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과 일본의 근대 살림지식총서 188
최경옥 지음 / 살림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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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177



‘일본 한자말’을 무턱대고 쓰는 한국

― 번역과 일본의 근대

 최경옥 글

 살림 펴냄, 2005.7.15.



  최경옥 님이 쓴 《번역과 일본의 근대》(살림,2005)라는 책은 일본이라는 나라가 ‘개화기’라고 하는 때에 서양 문화와 문명을 어떻게 받아들이려 했는지 들려줍니다. 서양은 서양말을 쓰고 일본은 일본말을 쓰니, 일본에서 서양 문화와 문명을 받아들이려 한다면, 일본에서 서양말을 쓰든지 서양말을 일본말로 옮겨야 합니다. 이때에 일본에서는 ‘서양말을 그대로 쓰는 길’보다 ‘서양말을 일본말로 옮기는 길’을 걷는다고 합니다.


  곰곰이 돌아봅니다. 한국은 일본과 달리 ‘서양말을 한국말로 옮기는 길’을 걷지 않았습니다. 예나 이제나 한국에서는 한국말을 살리는 길로 가지 않을 뿐더러, 한국말을 생각하면서 한국 사회나 문화를 가꾸는 길로 가지 않습니다.



.. 대체로 동양식 근대화에 있어서는 전통적인 사유양식이 지니는 체제유지의 촉매제 역할로서 자본주의적 근대화를 위한 부국강병을 전제한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바로 이 관점이 일본의 근대화 과정에서 나타나는 보편적인 문명개화인 것이다 … 메이지 정변 이전의 막부 관료 출신으로서 ‘한쇼구라베죠’에 소속된 인물들이었고, 주로 외국어 중심의 신지식을 가지고 막부 정부에 참가했다 ..  (10, 24쪽)



  일본은 왜 서양말을 일본말로 옮기려 했을까요. 일본 사회와 문화가 발돋움하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왜 서양말을 안 쓰고 일본말을 쓰려고 했을까요. 낯선 문화나 문명을 낯선 말로 들려주면 알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한국은 왜 한국말을 살리거나 가꾸지 않을까요. 한국 사회나 문화를 제대로 살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개화기나 일제강점기를 지나 해방이 되고 한국사람 스스로 정치와 경제와 문화와 교육을 다스린다고 하지만, 왜 아직도 한국에서는 한국말로 가르치거나 배우는 얼거리를 세우지 않을까요. 아직도 한국 사회에서는 한국말을 제대로 다루거나 바라보거나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거치면서 일본 국내에서는 낭만주의, 자연주의, 사회주의와 같은 신사조가 받아들여지게 되는데 이 시기를 제2차 서양지향기라 한다. 이 시기에는 제 1차 서양지향기에 탄생된 언문일치가 정착의 단계를 맞이하며, 소학교에서 국정교과서를 사용하게 됨으로써, 표준어 성립이라는 근대적 국가의 틀을 갖추어 가는 시기가 된다. 메이지 시대는 이와 같은 과정 속에서 급격한 어휘 변화를 겪게 되는데, 이렇게 증가된 단어는 ‘번역한자어’가 대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  (30쪽)



  그런데, 《번역과 일본의 근대》라는 책을 읽으면, 이 책을 이루는 글은 온통 ‘일본 한자말’입니다. 토씨는 한국말이지만, 낱말은 거의 모두 ‘일본 한자말’입니다. 말투도 한국사람 말투가 아니라 일본 말투이거나 번역 말투입니다. 일본에서는 서양 문화와 문명을 받아들이려고 하면서 서양말을 ‘번역 한자말’을 썼다고 하지만, 한국은 왜 한국말도 못 쓰고 한국 말투도 못 쓸까요. 왜 한국은 번역 말투에다가 일본 말투가 뒤섞인 엉성한 말투를 쓸까요. 일본은 그들 나름대로 ‘번역말’을 짓고 가꾸고 손질하고 보듬으면서 그들 사회와 문화를 세웠지만, 한국은 지난날이나 오늘날이나 아직 우리 나름대로 ‘번역말’을 짓지도 못하고, ‘한국말 살리기’조차 못 합니다.


  말이 바르게 서지 않은 나라에 어떤 문화가 있을까 궁금합니다. 말을 바르게 살리지 못하는 나라에서 어떤 문명을 일굴 만할까 궁금합니다. 한국사람이 한국말을 제대로 할 줄 모르는데, 이런 바탕으로 서양말이나 한자말을 제대로 익히거나 다룰 수 있을는지 궁금합니다.



.. 후쿠자와가 전혀 새로운 번역어를 만들어내지 않고 일본어에서 사용되고 있던 단어를 굳이 끄집어내어 사용한 것은 되도록이면 일본인의 일상적 언어생활에서 이해할 수 있는 단어를 번역어로 사용하려 했던 그의 배려였는지도 모른다. 현실과 동떨어진 말이 아니라, 현실에 살아 있는 단어를 새로이 조작하고 조합함으로써 전혀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내려는 그의 의도는 … 한국의 서구문명 수용은 사실상 일본의 경험에 의해 이미 걸러진, 다시 말해 일본에 의해 번역된 제2의 서구문명을 이식받은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  (33, 79쪽)



  후쿠자와 유키치라는 사람이 지은 ‘일본말’은 “일본인의 일상적 언어생활에서 이해할 수 있는 단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일본인의 일상적 언어생활에서 이해할 수 있는 단어”는 무엇일까요. 이런 말마디는 얼마나 ‘한국말’다울까요. ‘일본사람이 으레 쓰는 쉬운 말’로 ‘번역말’을 짓고, 학문을 하고 책을 옮기고 문화와 문명을 갈고닦은 일본입니다. 이와 달리, ‘한국사람이 으레 쓰는 쉬운 말’이든 ‘한국사람이라면 누구나 쓰는 수수한 말’이든 ‘한국사람이 고장마다 즐겁게 쓰는 말’이든 ‘어른과 아이가 모두 알아듣는 쉽고 깨끗한 말’이든, 한국말이라 할 참다운 한국말로 학문을 하거나 문화나 문명을 갈고닦을 날은 언제쯤이 될까 잘 모르겠습니다.


  일본에서 서양 문화와 문명을 받아들인 까닭은 일본에 새롭게 거듭나고 싶기 때문입니다. 한국에서 서양 문화와 문명을 받아들여야 한다면 한국이라는 나라가 새롭게 거듭나고 싶기 때문이어야 합니다. 일본 뒤를 좇는다든지 미국 꽁무니를 따르려고 서양 문화와 문명을 받아들일 까닭은 없습니다.


  영어를 쓰든 일본 한자말을 쓰든, 아니면 한국말을 슬기롭고 아름다우며 사랑스럽게 갈고닦든, 아무쪼록 한국사람 스스로 제 넋과 얼을 똑똑히 찾을 수 있기를 빕니다. 4347.12.1.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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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열 선생님의 우리말 바로 쓰기 - 우리말과 글을 제대로 쓰는 지름길
이수열 지음 / 현암사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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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89



한자는 ‘한국말’이 아닙니다

― 이수열 선생님의 우리말 바로 쓰기

 이수열 글

 현암사 펴냄, 2014.10.6.



  이수열 님은 1999년에 처음 낸 《이수열 선생님의 우리말 바로 쓰기》(현암사,2014)를 2014년에 고침판으로 다시 선보입니다. 428쪽에 이르는 도톰한 책을 꼼꼼하게 읽으면서 생각합니다. 이수열 님은 이 책에서 ‘한국말을 바르게 쓰는 길’을 밝히기보다는 ‘품위 있는 한자말을 알맞게 쓰는 길’에 크게 마음을 기울이는구나 싶습니다.



