는 날카로운 인식 위에 따뜻한 희망이 얹어 있”다는 이야기가 보입니다.

 동시모음 《재개발 아파트》는 이제까지 나온 동시모음과 견주면 이름부터 남다릅니다. 다른 동시 작품은 ‘현실을 바라보는 날카로운 인식’이 있다고는 거의 느낄 수 없는 터이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 나라에도 무언가 빛다르게 이야기를 풀어내는 작품이 선보였는가 싶어 좀더 눈길이 갑니다.

 고구마를 이야기하면서도 ‘먹기만 하는’ 고구마가 아니라, 아이가 ‘손수 호미를 쥐고 캐는’ 고구마를 이야기합니다. 재개발 아파트를 바라보면서도 여느 어른들과 달리 돈이나 싸움이 아닌 다른 자리에서 바라보는 눈썰미를 느낍니다.


.. 나도 반가워 / 밭이랑으로 / 달려가 / 고구마 캤지요 // 아빠 고구마를 캐니 / 엄마 고구마 / 아기 고구마 / 줄줄이 따라나와요 // 고구마 식구들은 / 땅속에서도 / 날마다 꼬옥 / 손잡고 있었나 봐요 ..  (고구마)


 그렇지만 《재개발 아파트》에 실린 여러 작품을 읽고 돌아보는 동안 마음이 답답합니다. 속시원하게 뚫는 작품은 찾아보기 수월하지 않고, 책방과 도서관 책시렁을 가득 차지하고 있는 ‘말장난 동시’는 아니라고 느끼면서도 어느 구석인가 갑갑합니다.

 글쓴이는 머리말에서 신춘문예에 뽑힌 뒤 기자하고 만나던 이야기를 적어 놓습니다. 기자는 글쓴이한테 “아무리 봐도 재개발 아파트와는 상관없는 분 같은데요?” 하고 물었다는데, 글쓴이는 “그 말은 가난해 보이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이런 시를 쓸 수 있냐는 것이었지요. 농담처럼 물었지만 나는 부끄러웠습니다 … 나에게도 가난한 어린 시절이 있었습니다. 풍족이라는 것은 상상 속에, 아니면 책 속에서나 가능했던 시절, 수줍고 내성적이던 나는 가난이 부끄러워 당당하지 못했습니다. 그때는 가난해서 부끄러웠고, 이제는 가난하지 않아서 부끄러운 이 아이러니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하고 생각합니다. 기자한테는 대충 얼버무리는 말만 했다고 합니다.

 머리말에서 글쓴이 스스로 밝힙니다만, 글쓴이는 ‘이제는 가난하지 않으나 어린 날에는 가난했던’ 분입니다. 아마, 오늘날 수많은 어른들이 글쓴이와 비슷하지 않으랴 싶습니다. 먹을거리 입을거리 모자라고 작은 방 한 칸에 큰식구가 끼어 살던 일을 떠올리지 않을 어른은 드물리라 봅니다.

 이런 지난날은 조금도 부끄러울 까닭이 없습니다. 살림을 편 오늘날 또한 하나도 부끄러울 구석이 없습니다. 가난한 지난날은 가난한 대로 좋고, 넉넉한 오늘날은 넉넉한 대로 좋습니다. 가난하니 얻기도 하고 받기도 합니다. 넉넉하니 베풀기도 하고 주기도 합니다. 얻는다고 창피할 까닭 없고 준다고 으스댈 까닭 없습니다. 모두 똑같은 자리에서 똑같이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 현수네가 도시로 이사 가고 / 끝까지 남아서 / 집을 지켜 주던 할머니마저 / 돌아가신 후 / 집은 정말로 혼자가 되었어 // 있는 힘을 다해 / 기둥을 받치고 / 주춧돌에 힘을 줬지만 / 아주 조금식 / 집은 알몸으로 허물어져 갔지 ..  (현수네 빈집)


