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메이드 천연 치약 - 아이부터 어른까지 온 가족 치아 지킴이
정인자 지음 / 넥서스BOOKS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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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책읽기 삶읽기 260



집에서 치약을 손수 지어서 쓰고 싶다

― 홈메이드 천연 치약

 정인자 글

 넥서스BOOKS 펴냄,2012.1.30. 13800원



  요즈음 우리 집에서는 이를 닦을 적에 ‘이엠발효액’을 씁니다. 화학약품도 계면활성제도 온갖 첨가물도 넣지 않는 치약을 생각하다가 이엠발효액으로 이를 닦기로 했습니다. 화학약품이나 계면활성제는 우리 이에 도움이 되기 어렵다고도 느끼지만, 이러한 약품이나 세제는 흙과 바다를 더럽히기도 합니다.


  그동안 생협 치약을 쓰기는 했는데, 생협 치약을 쓰면서도 느낀 아쉬운 대목은 ‘빈 치약 플라스틱 주머니’입니다. 치약을 다 쓰면 플라스틱 주머니가 쓰레기로 남거든요. 우리가 집에서 어떻게 하면 ‘이 닦을 것’을 마련할 수 있을까 하고 오래도록 생각한 끝에 이엠발효액을 쓰는데, 처음에는 익숙하지 않았지만 며칠 쓰고 보니 이엠발효액 냄새가 썩 괜찮아서 그냥 마실 만하기도 하겠다고 느낍니다.



치약은 이렇게 자연에서 얻은 재료에서 출발했지만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복잡한 화학물질의 혼용으로 어지러운 탈바꿈을 계속해 왔다. 치약이 천연의 원래 모습에 벗어나 화학재료 덩어리로 전락한 것은 서글픈 일이다. (머리말)



  곰곰이 돌아보면 나는 ‘치약’이 무엇인지 제대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사회에서 흔히 쓰는 치약은 ‘너무 센’ 줄은 알았어요. 냄새도 너무 세지요. 그러나 예전에는 치약을 손수 지어서 쓰자는 생각까지 못했어요. 생협 가게를 찾아가서 ‘한결 나은 치약’을 장만하자는 생각만 겨우 했습니다.


  곁님을 만나고 아이들을 낳으며 시골에서 여러 해를 사는 요즈음 비로소 치약에 눈길을 둡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생각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에요. 곁님은 여러 해에 걸쳐서 나더러 ‘치약을 집에서 손수 지어서 쓰는 공부’를 해 보자고 했는데 내가 이제껏 미뤘습니다.


  정인자 님이 쓴 《홈메이드 천연 치약》(넥서스BOOKS,2012)은 ‘집에서 쉽게 치약을 지어서 쓸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여러모로 도움이 될까 싶어서 이 책을 장만해서 읽어 봅니다. 이 책은 글쓴이 정인자 님이 여러모로 새롭게 지어서 써 보는 여러 가지 치약 이야기가 흐릅니다. 우리 둘레에 있는 어떤 것이든 좋은 대목을 잘 살려서 치약으로 삼을 만하다고 이야기해요.


  다만, 이 책에서는 큰 한 가지가 빠졌어요. 이 책에서 다루는 ‘집 치약(집에서 짓는 치약)’은 거의 모두 중조와 정제수와 글리세린과 쟁탄검과 옥수수 전분을 씁니다. 그리고 ‘어성초 치약’이든 ‘후박 치약’이든 어성초나 후박을 집에서 어떻게 손수 다루어서 가루를 내는가 하는 이야기는 들려주지 않아요. ‘누군가 따로 미리 마련해 놓은 것’을 사다가 쓰는 길만 들려줍니다.



대부분의 치과의사는 불소에 대해서는 대부분 호의적인 편이다. 그러나 불손느 충치에 효과적이지만 이를 반대하는 의견이 적지 않다. 심의에 까다로운 미국 FDA에서도 안전을 승인하지 않고 있는데 불소는 바퀴벌레나 쥐를 죽이는 살충제, 마취제에 쓰일 만큼 독성이 강하기 때문이다. (15쪽)



  《홈메이드 천연 치약》을 쓴 분은 이녁이 꾸리는 누리집에서 ‘집 치약’을 짓는 여러 가지를 팝니다. 우리는 글쓴이 누리집에 들어가서 ‘집 치약’으로 지을 여러 가지를 손쉽게 사서 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 ‘집 치약’을 하나부터 열까지 손수 짓는 길은 이 책에서 알 수 없어요. 틀림없이 좋은 성분과 약품과 풀(허브)을 다루는 이야기를 담은 책입니다만, 다문 한 가지라도 ‘집에서 누구나 스스로 짓는 길’을 더 깊이 파고들면 어떠했으랴 싶어요.


  그나저나 잇솔은 어떻게 하면 좋은가 하는 대목이 무척 궁금합니다. 이를 닦는 솔은 몽땅 플라스틱입니다. 석유에서 뽑는 플라스틱이 아닌 잇솔은 찾아보기가 아주 어렵습니다. 잇솔을 집에서 손수 지을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숲과 바다를 살리면서 살림과 우리 몸을 두루 살릴 만한 잇솔을 수수하면서도 즐겁게 집에서 지어서 쓸 만할까요?