.. 지식인들이 이렇게 터무니없이 유치한 표현을 하는 현상은, 영어의 수동문을 무턱대고 모방하는 것이 버릇이 된 결과다 … (‘식어지면’은) ‘식으면’이라고 고쳐야 한다. 이를 두고 시적 허용이나 창조적 시어라고 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나, 언어의 기본 질서를 파괴하고 치졸하게 표현하는 것은 결코 창조가 아니다 ..  (58, 65쪽)



  한국이나 중국이나 일본은 ‘한자 문화권’이 아닙니다. 한자 문화권이 될 수도 없습니다. 왜 그러할까요? 한국도 중국도 일본도, 예부터 99%를 웃도는 거의 모든 사람은 시골에서 흙을 만지면서 스스로 삶을 지었습니다. 세 나라 모두 99%를 웃도는 거의 모든 사람은 시골에서 ‘글’이나 ‘책’은 하나도 모르면서 ‘말’로 삶을 지었습니다. ‘한자’를 빌어 글을 쓰거나 책을 엮은 사람은 1%조차 안 됩니다.


  그러니, ‘한자 문화권’이라는 이름부터 말이 안 돼요. 몇몇 권력자와 지식인이 한자를 썼다고 해서 세 나라가 이러한 한자로 문화권을 이루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옳게 말하자면, 한국도 중국도 일본도, 또 유럽도 다른 아시아도 중남미도 ‘시골 문화권’이라고 해야 합니다. 지구별 거의 모든 나라 거의 모든 사람들은 밥과 옷과 집을 스스로 시골자락에서 일구면서 쓰레기는 하나도 없이 살았어요. 글이나 책이 없어도 삶을 아름답게 가꾸었습니다.



.. 여러 국어사전에 실린 표제어 ‘세련된다’는 무식한 사람들이 잘못 쓰는 표현을 합리화한 것이므로 삭제해야 한다. 그리고 좀 더 생각해 보면, ‘세련한’이라는 관형어보다는 세련한 결과를 드러내는 말을 앞세워, 세련한 작품은 수려(秀麗)한 작품, 세련한 문장은 간결(簡潔)하고 유려(流麗)한 문장, 세련한 말씨는 유창(流暢)한 말씨, 세련한 몸매는 맵시 있는 몸매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하겠다 ..  (75쪽)



  우리가 쓰는 말은 옛사람이 슬기롭게 지은 말입니다. 한자로 짓거나 알파벳으로 지은 글이 아니라, 글이 없어도 얼마든지 ‘생각으로 지은 말’입니다. ‘말’이라는 낱말부터 시골에서 흙을 일군 사람이 지은 낱말입니다. 사람, 생각, 하늘, 땅, 흙, 꽃, 풀, 나무 …… 온갖 낱말을 시골사람이 손수 지었습니다.


  임금님이나 지식인이나 신하나 학자는 어떤 낱말도 안 지었습니다. 이들은 한자를 빌어 저희끼리 권력을 만들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수열 님은 《이수열 선생님의 우리말 바로 쓰기》라는 책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세련한 한자말’이나 ‘유려한 한자말’이나 ‘유창한 한자말’을 쓰는 길을 밝힙니다. 그러면, 이 책은 “우리말 바로 쓰기”가 아니라 “한자말 바로 쓰기”로 이름을 고쳐야 알맞으리라 느낍니다.



.. 문화의 지엽적 세목이라 할 주거·복식·음식 등에 문화를 붙여, 주거문화·복식문화·음식문화라고 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 양식·법식·양상·방식·종류 등 차원에 어울리는 말로 가려 써야 한다 ..  (234쪽)



  ‘음식문화’처럼 쓰는 말이 올바르지 않다면, 우리는 어떤 말을 써야 할까요? ‘음식양식’이나 ‘음식종류’처럼 써야 할까요?


  ‘문화’라는 한자말이 없던 때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런 한자를 알지 못하거나 쓰지 않던 때에 사람들이 어떻게 말을 주고받았는지 떠올려야 합니다.


  예부터, 밥이면 ‘밥’이라고만 합니다. 따로 ‘밥 문화’라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렇지만, 오늘날에는 따로 문화를 헤아리면서 이야기를 해야 하니 ‘음식 문화’이든 ‘밥 문화’이든 새로운 말이든 지어야 해요. 이러한 흐름을 살핀다면, ‘밥 문화’란 ‘밥삶’이나 ‘밥살이’처럼 새롭게 낱말 하나 지을 만합니다. 왜냐하면, 문화란 언제나 삶이기 때문입니다. 삶으로 녹아내거나 삭힐 때에 비로소 문화예요. 그러니, 한자말을 쓰고 싶다면 ‘음식 문화·밥 문화’처럼 쓰면 되고, 한국말을 쓰고 싶다면 ‘밥삶·밥살이’처럼 쓰거나 그냥 ‘밥’처럼 쓰면 됩니다.



.. ‘좋지 않다’와 뜻이 같고, 많은 사람이 그렇게 말하니까 별로 문젯거리가 아닌 듯싶으나 ‘안’을 여러 상태에 두루 적용해 보면 ‘편찮으시다’가 ‘안 편하시다’, ‘귀찮다’가 ‘안 귀하다’가 되는 등 본래 어감을 손상하는 예가 생긴다 ..  (253쪽)



  ‘안’이라는 한국말을 앞에 붙이는 일은 잘못이 아닙니다. 아이들은 으레 ‘안’을 앞에 붙여서 씁니다. 이와 달리, 글을 배우거나 생각을 조금 더 차분히 갈무리하는 어른들은 ‘안’을 앞에 넣기보다는 뒤쪽에 넣습니다. 아이들은 “나 밥 안 먹어”처럼 말하고, 어른들은 “나는 밥을 먹지 않겠습니다”처럼 말합니다. 이수열 님 말씀과 달리 ‘안’을 앞에 넣는다고 해서 글멋이 사라지거나 글맛이 없어지지 않습니다. ‘안’을 앞에 넣는 말씨는 ‘어린이 말씨’입니다. 그리고, 뜻이나 느낌을 힘주어 말하고 싶을 적에 ‘안’을 앞에 넣습니다. “안 해!”와 “하지 않아!”는 뜻은 같아도 느낌은 달라요.



.. ‘냉탕’, ‘온탕’은 한자 지식이 짧은 사람이 짜맞춰 놓은 한자음이지 한자어가 아니다. 말다운 한자어도 될 수 있으면 순수어로 바꿔 써야 우리말이 아름다워진다. 참으로 감각적이고 친밀한 ‘찬 물’, ‘따뜻한 물’, ‘더운 물’, ‘뜨거운 물’을 비켜 놓고, 무식쟁이들이 짜맞춰 놓은 한자음을 말입네 하고 쓰는 것은 ..  (265쪽)



  이 글월에서 엿볼 수 있듯이, 이수열 님은 “말다운 한자어”를 사람들한테 알리고 싶은 마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자 지식이 짧은 사람”이 아무렇게나 한자말을 짜맞추는 일을 보면 이수열 님은 여러모로 거북하게 여기시는구나 싶어요.


  그나저나 ‘순수어’란 무엇일까요? 왜 ‘순수어’를 말할까요?


  어느 겨레나 나라에도 ‘순수어’란 없습니다. 그저 ‘말’이 있습니다.


  한자와 한자말은 한국말이 아닙니다. 한국말이 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한자와 한자말 가운데 우리가 쓸 만하다 싶으면 받아들여서 쓰기도 합니다. 나라밖에서 들여온 말은 ‘들온말(외래어)’이라 합니다. 우리가 쓰는 한자말은 모두 ‘들온말’입니다.


  그런데, 굳이 들여올 만하지 않은데 마구 들어와서 함부로 쓰는 말이라면 ‘바깥말(외국말)’입니다. 오늘날 한국에 널리 퍼진 수많은 일본 한자말은 바로 ‘바깥말’입니다. 꽤 예전에 한국사람이 썼다고는 하지만, 몇몇 권력자와 지식인만 쓰던 ‘중국 한자말’도 바깥말입니다. 한국사람은 한국말을 쓰면 됩니다. 오랜 옛날부터 한겨레가 쓰던 말에다가 바깥에서 우리 스스로 즐겁게 받아들인 말을 쓰면 돼요.