 가난해 보이지 않더라도, 아니 가난하게 살지 않더라도 가난은 얼마든지 그릴 수 있습니다. 내 가슴이 가난한 벗하고 어깨동무를 하고 있다면 얼마든지 그릴 수 있습니다. 또한 가난한 이는 못 보거나 못 느끼는 대목까지 살포시 잡아채면서 무척 싱그럽고 훌륭히 펼쳐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난하다고 하여 가난한 삶을 모두 잘 그려내지 않습니다. 스스로 굴레에 갇히거나 발목에 쇠사슬을 매어 놓고 있으면 가난이건 무엇이건 어느 하나 제대로 그려내지 못합니다.

 누구한테나 마찬가지입니다만, 가슴이 있느냐 없느냐로 시를 쓰지 머리로 시를 쓰지 않습니다. 돈이 있느냐 없느냐로 시를 쓰지 않습니다. 집이 크냐 작으냐로 시를 쓰지 않습니다. 골목동네에 산다 하여 골목동네 삶자락을 사진으로 더 잘 담는다든지 소설로 잘 풀어낸다든지 하지 않아요. 골목동네에 안 살고 있어도, 골목동네 사람들과 이웃이 되고 벗이 되고 언니오빠동생이 되는 매무새라면 얼마든지 사진 잘 찍고 소설 잘 쓰고 동시 잘 엮을 수 있습니다.


.. 지하도 입구에서 / 고개를 푹 처박고 / 손만 내민 아이 / 마치 손이 얼굴 같습니다 ..  (지하도의 아이)


 동시모음 《재개발 아파트》는, 글쓴이 스스로 겪었으며 지켜보는 ‘가난한 자리’가 조촐하게 담깁니다. 그렇지만 수수하지는 않습니다. 싱그럽지도 않습니다. 꾸밈없이 담기는구나 싶지만, 꾸밈이 없다고 해서 살갑거나 따뜻한 작품이 되지는 않아요. 내미는 손길이라고 하여 늘 따뜻하지 않습니다. 맞잡는 손길이 되어도 언제나 따스하지 않습니다. 껴안는 몸짓이라 하여도 한결같이 따사롭지 않아요.

 시 하나가, 소설 하나가, 사진 하나가, 그림 하나가, 몸그림 하나가 따뜻하거나 따스하거나 따사로우려면 다른 데에서 만나고 부둥켜안아야 합니다. 아름다움을 꽃피우려면, 기쁨을 나누려면, 웃음꽃과 눈물꽃을 일구려면, 다른 곳에서 어우러지고 어깨동무해야 합니다.


.. 어른들은 모두 엉터리야! / 지구촌 한마을이니 / 사이좋게 살아야 한달 때는 언제고 // 우리 반의 코시안 영진이와 / 놀면 싫어하고 ..  (모두 한마음으로)


 동시모음 《재개발 아파트》에 추천글을 쓴 문삼석이라고 하는 시인은 “아무튼 김영미 선생님은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이 어떤 곳인가에 대해 아주 많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아. 그리고 우리에게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 것인지, 행복하게 살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는지 우리들에게 끊임없이 생각하게 하고 있어(123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곰곰이 돌아보면, 문삼석 시인이 한 말이 맞습니다. 김영미 님 동시는 ‘생각하는 동시’입니다. 아이들한테 시를 읽으며 ‘생각하도록’ 이끕니다. 다만, ‘생각만 하는’ 동시요, ‘생각에 머문’ 동시인데다가, 아이들 스스로 ‘생각에 갇히’게 하는 동시로 그칠 뿐입니다.

 내 삶, 그러니까 글쓴이 삶이 없습니다. 내 벗, 그러니까 글쓴이와 벗삼을 아이들 삶이 없습니다.


 (2) 어린이책은 어떻게 만드는가?