  숲에서 오는 치약과 숲에서 오는 잇솔을 꿈꾸어 봅니다. 숲에서 즐겁게 짓는 살림을 가만히 헤아려 봅니다. 2016.6.28.불.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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探書의 즐거움 - 오래되고 낡았으나 마음을 데우는 책 이야기
윤성근 지음 / 모요사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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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257



책 한 권을 찾는 손길

― 탐서의 즐거움

 윤성근 글

 모요사 펴냄, 2016.5.16. 15000원



  책 한 권을 찾으러 책방으로 마실을 갑니다. 어느 책을 만날는지는 모르지만, 저마다 마음에 스며들 이야기가 깃든 책을 찾으러 책방으로 마실을 갑니다. 오늘날에는 책방마실을 하지 않아도 인터넷에서 책을 찾아보기 쉽습니다. 인터넷으로 책을 장만하기 쉽고, 인터넷에서 줄거리를 살피기 쉽습니다. 가만히 따지고 보면 새책이나 헌책이나 줄거리는 모두 같고, 종이책이나 전자책이나 줄거리는 다 같기 마련입니다. 어떻게 책을 읽든 우리는 늘 이야기를 읽는 셈입니다.



정작 내가 이 책을 가장 귀중하게 여기는 이유는 잡다하게 모아 놓은 산문들 중 하나인 〈회사원과 매몰광부〉라는 짧은 글 때문이다. (22쪽)


《죠스》의 번역 초판 제목은 황당하게도 《아가리》다. 이러니 어떤 곳에서도 검색에 걸리지 않은 것이다. (80쪽)



  줄거리를 잘 훑기에 책을 잘 살폈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줄거리를 모르더라도 책을 못 읽거나 안 읽었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책을 손에 쥐고 읽을 적에는 ‘줄거리 외우기’를 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새로운 생각을 얻으려는 뜻으로 책을 한 권 만나려 합니다. 더 많은 책도 아니요, 더 꼼꼼히 살피는 줄거리도 아니라, 더 즐겁게 삶을 짓는 슬기롤 다스리려는 뜻으로 책 하나를 만나려 하지요.



김영하의 진정한 첫 번째 소설은 《무협 학생운동》이다. 김영하 작가를 좋아하는 많은 독자들 가운데 과연 이런 소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87쪽)


책이라고 하는 것을 어떤 마음으로 대해야 하는지 정답은 없다. 그러나 한 가지, 사람이 만들어 낸 것 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남아 또다시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이 책이다. (127쪽)



  윤성근 님이 쓴 《탐서의 즐거움》(모요사,2016)은 윤성근 님 나름대로 스스로 좋아하는 책을 찾아나선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다른 사람이 추천하기에 어느 책을 더 좋아하지 않습니다. 널리 알려진 책이기에 그 책을 이녁도 좋아할 만하지 않습니다. 책 한 권을 찾아나서려는 사람 스스로 마음에 들 때에 비로소 그 책을 좋아할 만합니다.


  오래도록 남을 만하기에 좋아할 만한 책은 아닙니다. 값어치가 크기에 더 좋아할 만한 책이 아닙니다. 즐겁게 읽을 만하기에 책을 찾아나섭니다. 기쁘게 되새기면서 마음밥으로 삼을 수 있기에 책 한 권을 찾으려고 오래도록 여기저기 책방마실을 다닐 수 있습니다.



지금 다시 《이방인》을 읽어 보아도 나는 딱히 번역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말하고픈 생각이 들지 않는다. 심지어 1950년대 판본을 읽으면서도 충분히 좋은 문장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190쪽)



  나는 《이방인》뿐 아니라 《어린 왕자》도 《베토벤의 생애》도 《독서술》도 꽤 오래된 번역으로 읽었습니다. 1950년대에 나온 번역이라고 해서 2010년대에 못 읽을 만하지 않습니다. 왜 그러한가 하면, 1950년대나 1930년대 번역이라 하더라도, 또 1970년대나 1990년대 번역이라 하더라도, 외국말을 한국말로 옮기려고 마음을 기울인 사람들이 흘린 땀방울을 느끼면 즐겁거든요. 요새는 잊혀졌을 수 있지만, 오래도록 사람들 가슴에 스며든 말결하고 말투를 예전 번역책에서 느낄 때에도 즐거워요.


  새로 나오는 책은 새로 나오는 책대로 사랑받기를 빌어요. 오래된 책은 오래된 책대로 사랑받을 수 있기를 빕니다. 이 모든 책이 우리 마음을 아름답게 가꾸는 밑거름이 되기를 빌어요. 꿈을 노래하고 사랑을 밝히는 책 하나를 즐겁게 가슴에 얹을 수 있기를 빕니다. 2016.6.21.불.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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쭈니 2016-06-21 23:11   좋아요 0 | URL
저도 책을 많이 읽지는 못하지만
항상 지니고 다닙니다
이렇게라도 해야 그나마 읽을수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주위에서는 항상 책 많이 읽는 사람으로 오해를 삽니다.
읽지도 못하면서 사 모으는건 잘 합니다 ㅎㅎ
서점에 자주 갑니다
사든 안사든 말이죠
˝탐서의 즐거움˝ 아는 분들은
다 아시겠죠 ^^
덕분에 좋은 책정보 감사합니다
아주 잘 읽었습니다

숲노래 2016-06-22 09:50   좋아요 0 | URL
책은 눈으로도 읽고
손으로도 마음으로도 읽으니
첫 쪽부터 끝 쪽까지
다 훑지 않더라도
우리는 늘 책읽기를 누린다고 생각해요.
늘 즐겁게 책방마실 즐기시겠지요?
고맙습니다 ^^
 
봄철 한정 딸기 타르트 사건 소시민 시리즈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김선영 옮김 / 엘릭시르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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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256



딸기 타르트와 자전거를 도둑맞은 뒤

― 봄철 한정 딸기 타르트 사건

 요네자와 호노부 글

 김선영 옮김

 엘릭시르 펴냄, 2016.4.29. 13500원



  고등학교를 ‘수수하게’ 다니는 두 아이가 주인공이 되어 이야기를 풀어내는 소설 《봄철 한정 딸기 타르트 사건》(엘릭시르,2016)은 ‘소시민 시리즈’ 가운데 하나라고 합니다. 이 소설을 쓴 분은 ‘고전부 시리즈’를 선보이기도 했는데, 이 작품도 고등학교 아이들이 학교 안팎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을 저희 나름대로 풀고 맺는 이야기를 다룹니다.