.. 역지사지(易地思之)는 ‘처지(處地)를 바꿔서(易)  그것(之)을 생각(思)한다’는 순수 국어를 한역(漢譯)해 놓은 문자(文字)다 ..  (266쪽)



  이수열 님은 《이수열 선생님의 우리말 바로 쓰기》라는 책에서 이 보기글처럼 한자를 자주 드러내어 묶음표에 자꾸 넣습니다. 왜 이렇게 해야 할까요? 이렇게 쓰는 글은 얼마나 “우리말 바로 쓰기”가 될까요?



.. ‘대한다’는 ‘-에 응한다, -에 대항한다’는 뜻의 자동사와 ‘-을 상대한다, -을 맞이한다’는 뜻의 타동사로 긴요하게 쓰는 말이지만, 타동사로 서술할 대상에 관형사형이나 부사형을 덧붙여서 쓰면 말의 맥이 빠져 박력 없는 표현이 된다 ..  (294쪽)



  ‘-에 대하다’는 한국 말투가 아닙니다. 번역 말투입니다. 영어를 잘못 옮겨 잘못 퍼진 말투입니다. ‘-에 대하다’는 “말의 맥이 빠져 박력 없는 표현”이 아니지요.



.. 이는 일어의 ‘∼ている’와 영어의 ‘be + ∼ing’ 형을 흉내 낸 것이지만, 오래 익어서 우리 어감을 별로 해치지 않는 것까지 부정하기는 어려우므로 굳이 절대로 쓰지 말라고 할 수는 없다. 다만 마치 우리말을 서투르게 배워 쓰는 외국인 말 같은 표현은 피해야 한다 ..  (256쪽)



  영어 현재진행형을 잘못 옮긴 ‘-고 있다’가 “우리 어감을 별로 해치지 않”는다고 함부로 말할 수 없습니다. 한국사람이 그만 이런 말투에 길들었을 뿐입니다. 더군다나, ‘-고 있다’는 영어 현재진행형뿐 아니라, 일본사람이 ‘中’이라는 한자를 빌어서 쓰는 말투가 뒤섞이면서 아주 얄궂게 퍼졌습니다.


  이러한 말투를 나무라려고 한다면, 이수열 님부터 이러한 말투를 안 써야 할 텐데, 《이수열 선생님의 우리말 바로 쓰기》라는 책에서 ‘-고 있다’ 같은 말투를 퍽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이 대목은 모두 바로잡아야지 싶습니다.



- 부추기고 있으니(25쪽)

- 즐겨 쓰고 있으니(62쪽)

- 앉아 계십니다(119쪽)

- 말살이를 시키고 있다(210쪽)

- 길을 막고 있는(328쪽)

- 같이 쓰고 있지만(338쪽)

- 예사로 쓰고 있으니(342쪽)



.. 우리말을 영어 직역투로 쓰는 대표적인 기형 서술어가 ‘-을 갖는다’는 표현이다. 아무거나 ‘갖는다’고 한다 ..  (44쪽)



  한편, ‘갖는다(가지다, 갖다)’가 영어 직역투라고 꼬집는데, 정작 이수열 님도 이 말투에서 홀가분하지 않습니다. 더욱이, ‘갖는다’와 비슷한 꼴로 ‘지니다’를 똑같이 잘못 씁니다. 낱말을 ‘가지다’ 아닌 ‘지니다’로 바꾼다고 해서 영어 직역투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 피동의 뜻을 지니기도 한다(64쪽)

- 일본인만의 고유한 정서를 지닌 것이 아닐(212쪽)

- 명사의 뜻을 가진 한자(275쪽)

- 더러운 뜻을 지니게 되었다(308쪽)

- 하여간 등의 뜻을 지닌 부사(335쪽)



.. ‘저절로, 자진하여, 제 힘으로’를 뜻하는 부사인데, 몇몇 국어사전이 부사 이외에 자기 자신을 뜻하는 명사로도 규정하여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물어 보라’, ‘스스로를 보살펴라’ 따위의 예문을 보였으나, 모두 분별 없는 짓이다. 아무 격조사도 붙이지 말고 순수하게 부사로만 써야 한다 … ‘자신’은 ‘자기’와 더불어 한자어임을 거의 의식하지 않고 친숙하게 쓰는 명사여서 ‘스스로’로 바꿔 쓰면 오히려 억지스러운 느낌이 든다 … ‘자기가’, ‘자신이’를 ‘스스로가’로 바꾼다고 자주 정신이 돋보이거나 우리말이 더 순수해지는 것이 결코 아니다. 고유한 어법이 무너지고 말맛만 상하니, 절대로 섣부른 말놀음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 ‘스스로도’를 빼어 버리고 “주민도 자구 노력해야”로 고쳐야 한다 ..  (141, 142, 143쪽)



  ‘스스로’를 다루는 이 대목에서도 ‘한자말 사랑’을 엿볼 수 있습니다. 한자말 ‘자기·자신’은 널리 써도 되고, 한국말 ‘스스로’는 쓰임새를 넓혀서 즐겁게 쓰면 안 될까 궁금합니다. “주민도 자구 노력해야”처럼 고쳐쓰라고 하는 말도 아리송합니다. 왜 “주민도 스스로 애써야”처럼 쓰면 안 될까요?


  말은 언제나 자랍니다. 고이는 말은 없습니다. 먼 옛날이라면 ‘스스로’도 아주 좁은 틀에서만 쓰면 됩니다. 오늘날처럼 갖가지 문명과 온갖 생각이 넘치는 때에는 한국말도 쓰임새를 차츰차츰 넓혀서 우리 뜻과 넋을 알뜰살뜰 담아낼 수 있도록 힘을 써야 합니다.



.. ‘모두’는 ‘서로’, ‘스스로’, ‘그대로’처럼 원래 부사로만 써 본 말인데, 요즈음 표현력이 미숙한 공직자와 언론인이 명사로 둔갑시켜 쓰는 사례가 만연하자, 주요 국어사전이 덩달아 명사로도 풀이해 우리의 언어 생활을 치졸하게 한다 ..  (144쪽)



  ‘모두’를 다루는 대목에서도 이수열 님이 ‘규범주의’에 갇힌 모습을 살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수열 님이 내세우는 ‘한국 말법’은 누가 세운 말법일까요? 예부터 한국사람이 스스로 쓰던 말법일까요, 아니면 몇몇 국어학자가 서양 말법에 따라 한국 말법을 억지로 끼워맞춘 말법일까요?


  “너희 모두 먹었니?”나 “우리 모두 좋아요!” 같은 말마디에서 ‘모두’는 이름씨일까요, 어찌씨일까요? 이런 말마디는 옳을까요, 그를까요?



.. 나이가 많은 사람 중에는 ‘감사한다’가 일본말 찌꺼기이므로 버리고 ‘고맙다’만 써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가 있지만, 그것은 오해다. 일본인이 ‘감사한다’는 말을 많이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 말이 일본인만의 고유한 정서를 지닌 것이 아닐 뿐더러, 그 뜻과 느낌이 우리말에도 맞는다 ..  (212쪽)



  ‘감사(感謝)’라는 한자말을 정 쓰고 싶으면 쓰면 됩니다. 그러나, 이런 한자말을 쓰려고 한국말 ‘고맙다·고마움’을 밀어내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한국사람이 갑작스레 ‘감사’라는 한자말을 부쩍 자주 쓰는 까닭은 일제강점기 때문입니다. 일본사람이 쓰던 말투에 길들었고, 일본책을 한국말로 옮기면서 이 한자말이 어마어마하게 퍼졌습니다. 그러니 이 한자말을 놓고 ‘일본 한자말’이라고 나무랄 만합니다.