 이 책에는 그림이 무척 많이 실려 있습니다. 그림을 그린 분은 여러 작품을 내놓았고, 예술고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한데, 이분 그림을 죽 돌아보면 ‘잘못 그린’ 그림이 곳곳에 나타납니다. 너무 많아 모두 들 수는 없고, 대표로 몇 가지만 들어 봅니다. 먼저 73쪽에 게 두 마리가 나오는데, 게는 ‘옆으로 걷’지 앞으로 걷지 않습니다. 게는 다리가 ‘열’이지 여덟이 아닙니다. 그 옆 72쪽 그림과 91쪽 그림에는 맛조개가 나옵니다만, 맛조개가 갯벌에서 뽀롱 고개를 내미는 모습이 이 그림과 같을까요? 이제는 거의 모든 갯벌이 땅메우기로 사라집니다만, 태안 앞바다만 해도 그럭저럭 남아 있으니(그나마 태안 앞바다는 기름으로 잔뜩 뒤덮이며 더러워지고 말았지만), 몸소 맛조개를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면 좋겠습니다. 더구나, 갯벌은 모래하고 빛깔이 아주 다르지요. 모래밭이나 ‘누런 빛’ 또는 ‘금빛’은 될지언정, 갯벌은 ‘짙은 잿빛’입니다. 때로는 ‘맑으면서 시커먼’ 빛이라 할 수 있고요. 79쪽을 보면 높자란 대나무가 나옵니다. 대나무 줄기는 잿빛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대나무가 잿빛일 수 있을까 궁금한데, 대나무가 ‘죽으면’ 잿빛이 됩니다. 대나무는 추위를 많이 타서 따뜻한 곳에서만 살아가는 나무입니다. 대나무를 쓰다듬어 본 분은 누구나 알 테지만, 대나무가 높자라면서 잎을 틔우려면 ‘푸르디푸러야’ 하고, 대나무잎은 마디마다 자랍니다. 땅바닥에 잎을 박고 있지 않아요.


.. 학교 가는 길 / 흘깃 / 건너편 근로자 대기소를 본다 // 뽑히지 못한 아저씨들이 / 옹기종기 모여 앉아 / 하얀 한숨을 날린다 // 발 앞에는 / 식구들의 숟가락 수만큼 / 꽁초가 수북이 쌓이고 // 담배 연기는 / 몽글몽글 하늘로 날아가는 / 아이들의 희망 // 쪼그려 앉은 아빠의 등 / 오늘은 / 유난히 더 좁아 보인다 ..  (근로자 대기소)


 그림 이야기를 따지자면 동시모음 두께보다 더 두꺼운 책을 써도 모자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그만둡니다. 다만 하나, 겉그림에 나온 자전거는 안 짚을 수 없습니다. ‘체인 없는’ 자전거를 타고다닐 수 없겠지요. 이 그림 하나에 모두 다 담아낼 수 없다지만, ‘브레이크 없는’ 자전거도 못 탈 테고요. 아이 얼굴에 주근깨도 그리고 머리카락도 한 올 두 올 그렸으며, 운동화 밑창에 금까지 그어 놓는 꼼꼼함을 생각한다면, 자전거 체인과 브레이크가 없는 자전거가, 또 뒷바퀴 축이 없는 자전거가 어떻게 구를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그런데 그림만이 아닙니다. ‘노동자 대기소’가 아닌 〈근로자 대기소〉라는 작품을 보면, ‘아이가 학교 가는 길에 흘깃 건너편 근로자 대기소를 본다’가 나옵니다. 이 동시모음은 초등학생이 볼 테니, 초등학교 아이가 학교 가는 길이겠지요. 초등학교 아이는 몇 시에 학교에 갈까요? 일찍 간다 하여도 여덟 시는 넘을 테지요. 아주아주 드물게 일곱 시 반에 나서는 아이도 있을 터이나, 여덟 시가 안 되어 학교에 닿으면 학교문은 잠겨 있습니다. 초등학교 아이들은 여덟 시 반이 넘어서야 비로소 학교에 간다고 보아야 올바릅니다.