  ‘고전부’ 이야기는 동아리 아이들이 주인공으로 나온다면, ‘소시민’ 이야기는 사내와 가시내 두 아이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대목이 다릅니다. 그리고 ‘소시민’ 이야기는 이 이름처럼 ‘수수하게’ 지내면서 다른 사람 앞에 드러나지 않게 조용히 지내고픈 마음을 담아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수수하게 살자고, 조용하게 살자고, 드러나지 않게 살자고, 남들 눈에 안 뜨이는 자리에서 살자고, 얌전하게 살자고 …… 하는 이야기를 고등학교 아이들이 나눕니다. 이제 막 피어나려는 풋풋한 아이들이 ‘수수함(소시민)’을 말합니다. 문득 내 열예닐곱 살 무렵을 떠올려 봅니다. 나도 그즈음에 이런 생각을 해 보았나 하고 떠올려 봅니다.


  굳이 남들 앞에서 튈 생각이 없이 지냈지만, 나를 숨긴 채 살고 싶은 마음은 없었습니다. 꿈을 품고 싶은 마음이었고, 꿈을 이루는 길을 가고 싶었어요. 수수한 삶이 아닌 즐거운 삶을 바랐고, 조용한 삶이 아닌 재미난 삶을 바랐어요. 그러나 학교에서는 힘들었어요. 학교에서는 대학입시만 생각하라고 했으니까요. 대학입시와 얽힌 일이 아니라면 마음을 쓰지 못하게 막은 학교였고, 입시 공부가 아니라면 아무 책도 읽지 말라고까지 하던 학교였어요.


  그러고 보니 대학입시에 짓눌려야 하던 무렵에 적잖은 동무는 ‘소시민’이 되려고 했다고 느낍니다. 나도 그렇고요. 끽소리조차 내지 않는 ‘소시민’이 되고, 둘레를 살피지 않고 조용히 있는 ‘소시민’이 되고 맙니다. 괜히 일을 시끄럽게 벌이지 않고 조용히 지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이 됩니다. 고작 열예닐곱 살인 짙푸른 숨결이 마치 애늙은이처럼 되고 말아요.



일상의 평온과 안정을 위하여, 나와 오사나이는 소시민을 관철한다. 물론 표현 방식은 조금 다르다. 오사나이는 숨는다. 나는, 웃음으로 얼버무린다. (22쪽)



  소시민이 되기에 하루가 차분하거나 고요할까요? 소시민으로 지내야 평온과 안정을 누릴까요? 어쩌면 우리는 ‘소시민’이라는 이름 뒤에 숨거나 웃음으로 얼버무리면서 ‘정작 스스로 즐기고 싶은 삶’을 잊거나 ‘막상 스스로 이루고 싶은 꿈’을 잃는 셈은 아닐까요? 오늘날 사회는 우리더러 ‘소시민’ 되기를 넌지시 밀어붙이면서 우리 스스로 삶을 새롭게 짓는 꿈이나 사랑을 잊거나 잃도록 하지는 않을까요?


  소설책 《봄철 한정 딸기 타르트 사건》에 나오는 가시내(오사나이)는 어느 날 ‘일(사건)’을 하나 겪습니다. 더욱이 이 일은 한 가지로 그치지 않아요.


  처음에는 일이 술술 풀렸지요. 딱히 아무런 걱정이 없이 조용히 삶을 누리는 듯했지요. ‘봄철 한정 딸기 타르트’를 장만해서 예쁜 상자에 담아 자전거 바구니에 실었어요. 이제 이 타르트 상자를 집으로 잘 가져가서 조용하면서 느긋하게 맛보면 되지요. 그렇지만 타르트 상자를, 게다가 봄철에 한정으로 나오는 딸기 타르트 상자를, 이 타르트 상자를 바구니에 실은 자전거를, 누군가가 훔칩니다. 코앞에서 자전거를 도둑맞습니다. 가시내 자전거를 훔친 사내는 타르트 상자가 든 짐바구니에 이녁 가방을 얹지요. 타르트 상자는 볼품없이 찌그러집니다.


  소시민으로 살겠다던 가시내는 봄철 한정 딸기 타르트를 잃었을 뿐 아니라 자전거를 잃습니다. 얼마 뒤에는 잔뜩 망가진 채 버려진 자전거를 봅니다. 자전거는 그냥 버려지지 않았어요. 앞뒤 바퀴를 발로 밟아서 찌그러진 채 버려졌어요.



이윽고 평소보다 훨씬 감정이 결여된 목소리로 오사나이가 물었다. “고바토, 어제 무슨 일이 있었을까? 어째서 내 자전거가 이런…….” (216∼217쪽)



  자, 이런 모습까지 본 아이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앞으로도 그냥 소시민으로 조용히 얌전히 지낼까요? “일상의 평온과 안정을 위하”자는 마음으로 모두 잊고 넘어가면 될까요?


  누군가 내 자전거를 훔쳤는데, 이 자전거 짐바구니에 담긴 내가 아주 좋아하는 것까지 훔쳐 가서는, 이 자전거를 찌그러뜨려서 버렸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지구 끝까지 또는 우주 끝까지 그 녀석을 찾아내어 코가 늘어지도록 나무라 줄까요, 아니면 그냥 못 본 척 넘어갈까요? 2016.6.15.물.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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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성이라는 거짓말 - 진정한 나를 찾다가 길을 잃고 헤매는 이유
앤드류 포터 지음, 노시내 옮김 / 마티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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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237



“어느 때보다 살기 좋은데 뭐가 문제란 말인가?”