  생각해 보셔요. 시골에서 흙을 일구던 99%가 넘는 오랜 한겨레가 ‘고맙다’라는 한국말을 썼을까요, ‘감사하다’라는 한자말을 썼을까요? 규범주의에 갇힌 틀과 ‘한자말 사랑’을 내세워서 한국말을 엉뚱하게 밀어내는 일은 안 해야지 싶습니다.



.. “꾸준히 노력하는 가운데 성공의 문이 열린다”, “계절이 바뀌는 가운데 자연에 대한 새로운 감각이 싹튼다”, “바쁜 가운데 용케 틈을 냈다”처럼, 일이나 행동, 때가 나아가는 과정을 뜻하는 ‘가운데’를 아무 데나 버릇처럼 쓰면, 말의 표현 방식이 일정한 틀로 굳어서 졸렬해진다 ..  (158쪽)



  ‘가운데’도 영어 번역 말투입니다. 그리고, ‘中’을 즐겨쓰는 일본사람 말투이기도 합니다. ‘가운데’는 이러한 말씀처럼 쓸 수 없습니다. 한국말사전에 나오는 말풀이도 잘못입니다. “꾸준히 애써서 성공이라는 문을 연다”, “철이 바뀌니 자연을 새롭게 보는 마음이 싹튼다”, “바쁜데 용케 틈을 냈다”처럼 바로잡아야 올바릅니다.



- 살아가는 중에 뜻밖에(277쪽)

- 대학 교수가 강연하는 중에(337쪽)



  “살아가는 중에”는 “살면서”로 바로잡고, “강연하는 중에”는 “강연하면서”로 바로잡아야 합니다. 이 대목에 나오는 ‘중’을 ‘가운데’로 고친들 올바르지 않습니다.



.. 다음 예문 중 밑금 그은 ‘의’는 말의 매끄러운 흐름을 가로막는 군더더기다 ..  (172쪽)



  한국말을 어지럽히는 잘못 가운데 으뜸으로 손꼽는 ‘-의’를 다루면서, 이수열 님은 그만 ‘-의’를 집어넣습니다. 다른 사람이 쓴 ‘-의’는 잘못이고, 이수열 님이 쓴 ‘-의’는 알맞거나 올바른가요? “말의 매끄러운 흐름”이란 무엇일까요?



- 그 법의 존재조차 모르는 듯한(5쪽)

- 이 책의 결점(6쪽)

- 자신의 일을 말하는 것인지 상대편의 일을 말하는 것인지(21쪽)

- 종래의 국어사전(25쪽)

- 위의 표에서(32쪽)

- 일반인의 대화에서(35쪽)

- 일본어의 특유한 표현법을 모방한 것이어서(61쪽)

- 조상의 숭고한 얼이 깃든 우리의 고유한 말본을 망가뜨리는(90쪽)

- ‘の’의 용례 ‘君への手紙’의 번역문이다(181쪽)

- 앞의 보기에서 말한 것처럼(184쪽)

- 이상의 예는 각각의 시기를 나타내는 말이므로(196쪽)

- 밥의 양이 적을 경우에(197쪽)

- 말의 품위를 떨어뜨린다(208쪽)

- 대중의 언어 생활(219쪽)

- 형용사의 뜻을 지닌 한자나 한자어(275쪽)

- 단편소설의 한 장면이다(325쪽)

- 신문 기사 속의 용례를 살펴보자(342쪽)

- 극도의 혐오감을 자아낸다(342쪽)



  《이수열 선생님의 우리말 바로 쓰기》라는 책에서 몇 군데만 들었는데, 이 보기글에서 한자말을 한자로 바꾸고, ‘-의’를 ‘の’로 바꾸면, 일본사람이 쓴 글하고 똑같습니다.


  그리고, “위의 표에서”나 “앞의 보기에서”는 아주 일본 말씨입니다. 일본사람이 원고지를 쓸 적에 으레 보여주던 말씨예요. “위의 표에서”는 “앞서 든 표에서”나 “이 표에서”로 바로잡고, “앞의 보기에서”는 “앞서 든 보기에서”나 “이 보기에서”로 바로잡아야 합니다.


  125쪽을 보면 “이웃으로부터 눈총을 받았다 → 이웃의 눈총을 받았다”처럼 손질한 보기글이 있는데, “이웃한테서 눈총을 받았다”로 바로잡아야지요. 127쪽을 보면 “스승으로부터 글을 배운다 → 스승께서 글을 배운다”처럼 손질한 보기글이 있는데, “스승한테서 글을 배운다”로 바로잡아야 합니다.



- 영어 직역투로 쓰는 대표적인 기형 서술어(44쪽)

- 영어의 영향을 받은 표현 형식의 대표적인 예다(179쪽)

- 전면적으로 다시 만들어야 할(283쪽)

- 습관적으로 마구 쓴 것이다(324쪽)

- 부분적인 소유격을 뜻하는(343쪽)



  ‘-의’ 못지않게 한국말을 어지럽히는 ‘-的’이 있는데, 이수열 님은 ‘-的’붙이 낱말은 아예 안 건드립니다. 그러면서 이러한 말투를 곳곳에 씁니다. “손꼽히는 말”, “손꼽힌다”, “모조리/몽땅/모두”, “버릇처럼”, “살짝/조금”으로 고쳐쓸 노릇입니다.



.. ‘-화한다’는 고속·국제·도시·미·민주처럼 동사의 어근이 될 수 없는 한자어에 붙어서 ‘무엇이 어떻게 된다’는 자동사와 ‘무엇을 어떻게 되게 한다’는 타동사를 이루는 접미사로, 다음같이 쓴다 … 요즈음 지식인들은 이처럼 간명한 논리를 모르고, 아무 말에나 ‘-화한다’를 붙여 쓰며, 써야 할 말에 붙일 때에는 ‘-화시킨다’, ‘-화된다’, ‘-화되어진다’ 따위로 꼴사납게 쓴다 ..  (82쪽)



  ‘-化’를 붙이는 말버릇도 한국말을 어지럽힙니다. 이런 말버릇도 일본사람 말버릇입니다. 이수열 님은 이 일본사람 말버릇도 스스로 바로잡거나 가다듬지 않습니다. 한 가지만 고쳐 본다면, 더 빠르게 한다고 할 때에는 ‘고속화한다’가 아니라 ‘빠르게 한다’나 ‘빨라진다’라 적으면 됩니다.



- 우리말은 끝없이 저질화할 것이다(61쪽)

- 잘못 쓰는 표현을 합리화한 것이므로(75쪽)

- 너무 치졸해서 도저히 생활화할 수 없다(79쪽)

- 더 빠르게 한다고 할 때에는 ‘고속화한다’고 해야 한다(83쪽)

- 더욱더 저질화하는 처사를 보니(283쪽)



  이수열 님은 한자말을 너무 사랑하는 탓에 외마디 한자말도 즐겨쓰고, 쉽지 않거나 묶음표에 넣는 한자말도 자꾸 씁니다. 몇 가지 보기글을 옮겨 봅니다. 이러한 보기글을 바로잡지 않으면서 “우리말 바로 쓰기”를 할 수 있을는지 고개를 갸우뚱할 뿐입니다. ‘납득’ 같은 낱말은 일본 한자말이기도 하지만, 한국말 ‘닿소리·홀소리’가 있는데, 굳이 묶음표를 치고 한자까지 밝히면서 ‘자음·모음’을 써야 하는 까닭도 아리송합니다.