 그러면, ‘노동자 대기소’에 ‘막일 하는 아저씨들은 몇 시에 나와서 모여’ 있을는지요?


.. 섬이 / 외로워도 / 아무 불평 없이 / 저렇게 떠 있는 건 // 날마다 / 파도가 놀러 와 / 발가락 간질이며 / 놀아 주기 때문이야 ..  (섬)


 막일을 안 해 본다고 막일 이야기를 못 그리라는 법이 없습니다. 삽질을 안 해 보았다고 삽자루 쥐며 땅 파는 모습을 못 그리라는 법이 없습니다. 시이든 그림이든 마찬가지입니다.

 겪어 보지 않았다고 늘 잘못 그린다고 할 수 없지만, 제대로 알아보지 않는다면 잘못 그리고 맙니다. 찬찬히 돌아보지 않는다면 엉터리가 되고 맙니다.

 막일을 하는 사람들, ‘노동자 대기소’에 있는 사람들은 ‘늦어도 새벽 여섯 시까지’는 모여 있어야 하고, ‘여섯 시 반’이면 으레 일감 나누기가 끝납니다. 아니, 여섯 시 반이면 저마다 일할 자리에 차 타고 가 닿아서 연장통을 챙긴다고 해야 옳지요.

 일곱 시만 되어도 대기소는 텅 빕니다. 요즈음 중고등학교 아이들은 어떠할까 모르겠습니다만, 중고등학교 아이들 가운데에는 일곱 시가 되어도 잠들어 있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새벽밥 지어 먹고 나가는 중고등학교 아이들이라고 하여도 ‘노동자 대기소 일꾼’을 보기 어렵습니다.


.. 이쪽 산이 저쪽 산에게 말했습니다 / -우리 꽃놀이 할까? / -뭐라고? / 아! 봄이 왔다고! // 둘이는 / 늘 딴말만 했습니다 // 터널이 뚫렸습니다 / 이제는 / 서로의 말이 / 잘 들렸습니다 // -민들레 홀씨, 세 개만 꿔 줄래? / -내년 봄에 꼭 갚아야 돼! // 둘은 / 이제 / 조금도 심심하지 않습니다 ..  (터널)


 이렇게 잘못 쓴 작품이 어쩌다 한 번 나온다면 그러려니 넘어갑니다. 그런데, ‘갑작스레 섬이 외롭다’고 나오는 까닭이 무엇인지 알쏭달쏭합니다. 공장 굴뚝에서 나오는 연기를 바람이 손질한다는 생각은 재미있기는 하나, 재미로 그칠 뿐입니다.

 글쓴이 집이 공장하고 이웃하고 있다고 해 보십시오. 아니, 공장과 울타리를 마주한 집에서 하루쯤이라도 지내 보십시오. 저는 어릴 적 태어나서 이제까지 살아가는 집이며 동네이며, 언제나 공장이 늘 가까이 붙어 있고, 공장으로 큰짐을 실어 나르는 큰차가 언제나 싱싱 달리는 길가에서 살았으며, 공장에서 내뿜는 연기와 폐수를 끝없이 바라보았습니다. 아침에 학교 가는 길에는 으레 온몸에 공장에서 내뿜는 연기와 폐수 냄새가 짙게 배어들었습니다.

 〈터널〉과 〈우리 동네〉 같은 작품도 안타깝기 그지없다고 느낍니다. 제 몸뚱이 한복판이 뻥 뚫린 산들이 뭐가 좋다고 즐겁게 웃으면서 ‘자동차 씽씽 달리는 구멍으로 의사소통을 할까’요? 북극이 밤낮이 따로 없는 까닭은 무엇 때문인가요?