― 진정성이라는 거짓말

 앤드류 포터 글

 노시내 옮김

 마티 펴냄, 2016.2.15. 16000원



  올해로 우리 집은 여섯 해째 시골에서 지냅니다. 시골에서 살아 본 적이 있어서 시골살이를 하지는 않습니다. 아이들이 마음껏 뛰놀고, 어른인 나도 내 살림살이를 느긋하게 다루고 만지면서 먹을거리를 흙을 가꾸어서 손수 얻고 싶은 꿈으로 시골살이를 합니다. 목돈은커녕 푼돈도 없이 시골살이를 했기 때문에 우리 땅은 백 평이 조금 넘을 뿐입니다.


  ‘시골에 살아야 훌륭한 사람이다’ 같은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도시에서는 아이들이 하루 내내 마음껏 뛰놀 수 없는 터전이었고, 도시에서는 아이들이 노래를 마음껏 부를 수 없는 터전이었으며, 피리이든 실로폰이든 피아노이든 하모니카이든 악기도 마음껏 다룰 수 없는 터전이었어요. 참말로 아이들이 마음껏 무엇이든 누릴 수 있기를 바라며 시골에서 살림을 짓습니다.


  이렇게 아이들을 헤아려서 시골에서 사는 동안 아이뿐 아니라 어른도 ‘일과 놀이와 살림’을 더 마음껏 가꾸면서 무엇이든 두 손으로 새로 짓는 보람이나 기쁨을 그야말로 새로 배웁니다. 흔히 말하는 ‘진정한 자아 찾기’를 뜻하지 않았습니다만, 새봄에 도시에서 ‘돈을 치러서 사다가 먹는 쑥떡’이랑 시골에서 ‘손수 쑥을 뜯어서 반죽을 하고 손수 구워서 먹는 쑥떡’은 맛부터 느낌이 사뭇 달라요. 내 땅에서 돋은 숨결을 내 손으로 다스리면서 누리는 살림은 ‘진정성’을 떠나서 ‘기쁨’이 무엇인가 하는 대목을 일깨우는구나 하고 느낍니다.



그런데 알고 봤더니 미국인들의 마음속에는 “광고업자나 정치인이 진짜라고 우기는 허상에서 벗어나 삶의 진실을 되찾고 싶은 욕구”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12쪽)


그렇다면 도중에 뭐가 잘못된 걸까? 어쩌다 우리는 우호적인 자연상태를 떠나, 피 튀기는 경쟁과 이기심으로 가득한 근대의 삶에 도달한 것일까? (71쪽)



  앤드류 포터 님이 쓴 《진정성이라는 거짓말》(마티,2016)이라는 인문책을 읽습니다. 《진정성이라는 거짓말》이라는 인문책은 글쓴이 앤드류 포터 님이 캐나다와 미국과 서유럽에서 나온 여러 책과 신문과 논문에서 다룬 ‘진정한 학문 추구’나 ‘진정한 진보’나 ‘진정한 사회운동’이나 ‘진정한 혁명’이 얼마나 ‘진정성’이 있는가를 따집니다. 그리고 ‘진정한 유기농’이나 ‘진정한 정치’라고 하는 이름이 얼마나 ‘진정성’이 있는가 하는 대목을 살피려고 합니다. 그래서 《진정성이라는 거짓말》을 읽다 보면, 글쓴이 앤드류 포터 님이 다른 분 글이나 책에서 따온 글이 무척 많고, 이 글이나 책을 ‘비판하는 대목’이 무척 많습니다.



그런 불평은 초점을 벗어난다. 작품 자체는 전혀 문제가 아니다. 팔리는 것은 작품이 아니라 작가의 페르소나 또는 ‘브랜드’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미술가 중에 데미언 허스트만 한 브랜드는 찾아보기 어렵다. (117쪽)


표절은 사례에 따라 ‘글 도둑질’ 그 이상일 수도 있고 그 이하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은폐나 기만을 목적으로 하는 지적 불성실의 한 형태로 봐야 한다. 표절을 저지른 자가 과시하려 드는 명민한 지성이나 예술적 능력은 본인 내면의 능력과 감성을 반영하지 않기 때문이다. (167쪽)



  한국말사전에 ‘진정성’이라는 낱말은 없습니다. ‘진정(眞正)’이라는 낱말은 한국말사전에 있습니다. ‘진정’은 “거짓이 없이 참으로”를 뜻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거짓이 없이”는 ‘참으로’를 뜻하지요. “거짓이 없이 참으로”라는 풀이말은 같은 말을 잇달아 적은 셈입니다. 아무튼, ‘진정성’이라면 ‘眞正 + 性’일 테고, “참다운 결”이나 “참것”쯤을 가리킨다고 할 만해요. 한국말사전 말풀이에서 엿볼 수 있듯이, 사회나 정치나 문화나 교육이나 종교 여러 갈래에서 사람들이 ‘진정성’을 말한다고 할 적에는 “거짓이 없다”고 하는 마음을 나타내려고 한다고 할 만합니다.


  그러면 정치 지도자로 나서겠다고 하는 분들은 왜 그분들이 “거짓이 없다(진정하다)”고 외칠까요? 참말로 거짓이 없으니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아요” 하고 말할까요? 사회나 경제나 정치나 문화가 워낙 장삿속(자본주의)으로 흐르다 보니, “나는 장삿속이 아니에요” 하고 밝혀야 하기에 “난 참말이에요(난 진정해요)” 하고 외쳐야 할까요?