- 격려해 주신 데 대해 충심으로 감사한다(5쪽)

- 의미가 서로 통하는(25쪽)

- 똑같은 범주에 속한다(79쪽)

- 전혀 감이 안 잡힌다(325쪽)

- 주체성 상실을 겸해서(342쪽)

- 쓰임이 자재로운 데 반해(344쪽)


- 일순간에 구별할 수가 없다(21쪽)

- 알맞은 순수어로 쓰자(204쪽)

- 납득(納得)한 학생이 설득한 학생에게(207쪽)

- 필자는 이 말들의 뜻과 문법 기능을 골똘히 연구한 끝에(210쪽)

- 기승을 부린다(329쪽)

- 그녀를 연발할 때는 민망하기 짝이 없다(329쪽)

- 우리말과 표현 방식이 판이한 외국어(329쪽)

- 지식인들이 애용하는 단골말(337쪽)

- 우리말로 오인하고 예사로 쓴다(340쪽)

- 정중하고 융숭하게 대접하기도 하고(344쪽)


- 창해일속(滄海一粟)에 불과할 것임을(5쪽)

- 자음의 발음은 모든 모음(母音)과 자음 중에서(23쪽)

- 미흡한 교육과 무관심한 언중(言衆)(34쪽)

- 지식인의 말병(言語病)을 치유할 수 있는 묘약(46쪽)

- 어느 정도의 자의(自意)가 있으므로(198쪽)

- 일본 의태어 ‘きら’의 취음한자(取音漢字)다(337쪽)

- 악화(惡貨)에 밀려난 양화(良貨) 신세가 되었다(339쪽)



  이밖에, “옥의 티”처럼 으레 쓰는 말투를 “옥에 티”처럼 쓰시는데, 우리는 그냥 “티”라고만 적으면 됩니다. 티라면, 옥에 묻은 티만 있지 않아요. 어디에서나 티는 티입니다. “인식함인지”처럼 이름씨 꼴로 끝맺는 말씨는 번역 말투입니다. “위와 같이”도 “앞의 보기”나 “위의 표”처럼 일본 말투입니다. “이와 같이”로 고쳐써야 합니다. ‘-지다’를 아무렇게나 쓰지 말라 이야기하시면서 “생각이 틀려지나 보다”처럼 적은 글줄도 알맞지 않습니다. “필요성을 느껴서”는 “필요를 느껴서”로 바로잡거나 “해야 한다고 느껴서”로 바로잡습니다. “위 기사”는 “이 기사”로 바로잡고, “예로부터”는 “예부터”로 바로잡습니다.



- 옥에 티(8, 63쪽)

- 외국어 교육에나 하는 것으로 인식함인지(21쪽)

- 위와 같이(162쪽)

- 많이 배울수록 생각이 틀려지나 보다(197쪽)

- 필요성을 느껴서 일부러 하는 행위가 아니므로(198쪽)

- 위 기사에서(340쪽)

- 예로부터(341쪽)



  끝으로 두 가지를 붙입니다. 쉽게 쓰면 될 말을 퍽 어렵게 쓴 글월을 두 가지만 뽑아서 손질해 봅니다. “우리말 바로 쓰기”가 참답게 한국말을 바르게 쓰면서 즐겁게 살찌우고 아름답게 밝히는 길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한자말을 쓰고 싶으면 쓰되, 지나치게 한자말을 내세우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 어른들이 아이들한테 어떤 말을 물려줄 때에 다 함께 즐겁고 아름다우면서 사랑스럽게 한국말을 가꿀 수 있는지 생각해야지 싶습니다.



- 의미가 서로 통하는 ‘창(窓)’과 ‘구(口)’가 겹쳐서 구상명사와 추상명사의 뜻을 함께 지닌 창구는 (25쪽)

→ 뜻이 서로 이어지는 ‘창(窓)’과 ‘구(口)’가 겹쳐서 꼴있는이름씨와 꼴없는이름씨로 함께 쓰는 창구는

: ‘의미(意味)’는 ‘뜻’으로 다듬습니다. ‘구상명사(具象名辭)’는 ‘꼴있는이름씨’로 손보고, ‘추상명사(抽象名詞)’는 ‘꼴없는이름씨’로 손봅니다. “-의 뜻을 함께 지닌”은 “-로 함께 쓰는”으로 손질합니다. 이 보기글을 보면, 앞에서는 한자말 ‘의미’를 쓰다가 뒤에서는 한국말 ‘뜻’을 쓰는데, 앞뒤 모두 한국말 ‘뜻’으로 적어야 올바릅니다.



- 최현배 씨가 쓴 《우리 말본》에 보조 동사가 자동사와 어울리는 예로, ‘날씨가 따뜻해서 산의 눈이 녹아진다’, ‘신라가 고려에 망하여졌다’를 들어 놓았으나 너무 치졸해서 도저히 생활화할 수 없다 (79쪽)

→ 최현배 씨가 쓴 《우리 말본》에 도움움직씨가 제움직씨와 어울리는 보기로, ‘날씨가 따뜻해서 산의 눈이 녹아진다’, ‘신라가 고려에 망하여졌다’를 들었으나 너무 어설퍼서 도무지 쓸 수 없다


: ‘예(例)’는 ‘보기’로 손봅니다. ‘치졸(稚拙)하여’는 ‘어설퍼서’나 ‘엉뚱해서’로 손질하고, ‘도저(到底)히’는 ‘도무지’나 ‘아무래도’로 손질합니다.



  한국말은 한국말입니다. 한국말 뿌리는 시골말에서 찾아야 합니다. 지식인들이 잘못 쓰는 말은 그만 건드리고, 먼먼 옛날부터 이 나라에서 시골사람이 손수 짓고 손수 가꾼 말을 슬기롭게 살피면서 알차게 북돋우는 길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4347.10.30.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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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시작하는 부자 공부
권성희 지음 / 가디언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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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172



나는 부자인가 아닌가

― 지금 시작하는 부자 공부

 권성희 씀

 가디언 펴냄, 2014.1.3.



  누리책방 ‘예스24’에서 얼마 앞서 책을 선물해 주었습니다. ‘이달에 가장 알차게 블로그를 가꾼 사람’한테 주는 선물이라 했는데, 선물로 날아온 책꾸러미 가운데 《지금 시작하는 부자 공부》(가디언,2014)가 있었습니다. 나는 이런 갈래 책을 한 권도 산 적이 없고, 읽은 적도 없습니다. 내가 이러한 책을 이제껏 읽은 적이 없는 줄 용케 알아서 선물해 주는가 하고 생각해 봅니다. 한편, 내가 아직 부자가 아니라고 여겨 앞으로는 부자가 되기를 바라면서 선물해 주는가 하고 헤아려 봅니다.


  아무렴, 그렇겠지요. 《지금 시작하는 부자 공부》 같은 책은 ‘부자인 사람’이 읽을 일은 없으리라 느낍니다. 부자가 되고픈 마음이 있는 사람이 읽겠지요. 그리고, ‘부자인 사람’ 가운데, 앞으로도 꾸준히 부자로 삶을 이으려는 분이 있으면 이 책을 읽을는지 몰라요. 왜냐하면, 시인이나 소설가로 일하는 사람도 ‘다른 작가가 쓴 글쓰기 이야기책’을 읽을 테니까요.



.. 중산층 부모들이 ‘돈이 조금만 더 있었어도 아이에게 더 많은 것을 해 줄 수 있을 텐데’라고 안타까워 하는 반면, 부자 부모들은 ‘돈 때문에 아이가 성실하게 살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를 걱정한다 ..  (47쪽)



  《지금 시작하는 부자 공부》는 경제신문 기자가 씁니다. 경제신문 기자이니 돈을 다루는 이야기를 글로 자주 쓰리라 느낍니다. 그러면, 경제신문 기자가 바라보는 돈이란 무엇이고, 경제신문 기자가 아는 부자는 어떤 사람일까요?


  회사를 만들어서 주식을 가진 사람이 부자일까요? 은행계좌에 돈을 많이 넣으면 부자일까요? 그렇다면, 주식을 얼마나 가져야 부자일까요? 은행계좌에 넣은 돈이 얼마쯤 되어야 ‘많다’고 할 만하거나 ‘부자’라고 할 만할까요?