.. 저 멀리 공장 굴뚝에서 / 연기가 머리카락처럼 나부낀다 // -깎아 드릴까요? / 볶아 드릴까요? / 미용사 바람이 다가와 / 친절하게 묻는다 // 굴뚝은 무뚝뚝 / 대답이 없다 // 화가 난 바람 / 굴뚝의 머리를 / 스트레이트로 쫙쫙 펴 버린다 ..  (바람은 미용사)


 동시를 읽고 사이그림을 보면서 한숨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책을 덮고 나서도 한숨이 절로 나왔습니다. 신춘문예 심사위원은 어떤 눈으로 작품을 가려냈는지 모르겠어서 한숨이 나오고, 이와 같은 작품을 신춘문예에 내놓을 수 있는가 싶어 한숨이 나오며, 이만한 작품을 애써 책으로 빚어내는 출판사 분들은 어떤 눈매인가 싶어 한숨이 나옵니다.

 그렇지만 아무런 빈틈이 없고 어느 하나 어설픈 대목이 없어야만 ‘대상을 주’고 ‘책으로 내’고 ‘문학을 해야 한다’란 법이 없습니다. 모자라면 모자란 대로 좋고, 어설프면 어설픈 대로 좋으니까요.

 그런데 말입니다, 맞춤법과 띄어쓰기가 잘 맞는다고 해서 좋은 작품일까요. 시를 쓰는 글감만 잘 뽑는다고 해서 훌륭한 작품일까요. 글쓴이가 드넓은 생각힘을 뽐내며 우리 삶터 이야기를 골고루 건드린다고 해서 문학이란 이름을 붙여도 될까요.


.. 우리 동네는 / 잠들지 못한다 // 24시간 pc방 / 24시간 찜질방 / 24시간 편의점까지…… // 온통 하얗게 / 대낮처럼 불을 밝혔다 // 이러다 / 달님이 길 잃고 / 못 찾아오면 / 어쩌지? // 아예 / 북극처럼 / 밤낮 없어지면 / 어쩌지? ..  (우리 동네)


 이 작품을 읽을 아이들을 걱정해 봅니다. 누구보다 이 작품을 쓴 분이 바라볼 삶터를 근심합니다. 문학에는 글쓴이 생각이 깊고 너르게 담기기 마련이지만, 생각만 담는다고 하여 문학이 되지 않습니다. 생각을 싣는다고 스스로 문학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상 몇 가지 탔다고 자랑스러운 문학인이라고 내세울 수 없습니다. 해적이에 끄적일 만한 이름조차 되지 않습니다.

 글쟁이는 제 작품으로 말하는데, 제 작품으로 무엇을 말하느냐면 제 삶을 말합니다. 글쟁이는 제 작품으로 제 삶을 말합니다. 제 생각을 말하는 제 작품이 아니라, 제 삶을 말하는 제 작품이 되어야 하는 글쟁이입니다.

 김영미 님은 동시모음 《재개발 아파트》에서 남다른 생각을 산뜻하고 재미있게 보여주었다 할 만합니다. 그런데 그 생각주머니는 어디에서 나왔는가요? 그 생각주머니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요? 머리에서 태어내 머리에서 죽는 생각인가요? 글쓴이 생각은 어디에 발을 대고 있는지요? 글쓴이 발은 어느 자리에 있는지요?

 글쓴이가 오늘날은 부자로 살아가고 있으면 ‘부자로 살아가는 이야기’를 거리낌없이 쓰면 됩니다. 부자로 살아가고 있어도 가난한 동무하고 오순도순 벗삼으며 살아간다면 ‘가난한 동무하고 벗삼는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쓰면 됩니다.

 가장 ‘가난한’ 문학이란, 생각주머니로만 펼치는 문학입니다. 가장 ‘넉넉한(부자인)’ 문학이란, 온몸을 움직여 땀흘린 이야기를 팔다리로 드러내는 문학입니다. 부디, 다음 작품에서는 글쓴이 ‘땀방울’을 흘리는 모습과 글쓴이 ‘땀방울이 떨어진 자리’ 삶자락이 고스란히 묻어날 수 있기를 빌어 봅니다. (4342.5.30.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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