우리는 이미 읽기/쓰기 문화로 갈아탔고, 새 문화는 완전히 다른 가치와 규범에 따라 움직인다. (180쪽)


3조 달러가 넘는 예산을 좌우할 사람을 뽑는 선거가 버락 오바마의 ‘변화’ 또는 존 매케인의 ‘명예’라는 두 가지 상표 중 하나를 고르는 상황으로 귀결되는 것은 경이롭다. 하지만 더 놀라운 점은 이 시스템이 잘 작동한다는 사실이다. 대다수 사람들은 정부 예산이나 정책 문서, 법률안 등을 제대로 이해할 시간도 없고, 솔직히 그럴 능력도 없다. (214쪽)



  《진정성이라는 거짓말》이라는 책은 ‘진정성’을 내세우는 개인이나 단체나 기업이나 정부나 학자 모두 ‘속으로 진정하지 않은 그림자나 뒷모습’이 있다고 비판합니다. ‘속으로 거짓이 없는 모습’이라면 구태여 ‘진정성 명함’을 마구 들이대거나 광고할 까닭이 없다고 비판합니다.


  그러고 보면 미국 대통령 선거가 아닌 한국 대통령 선거에서도 ‘어마어마한 나랏돈을 주무를 대표’를 뽑는 일이 ‘정당 구호’와 ‘정당 기호 숫자’를 누가 더 잘 홍보하느냐 하는 ‘프레임 싸움’으로 판가름나기 마련이로구나 싶습니다. 214쪽에서 말하듯이 “대다수 사람들은 정부 예산이나 정책 문서, 법률안 등을 제대로 이해할 시간도 없”고 “그럴 능력도 없다”는 말이 참으로 맞구나 싶어요.


  그런데, 《진정성이라는 거짓말》이라는 책을 읽다 보니, 곳곳에서 고개를 갸우뚱거릴 만한 대목이 자꾸 나옵니다. 아무래도 자본주의 경제 얼거리에서 홍보와 광고로 돈이나 이익을 얻어야 하는 몸짓이 되다 보니까, “진정성 효과”를 얻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을 수밖에 없다고 할 텐데, 너무 한쪽으로만 몰면서 책 줄거리를 이으려 하지는 않느냐 싶기도 합니다.



“흙바닥에서 먹고 자고 일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수십억이다. 원해서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라 극빈하기 때문이다. 만일 그들에게 선택의 여지가 있다면 아마도 나무 바닥이나 대리석 바닥에서 생활하기를 선호할 것이다. 그런데 미국 일부 지역에서는 흙바닥 생활이 극빈은커녕 흠잡을 데 없는 진정성의 표시로 여겨진다(138쪽).”



  미국이나 서양은 잘 모르겠습니다만, 한국에서 시골에 사는 사람들이 짓는 집은 으레 ‘흙바닥’인 집입니다. 흙바닥에 장판이나 종이 한 겹을 깔고서 지내지요. 절집도 이와 같고요. 한국이나 일본이나 중국이나 아시아 나라에서 ‘흙바닥집’이나 ‘흙벽집’이나 ‘흙집’을, 또는 ‘나무집’을 짓고 사는 까닭은 ‘극빈’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흙이나 나무 같은 ‘자연 소재’로 지은 집에서 몸이 한결 말끔하면서 싱그러이 쉬면서 깨어날 수 있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유럽에서는 시멘트 문명에는 새 앞날이 없다고 여겨서 나무집으로 9층이나 10층짜리 아파트를 더욱 튼튼히 짓는데 값도 훨씬 적게 드는 건축법이 나오기도 합니다. ‘흙집 살기’는 ‘참말’로 ‘진정성 표시’이기만 할까요?



“특히 유기농이 영양 면에서 훨씬 우수하다는 주장은 논란이 많다. 공중질소로 제조한 질소비료 사용을 금하는 유기농법의 지속가능성 또한 의문이다 … 그런 문제로 궁지에 몰리면 유가농법 옹호자들은 미각에 호소한다(150쪽).”



  《진정성이라는 거짓말》을 쓴 분은 ‘유기농 비판’을 꽤 자주 합니다. 시골에서 흙을 지으며 사는 분이라면 도시 매장에 흔하게 있는 ‘유기농 상표’가 그리 미덥지 못한 줄 알리라 생각합니다. 이 책을 쓴 분도 이렇게 비판할 만하리라 생각합니다. ‘진정성 있는’ 유기농이라면 대량생산을 하기가 어려울 테니까요. 그러면, 유기농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일까요? 화학농으로 비료와 농약을 엄청나게 흙에 쏟아붓기만 해야 한다는 뜻일까요?


  《진정성이라는 거짓말》이라는 책을 읽는 동안 이 책에 흐르는 줄거리는 ‘진정성 비판’에만 맞추어졌구나 하고 느낍니다. 이러면서 이 책을 쓰신 분은 ‘새로운 길(대안)’을 이야기하지는 않습니다. 비판은 있되 대안은 없는데, 꼭 글쓴이가 대안까지 내놓아야 하지는 않습니다만, 도시를 떠나 시골로 가서 지내는 사람들은 “유기농 신봉자”이기 때문이 아니라는 대목은 하나도 못 짚으니 좀 아쉽습니다. 시골에서 살며 농약이나 비료를 안 쓰고 흙을 살리면서 먹을거리를 얻어서 아이들을 돌볼 적에는 ‘아이들 몸에 생기는 아토피’도 한결 슬기롭게 다스리고, 무엇보다도 손수 심고 돌보고 가꾸고 지어서 먹는 밥이 삶에 기쁨을 베풀기도 해요.



“로컬푸드의 친환경성은 사실 과장된 부분이 있다. 선박이나 열차로 식품을 운송하는 것은 매우 효율적이고, 농산물의 경작, 포장, 조리에 드는 비용을 전체적으로 고려하면, 운송에 소비되는 에너지는 총 에너지 소비량에서 상대적으로 적은 비중을 차지한다(152∼153쪽).”