  한번 묻고 싶어요. 은행에 100억 원이 있으면 부자일까요? 아마, 부자라고 여길 테지요? 그러면, 99억이 있으면? 이때에도 부자라고 여길 테지요? 98억은? 97억은? 96억은? …… 85억은? 84억은? 83억은? …… 24억은? 23억은? 22억은? …… 11억은? 10억은? 9억은? …… 1억은? 9천만은? 8천만은? …… 1천만은? 9백만은? 8백만은? …….


  부자라 할 수 있는 사람은 숫자로조차 따질 수 없습니다. 숫자로 따져 보셔요. 참말, 숫자로 누구부터 부자이고, 누구까지 부자가 아니라 할 수 없습니다.


  나이가 많은 사람은 몇 살쯤 되어야 나이가 많을까요? 아흔 살은 되어야 나이가 많나요? 그러면 여든아홉이나 여든여덟은 어떻지요? 일흔아홉이나 일흔여덟은 어떠할까요?



.. 미국의 명품시장 조사기관인 럭셔리 인스티튜트가 2013년 6월 초 자산 500만 달러 이상 부자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80% 이상이 보석이나 시계, 핸드백 같은 명품을 그리 중시하지 않았다. 또 하반기에 시계나 보석에 돈을 더 쓸 생각이라는 대답은 4%, 핸드백에 돈을 더 쓸 생각이라는 응답은 6%에 불과했다 ..  (97쪽)



  우리는 ‘부자’가 어떤 사람인지 똑똑히 알아야 합니다. ‘부자’가 어떤 사람인지 똑똑히 모르기 때문에, 저마다 부자가 되겠다고 발버둥을 치는데, 막상 아무도 부자가 되지 못해요. 1백만 원을 가져도 부자가 되려고 안달합니다. 1천만 원을 가져도 부자가 되려고 악을 씁니다. 1억 원을 가져도 부자가 되려고 용을 씁니다. 10억 원을 가져도 부자가 되려고 죽을힘을 냅니다. 100억 원을 가져도 부자가 되려고 이웃을 짓밟습니다. 1000억 원을 가져도 부자가 되려고 동무를 해코지합니다. 1조 원을 가져도 부자가 되려고 끝없이 돈만 만집니다.


  다시 말하자면, 부자는 돈을 만지는 사람이 아닙니다. 돈을 만지는 사람은 ‘돈을 만지는 사람’일 뿐이에요. 부자는 돈을 굴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돈을 굴리는 사람은 ‘돈을 굴리는 사람’일 뿐입니다.


  부동산이나 증권으로 돈을 더 불리는 사람은 ‘돈굴리기’나 ‘돈불리기’를 하는 사람일 뿐, 어느 누구도 부자가 아니에요. 그러면, 부자는 누구일까요? 부자는 있을까요, 없을까요?



.. 정말 필요한 물건이라면 필요할 때 사는 것이 가치 있는 것이지, 가격 때문에 필요한 시기가 지났을 때 사거나 언젠가 필요할 것이라는 생각에 미리 사놓는 것은 오히려 물건의 가치를 깎는 행위일 수 있다 ..  (103쪽)



  숨을 거두어 죽는 자리에서 돈을 1원이라도 가져갈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승을 떠나 저승으로 갈 적에 10원 한 닢 들고 갈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돈뿐 아니라 주식도 뭣도 다 놓아야 합니다. 졸업장도 내려놓고 계급장과 나이까지 다 내려놓아야지요. 내려놓지 않는 사람은 죽어도 죽은 넋이 아니에요.


  무슨 말인가 하면, 우리는 처음 태어나던 날부터 모두 ‘부자’입니다. 스스로 부자인데 부자인 줄 모르니, ‘어디에도 없는 뜬금없는 부자 그림자’ 꽁무니만 좇다가 삶을 마감합니다. 아주 불쌍하고 딱한 노릇입니다.


  돈은 돈일 뿐, 부자인 삶하고 하나도 이어지지 않습니다. 돈은 언제나 돈이에요. 삶은 삶입니다. 삶을 가꾸며 사랑할 수 있을 때에 부자입니다. 이웃과 사랑하며 동무와 어깨를 겯고 즐겁게 노래할 수 있을 때에 부자입니다. 아이 손을 잡고 춤을 추는 사람이 부자입니다. 날마다 새롭게 태어나서 웃는 사람이 부자입니다.


  자, 묻겠습니다. 경제신문 기자인 이녁은 부자입니까? 《지금 시작하는 부자 공부》 같은 책을 읽은 이녁은 부자입니까? 《지금 시작하는 부자 공부》 같은 책을 안 읽은 이녁은 부자입니까? 4347.9.14.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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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길을 가는 사람 조정민의 twitter facebook 잠언록 4
조정민 지음, 추덕영 그림 / 두란노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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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170



마음에서 길을 찾는 삶

― 새로운 길을 가는 사람

 조정민 글

 추덕영 그림

 두란노 펴냄, 2013.11.25.



  조정민 님이 쓴 《새로운 길을 가는 사람》(두란노,2013)이라는 책을 찬찬히 읽습니다. 조정민 님은 이 책을 쓰면서 ‘아직 예배당에 가지 않는 사람’을 ‘예배당으로 이끌 마음이 가득하구나’ 하고 느낍니다. 그러나, 예배당이든 학교이든 시골이든 도시이든, 누가 이끈다고 해서 갈 수 있지 않습니다. 사람들 스스로 마음에서 우러나와야 갈 수 있습니다. 달콤한 말이나 멋있는 말이나 훌륭한 말을 들려준다고 해서 사람들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사람들 스스로 삶을 바꾸거나 새롭게 다스릴 적에 비로소 움직입니다.


  《새로운 길을 가는 사람》 첫머리에는 멧기슭 이야기가 나옵니다. 맨 처음을 여는 ‘잠언’을 가만히 되새깁니다. 참말 그러한가 하고 고개를 갸우뚱거리기도 하고, 글쎄 하고 고개를 가로젓기도 합니다.



.. 산 정상에 올라가야 숨 막히는 전경을 볼 수 있지만 그곳에 오래 머무를 수는 없습니다. 일상은 대부분 산기슭의 삶입니다 ..  (13쪽)



  “숨 막히는 전경”이란 무엇일까요. 숨이 막힐 만큼 놀라운 모습을 본다면 우리 삶은 얼마나 달라질까요. 도시에서 사람들은 숨이 막힐 만큼 놀라운 모습을 보고 싶어서 40층이니 50층이니 하는 주상복합 건물을 지어서 높다란 꼭대기에서 남을 내려다보고 싶을까요?


  우리는 ‘꼭대기’가 아닌 ‘기슭’에서 산다고 조정민 님이 이야기합니다. 어쩌면 그럴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집을 꼭대기에 둘 수 있습니다. 꼭대기 가까운 데에 둘 수도 있습니다. 도시나 마을하고 멀찌감치 떨어진 높은 곳에 마련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시끄럽기 때문입니다. 어수선하거나 지저분하기 때문입니다.


  공장이나 짐승우리 곁에 집을 마련하면 물을 마음껏 마시지 못합니다. 들이 가까이에 있는 시골집에 집을 마련하더라도, 시골사람이 모두 들에 농약을 치고 비료를 뿌리면, 이때에도 물을 제대로 마시지 못합니다. 농약과 비료 기운이 스며든 물은 못 마십니다. 공장에서 내보내는 쓰레기가 섞인 물은 마실 수 없습니다. 이리하여 도시에서는 모두 수돗물을 마셔요. 도시 언저리에서 흐르는 냇물이 있어도, 냇물을 길어 마실 수 없어요.


  기슭에서 마을을 이루며 산다고 할 때에는 어떤 하루가 될까요. 물을 싱그럽게 마시지 못한다면, 바람도 맑지 않겠지요. 그저 사람들이 많이 모인 도시나 마을에서만 보금자리를 꾸려야 할까 궁금합니다.