  비판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비판할 대목은 얼마든지 비판할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배나 기차나 비행기 ‘운송비용’은 어디까지 따져 보았는지 한번 여쭙고 싶어요. 배나 기차나 비행기를 ‘만드는 돈’에다가 ‘운송 인건비(배나 기차나 비행기를 몰고 관리하고 정비하는 모든 사람들 인건비)’도 따져 볼 노릇이겠지요. 아니, 이런 돈을 ‘숫자’로 따져서 ‘진정성 겨루기’를 굳이 해야 하지는 않다고 느껴요. 마을에서 살면서 마을에서 거둔 곡식하고 열매를 마을에서 먹자고 하는 ‘마을살림(로컬푸드)’ 이야기는 거대도시 문명이 아닌 ‘마을두레(마을공동체)’를 살리자는 작은 몸짓이라고 느껴요.


  《진정성이라는 거짓말》이라는 책은 마을살림을 얼마든지 비판할 수도 있을 테지만, 마을살림을 비판하면서 ‘마을살림이 새로 어떻게 나아가야 아름다울까’ 하는 대목은 딱히 이야기하지 못합니다.



“실질적으로 이제 부탄은 다른 유명한 아시아 여행지에서 수염 나고 땀내 나는 배낭여행자들과 뒤섞이고 싶지 않은 돈 많은 ‘진정한 사냥꾼’들을 위한 거대한 불교-친환경 고급 리조트로 변질됐다 … 히말라야 기슭에서 농민들이 뼈 빠지게 벼농사를 하는 농경시대 불교 왕국 부탄의 매력적인 모습이나, 1946년 모습 그대로 정지한 아바나를 보는 일이 강단좌파나 진정성 추종자들의 마음을 훈훈하게 해 줄 수는 있다. 그러나 우리는 부탄이나 쿠바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267, 268쪽).”



  부탄이나 쿠바를 ‘진정성 비판’으로 다루는 대목을 읽다가, 이 책을 쓴 분한테 “있는 그대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268쪽)”는 말을 고스란히 돌려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탄이나 쿠바가 “농경시대 불교 왕국”이나 “1946년 모습 그대로 정지한” 삶이기만 할까요?


  현대문명에도 장단점이 있듯이 부탄이나 쿠바에도 장단점이 있어요. 현대문명에서도 장점은 살리고 단점은 고치면 되지요. 부탄이나 쿠바에서도 장점을 살리고 단점은 고치면 되지요. ‘진정성 비판’이라는 이름에 너무 얽매인 나머지 《진정성이라는 거짓말》이라는 책은 어느 모로 본다면 좀 ‘마구잡이 비판’처럼 ‘비판만 하다가 그치고’ 마는 얼거리는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자꾸 듭니다.



“아무리 근대의 삶이 암울해도 인간개발의 측면에서 삶의 질이 그 어느 때보다 크게 개선된 사실까지 부인할 수는 없다. 수명과 건강이 향상되고, 공기나 물도 청결해졌고, 상하수도, 난방, 전기, 의료, 텔레비전, 인터넷 등의 서비스도 거의 보편화된 상태다. 오락거리, 음악, 영화, 방송, 뉴스, 기타 정보의 다양성이 풍부해졌고, 시장은 상상 가능한 온갖 취향과 라이프스타일에 맞춰 재화와 서비스를 제공한다. 즉 선진 자유민주국가의 시민들은 전반적으로 역사상 어느 때보다도 삶을 즐길 수 있게 됐다. 그런데 뭐가 문제란 말인가(309쪽)?”



  책을 마무리짓는 대목에서 글쓴이 앤드류 포터 님은 “공기나 물도 청결해졌고(309쪽)” 하고 적습니다. 이 대목에서 그야말로 아리송할 수밖에 없습니다. 참말 오늘날 우리 지구별은 ‘공기가 깨끗’해졌을까요? 토론토나 뉴욕이나 서울이나 도쿄나 런던 같은 곳은 ‘참말로(진정성 있게) 공기가 깨끗’해졌을까요? 토론토나 뉴욕이나 서울이나 도쿄나 런던 같은 곳은 ‘참으로(진정성 있게) 물이 깨끗’해졌을까요? 큰도시를 가로지르는 냇물에서 두 손으로 물을 떠서 마셔도 될 만큼 ‘물이 깨끗’해졌을까요?


  책 끝자락에 나온 이런 이야기를 읽다 보니, 《진정성이라는 거짓말》을 쓴 학자는 “상하수도, 난방, 전기, 의료, 텔레비전, 인터넷 등의 서비스도 거의 보편화된 상태다. 오락거리, 음악, 영화, 방송, 뉴스, 기타 정보의 다양성(309쪽)”이 있어야 ‘진정성 있는 사회와 살림’이라고 여기는구나 싶습니다. 그런데 적잖은 사람들은 집에 텔레비전을 두지 않고, 신문이나 방송을 보지 않으며, 구태여 ‘정보 다양성’을 누리려 하지 않습니다. 어마어마한 정보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려 하지 않는 사람이 제법 많습니다. 오락거리(놀이시설)나 대중음악이나 극장(영화)이 있어야만 ‘문화를 누리는 일’이 될는지도 좀 아리송합니다. 문화를 너무 좁게 보는 눈길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진정성이라는 거짓말》이라는 인문책은 우리 사회나 정치나 교육이나 종교나 문화나 예술이나 문학 같은 자리에서 ‘진정성 화두’나 ‘진정성 명함’을 내세워서 ‘이름 팔기·돈벌이·권력 얻기’를 하려는 개인이나 집단이나 정부나 기업을 찬찬히 비판합니다. 이러한 비판은 여러모로 고개를 끄덕일 만하다고 느낍니다. 그런데 ‘진정성 비판’에 살짝 지나치게 얽매인 나머지 너무 비판만 하다가는 ‘진정성 비판하게 진정하게 갇힌 비판몰이’로 그칠 수 있겠다고도 느낍니다.


  우리가 무엇을 비판한다고 할 적에는 ‘비판받는 사람이나 것이나 제도’가 깡그리 없어져야 한다는 뜻이라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참말 없어져야 할 것도 있겠지요. 그러나 사람들이 저마다 새로운 기쁨을 찾아서 크고작게 가꾸는 살림살이를 마냥 비판으로만 바라보려 한다면, ‘삶을 짓는 재미’나 ‘살림을 가꾸는 즐거움’하고는 그만 멀어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글쓴이 앤드류 포터 님은 책을 마무리짓는 자리에서 “어느 때보다 살기 좋은데 뭐가 문제란 말인가?” 하고 우리한테 묻습니다. 그래요. “선진 자유민주국가의 시민들은 전반적으로 역사상 어느 때보다도 삶을 즐길 수 있게 됐다(309쪽)”고 하니까 아무것도 문제가 아닐 수 있고, 이 책에서 밝히듯이 ‘진정성 비판’으로 책 한 권을 엮을 수도 있습니다. 도시가 참으로 살기 좋은데 뭐가 문제라서 도시를 떠나 시골로 가느냐 하고 비판을 할 수 있어요.


  저희처럼 시골살이를 하는 사람들은 이 책을 쓰신 학자한테 아무 할 말이 없습니다. 다만, 한 마디는 할 수 있습니다. 새봄에 밭에서 쑥을 뜯어서 쑥국을 끓이고 쑥떡을 찌고 쑥부침개를 하고 쑥밥을 지으면 참으로 재미있어요. 아이들하고 함께 쑥을 뜯으면서 일하거나 놀고, 아이들하고 함께 갓을 솎으면서 갓김치를 담그면 참으로 신나요. 저희는 집에 텔레비전을 안 두고 조용히 시골살이를 하면서 “아무 문제가 없”답니다. 2016.3.8.불.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시골에서 인문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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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이하의 날들
김사과 지음 / 창비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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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229



‘더럽혀진 한국말’로 문학을 하는 어려움

― 0 이하의 날들

 김사과 글

 창비 펴냄, 2016.1.22. 14000원



  소설을 쓰는 김사과 님이 선보인 산문책 《0 이하의 날들》(창비,2016)은 소설로는 풀어내기 어렵다고 여긴 이야기를 홀가분하게 풀어낸 이야기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소설하고는 다르게 풀어내려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소설로는 쓸 수 없다고 여기는 이야기를 적바림하는구나 싶습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나를 줄곧 따라다니던 그 이상한 느낌의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지금 우리가 도시를 불태우고 있다. 어, 그런 생각이 들었다. (12쪽)


총과 술과 마약과 여자, 화가 나서 돌아버린 미국 남자들을 생각한다. 그들의 삶은 분노로 가득했다. (51쪽)



  소설도 문학이고 산문도 문학입니다. 어떤 갈래로 글을 쓰든 모두 문학입니다. 다만, 소설에서는 굳이 ‘나(내 이름)’라는 사람이 민낯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할 수 있다면, 산문에서는 언제나 ‘나’라는 사람이 민낯으로 드러나요. 소설에서는 내 모습이나 내 얼굴이 아닌 이웃 모습이나 이웃 얼굴을 그린다고 여길 수 있지만, 산문에서는 모든 글마다 내 마음이나 내 생각을 밝힌다고 할 만합니다.


  김사과 님은 산문책 《0 이하의 날들》에서 몇 가지를 자주 다룹니다. 먼저 ‘화(분노)’를 자주 다루고, ‘무라카미 하루키’를 자주 다루며, ‘글과 말’을 자주 다루어요. 김사과 님이 이제껏 빚은 문학은 ‘화(분노)’가 바탕이었다고 이 책에서 곧잘 밝힙니다. 누구보다 글쓴이 스스로한테 성을 내고, 글쓴이를 둘러싼 터전에 성을 내며, 글쓴이가 태어난 이 나라와 사회에 성을 냅니다.



나는 빛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고 단지 압도된 상태로 끝없이 빛, 한 단어를 반복할 수 있을 뿐이었다. 아니 나는 기록하고 싶지 않았다. 기록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것을 나누고 싶었다. (72쪽)


사실 난 한 번도 상상을 시도해 본 적이 없었다. 단지 절망 앞에서 화를 냈을 뿐, 거기에 제대로 맞설 의지를 가져 본 적이 없다. (83쪽)



  한국에서 태어나 사는 사람이라면 신문을 펼치거나 텔레비전을 켤 적마다 으레 ‘성을 낼’ 만하지 않으랴 싶습니다. 안타깝거나 안쓰럽거나 딱한 사건하고 사고 이야기가 그득하거든요. 신문이나 텔레비전을 들추지 않더라도, 학교를 다니거나 회사를 다니면서 기쁨이나 즐거움을 한가득 누리는 사람은 그리 안 많아 보이기도 해요.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입시지옥인 얼거리이고, 이 얼거리는 꿈쩍을 안 합니다. 대학교는 취업지옥이 되기 일쑤이고, 대학교를 마친 뒤에 회사나 공공기관이나 공장에 일자리를 얻어도 기쁨이나 즐거움으로 일하기는 만만해 보이지 않아요. ‘영업용 웃음(감정노동)’이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기쁜 웃음’으로 일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궁금한 노릇입니다. 이리하여, 김사과 님이 선보이는 산문책 《0 이하의 날들》은 바로 이 같은 대목을 ‘소설가 눈높이’로서 가볍게 바라보고 글로 갈무리해서 들려줍니다.