.. 같은 장소인데, 한 사람은 쓰레기가 넘치는 곳으로 만들고, 한 사람은 꽃이 활짝 핀 정원으로 가꿉니다. 같은 마음인데, 한 사람은 죽음의 파편들로 가득하고, 한 사람은 생명의 씨앗들로 넘칩니다 ..  (23쪽)



  쓰레기란 무엇일까요. 쓰레기는 왜 생길까요. 스스로 흙을 일구어 스스로 밥과 옷과 집을 얻는 사람은 쓰레기를 만들지 못합니다. 쓰레기가 나올 수 없습니다. 밥과 옷과 집을 돈을 들여 사다가 쓰는 사람은 언제나 쓰레기가 나옵니다. 쓰레기가 안 나올 수 없습니다. 도시사람이 누는 똥오줌은 모두 쓰레기입니다. 거름으로 되살려 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도시사람이 설거지를 하며 흘리는 구정물도 쓰레기입니다. 흙으로 돌려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머리를 감을 때에 쓰는 샴푸는 쓰레기가 아닐까요. 자가용을 굴리며 내뿜는 배기가스는 쓰레기가 아닐까요. 도시에서 쓰레기 안 내보내고 살 수 있을까요. 백 해쯤 거뜬히 쓸 수 있는 냉장고나 세탁기나 텔레비전이 있을까요. 없습니다. 모두 쓰레기가 됩니다. 백 해를 쓰더라도 백 해 뒤에는 쓰레기가 됩니다.



.. 담이 감옥을 만들고 철창이 감방을 만들지만 더 힘든 곳은 내 욕심이 만든 감옥이고 내 편견이 만든 감방입니다 ..  (32쪽)



  학교는 담을 세웁니다. 그래서, 담을 세운 학교는 감옥과 같습니다. 청와대와 국회의사당이나 법원 같은 데는 경찰 같은 문지기가 지키고 담도 높습니다. 그래서 청와대나 국회의사당 같은 데는 감옥하고 닮습니다.


  왜 학교는 감옥과 같은 모양새가 될까요? 왜 학교는 아이들한테 똑같은 옷을 똑같은 빛깔과 모양대로 입힐 뿐 아니라, 머리카락과 신과 속옷까지 하나하나 따질까요? 왜 다 다른 아이들을 다 다르게 살찌우면서 가르치지 못할까요? 왜 다 다른 아이들을 죄수로 바라보면서 입시지옥에 내몰기만 할까요?


  곰곰이 돌아보면, 열린 터가 아닌 닫힌 감옥과 같은 얼거리인 터라, 청와대나 국회의사당에서 나오는 정책이나 행정은 아름답지 못합니다. 사회와 문화가 더 열리면서 아름답게 피어나는 길보다는, 더 닫히고 더 막히며 더 경쟁을 부채질하기만 합니다.


  예배당도 다르지 않아요. 예배당은 담이 없을까요. 담이 없이 누구나 맞아들여 밥을 나누어 주고, 돈을 널리 베푸는 예배당은 몇 군데가 될까 궁금합니다.



.. 젊어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순수해서 아름다운 것이고, 늙어서 추한 것이 아니라 탐욕스러워서 추한 것입니다 ..  (48쪽)



  마음이 맑을 때에 맑습니다. 마음이 아름다울 때에 아름답습니다. 마음에 때가 묻으면 때가 묻은 삶입니다. 마음이 어지러우면 어지러운 삶입니다.


  아주 마땅한데, 마음은 숫자로 못 따집니다. 경제성장률은 숫자로 나오고, 시험성적과 등수는 숫자로 나옵니다. 그러면, 학교에서 공부를 잘 한다고 하는 아이들은 어떤 마음일까요. 등수와 성적으로 매기는 숫자는 아이들 마음을 얼마나 잘 헤아리는 잣대가 될까요.


  시험을 없애지 않는 어른들은 아이들이 맑지 못한 길로 내모는 셈이리라 느낍니다. 자격증을 새로 만들고, 졸업장을 보여주라 말하는 어른들은 아이들이 아름다움과 동떨어지도록 몰아붙이는 셈이로구나 싶습니다.



.. 믿음은 볼 수 없는 것에 눈뜨게 하고, 사랑은 뻔히 보이는 것에 눈멀게 합니다 ..  (111쪽)



  믿음이 있기에 ‘눈으로 못 보는 것을 본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사랑이 있기에 ‘뻔히 보이는 것을 못 본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참다운 믿음이란 사랑입니다. 참다운 사랑이란 믿음입니다. 믿음과 사랑은 둘로 가르지 못합니다. 내가 너를 믿기에 내가 너를 사랑해요. 네가 나를 사랑하기에 네가 나를 믿어요. 둘은 늘 같아요.


  이른바 ‘맹신’과 ‘광신’일 때에는 눈이 멉니다. 숫자와 성적에 목이 매일 때에도 눈이 멉니다. 즐겁게 벌어서 즐겁게 쓰는 돈이 아닌, 더 많이 거두어들여 마구마구 쓰려는 돈일 때에도 눈이 멀어요.



.. 내가 분노로 지은 것은 남을 분노하게 만들고, 내가 슬픔 속에 노래한 것은 남도 슬프게 하고, 내가 목말라 디자인한 것은 남까지 목마르게 합니다. 나는 세상에 반드시 투영됩니다 ..  (184쪽)



  조정민 님이 《새로운 길을 가는 사람》이라는 책에서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는 ‘사랑’이리라 생각합니다. 맑은 사랑으로 착하게 삶을 가꾸어 참다운 아름다움을 누리자는 뜻을 들려주고 싶은 마음이리라 봅니다.


  그러면, 사랑을 더 깊이 살펴서 이야기하면 좋겠어요. 조정민 님이 스스로 생각해서 지은 여러 ‘잠언’을 묶은 《새로운 길을 가는 사람》을 읽으면, 이것과 저것을 갈라서 이것은 옳고 저것은 그르다는 틀을 세웁니다. 이쪽으로 가야 맞고 저쪽으로 가면 그르다는 이야기가 처음부터 끝까지 흐릅니다.



.. 문제를 바라보는 사람은 문제 속에 살고, 해답을 바라보는 사람은 해답 속에 삽니다 ..  (255쪽)



  굳이 둘로 갈라야 하지 않습니다. 좋음과 나쁨으로 가를 만한 일이란 없습니다. 어떤 길이든 우리들이 스스로 걸으면서 삶을 겪습니다. 어떤 삶을 누리든 저마다 사랑을 배우고 나누면서 새롭게 눈을 뜹니다.


  길을 찾을 적에, 어떤 이는 하루만에 찾을 수 있어요. 어떤 이는 백 해는커녕 즈믄 해가 흘러도 길을 못 찾을 수 있어요. 그러면, 하루만에 길을 찾으면 훌륭하고, 즈믄 해가 걸려도 길을 못 찾으면 어리석을까요?


  이틀만에 길을 찾는 사람은 하루만에 길을 찾은 사람보다 어리석을까요? 구백 해만에 길을 찾은 사람과 구백 해하고 열흘이 걸려 길을 찾은 사람이 있으면, 누가 슬기롭고 누가 어리석을까요?


  그예 사랑을 이야기하기를 바라요. 예배당이나 예수님이나 하느님을 이야기하기보다, 스스로 나를 사랑하고 내 마음속에 깃든 푸른 숨결을 사랑하며 내가 마주하는 사람들과 일구는 삶을 사랑하는 길을 이야기하기를 바라요. 그뿐입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우리 마음속에 있을 테니까요. 사랑은 늘 우리 마음속에서 태어나니까요. 4347.9.7.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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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효진의 공책
공효진 지음 / 북하우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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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166



‘화보집’으로 그치고 만 ‘공책’

― 공효진의 공책

 공효진 글

 북하우스 펴냄, 2010.12.13.



  한국에서 꾸준히 나오지만 그야말로 꾸준히 안 팔리는 책 가운데 하나는 ‘환경책’입니다. 어른이 읽을 환경책은 어른 스스로 안 사거나 안 읽기 일쑤입니다. 어린이가 읽을 환경책은 어버이나 교사가 사 주어 읽히지만 독후감 숙제를 내면 잊히기 일쑤입니다. 어른이 읽는 환경책은 인문지식만 가득하기 마련입니다. 어린이가 읽는 환경책은 도시에서 몇 가지 실천 사례를 보여주거나 지구별 위기를 알려주는 데에서 그치곤 합니다.


  ‘환경책’이란 무엇일까요. 환경책은 왜 읽어야 할까요. 환경책이 이럭저럭 꾸준히 나와서 읽히지만 지구 환경과 한국 환경은 그리 안 달라지지 싶은데,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즐겁거나 아름답거나 사랑스러울 수 있을까요.



.. 무엇보다 뿌연 서울 하늘을 브리즈번의 파란 하늘처럼 바꾸고 싶은 바람이 생겼다 … 그때 가슴속 깊이, 토토가 그냥 집에서 키우는 개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나와 소통하는 하나의 생명이었다 ..  (30, 65쪽)



  ‘환경책’을 알자면, 먼저 ‘환경(環境)’이라는 한자말부터 또렷이 알아야 합니다. 이 한자말은 “생물에게 직접·간접으로 영향을 주는 자연적 조건이나 사회적 상황”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자연 조건’이나 ‘사회 상황’을 가리켜 ‘환경’이라 일컫는 셈입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말하는 환경책은 자연 조건이나 사회 상황을 들려주는 책이 아닙니다. 환경책은 환경을 푸르게 가꾸자는 이야기를 담습니다. 영어로 ‘에코북’이나 ‘그린북’이라 하는 사람이 있기도 한데, 이름을 올바로 붙인다면 ‘푸른책’이라고 할 만합니다.


  그런데, ‘푸른책’이라고 해도 제 뜻을 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푸름이’라는 낱말은 초·중·고등학교 청소년을 가리키는 한국말이기도 한 터라, ‘푸른책’이라 하면 ‘청소년책’하고 뒤섞입니다.


  더 생각을 이어 환경책이 무엇을 바라는지 살펴볼 노릇입니다. 지구가 아름답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겠지요? 도시가 자꾸 커지면서 나무와 풀이 사라지는 모습이 안타깝다고 여기지요? 끝없는 개발과 문명이 아니라, 맑은 바람과 밝은 빛과 싱그러운 물과 푸른 숲이 어우러진 모습을 바라는 책이겠지요? 따사롭고 아름다우면서 사랑스러운 삶을 바라는 책이 환경책이라 한다면, 이러한 길로 나아가는 모습은 ‘숲’으로 가는 길입니다. 곧, 제대로 붙일 이름이라면 ‘숲책’입니다. 환경책이 아닌 숲책은 숲을 살리고 숲을 노래하며 숲을 가꾸는 길을 밝힐 때에 제대로 빛납니다.



.. 지퍼백은 정말 튼튼하고 다양하게 사용이 가능해서 정말 좋다. 잘만 쓰면 몇 번이고 재사용이 가능하다. 그래서 나는 싱크대에 빨래집게를 걸어 놨다. 설거지하고 난 축축한 수세미, 한 번 쓴 비닐, 생선 담아 뒀던 지퍼백을 물에 잘 헹궈서 집게에 매달아 놓는다. 이게 다 마르면? 다시 쓰는 거다 ..  (170쪽)



  공효진 님이 《공효진의 공책》(북하우스,2010)이라는 책을 선보입니다. 공효진 님은 이 책이 ‘환경책’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책에는 환경 이야기, 다시 말하자면 숲 이야기가 몇 줄 없습니다. 이 책은 거의 모두 ‘배우 공효진 화보’로 이루어졌고, 사이사이 짤막하게 글이 깃듭니다.


  공효진 님으로서는 환경책을 내고 싶었다 하는데, 그러면, 책을 두 가지로 나누어 내놓아야 올바릅니다. 하나는 ‘공효진 화보집’으로 묶고, 다른 하나는 ‘공효진 환경 이야기’로 묶어야지요. 개인 화보와 일상 이야기는 ‘공효진 화보집’에 넣은 뒤, 공효진 님 스스로 삶을 가꾸거나 밝히거나 고치는 이야기는 ‘공효진 환경책’으로 담을 노릇입니다.


  그런데, 《공효진의 공책》을 읽으면, 공효진 님이 스스로 바꾸거나 가꾸는 ‘푸른 숲 이야기’는 몇 줄 안 돼요. 알맹이가 아주 많이 모자랍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책을 섣불리 빨리 낼 일이 아닙니다. 더 배운 뒤에 더 글을 가다듬고 더 살피고 ‘푸른 나날을 살아낸’ 다음에 책을 선보일 노릇입니다. 알맹이가 모자라다면, 알맹이가 그득그득 찰 때까지 더 삭히고 묵히고 쟁여서 이야기를 늘려야지요. 괜히 화보를 잔뜩 집어넣어서 ‘없는 알맹이를 가릴’ 일이 아닙니다. 이렇게 되면, 《공효진의 공책》은 환경책 구실을 못합니다.



.. 난 이 책을 읽은 모든 분들이 자기 자신을 더 많이 돌보고 사랑하길 바란다 ..  (247쪽)



  공효진 님도 이녁 스스로 더 많이 돌보고 사랑하기를 바랍니다. 공효진 님이 지내는 보금자리를 돌보고 사랑할 뿐 아니라, 공효진 님이 쓰는 말도 아름다운 한국말이 되도록 가다듬고 돌보며 사랑하기를 바랍니다. 환경을 생각하는 삶이란, 꽃을 심고 들짐승을 돌보는 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이런 일은 아주 조그마한 첫걸음입니다. 첫걸음을 떼는 일도 뜻이 있으나, 첫걸음에서 제자리걸음을 하면 아무것이 되지 않습니다. 첫걸음을 떼었으면 씩씩하게 나아갈 일입니다. 첫걸음을 지나 씩씩하게 나아간 수많은 길과 이웃을 느껴 차곡차곡 담을 일입니다.


  4대강 막공사 현장에도 가 보고, 내성천에서 씩씩하게 숲을 돌보면서 ‘숲과 냇물을 살리는 이야기를 영화로 찍는’ 지율 스님을 찾아뵙기도 하면서, 시골에서 오순도순 즐겁게 살아가는 수수한 이웃을 만나기도 하기를 바랍니다. 배우나 연예인이기에 대중교통을 타기 힘들 일이란 없습니다. 아마 사람들은 너무 바빠 지하철이나 버스에 배우나 연예인이 타도 알아보지 못하기 마련이지 싶습니다. 다들 제 갈 길이 바쁜데 연예인이나 배우 한 사람이 탔다 한들 무엇이 대수롭겠습니까. 그리고, 연예인이나 배우가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면, 오히려 홍보 효과가 되겠지요. 저 배우나 연예인은 자가용을 안 타고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는구나, 참 아름답구나, 참 멋지구나, 하는 생각을 불러일으키겠지요.


  서울에서 살며 공효진 님이 할 수 있는 일이 아주 많고, 서울에서도 얼마든지 숲을 가꾸고 돌보며 사랑하는 길을 열 수 있습니다. 이런 수많은 이야기를 ‘환경책’으로 담으려 하지 못한 채, 화보집 만들기로 그친다면, 《공효진의 공책》은 너무 아깝습니다. 부디, 하루빨리 ‘화보집’과 ‘숲책’으로 나누는, 제대로 된 고침판이 나오기를 바랍니다. 4347.7.31.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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