한국의 역사를 돌아보면 중국어, 일본어, 영어로 이어지는 외국어들이 한국 사회 내에서 실질적 권한과 힘을 가져왔다. 다시 말해 한국어는 한국에서 공적인 도구로, 즉 실질적 결정권을 행사하는 언어로 사용된 적이 없다. (105쪽)


소설가가 되는 과정에서 나는 마치 외국어를 배우듯이, 의도적으로 내 모국어인 한국어를 백지 상태에서부터 쌓아올렸다. 왜냐하면 내가 사용하는 한국어가 싫었기 때문이다. 내 한국어가 어설픈 번역 어투와 고루한 일본식 한자들, 그리고 논술식 글쓰기에 의해 더럽혀져 있다고 느꼈다. (148쪽)



  문학을 하는, 그러니까 ‘글을 쓰는’ 김사과 님은 이녁 산문책에서 ‘글쓰기’나 ‘문학하기’를 둘러싸고 ‘한국말’이란 무엇인가 하는 대목을 찬찬히 돌아봅니다. 한국 역사를 돌아보면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한국말은 여태 한 번도 ‘공적인 도구’, 그러니까 ‘공공 언어’로 쓰인 적이 없다고 합니다.


  이 말은 더없이 옳습니다. 한국은 ‘한국말’을 쓰는 나라입니다만, 한국 정치나 사회를 살피면 지난날에는 중국말을 썼고, 개화기를 지나 일제강점기를 맞이하면서 일본말을 썼어요. 해방 뒤에는 ‘일본 한자말’하고 ‘중국 한자말’이 뒤섞인 ‘국한문혼용’ 말투였는데, 토씨만 한글인 말투였어요. 겨우 ‘한글 쓰기’가 자리를 잡을 즈음 영어가 무시무시한 바람을 타고 찾아왔지요. 게다가 수없이 바뀌는 입시제도에 맞추어 ‘논술 글쓰기’가 태어나기까지 하니 ‘말다운 말’은 자리를 못 잡습니다. 한국사람 스스로 ‘한국말다운 한국말’을 쓰기란, 오히려 더 어려운 모습이 돼요.


  그러니, 김사과 님이 들려주는 이야기마따나, ‘더럽혀진 한국말’로 문학을 하는 어려움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이 크다고 할 만합니다. 참말로 한국말이란 무엇일까요? 일본 한자말도, 번역 말투도, 일본 번역 말투도, 영어도, 대놓고 쓰는 일본말도, 중국 한자말도, 한문 번역 말투도, …… 이런 자질구레한 모든 것을 신나게 버무리는 말이 바로 ‘한국말’일까요?



10대 후반의 고등학교 중퇴생이 할 수 있는 일은 뻔했다. 뻔한 일들을 닥치는 대로 했다. 시간당 천오백 원을 받고 사장에게 성희롱을 당하며 돈까스집에서 일하기도 했다. (197쪽)


까페로 들어선 순간 문 밖의 변두리 동네적 요소들과 완벽하게 격리된다. 이제 내 앞에 펼쳐진 것은 쾌적한 온도의 실내, 향긋한 커피 냄새와, 여유롭게 배치된 의자와 탁자들, 깔끔한 옷차림의 사람들, 적절한 음량으로 흘러나오는 음악이다. (237쪽)



  고등학교를 그만두며 지냈다는 김사과 님은 이제 ‘시급 천오백 원’을 받으면서 ‘돈까스집에서 성희롱까지 받는’ 일자리에 서지 않습니다. ‘변두리 동네’에 나들이를 가더라도 스타벅스를 마음 놓고 드나들 만한 살림이 됩니다. 산문책 《0 이하의 날들》은 첫머리로 미국 어느 도시에서 지낸 이야기를 쓰고, 곳곳에 여러 나라를 여행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고교 중퇴 알바생’에서 ‘세계여행을 하는 소설가’로 탈바꿈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탈바꿈한 삶에서 김사과 님은 ‘성내는 삶’이 사라졌다고 할 만할까요? 산문책 《0 이하의 날들》을 읽는 내내 헤아리니, 김사과 님은 아직 ‘성내는 마음’이 사그라들지 않습니다. 이 책에서 김사과 님은 “한 번도 상상을 시도해 본 적이 없었다(83쪽)” 하고 밝힙니다. “절망 앞에서 화를 냈을 뿐(83쪽)”이라고 덧붙여요. 산문책 마지막 줄까지 ‘상상’을 펼치는 삶이나 이야기는 흐르지 않고 ‘절망에 화를 내는’ 삶이나 이야기만 흐릅니다.


  소설가 한 사람 힘으로는 사회를 바꿀 수 없기에 ‘상상’이 아닌 ‘성·화·분노’만 마음에 품어야 할 수 있습니다. 성이든 화이든 분노이든, 이러한 것으로도 얼마든지 문학을 빚을 수 있습니다. 성을 낼 수밖에 없는 모습이나 얼거리인 한국 사회이기에 성을 내면서 글을 쓸 수밖에 없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나라나 사회에 성을 낸다면, 아직까지 아름다움도 사랑스러움도 기쁨도 이 나라나 사회에 깃들지 않았다고 느끼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참다운 아름다움과 사랑스러움과 기쁨이 싹이 터서 자랄 수 있기를 비는 마음입니다. 비록 ‘더럽혀진 한국말’이라 하더라도, 이 한국말을 갈고닦으면서 바로 이곳 이 삶자리에 아름다운 노래와 사랑스러운 웃음과 기쁜 꿈이 자랄 수 있기를 빕니다. 4349.2.2.불.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6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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